第 42 輯 - 한국일본문화학회

Journal of Japanese Culture
第 42 輯
2009. 8
韓國日本文化學會
Journal of Japanese Culture
目
次
․『捷解新語』卷十의 文面解讀(Ⅱ) ····················································································· 林 昌 奎… 5
․話題導入ストラテジーの韓日対照研究 ·············································································· 鄭 榮 美…25
․近代日本の「国語」教育と漢字政策 ·············································································· 邢 鎭 義…43
․平安時代の女性たちの自己主張 ······················································································· 金 玉 京…59
-『源氏物語』の「女」という語を中心に ․『紫式部日記』における対『枕草子』意識 ····································································· 金 孝 淑…77
- 藤原斉信関連記事をめぐって ․일본 근대문학에 나타난 에도시대의 전통 고찰 ·············· 權 赫 建⋅金 泰 寬⋅車 珉 庚…99
- 나쓰메 소세키의 『그 후』에 묘사된 참살과 할복 ․포스트 프롤레타리아 여성 ·························································································· 明 惠 英…117
- 백신애의 「적빈」과 이북명의 「벌거숭이 부락(裸の部落)」을
통해 본 ‘능부(能婦)’의 재탄생 ․‘족보’와 ‘창씨개명’ ····················································································· 박 제 홍ㆍ김 순 전…141
- 김달수의 「族譜」와 가지야마 도시유키의 「族譜」를 중심으로 ․『或る女のグリンプス』から『或る女』へ ······································································· 鄭 旭 盛…165
․江戸後期浮世絵にみる視覚イデオロギー ········································································· 金 愛 鏡…183
- 広重の名所江戸百景 ․일본 사가현의 임란포로에 관한 연구 ······································································ 魯 成 煥…207
․일본의 삼림자원 활용전략에 관한 연구 ·············································· 兪 起 濬⋅池 鎭 浩…231
․다다노 마쿠즈의 獨考 에 나타난 서양지식 ·························································· 林 泰 弘…249
․일본사회에서의 한류열풍으로 인한 한국인과 재일코리안에 대한 인식변화 ·· 황 혜 경…269
- 연령별 분석 ․『隠州視聴合紀』の名所和歌 ······················································································· 伊藤政彦…293
■合評會 ·················································································································································· 315
■韓國日本文化學會 任員名簿 ··················································································································· 317
■韓國日本文化學會 會則 ·························································································································· 321
『捷解新語』卷十의 文面解讀(Ⅱ)
林 昌 奎*1)
(e-mail : [email protected])
目 次
Ⅰ. 序論
Ⅱ. 本論
1.「候」에 대하여(1)
2.「間」에 대하여
3.「候」에 대하여(2)
4.「参を以て」와 「其の儀無く候」에 대하여
5.「御懇札忝なく拝見」등에 대하여
6.「罷里渡里」에 대하여
7.「然るべきように」에 대하여
Ⅲ. 結論
Ⅰ. 序論
司譯院 倭學書의 白眉라고 할 수 있는 『捷解新語』(全十卷) 는 그 자료적
우수성과 通時的 자료로서의 중요성으로 말미암아 한․일 양국의 연구자들에
의해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卷一부터 卷九까지와는 성격을 달리
하는 候文体書簡文인 卷十은 지금까지 대부분의 선행연구에서 제외되어 온 것
이 사실이다. 즉 口語体라고 하는 자료적 성격으로 인해 통일성을 갖지 않는
卷十의 경우, 李太永(1997)에서 한국어 부분이 해석된 것을 제외하면, 그 어휘
적 성격이나 문장구조에 대하여 아직까지 면밀히 검토되지 못한 것이 현실인
것이다. 또한
『捷解新語』 한국어 부분의 유일한 해설서인 李太永(1997)에서
* 濟州漢拏大學 觀光日本語科, 敎授, 日本語學
6 日本文化學報……第 42輯
는 일본어 본문이 고려되지 않은 채, 對譯 한글만을 주요 고찰의 대상으로 하
였기 때문에 誤謬가 나타나는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本稿에서는 李太永
(1997)의 誤謬에 대한 수정방향을 제시함과 동시에 그 동안 연구 대상에서 제
외 되었던 候文体書簡文인 卷十의 文面解讀, 즉 卷十에 대한 현대일본어와 국
어번역을 原文인 일본어 본문과 문맥, 그리고 각종 문헌을 바탕으로 보다 객관
적으로 세밀하고 치밀하게 解讀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Ⅱ. 本論
1. 「候」에 대하여(1)
다음 용례 1), 2)의 편지는 조선 측에서 茶禮날짜를 정하여 알린 것1)에 대한
일본 측의 답신 내용이다.
용례 1)의「明後日茶禮成され候由、相心得申し候」에 대하여 李太永(1997)에
서는 文末의「候」를 改修本의 한글 對譯을 그대로 현대어로 옮겨「모레 연향
은 할 줄을 알았으며」로 해석하고 있다.
1)<原>2)貴札依つて、明後日 茶禮 3)成され候由、相心得申し候。
5裏2-5裏6 4)
依貴札 明後日 茶禮 被成候由 相心得申候5)
1)「態と申し入れ候。明後日茶礼仕り候様に相定め申し候間、御僉管衆へ御心得成され候て下
さる可く候。將又、茶礼の翌日よ里五日まては、早飯にて御座候條、是又御心得成さる可く
候。恐恐謹んて申。4裏1-5裏1 (改めてお手紙を差し上げます。明後日茶礼を行うように決定いたしまし
たので、役人の皆樣へそのようにご了解くださるように(お伝え)お願いいたします。また、茶礼の翌日より
五日までは早飯でございますので、こちらもまたお含みおきください。恐々謹んで申しあげます。/일부러
(특별히) 아룁니다. 모레 茶礼를 하도록 결정했으므로 여러분들께 그렇게 알려주시기 바랍
니다. 또한 다례 이튼 날부터 닷샛날까지는 早飯하올 것이니 이도 알아 두십시오. 황송하게
도 삼가 아뢰옵니다.: 필자에 의함)」
2) <原>은 原刊本, <改>는 改修本, <重>은 重刊本, (李)는 李太永(1997)를 나타냄. 本稿
의 表記는 讀者의 便宜를 고려하여 京都大学(1973)의 『三本対照 捷解新語』에 의함. 이하
같음.
3) 茶禮: 日本 使臣들에게 茶를 대접하는 儀式.
4) 文末에 표기한 숫자 등은 순서대로 帳、表・裏、文節를 나타냄. 이하 같음.
5) 原刊本 일본어문장에 대응하는 對譯文으로 주로 일본식 漢文으로 표기되어 있다.
『捷解新語』卷十의 文面解讀(Ⅱ) ························································································· 林 昌 奎…7
<改> 依貴札 明後日 茶禮 被成候由、 相心得申候。
貴札依 明後日茶禮 成被候由、相心得申候。
貴札대로 모뢰 宴享은 올줄을 아라오며
<重> 貴札拝見。茶禮、明後日ニ、相極リ候段、仰越被、委細、致承知
候。
貴札拝見 茶禮明後日 相極候段 仰越被 委細 承知致候
貴札을 拜見오니 茶禮 모뢰 졍줄을 긔별시니 셰히 아랃
이다
(李) 편지대로 모레 연향은 할 줄을 알았으며
우선 편지의 첫 부분부터 검토하기로 한다.「貴札依つて(きさつよって)6)」의
「貴札(きさつ)」는「Qisat.キサツ(貴札)書状。それを書く人を尊敬して言う語。」7)
「他人を敬ってその手紙をいう語」8)「他人の手紙の敬称。貴翰とも。」9)등의 뜻이므
로「貴札」는 현대어로는「ご書面」과 같이 해석되어야 하며, 「明後日茶禮成
され候由(みょうごにちされいなされそうろうよし)」의「由(よし)」는「伝え聞いた事柄である
ことを示すことば。…とのこと。ということ。」10)등의 의미로 파악되므로「明後日茶禮
成され候由」는 현대어로「明後日茶禮をなさるとのこと」와 같이 풀이할 수 있겠
다.
이어지는 문장「相心得申し候(あいこころえもうしそうろう)」의「相(あい)」에 대하
여『日葡辞書』에는「一種の助辞でもあって、時にそれ自身は何の意味をも示さない
で、動詞を合してそれに一種の力を添え、あるいは、優雅さを加える場合がある。たとえ
ば。Aicamaite(相構ひて)、Ai cocoroyete(相心得て)など。」로 기술하고 『時代
別国語大辞典』에는
接頭辭로써「④動詞などに冠して、その動詞の意味する動作を
強調し、また、書状などの改まった言い方として使われて、丁寧の意を加える」등으로 정
의하고 있다. 따라서「相心得申し候」는 현대일본어로「承知いたしました。」와
같이 解釋되어야 한다. 따라서「貴札依つて、明後日茶禮成され候由、相心得申
し候」는「ご書面のとおり、明後日茶禮をなさるとのこと、承知いたしました。(書翰대로
6) 괄호 안 히라가나(読み仮名) 표기는 필자에 의함. 이하 같음.
7) 『日葡辞書』
8) 『日本国語大辞典』
9) 『古語大辞典』등. 「よって」의 상세한 의미 등은『日本大文典』p.523-525 참조.
10) 『日本国語大辞典』『古語大辞典』등.
8 日本文化學報……第 42輯
모레 茶禮를 하신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와 같이 解釋되어야 한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原刊本「明後日茶禮成され候由、相心得申し候」에
대하여 李太永(1997)에서는 改修本의 한글번역을 그대로 현대어로 옮겨「모레
연향은 할 줄을 알았으며」로 해석하고 있는데 이는 文末의「候」를 連結形
語尾로 파악했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일본어「候」는 平安時代에서 鎌倉時代
초기에 성립되어 일반화 된 어휘로서, 주로 書簡文에 사용되었으며, 用言의 連
用形에 접속되어「~(で)ございます」「~ます」의 의미를 나타내는「丁寧形語
尾」또는「謙讓形語尾」로 주로 사용되었다.11) 또한 전․후 문장의 흐름이나
重刊本의 改修를 고려하더라도「候」를 「丁寧形語尾」로 파악하여「알았습니
다」로 하는 것이 일본어 原文에 충실한 解釋이라 할 수 있겠다.
덧붙여 용례 1)의 原刊本「明後日茶禮成され候由、相心得申し候」에 대응하는
對譯은 일본식 漢文인「明後日 茶禮 被成候由 相心得申候」로 번역되어 있으
며, 原刊本「明後日茶禮成され候由、相心得申し候」에 대응하는 重刊本은「貴札
拝見。茶禮、明後日ニ、相極リ候段、仰越被、委細、致承知候(きさつはいけん、さ
れい、みょうごにちに、あいきわまりそうろうだん、おおせこされ、いさい、しょうちいたしそうろ
う)」와 같이 일본어 표현 자체가 改修되어 있다. 대응하는 국어번역에서는
「候」를 종결형어미로 파악하여「貴札을 拜見오니 茶禮 모뢰 졍 줄을 긔
별시니 셰히 아랃이다」로 되어 있어 문제되지 않는다.
문제는 이와 같이 일본어 문장과 대역 한국어 문장 구조에 차이가 있을 경우,
현대어 해석을 무엇에 근거하여 解釋하는 것이 타당할지가 고려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일본어 原文과 대역 한국어 문장 구조에 차이를 보이는 이유는, 먼저
일본어와 한국어의 표현이 항상 완전히 일치할 수 없으므로 대역 한국어가 일
본어 표현과는 좀 차이를 보이나 한국어 문법을 기반으로 하여 자연스러운 한
국어적 표현이 사용된 경우가 있을 것이다. 혹은 改修本의 편찬 과정에서 일본
어를 세밀히 파악하지 못하여 생긴 단순한 誤謬가 발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前者의 경우 현대 한국어로서 일본어 표현의 직역이 문법적이지 않다면 한국
어의 문법적 표현으로 의역하여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겠으나, 후자의 경우는
原刊本 일본어의 표현에 근거하여 한국어 해석을 하는 것이 타당하리라 여겨
진다. 왜냐하면 『捷解新語』는 일본어 교재로서 제작된 자료적 특성이 있으므
로, 일본어가 중심문장일 수밖에 없으며, 한국어 번역은 학습자의 편의를 위해
작성된 것으로서 일본어보다 그 비중이 낮았을 것이라고 여길 수 있기 때문이
다. 따라서 용례 1)의 경우 原刊本과
改修本의 일본어에 근거하여「候」를
「終結形語尾」로 파악해야 한다고 본다.
11) 『日本国語大辞典』,『時代別国語大辞典』, 『日葡辞書』, 『古語大辞典』등
『捷解新語』卷十의 文面解讀(Ⅱ) ························································································· 林 昌 奎…9
이상의 검토 결과와 문장 전후의 문맥, 原文인 일본어 등을 고려하여 용례 1)
을 현대어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1-1) ご書面のとおり、明後日茶禮をなさるとのこと承知いたしました。
1-2) 書翰대로 모레 茶禮를 하신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2. 「間」에 대하여
다음 2)의 용례는 1)의 용례에 이어지는 문장으로 일본 측이 조선 측에게
「茶禮가 틀림없이 이루어지도록 당부하는 내용」에 해당한다.
2)<原>御僉官中へ御傳筆申し聞かせ候。茶禮の儀、延引に及び申し候
間、明後日は彌々仕る様に頼み上げ奉り候。5裏7-6表6
御僉官中예 御傳筆申聞候茶禮之儀 及延引申候間 明後日란彌仕候様
奉頼上候
<改>御僉官中 御傳筆申聞候。茶禮之儀 及延引申候間、 明後日彌
仕候様 奉頼上候。
御僉官中御傳筆申聞候。茶禮之儀、延引及申候間、明後日彌仕様
頼上奉候。
僉管들의게 글월로 알게 엳오니 宴享졀 쳔연올가 너기오니
모뢰란 브 올줄을 미더이다
<重>如何様明日、 緩々、可得貴意候。
如何様明日緩緩 貴意得可候
아마 일 죵용히 말올가 이다
(李) 첨관들에게 글월로 알게 하였으니 연향 절차 늦어질까 여기니
모레는 부디 할 것으로 믿습니다.
「御僉官中へ御傳筆申し聞かせ候」의「御傳筆」는 「Denpit.デンピツ(伝
筆)Fudeuo tçutayuru.(筆を伝ゆる)すなわち、 Xoni cotozzte suru.(書に言伝て
する)手紙による伝言。例、Denpituo
12) 『日葡辞書』
mŏxi
soro.(伝筆を申し候)文書語。」12)
10 日本文化學報……第 42輯
「手紙で申し送ること」13)등의 의미를 나타내며,「申し聞かせ」는「他人に言って聞
かせる」혹은 「「言い聞かせる」の「謙譲語」」14)등의 뜻이 있으므로 「御僉官
中へ御傳筆申し聞かせ候」는「僉官たちに書面にてお知らせ申しました。(僉官들에
게는 편지로 알렸습니다.)」와 같이 해석할 수 있겠다.
2)의 용례 중의「茶禮の儀、延引に及び申し候間(されいのぎ、えんいんにおよびもう
しそうろうあいだ)」에 대하여 李太永(1997)에서는 「연향 절차 늦어질까 여기니」
로 번역하고 있다. 原刊本「茶禮の儀、延引に及び申し候間」의 對譯은 일본어
본문 그대로를 일본식 漢文「茶禮之儀 及延引申候間」으로 번역하고 있으며,
改修本에서는「宴享졀 쳔연올가 너기오니」로 번역되어 있다. 重刊本에서
는 2)의 용례에서 알 수 있듯이 표현 자체를 달리 하고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茶禮の儀、延引に及び申し候間」의「間(あいだ)」인
데 李太永(1997)에서는 일본어「間(あいだ)」를 고려하지 않고 개수본의 한글번
역을 현대국어로 옮기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어「間」는「~よって、~が故
に、~ので」등 「원인, 이유」를 나타내는 接續助詞로서의 기능15)이 있으므로
용례 2)의 「茶禮の儀、延引に及び申し候間」의 「間」는 接續助詞의 기능으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더욱이 일본어「間(あいだ)」는 文章體에서는
「~したので」의 뜻을 나타내므로16) 「茶禮の儀、延引に及び申し候間」는 「茶
禮の儀は予定より遅れておりますので(茶禮는 예정보다 늦어졌으니)」로 해석하는
것이 보다 原文에 충실한 번역이라고 여겨진다.
또한 용례 2)의 마지막 부분의「明後日は彌々仕る様に(みょうごにちはいよいよつ
かまつるように)」의 「彌々(いよいよ)」는 「確かに、ほんとに、きっと、間違いなく、確
実に」17)등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문맥상으로도「반드시, 틀림없이, 꼭」등
으로 파악하는 것이 보다 원문에 충실한 번역이 되리라 본다. 따라서 「明後日
は彌々仕る様に」는
「明後日は間違いなく行いますように(모레는
록)」과 같이 해석할 수 있겠다.
이상의 검토 결과를 바탕으로 현대어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13)『日本国語大辞典』등.
14)『日葡辞書』『日本国語大辞典』등.
15)『日葡辞書』『時代別國語大辭典』『日本國語大辭典』『古語大辞典』등.
16)『日葡辞書』『時代別國語大辭典』『日本國語大辭典』등.
17)『時代別國語大辭典』『日本國語大辭典』등.
반드시
행하도
『捷解新語』卷十의 文面解讀(Ⅱ) ······················································································· 林 昌 奎…11
2-1) 僉官たちに書面にてお知らせ申しました。茶禮の儀は予定より遅れてお
りますので、明後日は間違いなく行いますようお願い申し上げます。
2-2) 여러 官吏들에게는 편지로 알렸습니다. 茶禮는 예정보다 늦어 졌
으니 모레는 반드시 행하도록 부탁드리겠습니다.
3. 「候」에 대하여(2)
다음 용례 3)과 4)는 「茶禮宴이 무사히 마친 것에 대한 감사의 書翰」으로
조선 측이 일본 측에 보낸 것이다.
3)의 용례「昨日者茶禮相済み、目出たく存ず
る事に候(さくじつはされいあいすみ、めでたくぞんずることにそうろう)」중의 文末의「候」
도 용례 1)과 같이「謙讓形語尾」로 해석되어야 한다.
3)<原> 昨日者茶禮相済み、目出たく存ずる事に候。6裏1-6裏3
昨日者 茶禮相済 目出度存事候
<改> 昨日者 茶禮相済 目出度存事候。
昨日者 茶禮相済 目出度存事候
어제 茶禮 오니 아답와
<重> 昨日者 茶禮相済 目出度奉存候。
昨日者 茶禮相済 目出度存奉候
어제 茶禮 오니 아다이 너기
(李) 어제는 다례를 마치니 기뻐
위 용례는 1)에서와 마찬가지로 改修本의 「候」에 대한 한국어 번역이 종
결어미로 나타나지 않고 「아답와」라는 연결어미로 나타나는 용례이다.
李太永(1997)에서는 日本語文과 重刊本은 고려의 대상으로 하지 않고 改修
本의 한글번역만을 참고하여「目出度存事候」를 현대국어로 「기뻐」로 번역
하고 있다.
한편 原刊本에 대응하는 改修本은「昨日者 茶禮相済 目出度存事候」로 원간
본과 표기를 달리 하고 있을 뿐 동일한데 비해 重刊本에서는「昨日者 茶禮相
済 目出度奉存候」와 같이「奉(たてまつる)」를 넣어 상대방에게 자신을 낮추
12 日本文化學報……第 42輯
어 표현을 보다 謙虛히 하고 있다. 重刊本의 대응하는 한글 번역도 文末의
「候」를「謙讓形語尾」로 번역하여「어제 茶禮 오니 아다이 너기
」로 하고 있어 일본어 원문에 충실한 번역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필
자 또한 용례 3)의 「昨日者茶禮相済み、目出たく存ずる事に候」는「候」로
문장을 마무리하고 있으므로 원문에 충실한 번역을 한다면「謙讓形語尾」로
파악되어야 한다고 본다. 따라서 현대어로는「昨日は茶禮が無事に終り、慶ばしく
存じます。(어제는 茶禮를 무사히 마쳐서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와 같이
번역 되어야 한다고 본다.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일본어에 대응하는 한국어 해석이 일본어의 표현
과 다를 때, 그 원인을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일본어 표현에 정확히 대응하는 한국어 표현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인
데, 『捷解新語』가 당시 조선인을 대상으로 하는 일본어 교재라는 점을 감안
했을 때, 『捷解新語』 巻一부터 巻九까지는 한국어적으로 다소 어색하더라도
일본어의 직역에 가까운 표현이 많이 사용되었다고 판단된다.
둘째, 한국어 해석 과정에서 일본어 원문에 충실하지 않은 한국어 해석을 한
경우라고 할 수 있는데, 巻十의 개수본의 「候」에 한해서 이러한 표현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本稿에서는 이러한 경우, 原刊本의 일본어 표현을 중심으로 해
독하는 입장을 취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捷解新語』의 底本은 역시 원간본
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며, 改修本과 重刊本의 경우 그 편찬 시기가 그다지 멀
지 않으나 중간본에서 개수본의 그러한 표현이 대부분 수정되어 있기 때문이
다. 따라서 원간본과 중간본의 한국어 부분을 참고하지 않고 개수본의 한국어
만에 의존하여 현대어로 解讀하는 것은『捷解新語』의 원간본과 중간본의 개
수 의도를 지나치게 소홀하게 다루는 것이 아닐까 사료된다.
이상에 근거에 의거하여 용례 3)을 다음과 같이 현대어로 해석할 수 있겠다.
3-1)昨日は茶禮が無事に終り、慶ばしく存じます。
3-2)어제는 茶禮를 무사히 마쳐서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4.「参を以て」와 「其の儀無く候」에 대하여
다음 용례 4)는 3)의 용례에 이어지는 편지 내용으로, 조선 측이 보낸 편지
인데 조선 측 관리가 몸이 좋지 않아 직접 만나서 인사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양해의 편지 내용이다.
『捷解新語』卷十의 文面解讀(Ⅱ) ······················································································· 林 昌 奎…13
4)<原> 尤も、參を以つて御禮申入る可き候えども、今朝より気相悪しく
候故、其の儀無く候。6裏4-7表1
尤 以參 御禮可申入候得共 自今朝 気相悪敷候故無其儀候
<改> 尤 以參 御禮可申入候得共、自今朝 気相悪敷候故、無其儀候。
尤 參以 御禮申入可候得共、今朝自 気相悪敷候故、其儀無候。
맏당이 가와 인오련마 오 아브터 긔운이 졍치 못
고로 셔히 젹지 못이다
<重> 以參 御祝詞可申入候得共、自今朝 気相悪敷候故、無其儀候。
參以 御祝詞申入可候得共、今朝自 気相悪敷候故、其儀無候。
가와셔 치하오련마 오 아브터긔운이 죠치 몯기예
셰히 젹지 몯
(李) 마땅히 가서 인사하련마는 오늘 아침부터 기운이 바르지 못한
이유로 자세히 적지 못합니다.
첫 부분인「尤も、參を以つて(もっとも、さんをもって)」의「参を以て」는 『捷解
新語』와 거의 동일한 시대(1561~1634)의 문헌인 ロドリゲス의『日本大文典』에
의하면「参を以て」는「行くこと、又、来ること」를
의미하는「謙語動詞」18)로서
정의하고 있는 등, 현대어로는「お伺いして(찾아뵙고)」와 같이 번역할 수 있겠
다. 따라서「尤も、參を以つて御禮申入る可き候えども」는「本来ならば、お伺い
してご挨拶をいたすべきところですが」와 같이 해석되어야 한다.
李太永(1997)에서는 「參を以つて(맏당이 가와)」를 겸양의 어미를 생략하고
「마땅히 가서」로 해석하고 있는데 이는 개수본의 겸양어미 「오」를 해석하
지 않은 오류로 생각된다.
또한「今朝より気相悪しく候故、其の儀無く候(こんちょうよりきあいあしくしてそのぎな
くそうろう)」의「気相悪しく候故」는 현대일본어로는「体調が優れていないので」혹
은 문맥을 고려하여「体調が優れず(몸이 좋지 않아서) 」와 같이 해석할 수 있
으며「其の儀無く候」를 직역하면「そのようにできません」과 같이 파악할 수 있
다. 그러나 李太永(1997)에서는「其の儀無く候」를 改修本의 한글번역「셔히
적지못이다」를 그대로 현대어로 옮겨「자세히 적지 못합니다.」로 해석하
18) p.593-594
14 日本文化學報……第 42輯
고 있는데 일본어 본문과는 차이를 보이는 解釋이라 할 수 있겠다.
용례 4)의「気相悪しく候故、其の儀無く候」의 문맥을 보면「茶禮が無事に終
り、目出度く存じ、本来ならば、直接お伺いしてご挨拶をするべきところだが、今朝より体
調がすぐれず、そのようにできない。」즉, 「茶禮를 무사히 마쳐서 매우 기쁘게 생
각하며, 원래대로라면 직접 찾아뵙고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오늘 아침부터 몸
이 좋지 않아서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는 것이다. 따라서 용례 4)의「気
相悪しく候故、其の儀無く候」는「体調が優れず、失礼いたしております(몸이 좋지
않아서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와 같이 해석되어야 한다.
이상과 같은 근거에 의거하여 용례 4)는 다음과 같이 현대어로 해석할 수 있
겠다.
4-1)本来ならば、お伺いしてご挨拶をいたすべきところですが、今朝より体調が
すぐれず、失礼しております。
4-2)마땅히 찾아뵙고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오늘 아침부터 몸이 좋지
않아서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5.「御懇札忝なく拝見」등에 대하여
다음 書簡文은 조선 측이 보낸 편지(茶禮宴이 무사히 마친 것에 대한 감사
의 書翰) 에 대한 일본 측의 답장이다.
5)<原> 御懇札忝なく拝見、来示の如く、昨日の茶礼、貴様の御取持に、
無事に相済み、一入大慶に存じ奉り候。然れば御気色の由、随分
御養生成さる可く候。7表2-7裏4
御悃札辱拝見、如来示、昨日之茶禮、貴様之御取持、無事相済、
一入大慶奉存候。然者、御気色之由、随分御養性可被成候。
<改> 御悃札辱拝見、来示如、昨日之茶礼、貴様之御取持、無事相済、
一入大慶存奉候。然者、御気色之由、随分御養性成被可候。
御悃札辱拝見、如来示、昨日之茶禮、貴様之御取持、無事相済、
一入大慶奉存候。然者、御気色之由、随分御養性可被成候。
극진신 편지감격오매 절고보와오며 긔별심치 어제
『捷解新語』卷十의 文面解讀(Ⅱ) ······················································································· 林 昌 奎…15
茶禮 게셔쥬션시기의 無事히 오니 장 긷비너리
그러나 병드시다니 브 됴리쇼셔
<重> 御悃札辱拝見、如来示、昨日之茶礼、貴様御取持ニ付、無事ニ相
済、大慶奉存候。然者、些與御病之由、随分御養生可被成候。
御悃札辱拝見、如来示、昨日之茶禮、貴様之御取持、無事相済、
大慶奉存候。然者、些與御痛色之由、随分御養性可被成候。
극진신편지감격오매 拝見엳오며 긔별심치 어젣茶禮
게셔쥬션시기예 無事히오니 긷비너기이다 그러나 져기
알흐시다오니 브 됴리쇼셔
(李) 극진하신 편지 감격하매 절하고 보았으며 기별하심과 같이
어제 다례 그대가 주선하시기에 무사히 마치니 매우 기쁘게
여깁니다. 그러나 병이 들으셨다고 하니 부디 조리하소서.
「御懇札忝なく拝見(ごこんさつかたじけなくはいけん)」의「懇札(こんさつ)」는
「Consat. コンサツ(懇札) Nengorono fuda.(懇ろの札)親切な、または、好意の
こもった手紙」19)「心をこめて書かれた手紙。親切な書状。多く「御懇札」の形で用
いられる。」20)등의 의미를 나타내며, 「 忝(辱)い」는「Catajiqeni. カタジケナイ
(忝い․辱い)お礼の言葉、あるいは、ある事に対して謝意を表する言葉」21)혹은「目上
の人から受けた行為を分に過ぎたものであるとして、もったいなく思い、感謝にたえない気持
である」「高貴な人などの、過分な厚志恩恵を感謝する気持を表わす。ありがたくうれし
い。」22)등의 의미가 있으므로, 「御懇札忝なく拝見」은 「ご懇切なお手紙ありが
たく拝見いたしました。(극진하신 편지 감격히 받아 보았습니다.)」와 같이 풀이할
수 있겠다. 한편 李太永(1997)에서는 일본어 원문을 고려하지 않은 채,「御懇
札忝なく拝見」을 改修本의 한글번역「극진신 편지감격오매 절고 보와
오며」를 그대로 현대어로 옮겨「극진하신 편지 감격하매 절하고 보았으
며」로 해석하고 있다.
다음은「来示の如く、昨日の茶礼、貴様の御取持に無事に相済み、一入大慶に
19) 『日葡辞書』
20) 『日本国語大辭典』『時代別國語大辭典』등.
21) 『日葡辞書』
22) 『時代別國語大辭典』『古語大辞典』등.
16 日本文化學報……第 42輯
存じ奉り候(らいしのごとく、さくじつのされい、きさまのおとりもちに、ぶじにあいすみ、ひとし
うたいけいに、ぞんじたてまつりそうろう)」에 대한 검토이다.
「来示」는「やってきて示すこと。また、書き手を敬ってその書状の内容をいう語。来
論」23)의 의미를 나타내므로「来示の如く」는「ご書面にありますように(편지에 쓰
여 진 말씀대로)」와 같이 풀이할 수 있겠다. 「貴様(きさま)」에 대하여『日本
国語大辭典』의「補注」에는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貴様」は中世末、
近世初期頃発生した対称代名詞で、もっぱら武家の書簡でかなりの敬意をもって用いられ
た。」24)
즉, 原刊本 당시의 의미로는「あなた様」와 같이 꽤 경의도가 높았다
고 파악할 수 있겠다. 「取持(とりもち)」는 당시에도 현대어와 類似한 의미「仲
をとりもつこと。仲立ち。仲人」25)로 사용되었으며, 「一入大慶に存じ奉り候(ひとしう
たいけいに、ぞんじたてまつりそうろう)」의「一入」는 부사적
「ひときわ。いっそう」26)등의
용법으로
사용되어
의미로 파악할 수 있겠다. 따라서 「来示の如く、昨
日の茶礼、貴様の御取持に無事に相済み、一入大慶に存じ奉り候」는
현대어로
「ご書面にありますように昨日の茶礼はあなた様のお世話で無事に終り、まことに大慶に存
じ上げます(편지에 쓰여 진 바와 같이 어제 茶禮는 그대 덕분에 무사히 마치니
대단히 기쁘게 여깁니다.)」와 같이 풀이할 수 있다.
다음은 용례 5)의 마지막 문장「然れば御気色の由、随分御養生成さる可く候
(しかればおきしょくのよし、ずいぶんごようじょうなさるべくそうろう)」에 대한 검토이다. 선
행하는 문장이 있고 5)의 용례와 같이 마무리 문장에 사용된「然れば」는 「さ
て。ところで。」27)의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御気色の由」의「由
(よし)」는「伝え聞いた事柄であることを示すことば。…とのこと。…ということ。」28)의 의
미로 파악되어「然れば御気色の由」는 현대어로「ところで、ご病気とのこと」와 같
이 해석할 수 있겠다.
「随分御養生成さる可く候」의 「随分(ずいぶん)」은 부사적 용법으로「よく、
念を入れて、極力、はなはだ、非常に」29)등의 뜻으로 사용되었으며「養生(ようじょ
23) 『日本国語大辭典』
24) 「貴様(きさま)」가 구어체로 사용되면서 일반 서민들도 사용하게 되었으며 그에 따라 점
차 「敬意」가 떨어져 文化, 文政期(1804-1830)에는 완전히 대등한 관계의 상대를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日本国語大辭典』 『古語大辞典』등 참조.
25) 『日葡辞書』『日本国語大辭典』『古語大辞典』등.
26) 『日本国語大辭典』『古語大辞典』등.
27) 『時代別國語大辭典』『日本国語大辭典』등.
28) 『日本国語大辭典』『古語大辞典』등.
29) 『日葡辞書』『日本国語大辭典』『古語大辞典』등.
『捷解新語』卷十의 文面解讀(Ⅱ) ······················································································· 林 昌 奎…17
う)」는「生命を養うこと。健康を維持し、その増進に努めること。摂生。病気の手当てを
すること。保養。」30)의
의미이므로「随分御養生成さる可く候」는
현대어로는
「念を入れてお大事にしてください」와 같이 풀이할 수 있겠다.
李太永(1997)에서는「随分御養生成さる可く候」개수본의 한글대역「브 됴
리쇼셔」을 그대로 현대어 표기로 하여 「부디 조리하소서」로 옮기고 있는
데 부자연스럽다. 이상에서 서술한 바를 근거로 일본어 原文을 반영한 현대 일
본어와 국어는 다음과 같다.
5-1)ご懇切なお手紙ありがたく拝見いたしました。ご書面にありますように昨日の
茶礼はあなた様のお世話で無事に終り、まことに大慶に存じ上げます。
ところで、ご病気とのことですが、くれぐれもお大事になさってください。
5-2)극진하신 편지 감격히 받아 보았습니다. 편지에 쓰여 진 바와 같
이 어제 茶禮는 그대 덕분에 무사히 마치니 대단히 기쁘게 여깁니
다. 그런데 몸이 불편하시다니 부디 몸조리 잘 하십시오.
6.「罷里渡里」에 대하여
다음 용례 6), 7)은「일본 측이 무사히 부산에
도착한 것에 대한 自祝의 뜻
으로 目錄으로서 조선 측에 선물을 보내니 받아 줬으면 한다」는 내용의 서간
문이다.
6)<原>一筆啓達せしめ候。是式些少に御座候ゑとも、今度罷里渡里の祝
までに、目録を以つて進覧致し候。7裏5-8裏5 一筆令啓達候 是式些少御座候得共 今度罷渡之祝迄 以目録 致進
覧候
<改>一筆令啓達候。是式些少御座候得共、今度罷渡之祝迄、以目録 致進覧候。
一筆啓達令候。是式些少御座候得共、 今度 罷渡之祝迄、目録以 進覧致候。
글월을 알외이다 이만 거시 비록 些少오나 이번 건너오신
덕담으로 目錄으로 보시게 보내오니
30) 『日本国語大辭典』『古語大辞典』등.
18 日本文化學報……第 42輯
<重>一筆啓達。是式些少御座候ヘ共、今度 罷渡候祝儀之迄、以目録 致進覧候。
一筆啓達。是式些少御座候得共、今度 罷渡候祝儀之験迄、目録以 進覧致候。
 글월을 알외이다 이 些少오나 이번 건너오온 덕담으로
目錄으로 보시게 보내오니
(李) 글월을 아룁니다. 이것이 비록 사소하나 이번 건너오신 덕담으
로 목록으로써 보시게 보내니
「一筆啓達せしめ候(いっぴつけいたつせしめそうろう)」는「一筆申し上げます」혹은
당시의 서간문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一筆啓上いたします」와 같이 파악할 수
있으며「是式些少に御座候ゑとも(これしきしゃしょうにござそうらえども)」의「是式」는
「これくらいの事」혹은「(しき)は接尾語、事柄の性質、内容、程度が問題とするに足り
ないほどであること。たかがこれほどの事。これぐらいのこと。」31)등의
사전적
정의가
있으며「些少(しゃしょう)」는「数量や程度がごくわずかであること。わずかなこと。少ない
こと。」32)등의 뜻에 해당되므로「是式些少に御座候ゑとも」는「これは僅かでは
ございますが」와 같이 해석할 수 있겠다.
다음은「今度罷里渡里の祝までに(こんどまかりわたりのいわいまでに)」에 대한 검
토이다. 李太永(1997)에서는 위의 용례 6)의「今度罷里渡里の祝までに」를 改
修本의 국어번역과 같이「건너오신 덕담으로」로 해석하고 있는데 이는 일본
측 스스로가 자신들을 높이는 표현을 하고 있어 부적절하게 여겨진다. 또한 일
본어 「罷渡(まかりわたる)」의 의미를 파악하지 않고 오직 改修本의 국어번
역을 현대어로 바꾼 단순한 해석이라 아니할 수 없다. 동사「罷渡(まかりわた
る)」는「渡るの謙譲語。こちからあちらに行く。行き移る。」33)를
의미한다.
따라서
「今度罷里渡里の祝までに」는 「今回無事に渡航できた祝までに(이번에 무사
히 건너온 자축의 뜻으로)」와 같이 해석된다.
「目録を以つて進覧致し候(もくろくをもってしんらんいたしそうろう)」에 대하여 李太永
(1997)에서는 개수본의 「目錄으로 보시게 보내오니」를 현대어로 단순히
바꾸어「목록으로써 보시게 보내니」로 해석하고 있는데 이 또한 일본어 원문
에 충실한 해석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6)의 용례「目録を以つて進覧34)致し候」
31) 『日葡辞書』『日本國語大辭典』『古語大辞典』등.
32) 『日本國語大辭典』『時代別國語大辭典』등.
33)『日本國語大辭典』『古語大辞典』등.
『捷解新語』卷十의 文面解讀(Ⅱ) ······················································································· 林 昌 奎…19
에서 알 수 있듯이「候」를 終結形 語尾 파악하여「目録をもって進上いたしま
す」와 같이 해석되어야 된다고 여겨진다.
이상의 서술에 근거하여 용례 6)을 原文과 前, 後 文脈을 고려하여 현대어로
해독하면 다음과 같다.
6-1)一筆啓上致します。これは僅かではございますが、今回無事に渡航できた祝 までに目録をもって進上いたします。
6-2) 한 글월 올리옵니다. 이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만 이번에 무사히
건너온 자축의 뜻으로 목록으로써 올리겠습니다.
7.「然るべきように」에 대하여
다음 용례 7)은 용례 6)에 이어지는 내용이다.
李太永(1997)에서는 다음 용
례 중의「東萊釜山浦ゑも然る可き様に仰せ上けられ候て下さる可く候」를 개수
본의 對譯「東萊 釜山浦에도 됴흘대로 와 주쇼셔」을 그대로 현대어로 「동
래 부산포에도 좋을 대로 아뢰어 주소서」로 옮기고 있는데 현대어 해석으로
는 부자연스럽다.
7)<原> 御笑留に於いては、忝く可く候。東萊釜山浦ゑも然る可き様に
仰せ上けられ候て下さる可く候。8表6-8裏5 於御笑留者 可辱候 東萊釜山浦에도 可然様 被仰上候而 可被下候
<改>於御笑留者 可辱候。東萊釜山浦 可然様、被仰上候而 可被下候。
御笑留於者 辱可候。 東萊釜山浦 然可様、仰上被候而 下被可候。
웃고 머므시면 감격올가 이다 東萊 釜山浦에도 됴흘대로
와 주쇼셔
<重> 於御笑留者 可辱候。東萊釜山浦へ茂 可然様 被仰上 可被下候。
御笑留於者 辱可候。東萊釜山浦 然可様、 仰上被 下被可候。
욷고 머므시면 감격올가 이다 東萊 釜山浦에도 됴흘대로
와 주쇼셔
34)「何か物を捧げること、あるいは、差しあげること。受け取る人を尊敬して言う。文書語。」
『日葡辞書』등.
20 日本文化學報……第 42輯
(李) 받아주시면 감격할까 합니다. 동래 부산포에도 좋을 대로 아뢰
어 주소서.
「御笑留に於いては、忝く可く候(ごしょうりゅうにおいては、かたじけなくそうろう)」는
「お笑納いただけましたらありがたく存じます」로 파악할 수 있겠으나,「東萊釜山浦ゑ
も然る可き様に仰せ上けられ候て下さる可く候」에
있어서「然るべきように」는
「ふさわしく、上手に、ちょうどよい」등의 뜻에 해당되므로「東萊様、釜山浦様にもし
かるべく申しあげてください。(東萊(府使)님과 釜山浦(僉使)님께도 잘 말씀드려 주십
시오)」와 같이 파악하는 것이 보다 자연스럽다. 이상의 검토 결과에 따라 용
례 7)을 현대어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7-1) お笑納いただけましたらありがたく存じます。東萊様、釜山浦様にもしかる
べく申しあげてください。
7-2) 가벼운 마음으로 받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東萊(府使)님과
釜山浦(僉使)님께도 잘 말씀드려 주십시오.
Ⅲ. 結 論
이상에서는 그동안 연구대상에서 제외 되었던 『捷解新語』 卷十 중, 5帳에
서부터 8帳에 나타나는 候文体書簡文에 대하여 검토하였다.
즉 本稿에서는 선행연구에서 卷十의 어휘적 성격이나 문장구조에 대하여 아
직까지 면밀히 검토되지 못한 부분, 혹은 잘못 해석된 부분을 수정하고, 현대
일본어와 국어번역을 일본어 본문과 문맥, 그리고 각종 문헌을 바탕으로 보다
객관적으로 세밀하게 解読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卷十의
자료적 가치를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으며, 『捷解新語』의 전체 改修 경향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또한 『捷解新語』의 현대어
解読에 있어 가장 타당한 원칙과 방법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검토 결과,
改修本의 부자연스러운 한글번역이 重刊本에서 보다 자연스러운
표현으로 수정된 경우가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改修本과 重刊本의 刊行
時期가 그다지 멀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어휘의 시대적 변천이라기보다 당
시의 어휘로서도 부자연스러웠던 改修本의 직역에 가까운 한국어가 重刊本에
서 수정되고 다듬어진 것으로 판단할 수 있겠다. 또한 『捷解新語』를 解読함
『捷解新語』卷十의 文面解讀(Ⅱ) ······················································································· 林 昌 奎…21
에 있어 어느 한 쪽만의 언어를 기반으로 하여 解読할 경우, 잘못 해석될 여지
가 많음을 확인하였다. 선행연구인 李太永(1997)에서는 重刊本의 한글번역이나
原文인 日本語를 고려하지 않은 채 改修本의 對譯 한글만을 근거로 현대어로
解読하고 있어 부자연스러운 표현들이 많이 나타나는데 本稿에서는 그러한 표
현들을 수정하고 解読의 방향성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특히 『捷解新語』巻十에서는 「候」에 한해서 일본어 원문에 충실하지 않
은 한국어 해석을 한 경우를 볼 수 있는데, 本稿에서는 이러한 경우, 原刊本의
일본어 표현을 중심으로 해독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왜냐하면 『捷解新語』의
底本은 역시 原刊本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며, 改修本과 重刊本의 경우 그 편
찬 시기가 그다지 멀지 않으나 중간본에서 개수본의 표현이 대부분 수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간본과 중간본의 한국어 부분을 참고하지 않고 개수
본의 한국어 만에 의존하여 현대어 해독을 하는 것은 『捷解新語』의 원간본
과 중간본의 改修 의도가 지나치게 소홀하게 다루어지는 것이라 論하였다.
지금까지 『捷解新語』연구는 두 가지 경향을 띤 연구가 주류를 이루어 왔
다. 제반 문법적 현상을 분석하는 연구와 자료적 가치를 논하는 서지학적 관점
의 연구가 그것인데, 이제는 이와 더불어 『捷解新語』의 올바른 현대어 解読
이 절실히 요구되지 않나 생각한다. 『捷解新語』의 올바른 현대어 解読이 완
성되었을 때,『捷解新語』 연구가 한층 완결성을 갖게 될 것으로 기대되기 때
문이다. 본 논문은 그러한 관점에서의 작은 시도라고 볼 수 있겠다.
22 日本文化學報……第 42輯
【参考文献】
李太永(1997) 『譯註 捷解新語』太學社
林昌奎(2007b)「『捷解新語』の資料的価値」『日本語学の研究と理解』,
p.315-355
----(2007a)「『捷解新語』の他動詞について」 『日本学報』第70輯
어문학사.
----(2005) 「『捷解新語』のハングル翻訳について(その二) 『日本語学研究』第13輯
----(2004) 「『捷解新語』のハングル翻訳について」『日本語學硏究』第8輯
----(2003c) 「自動詞「背く」에 대하여 」『日本語學研究』第8輯
----(2003b) 「『捷解新語』における狀態述語と共起する「を」について」
『日本文化學報』
----(2003a) 「『捷解新語』における二重「を」構文について」『日語日文學硏究』
44輯
----(1998c) 「『捷解新語』의 자동사「あう」와 共起하는 조사「を」에 대하여」 『日語日文学研究』32輯
----(1998a) 「『捷解新語』における「を」格の誤用について」 『月刊言語』2.
大修館書店
韓美卿(1995) 『捷解新語における敬語硏究Ⅰ.Ⅱ』 도서출판 박이정
梅田博之・林昌奎(2000) 「『捷解新語』의 使役構文」『21세기 국어학의 과제』
月印p.39-60
辻星児(1975)「原刊「捷解新語」の朝鮮語について」『国語国文』44-2、
京都大学国語学国文学研究室
----(1997) 『朝鮮史における『捷解新語』』岡山大学文学部
中田祝夫編(1985) 『古語大辞典』、小学館
室町時代語辞典編集委員会(1985-1994)『時代別国語大辞典室町時代編』、小学館
京都大學文學部國語學國文學硏究室編、刊(1973)『三本對照捷解新語本文編』
京都大學文學部國語學國文學硏究室編、刊(1973)『三本對照捷解新語釋文・解題編』 日本大辞典刊行会(1979ー1981)『日本国語大辞典』縮刷版(全十巻)、小学館
J.ロドリゲス著、土井忠生訳(1955)『日本大文典』三省堂
土井忠生、森田武他訳(1980) 『邦訳日葡辞書』、岩波書店
『捷解新語』卷十의 文面解讀(Ⅱ) ······················································································· 林 昌 奎…23
要 旨
本稿は従来の研究では研究対象から排除されてきた候文体書簡文である『捷解
新語』巻十(五帳から八帳まで)について検討したものである。
司譯院における倭學書の白眉とも言うべき『捷解新語』の資料的重要さは言を俟
たない。しかし、従来の研究では巻十の場合、候文体書簡文であることから、研究
対象から排除されてきたのである。先行研究があるとしても李太永(1997)が唯一である
が、李太永(1997)においては原文である日本語文については考慮の外に置き、改修
本の対訳のハングルだけに注目し、現代韓国語を解釈しており、不自然な表現など
が少なくない。そこで本稿では、『捷解新語』が書かれたほぼ同時代の文献、すな
わち『日葡辞書』『日本大文典』の他 、多数の資料を参考にし、 日本文及び、
文の前後の状況までを考慮の対象とし、巻十の文面を繊細で且つ緻密に解読を試み
たものである。
検討の結果であるが、『捷解新語』を解読するに当たって日․韓どちらかの一方
だけの言語の立場から解読した場合、誤謬を犯しやすいことを確認することができた。
さらに、本稿においてはそうした先行研究の誤謬を修正し、且つ最も望ましい巻十の解
読の方向性を提示しようとしたのである。すなわち、『捷解新語』の底本である原刊
本の日本語を軸にし、まず、原文の日本語を現代日本語に解読し、さらに改修本と
重刊本の韓国語を考慮の対象にし、現代韓国語に解釈すべきであると論じた。また、
日本語文と対訳の韓国語文の構造の違いが有る場合、特に日本文の直訳が韓国語
として文法的ではない場合においてはまず、韓国語の文法的な表現に意訳して解釈す
るのが妥当であると考える。さらに改修本の編纂過程において生じた誤謬または不自然
な表現は、原刊本の日本語の表現に基づき、現代韓国語に解釈すべきものであると
論じた。
キーワード : 捷解新語、巻十、 候文体書簡文、誤謬、文面解読、日本語テキスト
투
고 : 2009. 5. 31
1차 심사 : 2009. 6. 13
2차 심사 : 2009. 6. 27
話題導入ストラテジーの韓日対照研究
鄭 榮 美*
1)
(e-mail : [email protected])
目次
1.研究目的
2.先行研究及び理論的背景
3.研究方法
4.分析項目
5.分析結果及び考察
6.まとめと今後の課題
1.研究目的
本研究では、会話の中で話題が導入されるとき、どのような言語的ストラテジーが使われ
るのか、またそのストラテジーの運用において韓日の相違点や類似点はあるのかを明らかに
することを目的とする。「話題」は、三牧(1999:50)に倣い、「会話の中で導入、展開さ
れた内容的に結束性を有する事柄の集合体を認定し、その発話の集合体に共通した概
念」と定義し、話し手と聞き手との相互作用によって成立、展開されていくものであると捉え
る。そして、話し手が新しい話題を導入したり、先行する話題へ回帰したりする際に用いる
ストラテジーを「話題導入ストラテジー1)」と定義する。
* 清州大学 日語日文学科 非常勤講師
1)
木暮(2002:7)は話題が転換する際に使われる表現ということで「話題転換表現」という用語を使用している。ま
た、山本(2003:67-68)は話題転換を合図する言語表現という意味で「話題転換マーカ」と呼んでいる。本研
究では会話参加者が話題を変える際に何らかの言語的表現を戦略的に用いるという意味で「話題導入ストラテ
ジー」という用語を用いる。
26 日本文化學報……第 42輯
2.先行研究及び理論的背景
話題に関する研究は、話題の概念とその展開構造を論じたもの(串田1997、南1981、
村上 熊取谷1995、Keenan and schieffelin1976)、選択される話題の内容に焦点を
おいたもの(三牧1999、李正子2007)、ポライトネスの観点から考察を行ったもの(宇佐美
1994、奥山2005、熊谷・石井2005)、話題転換に焦点をおいたもの(木暮2002、山本
2003)など多様な観点から行われている。 ここでは、木暮(2002)と山本(2003)が話題転換における言語表現を取り上げていること
から本研究と関連深いと考え、この二つの研究を中心に見ていく。木暮(2002)は日本語母
語話者同士の会話と接触場面の会話を用い、話題転換の際に見られる表現形式2)につ
いて分析している。母語話者は話題転換を示す表現の使用率が非常に高く(80%以上)、
その中でも接続表現(談話標識と接続詞)の使用率が過半数を占めると報告している。
一方、学習者は個人差が大きいが、学習の発達的な観点から捉えると、使用形態の変
化は、学習のレベルが上がるにつれて、認識の変化と談話標識⇒接続詞⇒メタ言語的
発話の順で多用しているとしている。さらに、表現形式別の使用傾向を示し、日本語教育
への応用の可能性を論じている。しかし、なぜそのような使用傾向が見られたのかまでは考
察していない。また、日本語学習者である被験者の第一言語3)が統一されていない点か
ら、第二言語の運用における第一言語の影響が考慮されていないと考えられる。
一方、山本(2003)は、アメリカと日本のテレビのトーク番組を資料として話題の結束性と
話題転換マーカーの使用傾向を結びつけて分析をしている。その結果、英語と日本語とも
により処理負荷の高い、つまり先行する話題との結束性の薄い非連続タイプの話題の導入
により頻繁に話題転換マーカが使われると述べている。そして、それは、話題転換マーカ
が、聞き手にかかる情報処理負荷度が高い時にその負荷を軽減する補助装置として働くこ
とを示唆すると説明している。しかし、この研究は、トーク番組が資料であるため、分析結
果が自然会話の言語運用をどの程度反映しているかは、さらなる検証の余地があろう。
そこで、本研究では先行研究の問題点を踏まえた上で、一定の条件を統制してから収
録した会話4)を用い、その中で見られる「話題導入ストラテジー」を分析する。
その後、「話題導入ストラテジー」の使用傾向をポライトネス理論(Brown and Levin
son、1987)の観点から考察する。
2) 木暮(2002:8-9)は話題転換の際に見られる表現形式を、①認識の変化を示す表現、②接続表現(談話標
識、接続詞)、③メタ言語的発話、④話題のフレームの提示、⑤話題そのものの提示、⑥会話相手の名前を
呼ぶ、の6つに分類している。
3) 被験者の第一言語は、フランス語、インドネシア語、マレー語、中国語である。
4) 会話収録における条件統制や手続きの詳細は3.1を参照。
話題導入ストラテジーの韓日対照研究 ··············································································· 鄭 榮 美…27
Brown
and
Levinson(1987)はすべての人間が持っている欲求として「フェイス
(face)」という概念を打ち出している。「フェイス」には、「他者に理解されたい、好かれ
たい、賞賛されたいという欲求」である「ポジティブフェイス(positive face)」と、「賞賛
されないまでも、少なくとも、他者に邪魔されたり、立ち入られたくないという欲求」である
「ネガティブフェイス(negative face)」があるとされる。「ポジティブフェイス」を満たすことが
「ポジティブポライトネス(positive
politeness)」であり、「ネガティブフェイス」を満たすこと
が「ネガティブポライトネス(negative politeness)」であるとしている。
そして、人間の行動には本質的にフェイスを脅かすものがあり、それを「フェイス侵害行
為(FTA:
Face
Threatening
Acts)」としている。「フェイス侵害行為」における
「フェイス侵害度」は、話し手と聞き手の社会的距離、聞き手の話し手に対するパワー、
行為そのものが持つ負担の度合いを合わせて見積もられると述べている。
「 フ ェ イ ス侵 害 行 為 」 を 行 う 際 に 用 い る 「 ポ ライ トネ スストラテジー( p o l i t e n e s s
strategy)」は、1)軽減行為なし、あからさまに言う(without
redressive
action,
baldly)、2)ポジティブ ポライトネスストラテジー(positive politeness strategy)(15種
類)、3)ネガティブ ポライトネスストラテジー(negative politeness strategy)(10種
類)、4)言語表現で明示しない(off record)(10種類)、5)フェイス侵害行為を行わ
ない(Don’t do the FTA)、に分類される。この中で1)2)3)のストラテジーは言語表
現で明示する(on
record)というストラテジーとなる。ストラテジーの番号が大きくなるにつ
れ、ポライトネスの度合いも大きくなるとされる。
3.会話データの基本情報及び分析方法
3.1 会話データの基本情報
Brown
and
Levinson(1987)は、話し手の言葉遣いに影響する要因として、力
(power)、距離(distance)、ある行為に対する負担の度合い(rank of imposition)
を挙げている。本研究では、表1で示したように、言語以外の要因はすべて統一した上で
会話収録を行った5)。
表1 会話データ収集の条件統制 言 語
力
距 離
負担の度合い
韓国語
日本語
大学生 同年代
同性(女性) 友人
誘いに対する気軽さ
(負担の度合いは少ない)
5) 日本語会話は2003年5月~6月、2004年5月~7月に、韓国語会話は2004年3月~5月に収録した。
28 日本文化學報……第 42輯
会話収録時には、協力者ペアのうち一人を誘い手と設定し、できるだけ普段通りの話し
方で、「自分が負担に思わずにできることを今の会話相手に誘ってください」と依頼した。
被誘い手には普段通りに話すことのみを依頼し、相手だけ誘いが行われるということは伝えて
いない。会話時間は、目安の時間(10分ぞい。分)を提示したが、厳密に守る必要はなく、
自然に終わけせるよう依頼した。会話収録後は、フォローアップ・アンケート調査により、自
然に会話ができたかどうかを確認した。
分析対象となった会話は韓日各9会話(協力者:韓18名、日18名、計36名)である。
会話時間の合計は韓国語会話が110分28秒、日本語会話が211分28秒で、日本語会
話が韓国語会話に比べ約2倍の長さである。
日本 語の 会 話データ は 、 宇 佐 美 ( 2 0 0 7 ) の 「 基本 的 な 文 字 化 の 原 則 ( B a s i c
Transcription System for Japanese: BTSJ)」、韓国語の会話は宇佐美他(2007)
の「基本的な文字化の原則韓国語版(Basic Transcription System for Korean:
BTSK)の試作版(第1版)」に従って、会話開始から会話終了まですべて文字化し
た。文字化は3回にわたる確認作業を行った上で、評定者間信頼性係数(Cohen’s
Kappa(κ))を測定し、その信頼性を確認した(韓国語の会話データ:κ=0.902(κ>0.8
5)、日本語の会話データ:κ=0.895(κ>0.85))6)。
3.2 分析方法
「話題導入ストラテジー」を分析するためには、まず何を基準にして一つの話題と認定
するのかを決めなければならない。しかし、会話を用いて、話題の内容や話題導入の頻
度、または話題転換などを分析している先行研究のほとんどは、話題の範囲認定の基準を
明示せず、話題の抽象的な定義にとどまっている。話題というものは抽象的な概念を持つも
ので、話題の範囲を認定する人の百科事典的な知識7)の違いに左右されやすい相対的な
性質を持っている。そのため何らかの言語形式で話題の範囲を一概には決められない。し
かし、話題の認定の基準によって研究の結果も大いに変わり得るので、その基準を明示す
る必要はあるだろう。そこで、本研究ではメイナード(1993)、串田(1997)、村上
熊取谷(1995)、Hinds(1982)などを参考に、本研究における話題の範囲を認定する手
がかりとなるものを、言語的な要素、非言語的な要素、構造的な要素に分けて表2に示
す。その後、会話例を挙げながら説明する。
6)文字化における評定者間信頼係数(Cohen’s Kappa(κ))とは、文字化の改行の信頼性を確認するために、研究
者と第三者間の改行の一致率を計るものである。木山 施信余(2004:62-63)によると、計算式は【κ=Po-Pc
/1-Pc(Po:実際観察された比率,Pc:偶然による比率)】であり,κの値が機械的な作業の要素が強い分類で
はκ>0.85,研究者の主観が強く働く分類ではκ>0.7であればそのデータは信頼できると判断される。
7) 石綿(1969:149)を参照。
話題導入ストラテジーの韓日対照研究 ··············································································· 鄭 榮 美…29
表2 話題の範囲認定の手がかり
言語的な要素
非言語的な要素
構造的な要素
話 題 開 始 部 に 1)初出語
見られる要素
2)話題を変える意図を表示する表現
3)注目を引く不変化詞
(副詞、前置詞、接続詞など)
4)時制の転換
5)話題化しようとする事柄を質問す る。
6)話題化しようとする事柄を告知す
る。
話 題 終 了 部 に 1)やりとりの内容に対するまとめや 見られる要素
評価をする表現
2)限られた反応
間、沈黙
質問⇒答え
述べる⇒応じる
【会話例1】8)
ライン番号 話者
発話内容 71
JF08 】】それで「友人03名前」ちゃんの話に?。
72
JF07 あ、そうそう、「友人03名前」ちゃん<2人笑い>。
73
JF08 <笑いながら>なんの、###テレビ朝日から<2人笑い>。
74
JF07 そうそうそう。
75
JF07 うーん、テレビ局が、で、なんか、すごいやばいシー ンとかあって、そういうの編集するんで、気持ち悪く
なっちゃたとか。
76
JF08 へえー、え、でも、テレビ局に、じゃ、行ってる
のね。
77
JF07 うん。
78
JF08 すごい、格好いいね。
79
JF07 ねえ。
80
JF07 なんか、だから、「友人03名前」ちゃんって、そう
いう…。
81
JF08 うん。
82
JF08 /沈黙2秒/会った?。
83
JF07 1回だけ会って、すっごい眠そうに、"今日2時間しか寝
てないよ"とか言ってた。
84
JF08 そうなんだ、格好いいね。
85
JF07 ねえ。
86
JF08 今度なんかおごってもらおう<最後少し笑い>。
87
JF07 そうだね。
話題内容
話題Ⅰ:
友人03の
仕事
30 日本文化學報……第 42輯
88
89
90
91
92
93
94
95
96
97
JF07 なんか、皆、就職するのか。
JF07 /少し間/スペイン、行くの?。
JF08 行きたいけど、金ないよ<2人笑い>。
JF07 スペインに行きたい?。
JF08 行きたいんだけどね(うん)、このままだと、ちょっと
ビザが間に合わなくてね(あー)、行けないかも、なん
か。
JF07 留学??は?。
JF08 ま、続く##んだけど。[##部分は外のバイクの音で聞こ
えない]
JF07 ああー。
JF08 留学したら、でも、私交換留学じゃないから(うん)、
卒業は遅れるんだ<けど>{<}。
JF07 <あー>{>}、そうか。
話題Ⅱ:
JF08のスペイ
ン留学
会話例1は二つの話題に分けることができる。話題Ⅰはライン番号71からライン番号88ま
でで「友人03の仕事に関する話」であり、話題Ⅱは、「JF08のスペイン留学に関する
話」で、ライン番号89からライン番号97までである。二つの話題に分ける手掛かりとなるも
のを挙げると、まず言語的な要素としては、話題Ⅱの開始部に見られる「スペイン」という
「初出語」と「スペイン、行くの?」という「話題化しようとする事柄を質問する」というも
のである。また、話題Ⅰの終了部に見られる要素として「やりとりの内容に対するまとめや評
価を表す表現」(ライン番号78、ライン番号84、ライン番号88の発話文)がある。次
に、非言語的な要素としては、ライン番号89の発話文の前に存在する「間」が挙げられ
る。そして構造的な要素 9)としては「JF07の質問(ライン番号89)に対するJF08の答え
(ライン番号90)」というやり取りを挙げることができる。ここではこれらの要素を総合的に取り
入れて一つの話題の範囲を認定している。
本研究で取り上げる「話題導入ストラテジー」は以上の手がかりによって認定された話
題の開始部に見られるもので、話題開始の発話文の中で命題内容と直接的な関係をもた
ない言語的要素である。ここでは村上
熊取谷(1995)、木暮(2002)、山本(2003)を参
考にして、「メタ表現」、「認識の変化を示す表現」、「談話標識」、「注目の呼び
かけ表現」の4種類に分類する。各ストラテジーの定義は以下のようである。
8)
話例において、ライン番 は一つの 話文が占める行 を表すものである。話者の表記におけるKF
は韓 人の女性(Korean Female)であり、JFは日本人の女性(Japanese Female)である。
9) 本 究では、話し手によって取り上げられた事柄に する聞き手の反 がない場合は話題として成立
していないと捉えている。それは 話における話題は話し手と聞き手との相互作用によって成り立つ
ものだと考えているためである。こういう意味で、一人で話す演 のようなものにおける話題とは異
なる。
話題導入ストラテジーの韓日対照研究 ··············································································· 鄭 榮 美…31
1) 「メタ表現」
:自分、あるいは相手の言ったこと、これから言うことに言及する表現。言語行動に
言及する表現も含める。
例)韓:할 말이 있는데~ 日:話は変わるけど~
2)「認識の変化を示す表現」
:何かを思いついたり発見したりすることにより、認識に変化が起きたことを示す表現。 例)韓:아 맞다~ 日:そう言えばさ~
3)「談話標識」
:会 話 の 構 成 や 展 開 、 内 容 な ど を 示 す 手 が か り と な る も の 。 接 続 表 現 を 含む。 例)韓:아ー、그런데~ 日:えー、なんか~
4)「注目の呼びかけ表現」
:こ れ か ら 話 す 物 事 に 対 し て 相 手 の 注 意 を 引 き つ け る た め に 用 い る 表 現。 例)韓:야、뭐지~ 日:ねえ、なんだっけ~
では、実際の会話の中でこれらのストラテジーがどのように用いられているのかを会話例
から見る。
【会話例2】「メタ表現」の例
ライン番号
427
428
429
430
431
432
433
話者
JF03
JF04
JF04
JF03
JF04
JF04
JF04
434
435
JF03
JF04
発話内容
じゃ、6月の末の週末<とかにしようね>{<}。
<オッケー>{>}、オッケーオッケー。
じゃ、ちょっとたくさん声かけよう。
うん。
どうだろう。
なんかね、さき 、なんか 、言おうと思ったんだ 。
飲み会から…、あっ[思い出したように]、語劇さ、なにや
るの?。
あー、私ね、ど、道具と照明とかするかな。
っていうかキャストが集まんなさそうだね。
上記の会話例では、JF03とJF04が飲み会の約束の確認をした後、JF04のライン番号
432の発話文から語劇への役割へと話題が移っている。話題を変えるにあたって「なんか
ね」「あっ」というような複数のストラテジーが用いられているが、ここでは「メタ表現」に
注目して説明をする。話題と関連する命題は「語劇さ、なにやるの?」という次の発話
文10)(ライン番号433)となるが、JF04は話題を変えるに当たって「さき、なんか、言おうと
10)
話文は、「 話という相互作用の中における文」と定義される(宇佐美、2007:17)。
32 日本文化學報……第 42輯
思ったんだ」と、自分が何かを言おうとしていることをJF05に明確に示している。それから語
劇での役割という話題を取り出している。
【会話例3】「認識の変化を示す表現」の例
ライン番号
56
57
58
59
60
61
62
63
64
65
話者
KF04
KF03
KF04
KF04
KF03
KF04
KF03
KF04
KF03
KF04
発話内容
<그래, 거기에>{>} 무슨 소보, 소, 소바??,,
음.
그러던 데든데 되게 좀, 좀 특이한 게 좀 많긴 많더라.
근데【【.
】】아, 맞어,[생각났다는 듯이] 나 오빠두 구두 산다구
그래 갖구, 오빠랑 동대문 가서,,
어.
페레가모 짝퉁,,
어.
둘이서 그냥 같이 살라구 그러는데 어떨까?.
아니야, 야, 동대문 구두 되게 비싸.
会話例3で、KF03とKF04はネットショッピングの話をしていた。KF04は「소바」という
店の評価をし、「근데」という接続表現を用いて話を続けようとしたが、KF03が「아,맞
어」を発したので話の続きを中断する。一方、KF03は「아,
맞어」を発することによって
発話権を獲得した後、自分が彼氏とペアで買いたい靴のスタイルに関する話を切り出してい
る。そこで、話題はネットショッピングの話からペア靴の話へと変わっている。
【会話例4】「談話標識」の例
ライン番号
238
239
240
241
242
243
244
245
246
247
248
249
話者
JF13
JF14
JF13
JF14
JF13
JF13
JF14
JF14
JF14
JF14
JF14
JF13
発話内容
っつか、3回休んだしもう。
あの馬鹿<だしね>{<}。
<まじ、まじ>{>}<にリーチかかってる>{<}。
<笑いながら><まじ馬鹿だしね>{>}。
やばいね(<笑い>)。
すげーやばいよ(<笑い>)。
私意外とね(うん)、平気だよ。
あ、でも遅刻多いけど…(うん)。
っていうか 、なんかとれてるし。
何これ?。
あ、何でとれ、とれてるね、これ明らかに<きらひら>{<}。
<あっ>{>}本当だ。
話題導入ストラテジーの韓日対照研究 ··············································································· 鄭 榮 美…33
ここではJF13が授業を3回も休んだのでこれ以上休んではいけないと話ているところに、
JF14は自分は平気であると話している(ライン番号238~245)。しかし、JF14が自分の
靴が壊れたことについて触れることによって話題は靴へと変わっている。JF14はこれから話す
話題が実際には先行する話題と全く関連のないものにも関わらず、何らかのかかわりがある
かのように「っていうか」という表現を用いて、話を切り出している。
【会話例5】「注目の呼びかけ表現」の例
ライン番号
1
2
3
4
5
6
7
話者
発話内容
KF02 오늘 토익 시험쳤더니 진짜 덥다.
KF01 음.
야, 우리, 놀러 갈까?, 이번주나 다음주에. KF01
KF02 어디로?.
KF01 음--, 어디 갈까?.
KF01 우리끼리 애들 막 몰, 모아 갖구 가자, 같이.
KF02 정, 「친구01이름」이는 계곡으로 놀러 가재=.
KF02とKF03は会話を開始するにあたって、まず天気について話をしている。そして、
KF01の「야, 우리, 놀러 갈까?, 이번주나 다음주에.」という提案(ライン番号3)に
より話題は「遊びに行くこと」へと移る。KF01は遊びに行くことを提案するにあたって、
KF02の注意をひきつけるために呼びかけの表現「야」を用いている。
4.分析結果及び考察
韓日の会話データから話題を抽出した結果、韓国語の会話データ(以下韓国語の会
話)では250話題が抽出され、1話題当たりの平均時間(秒)は26.51であった。一方、日
本語の会話データ(以下日本語の会話)では392話題が抽出され、1話題当たりの平均
時間(秒)は32.53であった。1話題の平均時間の長さから同じ時間における話題の数を類
推してみると、韓国語の会話が日本語の会話より数多くの話題を持ち、その分、話題の転
換も頻繁に起こることが分かる。
表3 韓日の話題の数と1話題当たりの平均時間
言語
韓国語
日本語
会話数
9
9
会話時間
110分28秒
211分28秒
話題の数
250
392
1話題当たりの平均時間(秒)
26.51
32.53
34 日本文化學報……第 42輯
各話題の開始において「話題導入ストラテジー」の使用有無を見ると、表4で示したよう
に、韓国語の会話では「話題導入ストラテジー」を使用していないものが250話題の中、
162話題で全体の60%を超えている。その一方、日本語の会話では「話題導入ストラテ
ジー」を使用しているのが392話題の中、237話題で全体の60%を超えるという反対の結果
が出た。
表4 韓日の「話題導入ストラテジー」の使用有無の頻度と割合
言語
有(%)
88(35.2)
237(60.5)
韓国語
日本語
話題導入ストラテジーの使用
無(%)
162(64.8)
155(39.5)
合計(%)
250(100)
392(100)
話の中で話題を変える際に「話題導入ストラテジー」を使用していない例を挙げると以下
の会話例6のようである。
【会話例6】「話題導入ストラテジーを使用していない」例
ライン番号
157
158
159
160
161
162
163
164
165
166
167
168
話者
JF01
JF02
JF01
JF02
JF01
JF02
JF01
JF02
JF01
JF02
JF01
JF02
発話内容
なんか主人公の人、(うんうんうん)が好きなんですよ。
あー。
大好き。
うーん。
だから観たいなって,,
あー。
思ってさー。
バイトしてるんだけど 。←[新しい話題開始の発話文]
あ、してるんだ、そうだ。
そう。
何<してるんだっけ?>{<}。
<お菓子>{>}屋さん。
この会話は、JF01とJF02が一緒に映画を見に行くことにした後、その映画の主人公役の
女優の話をしているところに、JF02が自分のバイトの話を始めている部分である。JF02の
「バイトしているんだけど」という発話文は先行する話題とは全く結束性を持たないものであ
る。新しい話題を導入するに当たって、JF02は話題を変えることに関する何の前触れもな
く、話題の核となる「バイトをする」という命題内容を伝えるだけである。そこで、ここでは
「話題導入ストラテジー」が使用されていないと判断する。
本研究で取り上げている「話題導入ストラテジー」は話題転換を表す何らかの言語表
話題導入ストラテジーの韓日対照研究 ··············································································· 鄭 榮 美…35
示的な要素である。そこで、「話題導入ストラテジー」の使用は、話し手が聞き手に自
分がこれから新しい話題を導入しようとしていることに関する何らかのヒントを与えることになると
考えられる。
Brown and Levinson(1987:213-215)は、「言語表現で明示しない(off record)」
ストラテジーの一つとして「ヒントを与える(Give
hints)」ことを挙げている。話題の転換に
おいてヒントを与えることは、何の前触れもなくいきなり新しい話題を導入する唐突さを回避す
るという効果を持つと解釈きる。したがって、「話題導入ストラテジー」の使用有無の観点
からすると、本研究のデータにおいては、日本語の会話が韓国語の会話より唐突さの回避
という点ではよりポライトであると言えるだろう。
次は、「話題導入ストラテジー」に注目し、各ストラテジーの使用状況と言語形式につ
いて見てみる。各ストラテジーの使用頻度と割合を使用率の高い順で示すと表5のようであ
る。
表5 韓日の各話題導入ストラテジーの使用頻度11)と割合
話題導入ストラテジー
韓国語
使用頻度(%)
日本語
使用頻度(%)
談話標識
注目の呼びかけ表現
認識の変化
65(63.11)
29(28.16)
9(8.74)
301(84.08)
29(8.10)
24(6.70)
0(0)
4(1.12)
103(100)
358(100)
メタ表現
合 計
「話題導入ストラテジー」の種類別の使用頻度をみると、韓国語の会話では全体103回
の中、「談話標識」が65回で60%を超え、「注目の呼びかけ表現」が29回で30%近く
使われている。しかし、「メタ表現」は一回も使用されていない。日本語の会話でも「談
話標識」、「注目の呼びかけ表現」の順に使用率は高いが、後者は全体358回の中29
回での10%にも至らず、ほとんどが談話標識(301回で全体の約84%)である。また、少数
ではあるが、メタ表現が4回使われている。これらのストラテジーを話題転換の意図表示の
明確さという観点から順序づけると、「メタ表現⇒注目の呼びかけ
認識の変化⇒談話
標識」となる。Brown and Levinson(1987)では言語表現で明示すること(on record)よ
り言語表現で明示しない(off
record)ことの方がポライトであると捉えている。そこで、Bro
wn and Levinson(1987)の観点からすると、本分類においては「談話標識」が最もポラ
11)一つの話題を導入する際、複 の「話題導入ストラテジ 」が用いられている場合もある。ここでは
使用されたすべての「話題導入ストラテジ 」を えている。
36 日本文化學報……第 42輯
イトなストラテジーであると位置づけることができる。両言語において、最も明示的な「メタ
表現」をほとんど使わず、「談話標識」を多く使っているのは、話題の転換においてよりポ
ライトでありたいという話し手の意図の表れであると解釈できる。
それでは、各ストラテジーの表現形式の詳細について説明する。表6では韓日の各ストラ
テジーの表現形式の使用状況を使用率の高い順で表している。表現形式の分類において
異形態や長音などは代表形にまとめて集計をしている。
韓国語の会話で「談話標識」に使われている表現形式は15種類で、合計65回用いら
れている。その中で「그런데」、「그러면」の接続表現が34回使われ、全体の50%を
超えている。「注目の呼びかけ表現」は5種類で、合計29回使用されている。その中で
「야」と「뭐지」が26回用いられ、全体の90%近くの使用率を見せている。また、「認
識の変化」の表現形式は4種類で、何かを思い出した時によく使う「맞다」という表現が
多く使われている。しかし、「メタ表現」は一つも現れていない。一方、日本語の会話で
は、「談話標識」が25種類で、合計301回使用されている。その中で「なんか」「え」
「じゃ」の三つの表現が合計167回用いられ、全体の50%以上を占めている。そして、
「注目の呼びかけ表現」と「認識の変化」の表現形式は各々6種類が現れ、前者の場
合は合計29回の中、「ね」と「あの」が19回用いられ、全体の約65%を占めている。
後者の場合は合計24回の中、「そう」と「あっ」が19回使用され、全体の80%近くを占
めている。「メタ表現」は3種類の表現形式が合計4回用いられている。 表6 韓日の各話題導入ストラテジーの表現形式別の使用頻度と割合
話題 導入スト
ラテジー
韓国語
言語表現
그런데(근데/근데-)
談話標識
그러면(그면/그럼/
그러믄)
아(아-)
그리고(그리구/그리
구선)
그래도(그래두)
그래서
注目の呼びか
け表現
その他(9種類)
合計
야(야아-)
뭐지(뭐냐/뭐야/저
기 뭐지/저기 뭐냐)
日本語
言語表現
なんか(なんかさ/なん
26(40.00)
かね)
頻度(%)
頻度(%)
79(26.25)
8(12.31)
え(えー/えっ/えっさ)
56(18.60)
7(10.77)
じゃ(じゃあ/じゃあさ)
32(10.63)
4(6.15)
でも(でもね)
29(9.63)
3(4.62)
23(7.64)
14(21.54)
65(100)
16(55.17)
あ(ああ/あー)
っていうか(ていうかさ
/っていうかね)
その他(19種類)
合計
ね(ねえ/ねー)
65(21.59)
301(100)
10(34.48)
10(34.48)
あの(あのさ/あのね)
9(31.03)
3(4.62)
17(5.65)
話題導入ストラテジーの韓日対照研究 ··············································································· 鄭 榮 美…37
그 있지
언제지?
잠깐
合計
認識の変化
맞다(맞어)
아아휴- 모르겠다
참
1(3.45)
1(3.45)
1 (3.45)
29 (100)
6(66.67)
1(11.11)
1(11.11)
1(11.11)
合計
無
9(100)
0
メタ表現
合計
0
なんだっけ
なに
あれだよね
ほら
合計
そう(あっそう)
あっ
そういえば
あれ
ちょっと思い出したんだ
けど
もしかして
合計
ゆったっけ?
なんか言おうと思った
んだ
言ったじゃん
合計
5(17.24)
3(10.34)
1(3.45)
1(3.45)
29 (100)
10(41.67)
9(37.50)
2(8.33)
1(4.17)
1(4.17)
1(4.17)
24 (100)
2(50)
1(25)
1(25)
4
(100)
4種類の「話題導入ストラテジー」の中で韓日ともに高い使用率を見せている「談話標
識」について韓日比較をしてみると、韓国語の場合は、「그런데」、「그러면」、
「그리고」のような接続表現が上位6位内に5つも入っており、70%近くの使用率を占めて
いる。その一方、日本語では、上位6位に入っている接続表現は「でも」「じゃ」で使用
率は約20%にとどまっている。
接続表現は先行する話題と次の話題が何らかの形で関係していることを暗示するもので
ある。そこで、韓国語で新しい話題を導入する際に接続表現が多く使われているのは、話
し手が何らかの形で後行話題に先行する話題との結束性をもたらせようとする意図の表れで
あると考えられる。Grice(1989)は会話には一定の規則性があるとし、それを協調の原理
(Cooperative Principle)と呼んでいる。協調の原理の中で3番目に挙げられているものに
「関連性のあることを言いなさい(p38)」というのがある。本研究の韓国語の会話データ
で話題を変える際に接続表現が多く使用されているのは、会話参加者がこの関連性の格
率(Maxim)を守ろうとしていることの表れであると解釈できる。
一方、日本語においては「なんか」、「え」、「あ」のような表現形式が「談話標
識」の中で50%以上を占めている。これらの表現は先行する話題と新しく導入する話題と
の間に結束性をもたらさないが、話し手の話題導入の意図を聞き手に否明示的に伝える機
38 日本文化學報……第 42輯
能を持つものである。ここから話し手が自分の意図を言語表現で明示しないことによってポラ
イトさを表そうとしていると解釈する。
5.まとめと今後の課題
本稿では、韓日の女子大学生の同性友人間の会話における「話題導入ストラテジー
」を分析し、ポライトネスの観点から韓日の比較を行った。その結果、日本語の会話で韓
国語の会話より多くの「話題導入ストラテジー」を使用していることが分かった。そこで、本
研究のデータでは日本語の会話の方が韓国語の会話よりポライトであると解釈した。また、
「話題導入ストラテジー」を大きく4種類に分類し、その詳細を分析した。その結果、韓日
共に「談話標識」というストラテジーが最も大きく使用されているということを明らかにした。
しかし、残された課題も多い。本研究の分析対象は、一定の条件を統一した上で収録
した会話ではあるが、多様な年齢層や親疎関係、性別のデータも分析する必要があると
考える。また、本研究では「話題導入ストラテジー」の運用にのみ焦点を当てた分析となっ
ているが、話題間の結束性とストラテジーの運用との関係も分析する必要があると考える。
今後はこれらの問題点を踏まえた形で研究を進めていきたい。
話題導入ストラテジーの韓日対照研究 ··············································································· 鄭 榮 美…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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話題導入ストラテジーの韓日対照研究 ··············································································· 鄭 榮 美…41
【文字化資料の記号凡例】12)
BTSJ
。
BTSK
.
,,
、
,
?
??
/少し間/
=
=
…
説 明
1発話文の終わりにつける。
発話文の途中に相手の発話が入った場合、前の発話文が終わってい
ないことをマークするためにつける。
①1発話文および1ライン中で、日本語(韓国語)表記の慣例の通りに読
点をつける。②発話と発話のあいだに短い間がある場合につける。
疑問文につける。
確認などのために語尾を上げる、いわゆる「半疑問文」につける。
話のテンポの流れの中で、少し「間」が感じられた際につける。
改行される発話と発話の間(ま)が、当該の会話の平均的な間(ま)
の長さより相対的に短いか、まったくないことを示すためにつける。
文中、文末に関係なく、音声的に言いよどんだように聞こえるものにつけ
る。
同時発話されたものは、重なった部分双方を<
>でくくり、重ねられた
<
>{<}
発話には、<
>の後に、{<}をつけ、そのラインの最後に句点
<
>{>}
「 。」または英語式コンマ2つ「,,」をつける。 また重ねた方の発話に
は、< >の後に、{>}をつける。
第1話者の発話文が完結する前に、途中に挿入される形で、第2話者
【【 】】
[ ]
( )
< >
(< >)
#
「 」
の発話が始まり、結果的に第1話者の発話が終了した場合に付ける。
結果的に終了した第1話者の発話文の終わりには、句点「。」の前
に【【をつけ、第2話者の発話文の冒頭には】】をつける。
文脈的情報を書く。
あいづちは( )で括る。
笑いながら発話したものや笑い等は< >で括る。
相手の発話の途中に、相手の発話と重なって笑いが入っている場合使
う。
聞き取り不能であった部分につける。
固有名詞等、被験者のプライバシーの保護のために明記できない単語
を表すときに用いる。
12) 記 凡例は、宇佐美(2007:27-29)と宇佐美他(2007:99-98)の中で、本稿で用いられた記 の
みを簡略化して表している。
42 日本文化學報……第 42輯
要 旨
本稿は、条件統制をした上で収集した韓国語と日本語の各言語を母語とする女子大学生の
友人間の会話を分析対象とし、話題導入におけるストラテジーの運用について考察したものであ
る。分析において、会話参加者が話題を導入するとき用いるストラテジーを「話題導入ストラテ
ジー」と呼び、それを「メタ表現」、「認識の変化を示す表現」、「談話標識」、「注目
の呼びかけ表現」の4種類に分類した。分析の結果、韓国語の会話データで合計250話題
が抽出でき 、 日本語の会話データでは合計392話題が抽出できた 。 「話題導入ストラテ
ジー」の運用を見ると、韓国語では250話題中、「話題導入ストラテジー」を使用していない
ものが162話題で、全体の約65%を示していることが明らかになった。その一方、日本語では
392話題中、237話題(全体の60%)において「話題導入ストラテジー」が使用されていると
いう韓国語とは正反対の結果が出た。そこで、「話題導入ストラテジー」の使用は話題転換
における唐突さを軽減することになると捉え、話題の導入においては日本語の会話が韓国語の
会話よりポライトであると解釈した。4種類の「話題導入ストラテジー」の中では韓日共に「談
話標識」のストラテジーが最も多く使われていた。しかし、その表現形式における詳細は異なっ
ている。韓国語では「談話標識」の中でも接続表現が70%近くを占めているが、日本語では
約20%を占めている。接続表現は新しく導入される話題と先行する話題とを何らかの形で関連
付 け る 働 き を す る も の で あ る 。 そ こ で 、 韓国 語 会 話で は 会 話参加 者 が 関 連 性 の 格 率
(Maxim)を守ろうとする傾向が強いと解釈した。
キーワード: 話題、話題導入ストラテジー、メタ表現、認識の変化を示す表 現、談話標識、注目の呼びかけ表現、ポライト
투
고 : 2009. 5. 31
1차 심사 : 2009. 6. 13
2차 심사 : 2009. 6. 27
近代日本の「国語」教育と漢字政策
*1)
邢 鎭 義
(e-mail:[email protected])
目
次
1.はじめに
2.近代日本の「国語」構築と「国語」教育の概観
2.1 「国語」構築以前の「国語」教育
2.2 「国語」構築以降の「国語」教育
3.「国語」教育における漢字に対する認識
4.漢字政策の概要
5.おわりに
1.はじめに
日本における近代教育の始まりは、よく知られている通り、明治4年(1871年)の文部
省設置と、同5年(1872年)8月に発布された「学制」においてである。「学制」の概
要は、全国を8大学区に分け、各大学区を32中学区に、さらに32中学区を210小学区に
分け、この学区に基づいて全国に大学校8校、中学校256校、小学校53、760校とする
内容である。これは人口600人につき小学校1、人口13万人につき中学校1を置く割合
である。このことは階級社会の崩壊に伴う市民社会の登場と文明開化、そのための庶民
皆学が地上課題であった明治初期において、日本全国を通してすべての人に教育を施そ
うとする明治政府の意気込みを物語る。
そして「学制」の教育理念は、「第一、人々自ら其身を立て、其産を治め、其業を
昌にして、以て其生を遂るゆえんのものは他なし。身を修め、智を働き、才芸を長ずるによ
るなり。第二、士官農商百工技芸法律政治天文医療等に至るまで凡人の営むところの事
*又松大学校日本学科 招聘教授 日本語学 社会言語学
44 日本文化學報……第 42輯
学あらざるはなし。第三、一般の人民必ず邑に不学の戸なく、家に不学の人なからしめん
事を期す」(高森[上掲書:28頁])に見られるように、立身、実学、庶民皆学であっ
た。つまりこの「学制」によって全国至る所に学校が設立され、すべての階層の人に、平
等に教育の機会を与えることが試みられたといえる。
とりわけ「皆学」は「国民」教育において、もっとも重要なキーワードである。皆学は文
字通り皆が学ぶことである。しかしそのようになるためには、まず教育の普及が前提にならな
ければならない。そしてそのためには「効率」を考えなければならず、また効率よく教育を広
めるには、教育の内容を分かりやすくしなければならない。庶民皆学という近代における教
育理念は、このような課題を解決しながら実現に向かうのである。これはつまり国民教育の
ことで、近代国家の「国民」教育は、こういう課題に立ち向かって構想された。
このような枠組みの中で行われた「国語」教育は、既述の近代教育の標榜する「すべ
ての人に平等に」という理念に、「国民」言語としての「国語」が標榜する「美しく、均
質で、平易な言葉」という理念を盛り込んで、「美しく、均質で、平易な言葉をすべての
人に平等に教える」教育であった。そのためには語法、即ち口語文法を整備し、文章も
文語文ではなく、分かりやすい口語体の文章に改めなければならない。そして仮名遣いな
どの表記法も改めなければならないが、その際もっとも困難な問題は漢字問題であった。漢
字は学習に負担が多いとされていたためである。
本稿では、近代日本の「国語」構築と「国語」教育を概観しながら、「国民」教育
の文脈において漢字はどのように語られ、また「国民」言語としての「国語」構築以降の
「国語」教育のなかでは、漢字は政策としてどのように扱われてきたかについて考察する。
研究方法としては、「国語」教育も漢字政策も「国語」構築と切り放せないテーマな
ので、近代日本の「国語」構築の軸にそって、論を進めていくことにする。つまり本稿は
近代日本の「国語」教育と漢字政策について考察するものだが、それを近代日本の
「国語」問題としてとらえて考えたいのである。そこでまず、「国語」教育を近代国民言
語としての「国語」構築の以前と以降に分けて概観し、漢字に対する認識も「国語」構
築を軸にして考察する。そして最後に政策として漢字問題にふれることにする。なお、「国
語」教育は、主に小学校令を中心に考察する。本稿は近代「国民」教育システムの中
での「国語」教育と漢字政策を考察するのであるため、もっとも就学者が多く、波及効果
が大きいと思われる小学校教育を対象にする。
先行研究としては、「国語」教育に関する研究として高森邦明(1979)が挙げられ、
漢字問題あるいは漢字政策に関する研究としては武部良明(1977)、平井昌夫
(1949/1998)、吉田澄夫
井之口有一編(1964)などが挙げられる。本稿は、「国
語」教育と漢字政策に関する史的研究として、研究手法においてはこれらの研究に倣った
ところが多い。しかしこれらの研究は、国民言語としての「国語」が前提にあって、そのう
えで「国語」教育と国字問題として漢字を取扱っているのに対し、本稿は近代国民国家に
近代日本の「国語」教育と漢字政策 ··············································································· 邢 鎭 義…45
おける「国語」とはなにかというところから、論を展開したいと思う。そこで1990年代後半か
ら活発に議論されている社会言語学的観点、つまりイ
ヨンスク(1997)、安田敏朗
(1998)、長志珠絵(1998)などの議論をふまえて「国語」をとらえ、それに基づいて
「国語」教育と漢字問題について考察したいと思う。
2.近代日本の「国語」構築と「国語」教育の概観
近代日本の「国語」教育を考察する際、時代区分としては様々な基準があるが2)、本
稿では近代日本の「国語」教育において、「国民」言語としての「国語」構築を中心
に、三期に分けて考察する。第一期は、日本の近代教育の始まりである1872年「学
制」から第二次小学校令までとする。そして第二期は、「国語」構築が本格化し、「国
語科」が科目として登場する1900年、第三次小学校令施行規則から1945年敗戦までと
し、第三期は1946年アメリカ教育使節団による、いわゆる「国語民主化」から今日までと
する。本稿では「国語」構築を軸にして考察するため、「国語」教育における第一期
を、「国語」構築以前として述べ、第二期と三期は「国語」構築以降として述べることに
する。
2.1 「国語」構築以前の「国語」教育
第一期は、明治5年(1872年)発布された「学制」と同19年(1886年)施行される
第二次小学校令を中心に考察する。この時期の「国語」教育は、「国語」の概念が
定まらない時期であっただけに、教科目として「国語」は存在せず、明治5年の「学制」
と「小学校則」により「綴字、習字、単語、会話、読本、書牘、文法」が、科目とし
て定められ、教えられた。その内容を簡単にみると、「習字」は上手に書くと同時に文字
を覚える、いわば文字教育であり、「書牘」は今日でいう「作文」で、日用文から諸証
文、公用文を書き、解意できるようにする目的で設けられた科目である。そして「読方」に
は「単語読方」、「会話読方」、「読本読方」があって、読む練習を主とする科目
で、「会話、綴字」は「ことばつかひ」、「かなつかひ」と呼ばれ、それまで「日本
語」で問題にならなかった「話す」ことと「スペリング」に関心をもって教える科目であった
2) 西尾実は「国語教育問題史」において、明治初年から明治末までを「語学教育期」として第一期、大正初年
から昭和10年ごろまでを「文学教育期」として第二期、昭和11年から今日までを「言語教育期」として第三期と
する。
また、輿水実は『国語科教育学』において、明治五年の学制発布、義務教育制度の実施段階を「文盲を
無くす時期」としており、明治33年から明治末までを「標準語確立と国語純化の時期」としている。そして大正11
年を頂点に「言語生活を高め、豊かにする時期」としている。(高森[1979]を参照されたい。)
46 日本文化學報……第 42輯
(高森[上掲書:32,33頁])。
この内容から考えられる明治初期のいわゆる「国語」教育は、「会話」を除いてすべ
ての科目が読み、書きを中心に行われていたことがうかがえる。しかしこの点は当時の社会
全般の言語観を反映したもので、すくなくとも明治初期において「言語」はもっぱら書かれ
た文字がその役割を担っていると考えられた。言うまでもないが「実際話される言葉」が
「言語」としての地位を獲得するのは、標準語による「国語」が構築されていく過程にお
いてである。
そして文部省は明治19年(1886年)第2次小学校令を出し、それまで初等科3年、中
等科3年、高等科2年となっていたのを、尋常小学校4年、高等小学校4年にし、尋常小
学校4年を義務教育にした。さらに教科書の検定制が開始され、国家システムとしての
「教育」は徐々に形作られていった。そういう中で今日の「国語」に当たる教科目として
「読書科、作文科、習字科」が定められた。
その内容は、「小学校教則大綱」第三条「読書及作文」の項目に「読書及作文ハ
普通ノ言語並日常須知ノ文字、文句、文章ノ読方、綴方及意義ヲ知ラシメ、適当ナル
言語及字句ヲ用ヒテ正確ニ思想ヲ表彰スルノ能ヲ養ヒ兼ネテ知徳ヲ啓発スルヲ以テ要旨ト
ナス」と記されていることから解るように、第一次小学校令と変わらず、読み書き教育が中
心になっている。しかし一つ注目したいのは、「普通ノ言語」あるいは「言語及字句」と
いう表現に見られるように、「言語」という概念が登場するようになったことである。
「言語」は本居宣長以来、この当時までは「話し言葉」の意味として用いられてお
り、「小学校教則大綱」においても「普通の話し言葉」と「字句」、つまり「書き言
葉」に対する「話し言葉」として用いられていた。要はその中身はともかくして、明治19年
の時点において「話し言葉」に注意を払うようになったことである。しかしこの背景には明治
16年「かなのくわい」、同18年「羅馬字会」の発足による表音文字への関心の高まり
と、同19年、山田美妙、二葉亭四迷などによる言文一致体小説の登場などがあったこと
を喚起しておきたい。
「話し言葉」は近代日本の「国語」構築において軸をなすキーワードとして、「国
語」を支える具体相である標準語制定、言文一致運動、口語文法などが「話し言葉」
なしには成り立たない概念であることは言うまでもない。文部省設置と共に始まった近代教育
において、第二次小学校令までの「国語」教育は、既述したように、主に書かれた文字
の読み、書きをメインにして行われたが、時代の流れによって徐々に話し言葉が浮上したと
いえる。つまり、第二次小学校令までの「国語」教育は、「国民」言語としての「国
語」の編制に関する内容が具体化されなかったため、「国語」の全体像を示して、「国
語」教育を押し進めるまでには至らなかったといえよう。
近代日本の「国語」教育と漢字政策 ··············································································· 邢 鎭 義…47
2.2 「国語」構築以降の「国語」教育
「国語」が教科目として登場するのは、1900年、第3次「小学校令施行規則」にお
いてである。つまり「国語」教育の第二期に当たる。この時期は近代日本の「国民」言
語としての「国語」が構築されるのとほぼ同じ時期で、「国語」構築においても「国語」
教育においても、もっとも重要な時期である。
近代国民国家における「国語」は「国家」の言語として、すべての「国民」はその言
葉によって意思疏通し、それによって同じ「国民」としての連帯感をもつという理念に基づい
て構築された一つの言語変種である。周知のとおり近代日本における「国語」の概念
は、1894年、上田万年の行った講演「国語と国家と」によって打ち立てられた。そこで上
田は近代日本における「国家」と「国民」と「国語」の概念を打ち立て、「国語」は
日本「国民」の精神的血液であり、「国語」によって「国民」は結ばれると説いた。こ
のような理念に基づく「国語」は、文部省諮問機関として設けられた「国語調査委員
会」によって構築されていくのだが、具体的には標準語制定、漢字と仮名遣による表記法
の改定、言文一致体の確立などである。つまり「東京の教育ある中流社会のことば」を
もって近代日本の標準語にするために、日本全国の話し言葉を調査して標準語を定め、そ
の標準語の発音による「表音かなづかい」を整備し、それによる「です、ます」調の近代
文体を整えて広める一連の過程を通して、近代日本の「国語」は構築されるのである。
「国語」構築は言い方を変えれば、「国語」改良である。つまり、既述のような一連の
過程は、すべての人に「国語」を広めるための「改良」なのである。そしてこの作業は、
既述の上田の講演(1894年)から始まって、およそ1910年までの間において、具体的な
形が表れるようになる。このような意味において第二期の「国語」教育は、「国語」の構
築と重なる時期として、「国語」を広め「国家」意識を高める手段としての役割を果たし
た。
『尋常小学編纂趣意書』からうかがえるこの時期の「国語」教育は、1900年から
1910年までは「国語」の統一と「国語」を広めることに焦点を当てており、1910年以降は
文学作品などを通して「国民思想」を培うことに焦点を当てていた。そして1941年、国家
主義の高揚と共に施行される「国民学校令」によって、「国民」として「皇民」としての
教育が強調されるようになる。つまり近代国家日本において「国語」教育は、「国語」と
いう言語の教育に止まらず、「国語」を通して「国民」としての思想を植え付ける役割を
果たしている。しかしこのことは、状況によって若干の差はあるにせよ、近代におけるほとんど
の国家で同じことが言えよう。
第三次小学校令は教科目として「国語科」が登場したことでも大きな意味をもつが、も
つもう一つの意味として「国語読本」という語が用いられることになったことが挙げられる。そ
して施行規則には、「読ミ方、書キ方、綴リ方ハ各々其ノ主トスル所ニ依リ、授業時間ヲ
48 日本文化學報……第 42輯
区別スルコトヲ得ルモ、特ニ注意シテ相連絡セシメンコトヲ要ス」と示しており、これに「話
し方」を入れて、今日における「国語」科目の教科内容を示すものとして用いられることと
なった(高森[上掲書:108頁])。
その後、1941年「国民学校令」が公布されるが、「国民学校令」は国粋的な思想
を強調する内容に変わっただけで、言語教育としての「国語」教育は、第三次小学校令
に従っており、第三次小学校令と施行規則は、近代日本の「国語」教育の根幹をなした
といえる。
そして1945年、敗戦によって連合軍軍政下におかれた日本は、連合軍総司令部
(GHQ)の主導のもと行われた社会全般にわたるいわゆる「民主化」により「国語」教育
も、大きく修正されるようになる。「国語」教育における第三期である。社会の変革に伴
い、教育基本法、学校教育法が公布され、「4月新学期制」の発足、教科書の検定
制の再開など教育に関する様々な変化がもたらされた。とくに「国語」改革として1946年
「現代かなづかい」と「当用漢字表」(1850字)が公布されたのは周知のとおりであ
る。
仮名遣と漢字からなる表記法は、近代日本の「国語」構築において、もっとも対立の
激しいテーマであったが、この「現代かなづかい」と「当用漢字表」によって、一段落し
たといえる。激しい対立というのは、「国民」だれもが学べる「国語」にするためには、
「国語」を平易に改良しようとする側と、「国語」の伝統を守るためには、歴史的仮名遣
と漢字を維持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側の対立である。そのため標準語制定、口語体の
確立など「国語」構築が進む中で、表記法だけは歴史的仮名遣が敗戦まで続いていた
のである。つまり1900年の第三次小学校令から「国民」教育のため、「国語」普及の
ため表音仮名遣と漢字制限の要求が続いたが、45年たって一応の解決をみることができた
といえる。
「国語」はすべての「国民」に用いられることを前提にする。「国語」教育はその
「国語」を普及するのが目的である。だとすれば「現代かなづかい」と「当用漢字表」
によって、真の意味においての「国語」教育が始まったといえよう。
3.「国語」教育における漢字に対する認識
近代日本における「国語」教育は、既述のように明治前期は庶民皆学、後期は義務
教育がモットとなって行われた。近代以前、一部の貴族階級にのみ与えられた教育の機会
が、近代国民国家の登場以降「すべての人」、つまり庶民にまで降りてくるのである。当
然のことながら、すべての人に教育の機会を与えるためには、教育の内容をある程度平易
近代日本の「国語」教育と漢字政策 ··············································································· 邢 鎭 義…49
にすることが求められる。このことは「国語」構築の過程においても浮上した問題で、その
中でもっとも深刻な問題となったのは漢字であった。つまり、学習に負担の多い漢字を教える
問題は、庶民皆学の進行と共に「国語」教育、「国民」教育の問題としてもっとも議論
になった。これは「国語」問題であり、「国語」教育の問題であったのである。
漢字に対する問題提起は、よく知られているように慶応二年(1866年)、前島密の「漢
字御廃止之儀」に始まる 3)。前島は徳川慶喜に上申した建白書に、「漢字御廃止之
儀」と題し、次のように述べている。
国家の大本は国民の教育にして其教育は士民を論せす国民に普からしめ之を普からしめ んには成るべく簡易なる文字文章を用ひさる可からすー中略ー然らば御国に於ても西洋諸国
の如く音符字(仮名字)を用ひて教育を布かれ漢字は用ひられす終には日常公私の文に漢
字の用を御廃止相成候様にと奉存候。(山本[1978:125頁])
つまり、国家の大本は教育であり、その教育はすべての「国民」に広めなければならな
い。そしてそのためには簡易な文字、文章を用いなければならず、日本でも漢字を廃止
し、西洋のように音符字、すなわち仮名文字を用いるべきであるという主張である。この文
章は近代日本の漢字廃止論の代表的な文章として、漢字問題、文字改革、言文一致
などを取り上げる際、必ず引き合いに出される文章であるが、ここでは漢字に対するこのよう
な問題提起が、国民教育に焦点を当てていることに注目したい。つまり簡易なる文字改革
としての漢字廃止は、「国民」に教育を広めるためであり、「国民」教育は「国家」の
大本であるという点である。
この外にも、明治初期には文明開化、教育の普及、西洋に対する危機意識などという
論理に基づいて、様々な文字改革論が繰り広げられた。たとえば西周の「洋字ヲ以テ国
語ヲ書スルノ論」(『明六雑誌』1874年3月号)によるローマ字論、清水卯三郎の
「平仮名ノ説」(『明六雑誌』1874年5月号)による仮名文字論、森有礼の「日本
語廃止論
英語採用論」4)などである。これらの様々な文字改革論に共通する認識は、
3) 厳密にいうと、漢字に対する最初の問題提起は、江戸時代まで遡る。
江戸時代に政府が中心になって「すべてを漢文化しよう」とする運動があり、それに反撥して江戸時代の中期以
後から「すべてをひらがな化しよう」とする大きな運動が起こった。それは本居宣長を中心とする国学運動で、国
学者たちは漢字 漢文や中国文化に強烈な反撥を示し、それに対して古典日本のひらがな的文化を復興させよう
とした。国学者たちは、そのころ再発見された『万葉集』や『古事記』を当時の最先端の学問を駆使して解読
し、古代日本の文学と精神を現代に移入していった。それはそのまま漢字 漢文に洗脳されていた当時の日本人
の内に「真の日本の魂」をよみがえらせることに通じていた。詳しいことは拙著(2008)を参照されたい。
4) 森有礼はアメリカ弁理公使であった1873年、『日本の教育(Education in Japan)』を英文で著し、そこで次
のように述べている。「日本における近代文明の歩みはすでに国民の内奥に達している。その歩みにつきしたがう
英語は日本語と中国語の両方の使用を抑えつつある。ー中略ーこのような状況で、けっしてわれわれの列島の外
では用いられることのない、われわれの貧しい言語は、英語の支配に服すべき運命を定められている。ー中略ー
50 日本文化學報……第 42輯
国民教育の普及のためには、学習に負担の多い漢字は廃止すべきであるというのであっ
た。
しかし一方では、漢字廃止ではなく節減の主張もあって、たとえば福沢諭吉の『文字之
教』(1873年)に見られる漢字節減論である5)。福沢は「文字之教端書」で、「日文
ニ仮名ノ文字アリナガラ漢字ヲ交ヘ用ルハ甚ダ不都合ナレドモ─略ー漢字ヲ全ク廃スルノ
説ハ願フ可クシテ俄ニ行ハレ難キ事ナリ此説ヲ行ハントスルニハ時節ヲ待ツヨリ外ニ手段ナ
カルベシ」と述べて、漢字を問題として認識はしているものの、その方法においては、俄に
廃止するのは難しいため、時節を待つと述べ、節減することで妥協する立場を取っている。
そしてさらに「ムツカシキ字ヲサヘ用ヒザレバ漢字ノ数ハ二千カ三千ニテ沢山ナル可シ、此
書三冊ニ漢字ヲ用ヒタル言葉ノ数。僅ニ千ニ足ラザレドモ一通リノ用便ニハ差支ヘナシ」
(「文字之教端書」)と述べ、『文字之教』を漢字節減の手本として示しているのであ
る。この書は当時の小学読本として書かれたもので、子供達が学んだ文字の意味を理解
し、その文字を使って文章を作れるようにするための教科書である。三冊からなる『文字之
教』は、「第一」では319字、「第二」では300字、「付録」では183字、合計802字
を実用漢字として提示し、漢字節減の一つの案を示した。
実際『文字之教』が教科書として、どのくらい用いられたかは明確ではない。しかし明
治初期における最初の漢字節減の手本として注目に値すると思われる。そしてこれの影響
だと思われるが、その後1886年の第二次小学校令においては、『尋常小学読本』の漢
字数を2000字に制限する初の漢字制限が試みられた。
ここで一つ注意したいのは、この当時の「国語」教育は、「国家」、「国民」、
「国語」の意識が薄く、今日のような「国家」としての組織が整っていなかった時期に行
われた「国語」教育であったことである。つまりいかなる主張や案も政策として押し進められ
ることはなく、一つの案のレベルに止まっていたといえる。そしてその後、1900年前後、即ち
明治30年代、「国家」意識の高揚と共に、組織としての「国家」が機能し始め、すべ
ての社会システムが政策として押し進められるようになってからは、漢字問題も言語政策とし
て取扱われ、推進されるようになる。第三次小学校令以降においてである。
既述したように1900年、第三次小学校令は、施行規則において「国語科」を教科目と
して定めたことで、「国語」教育としては重要な節目となる。そして1902年、日本の初めて
の言語政策機関として官制施行される「国語調査委員会」の設立と共に、「国語」と
「国語」教育は本格的に政策の対象として押し進められる。
日本の言語によっては国家の法律をけっして保持することができない。あらゆる理由が、その使用の廃棄の道を示
唆している。」
5) 漢字節減には明治6年(1873年)文部省で編纂された『新撰字書』もある。しかしこの書は1923年関東大震災
の際焼失され残っていない。この書については幣原担が『教育研究』251号に著した文章があるが、それによると
『新撰字書』では漢字を3167字採用し、方針としては「漢字を選み出すは、世間尤も普通のものを取る」と記さ
れていたという。(『国語施策百年史』98p)
近代日本の「国語」教育と漢字政策 ··············································································· 邢 鎭 義…51
漢字に関して第三次小学校令は、小学読本の漢字数を1200字にする方針を打ち出し
た。これは既述のような「国語」意識の高揚によるものであり、「国語」教育の効率を考
慮してのことである。その後「国語調査委員会」は、日本における初の「国語」政策に
乗り出す際、基本方針として「一、文字ハ音韻文字(フォノグラム)ヲ採用スルコトヽ
シ、仮名羅馬字等ノ得失ヲ調査スルコト、二、文章ハ言文一致体ヲ採用スルコトヽシ、
是ニ関スル調査ヲ為スコト、三、国語ノ音韻組織ヲ調査スルコト、四、方言ヲ調査シテ標
準語ヲ選定スルコト」の四つの項目を打ち出した。この中で漢字に関しては(一)に「文
字は音韻文字を採用する」として、漢字を廃止する方針を打ち出している。これについ
て、同委員会の委員長を勤めていた加藤弘之は「以上の四件の中で確定して居る事項
は、音韻文字を採用すること、文章は言文一致体を採用することの二件で、この決定は
将来動かさぬのである。即ちこの方針によれば音韻文字を採用するのであるから、無論形
象文字たる漢字は使用せぬことに定めたのである」(文化庁[2006:117頁])と述べてお
り、当時、同委員会の漢字廃止は、政策として確固たるものであった。そしてさらに保科孝
一は、この基本方針に触れ「国語調査委員会わ、絶対的に漢字お廃止して、将来仮名
と羅馬字との、いづれかお採用しよー、としていることが分かる。この方針わ、つまり教育
上、学術上の諸点に照らして、立てたものであろー、と思われる」(保科[1902:28頁]
(仮名遣は原文による))と述べており、同委員会による漢字廃止の方針は、教育を考
慮した方針であったことを明らかにしている。
しかし実際には、漢字廃止は政策として実行できず、節減の形で政策は進められた。
1900年の第三次小学校令施行規則によって、「国語」教育における漢字数を1200字に
制限したのを筆頭に、1923年、常用漢字表(1952字)、1942年、標準漢字表(2528
字)、1946年、当用漢字表(1850字)を経て、今日に至っている。
漢字をどのようにみるかは、「国語国字問題」の議論 6)によく表れているように、「国
語」の伝統と歴史性に重点を置く立場と、「国語」教育を念頭においた「国語」改良に
重点をおく立場に分かれる。当然のことながら、前者は漢字の維持を主張し、そこに「日
本語」の歴史性や伝統を見いだそうとする。一方で後者は漢字を廃止、または節減し、な
お略字体をつくって、さらに学びやすくする。教育の普及のための効率がその理由である。
近代日本における「国語」教育は、「国民思想の涵養」と位置づけられ、「国語」
教育を通して、「日本人」としての思想が培われるとされた。その際漢字は、「維持」を
主張する側からすれば、漢字の維持が「日本語」の伝統であり、歴史性であるため、そ
れこそが「国語」教育の中核であり、逆の立場からすれば、「国語」広めることが、
「国語」教育の最大課題と判断したため、なるべく分かりやすく改良して、一人でも多くの
6) 国語国文学関連の議論には平井昌夫(1949/1998)、吉田澄夫 井之口有一編(1964)などがあり、社会
言語学観点からは拙著(2008)などがある。
52 日本文化學報……第 42輯
「国民」に理解してもらうことを「国語」教育の中核となした。しかしこの二つの立場は、
是非の問題でもなく、正しい正しくないの問題でもない。それぞれの言語観の問題であり、
主義主張の問題なのである。
「政策」という言葉がそうであるように、漢字政策は「日本語」の表記法の問題とし
て、漢字かな交じり文において漢字をどう表記するか、字数、字体はどうするかを国家機関
で審議して基準を定めることである。当然のことながら、そこには時勢の論理と政策立案者
の言語観が伴われる点に注意を払いたい。
4.漢字政策の概要 明治維新以降、漢字に関しては様々な議論が繰り広げられた。おおむね漢字廃止と制
限である。しかし漢字問題を政策として打ち出したのは、1900年8月に発布された「小学
校令施行規則」においてである。同施行規則では「尋常小學校ニ於テ教授ニ用フル漢
字ハ成ルヘク第三號表ニ掲クル文字ノ範圍内ニ於テ之ヲ選フヘシ」とし、教科書用の漢
字として1200字を提示したのである。国家機関による初の具体的な漢字制限案である。
しかし当時は、近代国民国家の制度としての「国語」づくりを急ぐ雰囲気が高まっていた
時期で、既述したように1902年、日本初の言語政策機関として官制施行される「国語調
査委員会」が、実質「漢字廃止」を基本方針として打ち出したこともあって、実際1904
年から始まる第一期国定教科書『国語読本』は、編纂趣意書の「漢字ハ数字ヲ除ク外
ハ第三册ノ後半ヨリ提示シ始メ大ニ字数ヲ節減シテ第八册(第四学年)後半期用ノ終迄
ニ約五百字ヲ提示セリ」という方針に基づいて、小学校4年間(八巻構成)で教える漢
字数を500字に制限した。かなり思いきった政策であったといえる。しかしこの政策は同時に
打ち出された棒引き表音仮名遣と共に猛烈に反対され、1910年、国定読本第二期改定
の際には、漢字数は1360字になる。つまり「国語」構築における「国語」改良は、この
時点から後退することになる。そして「国語」改良を先頭で率いていた「国語調査委員
会」も1913年廃止された。しかし1914年「教育調査会」に「わが国の学生は言語文字
のために過重な負担を与えられ学力の進歩が不十分であるから言語問題を改良する必要
がある」(平井[1949/1998:231頁])という建議案が出されるなど、教育界からの「国
語」改良の要望が絶えなかったので、文部省は1921年「臨時国語調査会」を設立し、再
び漢字と仮名遣問題に取り掛かる。そこで、1923年5月、1962字からなる「常用漢字表」
が完成する。しかしこの「常用漢字表」は、同年9月に起きた関東大震災により、教育界
はさることながら、とりわけ東京を拠点とする出版、新聞などの印刷、メディア関係の諸機能
が麻痺状態になったため、実質的な実施には至らなかった(武部[1977:281頁])。
近代日本の「国語」教育と漢字政策 ··············································································· 邢 鎭 義…53
そして1934年には「臨時国語調査会」を拡大強化した「国語審議会」が発足し、文
部大臣は、翌年「漢字ノ調査ニ関スル件」について諮問する。そこで1938年「常用漢
字表」の再検討に着手し、「漢字に関する主査委員会」を設け、審議に当たる。その
後1942年6月17日、同審議会は常用漢字1134字、準常用漢字1320字、特別漢字74
字、合計2528字からなる「標準漢字表」を発表する。「常用漢字」は「国民ノ日常生
活ニ関係ガ深ク、一般ニ使用ノ程度ノ高イモノ」、「準常用漢字」は「常用漢字ヨリモ
国民ノ日常生活ニ関係ガ薄ク、マタ一般ニ使用ノ程度モ低イモノ」、「特別漢字」は
「皇室典範、帝国憲法、歴代天皇ノ御追号、国定教科書ニ奉掲ノ詔勅、陸軍海軍人
ニ賜ハリタル勅諭、米国及英国ニ対スル宣戦ノ詔書ノ文字デ、常用漢字、準常用漢字
以外ノモノ」(平井[1949/1998:342頁])という意味である。さらに同年12月には、既存
の「標準漢字表」を大幅に修正した2669字からなる新たな「標準漢字表」が発表され
る。ここでは「常用漢字」「準常用漢字」「特別漢字」などの区別を廃止し、簡易字
体も142字から62字に減らした。つまり1900年「小学校令施行規則」以降続いていた
「漢字制限」政策は、逆戻りした形となったのである。
このことは1931年の満州事変と1937年の中日戦争による社会情勢の変動と無関係では
ない。とりわけ中日戦争の後は国家主義が最高潮に達しており、たとえばローマ字運動も
左翼運動と結び付けられ弾圧され、「ヘボン式」という呼称も禁じられたことはよく知られて
いる通りである。つまり戦争が拡大されていく中で、「日本」の結集力を図らねばならない
状況において、「国語」教育はもっとも有効な手段として機能したが、そこに漢字は「日
本語」の伝統と歴史性として表象されたのである。
そして1945年敗戦と共に、日本は連合国の占領下に置かれ、社会諸制度の改革を余
儀なくされる。この中には「国語改革」も含まれ、この改革において、「国語民主化」と
呼ばれる「当用漢字表」(1850字)が発表された。その中身は「社会の現況から実施
可能な案」と「義務教育用漢字」という二本立てであった。前者は「当用漢字表」であ
り、後者は「当用漢字表別表」である。「当用漢字表」から「義務教育用漢字」を選
別した理由は、1850字の当用漢字を義務教育期間内に教えるのは無理があるとの判断で
あった。やはり「教育」における漢字は時代を問わず負担そのものであったのである。そし
てこの「当用漢字表」は、これ以上議論されることなく、一斉に教育及び社会諸制度へ
拡大していった。「当用漢字表」の言語的な正当性によるものではなく、この表を押し進
める政策主導側の影響力によるものであることは言うまでもない。
そしてさらに注目したいのは、「教育漢字表まえがき」第五項の記述である。そこには
「義務教育用漢字は、その数1160字であるから、当用漢字1850字に比してその間多少
開きがあるが、当用漢字は使用の実績や時勢の推移に徹しておいおい制限されていくべき
ものである。しかし、義務教育用漢字は基本的なもので容易に動かないものであるから、
両者の開きが年とともに縮小するであろう」(文化庁[2006:292頁])と記されており、
54 日本文化學報……第 42輯
1850字の当用漢字も義務教育用漢字表の水準まで減らしていく方針であったことがうかが
える。しかしその後、1981年新たに1945字からなる「常用漢字表」が発表され、今日に
至っている。
5.おわりに
近代日本における「国家」、「国民」、「国語」の概念が打ち立てられ広まり始める
のは、明治30年代、つまり1900年前後である。したがって当然のことながら「国語」教育
の始まりも、この時期とみてよかろう。明治維新と共に押し寄せられた近代化、西洋化の波
の中で、文部省が設置され、近代教育システムが立ち上がり、習字、読書、作文など
が教えられたが、近代における「国民」言語としての「国語」が整備される以前であるた
め、性格を異にするものである。既述したように近代国民国家における「国語」は、国家
機関による「国語」政策として押し進められるものである。標準語制定、言文一致文体の
確立、表記法の整備などが国家の方針に基づいて行われ、「国語」として構築されるの
である。その意味において「国語」教育も、「国民」言語としての「国語」構築以前と
以後に分けて考察すべきであると思われる。
このような意味で、近代日本の「国語」教育と漢字政策にとって、社会的にもっとも大き
な反響を呼び起こしたのは、1900年の第三次小学校令と、1946年のいわゆる「国語民主
化」である。第三次小学校令は「国民」言語としての「国語」が構築されつつあった時
期に出された学校令として、その時勢にのっとって「国語科」がはじめて登場し、読み、
書き、聞き、話しの設定など、今日の「国語科」の基盤となった。そして漢字政策として
は、小学校で教える漢字数を1200字に制限する具体案が、第三次小学校令において示
された。この学校令は、1904年から施行される国定教科書制度と、1908年から4年から6
年に拡大施行される義務教育制度と相まって、名実共に「国民」教育が可能になる土台
となった。
そして1946年のいわゆる「国語民主化」は、「国語」構築以来、もっともながく論争が
続いた表記法問題に一応の結論を出した出来事で、表音かなづかいによる「現代かなづ
かい」と「当用漢字表」による漢字制限である。これが「国語民主化」と呼ばれる所以
は、「現代かなづかい」と「当用漢字表」によって、ようやく「すべての人が平等に学べ
る平易な国語」が実現されたと思われるからであろう。つまり近代教育の始まりから、漢字
はたえず「問題」として認識され、廃止論と制限論が繰り広げられたが、1850字に制限す
ることで、漢字問題は一段落し、「国語民主化」と位置づけられたのである。そしてその
実体はどうであれ、このいわゆる「国語民主化」を境に「国語」教育も漢字政策も、戦
近代日本の「国語」教育と漢字政策 ··············································································· 邢 鎭 義…55
前のような大きな論争がないのも事実であろう。
第三次小学校令が出される1900年は、明治維新以来押し寄せてきた文明開化と国家
主義の波が、清日戦争の勝利によって最高潮に達し、「国家」建設に向かって走ってい
た時期であり、いわゆる「国語民主化」が出される1946年は、言うまでもなく敗戦による社
会変革の波が大きかった時期である。つまり近代日本における「国語」教育と漢字政策
は、「国語」そのもの(とはいっても「国語」自体が、言語の範囲内に収まりきれない概
念であるが)、漢字そのものが持っている言語的要素によるものではなく、時勢による政治
的判断も介入した結果物であることに注意を促したい。
本稿は国民言語としての「国語」構築と「国語」教育、そして政策として漢字問題に
ついての考察である。当然のことながら大前提として「国民」についての丁寧な考察が必
要である。「国語」構築であれ「国語」教育であれ「国民」形成とつながっているため
である。日本における「国民」という概念は、明治30年代に打ち立てられたが、時代の
流れと共に変化してきた。明治30年代の「国民」は国家との関係において被統治者として
の位置だったとすれば、現代における「国民」は主権者として位置づけられているのであ
る。このことは当然「国語」政策、「国語」教育にも互いに影響を及ぼしているため、
「国民」の概念の変遷と「国語」教育の在り方についての考察が必要だが、これは今
後の課題として、稿を改めて考察したい。
56 日本文化學報……第 42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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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代日本の「国語」教育と漢字政策 ··············································································· 邢 鎭 義…57
要 旨
日本における近代教育は、明治4年文部省設置と同5年学制の発布によって始まる。明治
維新と共に近代化が進められるなか、庶民皆学の理念のもと、近代教育システムが整えていく
のである。そこに漢字は学習に負担が多いという理由で、問題として浮上し、漢字廃止論が台
頭する。それに対抗して漢字節減論も持ち上がる。このようにして始まった漢字に対する問題提
起は、「国民」言語としての「国語」構築の際にも、「国語」教育においても続く。
日本の「国語」教育と漢字政策にとって、もっとも注目すべきは、1900年の第三次小学校
令と、1946年のいわゆる「国語民主化」である。第三次小学校令は「国民」言語としての
「国語」が、構築されつつあった時期に出された学校令として、これによって「国語科」がは
じめて登場し、読み、書き、聞き、話しの設定など、今日の「国語科」の基盤となった。そし
て小学校で教える漢字数を1200字に制限する具体案が 、 第三次小学校令において示され
た。
そして1946年のいわゆる「国語民主化」は、「国語」構築以来、もっともながく論争が続
いた表記法問題に一応の結論を出した出来事で、表音かなづかいによる「現代かなづかい」
と「当用漢字表」による漢字制限である。これが「国語民主化」と呼ばれる所以は、「現
代かなづかい」と「当用漢字表」によってようやく「すべての人が平等に学べる平易な国語」
が実現されたと思われるためであろう。つまり近代教育の始まりから、漢字はたえず「問題」とし
て認識され、廃止論と制限論が繰り広げられたが、1850字に制限することで、漢字問題は一
段落し、「国語民主化」と位置づけられたのである。そしてその実体はどうであれ、このいわ
ゆる「国語民主化」を境に「国語」教育も漢字政策も、戦前のような大きな論争がないのも
事実であろう。
キーワード: 近代、国民教育、国語教育、効率、漢字政策、国語、政策
투
고 : 2009. 5, 31
1차 심사 : 2009. 6. 13
2차 심사 : 2009. 6. 27
平安時代の女性たちの自己主張 * 1)
─『源氏物語』の「女」という語を中心に─ 金 玉 京**
2)
(e-mail : [email protected])
目 次
一 はじめに
二 結婚相手としての理想的な女性
─「雨夜の品定め」を中心に─
三 男性の立場で見る「女」
四 母親の立場で見る「女」
五 紫上の自己主張としての「女」
六 おわりに
一 はじめに
『源氏物語』は、光源氏や薫などをめぐる数多くの女性たちが登場し、その女性たちの
生き方を描き出しているところに、この物語の主な意味があることは、すでに言われている。
そもそも成人した光源氏が物語の主人公として本格的に活躍する帚木巻1)は、「雨夜の品
定め」による女性談義が話の中心になっていて、物語は初めから女性のあり方に関心を寄
せ、それを表面に打ち出して問題にしている。当時の文芸作品において『源氏物語』ほ
*本論文は住友財団の2007年度「アジア諸国における日本関連研究助成」事業の助成金によるものである。
**韓南大学校 講師 平安文学専攻
1)『細流抄』では、「帚木と云名は惣ては源氏一部の名にかけて見るべきなり、一切衆生のあるかとすればなき有さ
まに能叶へり、桐壷巻は序文までも入たたず、此帚木巻物語の序分也と見へたり。(源氏物語古注集成7『細
流抄』おうふう)」とある。また、和辻哲郎は帚木巻を「一つの物語の発端としての書き方」になっているとし、
「帚木の発端は、後に来る物語を呼び起こすべき強い力を持ってゐるが、それに先行する何の描写をも必要とす
るものでない。」と桐壷巻をうけていないとしている。(和辻哲郎『日本精神史研究』岩波書店 大正15年 p.133)
60 日本文化學報……第 42輯
ど女性について多くのことを記述したものはなく、とりわけこの帚木巻は女性論
婦人論の総
論と言われるほど様々な女性のあり方を取り上げている2)。ところが、この物語では女性に
関するもののほとんどが男性の立場で語られ、帚木巻の女性談義は、それをよく示してい
る。
今一つ、「女」という語を見出しにしてみても、その傾向は明らかである。この「女」と
いう語は、女性への見解を述べるときによく用いられる表現で、物語の語り手や作中人物
の口から語らせ、身分の高低に関係なく広く使われている。しかし、作中女性の口を通さ
れて使われている用例は、わずか4例にすぎない3)。勿論、ここでいう「女」は、男性とは
異なる女性の特色などを示す一般化された「女」に限定した場合のことである4)。物語で
は女性たちのあり方を多く描いているにもかかわらず、作中女姓による「女」についての考
えはあまりふれられていないのである。
本稿は、源氏物語に用いられている「女」という語をキーワードにして、物語における女
性への考え方を考察する。ただ、物語の女性への見解は、結婚問題を契機としてなされる
場合が多いので、問題にする「女」という語も、結婚に関わるものを中心に考えたい。そ
れを考える前に、まず、この物語の女性論を総括したというべき「雨夜の品定め」では、
女性をどのように見ていたのかを見ておきたい。
二 結婚相手としての理想的な女性
─「雨夜の品定め」を中心に─
五月雨の降りつづくある夏の夜、頭中将は物忌みゆえに宮中に留まって何もできないでい
る光源氏の宿直所を訪れ、女性を話題にして話す。そこに左馬頭と藤式部が加わって、
四人の男による「雨夜の品定め」は始まる。周知のごとく、この貴公子たちによる女性談
義は、女性の品を三つに分けて、女性としてしかるべきあり方や理想的な結婚相手につい
て語るもので、その焦点は主に中の品の女性に当てられている。
この男性四人の内、左馬頭は女性の良し悪しを判断したり評価したりしてまとめていく中心
2) 竹村義一「源氏物語にあらわれた女性観」(『源氏物語の女性像』有精堂 1970 p.164)
3)「おんな」は、総244例の内、特定の女性を指す97例と一般論としての女性を指す80例、特殊な用法としての女
性が67例(この中には、「女にて見奉つらまほし」や「かしこき女のためし」といった用例など)ある。
4) 清水好子は、特定の女性を指す「女」について、作中人物が「おんな」や「おんなぎみ」と呼ばれるときは、た
だ男に対する女として見られているときであり、それらはいずれも恋の場面に限られているといっておられた(増補板 『源氏の女君』塙新書 1967 p.13)。これについては、森本元子も「源氏物語の「女」考」で類似なこと
を論じている(『源氏物語の探求』第八輯 源氏物語探求会 風間書房 1983)。本稿は、一般論として
の女性を指す例だけに限定して考えているので、これらの論と方向性がやや違う。
平安時代の女性たちの自己主張 ─『源氏物語』の「女」という語を中心に─ ······ 金 玉 京…61
的な役割を担っている人物である。特に彼が力を入れて語りつづけているのは、思いに叶う
女性を妻とすることの難しさについてである。実際に相手の女性に会ってみると、期待とは異
なって、表向きの情けばかりに身を入れていたり、家事という実生活だけを励んでいたりし
て、どちらの女性にも満足できない。どうせ男性には自分たちの求める女性は見つからない
のである。それなら、「ただひたぶるに児めきて柔かならむ人(帚木
64)5)」を妻とすべ
きだ、と左馬頭は言っている。なぜなら、素直で従順な女性の場合は、あまり自己を主張
しない傾向があり、そのほうが男性にとっては理想にかなった妻にできるという期待が持たれ
るからである6)。しかし、夫の留守中には、一人で何も判断できず頼りない欠点が表立つ
場合もあるので不安が残る。よく考えてみると、やはり普段は愛想がなく、親しみにくい女性
であっても、何かの折に活躍してくれる女性の方が妻としてはいいかもしれない、と左馬頭は
あれこれ妻とすべき女性のあり方を考える。そして結論的に左馬頭が導き出した妻の条件と
は、次のようなものであった。
今はただ品にもよらじ、かたちをばさらにも言はじ、いとくちをしく、ねぢけがましきおぼえだに
なくは、ただひとへにものまめやかに、静かなる心のおもむきならむよるべをぞ、つひの頼み
所には思ひおくべかりける、あまりのゆゑよし心ばせ、うち添へたらむをば、よろこびに思ひ、
すこし後れたる方あらむをも、あながちに求め加へじ。うしろやすくのどけき所だに強くは、う
はべの情けは、おのづからもてつけつべきわざをや。 (帚木 65)
要するに、左馬頭はここで生涯の妻とすべき女性を選ぶ基準は、相手の女性の身分や
地位などの社会的な背景にも外形的な美しさにでもなく、頼もしく落ち着いた心持ちにある、
といっている。竹村氏は、この左馬頭の意見に対して、「作者の謙虚と深い愛情からくる人
間への肯定的態度、人間性尊重、現実主義のひらめき7)」を見い出している。
しかし、当時は男女が直接会うまでに、相手に関する情報、たとえば家柄や世評、ある
いは歌のやり取りによる趣味教養などが、相手を判断する材料となっていた。従って、相手
の女性の心持を判断して結婚相手にすることは、ほとんど不可能に近い。むしろ、妻を選
ぶに当たって、相手の女性を支えている外的条件に頼るのが普通のあり方であった。この
物語の中でも、例えば、浮舟の母が娘の結婚相手にと考えていた左近少将は、浮舟が
常陸介の実子でないことを知って縁談を破談にする。少将はその代わりに介の実娘と結婚
するが、仲人がこの縁談を持ちかけてきたとき、少将は「もはら顔容貌のすぐれたらん女の
5) 本文引用は、新編古典文学全集『源氏物語』による。以下、同様。
6) 主人公の源氏が若紫を引き取って、理想的な女性に育て上げるために早くから教えたのも、「女は、心やはらか
なるなむよき(若紫 257)」ということであった。源氏のこうした考え方は、「雨夜の品定め」の女性談義に影
響されていることは明らかである。さらに、匂宮も妻の中君に向かって、「すべて、女は、やはらかに心うつくしきな
んよきこと(宿木 467)」と、穏やかで心が素直であるのをよいとしている。
7) 前揭書 注2)と同じ。(『源氏物語の女性像』有精堂 1970 p.170)
62 日本文化學報……第 42輯
願ひもなし。品あてに艶ならん女を願はば、やすく得つべし。(東屋
25)」といって、結
婚相手の容貌の美しさや品格の良さなどは問題にしていない。少将は「人にすこし謗らると
も、ながらへて頼もしきこと(東屋 32)」が可能だと判断したから、常陸介に近づいたの
である。少将がなによりも重視したのは、相手の女性の経済的な条件であった。
つまりここで左馬頭が、結婚相手の外的条件よりも心持の有り様を重視すべきだとする意
見は、実際物語で叙述している状況とも大きく違っている。いわば、左馬頭の言っている内
面の充実な女性を生涯の伴侶とすることは、作者の人間性尊重や現実主義のひらめきとい
うよりも、当時の実情とは掛け離れたあくまでも実現しにくい観念的な理想に近いものであった
に違いない。
このように相手の女性の性質を重視していた左馬頭は、その具体的なあり方として次のよ
うな点をあげている。
すべて、よろづのことなだらかに、怨ずべきことをば見知れるさまにほのめかし、恨むべから
むふしをも憎からずかすめなさば、それにつけて、あはれもまさりぬべし。(中略)「さしあ
たりて、をかしともあはれとも心に入らむ人の、頼もしげなき疑ひあらむこそ大事なるべけれ、
わが心あやまちなくて見過ぐさば、さし直してもなどか見ざらむとおぼえたれど、それさしもあら
じ。ともかくも、違ふべきふしあらむを、のどやかに見しのばむよりほかに、ますことあるまじか
りけり。 (帚木68)
ここでは、女性の心持を判断する一つとして、男の浮気に対処する女性の態度に焦点を
あて、男の浮気などにも直接的な嫉妬を避けて、「かすめる」「ほのめかす」「見しの
ぶ」態度をとる女性を好ましいといっている。
周知のとおり、当時は結婚形態として一夫多妻制が認められ、貴族男性は何人かの妻
を持っていた8)。それゆえに、男性にとって女性の嫉妬は避けられない問題であったに違い
ない。物語では理想的な女性として描かれる紫上も、ただ唯一の欠点として嫉妬があげら
れ、源氏の女性関係における紫上の嫉妬は絶えず問題にされていた。どんなに優れた女
性であっても、夫の浮気に動揺せずに平然といられるはずがない。勿論、嫉妬は相手へ
の愛情と関心の深さを表す一つの表現でもある。それを十分に承知しているからこそ、男性
たちも女性の嫉妬をあってはならないものとしていながらも、一方ではやむをえないものとして
8) たとえば、栄華物語では道長が息子の頼通に向かって、「男は妻を一人のみやは持たる、痴のさまや。いままで
子もなかめれば、とてもかうてもただ子をまうけんとこそ思はめ。このわたりはさやうにはおはしましなん。(栄華物語
十二 56)─本文引用は、新編古典文学全集『栄華物語』による。」と言っている。頼通に子供がめぐまれ
ないので、新しく妻を娶って跡を継がせるという意味でも、もう一人の妻が必要であるという。この道長の語り口から
も明らかなように、当時の貴族男性には、一人の妻を固執するほうが、むしろ普通のあり方ではなかったようであ
る。ただし、増田氏によると、当時男性にとって妻と呼べる相手はせいぜい二人三人くらいだったらしい。(増田
繁夫「十世紀後半の貴族社会の婚姻制度」(『源氏物語と貴族社会』吉川弘文館 2002 p66~108)
平安時代の女性たちの自己主張 ─『源氏物語』の「女」という語を中心に─ ······ 金 玉 京…63
容認せざるをえない。ただ、嫉妬の仕方が問題なのである。
例えば、髭黒の北の方の場合のように、夫が玉鬘に熱中していることに怒り狂って、灰を
かぶらせたりするなどして、夫の女性関係に対する激しい嫉妬心を剥き出しにしてはならない
のである。もちろん、北の方のこうした行動は、「例の御物の怪の、人に疎ませむとする事
(真木柱
366)」とされ、物語では貴族女性の激しい感情表出を、「もののけ」に取
り付かれたことによるものとして説明している。当時は女性における感情表現さえ自由にできな
い制約の多い社会であったことが知られる。
つまり、女性は嫉妬をするにしても、面と向かって自分の感情を露骨に表すというより、
そっとそれとなく仄めかすという、ほどのよさが望まれる。これはたとえ男の浮気に関するときだ
けに限られるものではなく、女性の感情の表し方や身の振る舞いなどにもこうした程度のよさ
が求められたのである。
以上、「雨夜の品定め」における女性への考えを見てきたが、それを整理してみると、
女性は自己を強く主張せずに誠実で穏やかな性質を持ち、何でも寛容な態度で忍耐すべ
きである。そうすることで生涯の伴侶として長く平穏な夫婦関係も維持されるのである。要す
るに帚木巻の女性談義における女性への見解は、男の男による男のための理想的な結婚
相手への希求としての妻の条件や態度に重点が置かれていたことがわかる。
それでは、こうした「雨夜の品定め」に描かれた男性の女性への見解に対して、女性
は「女」としての自身をどのように見ていたのか。以下、「女」という語を中心にして検討
していきたい。
三
男性の立場で見る「女」
「女」という語は、女性の特色を一般化して示すときに用いられる表現で、話しの主体
が作中人物の男性なのか女性なのかに分けて考えることができる。本節ではまず男性の立
場で語られたものについて考えたい。
当時の女性は男性に比べて社会的経済的活動が容易でなかったために、一人の力で
は世の中を生きることが難しく、一層のこと保護者の援助を必要とする存在であった。それ
は、北山の僧都が若紫を願う源氏に向かっていう次の言葉によく示されている。
「あやしきことなれど、幼き御後見に思すべく聞こえたまひてんや。思ふ心ありて、行きかか
づらふ方もはべりながら、世に心のしまぬにやあらん、独り住みにてのみなむ。まだ似げなき
ほどと、常の人に思しなずらへて、はしたなくや」などのたまへば、「いとうれしかるべき仰
せ言なるを、まだむげにいはけなきほどにはべるめれば、戯れにても御覧じがたくや。そもそ
も女は、人にもてなされて大人にもなりたまふものなれば、くはしくはえとり申さず、かの祖母に
64 日本文化學報……第 42輯
語らひはべりて聞こえさせむ」とすくよかに言ひて、ものごはきさましたまへれば、若き御心に
恥づかしくて、えよくも聞こえたまはず。 (若紫 214)
北山へ療養に訪れた源氏は、かねてから恋慕していた藤壷に似通った若紫を見つける。
若紫は有力な後見者を持っていず、唯一の保護者である祖母も病気の身の上で、いつ亡
くなるかわからない状態である。源氏はこうして若紫が藤壷ゆかりである点やかつての自分と
同じく危うい状況に置かれていたことへの同情心から世話役に申し出る9)。それに対して僧
都は、若紫はまだ幼い子どもなので源氏の相手としては似つかわしくないとしながら、女性は
本来自分一人の力では成人になれるものでないことを言って、その決定を若紫の祖母に委
ねている。僧都は源氏のいう世話役の内容を結婚相手として受け取ったので、若紫を「む
げにいはけなきほど」と、源氏に相応しくないことを言っていた。勿論いつかは若紫にも源氏
の言っている「御後見に思すべく」存在が必要であることを念頭に置いた発言である。
このように僧都は「女」という語を用いて、若紫にとっての世話役の必要性を言及してい
るが、若紫は親王の娘という高い身分を持つ女性であり、物語ではこうして皇族出身の女
性にとっての後見者の必要性を説く場合に、よく「女」という語を使っている。女三宮の場
合もそれに当てはまる。
女三宮は、朱雀院と藤壷女御の間で生まれた内親王である。父の院は、母女御に先
立たれた娘を、多くの子女の中でもっともいつくしみ愛していた。ところが病がちな朱雀院
は、この世に残された時間が少ないことを心細く思い、かねてから志していた出家を決心す
る。そして、自分以外には有力な後見者を持たない最愛の娘女三宮の不安な将来を心配
して、腹違いの弟源氏を宮の結婚相手と選び、源氏本人にその心中をほのめかす。源氏
はそうした朱雀院に向かって、次のようにいっている。
「げにただ人よりも、かかる筋は、私ざまの御後見なきは、口惜しげなるわざになむはべり
ける。春宮かくておはしませば、いとかしこき末の世のまうけの君と、天の下の頼みどころに
仰ぎきこえさするを、ましてこのことと聞こえおかせたまはんことは、一事としておろそかに軽め
申したまふべきにはべらねば、さらに行く先のこと思し悩むべきにもはべらねど、げに事限りあ
れば、おほやけとなりたまひ、世の政御心にかなふべしとはいいながら、女の御ために、何
ばかりのけざやかなる御心寄せあるべきにもはべらざりけり。すべて女の御ためには、さまざ
ままことの御後見とすべきものは、なほさるべき筋に契りをかはし、え避らぬことにはぐくみきこゆ
る御まもりめはべるなむ、うしろやすかるべきことにはべるを、なほ、強ひて後の世の御疑ひ
残るべくは、よろしきに思し選びて、忍びてさるべき御あづかりを定めおかせたまふべきにな
むはべなる」と奏したまふ。 (若
菜上
47~48)
ここで源氏は、女三宮は皇女という高貴な素姓を持っているからこそ、私的な後見者が
9) 増田繁夫「源氏物語作中人物論の視角」(『国文学』1991 p.15)
平安時代の女性たちの自己主張 ─『源氏物語』の「女」という語を中心に─ ······ 金 玉 京…65
なくてはならないとしている。女三宮の場合、東宮という強力な後ろ楯がいて、院の死後で
も将来は何も心配することはない。勿論、東宮は公的な立場にいる存在なので、些細なこ
とまでを気づかうことはできまい。要するに、女三宮は一生を独身で貫き通されても、東宮
や源氏自身などが背後にいるから、生活の面においては、それほど心配は要らない。た
だ、東宮は公的な立場にいるから、世話して上げるにも限界がある。従ってどうしてもその
将来が不安ならば、結婚させて夫の保護下に置くのが一番安心できる方法である、と源
氏は女三宮にとっての結婚の必要性をあつく語っている。
女性は親兄弟であれ夫であれ、自分以外の人の援助に支えられて生活していくしかない
依存的な存在である。殊に高い素姓を持つ女性の場合は、有力な後見人のいない状況
で、独身のまま生活を営んでいくことは、大変困難である。その一つの原因には、他の身
分の女性に比べて、自分の意思や判断を必要としない環境で育てられた点があげられ
る。
この物語では、すでに末摘花という女性を通して、後見者のいない独身女性の生活像
を垣間見ることができた。末摘花は常陸宮の「末にまうけていみじうかなしうかしづきたまひし
(末摘花
266)」娘で、親王の娘という高い身分に生まれながらも、早く親に死なれて
一人常陸宮を守って困窮な生活を余儀なくされた。屋敷はだんだん荒れていき、周りの女
房は一人二人そばを離れていった。しまいには受領に身を落とした叔母の娘たちの女房に身
を落としかねない状況にまで追い込まれる。末摘花の場合は、女三宮のように世評が高い
わけではなく、その醜い姿や古めかしい生活態度が極度に誇張して描かれているため、一
見すると女三宮の境遇とは違うように見える。しかしながら、少なくとも末摘花の高い身分に
ふさわしくない内実や育てられた環境のために、一人で世を生きてゆくすべが分からず、そ
れを十分に自覚できずに生きてきた受動的なあり方は、女三宮によく似ている10)。実は女三
宮の幼く頼りない性格やその育ってきた環境から、女三宮は末摘花以上に保護者を必要と
される存在なのである。つまり、後見のいない皇族女性にとって結婚は安定した生活のため
には不可欠のものであった。
この高貴な女性にとっての夫という庇護者の重要性は、落葉宮の女房たちに宮の再婚の
必要性を強く語っている大和守の言葉にも表れている。
その日 、 我おはしゐて 、 御車 、 御前など奉れたまふ 。 宮は 、 さらに渡らじと思しのたまふ
を、人々いみじう聞こえ、大和守も、「さらにうけたまはらじ。心細く悲しき御ありさまを見た
てまつり嘆き、このほどの宮仕は堪ふるに従ひて仕うまつりぬ。今は、国のこともはべり、まか
り下りぬべし。宮の内のことも見たまへ譲るべき人もはべらず、いとたいだいしう、いかにと見
たまふるを、かくよろづに思し営むを、げに、この方にとりて思たまふるには、かならずしもお
はしますまじき御ありさまなれど、さこそはいにしへも御心にかなはぬ例多くはべれ、一ところや
10) 拙稿『源氏物語の女三宮における一試論』(武庫川国文 2005 p.40)
66 日本文化學報……第 42輯
は世のもどきをも負はせたまふべき。いと幼くおはしますことなり。たけう思すとも、女の御心ひ
とつにわが御身をとりしたためかへりみたまふべきやうかあらむ。なほ人のあがめかしづきたま へらんに助けられてこそ。深き御心のかしこき御おきても、それにかかるべきものなり。君たち
の聞こえ知らせたてまつりたまはぬなり。かつは、さるまじきことをも、御心どもに仕うまつりそめ
たまうて」と言ひつづけて、左近、少将を責む。 (夕霧
462~463)
これは、夕霧の求婚を避けて小野に籠もり、京へは帰るまいとする落葉宮の意中を察した
大和守が、落葉宮付きの女房を叱責する場面である。落葉宮を向かえるために小野を訪
れた大和守は、左近と少将に向かって宮が夕霧の求婚を受け入れるべき理由を長々といっ
ているが、その言葉の中には女性にとっての結婚の意味を考えさせるものがある。
ここで大和守は、宮の京へは「さらに渡らじ」という言葉には従えないとしている。宮の置
かれた状況に心を痛め、母御息所の死後より今まで宮のために自分のできる限りのことはし
た。が、今は任国での用務もあって下向しなければならず、宮に勤めることができなくなっ
た。そうして後の世話を任せる人もいない宮の今後が心配な折に、夕霧のような権勢家が
心を寄せて世話してくれるので安心である。いくら夕霧の心遣いや援助が懸想からなるもの
であっても、そのために宮本人が世間の非難を受けることはない。というのは、皇女が夫と
死別して再婚した例は他にも多いからである 11)。それを宮本人もよくわかっているはずなの
に、京へは帰るまいと意地を張っているのは、幼い子どものような分別のない発想としか受け
取れない。女の身の上の始末や、思慮深い考えに基づく立派な方針、例えば出家生活
なども、だれかの保護下にあってはじめて可能である。
要するに、自らの力ではこの世をうまく生きることが困難である女性にとっては、自分以外
の人による「後見」「まもりめ」「もてなす」「はぐくむ」「あがめかしづく」という行為が
伴わなければ、自らの意志や分別ある判断も、ほとんど意味がないのである。
以上の用例は、有力な後見者を持たない皇族女性の世話役による安定した生活が男
性の口を通じて強調されている共通点を持っている。しかし、皇族女性といっても置かれた
環境が違い、「女」という語を用いる男性の立場もそれぞれ異なっている。若紫の場合
は、まだ十歳ばかりの子どもであり、孤児同然の身の上となることが予想されるほど危うい状
況に置かれていた。「女」はそうした若紫の境遇を念頭に置いて、祖母の兄である僧都に
よって発せられたものである。また、女三宮は皇女という最高の身の上でありながら、その
身分地位に相応しくない幼さのために、より庇護者の存在が必要とされている。しかも結婚
相手と内定されていた源氏自身が、「女」という語を用いて宮にとっての世話役の必要性
を強調している。一方、落葉宮は、若紫や女三宮と違って皇女の再婚という宮本人として
11) この点について全集は「『皇胤紹運録』その他の公的記録によれば、当時の皇女が夫と死別後に再婚した例
は見られない(新編『源氏物語④』小学館 p.581)」とあり、この大和守の言葉は、逆に記録類とは異なる
当時の実態を想像させられるものとしている。
平安時代の女性たちの自己主張 ─『源氏物語』の「女」という語を中心に─ ······ 金 玉 京…67
は不本意と思われる結婚問題を抱えている。それぞれ女性にとって異なる事情や状況があ
ることはいうまでもないが、落葉宮の場合は、夕霧の家来の大和守が宮付きの女房を責め
る言葉に「女」という語を用いて、夫の柏木や母の一条御息所を亡くした今の落葉宮の境
遇の厳しさを認知させ、宮にとって夕霧という存在の重要性を強調している。勿論、これら
の例には女性当の本人の結婚に対する立場や悩みなどは見られない。というよりも、いまだ
物語の叙述が男性中心に展開されているために、女性自身の結婚に関する考え方はあまり
表出されていない。が、第三部の宇治十帖へ進んでいくと、物語では作中女性の結婚に
対する本人の立場や悩みを本格的に取り上げて問題にする。
それでは、「女」という語が作中女性の口を通されたとき、「女」はどのようなものとして
捉えられているのか。 四 母親の立場で見る「女」
作中女性による「女」という語は、物語の第一部では六条御息所、第二部では女三
宮の乳母と紫上、第三部では浮舟の母中将の君に用いられている。これらの用例は、す
べて母親の立場で娘の結婚問題に関わって発せられたという共通性を持っている。まず、
六条御息所の場合から、その内容を具体的に探ってみたい。
御息所は、伊勢から帰京してしばらくは昔とかわりのない優雅な生活をして暮していた
が、にわかに重い病気を患って出家してしまう。それを知った源氏は御息所を訪れて思いを
込めて見舞う。御息所はそうした源氏の深い思いに感心しながら、自分の死後孤児同然と
なる娘斎宮のことを託す。その頼みの言葉の中には「女」についての御息所の考えが、
下記のように記るされている。
「心細くてとまりたまはむを 、かならず事にふれて数まへきこえたまへ 。 また見ゆづる人もな
く 、たぐひなき御ありさまになむ。かひなき身ながらも、いましばし世の中を思ひのどむるほど
は、とざまかうざまにものを思し知るまで見たてまつらむとこそ思ひたまへつれ」とても、消え入
りつつ泣いたまふ。「かかる御事なくてだに、思ひ放ちきこえさすべきにもあらぬを、まして心
の及ばむに従ひては、何ごとも後見きこえむとなん思うたまふる。さらにうしろめたくな思ひきこ
えたまひそ」など聞こえたまへば、「いと難きこと。まことにうち頼むべき親などにて見ゆづる
人だに、女親に離れぬるは、いとあはれなることにこそはべるめれ。まして、思ほし人めかさ
むにつけても、あぢきなき方やうちまじり、人に心もおかれたまはむ。うたてある思ひやりごとな
れど、かけてさやうの世づいたる筋に思しよるな。うき身をつみはべるにも、女は思ひの外に
てもの思ひを添ふるものになむはべりければ、いかでさる方をもて離れて見たてまつらむと思う
たまふる」など聞こえたまへば、
(澪標 310~311)
68 日本文化學報……第 42輯
ここの御息所は、自分亡き後の娘の後見役を引き受けた源氏がそれを言い訳にして娘に
心を寄せるのではないかと心配している。そのことは御息所本人の過去を振り返ってみても予
想するに難くない。それで御息所は、源氏にむかって娘を好色がましい筋には思うな、娘に
は男女の愛情問題でつらい目に合わせたくない、とくれぐれも頼んでいる。ここで御息所
は、不幸なわが身に寄せて人の心を知るにも、女は思いもよらないことで悩みを重ねるもので
ある、とわが身をもって娘の将来への不安感を表している。
周知のごとく、御息所は斎院の禊の見物の折に、葵上側との車の所争いに巻き込まれ
て深く傷つき、それをきっかけにして生霊となって葵上を取り殺す。しかも、そのことを源氏に
知られてしまい、身のやり場に悩み苦しんだ御息所は、娘の斎宮について伊勢へ下ることを
決心する。御息所は、思いがけない源氏との関係によって、物思いにふける生活をし、生
霊というおぞましい現象にあわれ、身を削る苦しみをも味わった。そうした痛切な経験によって
導かれたものが「女は思ひの外にてもの思ひを添ふるものになむ」という言葉である。
御息所は、つらいわが身を噛み締めることで、男女関係による女の不幸に自覚し、娘に
は自分のように薄幸な道を歩ませたくないと思っている。そしてそれが「いかでさる方をもて離
れて見たてまつらむ」という願いとなったのである。御息所の「女」というものに対する考え
は、娘の頼りない生活を案じる母親としての不安な気持とともに、御息所自身の生活のやり
きれなさや苦痛の思いに基づかれている。
さて、女三宮が新たな主人公として登場する『源氏物語』の第二部に入ると、物語は
源氏の栄華の生活に至るまでを描いてきたそれまでの世界から一変して、余命少ないと感じ
た朱雀院が、かねてから志していた仏門に入った後、残される娘の女三宮の不安な将来を
心配して思い悩む沈鬱な世界から語り始められる。この新しく繰り広げられる物語の世界で
は、すでに言われているように、高貴な女性の結婚問題が本格的に取り上げられてい
る12)。
早くから母親を亡くしていた女三宮の将来については、父朱雀院の他に乳母にも深く心
配されることであった。乳母による「女」という語も、そうした状況で用いられている。
この御後見どもの中に、重々しき御乳母のせうと、左中弁なる、かの院の親しき人にて年
ごろ仕うまつるありけり。この宮にも心寄せことにてさぶらへば、参りたるに会ひて物語するつ
いでに、「上なむ、しかじか御気色ありて聞こえたまひしを、かの院に、をりあらば漏らしき
こえさせたまへ。皇女たちは、独りおはしますこそは例のことなれど、さまざまにつけて心寄せ
たてまつり、何ごとにつけても御後見したまふ人あるは頼もしげなり。上をおきたてまつりて、ま
た真心に思ひきこえたまふべき人もなければ、おのらは仕うまつるとても、何ばかりの宮仕に
12)
石田穣二氏は、この第二部の物語で主要人物によって提起されている問題は、若菜巻の発端に見られる朱雀
院の「高貴の子女の結婚問題の不安」という認識に基づいた「女の宿世」であるという。(石田譲二「若菜
の巻の発端について」(『源氏物語論集』桜楓社 昭和46 p.154))
平安時代の女性たちの自己主張 ─『源氏物語』の「女」という語を中心に─ ······ 金 玉 京…69
かあらむ。わが心ひとつにしもあらで、おのづから思ひの外のこともおはしまし軽々しき聞こえ
もあらむ時には、いかさまにかはわづらはしからむ。御覧ずる世に、ともかくもこの御事定まり
たらば、仕うまつりよくなむあるべき。かしこき筋と聞こゆれど、女はいと宿世定めがたくおは
しますものなれば、よろづに嘆かしく、かくあまたの御中に、とりわききこえさせたまふにつけて
も、人のそねみあべかめるを、いかで塵も据えたてまつらじ」と語らふに、
(若
菜上 29~30)
これは、女三宮の乳母が源氏に仕えている兄の左中弁に、源氏への結婚仲介を打診
している場面である。ここで乳母が左中弁に言っている内容は要するに、女三宮にとっての
保護者の必要性であり、これは前節で源氏が朱雀院に向けて言ったのとほぼ同じ内容で
ある。皇女という最高の身分に生まれ育った女性は、独身を通すのが常例である13)が、そ
れも有力な世話役がいる場合のことである。女三宮のように父の朱雀院以外に心強い後見
人のいない場合は、院の死後、女三宮が独り身で生きるのは安心できない。勿論東宮の
援助を頼りにすることもできるが、細やかなことまでを期待するには限界がある。もしも朱雀院
の亡くなった後でことが運ばれ、思いがけない間違いでも起きて浅はかな浮名を立てることに
なったら、宮の本人ばかりではなく仕える者の手抜かりも世間の非難の対象となり、困難なこ
とになりかねない。どんなことがあっても、院が生きている間に宮を結婚させて気持よく宮仕え
ができたら、それ以上望むことはない。というのも、いくら高貴な血筋をもって生まれても、女
というものは、男のように自分の運命を切り開いていけるものではないので、どんな運勢なの
かはほんとうに分かりにくいからである。物語では女三宮の結婚の必要性を語るにあたって、
女三宮の乳母の内、「重々しき御乳母」と母親の立場に一番近い存在の口を通して
「女」という語を語らせ、そこには意外な境涯に陥りがちな「女」というものの不運で悲し
い存在としての認識が基づかれている。
御息所や女三宮の乳母のように、母親の立場で娘の将来を案じていたのは、第三部の中
将の君も同様である。中将の君は、中君に浮舟を託しながら、次のようなことを述べている。
「つらき目見せず、人に侮られじの心にてこそ、鳥の音聞こえざらん住まひまで思ひたまへ
おきつれ、げに、人の御ありさまけはひを見たてまつり思ひたまふるは、下仕のほどなどにて
も、かかる人の御あたりに馴れきこえんは、かひありぬべし。まいて若き人は、心つけたてま
つりぬべくはべるめれど、数ならぬ身に、もの思ひの種をやいとど蒔かせて見はべらん。高
きも短きも、女といふものはかかる筋にてこそ、この世、後の世まで苦しき身になりはべるなれ
と思ひはべればなむ、いとほしく思ひたまへはべる。それもただ御心になん。ともかくも、思し
棄てずものせさせたまへ」と聞こゆれば、 (東屋 56)
13)『河海抄』には「正三位源潔姫母當麻氏嵯峨天皇之女也天皇選聟未得其人太政大臣正一位藤原朝臣良
房初参之時天皇悦其風操超倫殊勅嫁之一品康子内親王延喜皇女配九條右丞相生閑院太政大臣公季 (源氏物語古注釈大成 第6巻 p.306)」と、皇女が降嫁した例は見られるが、その数はわずかで、嵯
峨朝から花山朝までの歴朝の皇女百六十人余りの内、百三十九人までが未婚のままに生涯を終っていた。
70 日本文化學報……第 42輯
ここで中将の君は、娘が結婚によって辛い目にあったり、無視されたりすることを避けるた
めに、出家させようかとも思っていたという。こうした中将の君の考えは、娘浮舟の受け継い
だ宮家の血筋に対する高い自負心に由来する。中将の君は、世間的には認められていな
いが、娘の高貴な素姓に相応しい相手と結婚させようとしていた。最初薫が浮舟を求めて
いたことを弁の尼から伝え聞いたときは、娘に有力な後見がいないことを理由にこの結婚に気
乗りしなかった。ところが、薫の優れた姿を目にした後、それまでの気持から一変して、娘
の薫との結婚を願うようになる。ただ、娘が薫と一緒になることで、一層悩みの種となることを
増やしてしまうのではないか、と不安にも思っている。なぜなら、中将の君には、身分相違
の結婚がどれだけつらいものであるのか、わが身をもって経験していたからである。実は、
今の浮舟の後見人も財産もない境遇また中将の君の八宮との身分違いの結婚による結果
であった。
というのも、八宮は、北の方の死後、人目を忍んで関係していた中将の君に浮舟が生ま
れたのを厭わしく思い、中将の君と浮舟を見捨てた。そのために中将の君は、浮舟をつれ
て常陸介の後妻となり、地方に下った。その後も、八宮に浮舟を認知してくれるよう頼む
が、宮は一切認めない。そうして実父に見捨てられた浮舟は、養父の常陸介のもとで肩身
の狭い生活を余儀なくされたのである。後見者や財産もない浮舟の境遇では、まともな結婚
相手もない。母が浮舟の結婚相手にと期待していた左近少将も、浮舟が介の実の子でな
いことを知ると未練もなく去っていき、介の実の娘である浮舟の妹と結婚してしまったのであ
る。これが今の浮舟の置かれた現実であった。それゆえに、中将の君は娘の薫との結婚を
望みながらも、一方では心配の念をぬぐい取れないのである。
勿論、中将の君の内心では、薫が全く娘と掛け離れた身分の結婚相手とは思っていな
い。八宮には娘として認められていないが、中将の君にとって娘浮舟はあくまでも宮家の血
筋をもって生まれた高貴な身の上なのである。しかも薫が浮舟を願うのは、浮舟を八宮の長
女大君の形見と思っていたからであり、少なくともそれは娘を宮家の血を受け継ぐ存在として
認めている証でもある。ただ、女の運命という面から考えると、女性にとって結婚というもの
は、必ずしも幸せになる道とはいえない。身分の高低に関わらず、女というものは男との関係
でこの世だけではなく、あの世においてまで、苦しい境涯を生きる身にもなるからである。し
かし、だからといって、今の娘に薫との結婚以外に安定した生活をする方法があるわけでも
ない。この中将の君の「女」に関する考えも、娘の結婚問題を契機にして導き出され、そ
の背景には中将の君の「女」としての不幸なわが半生を顧みたことで認識されたものとして
読み取れる。
このように母親たちは、娘の安定した生活を望んではいるが、結婚がすべてを解決するも
のではないことも、結婚によってさらなる苦しみが生まれることも分かっている。にもかかわら
ず、女性一人では自分の身が保てない。そうした「女」としてこの世を生き抜くことの難しさ
平安時代の女性たちの自己主張 ─『源氏物語』の「女」という語を中心に─ ······ 金 玉 京…71
をわが身をもって実感し、「女」という語はその母たちの体験を背景にしているのである。
紫上もこれらの女性とほぼ同じく母親に近い立場で、「女」という語を用いているが、紫上
の場合は、会話文ではなく心情語として表れ、その内容またより深く掘り下げられたものになって
いる。それでは、紫上は「女」としての自身の境涯をどのように見ていたのか。
五 紫上の自己主張としての「女」
紫上は、この世で自己をありつかせるものは、源氏以外に誰も存在しない孤独な身の上
である。これまでの紫上の社会的な地位も経済的な安定も、すべて源氏との関わりによって
生まれ維持された。紫上自身女三宮の降嫁をきっかけに、そのことを骨身にしみてわかっ
た。源氏だけを心の支えにして生きてきた晩年の紫上が、「女」というものについてその心
中を次のように述べている。
女ばかり、身をもてなすさまもところせう、あはれなるべきものはなし、もののあはれ、をりをか
しきことをも見知らぬさまにひき入り沈みなどすれば 、 何につけてか 、 世に経るはえばえしさ
も、常なき世のつれづれをも慰むべきぞは、おほかたものの心を知らず、言ふかひなき者に
ならひたらむも、生ほしたてけむ親も、いと口惜しかるべきものにはあらずや、心にのみ籠め
て、無言太子とか、小法師ばらの悲しきことにする昔のたとひのやうに、あしき事よき事を思
ひ知りながら埋もれなむも言ふかひなし。わが心ながらも、よきほどにはいかでたもつべきぞ、
と思しめぐらすも、今はただ女一宮の御ためなり。 (夕霧 456~457) 紫上の「女」としての心境は、夕霧と落葉宮の結婚話をきっかけにして述べられ、その
内容はおよそ次のようである。女だけが自由に動けないし、思うとおりに表現することもできな
い。この世を生きていく中で経験することや感じること、それによって感動する心を表にあらわ
すことができなかったら、生きることに何の面白みがあろうか。自分でもこの世を生きること、
とりわけ女として自己を保持していく、その程度のよさがわからないのに、若い女一宮はこれ
からいかに生きていくべきか。つまり、ここで紫上は、女としてこの世で自主的に生きることへ
の厳しさを吐露し、身の処し方の困難さを嘆いている。清水氏の言葉を借りると、これは
「時代と社会の中で本然の姿をゆがめて生きることを余儀なくされている女の姿を見抜い
た」紫上の心境を表したものであり、そこには「自我に目覚めてゆく近代人の心に通うも
の」がある14)。
実はこの紫上の「女」としての嘆きは、すでに「雨夜の品定め」で語られていた「すべ
て、心に知れらむことをも知らず顔にもてなし、言はまほしからむことをも、一つ二つのふしは
14) 前揭書 注3)と同じ。(増補版『源氏の女君』塙新書 1967 p.99)
72 日本文化學報……第 42輯
過ぐすべくなむあべかりける(帚木
90)」という「女」への社会の希求を、まるで抗議し
ているかのように記るされている。物語では、これまでにも女性としてしかるべき身の振り方を
繰り返し強調してきた。例えば、源氏は養女の玉鬘に求愛してくる男たちの懸想文をめぐっ
て、乳母の右近に次のようなことを言っている。
すべて女のものづつみせず、心のままに、もののあはれも知り顔つくり、をかしきことをも見知
らんなん、その積もりあぢきなかるべきを、宮、大将は、おほなおほななほざりごとをうち出で
たまふべきにもあらず、またあまりもののほど知らぬやうならんも、御ありさまに違へり。
(胡蝶 178)
だいたい女は、遠慮深くなく思う存分に物事にふれて起こる感情をあらわにし、よく心得て
いるような顔つきをしたり、あるいは風情なことに見分けがつかないなどして、それが積もれば
おもしろくない。このように女性は、自分の感情を表すことにも制約が多く、絶えずその身の
振り方が注意されている。他にも内大臣などは娘の雲居雁を相手にして、女性の身の処し
方について訓戒している15)。
この物語では理想的な結婚相手の女性を探し求めるのは、ほぼ不可能であるとしながら
も、女性たちには理想的なあり方であることを求め続けている。それが女性たちにとって、ど
れほど身動きできない気詰まりな状態を作っていたのかは、紫上の心中の言葉からも推察で
きる。なお、登場以来、理想的な女性として描き続けられてきた紫上が、窮屈な女の身の
上を嘆く点は、多いに示唆するところがある。特に女三宮の降嫁後の紫上は、常に源氏
や明石君、そして夕霧などによって、その優れたあり方が強調されてきた16)。中でも、その
理想像は源氏によって繰り返し語られていた。紫上の発病前夜も、源氏は紫上の心の遣
い方を持ち上げて、「人により事にしたがひ、いとよく二筋に心づかひはしたまひけれ。さら
に、ここら見れど、御ありさまに似たる人はなかりけり。(若菜下
211)」と、その優れた
あり方を誉めていた。実は、紫上に対するこうした源氏の評価とは裏腹に、紫上の苦悩は
深まっていくばかりで、その心労の重なりが一つの原因となって紫上は病に臥してしまうのであ
る。この源氏の発言のすぐ後、紫上が発病したということは、紫上にとって「人により事にし
たがひ、いとよく二筋に心づかひ」をすることが、どれだけ苦しみを伴うものであったのかを裏
15)「女は、身を常に心づかひして守りたらむなんよかるべき。心やすくうち棄てざまにもてなしたる品なきことなり。さりと
て、いとさかしく身固めて、不動の陀羅尼誦みて、印つくりてゐたらむも憎し。現の人にもあまりけ遠く、もの隔てが
ましきなど、気高きやうとても、人憎く心うつくしくはあらぬわざなり。(常夏 239)」
16)「のたまはせねど、いとありがたき御気色を見たてまつるままに、明け暮れの言ぐさに聞こえはべる。めざましきものに
など思しゆるさざらむに、かうまで御覧じ知るべきにもあらぬを、かたはらいたきまで数まへのたまはすれば、かへりて
はまばゆくさへなむ(若菜上 131)」「かやうのことを、大将の君も、げにこそありがたき世なりけれ、紫の御用
意、気色のここらの年経ぬれど、ともかくも漏り出で、見え聞こえたるところなく、しづやかなるを本として、さすがに
心うつくしう、人をも消たず身をもやむごとなく、心にくくもてなしそへたまへることと、見し面影も忘れがたくのみなむ思
ひ出でられける。(若菜上 134)」
平安時代の女性たちの自己主張 ─『源氏物語』の「女」という語を中心に─ ······ 金 玉 京…73
付けている。紫上における理想的な評価は、紫上の誰にもいえない深い苦しみの上に成り
立ったものである。
このように紫上の「女」に関する思考は、いうまでもなく紫上自身のそれまでの生活の中
から痛切に確信となってきたことによるものである、と同時に、作者自身の女として生きること
の難しさへの深い認識をも代弁しているといえよう。
今一つ、ここで見過ごしてはいけないのは、こうした紫上の女としての嘆きが、「今はた
だ女一宮の御ためなり」という言葉で締めくくられている点である。紫上は落葉宮の夕霧と
の再婚話を発端として、女としてこの世を生きることの困難さを吐露しているが、それは紫上
のわが半生を振り返ったことによる女の生き方への自覚としてあるばかりではなく、これからそ
うした時代と社会を生きていかねばならない女一宮の将来を心配する思いからなるものであ
る。当時を生きる女性の姿を鋭く見抜いた紫上の洞察力も、母親の立場になってはじめて
発揮されることになるわけである。しかもそれを口に出すことなく、心中思惟としてしか表出で
きなかった点には、女性の自己の生活に対する主張も、いまだ芽生えの状態にあるといわざ
るをえない。そして、このような紫上の「女」としての心境は、第三部以降になると、大君
の自分の判断によって自らの生き方を選んでいく主体的な姿として発展深化していくことにな
るのである17)。 六 おわりに
以上のように、『源氏物語』に用いられている「女」という語をキーワードにして、物語
における女性への考え方を考察した。この物語では冒頭の部分に女性論の総論と言われる
「雨夜の品定め」を設定しておき、男性による女性への見解を多様に打ち出している。そ
れはよき妻の条件や妻のとるべき態度に焦点を当て、男の男による男のための理想的な結
婚相手への希求として表れている。そのために、女性自身の立場や悩みなどは顧みられて
いない観念的なものになっていた。
一方、女性の場合、結婚は自己の生活と密接に関わっていたために、より内面的で切
実な問題にならざるをえなかった。ただそれも、男の口を通されると、結婚による女性の生活
の安定に重点が置かれることになり、とりわけその傾向は有力な後見者のいない皇族女性
の場合に目立って表れていた。つまり、男性の立場で用いられる「女」は、親兄弟、ある
いは夫の世話にかかる依存的な存在としての女性のあり方を強調し、女性の結婚による安
定した生活の確保という面を重視している。
17)拙稿「大君の結婚問題に関する一考察─「隔てなき心」を中心に─」(『日本文化学報』第39輯 2008.11
p.57~67)
74 日本文化學報……第 42輯
それに比べて女性による「女」という語は、そうした社会を生きる女性たちが自身の
「女」としての境涯を、どのように見ていたのかを示すものとなっている。女性の立場で用い
られる「女」は、すべて娘の結婚に関する母親の立場と悩みとして表れている。女性の場
合は、母親となる女性の体験による自己認識が含まれていただけに、女性にとっての結婚
は生活の安定ばかりではなく、女性の生き方の一つの問題として見つめようとする態度が見
られる。中でも、紫上の「女」としての嘆きは、社会的には低い位置を占めていながら
も、理想的なあり方であることが求められている、息苦しい時代を生きていく女性たちの苦痛
を訴えっているのである。なおそこには女性の主体的な生き方への希求という自己主張が芽
生えている。
【参考文献】
新編古典文学全集(『栄華物語』小学館 1998)
源氏物語古注釈大成6(『河海抄』日本図書センター)
源氏物語古注集成7(『細流抄』おうふう)
和辻哲郎(『日本精神史研究』岩波書店 1927 p.130~143)
清水好子(増補版『源氏の女君』塙新書 1967 p.5~106)
竹村義一(『源氏物語の女性像』有精堂 1970 p.164~186)
石田譲二(『源氏物語論集』桜楓社 1971 p.154~176)
増田繁夫(『源氏物語と貴族社会』吉川弘文館 2002 p.66~108)
平安時代の女性たちの自己主張 ─『源氏物語』の「女」という語を中心に─ ······ 金 玉 京…75
要 旨
本稿は『源氏物語』における「女」という語を一つの手がかりにして、女性への考え方につ
いて検討を施したものである。『源氏物語』はそれ以前の文芸作品には例を見ないほど、女
性に関する見解を多く残している。中でも、光源氏が本格的に物語の主人公として活躍する帚
木巻では、女性に関する考え方が集約されている。それは結果的に理想に叶えられる女性は
実在しないということで終わってしまうが、話が男性の観点に立って進められたために、女性自
身の立場や悩みなどは顧みられていない観念的なものになっている。
それに比べて女性の場合は、結婚は自己の生活問題と密接に関わっていたので、より内面
的で切実な問題になっている。ただそれも男の口を通されると、後見者による女性の生活の安
定に重点が置かれることになる 。 とりわけそれは皇族女性の場合に目立って表れていたことを
「女」という語から確認することができた。
ところで、女性による「女」というすべての例が、母親の立場で娘を思う心から発せられ、
結婚問題にかかわっている点は注目される。勿論それは母親に限らず、父親にとっても同様で
ある。ただ、女性の立場で述べられる「女」に対する考えは、母親となる女性の体験や思考
に基づかれたもので、娘の結婚による生活の安定ばかりではなく、女性の生き方の問題にも繋
がっている。とりわけ、紫上の「女」としての嘆きには、社会のあらゆる面において弱者の立場
で不利な条件を生きながらも、より人間的な存在として自己の意味を探ろうとする女性の深い悩
みを思わせるものがある。
キーワード: 「女」、後見者、母親、結婚、生き方、自己主張
투
고 : 2009. 5. 31
1차 심사 : 2009. 6. 13
2차 심사 : 2009. 6. 27
『紫式部日記』における対『枕草子』意識
──藤原斉信関連記事をめぐって──
金 孝 淑*
1)
(e-mail : [email protected])
目 次
一 はじめに
二 消息文的部分の中の清少納言批判──文の流れと藤原斉信──
三 『枕草子』の中の藤原斉信
四 『紫式部日記』の中の藤原斉信
五 むすびにかえて──日記文学というもの──
一 はじめに
平安時代のかな散文文学の双璧と評される紫式部と清少納言は、"ライバル"と位置
づけられ、その作品の特質から個人の性質にまで及んで多面的に比較検討されてきた。そ
れは、その二人がそれぞれ彰子と定子の後宮に仕えた女房であるという歴史的事実や、ま
た『源氏物語』や『枕草子』という作品の相違点に因るものであろうが、さらに『紫式部
日記』に見える清少納言批判文の存在に起因するといっても過言ではあるまい1)。
*培材大学校 非常勤講師 日本古典文学専攻
1) 『紫式部日記』の対『枕草子』意識に関しては、例えば、妹尾好信氏は、両作品の最大の類似点を「両作
品ともそれぞれの属する後宮サロンの素晴らしさを筆に尽くして書こうとしているところだ」と指摘し、さらに「道長
は、父道隆を失い、みじめな境遇で皇子を出産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定子のことを思いながら、我が子彰子の
出産を一大イベントとして後世に伝えるべく、紫式部日記を記録させたのであろう。それは『枕草子』が書き得な
かった中宮サロンの盛儀であった。そして、紫式部は、中宮の出産前後のルポに留まらず、彰子後宮のありさまを
あれこれ随筆風に綴ったのであるが、おそらくこれも、『枕草子』を読んでおり、これを強く意識して日記を綴った
ものと思われる。『紫式部日記』が書かれた寛弘年間にはすでに定子はこの世になく、清少納言も宮廷から退い
ていたはずであるが、世に歩き始めた『枕草子』は、定子の崩御後も宮廷に多くの読者を得ており、憧憬とともに
愛読されていたものと考えられる。紫式部は、今は亡きライバル定子のサロンのことを強く意識しつつ、『紫式部日
78 日本文化學報……第 42輯
従来、この有名な『紫式部日記』における清少納言批判文に対しては、様々な側面か
ら論じられてきた。とくにもっとも問題となっているのは、この日記が書かれたと推定される寛弘
年間には定子はすでに亡くなっており、従って清少納言も宮廷を去っていると推定される
が、そうすると、「清少納言こそ、したり顔にいみじうはべりける人」(202頁)2)と始まり、
その末尾には「そのあだになりぬる人のはて、いかでかはよくはべらむ」と、その零落までも
予言するような厳しさが、面識のない過去の人間に対して果たして可能なのかということで
あった。この問題に関連して、山本淳子氏は、「定子は生前から周辺貴族層に明るく美
しいイメージを与えており、死亡後はそれを保ったまま同情の念で迎えられた。そこに『枕草
子』日記的章段が執筆
流布され、定子の理想的后妃としての幻想化をさらに促した。
それは彰子および彰子付き女房群にとっては、後宮およびその周辺貴族の人心をいつまでも
定子時代につなぎ止め、彰子の中心化を阻む障害であった。彰子女房紫式部は、この
障害を除去すべく、清少納言、ひいては『枕草子』を否定、それによって世の定子時代
懐古の阻止を図った」3)と述べられている。氏は、紫式部の清少納言に対する私的な感
情に加え、彰子の後宮女房であるという公的な立場が、あの手厳しい批評を書かせたと解
されているのである。また、上村悦子氏は、定子所生の敦康親王が定子崩御後、彰子
の許で養育されたことから、清少納言も敦康親王付きの女房として宮中に留まっていた可能
性を提示されている4)。さらには、近年、『紫式部日記』に見える女房の名前が、主
上
中宮
道長家のどちらに所属しているのか明確に区別できるように書かれているとし、
清少納言の名が彰子後宮に仕えていた和泉式部
赤染衛門とともに配列されていることか
ら、清少納言も紫式部とともに彰子付きの女房として奉仕していた可能性を示唆する論考も
ある5)。これらは、清少納言批判文を、紫式部の個人的な感情だけではなく、後宮女房
という歴史的な事実から読み解こうとしたものだが、『紫式部日記』が紫式部という個人の
日記ではなく、敦成親王の誕生から筆を起し、その賛美に多くの部分が費やされていると
いうことを考え合わせると、示唆するところが大きい。
ところで、このような視座に立って、清少納言批判文に至るまでの一連の記事を読み進
めていくと、そこには後宮サロンの雰囲気を評価する人物として藤原斉信が登場していること
記』を書かざるを得なかったわけなのである」と論じられている。「後宮プロパガンダとしての『紫式部日記』─
─その対『枕草子』意識──」(「国語の研究」第十八号、1993年、大分大学国語国文会、pp.2~5)
2)
『紫式部日記』の本文の引用は、小学館「新編日本古典文学全集」による。ただし、私に表記を改めたとこ
ろがある。なお末尾に「新編日本古典文学全集」の頁数を付した。
3)
山本淳子「『紫式部日記』清少納言批評の背景」(「古代文化」第53巻 第9号、2001年、古代学協
会、p.31)
4) 上村悦子「清少納言と紫式部」(『王朝女流作家の研究』1975年、笠間書院、p.232)
5)
大橋清秀「紫式部日記にみえる清少納言について」(「帝塚山学院大学研究論集」第25集、1990年、帝
塚山学院大学、pp.1~16)
『紫式部日記』における対『枕草子』意識 ·································································· 金 孝 淑…79
に気づかされる。すると、ここには何か特別な意味が持たされているのではないだろうか。と
いうのは、藤原斉信は『枕草子』において、たくさんの貴公子の中でももっともその登場回
数が多く、清少納言との親密な関係が色濃く描かれている人物だからである。諸家によっ
てすでに論じられているように、『紫式部日記』には対『枕草子』意識が強く表われてお
り、紫式部が『枕草子』を読んでいるとするのであれば6)、清少納言の批判に至るまでの
一連の記事の中で、『枕草子』の中でもっとも美しく華麗な姿で定子サロンを輝かせてい
た藤原斉信が登場しているということは、看過できない重要な問題であろう。本稿では、
『枕草子』に描かれている藤原斉信を横目に睨みつつ、消息的部分の中で斉信が登場
している意味、さらには『紫式部日記』の斉信の描かれ方を検討していきたいと思う。
二 消息的部分の中の清少納言批判
──文の流れと藤原斉信──
本節ではまず『紫式部日記』において、清少納言のことがどのような文脈の中で、また
どのような形で記されているのかを確認したいと思う。『紫式部日記』もいよいよ後半部にな
ると、若宮の戴餅の儀の様子が述べられ、それに勤めた女房達のことが語られる。そして
その女房達の様子を記しているうちに、筆はいつしか他の女房達に対する批評へと移ってい
く。そして、中宮彰子付きの女房に対する批評が済むと、次に引用しているように、斎院に
勤める「中将の君」という女房に対して記していく。やや長くなるが消息的部分全体の流
れをみるべく、以下に「中将の君」の記事から清少納言批評に至るまでの文を続けて掲
げる。
①⒜斎院に、中将の君といふ人はべるなりと聞きはべる、たよりありて、人のもとに書きかは
したる文を、みそかに人のとりて見せはべりし。いとこそ艶に、われのみ世にはもののゆゑ
知り、心深き、たぐひはあらじ、すべて世の人は、心も肝もなきやうに思ひてはべるべか
める、見はべりしに、すずろに心やましう、おほやけばらとか、よからぬ人のいふやうに、
にくくこそ思うたまへられしか。……
6)
前掲の妹背好信氏や山本淳子氏の他にも、例えば、中野幸一氏は「道長は兄道隆の盛時に中宮大夫として
定子中宮に奉仕し、中関白家の隆盛を目の当たりに見聞きして、中宮サロンの華やかで明るい雰囲気を実感して
いる。……自らが中関白家に取ってかわった現在においても、かつての中関白家や定子中宮の盛時を明るく賛美
した『枕草子』が後宮女性の間にもてはやされていたとしたら、道長ならずともこれへの対抗を意識せざるを得ない
であろう。この対抗心は執筆を依頼された式部にとってはなおさらのことで、日記中に思わず清少納言に対する辛
辣な批評を加えていることは周知のことであるが、他の叙述の端々にも『枕草子』を意識したと思われる表現が認
められる」(『紫式部日記』「新編日本古典文学全集」解説、1994年、pp.243~244)と述べられるなど、
『紫式部日記』における対『枕草子』意識はほぼ定説とみてよい。
80 日本文化學報……第 42輯
げにことわりなれど、わがかたざまのことをさしもいはば、斎院より出できたる歌の、すぐ
れてよしと見ゆるもことにはべらず。ただいとをかしう、よしよししうはおはすべかめる所のやう
なり。……
されど、内裏わたりにて明け暮れ見ならし、きしろひたまふ女御、后おはせず、その御
かた、かの細殿と、いひならぶる御あたりもなく、をとこもをんなも、いどましきこともなきにう
ちとけ、宮のやうとして色めかしきをば、いとあはあはしとおぼしめいたれば、すこしよろし
からむと思ふ人は、おぼろけにて出でゐはべらず。心やすく、もの恥ぢせず、とあらむか
からむの名をも惜しまぬ人、はたことなる心ばせのぶるもなくやは。⒝たださやうの人のや
すきままに、たちよりてうち語らへば、中宮の人埋もれたり、もしは用意なしなどもいひはべ
るなるべし。上 中 のほどぞ、あまりひき入りざうずめきてのみはべるめる。さのみして、
宮の御ため、もののかざりにはあらず、見ぐるしとも見はべり。……
⒞まづは、宮の大夫まゐりたまひて、啓せさせたまふべきことありけるをりに、いとあえか
に児めいたまふ上
たちは、対面したまふこと難し。また、あひても何ごとをか、はかばか
しくのたまふべくも見えず。言葉の足るまじきにもあらず、心の及ぶまじきにもはべらねど、
つつまし、恥づかしと思ふに、ひがごともせらるるを、あいなし、すべて聞かれじと、ほの
かなるけはひをも見えじ。ほかの人は、さぞはべらざなる。かかるまじらひなりぬれば、こよ
なきあて人も、みな世にしたがふなるを、ただ姫君ながらのもてなしにぞ、みなものしたま
ふ。下
のいであふをば、大納言こころよからずと思ひたまふたなれば、さるべき人々、
里にまかで、局なるも、わりなき暇にさはるをりをりは、対面する人なくて、まかでたまふとき
もはべるなり。そのほかの上達部、宮の御かたにまゐり馴れ、ものをも啓せさせたまふは、
おのおの、心よせの人、おのづからとりどりにほの知りつつ、その人ないをりは、すさまじ
げに思ひて、たち出づる人々の、ことにふれつつ、この宮わたりのこと、「埋もれたり」
などいふべかめるも、ことわりにはべり。
⒟斎院わたりの人も、これをおとしめ思ふなるべし。……
⒠和泉式部といふ人こそ、おもしろう書きかはしける。……
⒡丹波の守の北の方をば、宮、殿などのわたりには、匡衡衛門とぞいひたる。……
⒢清少納言こそ、したり顔にいみじうはべりける人。さばかりさかしだち、真名書きちら
してはべるほども、よく見れば、まだいと足らぬこと多かり。かく、人に異ならむと思ひこの
める人は、かならず見劣りし、行末うたてのみはべれば、艶になりぬる人は、いとすごう
すずろなるをりも、もののあはれにすすみ、をかしきことも見すぐさぬほどに、おのづからさる
まじくあだなるさまにもなるにはべるべし。そのあだになりぬる人のはて、いかでかはよくはべ
らむ。
(193~202頁)
上記引用は、まず斎院に勤める「中将の君」が書いた「文」に対する論評から始まり、
筆は自然とその「中将の君」が仕えている斎院方の様子へと移っている。そしてそこから紫
式部自身が所属している彰子方の自己批判へと転じていく。とくに⒝の下線部では「ただ
『紫式部日記』における対『枕草子』意識 ·································································· 金 孝 淑…81
さやうの人のやすきままに、たちよりてうち語らへば、中宮の人埋もれたり、もしは用意なし、
なども言ひはべるなるべし」とし、彰子の後宮が世間から引っ込み思案であると批判されて
いることに触れられている。そして、そうした世間の認識を具体的に語る人物として、藤原斉
信のことが引き合いに出されるのである。⒞の下線部は、「宮の大夫」つまり当時中宮大
夫であった斉信に関連する記事だが、「まづは、宮の大夫まゐりたまひて、啓させたまふべ
き事ありける折に、いとあえかに児めいたまふ上 たちは対面したまふこと難し」云々とあり、
斉信が訪ねてくるも女房達がまともに対応できないため、彼は快く思っていないとしているので
ある。また、「下 のいであふをば、大納言こころよからずと思ひたまふたなれば」の「大
納言」も斉信のことだが、然るべき女房がいないときは、応対に出る人がいないため、その
まま帰ってしまうこともあるという。ここでは、まず斎院方に比べ、彰子方は物事に消極的で
あること、そしてその雰囲気を具体的に評価する人物として斉信のことが挙げられていること
に注目したいと思う。
これに引き続き『紫式部日記』は、⒠「和泉式部といふ人こそ」、⒡「丹波の守の
北の方をば」とあるように、和泉式部や赤染衛門について述べ、そして⒢「清少納言こそ
したり顔にいみじうはべりける人」云々と、清少納言に対して極めて辛辣な批判を展開して
いく。この清少納言に対する批評は実に厳しいもので、『紫式部日記』全体の筆致とは
異質なもののようにすら見えるのだが、先述したように『紫式部日記』における対『枕草
子』意識を勘案すると、この文はただ単に清少納言という一女房に対する批評に終わるも
のではなく、『紫式部日記』という作品全体の観点から考える必要があろう。とくに、本節
で検討している消息的部分は、それぞれ別の事件を書き記しているものではなく、一人の女
房の批評から、その女房が属しているサロンに対する評価、そして式部自身が身を置いて
いるサロンの自己反省、さらにまた別の女房批評、といったように、次から次へと有機的か
つ連続的に移動していることから、一続きのものとして理解すべきであろう。こうした消息的
部分のありように対して、豊田芳子氏は「日記は敦成親王誕生の記に続いて消息文体へ
と移っていくのであるが、ここから紫式部はいよいよ清少納言と正面から向き合う姿勢になっ
ている。まず序奏として彰子サロンに身を置く女房達の批評から始め、次に斎院の中将の
書簡を登場させて、その反論を長々と繰り広げて行く」7)と述べられ、『紫式部日記』が
『枕草子』に対抗意識を持って書かれ、そして『紫式部日記』全体が連動していると述
べられている。
このように、『紫式部日記』全体に『枕草子』に対する対抗意識が顕著であったこ
と、とくに消息文体の部分が最後の清少納言批評に向って連続的に書き進められているこ
とを考え合わせると、その後宮文化を批評する人物として藤原斉信が登場しているということ
に関しても、その意味や必然性をさらに検討する必要があろう。言い換えれば、消息文の
7)
豊田芳子「紫式部日記小考──「清少納言批判文」の存在をめぐって──」(『王朝日記の新研究』笠
間書院、1995年、p.572)
82 日本文化學報……第 42輯
記事が清少納言批判を射程に入れて書き進められたとするならば、『枕草子』において
定子後宮の華やかさを支え輝かせる人物として大いに活躍した斉信が、当該場面で他でも
なく後宮サロンの批評者として現れていることは、極めて重大な問題であるからである。その
登場の意味を探るべく、次節ではまず『枕草子』における斉信の描かれ方を確認していき
たいと思う。
三 『枕草子』の中の藤原斉信
藤原斉信(九六七~一〇三五)は、太政大臣藤原為光の二男で、俊賢、公任、
行成とともに一条朝の四納言と称されるなど才学に秀で、多くの漢詩文を残している人物で
ある。また、政治家としての彼は、中関白家の道隆や、そして道長にも重用されるが、とく
に道長の時代になると、彰子の立后にあたって中宮大夫として任ぜられる8)。
『枕草子』での斉信は、主に頭中将時代の逸話を中心に描かれているが、主君筋の
一条天皇、中宮定子、伊周などを除けば、登場回数がもっとも多く、三巻本の「新編日
本古典文学全集」で数えると、八章段に及んで登場している。その描かれ方は概ね清少
納言の賛美の対象であったと言ってよいだろう。それではまず「心にくきもの」段(一九
〇)を見てみよう。
② 薫物の香、いと心にくし。
五月の長雨のころ、上の御局の小戸の簾に斉信の中将の寄りゐたまへりし香は、まこ
とにをかしうもありしかな。その物の香ともおぼえず。おほかた雨にもしめりて、艶なるけしき
のめづらしげなき事なれど、いかでか言はではあらむ。またの日まで御簾にしみかへりたり
8)
藤原斉信の人物像に対して、福井迪子氏は、『小右記』の記録を分析した上で、「ひたすらに執着心強く栄
誉欲あり、多才で芸術家肌な感があるものの用意周到、着実、実務にも堪能な面が評価されるが、老年期に
及んでは、無頓着さ 非礼が目立ち総じて我の強い複雑な人となりが比較的率直にあばき出された」と論じられ
ている(「藤原斉信の人間像──『小右記』を中心に──」(「九州大学国語国文学会」66号、p.3
1))。また、村井順氏は、『小右記』『大鏡』などの記事から「我執が強かったばかりでなく、栄達主義者
だったということにまちがいない。自己の立身出世のためには、同母兄であろうが先輩であろうが、蹴落としてもか
まわないという、我利我利の栄達妄執者だったと想像される」(「清少納言と藤原斉信(一)」(「愛知淑徳
短期大学国文学会」1972年7月、p.7))と述べられている。両論とも藤原斉信を史実から分析したものだが、
彼を極めて政治的な人物として捉えているように思われる。管見の限り、斉信の記録が見える漢文史料の中で、
紫式部あるいは清少納言との関係を窺わせるようなものは見当たらず、三者の関係(あるいは紫式部の対清少納
言意識)を理解するのに、『紫式部日記』『枕草子』以外の資料を想定するのは今のところ難しい。だが、
『紫式部日記』や『枕草子』は女房の私的な記録ではなく、それぞれの書物をバックアップしてくれる後宮サロ
ンの権威を標榜したものであり、そして、両氏の論じられるように、斉信が極めて政治的な人物であれば、『紫式
部日記』や『枕草子』という後宮の記録に書かれる意味、つまり後宮に仕える女房である紫式部や清少納言
が、彼との遣り取りを書き残す意味を、積極的に読み取るべきではないかと思う。
『紫式部日記』における対『枕草子』意識 ·································································· 金 孝 淑…83
しを、若き人などの世に知らず思へる、ことわりなりや。
(332頁)9)
この段には、「薫物の香、いとにくし」の連想によって、「五月の雨のころ」、「上の御
局の小戸の簾」に寄りかかって座っている斉信から漂う香が「まことにをかし」と称賛されて
いる。さらに翌日まで残っている余香は「若き人などの世に知らず思へる、ことわりなりや」
と記される。「香の奥ゆかしさを語る時、その美の典型として清少納言の心に浮かんだの
は、上の御局におけるある日の斉信の姿と、その漂わせる薫香の美」10)であったと評され
るように、この記述から清少納言にとって斉信がいかに美しき貴公子に思われていたかが垣
間見られよう。
また、次の③の引用本文には、一条帝の岩清水八幡宮行幸の折、名誉の「宣旨の
御使」として供奉する斉信の姿に賛辞が送られている。
③八幡の行幸の、かへらせたまふに、女院の御桟敷のあなたに御輿とどめて、御消息申
させたまふ 。 世に知らずいみじきに 、 まことにこぼるばかり 、 化粧じたる顔みなあらはれ
て、いかに見苦しからむ。宣旨の御使にて、斉信の宰相中将の、御桟敷へまゐりたま
ひしこそ、いとをかしう見えしか。ただ随身四人、いみじう装束きたる、馬副の、ほそく白
くしたてたるばかりして、二条の大路の広く清げなるに、めでたき馬をうちはやめていそぎま
ゐりて、すこし遠くより下りて、そばの御簾の前に候ひたまひしなどいとをかし。御返しうけた
まはりて、また帰りまゐりて、御輿のもとにて奏したまふほどなど、言ふもおろかなり。
(233~234頁)
清少納言は、「宣旨の御使」を勤める斉信が女院の御桟敷に参上する姿を「いとをか
し」と述べ、また立派な装束をつけた随身四人と白く化粧した馬副いを引き連れ少し遠くか
ら馬をおりて、御簾の前に伺候する様子を「いとをかし」と語っている。さらには女院の御返
事を承ってから、主上のもとに帰参してそれを奏上する折の様子を「言ふもおろかなり」とす
るなど、斉信の容姿や態度について、最上の賛辞を惜しまないのであった。こうした清少納
言の斉信への傾倒ぶりは、次に引用した「返る年の二月二十余日」段(七九)にさらに
克明に表われている。
④局は引きもやあけたまはむと、心ときめき、わづらはしければ、梅壺の東面、半蔀上げ
て、「ここに」と言へば、めでたくてぞ歩み出でたまへる。
9) 『枕草子』の本文の引用は、三巻本系統第一類本の陽明文庫蔵本を底本とする「新編日本古典文学全集」
による。ただし、私に表記や句読点など改めたところがある。なお、末尾に「新編日本古典文学全集」の頁数
を付した。
10) 『枕草子大事典』(「藤原斉信」項目、岡田潔執筆)勉誠出版、2001年、p.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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桜の綾の直衣の、いみじうはなばなと、裏の艶など、えも言はずきよらなるに、葡萄染
のいと濃き指貫、藤の折枝おどろおどろしく織り乱りて、紅の色、打目など輝くばかりぞ
見ゆる。白き薄色など下にあまた重なりたり。せばき縁に、片つ方は下ながら、すこし簾
のもと近う寄りゐたまへるぞ、まことに絵に描き、物語のめでたき事に言ひたる、これにこそ
はとぞ見えたる。……
暮れぬれば 、まゐりぬ 。……「この事どもよりは、 昼斉信がまゐりたりつるを見ましか
ば、いかにめでまどはましとこそおぼえつれ」と仰せらるるに、「さて、まことに常よりもあら
まほしうこそ」など言ふ。「まづその事をこそは啓せむと思ひてまゐりつるに、物語のことに
まぎれて」とて、ありつる事ども聞こえさすれば、「誰も見つれど、いとかう縫ひたる糸、
針目までやは見とほしつる」とて笑ふ。
(141~145頁)
清少納言の許を訪れた斉信の装束に関連して、桜の綾の直衣は「いみじうはなばな」
で、その裏の艶は「えも言はずきよらなり」と称賛され、さらに指貫は「目など輝くばかり」と
誉め称えられている。そしてそのように素晴らしい服装をした斉信が御簾のもとに近く寄って
座っている姿は「まことに絵に描き、物語のめでたき事に言ひたる、これにこそはとぞ見えた
る」と形容されている。あまりにも素晴らしい彼の姿は、一幅の絵に譬えられ、物語の中で
しか出会えないような貴公子に比喩されているのである。そして、こうした斉信の姿を中宮定
子に報告すると、そこに居合わせた女房達は「誰も見つれど、いとかう縫ひたる糸、針目ま
でやは見とほしつる」と笑ったという。誰もが斉信の姿を見ていたけれども、縫ってある糸や
針目までは見通せなかったと、清少納言の斉信に対する並大底ならぬ思い入れに感心した
というのである。この記事から、清少納言の斉信への憧憬や傾斜ぶりが窺われ、さらにそ
れがすでに中宮定子や女房達の間で周知の事柄として認められていたということが分か
る。そして、清少納言の賛美の対象になったのは、こうした斉信の容姿だけではなく、例え
ば次に掲げる「御殿の御ために、月ごとの十日」段(一二九)には、彼が吟誦した漢
詩が礼讃されている。
⑤故殿の御ために、月ごとの十日、経仏など供養せさせたまひしを、九月十日、識の御
曹司にてせさせたまふ。上達部、殿上人、いとおほかり。清範講師にて、説く事、は
たいと悲しければ、ことに物のあはれ深かるまじき、若き人々、みな泣くめり。
果てて、酒飲み、詩誦じなどするに、頭中将斉信の君の、「月秋と期して身いづく
か」といふ事をうち出だしたまへりし、はたいみじうめでたし。いかでさは思ひ出でたまひけ
む。おはします所に分けまゐるほどに、立ち出でさせたまひて、「めでたしな、いみじう今
日の料に言ひたりけることにこそあれ」とのたまはすれば、「それ啓しにとて、物見さしてま
ゐりはべりつるなり。なほいとめでたくこそおぼえはべりつれ」と啓すれば、「まいてさおぼ
ゆらむかし」と仰せらる。
『紫式部日記』における対『枕草子』意識 ·································································· 金 孝 淑…85
わざと呼びも出で、会ふ所ごとにては、「などかまろをまことに近く語らひたまはぬ。さす
がにくしと思ひたるにはあらずと知りたるを、いとあやしくなむおぼゆる。かばかり年ごろにな
りぬる得意の、うとくてやむはなし。殿上などに、明け暮れなきをりもあらば、何事をか思
ひ出でにせむ」とのたまへば、「さらなり。かたかるべき事にもあらぬを、さもあらむ後に
は、え誉めたてまつらざらむが、くちをしきなり。上の御前などにても、役と預かりて誉めき
こゆるに、いかでか。ただおぼせかし。かたはらいたく、心の鬼出で来て、言ひにくくなり
はべりなむ」と言へば、「などて。さる人をしもこそ、めよりほかに、ほむるたぐひあれ」と
のたまへば 、「それがにくからずおぼえばこそあらめ。 男も女も 、 け近き人思ひ 、 方ひ
き、ほめ、人のいささかあしき事など言へば、腹立ちなどするがわびしうおぼゆるなり」と
言へば、「たのもしげなの事や」とのたまふも、いとをかし。
(242~244頁)
道隆の追善のため経供養と仏供養が営まれた九月十日、供養が終わると斉信は、「月
秋と期して身いづくか」と吟じる。この詩は、菅原文時が謙徳公のために営まれた追善の
折に読んだ願文で、月は秋となってまた美しく照り明しているけれど、月を賞した人はいづこ
に去ってしまったのかという意だが、この斉信の吟誦を聞いていた清少納言は「はたいみじう
めでたし」と語り、「いかでさは思ひ出でたまひけむ」とその機知に感心する。そして、中
宮定子のところに参上すると、定子は「めでたしな。いみじう今日の料に言ひたりけることに
こそあれ」と、斉信が今日の供養の日のために用意したものに違いないだろうとその素晴ら
しさを誉めるのであった。そして清少納言に向って「まいてさおぼゆらむかし」という言葉を投
げかけるのだが、ここには、斉信びいきのお前にはましていかに素晴らしく映ったのだろうかと
いう意味が込められており、清少納言の斉信への傾倒ぶりが見受けられる。ここには、斉
信のその折に合った詩句を朗詠するための心遣いと、その心遣いを理解する清少納言の姿
が描かれており、二人の心の交流が読み取られよう。さらに、清少納言が斉信によって
「わざと呼び出で」られたという記述から両者の親密さが窺われるが、とくに二人の会話の
中で彼女は「上の御前などにても、役と預かりて誉めきこゆるに」と話している。つまり、主
上の前でも斉信のことを誉めることは自分の役割となっているというのだが、当該場面から清
少納言の斉信に対する深い思い入れは勿論のこと、さらに、お互いの才知を理解し合える
二人の関係も読み取られよう。
清少納言の才学機知の披露といえば、まずあの有名な「頭中将のすずろなるそら事を
聞きて」段(七八)を避けて通れないであろう。
⑥頭中将のすずろなるそら言を聞きて、いみじう言ひおとし、「何しに人と思ひほめけむ」な
ど 、 殿上にていみじうなむのたまふと聞くにも 、 はづかしけれど 、 「まことならばこそあら
め、おのづから聞きなほしたまひてむ」と笑ひてあるに、黒戸の前など渡るにも、声など
するをりは、袖をふたぎてつゆ見おこせず、いみじうにくみたまへば、ともかうも言はず、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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も入れで過ぐすに 、 二月つごもり方 、いみじう雨降りてつれづれなるに 、 御物忌に籠り
て、「さすがにさうざうしくこそあれ。物や言ひやらまし」となむのたまふ、と人々語れど、
「世にあらじ」などいらへてあるに、日一日下にゐ暮らしてまゐりたれば、夜のおとどに入
らせたまひにけり。長押の下に火近く取り寄せて、篇をぞつく。……炭櫃のもとにゐたれ
ば 、 そこにまた 、 あまたゐて物など言ふに 、 「なにがし候ふ」といとはなやかに言ふ 。
「あやし。いつのまに何事のあるぞ」と問はすれば、主殿司なりけり。「ただここもとに
人づてならで申すべき事なむ」と言へば、さし出でて、言ふ事、「これ頭の殿の奉ら
せたまふ、御返事とく」と言ふ。……「蘭省花時錦帳下」と書きて、「末はいかに、
末はいかに」とあるを、「いかにかはすべからむ、御前おはしまさば、御覧ぜさすべき
を、これが末を知り顔に、たどたどしき真名書きたらむもいと見苦し」と思ひまはすほどもな
く、責めまどはせば、ただその奥に、炭櫃に、消え炭のあるして、「草の庵を誰かたづ
ねむ」と書きつけて取らせつれど、また返事も言はず。
みな寝て、 つとめていととく局に下りたれば、 源中将の声にて 、「ここに草の庵やあ
る」とおどろおどろしく言へば 、 「あやし 。 などてか 、 人げなきものはあらむ 。 『玉の
台』ともとめたまはましかば、いらへてまし」と言ふ。「あなうれし。下とありけるよ。上に
てたづねむとしつるを」とて 、夜べありしやう 、「……さばかり降る雨のさかりにやりたる
に、いととく帰り来、『これ』とて、さし出でたるが、ありつる文なれば、返してけるかとて
うち見たるに 、 あはせてをめけば 、 『あやし 、 いかなる事ぞ』と 、 みな寄りて見るに 、
『いみじき盗人を。なほえこそ思ひ捨つまじけれ』とて、見さわぎて、『これが本つけて
やらむ。源中将つけよ』など、夜ふくるまでつけわづらひてやみにし事は、行く先も、語
りつたふべき事なりなどなむみな定めし」など、いみじうかたはらいたきまで言ひ聞かせて、
「今は御名をば、草の庵となむつけたる」とて、いそぎ立ちたまひぬれば、「いとわろき
名の、末の世まであらむこそくちをしかなれ」と言ふほどに、……
物語などしてゐたるほどに、「まづ」と召したれば、まゐりたるに、この事仰せられむと
なりけり。上笑はせたまひて、語りきこえさせたまひて、「男どもみな扇に書きつけてなむ
持たる」など仰せらるるにこそ、あさましう、何の言はせけるにかとおぼえしか。
さて後ぞ、袖の几帳なども取り捨てて、思ひなほりたまふめりし。 (134~140頁)
清少納言についてあらぬ噂を聞いた斉信は、彼女をたいそう言いけなして、「何しに人と思
ひほめけむ」と殿上人に語るなど、しばらく疎遠になっていた。そうしたある日、雨が降り注
ぐ中、斉信から「蘭省花時錦帳下」と書いて、「末はいかにいかに」とある文が届けられ
る。この句は『白氏文集』巻十七の「蘭雀ノ花ノ時錦帳ノ下。廬山ノ雨ノ夜草庵ノ
中……」の詩によるものである。この斉信の文に対して清少納言は「草の庵を誰かたづね
む」と書き返し座中の絶賛を博した。諸注の多くは、「蘭省花時錦帳下」の対句は知る
まいと思ってためしたのが、それを知っていただけではなく、まともに「真名書き」で書かずさ
らにそれを和歌の下の句に書き換えて答えたので、斉信側はその上の句を求められた格好
『紫式部日記』における対『枕草子』意識 ·································································· 金 孝 淑…87
となり、彼女の漢籍に対する知識と機知が称賛の理由となったと解している11)。この両者の
遣り取りを通して、清少納言の答は斉信によって「行く先も、語りつたふべき事」と言わ
れ、その漢籍の知識と機知が称賛される。そして、またさらにこの噂は宮中に広がり、一条
帝までもが「男どもみな扇に書きつけてなむ持たる」と言うほどそのことを興じているのであ
る。当該章段から、清少納言が、栄華と権勢を誇る定子サロンの代表的な存在として、
当代を代表する貴公子斉信との漢詩の遣り取りをもって交流を深め、さらにそれが周囲の
人々から常に注目されていたことが分かる。
清少納言は、自らが『枕草子』の中で「歌よませたまへるか。さらに見はべらじ」
(「里にまかでたるに」段(八〇)、148頁)と記すなど、和歌を苦手としていたとされる
が、漢籍の知識に関しては内侍典を希望するほど強い誇りを持っていた。前掲の⑤「故殿
の御ために、月ごとの十日」段には藤原斉信の詩の吟誦を理解し賛美する清少納言の姿
が、そして、当該章段には斉信と『白氏文集』の詩句を介して交流する清少納言の姿が
描かれている。とくに、頭中将の問いに対して、「これが末を知り顔に、たどたどしき真名
書きたらむもいと見苦し」と記されているのは、すでに定子サロンの代表的な女房として漢籍
に通じていることが宮中の中で噂となっていたからであり、その自負心の裏返しとみてよいだ
ろう。前節で引用した『紫式部日記』の消息的部分の記述の中で、清少納言がまず批
判されたのは「清少納言こそ、したり顔にいみじうはべりける人。さばかりさかしだち、真名
書きちらしてはべるほども、よく見れば、まだいと足らぬこと多かり」とあったように、「真名」
を書き散らしているけれども、よく見ると足りない部分が多いというところであった。清少納言
のみならず、紫式部もやはり漢籍に関しては人一倍自負を持っていたが、紫式部自身の漢
籍に関する逸話は『紫式部日記』の中で詳細に述べられている。これに関しては次節で
さらに詳細に検討するが、ここではまず紫式部が非難の矢を向けた清少納言の「真名書
き」ぶり、つまり漢籍に関する教養が、『枕草子』の中で藤原斉信との交流を介して誇ら
しげに書き述べられていることを確認しておきたい。
『枕草子』における斉信に関して、岡崎知子氏は、端麗な容姿と才学に秀でた彼は
もっぱら清少納言の賛美の対象として描かれているとした上で、斉信を称賛することによっ
11) 清少納言の返事が絶賛された理由として、岡田潔氏は、斉信が問いかけた『白氏文集』の詩句は、白楽天
が左遷されて廬山にある時、宮廷で華やかな生活をしている友人に詠み送ったものであり、この章段の事実があっ
た当時(長徳元年二月)栄華の絶頂にあった中宮サロンの女房である清少納言にこの詩句を送りつけたのは、
単に漢籍に関する知識を問うたものではないとする。そして「草の庵を誰かたづねむ」という清少納言の返事は、
「さびしい草の庵にいる私を誰が訪ねるでしょう」という意味となり、斉信と清少納言の立場が逆転したところを読み
取るべきと説かれる(「頭中将のそぞろなるそら事をききて──斉信と清少納言の応答の際の意識──」(「女
子聖学院短期大学紀要」第22号、1990年、pp.68~72)。また、鄭順粉氏は、当該章段の両者の遣り取りの
意味は、清少納言の句が「聯句の形式を連歌の形式へと文芸様式そのものを転位させることによって、和歌の
類型化された共通観念を巧みに駆使した」ところにあると解し、さらに清少納言の返事に対して斉信達が付け句を
作れなかった理由を詳細に分析されている。(「「頭の中将の、すずろなるそら言を聞きて」段の和歌の方法─
─遊戯的な性格について──」(『枕草子 表現の方法』勉誠出版、2002年、pp.148~170))
88 日本文化學報……第 42輯
て、「清少納言は自己を誇り、かつ二人の交渉の舞台となった中宮定子の時代を追憶
し、礼讃したのである。ここに斉信の存在が清少納言の宮仕生活にもたらした意義があ
る」12)と述べられている。一方、田畑千恵子氏は、日記的章段と称される章段群はその
各々のもつ性格が一様ではなく、藤原斉信が登場する章段においても、史実の時期によっ
て斉信の描かれ方が異ると論じられる。
前期章段において、中宮サロンの繁栄を保証し、また証明する存在として場面の中心を占
めたのは、 道隆であり伊周であった。 道隆が薨去し 、伊周にも昔日の栄花がみられなく
なった、この時期(道隆死後の一年間)を描くにあたって、前期章段のスタイルを維持す
る限り、具体的な主家賛美は描けない。現実には衰退のきざしをみせる中宮サロンの「め
でたさ」を描くために作者の用いた方法は、頭中将として身近にあった、美貌で才芸秀れ
˙ ˙ として用い、前期章段のスタイルを踏襲しつつ、彼を中関白家側の人物と
た斉信を、素材
して仮構し、文脈に取りこむことであった。
しかし、現実に、彼のもつ政治的位置(道隆の死後、急速に道長へ寝返った人物とし
ての実像)を見てしまった作者には、最後まで彼を賞揚し切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のではない
だろうか 。 上述の三段(稿者注─「故殿の御服のころ 、 六月のつごもりの日」段 、
「故殿の御ために、月ごとの十日」段、「返る年の二月二十余日」段)は、これを反
映する形で、斉信に対する意識が屈折をうかがわせるが、それは、彼のもつ政治性を十
分に知りつくしている作者の目──長徳の変以降の政治の趨勢を見極めた目を感じさせ
る。斉信関係章段の特徴として、過去形の使用が多いこと、詠嘆的な言辞が多くみられ
ることも合わせて、執筆時期が比較的後期であることを物語るものではないだろうか。13)
氏の論じられるように、藤原斉信関連の章段、とくに「故殿の御服のころ、六月のつごもり
の日」段など道隆薨去の後の事実が書かれた章段において、「過去形の使用」「詠嘆
的な言辞」が多いことをもって、果たして清少納言の斉信に対する屈折を読み取っていいの
かどうか、それはさらなる検討を要するだろう。しかし、ここで重要なのは、そうした政治的な
状況の中でも清少納言が中関白家への礼讃を描くために「素材」として用いているの
12)
岡崎知子氏は、「『枕冊子』における中の関白家の盛時を語る回想的、叙事的章段にみられる中宮礼讃と
˙ ˙ ˙ ˙ でもある。清少納言の宮仕生活中
宮廷生活の謳歌とは、同時にそこに生活する女房清少納言自身のわれぼめ
特筆すべき事柄は皆、『一つな落としそ』と励まされて、自他の区別なく記るしとどめたもののようである。その中
で清少納言が殿上人等を相手に秀句や諧謔にみちた問答をする時、彼女の面目は最も躍如たるものがある。そ
して斉信もまたその殿上人の一人として、云わば清少納言の引立て役を演じ、おおいに彼女の機知を誘発した。
この斉信を称賛することにおいて清少納言は自己を誇り、かつ二人の交渉の舞台となった中宮定子の時代を追憶
し、礼讃したのである。ここに斉信の存在が清少納言の宮仕生活にもたらした意義があるように思う。」と述べら
れている。「『枕冊子』に見える藤原斉信」(「古代文化」第15巻 第1号、1965年、p.24)
13)
田端千恵子「枕草子 藤原斉信関係章段の位相──「故殿の御服のころ」「故殿の御ために」の段を中
心に──」(「中古文学論攷」第四号、早稲田大学大学院中古文学研究会、1983年、pp.33~34)
『紫式部日記』における対『枕草子』意識 ·································································· 金 孝 淑…89
が、すでに道長の右腕として活躍し重用されている斉信であったという事実である。清少納
言の心情、あるいはその意図はともかく、『枕草子』が流布し同時代の人々に読まれた場
合、このことがいかに受け止められるのかという問題がまたここに生じるのである。ましてや中
宮彰子サロンに仕え、さらに『枕草子』(あるいは清少納言)に対して強烈な対抗意識
を持っている紫式部にとって、『枕草子』の中で繰り広げられる定子サロンを舞台にした斉
信の活躍は、どのように受け止められていたのであろうか。また、『紫式部日記』の中で
どのような形で反映されているのだろうか。次節でさらに検討を進めていきたい。 三 『紫式部日記』の中の藤原斉信
道長の右腕として重用された藤原斉信は、彰子の立后にあたり中宮大夫に任ぜられる
が、『紫式部日記』においても「宮の大夫」「大宮の大夫」「大夫」「大納言」と
称されている。その登場回数は、中宮彰子や道長、あるいは紫式部が親しくしていた何人
かの女房を除けば、男性貴族としてはもっとも多く、十一回を数える。その登場回数だけを
みても、『紫式部日記』の主要人物の一人であったといえよう。それではまず斉信がどのよ
うに描かれているのかを見ていきたいと思う。次は寛弘五年、彰子の出産を前にして公卿達
が土御門に集って待機している場面である。
⑦八月二十余日のほどよりは、上達部、殿上人ども、さるべきは、みな宿直がちにて、橋
の上、対の簀子などに、みなうたた寝をしつつ、はかなうあそび明かす。……宮の大夫
斉信、左の宰相の中将経房、兵衛の督 、美濃の少将済政などして 、遊びたまふ夜もあ
り。わざとの御遊びは、殿おぼすやうやあらむ、せさせたまはず。
(127頁)
ここには、彰子腹の第一子の誕生に待機する公卿達の様子が描かれているが、その場に
は「宮の大夫」である斉信も列席している。若宮が誕生してからも斉信は道長邸の行事に
ほとんど出席し慶事に花を添えているのだが、それは「宮の大夫」という職掌、あるいは主
家と斉信との位置関係を考えると当然といえば当然かも知れない。しかしここで重要なの
は、一見当然のように見える彼の列席を紫式部が省略することなく悉く記し残しているというこ
とである。例えば、次の引用文は、若宮(しかもそれが将来の天皇となる親王)が誕生し
喜び合う場面だが、ここで斉信は、「宮の大夫、ことさらにも笑みほこりたまはねど、人より
まさるうれしさの、おのづから色に出づるぞことわりなる」とあり、殊更に喜ぶ姿が描かれてい
る。
90 日本文化學報……第 42輯
⑧例の、渡殿より見やれば、妻戸の前に、宮の大夫、東宮の大夫など、さらぬ上達部
も、あまたさぶらひたまふ。……心のうちに思ふことあらむ人も、ただ今は、まぎれぬべき
世のけはひなるうちにも、宮の大夫、ことさらにも笑みほこりたまはねど、人よりまさるうれしさ
の、おのづから色に出づるぞことわりなる。 (136~137頁)
この場面に、宮大夫と東宮大夫の名が列記されていることに対して、守屋省吾氏は、
「多数の公卿達が居集まるその中から特にこのふたりに視線を止めているところは、主家に
対する両者の位置関係を意識していたればこそであり、眼前に展開するそれ自体どういうこ
ともない人物情景を、常に過去から現在へと流れる時間によって相対化して認識 評価し
ないではおかない筆録者の批評精神のなせる業であり、ひいては主家の権勢を強く意にお
いている筆録者の心情をはしなくも表現する結果にもなっていよう」14)と述べられている。氏
は、斉信の出自が極めて高く、道長の繁栄に多少なりとも嫉妬の念を抱いていたかも知れ
ないという意味から、常に過去の歴史を認識する紫式部が、その名をとりわけ記している可
能性を示唆されているのである。だが、氏の述べられるように、紫式部が「人物情景を、
常に過去から現在へと流れる時間によって相対化して認識 評価」する「批評精神」を
持っているとするならば、そこには自ずとつい最近まで道隆に重用され、定子後宮に出入り
しながら交流を深め、『枕草子』という書物を通して今もなお当時の様子が語り伝えられて
いる斉信、という意識が入り込んでいる可能性も排除できまい。というのは、『紫式部日
記』における斉信の描かれ方は、ただ慶事に顔を出し、その名前が単なる記録として書き
残されたというレベルに留まるものではないからである。
⑨暮れて、月いとおもしろきに、宮の亮、女房にあひて、とりわきたるよろこびも啓せさせむと
にやあらむ、妻戸のわたりも御湯殿のけはひに濡れ、人の音もせざりければ、この渡殿
の東のつまなる宮の内侍の局に立ち寄りて、「ここにや」と案内したまふ。宰相は中の
間に寄りて、まだささぬ格子の上押し上げて、「おはすや」などあれど、出でぬに、大
夫の「ここにや」とのたまふにさへ、聞きしのばむもことごとしきやうなれば、はかなきいら
へなどす。いと思ふことなげなる御けしきどもなり。「わが御いらへはせず、大夫を心こと
にもてなしきこゆ 。ことわりながらわろし。 かかるところに 、上
のけぢめいたうは分くもの
か」と、あはめたまふ。…… (160~161頁)
上は、若宮関係の人事が定められ、その夜、「宮の亮」と「宮の大夫」が紫式部の局
に立ち寄る場面である。ここでの「宮の亮」というのは、中宮の権の亮、つまり藤原実成
のことだが、実成が式部に声をかけるも、式部はそれに対して返事をしようとしない。しか
14) 守屋省吾「『紫式部日記』小考──人名記述に関連して──」(『王朝女流文学の新展望』伊藤博
宮崎莊平編、竹林舎、2003年、p.84)
『紫式部日記』における対『枕草子』意識 ·································································· 金 孝 淑…91
し、その時、「宮の大夫」つまり斉信が訪ねてくると、式部はどうすることもできず応対した
というのである。この場面は、実成が「わが御いらへはせず、大夫を心ことにもてなすきこ
ゆ。ことわりながらわろし」と述べているように、まずは高位官職にある斉信のことは、男性
貴族との付き合いに消極的である紫式部でさえ無視するわけにはいかなかった、というふうに
まずは解されよう。しかしそれと同時に、斉信の存在は彰子サロンにおいてそれだけ重いもの
であったとも理解できるのではないだろうか。そして、『紫式部日記』には、中宮彰子の慶
事を取り仕切る「宮の大夫」として斉信の顔もしっかりと書き記されている。
⑩御五十日は霜月の朔日の日 。 例の 、 人々のしたててまうのぼりつどひたる御前の有
様、絵にかきたる物合の所にぞ、いとよう似てはべりし。……内裏の台盤所にもてまゐる
べきに、明日よりは御物忌とて、今宵みな急ぎてとりはらひつつ、宮の大夫、御簾のもと
よりまゐりて、「上達部御前に召さむ」と啓したまふ。聞こしめしつとあれば、殿よりはじめ
たてまつりて、みなまゐりたまふ。……大納言の君、宰相の君、小少将の君、宮の内
侍とゐたまへり。右の大臣よりて、御几帳のほころび引きたちみだれたまふ。さだすぎたり
とつきしろふも知らず、扇をとり、たはぶれごとのはしたなきも多かり。大夫、かはらけとり
て 、 そなたに出でたまへり 。 美濃山うたひて 、 御遊び 、 さまばかりなれど 、 いとおもしろ
し。 (162~164頁)
上は、若宮の御五十日の祝が行われる場面だが、それは「人々のしたててまうのぼりつど
ひたる御前の有様、絵にかきたる物合の所にぞ、いとよう似てはべりし」とあり、美しく着飾っ
た女房たちが参上し集った中宮彰子の様子が、まるで絵に描いた物合せの場面のようだと
最上の賛辞を呈している。そして、その美しい場を切り盛りするのが「宮の大夫」つまり斉
信なのだが、「宮の大夫」として将来の天皇の御五十日という慶事を仕切る様子が事細
かく書かれているというのは、単なる記録を越えて、時の権勢に与しまたその栄華に参画した
ということに繋がることを意味しよう。こうして斉信は、『紫式部日記』に繰り返し栄華の絶
頂にあった彰子方の「宮の大夫」としてその名を刻まれ、その記述を通して道長という主家
に属する人物として新たに創り直されていく。一見して当然と見受けられる事柄は、一方で
は省略して差違えないという意味にも通ずる。しかしそれが省かれることなく書物の中に悉く書
き込まれていくというのは、少なくとも筆録者にとっては、当然と思われるその事に対して重い
意味があるからである。そしてそれが繰り返し書き記されることによって、読者は、そこに重
要な意味性を読み取ることになるのである。斉信は中宮彰子の「宮の大夫」であり、親王
誕生などの慶事に出席して当然の人物だが、その当然の人物の列席を悉く書き記し、そし
て論評を付け加える、そこに『紫式部日記』の意図が見え隠れするのではないだろうか。
また、こういうところにこそ『紫式部日記』の単なる記録日記ではなく日記文学としての意義
があろう。
92 日本文化學報……第 42輯
『枕草子』で清少納言との交流を通じて、清少納言を引き立て、さらには定子サロンの
華やかさを引き立てていた斉信は、こうして、中宮彰子の「宮の大夫」として、その栄華を
見届け、そしてその栄達に参画する人物として『紫式部日記』に書き刻まれていく。そして
今度は彰子サロンの優秀さを保証する人物として創り直されるのである。そして、先述したよ
うに、『枕草子』にはとくに清少納言と斉信の漢詩を介した交流が印象深く描かれていた
が、『紫式部日記』においてもそれを髣髴とさせるような場面が叙述されている。
⑪十一日の暁、御堂へ渡らせたまふ。御車には殿の上、人々は舟にのりてさし渡りけり。
それにはおくれて 、 ようさりまゐる。 教化おこなふところ 、 山 、 寺の作法うつして大懺悔
す。しらいたうなど多う絵にかいて、興じあそびたまふ。上達部、多くはまかでたまひて、
すこしぞとまりたまへる。後夜の御導師、教化ども、説相みな心々、二十人ながら宮の
かくておはしますよしを、こちかひきしな、ことば絶えて、笑はるることもあまたあり。
事はてて、殿上人舟にのりて、みな漕ぎつづきてあそぶ。御堂の東のつま、北向きに
おしあけたる戸のまへ、池につくりおろしたる階の高欄をおさへて、宮の大夫はゐたまへ
り。殿あからさまにまゐらせたまへるほど、宰相の君など物語して、御前なれば、うちとけ
ぬ用意、内も外もをかしきほどなり。
月おぼろにさし出でて、若やかなる君達、今様歌うたふも、舟にのりおほせたるを、
若うをかしく聞こゆるに、大蔵卿のおほなおほなまじりて、さすがに、声うち添へむもつつま
しきにや、しのびやかにてゐたるうしろでの、をかしう見ゆれば、御簾のうちの人もみそか
に笑ふ 。 「舟の中にや老をばかこつらむ」といひたるを 、 聞きつけたまへるにや 、 大
夫、「徐福文成誑誕多し」と、うち誦じたまふ声も、さまも、こよなういまめかしく見ゆ。
「池の浮草」とうたひて、笛など吹きあはせたる、暁がたの風のけはひさへぞ、心こと
なる。はかないことも、所がら折がらなりけり。 (213~214頁)
土御門で開かれた盛大な船楽が終わると、殿上人は皆舟を漕ぎながら管絃の遊びをして
いる。そして「御堂の東のつま、北向きにおしあけたる戸のまへ、池につくりおろしたる階の
˙ ˙ ˙ ˙ ˙ ˙ ˙ ˙ ˙ ˙ 」とあるが、この文は、場所を表わす長い副詞節
高欄をおさへて、宮の大夫はゐたまへり
を前に置いて、そこにいるのが誰かというと、他ならぬ「宮の大夫」であった、という構成に
なっており、「宮の大夫」の存在がとくに強調されたものとなっている。これはもちろん、後に
紫式部の吟誦した詩句を、斉信がよくも聞き取り、その下の句を諳誦し応酬してくれた、と
いう流れを作るためのものであろう。紫式部は、若い公達の中に年老いた大蔵卿がまじって
いるのを見て「舟の中にや老をばかこつらむ」と発する。周知のように、これは『白氏文
集』巻三
新楽府の中の「海漫漫」の一句に「童男丱女舟中ニ老ユ」とあるのを踏ま
えたもので、秦の道士徐福が不老不死の薬を求めて蓬莱に向かったが、蓬莱に至らぬう
ちに随行していた童男丱女が舟中で老いたという故事を、年老いた舟中の大蔵卿になぞら
『紫式部日記』における対『枕草子』意識 ·································································· 金 孝 淑…93
えたものである。この紫式部の言葉を聞いた斉信は、それが「海漫漫」の詩に拠ったもの
であることに気づき、「徐福文成誑誕多し」とその続きの句を誦し、式部に応えるのであっ
た。さらに、こうした斉信の応対に対して式部は「さまも、こよなういまめかしく見ゆ」と賛辞
を送っている。この場面に対して、妹背好信氏は、「これはあたかも『枕草子』の一齣の
ようではなかろうか。紫式部はここで、漢籍の知識をひけらかすと言ってあれほど非難した清
少納言とそっくりな振舞をしているのである。」15)と論じ、漢籍の知識を誇示するという点に
おいて『枕草子』と同様の趣向であると説かれている。氏も論じられているように、当該場
面は、男性貴族と漢詩を介して交流し、その相手を称賛することによって、けっきょく自分自
身を引き立て、ひいては自分が属している後宮の文化の高さを賞揚することに繋げるという点
において、『枕草子』の前掲引用本文⑥「頭中将のすずろなるそら事を聞きて」段に酷
似しているといえよう。しかしここでさらに考えるべきは、その相手の男性貴族が取りも直さず
藤原斉信であったということである。これはやはり『紫式部日記』における斉信という人物
の描かれ方に、対『枕草子』意識が底流していたことを意味するのではないだろうか。
ここで、第二節で検討した『紫式部日記』における清少納言批判を思い起こしてみよ
う。先述した通り、清少納言があれほど手厳しい批判を受けたのは、「さばかりさかしだ
ち、真名書きちらしてはべるほども、よく見れば、まだいと足らぬこと多かり。かく、人に異な
らむと思ひこのめる人は、かならず見劣りし、行末うたてのみはべれば……」と、主に「真
名書き」を書き散らし、「人に異ならむ」とする性質であった。福家俊幸は、紫式部は、
散文作家という共通点の上に、漢籍に造詣が深いという点においても「新しいタイプの女房
として、清少納言と近似の存在として受け取られた」だろうと推定される。そして清少納言
批判文の意義について、「清少納言との異質性を強調し、清少納言とは異る自像を打ち
立てることが、自己アイデンティティの確立となっていたように思われる。その背後には、作者
を清少納言と類同的な存在と見ようという周囲の眼が存在していたのであり、作者は自らを
対置することで、一旦は清少納言の盛名を利用しながら、最終的には清少納言とは異質
な存在としての自像を据えた」16)と論じられている。『紫式部日記』の手厳しい清少納言
批判が、漢籍の教養を誇る散文作家としての矜持に基づくという点において、示唆するとこ
ろが大きい。そして、紫式部が、清少納言に対して辛辣な批判を展開するに至ったその対
象が、まずは『枕草子』に散見する「よく見れば、まだいと足らぬこと多」い「真名」を
15)
前掲妹背好信論文、p.8。氏は「これはあたかも『枕草子』の一齣のようではなかろうか。紫式部はここで、
漢籍の知識をひけらかすと言ってあれほど非難した清少納言とそっくりな振舞をしているのである。この大いなる矛盾
は、紫式部が実は本質的に清少納言と同類の人物であり、『枕草子』の中の清少納言に潜在的な憧れを抱い
ていたから生じたものではないかと思う。紫式部の清少納言批判の言葉に、言いようもない力みが感じられるの
は、それが相当な痩せ我慢に基づいていたからだと思えてならないのである」と述べ、清少納言と紫式部の共通
性を説かれている。
16)
福家俊幸「『紫式部日記』いわゆる三才女批評の位相」(『平安文学の風貌』武蔵野書院、2003年、
p.319)
94 日本文化學報……第 42輯
書き散らすところであり、そしてそうした清少納言の機知を誘発し引き立てる相手として藤原
斉信が描かれていたとすれば、『紫式部日記』において斉信が多くの場面に登場し、ま
た紫式部の漢籍の知識を導き出し称賛する人物として現われているというのは、決して偶然
ではないだろう。それは、『枕草子』を著した清少納言に対して強い対抗意識を持ってい
る紫式部が、『枕草子』の中で清少納言の優秀さを引き立てた貴公子藤原斉信を、今
度は『紫式部日記』の中で自らの優位を証明する貴顕として描き直すことによって、『枕
草子』の世界を否定することになるということではないだろうか。そして先述したように、『紫
式部日記』や『枕草子』が一介女房の私的な記録ではなく、それぞれが属している後
宮を賞揚するためのものであることを考え合せると、それは定子サロンを否定し、自らが属す
る彰子サロンの優位性を確立することにも繋がるだろう。
そして、このように、『紫式部日記』における藤原斉信の描かれ方を検討していくと、清
少納言批判へと続く消息的部分の中で、後宮サロンを批評する人物として見える斉信の意
味も捉え直されよう。消息的部分での斉信の登場は、その一連の記事のクライマックスとも
いうべき清少納言批判を射程に入れたものと考えられるのではなかろうか。つまり、紫式部
は、貴公子との交流を『枕草子』という書物に描くことによって、かつての定子サロンの栄
華を今もなお世に伝える清少納言を念頭に置いて、昔日の定子サロンを知り尽くし後宮サロ
ンの文化を具体的に語り得ると同時に、さらに今となっては彰子サロンの権勢や栄達に参画
している人物として、藤原斉信を描き続けていたのである。
五 むすびにかえて-日記文学というもの『紫式部日記』に『枕草子』に対する対抗意識が顕著であるということは、従来よく言
われることである。それは、『紫式部日記』の消息的部分に清少納言に対する辛辣な批
判が述べられていることがもっとも大きな原因であろう。本稿では、その清少納言批判に至
るまでの消息的部分が連動して書き進められていることに注目し、その中で後宮サロンを具
体的に批評する人物として藤原斉信が登場している意味、さらには『紫式部日記』全体
における斉信の描かれ方を『枕草子』と関連づけながら検討してきた。
『枕草子』には藤原斉信との交流が描かれ、清少納言は彼に対して常に最上の賛美を
呈するのだが、彼に贈られた称賛は、すなわち彼女自身の才知を引き立て、さらには中宮
定子のサロンを輝かせることに繋がっていた。そして『紫式部日記』にもやはり藤原斉信の
ことが多く描かれているのだが、それは彼が中宮彰子の「宮の大夫」であったという職掌
に加え、『枕草子』を意識してのものであったと思われる。それは、例えば漢籍の知識に
関わる記事によってさらに鮮やかに浮き上がる。紫式部は、かつて清少納言との交流を通し
『紫式部日記』における対『枕草子』意識 ·································································· 金 孝 淑…95
て定子サロンの栄華を世に伝えた役割をしていた藤原斉信を、今度は『紫式部日記』に
おいて彰子サロンの一員として描き直すことによって、定子サロンを否定し彰子サロンの優越
性を世に知らしめたのではないかと思う。
『紫式部日記』のジャンルは何だろうか。あるいは、〈日記文学〉の定義は何であろう
か。これは稿者をして『紫式部日記』を読むたびに考えさせる課題である。それはまずは
『紫式部日記』が『蜻蛉日記』や『和泉式部日記』『更科日記』など他の日記文
学作品とその形態が大いに異るためである。つまり、敦成親王の誕生に関わる部分は他の
作品に比して極めて記録的でありつつも、また「消息文」ともいわれる部分においては「消
息文」という名称がすでに物語るように、極めて自己省察が多く物語性が強いため、敦
成親王関連の記事などとはまったくその性格を異にしているのである。故に稿者にとっては、
『紫式部日記』のジャンル、あるいはその有り様を考えるにあたって、どの部分を基準にし
て判断すればいいものか極めて難しい問題であった。しかし、本稿で検討してきたように、
例えば藤原斉信関連の記事を分析してみると、それが記録的な部分であったとしても、実
録とは違って、そこには〈書き記す〉ことによって新たに持たされる意味があり、さらにそれは
『紫式部日記』という作品全体を通じて連動しているということが、微かでありながらも見え
てきたのではないかと思う。紫式部の意識を通り越して、そこにこそ〈日記〉ではなく我々
が〈日記文学〉と称する意味が存するのではなかろうか。
96 日本文化學報……第 42輯
【参考文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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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式部日記』における対『枕草子』意識 ·································································· 金 孝 淑…97
要 旨
『紫式部日記』に『枕草子』に対する対抗意識が顕著であるということは、従来よく言われ
ることであった。それは、『紫式部日記』の消息的部分に清少納言に対する辛辣な批判が述
べられていることがもっとも大きな原因であろう。本稿では、その清少納言批判に至るまでの消
息的部分が連動して書き進められていることに注目し、その中で後宮サロンを具体的に批評す
る人物として藤原斉信が登場している意味、さらには『紫式部日記』全体における斉信の描
かれ方を『枕草子』と関連づけながら検討している。
『枕草子』には藤原斉信との交流が描かれ、清少納言は彼に対して最上の賛美を呈するの
だが、彼に贈られた称賛は、彼女自身の才知を引き立て、さらには中宮定子のサロンをさらに
輝かせることに繋がっていた。そして『紫式部日記』にもやはり藤原斉信のことが多く描かれて
いるのだが、それは彼が中宮彰子「宮の大夫」であったという職掌に加え、『枕草子』を意
識してのものであったと思われる。それは、例えば漢籍の知識に関わる記事によってさらに鮮やか
に浮き上がる。紫式部は清少納言批判文において清少納言の漢学の教養を見せびらかすよう
な態度を非難しているが、実は紫式部も清少納言のように自身の漢学の教養に対して異常なま
での自負を持っていた。そして、『枕草子』には藤原斉信との漢詩の遣り取りが書かれている
が 、 『紫式部日記』においてもやはり斉信との漢詩の応酬が描かれており 、 これもやはり対
『枕草子』意識によるものではないかと思うのである。
紫式部は、かつて清少納言との交流を通して定子サロンの栄華を世に伝えた役割をしていた
藤原斉信を、今度は『紫式部日記』において彰子サロンの一員として描き直すことによって、
定子サロンを否定し彰子サロンの優越性を世に知らしめたのではなかろうか。
キーワード: 『紫式部日記』、『枕草子』、紫式部、清少納言、藤原斉信
투
고 : 2008. 5. 31
1차 심사 : 2008. 6. 13
2차 심사 : 2008. 6. 27
일본 근대문학에 나타난 에도시대의
전통 고찰
-나쓰메 소세키의 『그 후』에 묘사된 참살과 할복-*1)
權 赫 建** ⋅ 金 泰 寬*** ⋅ 車 珉 庚****
(**e-mail : [email protected])
(***e-mail : [email protected])
(****e-mail : [email protected])
目次
1. 서론
2. 나쓰메 소세키와 에도시대의 전통
3. 참살
4. 할복
5. 결론
1. 서론
작품 『그 후(それから)』가 110회에 걸쳐 도쿄(東京)와 오사카(大阪)의
「아사히신문(朝日新聞)」에 연재된 것은 1909년(明治42) 6월 27일부터 같은
해 10월 14일까지이다. 당시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1867-1916)는 만 나이로
42세였다.
에도시대 말에 태어나 어릴 때부터 야담(講談)과 라쿠고(落語) 등 에도시대
전통문화에 관심을 갖고 성장한 나쓰메 소세키는 일본의 전통을 지켜나가면서
* 이 논문은 2008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KRF--2008-323-A00011)
** 동의대학교 교수 일본근현대문학 *** 동의대학교 교수 중국근현대문학
**** 동의대학교 강사 일본근현대문학
100 日本文化學報……第 42輯
서구의 문화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해 항상 고뇌했던 작가이다.
『그 후』의 주인공 나가이 다이스케(長井代助)는 서양식 고등교육을 받은
근대 지식인이며, 그의 아버지 나가이 도쿠(長井得)는 에도시대의 무사교육을
받고 성장하여 시대가 메이지(明治)로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에도시대의 사
고방식과 전통을 고집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본고에서는 우선 『그 후』의 주인공 다이스케와 끊임없이 충돌을 일으키는
나가이 도쿠가 젊은 시절 무사(武士)였을 때, 어떻게 행동을 했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려고 한다. 에도시대에 존재했던 무사와 그들의 행동 규범이었던
무사도를 알아보고 난 이후, 그것을 『그 후』에 나타난 무사의 참살, 할복과
비교하여 그 차이점을 분석해 보겠다. 위와 같은 차이점 분석을 통해 에도시대
후기 무사들의 행동과 무사도를 포함한 전통 변모가 작품에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를 점검해 보려고 한다.
이제까지 일본을 포함한 국내외에서 발표된 『그 후』연구물은 대단히 많기
때문에 정확하게 몇 편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일본과 한국에서 발표된 연구
물 숫자만 어림잡아도 570편 이상이다.
이제까지 발표된 논문 가운데 참신하고 독창성이 있다고 생각되는 『그
후』에 관계된 논문을 두 편 소개해 보면 사이토 히데오(斎藤英雄)의 「진주
반지의 의미와 역할-『그 후』의 세계-」와 윤혜영의「『산시로(三四郎)』와
『그 후(それから)』에 묘사된 감각표현 고찰」이다.
사이토 히데오는 작품 속의 남성이 여성에게 진주 반지를 주는 것에 중요한
의미를 두고 작품을 정밀하게 분석했다.1) 윤혜영은 작품 속에 매몰되어 있는
감각표현의 특징을 찾아내어 논을 전개해 나갔다. 작품 모두(冒頭) 부분의 누
군가 황급히 뛰어가는 발소리는 마지막 부분의 조용한 골목길에 울리는 다이
스케 자신의 발소리와 호응되며, 황급한 「문명사회로 뛰어드는 다이스케의 운
명을 암시」2)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국인 연구자에 의해 국내외에서 발표된 『그 후』에 관한 연구물은 44편
이상이다. 하지만 이제까지 발표된 선행 연구물 가운데 「일본 근대문학에 나타
난 에도시대의 전통 고찰」을 테마로 삼아, 그 가운데 『그 후』에 나타난 무
사의 참살과 할복을 에도시대에 존재했던 무사도와 비교하여 고찰한 연구는 발
견하지 못했다.
1) 斎藤英雄「真珠の指輪の意味と役割-『それから』の世界-」(『夏目漱石Ⅲ』, 有精堂, 1985) 148-159
쪽 참조.
2) 윤혜영「『산시로(三四郎)』와 『그 후(それから)』에 묘사된 감각표현 고찰」(『나쓰메 소세키의
전기 삼부작 연구』, 韓國夏目漱石研究会 編, 2005) 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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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나쓰메 소세키와 에도시대의 전통
전통(傳統)이란 일반적인 의미로는 습관이 된 풍속이 「전대(前代)로부터 후
대(後代)로 전해지는 것으로서, 동시에 시간적․공간적 구조를 제시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국가․민족의 전통을 자랑으로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에
는 단순한 습속(習俗)만이 아니라 정신적․문화적인 것, 즉 한 세대로부터 다
음 세대로 전해지는 것과 그 내용」3)을 가리킨다.
전통을 좀더 쉽게 설명하면 어떤 국가와 민족, 집단, 공동체에서 좋고 나쁨
을 떠나 지난 시대에 이미 이루어져 계통을 이루며 전해 내려오는 사상, 관습,
풍속, 행동 등을 아우른 양식이라고 볼 수 있다.
나쓰메 소세키가 태어난 해인 1867년(慶應3)은 에도시대(江戶時代,1603∼
1867) 15대 장군(將軍)인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가 국가통치권을 천황이
지도하고 있는 조정에게 반환하는 대정봉환(大政奉還)이 실현되어 사실상 에
도막부(江戶幕府)시대는 막을 내리고 새롭게 천황제국가가 성립된 때이다. 그
는 에도시대 말기인 게이오(慶應) 3년에 태어났으나, 이듬해인 1868년(明治元
年) 8월 27일에 메이지천황(明治天皇) 즉위식이 거행되어 연호가 메이지(明治)
로 바뀌었다. 그러므로 그는 인생의 대부분을 메이지시대(明治時代,1868~
1912)에 살았다.
에도시대 말기에 태어난 나쓰메 소세키가 실제로 살았던 메이지 라고 하는
시대는 일본이 긴 쇄국을 그만두고 외국에 문을 활짝 열어 서양문명과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시기이다. 서양을 따라잡아 추월하려고 일본의
국가와 국민이 서양문명․서양문화 섭취에 노력했던 시대였다.4)
위와 같은 서양문명․문화 섭취라는 새로운 시대의 물결은 차례로 옛것을
부수어 버리고 놀랄 정도의 속도로 일본을 바꾸어 나갔다. 그러나 나쓰메 소세
키가 태어나 자란 메이지시대는 서양의 문화와 사회제도를 받아들인 진보와
발전이 함께 하는 시대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에도시대의 전통과 근대이후
서양에서 물밀듯이 들어온 신문화가 혼동을 이루었던 불안정한 시대였다.
어린 시절에 나쓰메 소세키는 자신이 어떤 시대에 태어나 살고 있는지 확실
히 알지 못했다. 그가 에도시대 말기에 태어나, 격동이 휘몰아치는 메이지시대
에 에도시대의 전통과 근대 이후 서양에서 들어온 신문화가 혼동을 이루고 있
던 도쿄에서 성장했다고 하는 것은 에도시대 전통의 변모를 누구보다 피부로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3) 한국어위키백과사전 :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10XX265094
4) 三田村信行 夏目漱石 (偕成社, 1994) 9-11쪽 참조.
102 日本文化學報……第 42輯
나쓰메 소세키는 1884년(明治17) 9월에 당시 도쿄 간다 히토쓰바시(一ツ橋)
에 있던 도쿄대학예비문(東京大学予備門) 예과(予科)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
했다. 도쿄대학예비문에 입학한 뒤 이제까지 하숙을 했던 고이시카와(小石川)
의 절에서 사루가쿠초(猿楽町)의 스에토미야(末富屋)라는 하숙집으로 이사를
했다. 그 하숙집에는 동급생이 많이 하숙하고 있었다. 수험 준비에서 해방되어
누구나 할 것 없이 노는 것밖에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5)
1886년 7월 나쓰메 소세키는 수업이나 공부는 뒷전으로 하고 놀기만 한 데
다 복막염(腹膜炎)을 앓았기 때문에 진급시험을 칠 수 없었다. 나쓰메 소세키
는 크게 충격을 받았지만 이것을 계기로 그때까지의 생활을 반성하고 구태여
추가시험을 치르지 않고 스스로의 의지로 결국 낙제를 했다.6)
당시 친구였던 하시모토 사고로(橋本左五郎)의 회고 등을 고려해볼 때, 나쓰
메 소세키를 비롯한 친구들은 에도시대의 전통문화라고 볼 수 있는 요세(寄
席)7)에 가서, 야담(講談)을 비롯하여 라쿠고(落語), 그리고 당시 유행하기 시작
했던 여자가 낭창하는 옛 이야기 등 에도시대의 예능을 관심있게 지켜보면서
성장했다. 그의 야담 취미는 청년기․장년기에 걸쳐 일관되게 계속 되었다.8)
나쓰메 소세키는 1906년(明治39) 4월 잡지 「호토토기스(ホトトギス)」에 발
표한 『도련님(坊っちゃん)』을 통해 주인집 아들에게 충성을 다해 봉사하는
특이한 하녀의 모습을 묘사했다. 「기요(淸)」 라고 불리는 이 나이든 하녀
는 본래 지체 있는 집안 출신이었다. 그런데 도쿠가와 막부(徳川幕府)가 붕
괴되면서 가문이 몰락하여 결국엔 「봇짱」 집에서 하녀로 일하고 있는 것
이다.
「기요」는 에도시대에 태어나 메이지시대를 살고 있는 할멈인 것이다. 「기요」
가 가정교육을 받고 성장했던 시대는 에도시대였다. 그런데 「기요」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헌신적인 사랑으로 도련님을 귀여워하며 사랑이 듬뿍 담긴
눈빛과 행동으로 「봇짱」을 돌보아 주고 있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의 누구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하고 성장한 「봇짱」을 인정해 주고 귀여워
해 주는 사람은 하녀인 「기요」 할멈뿐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부터 「기요」는 이상하리 만치 점점 「봇짱」을 애지중
지(愛之重之)했다. 이따금 자신의 용돈으로 그 당시 손쉽게 살 수 있었던 일
본식 구운 과자인 긴쓰바 등을 사주기도 했다. 또한 하녀 「기요」는 「봇짱」에게
5) 丸谷才一 「慶應三年から大正五年まで」( 夏目漱石 , 河出書房新社, 1990) 11쪽 참조.
6) 앞의 책, 三田村信行 夏目漱石 , 32-33쪽.
7) 야담(講談)·라쿠고(落語)·로쿄쿠(浪曲) 등의 대중 예술을 상연하는 공연 연예장.
8) 오현수 「나츠메 소세키(夏目漱石)의 강담(講談) 취미」(『일어일문학연구』「第45輯」, 2003)
150-1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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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3엔 정도 빌려주었던 일까지 있다. 당시 하녀의 월 임금이 「3엔」 이었으
므로 「기요」가 「봇짱」에게 준 3엔이라는 금액은 자신의 한 달치 월급에 해당
되는 큰 금액이었다.
「봇짱」은 그 3엔을 지갑에 넣고 허리춤에 낀 채로 재래식변소에 갔다가 3엔
을 텀벙하고 변소 구멍 속에 빠트렸다. 「기요」는 재빨리 대나무 가지를 찾아내
가지고 와서 재래식 변소 구멍에 떨어뜨린 3엔을 건져 올렸다. 건져 올린 돈을
물로 씻어서 화롯불에 말려 「봇짱」에게 주었으나, 「봇짱」이 냄새가 난다고 하
자, 어디서 은전으로 바꾸어 와서 3엔을 돌려주었던 일까지 있다. 「기요」는 「
봇짱」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봇짱」 한 사람에게만 애정을 주며, 친어
머니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요」가 「봇짱」 한 사람에게만 애정을 쏟으며 절대적인 존재로 여겨
기대어 살려고 하는 것은 형과 부모님에게 미움을 받고 살아 온 「봇짱」 에
대한 동정심(同情心)과 배려(配慮)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에도시대에 태
어나 성장한 「기요」의 이와 같은 행동에는 비록 신분은 하녀이지만 자신이 섬
기는 주군을 위해 지극정성(至極精誠) 최선을 다해 충성하며 봉사하는 에도시
대의 무사적 전통이 배어있다고 생각된다.
『夢十夜』는 1908년(明治41) 7월 25일부터 8월 5일까지 10회에 걸쳐서 「아
사히신문(朝日新聞)」에 연재되었던 작품이다.『夢十夜』「第八夜」의 거울 속
세계를 통해 나타난 장면 가운데는 일본 에도시대에서나 볼 수 있는 전통적
풍경 가운데 하나인 좁쌀떡 장수가 등장하여 궁금증과 재미를 독자에게 선사
하고 있다.
『夢十夜』「第八夜」에 등장하는 좁쌀떡장수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에 대하여 살펴보면 아래와 같이 표현되어 있다.
좁쌀떡, 좁쌀떡, 좁쌀떡 사아려 하는 소리가 바로 근처에서 났다. (중략)
좁쌀떡 장수는 어릴 때 보고 보지 못했기 때문에, 어떤 모습인지 좀 보고
싶다. 하지만 거울 속에는 도무지 좁쌀떡 장수가 나타나지 않는다. 단지
떡을 찧는 소리가 들릴 뿐이다.9)
좁쌀(粟)은 오곡(五穀)의 하나로 일컬어지고 있으며 일본에 농경이 전래된
이후 중요한 식량이었다. 일본은 벼 재배 기술 보급이 늦어진 산촌 마을은 물
론이고, 농촌에서도 정월과 축제(마쓰리) 때에 좁쌀로 밥과 떡을 해서 먹었
다.10)
9) 夏目金之助 『漱石全集』「第12卷」, 『夢十夜』 (岩波書店, 1994) 123쪽.
10) 相賀徹夫編 『日本大百科全書』「1」(小學館, 1987) 855-856쪽 참조.
104 日本文化學報……第 42輯
좁쌀떡장수는 에도시대부터 있었다. 그런데 좁쌀떡 가게는 좀처럼 드물었다.
좁쌀떡장수는 절의 행사 때나, 사람들이 많은 길가에서 좁쌀떡을 팔았다.11)
『夢十夜』「第八夜」의 주인공 「나」는 옛날 어린 시절에 보았던 좁쌀떡
장수를 보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발소 거울 속에 좁쌀떡장수는 좀처럼 나타나
지 않는다. 단지 좁쌀떡을 찧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다. 주체는 보이지 않고
소리만이 들리는 좁쌀떡 장수는 「서구문명에 의해 왜곡되거나 혹은 도태되
는 전통에 대한 작가의 불안」12)한 시각을 나타낸 것이다.
어릴 때부터 에도시대의 전통문화에 관심을 갖고 성장한 나쓰메 소세키는
에도시대 후기에 지체 있던 가문의 여성이 주인집 아들을 지극정성으로 돌보
아주는 모습과 에도시대·메이지시대 초기에 존재했던 좁쌀떡장수를 보고 싶어
하는 갈망 등을 다양한 각도로 『도련님』과 『夢十夜』 「第八夜」를 통해 묘
사했다.
3. 참살
무사라는 말이 문헌에 등장하는 것은 8세기 전반으로 문인(文人)에 대비되
는 말로 사용되었다. 9세기에는 율령의 동요와 함께 율령 체제 하에서 시행되
던 징병제가 폐지되고, 호족이나 수렵을 생업으로 삼던 사람들이 군사력으로
이용되던 것이 무사의 직접적인 기원이다.
무사에게 있어 무예의 기본은 말 위에서 활을 쏘는 기술이었다. 중세에서 무
예를 궁마(弓馬)의 예(藝), 무사를 궁마의 사(士)라고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
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칼을 찬 무사의 모습은 근세 이후에 형성된 이미지
이다.
1185년 헤이시(平氏) 세력을 멸망시킨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는 가마
쿠라(鎌倉)를 근거지로 무가정치의 틀을 마련한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조
정으로부터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이라는 관직에 임명되고, 자신을 따르던 무
사들과는 주종관계를 맺고, 무사정권을 수립하여 천황을 대신하여 일본을 지배
하게 되었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무사정권을 세워 1192년 일본최초의 막부
인 가마쿠라 막부를 열었다. 그 후 가마쿠라 막부의 뒤를 이어 1338년에는 무
로마치막부(室町幕府)가 수립되었다.13)
11) 三谷一馬 『明治物賣圖聚』(立風書房, 1991) 160쪽 참조.
12) 권혁건․이호규․황은미 「일본 근대문학에 나타난 근대와 전통 고찰-나쓰메 소세키의 『夢十
夜』 「第八夜」를 중심으로-」( 한국일본학연합회 제7회 학술대회 및 국제심포지엄 프로시딩 , 한국일
본학연합회, 2009) 222쪽.
일본 근대문학에 나타난 에도시대의 전통 고찰 ············· 權 赫 建․金 泰 寬․車 珉 庚…105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가신들과 대립
하여, 1600년 세키가하라(関ヶ原) 전투에서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를 중심
으로 한 도요토미 세력을 격파하고, 1603년 정이대장군에 임명되어 에도막부
(江戸幕府)를 수립했다. 일본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1192년 가마쿠라막부를
수립한 이후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에 의해서 메이지천황 친정이 이루
어질 때까지 676년간 무사들에 의해서 통치되는 특이한 무인통치시대를 경험
한 나라이다.14)
에도막부는 막부의 장군과 다이묘(大名)가 주종관계를 맺고 전국을 지배하
였다. 막부는 다이묘를 견제하기 위해 엄격한 통제 정책을 폈다. 무가제법도
(武家諸法度)를 발표하여 다이묘의 성(城) 신축을 금지시키고 성의 수리와 개
축을 제한하였다. 또한 무사를 정점으로 사농공상의 엄격한 신분제를 시행하였
다. 이 시대에 무사는 다이토(帶刀), 묘지(名字), 기리스테고멘(切り捨て御免)15)
의 특권을 누렸다.
이와 같은 제도는 무사의 권위, 에도시대의 신분제도가 얼마나 엄격했는가를
잘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당시 전인구의 80%를 차지하는 농민은 연공을 납
부하여 무사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16)
『그 후』에 등장하는 나가이 도쿠(長井得)는 예전에 무사였다. 그의 일가족
은 막말(幕末) 때 도막(倒幕)측에 붙어 번을 지탱했다. 그의 얼굴은 나이에 비
해 살이 많고 볼이 홀쭉한 노인이다. 「짙은 눈썹 아래에 눈꺼풀이 처져 보인
다. 수염은 새하얗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노랗다.」17)
나가이 도쿠는 나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젊은 첩을 두고 있으며, 장남인 나가
이 세이고와 차남인 나가이 다이스케가 있다. 메이지유신 때 보신전쟁(戊辰戰
爭,1868년~1869년)18)에 참가한 전쟁체험이 있는 그는 보신전쟁에 참가한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보신전쟁은 신정부군이 승리를 하여 신정부군의
13) 연민수 『일본역사』(보고사, 1998) 85-121쪽 참조.
14) 공의식 「일본의 무사도와 그 현대적 의미」(『일본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책사랑, 2002) 44-45
쪽.
15) 평민이 사무라이에게 누를 범했을 경우 그 자리에서 목을 벨 수 있는 특권. 앞의 책, 공의식 「일
본의 무사도와 그 현대적 의미」53쪽 참조.
16)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연구소 편 『교양으로 읽는 일본사회와 문화』(제이앤씨, 2006) 61-62쪽
참조.
17) 夏目漱石 漱石全集 「第四巻」(岩波書店, 1966) それから 「3」, 344쪽. 본 논문의 텍스트
는 漱石全集 「第四巻」(岩波書店, 1966)을 사용했음. 논자번역 이하 같음. 이후 주(注)에 표
기되는 텍스트 인용은 「텍스트 「3」, 344쪽」과 같이 간략하게 표기하겠음.
18) 보신전쟁(戊辰戦争)은 1868년에 막부파(幕府派)와 막부(幕府) 반대파(倒幕派) 사이에 있
었던 내란임, 그 결과 막부 반대파의 지지를 얻은 메이지천황에 의한 통일국가가 완성됨.
下中弘 日本史大事典 「第6巻」(平凡社, 1994) 160-161쪽 참조.
106 日本文化學報……第 42輯
지지를 얻은 메이지천황에 의해 메이지 통일국가가 완성되게 되었다. 무사였던
그는 보신전쟁에 참가한 것이 인연이 되어 메이지유신 이후 관직에 들어갈 수
있었다. 관직을 지낸 다음, 실업계로 뛰어들어 당시 관료·권력자들과의 친분관
계가 있었기 때문에, 회사를 설립하고 이럭저럭하는 사이에 돈을 모아 근래 십
사오년 사이에 상당한 재산가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나가이 도쿠가 재산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메이지유신 당시 보신전
쟁 때에 신정부군 측에 참가했던 것이 하나의 결정적인 요인이다. 만약에 그가
구막부파(舊幕府派) 측에 들어가 신정부군과 싸웠더라면 메이지유신 이후 관
직에 오르기는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또한 사업을 하여 성공을 하기도 아주 어려웠을 것이다. 그는 메이지유신 당
시 메이지천황 편에 서서 신정부군 밑에서 막부를 타도하는 전쟁에 참가하여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일조를 했기 때문에 관직에도 오를 수 있었고, 이
후 사업을 하여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들에게 배짱이나 담력을 강조하는 나가이 도쿠는 에도시대 말기에 형인
나가이 나오키(長井直記)가 열여덟 살이 되던 해의 가을의 어느 날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성 마을 외곽에 있는 도카쿠지(等覺寺)라는 절에 사는 스님에게
아버지의 편지를 전하러 갔다. 용건은 바둑을 두러 오라든가 하는 내용으로 답
장도 필요없을 만큼 사소한 것이었다. 그런데 스님에게 붙잡혀서 이런 저런 이
야기를 하다보니 늦어져서 해가 지기 한 시간 전 쯤에 겨우 절을 나섰다.
아버지의 편지를 전해 드리고 절에서 돌아오려고 하는데 그날은 무슨 축제
가 있어서 거리가 몹시 혼잡했다. 군중 사이를 빠져나와 서둘러 돌아오려고 하
는 참에 두 사람은 어느 골목길로 접어드는 모퉁이에서 강 건너에 사는 호기
리(方限り)라고 불리는 자와 맞부딪쳤다. 호기리와 나가이 도쿠 형제는 평소
사이가 나빴다. 술기운이 있는 호기리와 두세 마디 옥신각신하는 사이에, 호기
리가 갑자기 칼을 들고 내리쳤다. 칼을 맞은 쪽은 형인 나가이 나오키였다. 하
는 수 없이 나가이 나오키도 허리에 찬 칼을 뽑아 맞섰지만, 상대는 평소에도
매우 평판이 나쁜 난폭한 자라서 잔뜩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척 셌다. 가만히
있다간 형이 질 것 같아 동생인 나가이 도쿠도 칼을 뽑았다. 그리하여 형제 둘
이서 상대인 호기리를 마구잡이로 찔러 죽였던 것이다.
서양의 칼이 「찌르고 쑤신다」를 목적으로 하는 양쪽에 날이 있는 검(劍)
인 것에 비해, 일본도는 「자른다」를 목적으로 하는 한쪽 날의 칼이다. 일본
도는 도검의 필요 조건인 「꺾이지 않고, 구부러지지 않고, 잘 잘린다」 라는
기능을 갖추고 있다. 일본도는 몇 번이고 때려 늘려서 단련시키고, 금속을 고
도로 가열한 후 급냉시키는 것에 의해 경도를 증가시켜 연마하는 일본 독자의
제법에 의해 완성된다. 때문에 여러 외국에서 예를 볼 수 없는 우수한 기술로
일본 근대문학에 나타난 에도시대의 전통 고찰 ············· 權 赫 建․金 泰 寬․車 珉 庚…107
시원스럽게 뻗친 곡선, 균형 잡힌 형태, 날무늬의 변화 등에 아름다운 매력을
뽐내고 있다. 한쪽 날로써 휘어짐을 가진 일본도의 기본형식은 헤이안시대(平
安時代)에 완성되었고, 가마쿠라시대에 우수한 도공이 배출되었다. 16세기중반
에 총포가 전래되기까지는 일본도가 무사들의 주요한 무기였다.19)
에도시대의 유교사상에 뒷받침되어져 무사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행동
규범, 도덕율인 무사도가 완성되자 일본도는 그 상징이 되었다. 무사들은 칼을
신성한 것으로 여겼고, 집안의 명예와 자랑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대대의 보물
로 여겼다. 흐려지기 쉽고 녹슬기 쉬운 칼을 항상 빛나게 하여 무사의 혼으로
서 소중하게 취급했다.20)
무사는 크고 작은 두 자루의 칼, 즉 대도(大刀)와 소도(小刀)를 외출시 언제
나 허리에 차고 나갔으며, 집에서 서재나 거실에 머물 때에는 가장 눈에 잘 띄
는 곳에 빼기 좋은 상태로 잘 비치해 두고, 밤에 취침시에는 여차 하면 손에
닿을 수 있는 머리맡에 놓아두었다.21)
칼은 이처럼 일상의 반려자로서 사랑을 받았으며, 무사들은 칼에 애칭을 부
여하는 등, 거의 숭배에 가까울 정도로 칼을 존중했다. 무사의 힘과 용기의 상
징인 칼은 무사에게 있어서 충성과 명예의 상징이기도 했다.22)
무사도에서 중요하게 강조하는 명예란 자신의 이름에 의무를 지키는 것이다.
인간이 태어나면서 지는 의무는 크게 주군을 섬길 의무와 이름에 대한 의무,
그 외의 의무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무사에게 있어 명예에 대한 유명한 이야기
로써 아래와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떡장수의 이웃집에 가난한 홀아비 사무라이가 아들을 하나 데리고 살고 있
었다. 어느 날, 그 아들이 떡집에서 놀다가 돌아간 후 떡장수는 떡 한 접시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자연히 사무라이의 아들에게 혐의를 두게 되었고
떡장수는 그에게 떡값을 내라고 하였다. 사무라이는 「아무리 가난할망정 내
자식은 사무라이의 자식이다. 남의 가게에서 떡을 훔쳐 먹었을 리가 없다」
라고 극구 해명하였다. 그럼에도 막무가내로 졸라대는 떡장수에게 참다못한
사무라이는 마침내 그 자리에서 칼을 빼 아들의 배를 갈라 떡을 먹지 않았음
을 입증해 보인 다음, 그 칼로 떡장수를 베어 죽이고는 할복해 자살하였다.23)
위의 이야기에서 무사는 칼을 빼어, 아들의 배를 갈라 떡을 먹지 않았음을
19)
20)
21)
22)
23)
學硏·語學ソフトウェア開發部 編 『JAPAN AS IT IS 日本タテヨコ』(學硏, 1985) 266쪽 참조.
위의 책, 266쪽.
니토베 이나조 저, 이만희 편 『일본인들의 무사도 정신』(학문사, 2002) 157쪽.
니토베 이나조 저, 양경미, 권만규 옮김 『일본의 무사도』(생각의나무, 2006) 152-211쪽.
김 영 『일본문화의 이해』(제이앤씨, 2002) 234쪽.
108 日本文化學報……第 42輯
입증해 보인 다음에, 떡장수를 베어 죽였던 것이다. 무사는 사사로운 일로 칼
을 빼어 남을 죽였기 때문에 자신도 할복해 자살하였던 것이다.
무사사회의 행동규범이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않았던 초기 봉건시대에는
『그 후』의 호기리와 나가이 도쿠 형제와 같이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은 사
이는 기회가 되면 칼을 뽑아 사람을 베어버렸다.
하지만 에도시대에 들어오면서 신분제도와 봉건제도가 확립되면서 무사사회
의 규칙이 엄격해 지고, 무사도에 대한 개념도 확실하게 형성되자, 칼은 무사
의 혼(魂)으로 간주되며 힘·용기·명예를 상징하는 것이 되었다. 무사도에서 칼
의 정당한 사용은 무엇보다도 강조되었으며, 그 난용(亂用)을 혐오하고 규탄했
다. 칼을 뺄 상황도 아닌데 빼서 휘두르는 자는 「비겁한 자」또는 「허세부리
는 자」라고 불려 조소(嘲笑)의 대상이 되었다. 침착하고 냉정한 무사는 칼을
뺄 때를 정확히 알았다.24)
가마쿠라시대의 무사에 있어서 최고의 승부는 「일대 일 승부(一騎打ち
)」25)였다. 검술·궁술 등으로 단련된 무사와 무사 사이의 결투는 기량과 용기
를 다한 자부심 높은 격돌이며, 이 싸움이야말로 무사를 만드는 원천이었다.
무기를 사용할 줄 모르는 일반인들은 무사의 상대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지
금의 프로 격투기 선수의 상대는 자신보다 약한 일반인들이 아닌 자신과 똑같
은 신분을 가진 프로 격투기 선수인 것과 같이, 무사들도 자신보다 약한 일반
인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무사의 자부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때에 따라서
일반인을 학살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것은 무사에게 있어서 본래의 싸움이 아
니었다. 단지 무사의 자부심인 칼을 더럽히는 행위였다. 강한 상대, 싸움에 어
울리는 상대와 목숨을 건 대결이야 말로 무사의 영웅심을 드높이는 것이고, 그
것이 자신의 자부심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26)
위와 같은 무사도의 행동규범을 고려해 볼 때 나가이 도쿠 형제와 호기리의
싸움은 무사들의 목숨을 걸고 영웅심을 드높이는 싸움이 아니었다. 단지 자부
심 높고, 명예를 자신의 생명처럼 존중하는 무사의 칼을 더럽히는 행위에 지나
지 않았던 것이다.
호기리는 술에 취해 무사의 혼으로 간주되며, 힘과 용기, 명예를 상징하는
24) 앞의 책, 니토베 이나조 저, 이만희 편 『일본인들의 무사도 정신』, 155-161쪽.
25) 일대 일 승부(一騎打ち) : 전쟁 상태에 있는 전장에서 말을 탄 전사(戰士)끼리가 일대일을 원칙으
로서 싸움을 붙이는 전투 수법이다. 결투와도 유사한 면이 있지만, 결투에는 전장(戰場)에서 실시하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는 사투도 포함되기 때문에 반드시 동의는 아니다. 일본에서는, 주로 중세(中世)
전기(가마쿠라시대 후기)까지 무사단을 구성하는 무사의 사이에 행해졌다. 수법이나 작법으로 당사자
인 무사간의 문화나 가치관, 전술 수법이 어느 정도 공통인 것을 전제로 하는 전투 수법이다.
인터넷 주소: http://ja.wikipedia.org/wiki/%E4%B8%80%E9%A8%8E%E6%89%93%E3%81%A1 참조.
26) 인터넷 주소: http://www5a.biglobe.ne.jp/~rjltof/new_page_15.htm#三 참조.
일본 근대문학에 나타난 에도시대의 전통 고찰 ············· 權 赫 建․金 泰 寬․車 珉 庚…109
칼을 난용한 비겁한 무사였던 것이다. 나가이 도쿠 형제도 무사들의 이상적인
싸움인 「일대 일 승부」를 피하고, 「일대 이」로 승부를 하여 겨우 승리한
것이다. 즉, 무사도의 이상적인 행동규범을 저버리고 나가이 도쿠 형제 둘이
합세를 하여 한 사람의 무사인 호기리를 상대로 해서 싸워, 끝내는 그를 마구
찔러 참살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가이 도쿠 형제와 호기리는 무사의 힘·용기·명예를 상징하고 혼
으로 간주되는 칼을 함부로 휘둘렀다는 결과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사사로운
일에 사투(私鬪)를 벌인 무사로서 매우 불충한 일을 저지른 것이다. 나가이 도
쿠 형제가 호기리와의 싸움에서 이겼다고 하더라도 막부의 법을 어긴 이상 죽
음을 면할 수가 없었다.27)
에도시대 후기에 무사들에게 있어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이었다. 내가 죽이지 않으면 상대가 나를 죽이는 시대였다. 그렇기 때문에 무
사는 누군가 나에게 칼을 들이 댄다면 나 역시 칼을 빼들어 맞서야 했다. 하지
만 무사들이 싸움을 할 때에는 엄격한 규칙이 있었다. 무사끼리의 싸움은 일대
일 싸움이여야 하고, 자신보다 강한 상대와의 싸움을 명예로운 싸움으로 생각
했다. 하지만, 에도시대에서 메이지시대로 넘어가는 전환기에는 무사들의 규율
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나가이 도쿠와 나가이 나오키가 호기리를 참살한 다음, 둘 다 남몰래 집을
떠난다. 나가이 나오키는 그 후 교토(京都)로 갔다. 그 당시 막말의 교토는 언
제 어떤 사건이 일어날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에 처해있었으며 피비린내가 나
는 많은 사건이 일어나는 곳이었다. 나가이 나오키가 교토의 여관에서 살해되
었을 때는 두건을 두른 떠돌이 무사들이 우르르 여관으로 몰려왔다. 당황한 나
가이 나오키가 2층 처마에서 뛰어내리면서 정원석에 걸려서 넘어지자 떠돌이
무사들이 몰려와 위에서 사정없이 내리치는 바람에, 그의 얼굴이 생선회처럼
되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 되어 죽었다.
나가이 나오키가 왜 교토에서 떠돌이 무사들에게 참살을 당했는지는 작품속
에 그 내용이 명확하게 나와 있지 않으므로 알 수가 없다. 그가 집을 떠난 지
사 년째 되던 해에 세상은 급격하게 메이지시대로 변했다.28)
하지만 나가이 나오키가 교토에서 떠돌이 무사들에게 무참하게 참살당하는
장면을 고려해보면 당시 무사들의 규율이 무너지고, 이미 예전의 무사도정신은
붕괴되어버렸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무사가 무사를 죽일 수 없다는 무사도의
규율을 지키지 않고, 아무런 이유도 없이 무사를 참살하는 것이 에도시대 말기
27) 구태훈 『일본의 무사도』(태학사, 2005) 174-175쪽.
28) 텍스트「3」357쪽 참조.
110 日本文化學報……第 42輯
에 일어나고 있었다는 것을 작가는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
가이 나오키라는 무사가 떠돌이 무사들에게 무참하게 참살당하는 것은 무사시
대의 명예로운 전통이 종막을 내리고 있는 것을 암시한 사건으로 보아 틀리지
않을 것이다.
4. 할복
무사란 정월 초하루 아침부터 그해 섣달 그믐날 저녁에 이르기까지 매일 낮
과 밤을 한결같이 마음에 죽음의 각오를 다지고 살았다. 무사사회에서는 「죽
음에의 각오」가 서 있는지 여부가 그가 무사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기본적
인요건이 되는 것이다.29)
전장에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겁쟁이 무사만큼 도움이 되지 않고 해를 끼치
는 존재는 없다. 무사도의 고전 『하가쿠레(葉隠)』의 초두에 씌어 있는 유명
한 경구(警句) 「죽음에 대한 각오가 서 있지 않으면 무사도를 추구할 수 없
다」 라는 문장도 무사사회의 토양에서 자라난 말이다. 「죽음에의 각오」30)
라는 개념은 시대가 지나도 무사의 기본자세로서 가치가 변하지 않고 있다.
무사가 「죽음에의 각오」를 가장 선명하고 강렬하게 표현하는 행위가 바로
할복(腹切り)인 것이다. 즉 할복은 칼로 배를 갈라 죽는 것으로, 자살 또는 사
형의 방법으로 이용되었다. 할복자살은 헤이안시대부터 시작되었고, 일본의 중
세시대·근세시대에 널리 행해졌다.31)
형벌로 받는 할복은 무사신분에 한하였다. 서민이 아무리 할복을 원하여도
용인되지 않았다. 할복은 무사의 특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만큼 괴로운
자살 방법도 없을 것이다. 할복하는 사람은 단도를 손에 쥐고, 자신의 배꼽에
서 3센티미터 위쪽의 왼쪽 옆구리를 찌르고, 그대로 오른쪽 옆구리까지 가르는
방법에 의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다. 무사인 그들은 배를 찌르는 깊이가 1
센티미터 내지 1.5센티미터를 넘지 않는 작법을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1.5
센티미터 이상을 찌르면 배를 가르기 어렵기 때문이다.32)
무사들은 인간의 영혼과 애정이 뱃속 어딘가에 머물고 있다고 생각하여, 나
의 영혼이 머무는 곳을 활짝 열어 당신에게 낱낱이 보여주고 싶다. 나의 영혼
이 더러운가 깨끗한가를 당신의 눈으로 확인받고 싶다는 상징적인 행동이 할
29)
30)
31)
32)
앞의 책, 니토베 이나조 저, 이만희 편 『일본인들의 무사도 정신』, 223쪽 참조.
위의 책, 223-224쪽.
下中弘 編集 『日本大事典』「第四卷」(平凡社, 1993) 237쪽 참조.
위의 책, 285-287쪽 참조.
일본 근대문학에 나타난 에도시대의 전통 고찰 ············· 權 赫 建․金 泰 寬․車 珉 庚…111
복인 것이다.33)
또한 무사들에게는 자연사(自然死)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했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할복이야 말로 무사들의 명예스러운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할복을 할 때 할복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할복하는 사람 뒤에서 목을
쳐 주는 사람을 「가이샤쿠(介錯)」라고 한다. 할복하는 사람은 단도를 들어
왼쪽 배 아래를 깊게 찌르고 나서 우측으로 배를 서서히 가른 다음 그 칼을
다시 위쪽으로 향해 가른다. 그리고 칼을 뽑아 앞으로 몸을 굽혀, 목을 치기
좋게 내민다. 그 순간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가이샤쿠가 칼을 뽑아 할복하는
사람의 목을 단숨에 내려친다. 단칼에 머리가 몸에서 떨어져 나간다. 그 몸뚱
이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용감하고 기백 있는 무사였다. 보는 것만으로도 두려
운 광경이다. 숨이 끊긴 몸뚱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처참한 피의 소리가 정숙한
분위기에서 울려 퍼질 때, 가이샤쿠는 절을 하고 할복 장소를 떠난다.34)
할복자살에 가이샤쿠가 필요하게 된 관습은, 할복하는 사람이 자력으로 복부
에 상처를 내는 것만으로는 곧바로 목숨이 끊어지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이유
에서 시작되었다. 즉, 사무라이의 자제력과 용기는 가이샤쿠가 머리를 떨어뜨
리기 전에 그가 복부를 어느 정도 갈랐는가에 따라 표현되었던 것이다.35)
가이샤쿠를 해 주는 사람은 훌륭한 신분의 사람이었으며, 양자(兩者)의 관계
는 희생자와 가해자의 관계가 아닌 주역(主役)과 조역(助役)의 관계가 되었다.
가이샤쿠의 역할은 할복하는 사람의 고통이 지속되지 않도록 집행을 도와주는
사람으로 무엇보다도 할복하는 사람이 편안한 마음으로 죽을 수 있도록 배려
하는 것이다.36)
할복은 일본 전통에 있어서 가장 명예스러운 죽음이었기 때문에 신분이 없
는 사람은 가이샤쿠가 될 자격조차 없었다. 훌륭한 신분이 있는 사람이어야 하
며, 한 번에 목을 쳐서 할복하는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어야 했다. 즉, 칼을 잘
다루고 그 누구보다 할복의 의미를 잘 이해하는 무사이어야 했다.
나가이 도쿠 형제는 평소에 매우 평판이 나쁜 호기리를 둘이 합세하여 칼로
마구 찔러 죽였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두 형제에게는 아래와 같은 에도시대
무사사회의 엄격한 관습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당시의 관습으로는 무사가 무사를 죽이면 죽인 쪽이 할복을 해야만 했
다. 형제는 그럴 각오를 하고 집에 돌아왔다. 아버지도 두 아들을 나란히 앉
33)
34)
35)
36)
앞의 책, 니토베 이나조 저『일본인들의 무사도』, 142-143쪽 참조.
앞의 책, 김 영 『일본문화의 이해』, 237쪽.
이케가미 에이코 지음, 남명수 옮김 『사무라이의 나라』(지식노마드, 2008) 382쪽.
앞의 책, 구태훈 『일본의 무사도』, 287-288쪽.
112 日本文化學報……第 42輯
혀 놓고 할복할 두 아들의 목을 자신이 직접 차례로 내리칠 생각이었다.37)
호기리와 칼을 빼든 싸움에서 나가이 도쿠 형제가 승리했다고 하더라도, 무
사가 무사를 죽인 것은 무사도의 행동규범과 관습, 막부의 규정을 어긴 것이므
로 나가이 도쿠 형제는 할복을 면할 수 없었다.38)
당시 무사라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언젠가 한 번은 주군의 일에 크게 도움
이 되고 나서 이 세상을 하직하려고 생각하고 있어야 했다. 무사가 병으로 죽
는 것조차 면목이 없는 일이거늘, 하물며 미련하게도 별것도 아닌 사사로운 싸
움에 휘말려 상대 무사를 죽이고, 자기도 할복을 해야 한다는 것은 주군에 대
한 가장 큰 불충인 것이었다.39)
호기리를 참살한 나가이 도쿠와 나가이 나오키는 단도를 손에 쥐고, 자신의
배꼽에서 3센티미터 위쪽의 왼쪽 옆구리를 찌르고, 그대로 오른쪽 옆구리까지
가르는 할복자살에 의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다. 나가이 도쿠는 할복할
때, 가이샤쿠 역할을 해 줄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아래와 같이 표현했다.
나가이 도쿠는 열일곱 살 때 사무라이 한 사람을 참살해서 할복할 각오를
한 적이 있었다고 항상 사람들에게 입버릇처럼 말했다. 나가이 도쿠는 형의
목은 자신이 치고, 자신의 목은 아버지에게 쳐 달라고 할 생각이었다.40)
위 문장을 분석해 보면, 형인 나가이 나오키의 목을 쳐 주는 가이샤쿠 역할
은 나가이 도쿠 자신이 하고, 자신의 목을 쳐주는 가이샤쿠는 아버지에게 부탁
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나가이 도쿠의 둘째 아들 나가이 다이스케는 아버지가
과거 무사시절의 이야기를 말할 때마다 「아버지에 대한 존경보다는 불쾌한
느낌이 앞섰다」고 비판한다.
나가이 도쿠의 아버지는 두 아들이 할복자살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어머니와
만나게 해 주고 싶은 마음에 먼 친척 집 잔치에 불려간 어머니를 불러 오게
했다. 어머니가 올 때까지 두 아들에게 훈계를 하기도 하고, 할복할 자리를 준
비하게 하면서 일부러 시간을 끌었다. 아버지가 시간을 끄는 사이에 무사도의
행동규범과 관습에 의해 할복자살을 해야만 되는 두 아들은 세도가였던 다카
기(高木)의 도움에 의해 아래와 같이 살아남아 남몰래 집을 떠나게 된다.
37)
38)
39)
40)
텍스트「3」, 355-356쪽.
앞의 책, 구태훈 『일본의 무사도』, 174-175쪽 참조.
위의 책, 175쪽.
텍스트 「4」, 359쪽 참조.
일본 근대문학에 나타난 에도시대의 전통 고찰 ············· 權 赫 建․金 泰 寬․車 珉 庚…113
어머니가 초대되어 갔던 곳이 마침 어머니의 먼 친척이 되는 다카기(高木)
라는 세도가의 집이었던 점이 두 사람에게는 천만다행이었다. 왜냐하면 그 무
렵은 사회에 변화가 일기 시작한 때로 무사의 규율도 예전처럼 엄격하게 지
켜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살해된 상대는 평판이 나쁜 무뢰한 청년이
었다. 그래서 다카기는 어머니와 함께 나가이 집으로 와서 관아의 공식적인
지시가 있을 때까지 당분간 할복을 시키지말고 그대로 놔두도록 아버지를 설
득했다. (中略) 다카기는 그 후로 바삐 뛰어다녔다. 우선 영주의 중신(重臣)을
설득했다. 그러고 나서 중신을 통해서 영주를 설득했다. (中略) 형제는 한동안
한방에 틀어박혀서 근신한 후 둘 다 남몰래 집을 떠났다.41)
무사도의 규율과 관습에 의해 할복자살을 해야만 되었던 나가이 도쿠와 형
나가이 나오키는 당시 자신들의 어머니의 먼 친척인 세도가 다카기가 영주의
중신과 영주를 설득하여 간신히 할복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가이 도쿠는 자신이 사업에 종사하여 성공한 것은 성실이라는 도의(道義)
때문이라고 공언하고 있다. 그가 생각하는 도의는 에도시대의 무사교육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그는 실제로 메이지유신 이전인 에도시대에 무사 고유의 도의
본위(道義本位) 교육을 받고 성장했다. 그는 옛날에 자신이 도의본위 교육을
받았던 강한 마음가짐이 있었기에 현재의 사업을 이 정도로 성공시킬 수 있었
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나가이 도쿠는 자신이 에도시대에 무사 고유의 도의본위 교육을 받
고 자란 것을 자랑하고 있지만, 무사도의 행동규범과 관습을 어기고, 세도가
다카기에게 부탁하여 편법에 의해 할복하지 않고 살아남은 이유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런 그의 행동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나가이 다이스케는 아버지를 대할 때마다 「아버지는 자기 자
신을 숨기는 가짜 군자거나, 그렇지 않으면 분별력이 부족한 바보거나 둘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5. 결론
이제까지 분석 점검한 것 가운데 핵심적인 것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 호기리와 나가이 도쿠 형제와의 싸움은 일본의 무사들이 전통적으로
지켜왔던 「일대 일 승부」가 아니었다. 먼저 칼을 맞은 사람은 나가이 나오키
41) 텍스트 「3」, 356-357쪽.
114 日本文化學報……第 42輯
였다. 나가이 나오키가 호기리와 싸워 칼싸움 실력 차이로 인해 패배하여, 그
가 죽음 다음, 나가이 도쿠가 정정당당하게 형의 원수를 갚기 위해 나서는 것
이 무사도에서 요구하는 행동규범이었다. 그런데 나가이 도쿠는 자신의 형이
칼에 맞아 죽을 것 같으니까, 아직 싸움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칼을 빼어 들고
나가, 형과 함께 호기리를 무참하게 참살했던 것이다. 즉, 나가이 도쿠는 무사
들의 전통적인 행동규범이었던 「일대 일 승부」가 아닌, 「일대 이 승부」를
통해 호기리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 무사가 사사로운 싸움에 휘말려 상대 무사를 참살했을 경우에는, 에도
시대 무사의 행동규범과 관습, 막부의 규정 등을 어긴 것이므로 할복을 해야
했다. 또한 에도시대에 무사가 싸움에 휘말려 상대 무사를 죽이고 할복하여 죽
는다는 것은 주군에 대한 가장 큰 불충이었다. 호기리를 참살한 나가이 도쿠
형제는 에도시대 무사의 행동규범과 막부의 규정에 의해 할복자살로 인생을
마감했어야 했다. 그런데 어머니의 먼 친척인 세도가 다카기가 영주의 중신과
영주를 설득하여 나가이 도쿠 형제는 간신히 할복을 피해 살아남았던 것이다.
셋째, 에도시대에 무사들의 행동규범과 관습 등은 무사도로 정립되어, 무사
는 용기·명예·충성을 목숨보다 소중히 여겼다. 호기리와 나가이 도쿠 형제와의
일대 이 싸움, 나가이 도쿠 형제의 편법에 의한 할복자살 회피 등은 에도시대
말기에 무사들이 높은 사회적 지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구 열강의 일본
진출에 의한 근대문명 수용 과정을 거치면서, 점차 무사의 전통적인 규율, 관
습 등이 예전처럼 지켜지지 않고 속물(俗物)적으로 몰락(沒落)하는 단면이 작
품에 그대로 드러난 것이라고 생각된다. 에도시대 말기에 태어난 나쓰메 소세
키는 무사들이 자신들의 명예로운 전통을 지켜가지 못하고 메이지로 시대가
바뀌는 과정에서, 본 모습을 버리고 편법을 동원하여 살아남는 모습과 무사도
라는 전통(傳統)이 허세(虛勢)로 남아버린 메이지시대의 풍경 등을 작품을 통
해 숨김없이 묘사했던 것이다.
일본 근대문학에 나타난 에도시대의 전통 고찰 ············· 權 赫 建․金 泰 寬․車 珉 庚…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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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精堂,
116 日本文化學報……第 42輯
要 旨
Following is the summary of what the writer has analyzed.
First, the fight between Hogiri, and the Nagaitoku brothers was not「Single
Combat」kept traditionally among Japanese warriors. Nagaitogu could beat
Hogiri through 「One on Two fight」, which was against the traditional
standards of behavior of Warriors.
Second, the Nagaitoku brothers, who decapitated Hogiri, had to finish their
lives by self-disembowelment, but could have a narrow escape from it. That
was because a power, Takagi, who was a distant relative on the maternal side
, persuaded the lord of a manor and the senior statesmen.
Third, in the late Edo era, warriors couldn't keep their honorable tradition in
the course of a change to Meiji era. They deserted themselves and resorted to
an expedient to survive. That is, the tradition of warriors only remained in a
bluff in the Meiji era. It is said that the warriors' bluff is well and openly
described in Nastume Soseki's works.
キーワード: Tradition, a Bluff, murder, Meiji era, One on Two fight,
Self-disembowelment
투
고 : 2009. 5. 31
1차 심사 : 2009. 6. 13
2차 심사 : 2009. 6. 27
포스트 프롤레타리아 여성
-
백신애의 「적빈」과 이북명의 「벌거숭이
부락(裸の部落)」을 통해 본 ‘능부(能婦)’의 재탄생-
明 惠 英*
(e-mail : [email protected])
1)
目次
1 들어가며
2 유교적 女性像
3 능부(能婦)의 삶
3.1 내조하는 여성
3.2 ‘바구니’와 ‘함지’로 4 소외되는 性
4.1 ‘금반지’의 속내
4.2 빛바랜 ‘몽당치마’
5 나오며
1. 들어가며
1930년대 들어 카프소설(프롤레타리아 문학)은 이전과 다른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는데, 이것은 이전 프로소설이 결하고 있던 혹은 간과했던 문제들을 인
식해나가는 과정이었다. 논쟁과 작품 창작을 통해 카프계 작가들은 문학이 단
순히 정치적 과제를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이 현실과 인간의 운명
을 탐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이들은 이전에 범했던 정치
주의의 흔적을 일소하는데 큰 힘을 기울였고, 그동안 편협한 국제주의의 이상
에 매달려 식민지 자본주의의 조선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진정한 국
*전남대학교 일어일문과 강사, 한일근대 비교문학 전공.
底本;백신애(1934.11), 「적빈」,
한국현대대표소설선4 (1996), 창작과비평사. 이북명
(1937.2), 「벌거숭이 부락(裸の部落)」, 近代朝鮮文学日本語作品集 五巻(2004), 緑蔭書房.
118 日本文化學報……第 42輯
제주의로부터 오히려 벗어났던 것에 대해 반성하면서 조선적 특수성을 차츰
깨달아나가게 되었다.1)
식민지 자본주의의 현실 속에 살고 있는 인간의 운명을 제대로 탐구하지 않
고 근대적 노동자계급의 삶과 실천을 제외해서는 현실의 온전한 모습을 그려
내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노동자 생활을 직접 경험하며 소설을 썼던
이북명의 등장은 프로소설계에 경이로 받아들여졌다.
이북명은 젊은 시절의 질소비료 공장 체험을 바탕으로 쓴 단편소설 「질소비
료공장」은 1932년《조선일보》에 연재되나, 검열에 의해 2회로 중단되어 1935
년에 文學評論 에 「初陣」이라는 타이틀을 붙여 일본어로 재발표 되었다. 또한
1937년 2월
文學案內 에 발표된 단편 「벌거숭이 부락(裸の部落)」을 비롯해
일본어 소설을 여러 편 남겼다.2) 이북명은 1930년대 중반 이후 일제의 탄압이
날로 심해지자 이를 피해 함남 장진의 수전촌으로 들어가 생활했으며3) 시기적
으로 「벌거숭이 부락」은 이 때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백신애 역시 1925년부터 <조선여성동우회>4)에 참가하고 있었으며, 사회주
의적 여성 운동5) 전개에 노력했던 작가이다. 1927년에는 사회주의 체험을 위
해 시베리아 행을 감행 했지만, 두만강 국경에서 일본 경관에게 잡혀, 심한 고
문을 당해 불임의 몸이 되었다고 한다.6) 그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단편소설 「
코레이(고려인)」( 新女性 , 1934)를 발표했다.
「적빈」( 開闢 , 1934.11)과 「벌거숭이 부락」( 文學案內 , 1937.2)은 두 프롤레
타리아 작가들이 조선의 현실을 직시하여 완성한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적빈」은 백신애의 대표 소설로, 무능하고 게으른 두 아들과 며느리를 보살
1) 김재용(1996), 「카프 신인의 등장과 소설 영역의 확대」, 한국현대대표소설선 , 창작과비
평사, p.474
2) 「初陳」( 文学評論 ,1935.5),「鉄を掘る男」( 国民文学 ,1942.10), 「鳳さん」( 国民総力 ,1944)
(布袋敏博(2004), 近代朝鮮文学日本語作品集 解説, p.327)
3) Daum백과사전, http://enc.daum.net/dic100, 2008.9.18
4) 1924年 5月 4日서울 세종동 조선여자강습원에서 발기 총회를 가졌다. 발기인으로는, 박
원희·정종 명·김필애·정칠성·김현제·홍순경·오수덕·우봉운·지정신·주세죽·최정삼·허정숙·이춘
수 등 당시 사회주의여성 활동가들이 참가했다. 동년 5月 23日 서울 경운동 천도교에서 열
린 창립총회에서 신사회건설과 여성해방운동에 참가하는 여성을 양성한다는 강령을 채택
해, 여성해방을 위해서는 부인들의 경제적 독립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경찰 감
시 하에서 적극적인 활동은 불가능했으나 최초 여성 사상단체로서 전국에 70개 이상의 지
부를 결성했다. (Daum백과사전, http://enc.daum.net/dic100, 2008.9.18)
5)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 사회의 착취 구조를 분석하지만,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은, 사
회 계급뿐만이 아니라, 나아가서 ‘성 계급’도 분석대상으로 한다. 즉, 여성차별의 기원이 자
본주의적인 가부장제 속에 있다고 주장한다. 노동과 가족의 분리, 생산 노동과 가사 노동의
분단, 그리고 전자의 우위성이라고 하는 뿌리 깊은 이데올로기 속에서 여성차별의 복합적
요인을 찾고자 하였다. (リサ タトル(1991), フェミニズム事典 , 明石書店, p.230)
6) 青柳優子(1997), 韓国女性文学研究 , お茶の水書房, pp.71~76
포스트 프롤레타리아 여성 ···························································································· 明 惠 英…119
피는 노모의 생명에 대한 애착을 그린 작품이다. 작자는, 어떠한 곤경 속에서
도 살아남으려고 고군분투하는 모성을 형상화하여, 무능력한 남자들을 내조하
는 강한 생명력을 그려내고 있다.
「벌거숭이 부락」은 가난에 찌든 순남 가족과 하층민의 일상을 그린 작품이
다. 순남 가족은 K읍 가까이의 매립지 부락에서 살고 있으며, 순남 아버지는
경제적으로 무능력한 주정꾼으로 가정을 돌보지 않는다. 이 때문에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가 바다를 메우는 매립 작업장에 매일 같이 나가 함지로 자갈을
나르는 일을 하여 가족을 부양한다.
송지헌(1996)은 「적빈」을 “매촌댁 노녀와 벙어리 며느리를 통해 묘사되는,
여성의 수난에 대한 관찰과 고발”로 평가하였다.7) 서정자(1999)는 “모성의 원
형을 보여준 작품”이라고 평하며, 덧붙여 “매촌댁 노녀의 분배 전략을 치가(治
家)의 원리”로 논하였다.8) 또한 다소 비판적 시선인 아오야기 유코(青柳優子,
1997)의 “아들 손자의 탄생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지나치게 기뻐하는 장면
은, 무능력한 아들의 재생산이라는 시점을 작자는 외면하였다.”는 지적9) 등 대
부분의 선행연구가 페미니즘 비평적 시점에 치우쳐 있다.
「벌거숭이 부락」은 월북 작가의 소설인 점이 작용한 때문인지 호테이(布袋)
에 의해 발굴되기 전까지는 그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다.10) 따라서 선행연구
또한 전무하다.
「적빈」과 「벌거숭이 부락」에는 1930년 당시 조선의 하층민들의 삶과 유교적
여성상이 언급되어 있다. 이러한 점에 초점을 맞추어, 1920년대의 신여성, 1930
년대 초반의 투쟁하는 공장의 프롤레타리아 여성에 이어 형상화 된 유교적 여
성상인 ‘능부(能婦)’의 삶을 재조명 하고자 한다.
2.
유교적 女性像
근대에 들어 1910년대 신여성들이 주창한 여성상인 ‘자립한 개인’의 개념에
는 결혼한 여성은 포함하지 않고 있다. 나혜석은 단편 「경희」(1918)를 통해 결
혼 후 겪게 되는 구습(=유교)의 폐단을 지적한 다음, 자신은 결혼하지 않겠다
는 각오를 보인다. 김명순 역시 단편 「돌아다 볼 때」를 통해 여주인공이 며느
7) 송지헌(1996), 페미니즘 비평과 한국소설 , 국학자료원, p.134
8) 서정자(1999), 한국근대여성소설연구 , 국학자료원, p.221
9) 青柳優子(1997), 앞의 저서, p.75
10) 권영민(2004), 한국현대문학 대사전 과 권영민(1990), 한국근대문인대사전 에는 누락
되어 있다.
120 日本文化學報……第 42輯
리 되기를 거부하고 사랑을 택하는 장면이 연출된다. 김일엽도 소설 「자각」
(1926)을 통해 구여성의 혹독한 시집살이(=유교 규범)를 폭로하며 이혼을 결심
하기에 이른다. 더욱이 1930년대의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조차도 ‘사회의 구성원
으로서의 여성’을 지향하며, 대부분 결혼하기 전의 공동체안의 여성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렇듯 한국에서 결혼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곧 유교
적 규범을 실천하는 일이며, 그것은 곧 강력한 유교문화 속에서 한 평생을 살
아야 하는 이른바 구속을 의미하였으므로 여성 작가들은 이에 강한 반론을 제
기해 왔던 것이다. 이러한 측면은 현대를 살아가는 결혼한 한국 여성들의 삶
속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유교적 규범은 어떠한 방식으로 담론화 되었을까?
조선 후기인 17세기 이후 조선의 사대부들은 자녀교육을 위한 가훈서(家訓書)
를 편찬하게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여훈서(女訓書)’가 탄생하였다.11) 김언순
(2005)은 사대부들이 편찬한 여훈서의 특징을 세 가지로 분류해 논하였다.12)
첫째, 조선 여성의 삶을 시집살이 중심으로 구조화하였다. 이를 위해 조선 유
일의 출가외인(出家外人)논리를 창출하였다. 사대부 여훈서
규범 (작가와 연대 미상)에는 출가외인에 대한 다음과 같은 구절이 명시되어
있다.
여자가 출가하면 원부모(遠父母) 이형제(離兄弟)하고 시집이 즉 내 집이 되나
니 시부모를 극진히 섬겨야 며느리 도리를 잃지 아니 하나니라.13)
즉, 여성이란 존재는 출가하면 부모와 멀어지고 형제와 헤어지는 남이라는
의식이 성립하는 것이다.
둘째, 제가(齊家) 중심의 기능적 여성상을 강조하였다. 즉 유교 가부장제 유
지를 위한 현실적인 필요에 따라, 여공(女工;음식과 의복 만드는 일)과 치산(治
産;재산의 관리)에 능한 능력 있는 부인 즉 ‘능부(能婦)’14)라는 새로운 기능적
여성상을 탄생시켰다. 능부는 내조(內助)의 개념을 넘어서는 것이다. 또한 능
부는 남성의 완성을 위해 보조하는 단계를 뛰어넘어 가정경제를 확실하게 책
임지는 것이다. 이것은 여성의 세계가 수신제가(修身齊家)에 머물렀던 유교사
회에서 여성이 자신의 성취를 가져오는 하나의 방법이 되기도 하였다. 조선사
11) 그 전에 이미 중국에서 들어온 典範 여훈서가 기초가 되었다.
12) 김언순(2005), 「朝鮮時代 女訓書에 나타난 女性의 正體性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학위논문, p.150~153
13) 규범 「사천지도라」, p.102, 김언순(2005)논문 재인용.
14) 능부(能婦)는 고려말기 신흥 사대부들을 일컬었던 ‘능문능리(能文能吏)’에서 따온 개념
이다.
포스트 프롤레타리아 여성 ···························································································· 明 惠 英…121
회의 유교 가부장제는 효부와 열녀를 통한 관념적인 지배 위에, 능부의 현실적
인 참여에 의해 유지되었다.
셋째, 불투기(不妬忌)를 강조하였다. 성리학의 엄격한 욕망의 통제는 남성들
의 외도와 축첩이라는 현상을 낳게 되었으며, 그로 인한 가정불화를 해소하기
위해 여성에게 불투기라는 규범을 요구한 것이다. 불투기의 덕목은 자유로운
욕망의 발산이 제한되어 있던 유교적 질서 속에서 남성의 성욕을 해소할 수
있는 출구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유교의 禮를 바탕으로 세워진 조선시대의 禮敎的 여성상15)은 생
존을 위한 수용이라는 형태로 내면화 되었다. 이러한 유교적 여성상이 1930년
대 후반에 발표된 문학 작품 「적빈」과 「벌거숭이 부락」에서 부활한 점은 매우
흥미롭다.
「적빈」의 서두를 보면 매촌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그의 둘째 아들이 매촌(梅村)이라는 산골로 장가를 간 후로는 그를 부를 때
누구든지 ‘매촌댁 늙은이’라고 한다. 늙은이라는 꼭지에다가 ‘매촌댁’이라고 특
히 댁(宅)자를 붙여 부르는 것은 은진 송씨(恩津宋氏)로서 송우암(宋尤庵)선생
의 후예라고 그 동리에서 제법 양반 행세처럼 해 오던 집안이 늙은이의 친정
으로 척당이 됨으로서의 부득이한 존칭이다. (「적빈」, p.459) 매촌댁은 다름 아닌 우암 송시열(1607~1689)의 후손이라는 사실이 소설 모
두에 명시되어 있다.
성리학자 송시열은 조선여성의 최초의 사대부 여훈서인
(이하
우암션생계녀서
계녀서 로 칭함)를 편찬한 사람이다. 그는 출가를 앞둔 큰딸에게 아버
지로서 성공적인 결혼을 위한지침을 기록한 계녀서 를 펴냈다.
차는 다음과
계녀서 의 목
같다.16)
1. 부모셤기도리라
2. 지아비셤기도리라
3. 싀부모셤기도리라
4. 형졔화목도리라
5. 친척을화목도리라
6. 식가라치도리라
7. 졔사밧드도리라
8. 숀디졉도리라
9. 투긔지말나도리라
10. 말을조심도리라
11. 지물존졀리쓰도리라
12. 일부지런이도리라
15) 禮가 잘 실현된다는 의미는 인간이 각자의 처해진 분수 즉 차별적인 사회 질서에 순응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16) 우암션생계녀서 (국립중앙도서관장본), 내훈ㆍ계녀서 , 김종권 역주(명문당, 1986)
122 日本文化學報……第 42輯
13. 병환모시도리라
14. 의복음식도리라
15. 노비부리도리라
16. 꾸이고밧도리라
17. 팔고사도리라
18. 비슈원도리라
19. 종요로온경계라
20. 옛착행실말이라
계녀서 는 순 한글로 되어 있으며 내용이 간결하고 일상생활에 요긴한 내
용을 담고 있어 손쉽게 필사를 통해 확산되어 나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위의
내용에서 특히 불투기를 강조한 것은 축첩으로 인한 가정 내의 갈등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며, 팔고 사는 도리와 꾸고 받는 도리는 규범을 벗
어나 현실적인 생활의 지혜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송시열은 조선
여성의 유교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프롤레타리아 작가 백신애가 1930년대 후반에 「적빈」을 통해 제시한 여주인
공이 송시열의 후손이라는 점과, 이북명이 「벌거숭이 부락」를 통해 형상화한
유교적 여성상은 프로 여성의 대체 캐릭터라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다음 항
에서 유교적 여성상인 능부(能婦)의 삶을 살펴보고자 한다.
3. 능부(能婦)의 삶
3.1 내조하는 여성
「적빈」의 여주인공 매촌댁 노녀에게는 두 아들이 있다. 큰아들은 오래전에
죽은 남편과 닮아 욕심이 많고 심술이 사나워 마을에서 “돼지”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사람구실을 못한다. 그나마 둘째아들은 일찍 결혼한 덕에 다년간 남의
집 고용살이로 돈을 벌어 가계에 보탠다.
그리고 둘째아들만 하더라도 남의 집에 고용살이로 있을 때는 그의 아내와
늙은이는 날만 새면 남의 집으로 돌아다니며 일해주고 밥 얻어먹고 무명베짜
는 집에 가서는 베 매어주고 옷감 얻고 하여 고용살이해서 남긴 돈은 그대로
소롯이 모아두게 되었었다. 모아둔다 치더라도 그까짓 일년에 십원 내외에불
과한 돈이지마는 늙은이는 천냥 만냥같이 귀중히 여기고 든든하였다. ‘어서몇
십원 모이면 남의 논이나 밭을 대지(貸地)로 얻어서 제 농사를 지어 보리라.’
하는 희망에 즐거워하며 남의 집에 가서 뼈가 녹게 일해주고 천대받고업신을
받아도 재미가 있었다. (「적빈」, pp.461~462)
포스트 프롤레타리아 여성 ···························································································· 明 惠 英…123
매촌댁이라는 호칭은 둘째아들이 매촌으로 장가를 들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
름이다. 따라서 “매촌댁”은 장래성이 없는 큰아들 대신 둘째아들에게 희망을
갖는다는 의미에서
남아선호사상은 유지되고 있으나 장자(長子)선호사상은
부정된다. 매촌댁은 둘째아들이 고용살이를 해서 벌어 온 돈은 아들 내외의 장
래를 위해 “소롯이 모아”두고 대신에 둘째며느리와 허드렛일을 하여 생활비를
충당하는 지혜를 보인다. 이렇게 해서 모은 돈으로 매촌댁은 드디어 “흙담집”
한 채를 구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머지 돈으로는 꿈에 그리던 논을 사려는
계획을 세우지만, 이도 마을 노름꾼의 말에 솔깃해 속아 넘어간 둘째아들의 과
욕 탓으로 하루아침에 날리고 만다.
옛적부터 기쁜 일이란 오래 계속되지 않는 법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맹랑한
일이 또 어데 있으리라고 늙은이와 매촌이 부부는 밤낮 이를 갈고 애꿏은 담
뱃대만 두들겨 분질러도 한 번 낚인 그 돈이야 돌아올 리가 만무하여 늙은이
는 목을 놓고 울었다. (「적빈」, p.462)
이처럼 믿었던 둘째아들마저 매촌댁을 한 없이 실망시키자 “목을 놓고” 우
는 것으로 감정을 정화시킨다. 그러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첫째 아들이 사방
공사를 해놓은 산에서 나무를 도둑질해오다 들켜 구류를 사는 대신에 마을에
서 쫓겨나는 등 악재가 되풀이 된다.
이렇듯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매촌댁은 두 며느리가 동시에 임신을 해 산달
이 가까워지자 “아마도 너희 둘이 모두 아들을 낳을 게다.”하며 스스로에게 희
망의 메시지를 보낸다. 그리고 이번에는 며느리들이 출산 때 사용할 미역과 쌀
을 확보하는데 온 힘을 쏟는다. 이런 매촌댁에게 마을 사람들은 입을 모아 “늙
은이는 그런 것들을 자식이라고 걱정을 해? 제 입추신도 못하면서 자식 만들
줄은 어떻게 알어.”하며 비아냥거렸지만 이럴 때마다 그녀는 몇 안 되는 이를
드러내며 “히에.”하고 “고양이처럼” 웃어넘기며 현실을 긍정한다. 이런 그녀의
모습은 소설 전반에 걸쳐 일관되게 묘사되어 있다.
늙은이는 지긋지긋하게도 망나니인 두 아들을 원망이나 미워나 하는 것도 이
제는 면역성이 되어 그대로 잠자코 방안으로 들어갔다. (「적빈」, p.465)
바가지의 밥을 덜어서 돼지를 주고 자기는 손가락에 묻은 밥알만 뜯어 먹었
다. (「적빈」, p.470)
“대체 해산을 하면 뭐를 먹을려고 이러고만 있어?” 늙은이는 목에 말라붙은
124 日本文化學報……第 42輯
것 같은 작은 소리로 노하지도 않고 말하였다. “일하러 갈래두 배가 고퍼
서…” “그렇다고 누웠으면 하늘에서 밥이 떨어지나? 젊은것은 어데 갔노.”
“뒷산에 나물 캐러…” (「적빈」, p.465)
매촌댁은 이제 더 이상 “지긋지긋하게도 망나니”인 두 아들을 원망하거나
미워할 기력도 없다. 그런 두 아들을 낳은 게 죄라도 되는 듯 “잠자코” 현실을
감내할 뿐이다. 한심한 아들들에게 그다지 “노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누웠으
면 하늘에서 밥이 떨어지나?”하며 얼리듯 나무란다. 그런 후에는 “바가지”로
자신의 밥을 나누어 주거나 쌀을 퍼주며 한없는 모성애를 보인다.
한편 「벌거숭이 부락」에 등장하는 순남 어머니 상황 또한 매촌댁과 별반 다
르지 않은 여성이다. 순남 가족은, 아버지 문성도, 어머니, 장녀 순남, 차녀 금
남, 장남 복돌, 차남 복남 등 여섯 식구이며, 이들은 함경남도 어느 해안에 조
성된 매립지 부락에서 토지를 빌려 집을 짓고 생활하고 있다.
가정을 돌보지 않는 술주정뱅이 남편과 돼지 새끼들 같은 아이들을 혼자 힘
으로 부양하고 있는 엄마는, 이 조상대감제가 최대의 위안이었다. 맑은 날, 흐
린 날은 매립지 공사장에 나가 함지로 모래와 자갈을 날라다 주고 60전을 받
아, 어둑해진 골목길을 파김치가 되어 집으로 돌아 왔다.17) (「벌거숭이 부락」,
p.120)
40대인 순남 어머니는 “가정을 돌보지 않는 술주정뱅이 남편”과 “돼지 새끼
들 같은” 먹성 좋은 자식들 부양을 위해, 매일 같이 매립 공사 현장에서 “함
지”로 골재를 날라 하루에 60전의 임금을 받아 온다. 일이 끝나면 언제나 “파
김치가 되어 집으로 돌아”오지만, 남편에게는 한마디의 불평이나 불만도 표하
지 않은 채 묵묵히 현실을 감내한다. 게다가 한심한 무능력 남편의 안녕을 위
해 무당을 불러 조상에게 제사를 올리는 것을 “최대의 위안”으로 삼는다.
이번 조상대감제 비용 일금 5원을 엄마는 개똥 아줌마 집에서 육부 이자
를 주고 빚을 내 왔다. 남편 나이가 기수인 해에는 반드시 닭을 신에게 바치
는 습관이 있었다. 남편은 금년에 47세이다. (중략) 엄마는 밥 두 그릇과 고기
전부를 함지에 담아 순남을 시켜 성인 무당에게 갖다 주도록 일렀다.18) (「벌
17) 生活を知らない、酒呑みの夫と、豚の仔見たいな餓鬼達を、自分の手一つで養って行く母
にはこの祖上大監祭が最大の慰安であつた。照る日曇る日、埋立工事場に傭はれて、ハムジで
砂、砂利を運んでは、六十銭貰つて、薄暗くなつた小路をクタクタに疲れて帰つて来た。
18) 今度の祖上大監祭費、一金五圓也を、母はケトンバーの母の所に行つて、六分利子で借用
して来た。夫の年齢が、奇数成る年には必らず鶏を神に供へる習慣であつた。夫は今年四十七
포스트 프롤레타리아 여성 ···························································································· 明 惠 英…125
거숭이 부락」, p.121)
그녀가 이렇게 빚을 내서까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이유는 “자손의 번
영”과 “가문의 융성”, “지긋 지긋한 밑바닥 생활로부터 벗어나기”위해서이다.
즉 문씨 집안의 가업을 일으키기 위함이다. 여기에다 남편의 나이가 홀수인 해
에는 닭을 잡아 상에 올리는 관습에 따라 상차림이 달라진다. 이렇게 정성을
다한 조상대감제가 끝나면 아이들이 그토록 먹고 싶어 해도 주지 않았던 귀한
음식을, 막노동에서 쓰던 “함지”에 담아 신처럼 믿는 “聖人무당”에게 몽땅 바
치는 등 마지막까지 정성을 다한다.
순남 어머니는, 자신의 인생은 오로지 가족을 위해서 존재하며 그것이 곧 자
신을 위하는 길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술주정뱅이이자 게으름뱅이인 무능력
한 남편에 대해서도 직접적으로 불만을 토로하지 않고 묵묵히 내조를 다한다.
그러나 그녀의 치적은 여기까지로, 기실 그녀는 소설에서 이름조차 부여받지
못하며, 딸을 기생으로 팔아넘기는 비정한 엄마로 형상화된다.
매립지 주민 모두가 거지로 나섰다. 그러나 순남 어머니는 아무래도 신시가지
로 거지로 나서기는 싫었다. 그래서 그날 밤 남편 성도에게 성인 무당의 본
순남의 점괘에 대해 꺼내며 딸을 팔자고 하였다. 남편도 찬성했다. (중략) 성
도는 고주사에게 머리를 벅벅 긁으며 생활난을 빌미삼아 순남을 점괘대로 어
딘가에 팔겠다고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19) (「벌거숭이 부락」, p.127)
순남은 16세로 야학20)에서 2년간 공부한 덕에 더듬거리기는 하지만 한글을
읽을 수 있으며, 평소 세탁과 물 길러오기, 동생들 돌보기를 헌신적으로 행하
는 어머니의 조력자이다. 그런 그녀를 홍수로 생활난에 허덕이게 되자 남편을
부추겨 비밀 창기 소개업자라인 고주사 부부에게 팔아넘긴 것이다.
である。(中略)母は御飯二サバリと、魚肉類全部をハムジにのせて、順男に聖人巫女の家に
持つて行かせた。
19) 埋立部落民全体が、乞食に早変わったからであった。しかし順南の母は、どうしても新市
街の方に、飯貰いに行く気にはなれなかった。それで或夜、夫の成道に、順南を占った聖人巫
女の占卦を話してから、相談を持ち出した。夫も賛成した。(中略)成道は高主事の前で、ゴ
シゴシ頭を掻きながら、云い憎くそうに生活難を訴え、順南を聖人巫女の占い通り何処かへ、
世話してくれと頼んだ。 20) 농민 조합 강령에는 ‘국고 지원 탁아소와 무료 산파원 설치, 농촌 여성을 위한 정치, 사
회적 차별 철폐, 여성을 위한 야학 설치, 일제 어용 단체인 여자 청년단과 부인단의 즉각
해체’ 등의 사항을 명시해, 농촌 지역에 잔존해 여성을 억압한 모든 악법과 구태 폐지를 주
장했다고 되어 있어, 1930년대에는 하층계급의 사람들을 위한 야학이 많이 설치되어 농촌
여성들의 큰 반향을 불렀다. (전경옥 외3인(2004), 한국 여성 정치 사회사 , 아시아 여성연
구소, p.306)
126 日本文化學報……第 42輯
이처럼 「적빈」과 「벌거숭이 부락」에는 매촌댁과 순남 어머니에 의해 ‘내조’
하는 유교적 여성상이 표상되어 있다. 두 여성은 하나같이 삼종지도(三從之道)
를 내면화하고 있지만, 자식과 남편에게 ‘내조’의 부덕을 몸소 실천하는 적극적
인 유교적 여성상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그렇다면 과연 유교가 조선의 결혼한 여성에게 원했던 ‘내조(內助)’란 구체적
으로 어떻게 해서 생겨난 이념일까?
유교에서 주창한 유교적 여성관은 덕녀(德女)이다. 이는 중국의 반소가 말한
사덕(四德; 婦德, 婦容, 婦言, 婦功)을 충실히 수행하고, 남편과 시부모에게 순
종하며, 남편의 생사와 무관하게 평생 절개를 지키며, 가정을 화목하게 이끌고,
부지런하며 검소한 여성이다. 그러나 조선의 유교는 여성에게 삼종지도와 불경
이부(不更二夫) 담론으로 여성을 가족 내에서 배제하는 한편, 가문과 국가를
완성한다는 차원에서 여성들의 생성의 힘에 주목하여 ‘내조’라는 참여의 이념
을 만들어 냈다. 중국의 유학자 유향은
열녀전
21)을
통해 여성을 집안에 머
물게 하면서 남편과 아들을 통해 여성의 능력을 가정 경영은 물론, 국가 경영
에까지 미치게 하는 방법으로서 내조를 구상하였다. 이러한 적극적인 내조는
삼종지도로 규격화된 수동적인 여성에게는 기대하기 어려운 항목이다. 유향이
제시하는 여성상은 한편으로는 유교적 여성상을 충실히 내면화하면서도, 또 다
른 한편으로는 지혜라는 형식을 빌려 능동적으로 남성을 완성시키는 모습이다.
이처럼 어머니로, 아내로, 그리고 딸로서 사리를 일깨우고 재앙을 대비시키며,
적극적으로 남성을 이끄는 ‘내조하는’ 여성상을 제시하였다.22)
매촌댁은 “망나니”인 두 아들을 위해 살아가는 지혜를 몸소 실천을 통해 가
르친다. 큰아들에게는 임신한 아내를 배려하는 가르침을, 둘째아들에게는 사리
를 일깨워 가정을 일구어가는 방법을 가르치며 내조의 덕을 유감없이 발휘한
다. 순남 어머니 또한 가문의 번성과 47세인 남편의 앞날을 위해 조상에게 제
21) 유향은 한나라 성제(成帝) 때의 관록대부로 조비연 형제가 임금의 총애를 믿고 권세를
부리는 것을 보고 이 책을 지었는데, 여인의 덕과 선악이 국가의 안정·혼란과 관계가 있다
고 했다. 이를 송나라 왕회(王回)가 모의(母儀)·현명(賢明)·인지(仁智)·정순(貞順)·절의(節
義)·변통(辯通)·얼패(孼嬖)의 7전으로 나누었다. 〈대명회전 大明會典〉의 기록에 따르면 이
책은 세종 초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 稗官雜
記〉에서는 1543년(중종 38) 유항(楡沆)·신정(申珽)이 번역했다고 한다. 국립도서관의 필사
본과 1918년 태화서관에서 발행한 활자본 〈렬녀젼〉이 전한다. 필사본은 송(訟)과 찬(贊)
을 생략한 것 이외는 유항의 〈열녀전〉 37편을 그대로 완역했으며, 활자본은 총 66회로
유항의 열녀전에서 32명, 한대 이후부터 송대까지의 인물 34명을 싣고 있다. 신분, 가계를
언급하는 부분과 〈시경 詩經〉 등의 구절을 인용한 평가 부분이 생략되어 있고 여인의 행
적만을 기술, 전(傳)의 형태를 벗어나서 소설의 형태로 바뀌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Daum백과사전, http://enc.daum.net/dic100, 2009.1.24)
22) 김언순(2005)의 앞의 논문. pp.83~84
포스트 프롤레타리아 여성 ···························································································· 明 惠 英…127
사하며 내조한다. 그러나 그녀의 내조는 오로지 남편과 아들을 위해서만 발휘
되며, 평소에 헌신적으로 가사를 도왔던 순남이는 딸이라는 이유로 매정하게
버려진다.
3.2
바구니와 함지로
「적빈」의 매촌댁과 「벌거숭이 부락」의 순남 어머니는 영락한 집안으로 시집
와 무능력한 남편과 자식들을 위해 가사는 말할 것도 없고, 기울어 가는 가정
경제에까지 발 벗고 나선다. 이러한 그녀들의 사고의 저변에는 가족을 위해 희
생하는 한 가정의 아내와 어머니로서 가족 부양에 몸을 사리지 않는 ‘강한 어
머니상’을 내포하고 있다.
그는 그 길로 바로 단골로 다니며 일해 주던 집들을 돌아다니며 사정이야기
를 하고 얼마라도 꿔주면 그만치 두고두고 일을 해주리라고 애원을 해보아도
한집도 시원케 대답해주지 않았다. (「적빈」, p.464)
그래도 그는 행여나 하는 생각으로 또 한 집을 들렀다. 그는 남들의 천대함을
슬퍼할 줄도 몰랐고 낙심할 줄도 몰랐다. (중략) 쌀 한 되, 보리쌀 두 되, 명
태 두 마리, 미역 한 쪽을 두 말없이 내어주는 것이었다. (중략) 그는 아무 고
맙다는 인사도 하지 않고 여러 가지를 바구니 속에 넣어가지고 머리에 이었
다. (「적빈」, pp.464~465)
늙은이는 지금까지 먹으라고 주는 것을 사양해본 적이 없는 터이라 김치 중
발을 넓적 받아 국물부터 후루룩 삼켜보는 것이었다. 그의 몸뚱이는 곯아 배
틀어졌어도 오직 창자만은 무쇠같이 억세고 튼튼하여 지금까지 배앓이란 것
을 해본 적이 없었다. (「적빈」, p.468)
매촌댁은 출산을 앞둔 두 며느리들을 위하고, 무능력한 두 아들을 대신하여
남의 집일을 해주기로하고 가불을 요청하지만 여의치 않자 동냥도 마다하지
않는다. 한때는 양반 가문의 후손으로 대접받던 그녀지만 몰락한 가문의 각박
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허드렛일도 동냥질도 모두 사양할 수 없는 처지
이다. 그런 그녀는 “남들의 천대함을 슬퍼할” 겨를도 “낙심할” 여유도 없이 지
금까지 “배앓이” 한 번 하지 않은 무쇠 같은 천한 몸으로 거듭나, 동냥 받은
물건을 한꺼번에 “바구니 속에 넣어” 머리에 이고 집으로 가져온다. 이 후에도
손자를 맞이하기 위한 노녀의 치산(治産) 활동은 계속된다.
128 日本文化學報……第 42輯
이날은 이 집에서 이것저것 치워도 주고 앓는 아이의 시중도 들고 하여 저녁
까지 잘 얻어먹고 돌아오려 할 때 마누라는 수고하였다고 치맛자락에 보리쌀
두어 되를 부어주었다. (「적빈」, p.468)
이렇게 남의 집 일로 마련한 음식은 노녀의 지혜의 잣대에 따라 두 며느리
들에게 적당히 배분된다. 노녀는 다년간 허드렛일을 한 결과 여러 가지 생활의
노하우를 쌓아 마을에서 병이 나면 으레 매촌댁을 찾았다.
평생에 하도 많은 남의 집에를 돌아다닌 늙은이는 남의 앓는 것도 많이 보고
고치는 것도 많이 보고 듣고 해온 터이라 지금 와서는 웬만한 서투른 의원보
다 아는 것이 많아 체증도 내려주고 ‘객귀’도 물려주고 조약도 가르쳐주고 하
여 동리에서는 앓는 사람이 있으면 약방의 감초같이 반드시 불려가는 것이었
다. (「적빈」, p.467)
이는 매촌댁이 유교적 여성상을 내면화하고 ‘내조’와 ‘치산’에 최선을 다한
결과 얻어진 명성이다. 그러나 그녀의 현실타개적 삶의 자세 또한 살아남기 위
한 생존 전략의 하나로써 수용한 결과라고 볼 수 있겠다.
이러한 노녀의 억척스러움은 소설의 후반에 가서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저까짓 보리쌀 두 되를 가지고 몇 날을 지탱할까.’하는 생각에 그의 두 다리
는 가리가리 힘이 빠지고 돼지와 매촌이의 못난 것이 새삼스럽게 얄미웠다.
그리고 눈앞에는 오늘 난 아기의 두 다리 사이에 사내란 또렷한 그 표적이
어릿어릿 나타나고 사라지고 하였다. 그는 이윽히 걸어가는 사이에 몹시 뒤가
마려워서 잠깐 발길을 멈추고 사방을 둘러 본 후 속옷을 헤치려다가 무엇에
놀란 듯 재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사람은 똥 힘으로 사는데…’ 내일 아침까지
굶고 자야 할 처지이므로 지금 똥을 누어버리면 당장에 앞으로 꺼꾸러지고
말 것 같았던 까닭이었다. (「적빈」, p.471)
노녀는 돼지와 매촌이의 “못남”을 내조하며, 갓 태어난 손자를 부양하기 위
해 “똥 힘”까지 비축하는 등 다시 한 번 자신에게 기합을 넣는다.
그렇다면 「벌거숭이 부락」의 순남 어머니의 억척스러움은 어느 정도일까?
소설 서두에는 순남 어머니의 모습이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몇 분 뒤 꼬마들이 달려 나왔던 골목에서 무서운 형상을 한 40대 여성이 굵
직한 버드나무가지를 꺾어 들고 맨발로 달려 나왔다. (중략) 소리 안 나는 총
어디 없을까.(중략) “이 간나새끼 벼락이나 맞아죽어라.”23) (「벌거숭이 부락」,
포스트 프롤레타리아 여성 ···························································································· 明 惠 英…129
p.119)
순남 어머니 역시 넷이나 되는 아이들의 교육과 어려운 가계를 책임지다보
니 “무서운 형상”의 주인공이 되고 만 것이다. 자식들을 향해 직설적으로 내뱉
는 욕설은 그녀가 처한 긴박한 처지를 대변해 준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순남 어머니는 “매립지 공사장에 나가 함지로 모래
와 자갈을 날라다 주고 60전을 받아, 어둑해진 골목길을 파김치”가 되어 돌아
올 정도로 전력을 다해 여섯 가족을 부양하고 있다. 게다가 제사에 쓸 음식을
준비하는 일마저도 남편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억척을 보인다.
점심때가 지나자, 어머니는 복순을 빨래터에 보내고 어린 자식들을 밖으로 내
쫓고서야 혼자서 닭을 잡아 삶고, 밥을 짓고 생선을 구웠다.24) (「벌거숭이 부
락」, p.121)
이처럼 순남 어머니는 여자의 몸으로 “혼자서 닭을 잡아” “조상대감제”에
올릴 제수를 손수 마련하고, 행여 방해가 될까 “어린 자식들을 밖으로 내쫓고”
정성을 다해 음식을 만든다. 그러나 그 해에도 순남 어머니의 지성은 조상님들
에게 닿지 않아, 또 다시 궁핍한 생활이 계속된다. 그러던 어느 날 순남 어머
니는 겨울 땔감을 마련하기 위해 부엌돌 어머니와 복돌 어머니를 동행하고 여
느 때처럼 석탄 도둑질에 나선다.
아줌마들은 산 밑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앉아 복돌에게 명했다. 복돌은 익숙
한 솜씨로 네발로 기어 철망 경계선까지 가서 울타리 기둥의 못을 빼고 옆으
로 제켰다. 그러자 철망이 늘어져 출입구가 생겼다. 잠시 후 복돌은 아줌마들
이 기다리는 곳으로 가서 망보는 영감이 없다는 것을 알렸다. 세 아줌마들은
함지를 들고 앉은걸음으로 철망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들은 어둠 속에서 석탄
더미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중략) 그녀들은 땔감을 이렇게 해결
하고 있었다. 막다른 곳까지 내몰린 그들에게 죄책감은 제삼의 문제였다. 잡
히더라도 먹여는 주겠지 하는 것이 그녀들의 마지막 위안이었다. 죽느냐 사느
냐 하는 절박한 전투 앞에 인정, 도덕, 청렴…이 다 무슨 소용인가?25) (「벌거
23) 数分後、この餓鬼等が出て来た同じ小路を、すごい形相をした四十婦が、太い柳の枝をシ
カと右手に握って、素足のまま走ってゐた。(中略)音のしない銃は、ないかいな。(中略)
カンセキ
此畜生奴、落雷にぶつかって、焦げうせろッ。 24) 昼過ぎ、母は福順を洗濯にやり、餓鬼達を外へ追ひ出してから、独りで鶏を殺して煮、ご
飯をたき魚肉をやいた。
25) 母達は、山の崖下の闇の中に、うづくまると、福突に命じた。福突はもうこの手には馴れ
130 日本文化學報……第 42輯
숭이 부락」, p.125)
성남 어머니를 비롯한 동네 아줌마들은 복돌이를 앞세우고 “함지”를 지참
한 채 일상처럼 석탄을 도둑질해 땔감을 충당해 왔다. 그녀들은 궁핍한 생활을
탓하며 “잡히더라도 먹여는 주겠지”하는 배짱으로 “죄책감”이라고는 느끼지
않는 그야말로 억척 아줌마들이다.
이처럼 예순셋의 매촌댁과 사십대 중반의 중년 여성인 성남 어머니는 하나
같이 어려운 가정 경제를 책임지며 억척스러움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살아간다.
그렇다면 이러한 억척 여성상은 단지 집안이 궁핍했기 때문에 생겨난 유형
일까? 또한 조선 시대 후기에 창조된 이른바 사대부 집안의 능부(能婦)와는
어떤 유사성이 있을까?
김언순(2005)은 능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능부(能婦)는 내조(內助)의 개념을 넘어서는 것이다. 능부는 남성의 완성을 위
해 보조하는 단계를 뛰어 넘어 가정경제를 확실하게 책임지는 것이다. 이것은
여성의 세계가 수신제가(修身齊家)에 머물렀던 유교사회에서 여성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고양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되기도 하였다. 조선사회의 유교 가부장제는 효부와 열녀를 통한 관념
적인 지배위에서 능부의 현실적인 참여에 의해 유지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
다. 조선의 여성들은 한편으로는 삼종지도를 내면화하면서도 가정 경제에 대
한 책임을 위해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강한 여성의 모습을 발휘하였다. 조선사
회에서 능부에 대한 요구
는 여성에게 실질적인 권한을 부여하지 않은 채,
힘든 노동위에 가정 경제까지 책임져야 하는 이중의 수탈이 되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강한 여성상에 대한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기여하였다.26)
다시 말하자면 이러한 능부의 형태는 이타주의(利他主義)를 원칙으로 한다
는 점에서 “개인”을 강력하게 부르짖었던 근대초기 신여성들의 계몽정신과는
たと見えて、四這ひに這ふて車庫の針金の境界線まで行くと、柵の一つの釘を横にひねった。
すると針金が緩んで、出入り口が出来た。しばらくすると福突は母達の所に戻って来て、見張
爺の居らない事を知らせた。三人の母はハムジを持ったまま、居行這いで柵内に入って行っ
た。彼女達は、暗がりの中で、今、粉炭の小山の方へ、抜き足、さし足で一歩一歩近づいて行
くのである。(中略)彼女達は薪炭問題を斯うして解決した。切羽詰った状態に置かれてゐる彼
女等には、罪悪は第三の問題であった。何、つかまったら、食わせるだろうーこれが彼女等の
最悪の場合の慰安であった。ノルカソルカの関が原の戦いの前に、人情、道徳、清廉…があっ
てたまるものか!皆無のドン底に喘いで居る彼女等には、自分達の行動の全部が、当然のよう
に思われた。
26) 김언순(2005)의 앞의 논문. p.152
포스트 프롤레타리아 여성 ···························································································· 明 惠 英…131
배치되는 이념이다. 따라서 이러한 가부장제적인 유교적 관념은 구습(舊習)으
로 치부되어 신여성과 엘리트 신남성들에 의해 철저히 부정되어 왔다. 그러던
것이 국가경제는 말할 것도 없고 세계경제가 파산을 맞이하게 된 1930년대가
되자, 사회 속에서 투쟁하는 프롤레타리아 여성의 모습은 자취를 감추고, 다시
한 번 능부라는 유교적 여성상이 문학작품을 통해 부활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능부’의 부활은 오늘날 여성의 몸의 수신(修身)차원에서 재고되고 있
다. 이은선(2000)은 “여성과 남성간의 복잡한 사회적 관계와 불평등을 생물학
적인 또는 전(前)사회적인 몸으로 환원시키는 방식은 지금까지 사회학적 페미
니스트들에게 결코 생산적이거나 효과적인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그러나 페
미니즘이, 몸과 性이 사회체계 안에서 갖는 중요성을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온
전히 이해하려면, 이 자연적 몸이 사회적 관계에 기여하는 바를 고려해야하며,
우리의 신체가 사회적 관계의 기초를 형성하는 것을 진지하게 수긍해야 한다
.”27)고 주장한다.
오늘날 페미니즘은 우리에게 몸이 우리 존재의 근원성임을 일깨워주었다. 이
러한 일깨움을 통해서 여성들은 이제 자신들의 몸과 성의 주체가 됨을 알게
되었고, 그리하여 지금까지 그들에게 금지되었고 억압되었던 性과 쾌락의 언어
를 더욱 주체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몸의 언어는 항상 다시 부패
할 수 있고, 오히려 우리를 더욱 더 비인간화하는 기제가 될 수 있음을 경험하
였다. 그래서 다시 주체적인 ‘몸의 기획’을 이야기하게 되었고, 유교 전통의 다
양성으로부터 陽明의 대안적인 몸닦기의 의미를 제고하기에 이른 것이다.28)
즉, 유교 전통을 통해서 관계맺음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여성의 몸을 희생으로
삼지 않는 유교예식을 개발해 나가야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 또한 페미니
즘의 성찰적 견지에서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하겠다.
매촌댁과 순남 어머니의 생명력 넘치는 억척스러운 모습은 사대부들의 몰락
이 사회문제화 되었던 조선 후기에 요구된 내조에 치산을 더한 능부의 정신을
이어 받고 있으며, 그 대상이 서민층으로 확대 되었다는 느낌과, 보다 더 서민
적인 모습으로 탈바꿈 된 그야말로 오늘날의 “아줌마”의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오늘날 아줌마라는 호칭은 당당하다 못해 뻔뻔하고 주책없으며 성적 매
력이 없는 억척스런 여성의 대명사가 되었다.29) 그러나 이 호칭이 능력 있는
여자 즉 능부에서 변용된 개념이라는 것을 안다면 아줌마들에 대한 시선도 달
라지지 않을까?
27) 이은선(2000), 「유교적 몸의 修行과 페미니즘」, 유교와 페미니즘의 만남Ⅱ , 한국유교
학회, p.14
28) 이은선(2000), 앞의 논문, p.27
29) 여성을 위한 모임(1999), 제3의성-중년여성 바로보기 , 현암사, p.26
132 日本文化學報……第 42輯
4. 소외되는 性
4.1
‘금반지’의 속내
한편 「벌거숭이 부락」의 순남 어머니를 비롯해 결혼한 부락의 중년 여성들
은 하나같이 가정 경제를 책임지고 노력하는 “능부”로 그려지지만, 그녀들에게
서 성적 매력이란 찾아 볼 수 없다. 게다가 2년 전 매립 부락으로 이사와 남편
의 사고로 졸지에 과부가 된 한 중년 여성은 부락 남성들을 통해 성적 욕구를
해결한다. 이렇듯 「벌거숭이 부락」에는 기혼 여성의 탈성화, 과부의 성적 욕구
해소와 이에 따른 매매춘이 문제시 되고 있다.
먼저 순남 어머니의 섹슈얼한 모습은 소설을 통틀어 단 한번 묘사된다. 그녀
는 40대 여성으로 평소 화가 날 땐 “무서운 형상”으로 “굵직한 버드나무가지
를 꺾어 들고” 입에 담기도 힘든 욕설을 퍼부으며 아이들을 교육하는 그야말
로 여자로서의 성적 매력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캐릭터이다. 그런 그녀에게
어느 날 30원이라는 거금이 생긴다.
그날 밤 엄마는 개똥아줌마의 빚을 갚고 남은 돈으로 신시가지에 있는 금방
에 가서 한 돈 오부의 금반지를 19원 50전에 사서 끼웠다. 성도는 저녁도 먹
지 않은 채 밖으로 나갔다. 그대로 그날 밤에 돌아오지 않았다. 5전 갈보 집
에 가서 잔 것이다.30) (「벌거숭이 부락」, p.128)
어느 해 여름, 장마로 부락 전체가 물에 잠겨 벌이가 없어지자 순남 어머니
는 남편 성도를 설득해 딸 순남을 기밀창기업자인 고주사에게 80원을 받고 판
다. 딸의 몸값인 80원을, 아버지 성도와 어머니는 각각 50원과 30원씩 나누어
갖는다. 그녀는 그길로 시내 금방에 가서 배분받은 돈의 절반 이상을 투자하여
금반지를 사서 끼고 남편 앞에서 멋을 부린다. 그러나 남편 성도는 이런 아내
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눈길한 번 주지 않고 “저녁도 먹지 않은 채” 매매
춘을 나가 외박까지 한다.
다음은 부락의 중년 여인들이 석탄 서리를 나서면서, 남편에게 여자로서 취
급받지 못하는 자신들의 고충을 우회적으로 한탄하는 장면이다.
30)
その夜嬶あはケトンバーの母の借金を返済すると残りの金を持って新市街の或る金房に
行って一匁五分の金指輪を十九円五十銭で買ってはめた。成道は夕飯も食べずに出て行つた
が、そのまゝその夜家へ帰らなかつた。五銭ガルボの家に行つて寝たのであつた。
포스트 프롤레타리아 여성 ···························································································· 明 惠 英…133
칠성녀의 엄마는 “저 미련한 놈, 5전 갈보 집에 썩은 XX냄새 맡으러 매일 밤
간데요. 툇”31) (「벌거숭이 부락」, p.124)
“남자들이란 정말 개와 한가지야. 저런 더런 간나에게 홀려서….”32) (「벌거숭
이 부락」, p.125) 부락의 중년 여성들은 하나 같이 남편에게 성애의 대상에서 소외당한 쓸쓸
함을 “5전 갈보”를 비난하는 것으로 해결하려 한다.
그렇다면 유교는 결혼한 여성의 성을 어떻게 이념화해 통치해 왔을까? 조선
사회가 유교 이념에 근거해 유지되는 방식은 바로 예비례(禮非禮) 담론이었다.
내면의 도덕적 완성과 차별적인 사회질서에 순응하는 것이 도덕적이며, 인간다
움의 실현이라는 담론은 사회 구성원들의 자발적인 동의를 이끌어 내어 효과
적인 통치를 가능케 했다. 조선의 禮敎가 지향하는 이상적 여성상은 여중군자
(女中君子)로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첫째, 예교적 여성은 中性的 혹은 無性的인 존재로 性性이 완전히 배제된 존
재이다. 유교에서는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는 논리로 여성의 性을 매우 불온
시 하였다. 따라서 성적 존재로서의 여성이라는 자각은 금기 사항이었다. 특
히 며느리는 생물학적인 성을 매개로 가문에 편입되나 실제 생활 속에서는
성적 기능을 배제 당한다. 며느리의 성은 출산의 도구로서만 의미를 지닐 뿐
여성으로서의 존재를 일깨우는 조건(성욕)으로서는 주목받지 못한다. 즉 며느
리의 성은 출산을 통한 가문의 승계를 담당하는 가문의 도구인 동시에 출산
을 통해 가문 내 며느리의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도구이기도 하다. 여성에 대
한 정절의 강조나 재가금지 모두 이차원에서 설명이 가능하다.33)
그러나 왜인지 푸념은 하지만 정작 그녀 자신들의 성적 매력을 갈고 닦아
남편의 마음을 돌리려는 자주적 노력은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양은영(1995)은 유교적 문화 속에서 결혼한 여성들은 “정숙한 아내" “얌전한
아내” “알뜰한 아내” 콤플렉스에 빠져 있다고 지적하며, 적극적인 성생활을 위
31)
七星女の家の前に来た時、七星女の母が夫と何か口論してゐる声がきこえた。(中略)
「こんなに夜遅く、何んの喧嘩ですの?」副突の母が、歩きながら訊いた。「あのトンチキ野
郎、五銭ガルボ奴め(カンナ)の所に、腐つたXXの匂嗅ぎに、毎晩行くよつ、ペツ」(中
略)「あの梅毒(ナチル)でもうつつたら、大変ですよ。わしもう死んでも、あのトンチキ野
郎とは寝ないわよ」
32)「男の奴つて全く犬ハンガジ(同じ)だよ。あんなキタナイ女奴め(かんな)に惚れ
て…。」
33) 김언순(2005)의 앞의 논문. p.38
134 日本文化學報……第 42輯
해 아내들에게 도 변화를 요구한다. 또한 “여자의 성감대는 육체에 있기보다는
정신적인 부분에 있다. 여자를 무시하고 존중해주지 않는 남편은 결코 아내를
성적으로 만족시킬 수 없다.”34) 고 일침을 놓기도 한다.
한편, 부락의 중년 과부의 성생활을 살펴보자. 그녀는 2년 전 매립지 부락으
로 이사와 졸지에 아이들과 남편을 잃었다. 부락에서 “제일의 미인”인 그녀는
남편을 잃고 성적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해 “대차 십장”과 하룻밤을 보낸다.
5전 갈보! 그녀는 부락에서 제일의 미인이자 성병 매개자였다. 공장지대로 나
와 두 명의 아이를 잃고 게다가 남편이 작년 여름 대차를 밀다가 대차가 넘
어지는 바람에 깔려 무참히 죽은 후 그녀는 먹고 살 방도가 없었다. 대차 십
장에게 하룻밤을 허락 한 뒤 그녀는 자신의 육체를 파는 것 외에는 생활의
방도가 없었다. 그녀가 이 부락에 온 것은 작년 가을이었다. 이 부락에서 처
음으로 그녀의 몸을 산 사람은 고주사였다. 그 때 고주사는 그녀에게 얼마라
도 쥐어 주려고 지갑을 열어보니 5전밖에 없었다. 그거라도 담배를 산다며 그
녀는 받았다. 그 때부터 모두들 그녀를 5전 갈보라고 불렀다.35) (「벌거숭이 부
락」, p.124)
그 후 돈 많은 고주사가 5전에 그녀의 몸을 산 것을 계기로, 그녀는 몸을 자
원화 한다. 그녀가 상대한 남성들은 칠성녀의 아버지, 박돌 아버지, 호민 아버
지, 미혼자 마당돌, 게다가 순남아버지까지 그 숫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
도다. 매매춘으로 그녀는 성적 욕구도 해결하고 경제적 여유도 누린다.
부락민들이 대홍수로 대지 임대료를 재촉 받고 있으나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는 사람이 늘어나는 판국이라 모두들 임대료를 낼 엄두도 못 내고 있지만
그녀는 여유롭다.
15일 정오까지 대지임대료를 지불한 집은 겨우 성도네와 5전 갈보 두 집뿐이
었다.36) (「벌거숭이 부락」, p.128) 34) 양은영(1995), 아줌마는 야하면 안 되나요? , 다솔, p.28
35)
五銭ガルボ!彼女は部落一番の美人であり、性病の媒介女であつた。工場地帯に出て来
て、二人の愛児を失ひ、その上昨年の夏、トロッコ押しの夫が、トロッコにひかれて無惨な死
を遂げると、彼女には、生活の途が絶えた。トロッコの什長に一夜を許すと、彼女は自分の肉
を売るより、生活の途がないと云ふ事を知つた。彼女がこの部落に来たのは、昨年の秋であっ
た。この部落で、最初彼女の肉を買ったのは高主事であった。その時高主事は、彼女に幾らか
持たせてやらうと思って財布を探すと、生憎五銭白銅一個しかなかった。それでもタバコを買
うといって、彼女は受け取った。この時から皆は、彼女を5銭ガルボと呼んだ。
36) 十五日の昼までに貸地料を支払った家は僅か成道と五銭ガルボの二軒しかなかった。
포스트 프롤레타리아 여성 ···························································································· 明 惠 英…135
부락에서 임대료를 낸 집은 성도네와 5전 갈보네 뿐이다. 성도는 딸을 기생
으로 팔아 서 받은 돈으로, 5전 갈보는 몸을 팔아 번 돈으로 임대료를 낸 것이
다. 그러나 작자는 그런 그녀를 내버려두고 보지는 않았다. 성에 대해 무지한
그녀를 성병인 매독에 걸리게 한 것이다. 국가로부터 위생적으로 관리 받지 못
한 그녀는 매독에 걸려 부락 남성들에게 옮기는 매개자로 전락하여, 3차 감염
원인 부락 여성들에게 미움의 대상이 된다.
거저 매독이라도 옮기는 날에는 큰일이요. 나는 죽어도 저 미련퉁이 하곤 잠
자리 같이하지 않을 거요.”37) (「벌거숭이 부락」, p.124)
이처럼 결혼한 여자들의 성은, 아이를 만드는 ‘낳는성’과 ‘쾌락의 성’으로 이
분된다. 이러한 이분화에 의해, 아내라는 이름의 그녀들은, 쾌락의 성에서 배제
되고 입장이 반대되는 여자끼리의 라이벌 의식이 조장된다. 쾌락의 성에서 제
외된 매립 부락의 그녀들은 상대편을 “갈보”, “썩은 XX”, “부정한” 등으로 비
하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4.2
빛바랜 ‘몽당치마’
「적빈」의 매촌댁은 오래전에 남편이 죽고 홀로 살아가는 이른바 과부다. 예
순셋의 노인인 그녀는 오로지 두 아들을 내조하는 일에만 몰두할 뿐, 그녀의
性적 매력은 철저히 배제된다. 문중에서 그녀의 모습은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늙은이는 혼자 생각다 못하여 노란 것, 흰 것, 검은 것이 한데 섞인 몇 가락
안 되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쓰담아 꽁져 찌르고 누덕누덕 걸어 맨 적삼에다
걸레 같은 몽당치마를 입고 빨리 집을 나섰다. (「적빈」, p.464)
모두들 비웃고 핀잔주고 놀려주고 할 뿐이라 늙은이는 이지러지고 뿌리만 남
은 몇 개 안 되는 이빨을 드러내어 “히에.”하고 고양이 같이 웃어 보이는 수
밖에 없었다. 웃으면 곯아 배틀어진 우엉뿌리 같은 그 얼굴에 누비질한 것같
이 잘게 깊게 잡힌 주름살이 피어지며 온 얼굴이 흰 줄로 밭 골진 것같이 보
였다. (「적빈」, p.464)
늙은이는 남은 밥을 벙어리에게 먹여놓고 차마 어린것을 싸놓은 치마를 벗기
37) 「あの梅毒(ナチル)でもうつつたら、大変ですよ。わしもう死んでも、あのトンチキ野
郎とは寝ないわよ」
136 日本文化學報……第 42輯
지 못하여 떨어진 속옷 바람으로 어둡기를 기다려 자기 집으로 보리쌀을 가
지러 가는 것이었다. (「적빈」, p.470)
그는 흘러내리는 옷을 연방 움켜잡아 올리며 코끼리 껍질 같은 몸뚱이를 벌
름거리는 그대로 뒤가 마려운 것을 무시하려고 입을 꼭 다문 채 아물거리는
어두운 길을 줄달음을 치는 것이었다. (「적빈」, p.471)
위의 인용을 종합해 보면 매촌댁은 “노란 것, 흰 것, 검은 것이 한데 섞인
몇 가락 안 되는 머리”와 “이지러지고 뿌리만 남은 몇 개 안 되는 이빨”과
“웃으면 곯아 배틀어진 우엉뿌리 같은 그 얼굴에 누비질한 것같이 잘게 깊게
잡힌 주름살이 핀” 얼굴에 “코끼리 껍질 같은 몸뚱이”를 하고 있다.
여기에 매촌댁이 걸치고 있는 “걸레 같은” “몽당치마”는 노녀의 쇠퇴한 섹
슈얼리티를 대변해 준다. 예로부터 치마는 입는 방법에 있어 반인(班人)계급은
좌(左)로, 서민계급은 우(右)로 여미어 입어 반상을 가렸고, 색상에 있어서는
출가하여 아이를 낳을 때까지는 다홍치마, 중년이 되면 남치마, 노년이 되면
옥색·회색 계열의 치마를 주로 입었다. 개화기에는 여성들의 사회활동으로 짧
은 통치마가 나타났고 이에 맞추어 저고리의 길이는 늘어났다. 오늘날 예전의
짧은 치마류는 양장으로 대신하게 되었고 긴 치마는 한복으로 계속 유지되고
있다.38)
그러나 노녀의 치마는 더 이상 여성성을 나타내고 미를 더해주는 물건이 아
니라 “갓 태어난 손자를 싸”고 마을 사람들이 던져주는 보리쌀을 받는 용기
대신으로 쓰인다. 게다가 이제는 몽당치마마저 갓 태어난 손자에게 빼앗기고,
속옷 차림으로 길을 나서는 탈성화 된 노녀의 모습은 안쓰럽기까지 하다.
늙은이는 무표정한 얼빠진 듯한 얼굴로 체머리만 바쁘게 쩔레쩔레 흔들며 연
방 콧물을 잡아 뜯듯이 닦았다. (「적빈」, p.465)
더욱이 매촌댁은 나이가 들어 “체머리”를 흔들기 까지 한다. 이러한 “체머
리” 증상은 체력이 떨어지고 기력이 허해 머리까지 기운이 잘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머리까지 힘이 잘 미치지 못하게 되니 흔들흔들 거리게 된
다는 게 병리적 해석이다.39) 이렇듯 소설 속에서 노녀는 무능한 남편과 아들
부양에 평생을 보낸 탓으로 기력이 쇠잔해 진 탈성화된 모습으로 묘사된다.
38) Daum백과사전, http://enc.daum.net/dic100, 2007.9.18
39) 남상천 한의원 (https://www.medcity.com)
포스트 프롤레타리아 여성 ···························································································· 明 惠 英…137
김기영(2005)은 노년의 性에 대해 “여성들은 어려서부터 ‘순결주의’를 강요받
았고 결혼 후에는 ‘여필종부’의 이념에 따라 스스로의 욕망과 쾌락을 남성에
맞추어 억제해왔다. 이러다보니 자녀와의 관계에서나 가족에 대한 여성들의 충
성도와 집착은 상당히 높다. 흔히 ‘모성’이라고 불리는 여성적 특징은 어떤 면
에서 바로 스스로의 욕망과 쾌락을 억제하고 제한한 것을 대가로 해서 주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사회적으로 성의 개방 풍조에 대해 여성들은 대체로 비판
적이다. 그리고 그 이유의 대부분을 ‘가정파괴'에서 찾는다. 이는 자기 욕망을
부정하고 쾌락을 스스로 금지해왔던 여성의 희생이 ‘가정’을 지킬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기 때문에 여성들은 배우자인 남편에게도 가정에의 충성을 요구하
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즉, 성의 개방 풍조(성산업이나 상업화)에 대한 격렬히
항의하는 보수적인 여성들의 밑바닥에는 공평한 희생에 대한 생각이 깔려있는
것이다. 이렇게 사회적으로 형성된 여성 성욕의 특징은 억제, 금지, 희생이다.
이것을 바꾸지 않으면, 이런 관념과 관습을 고스란히 갖고 있는 여성 노인의
경우 아무리 노년의 성을 이야기한들 달라질 것 같지 않다.”고 역설하였다.40)
그녀의 주장처럼, 사회주의 운동가와 프롤레타리아 문학자로서 31세에 요절
한 작가 백신애에게도 역시 여성 노인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시선은 없다. 보수
적인 아버지와 첩 문제로 괴로워하던 어머니를 곁에서 지켜보며 성장한 그녀
에게 개방적 성애의 시점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까?
「적빈」의 매촌댁의 섹슈얼리티 역시 이러한 작가의 체험과 문화적 기반위에
서 그려지고 있으며, ‘강한 모성’을 발휘하는 대신 성적 욕망을 억제한 탈성화
된 노인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형상화 되어 있다. 그러나 성숙된 사회라면 성적
으로 소외받는 이들의 불만 섞인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5. 나오며
한국의 대표적 프롤레타리아 작가 백신애와 이북명의 체험적 소설 「적빈」과
「벌거숭이 부락」을 포스트 프롤레타리아의 여성상 제시라는 관점에서 고찰해
보았다.
「적빈」과 「벌거숭이 부락」의 무대는 각각 가난한 농촌마을과 매립지 부락이
며 하층민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정서를 계승하고
있다. 그러나 소설에 형상화되는 여성들은 더 이상 현실을 부정하거나 권력과
맞서 투쟁하지 않는다. 즉, 그녀들은 저마다 자신의 처지를 긍정하며 무능한
40) 김기영(2005), 다시 찾은 性의 renaissance , 선미디어, pp.193~195
138 日本文化學報……第 42輯
남편과 아들을 위해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남의 집 허드렛일로 가족을 부양
하고 내조하는 지극히 탈정치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또한 여성의 삶은 결혼 후
의 ‘시집살이’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유교의 가르침을 내면화하여 살아 온 구여
성들의 삶이 재현되어 있다. 이는 삼종지도를 내면화한 ‘내조’하고 ‘치산’하는
조선 전통의 유교적 여성상인 능부(能婦)의 모습이다.
이러한 여성상은 개화기부터 일관되게 추구되어 온 자립한 ‘신여성’의 이미
지로부터도 권력과 투쟁하며 ‘노동자를 위해 죽어갔던’ 프로 여성의 이미지로
부터도 크게 벗어난 독자적인 것이다. 이러한 능부의 재탄생은 김재용의 지적
처럼 1930년대의 프로 작가들이 ‘조선의 특수성’을 직시하고 ‘조선 현실’을 그
리려 했던 것에서 얻어진 결과라 생각된다.
그러나 두 소설에는, 가난에 맞서는 여성들의 치열한 삶이 생명력 넘치는 필
치로 그려지지만, “금반지”와 “몽당치마”로 대변되듯 性 역시 유교적 시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녀들의 성은 결혼한 여성의 성, 노년 여성의 성이라는 점
에서 탈성화 되고, 낳는성과 쾌락의 성으로 이분화 되어 소외된다.
포스트 프롤레타리아 여성 ···························································································· 明 惠 英…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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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명문당,
140 日本文化學報……第 42輯
要 旨
1920年代の半ばから1930年半ばの約10年間においての韓日文壇は、プロレタリア作品が主
流であった。ところが、日本政府の相次ぐ検閲と弾圧により、プロ作家たちは’転向’を余儀なくさ
れた。当然の如く、文学のテーマもまた世界恐慌といった時代状況と相まって’闘争’から’生活’
へと移っていった。
ペク
シンエの「赤貧」とイ
ブクミョンの「裸の部落」は、こうした厳しい状況の中で生ま
れた。当然の如く、文学者たちの目に移ったのは「朝鮮人民たちの生活状況」であった。す
るとそこには、行き場を失った男性たちの姿と、彼等に代わって頑張っている女性たちの姿があっ
た。二つの作品には、生活力を失った家長の代わりに、家計を支えている女性の姿が描かれ
ている。彼女たちは家族のためによく働き、夫や息子を内助する。それは他でもない、朝鮮時
代から引き続いている’能婦’の姿であったのである。
二人のプロ作家は、「闘争するプロ女性」から生活する伝統的女性であり、脱政治的な
「能婦」を再誕生させているのである。
キーワード: プロレタリア女性、下層階級、無能力、家父長、脱政治、能婦
투
고 : 2009. 5. 31
1차 심사 : 2009. 6. 13
2차 심사 : 2009. 6. 27
‘족보’와 ‘창씨개명’
-김달수의 「族譜」와 가지야마 도시유키의 「族譜」를
중심으로-
박제홍* ㆍ김순전**
1)
2)
(*e-mail : [email protected])
(**e-mail : [email protected])
目次
1. 서론
2. 김달수와 가지야마 도시유키의 문학세계
2.1 김달수의 문학과 삶
2.2 가지야마의 문학과 삶
2.3 「족보」의 상징성과 개작
3. 양 작품의 차이와 한계
3.1 조선작가와 일본작가의 인식 차이
3.2 양 작가의 공통성(개인의 한계)
4. 창씨개명의 양상
5. 결론
1. 서론
최근 정부의 금성출판사 교과서에 대한 수정요구1)는 시대의 상황에 따라 역
사인식이 달라 질 수 있다는 문제점을 잘 표출한 예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미국의 유명한 한국 근현대 역사가인 부르스 커밍스(Bruce Cumings)는 정부
의 역사교과서 수정 압력에 대해서 “정부가 역사교과서에 개입하는 것 자체가
* 전남대학교 일어일문학과 BK21 Post-Doc
** 전남대학교 일어일문학과 교수
1) 2002년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의 검인정 제도에 의해 발간된 금성출판교과서의 일부 내용
에 대해 2008년 10월 30일 교육과학 기술부는 수정권고를 명령하였다.
142 日本文化學報……第 42輯
상식적이지 않다. 정부가 나서서 역사를 호도하면 할수록 학생들은 국가에 대
한 신뢰와 자긍심을 잃어갈 것”이라고 비판했다. 또한 그는 “한국정부는 ‘모래
에 머리를 파묻은 타조’처럼 불편한 과거사에 대해 무작정 귀를 막으려 하고
있고, 이는 ‘국가적 자긍심’을 명분으로 역사왜곡을 일삼는 일본 우익들의 행태
와 다를 것이 없다”2)고 꼬집고 있다. 즉 과거 일제가 조선의 말과 글에 이어
서 성을 일본식으로 바꾸게 하는 정책을 조선인과의 차별을 없애기 위함이 이
었다고 주장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와 같은 인식이
아직도 일본인 속에서 많이 존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현 총리
인 아소 다로(麻生太郞)는 自民党의 政調会長 신분이었던 2003년 5월 31일 도
쿄대학 강연에서 “창씨개명은 조선인이 성을 달라고 한 것이 시작이다.” “한글
은 일본인이 조선인에게 가르친 것이며 의무교육 제도도 일본이 시작했다. 옳
은 것은 역사적인 사실로 인식하는 것이 좋다.”3)라고 강변한바 있다.
이와 같은 상반된 인식이 현재에도 한ㆍ일간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분
명한 것은 창씨개명이란 정책은 일제가 조선에서 조선인에게 실시했다는 사실
이다. 그러나 일본의 일부 우익들은 강제가 아니고 조선인이 원해서, 조선인의
권익을 보호하고자, 조선인의 차별을 없애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조선총독부의
강제가 아니라 하급기관들의 자발적인 독려가 마치 강제성을 띈 것처럼 오해
를 불러일으키고 있을 뿐이라고 변명하고 있다.
한ㆍ일간의 ‘창씨개명’에 대한 다른 역사인식은 앞으로도 당분간 평행선을
그을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와 같은 상황아래 ‘족보’라는 똑같은 제목
과 테마를 가지고 창씨개명에 대해 소설로 형상한 두 작품, 즉 일제말기 쓰여
진 김달수의 「족보」와 일제강점기 경성에서 태어나 16살까지 조선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는 가지야마 도시유키(梶山季之)(이하 : 가지야마라 함)의 「족보」를
비교하여 살펴보는 것은 비록 픽션이지만 소설 속에서 ‘창씨개명’에 대한 당시
의 상황을 파악하는데 매우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4)
김달수 「족보」의 선행연구로 정대성(2000)은 「8.15 전후 재일조선인의 생활
상과 민족의식」을 통해 해방 전후의 단편집의 여려 유형들을 분류하여 고찰하
였고, 박정이(2004)는 「김달수의 3개 ‘족보’와 관련해서-그 이동을 중심으로-」
2) 2008. 11. 25일 <한겨례> 인터뷰
3) 自民党の麻生太郎政調会長は31日、東京都内で講演し、日韓倂合時代に日本政府が朝鮮の人々を
日本名に変えさせた「創氏改名」について、「朝鮮の人たちが「名字をくれ と言ったのがそもそもの始まりだ」
などと語った。(2003. 6.1 <朝日新聞>)
4) 김달수의 「족보」는 1941년 일본(日本)대학 문예잡지 ‘예술과’에 발표한 것을 2001년 ‘綠
蔭書房’ 近代朝鮮文學日本語作品集 에 수록된 것을 저본으로 하였다. 가지야마의 「족보
」는 1952年 「広島文学」에 初出 된 후, 1961年 ‘文學界’에 가필해서 発表된 것을 1963년
‘文藝春秋新社’에서 발행한 「이조잔형」의 단행본 안에 수록된 것을 저본으로 하였다.
‘족보’와 ‘창씨개명’ ····················································································· 박 제 홍ㆍ김 순 전…143
에서 1941년 「족보」, 1948년 「족보」, 1978년 「낙조」의 이동(異同)을 중심으로
김달수에 있어서 족보와 조선인, 민족이라는 의미의 변화를 고찰하고 있다. 김
환기(2008)는 「김달수의 초창기 문학연구」에서 김달수의 초창기문학은 일본어
를 통한 식민지 조선의 비참한 현실을 외부로 알리는 역할을 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가지야마 「족보」의 선행연구로는 남부진의 「문학의 식민주의」5)가 있다. 여
기에서 남부진은 「족보」에 등장하는 창씨개명과 실제와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
이것은 단지 픽션에 불과하다고 의미를 축소시키며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반면 이원희는 「가지야마 도시유키(梶山季之)와 조선」6)에서 「족보」나 「
이조잔형」을 통하여 창씨개명과 3.1독립운동을 일본의 전후 세대에게 알리고,
나아가 조선의 문화와 풍물을 소개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상반
된 견해를 나타냈다.
양 작품의 발표연대가 시공간의 차이가 존재하고 있으나 ‘창씨개명’이라는
공통된 테마와 1940년대 조선의 상황을 그리고 있다는 점이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재일 조선작가의 시선으로 바라본 ‘창씨개명’과 ‘족보’
가 조선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낸 일본인 작가의 시선과 어떠한 차이가
존재하는지, 또 일제말 일제의 ‘창씨개명’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 그리고 조
선인에 있어서 족보의 상징이 무엇인지를 고찰 해보고자 한다.
2. 김달수와 가지야마 도시유키의 문학세계
2.1 김달수의 문학과 삶
김달수는 1919년 경상남도 창원에서 아버지 김병규와 어머니 손복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은 일정한 직업이 없이 지내다가 고향에 김달수와 할머
니를 남겨두고 나머지 가족들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에서 공사판의 막
노동을 하다가 김달수 나이 10살 때인 1928년 사망했다. 부친 사망 후 그는
1930년(12살) 마침내 일본으로 건너가 가마쿠라(鎌倉)의 에바라(荏原)에서 넝
마주의를 하면서 1931년 오이마치(大井町)의 야마나카(山中) 심상소학교 야간
부에 입학하였다. 이곳은 주로 조선아동에게 속성으로 일본어교육을 실시하는
학교로, 그는 학업 진행속도가 빨라 1년에 2학년씩 진급하여 다음해 1932년 에
바라 소학교 4학년에 편입하였다. 그는 처음으로 일본어를 읽을 수 있게 되자
5) 남부진(2006), 「文學の植民地主義」, 世界思想社, p.194
6) 이원희(2007), 「가지야마 도시유키(梶山季之)와 조선」, 일본어문학회 제38집 pp.405~422
144 日本文化學報……第 42輯
기뻐서 다쓰카와분코(立川文庫)의 「少年倶樂部」를 탐독했다. 그의 학교성적은
항상 상위였으나 조선아동에 대한 차별의 반발로 金파라는 서클을 만들어 저
항했기에 그의 품행점수는 매우 나빴다.
그는 1935년(17살) 요코스카(横須賀)로 이주하여 넝마주이를 하면서 야간 중
학교에 2개월 정도 다녔다. 그때부터 그는 문학에 관심이 생겨 와세다(早稲田)
대학의 ‘文学講義録’을 읽거나, 넝마주의 일을 하면서 쓰레기더미에서 발견된
일본과 조선문학전집을 탐독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그는 시가 나오야(志賀直
哉)의 문학에 심취하였고 도스도에프스키로부터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견습
공과 막노동을 하면서 간다(神田)의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에 잠시 다녔다.
그는 1939년(21살) 일본대학 예술과에 입학하게 되었고 문학수업 중에 이토
세이(伊藤整)의
율리시즈
강의에 가장 흥미를 가졌다. 1940년 8월 대학 문예
잡지 ‘예술과’에 그의 처녀작 「위치(位置)」를 발표했다. 1941년 조기졸업 할 때
까지 예술과에서 오자와 다쓰오(大沢達雄)라는 필명으로 「아저씨(をやじ)」(40.
10), 「기차도시락(汽車弁)」(41. 3), 「족보(族譜)」(41. 11), 「잡초(雑草)」(42. 7)와,
가네미쓰 쥰(金光淳)7)이란 필명으로 「쓰레기(塵)」(42. 3) 등을 발표했다. 그는
졸업 후 패전까지 가나가와(神奈川) 신문기자로 근무하는 도중에 1943년 5월
부터 1년간 조선총독부 기관지 일본어신문인 <京城日報> 기자로 경성에서 생
활한 경험이 있다.
그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 후, 장편
후예의 거리(後裔の街) 를 쓰기 시작
하면서 조선인의 回覧 동인지 「鶏林」을 만들어 공습경보하에도 합평회를 열고
활발한 담론을 펼치며 활동하였다. 1945년 해방으로 재일동포들이 ‘在日朝鮮人
連盟’을 결성하자 그는 일본의 조선사정 소개지인 「民主朝鮮」(32호까지 간행
됨)의 편집을 맡게 되었다. 한 때 반 실업상태의 작가생활을 유지하다가 ‘新日
本文学’(1952. 1~1953. 11)에 연재한 장편소설
현해탄(玄海灘)
8)(1954.
1 筑摩
書房)을 발표한 이후 그는 전업 작가의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는 ‘리얼리
즘연구회’, ‘문학예술회’, ‘현대문학연구’ 등에 소속되어 일관 되게 일제강점기
조선과 조선인의 현실묘사와 민족차별에 괴로워하는 재일조선인의 모습을 소
재로 인간과 조직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의 문학 활동은 정점을 이루어
1957년 ‘日本文化人会議’로부터 평화상까지 받았다.
소설 활동 외에 그는 일본 각지에 남아있는 조선의 옛 문화유적을 찾아 일
본 전국을 여행하며 일본역사가 고대한국사를 왜곡하는 부분에 대해서 기행문
7) 실제로 김달수는 영화관에 일할 때나 여자 친구와 사길 때 가나가와(神奈川) 신문사 시
절에 ‘金光淳’이란 이름을 쓰고 ‘가네미쓰 쥰’으로 행세했다. 특히 그의 작품 「족보」에서
형 종태의 창씨개명한 성과 이름이 가네미쓰(金光) 쇼타이(宗泰)이다.
8) 제30회 아쿠타가와(芥川)상 후보에까지 오름.
‘족보’와 ‘창씨개명’ ····················································································· 박 제 홍ㆍ김 순 전…145
을 발행하였다. 1975~1987년에는 계간지
삼천리 의 편집위원을 지내며 활발
히 문학 활동을 하다가 1997년 일본 도쿄 나카노(中野)의 자택에서 향년 79세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 후 대한민국 문화체육부로부터 은관문화훈장이 추서 되
었다.9)
김달수는 재일 조선출신 작가의 1세대 리더로서 조선의 자연과 모습을 사실
적으로 묘사함으로서 조선인 작가만이 느낄 수 있는 조선의 정서와 향수를 잘
표현하고 있다. 「족보」는 어렸을 때 일찍 고향을 떠나 조선인의 피가 흐르고
있으면서도 일본인화 되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조선인으로서 정체성을 되찾아
가려는 과정에서 ‘창씨개명‘과 ’족보‘라는 대립구도를 통하여 당시의 시대상을
사소설형식으로 그리고 있는 단편소설이다. 특히 자신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주인공 김경태의 내성적인 성격에서 처음에는 낯설기만 했던 고국이 점점 친
근해 지는 원근적인 묘사로 비록 나라는 빼앗겨서도 조선만이 가지는 따뜻한
문화의 동질성을 한편의 영화를 보는 듯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2.2 가지야마 도시유키의 문학과 삶
가지야마(梶山)는 1930년 1월 2일 조선총독부의 전기기사로 일하는 유이치
(勇一)와 일본계 하와이 이민 2세인 노부코(ノブコ)의 사이에 경성에서 차남으
로 태어났다. 그는 1936년 남대문소학교(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초등학교 3학
년 무렵에부터 소설에 관심이 많아 과학 모험소설을 쓰기도하였다. 1942년 경
성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45년 일제의 패망으로 인해 아버지의 고향인 히로
시마로 돌아가 히로시마二中(현広島観音高) 3학년에 편입하였고, 졸업 후 히로
시마고등사범학교 국어과에 입학하였다. 그는 재학 중에 지방 동인지인 ‘히로
시마문학협회’를 만드는 등 정력적인 활동을 하였고 히로시마 펜클럽 설립 운
영에도 참가하였다. 그는 1951년 졸업 후, 1953년 상경하여 요코하마의 쓰루미
(鶴見)공업고등학교 국어교사로 근무하였다. 교사를 그만두고 다방을 경영하면
서
新早稲田文学 ,
희망
미우라 슈몬(三浦朱門) 등의
등의 동인지와 무라카미 효에(村上兵衛)의 소개로
新思潮
제15차 동인이 되어 소설작업에 본격적
으로 뛰어들었다. 1958년에는 자유계약 기자로
文芸春秋 ,
週刊新潮
등에
기사를 썼다. 1959年 週刊文春 을 창간할 때에는 자유계약 기자모임을 만들어
유명했다.10) 이때 그는 가지 겐스케(梶謙介)라는 필명으로 小学館의 학생잡지
등에 많은 모험소설을 발표하였다. 그는 1958년부터 64년까지 라디오드라마의
각본을 주로 집필하였다. 1961년 결핵으로 약 3개월 입원 후, 이것을 계기로
9) 日本近代文學館(1977), 日本近代文學大事典第一卷 , 講談社, p. 520참조.
10) 出典: フリー百科事典 ウィキペディア(Wikipedia)
146 日本文化學報……第 42輯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자동차회사의 치열한 경쟁을 배경으로 한
경제기업소설
검은 시험자동차(黒の試走車) 가 독자들로부터 많은 인기를 얻
었다. 이후 그는 기업정보소설, 산업스파이소설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였
고 마침내 많은 베스트셀러 소설과 르포(reportage)로써 일본 고도성장기의 조
류를 탄 유행작가로 성장하게 됐다.
그는 1969년 부인을 사장으로 季節社를 설립하여 1971년 문단, 매스컴계의
숨겨진 일화를 소개한 월간
소문(噂) 을 자비 창간했지만 적자로 1974년 종
간되었다. 1972년 그는 평소 앓아온 결핵이 재발되어 병원에 입원한 후, 이즈
(伊豆)의 별장에서 요양했다. 1975년 5月 7日 장편소설
적란운(積乱雲)」의 취
재를 위해 방문한 홍콩의 호텔에서 갑자기 토혈로 인해 급히 귀국한 후 5月
11日 아침 식도정맥류파열과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관에는 평소 그가
자주 먹던 술 산토리올드가 뿌려지고 피스담배, 원고용지, 몽블랑 만년필, 소설
「이조잔영」이 함께 넣어졌다고 한다.
그는 비교적 짧은 생을 보냈지만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발표했다. 그의 생
애 테마는 朝鮮, 移民, 原爆이었다. 그 중에서 「족보」, 「이조잔영」 등은 일제강
점기 조선을 무대로 조선의 역사를 제재로 한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가지야마의 「족보」는 1978년 임권택 감독 하명중 주연의 영화로 제작되었고
그 해 대종상 우수작품상과 감독ㆍ남우주연상을 받을 정도로 한국의 대중에게
알려진 작품이다. 특히 가지야마의 「족보」는 일본인 작가로서 일제의 창씨개명
정책에 대해 비교적 비판적인 글쓰기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다만 아쉬운 점은 주인공 다니의 소극적인 행동과 개인의 한계성 그리고
족보의 상징성을 깊이 이해 못하고 내용의 줄거리가 에피소드에 머물러 있다
는 점이다.
2.3 「족보」의 상징성과 개작
김달수가 문학을 쓰기 시작한 이유에 대해 그는 식민지조선의 궁핍한 현실
과 집안의 몰락으로 인해 건너간 일본에서 피식민지인의 차별과 체험을 표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작가는 조선인의 불합리한 입장과 일
본인의 조선인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 눈을 돌리게 된다. 즉 “식민지인 조선인
의 입장에서 조선인의 생활을 묘사함으로서 일본인들의 그릇된 조선인 인식에
호소하여 그들에게 강한 자극을 주기 위함 이었다”11) 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이소가이 지로(磯貝治良)는 재일조선 작가의 작품 속에서 조선적인 모
습을 자주 그리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파악하고 있다.
11) 유숙자(2000),「創作方法をめぐって」金達壽, 在日한국인 문화연구 , 月印, p.31재인용.
‘족보’와 ‘창씨개명’ ····················································································· 박 제 홍ㆍ김 순 전…147
조선인 작가가 조선적인 것을 그리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그렇다면 일본
인작가가 재일조선인 작가가 조선적인 것을 그린 것만큼 일본적인 것을 농후
하게 그리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거기에는 자명한 이치를 넘어 재일조선작
가의 근원에 관계된 이유가 있다. 간단하게 결론을 말하면 재일조선인의 일본
어작가가 조선적인 것의 형상화를 문학적인 리얼리티의 골격으로 자리 잡았
다는 것은 소위 민족적인 것의 유지와 다시 탈취해야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결국 조선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의 복권에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12)
이처럼 일제강점기 김달수와 같은 재일조선작가들의 의식에는 일제의 식민
지 통치에 대한 우리 민족의 고유한 생활과 문화를 다시 찾고 복원해야 한다
는 책임감과 동질성이 함께 내포되어있다.
가와무라 미나토(川村湊)는 김달수 문학의 모티브를 다음의 4가지로 분류하
고 있다. 첫째, 조선의 해방과 독립에 불타는 군상을 그린 것. 둘째, 조선인 민
중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린 것. 셋째, 억압되고 차별된 재일조선인의 저항을
사상적으로 정치적인 입장에서 그린 것. 넷째, 혼란된 오늘의 사회주의를 다시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으로 분류하였다.13)
특히 김달수가 일제강점기 주로 습작으로 썼던 단편집은 작품의 구성과 내
용면에서는 세련되지 못했고, 민족의 아픔으로까지 승화시키지 못했지만 그 나
름대로 고민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자신의 아킬레스건이라 할 수 있는 일제강점기의 작품에 대해 김
달수는 해방이라는 새로운 환경에 부적절하다고 판단하고 작품을 개고하기에
이른다. 즉 그는 「족보(族譜)」(41,11), 「쓰레기(塵)」(42,3), 「잡초(雑草)」(42,7) 등
의 3작품을 해방 이후 「민주조선」14)에 다시 개고 후 재발표하였다. 「족보(族
譜)」는 동일한 제목으로 1948년부터 1949년 7월까지 9회로, 「쓰레기(塵)」는 47
년 2월부터 「쓰레기선박후기(塵芥船後記)」로, 「잡초(雑草)」는 47년 6월 「잡초
12) 이소가이 지로(磯貝治良)(1979), 「在日朝鮮人文學の世界ー負性を越える文学ー」, 三千里
1979년 겨울호, p.27 (번역 필자 이하동)
13) 정대성(2000), 「8ㆍ15 前後 在日朝鮮人의 生活相과 民族意識-김달수 초기단편들의 유형
화와 梗槪-」 p.115재인용
14) 1946년 4월에 창간하여 1950년 7월 폐간되었다. 민주조선 은 당시에 작품을 발표할 기
회가 없었던 교포작가들에게 발표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고 진보적인 일본문인과 문학적
인 연대를 이루게 하였다. 또한 김사량, 이태준, 김남천 등의 작품을 소개하여 본국과 교
포사회의 교류에 가교역할을 했다. 특히 민주조선 창간사에서 “과거 36년간의 오랜 시
간 동안 왜곡된 조선의 역사, 문화 전통 등에 대한 일본의 인식을 바르게 하고 조선인을
이해하려고 하는 세상의 여러 현인들에게 그 자료를 제공하려고 한다.” 고 그 취지를 밝
히고 있다.
148 日本文化學報……第 42輯
처럼(雑草のごとく)」15)로 개명하여 개고하였다.
그 중에서 「족보(族譜)」는 그가 30년에 걸쳐 3번이나 개작한 작품으로, 김달
수는 ‘족보’와 ‘창씨개명’에 관한 그의 관심이 일생의 테마로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초판의 「족보(族譜)」(41,11)는 1940년 처음으로 약 12년 만에 돌아
온 고향 방문과 짧은 조선사회의 체험을 기술한 자전적인 작품이다. 김달수가
직접 고향에 돌아와 22살이 되어서 비로소 처음으로 족보를 봤다는 그의 말에
서 ‘족보’는 참으로 신기로운 것이었고 청년시절 일본에서 자란 본인에게는 처
음에는 이질감을 느끼게 하였다.
나는 한번 지금은 조선의 친척에 맡겨져 있는 자신의 족보를 본 적이 있지
만, 우리 집의 것은 소위 대동보이고 두꺼운 28권의 목판으로 되어있어 정말
로 놀랬다. (중략) 이것을 한 번 보기 위해서 목욕재계하고 향을 피우고 공손
히 절을 하였다. 그것을 1940년 고향에 돌아간 우리 형제는 그대로 뒤적여 보
기 때문에 ‘저런, 뭐하는 짓이냐!’ 라고 족보를 보관하고 있던 나이 드신 숙부
님을 통곡하게 했다.16)
이와 같은 사실에서 「족보」는 1940년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형과 함께 고향
에 돌아와 평생 처음으로
족보의 존재를 보고 알게 된 주인공인 김경태를 통
해서 조선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자부심이 존재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일본
인화 되어버린 자기 자신의 발견과 즉 타자화 된 자신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족보」의 발표연도가 1941년 11월임으로 보아 그가 일본으로 돌아와 얼
마 되지 않은 시기에 쓴 것으로, 조선에서의 창씨개명 상황을 알 수 있는 중요
한 단서가 되고 있다.
이에 비해 가지야마의
족보 는 창씨개명 상황이 비교적 자세히 쓰여 져 있
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것은 결정적
으로 해방 이후 쓴 작품이라는 점이다. 김달수는 이 소설을 쓸 당시 조선이 곧
해방 될 것이라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에 가능한 있는 그대로 사실적으
로 기술했다. 그런 이유에는 「족보」의 마지막 부기에서 “작자는 이 원고를 끝
내고, 제2부의 원고를 시작하고 있다.”라고 쓰고 있다. 그러나 제 2부는 끝내
나오지 않았고 초판의 「족보」를 3번이나 아래와 같이 개작하는데 머물렀다.
15) 「민주조선」 1947년 6월에 발표함, 주인공 현팔길과 고철상 나카무라(中村)가 조선보험
인 서민희를 사주하여 그 권익을 빼앗으려하자 신문기자인 나(경태)의 도움으로 어려움
을 모면한다는 내용으로 전편과는 달리 고철상 나카무라와의 갈등과 대립을 강조하고
있다. 정대성,(2000), 앞의 책, p.116참조.
16) 김달수(1963), 조선-민족ㆍ역사ㆍ문화- , 岩波書店, p.10
‘족보’와 ‘창씨개명’ ····················································································· 박 제 홍ㆍ김 순 전…149
<표 1> 「族譜」의 개작상황
순번
1
2
3
년도
題名
1941
族譜
1948
族譜
1979 落照17)
발행지
新藝術
民主朝鮮
筑摩書房
주인공명
金敬泰
西敬泰
西貴嚴
이처럼 김달수의 「족보」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세 번 개작이 이루어진 이유
에 대해 朴正伊은 해방이 되자 ‘창씨개명’에 대한 작자에 대한 비난을 없애기
위해 일본에도 존재한 姓인 西(니시)를 사용하고자 金敬泰에서 西敬泰로, 내용
에서도 ‘창씨개명’에 대해 주인공이 거부하는 장면으로 바꿨다. 「낙조」(1978)에
서는 西貴厳의 역할이 약화되자 주인공과 대립관계의 고리대금업자이며 창씨
개명을 독려한 皇民化 지도원인 李在守를 등장시켜 작품의 내용을 보완하고자
했다. 또 주인공을 백부 西貴厳으로 바꾸고, 이미지 또한 최익현의 문하생
(1905)으로 의병항쟁(1910)에 참가하고 3.1운동에 투옥된 신간회 간부를 거쳐
광주학생운동(1929)에 투옥되고, 상해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한 유생이며 독
립운동가로 형상화했다.18) 김달수가 「족보」에 대해 집착한 이유는 조선인이면
서 조선 문제에 대한 자기의 아이덴티티 문제가 조선의 상황 즉 해방, 한국동
란 이후 남북한의 분단, 남북한의 정치상황 등 정치적인 사건과 연동하여 작자
자신이 이와 같은 시대적인 변화를 작품에 적극 반영한 결과로 볼 수 있다.
반면 가지야마 「족보」의 초판은 그가 1952년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 재학중
広島文学 에 처음 발표한 후 1961년 文学界 에 가필되었다. 그가 소설 「족보
」를 쓰게 된 동기는 주일대한민국대표부 공사였던 김용주가
文藝春秋 (1950.
12월호)에 실린 ‘김용주공사, 크게 말하다’ 에서 가마타 사와이치로(鎌田澤一郎
: 조선총독이었던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의 브레인)의 질문에 답한 인터뷰
를 접하면서 부터이다. 가마타는 창씨개명과 관련된 비극으로, 전라북도의 설
진영(薛鎭永)19)이 물에 빠져 자살한 사건에 관하여 손영목지사에게 들은 이야
기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설진영은 어느 지방의 뼈대 있는 집안 출신이어서 족보를 대단히 귀하게
여겼다더군요. 그래서 성만은 아무래도 바꾸고 싶지 않았지요. 그런데 설가(薛
家)가 창씨를 하지 않으면 그 부근의 사람들이 한 사람도 개명을 하지 않는다
17) 「落照」는 1978년 文芸展望 夏季号에서는 「참봉의 최후(参奉の最後)」이었다.
18) 朴正伊(2004), 「金達壽三っの『族譜』をめぐってーその異同を中心に」, 日語教育27輯, p.230
19) 실화의 본명은 설진영(薛鎭永)이나 가지야마는 소설의 스토리상 ‘마사키’라는 일본의 성
과 같은 音讀인 벽(薜)으로 바꿨다. 이름도 진영(鎭永)에서 진영(鎭英)으로 바꾼 데에는
창씨개명이 영일(英一)이 등장하여 같은 영(英)을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50 日本文化學報……第 42輯
는 게 문제였습니다. 설가가 종가이기 때문에 무리가 아니지요. 관리들은 어
떻게든 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이것만은 안 된다면서 누가 말해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민족주의자도 아니었고 반일을 내세우는 사람도 아
니었기 때문에 구속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기는커녕 그는 굉장한 친일파였
습니다.20)
가마타의 이와 같은 말을 유추해볼 때 가지야마는 이와 같은 인터뷰 내용에
크게 자극받아 「족보」를 쓰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족보」에 등장하는 인물
의 이름이나 직업 등 구성내용이 실제로 있었던 것과 유사한 것을 볼 때, 이것
을 힌트로 소설을 창작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와 같은 사실은 그의 부인인 가
지야마 미나에(梶山美奈江)의 증언에 의하면
문예춘추 에 실린 기사를 읽고
큰 충격을 받아, 히로시마에서 도쿄로 떠날 때에도 오려낸 기사를 품속에서 넣
고 있었다고 한다. 사후, 그가 남긴 산더미 같은 자료 속에서 누렇게 변색된
이 기사가 발견되었다.21)
가지야마 「족보」의 초출본과 최종본의 차이에 대해 구스 기요부미(楠井清
文)는 주인공의 시점변화, 계절의 변경, 에피소드 증보 등을 지적하고, 이것들
이 주인공의 죄책감이나 작품의 비극성이라는 테마를 좀 더 강조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가지야마의 「족보」는 서울과 수원을 무대로 ‘창씨개명’에 의한 조선민중의
수난을 제재로 한 것이다. 화가 지망생인 주인공 다니 로쿠로(谷六郎)는 징용
을 피하고자 경기도의 말단 관리로 들어와 경기도 일부 지역의 창씨개명을 독
려하는 담당을 맞게 된다. 그러나 자기 담당구역 안에 700年의 역사를 이어온
족보를 간직한 지방의 유지인 벽진영은 매우 완고해서 창씨개명을 거절한다.
창씨개명을 한다는 것은 조상에 대한 불효라고 믿고 있어서 다니(谷)는 그를
설득하려고 했지만 단념하고 만다. 그러나 상사인 과장은 국가의 위신과 관련
한 문제이니 모든 수단을 강구해서라도 그를 창씨개명하게 만들라고 지시한다.
딸의 약혼자이며 창씨개명 한 가네다 호쿠만(金田北萬)을 헌병대에 구속시키
고, 고문시켜도 벽진영은 끝내 창씨개명을 하지 않는다. 이처럼 창씨개명을 반
대했던 그도 초등학교에 다니는 손자들이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학교에 가
지 않겠는 다는 말을 전해 듣고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할 수없이 밤에 자살하
게 된다. 벽진영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낀 다니는 과장에 대한 반항심으로 벽진
영의 장례식에 참석한다. 그리고 3개월 후 영장을 받고 태평양전쟁에 참전하게
된다는 줄거리이다.
20) 미즈노 나오키(水野直樹)ㆍ정선태 옮김(2008), 창씨개명 , 산처럼, pp.244~245
21) 가지야마 미나에(梶山美奈江) 編(1998), 積亂雲 , 季節社, p.385
‘족보’와 ‘창씨개명’ ····················································································· 박 제 홍ㆍ김 순 전…151
3. 양 작품의 차이와 한계
3.1 조선작가와 일본작가의 인식 차이
김달수 「족보」에 등장하는 주인공 김경태의 민족정체성 변이는 조선을 떠나
일본에서 생활하면서 피는 조선인이나 사고는 이미 일본인과 일본화 되었다.
따라서 12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경태는 식민지 조선의 모든 것이 낯설고 비
문명적이었고 일본인의 삶에 비해 조선인의 삶은 비참하기 짝이 없음을 깨닫
게 된다. 하지만 고향의 풍습과 자연 그리고 정든 사람들을 통해 자기 자신이
다시 조선인이라는 자각과 자부심 그리고 민족의 동질성을 찾아 가고 있다. 캐
러멜의 상징성은 경태 자신이 과거의 배고픔에 아파했던 추억을 되돌려 주려
는 작자의 배려가 잘 나타나 있다. 가난 때문에 전 식구를 데려가지 못하고 할
머니와 경태 그리고 아픈 동생이 남아서 일본에서 부쳐준 작은 생활비로 생활
하기에 동네 아줌마가 동생의 몫으로 하나 더 준 캐러멜을 자신이 먹어버린
것에 대한 죄책감에서 식민지 조선의 암담한 생활상을 잘 묘사하고 있다.
내지(일본)선물이라고 한집에 한 개씩 캐러멜을 나누어주었다. 복태의 병을
불쌍히 여긴 그 아내는 1개의 여분을 더 주었다. 형제는 그 캐러멜을 먹어 버
리고 걱정스럽게 서로 얼굴을 쳐다봤다. 할머니에게 맛을 보여줄 수 없었다.
토하려고 목구멍에서 소리도 내보았다. 내지로부터 보내준 생활비가 부족한
할머니의 고생과 함께 캐러멜의 불효가 기억에 남아서 경태는 잊을 수가 없
었다.22) (김달수 「족보」 p.148 번역 : 필자 이하 동)
이와 같이 경태의 아픈 추억을 간직하고 있던 고향은 겉모습은 옛 그대로
이나 마을사람들의 의식은 이미 일본인화 되버린 조선의 변화된 모습이었다.
경태는 귀엄과 마주앉은 형을 봤다, 종태는 놋쇠 그릇 가득 쌓인 밥을 무거
운 수저로 작게 떠서 먹고 있었다.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맛이었다. 경태는 변
한 슬픈 자신에게 향수를 느꼈다. 겉치레라도 조금이라도 먹지 않으면 안 된
다고, 쩔쩔매는 자신을 꾸짖으면서 젓가락을 움직였다. 무늬가 없는 놋쇠의 무
거운 수저도 손에 집어 보았다.23) (김달수 「족보」 p.158)
22)
内地土産だと言つて一軒に一粒づつのキヤラネルを配つた。福泰の病気を同情した妻君は一粒余計
にくれたのだつた。兄弟はそのキヤラネルを食べてしまつてハツと顔見合はせた。祖母に味をみせられなか
つたのだつた。吐き出そうと咽喉を鳴らしても見た。内地からの仕送りの足りなかつた祖母の苦労と共にキ
ヤラネルの不孝が記憶となつて敬泰は忘れることが出来なかつた。
23) 敬泰は貴嚴と差し向ひの兄を見た。宗泰は真鍮の器の飯の盛りを重い匙で、小さく崩して食べてゐた。
152 日本文化學報……第 42輯
이와 같이 조선의 모든 것들이 부정적으로 비쳐졌던 그에게도 점차 동질성
을 찾아간다. 거리감이 있었던 숙부 귀엄이를 이해하게 되고 점차 조선의 풍습
과 습관에 익숙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고 내 몸에도 조선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
는 것을 깨닫게 된다.
경태는 무의식적으로 무릎을 가지런히 했다. 몸속의 피가 갑자기 오싹오싹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새로운 옛 애정이 숙부를 향해 올라왔다.24) (김달수
「족보」 p.169)
아침밥을 먹고 한 개피도 피지 않았던 담배를 꺼냈다. 하지만 입에 물자, 어
딘가에서 조상이 보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거리낌 했다. 경태는 입에
서 담배를 집어 담배 갑에 다시 넣었다.25) (김달수 「족보」 p.173)
경태는 상도를 흉내 내어 한쪽 무릎을 꿇고 풀베기를 시작했다. 예상외로
손놀림은 잊지 않았다. 조상의 묘를 자신이 깨끗하게 하고 있는 먼 감동이 점
점 다가 왔다.26) (김달수 「족보」 p.174)
의외로 경태는 조선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가 内地에서 열심히
외운 ‘고향을 떠나서’라는 조선의 15․6년 전의 유행가였다. 내 고향을 떠나서,
등 감상적인 오래된 유행가였지만, 경태에게는 이 노래를 조선어로 부를 경우
예술품이었다. 가타카나로 번역한 러시아인의 이름처럼 쪽지에 써서 외웠던
것이었다.27) (김달수 「족보」 p.182)
경태가 다시 돌아온 고향은 어렸을 때의 향수를 느끼기에 충분한 터전이었
다. 숙부에 대한 옛정, 조선에서의 담배예절, 조상의 묘에 대한 풀베기, 조선노
래 부르기 등 한국적인 동질성의 회복이었다. 이와 같은 경태의 모습을 통해
なにもかもが勝手の解らない味だつた。敬泰は變つた悲しい自分に鄕愁を感じた。見せかけにも少しは食
べねばと、當惑の自分を叱りつけながら箸を運んだ。無地の真鍮の重い匙も手に執ってみた。
24) 敬泰は思はず膝を揃へた。體内の血液が俄にじんじん流れ締まるのを感じた。新らたな古い愛情が叔父
に向つて突き起るのだつた。
25) 朝食が了つても一本も喫へなかつた煙草を取り出した。が、口にくわへて見ると、どこかで祖先が見
てゐるやうな気がして憚られた。敬泰は口から煙草を取つて箱に戻した。
26) 敬泰は相度を真似て片膝をついて草を刈り始めた。案外手つきは忘れてはゐなかつた。祖先の墓を
自身で清めてゐる遠い感動がだんだん追つでくるのだつた。
27) 意外に敬泰は朝鮮語の歌をうたい出した。それは彼が内地でいま一生懸命になつて覚えてゐる「故鄕
を後に」といふ朝鮮の十五、六年前の流行歌だつた。わが故鄕に離別して、などと感傷的な古い流
行歌だが、敬泰にはそれが朝鮮語でうたふ場合藝術品であつた。片仮名で飜譯のロシヤ人の名前
のやうな紙切れに書いて覚えてゐたのだつた。
‘족보’와 ‘창씨개명’ ····················································································· 박 제 홍ㆍ김 순 전…153
작자 자신의 생각을 투영시키고 있다.
한편 가지야마 도시유키 「족보」의 주인공 다니는 상관의 부당한 창씨개명의
강요는 잘못된 정책이고, 일본국민으로 편입시킨다는 의도아래 조선인과 평등
이라는 것을 내세워 지금의 지원병제도를 징병제도로 바꾸어 태평양전쟁의 병
사를 동원하기 위한 일제의 전략이라는 것을 아래와 같이 간과하게 된다.
그것은 일본국민이기 때문에 해야 될 의무 즉 징병이며 징용이었다. 또 세
금이며 공출이었다. 종래의 지원병제도를 한꺼번에 징병제도로 바꾸어 치기
위한 준비공작이었다……(그 증거로 곧 막대한 병사가 필요한 대동아전쟁이
일어났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 기가 막혔다. 과연 정치란 이런 것이구나 하
였다.28) (가지야마 도시유키 「족보」 p.173)
그러나 다니의 이와 같은 생각은 행동에서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창씨개명
정책을 찬성하는 이중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다. 즉 자신의 징집을 면제받기 위
해서는 잘못된 정책임에도 옳은 것으로 선전할 수밖에 없는 한계에 직면한다.
<이 남자가 정책의 암이 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벽진영을 미워하지 않으
면 안 된다고 마음먹었다. 아무런 관계가 없는 타인에게 동정은 금물. 살아야
되겠다는 내 목적을 위해서도 수단을 쓰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한다. 직무에 충실한 매정한 관리가 되라, 라고 마음속으로 외친다. 나는
맹점을 숨기려는 자세로 가슴을 펴고 벽진영의 약간 숙인 것 같은 옆얼굴을
노려보면서 <창씨개명은 너희들 조선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은전이다>라고
주문같이 외여 본다.29) (가지야마 도시유키 「족보」 p.185)
“긴 것에는 감겨 주어라(권력 있는 자에게는 거역하지 말고 순종하는 것이
득이 된다)라는 일본격언을 아십니까?” 나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이유가 벽
씨가 家名을 위해서라지만 이 마당에 있어서는 불리하다고 설명했다. 조선총
독부는 일본인을 만들려고 하고 있다. 창씨개명을 하는 것으로 몸도 마음도
28)
それは日本国民であるが故に、果たさなければならない義務、つまり徵兵であり、徵用だったのであ
る。また税金であり、供出であった。從來の志願兵制度を一気に徵用制度に切り換えるための、準備
工作だったのだ……(その證據に間もなく厖大な兵士を必要とする、大東亞戰爭が起った)僕は、その
事実を知って、啞然となった。なるほど、政治というのは、こんなものなんだなとも思った。
29) <この男が、政策の癌になっているのだ>僕は薜鎭英を、憎まなければならないと、決意する。赤の
他人に同情は禁物。生きてゆくという俺の目的のためには、手段は選ばれないのだ、と心に攝く。非
情な職務に充實な官吏になれ、と心に叫ぶ。僕は盲點を蔽いかくす姿勢で胸を張り、薜鎭英のうつむ
き加減の横顔を睨みつけながら、<創氏改名は、貴様たち朝鮮人のためにつくられた恩典なんだ>
と、呪文のように唱えてもみる。
154 日本文化學報……第 42輯
일본화 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어떤 의미로는 그런 족보나 조선인의 민족
의식을 없애버리려고 이 정책이 세워졌다고 말 안할 수 없다.30) (가지야마 도
시유키 「족보」 p.201)
일제가 조선인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것은 몸도 마음도 모두 일본화 시
키기 위함이 목적이었다는 것을 다니는 알고 있다. 그러함에도 조선인에게 창
씨개명을 강요하는 다니의 태도는 철저하게 개인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자기
직분에 충실하게 실행하는 전형적인 일본인의 모습이었다. 더 나아가 자신도
이와 같은 것을 하고 싶지 않지만 시대와 국가가 이렇게 만들기 때문에 할 수
밖에 없음을 강변하는 대목에서 절정을 이룬다.
“당신은 내가 귀신같은 인간으로 보이겠지요. 나도 뭐 좋아서 이런 일을 하
고 싶지 않지요. 그러나 그림마저 자유롭게 그릴 수 없는 시대입니다.…지금
의 나는 좋은 그림이나 한 장 그리고 싶은데 이것도 안 됩니다.”31) (가지야마
도시유키 「족보」 p.201)
개인이 하고 싶은 것도 포기할 수밖에 없는 현재의 시대 상황을 이해해 주
길 바란다는 주인공 다니의 발상은 거대한 국가 권력 앞에 초라한 한 개인의
연약함과 한계성을 드러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특히 가지야마 「족보」에 나오
는 ‘족보’의 상징성을 이해하지 못한 채 일제의 창씨개명 정책이 지나치게 과
장되게 묘사되었다고 주장하거나 실제로 족보에 일본인 성과 이름으로 창씨개
명 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일본 우익들의 사고가 아직도 현존하고 있는
것이 작금의 실정이다. 특히 주인공 다니의 소극적이며 우유부단한 성격은 식
민자의 한계이며 일본인의 한계임을 잘 표현한 캐릭터이기도 하다.
3.2 양 작가의 공통성(개인의 한계)
김달수 「족보」에서 김경태의 눈에 비친 조선의 현실은 매우 암담하였다. 자
기 자신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인으로 동화된 것처럼 이미 조선의 아동들
도 자신과 똑 같이 동화되었을 때 개인으로서 느끼는 한계를 깨닫게 된다.
30) 「長いものには巻かれろ、という日本の諺を知ってますか?」僕は、創氏改名しない理由が、薜家の家名
のためだということが、この場合には不利なのだと説明した。朝鮮總督府は、日本人をつくろうとしているの
である。創氏改名することによって、身も心も、日本化できると考えている。ある意味では、そんな族譜だ
の、朝鮮人の民族意識を葬り去るために、この政策が立案されたと言えないこともない。
31) 「あなたは、僕が鬼のような人間に見えるでしょうね。なにも僕だって、こんな仕事はしたくないんですよ。し
かし、絵だって自由にかけない時代なんです。……いまの僕は、立派な絵が一つ描きたいんだけれど、と
ても駄目です」
‘족보’와 ‘창씨개명’ ····················································································· 박 제 홍ㆍ김 순 전…155
멀리 조그마하게 주저 한 듯 발음이 갖추어지지 않은 애마행진곡 합창이
들려왔다. 경태 뒤에서 어린이들이 마주 보는 쪽에 서로 조를 짜서 어깨동무
를 하고 노래 부르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히 경태를 의식해서 그들이 보여주
었다. 아직 모두가 소학교에 다니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학교에 다니
고 있는 사람이 많은 것을 나타내고 있다.32) (김달수 「족보」 p.160)
“4학년 이상은 한글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만약 한글을 사용하면 선생
님에게 서로 일러바치게 되어있다.” 생콩을 먹고 있는 남자는 애마행진곡을
듣고 설명했다. 경태는 고개를 끄떡하고 앞의 중리산을 살짝 봤다. 묵묵히 소
리 없이 치솟아 있었다. 이어서 어린이들의 합창은 점점 고성이 되어 애국행
진곡으로 옮겨갔다.33) (김달수 「족보」 p.160)
이미 조선의 시골 아동들까지 합창하며 부른 애마행진곡은 육군성이 군마를
애호하는 정신을 드높이고자 공모하여 선정된 군가로 1939년 1월 <국민가요>
제 40집으로 출판되었다. 그 가사를 살펴보면
고향을 떠나 며칠 지났느냐
함께 죽을 각오로 이 말을
공격하며 나아갔던 산과 강
잡은 말고삐에 피가 흐른다.34)
군마를 전우로 취급함으로 말에 대한 애정과 친근함을 통해 전쟁의 공포를
서정적으로 치환하고 있다. 일본에서도 노래 보급이 약 1년 밖에 되지 않았지
만 1940년 이미 시골의 조선아동들이 이 노래를 합창하고 있다는 것은 조선아
동들을 대상으로 황민화가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애국행진곡은 1937년 12월 12일 정부 공모선정 작곡 부분에 일등으로
32)
遠慮勝ちなためらひ勝ちな発音の不揃ひな、愛馬行進曲の合唱が聞えて来た。敬泰の後ろで子供
たちが向ふ向きに組み合つた肩を搖らして歌つてゐるのだつた。それは明らかに敬泰を意識した彼等の
見てくれだつた。未だ皆んなが皆んなとも小学校へ行つてゐるのではないだらうけれど、これは学校へ
通つてゐるものの多いことを示してゐる。
33) 「四年生以上は朝鮮語を使はないことになつてゐるんだ。若し朝鮮語を使つたら先生にお互ひに云ひつけ
ることになつてゐる。」生豆を食ふ男は愛馬行進曲を聞いて説明した。敬泰はうなづき、前の中里山をそ
つと見た。黙々と音もなく聳えたつてゐた。次いで子供たちの合唱はやや高聲になり愛国行進曲に移つ
た。
34) 金田一春彦ㆍ安西愛子(1982), 日本の唱歌(下) , 講談社文庫, p.230
作詞:久保井 信夫 作曲:新城 正一
一
国を出てから幾月ぞ
共に死ぬ気でこの馬を
攻めて進んだ山や河
取った手綱に血が通う
156 日本文化學報……第 42輯
당선된 작품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전우의 사기를 북돋기 위한 노래이다.
봐라 동해의 하늘 밝게
일장기 휘날리면
천지의 정기 발랄함과
희망이 넘치는 일본
오오 청랑한 아침 안개에
우뚝 선 후지산의 모습이야 말로
금구무결 흔들림 없이
우리 일본의 자랑이다.35)
이와 같은 노래뿐만 아니라 ‘창씨개명’ 정책을 장려하는 단체로 유명한 ‘애국
반’이 이미 조선의 방방곡곡에 조직되어 있는 것을 볼 때, 경태는 창씨개명이
라는 대세 앞에 개인으로서 감당할 수 없는 한계를 깨닫게 된다.
이갑득은 종태와 마을에서 소학교에 다니는 두 사람 중에 한사람이었다. 그
가 마을에서 유일한 소학교를 졸업한 지식인으로서, 마을을 감독한 것은 경태
가 있을 때부터이었다. 현재는 애국반의 반장이다. 편지나 관공서 일은 모두
그가 있는 곳으로 가지고 와서 부탁했다.36) (김달수 「족보」 p.162)
특히 1938년에 결성된 ‘国民精神総動員朝鮮連盟’은 황민화정책을 펼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하부조직으로 ‘각도지방연맹’은 조선총독부 행정기구의 하나
로 조직되었고, 기초조직은 10호를 표준으로 ‘애국반’이 만들어져 1939년에는
전인구가 참여하게 되었다. 전쟁에 필요한
물자의 보급 등이 ‘애국반’을 통해
행해졌기 때문에 대부분의 조선 민중은 ‘애국반’에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창씨개명’의 장려도 ‘애국반’이 중심이 되어 진행되었다. 종태의 친구 이갑득이
애국반장으로 마을의 모든 일을 감독하고 창씨개명에 적극적 관여하는 장면이
35) 金田一春彦ㆍ安西愛子(1979), 日本の唱歌(中) , 講談社文庫, p.230
作詞:森川幸雄
作曲:瀬戸口藤吉
一
見よ東海の空あけて 旭日高く輝けば
天地の正気溌剌と 希望は躍る大八洲
おお晴朗の朝雲に 聳ゆる富士の姿こそ
金甌無欠揺ぎなき わが日本の誇りなれ
36) 李甲得は宗泰と村で小学校に通つた二人の一人だつた。彼が村では唯一の小学校を卒業した知識
人で、村を宰領してゐたのは敬泰のゐるころからだつた。現在は愛國班の班長であつた。手紙や役
場のことなど全て彼のところに持ち込まれた。
‘족보’와 ‘창씨개명’ ····················································································· 박 제 홍ㆍ김 순 전…157
등장하는 것은 일제의 ‘창씨개명’이 조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한편 가지야마의 「족보」에서 주인공 다니는 ‘황국신민서사’를 ‘해괴망측한 주
문’으로 비유하며 비판한다. 일제는 창씨개명의 설정기간이 가까워지자 아동들
에게 한글을 사용하면 전쟁의 비협력자이고 반일주의자라고 하면서 일본어 사
용을 강요하기에 이른다.
조선말을 사용하는 자는 전쟁비협력자이고 반일주의자이다. 황국신민은 모
름지기 일본어를 상용해야 된다. ……그런 일방적인 생각에서 ‘황국신민서사’
라는 해괴망측한 주문이 만들어진 것이다. “하나, 우리들은 대일본제국의 신민
이다.” “하나, 우리들은 마음을 합하여 천황폐하에게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하나, 우리들은 나라를 위해 훌륭한 일본인이 되겠습니다.”라는 문구는 아동
용의 ‘황국신민서사’이다.37) (가지야마 도시유키 「족보」 p.218)
이처럼 일제는 ‘창씨개명’을 완성하기 위해서 아동들의 압박을 통한 학교교
육으로 까지 진행하게 된다. 벽진영의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다섯 손자들이
“창씨개명하지 않는 자는 일본인이 아니다. 내일부터 학교에 오지 않아도 좋
다.”고 학교선생님이 말했다는 사실에 할아버지(벽진영)는 절망적인 처지에 빠
진다. “철없는 애들이구나. 조부의 고집도 족보의 귀중함도 모른다.”고 한탄해
봤지만 이미 손자들의 등교거부라는 행동에는 그렇게 완고하던 벽진영도 어쩔
수가 없게 된다. 결국 그는 ‘창씨개명’을 실천함으로써 조상에 대한 죄의식으로
죽음을 택하게 된다. 일제는 학교에 다니는 아동ㆍ생도를 통하여 호주(아버지
나 할아버지)에게 창씨를 결단하도록 압박하였다. 이미 서술한바와 같이 법무
국과 지방법원의 ‘주지철저’ 활동계획에는 “생도를 통하여 가정에 철저” 라는
내용이 포함 되어 있다.38)
이처럼 개인으로서도 당해낼 수 없는 한계가 사회의 분위기로 이미 진행되
고 있음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또한 자기 자신의 행동이 기계의 일부분으로
정당화 되어가고 있다.
<나는 기계가 될 수 없다> 나는 그렇게 부르짖는다. 이질적인 자기를 느낀
다. 그러나 나도 수례의 이빨의 하나가 되었다. 이것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일
37) 朝鮮語を使う者は、戦争非協力者であり、反日主義者である。皇國臣民はすべからく、日本語を常用
すべきである。……大体、そんな一方的な発想から、「皇國臣民の誓詞」という馬鹿馬鹿しい呪文が、
つくられたのであった。「一ツ、私達ハ、大日本帝國ノ臣民デアリマス」「一ツ、私達ハ、心ヲ合ワセ
テ、天皇陛下ニ忠義ヲ尽シマス」「一ツ、私達ハ、御國ノ為ニ、立派ナ日本人ニナリマス」という文句は
兒童用の「皇國臣民ノ誓イ」である。p.218
38) 미즈노 나오키(水野直樹)ㆍ정선태 옮김(2008), 앞의 책, pp.127~128
158 日本文化學報……第 42輯
인가? 역시 나도 훌륭한 기계란 말인가?39) (가지야마 도시유키 「족보」 p.217)
잘못된 행동에 대한 정의감이 점점 사라지고 스스로의 무력감에 빠져드는
다니의 자세에서 잘못된 정책이지만 개인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무
력함을 엿볼 수 있다.
4. 창씨개명의 양상
김달수 「족보」의 주인공 경태가 창씨개명에 대해 취한 태도와 당시의 상황
을 살펴보도록 하자. 특히 김달수가 1940년 고국을 방문했을 당시는 창씨개명
이 각 마을에 중요한 화두였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일본의 <민법>에 해당하는
<朝鮮民事令>을 제정하였다. 창씨에 대해서는 <朝鮮民事令>이 제정될 때부터
전혀 언급이 없다가 1937년 중일전쟁 이후, <朝鮮民事令>을 개정할 목적으로
1939년 <조선인 씨명에 관한 건(朝鮮人ノ氏名ニ関スル件)>이 制令으로 공포되
면서 조선인의 종래 성을 대신하여 새로운 성을 만들 것을 강제하였다. 조선에
는 氏라는 제도가 원래 없기 때문에 각 가족의 호주에게 ‘씨명’을 새로이 창설
하여 1940년 8월 10일까지 관청에 강제로 신고하게 했다. 이것은 조선에서 전
통으로 내려오는 가문을 중심으로 하는 성씨를 버리고 호주를 중심으로 하는
氏제도로 바뀐다는 뜻이다. 경태의 숙부인 귀엄이 가문의 자랑이라고 떠들었던
족보가 하루아침에 무용지물이 될 처지에 놓였다. 하지만 종태와 경태는 이 상
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즉 경태와 종태는 자신의 성을
창씨로 바꾸고 족보를 불태움으로서 이 작품을 끝마치고 있다. 이는 당시 시대
상황에서 개인으로서 저항할 수 없는 현실적인 고뇌가 내포되었지만 이 장면
이 조선인 작자인 김달수에게는 앞에서 기술한바 같이 가장 치욕적인 것이었
다. 그래서 김달수는 「족보」를 37년이 지난 후 그의 나이 60 가까이 되서도 다
시 개고해아만 하는 당위성을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다. 그러면 작
품 속에서 구체적으로 창씨개명에 관한 묘사가 어떻게 기술되어 있는지 살펴
보도록 하자.
“자네들은 어떻게 했느냐? 창씨를 했느냐? 요번 民事令의 개정으로 8월 10
일 까지는 창씨를 하게끔 되었다.” 李는 종태에게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39)
<おれは、機械にはなれない>僕は、そう呟く。異質な自分を感じる。でも、僕も歯車の一つになつて
いるのだった。これは一体どういうことだろうか。矢張り僕も、立派な機械なのか。
‘족보’와 ‘창씨개명’ ····················································································· 박 제 홍ㆍ김 순 전…159
종태는 내지에서는 몰랐지만 부산에서 신기해 경태가 사온 조선 신문에
창씨성적이 나와 있었다. 무슨 군 90 퍼센트, 무슨 군 100 퍼센트라고 주요기
사의 하나가 되었다. 게다가 역이나 가두에는 밀항방지 포스터와 함께 한글로
창씨기한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등의 포스터를 볼 수 있었다.40) (김달수 「
족보」 p.166)
“어떻습니까? 金光宗泰(가네미쓰 소타이)란 것은” 경태는 말하고 한순간, 어
디로부터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종태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둑어둑한
방 천장에 호롱불이 크게 요동하고 있었다.41) (김달수 「족보」 p.170)
당시 조선 신문에 구체적인 각 군의 퍼센트가 기사화 되었다는 것은 일제가
얼마나 창씨개명에 관여하고 있는가를 잘 나타 증거이다. 또한 일제가 자발적
으로 창씨개명을 했다는 것이 허구라는 것은 종태의 초등학교 친구이며 애국
반장인 이갑득이 종태와 경태에게 창씨개명을 권하는 말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창씨를 했느냐? 요번 民事令의 개정으로 8월 10일까지는 창씨를 하게끔 되었
다.”고 일본에서 방학을 이용하여 12년 만에 고향을 돌아온 종태 형제에게도
창씨개명을 요구하는 것을 볼 때, 실제로 조선에서 살고 있는 이들은 어떠했을
까 가히 짐작이 가고 남는다. 이와 같은 장면에서 김달수는 있는 그대로 정치
적인 목적을 배재하고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점이 본 작품을 높이 평가
하는 이유이다. 경태가 형의 창씨개명을 가네미쓰 소타이(金光宗泰)라고 외칠
때 천장의 호롱불이 흔들린 것 같은 요동이 있었다는 표현은 조상에 대한 미
안함을 우회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반면 가지야마의 「족보」에서는 해방 이후 써진 작품이기에 당시 유명한 조
선인의 이름과 직함이 아래와 같이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전북지사 손영목, 경북지사 김대우42) 등도 최후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벽진영 같이 민간인은 아니고 행정관청에 다
40) 「君たちはどうしたね。創氏(チヤンシ)をしたかね。今度民事令の改定で八月十日までに創氏(チヤン
シ)をすることになつたんだ。」李は宗泰に誇らしく説明した。宗泰たちは内地では知らなかつたが、釜
山で珍しがつて敬泰が買つた朝鮮の新聞に創氏の成績が載つてゐた。何郡は九十パーセント何郡
は百パーセントだとか、主要記事の一つになつてゐた。そして駅や街頭には密航防止のポスターと共
に朝鮮仮名で創氏期限が迫りつつあるのだなど云ふポスターが見られる。
41) 「どうです。金光宗泰(カネミツシウタイ)といふのは。」敬泰は云つて一瞬、どこからの声か耳をそばだ
てた。宗泰は微動もしなかつた。薄暗い部屋の天井に灯燈が大きく揺れてゐた。
42) 김대우(金大羽)는 1900년 평안남도 강동에서 출생하여 1925년 구슈(九州)제국대학 공학
과 졸업 후 바로 총독부 관리로 임명되었다. 1936년 총독부 학무국 교학과장으로 임명되
어 1937년 ‘황국신민서사’를 기획하여 제정한 인물이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1943년
전라북도 도지사로 승진하였고 1945년에는 경북도지사에 임명되어 일제에 충성을 다하
였다. 친일 인명사전에 등록된 인물이다.
160 日本文化學報……第 42輯
니고 있기 때문에 교묘하게 특례를 인정받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불행하게도
그는 권력이 없는 민간이었다.43) (가지야마 도시유키의 「족보」 p.216)
위의 예는 현재 일본에서 ‘창씨개명’에 대한 우익단체의 논리로 두 사람의
예를 들면서 ‘창씨개명’이 총독부의 강압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행해졌다는 증
거로 내세우며 조선총독부의 말단 하부조직에서 경쟁적으로 실적을 올리기 위
해 강압이 행해졌을 뿐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그러나 전북지사 손영목, 경북지
사 김대우는 창씨개명은 하지 않았으나 특례를 인정받은 인물이기에 이들의
특별한 예를 들어 조선에서 일제가 창씨개명하지 않았다는 논리는 설득력이
없다. ‘창씨개명’은 전술한바와 같이 ‘애국반’과 학교교육을 통해서 장려하고 있
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일제의 ‘창씨개명’에 관여한 객관적인 자료로
1940년 7월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교과서편찬휘보 제6집 의 「교과서의 가작
(假作)인물의 氏名에 대해서-창씨개명으로 인한 수정-」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앞으로 새롭게 교과서를 편찬할 때에는 기존의 책에도 등장하는 假作인물
의 氏名은 모두 새로운 제도에 따라 고치기로 했다. 그러나 이미 발행 발매
분 및 금년도 후반기의 것이라도, 이미 인쇄가 끝난 것까지 정정할 수가 없어
서 이번 휘보를 이용하여 알린다. 이에 따라 즉시 정정하여 앞으로 취급해주
기를 희망합니다.
<표 2> 교과서 假作인물의 씨명 개명표 44)
舊名
尹龍吉(いんりうきち)
李誠一
초등수신
改名
谷龍吉(たにりうきち)
森誠一(もりせいいち)
舊名
金昌大
朴大植
安
金
朴
李
張
李成基
安貞子
安英子サン
朴君
安君
閔君ビン
초등산술
改名
金子新吉
水原(ミズハラ)
安川
金川
木下
中村
吉田ヨシダ
中村
安川貞子
林英子(ヒデコ)サン
森君
原君
岡君
43) 全北知事孫永穆、慶北知事の金大羽なども、最後まで創氏改名をしなかった人達である。でも、そ
れらの人たちは、薜鎭英のように民間人ではなく、行政官廳に勤めていたため、巧みに特例を認めさ
せたにすひない。不幸なことに、彼は権力のない民間人であったのだ。
44) 조선총독부(1940), 「교과서편찬휘보 제6집」의 「교과서의 가작인물의 씨명에 대해서-창
씨개명으로 인한 수정-」
‘족보’와 ‘창씨개명’ ····················································································· 박 제 홍ㆍ김 순 전…161
위의 <표 1>에서 알 수 있듯이 1940년도 2학기에 발행할 교과서부터는 조
선의 성과 이름이 더 이상 나오지 않게 됨으로써 조선아동의 성과 이름은 모
두 일본식으로 바꿔졌다.
초등국어독본 에서는 씨명이 함께 나온 경우가 없었
다. 그러나 이름은 구교과서의 에이시 상(エイシサン)이 하나코 상(ハナコサン)으
로 음독에서 훈독으로 바꿔졌다. 이처럼 일제는 ‘창씨개명’의 적극적인 실천을
학교교육과 교과서를 통해 정착시키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5. 결론
1940년대 ‘창씨개명’이 한창일 때 김달수는 22살의 청년으로 가지야마는 13
살의 초등학교 5학년으로 직접 목격하게 된다. 이와 같은 경험을 바탕으로 김
달수는 경남창원, 가지야마는 경성과 수원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 「족보」를 작
품으로 형상화 한다. 두 작품의 공통적인 소재인 ‘족보’와 ‘창씨개명’이라는 대
립적인 주제를 통하여 식민지 조선의 암담한 현실을 표현하였다는 사실만으로
도 두 사람의 평가는 높이 사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두 작품의 가장 큰
차이는 김달수의 「족보」가 정치적인 배경을 삭제한 체, 가능한 솔직하고 사실
적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어찌 보면 주인공 김경태의 눈에 비친
조국의 암담한 현실 앞에 ‘창씨개명’이라는 소용돌이 속에 조선의 상징인 ‘족
보’가 사라지게 되는 아쉬움이 작품 속에 내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가지야마의 「족보」는 비록 해방 이후 일제의 과거사문제에 대해 일본이 비교
적 수세적인 입장에 있을 때고 직접체험이 아닌 신문이나 전언을 참고하여 쓴
작품이어서 정치적인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 있다. 주인공 다니의 소극적인 행
동에 대한 책임을 국가를 대신하여 개인이 속죄하는 장면에서 일본적인 느낌이
든다. 특히 이 작품은 결과를 이미 정해놓고 쓴 작품이어서 김달수의 「족보」와
는 달리 마지막에 족보를 경성제국대학에 기증하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것은
가장 정치적인 표현의 절정을 보여주고 장면이다.
이에 반해 김달수의 「족보」는 12년 만에 찾아온 고향의 모습을 통해 조선에
서도 일제의 황국신민화가 진행해가는 현장을 있는 그대로 그림으로써 개인으
로서 거대한 물결에 저항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족보’로 형상화 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2번이나 개작을 했다는 사실에서 이 작품에 대한 작자의 관심과 在
日작가로서의 고뇌를 함께 읽을 수 있다.
162 日本文化學報……第 42輯
【参考文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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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와 ‘창씨개명’ ····················································································· 박 제 홍ㆍ김 순 전…163
要 旨
本稿は、在日朝鮮作家である金逹寿の小説「族譜」と、朝鮮で生まれて幼年時代を過ごし
た日本作家である梶山季之の小説「族譜」の間に、どんな差が存在するのか、また日帝強占
期末日帝の‘創氏改名’がどういう形で展開されているかを考察したものである。.
1940年日帝は、朝鮮人をすっかり日本人で同化させようと‘創氏改名’を強要した。このような
時代相を金逹寿は22歳の青年で故郷の昌原で、梶山は13歳の小学校5年生で京城で目撃し
ながら経験したことを小説「族譜」で形象化した。この二つの作品の共通的な素材である‘族譜’
と‘創氏改名’という対立的な主題を通じて、植民地朝鮮の惨澹たる現実を表現したという事実だ
けでも、高く評価すべきだといえよう。しかし、二つの作品の大した違いは、金逹寿の「族譜」は
政治的な背景を削除したまま可能な率直でリアルに描き出しているという点である。主人公金敬
泰の目に映った祖国の慘憺たる現実の前に、‘創氏改名’という渦巻きに朝鮮の象徴である‘族
譜’が消えゆくようになる惜しさが、作品の中に内在していると言える。
一方 、 梶山の「族譜」は自分の直接体験ではない新聞や伝言を参考して書いた作品なの
で、政治的な傾向が強く作用して現われているといえよう。主人公谷の消極的な行動に対する
責任を国家の代わりをして個人が償う場面で、日本的な感じがする。特に、この作品は結果を
もう決めておいて書いた作品なので、金逹寿の「族譜」とちがって終わりに‘族譜’を京城帝国大
学に寄贈することで仕上げる場面は、一番政治的な表現の絶頂を見せてくれている。
特に、両作家の共通的な‘族譜’という題名に決めたところには、‘創氏改名’に対する反対の
概念で把握している 。 一番 、 朝鮮的な伝統である‘族譜’と日本人で同化の象徴である創氏
は、ついに、抵抗しても創氏改名するしかない現実認識で始まる。にもかかわらず、在日朝鮮
作家と日本人作家が、この族譜の問題を作品で形象化したことは、昨今の日本政府の‘創氏
改名’に対する誤った主張を正しく直すようにいい機会だと考えられる。
キーワード: 族譜、 創氏改名、 朝鮮總督府、金逹寿、 梶山季之、 同化主義
투
고 : 2009. 5. 31
1차 심사 : 2009. 6. 13
2차 심사 : 2009. 6. 27
『或る女のグリンプス』から『或る女』へ
鄭 旭 盛*
(e-mail : [email protected])
目 次
一、はじめに
二、西垣と浦生の論争及びその他の先行研究
三、『或る女のグリンプス』の「中絶」と「完結」をめぐって
(1) 蒲生に対する疑問
(2)『グリンプス』の根源的なモチーフをめぐって
四、まとめ - 西垣説への疑問をめぐって -
1 はじめに
『或る女のグリンプス』(以下、『グリンプス』とする)の初出は、明治44年1月から
大正2年3月までの雑誌『白樺』に連載された作品である。明治44年というと、有島自身
が留学から歸國して4年目にあたる時期で、文学者として志した時期でもある。この作品
が、6年後の大正8年に改稿ㆍ增補を経て『或る女』前篇に、更に後篇の創作を付け
加えて、有島武郞の代表作と言われている前ㆍ後篇49章の『或る女』に纏められたので
ある。
しかし、この作品が発表された当時は、山田昭夫氏が言うように読者から「背德小説」
1)として扱われ、多くのファンを失望させたのだが、正宗白鳥氏の高い評価2)を機に、この
作品に対する注目は一転することになる。それ以後、「本格的なリアリズム」小説 3)や
*
1)
2)
3)
남서울대학교 일본어과 일본근대문학
山田昭夫『有島武郎』明治書院、明治41年1月15日
正宗白鳥「有島武郎『或る女』」『読売新聞』昭和2年9月19日付
奥野健男「有島武郎『或る女』の早月葉子」『国文学』昭和34年5月
166 日本文化學報……第 42輯
「本格的構成ロマン」小説4)として、日本近代文学における類のない傑作として評価され
てきた。そして、『或る女』の研究は現代に至るまで数多くなされてきたが、その論者の観
点は多様である。例えば、トルストイの「アンナㆍカレニーナ」、イブセンの「ヘッダㆍカ
ブラー」と『或る女』との比較研究5)、モデル小説としての事実問題6)、『グリンプス』
の主人公と古藤、および有島武郞との私小説的分析7)、更に〈二元〉思想をめぐる有島
武郞の精神史上の解明8)、あるいはエリスの『性の心理学的研究』と『或る女』との影
響問題9)等のような角度から論じられている。
本稿は、このような研究方法の中から、『グリンプス』の「完結」ㆍ「中絶」という文
献的問題を踏まえつつ、『グリンプス』の根源的な主題について考察することを目的として
いる。
2 西垣 10) と蒲生 11) の論争及びその他の先行研究
『グリンプス』と『或る女』の前編との問題、あるいはこの問題の延長線に属する『或
4) 瀬沼茂樹「或る女-有島武郎-」『日本近代文学ㆍ人と作品』読売新聞社、昭和40年12月20日
5) これに代表される論文として、小坂晋「『或る女』と『グリンプス』-比較対比研究序論-」(『岩手大学教育
学部研究年報』26、昭和41年12月)、上杉省和「『或る女のグリンプス』から『或る女(前編)』へ」
(『国語国文研究』41、北海道大学国文学会、昭和43年9月)、安川定男『有島武郎論』(明治書
院、昭和42年10月30日)等をあげることが出来る。
6) この論点でもっとも有力な論としては、先の注1にあげた山田昭夫の論がある。
7) これは本多秋五氏の次の二篇の論文で提唱されたのである。「或る女」(『「白樺」派の文学』講談社、昭
和29年7月)、「私小説にみた『或る女』」(中央公論社版『日本の文学』の『有島武郎ㆍ長與善郎の
解説、昭和42年4月)
8) これは先の注5にあげた上杉省和氏の論が代表的であるが、その他、土方定一「或る女」(『国語国文学』
12-10、昭和10年10月)や野島秀勝「人道主義の振幅-有島武郎論-」(『文学界』12-1ㆍ2ㆍ3、昭和
40年1ㆍ2ㆍ3月)等の論文もある。
9) エリスの『性の心理学的研究』と『或る女』との問題は、江頭太助「『或る女』研究の基本問題-『性の心
理学的研究』の影響について-」(季刊『文学ㆍ語学』11、昭和33年)や青山孝行「葉子の中のエリス『或る女』の明晰な位置づけのために-」(『国語と国文学』38-9、昭和36年9月)や笹淵友一「『或る
女』の主題-有島武郎研究-」(『東京女子大学付属比較研究紀要』17、昭和39年6月)や小坂晋
「『或る女のグリンプス』改作の問題点」(『岡山大学教養部紀要』6、昭和45年3月)のほかに上杉省和
の論などによって論じられている。
10) 西垣勤の説は、次の3編にわたって論じられている。それは「『或る女』論-前編の構造について-」(『黄塵』
5、昭和43年3月)、「『或る女』補論-「或る女のグリンプス」の成立-」(『黄塵』6、昭和43年8
月)、「『或る女』再論-後編について-」(『黄塵』7、昭和44年5月)等の3編であるが、後に『有島武
郎論』(有精堂、昭和46年6月10日)に収められる。
11) 蒲生芳朗の説は、「『或る女』論序説-前ㆍ後編屈折の問題に関する試論-」(『宮城学院女子大学基督
教文化研究年報』6ㆍ7、昭和47ㆍ48年)と「『或る女』論-『或る女のグリンプス』と『或る女』後編の関
係-」(『宮城学院女子大学基督教文化研究年報』9ㆍ10、昭和51年)である。
『或る女のグリンプス』から『或る女』へ ······································································· 鄭 旭 盛…167
る女』の前ㆍ後編の屈折の問題は、執筆時期に6年という時間の隔たりやその間の有島
武郞の精神と生活上の変化をも視野に入れながら、数多く語られてきた。しかし、いまだに
『グリンプス』の「完結」ㆍ「中絶」問題や屈析問題が明快に論じられていない状況に
ある。その中で、特に注目に値するのは、後述する西垣氏と浦生氏との間に展開された
『グリンプス』から『或る女』への「中絶」ㆍ「完結」という観点の論爭である。本稿
ではそれを中心に考察するが、その前に、この両氏の論爭に前後して展開された関連する
諸論を視野に入れながら、更に両氏の論爭の意義を考えてみる。
まず、西垣氏の論の起点として取り上げておかねばならない本多秋五氏の『「白樺」
派の文学』(講談社、昭和29年7月)である。
氏は、〈古藤=作者〉という私小説的見解の立場を取りながら、前ㆍ後編の描き方に
注目している。氏は、前篇における作者と主人公の絡み具合がよく分からない故に、彼ら
が「点景人物」に見えるとするが、後編になると、古藤の人物像が変わることによって、古
藤が主人公の全像を浮き上がらせていると言っている。更に氏は、その意味において前編
より後編が格段に優れているという前ㆍ後編の主題の屈折を唱えながら、後編の優越説を
指摘したのである。なお、氏は『或る女』の私小説的見解を强く主張したが、その根據と
して『グリンプス』の創作動機が、有島自身の私的体験によるものであったことをここで主
張したのである。
次に、山田昭夫氏が「或る女」(『有島武郞』明治書院、昭和41年1月)で、
『或る女』をモデル小説としてとらえつつ、有島自身の精神的な変転を銳く見極めたことは
注目に値する。つまり、ここで氏は、モデル小説である『グリンプス』(明治44年頃)の
執筆時期と明治34年の私的体験との間に、有島自身の精神的変化―キリストからロー
ファーへ―に、この作品の成立事情があって、そういう意味において、信子にローファー的
面影を見ると共に〈叛逆〉の田鶴子を描いた『グリンプス』であるという『グリンプス』そ
れ自体の新たなモチーフへの読みを指摘したのである。更に、安川定男氏は『グリンプ
ス』の成立過程について次のように指摘した。『グリンプス』という作品は、作者自身の
内的規制と抑圧を、田鶴子を通すことによって精神的解放を試みた一種のカタルシス的意
義を持つ作品であり、また、そのような目的が生んだ作品であると言っている。
このように、『グリンプス』成立事情に関わる注目すべき幾つかの研究を挙げた。そこに
は、山田ㆍ安川氏の見解から窺われるように、有島自身の精神的変化、即ちキリストから
ローファーへという內的変貌が起因していると言えよう。このような先行研究がある中、西垣
氏は本多説を否定しながら、一方では山田ㆍ安川氏らの有島の精神史的見解を多いに
受け入れつつ、『グリンプス』の意義を更に明らかにしたのである。では、西垣氏の論を
概観する。
168 日本文化學報……第 42輯
〈西垣説〉
西垣氏は、本多氏の私小説的見解に疑問を抱き、『グリンプス』の成立当時と有島
自身の私的体験との10年間に見られた精神史―「渡米ㆍ背教ㆍ無政府主義への接近
ㆍ歸朝ㆍ河野信子との結婚および失敗ㆍ神尾安子との結婚ㆍ教会退会」―を重視すべ
きだと言う。そして氏は、このような視点から、『グリンプス』における事実の枠組みは、本
多氏がいう私小説的意味を持つのではなく、むしろ「俗物キリスト教徒」に対する作者自
身の反逆の機能を担うものとして理解すべきであるとしている。
ここで注目しておきたいのは、山田氏の言う「叛逆」や安川氏が指摘した「作者自身
の內的規制と抑圧」といった漠然たる表現から、西垣氏が「俗物キリスト教徒」という
「叛逆」対象の具体化を行ったということである。勿論、このような反キリスト的なテーマ
は、西垣氏によって初めて論ぜられたことではない。旣に笹淵友一12)は「自己解放を求め
る浪漫的自我の抵抗物としての一般の世俗社会は自我を遠卷きにしている形であった、直
接抵抗となっているのは主としてキリスト教である」と指摘し、この作品における中心テーマと
して、反キリスト教的な側面を見逃さなかった。
しかし、西垣説は笹淵説の継続ではあるものの、主人公が抵抗するキリスト教というテー
マを、「俗物」的な「キリスト教徒」―「信子をとりまく良識の士ㆍ森広ㆍ矢島楫子ㆍ信
子など親族のキリスト者」―と、それに「叛逆」する主人公といった構図として捉えたので
ある。私も、このような西垣説の「俗物キリスト教徒」という「叛逆」対象の具体化には贊
成の立場であり、後にこのような見解に立って『グリンプス』をより厳密に検討することにす
る。
さらに、西垣氏は古藤=作者の本多説を否定し、田鶴子の挫折ㆍ虚無と執筆当時
(『グリンプス』を執筆し始めた明治44年頃)の有島の精神状態との共通性を取り上げ
ながら、田鶴子=作者という見解をここでは强調している。つまり、『グリンプス』は田鶴
子が挫折して後、倉地との愛を成立させることによって「自己回復」するヒロインとして描か
れた作品と捉えるべきだと言うのである。その結果、『グリンプス』は「一先ずの解放感を
得て終わった」という一つの「完結」されたテーマを持つ作品として捉えることが出来ると述
べている。
以上のように西垣説を概観したが、〈叛逆〉対象として具体化されたものが「俗物キリ
スト教徒」であることと、『グリンプス』が「一先ずの解放感を得て終わった」という「完
結」した作品として捉えたという二点が注目すべき点であろう。
参考までに、西垣氏が主張する「完結」説と同じ立場に立ち、なおかつ注目すべき他
の論として、福田準之輔氏の見解もある13)。氏は、『グリンプス』を「完結」された作品
12) 笹淵友一「『或る女』の主題-有島武郎研究-」(『東京女子大学付属比較文化研究紀要』17、昭和39
年6月)
13) 福田準之輔「『或る女のグリンプス』-その成立について-」(本多秋五ㆍ瀬沼茂樹共編『有島武郎研究』
『或る女のグリンプス』から『或る女』へ ······································································· 鄭 旭 盛…169
として見ることを前提としながら、『グリンプス』の創作モチーフとして、「二つの道」や
「も一度『二つの道』」に見られる二元論の模索として、〈ヘッダㆍカブラー〉たる要求
が自己における一つの方向を与え、その意欲と抵抗感が同時に『グリンプス』の創作のモ
チーフであったと述べている。さらに、モデル論的な視点から、田鶴子に対する有島自身
の「矛盾」する二面性を指摘した。それは、モラリティとそれに対峙した自己や「聖書と性
欲」という二元論的葛藤と苦悩である。有島にとって、それを止揚した一元の世界に生と
「自己」の確立を追究することが、『グリンプス』創作の根源的な作者の意図であったと
語っているのである。つまり、氏はこの『グリンプス』における意義を、有島自身の一つの
理想として捉えていたと言えよう。
以上のように、まず 西垣氏が『グリンプス』という作品をどのように読み取っていたのかを
整理してみた。次に、この西垣説に対して反論を提示した蒲生氏の論を見ることにする。
〈蒲生説〉
蒲生氏は西垣氏の『グリンプス』完結説に対し、「破れた懐中鏡」ㆍ「下腹の痛
み」ㆍ田鶴子の「ヒステリー」ㆍ『グリンプス』の結末等の場面を挙げながら、これらの
事項は後編において破滅を予知させる機能を持っていると指摘した。従って、『グリンプ
ス』は未完で「中絶」された作品であると主張したのである。更に、前ㆍ後編の屈折論
に関しては、『グリンプス』の結末部をもって既に屈折していると言いながら、『或る女』
における前ㆍ後編の屈折それ自体を否定し、『或る女』という長編小説をトータルに論ず
るべきであるという論を展開したのである。即ち、蒲生氏は、
『或る女』前編(『或る女のグリンプス』)から後編にかけての急激な暗転、愛によ
る再生への期待から愛による破滅の道への銳い屈折、その屈折を通して描かれた「葉子
の廃減への道筋、愛の絶頂感と墜落感、愛と嫉妬、激情と諦念、現実と妄想の交錯、
反復、混迷の生」(西垣氏「或る女」再論)とは、もしかしたら、『或る女のグリンプ
ス』あるいは『或る女』前編から後編への屈折とは、よしんばそれがいかに銳い屈折を示
すにせよ、いわば予定させられた屈折、あるいは「必然的なつながり」によってみちびかれ
る展開ではなかったのか。そして、もしそうだとしたら、『或る女』前ㆍ後編の「モティーフ
と主題」は「それぞれ」別なもの 、あるいはそむきあう志向としてではなく、一つのもの、
トータルなものとしてとらえる視点が正しいのではないか。
と、論じたのである。このように、蒲生氏は「前ㆍ後編屈折論への否定としての首尾一貫
説」という『グリンプス』に対する「中絶」の立場を强調したのである。しかし、蒲生氏の
論に対して、西垣氏は次のように反論している14)。 右文書院、昭和47年10月)
170 日本文化學報……第 42輯
次に挙げられた四点(筆者注―破れた懐中鏡 、 下腹の痛み 、 田鶴子のヒステリー
症 、凶夢)についても、後編は『グリンプス』をふまえ、 前編をふまえるのであって見れ
ば、氏のような脈絡を有機的につなぐ考えもあるが、具体的に構想していなくても、ふまえる
時に增幅しそれが成功したということに止めておくこともできるのではあるまいか。
以上のように、『グリンプス』に対する「完結」ㆍ「中絶」をめぐる両氏の論をみました
が、この両氏の論に対する私なりの見解は後述するとして、この両氏の論爭以後の『グリ
ンプス』に対する「完結」ㆍ「中絶」に関連する先行研究について、もう少し触れておく
ことにする。
〈その以後の研究〉
①植栗彌「『或る女のグリンプス』の根源的なモチーフ」(『国文学論集(上智
大)』10、昭和52年1月)
植栗氏は、「田鶴子の行動言動が、継続一貫して激情に溢れ愛情と反抗心を强く保
持する」ことと「田鶴子の体験と意識の本質が、有島自身の精神的体験と似通うところが
多い」という二点に注目し、作品の分析を行った。特に、当時の有島自身の精神的憧憬
であったホイットマンとの精神的影響を指摘しながら、倉地のホイットマン近似性から有島と
同形の原質に歸る田鶴子を描いていると述べている。つまり氏は、「田鶴子の人生態度
変換の歩みは、有島の精神的転回の足どりのヴァリェーションである」と指摘したのであ
る。なお、氏のこのような有島の精神史は、「二つの道」から「惜みなく愛は奪ふ」に至
るまでのその精神史をトータルの連続性として捉えながら、『グリンプス』は「中絶」であ
ると指摘したのである。
②山田俊治「『或る女のグリンプス』論―その変質をめぐって―」(『文芸と批評』
昭和53年1月)
「『或る女』前編の改稿問題―葉子の形象について―」(『文学と批
評』昭和54年2月)
山田氏は、「イブセン雑感」に示した男女関係における悲劇的な運命に注目しなが
ら、『グリンプス』の第16章にある回想部を考察し、女性の現実におけるリアリティを読む
ことが出来ると指摘した。つまり、この第16章の「作者の意図」の変質を指摘した上で、
『グリンプス』の「中絶」説を述べたのである。そして、こうした男女関係における運命論
的観念―「開かれた可能性」ではなく「呪われた女」としての田鶴子―が、改稿された
『或る女』では田鶴子から葉子へという着実な変身を成し遂げ、運命的な女性として変貌
14) 西垣勤「『或る女のグリンプス』と『或る女』-蒲生芳朗氏の批判によせて-」(『国文学』昭和52年8月)
『或る女のグリンプス』から『或る女』へ ······································································· 鄭 旭 盛…171
したということを指摘したのである。
③外尾登志美「『或る女』の主題「暗い力」」(『日本文学』303、昭和53年9月)
外尾氏は、「老船長の幻影」と同様に、『グリンプス』も破滅を意味する要素をはら
んではいるものの、葉子の「暗い力」による行動パターンで示したように、「衝動の世界
へ飛びこむ」階段での有島自身の「衝動のままに動くことへの情熱」を読むべきであると指
摘した。そしてその意味において、『グリンプス』は「完結」された作品として見ることが出
来ると言うのである。(葉子の「暗い力」による行動パターンは外尾氏によれば、衝動を
感じる→不完全な覚醒による反発→衝動の世界に飛びこむ→世の中へのふりかえり→徹底
的破滅、ということになる。)
④鳥居明久「『或る女のグリンプス』から『或る女』後編へ―古藤をてがかりとして―」
(紅野敏郞編『有島武郞「或る女」を読む』青英舍、昭和55年10月)
鳥居氏は、古藤が「批判の視点」の「転移」に着目した『グリンプス』の「中絶」
説である蒲生説に反対しながら、『グリンプス』における古藤は批判者ではなく、観察者
の「視点人物」であると主張したのである。そして氏は、『グリンプス』をモデル小説とし
て「目前の事業」を見るという有島の観察行爲がその当初の意図であったと指摘した上
で、「『グリンプス』の連載終了は、作品が中途で行き詰まったためのものではなく、作
品それ自体がひとつの結局を迎えていたが故のことだと言えよう」と言い、『グリンプス』の
「完結」説の立場に立った論を展開している。
⑤江藤茂博「『或る女』成立に関する試論―〈破滅〉への視座をめぐって―」(『武
蔵大学人文学会雑誌』昭和59年12月)
江藤氏は、「ヒロインの破滅を描く〈終局〉は、『グリンプス』執筆の段階でほとんど
具体的なイメージとして作者の胸中に構想されていた」という蒲生氏の論を否定しながら、
破滅に対する認識はあったにしろ、『グリンプス』の段階ではその破滅の構想が具体的に
イメージ化されていなかったという当時の有島自身の精神的状態を指摘したのである。つま
り、氏は「少なくとも、単に状況に敗北する女性の悲劇を描くということは、『二つの道』を
書いた有島には許されていないのである。単なる破滅は、この期の有島の社会認識からす
ると必然なものではあっても、そこからの脫却こそが彼の希いである自己確立に結びつくから
である。『或る女のグリンプス』は文学通り『グリンプス』で終わったのである」という見
解なのである。
以上にように、『グリンプス』における「完結」ㆍ「中絶」をめぐる諸論を見たが、や
はり問題になるのは、有島自身が『グリンプス』を執筆した当時に持っていた原構想は何
172 日本文化學報……第 42輯
であったのか、あるいは『グリンプス』の執筆意図はどこにあったのかという根源的な問題
が、この「完結」ㆍ「中絶」の問題と深く関連しているようである。従って、『グリンプ
ス』における「完結」ㆍ「中絶」の問題は、単にそれらの文献的な考察に止まるのでは
なく、『或る女』と『グリンプス』とに表現されているそれぞれのモチーフを明らかにすること
に通じているように思われる。それを踏まえ、『グリンプス』という作品が、一つの「完結」
された作品か、あるいは「中絶」のままで終わった作品かという論争がなされる根源的なモ
チーフと作者の原構想について、考察を行うことにする。
3『或る女のグリンプス』の「中絶」と「完結」をめぐって
ここまで、研究史および研究内容を概観してきたが、西垣と蒲生両氏の論爭によって活
性化された『グリンプス』論は、特にその「完結」ㆍ「中絶」をめぐって、依然として明
確な究明を得るには至っていない。そのような状況の中で、私としては、それぞれの論点に
幾つかの疑問を感じざるをえないため、ここでは両氏の論について私なりの再検討を施し、
更に『グリンプス』における「中絶」と「完結」の問題を再考しようとするものである。
既に考察してきたことだが、改めてその論の重要なポイントを挙げると次のようになる。ま
ず、西垣説は「『グリンプス』の終わりは、中絶ではなく、そこに有島は一先ずの解放感
を得て終わったと見られるのである」ということであった。これに対して蒲生氏は、前ㆍ後編
の首尾一貫説を主張しながら、『グリンプス』の終わりは西垣氏が言う一つの作品として
「完結」されたものではなく、「中絶」であるとした。この両者の見解に大きな差があるの
は、作者の原構想として、有島自身の執筆当初の見通しや『グリンプス』における作者
の意図が、どこにあったのかという捉え方の違いによって生じている問題であろう。
そこで、『グリンプス』は作者の原構想として一つの完結された作品として見なすことを
可能にするのか、あるいは『或る女』の後編まで有島自身が『グリンプス』を執筆する当
初から抱いていた構想であったのかという問題について考察することにする。
(1)蒲生説に対する疑問
氏は、『グリンプス』における幾つかの要素―破れた懐中鏡ㆍ田鶴子のヒステリー症
ㆍ下腹部の痛みㆍ凶夢ㆍ「青白い顔」の少女との出会いの場面ㆍ愛子と貞世に対する
差別待遇ㆍ倉地の犯罪行爲の伏線等―を取り上げ、これらの場面が『或る女』の後編
の破滅を暗示するものと考えられるのは、作者の意図した描写に他ならない。そのように考え
た場合、『グリンプス』は完結された作品ではなく、『グリンプス』の結末が物語っている
ように、その先には主人公の破滅を描いた『或る女』の後編とつながるのは当然のことであ
『或る女のグリンプス』から『或る女』へ ······································································· 鄭 旭 盛…173
る。その意味でも『或る女』の前ㆍ後編は屈折されたモチーフで描かれているのではな
く、前ㆍ後編の首尾一貫した「トータル」な読みを必要とすると主張した。
この論は、『グリンプス』において破滅的な暗示を物語るそれらの場面によって支えられ
ているのだが、氏が言うようなこれらの場面は、必ずしも『或る女』後編を必要とすることに
はならない気がする。抽象的に表現するならば、もし氏の言う通りであるとすると、その破滅
は必ず描かれなければならないはずである。そうでなければ、氏が指摘した破滅を暗示する
場面の破滅の暗示という機能そのものは、その意味を失うことになってしまう。
しかし、ここでもう一度蒲生氏が指摘したその暗示的な場面を具体的に取り上げなが
ら、蒲生説に対する私の疑問を述べてみる。まず、愛子と貞世に対する差別待遇について
であるが、氏はこの二人に対して田鶴子が接する待遇の違いから、後編の破滅へつなが
るとし、その「偏愛ぶり」を指摘した。
田鶴子は自分の寝床を手早くたたんで愛子を揺り起すと、愛子は驚いた様に、大きな美
しい眼を開けて飛び起きた。田鶴子はいきなり嚴重な調子で、「貴女は明日から私の代り
をしないぢやならないんですよ。朝寝なんぞをして居て如何するの。貴女がぐつぐつして居る
と貞ちゃんが可愛相ですよ。早く身じまひをして下のお掃除でもなさいまし」とにらめつけた。
愛子は羊の様に柔和な眼を眩ゆそうにして、姉を盜み見ながら、衣物を着かへて下に降り
て行つた。田鶴子は姉が階子段を降りきつたのを聞きすまして、寝床にいざりよつて羽がひ
に貞世を軽く抱いた。
この箇所は、氏が指摘した通り、「偏愛ぶり」のように見えなくもない。田鶴子は愛子に
対する「嚴重な調子」や「にらめつけ」るような眼付などとはうらはらに、貞世に対して限り
のない姉の情を寄せるのである。しかし、次の一文見ると、蒲生氏の論に疑問を抱かない
わけにはいかない。それは、「貴方は明日から私の代りをしないぢやならないんですよ」とい
う箇所である。これは一体何を意味するのであろう。思うに、それは愛子が田鶴子の代役
をし、いい加滅で俗たる親族達から妹達を守る役であった。このような愛子にしてみれば、
田鶴子の愛子に対する扱いは、嚴しいものであったことも理解し得るが、この『グリンプ
ス』での差別待遇をもって、後編に見られる葉子のヒステリックな破滅への前触れであると
いう作者の意図した箇所として理解しようとするのは、若干の無理を強いる読みではないだろ
うか。
更に見ると、氏は後編の破滅として、倉地が外國に日本近海の海図を売る犯罪的なこと
の伏線として、『グリンプス』の次の箇所を挙げている。
夫れは始終事務所や船医とグループを造つて、小さな卓を囲んでウィスキーをあぶりな
がら、時々外の船客の話に皮肉な茶々を入れる連中だつた。日本人が着るといかにも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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味に見える亜米理加流の服の仕立方も、さしてさはりにならない程、太平洋を幾度も往来
したらしい人達で、どんな職業を持つ人か、さう云ふ事に人一位銳い田鶴子にすら見当が
つかなかつた。田鶴子が這入つて行つても彼等は格別自分の名前を名乗るでもなく、一
番気楽な椅子に腰かけて居た男が、それを田鶴子に讓つて、自分は二つに折れるやうに
小さくなつて、寝台に曲りこむと、一同は其様子に声を立てて笑つたが、すぐ平気で前の
通りに勝手な口をきゝはじめた。夫れでもどの人も事務長には一目置いて居るらしく、又事
務長と田鶴子との関係も、事務長からすつかり聞かされて知つて居る様子だつた。田鶴
子はさう云ふ間に這入る事を却て気安く思つた。 彼等は田鶴子を下級船員の所謂「姉
御」扱ひにして居た。
この箇所をもって、蒲生氏は後編における倉地の犯罪行為の伏線として取り上げたが、
私としては、既に安川氏によって指摘―「作者としては、倉地の性格、およびこれまでの船
員としての経歴からみてもっとも自然にありうべき可能性として、彼を売国奴的スパイという兇
状持にまですることを考えついたかもしれない。」―済みのように、後編で倉地を國際スパイ
として描いたことについて、やや言い過ぎかもしれないが、当然な感がなくもない。私は、有
島が『グリンプス』の執筆の段階で、倉地を國際スパイとして描くことを構想していたので
はないと考える。それは、後編における倉地の重みㆍ肉付けの必然性によって、しかも『グ
リンプス』を踏まえることであった以上、最もそれらしいものとして、國際スパイという職業に
なったのではないかと思われる。ここでは、たくましくて得体が知れず、しかも悪たる〈男〉
の集団を物語っている上に、田鶴子も「さう云ふ間に入る事を却て気安く思つた」というよう
に、『グリンプス』における倉地と田鶴子との結びにおける一つのバリエーションとして読む
こともできるのである。
更に、破れた懐中鏡ㆍ下腹部の痛みㆍ凶夢ㆍやせた「青白い顔」の少女との出会い
の場面等を挙げながら、これらが後編の破滅を暗示し、その伏線的な機能を担うものとして
氏は指摘した。それは、氏の指摘の通り、暗い未来の破滅として予知的に機能しているこ
とは確かであろう。しかし、だからといって、必ずしも後編の破滅の場面を描かなければなら
ないということではないのではなかろうか。つまり、これらの破滅的な予知の描写は、蒲生氏
が言う後編の破滅を必要とする伏線的なものではなく、『グリンプス』において、ただ予知
的な機能のみを意図して描かれたのではなかったかと思うのである。とすると、この「予知的
な機能のみの意図」というのは、一体どのようなことであるのだろうか。あるいは、『グリン
プス』におけるこの「予知的な機能のみの意図」というのはどのような意味を持っているのか
ということについて、項を改めて考察していくことにする。
(2)『グリンプス』の根源的なモチーフをめぐって
上杉氏は、「『グリンプス』は『二つの道』に述べられている霊肉二元対立のドラマ
『或る女のグリンプス』から『或る女』へ ······································································· 鄭 旭 盛…175
に他ならない」 15)と前提したあと、「『グリンプス』は霊肉二元の世界であり、『或る
女』は霊は去り、肉の次元である」と言い、「この『或る女』の変化はエリスの影響であ
る」とも指摘している。私も、上杉氏が二元から一元への変化であると唱える論に賛同す
る。特に氏は、倉地の描きに対する変化や主人公と倉地との愛の進行に重点を置いてい
た。(上杉氏は倉地を肉の世界として想定し、主人公が倉地と結ぶプロセスを霊の世界
から脫皮し肉の世界に入るという見解をここで述べている。)しかし、私は他の意味で、上
杉氏がいう霊肉二元の世界として『グリンプス』を捉えたいのである。それは、霊肉の裏
側に潜むいわゆる霊による「圧迫」と肉による「反発」である。このことについて、次の本
文を例に挙げながら考えてみる。
『グリンプス』
『或る女』
A.木田は熱烈な基督教徒でもなんでもな a.今までおくびにも葉子にみせなかつた女々
い。田鶴子と同じ平凡な欲望を持つた一
しい弱点を露骨に現はし始めた。後ろから
個の男であるのみならず。
見た木部は葉子には取り所のない平凡な
気の弱い精力の足りないにすぎなかつた。
B.彼れは名を木村と云つて、最も活動的な b.その青年は名を木村と云つて、日頃から快
基督教徒として知られた男で、
C.かの木田との離婚問題が暴露したので、
活な活動好きな人として知られた男で、
c.あの木村との結婚問題が持上ると、
この例の他にも、赤坂ミッションスクールや母への批判等、キリストに対する作者の意図
した描写から、内容が反キリスト的に構成されていることが分かる。従って、改作前の『グ
リンプス』においては、その主旋律として、霊によって「圧迫」するキリストと肉をもって「反
抗」する主人公田鶴子を構図化した作品として読むことが可能であろう。この『グリンプ
ス』におけるキリスト教に対するモチーフは、このように確かなものとして窺うことができるし、こ
のキリストの対立構造は、有島自身が『グリンプス』において意図したものでもあったと思
う。それは、『グリンプス』の成立過程に、有島自身の精神史―キリスト傾倒からキリスト
離れに至るまで―と大きな関わりを持っていると思うからである。(有島とキリスト教との関わり
は、旣に多くの指摘がなされている16)。実際その関係が、有島の精神史の中で重要であ
ることは、いまさら言うまでもなかろう。)
15) 上杉省和「『或る女のグリンプス』から『或る女(前編)』へ」(北海道大学国文学会『国語国文研究』
41、昭和43年9月)
16) これについては既に多くの論者によって指摘されてきたのである。例えば、山田昭夫『有島武郎』、安川定男『有
島武郎論』の論や笹淵友一、西垣勤、上杉省和等ほとんどの研究に、有島武郎とキリスト教との問題を扱って
いるのである。筆者がこの論文に当たって、特に注目したいのは、有島自身の日記(『感想録』)の中に見ら
れる「偽善」の問題である。思うに、当時の有島自身にとって、この「偽善」的な自分のキリスト教観に苦悩さ
れた精神的なことが、『或る女のグリンプス』創作の動機と多くかかわりがあるだろうと思うのである。
176 日本文化學報……第 42輯
しかしながら、ここで有島とキリスト教の問題について少し振り返ってみると、まず注目した
いのは、有島自身の精神的自伝の性格を持った「『リビングストン伝』の序」にある次の
箇所である。
その時私は始めて宗教的有頂天とも云ふべきものに捕へられた。その有頂天が呼び起
す恐るべく緊迫した性欲の発作も亦だ(中略)基督教の説く所のやうでは私にはそれが方
便的であるが、中途半端であるとしか思はれない、ここには虚僞がある。さう思つた。
(中略)
私はかうして信仰から離れてしまつたのだ。それからの私は精神的に全く孤独なものとな
つた。三十四歲で私は元のえいじになつた。
ここに挙げられた引用からは、有島自身のキリスト教信者としての苦悩の精神的内面をよ
く窺い知ることができる。つまり、ここでは、キリスト信者として「性欲」(看護婦)や「罪
意識」(表裏の違い)という〈肉の要求〉に苦しんだことが述べられている。そしてつい
に、有島自身がキリスト教会から明治43年に脫退するが、この明治43年というのは、『グ
リンプス』を発表した1年前であった。つまり、当時の有島の精神的な苦悩、即ちキリスト
による「圧迫」の苦悩を、『グリンプス』によって作品化したのではなかったのだろうか。よ
り具体的に言えば、『感想錄』(有島が日記形式で記録したもの)からも、キリスト教徒
である自分自身の僞善性に何より耐えられなかったことは、既によく知られていることである。
有島自身が抱いていた当時の精神的苦悩は、內面奧の人間的本能への罪意識とキリスト
教徒という外面的僞善性に挟まれ、その脫出口を模索し続けた構図であった。つまり『グリ
ンプス』はそのような意味において、その有島の精神的苦悩の脫出口(カタルシス)として
の意義を持つものとして理解することを可能にすると共に、苦悩の脫出の仕方として僞善性
の脫皮から罪人へと精神的構図の変貌があったと思われる。そのことが、後の『惜しみなく
愛は奪ふ』の中でも窺い知ることができるのである17)。
更に、「『リビングストン伝』の序」で注目しておきたいものは、「飛躍」という言葉が
意味する作家有島の意識の問題である。ここでは、有島の祖母がある宗教から離れること
になるが、そのことを「眼もくらむやうな飛躍」と言ったのである。この箇所は、『グリンプ
ス』本文から次に挙げる箇所の裏側に潜んでいるある意識を物語っているのではないだろう
か。まず、本文を見ることにする。
17) 注16に述べた「偽善」の問題は、日記だけではなく、『惜みなく愛は奪ふ』や『内部生活の現象』、「ホイッ
トマンの一断面」、「草の葉」などにも伺え知ることが出来る。その中で、『惜みなく愛は奪ふ』の一節をあげ
てみると、次のようである。(「神を知つたと思つていた私は、神を知つたと思つていたことを知つた。私の動乱は
そこから芽生えはじめた。或る人は、私を偽善者ではないかと疑つた。どうしてそこに疑ひの余地などがあろう。私
は明らかに偽善者だ。明らかに偽善者である。」)
『或る女のグリンプス』から『或る女』へ ······································································· 鄭 旭 盛…177
『グリンプス』
D. 田鶴子の心は夫れから峰から峰を飛躍した。 d.
『或る女』
葉子はふと心の眼を開いた。そしてその心
はそれ以来峰から峰を飛んだ。
E.田鶴子は兎に角恐ろしい飛躍の瞬間に臨 e. 葉子は兎に角恐ろしい崖の際まで来てしま
んだ事を思はない訳には行かなかつた。
つた事を、
ここに挙げたDの箇所は、赤坂ミッションスクールでの矛盾たるキリスト教への経験、即ち
純粹な少女の心がキリスト教徒達によって無残に破壞された後「飛躍」することを描くことに
よって、反キリスト的なモチーフを强く醸し出している。そしてEの箇所では、ついに主人公
田鶴子が倉地との愛を結んだ直後のことで、それをここでも「飛躍の瞬間」として形容して
いるのである。つまり、倉地との愛の成立は、霊的キリストからの「圧迫」を断ち切る境地
を獲得したことであり、同時に肉の次元の実現でもあるのである。
このように、『グリンプス』を具体的に見ていくと、自分自身の僞善的外面を脫皮するた
めにも、その対象として僞善的キリスト教徒を「俗物的」(西垣)対象として想定し、そし
てそれに反発する〈罪人〉としての田鶴子を描き上げたのである。このような構図とモチーフ
を持つ『グリンプス』が『或る女』の前篇になると、『グリンプス』が持つ意図がかなり
薄れているのである。
何よりも、『グリンプス』を通して有島が獲得した意図は、僞善的キリスト教徒から罪人
への精神的な「目もくらむような」「飛躍」的な変貌であったと言えよう。そういう意味にお
いて、先の「予知的な機能のみの意味」の本文として理解すべきであると言ったのであ
る。というのは、僞善的キリスト教徒である自分自身の罪意識から解放されることによって訪
れるある漠然とした不安感を、「予知的な機能のみの意図」は充分にテクスト內で担って
いるし、有島自身、その機能がテクストの內部に設定する必要があったと認識していたので
はないだろうか。
そのような意味においても、西垣氏が言う「〈俗物〉キリスト者への攻擊、否定が太い
軸として貫かれている」18)という指摘は、これまでの考察から、当を得ていると見ることがで
きよう。さらに西垣氏は、そのような意味で『グリンプス』は、「そこで有島は一先ずの解
放感を得で終わった」と述べていた。氏が言う「解放感」という意味自体の不透明さはあ
るものの、西垣氏が言うこのような結論は、『グリンプス』の結論として妥当であろうか。
私としては、西垣説のこの箇所が疑問でならないのである。
18) 注10と同じ。
178 日本文化學報……第 42輯
4 まとめ―西垣説への疑問をめぐって―
既に考察したように、『グリンプス』のモチーフは、キリストとそれを否定し反発する主人
公田鶴子を構図化し、有島自身の反キリスト的內面を描いたものであるということがわかっ
た。しかし一方で、反発する田鶴子はどのように描かれていたのか。或いは、キリストに反
抗する田鶴子の描き方から、作者有島の意図したものは何であったのかを、更に考えること
にする。
旣に多くの論者によって指摘されてきたことであるが、それらの論点は田鶴子が有島自身
の精神的分身として理解されてきた。この有島の精神的分身たる田鶴子に対して、山田昭
夫氏は「〈叛逆〉への昇華」19)された田鶴子と見なし、その原動力としてローファー的思
想のはたらきを指摘した。同じ見解として西垣氏も「〈叛逆〉の田鶴子に昇華」することに
よって、その反動として信子の親族などのキリスト者を「〈俗物〉キリスト者」20)として形象
することに他ならなかったと言う。更に、上杉氏も「田鶴子は光栄ある叛逆者ヘッダ」21)で
あると指摘した。これらで述べられているように、有島自身が『グリンプス』を執筆するにあ
たっては、その主人公たる田鶴子に対する共感を持っていたと見るべきだろう。それは、田
鶴子を通して有島自身の当時のキリスト教への懐疑を見事に描き出したことからも、田鶴子
は有島自身の分身であると言ってよいと思う。しかし、果たして『グリンプス』における田鶴
子は、その指摘のように昇華された存在あるいは光栄ある存在として描かれていたのであろう
か。それについて、次の本文を取り上げながら考えてみたいと思う。
『グリンプス』
『或る女』
F.勝利者らしい真面目臭つた顔付をして 、 f.小さく見える遠くの方から、 憐れむやうなさ
悪むべき魔女をみよと身のまわりの人達にを げすむやうな顔付きをして葉子の姿を眺めて
めき叫んで居た。
ゐた。
G.田鶴子は墜落するかも知れませんつて仰 g.葉子はどんな人間になり下るかも知れませ
つて下さいまし。
んつて。
H.田鶴子はかうして思はず眼をたぢろがす h.葉子はかうして思はず眸をたじろがす度毎
度に事務長に対して不思議な悪しみを覚え に事務長に対して不思議な憎しみを覚えると
ると共に、もう一度其悪むべき眼を見すゑて 共に、もう一度その憎むべき眼を見すゑてそ
其中に潜む不思議をよく見きわめたい心に の中に潜む不思議を存分に見極めてやりた
なつた。
い心になつた。
I.初めて大罪でも犯そうとする人のやうに夢
中になつて、
19) 注1と同じ。
20) 西垣勤「『或る女』論-前編の構造について-」(『黄塵』5、昭和43年3月)
21) 注15と同じ。
『或る女のグリンプス』から『或る女』へ ······································································· 鄭 旭 盛…179
J.魔のやうな好奇心を似て待ち設けて居たが、
j.心ばかりでなく、肉対的な好奇心を似て待
ち受けていたのだつたが、
K.唯眼の前の罪の淵に浮ぶばかりなる…… k.唯眼の前の恥ずかしき思ひに漂ふばかりな
る……
これらの記述、即ち「魔」「墜落」「悪」「罪」等の言葉は、「昇華」された田鶴
子として或いは「光栄」ある田鶴子として理解することが出来るだろうか。『グリンプス』に
おける田鶴子は、決して「昇華」や「光栄」といった言葉で表せる人物として形容されて
いたわけではなく、相善的ㆍ相聖的な人物として理解するべきである。それに、このような
人物形容にこそ、有島の『グリンプス』に対する反キリスト教という意図による倫理的―宗
教的倫理―反動として、しかもそれを歪曲する(キリスト教そのものに歪曲)ことなく受け止
めようとした有島の姿勢を読み取るべきではないだろうか。有島は『グリンプス』の本文の
中で、次のような非常に意味深い言葉を用いている。それは、「田鶴子は生来こんな惨
い、いまはしい思ひに悩んだ事はなかつた。」という箇所の「いまはしい」という言葉である
が、改作後には「真暗な」と表されている。つまり、『グリンプス』において有島に迫って
くる現実―キリスト教に対する反発によって訪れる―の「罪」意識は、反抗する田鶴子を通
してキリスト教から完全に解放されたと言い得ないのであろう。換言すると、『グリンプス』
の段階では、有島自身に対して西垣氏が言うような「一先ずの開放感を得て終わった」で
はやや無理がある。どちらかというと、『グリンプス』は開放感を得たのではなく、「いまは
しい」という言葉が象徴するように、『グリンプス』執筆当時に抱えていた有島自身の精
神的苦悩―キリスト教に対する苦悩―を完全に振り切ったとは言えないと思うのである。
そのような意味において、蒲生氏が指摘した『グリンプス』における破滅的な伏線を意
味する場面は、「いまはしい」『グリンプス』執筆時期の有島の內面を端的に物語るもの
として、ただ予知的機能にすぎなかったというテクスト上の機能的な読みも充分に可能にする
のではないだろうか。
結論的に、『グリンプス』は、有島が当時抱いていたキリスト教に対する精神的苦悩
を、主人公である田鶴子を通すことによって「叛逆」として描きつつ、一方では有島自身
がその「叛逆」によって求道されることなく、「いまはしい」気分に包まれていた精神の內
面を、率直に表した作品として理解すべきではないかと思われるのである。
180 日本文化學報……第 42輯
【参考文献】
ㆍ本多秋五(1954)『「白樺」派の文学』、講談社
ㆍ瀨沼茂樹(1965)『日本近代文学ㆍ人と作品』、読売新聞社
ㆍ野島秀勝(1965)「人道主義の振幅―有島武郞論―」、『文学界』12-1ㆍ2ㆍ3
ㆍ山田昭夫(1966)『有島武郞』、明治書院
ㆍ安川定男(1967)『有島武郞論』、明治書院
ㆍ上杉省和(1968)「『或る女のグリンプス』から『或る女(前編)』へ」、北海道大学
国文学会『國語國文研究』
ㆍ西垣 勤(1971) 『有島武郞論』、有精堂
ㆍ蒲生芳郞(1972~1973)「『或る女』論序説―前ㆍ後編屈折の問題に対する試論―」、
『宮城学院女子大学基督教文化研究年報』6ㆍ7
(1976)「『或る女』論―『或る女のグリンプス』と『或る女』後編の関係―」、
『宮城学院女子大学基督教文化研究年報』9ㆍ10
『或る女のグリンプス』から『或る女』へ ······································································· 鄭 旭 盛…181
要 旨
本稿で 、 『或る女のグリンプス』の「完結」ㆍ「中絶」という文献的問題を踏まえつつ 、
『或る女のグリンプス』の根源的な主題について考察した。特に、西垣勤の論と蒲生芳郞の
論との両氏の説に注目しながら、それぞれの論点の是非にについて論じながら、新たに『或る
女のグリンプス』の読みを提示したのである。
まず、蒲生芳郞は、『グリンプス』における幾つかの要素―破れた懐中鏡ㆍ田鶴子のヒス
テリー症ㆍ下腹部の痛みㆍ凶夢ㆍ「青白い顔」の少女との出会いの場面ㆍ愛子と貞世に対
する差別待遇ㆍ倉地の犯罪行爲の伏線等―を取り上げ、これらの場面が『或る女』の後編
の破滅を暗示するものと考えられるのは、作者の意図した描写に他ならない。そのように考えた場
合、『グリンプス』は完結された作品ではなく、『グリンプス』の結末が物語っているように、
その先には主人公の破滅を描いた『或る女』の後編とつながるのは当然のことである。その意
味でも『或る女』の前ㆍ後編は屈折されたモチーフで描かれているのではなく、前ㆍ後編の首
尾一貫した「トータル」な読みを必要とすると主張した。しかし、だからといって、必ずしも後編
の破滅の場面を描か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ことではないのではなかろうか。つまり、これらの破
滅的な予知の描写は、蒲生氏が言う後編の破滅を必要とする伏線的なものではなく、『グリン
プス』において、ただ予知的な機能のみを意図して描かれたのではなかったかと本稿では、論
じられているのである。
それから、『グリンプス』の段階では、西垣勤がいうように、「一先ずの開放感を得て終
わった」ではやや無理があるみるのである。どちらかというと、『グリンプス』は開放感を得たの
ではなく、本論で考察した「いまはしい」という言葉が象徴するように、『グリンプス』執筆当
時に抱えていた有島自身の精神的苦悩―キリスト教に対する苦悩―を完全に振り切ったとは言
えないと思うことを本稿では、主張されているのである。
キ ワ ド: 完結説、中絶説、予知的な機能、飛躍、いまわしい
투
고 : 2009. 5. 31
1차 심사 : 2009. 6. 13
2차 심사 : 2009. 6. 27
江戸後期の浮世絵にみる視覚イデオロギー
-広重の名所江戸百景-
金 愛 鏡*1)
(e-mail : [email protected])
目 次
1. はじめに
2. 分析対象絵図の位置づけ
3.『江戸百』の製作背景
4.「定型」のハード要素の象徴性
5.「定型」のソフト要素の象徴性
6.『江戸百』の本質
7. 結びに
参考文献
図版目録
図版
1.はじめに
『名所江戸百景』(以下では『江戸百』)とは、浮世絵師の歌川広重(1797~185
8)が安政3年(1856)から同5年(1858)にかけて制作した連作「浮世絵」である。
広重最晩年の作品であり、その死の直前まで制作が続けられ、最終的には完成せず、
二代目広重の補筆が加わって、『一立斎広重一世一代江戸百景』として刊行された。
周知のごとく「浮世絵」の種類には性を扇情的に描写した「春画」、遊女など若い女
性を描いたを「美人画」、歌舞伎役者を描いた「役者絵」、各地の景色や風俗を描い
た「名所絵」など約20種類ある。
『江戸百』は「名所絵」として知られているが、単なる「名所絵」ではなく、江戸後期
の混乱期に瓦版と共に情報伝達媒体としての役割を果たした全120図(内一図は二代広重
落款、一図は目録)の連作である。この連作は西欧のジャポニスム形成の要因になったこと
* 漢陽大學校 大学院 日本言語文化學科 博士課程
184 日本文化學報……第 42輯
で日本が誇る芸術品であり、枚数の多さに呼応した情報量、描かれた場所の明示、幕
府の検閲をパスした年月の入った改印が捺されていることから多くの分野の画証資料として
注目されている。
これまでの『江戸百』に関する先行研究をみれば二つの流れがある。一つは芸術性に
関する分野で、芸術的価値を論ずる場合よく挙論されることがジャポニスムと印象派との関
係である。また、構図、配色
ボカシの妙、描法、種本利用の問題がある。特に構図
については広重得意の斬新な「近像型構図」が注目されているし、配色
ぼかしについ
ては、水の濃い藍色のボカシと高度な摺り技術の熟達が論じられている。もう一つの分野
は、芸術性以外の分野である風俗史、都市史、マスメディア論、都市景観論、流通の
メカニズム論、知的財産戦略論、地震に関する論、最近の製作の背景や製作動機に関
する研究など大変重層的である。しかし、これほど幅広い分野から研究されている『江戸
百』だが、そのイデオロギー性まで踏み込んで考察することはいまだ十分なされているとは言
い難い。
本来、「浮世絵」とは、庶民が集団的に認知する表現、時事性ある素材を扱う、今
で言う人気俳優のブロマイドや絵葉書、街頭ポスターやチラシのような商品である。これら
は肉筆画もあるがたいてい商業的に企画された錦絵1)であり、絵師の意志が貫通できる純
粋美術品と違い、企画する版元の意向に制約され、彫師(ほりし)や摺師(すりし)の
技術にも左右される共同製作する印刷物である。
効率的な大量生産は「名所絵」の低価格を実現し、視覚文化の大衆化に寄与した
が、大量生産による「定形化」は恐ろしい‘諸刃の剣’ともいえる。「名所絵」形式の「定
形化」は良い結果をもたらす可能性をもつ反面、定形イメージの内容が支配され、資本と
権力の力、伝統で包装した行為などが介入される蓋然性がある。
広重の『江戸百』は江戸後期の風景の中に庶民の暮らしぶりを敍情的に描写したこと
で一層高く評価されている。しかし『江戸百』が描かれた嘉永、安政年間は、諸外国か
ら開国を迫る政情不安のなか、天災と人災が絶えず、元号までも嘉永から安政へ改めら
れるほど不安な時期だったのだ。この矛盾に基いて見れば、『江戸百』形式の「定形」
要素は‘江戸社会の支配イデオロギーの象徴’である蓋然性が高い。
本稿では『江戸百』を特徴つける「定型」要素に焦点をあて、「定型」を形成して
いる主要な視覚モチーフになっている素材、構図、色という造形的要素の象徴性を分析
し、上記の蓋然性が高いことを示し、その基底に存在するイデオロギー性を把握すること
で、広重晩年の連作がもっている本来の性格を明らかにすることを試みたい。
1) 浮世絵版画の版様式。1765年(明和2)に江戸で大流行した絵暦(えごよみ)交換会を機に飛躍
的に進歩した多色摺(ずり)木版画をさし、初期の三色程度の多色摺は紅摺絵(べにずりえ)とよんで
区別する。
江戸後期浮世絵にみる視覚イデオロギー-広重の名所江戸百景- ······························ 金 愛 鏡…185
「名所絵」の解釈問題は他の分野の「浮世絵」研究にも直
間接的に繋がるのでこ
のような試みは意味があると考えられる。
2.分析対象絵図の位置づけ
本稿では、「名所絵」を特徴つける「定型」要素に焦点を当て、「定型」を形成して
いる主要な視覚モチーフになっている素材、構図、色という造形的要素の象徴性を分析す
る。以下では、具体的な例をあげてそれぞれの「定型」モチーフについて詳細に説明して
いくが、その際、分析対象絵の枠組となる次の三点を確かめておきたい。
第一は、江戸時代後期に描かれた「浮世絵」であること。
第二は、マスメディアとして中心的役割を果たした浮世絵版画であること。
第三は、「定型化」による象徴性を明示的に見せてくれる「名所絵」であること。
こうした枠組の中で、分析対象「浮世絵」を選定しなければならない。
以上の条件を満たす広重の『江戸百』を分析対象とし、「定型」モチーフということを
念頭におくと、以下の二群のカテゴリーが浮かび上がってくる。
第一群は、「定型」のハード要素として、本稿では日本橋、富士山、江戸城、白壁の
蔵をとりあげる。
第二群は、「定型」のソフト要素として、俯瞰(鳥瞰)構図とベロ藍(Prussian Blue)
をとりあげ、その象徴性を分析する。
このうち、まず3章で広重の『江戸百』の描かれた社会
文化的背景、絵師の成長
背景を考察した後、4章では第一群のモチーフを先に取り上げることとし、第二群のモチー
フについては5章で取り上げる。6章では以上の論議をまとめ『江戸百』の本質を明らか
にし、7章を結びとする。
3.『江戸百』の 製作背景
3-1. 江戸後期社会の姿:名所絵の発達
広重が浮世絵師として活躍した江戸2)後期の嘉永、安政年間は、開国を迫る政情不安
の中、天害と人災の連続であった。嘉永7年(1854)には、元号が嘉永から安政へ改
められた。その理由は、改元前の4月、京都で大宮御所から出火する大火があり、6月
には震度7.3弱と推定される伊賀上野地震が起き、また異国船が近海にしばしばやってくる
2)
徳川家康が征夷大将軍に任ぜられた慶長8年(1603)から、徳川慶喜(よしのぶ)が大政を奉還して
将軍職を辞した慶応3年(1867)までの、江戸に徳川幕府の存続した265年間。家康が関ヶ原の戦いに
勝利を収めた慶長5年を始期とする説もある。徳川時代。
186 日本文化學報……第 42輯
ことが、改元の理由として挙げられている(原信田、2007)。しかし改元後の安政という
時代は、残念ながら改元に込められていた念願とはほど遠い時代たった。
対内的には、安政2年(1855)、「安政江戸地震」 3)とも呼ばれる大地震があっ
た。この地震で江戸城の石垣が崩壊し本所や深川など下町を中心に死者約4300人、倒
壊家屋約1万戸など大きな被害があった。以前に江戸を襲った大地震は、元和の地震
(1615年)、慶安の地震(1649年)、元禄の地震(1703年)があり、それから150年
以上経っているので、地震に対する危機感が欠如していた人々に危機意識が急激に高
まった。続いて安政3年(1856)の大台風の被害もあり、火災も頻繁に発生し、特に安
政4年(1857)4月の芝宇田川から出火した火災は大きかった。安政5年(1858)に
は、広重が同年コレラで死亡したと伝えられるように、長崎から侵入したコレラが全国的に
流行し、激甚な被害を与え、超人口過密都市江戸だけで死者10万余あるいは26万余とも
いわれた。
対外的には、江戸時代中期頃から、日本近海に外国船が頻繁に出没するようになり、
諸外国から開国を迫る中、1853年アメリカのペリーが浦賀に来航し強硬に開国を迫り、幕
府は1854年開国する。開国してからの日本は幕政開国派と尊皇攘夷派に分かれての抗
争が始まり、長州による内乱も起こり幕府の瓦解が始まった。ペリー来航がもたらした幕末
の政治的緊張
混乱は、庶民のレベルにおいては、不安感とともに見たことのない外国の
文化や外国人そのものへの好奇心も広がった。
庶民は予測出来ない不安感から、災害や疫病などについての情報収集にやっきになっ
ていた。庶民の不安感を解消する視覚的情報伝達の役割は大きく、大錦絵や出火場細
見記の半紙本、地震絵図等が版元に持ち込まれ、版元達はニュース性を盛り込み、庶
民の趣向に敏感に反応し、廉価4)な名所絵版画制作を競い、制作量も一度に大量化す
ることになる。
以上のような時代状況のもとで、広重は『江戸百』シリーズを2年半に渡り、江戸最後
の光景を描き続くことになる。明治維新まであと10年のことだった。
3-2.出版物規制と筆禍事件 5)
『江戸百』には具体的な場所が明示されていて、正確な検閲日付も捺されている。新
興幕府は体制保持の為、政治を批判する声を封殺すべく諸々の法令を出していたが「浮
3)
安政三大地震の一つ。江
を震源とする、 東地方南部で 生したM6.9の大地震。この
地震による災害は、1923年の 東大震災と 別する に、「1855年 東大震災」とも言われ
る。
4) 風景画ブームの頃の浮世絵風景画の値段は,1枚20文程度で、一枚当たりの価格は、当時の諸物
価と比較しても安価であったことは確かなようである。
5) 筆禍とは発表した作品の内容が原因になって、当局や社会から処罰を受けたり制裁を加わえられること
をいう。
江戸後期浮世絵にみる視覚イデオロギー-広重の名所江戸百景- ······························ 金 愛 鏡…187
世絵」の出版に関しても、その内容については規制を加える法令を出した。万が一、「浮
世絵」が幕藩体制を批判する内容などに用いられれば、一瞬に世間に浸透する恐れがあ
ると憂慮したからだ。法令そのものは明歴
寛文の頃(1655〜73)より出されているが、
享保の頃(1716~1736)には禁止の内容が具代的に整えられ、内容に違反した絵師や
版元には処罰が科せられた。その骨子は次の5項目である。
①幕藩体制を批判する内容を持つもの。
②信長 秀吉政権以降の武家について記す事。
③社会の出来事や流行の報道。 ④金をかけた贅沢な印刷。
⑤春画や枕絵 好色本など風紀上好ましくない内容であること。
(「図説 浮世絵入門」、稲垣進一、1990)
また寛政2年(1790)には、松平定信(1758―1829)6)が行った寛政の改革の一環
として出版統制が始まり、「改印制度」を施行し、出版を町奉行の管理下に置かせた上
で、出版物を製版前に版下を提出させ許可印である改印を画中に捺印させるという方法を
とらせた。同年、松平定信の出版取締りに関する触書の効果をあげるため、見せしめとし
て摘発されたのが、蔦重と京伝であった。7)
続いて寛政4年(1792)には「一枚絵」にも実在の女の名前を表示することが禁止さ
れ、さらに過度の重ね摺りの禁止、赤色の使用禁止が発令された。
以下は『筆禍史』8)における、「浮世絵」に関する部分の一部である。
例へば太閤の側に石田三成児髷の美少年にて侍るを、太閤その手を執る、長柄の銚
子盃をもてる侍女顔に袖を蔽ひたる図、或は加藤清正甲冑して、酒宴を催せる側に、挑
戦の妓婦蛇皮線を弾する図など也、かゝれば板元絵師等それ/\糾問の上錦絵は残ら
ず没収、画工歌麿は三日入牢の上手鎖、その外の錦絵かきたるもの悉く手鎖、板元は十
五貫つゝの過料にて此の一件事すみたり云々又『浮世絵画人伝』には左の如く記せり喜
多川歌麿と同時に、豊国、春亭、春英、月麿及び一九等も吟味を受けて、各五十日
の手鎖、版元は版物没収の上、過料十五貫文宛申付られたり豊国等の描きしは、太閤
6) 江戸後期の大名。寛政(かんせい)の改革を断行した老中。
7)
京伝は手鎖50日(在宅のままひょうたん形の手錠をはめられる)刑に処せられ、版元の蔦重は書籍絶
版の上、財産の半分没収という苛酷な刑を受けた。以降、京伝は筆を折り、蔦屋は錦絵中心の経営に
シフトした。
8) 宮武外骨著 明治44年刊(原本:浅香書店 明治44年(1911)刊、底本:影印版 崙書房
昭和49年(1974)刊)
188 日本文化學報……第 42輯
記中賤ヶ嶽七本槍の図にして、一九は化物太平記といふをものし、自画を加へて出版せし
によるなり
当時、美人画の大家喜多川歌麿(1753~1806)は、秀吉の花見姿を描いたという理
由から逮捕された。歌麿は入獄3日、手鎖(てぐさり=手錠)50日の刑を受けた。52歳の
歌麿にとっては非常に重すぎる刑は心理的にも、身体的にも悪影響を受けざるを得なく、2
年後、世を去った。この時代、幕府の許可なしに武士の生活を描くことは禁じられていた。
「太閤記」9)と関係があれば、文学作品であろうと、画作であろうと、テーマとしてタブー
であった。また、江戸の庶民の同情を集めていた豊臣秀吉を描くことも禁止されていた。
江戸も後期になると、規制の網をくぐり、黒船の来航や各地の災害などを伝える瓦版が出
版され、揺れ動く世相を風刺した。
安政2年(1855)、安政大地震の瓦版が多数発行された。その中『安政見聞誌』が
有名だったが、安政3年(1856)5月、発禁本となり、『安政見聞誌』を出した版元と共
著者の一筆庵英寿は手鎖の刑となった。絵師の歌川芳綱は崩れた半蔵門
10)を描いたこ
とが処罰の対象になり、堀師と摺師にいたるまで厳しい処分があった。ちょうどこの時期は
『江戸百』の製作が始まったところで、版元の魚栄と絵師の広重は筆禍を恐れていたに
違いないだろう。
この制度は明治8年(1875)に新政府によって改正されるまで86年間続いた。
3-3.絵師の成長背景:俯瞰構図との関連性
広重は幕府定火消11)同心安藤源右衛門の子として江戸八代洲河岸の同心長屋に生ま
れた。安藤家は定火消同心という下級役職で俸禄は三十俵二人扶持という貧しい御家人
だった。
13才に両親を亡くした広重は、幼い身でありながらも定火消同心の家督を相続した。 15才の時、浮世絵師、歌川豊広の門人となり、師匠の一字をもらって『広重』の名に
なったもので、画号は、「一幽斉」․「一遊斉」と称と称後に「一立斉」または「立
斉」と名乗る浮世絵師となった。
豊広に入門して10年余り、文政6年27歳で安藤家の家督を縁者の仲次郎に譲り隠居
した。この時期の作品は流行に追随した「美人画」作品が多く、広重の感性を充分に表
現したものではない。しかし、師匠である豊広の死去が「自立」に大きな拍車をかけた。
9)
豊臣秀吉に関する伝記。「太閤」とは摂政 関白を辞した者への敬称で、秀吉が1591年に関白職
を辞し甥の豊臣秀次に譲った後に太閤となったことにちなむ。
10) 江戸城(現在の皇居)にある門の1つ。
11)
定火消とは江戸城の丸の内、大名屋敷、旗本屋敷の消火に当たるのが役目で、普通四千石から
一万石の旗本が交代で定火消を勤め、配下に与力六騎と同心三十人づつがついていた。
江戸後期浮世絵にみる視覚イデオロギー-広重の名所江戸百景- ······························ 金 愛 鏡…189
35歳の天保2年(1831)頃から、季節感と文学的要素を盛り込んだ「名所絵」を描く
ようになり、その3年後、保永堂から発刊された『東海道五十三次』は浮世絵界始まって
以来の大ヒットとなって人々に受け入れられ、ようやく自分の進むべき方向を確立した。
以上、『江戸百』が描かれる以前の、広重の画風確立にいたるまでの成長過程の背景を
見た。
「江戸百」の80%を占める俯瞰(鳥瞰)視点と近像を多岐にわたって取り入れるなど
の構図は絵師の成長過程と関連はないだろうか。
原信(2007)は『江戸百』と関連し、広重の人生に触れて、「多感な年頃に肉親を
亡くすという経験が、広重の情緒形成に大きな影響を及ぼした」と述べている。
本稿ではそれより安藤家の定火消同心の職業に住目したい。
広重は13才で定火消同心の家督を相続いたものの、幼年の時から火の見櫓12)という高
いところから町を観察、真下に見下ろすことができる経験があったのだ。また職業性格上、
火事発生を備えて特定場所を集中して観察しなければならない必要性もあったはずだ。
これらの経験は風景を深く観察する目を養い、体験した事をどのように表現し、アピールす
かを学ぶのに役立ったはずである。
このような仮説を後押しているのが広重の初期の「火事絵」である『江戸乃華』だ。こ
れは、上下二軸に収められた21点を絹地に画いた作品である。この作品は題材、構図、
色彩、考証など総ての点で定火消同心という職業でなければ到底画き得ない境地の「火
事絵」と評価されている。
実際『江戸百』の「名所絵」と『江戸乃華』の中の「火事絵」の構図を比較してみ
ると、図1は『江戸乃華』上券の中の一点の絵で、簡単な火の見櫓で番人が勤務してい
る様子を絵にしたものである。図2は、『江戸百』の中でも評判のよい一点で、江戸の町
並みに七夕飾りをつけた青竹が描かれているものである。構図においてほとんど同じことがひ
と目で分かる。いまひとつ、図3と図4を比較してみると、図3の空に鷹を描きこむと図4とほとん
ど同じ俯瞰(鳥瞰)構図の絵になるのである。
4.「定型」のハード要素の象徴性
4-1.共有するイメージの表出
以上のようなの製作背景を踏まえ、ここでは『江戸百』を特徴つける「定型」のハード
12)
江戸には町の中のいたるところに火の見櫓があった。町ごとに番屋(番所、自身番とも)を設置し、
番人(番太郎 番太と呼ばれていた)を常駐させて24時間態勢で警戒にあたるのが一般的であった。こ
のとき番人が町全体を見渡せるよう、番屋に櫓を組んで一段高いところに見張台を置いたが、それが火の
見櫓と呼ばれる。
190 日本文化學報……第 42輯
要素、つまり日本橋、白壁の蔵、富士山、江戸城に焦点を当て、その象徴性を探ってみ
ることにする。
『江戸百』の巻頭絵(図5)には
日本橋、白壁の蔵、富士山、江戸城がひとつの
画面に全部収められている。同様の構図は、西村重長(?-1756) 13)の『絵本江戸土
産』をはじめとして一つの「定型」になっていた(原信、2007)。これら「定型」のハー
ド要素は「名所絵」に欠かせない素材で「名所絵」成立以来、繰り返し描かれていた
が、文化年間(1804年)以後となると「浮世絵」だけでなく、狂歌にもこれらの素材を一
体化した見方が同時期うかがえ14)、江戸末期に近づくにしたがって、この意識は絵資料と
文字資料双方からいっそう明確に確認できる(大久保、2007)。
まず絵資料をみると、広重が江戸中心部を描いた「日本橋雪晴」(図5)には、日本
橋、富士山、江戸城の3モチーフと白壁の蔵がひとつの画面に揃って描かれている。
図6は雪が降っている江戸を描いた『東都名所』の「日本橋雪中」である。雪が降っ
ているので現実的に富士山か見えることが有り得なくとも、近景に日本橋、白壁の蔵、中
景に江戸城、遠景に富士山を配する構図をとっている。これらのモチーフは視覚上の必然
として描かれるのではなく、人々の間で共有するイメージにもとづき事実と異なる景観が描き
出されるのである。
広重に限らず、当代の有名な浮世絵師であった葛飾北斎(1760ー1849)が描いた
『富嶽三十六景』の「江戸日本橋」(図7)でも同じ構成がみられ、江戸風景を描く
時の欠かせない象徴と思われる。
次は文字史料をみると、日本橋、富士山、江戸城の3モチーフのイメージを揃って記述し
た例は多く見られる。以下では簡単な句を一つ選んで例に挙げると、天保4年(1833)刊
の『柳多留』15)121編に載っている句(大久保、2007、再引用)がある。
名山と名城晴日本橋
日本橋の上に立って望めば、晴れ渡った空を背にして、江戸城の偉容と富士山の麗姿
が浮かび上がって見えると詠んで、まるで「日本橋雪晴」(図5)の絵画的光景を詠ん
だように記述されている。
それでは各モチーフはどういう意味をもって、揃っているのか。以下では各モチーフごとの
13)
江戸時代中期の浮世絵師。鳥居清信、奥村政信の影響をうける。美人画、花鳥画、役者絵など
画題は多彩で、細判三枚組を創始し、石摺絵を考案したという。
14)
「日本橋とりて向へる御膝元へすはりし膳のふしの高もり 我心斎不石」という狂歌がある。この狂歌は、
豊国の絵本『燕都の見画』中の「日本橋」に見られる画讚である(大久保、2007、p.133 再引用)
15) 江戸中~後期の川柳(せんりゅう)句集。初編1765年(明和2)刊~167編1840年(天保11)
刊。
江戸後期浮世絵にみる視覚イデオロギー-広重の名所江戸百景- ······························ 金 愛 鏡…191
象徴性を把握してみる。
4-2.諸モチーフの象徴性
近景から日本橋と白壁の蔵の象徴性をみる。
日本橋は五街道16)への起点とし、橋詰めには高札場17)があり、陸路水路を使ってさまざま
な物資が集まってくる江戸の中心地であった。
江戸時代も後期に入ると、都市
地方ともに新興商人の台頭が始まり、活発な展開を見
せるようになる。出版に関しても、当時日本橋には多数の板元があり、「浮世絵」や「絵
草紙」18)が盛んに製造
販売される。図5、図6、図7には日本橋川南岸に沿って一列
に並んだ白壁の蔵が不自然に大きく描かれていて、経済繁栄の中心地であることを裏づけ
ている。煩雑な日本橋と白壁の蔵は活気に満ちた江戸の経済を象徴する。
次は、江戸城の象徴性をみる。
江戸が「将軍のお膝元」と象徴されたように、江戸城は将軍の居城として、また江戸幕
府の政庁として、当時は天下一の格式と規模を誇った城であった。
江戸の大名屋敷を描いた物としては、「泥絵」19)が唯一の物といって良いだろう。その
「泥絵」にしても江戸城だけは描いていない。他の「江戸図」にも描いてはいないし、
「名所絵」のタイトルにも大名の名前や建築の名称が使われなかった。そこには、社会的
規制にかかわる問題として、江戸城を正面から取り上げることへの規制、政治的規制ない
しは禁忌の存在を想定するしかない。
広重は江戸城を森のなかにこっそり描き込むことで、国家権力と権威ともいえるその象徴性
だけを共有した。
最後に富士山の象徴性をみる。
日本最高峰の山である富士山は、古来より絵画に多く描かれたモチーフだった。仏教の
禅宗内部でも富士山は愛され、白隠慧鶴(1685~1768)20)なども描いていた。
16) 東海道、中山道、甲州街道、奥州街道、日光街道
17) 「高札」とは、法令 禁令などを板札に墨書きし、人々に周知するために、高く掲げたもの。江戸
時代が全盛期。幕府や藩は、人の往来の多い目立つ場所に高札場を設けた。その中で、最も重要な
場所の一つがが、江戸日本橋だった。江戸では、日本橋のほか、常盤橋門外、浅草橋門内、麹町
半蔵門外、芝車町などに高札場があった。高札に記された法令の中には、キリシタン密告者への褒美の
定め、駄賃等の定め、似せ金銀売買の禁止、金銭の公定相場(金一両=銭四貫文)、など、お金
にまつわるものも含まれていた。
18) 江戸時代、世間の出来事を1、2枚の絵入りの読み物にした印刷物。読み売り。瓦版(かわらばん)。
19) 泥絵とは泥絵の具とよばれる、胡粉(ごふん)を混ぜた安価な粉末状の絵の具で描いた絵のこと。幕
末から明治の頃に泥絵具を用いて描かれた庶民的な日本画で、西洋や中国からの舶来絵画の影響を受
けている。泥絵に描かれた内容として、富士を配した江戸の名所、特に白壁の大名屋敷、江戸城門を
画題としたものが多い。
20) 臨済宗の僧侶。「駿河には過ぎたるものが二つあり、富士のお山に原の白隠」とも称される人物
(1685~1768)白隠は民衆に禅をわかりやすく伝えるため、書や禅画を多数制作した。技巧にとらわれ
192 日本文化學報……第 42輯
江戸後期になると、富士信仰がブームとなり、「八百八講」という言葉が象徴するよう
に、富士講という組織がレジャー的要素も加わって爆発的な流行を見せた(大久保、
2007)。
『江戸百』119点中、富士山が描かれている絵図は16%にのぼり、富士塚を描いだ
絵も2点ある。富士塚は土を盛って作られた人工の小さな山で、富士山がよく見えるところに
作られ、富士山に行くことが出来ない人たちの遙拝所であった。江戸のいたるところに富士
塚が築かれ、当時の富士山は富士信仰と繋がって意識されていたともいえる。
以上、主要モチーフの象徴性を見た。当時は画作であろうと、文学作品であろうと、江
戸をテーマとした作品の多くは、江戸の人々ならば了解可能なモチーフ(象徴性を共有す
るモチーフ)、つまり日本橋、白壁の蔵、富士山、江戸城といったモチーフの組み合わせ
によって、メッセージを表出した特徴がある。『江戸百』の各名所ごとに描かれている主要
モチーフも同じ脈絡で描かれていた。象徴モチーフの組み合わせは版画絵の企画段階で
の約束事であり、それを守ることによって表出されるメッセージは大衆にとって了解可能にな
り、それが定番商品の要件にもなったのだ。
大久保(2007)は江戸時代も後期になると個々の名所ごとに描かれるべき景観の「定
型」が形成されていると指摘し、これらが売られる定番商品としての要件であると述べてい
る(『広重と浮世絵風景画』)。
幕府の検閲をパスした改印によると「江戸百」は一ヶ月に3点から14点の頻度で出版さ
れた人気商品であった。広重が描いた「名所絵」は一説では1000点という膨大な点数に
のぼり、同時期の他の江戸名所絵に比して、概して残存枚数も多く、摺りの粗悪なものや
版木の甚だしく摩滅したものなどが当たり前のように見られることから、相当な枚数が売れた
ことが明らかである(大久保、2007)。
単純な「定型化」パターンの趣向は江戸庶民に支持され、相当な影響力を持っていた
のに違いない。
5.「定型」のソフト要素の象徴性
5-1.俯瞰構図の意味
以上では『江戸百』の「定型モチーフ」の中、ハード要素の象徴性をみたが、ここで
はソフト要素について詳細に説明していく。その際、まず『江戸百』119点を視線に着目し
ない豪放でユーモラスな書画は高く評価されている。
江戸後期浮世絵にみる視覚イデオロギー-広重の名所江戸百景- ······························ 金 愛 鏡…193
て分類してみると、図3のように、「俯瞰」 21)と「水平」の二つの視線に分類できる。
「俯瞰+近像」の視線は「俯瞰」を基本にしているので、「俯瞰」に含ませると、『江
戸百』は「俯瞰型」と「水平型」という二つの構図が繰り返されているのに気づく。
特に「俯瞰型」構図は全体の80%を占め、広重はヘリコプターもない時代にかなり高
い所で見下ろす俯瞰の感覚を持っていた。この感覚については前述の絵師の成長背景と
俯瞰構図との関係で詳しく把握してみた。
広重「名所絵」の全般を占める俯瞰の視点は、水平よりも下方向を見下ろしたのが大部
分だ。これらの構図が意味することは「状況説明」である。俯瞰構図は被写体が小さく
見えて登場背景の配置が一目でわかる。スポーツ中継やビデオゲームなどに俯瞰の映像
が多いのは、見る者に早く情報を伝えるためである。
図3「江戸百」構図分布
俯瞰(鳥瞰)
43%
水平
20%
俯瞰(鳥瞰)
80%
俯瞰+近像
37%
水平
俯瞰(鳥瞰)
俯瞰+近像
現代において、俯瞰視線はプライバシー保護とも関係あるが、江戸時代の俯瞰視線は
権力と統治の象徴であった。天守閣がその典型的な象徴である。天守閣はすべてを俯瞰
できるように可能な限り高くつくられている。城下町の庶民は生活しながら天守閣を眺めて実
際君主がそこに居るか居ないかに関係なく、君主の視線すなわち、権力を感じながら生活
しなければならない仕組みになっている。
‘江戸時代の視線は権力であり、権力は視線をコントロールし、俯瞰する場所を独占する’
この観点からいうと、広重の『江戸百』の得意な俯瞰視点は大衆に都市の眺望権を提供
している。大衆は必要な情報を取りながら俯瞰構図が与える広い視界の余裕を感じながら
代理満足することができる。このことが『江戸百』が持っている商品としての力であるといえ
る。
21)
空中または高所から見おろしたように描いた地図や風景画のことを言う。
194 日本文化學報……第 42輯
5-2.「俯瞰+近像」の意味
「俯瞰+近像」は「近像型構図」ともいわれ、テーマになるものの姿を前面に大きく拡
大し、近景が遠景に比べ極端に対比され、近景のモチーフが強調される描写法ともいえる
(成瀬、1977)。この描写法は「江戸百」が持つ独特の位置の一つであり、広重は
「近像型構図」を多様している。これは広重特有の独創的構図とみるより洋風化との関連
性を通じて理解することができる。代表的な「近像型構図」の始まりは秋田蘭画(あきたら
んが)で見られる。秋田蘭画とは、江戸時代における絵画ジャンルのひとつで、「西洋
画」の手法を取り入れた構図と純日本的な画材を使用した和洋折衷絵画である。安永年
間(1772年-1781年)に久保田藩で成立したが、後継者もなく天明年間(1781年-
1789年)には廃れた。しかし、短い時間存続した秋田蘭画は司馬江漢22)を通じて継承さ
れ(武
、1979)、その極端な遠近法は後代の「浮世絵」にも大きな影響を与えたとさ
れる。代表的な画家は佐竹曙山(1748~1785)23)とか小田野直武(1749~1780)24)
があり、作品に登場する近大遠小の構図は「近像型構図」として知られている。
「近像型構図」という名称は成瀬不二雄の論文で1977年最初に使われた言葉であ
る。25)彼は近像型構図の由来を秋田蘭画→司馬江漢→亞歐堂田善→葛飾北齋→歌川
広重につながる一連の系譜を構成した。このような系譜は「名所絵」と「西洋画」との密
接な関連性を物語っている。
図8、図9は『江戸百』の「俯瞰+近像」の作品である。かなり高所から見おろした俯
22)
江戸時代の絵師。蘭学者。鈴木春重は同一人物。本名は安藤峻。浮世絵師だったが、後に洋
風画を描くに至った。平賀源内と接点があり、彼を通じて前野良沢や小田野直武に師事したとも言われて
いる。 安藤広重の名作「東海道五十三次」のオリジナルを描いたという説がある。
23) 江戸中期の洋風画家、第8代秋田藩主。幼名秀丸、初名義直(よしなお)、のちに次郎義敦(よ
しあつ)と改め、字(あざな)を大麓(だいろく)、号を曙山といった。幼くして狩野(かのう)派の絵を
よくしたが、のちに南蘋(なんぴん)派の写生体も学び、1773年(安永2)平賀源内が秋田にきたとき、
家臣小田野直武(なおたけ)らと西洋画法を学んだ。のち、おもに参勤のため江戸に出たとき、直武の
導きにより西洋の銅版画や画法書を頼りに洋風画を描き、東洋画の題材に西洋画の視点の加わった作品
を残して、秋田蘭画(らんが)の代表者となったが、短命であった。78年日本最初の西洋画論『画法
綱領』と『画図理解』を書いた。
24) 江戸後期の洋風画家。 江戸系洋風画の事実上の祖。短い生涯の最晩期に、西洋画法による日
本風景図を描き、司馬江漢を指導した。秋田藩領角館(かくのだて)の武士の家に生まれる。幼名長
治、通称武助、字(あざな)を子有といい、羽陽、玉泉、麓蛙亭(ろくあてい)、蘭慶堂(らんけい
どう)と号した。幼少から画才があり、1773年(安永2)秋田にきた平賀源内から西洋画法を学び、そ
れを藩主佐竹曙山(しょざん)や角館城代佐竹義躬(よしみ)に伝えて、秋田蘭画(らんが)の一派を
開いた。同年藩主の命令で江戸に出て、源内のもとで洋風画の研究を進め、1774年杉田玄白が『解
体新書』を出版するとき、挿絵を描いた。ついで藩主の側近にまで昇進したが、1779年暮れ、その怒り
に触れて帰国し、翌年わずか32歳の生涯を郷里で閉じた。彼の絵は在来の東洋画に西洋画法を加味し
たものであるが、綿密な描写と高い気品に特色がある。
25) 成瀬は, 近像型構図、すなわち近景が遠景に比べて,極端に対比される構図を 近像型構図と命名し
た(1977、「江戸からパリーへ」、『季刊芸術』11)。
江戸後期浮世絵にみる視覚イデオロギー-広重の名所江戸百景- ······························ 金 愛 鏡…195
瞰の視線だが、手前の過大拡大された亀と鯉が視線を奪っている。背景をよくみると遠景
の真ん中には欠かせないハード要素の一つとされる富士山がしっかり収まっている。
これをみる瞬間、当時の人々なら、必要な情報が簡単に取れるはずである。広重は
「俯瞰+近像」を通じて名所の情報を提供した。つまり、『江戸百』独特の「立て画」
という範疇に入っている近像モチーフと、登場背景の配置は、ある「情報」を提供している
のだ。登場モチーフの意味を把握し「情報」をとるのは当時の人々の楽しみでもあり、版
画絵を買った人々の目的でもある。
俯瞰の感覚に西洋画の手法を取り入れた「俯瞰+近像」技法は「情報提供」の有効
な定型パターンになり、 当時の支配イデオロギーを象徴的に物語っている。
5-3.「ベロ藍」の意味
構図だけでなく色(color)でも「定型」の色パターンが導入された。『江戸百』では
青、赤、白が主に使われている(表1)。特に、「青」が効果的に使われ、鮮明な
「青色イメージ」はほとんどの絵画で見られる。
(表1)「名所江戸百景」の定型色
色
主要モチーフ
点数(総119点)
青色
空、海、夜空、
116
赤色
地平線、夕焼け、夜明け、
109
白色
富士山、帆、壁、鳥、星、光、月、雪
103
「江戸百」119点中、116点に使われた「青」を画面に対する面積比でみると30%以
下のが54点、30%以上のが65点もある。なぜ広重はそれほどまでに「青」に執着したの
だろうか。
江戸初期は「青」の顔料である鉱物のラピスラズリは高価であるため、「青」は身分や
権力の象徴だった。しかし、多色摺の開発から約半世紀後、「ベロ藍」26)と呼ばれるド
イツ製の合成絵具が文政12年(1829)、長崎の出島経由で輸入されるようになる。この
出来事は「浮世絵」の風景表現を一変させたと言われている。27)
26)「ベロリン藍」あるいは「ベルリン・ブルー
Berlin Blue(プルシアン ブルー Prussian Blue)」
初期の浮世絵版画ではツユ草など、植物性の「青」を使ったが、退色し易く、藍染の「青」は退
色しないが、水に溶けないので版木には乗りが悪かった。「ベロ藍」を最初に浮世絵に使用したのは、
文政13(1830)年、美人画で有名な絵師 溪斎英泉であるという(小林忠「浮世絵体系13 富嶽三
十六景」1975:62)が、 天保2(1831)年、葛飾北斎が『冨嶽三十六景』に用いて以降、浮世
絵の風景表現が一変したと言われている。
27)
196 日本文化學報……第 42輯
広重の『江戸百』で、「ベロ藍」は主に広い空と海などに塗られている(表1)。当
時「ベロ藍」はプルシアン ブルー(Prussian
Blue)ともいわれ蘭画28)を象徴してい
た。海外から輸入された構図と共に江戸の人々のエキゾティック(exotic)なものへの憧れ
が商品化され、輸入人造着色料である「ベロ藍」が取り入れられることは人気ある商品の
要件であった。その根拠として、安政4年(1857)2月に出版許可印を得た「ベロ藍」塗
りの絵は14枚にのぼる。平均二日に一枚の頻度であり、「俯瞰構図」に「ベロ藍」が塗
られた『江戸百』の人気が実感できる部分である。
6.『江戸百』の 本質
6-1.近世的文化交流の産物
江戸時代は鎖国の時代と言われているが、中国
オランダとは「通商の国」として、朝
鮮とは「通信の国」としての外交関係があった。「名所絵」はこのような比較的自由な雰
囲気の中で発展し、表現技法において西洋画の手法を積極的に取り入れた。
地理的に一番近い朝鮮との交流は1607年に始まり、広重が定火消同心として勤めてい
る14歳のとき、12回目(1811年)の「朝鮮通信使」29)が訪ねた。総勢約400人から500
人にのぼる大使節団の行列には画員も居た。当時通信使の楽隊に対して興味を抱いてい
た庶民のイメージを具体化した絵画もあり、伊芝惠(2005)の研究30)で読み取れる。
続いて2年後の1609年からオランダとの交流が始まり、江戸時代中期の18世紀末になる
と、「阿蘭陀趣味」といった言葉が象徴するように、江戸の庶民の異国趣味としてオラン
ダからの輸入品そのものが庶民の手に渡るようになり、それらを持つことが彼らのステータスと
なり、オランダの文物に興味や関心を持って模倣するほか身近なものに取り入れようとする風
潮が江戸庶民の間に大いに流行した。
平賀源内(1728~1779) 31)が1768年に入手、所蔵していたヨンストン著『動物図
譜』は、従来の東洋画では定型化されていた獅子や蛇、馬などの動物表現についても、
陰影をつけて立体感をあらわす方法を見せ、平賀源内は「東叡山不忍池図」(重要文
化財)、「唐太宗
28)
花鳥山水図」(重要文化財、秋田県立近代美術館所蔵)、
江戸時代、オランダ人により伝えられた西洋画。また、その画法で描かれた絵画。
徳川幕府が朝鮮通信使を招き文化などの交流が盛んに行われていた。朝鮮通信使は正使 副使
従事官の三使以下、画員 医員 訳官 楽士など総勢約400人から500人にのぼる大使節団であっ
た。朝鮮通信使船団 朝鮮通信使行列は多くの民衆に熱狂的に迎えられるなど、日本の各階層の人々
に多大な影響を与えた。
30) 『江戸絵画に描かれた朝鮮通信使の楽隊』(伊芝惠、2005)
31) 平賀源内:江戸時代の本草学者、戯作者。
29)
江戸後期浮世絵にみる視覚イデオロギー-広重の名所江戸百景- ······························ 金 愛 鏡…197
「唐太宗図」(秋田市立千秋美術館所蔵)、「江ノ島図」(大和文華館所蔵)など
を描くとともに、司馬江漢(1747~1818)にも技法を伝授したといわれている。
また、異国の文化を描いた長崎版画と呼ばれる「長崎絵」が長崎で流行した。この絵
はオランダや清国の人 船、居留地、港などを主に描いた。
前述したように「名所絵」表現を一変させたといえるドイツ製の合成絵具である「ベロ
藍」も長崎の出島経由で輸入された。
このように、『江戸百』は人が動き、物が動くに伴い、文化を伝播し流行させるという典
型的な近世的文化交流の産物とも言える。
6-2.『名所百』の製作意図
『名所百』の製作意図について大久保(2007)は、広重晩年の作画姿勢の変化に
よって、「都市伝統性」を視覚化したと論じている。その解釈を否認する気はない。広重
が伝統性に関心がなかったと斷言しにくい。
しかし江戸時代、流行絵師の社会的地位は低く、広重の遺言状には「借金を返済す
るように」という一節がある(原信田、2007)ことからも職人である絵師の経済的事情がう
かがわれる。そして「名所絵」は絵師の名で語られるのが普通だが、絵師の意志が貫
通できる純粋美術品ではなく、版元の意向に制約され、彫師や摺師の技術にも左右され
る、共同作業による商品なのである。絵師の意志は版元に制約されるが、さらに版元の意
志は検閲制度によって幕府の意向に厳しく制約される時代だった。
マクルーハン(McLuhan)は、「メディアはメッセージである」といった。また、ベレル
は美術は視覚(見える)の問題であるだけでなく盲人(見えない)の問題でもあると言っ
た。すなわち美術は特定観点を通じて見られることに関する問題であるだけでなく、見落とさ
れることに対する問題でもあるという意味である。
『江戸百』の最初の出版許可印は、安政3年(1856年)2月で、最後が広重の死ん
だ安政5年(1858年)9月の翌月の10月である。この時期は実に混乱期であった。
『江戸百』からは、この時期の黒船騒ぎや職人は仕事がなく商人は商売がなく、金回り
が悪いので歌舞伎も顔見世がなく、押込強盗が流行り、夜の八時すぎには往来に入っ子
ひとりいなくなり、新吉原も、銭のないひやかしばかりになっていた(原信田、2007)庶民の
生活模様は見えない。
逆説的にも、広重は約2年半かけ、江戸後期の風景を非常に安定した社会像で描写し
た多くの作品を残している。
『江戸百』という情報伝達媒体にみえる敍情的雰囲気の基底には目に見えない正反対
の浮世(現世)があったということであり、広重は一時代のイデオロギー的な要素に敍情
的イメージを付与した。
江戸後期の幕府は都市繁栄と伝統を象徴する敍情的モチーフが描かれた『江戸百』
198 日本文化學報……第 42輯
の「定型」モチーフをを通じ、安定感と国民統合を求めた蓋然性がある。
版元の意図が反映されたのか、幕府の意図が反映されたのか、断定することはできない
が、『江戸百』には江戸後期の時代が期待していた視覚イデオロギーが内在している。
6.結びに
江戸時代は鎖国の時代と言われているが、中国
オランダとは「通商の国」として、朝
鮮とは「通信の国」としての文化交流があった。「浮世絵」ジャンルのひとつである「名
所絵」は比較的このような自由な雰囲気の中で発展し、その内容については法令の厳しい
規制を受けたが、表現技法においては西洋画の手法と色を積極的に取り入れた「大衆文
化商品」である。
江戸後期の「名所絵」である広重の『江戸百』は、単なる視覚商品ではなく、情報
伝達媒体の役割も果たした全120図の連作だ。この連作は西欧のジャポニスム形成の要
因になったことで日本が誇る芸術品であり、枚数の多さに呼応した情報量、描かれた場所
の明示、幕府の検閲をパスした年月の入った改印が捺されていることから多くの分野の画
証資料として知名度が高い。
この視覚媒体の独特の位置は、江戸の大衆ならば了解可能な象徴性モチーフの組み合
わせによってメッセージを表出した点、広重得意の「俯瞰+近像」の構図は人々にメッ
セージをより効率的に伝達している点、また輸入の合成絵具である「ベロ藍」を効果的に
使った鮮明な「青色イメージ」は江戸庶民のエキゾティックなものへの憧れを上手に表現し
た点にある。
このような性格を持つ『江戸百』は江戸後期の風景の中に庶民の暮らしぶりを敍情的に
描写したことで一層高く評価されている。しかしその製作背景を踏まえてみると、『江戸
百』が描かれた嘉永、安政年間は元号までも嘉永から安政へ改められるほど対内外的に
不安な時期だったのだ。この矛盾に基いて見れば、『江戸百』の敍情的モチーフの基底
には絵には見えない正反対の浮世(現世)が存在していたということがわかる。
江戸後期の幕府は都市繁栄と伝統を象徴する敍情的モチーブが描かれた『江戸百』
の「定型」モチーフを通じ、安定感と国民統合を求めた蓋然性がある。
広重は約2年半かけ、江戸後期の風景を非常に安定した社会像で描写した数多くの作
品を残している。版元意図が反映されたのか、幕府の意図が反映されたのか、断定する
ことはできないが『江戸百』は江戸後期の時代が期待していた支配イデオロギーを内在し
ている視覚媒体である。
『江戸百』の画一的構成、構図、色と象徴される敍情的モチーブの諸イメージは、
江戸後期浮世絵にみる視覚イデオロギー-広重の名所江戸百景- ······························ 金 愛 鏡…199
単純に「商業的」な、あるいは「日本的」「伝統性」といわれる文化的営為である以
前に、それより高い秩序に属する、当時のイデオロギー性の象徴にほかならない。
【参考文献】
尹芝惠(2005)『総合政策論議』第10号、「江戸絵画に描かれた朝鮮通信使の楽隊」
p. 86
今田洋三(1998)『鯰絵』「幕末マス メディア事情」、里文出版
大久保(2007)「広重と浮世絵風景画」2007、p.155-157
内田實(1978)『廣重』、岩波書店、p. 61
小島鳥水(1919)『浮世絵と風景画』、「霧と雨と雪の美術家」pp.157-158
小林忠(1975)「浮世絵体系13 富嶽三十六景」、p.62
成瀬不二雄(1977)、『季刊藝術』11、「江戸からパリへ.― 秋田蘭画から西洋近代
絵画へ」、東京:季刊芸術出版、p. 87
原信田(2007)『謎解き 広重「江戸百」』pp.23-44
宮武外骨(1911)『筆禍史』、浅香書店、p. 100
武塙林太郎(1979)『美術手帳』1979、8月号、「司馬江漢と秋田蘭画の関係」、東 京美術出版社、p. 452
Marshall McLuhan (1967)『미디어의 이해』、박정규、커뮤니케이션북스、p. 1
Jonathan Harris(2001)『신미술사?비판적 비술사!』이성훈,경성대학교출판부,
p. 137
200 日本文化學報……第 42輯
【図版目録】
1.
2.
3.
4.
歌川広重『江戸乃華』上券
歌川広重 『名所江戸百景』「市中繁栄七夕祭」
歌川広重 『江戸乃華』下券
歌川広重 『名所江戸百景』「深川洲崎十万坪」
5. 歌川広重『名所江戸百景』「日本橋雪晴」
6. 歌川広重 『東都名所』「日本橋雪中」
7. 葛飾北斎『富嶽三十六景』「江戸日本橋」
8. 歌川広重 『名所江戸百景』「深川萬年橋」
9. 歌川広重 『名所江戸百景』「水道橋駿河台」
10.歌川広重 『名所江戸百景』「逆井のわたし」
11.歌川広重 『名所江戸百景』「角筈熊野十二社 俗に十二そう」
【図版】
図1 図2
江戸後期浮世絵にみる視覚イデオロギー-広重の名所江戸百景- ······························ 金 愛 鏡…201
図3 図4
図5
図6
図7
202 日本文化學報……第 42輯
図8 図9
図10 図11
江戸後期浮世絵にみる視覚イデオロギー-広重の名所江戸百景- ······························ 金 愛 鏡…203
要 旨
江戸後期に描かれた「名所絵」である広重の『江戸百』は、単なる視覚商品ではな
く、情報伝達媒体の役割も果たした全120図の連作だ。この連作は西欧のジャポニスム形
成の要因になったことで日本が誇る芸術品であり、江戸後期の風景の中に庶民の暮らしぶ
りを敍情的に描写したことで一層高く評価されている。
しかし『江戸百』の製作背景を踏まえてみると、『江戸百』が描かれた時期は元号ま
でも嘉永から安政へ改められるほど対内外的に混乱した時期だった。江戸百』の敍情的
モチーフの基底には絵には見えない正反対の浮世(現世)が存在していたことがわかる。 江戸後期の幕府は都市繁栄と伝統を象徴する敍情的モチーフが描かれた『江戸百』
の「定型」モチーフを通じ、安定感と国民統合を求めた蓋然性がある。
広重は約2年半かけ、江戸後期の風景を非常に安定した社会像で描写した数多くの作
品を残している。版元の意図が反映されたのか、幕府の意図が反映されたのか、断定す
ることはできないが『江戸百』は江戸後期の時代が期待していた支配イデオロギーを内在
している視覚媒体である。
『江戸百』の画一的構成、構図、色と象徴される敍情的モチーフの諸イメージは、単
純に「商業的」な、あるいは「日本的」「伝統性」といわれる文化的営為である以前
に、それより高い秩序に属する、当時のイデオロギー性の象徴にほかならない。
キーワード : 浮世絵、名所絵、視覚イデオロギー、名所江戸百景、広重、定型モチーフ、
近像型構図
투
고 : 2009. 5. 31
1차 심사 : 2009. 6. 13
2차 심사 : 2009. 6. 27
일본 사가현의 임란포로에 관한 연구
魯 成 煥*1)
(e-mail : [email protected])
目
1. 머리말
2. 가라츠의 조선포로
(1) 부산해 고덕사와 조선예조의 유고
문
(2) 토진마치의 조선인 기술집단
次
3. 사가의 조선포로
(1) 임일덕과 임영구 부자
(2) 나염기술을 개발한 이구산
(3) 정진(淨珍)과 마키츄자에몬(槙忠左
衛門)
4. 타쿠의 소년포로
5. 마무리
1. 머리말
임란과 정유왜란 중에 일본군에 피랍되어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부지기
수이다. 역사학자 민덕기는 사료에 의거하여 구체적으로 산출한 결과 9-14만
명 정도라고도 했다.1) 이러한 상황을 본다면 당시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들
은 엄청나게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이 일본에서 보낸 삶의 역사에 대해 우
리는 조금이라도 알 수 없을까?
이러한 움직임이 우리의 학계에서도 조용히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 신일
철,2)
김태준,3) 정광4)등이 도공들과 유학자를, 그리고 김옥희가 기독교도가 된
조선여성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한 적이 있다.5) 그러나 시점을 조금 바꾸어 지
* 울산대학교 일본어․일본학과 교수 역사민속학, 비교신화학
1) 민덕기(2005: 395)
2) 신일철(1976: 26-36)
3) 김태준(1977: 51-119)
4) 鄭光(1990: 3-157)
206 日本文化學報……第 42輯
역에 초점을 맞추어 그 지역에서 조선인을 찾아내고 그들이 어떤 역사적 흔적
을 남겼는지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미진한 편이다.
그에 비해 일본에서도 지역에 거점을 두고 조선인들을 연구한 사례는 그다
지 많은 편이 아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근년에 접어들어 여기에 대한 연구
가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鶴園裕6)는 가가번(加賀藩)의 조
선인 포로에 대한 연구를 비롯하여, 中村質7)가 나가사키(長崎), 木部和昭8)가
하기번(萩藩)의 조선인 포로에 대한 연구 등을 들 수가 있을 것이다.
큐슈 북부에 자리잡고 있는 사가현은 과거 나베시마씨가 지배했던 영지이었
다. 그들의 시조격인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임진과 정유왜란 때 군사를 이끌고
조선침략에 가담하였을 뿐 아니라 그가 철수를 할 때 수많은 조선인들을 납치
해 간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그는 조선도공들을 많이 잡아간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하여 학계에서는 그가 잡아간 조선도공에 대해서는 관심이 높아
연구도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가 잡아간 사람은 도공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도공이 아닌 다른
분야에 종사하는 조선의 피랍인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흔적은 여기저기서
감지된다. 더군다나 나베시마는 히데요시로부터 세공인과 봉관녀(縫官女)를 잡
아 보내라는 주인장(朱印狀)을 받았을 때 그는 1594년 6월과 7월에 두 번이나
히데요시에게 봉관녀를 잡아 보낸 자이다. 그러므로 그는 도공말고도 다른 특
수한 재주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포로로 잡아갔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이에 필자는 사가의 현지를 방문하여 몇 차례 조사를 벌인 적이 있다. 그리
고 초기의 조사결과를 학회를 통하여 보고하기도 했다.9) 그러나 조사를 거듭
되면서 앞서 발표한 연구가 너무나 미흡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다시 말
하여 그 논문은 대폭 수정하고 보충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필요
성에 따라 필자는 다시 사가지역의 현지조사를 행하였고, 그 결과 지금까지 미
처 발견하지 못한 조선포로들을 찾아내고, 또 그에 관한 기록들을 수집할 수
있었다. 본고는 비록 그 결과의 일부분을 정리한 것이나 시야는 사가시에 국한
하지 않고 사가현을 대상으로 함으로써 이 지역에 있어서 조선포로 전체의 실
상을 살펴보려고 했다.
도공이 아닌 조선포로들도 사가현 전역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그 중에서 특
히 가라츠(唐津)와 사가(佐賀) 그리고 타케오(武雄) 등지에는 오늘에 이르기까
5)
6)
7)
8)
9)
김옥희(1985: 117-133)
鶴園裕(1990)
大石學(2001: 83-84), (2002: 92-95), (2005: 73-77)
木部和昭(1999: 47-59)
노성환(2008: 273-293)
일본 사가현의 임란포로에 관한 연구 ······································································· 魯 成 煥…207
지 이들에 관한 전승 또는 유적들이 많이 남아있는 편이다. 그리하여 본고에서
는 이 세 지역을 중심으로 어떤 조선인 포로들이 살았으며, 또 그들이 어떤 삶
을 살았는지에 대해 현존하는 자료와 전승을 통해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2. 가라츠의 조선포로
1) 부산해 고덕사와 조선예조의 유고문
사가현 북부에는 충청도의 당진과 똑같은 지명이 있다. 가라츠(唐津)가 바로
그것이다. 이곳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한국과 마주보고 있는 지형적 특징으로
말미암아 임란 때 일본군들이 이곳 나고야에서 총집결하여 조선으로 출발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한 관계로 이곳에는 임란은 물론 임란포로에 관한 이야기
들이 많이 남아있다. 그 중 하나가 고덕사의 조선예조 유고문일 것이다.
고덕사는 나카마치(中町)에 있다. 정식의 이름은 부산해(釜山海) 고덕사(高德
寺)이다. 보통 일본에서 절의 이름은 〇〇산이라는 식으로 산호(山號)를 쓰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절은 이름부터 매우 특이하다. 즉, 산
(山)대신 바다를 의미하는 해(海)를 썼고, 그것도 부산이라는 이름이 붙어져
있다. 여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1877년(명치10) 이 절의 주지였던 오
쿠무라 엔신(奧村圓心)이 쓴 『조선국포교일지(朝鮮國布敎日誌)』에 의하면 이
절을 세운 것은 오하리번의 가신 奧村掃部이었다. 그가 무사를 그만두고 출가
하여 쿄토의 본원사(本願寺)의 승려 교여(敎如)의 제자가 되어 이름을 정신(淨
信)이라 했다. 그는 본원사로 부터 조선 포교의 명을 받고 부산에 건너가서 포
교를 하면서 그 절을 고덕사라 했다. 그런데 1591년(天正 19)에 조선출병이 결
정나고,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귀국하였으며, 그 이듬해인 1592년에는 나고야
성에 있는 히데요시에게 불려가 조선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리고
같은 해 종군하여 바다를 건너 사자의 영혼을 위로하다가 1596년에 일단 귀국
을 하였으며, 1598년에 다시 부산으로 가려고 가라츠로 왔으나 도해가 금지되
어 하는 수 없이 교토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 때 가라츠의 영주 테라사와의 간
청으로 이 지역에 머물게 되었으며, 히데요시로부터 부산해라는 산호(山號)를
받았다고 한다.10)
이러한 내용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면 고덕사의 출발은 일찍이 자신의 불교를
조선에 포교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부산으로 건너가 포교활동을 벌인 불교사찰
10) 尹達世(2003: 164-165)
208 日本文化學報……第 42輯
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전쟁이라는 의미에서 보았을 때는 그렇지 못하다. 왜냐
하면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하고자 조선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였을 때는 그
들이 조선에서 활동하면서 모은 정보를 고스란히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러므로 전쟁 시 그도 종군하여 전사자의 영혼을 위로하였다고 하나, 일본군이
전쟁 수행하는 동안 통역 또는 정보를 제공하는 첩자 노릇까지 하였을 것으로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가 히데요시로부터 받았다는 부산해라는 이름은 그에
대한 공로가 인정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활약은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군에 납치되어 일본으로 끌려가는 데도 일익을 담당하였을 가능성도 없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부산해 고덕사는 출발부터 정치적이었기 때문에 그 후 활동도 매우 정치적
이었다. 가령 막말 때 주지 료관(了寬)은 근황파로 활약했고, 그의 장녀 오쿠
무라 이오코(奧村五百子)는 애국부인회를 조직한 여성이다. 그 뿐만 아니라
1877년(明治10)에는 과거 고덕사가 부산에 포교한 인연이 있다고 하면서 조선
포교에 나서고 있다. 즉, 이 절은 본사인 본원사의 힘을 빌려 임란과 한일합병
에도 일본의 첨병노릇을 하였던 것이다.11) 이러한 사찰이 가라츠에 있는 것이
다.
이와같이 이름만큼이나 조선과 관계가 깊은 가라츠의 부산해 고덕사에는 조
선정부가 포로로 잡혀간 동포들에게 알리는 조선국예조위통유사(朝鮮國禮曹爲
通諭事)가 보관되어 있었다. 크기는 세로 99센티, 가로 139센티의 폭으로 되어
있는데,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국 예조가 다음과 같이 통유한다.
나라가 불행히도 갑작스러운 병화를 입어 전국의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 가
까스로 적이 휘두르는 칼에 죽음을 당하지 않고 살아남은 자들도 모두 포로
가 되어 어연 20여년이라 세월이 흘렀다. 그러한 가운데 부모의 나라를 생각
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시도하지 않는 자가 어디 있겠는가. 어린아이를 등
에 업고 큰길을 따라 고향으로 오는 자를 아직 보지 않았으나, 이는 완전히
매몰하여 세월이 흘러 자력으로 탈출할 방도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 심정
11) 오쿠무라 엔신과 오쿠무라 이오코는 남매지간이다. 엔신은 1870년대부터 조선에 들어와 전국을
돌아다니며 절을 세우는 등 일본식 불교 포교에 열을 올렸으며, 그의 여동생 이오코는 일본의 폭
력조직인 흑룡회(黑龍會)를 뒤에 업고 광주에 들어와 활동을 했으며, 그 후 그녀의 둘째 딸(光子)
과 사위까지 광주에 와 정착하여 활동을 벌였다. 이들이 처음 정착하였을 때는 광주에 일본인들
이 8명밖에 없었다. 그러나 1898년에는 100여명으로 늘어났고, 불로동과 황금동에 일본인들이 이
용하는 음식점과 요정이 생겨났고, 이를 기점으로 광주 북쪽에는 일본식 부락인 「극락촌」을 만들
어 집단으로 거주했다. 이들은 일제는 식민정책의 강화와 군수물자를 조달하기 위한 일환으로 광
주에 정착한 어용상인과 민간인들이었다. 이러한 기반을 만들어낸 사람들이 부산해 고덕사의 오
쿠무라 일가들이었던 것이다.
일본 사가현의 임란포로에 관한 연구 ······································································· 魯 成 煥…209
은 또한 가련할 뿐이다. 나라가 피로인을 쇄환함에 있어서 특히 관대한 조치
를 베풀고자 한다. 정미년(1607)에는 (일본에 파견한) 사신이 피로인들을 데리
고 왔다. 그들은 한결같이 죄를 사하고, 부역을 가진 자는 역을 면제하고, 공
사의 천민이면 천민으로부터 해방하고, 완전히 다시 돌아가는 것을 도와 고향
의 땅에 돌아가게끔 했다. 쇄환된 자는 모두가 친족들의 얼굴을 만나게 되었
고, 다시 낙토의 백성이 되었다. 일본에 있는 자도
반드시 이 사실을 들어서
알고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일본은 우리나라의 적(토요토미씨)을 물리쳐 멸
망시키고, 모든 전대의 소업을 새롭게 고치고, 서찰을 보내어 우호를 구하여
왔다. 나라는 백성들을 위해 사신을 보내어 일본에 남아있는 피로인들을 생환
하고자 하는 것이다. 지금이 바로 이때이다. 만일 일제히 (사신이 있는 곳) 나
오면, 왕년에 나온 자의 예에 맞추어, 천민을 해방하고, 부역을 면제하고, 이전
의 생활을 회복시키는 등 특전을 일일이 시행하고자 한다. 이 유문이 도달하
면 (동포들) 서로 알려 유문의 통고에 따라 사신이 (조선국으로) 돌아갈 때
일시에 나오도록 하라. 의심하거나 무서워하여 우물쭈물 망설이는 일이 없이
이역의 혼귀가 되는 일은 없도록 하라. 분명히 시행하기 위해 이렇게 쓰노라.
(이상의 글을) 오른쪽 하단(에 적은) 피로의 사민(士民)에게 부치노라.
만력 45년(1617) 5월 통유.12)
이상에서 보듯이 이는 1617년에 포로쇄환의 목적과 회답사를 겸한 정사 오
윤겸 등이 본국으로 포로들을 데리고 간 상황을 말하고, 쇄환자에게는 관전을
베풀고, 유역자에게는 역을 면하게 하고, 공과 사적으로 천한 자는 천역을 면
하는 등 충분히 애호무휼(愛護撫恤)을 베풀고, 각기 고향에서 안심하고 정착할
수 있도록 하고, 또 일가친척들도 만나게 하여 낙토의 백성이 되게 한다고 하
며, 새로이 본국으로 귀환하기를 원하는 자들은 의심하지 말고 이역에서 귀신
이 되는 일이 없도록 하루 빨리 같이 돌아가자는 것이다.13) 즉, 일종의 호소문
과 같은 것이었다. 그 호소문을 쓴 날짜는 1617년(萬曆 45) 5월로 되어있다.
즉, 1617년의 일이다. 포로들을 모집하는데 필요한 공고문은 대략 3가지 종류
가 있었다. 하나는 조선예조가 발행한 문서이고, 둘은 조선 사절이 발급한 문
서이며, 셋은 일본 막부의 숙로(宿老)가 쇼군이 피로인의 귀국을 허락했다는
내용을 조선 예조로 보낸 서계이었다. 이를 큰 길에다 붙여서 지나가는 사람들
이 보게끔 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조선으로 귀국하고 싶어 하면 반드
시 귀국시키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 명령에 따라 의문을 품지 말고 귀국해
라. 약속한 배는 우리가 준비할 테니 아무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일본어로
12) 이는 나고야성 박물관에 보관되어있는 것을 번역한 것이다.
13) 內藤雋輔(1976: 736-737)
210 日本文化學報……第 42輯
된 문장도 첨부되는 경우도 있었다.14)
이상의 것은 조선예조가 발행한 서계이었다. 또 이러한 내용의 예조 유문이
가라츠 이외에 오우미(近江)의 히가시아사이군(東淺郡)과 이요(伊豫)의 마츠야
마(松山)에서도 전래되는 것으로 보아 조선조정은 여러 장의 유고문을 작성하
여 조선포로들이 있을 만한 곳에 배포하여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을 쇄환하려
고 하였던 것이다. 그 이후에도 가라츠 지역에 있던 조선인 포로들을 쇄환하려
고 노력했던 것 같다. 1636년 조선통신사가 귀국길 도중에 역관 강우성으로 하
여금 유고문을 가지고 가라츠로 파견하는 기사가 조선통신사의 기록15)을 통해
확인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흔적이 가라츠의 부산해 고덕사에 남아있었던 것이
다.
2) 토진마치의 조선인 기술집단
고덕사에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토진마치(唐人町)이라는 동네가 있었
다. 현재 쵸다(町田) 5쵸메(丁目)라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여기에서 당인이란
당나라 즉, 중국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인을 의미한다. 토미오카(富岡
行昌)에 의하면 경장연간(慶長年間: 1596-1615)에 테라사와 시마모리(寺澤志摩
守)가 조선에 출병하여 데리고 온 조선인을 살게 함으로써 생겨난 지명이라고
설명했다.16)
이들은 평범한 조선인이 아니었다. 『당진촌지(唐津村誌)』에 의하면 “도요
토미 히데요시가 정한에서 귀환할 때 이 지역으로 데리고 온 조선인을 이 땅
에 거주케 하고 가신 오니히라(鬼平)로 하여금 감독케 하여 무명삼베를 짜는
일에 종사케 했다. 번정시대(藩政時代)에 이르러 크게 발전하여 강호저(江戶
苧), 당진자마(唐津紫麻)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졌다.”고 되어있다. 그리고
에도 중기의 가라츠번의 무사였던 木崎悠悠軒이 그린 『비전국물산회도(肥前
國物産繪圖)』에는 그들의 작업현황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고 한다.17) 그리고
『당진촌사(唐津村史)』에 “이곳에 거주하는 타키시다(滝下)라는 성씨는 이들
자손이다.”라는 기록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이들 대부분이 일본식 이름으로 바
꾸어 생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18) 이처럼 토진마치에는 삼베를 짜는 기
술자들이 있었다.
14)
15)
16)
17)
18)
米谷均(2007: 97-101)
강홍중(1989: 265)
富岡行昌(1983: 589)
尹達世(2003; 165-166)
服部英雄(2008: 7)
일본 사가현의 임란포로에 관한 연구 ······································································· 魯 成 煥…211
한편 사가지역의 명산물을 그린 『비전명산회도(肥前名産繪圖)』에도 당진
자마가 등장할 뿐만 아니라 조선에서 건너간 향의 제조에 대해서도 자세히 그
리고 있다. 이 향의 제조법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아버지인 고니시
류사(小西隆佐)가 조선에서 습득하여 일본으로 가지고 간 것이라고 한다.19) 이
런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왜냐하면 그 또한 조선과 중국과의 교역을 통하여
부를 축적한 호상이었으며, 특히 조선에서는 고려인삼과 벌꿀 등을 수입하고
있었다.20) 그러므로 누구보다도 조선에 관한 사정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
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아무튼 가라츠의 토진마치에는 조선에서 포로로
잡혀간 삼베 및 향 등을 만드는 특수기술자 집단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
은 임란이후에도 돌아가지 않고 그곳에 남아있었다.
3. 사가의 조선포로
사가현의 중심지인 사가시에도 조선포로들이 많았다. 여기에 대한 관심은 일
찍부터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30년대 이 지역의 도자기 연구가로 이름을
떨친 나카시마 히로키(中島浩氣)의 연구이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로는『비전도
자사고(肥前陶磁史考)』를 들 수가 있다. 이 책은 아직도 사가의 도자기 역사
연구에서는 기본도서로 통할 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그 내용 가운데
사가시의 토진마치(唐人町)라는 지명에 관해 간략히 설명하고 있는 부분에서
도공이 아닌 조선인 포로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 있다. 그 내용을 잠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토진마치(唐人町), 정한의 때에 우리 나베시마군에 따라온 한인들이 있었다.
사가성 아래에 온 자들이 180명이나 되며, 이때에 많은 한인들은 일본군을 위
해 길 안내를 하거나, 혹은 식량을 보급하거나, 또는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한
자들인데, 그렇다고 해서 모두 자진하여 온 자들은 아니었다. 대부분은 우리
군사들에게 위협을 받거나 어쩔 수 없이 따라온 자들일 것이다. 이 때 사가에
귀화한 한인들 가운데는 의도에 조예가 깊은 임일덕(林一德), 임영구(林榮久)
의 부자가 있었고, 그의 자손은 하스이케번(蓮池藩)의 무사가 되어 타케시마
(竹島)라 했다. 그리고 의약에 정통한 구야마 도세이(九山道淸)가 있었는데,
그는 후에 쇼자에몬(庄左衛門)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성 아래에서 한베이
19) 尹達世(2003: 166)
20) 李進熙(1993: 138)
212 日本文化學報……第 42輯
사라사(半兵衛更紗)를 만들었다. 그 중에는 나오시게가 진성(晋城)으로부터 데
리고 온 소년이 훗날 능서가가 된 홍호연(洪浩然)도 있었다. 그 밖에도 行李
工, 飴工, 織工도 있었다.21)
이상의 내용을 보듯이 사가에는 임진과 정유왜란 때 포로가 된 조선인들 가
운데는 도공뿐만 아니라 당시 첨단기술을 가진 자들도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령 의술에는 임일덕과 임영구의 부자, 의약에는 구산도청, 서예가로는
홍호연이 있었으며, 그 밖에도 여행용구, 엿, 직물 등의 기술자들도 있었던 것
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나카시마는 임일덕과 임영구, 구야마 도세이, 홍호연이
어떤 성격의 사람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다. 다만 임씨 부자와 구야마
도세이는 의학에 밝으며, 홍호연은 진성출신으로 능서가(서예가)였다고 짧게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이에 우리는 이들이 어떤 인물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특히 홍호연에 관한 자료가 최근에 그
들의 자손에 의해 나고야 성 박물관으로 기증이 이루어짐에 따라서 그에 관해
서는 좀 더 많은 사실들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본고에서는 홍호연에
대해서는 기회를 달리하여 살펴보기로 하고, 그 밖의 인물들에 대해 살펴보기
로 하자.
1) 임영구의 일족
그럼 먼저 나카시마가 첫 번째로 언급한 임일덕과 임영구의 일족부터 알아
보기로 하자. 그들의 시조인 임일덕에 대해서는 1847년(弘化 4) 2월에 그들의
자손인 林利兵衛昌彭이 편찬한 『임가계도(林家系圖)』에 비교적 자세하게 나
와있다. 그것에 의하면 임일덕의 이름이 일덕제(一德齊)로 표기가 되어있는데,
원래의 그의 성씨은 진씨(秦氏)이며, 이름은 백(伯)이며, 자가 문열(文烈)이라
고 했다. 그리고 그는 박학하며, 의술에 통달한 사람으로 노모처자와 함께 일
본으로 갔으며, 1607년(慶長12) 8월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있다.22)
여기에서 보듯이 임일덕은 어떤 연유로 언제 어디에서 포로가 되어 일본으
로 건너갔는지 알 수 없지만 그의 본명은 진백이며, 그가 일본으로 갈 때 그는
이미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노모를 모시고 살아가고 있었던 가장이었으며, 또
직업은 한의사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로 인해 나베시마군이 그가 가지고 있던
의술의 활용도에 높이 평가하여 그를 가족들과 함께 일본으로 데리고 갔을 것
21) 中島浩氣(1985)
22) 大園弘(1977: 105)
일본 사가현의 임란포로에 관한 연구 ······································································· 魯 成 煥…213
으로 추정된다. 그에게는 아들 영구가 있었다. 그의 조선이름은 알 수 없으나
일본 이름은 林利兵衛貞正이었다. 그는 사가의 영주 나오시게(直茂)가 죽자 불
교에 귀의하여 출가했고, 그곳에서 얻어진 이름이 영구이었다.23)
임영구도 그의 아버지 뒤를 이어 한의사를 했던 것 같다. 그의 의술이 인정
받았는지 나오시게와 가츠시게의 부자로부터 총애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리
고 임영구는 1629년(관영 6) 5월에 사망하였으며, 그의 법명은 일산종무(一山
宗無)이며, 그의 묘는 사가시 용태사(龍泰寺)에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24)
임영구의 가족에 대한 정보는 야마모토 쯔네토모(山本常朝)가 쓴 『엽은(葉
隱)』이 많이 제공해준다. 그것에 의하면 임영구는 영주의 주치의로서 활약을
했던 것 같다. 그에 대한 일화가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즉, 나오시게가 귀에
혹이 생겼을 때 누군가가 거미줄로 묶어서 당기면 낫는다는 말을 듣고 그렇게
하였더니 그것이 낫기는 커녕 점점 커지고, 상처부위가 섞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는 고민이 되어 “나는 오늘날까지 남을 위해 무엇이든 했다. 사람들이 말하
는 것을 잘못 듣고 나도 모르게 과실을 범하고 말았다. 섞어서 죽는다는 것은
자손들에게 수치를 주는 일이다. 이 상처가 더 심하게 되기 전에 죽고 싶다.”
며 식음을 전폐하고 뒷전에 물러나 사람들을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아들인 가츠시게가 염려하여 “부모가 죽느냐 사느냐에 기로에 서있는데, 약이
라도 지어 올리지 못했다는 것은 자식으로서 면목이 서지 않는다. 그러므로 반
드시 약을 올리도록 하라.”고 가신들에게 거듭 부탁했다. 이 때 약을 올리는
역할을 맡았던 사람이 임영구이다. 그는 약에다가 약간의 죽에 섞어 넣어 올렸
다. 그러자 나오시게는 버럭 화를 내며 “그대는 내가 아끼는 자로 율의자(律義
者)라고 생각하여 의사의 역할을 맡겼는데, 이런 짓을 하다니, 이 약은 쌀을
넣은 것이지, 거짓 없이 솔직히 말하라.”고 다그치는 것이었다. 그러자 임영구
는 울면서 “수일 식사도 하지 않아 체력이 떨어지신 것이 아닌가하고 염려되
어 약에다 조금 쌀을 넣어 달여서 올린 것입니다. 체력이 회복되면 병도 나을
것이라 생각하여 쌀을 넣은 것입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25)
여기에서 보듯이 임영구는 단식을 하고자 하는 나오시게의 뜻을 거슬려 약
과 함께 곡기를 먹이려 하다가 혼나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이를 통하
여 우리는 그가 나오시게로부터 신임을 받고 있는 의사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향토사가 오노미야 무츠지(小宮睦之)에 의하면 그의 봉록은 220석이나
되었다고 하니26), 그야말로 그에 대한 신임이 대단히 두터웠던 것 같다. 그리
23)
24)
25)
26)
大園弘(1977: 105)
栗原耕吾(2002: 41)
山本常朝(1983: 245-246)
小宮睦之(1996: 77)
214 日本文化學報……第 42輯
고 『엽은』은 그의 아들들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는데 먼저 그의 장남인 염
동(鹽童)의 기록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염동의 원래 이름은 임정지(林正之)이었고, 염동은 그의 아명이었다. 그에
대한 일화를 『엽은』에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즉, 그의 양부 이시
이 누이도노스케(石井縫殿助)가 상부로부터 명을 받아 이시이 요자에몬이라는
사내를 심문할 것을 명받아 그의 부하인 히코에몬과 함께 그를 찾아갔다. 그
때 요자에몬은 술을 권하고 싶다고 하며, 부엌 쪽으로 가자 누이도노스케가 도
망치는 것으로 생각하고 뒤쫓아 가서 그를 포박하려고 실랑이를 벌였다. 그 바
람에 화로가 뒤집어져 캄캄한 상황이 되었다. 그 때 마음이 다급해진 히코에몬
이 허리에서 칼을 뽑아 뒤엉켜 있는 두 사람을 향해 다가가 위에 있는 주인을
요자에몬으로 잘못 인식하고, 그만 그의 허리를 찌르고 말았다. 그러자 누이도
노스케는 “네가 찌른 사람은 바로 나다. 내가 누이도노스케란 말이다.”고 외치
자 히코에몬은 깜짝 놀라 그 길로 도망치다가 끝내 자해를 하고 말았다. 누이
도노스케는 부하에게 허리에 상처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격투를 벌여 끝내
요자에몬의 목을 베고 자신도 죽어버린다.
이를 들은 영주는 누이도노스케의 아들인 염동 즉, 이시이 야시치자에몬에게
누이도노스케의 가독권을 승계하도록 했다. 그 때 염동의 나이 13살이었다. 이
처럼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취한 자세는 그야말로 감동적이다. 이에
대해 『엽은』은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염동은 “말씀은 고맙지만 가독의 승계는 거절하옵니다. 저는 양자이며, 그 뒤
에 쿠라보오시(倉法師)가 태어나 있습니다. 양부 누이도노스케도 내심으로는
쿠라보오시가 가독을 잇게 하고 싶을 것입니다. 이처럼 실자도 있기 때문에
쿠라보오시에게 가독을 내려주십시오. 저는 무급의 자로서 봉사하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에 영주인 카츠시게는 “어린 녀석이면서도
참으로 신묘한 말을 하는구나. 그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그러면 쿠라보오시
에게는 600석, 염동에게는 100석을 주도록 하여라.”고 했다. 그러자 염동은 다
시 “거듭 거듭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누이도노스케에 과실이 없음에도 불구하
고 가독이 깎여지는 일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저는 다만 무급으로 봉
공하고자 합니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가츠시게는 쿠라보오시에게 누
이도노스케의 가독을 계승시켰고, 염동에게는 가계 가운데 보탬이 될 수 있도
록 하라는 명에 따라 70석이 부여되었다고 한다.27)
여기에서 보듯이 그는 임영구의 장남이면서도 일찍부터 이시이 집안에 양자
27) 山本常朝(1983: 62-63)
일본 사가현의 임란포로에 관한 연구 ······································································· 魯 成 煥…215
로 가 있었다. 보통 일본에서는 양자를 아들이 없고 딸만 있었을 때 대를 잇게
하기 위하여 자신의 딸과 결혼시킨 사위를 양자로 받아들인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의 양자는 너무나도 빠르게 진행되었다. 이는 어쩌면 이시이가 그의 범상
치 않음에 감탄하여 그를 자신의 양자로 삼았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를 뒷
받침이라도 하듯이 그는 양부가 사고로 죽고 그의 가독권을 계승시키려는 영
주에게 논리적인 근거를 내세워 용감하게 거절하는 소년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죽은 양부와 살아있는 양제와의 의리를 지켰던 것이다.
그는 또 성장하여 어른이 되었을 때 이시이 야시치자에몬이라는 이름을 사
용했다. 『엽은』은 그 후의 활동에도 관심이 많아 그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는
데, 그 대표적인 것이 다음과 같이 전쟁에서 무훈의 성과를 올리는 기록이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가츠시게가 아리마에 도착하였을 때 야시치자에몬은 특별한 역할이 없었기
때문에 多久美作에게 가로(家老)의 보좌를 맡겨라고 하였다. 27일 原城을 공
격할 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에 중야병우위문을 향해 상사의 명
령이므로 빨리 후퇴하라고 전했다. 그러나 야시치자에몬과 이시이 덴에몬(石
井傳右衛門)은 “榊原殿 父子가 성으로 들어가려는 모양이다. 그 때 우리들이
제일 빨리 들어가고자 기다리고 있다고 하며 후퇴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오후
4시경에 성안으로 들어갔다. 그 후 제일 먼저 들어간 사람을 조사할 때 논쟁
이 있었다. 이에 나베시마 모토시게(鍋島元茂)는 가츠시게(勝武)에게 ”가장 먼
저 들어간 자는 막부로 불러 조사하면 알겠지만 그 때 훌륭하게 자신의 의사
를 말할 수 있는 자는 야시치자에몬밖에 없을 것이다. 한치도 소홀함이 없어
야 할 것입니다. 그리 하여야 나와 부하들이 납득할 것입니다. 야시치자에몬
으로 결정하시길 바랍니다. 그러자 가츠시게는 “이러한 일에 대한 논쟁은 자
주 있는 일이다. 나에게 좋은 생각이 있다. 내가 검분하여 결정할 터이니, 다
른 증거는 필요가 없다. 진홍색의 태양이 그려진 黑羅紗의 陣羽織을 입은 자
가 제일 먼저 들어간 자이다.”고 하였다. 그 때 야시치자에몬은 “하필이면 이
때에 나는 움직일 수가 없다. 그러므로 누가 사람을 보내어 그 뜻을 알아오게
해 달라.”라고 했다. 그리하여 이 사실을 안 야시치자에몬의 진에서 곧 “이 羽
織이다.” 하였다. 그리하여 야시치자에몬과 덴에몬이 제일 먼저 들어간 자로
인정되었다.28)
여기에서 보듯이 그는 이시이 집안으로 양자로 들어가 그의 일족 이시이 덴
에몬과 함께 전쟁에 출전하여 상대의 성을 함락할 때 제일 먼저 그 성 안으로
28) 山本常朝(1983: 158-159)
216 日本文化學報……第 42輯
침입해 들어가 맹렬히 싸운 무사이었다. 그 결과 그는 군공을 인정받아 사가번
으로부터 250석을 받는 무사가 되었다. 이처럼 임영구의 일족은 비록 조선인이
었지만 사가번에서 귀감이 될 만한 무사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1660년(万治
3)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9)
한편 『엽은』에 의하면 임영구의 차남인 하야시 쿄자에몬은 영주인 나베시
마 타나나오(鍋島忠直)가 1635년(寬永12) 1월 28일에 죽자 그 뒤를 따라 할복
순사를 한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에 관련된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
다.
타다나오(忠直)에 순사한 하야시 쿄자에몬은 타다나오가 살아있을 때 그 측근
에 사람이 없어서 타다나오로부터 총애를 받은 자이다. 충직의 측근에서 섬기
기 위해 에도(江戶)로 가려고 준비하고 있었을 때 타다나오의 서거 소식이 있
었다. 쿄자에몬은 하루도 봉공하지 않았지만, 수백명의 가신 중에서 영주의 총
애를 받았다는 것은 과분할 정도의 영광이다 하며, 야마시로(忠直의 아우)가
말렸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할복했다. 쿄자에몬을 총애하신 이유는 가츠
시게(勝武)로 부터 “누구라도 좋으니 데리고 있고 싶은 부하가 있으면 한번
추천해보라.”는 말을 듣고, 타다나오는 “하야시 쿄자에몬이라는 자가 작년 사
자로 와서 얼굴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밖에는 잘 아는 자가 없습니다.”고 하
였기 때문에 쿄자에몬은 타다나오의 측근에서 보필하도록 명받았던 것이다.
일설에 임영구(쿄자에몬의 부친)가 죽었을 때 쿄자에몬에게 “나는 가츠시게를
위해 순사할 생각이었지만 먼저 죽는 것이 대단히 유감이다.”라고 했다. 이 말
을 들은 쿄자에몬은 “그 일은 염려마십시오. 나의 명예를 걸고 나의 목숨은
주군과 함께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영구는 기뻐하며 죽었다.
쿄자에몬은 자신이 병약하여 단명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는데, 타다나오가
죽었기 때문에 바로 이때라고 생각하고 순사한 것이다.30)
여기에서 보듯이 그의 아버지 임영구는 아들에게 남겼던 말처럼 자신을 거
두어준 가츠시게가 죽으면 그를 따라 죽으려고 했었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이
를 원하는 대로 하지 못하였고, 그의 아들 쿄자에몬에게 주군의 죽음에 순사하
도록 부탁하였다. 이를 새겨들은 쿄자에몬은 자신의 주군인 타다나오가 죽었을
때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할복하여 목숨을 끊었다. 그 때가 1635년(寬永
12) 4월 9일이었다. 그의 묘는 부친과 같이 사가시의 용태사에 있으며, 법명은
효안수충(孝安殊忠)이었다.
29) 栗原耕吾(2002: 41)
30) 山本常朝(1983: 306-307)
일본 사가현의 임란포로에 관한 연구 ······································································· 魯 成 煥…217
『엽은』의 진수는 무사의 삶과 죽음을 깊게 추구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이러
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엽은』은 그들을 주목한 것은 비록 조선인이지만 임
영구의 부자가 취한 자세는 충과 의리에서 나온 것이며, 이것은 바로 사가의
무사들에게도 귀감이 될 만한 것으로 높게 평가한 결과일 것이다.
『엽은』은 삼남 후지타케겐우에몬(藤竹源右衛門)에 대해서도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 그에 대해서는 코시로(小城)의 나베시마가(鍋島家)를 섬기는 무사가
되었고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다. 이상에서 보듯이 임일덕의 아들 임영구는 사
가에서 한의사로서 활동하면서 아들 3명을 모두 무사로서 길렀으며, 이들 모두
사가번에서 모범이 되는 훌륭한 무사로서 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나염기술을 개발한 이구산
사가시의 경원사에는 조선인 무덤들이 있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이종환
과 구야마 도세이(九山道清)이다. 전자는 임란 이전에 일본으로 들어간 사람이
고, 더군다나 일전에 그에 대해 소개31)한 바가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임란포
로에 맞추어 임란을 계기로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 후자인 구야마 도세이에 대
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구야마 도세이는 우리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임란 400주년을
맞이하였던 1992년에 역사학자 홍종필이 그해 6월에 동아일보에 임란을 기획
한 글에서 그에 대해 잠시 소개되어 우리에게 알려진 적이 있다. 그것에 의하
면 그는 의사로서 명약개발과 비단기술을 개발하여 사가의 산업발전에 공헌한
인물이라 했다.32) 그 후 그의 존재는 한동안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그
러다가 2003년 일문학자 최관이 임진왜란과 관련된 연구저서에서 구야마 도세
이는 제약기술과 견사 제조법을 전해준 인물로 잠깐 언급33)되었을 뿐 오늘에
이르기 까지 그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는 없었다. 홍종필과 최관의 글을 통해
그의 기본적인 신변상황은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지만 그가 사가에서 어떤
일을 하며 어떤 삶을 살았는지 좀 더 알고 싶은 우리들에게는 정보가 턱없이
부족하다.
최근에 사가현립 박물관에서 그의 집안의 가계를 적은「강두가계도(江頭家
系圖)」가 발견이 되었다. 그것에 의하면 1598년(慶長 3) 우리나라를 침략한
사가의 영주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13명 가량의 조선인을 데리고 일본으로 돌
아갔는데, 그 중의 한 명이 구야마 도세이었다. 그 때 나이가 33세이었으며, 그
는 자신과 같이 납치당한 사람들과 함께 토진마치(唐人町)에 살며, 의술을 배
31) 노성환(2008: 277-281)
32) 홍종필(1992. 6. 2)
33) 최관(2003: 31)
218 日本文化學報……第 42輯
우고 ‘환산선(丸散仙)’이라는 환약을 제조하여, 그것에 대한 제조와 판매의 특
허를 얻었다. 그리고 이름을 九山庄左衛門이라고 했다.34) 그리고 그는 오가와
후지사에몬(小川藤佐衛門)의 딸과 결혼하여 그 사이에서 아들 시치로자에몬(七
郞左衛門)을 두었다. 그리고 그는 1647년(正保4) 9월 23일 80세의 나이로 세상
을 떠난 인물이었다.
테라사키(寺崎宗俊)씨에 의하면 그의 본명이 이구산(李九山)이며, 정유재란
때 나베시마군에게 포로가 되어 33세의 나이로 일본으로 갔으며, 조선에서의
직업은 도공 또는 한의사이었다고 알려져 있다.35) 그리고 향토사학자인 오조
노 히로시(大園弘)씨에 의하면 그의 후손들이 1875년(명치 8)에 기응환(寄応
丸), 고약(膏藥), 신효환(神效丸), 지황환(地黃丸) 등 한약의 제품을 판매할 수
있도록 제품에 대한 검사를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어쩌면 오늘날까지도
그의 후손들은 그가 전한 비법의 한약제조의 기술이 전수되고 있을지도 모른
다고 추정하기도 하였다.36)
이구산은 일본에 한방의 의학만 전한 것이 아니었다. 염직의 기술도 개발하
여 일본인들에게 전수하고 있다. 염직에게는 대개 식물성의 재료를 이용한 염
료염직(染料染織)과 광물성의 재료를 이용한 안료염직(顔料染織)으로 나누어진
다. 한의사였던 그가 염직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한방의 재료가 되는 약초
와 염료의 재료가 되는 식물이 때로는 같은 것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염직의 기술개발에 박차를 가하여 완성한 것이 일본에서도
유명한 「나베시마 사라사(鍋島更紗)」라는 화려한 문양의 염직이다. 그리하여
사가현립박물관(佐賀縣立博物館)에서
보관하고
있는『사라사비전서(更紗秘傳
書)』에는 “원래 이것은 지금으로부터 300여년 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을 정벌할 때 히젠(肥前)의 영주 나베시마 나오시게에게 포로가 된 고려인 구
야마 도세이(이구산)가 가지고 온 것”이라고 설명되어있다 한다.37)
이렇게 그가 개발한 사라사를 도세이 사라사(道淸更紗) 또는 고려 사라사(高
麗更紗)라 했으며,38) 그 후에는 한베이 사라사(半兵衛更紗)라고도 불리웠다. 그
이유는 후술하겠지만 4대에 이르러 남자아이가 결혼도 하기 전에 죽는 바람에
홀로 된 딸이 에구치 집안으로 시집가게 됨에 따라 그들의 기술이 모두 에구
치 집안으로 전해졌고, 이들이 사라사를 한베이라라는 이름을 사용한 데서 생
겨났기 때문이었다.39)
34)
35)
36)
37)
38)
阿部桂司(1979: 199)
寺崎宗俊(1993: 222)
大園弘(1977: 103)
尹達世(2003: 177)
鈴田滋人(2002 :31)
일본 사가현의 임란포로에 관한 연구 ······································································· 魯 成 煥…219
‘사라사’라고 하는 것은 목면천에다 화려한 문양을 인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인쇄기술의 발전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고급의 기술이다. “사라사”
는 너무나 정교한 기술을 요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1개월에 두 필 정도밖에 제
작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나베시마 사라사」는 영주 또는
귀족들에게 주로 애용된 것이라서 일반적인 시장에서 판매되는 상품이 아니었
던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의 「나베시마 사라사」라는 염직의 천은 박물관 이
외의 다른 곳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이처럼 이구산은 조선에서 보아
온 조선의 활자 인쇄술을 기초로 기술을 개발하였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이구산이 개발한 나베시마 사라사는 명치기(明治期:1868-1911)에 접어들어
번의 정치제도가 폐지가 됨과 동시에 쇠퇴의 길을 걷게 되더니, 드디어 대가
끊어지고 말았지만, 1960년대부터 염직공예가 스즈다 테이지(鈴田照次)씨에 의
해 복원되었다.40)
그는 또 광물에 대한 지식도 풍부했다. 그리하여 자신이 개발한 염직의 문양
을 도자기에도 그려 넣고 싶어 했다. 이 기술도 그에 의해 개발된다. 이로 말
미암아 생겨나는 것이 사가의 특유한 양식의 「이로나베시마사라사문(色鍋島
更紗文)」이라 불리는 도자기이다.
이같이 사가의 산업기술의 발달에 크게 기여한 조선인 구야마 도세이의 집
안이 2대째 시치로자에몬에 이르면 그들은 성씨를 자신의 어머니의 성인 ‘오가
와(小川)’로 바꾸었다. 그리고 시치로자에몬은 히데시마 겐우에몬(秀島源右衛
門)의 여동생과 결혼하여 두 명의 아들을 두었으나, 장남에 대해서는 가계도에
이름도 적혀있지 않아 아마도 일찍 죽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차남인 도쿠우에
몬(德右衛門)이 가계를 계승하고, 에구치 키치우에몬(江口吉右衛門)의 여동생
을 아내로 맞아들인다. 그 사이에서 2남 1녀가 태어나나, 장남 지베이(次兵衛)
와 차남 히사자에몬(久左衛門)이 결혼도 하기 전에 사망하는 바람에 막내딸만
남게 된다. 그녀가 외삼촌 에구치 키치우에몬의 아들 고우에몬(五右衛門)과 결
혼하여 감에 따라 이구산의 남계혈통은 끝을 맺게 된다.41)
이와같이 오가와 집안의 가계는 끝이 났지만 도쿠우에몬의 딸이 외갓집인
에구치 집안으로 시집가면서 이구산이 조선에서 가지고 간 약사여래존상과 그
의 집안에서 전해져 내려가는 제약비법과 사라사 염직기술의 비법을 모두 남
편인 고우에몬에게 전하였다고 한다. 이로 말미암아 이구산이 개발한 여러 가
지 비법은 외손 에구치 집안에 전해지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에구치 집안의 9
대 손인 베에몬(兵右衛門)이 자신의 처의 성인 ‘에토(江頭)’로 바꾸어 분가를
39) 尹達世(2003: 177)
40) 尹達世(2003: 178)
41) 佐賀縣立博物館編(1977: 116)
220 日本文化學報……第 42輯
하여 나갔다.
오조노씨에 의하면 구야마의 후손이 현재 도쿄에 살고 있으며, 그의 이름은
에토 타미오(江頭民雄)라 했다. 에토 타미오씨는 자신의 집안에서는 이구산이
개발한 신효환을 근대에 까지 제조하여 판매하였으며 구야마 도세이가 조선에
서 가지고 온 약사여래존상도 지금까지 자신의 집에서 정중하게 모시고 있다
고 한다.42) 이와 같이 이구산에서 시작한 구야마씨는 시조 구야마 도세이가
죽고 나서 집안의 성씨가 오가와로 바뀌어 내려오다가 남자의 대가 끊어지자
외손들에게 그의 비법이 전해졌고, 외손들은 에구치를 거쳐 에토로 변하면서도
그의 외조부가 전해준 비법과 유물을 근래에게 까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
다.
3) 정진(淨珍)과 마키츄자에몬(槙忠左衛門)
이석문(李石門)의 『부상록(扶桑錄)』에 의하면 조선포로들의 태반이 노복이
라고 했을 만큼 그들의 신분은 낮았다. 임영구, 이구산과 같이 어느 정도 사회
적 신분이 보장된 사람은 극히 적었다. 조선인포로들 가운데는 전쟁터에서 무
사에게 붙잡혀 일본으로 연행되어 그들의 부하가 되는 자들도 있었다. 이들 가
운데 자신의 주인이 영주가 죽어서 순사하게 되면 그들도 주인을 따라 죽는
자들도 있었다.
즉, 순사자의 순사자가 나오는 것이다. 1657년 3월 24일 사가
번의 영주 나베시마 가츠시게(鍋島勝茂)가 죽었을 때도 그와 같은 일이 벌어
졌다. 그들 가운데는 정진(淨珍)을 비롯한 3명의 조선인이 있었다. 정진은 나
베시마의 가신인 오노요시베이(大野吉兵衛)를 섬겼던 것 같다. 오노가 주군을
따라 할복자결하는 순사를 하자, 그는 아내와 함께 순사했다. 그리고 타자에몬
(太左衛門)이라는 일본식 이름을 가진 조선인도 아내와도 같이 자결했다.43) 이
들의 신분이 그렇게 높은 편이 아니었던 탓에 그들에 관한 상세한 기록이 남
아있지 않아 그들이 일본에서 어떠한 생활을 하였으며, 또 그들의 후손이 훗날
어떻게 되었는지 자세히 알 길이 없다.
한편 사가에는 어린나이로 포로가 되어 사가에서 살았던 조선소년의 이야기
가 있다. 『엽은(葉隱)』에 의하면 그는 일본군에 의해 코가 잘릴 위험에 처해
있었을 때 山本重澄(中野神右衛門淸明)이 이를 보고 가엽게 여겨 자신의 아들
千松丸과 같은 또래라고 하며 그를 귀국 시에 사가로 데리고 갔다. 그 후 그를
마키츄자엔몬(槙忠左衛門)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아시가루(足輕)라는 하급 군
졸로서 이용했다.
42) 大園弘(1977: 103)
43) 服部英雄(2008: 6), 그러나 타자에몬의 아내는 일본인인지 조선인인지 정확하지 않다.
일본 사가현의 임란포로에 관한 연구 ······································································· 魯 成 煥…221
원래 사가번에는 아시가루가 없었다. 사가번이 아시가루라는 하급 무사제도
를 설치하는 것은 임란과 정유재란 때의 일이다. 그들이 히데요시가 일으킨 조
선전쟁에 참가해 있었을 때 다른 지역의 영주들에게는 아시가루들이 있었고,
이들의 활약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알고 전쟁에 함께 참가한 차남이하의 자
식들을 아시가루로 삼은 것이 사가번의 아시가루 제도의 출발이었다.44) 즉, 아
시가루란 계급 상으로는 높지도 않으면서도 결코 무시할 수없는 하사관급의
무사이었던 것이다.
마키츄자엔몬도 결혼하여 나가우에몬(長右衛門)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
는 사가번의 직참(直參)이 되었다. 하사관급에서 장교급인 사무라이가 된 것이
다. 그러자 그의 이름도 히데시마나가우에몬(秀島長右衛門)이라 고쳤다. 그리
고 그에게는 히데시마 고우에몬(秀島五右衛門)이라는 아들이 있었다.45)
이처럼 사가현에 있는 조선포로들 가운데는 나이어린 소년포로들도 있었다.
여기에 대해 나카자토 노리모토씨(中里紀元)는 이들은 자식(친지)들에게 선물
용으로 가져갔다고 해석했다.46)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같이 놀아주
는 노리개이자 몸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비록 그들의 출발이 그렇다고 하지
만, 이들은 능력을 인정받아 처음에는 신우에몬의 사병인 아시가루가 되었고,
또 노력하여 번의 정식 사무라이가 되어 자식들에게 그 직을 물려줄 수가 있
었다. 즉, 노예출신으로서 일본의 관료가 된 것이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이러한
노력에 따라 출세의 길은 열려 있었던 것이다.
4. 타쿠의 소년포로
사가현의 중앙부에 위치한 타쿠시(多久市)에도 마키츄자에몬과 같은 소년포
로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불행히도 일찍 죽어서 지역의 저주신이 되
었다. 그를 모신 사당은 오쯔카씨(大塚氏) 묘역에 있으며, 사람들은 그를 고라
이콘겐(高麗權現)이라 했다. 그를 신으로 모신 사당이 오쯔카씨의 묘역의 일각
에 있다. 그에 관한 전설이 한문설화집인『금제해(今齊諧)』(卷4 第33話)에 적
혀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소개된 적이 없기 때문에 전
문을 번역하여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44) 山本常朝(1983: 197)
45) 山本常朝(1983: 161)
46) 中里紀元(2001: 233)
222 日本文化學報……第 42輯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에 침공하였을 때 지금 초대 사가번주인 나오시게
공은 가끔 전공을 올렸다. 그 때 가로인 타쿠타이유(多久太夫)도 여기에 종군
했다. 그 다구씨의 가신이었던 소에시마(副島) 모씨가 조선의 소년을 잡아서
일본으로 데리고 갔다. 소년은 나이가 어림에도 불구하고 똑똑하고 영리하며,
게다가 학문을 좋아하여 문학에도 뛰어나서 많은 기예들을 익히고 있었다. 이
에 소에시마 모씨는 기뻐하여 이 소년을 아끼며 키우더니 이윽고 자기의 자
식으로 삼았다. 소년은 어느 정도 나이를 먹자 자신의 재능을 뽐내고 거만해
졌으며, 자기 마음대로 행동을 하여 언제나 남들을 무시했다. 주위의 사람들은
이를 막으려고 이 소년을 멀리했다. 그러자 소년은 스스로 자신이 아버지의
사랑을 잃어버린 것을 알고 항상 만족하지 않고 즐거워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 나쁨과 흉폭함은 멈추지 않았고, 끝내는 재앙이 자신의 몸에 닥치
는 것이 명확했다. 어느 날 밤 잘 자고 있었을 때 그의 몸이 꽁꽁 묶여 매달
려지고 칼에 찔려 죽고 말았다. 이런 일이 있고 난 후 그 소년은 원귀가 되어
원한을 품고 3대에 걸쳐 소에시마의 당주(當主)를 일찍 죽게 만들었고, 4대째
가문이 이어지는 어느 날 낮에 도깨비가 바깥에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
다. 이를 보니 그 도깨비는 다름 아닌 죽은 조선의 소년이었다. 흐트러진 머
리카락은 등줄기까지 내려져 있고, 얼굴은 새파랗고, 몸에는 죽었을 때의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으며, 피는 여전히 뚝뚝 땅에 떨어지고 있었다. 주인과 마주
하더니 말하기를 “나는 너의 조상에게 살해당한 조선의 소년이다. 나의 원한
은 억울한 죄가 언제까지 사라지지 않는 점에 있다. 이미 너의 조부 등 3명을
죽였다. 이처럼 사람을 죽여보아도 기분이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아마
도 사람들은 이러한 것을 믿지않고 여우나 너구리, 혹은 百鬼가 저지른 일이
라고 생각할 것이다. 조부 등 3명을 빨리 죽게 하는 것만으로는 나의 마음을
천하에 알리는 것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내일 내가 한번 더 이곳에
오고자 하니 너는 반드시 제물로 한명의 소년을 골라 놓아라. 그러면 내가 그
아이에게 빙의하여 마음에 담아있는 분한 마음을 털어놓겠다.”하며 이내 사라
지고 말았다. 이를 들은 집 안 사람들은 크게 놀라고 그 귀신의 뜻을 거슬려
화를 입는 것을 두려워하여 다음날 아침 모든 친척들이 모여 마을의 아이들
가운데 가장 어리석은 아이 한명을 골라 제물로 삼았다. 그리고 모두가 그 아
이를 둘러싸고 보고 있었더니 갑자기 그 아이의 다정한 눈빛이 사납게 바뀌
더니 흥분된 상태로 일일이 오랫동안 품어온 원한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 변
설은 마치 흐르는 강물처럼 유창하여 그 상태는 도저히 어제의 시골 소년이
라고 볼 수가 없었다. 잠시 후 동자는 울부짖으며 자신의 노여움을 말하고, 주
먹을 불끈 쥐고 들어올리고 “나의 원한은 쌓일대로 쌓이고, 분노는 점점 깊어
져 입으로는 도저히 다 표현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즉시 붓과 벼루를 가지고
오라.”고 했다. 집 식구들은 공포에 떨면서 명령에 따랐다. 동자는 붓을 잡는
일본 사가현의 임란포로에 관한 연구 ······································································· 魯 成 煥…223
순간 즉시 물이 흐르는 것처럼 엄청난 문자를 빠르게 적더니 그것을 사람들
에게 던졌다. 사람들이 이를 주워보니, 그 필적은 약동하고, 말은 비장감에 차
있으며, 모든 것이 원한을 호소하고 자신의 무실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 내용의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나는 고원한 삼한의 누대의 거가에서 태어
났으나, 포박되어 여기 일본에 왔다. 원래부터 출세를 하고자 하는 마음도 없
었으며, 민간에서 생활하기로 마음을 먹고 있었다. 왜냐하면 사람은 반드시 죽
기 때문이다. 나는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증오하는 것은
한번은 나를 기르며 자식으로 삼으면서도, 이번에는 거짓으로 계략을 꾸며 나
를 죽이려고 한다. 이 거칠고 비정한 짓은 도저히 인간다운 마음을 가진 것이
라 할 수 없다. 다시 말하여 개나 돼지와 같은 짐승들이 할 짓이다. 나를 죽
이려고 하였다면 어찌하여 나에게 칼을 잡을 기회를 한 번도 주지 않았단 말
인가. 내가 이 사태를 충분히 이해하고 괜찮았다고 칭찬받을 훌륭한 죽음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이 때문에 험악하고 악의로 가득 찬 함정을 파놓고 또
거짓으로 가득 찬 계략을 꾸미고는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용서할 수 없다.
나는 나의 진심을 천제에게 호소하고, 이를 인정받았기 때문에 너의 가족 3대
를 모두 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아직 나의 분노가 충분히 풀리지
않는다. 몇월 몇일 몇시 나는 반드시 주인의 목숨을 끊고 소에시마의 자손에
게 오랫동안 한줌의 살점을 남기지 않도록 하려고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문장을 다 읽고 나니, 그 동자는 원래 어리석은 소년으로 돌아왔으며,
여태까지 있었던 상황에 대해서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집의 식구들
은 공포에 떨며 온갖 수단을 다하였지만 그 귀신은 나가지 않았다. 동자가 말
한 날짜가 오자 즉시 주인은 죽고, 그 자식, 그리고 손자들도 오래 살지 못했
다. 따라서 양자를 맞아들여 대를 이어 소에시마 가문을 단절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하였지만 끝내 단절되고 말았으며, 그 후 시간이 많이 흘러 버렸다. 그 동
자가 처음으로 호소하였을 때의 문장은 오랫동안 소에시마 집안에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촌노들 가운데 이를 본 사람이 있다고 하나, 최근 화재로 말미
암아 소실되어 버렸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타쿠의 사람 쿠사바 아키라(草場
鞾)가 나에게 해준 것이다. 이를 내가 정리한 것은 문화 8년(1811) 초 사일(巳
日)의 이틀 뒤이다.47)
이 문장에서 보듯이 임란 때 소년으로 잡혀와 일본인 집안에서 자라다가 양
부모에게 살해당한 조선 소년의 슬픈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그의 살해를 정당
화하기 위해 그가 영특하지만 거만하고 흉폭한 행동을 일삼았다고 했다. 그러
나 이것이 그를 죽일 만큼 위협적인 행위이었다고 보기는 힘든다. 다른 이유가
47) 志波深雪(2002: 25-26) 재인용
224 日本文化學報……第 42輯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가 어리석은 일본 소년에게 빙의하여 말하기를 출세
하고자 하는 욕구도 없으며, 다만 평범하게 보통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원했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조선의 포로출신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원한
을 품었던 것은 한 때는 애지중지하며 자식으로 키우다가 마음을 바꾸어 자신
을 죽이는 몰인간적인 행위이었다. 이러한 것을 그는 개, 돼지와 같은 짐승들
이나 하는 것이며, 도저히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이라 하며 저주의 귀신이 되어
소에시마의 집안의 씨앗을 말려버린 것이었다. 이처럼 그의 죽음은 그의 교만
하고 흉폭한 행위로 말미암은 것으로 보기 힘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죽음은 영특함 때문에 생겨났을 가능성이 높다. 비상한 머리
와 뛰어난 재주를 가진 그는 조선을 침략하여 많은 사람들을 살해한 일본인으
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을 길러
준 양부모로부터 살해당하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실
제로 그의 사당을 지은 오쯔카씨 집안에 전해지는 구비전승에는 그의 교만함
에 대한 이야기는 없고, 그의 죽음은 그가 지니고 있는 비상한 영리함 때문에
이를 두려워한 당시 권력자들이 장래의 화근을 없애기 위해 살해하였다고 한
다.48) 이처럼 그의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은 오쯔카씨 집안의 전승처럼 그의
뛰어난 재능에서 기인한 것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이처럼 사가현 타쿠에서
는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조선 소년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의 사당이 오쯔카씨 묘역에 있게 된 이유는 그 소년의 저주 때문인지 수
대에 걸쳐 오쯔카씨 집안에서는 남자아이가 태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 소년을 위해서 사당을 짓고 고려콘겐이라는 신으로 모시기 시작했다고 한
다. 여기에 효과가 있었는지 아들이 태어나기 시작했으며, 근년에는 그 아들이
공부를 잘하여 도쿄대학에 입학하였다고도 전해진다. 이러한 신앙이 널리 퍼지
면 그에 대한 신격은 원래와 같이 저주의 신이 아니라, 자식을 점지해주고, 또
그 자식으로 하여금 공부 잘하게 해주는 신으로 변질되어 발전할 가능성이 높
다.
5. 마무리
지금까지 임란과 정유왜란을 계기로 일본군에게 포로가 되어 바다를 건너
사가현에 정착한 조선인들 가운데 도공이 아닌 사람들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들은 주로 가라츠와 사가 그리고 타케오라는 3지역에 많이 살고 있었다.
48) 志波深雪(2002: 24)
일본 사가현의 임란포로에 관한 연구 ······································································· 魯 成 煥…225
이 중 가라츠는 조선과의 통교에서 창구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인
포로들이 많이 살았던 지역이었다. 그리하여 조선조정에서는 포로들을 쇄환하
기 위한 통고문을 가라츠로 보냈다. 그러한 증거로 남아있는 것이 고덕사에 보
관되어 있었던 조선국예조통유사(朝鮮國禮曹通諭事)이다. 이러한 사료에서 보
듯이 조선정부는 일본에 남아있는 임란포로들을 가능하면 많이 쇄환하기 위해
노력을 하였던 것 같다. 그에 따라 귀국하는 다수의 사람들도 있었으며, 그 중
에는 일본에 남아 생계를 영위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들 가운데 가라츠에 남은 사람들은 대체로 양반출신이 아니었지만, 목면과
향을 만드는 특수한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한마을을 이루고 살
았으며, 일본인들은 이 마을을 외국인 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토진마치라고 불
렀다. 이들은 가라츠 산업에 일익을 담당하였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들에 관한 기록이 없어 구체적인 그들의 이름과 후손들의 활
약상까지 파악하기는 무척 어렵다.
그러나 이에 비해 사가현의 중심지인 사가시에는 지식계층의 포로들도 많았
다. 그런 특성 때문에 그들에 관한 기록들이 비교적 부분적이나마 남아있어 그
들과 그들의 후손에 대해서 어느 정도 파악할 수가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
임영구, 이구산의 일족 등을 들 수가 있을 것이다. 임영구는 영주로부터 신임
을 얻었던 의사이었다. 그리고 영주가 죽으면 순사하고자 했던 무사이기도 했
다. 그러한 임영구이었기에 그의 후손들은 주군의 죽음에 자신의 목숨도 기꺼
이 내놓은 순사자로, 또 전쟁에서는 선봉장에 서서 싸우는 훌륭한 무사의 집안
으로서 성장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이구산은 제약과 나염기술을 개발하여 지
역산업에 큰 공헌을 했다. 그리고 나베시마 카츠시게가 죽었을 때 그를 따라
할복 순사하는 무사들이 속출할 때, 그 무사의 부하로 있던 정진과 타자에몬의
부부처럼 자신의 주인을 따라 목숨을 끊는 조선인들도 있었다. 또 사가에는 마
키츄자에몬이라는 소년포로를 위시하여 나카시마가 行李工, 飴工, 織工이라고
만 언급한 수많은 무명의 조선인 기술자들도 있었음을 빠뜨릴 수 없다.
한편 타쿠에는 양부모에게 살해당하는 소년포로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
다. 이 이야기를 통해 재능 있는 어린 조선소년포로들이 있으면 그 재능을 높
이 사서 양자로 삼는 경우도 있었으며, 또 이 지재능이 자신들이 위협이 되면
비록 양자라 할지라도 여차 없이 제거해버리는 인간의 냉혹함을 느낄 수가 있
다. 그로 말미암아 소년포로는 원한을 품고 죽어서 저주의 신이 되었고, 또 오
늘날에는 지역민들의 요구에 따라 그 성격을 학문의 신으로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이처럼 포로들 가운데 불행한 죽음을 당하여 일본에서 신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임란을 흔히 도자기전쟁, 서적전쟁, 활자전쟁, 포로전쟁이라고 일컫는 것은
226 日本文化學報……第 42輯
그만큼 전쟁을 통해 많은 한국의 문화가 일본으로 전래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일본은 이를 빗대어 일본의 저명한 저술가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1863-1957)
는 그의 저서『근세일본국민사(近世日本國民史)』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조선침략전쟁은「일본의 사치스러운 해외유학이었다」고 까지 표현한
적이 있다. 그만큼 일본의 조선침략이 일본의 문화와 사상의 발전에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사가현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
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그들이 잡아간 조선인 포로들은 사가현에서 의술, 의
약, 서예 및 생활용품의 제작기술 등 많은 부분에서 눈부신 활약과 공적을 남
긴 사람들이다. 이를 두고 도쿠토미 소호 식으로 표현하자면 일본은 조선에서
사치스러운 유학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그들의 스승마저 강제로 납치
하여 자신의 땅에서 학업을 계속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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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 日本文化學報……第 42輯
要 旨
本稿は壬亂と丁酉の倭亂によって日本軍に捕虜となり、海を渡って佐賀県に定着した非陶工
の人々を中心に考察したことである。彼らは主に唐津と佐賀そして武雄という地域に多く住んで
いた。唐津の場合、唐人町という所で木棉と香を製造する朝鮮人たちが多く住んでおり、また
高德寺では捕虜の刷還するために朝鮮禮曹から送った諭告文が保管されていたことが分った。
そして佐賀市では 知識階層の朝鮮捕虜も多かった。その代表的な人物としては林榮久, 李九
山の一族などが挙げられる。林榮久は藩主から信任を受けた醫師であった。彼は藩主が死ぬ
と殉死したいと思ったが達成できず、自分の子供にそれを願った。その結果、彼の次男はそれ
を實踐した。自分の仕えていた主君が死んだ際、殉死する朝鮮人は、ただ林氏一族だけでは
ない。鍋島勝茂が死ぬと、その家臣たちが次から次へ殉死した。そうすると今度はその家臣の
家来が殉死することが起きた。大野吉兵衛の家来であった朝鮮人淨眞と太左衛門の夫婦の自
殺は、まさにそれに属する殉死はであった。その一方、佐賀の産業に大きく貢献した朝鮮人捕
虜もいた。製藥と更紗技術を開發した李九山をはじめ無名の行李工, 飴工, 織工たちがそれ
である。そのほか槙忠左衛門という少年捕虜もいた。多久には養父母に殺された朝鮮少年捕
虜の話しがあった。この話しは才能のある少年捕虜だったらその才能を高く評価し自分の養子に
することもあったあるが、万が一その才能が自分たちに威脅になると、早速除去してしまう人間の
冷酷さがある。このように佐賀県の朝鮮捕虜たちは社會的に安定された生活をするためには武
士になった捕虜は、切腹殉死するほど主君への忠と義を守り、一般人たちは獨特の專門的な
技術と特徵を持ってい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これは日本での朝鮮捕虜の社會的な地位がいか
に不安定であったかをよく示されていると見なされる。
キ ワ
ド: 壬辰倭亂、丁酉倭亂、朝鮮捕虜、唐津、佐賀、武雄
투
고 : 2009. 5. 31
1차 심사 : 2009. 6. 13
2차 심사 : 2009. 6. 27
일본의 삼림자원 활용전략에 관한
연구
兪 起 濬*⋅池 鎭 浩**
1)
(*e-mail : [email protected])
(**e-mail : [email protected])
目次
1.머리말
2.삼림자원의 활용전략
3.삼림자원의 활용을 위한 정보발신 전략
4.삼림자원 활용의 사업화를 위한 전략
5.맺음말
1. 머리말
한 지역이 훌륭한 자원을 보유하면서도 그것이 지역의 매력물로 작용하지 못
하고 또한 지역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산촌
지역에서는 삼림 또는 삼림 내에 있는 자원의 다양하고 적극적인 이용이 미흡
하여 그 보유하고 있는 자원을 다각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곳이 많다.
그러나 최근 환경이나 자원의 유한성이 인식됨과 동시에 우리의 가치관도 자
연과의 소통이나 여유를 중요시하는 방향으로 변화되고 있고 삼림에 관해서도
국토보전, 수질원의 보존 등의 공익적 기능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더
불어 삼림환경교육의 중요성이 이야기되고 삼림을 목재 생산기지로서 만이 아
니라 삼림을 건강만들기의 장소로도 활용하고 또한 자원봉사 등으로 많은 주
* 공주대학교 관광학부 관광경영학전공 교수, 제1저자
**건양대학교 관광학과 교수, 공동저자
230 日本文化學報……第 42輯
민이 직접 푸른숲 가꾸기 사업에 참여하는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앞으로 자연환경과의 조화를 포함한 생활의 질적 향상을 위한 삼림의 중요성
에 대한 인식은 높아지리라 생각된다. 삼림은 정신적, 물질적 양면에서 많은
혜택을 주는 존재임과 동시에 인류의 생존기반인 지구환경을 형성하고 있고
최근 지역사회에서도 삼림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인류생활의
기반이 되는 삼림의 여러 기능을 미래에도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게 하며
현재의 우리들도 삼림의 혜택을 누리며 삼림의 다양한 역할을 깨닫는다는 것
은 중요한 일이다.
이에 일본에서는 임야청(林野庁), 국토녹화추진기구(国土緑化推進機構), 아름
다운 삼림만들기전국추진회의(美しい森林づくり全国推進会議) 등을 통하여 삼림
을 단순히 목재와 그와 관련된 제품의 생산 활동의 장소로서 만이 아니라 자
연체험학교의 운영과 체험형 관광, 교육상품, 삼림테라피(森林セラピー, Forest
Therapy)1) 프로그램 등 환경 메시지성이 있는 새로운 상품을 운영할 수 있는
장소로 적극 개발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을 삼림활동에 참가를 독려하며 창조
적 삼림 만들기 사업2)을 추진하며 삼림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게하고 삼림
의 혜택을 누리게 하고 있다.
이와 관련된 연구로 일본의 대표적인 자연체험학교시설인 요코하마 자연관찰
의 숲과 야마나시현의 KEEP Foresters School 등을 현지 방문조사하고 관련
자료와 문헌조사를 통해 국내 자연체험학교 현장에 적용 가능한 운영방안을
고찰한 김상윤의 연구와 보다 매력적인 삼림경관을 만들기 위함이나 삼림경관
을 만들어 그를 이용한 관광, 삼림테라피, 환경교육 등으로 광범위하게 응용할
수 있는 방법과 전략을 고찰한 奥敬一의 연구와 한국과 일본에 있어서 삼림레
크레이션의 역사적 전개 및 중요시책을 검토한 김상윤의 연구 그리고 그린투
어리즘의 대상으로서 산촌의 활용에 관한 박광순의 연구 등이 있다.3)
그러나 이러한 연구들은 건강지키기와 삼림활용 교육 등으로 삼림을 다각적
으로 활용하여 산촌지역의 활성화를 도모하려는, 최근 변화되는 지역의 삼림활
1) 삼림테라피란 숲의 풍경, 향기, 소리, 감촉 등 숲의 생명이나 힘을 실감하는 것에 의해 우리들의
심신에 원기를 회복시키려는 것으로 소위 삼림욕으로 부터 일보 진전된 것이다. 삼림욕의 효과를
과학적으로 규명하고 마음과 신체의 건강에 활용하려는 시도이다.(www. forest-therapy.jp)
2) 社団法人国土緑化推進機構 平成18年度「創造的森林づくり推進事業」
3) 金相潤 (1996), 「森林レクリエ―ション政策の社会経済学的硏究」, 東京大学 博士学位論文
김상윤(2001),「자연체험학교 프로그램의 운영 체계 및 기능 증진에 관한 연구 - 일본의 사례를
중심으로-」,한국산림휴양학회지 제5권 4호.
박광순(2001),「일본산촌에서의 그린투어리즘의 도입, 전개, 성과(Ⅱ)」,아시아태평양지역연구 제5
권2호
奥敬一, 香川隆英, 田中伸彦編著(2007), 『魅力ある森林景観づくりガイド : ツーリズム、森林セラピー、環
境教育のために』, 全国林業改良普及協会
일본의 삼림자원 활용전략에 관한 연구 ··············································· 兪 起 濬․池 鎭 浩…231
용전략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을 종합적으로 살펴보기에는 미흡하다. 이러한
시점에 산촌지역의 삼림자원 등을 활용하여 <도시와 농산촌의 교류> 또는
<건강 만들기> 등을 키워드로 하여 새로운 지역 서비스산업과 지역 커뮤니케
이션 형성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일본 가고시마현(鹿兒島県)의 미나미사쯔마
(南さつま)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NPO(Non Profit Organization, 特定非營利活
動法人)의 자료를4) 중심으로 삼림자원의 활용전략과 삼림자원의 활용을 위한
효과적인 정보발신전략 그리고 삼림자원 활용의 사업화를 위한 전략에 관하여
살펴보려한다.
이러한 일본의 삼림활용전략에 관한 사례 연구는 삼림의 다각적인 활용을 통
하여 산촌지역을 활성화시키려는 우리나라의 삼림정책에도 시사점을 제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2.삼림자원의 활용전략
일본에서는 삼림을 단순히 목재 생산의 장소로서 만이 아닌 체험형 관광, 교
육상품, 삼림테라피(森林セラピー, Forest Therapy)의 운영 등 환경 메시지성의
새로운 상품을 운영할 수 있는 장소로도 개발하고 있다. 이는 많은 사람들을
삼림활동의 참가를 촉진하게하면서 나아가 지역의 풍부한 숲 만들기에 기여하
고 산촌지역의 활성화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하여 산촌에서는 도시주민과 교류할 수 있는 기반의 정비와 함께 지
역의 자연이나 전통, 문화 등을 안내 지도하기 위한 인재를 육성하고, 고령자
가 지닌 기술이나 경험 등을 적극적 활용하면서 삼림 산촌체험형 투어리즘과
삼림환경 교육 등을 할 수 있는 유입체제의 정비가 이루어지고 있다.
미나미사쯔마(南さつま)지역에서는 지역이 풍부하게 지니고 있는 삼림을 목재
의 생산 활동의 장소로서 뿐만 아니라 삼림환경을 활용하여 환경메세지성이
강한 상품을 만들어 운영하며 지역의 활성화를 도모하고 있다. 미나미사쯔마
(南さつま)지역에서 환경메세지성이 강한 삼림의 활용 전략은 크게 두 가지 유
형이다5). 하나는 의료관계자와 제휴를 통한 삼림을 활용한 삼림테라피(森林セ
4) 特定非營利活動法人エコ·リンク·アソシエーション(2006),『森林體驗型敎育プログラムー新たな森林パートナー
シップの創造ー実施計画書』
特定非營利活動法人エコ·リンク·アソシエーション(2007),『森林體驗型敎育プログラム開発による新たなパート
ナーシップ事業事業報告書』
5) 特定非營利活動法人エコ·リンク·アソシエーション(2007),『森林體驗型敎育プログラム開発による新たなパート
ナーシップ事業事業報告書』p.2
232 日本文化學報……第 42輯
ラピー)의 운영이고 다른 하나는 삼림체험형 종합학습 프로그램의 운영이다.
2-1. 삼림체험형 종합학습프로그램의 운영
삼림체험형 종합학습프로그램의 운영은 삼림환경교육이라는 입장에서 이루어
지는 것이다. 삼림환경교육이란 환경문제를 해결하려는 새로운 환경정책의 일
환으로 범사회적으로 형성되고 있는 자연환경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계
기로 이루어지는 새로운 교육활동이다. 이러한 교육은 1970년대에 독일에서
이루어지는데 독일 교육의 특징은 삼림 및 자연환경의 가치를 전달하는 수단
으로 자기학습식(self-guided) 환경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6) 일본에서는 일찍
부터 삼림레크레이션 이용 환경의 정립이라는 측면에서 소위 삼림인타프리타
(森林インタ―プリタ―)라는 삼림가이드를 양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자기학습식
(self-guided) 방법보다는 지도식(guided program)으로 이루어지는 경향이라
생각된다.7)
삼림환경교육이라는 새로운 교육활동을 통하여 삼림에 대한 포괄적이고 종합
적인 인식을 할 수 있게 되고 삼림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가치를 인간과 자연
의 전체적인 관계 속에서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교육을 통하여 삼림
은 적절한 보전을 도모하면서 이용하는 한, 인간에게 다양한 혜택을 지속적으
로 공급하고 있는 곳으로서 인식을 할 수 있게 한다. 즉 삼림환경교육은 삼림
이 지니고 있는 복합적인 생태관계를 일깨우고 그 속에서 적절한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자세를 확립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삼림의 다양성, 상호관련성 또는 삼림과 인간생활과의 관계를 보면 삼림은 다
른 것과 바꿀 수 없는 가장 좋은 야외교육이나 환경교육의 장소가 될 수 있
다. 체험을 통하여 배우는 기회가 제한되어있고, 심신의 강인함이 약해져가고
있는 현대의 아이들에게 삼림환경교육은 아이들이 스스로 과제를 찾아서 스스
로 배우고, 가르치는 힘을 키우게 할 수 있다. 삼림 안의 여러 가지 상황에서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함으로써 새로운 발견이나 놀라움과 감동을 맛보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이러한 삼림환경교육은 삼림이 학교이고 또한 스스로의 행동
으로 체험하며 배우는 것으로써 아이들의 삶의 힘을 키우게 하는 교육이라 할
6) 자기학습식(self-guided) 삼림환경교육이란 삼림을 찾는 사람이 해설자나 안내자 없이 현장에 준비
된 해설판과 안내책자를 이용하여 자연에 대한 섭리를 스스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방법이
고 지도식(guided program)삼림환경교육이란 피교육자가 교육자인 자연해설가와 직접 현장에서
함께 자연을 체험하는 방법을 말한다.
(남효창(1999),「삼림환경교육- 독일의 자기학습식(self-guided)현장프로그램을 중심으로-」,『삼림
휴양연구』 제3권12호 p.p 16-17)
7) 金相潤 (1996), 「森林レクリエ―ション政策の社会経済学的硏究」, 東京大学 博士学位論文, p.p153-211
일본의 삼림자원 활용전략에 관한 연구 ··············································· 兪 起 濬․池 鎭 浩…233
수 있다. 특히 최근 일본에서는 미래를 책임지는 어린이가 강인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어린이들을 일정기간 동안 산촌에 체재하고 산촌의 풍부한 자연이
나 문화 등에 접하면서 다양한 삼림체험 활동이나 환경교육을 추진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8)
미나미사쯔마(南さつま)지역에서도 삼림에서 교육활동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
을 개발하고 이를 활용한다는 것은 삼림에 대한 인식이 단순히 목재 등의 자
원 공급처로서의 역할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삼림환경교육의 장으로도 활용하
면서 지역 활성화를 이루려는 의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미나미사쯔마(南さつ
ま)지역의 삼림체험형 교육프로그램의 유형과 특징은 다음과 같다.
2-1-1.삼림체험형 교육프로그램의 유형과 특징
미나미사쯔마(南さつま)지역에서는 삼림·산촌 체험형 투어리즘과 삼림환경 교
육 등을 위한 체제를 구축하고 체험학습 프로그램<표-1>과 종합학습 프로그
램<표-2>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9)
<표-1> 체험학습 프로그램
구분
기본 : 농림업 체험
•농작업 체험
•야채 심기, 수확 작업
•메밀 심기, 수확 작업
교육
내용
•귤 수확, 잼 만들기 체험
•모내기, 벼 베기 체험
•임업 체험
•삼림정비(잡초베기,간벌
등)
•목공 교실, 버섯 식균
복합 : 농림업+체험교실,
투어 :
공방
체험 교실&창작 공예
•농림업 체험과 식문화
•목공교실+메밀 치기 체험
•산채, 야채 수확+향토음식
조리
•체험교실, 공방과 농림업
체험
•그룹마다 체험
•삼림 정비+삼림 테라피
•목공 체험+승마 체험
•삼림정비 + 잼 만들기
•자연관찰 + 도예체험
8) 이는 어린이 농산어촌교류프로젝트사업이다. 2008년부터 새롭게 실시하는 사업으로 농림수산성, 문부
과학성, 총무성의 3성이 제휴한 약 470억 엔 규모의 방대한 예산이 투입된다. 이 사업은 초등학생들이
배우려는 의욕이나 자립심, 배려심, 규범의식 등을 기르면서 강인한 어린이로 성장할 수 있게 하는 일
종의 교육활동의 성격으로 농산어촌에서의 장기 숙박 체험 활동을 추진하는 것이다. 総務省 報道資料
(平成 19年 8月31日), 総務省,文部科学省,農林水産省による連携事業, 「子ども農山漁村交流プロジェクトの推進
について -120万人 自然の中での体験活動の推進 -」( http:// www. soumu.go.jp )
(유기준(2009),「일본그린투어리즘의 전략과 실제」,『일본문화연구』 제40집 p.397)
9) 特定非營利活動法人エコ·リンク·アソシエーション(2007),『森林體驗型敎育プログラム開発による新たなパート
ナーシップ事業事業報告書』p.p8-9
234 日本文化學報……第 42輯
•산채 채취
•삼림 테라피
체험학습프로그램은 기본, 복합, 투어의 3가지 유형으로 구분되는데 모두 체
험위주로 교육내용이 구성되어있다. 기본이 되는 농림업의 체험뿐만 아니라
목공, 도예, 승마 등 즐기면서 자발적으로 몰입 할 수 있도록 하고 삼림에 관
한 기초적인 지식을 체험활동을 통해서 배울 수 있게 하였다.
<표-2> 종합학습 프로그램
교실
농림업과 순환형 사회
주
토산물의 소비추진과 농림업
제
배우기
기본
교육
•농산촌의생활문화와 <식>
•고장의 신선한 야채로 향
토요리 만들기
•산채 채취와 산채 요리 만
들기
자연환경, 삼림 보전과
보호
삼림 테라피와 건강 만들기
삼림간벌작업과 목재배우기
숲의 다양한 기능 배우기
•삼림정비와환경보호와임업
•삼림테라피의 역할
•임업의 현상과 삼림정비를
•삼림테라피의 효과를 배
생각한다.
•수원함양과 삼림환경보호
를 생각한다.
•잡초베기, 간벌 실습 체험
목질 바이오매스를 살리기
운다
•삼림테라피 체험
•식이요법 체험
•삼림테라피 프로그램 제
안
•강을 테마로 순환형 사회
를 검증
심화
교육
•바다와산의 관계를배운다.
•자연 관찰, 등산, 하이킹
•음식의 역사에서 배우는
•희소 식물, 곤충을 관찰
농산촌 생활
•산업으로부터 보는 농산촌
생활
•순환형 사회를 농림업, 축
산에서 검증
•풍경을 즐긴다.
•삼림, 초원, 습원의 사계절
을 관찰
•사계의 삼림을 산책, 체감
캠프 체험
•분뇨 처리와 퇴비 만들기
•테라피 효과의 분석한다
•표현문화 요범을 시험해
본다.
•삼림 레크리에이션을 즐기
자
•약초의 연구를 하자
•숲의 고장학을 실천해보자
•아로마 테라피를 알자
를 생각한다.
종합학습 프로그램은 기본교육과 심화교육으로 삼림에 관한 기초적인 지식부
터 삼림테라피, 순환형사회, 바다와 산의 관계성 등을 종합적이고 단계적으로
배울 수 있게 하고 있다. 또한 지역의 역사와 전통문화 그리고 생활양식 등에
접하는 기회를 만들어 주면서 삼림과 인간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학습이 가능
하도록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프로그램의 운영은 초심자나 아이들을 비롯하여 이용자가 삼림에 새로움이나
일본의 삼림자원 활용전략에 관한 연구 ··············································· 兪 起 濬․池 鎭 浩…235
관심을 가지고 삼림의 다양한 역할 등을 깨닫고 보다 깊게 이해하도록 이용자
의 수준이나 이용목적과 개인의 성격에 따라 다르게 적용시키고 있다. 또한
삼림체험 프로그램의 추진을 원만하게 하기위하여 교육관계 등 다양한 관계기
관과 제휴를 하고 프로그램의 기획이나 정보발신을 위하여 지역의 시설이나
다양한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참가자를 폭넓게 참여시키고 있다.
삼림체험 프로그램에 직접 참가를 촉진하기 위하여 참가희망자에 대한 정보
의 수집과 네트워크화를 지원하는 시책을 실시하고 힘든 노동에는 참가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나 재미있는 이벤트라면 참가 하려는 사람 등도 참가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하고 있다.
최근 일본에서 도시주민들 중에는 이러한 산촌지역의 매력을 느껴보고자하는
욕구가 높아지고 있다10). 이러한 산촌지역의 전통문화와 풍부한 삼림 자연환
경을 활용하여 도시민과의 교류를 추진하는 것은 산촌지역의 활성화에도 일익
을 담당한다.
2-2 의료관계자와 제휴를 통한 삼림테라피(森林セラピー)의 운영
삼림은 종래부터 삼림 안에서 여러 활동을 통하여 보양의 장소로서 이용되
고 있었지만 최근 도시화의 진전이나 스트레스 사회의 진행에 따라 삼림이나
수목 등이 지니고 있는 치료효과를 활용하여 생활 습관병의 예방이나 체력 향
상을 목적으로 삼림욕 등을 하는 사람이 증가하는 경향이다.
삼림욕에 대해서는 삼림 내외에서 활동을 하는 경우와 비교하여보면 혈압을
내리는 효과나 스트레스호르몬의 분비를 억제하는 효과가 있는 것이 의학적으
로 규명되고 있고11) 삼림은 건강 만들기를 위한 야외활동이나 기분전환 등을
통하여 심신과 인간을 재생시키는 장소로서 이용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삼림은 아이들에서 고령자까지의 모든 세대의 건강만들기의
장소로 이용됨과 함께 특히 일본사회에서는 고령화의 급속한 진전12)에 따라
고령자 등이 사는 보람의 장소로도 이용되고 있다.
이렇게 삼림이 가진 인간 건강증진과 질병치유의 효과에 대한 관심은 이미
스위스나 독일 등 유럽지역에서는 높아지고 있고 특히 독일에서는 크나이프
(Kneipp) 요법13)을 활용하고 있다. 이러한 삼림의 치유기능을 활용한 <치유의
10) 유기준(2009),「앞의 논문」, p.390
11) http//www. forest-therapy. jp
12) 일본의 65세 이상의 고령자 인구의 비율은 1995년에 14%를 넘었으며 2007년에 약 20%를 넘었고
2035년에는 30%를 넘게 될 것으로 추측된다.( 오사다 마사오(2007),「일본의 노인 심리학 연구 동
향」,한국심리학회 심포지엄 및 워크삽 p.64)
236 日本文化學報……第 42輯
숲>에 관한 관심과 연구가 우리나라에서도 이루어지고 있고 산림청에서는
2017년까지 54억이 넘는 예산을 투입해서 숲을 이용한 치유센터건립에 나설
계획이다14).
최근 자연 속에 몸을 두고 자연의 은총을 누리면서 자신의 자연치유력을 끌
어내는 삼림치료요법을 받고 있는 사람의 수가 증가하고 있고 또한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자연이나 삼
림 속에서의 생활을 통
해 인간 자신의 자연 치
유력을 높이는 의학요법
이 확립되고 있다.
이러한 삼림요법은 일
본에서는 삼림테라피(森
林セラピー)라
그
운영은
불리는데
삼림테라피
기지(森林セラピー基地)
및 삼림테라피 로드(森
林セラピーRoad)의 두 가
지 형태로 구분하여 추
진하고 있다. 삼림테리피
기지란 삼림치유의 효과
<그림- 1> 삼림테라피사업의 협력과 제휴도
(http//www. forest-therapy. jp)
가 삼림의학적인 면에서
전문가에 의하여 검증되
고 관련시설 등 자연, 사회조건이 일정 수준으로 정비된 지역이다. 이들 삼림
테라피 기지(森林セラピー基地)에서는 지역의 특색에 맞는 운동요법, 식사요법,
작업요법, 방향요법에서 기공법, 자립훈련법, 카운슬링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13) 크나이프 요법은 120여 년 전 독일 뮌헨 인근의 뵈리스호펜 마을의 가톨릭 사제였던 세바스찬크
나이프(F.S.Kneipp, 1821-1897)신부에 의해 고안된 자연요법으로 냉수욕에 초점을 맞춘 물 요법을
중심으로 산림산책을 하는 운동요법, 영향균형을 맞추는 음식요법, 허브나 약초 등을 이용한 요리
법 및 입욕법, 그리고 심신과 자연의 조화를 도모하는 조화요법 등으로 구성된 자연요법이다
(유이화(2009), 「선진국의 삼림치유효과 활용사례 1」,『숲과 건강』, 2009.3.)
14) 삼림청, 국립산림과학원, 사)삼림치유포럼에서는 <숲, 건강, 그리고 행복>이라는 주제로 숲의 건
증진 및 질병치유효과에 관한 국제심포지엄을 개최하였다(2008. 10.16).
김기원(2001),「산림요양센타 모델을 위한 기초연구」, 『산림과학』, 제13권 p.p 63-75
이우충(2008),『삼림욕』, 김영사
전영우(2001),「녹색관광과 숲 문화체험사업을 통한 산촌활성화 방안모색」, 『산림과학』 제13권
p.p 5-18
http//www.forest.go.kr
일본의 삼림자원 활용전략에 관한 연구 ··············································· 兪 起 濬․池 鎭 浩…237
준비해놓고 개인의 체력이나 기호에 맞춰 <마음과 신체의 건강 만들기>프로
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삼림테라피 로드(森林セラピーRoad)란, 워킹로드라고도
불리고 20분 정도의 보행이 가능한(연장 가능) 지형이나 풍경 등을 고려하여
만든 복합적인 산책로이다. 모두 전문가에 의하여 과학적 효과의 검증을 통해
삼림테라피 실행위원회가 인정 곳이고 의료 보건 기관 등과의 제휴를 통하여
각종 지원도 받고 있다.15)
일본전역에서 이러한 삼림의 효과를 건강증진과 재활치유에 활용함으로서 삼
림정비는 물론 농산촌 지역사회에서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도모할 목적으로
“삼림테라피 종합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본 사업은 2004년 초반부터 “삼
림테라피연구회” 발족을 시작으로 다수의 기업과 대학, 삼림종합연구소 등이
참여하여 삼림이 가진 테라피 효과의 증명 및 응용연구 프로젝트이다.16) 국민
들의 건강증진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는 일본의 삼림테라피 사업은 삼림테라
피위원회, 임야청(林野庁), NPO법인, 일본위생학회 등이 협력과 제휴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다.<그림-1>
이러한 배경 속에서 미나미사쯔마(南さつま)지역에서는 의료관계자와 제휴를
통한 삼림을 활용한 테라피 프로그램을 자체적으로 개발하였다. 자연이나 삼
림 속에서 운동요법이나 삼림욕 등을 통하여 자연치유력을 최대한 활용하는
의료, 복지산업 프로그램이다. 그 프로그램의 내용과 운영전략은 다음과 같
다.17)
2-2-1 삼림테라피 프로그램의 내용과 운영전략
미나미사쯔마(南さつま)지역에서의 삼림테라피 프로그램 개발은 모든 세대의
사람과 여러 신체기능을 가진 사람이 건강 만들기 등에 이용할 수 있도록 대
상자에 따라 차별화된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도록 하였다. 프로그램은 4가
지 유형이 있다.
첫째, 일반 보양객 대상 프로그램 : 평소의 건강 체크로 시작되고 그 심신의
상태에 따라 생활습관병 예방, 레크리에이션, 카운슬링 등의 프로그램을 설정
한다. 생활습관병 예방에서는 단거리부터 장거리까지 복수산책 코스에서 보행
을 하고 카운슬링에서는 평소의 고민이나 문제를 삼림환경 속에서 생활하면서
경감, 완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둘째, 고령자 프로그램 : 삼림환경을 이용
15) http/www. forest-therapy. jp
16) 지경배(2006),『강원도 농촌어메니티 자원실태 및 활용방안연구』, 강원발전연구원, p.70
17) 特定非營利活動法人エコ·リンク·アソシエーション(2007),『森林體驗型敎育プログラム開発による新たなパー
トナーシップ事業事業報告書』p.p 2-7
238 日本文化學報……第 42輯
한 보행 리허빌리테이션(전도예방), 회상법, 카운슬링, 공작 등을 하고 예방의
료 및 리허빌리테이션적인 요소를 중심으로 한다. 특히 인지증 증상을 가진
대상자의 경우에는 삼림환경 속에 몸을 맡기고 산책하면서 관심을 바깥세상으
로 향하는 회상법의 수법도 곁들여 치료를 한다. 셋째, 장애자 대상 프로그램
: 보행·감각 리허빌리테이션(주로 신체·고차 뇌기능 장애자 대상), 카운슬링,
공작이나 산책 등의 교육활동을 한다. 넷째, 교육자 대상 프로그램 : 학교교육
이나 유아교육 분야에서 오감 발달 촉진 및 커뮤니케이션 능력의 향상을 도모
하기 위하여 특용임산물의 수확이나 가공, 삼림 보전 경작업, 운동, 공작, 음악,
게임 등 각종 프로그램을 행한다.
프로그램은 다음의 8항목을 주된 활동 단위 프로그램으로 하고 이들의 편성
에 의해 개개의 대상자 프로그램을 확정한다.
첫째, 산책 : 삼림 내에서 산책(삼림욕)을 하며 심신의 스트레스를 완화하고
자율신경을 조절한다. 또한 보행 리허빌리테이션, 전도예방 트레이닝, 비만 예
방도 겸한다. 둘째, 작업 : 작업요법적인 내용을 중심으로 한다. 복수의 인원이
동시에 활동할 수 있도록 삼림환경과 일정면적을 확보한다. 셋째, 카운슬링 :
숲 속을 걸으면서 혹은 숲 속의 휴게장소에서 카운슬링이나 카운슬링교육을
한다. 넷째, 놀이와 공작 : 특히 수학여행 등을 대상으로 하고 삼림 속에서 놀
이를 통하여 건전한 성장발달을 촉진한다. 또 환경교육도 겸한다. 다섯째, 휴양
과 예방과 치료 : 삼림환경을 이용하여 정기적으로 일정시간의 휴양을 얻으면
서 자율신경을 조절한다. 임상별 환경을 다르게 한다. 호흡법이나 자율훈련법
과 아로마 테라피도 포함한다. 장기에 걸친 질환치료나 수술 후의 요양 등에
도 응용한다. 여섯째, 예술과 조형 : 삼림활동 속에서 그림이나 사진촬영 또는
조형이나 콜라주 등의 예술에 몰두하고 내적 에너지를 분출시킨다. 일곱째, 식
사요법 : 일상 식생활 체크와 식사지도를 하고 신선한 각지의 향토식재료에
의한 식사를 즐긴다. 여덟 번째, 건강 체크 : 비만도나 평소 생활습관의 체크
또는 삼림테라피 전후의 혈압과 맥박 측정이나 기분평가 등도 한다.
미나미사쯔마(南さつま)지역에서는 이러한 프로그램의 실행 담당자로서 삼림인
스트럭터(森林インストラクタ―, 삼림지도원)가 중심이 되고 의료 복지관계자와의
제휴를 도모하면서 구체적인 요구에 응하고 그것에 따른 프로그램 입안과 실
행을 한다. 이러한 삼림인스트럭터(森林インストラクタ―)제도는 임야청(林野庁)에
서 1992년부터 인증된 자격으로 자연체험의 장이나 해설분야의 특성을 고려하
여 각 분야의 전문성을 살린 인력양성을 위한 것이다.18) 그러나 다른 지역의
NPO19)에서는 아로마테라피 등 삼림의학 전반의 지식을 함양시킬 수 있는 가
18) 김상윤(2001), 「앞의 논문」, p.52
일본의 삼림자원 활용전략에 관한 연구 ··············································· 兪 起 濬․池 鎭 浩…239
이드 북 형태의 책을 발간하고20) 삼림테라피가이드(森林セラピーガイド)21)와 삼
림테라피스트(森林セラピスト)22)를 양성하고 있고 삼림테라피 검정시험23)을 통하
여 그 자질을 더욱 더 향상시키고 있는 등 보다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접근을
하고 있는 곳도 있다.
실시 계획 진행 방법은 첫째, 평가단계 : 대상자의 성별, 연령, 특징(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일상생활동작, 삼림 활동 경험 유무, 성욕, 알레르기, 기호, 기
타에 관해서 미리 평가를 하고 보다 원활히 효과적인 삼림요법 프로그램의 기
반을 준비한다. 둘째, 목표 수립단계 : 삼림요법에서 지향하는 목표(단기, 중기,
장기)를 만든다. 그때 전문의, 간호사, 작업요법사, 이학요법사, 보건사, 영양사,
카운슬러, 사회복지사 등의 각 의료, 복지전문직과 연계를 하고 최선의 목표를
정한다. 셋째, 구체적인 방법 구상단계 : 구체적인 내용으로서 작업, 산책, 레크
리에이션, 리허빌리테이션, 휴양, 요양, 기분전환, 아로마테라피, 조형 활동, 카
운슬링, 보육, 또는 이들의 혼합 프로그램 등의 방법으로 목표를 세운다. 넷째.
실행 후 평가 단계 : 프로그램 실행 후에는 반드시 평가와 반성을 하고 구체
적으로 깨달은 혹은 깨닫지 못한 효과나 프로그램의 내용, 실효체제, 설정 환
경 등 다음에의 과제를 모아 대상자에게 제시한다.
치유의 프로그램은 6가지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첫째, 자연요법체험 프로
그램 : 카운슬링, 의사소통, 온천요법, 호흡법, 삼림요법, 정신치료, 운동요법,
기공법 등을 실시한다. 둘째, 식물요법 프로그램 : 약초, 약나무, 아로마테라피,
한방, 식물요법 등을 실시한다. 셋째, 체험요법 : 작업요법, 치유의 숲만들기 연
구, 삼림레크레이션, 도예체험, 그림그리기, 사진, 자연체험, 유아교육체험, 원예
체험, 승마체험 등을 실시한다. 넷째, 식이요법 : 요리, 약초와 지역특산 식자재
를 활용한 요리, 가공품, 산나물, 허브식용 등을 실시한다. 다섯째, 관찰요법 :
자연과학, 자연관찰, 야생초관찰, 식물관찰 등을 실시한다. 여섯째, 표현문화요
법 : 역사, 민화, 생활문화, 그림그리기, 음악, 사진, 도예, 등을 실시한다.
19) 特定非營利活動法人 森林セラピー ソサイエティ (http/www.fo-society.jp)
20) 平野秀樹, 宮崎良文, 香川隆英編(2009),『森林セラピー』 - 森林セラピスト(森林健康指導士)養成 検定
テキスト-, 朝日新聞出版
21) 삼림을 방문하는 이용자에게 삼림욕 효과가 오르도록 산책이나 운동을 현지에서 안내하는 자이
다. 삼림에 관한 환경 과학적 지식뿐만 아니라 삼림의 치유효과에 관한 생리학적인 식견을 가진
자로 삼림이용자에게 안전하고 편안한 삼림산책과 보행, 레크리에이션 활동 등을 통하여 올바른
삼림테라피 방법을 조언해 준다. (http/www.fo-society.jp/therapist)
22) 삼림테라피가이드의 식견에 더하여 삼림을 방문하는 이용자에게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유지 증진시
키기 위한 적절한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효과적인 테라피 활동을 지도할 수 있는 자이다. 삼림건강
과학과 건강심리학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과 고도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지닌 자로 이용자에게
보양프로그램을 제공해주며 삼림테라피의 실천을 조언해 준다. (http/www.fo-society.jp/therapist)
23) 平成21年(2009년)부터 삼림테라피 검정시험 1급과 2급을 실시하고 있다.(http/www.fo-society.jp)
240 日本文化學報……第 42輯
이러한 프로그램 실행 후에는 실행계획의 진행과정에서 볼 수 있듯이 반드시
평가와 반성을 하고 구체적으로 깨달은 혹은 깨닫지 못한 효과나 프로그램의
내용과 삼림 테라피의 효과로서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일상적에서 변화 등을
기록하여 대상자에게 전달한다.
3.삼림자원의 활용을 위한 정보발신 전략
삼림자원의 활용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삼림체험프로그램이나 체험 가
능한 삼림이나 지역에 관한 정보의 수집을 편리하게 하여야하고 지역에 관한
정보의 발신전략을 다양하고 적극적으로 하여야한다.
이를 위하여 미나미사쯔마(南さつま)지역에서는 보다 많은 도시주민 들이 관심
을 갖도록 인터넷을 이용하는 것은 물론 도시의 NPO와 여행회사 등 도시주민
과 오랜 관계를 이어온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정보의 발신을 꽤하고 있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세 가지의 전략을 시행하고 있다. 첫째, 자립판
촉형정보발신전략으로 지역의 매력을 한층 더 많이 효율적으로 발신하기 위하
여 지역이미지 창출 작업과 정보수집과 발신을 위한 전문 집단을 지역 내에
조직 하였다. 지역을 홍보하기 위해서는 <지역의 외부>을 많이 의식하여야 하
는데 무엇보다 먼저 <지역의 내부>에 그 만큼의 소재가 없으면 지역의 매력
을 알릴수가 없다. 지역에 사는 사람이 그 매력을 최대한 꺼내는 것이 정보
발신의 매력으로 이어지고 지역을 홍보할 수 있는 기본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매스컴 활용형 정보발신전략으로 매스컴에 채택 받을 수 있도록 “화제 만들
기”를 하였다. 이를 위하여 가고시마 현내에서 처음으로 “장애자 승마” 지도자
육성과 자원봉사 육성사업을 실시하였고 삼림을 활용한 “음악하이킹”에 의한
국제교류 사업도 실시하였다. 이러한 화제 만들기 만이 아니라 정보를 정기적
으로 매스컴에 알림으로서 정보를 공유하고 평소 활동하고 있는 지역이고 단
체인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매스컴에 DM 발송과 정보제공 등을 실시하였다.
셋째, 풀뿌리 전개형 정보발신전략으로 수학여행이나 단괴세대24)를 목표로 관
계있는 도시부의 NPO나 여행회사 등과 연계하여 내방객을 유치하였다. 또한
다양한 지역 연합을 통하여 관계자들에게 미나미사쯔마(南さつま)지역의 지명도
를 높이는 노력을 하고 있다.
24) 1947년부터 1949년 무렵의 베이비붐 시대에 태어난 세대
일본의 삼림자원 활용전략에 관한 연구 ··············································· 兪 起 濬․池 鎭 浩…241
4. 삼림자원 활용의 사업화를 위한 전략
미나미사쯔마(南さつま)지역에서는 이상에서 고찰한 프로그램의 사업화를 위한
단․중․장기 전략을 수립하였다. 사업화를 위한 전략으로 5개 사업, 12개 시
책을 마련하고 사업 각각의 체제와 조직을 정비하고 이를 통합적으로 조정하
는 추진체제를 구축하였다. 사업명과 세부시책의 내용은 <표-3>과 같다.25)
<표-3>사업화를 위한 세부시책과 조직
사
업
시책
체제 ․ 조직
명
1.
년
① 지역이 지향하는「아름다운 산」의
아름
형태 명확화
②「아름다운 산 만들기」위한 태세정
다운
비․나무 자르기 응원단 만들기
산
내
•임업의 산으로서 태세정비
일 정
단 중
기
기
장
기
각시정촌, 삼림조합, 민간
각시정촌, 삼림조합
만들
기
•교류의 산으로서 태세정비
사업
삼림조합, 민간, 삼림자원
봉사, NPO
① 나무이용에 대한 생각 및 이해
• 교육계본형이벤트 학습강좌의 개최
각시정촌, 삼림조합 민간
• 소비자요구에 대응할 수 있는 목재
삼림조합,민간(제재업자,
유통의 계획세우기
② 나무 사용․문화의 재발견과 새로
설계, 공무점 등)
운 스타일의 창조에 의한 나무이용
2.
나무
이용
촉진
• 가까운 생활 속에서의 (나무사용)
촉진
삼림조합,
민간(제재업자,
설계,공무점, 숙박시설 등)
촉진
•지역과 깊게 가까이하는 나무사용의
시정촌
삼림조합, 민간 (제대업자,
사업
촉진~본고장의 목재로 집 만들기
•본고장의 재료를 이용한 지역경관의
설계, 공무점 등) 시정촌
시정촌, 삼림조합,
민간
수경~공공사인계획, 마치나미 만들기
(제대업자,설계,공무점 등)
③새로운 관점에서의 나무 이용 촉진
•지역의 목재, 목재품 PR사업
•삼림인증제도의 인증취득
삼림조합, 민간 (제대업자,
설계, 공무점 등)
삼림조합 ․ 민간
25)特定非營利活動法人エコ·リンク·アソシエーション(2007),『森林體驗型敎育プログラム開発による新たなパート
ナーシップ事業事業報告書』p.32
242 日本文化學報……第 42輯
시정촌,삼림조합,민간(제재
•목질 바이오매스 이용의 검토
업자, 건설업자, 에너지-기
술자 등) 학식경험자 등
3.
①산촌문화의 달인․명인 찾기
NPO, 시정촌
②산촌문화의 체험프로그램 만들기
NPO, 시정촌, 민간
③산촌 문화를 전하는 사람 만들기
NPO, 시정촌, 민간
산촌
문화
발신
사업
① 지역이미지 만들기
•장래적인 CI사업으로의 활동
4.
광역단시정촌, NPO
② 정보발신수단검토
유객
•홈페이지의 강화․효율화
광역단시정촌 ,NPO
홍보
•팸플릿 정리통합
광역단시정촌, NPO
•광역체험관광 팸플릿 작성
광역단시정촌, NPO
사업
•도시NPO와의 네트워크화에 의한 정
보발신
NPO
① 체험형 관광이용 상품개발
5.
주변
체제
체험
촉진
사업
◎
•지역자원의 발견․발굴 평가
NPO, 시정촌
•체험프로그램 만들기
NPO, 시정촌
②광역에서의 안내유도․정보시스템의
정리
•공공사인
시정촌
•광역에서의 관광교통거점의 정비
시정촌
•지역 내를 회유하는 계획 세우기
광역단시정촌, NPO
•배리어프리26)
시정촌, 민간
유입체제 정비
① 기존 관광관련 관계자의 제휴 강화
민간사업자, 단체
•광역체험형 관광진흥 추진조직 설립
민간사업자, 단체
추진
체제
의
구축
첫째는, 아름다운 산 만들기 사업이다. 아름다운 산의 형태를 명확히 하는 것
과 동시에 산을 임업의 산과 교류의 산으로 형태를 정비하는 것이다. 임업의
산이란 종래의 목재생산기지로서의 의미이고 교류의 산은 삼림자원의 새로운
26) 신체장애자나 고령자가 생활하는데 지장이 없도록 상품을 만들거나 건물을 설계하는 것
일본의 삼림자원 활용전략에 관한 연구 ··············································· 兪 起 濬․池 鎭 浩…243
활용 즉 환경메세지성이 강한 상품을 만들어 산촌지역과 도시와의 교류를 할
수 있는 장소로 정비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아름다운 산 만들기를 위
하여 민간중심으로 삼림자원봉사연락회를 발촉하였다. 이 조직에서는 삼림자
원봉사와 현존 산의 손질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 산주인과 사이에서 조정의
역할을 하고 또한 삼림욕 등 삼림을 체험하기 위하여 필요한 보도의 정비나
삼림에 관한 인터프리터의 육성 등 새로운 요구에 대응하기 위한 사업에 적극
적,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삼림자원봉사 연락회는 삼림조합과 함께 지역의 아
름다운 산 만들기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둘째, 나무 이용촉진 사업이다. 나무이용촉진사업의 추진은 삼림조합이나, 제
재업자, 설계나 공무점 등, 각각의 전문가 그룹이 중심이 되어 의견을 교환하
고 그것을 네트워크 하여 지역전체의 나무이용촉진을 위한 구체적인 사업에
대해서도 검토한다. 이러한 전문가에 의한 사업적 검토와 일반시민을 대상으
로 한 나무이용촉진 이벤트와 학습강좌를 개최하고 소비자의 요구 등을 파악
하고 상호 정보교환을 도모한다. 또 목질바이오매스 등의 이용도 지역내외의
임업관계자 및 학계관계자와 제휴하면서 검토한다.
셋째, 산촌문화 발신 사업이다. 도시와 산간부의 교류를 촉진하는 정보발신사
업이다. 산촌문화의 실상을 잘 알고 있는 이들을 찾고 또한 산촌을 찾아오는
방문객들에게 실질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업이다. 이를
위하여 새로운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고 자연과 공생하는 새로운 라이프스타일
(슬로우 라이프)을 실현가능하도록 지원하는 코디네이터를 NOP와 시정촌(市
町村), 민간에 의하여 조직하였다.
넷째, 관광객홍보사업이다. 미나미사쯔마(南さつま)지역의 이미지를 만들고 효
과적인 정보발신을 위한 여러 수단과 방법들을 검토하고 만들고 있다.
다섯째, 주변체제체험촉진사업이다. 체험형 관광 상품을 만들고 지역으로 오
는 사람들을 효율적으로 안내하기 위한 시스템을 정비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업은 각각 전문분야에서의 참여와 협조가 이루어지고 있다. 민간이
중심이 되고 있지만 삼림조합 등의 전문가 집단에서는 종래의 목재생산을 목
적으로 한 사업의 추진과 함께 일반 시민이 산에 들어갈 때 안내역할을 하며,
목재 소비를 촉진하는 목재 유통 본연의 모습과 임업을 유지하는 산촌의 생활
문화 스타일을 적극적으로 알리는 등의 역할을 한다.
또한 이러한 다섯 개의 사업을 종합적으로 관리하고 삼림자원 활용의 사업화
를 위한 추진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사업화를 위한 추진체제는 기존의 관광관
련 관계자와 제휴를 강화하며 민간사업자와 단체들의 참여가 이루어지는데 이
는 서로 제휴를 깊게 하면서 장래 사업의 계획과 역할의 분담, 이견의 조정 등
을 위하여 필요하다.
244 日本文化學報……第 42輯
이러한 제반 사업의 운영을 첫째, 단기(차년도~2,3년 이내) : 조기에 착수할
필요가 있고 효과가 2~3년 이내에 나올 수 있는 것. 비교적 착수하기 쉽고
빠르면 빠를수록 효과적인 것. 둘째, 중기(5년 이내) : 활동하고 나서 5~6년
후에 효과가 나오는 것. 활동까지는 해결해야만 하는 과제가 있고 5년 후 쯤
에 틀이 잡히는 것. 셋째, 장기(5~10년) : 활동을 하고나서 10년 정도에 효과
가 나오는 것으로 단․중․장기적으로 차별화하였다.
이러한 단․중․장기적인 사업의 시행에 있어서 사업비가 장애가 되지만 미
나미사쯔마(南さつま)지역에서는 지역의 NPO가 중심이 되어 산․관․민이 협력
하여 추진해 나가려 하고 있다. 전략의 전개 방법은 지역자원의 장래에의 변
동요인에 대한 객관적 분석이 빠트리지 않는 요소이다. 또한 무엇을 하고 싶
은가 라는 전략 목표도 여러 가지의 목표가 복잡하게 교착하는 것에서 반드시
중점 목표를 정해서 단계적으로 달성하는 것은 아니고 각 목표 간의 조화를
중요시 하고 있다.
5.맺음말
일본에서 삼림은 단순히 목재와 그와 관련된 제품을 생산하는 자원의 공급처
로서의 역할 뿐 만아니라 삼림체험형관광, 삼림체험교육프로그램, 삼림테라피
(森林セラピー) 프로그램 등 환경 메시지성이 있는 새로운 상품을 운영하면서
산촌지역의 활성화를 도모할 수 있는 장소로도 활용하고 있다.
이러한 정책은 삼림환경교육이라는 새로운 교육활동을 통하여 삼림에 대한
포괄적이고 종합적인 인식을 할 수 있게 하는 계기를 만들고, 삼림을 인간의
건강증진과 질병치유에 활용하여 국민의 건강증진 복지정책의 실현 공간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삼림테라피와 관련하여 의학 전반의 지식을 함양시킬 수 있
는 가이드 북 형태의 책을 발간하고 삼림테라피가이드(森林セラピーガイド)와 삼
림테라피스트(森林セラーピスト)를 양성하고 있고 또한 삼림테라피 검정시험을
통하여 그 자질을 더욱 더 향상시키고 있는 등, 보다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접
근을 하고 있는 곳도 있다. 이러한 정책의 운영은 국가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지방자치단체와 지역의 NPO 그리고 민간 등이 중심이 되어 적극적이고 체계
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미나미사쯔마(南さつま)지역에서의 새로운 삼림활용전략은 삼림체험형종합학습
프로그램과 삼림테라피(森林セラピーForest Therapy) 프로그램의 운영이다. 이
러한 프로그램의 실행을 위하여 전문가를 양성하고 삼림을 찾는 개인의 성격
과 대상자에 따라 차별화되게 운영하고 있다. 또한 삼림체험 이용을 촉진하기
일본의 삼림자원 활용전략에 관한 연구 ··············································· 兪 起 濬․池 鎭 浩…245
위하여 인터넷은 물론 도시의 NPO와 여행사 등 도시주민과의 오랜 관계를 이
어온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지역에 관한 다양한 정보 발신 전략을 취하고 있
다. 삼림자원 활용의 사업화를 위하여 시정촌(市町村)과 관련조합, 민간, 그리
고 NPO 등이 연계되는 추진체제의 구축과 단․중․장기계획을 수립하는 등
체계적이고 계획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
이러한 중앙정부만이 중심이 되지 않고 광역지자체와 시정촌(市町村), 마을단
위에서의 민간과 관련조직 그리고 NPO 등의 자발적 참여와 지원으로 이루어
지고 있는 미나미사쯔마(南さつま)지역에서의 삼림활용전략은 우리에게 주는 시
사점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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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 日本文化學報……第 42輯
要 旨
日本での森林に対する認識は、単に木材とそれに関わる製品を生産する資源の供給源として
の役割だけでなく、森林体験型観光、森林体験教育プログラム、森林セラピープログラムな
ど、環境メッセージ性のある新しいプログラムが営まれる場所として開発されている。
このような政策は森林環境教育という新しい教育活動を通じて、森林に対する包括的で総合
的な認識のきっかけをつくり、森林を健康増進と疾病の治癒に生かして、国民の健康増進福祉
政策の実現空間としての活用と繋がる。
本稿の研究地域での森林活用戦略は、森林体験型総合教育プログラムと森林セラピープロ
グラムをもって運営されているが、個人の性格と被体験者の特性を考慮し、多様なプログラムを
営んでいる。また、森林体験の利用を促進するために、地域に関する多くの情報の発信戦略
をとっており、市町村と関連組合、民間、NPOなどが連繋する推進体制の構築と、短·中·長
期計画を立てるなど、体系的な努力を傾けている。
キ ワ ド:森林活用戦略、森林セラピー、森林環境教育、森林セラーピスト、
森林体験型教育、森林体験型観光
투
고 : 2009. 5. 31
1차 심사 : 2009. 6. 13
2차 심사 : 2009. 6. 27
다다노 마쿠즈의
獨考 에 나타난
서양지식
林 泰 弘*1)
(e-mail : [email protected])
目 次
1. 머리말
2. 정치적인 문제
2.1 국왕
2.2 수행원
2.3 국가적인 전략
2.4 여성의 사회활동
3. 경제적인 문제
3.1 공무원과 상업
3.2 무역
3.3 상도덕
4. 문화적인 문제
4.1 결혼
4.2 복지시설
4.3 건물과 도박
4.4 하인
4.5 학문연구
4.6 시간관념
5. 맺음말
1. 머리말
다다노 마쿠즈(只野真葛, 1763-1825)는 에도시대 말엽에 활동한 사상가이자 문학가,
저술가로 옛날이야기(昔ばなし) (1811-1812),
(独考) (1817),
동북지방 이야기(奥州ばなし) ,
물가를 따라서(磯づたい) (1818),
저작이 있다. 이 글에서는 독고
1)를
크리스찬 고찰(キリシタン考)
독고
등의
중심으로 그 속에 나타난 서양지식을 살펴보고자
*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 동아시아 근대사상 전공
1) 鈴木よね子校訂, 只野真葛集 , 叢書江戸文庫30, 国書刊行会, 1994. 독고 는 Janet R.
Goodwin, Bettina Gramlich-Oka, Elizabeth A. Leicester, Yuki Terazawa, Anne Walthall
등이 영문으로 번역하여 “Solitary Thoughts: A Translation of Tadano Makuzu's Hitori
Kangae”라는 타이틀로 Monumenta Nipponica (56:1, 2001), 56:2, 2001)에 실었는데, 번역
에 이 자료도 참고하였다.
248 日本文化學報……第 42輯
한다.
마쿠즈는 센다이번(仙台藩)의 무사집안 출신으로, 번(藩)의 의사였던 구도 헤이스케
(工藤兵助, 1734-1800)의 장녀다. 헤이스케는 1783년에 『붉은 오랑캐 풍문 고찰(赤蝦
夷風説考)』이라는 서적을 집필하여 당시의 지식인이나 정치가들의 주목을 받았다. 특
히 헤이스케의 저서에 대해서는, 쇼군 도쿠가와 이에시게(徳川家重, 1711-1761)의 총애
를 받아 막부의 정책을 담당했던 다누마 오키쓰구(田沼意次, 1719-1788, 집권기간:
1767-1786)가 홋카이도 개발과 관련하여 관심을 가지기도 하였다.2) 그러나 다누마가
1786년에 실각하는 바람에 헤이스케는 막부사업에 발탁되지 못하고 다다노 집안도 그
후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붉은 오랑캐’는 지금의 홋카이도의 북방에 있는 캄차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가리킨
다. 이 지역은 18세기 후반에 러시아가 진출하여 러시아 영토가 되어 있었으므로 『붉은
오랑캐 풍문고찰』이라는 책의 내용은 결국 ‘러시아’에 관한 풍문을 정리한 것이다. 헤이
스케는 러시아와 홋카이도를 개발하고 러시아와 통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3)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다다노 마쿠즈의 사상에 대한 평가문제에 대해서 간단히 언
급하기로 한다. 다다노 마쿠즈는 아직 그 사상적인 위상이 정확히 평가되지 않은 인물이
라고 할 수 있다. 엄밀히 말한다면 현재 평가가 진행 중인 사상가다. 그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동시대에 마쿠즈의 글을 읽었던 교쿠테이 바킨(曲亭馬琴, 1767-1848)은 마쿠
즈가 한문도 잘 읽을 줄 모르고 근거 없이 너무 과격한 주장을 일삼는 인물로 보고, 마쿠
즈의 독고 출판 지원을 거부하였다.4)
이후 근대적인 학문의 시기로 들어와 마쿠즈는 수필가, 시인, 소설을 쓰지 않은 특이
한 여류문학가로서의 ‘잡문가’,5) 고독한 도전자,6) 여성해방의 선구자7) 등으로 평가 되었
다. 또 국학과 경세실학의 영향을 받은 사상가,8) 국학자이나 난학자인 사상가,9) 유교를
비판한 실학사상가,10) 효성이 지극한 사상가,11) 자신을 미화시키고 왜곡하였으며, 정신
2) 민두기 편저, 일본의 역사 , 지식산업사, 1976, p.156.
3) 아미노 요시히코, 이계황역, 일본사회의 역사(下) , 소화, 1997, p.159 참조.
4) 『독고』가 정식적으로 출판된 것은 근대시기 이후의 일이므로, 『독고』가 일본사회에
미친 사상적인 영향은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초록(『獨考抄錄』)이 1817년, 필
사본(초록본과 내용은 유사)이 1826년에 각각 필사된 것을 보면,(鈴木よねこ, 「解題」, 只野
真葛集 , 569쪽) 일부 지식인들에게는 『독고』의 존재와 내용이 알려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 鈴木よね子, 「只野真葛「奥州ばなし」―異界発見の一過程」, 都大論究 23, 1986.3, p.51.
6) 門玲子, 「只野真葛その文学と思想―孤独な挑戦者」, 江戸期おんな考 7, 桂文庫, 1996 참조.
7) 宮沢民子, 「幕藩制解体期における一女性の社会批判―只野真葛の「独考」を中心に」,
研究 423, 1975.8, p.17.
8) 鈴木よね子, 「「独考」試論―その方法と実学 国学の影響」,
등
歴史学
都大論究 通号24, 1987.3, p.85
다다노 마쿠즈의 獨考 에 나타난 서양지식 ··························································· 林 泰 弘…249
적으로 다소 불안하였던 여성12) 등 평가가 다양하였다. 또 마쿠즈의 독고 는 영문으로
도 번역되어13) 구미에서 영문 논문이 발표되기도 했다.14) 최근에는 마쿠즈의 마지막 문
장으로 알려진 「크리스찬 고찰」에 대한 논문도 발표되었다.15)
필자는 1994년에 벳쇼 코이치 논문을 번역하면서 마쿠즈 사상을 접했다. 벳쇼 고이치
는 마쿠즈를 실학자로 소개하면서 유교 비판가로 소개하였는데16) 필자는 후에 「에도시
대 한 여성지식인의 유교인식」이라는 글에서 마쿠즈의 사상을 유교비판의 측면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교적인 가르침을 자기 사상의 출발점으로 삼아, 새로운 현실에
그것을 대응시키고자 하는 측면이 강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그러한 사유방식에 따라 유
교를 새롭게 해석하고자 한 것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17)
또 「마쿠즈 사상의 형성과정」이란 글에서는 마쿠즈의 사상이 단지 인문학적인 기반만
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 신앙적인 바탕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불교에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던 마쿠즈는 세 차례에 걸친 종교적인 체험을 경험하였는데,
그러한 경험을 통하여 자신의 독특한 사상을 구축하였다고 지적한 것이다.18)
그 후에 집필한 「다다노 마쿠즈의 ‘천지간 박자’개념」에서는 독고 에 제시되고 있는
‘천지간 박자’개념을 검토하고 그것이 ‘시간’적인 개념, ‘시대’의 개념, 그리고 종교적인
개념을 포함한 것이며 나아가 ‘천지간의 박자론’이라고 할 만한 어떤 체계를 지향하는 것
이었다고 정리하였다.19) 물론 이러한 박자론은 하나의 완결된 사상으로, 깊이 있게 정리
9) 前田勉, 「只野真葛の思想―国学と蘭学との交錯, 日本文化論叢 (12), 2004.3 p.55, p.73참조.
10) 別所興一, 「只野真葛の貨幣經濟認識と儒教批判」, 自然と実学 2, 2002.3 참조.
11) 高橋恵, 「只野真葛の思想」, 年報日本思想史 創刊号, 2002.3, pp.46-47 참조.
12) 鈴木よね子, 「近世後期における主体と表現―只野真葛をめぐって」, 日本文学 , 1995.10, p.51;
鈴木よね子, 「反真葛論―「独考」1件をめぐって」, 日本文学 36-1, 1987.1, p.27 참조.
13) Janet R. Goodwin, Bettina Gramlich-Oka, Elizabeth A. Leicester, Yuki Terazawa,
Anne Walthall, “Solitary Thoughts: A Translation of Tadano Makuzu's Hitori Kangae”,
Monumenta Nipponica 56:1, 56:2, 2001
14) Bettina Gramlich-Oka(2001) “Tadano Makuzu and her Hitori kangae”, Monumenta
Nipponica 56
15) Bettina Gramlich-Oka, 'Kirishitan Ko by Tadano Makuzu : A late Tokugawa
Woman's Warnings', Bulletin of Portuguese-Japanese Studies, Vol8, Universidade
Nova de Lisboa., 2004.6
16) 앞의 주석에서 소개한 別所興一의 「只野真葛の貨幣經濟認識と儒教批判」임.
17) 임태홍, 에도시대 한 여성 지식인의 유교인식-다다노 마쿠즈(只野真葛)의 獨考 를 중
심으로- , 일본문화학부 39, 2008.11, p.309 참조.
18) 임태홍, 「마쿠즈 사상의 형성과정-그의 종교적 체험을 중심으로-」,
2009.1, pp.444-445 참조.
일본문화연구 29,
19) 임태홍, 「다다노 마쿠즈의 천지간 박자개념」, 동양철학연구 58, 2009.5.
250 日本文化學報……第 42輯
된 것은 아니었다.
마쿠즈 사상에 관한 이러한 필자의 분석 작업은 물론 필자가 가지고 있는 지식의 한계
때문이기도 할 것이나, 또 한편으로는 독고 가 분량에 있어서 매우 짧고, 독고」자체가
가지고 있는 사상적인 ‘빈약성’ 때문에, 즉 마쿠즈가 한문 문장을 전문적으로 다루지 못
한다는 점, 일본 사상 역시 심도 있게 검토하고 있지 않다는 점, 그리고 문학가적인 성향
이 강하다는 점 등으로 인한 ‘빈약성’ 때문에 충분히 깊이 있게 전개되지 못한 측면이 있
었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이번에는 마쿠즈의 독고 에 나타난 서양지식을 고찰하고자
한다. 독고』의 서양에 관한 정보는, 분량으로는 그렇게 많지 않으나, 정치나 경제의 문
제, 사회 관습이나 여성과 관련한 문제 등 다방면에 걸쳐 있다. 그 주된 내용을 주제별에
나누어서 소개하고 분석하여, 그러한 서양지식이 어떤 것인지를 정리, 고찰해보기로 한
다.
2. 정치적인 문제
2.1 국왕
마쿠즈는 러시아 국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러시아의 관습에는 부럽다고 생각되는 것이 있다. 그곳의 국왕은 일향종(一向
宗)의 교조와 같다. 사람의 시신을 거두는 절 같은 곳은 여기 저기 있지만, 모
두 같은 종파이기 때문에 서로 싸우는 일이 없다.20)
일향종은 정토진종(淨土眞宗)의 한 종파로, 15세기 말경에 무장봉기(一向一揆, 잇코
잇키)를 하여 20여 만 명의 무장집단으로, 교토 북쪽에 있는 가가지방(加賀國)을 장악하
고, 거의 1세기 동안 독립적인 자치정부를 형성하였다.21) 이 집단은 오다 노부나가가 일
본 통일을 위해서 정복전쟁을 전개하고 있던 1580년경, 노부나가 군대의 공격을 받고 그
세력이 약화되어 결국 멸망하였다. 이 교조를 법왕(法王) 또는 법주(法主)라고 하는데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오사카지역과 교토, 교토 이북의 광대한 지역을 통치하였다. 이 일
향종의 교조와 같다는 것은 정치적인 권위를 가지면서 동시에 종교적인 수장이라는 뜻
으로 볼 수 있다.
20) 只野真葛,
p.276.
独考 (鈴木よね子校訂,
只野真葛集 , 叢書江戸文庫30, 国書刊行会, 1994),
21) 무라카미 시게요시외, 최길성편역, 일본의 종교 , 1993, pp.108-109참조.
다다노 마쿠즈의 獨考 에 나타난 서양지식 ··························································· 林 泰 弘…251
러시아는 10세기 말(988년)에 그리스트교로 개종을 하였는데, 나중에 그리스트교는
러시아에서 국교로 발전되었다. 이 그리스트교를 러시아 정교(正敎)라고 하는데 15세기
중기에 비잔틴제국이 멸망하자, 러시아는 그리스트교의 정통 후계자로 자청하였다. 러시
아를 강국으로 이끈 계몽군주 표트르대제(1672-1725)는 서유럽에 가서 직접 근대적인
선진문화를 체험하는 가운데, 서양의 강국들이 교회를 국가에 예속시켜 운영하는 것을
보고 러시아 정교의 국교화, 세속화를 추진하였다.22) 이러한 정책으로 러시아의 최고 통
치자 차르는 국가원수로 3권을 장악하고, 러시아 정교의 수장까지 겸하게 되었다. 나아
가 절대자로서 차르는 ‘하늘에서는 하나뿐인 태양이 빛나고, 당에서는 러시아의 차르가
빛난다.’고 하는 반신 반인적(半神半人)인 위치까지 추앙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사정이
마쿠즈에게 전해진 것이다.23)
마쿠즈는 또 인용문에서 또 러시아에는 하나의 종파만 있어서 서로 싸우지 않는다고
하였다. 일본은 독고 를 집필하던 1817년 당시 유교가 관학화되어 있었으며, 정토진종,
일련정종 등 다양한 불교세력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또 한편으로는 서구에서 전해진 천
주교세력도 있었고, 내부적으로는 고유의 신도도 있었다. 다양한 종교 세력이 서로 갈등
을 일으키며 공존하고 있는 현실을 염두에 두고 이러한 러시아의 사정을 소개한 것이다.
2.2 수행원
무사집안의 출신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무사계급의 상황을 항상 안타까워했던 마
쿠즈는 러시아 정치인의 행차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하기도 했다.
(러시아에서 온) 아담 이야기로는, 일본에서 (높은 사람은) 수행원이 많이 따
른다고 말하면, 러시아 사람들은 그것을 거짓이라고 생각하고 믿지 않을 거라
고 한다.24)
국왕에게는 그 나라 사람들이 물건을 바치려 한다고 들었다. 여러 훌륭한 관
리들도 수행원을 데리고 다니지 않고, 국왕만 다섯 명 정도의 수행원을 데리
고 다닐 뿐이다. 그러면서도 마음대로 시가지를 걸어 다닌다고 한다.25)
존경받는 국왕에 대한 이야기와 그렇기 때문에 수행원이 적어도 홀가분하게 사람들
사이를 걸어 다닐 수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쇼군의 경우 행차를 하면 수많
22) 석영중,
러시아 정교 - 역사, 신학, 예술 , 고려대학교출판부, 2005, p.112 참조.
23) 김학준,
러시아사 , 대한교과서 주식회사, 2005, pp.93-96 참조.
24) 只野真葛,
独考 , p.276. 인용문의 ( )는 필자의 주석임. 이하 같음.
25) 只野真葛,
独考 , p.276.
252 日本文化學報……第 42輯
은 수행원이 따른다. 2대 쇼균 히데타다(徳川秀忠, 1597-1632)는 닛고(日光)에 행차하
는 데 5만 여명의 하인을 데리고 간 적이 있다.26)
또 당시 에도시대에는 각지의 영주들이 에도에 가서 교대로 근무를 하는 참근 교대(參
勤交代)제도가 있었는데, 이때 영주들이 이동할 때는 서로 경쟁하듯 수 백명, 수 천명의
수행원들을 데리고 이동하였다. 때문에 필요이상의 막대한 경비를 지출하고 있었다. 마
쿠즈 자신이 센다이번 영주의 부인을 직접 모시기도하고, 또 자신의 부친이나 신랑이 영
주를 모시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27) 그 폐해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간소한
러시아 관리들의 행차는 마쿠즈의 주의를 끌었던 것 같다.
2.3 국가적인 전략
마쿠즈는 또 일본인들의 시야가 너무 짧은 것을 한탄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우리나라가 하는 일을 천박하다고 한탄하는 이유는, 책을 펴고 중국이나 일본
의 옛날부터 있었던 일을 단지 알기만 하면 스스로 지식인이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놓아버리고, 국가 전체를 되돌아보자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다. (중략) 문자를 옆으로 쓰는 나라가 하는 것을 배워서, 어떤 뜻을 이어가며
국가 전체를 잘 되돌아보아, 외국의 시선에 부끄럽지 않은 것을 꾀하고자 생
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좋을 텐데.28)
문자를 옆으로 쓰는 나라는 마쿠즈의 경우 대개 러시아를 지칭하지만, 서구의 국가들
도 포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들 국가를 배워서 국가 전체를 되돌아보는 정책을 펼 것
을 주문하고 있다. 그들 서구 나라는 그렇게 한다는 뜻이다. 또 이러한 언급을 하기도 하
였다.
옛날의 말이 세상에 퍼져 알려지게 된 것도, 옛날의 말을 좋아하는 지식인들
이 생각한 바를 버리지 않고 차차로 그 생각한 바를 덧붙여왔기 때문에 훌륭
하게 되지 않았겠는가? 좋은 일을 버리지 않고 계속해서 덧붙여 가면, 아주
멋진 것이 된다. 다른 나라들이 하고 있는 것을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지
마라. 많은 국가들 전체를 잘 알아야 확고한 정치가 이루어질 것이다.29)
26) 모로 미야, 허유영 역, 에도일본 , 일빛, 1990, p232.
27)門玲子,「只野真葛小傳」, p.1, p.13,
http://www.japanpen.or.jp/e-bungeikan/study/kadoreiko.html,검색일: 2009.5.27.
28) 只野真葛,
独考 , p.275.
29) 只野真葛,
独考 , p.272.
다다노 마쿠즈의 獨考 에 나타난 서양지식 ··························································· 林 泰 弘…253
이 글에 대해서 교쿠테이 바킨은 비판적인 시각에서 “마쿠즈의 아버지 구도 헤이스케
는 난학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마쿠즈도 어려서부터 가끔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어서,
경솔하게 오랑캐가 행한 바를 칭찬하고 이러한 논의를 하였을 것이다”30)라고 하였다.
마쿠즈는 이러한 바킨의 견해와는 달리, 많은 국가들 모두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고
하고 그들 국가들이 하고 있는 것을 배우자고 하였다. 러시아가 급속히 발전할 수 있었
던 것은 서구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기 때문이었다. 18세기 초 러시아는 프랑스,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와 함께 유럽의 5대 강국으로 급속히 성장하였다. 특히 로마
노프 왕조의 계몽군주들이 추진한 서양화 노력으로 서유럽의 선진문물을 도입하고 정치,
교육, 산업, 제도 등 각 방면에서 근대국가체제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크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31) 마쿠즈는 어렴풋이 그러한 사실을 알고 그것을 권장하고자 하였던 것
이다.
2.4 여성의 사회활동
마쿠즈는 여성의 사회활동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삼가 언급하기에 황공스러우나 아마테라스 신은 여성신이다. 또 오키나가다라
시(신공황후 - 필자)신도 여성 신으로, 외국을 삼가 복종시키셨다. 시대를 내
려가 무라시키부(紫式部)가 멋지게 그려낸 히카루 겐지 이야기보다 훌륭한 글
은 없었다. 서양에서 전해진 해부에 관한 책을 보면 여자이면서도 해부를 하
는 모습이 있었다. 그렇다면 비록 여자일지라도 어찌 큰 뜻을 품을 수 없을
것인가?32)
태양신 아마테라스 신은 천황가의 조상신으로 일본의 기기신화에 나오는 여신이다. 신
공황후는 일본서기 에 신라를 정벌했다고 나오는 여성으로 가공의 인물이다. 무라시키
부는 겐지모노가타리 를 지은 여성 작가다. 이들의 활동이 있었는데, 왜 일본에서 여성
이 큰 뜻을 품을 수 없는가 묻고 있는 것이다.
이 문장은 해체신서(解体新書) (1774)에 그려진 여성을 보고 그것을 소개한 것이니
러시아의 여성이야기는 아니다. 여성의 활동에 비교적 자유스러운 유럽의 여성에 대해서
소개한 것이다. 다만 유럽 여성에 대한 이야기는 더 상세히 소개되어 있지 않다.
마쿠즈는 ‘해부를 하는 전문가’를 보며, 여성의 큰 뜻을 이야기 했는데 그가 자신의 희
30) 只野真葛, 独考 , p.272; Janet R. Goodwin 등, “Solitary Thoughts: A Translation of
Tadano Makuzu's Hitori Kangae”, Monumenta Nipponica 56:1, p.37의 18번 주에 논자를
바킨으로 본 것에 따름.
31) 차하순,
32) 只野真葛,
서양사총론 , 탐구당, 1986, p.314.
独考 , p.273.
254 日本文化學報……第 42輯
망을 세 가지 즉 여성의 모범이 되는 것, 깨달음에 대한 호기심을 푸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이익이 되는 것으로 정리한 것을 보면33) 단순히 그러한 전문직에 머물지 않고
좀 더 정치적인 의미의 여성 활동도 포함하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에도시대의 여성들도 사실은 여러 가지 생산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그
러나 공적인 활동에는 제약과 한계가 있었다.34) 마쿠즈가 체계적인 한문교육을 받지 못
하였듯이, 지적인 교육에서 제약이 있었으며 또 공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직업도 제약
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양 여성의 ‘해부 모습’은 마쿠즈에게 매우 신선한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3. 경제적인 문제
3.1 공무원과 상업
러시아의 경제에 대해서 마쿠즈는 러시아에는 “오곡이 나지 않으니 농민이 없다. 소나
양의 두 가축을 기르는 사람은 일본의 쌀집과 같다”35)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상업을 관장하는 사람은 즉 공무원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사람의 이익을
탐내서 자기 한사람만을 부유하게 하려고 하지 않는다. 나라 사람들이 편안해
지는 것을 원한다.36)
또 이어서, 러시아의 관리는 상인의 역할을 동시에 한다고 이렇게 소개하였다.
에조(홋카이도) 까지 (난파된) 일본인을 데리고 온 아담의 아버지는 일본의
중앙 관리(若老中)에 해당한다고 하는데, 칸막이 전문 가구점의 총 책임자이
며 유리를 판다고 한다. 보다 상급의 중앙 관리(老中)라면 가축 도매상, 또 어
떤 관리는 술 도매상 등등과 같이 공무원이 되면 이러저러한 도매상의 책임
자가 되어 공정하게 거래를 하고 이익도 적절하게 내기 때문에 국가 전체가
서로 다투는 일이 없어지게 된다. 이렇게 교역을 하여 나라를 부유하게 하는
것을 원한다고 한다.37)
33) 只野真葛,
独考 , p.262.
34) 아미노 요시히코,
일본사회의 역사(하) , p.153.
35) 只野真葛,
独考 , p.276.
36) 只野真葛,
独考 , p.276.
37) 只野真葛,
独考 , pp.267-277.
다다노 마쿠즈의 獨考 에 나타난 서양지식 ··························································· 林 泰 弘…255
러시아의 관리들이 상업에 종사하거나 상업을 관리하는 것에 대해서 소개한 것이다.
마쿠즈가 그들을 소개한 것은 그러한 활동에 의해서 거래가 공정하게 되고 이익도 적절
하게 낼 수 있으며, 나아가 국가 전체가 다투지 않게 되고 부유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생
각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개는 당시 일본의 사정을 염두에 두고 이루어진 것이다.
마쿠즈는 독고 에서 상인계층에 대해서 몹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38) 그 자
신이 무사 계층의 집안에서 태어나, 또 무사의 집안으로 시집을 갔기 때문이기도 하겠지
만, 사실 당시 에도시대 경제는 초기와는 달리 여러 가지 문제가 드러나고 있었다. 막부
내부의 재정적자문제뿐만 아니라 관료계급이라고 할 수 있는 무사계층도 지나친 소비생
활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39) 마쿠즈는 이러한 원인이 주로 상인의 부도덕한 경제
행위에 의한 것으로 보고 비판하였다.40) 그런데 러시아에서는 상인의 활동도 관리들이
통제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직접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마쿠즈는 이렇게 관리가 상업 활
동에 직접 참여하고 개입하면, 쓸데없이 폭리를 취하거나 부도덕한 상거래가 없어지기
때문에 국가의 경제가 안정되고 건전하게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
3.2 무역
무역에 대해서도 이렇게 일본의 경우를 소개하고 외국의 상황에 대해서 소개했다.
외국에서 일본의 특산품이라고 부르는 것은 금, 은, 동, 철, 수정, 쌀, 소금, 종
이, 해삼, 말린 해삼, 담배 등이다. 약으로 쓰이는 물건 종에도 여러 가지가 있
을 것이다. 소금과 사탕은 서로 대응되는 상품인데 소금 쪽이 더 소중하다.
(원저자 주 - 소금은 꼭 필요하며 일상생활에 사용한다. 사탕은 약용이며 차
에 넣어 먹는다.) 다른 나라에서는 바다가 멀리 있기 때문에 소금이 귀하다.
소금은 눈 대충으로 거래하지만, 사탕은 정확히 계산해서 판다. 일본은 소금이
많기 때문에 일용으로 써도 남으며 그 가격은 매우 싸다. 그렇다고 무시하는
것은 잘못이다.41)
일본에서는 다누마 시대(1767-1786)부터 이미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서 동, 철, 황동,
인삼 등을 특정 상인에게 전매권을 부여하고 세금을 받고 있었다.42) 이러한 생산품들은
외국에서도 일본의 특산품으로 친다고 하면서 ‘다른 나라’에서는 소금이 귀하니, 일본에
38) 예를 들면 只野真葛, 独考 , p.267의 상인집 딸에 대한 비판을 참조.
39) 민두기편저,
일본의 역사 , p.152, p.166 참조.
40) 只野真葛,
独考 , pp.289-290.
41) 只野真葛,
独考 , p.281.
42) 연민수 편저, 일본역사 , 보고사, 2000, p.176.
256 日本文化學報……第 42輯
서 많이 나는 소금을 무시하지 말자고 하였다. 다른 나라는 아마도 러시아, 특히 캄차카
반도를 염두에 두고 언급한 것 같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일본은) 춘하추동의 기후가 잘 순환하여 오곡이 풍성하게 열린다. 그리고 바
다가 사방에 둘러쳐져 있어서 어류가 많다. 먹는 물건이 풍성하니, 사람들의
마음이 화사하다. 소금을 많이 생산하여 국가적으로 사용하고도 남기 때문에,
나라 사람들이 무시하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소금과 사탕은 서로 대응되는 귀
중품인데, 소금을 상품(上品)으로 삼고, 사탕을 하품(下品)으로 삼는다. 이것은
만국에 정해진 것이다. 그것은 왜 그런가 하면, 소금은 일용에 필요한 것인데,
사탕은 약이나 차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소금을 끊으면 밥 한 그릇도
먹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소금이 없는 나라에서는 주의해서 그것을 계산해
서 비싸게 파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대충 계산해 싸게 판다. 이것은 다른 나라
가 부러워하는 점이다. 소금을 국산상품으로 개발해야 한다.43)
일본이 다른 나라보다 뛰어난 점은 사람들이 빠르고 긴박한 승부에는 반드시
이긴다. 이것이 첫 번째다. 금, 은, 동, 철 외에 산에서 광석이 많이 나온다. 이
것이 두 번째다. (원저자 주 - 많은 것에 너무 익숙해져서 매년 나오는 대로
전부 다른 나라에 건네주어 지금은 부족하다.) 다른 나라에는 소금과 사탕을
서로 바꾸는 물건으로 했으면 좋겠다.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보다 떨어지는 점
은 성격이 너무 급하고 마음씀씀이가 단기적이며 생각을 치열하게 해서 치밀
한 것을 생각해내지 못하는 점이다. 당장 좋은 것만을 즐기는 것은 나쁘다.44)
다누마 시대에는 특히 외국무역에 적극적이어서 무역제한을 완화하였다. 또 금과 은을
획득하기 위해서 동과 해산물을 적극적으로 수출하고 있었다.45) 이러한 방침에 대해서
비판한 것이다. 소중한 광석 보다는 많이 나는 소금을 이용하자고 하는 것이다.
입으로 핥으면 녹아버리는 사탕을, 만 세대까지도 썩지 않는 구리를 주고 사
오는 것을 천박한 행동이라고 다른 나라 사람들이 깔보는 데, 이것은 아주 창
피한 일이다. 책을 힘으로 삼는 중국인들은 마음을 엄격하게 하여 땅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 전체를 보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46)
43) 只野真葛,
独考 , p.297.
44) 只野真葛,
独考 , p.281.
45) 연민수 편저, 일본역사 , p.177.
46) 只野真葛,
独考 , p.275.
다다노 마쿠즈의 獨考 에 나타난 서양지식 ··························································· 林 泰 弘…257
‘다른 나라’사람들은 생각을 치열하게하고 치밀하게 하는데, 일본인도 이를 본받자고
한다. 소금과 설탕을 서로 바꾸고, 중요한 지하자원을 함부로 유출시키자 말자고 제안하
였다. 또 나라의 일을 생각할 때는 나라 전체를 보는 일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이러한 주
장은 국가에서 무역을 체계적인 전략을 세워서 장기적인 안목에서 추진해야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한 것을 이미 서양에서는 하고 있다는 것을 소개하는 것이다.
3.3 상도덕
마쿠즈는 또 경제활동을 속이면서 하는 것에 대해 부끄러워하라고 지적하면서, 일본의
관청에서 외국인에게 제공된 담배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 했다.
표류한 일본인을 데리고 온 러시아인 아담에게 들었다. 일본의 관청에서 답례
로 준 물건들 가운데 박스에 들어있는 담배가 있었다. 일본은 담배가 명산품
이라고 들었기 때문에 아주 기뻤다. 그래서 한 대 피워 보려고 서둘러 덮개를
열어보았는데, 위쪽 한 꺼풀만 얇게 상품의 담배 잎을 깔고, 중간에는 다름 아
닌 하품의 담배 잎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걸 보고 웃고 나서 피지 않고 길에
버렸다고 하였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문득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우리나라의 부끄러움이라고 생각되어 지금도 기분이 좋지 않다.47)
이는 단지 선물에 대한 이야기일 수 있으나, 크게 보면 무역의 상도덕과 관련된 중요
한 이야기다. 러시아 인들의 웃음을 사지 않도록 상도덕을 확립하자는 주장인데, 서양인
들의 근대적인 상품경제의 한 모습을,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소개한 것이라고 할 수 있
다. 물론 마쿠즈는 이러한 ‘상도덕’의 문제를 좀 더 체계적이고 심도 있게 소개한 것은
아니고 단지 부끄러운 이야기를 통해서 일본인의 자성을 촉구하는 단계에 머물고 있다.
4. 문화적인 문제
마쿠즈는 앞서 소개하였듯이 정치, 경제에 대한 문제 외에도 러시아와 서양의 생활문
화에 대해서도 다양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내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4.1 결혼
아이를 가질 정도가 되어 결혼을 해야 할 나이가 되면, 짝을 지어주고 싶은
47) 只野真葛,
独考 , p.275.
258 日本文化學報……第 42輯
남녀를 사원에 같이 데리고 가서 먼저 남자를 사제의 앞으로 불러서 이렇게
묻는다. “저 여자를 그대는 일생동안 같이 함께할 부인으로 결정하였는가?”
이때에 남자의 대답을 듣고 가부를 정하고, 또 여자도 불러서 앞과 같은 질문
을 한다. 같은 마음이라면 부부로 정해준다. 그런데 딴 마음이 생긴다면, 남녀
모두에게 중죄를 내린다고 한다.48)
오늘날에는 흔히 볼 수 있는 서양식 결혼의 일반적인 모습인데, 마쿠즈에게는 특이한
결혼 모습이었던 것 같다. 특히 부모의 일방적인 결정으로 두 번씩이나 내키지 않은 결
혼을 해야 했던 마쿠즈에게, 신부의 결혼 의사를 확인하는 서양식 결혼은 부러움의 대상
이었을 것이다.
또 서양인들은 결혼하는데 상대방을 스스로 정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 어떻게 해
주는 지 그 방법에 대해서도 이렇게 소개를 하였다.
또 스스로 혼자서는 마음을 정할 수 없는 젊은이도 있다고 들었다. 그때는 부
인을 정하지 않고 좋은 사람의 딸이라 할지라도 잠시 (시간적인 여유를 두고)
마치 매춘부를 고르듯이 많은 사람들을 보여주어 그 중에서 마음에 드는 사
람을 부인으로 정한다고 한다.49)
인용문에서 ‘매춘부를 고르듯이’라는 말은 남녀가 둘이서 ‘서로 당분간 사귀어보고’ 라
는 뜻이라고 판단된다.
마쿠즈는 부친이 막부의 홋카이도 개발 사업에 발탁되지 못하여 혼기를 놓쳤다. 부친
이 높은 직책을 갖게 되면 좋은 배필을 찾을 것이라고 기대했으나 그것이 무산되자 오랫
동안 결혼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겨우 소개 받은 사람은 또 너무 나이가 많아서 헤어지
고 35세 때(1797년) 다다노 집안에 재취로 시집을 같다. 그러한 연유로 서양식의 결혼
풍습을 부럽게 생각하였던 것 같다.
4.2 복지시설
마쿠즈의 독고 에는 러시아의 복지시설에 대한 소개도 있다.
러시아에서는 사원에 반드시 넓은 방을 지어, 돌보는 사람이 없는 노인이나
아이들을 거주시켜 사람들이 기부하는 물건을 가지고 부양을 한다고 한다.50)
48) 只野真葛,
独考 , p.276.
49) 只野真葛,
独考 , p.276.
50) 只野真葛,
独考 , p.276.
다다노 마쿠즈의 獨考 에 나타난 서양지식 ··························································· 林 泰 弘…259
러시아는 서구 사회로부터 배워, 교육과 사회복지 진흥에 힘썼다. 특히 카서린 대제
(1762-1796)때에는 학교를 많이 세우고 병원과 고아원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51) 마
쿠즈는 어려서 남들을 위해서 살고자하는 뜻을 세우고, 또 불쌍한 사람들에 대해서 자신
이 열심히 도와주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52) 그래서 이러한 사회 복지 시설에 대해
서 관심을 가지고 이를 소개한 것이다.
4.3 건물과 도박
마쿠즈는 또 러시아의 건물의 구조와 그 구조 때문에 일어나는 삶의 양식에 대해서 이
렇게 소개하기도 하였다.
러시아에서는 도박이 금지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 얼핏 들으면, (그 나라 사람
들은) 품위가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나라는 춥기 때문에 집을
지을 때는 마치 에도의 기생집처럼 여러 층으로 짓게 되었을 것이다. 부자들
은 점점 더 층을 높게 짓는다. 그러나 7층을 한도로 한다. (그 집들은) 창이
있기는 하지만, 유리를 끼워서 바깥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한 집에 살기
때문에) 일 년에 100일 남짓 피는 초목의 꽃을 감상하는 즐거움이 없다. 정원
이 없기 때문에 달은 헛되이 허공을 돌며 지붕 위를 비춘다. 이렇다 보니 승
부를 즐기는 외에 다른 재미가 없는 것이다. 오늘날 (일본에서는) 도박 금지
가 매우 엄격하지만, 매달 마음을 억제하지 못한 하층민들이 몰래 도박을 한
다고 한다. 슬픈 일이다.53)
러시아는 춥기 때문에 위아래로 높이 집을 짓고, 그러기 때문에 꽃밭이 없으며 그로
인해 도박이 성하다는 이야기다. 마쿠즈 생각으로는 러시아가 도박을 금지하지 않은 이
유는 정부가 다른 즐거움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허락했다고 보는 것이다. 꽃밭을 감상하
는 즐거움은 시를 쓰던 마쿠즈에게는 각별한 것이었다. 그리고 남달리 꽃에 대한 애착을
많이 가지고 있어 자기 형제들에게 꽃 이름을 하나씩 붙여주었던54) 마쿠즈로서는 그런
즐거움을 가질 수 없는 러시아 사람들이 답답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이 글은 결론에 일본의 하층민들이 몰래 도박을 많이 하는 것을 비판하고 있지만, 사
실 이글이 시작되는 부분에는 도박이 갖는 장점을 열거하였다. 즉 도박은, 천지 만물이
어느 것이나 생존경쟁을 하고 있듯이, 경쟁의 게임이며 또 승부를 빨리 결정해주기 때문
51) 차하순,
서양사총론 , p.320 참조.
52) 只野真葛,
独考 , pp.264-265, pp.287-298.
53) 只野真葛,
独考 , p.270.
54) 只野真葛, 「七種のたとへ」(鈴木よね子校訂,
1994), pp.500-507.
只野真葛集 , 叢書江戸文庫30, 国書刊行会,
260 日本文化學報……第 42輯
에 흥미가 있다는 것이다.55) 그러한 맥락에서 보면 러시아에서 도박이 허락되는 것은 그
사회가 생존경쟁의 현실을 생활에서 즐기고 터득하게 하려는 사회적인 배려라고 이해할
수 있다.
4.4 하인
마쿠즈는 무사집안의 딸이었고, 또 무사집안에 시집을 갔기 때문에 하인을 부릴 기회
가 많았다. 그녀는 하인을 부리면서 느낀 불만을 토로하면서 러시아에는 ‘하인’없다는 사
실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했다.
(하인은 주인의) 관용이 있기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주인은 자신이 데리고 있는) 그 하인이 나쁘다고 생각해도 때리기에는 힘이
없고, 꾸짖기에는 별 이득이 없다. (하인은) 도망가는 길, 빠져나갈 구멍을 알
고 있어 잘도 달아난다. 봉급을 주인으로 삼고, 고용한 주인을 돈주머니로 생
각한다. 조금이라도 싫은 소리를 하면 주인을 버리고 도망간다는 것을 정면으
로 내걸고 일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인정머리 없는 것들을 같이 데리고 사
는 것은 무슨 이익이 있는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오직 체면만을 생각할 뿐이
다. 이것은 낭비라고 할 수 있다. 러시아에서는 하인을 데리고 다니지 않는다
고 한다.56)
이와 같은 글 가운데에는, 러시아사람들은 체면을 중시하지 않고, 낭비를 싫어하기 때
문에 하인이 없다는 암시가 담겨져 있다. 반면에 일본은 체면을 중시하고 허세가 심하여
쓸데없이 하인을 고용하여 데리고 다닌다고 하였다.
마쿠즈는 하인을 써봐야 일은 잘 하지 않고, 오히려 주인을 무시하고, 인정머리가 없
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특히 경제적인 측면에서 하인이 비용만 드는 것이라고 보았다. 하
인이 필요한 무사계층에서 하인을 없애자고 하는 것은 상당히 과격한 주장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러시아 사회를 예로 소개하고 있다.
4.5 학문연구
마쿠즈는 러시아인들 그리고 서양 사람들이 왜 그렇게 훌륭한 문명을 이룩하였을까
하는 문제도 생각해본 것 같다. 러시아인들은 수명이 짧으나 나름대로 성과를 이루어내
는 것에 대해서 다름과 같이 언급했다.
55) 只野真葛,
獨考 , pp.269-270.
56) 只野真葛,
獨考 , pp.298-299.
다다노 마쿠즈의 獨考 에 나타난 서양지식 ··························································· 林 泰 弘…261
오곡이 드물고 문자를 옆으로 쓰는 나라는, 고기를 음식으로 하기 때문에, 수
명이 짧다. 30만 되면 머리에 백발이 생기고 50까지 살게 되면 장수한 것으로
여긴다. 천황폐하의 나라는 풀에서 나는 열매를 항상 먹기 때문에, 수명은 길
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깊지 않고, 멀고 오랜 기간의 일을 도모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생각지도 않게 허망한 일이 많다. 설사 만 살이나 넘게 살더라도, 사람
들에게 도움 될 수 있는 것을 남기지 않는다면 이득이 없다. 고기를 음식으로
하는 나라는, 30십부터 40사이를 이 세상에서 봉사해야 하는 기간으로 정해져
있지만, 독창적으로 특출 나고 엄밀하게 생각해낸 것을 바탕으로 그 문제를
깊이 생각하기 때문에 일본인이 따라가지 못한 것도 이루어 낸다. 이는 부러
운 일이 아니겠는가?57)
문자를 옆으로 쓰는 나라, 즉 서양의 나라들이 독창적이고, 치밀하고, 깊이 있게 여러
가지 문제를 생각하기 때문에 일본보다 앞선 것을 이루어냈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것은
마쿠즈가 구체적으로 지목하지는 않았지만 ‘학문연구’에 대해서 언급한 것으로 판단된다.
러시아는 이미 17세기경부터, 즉 마쿠즈가 이러한 사실을 언급하기 200여 년 전부터
서유럽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였는데, 그 중에는 교육과 과학 기술 및 지식에 대한 연구
진흥도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과학지식은 주로 응용과 실용중심으로 수용되었으며 생산
활동에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는 서적들이 수입되었다.58) 이러한 서적의 수입과 더불어
그러한 지식의 증진에 대한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이것은, 단순히 과학적인 지식뿐만 아니라, 다양한 ‘근대학문’이 서구에서 형성, 발전되
고 있었던 사실을 마쿠즈가 알게 되어, 그것을 막연하게 표현한 것으로 판단된다. 일본사
람들은 수명이 길지만 ‘오랜 기간의 일’을 도모하지 못한다는 것은 바로, 실용적이고도
현실적인 근대적인 학문이 일본에 없기 때문에 치밀한 연구를 하지 못하고 또 그러한 연
구의 성과를 축적해나가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4.6 시간관념
마쿠즈는 서양인들이 시계를 중시한다고 하면서 시간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
다.
어려서부터 ‘주야의 수’를 마음에 새기고, 마음속의 박자로 삼아야 한다. 시각
에 따라 변해가는, 인간의 나가고 들어오는 숨과 함께, 떠나지 않는 이 시각을
중시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혼란스러워하는 것이다. 육체가 어디에 숨더
라도, 숨과 시각은 서로 달라붙어 이 세상은 변해가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
57) 只野真葛,
独考 , p.274.
58) 슐긴․꼬쉬만․제지나, 김정훈 등역,
러시아 문화사 , 후마니타스, 2002, pp.116-117.
262 日本文化學報……第 42輯
다. 외국인들이 시계를 손에,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시각을 잊지 않기 위해서이
다. 사람은 이래야 되는 것이다. 외국인만 계산을 하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
니다.59)
마쿠즈는 독고 전편을 통해서 시간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하였다.60) 이러한 것은 일
본사람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생각으로 앞으로 그러한 점을 본받아야 한다는 입장에서
서양인들이 시계를 중시하는 관습에 대해서 소개한 것이다.
독고 에는 ‘시계’에 대해서 더 이상 깊이 있는 소개는 없다. 다만, 시간을 중시하는
서양인들의 생활태도를 소개함으로써 일본사람들에게 시간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고자
하였다.
5. 맺음말
이상의 논의를 종합, 정리해 보면 독고 에 나타나 있는 마쿠즈의 서양지식은 그 성격
이 다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첫째, 러시아에 관한 내용이 많다. 마에다 쓰토무(前田勉)는, 마쿠즈의 사상이 “당시
두 개의 큰 사상적인 조류였던 국학과 난학이 교차하는 지점에 있었다”61)고 지적하면
서도, 마쿠즈의 난학 사상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상세하게는 논하지 않았다. 마쿠즈의 난
학은 엄밀히 말한다면 넓은 의미에서의 ‘난학’이라고 할 수 있다. 마쿠즈가 『독고』에서
제시하고 있는 ‘서양의 나라’는 대개의 경우 네덜란드가 아니고 러시아이기 때문이다. 물
론, 서양의 다른 나라를 염두에 둔 발언도 있으나, 그럴 경우 그 나라의 이름은 구체적으
로 언급하지 않았다.
둘째,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내용이 중심이다. 이는 원래 독고 라고 하는
저작의 성격으로부터 기인한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서양을 체계적으로 소개하기 위해서
이 저작이 기획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어떤 ‘생각’을 소개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획된 것
이다. 그러므로 서양에 대한 소개 내용도 적고 전체로서의 체계성도 결여되어 있다. 대부
분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사상적 근거로서 거론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일단 제
시된 내용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마쿠즈 자신의 사상에 있어서는 대단히 중요한 기
초가 되고 있다.
59) 只野真葛,
独考 , p.306.
60) 마쿠즈가 인식한 시간관념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임태홍, 「다다노 마쿠즈의 ‘천지간 박자’
개념」을 참조할 것.
61) 前田勉, 「只野真葛の思想―国学と蘭学との交錯」,
日本文化論叢 (12), 2004.3, p.73.
다다노 마쿠즈의 獨考 에 나타난 서양지식 ··························································· 林 泰 弘…263
셋째, 『붉은 오랑캐 풍문 고찰(赤蝦夷風説考)』의 내용과는 그 지향점이 다르다. 마
쿠즈의 아버지가 쓴 『붉은 오랑캐 풍문 고찰』의 내용은 러시아에 대한 외교 전략적인
성격이 강하다. 그에 따르면 ‘붉은 오랑캐’들, 즉 러시아사람들이 홋카이도나 일본에 사
람을 보내고 배를 보내고 있는 것은 통상 목적일 가능성이 많다. 그러므로 일본은 이 기
회를 이용해 홋카이도를 일본의 직할지로서 편입하고, 개발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였
다.
마쿠즈의 서양 지식, 특히 러시아에 대한 소개는 이러한 『붉은 오랑캐 풍문 고찰』의
취지와는 그 지향점이 다르다. 그녀는 대개의 경우, 러시아 사회, 나아가 서양사회의 ‘근
대성’에 주목하고 있었다. 즉 ‘근대서양’이라고 하는 선진 사회에, 일본의 제도나 사회 문
화를 대비시켜, 일본을 변화시키려고 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아마 이러한 사회 변혁의 태도는 19세기 전반에 활동한 오시오 츄사이(大鹽中齋,
1793-1837), 이쿠다 요로즈(生田萬, 1801-1837), 아이자와 세이시사이(會澤正志齋,
1781-1863), 히라타 아쓰타네(平田篤胤, 1776-1843) 등이 공통으로 보여주고 있는 시
대적인 분위기로 부터의 영향일 것이다. 그러나 이들과 다른 점은, 마쿠즈가 주목하고 있
던 ‘사회’는 중국이나 일본의 고대 사회가 아니고, ‘서양’ 사회라는 점이다. 후쿠자와 유키
치(福澤諭吉, 1835-1901)가 태어난 것은, 마쿠즈가 사망하고 나서 10년이나 경과한 뒤
였다는 사실로도 그녀의 사상이 얼마나 선구적이었나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 논문에서 논한 마쿠즈 사상의 위상에 대해서 간단히 정리해보기로 한
다. 마쿠즈보다 50여년 뒤에 태어나 서양사정(西洋事情) (1866), 학문의 권장(学問の
すすめ) (1872), 문명론의 개략(文明論之概略) (1875) 등을 발표한 후쿠자와 유키지
(1835-1901)와 비교해보기로 한다.62)
후쿠자와 유키지는 서양에 대한 소개를 매우 전문적으로 행하였다. 그 분량도 매우 많
아 독고 의 분량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리고 그가 당시의 서양을 소개하는 내용 역시
매우 체계적이고 깊이가 있었다. 반면에 마쿠즈의 서양지식은, 이 논문에 제시된 서양 지
식이 거의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글은 마쿠즈의 다른 저작은 포함하지 않았
으나, 대개 다른 저작은 문학적인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역시 후쿠자와와 비교할 수는
없다. 현재 일본에서 평가되듯이 후쿠자와의 위상이 단연 높고, 그가 서양에 대해서 소개
한 공헌은 마쿠즈와 비할 바가 아니다.
그렇다면 마쿠즈의 서양지식을 분석하는 이러한 작업이 어떠한 의의가 있는 것 인가?
다시 결론으로 돌아가 마쿠즈의 ‘선진성’ 부분을 주목하고자 한다. 특히 러시아에 대한
관심이 깊었으며 러시아를 통한 서양이해라고 할 만한 부분에 장점이 있다. 그리고 서양
62) 이 글을 발표한 제33회 한국일본문화학회 국제학술대회(2009.4.25)에서 질문을 받은 사항
인데, 마쿠즈가 후쿠자와 유키치 보다 50여년 정도 앞서 태어났고, 서양 지식에 대해서도
선구적인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면, 마쿠즈의 위상을 후쿠자와 정도로 높이 평가할 수가 있
는가 하는 질문이었다.
264 日本文化學報……第 42輯
사회의 제도와 문화에 관심이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물론 이는 내용적으로 너무 빈
약하기 때문에 이러한 내용이 당시 사회에 미친 영향은 매우 미약했을 것이다. 또 독고
자체가 출판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영향력은 거의 없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 사회와 비교하면서 마쿠즈가 제기한 문제는 충분히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마쿠즈의 사상을 살펴보면서, 적어도 우리는 에도시대 말기에, 전문적으로 학
문을 하지는 않았으나, 여성으로서 어느 정도 문학적이며 문화적인 소양을 갖춘 지식인
이 어떻게 서양을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또 지역적으로는
센다이라고 하는 지역에서 사는 한 여성의 지적세계가 어떠한 것이었는가 하는 점도 살
펴볼 수 있다. 다만 마쿠즈가 스스로 자랑했듯이 이 독고 의 내용은 매우 독창적이며
세상 사람들과는 매우 다르게 생각한 내용이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인 인식과
는 매우 다른 것이었을 것이라는 점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다다노 마쿠즈의 獨考 에 나타난 서양지식 ··························································· 林 泰 弘…265
【参考文献】
김학준(2005) 러시아사 대한교과서 주식회사, pp.93-96.
모로 미야, 허유영 역(1990) 에도일본 일빛, p232.
무라카미 시게요시외, 최길성편역(1993) 일본의 종교 , pp.108-109.
민두기 편저(1976) 일본의 역사 지식산업사, p.156 등.
석영중(2005) 러시아 정교 - 역사, 신학, 예술 고려대학교출판부, p.112.
슐긴․꼬쉬만․제지나, 김정훈 등역(2002) 러시아 문화사 후마니타스, pp.116-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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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 日本文化學報……第 42輯
要 旨
本稿は、只野真葛(1763-1825)の 独考(ひとりかんがえ) (1817)の中に含まれている西洋知
識に関して探ってみるものである。 独考』に見られる西洋に関する情報は、分量的には多くは
ないが、政治や経済の問題、社会の慣習や女性の問題など多方面にわたっている。幾つか
に分けて、それを整理すれば次のようである。
第一、ロシアに関する内容が多い。
真葛の思想は、国学と蘭学の二つの交錯する地点にあると言われるが、本稿で考察した真
葛の「蘭学」とは、厳密に言えば広い意味での「蘭学」である。彼女が『独考』の中で提
示している「西洋の国」は、多くの場合、オランダではなくロシアであるからである。
第二、自分の主張を裏付けるような内容が中心である。
もともと 独考 という書物の性格がそうであるが、その本に含まれている西洋の知識は、西洋
の「紹介」ではない。その情報の分量も少なく、全体としての体系性も欠如している。真葛自
信が主張したかった思想の根拠として取り上げられている場合がほとんどである。しかし一応提
示された内容は、その分、真葛の思想においてはたいへん重要な基礎になっていることは確か
である。
第三、『赤蝦夷風説考』の内容とは重なっていない。
真葛の父親の著作である『赤蝦夷風説考』の内容は、ロシアに対する外交戦略的な性格
が強い。彼によれば、「赤蝦夷」の人々が北海道や日本に人や船を送っているのは、通商
の目的による可能性が高い。そこで日本は、この機会を利用し北海道を日本の直轄地として編
入し、開発して行くべきであると主張していた。
真葛の西洋の知識、すなわちロシアに対する紹介はこうした『赤蝦夷風説考』の内容とは多
少異なる。彼女は多くの場合、ロシア社会や西洋の「近代性」に注目していた。先進の西洋
社会に、日本の制度や社会文化を対比させ、日本国を変革したいという立場を取っている。
恐らくこうした「変革」態度は、19世紀の前半、大鹽中齋(1793-1837)、生田萬
(1801-1837)、會澤正志齋(1781-1863)、平田篤胤(1776-1843)等が共通に有していた時代
的な風潮からの影響であろう。しかしながら真葛が注目していた「社会」は、中国や日本の
古代社会ではなく、「西洋」の社会であるということが異なる。福澤諭吉(1835-1901)が生ま
れたのは、彼女が死んでから10年も経ってからの年であったという事実からも、彼女の思想の先
進性が読み取れる。
キーワード;只野真葛、獨考、西洋認識、西洋、ロシア、蘭学
투
고 : 2009. 5. 31
1차 심사 : 2009. 6. 13
2차 심사 : 2009. 6. 27
일본사회에서의 한류열풍으로 인한
한국인과 재일코리안에 대한 인식변화
-연령별 분석-
황 혜 경*
1)
(e-mail : [email protected])
目 次
1.서론
2.조사방법 및 조사항목
3.조사 결과
4.연령별 고찰
5.결론
1. 서론
일본의 한류는 NHK방송국에서 한국드라마 겨울연가가 방영된 것이 계기가
되어, 드라마는 물론 한국영화, 그리고 배우, 가수들까지 일본에 진출하여 많은
사랑을 받으며 한류열풍에 가담하고 있다. 2004년 일본 NHK 위성방송에서 무
려 여덟 시간에 걸쳐서 일본여성들이 왜 한류에 젖는지에 관해서 한류에 대한
특집방송을 할 정도로 일본을 떠들썩하게 했다. 일본사회를 뒤흔들 정도의 인
기인 한류에 동참하는 일본인들도 많은 반면에, 한류에 열광하는 사람이 싫어
서 한국을 깎아내리기 위한 의도의 혐 한류도 나오고 있는 상태이다.
일본에서의 한류의 인기는 한국 매스컴을 통해서도 흔하게 볼 수 있다. 한류
스타의 열렬한 아줌마 팬들은 일본에서 한국까지 와서 한류스타의 공식 스케
줄을 따라다니는가 하면, 한류스타의 특별한 이벤트에는 언제나 일본 팬들이
* 남서울대학 일본학 강사
268 日本文化學報……第 42輯
자리할 만큼 대단했다.
또한, 드라마 촬영지나 한국 음식을 맞보기 위한 전문투어가 생겨서 매일
1500명 정도 일본아줌마들이 왔다갈 정도로 한류는 일본의 하나의 사회현상이
고, 또 하나의 역사적인 사실로 남을 것이다. 이러한 한류열풍은 일본사회에서
일본인의 연령에 따라서 다르게 반응할 것으로 생각된다.
전 논문(황 2008)에 의하면, 한류열풍은 일본사회에 있어서 일본인의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인식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한류가 일본인에 있어서 한국 한
국인에 관한 인식을 긍정적으로 변화시켰으며, 한국 한국인에 대해 더욱더 친
근감을 느끼게 하였다. 또한, 한류가, 1919년 한일합병 전후부터 1세기가 넘도
록 일본에서 많은 차별을 받고 생활하고 있는 재일코리안에 대한 인식도, 무관
심에서 더욱 긍정적인 면으로 받아들이게 되어서, 친근감을 느끼지 않았던 일
본인들도 친근감을 느끼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한류는 일본인들에게 한
국 한국인 재일코리안 대한 인식의 변화나 한국문화에 관심의 동기를 부여
하고, 한 일 관계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왔으나, 정치적
인 문제까지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한류에 관한 선행연구는 한국드라마에 관한 연구(신 2005), 한류 현황과 전망
에 관한 연구(손 2004, 호사카 2005), 한국관광에 관한 연구(채 2006), 한류로
인한 문화 관광객 유치, 그것으로 인한 한국 상품판매 및 소비자 지출구조에
관한 연구(허 2006), 한류를 통한 한국 이미지 변화에 관한 연구(김 외1인
2006)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되고 있다. 그러나 한류와 재일코리안을 연관
지어서 다룬 연구는 많이 되고 있지 않다. 게다가 연령별로 비교 고찰한 논문
은 볼 수가 없다. 이 논문은 전 논문 (황 2008)에 이어서, 한류로 인한 일본인
의 한국인과 재일코리안에 대한 인식변화를 연령별로 나눠서 분석한 것이다.
일본사회에 있어서 일본인의 연령에 따라서 한류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으며,
한류이전과 한류이후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오는지 실증적 데이터를 이용해 고
찰해 보고자 한다.
한류의 개념 및 일본 내 한류의 현황에 관한 것은 황(2008)참조.
2. 조사방법 및 조사항목
(1) 조사방법 및 대상
일본 관서지방(오사카, 나라지역)의 일본인 312명을 대상으로, 한류로 인한 일
일본사회에서의 한류열풍으로 인한 한국인과 재일코리안에 대한 인식변화 ···황 혜 경…269
본인의 한국인과 재일코리안에 대한 인식에 관하여 앙케트조사를 실시했다.
나라에서 나라여자대학교와 나라현립대학교를 방문해, 학교식당 등을 이용,
직접 앙케트 설문지를 배부 회수했다. 또한, 나라 아동상담소와 나라 공민회
관을 방문해, 그곳에 방문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설문지를 배부 회수했다.
그리고, 오사카에서 관서대학을 방문해 학생들이 많은 곳을 찾아가 설문지를
배부 회수했다. 그리고 쯔루하시 중학교의 학부모를 대상으로 앙케트를 실시
했으며, 오사카시의 산손지라는 절을 방문해, 그 곳에 방문한 신자들을 대상으
로 앙케트를 실시했다. 이외에도 본인이 장소를 옮기는 과정에서 다른 몇 명에
게도 앙케트를 실시했다. 그 결과 총 312부를 회수했고, 그 중에서 불성실한
설문지 10부를 제외하고 302부(오사카:123부, 나라:179부)를 유효한 설문지로
확보했다.
조사 방법은 2007년 7월부터 8월 사이에 앙케트조사를 실시했고, 인터뷰조사
도 했다.
(2) 조사항목
조사항목으로는 일본사회의 한류로 인한 일본인의 한국인과 재일코리안에 대
한 인식의 변화를 보기 위해서 그것에 관련해 크게 4가지로 나눴다. 우선, 기
본사항 및 한국 한류에 관련된 항목으로 성별, 연령, 한국의 관심정도, 한국
관심시점, 한류에 대한 인지도, 한류의 단어 의미, 한류의 관심정도, 한류가 일
어난 시점의 8항목, 그리고 한국인에 관한 항목으로 한국인 인식(한류이전 한
류이후), 한국인의 친근감 정도(한류이전 한류이후), 한국인이 이웃으로 이사
온다면(한류이전 한류이후)의 3항목, 재일코리안에 관련된 항목으로 재일코리
안의 인식(한류이전 한류이후), 재일코리안의 친근감 정도(한류이전 한류이
후), 주변의 재일코리안이 있다면 사이좋게 지낼 것인가(한류이전 한류이후)
의 3항목, 그리고 한국에 관련된 역사 정치 식문화에 관련된 항목으로 한
일 관계(한류이전 한류이후), 한국 역사에 관한 관심도(한류이전 한류이후),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문제(한류이전 한류이후), 독도 소유권 문제 일본입장
(한류이전 한류이후), 한국요리 섭취도(한류이전 한류이후), 한국김치 선호도
(한류이전 한류이후)의 6항목, 총 20항목으로 설문지를 각각 한류이전과 한류
이후로 나눠서 작성했다.
(3) 분석방법
조사 자료에 대한 통계처리는 SPSS 12를 사용하여, 위 조사항목에 대해서는
전체적인 백분율을 산출하였고, 연령별로 항목 간의 관련성을 보기위해서 카이
270 日本文化學報……第 42輯
스퀘어 검증에 의해서 분석하였다.
3. 조사 결과 및 고찰
(1)기본사항 및 한국
한류에 관한 사항
기본사항으로 성별과 연령을 보면, 성별은 여성이 81%, 남성이 19%를 차지
했다. 연령을 보면, 10대가 19%, 20대가 35%, 30대가 8%, 40대가 14%, 50대가
14%, 60대 이상이 11%를 차지했다. 이번 조사에서 10대와 20대는 대부분 대
학생으로 20대 전후라고 볼 수가 있다. 따라서 연령과 다른 항목과의 관계를
보는데 있어서 3개의 층으로 나눠서 분석하기로 한다. 젊은 층인 10대와 20대
를 묶어서 10-20대, 중년층인 30대와 40대를 묶어서 30-40대, 노년층인 50대와
60대 이상을 묶어서 50-60대 이상으로 나눠서 분석하기로 한다1).
표1 한국의 관심정도
한국 관심 시점
한국의 관심정도
관심
있다
10-20대
30-40대
령 50-60대이상
전체
연
19.0%
35.5%
49.3%
29.9%
한국 관심 시점
조금
뭐라고
별로
전혀
1988년
관심
말할수
관심
관심
올림픽
있다
없다
없다
없다
이후
39.9%
33.9%
29.6%
36.1%
20.3%
11.3%
12.7%
16.5%
15.8%
16.1%
5.6%
13.4%
5.1%
3.2%
2.8%
4.1%
6.3%
8.6%
17.2%
10.1%
***P<0.001
2002년
한 일
월드컵
이후
34.4%
28.6%
10.3%
25.9%
겨울연
가 시청
기타2)
이후
32.3%
34.3%
50.0%
38.1%
27.1%
28.6%
22.4%
25.9%
**P<0.01
일본인의 연령에 따른 「한국의 관심정도」와의 관계를 보면, 관련성이 있는 것
으로 나타났다. 표1과 같이 「관심 있다」가 거의 50%로 「50-60대 이상」이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30-40대」가 36%, 「10-20대」 20% 순이고, 「전혀 관심 없다」
와 「별로 관심 없다」를 보면 50-60대가 가장 적었고, 30-40대와 10-20대는 근
소한 차이로 10-20대가 많은 것을 알 수가 있다. 「뭐라고 말할 수 없다」는 「10-20대」에서 가장 많았다. 이와 같이 현재 한국에 대한 관심정도를 보면 전
1) 이번 조사에서 연령 비를 보면 10-20대가 43%, 30-40대가 22%, 50-60대가 25%로
10-20대가 다른 연령대 보다 비율이 높게 나타났다. 하지만, 비율이 가장 적은 30-40대인
22%는 총 조사인원 302명중 66명으로 이 수치는 통계학적으로 분석하는데 크게 문제는 되
지 않는 수치이다.
2) 「기타」로는 「어릴 적에」,「한국 친구가 생기고 나서」,「한국을 방문하고 나서」,「한국 음식
을 자주 먹게 되면서부터」,「한국 김이 맛있어서」 등의 의견이었다.
일본사회에서의 한류열풍으로 인한 한국인과 재일코리안에 대한 인식변화 ···황 혜 경…271
체적으로 관심이 있는 쪽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50-60대에서 가장 관심이
많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면, 다음은 일본인들이 한국에 언제부터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에 관해서
「한국 관심 시점」을 보기로 한다. 또한, 「연령」과 「한국 관심시점」 과의 관련
이 있는지도 보도록 한다. 표1을 보면 「50-60대 이상」은 「겨울연가 시청이후」
가 50%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기타」,「1988년 올림픽 이후」,「2002년 한 일
월드컵 이후」 순이였다.
「30-40대」의 경우는 「겨울연가 시청이후」가 34%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기타」와 「1988년 올림픽 이후」가 거의 각각 30%를 차
지, 다음이 「2002년 한 일 월드컵 이후」 순 이였다. 그리고 「10-20대」를 보면
다른 연령대(30-60대)와 달리, 한국 관심 시점이 「2002년 한 일 월드컵 이후」가
34%로 가장 많았고, 근소한 차이지만 다음으로 「겨울연가 시청이후」 순이였다.
1988년 서울올림픽은 한국을 전 세계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표1과
같이 젊은 층인 「10-20대」의 경우, 1988년 서울올림픽 때는 거의 20년 전으로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을 시기로, 10-20대에게는 한국에 대한 관심을 이끌어
낼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전 세계에 한국을 다시 한
번 알리는 계기가 되었던 2002년 한 일 월드컵은 10-20대가 고등학교 이상의
시기로 한국에 관심을 갖게 하는 큰 계기가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겨울연가 시청도 최근 4년 전후의 일로 한국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30-40대」의 경우도, 1988년 서울올림픽 때는 초등학교 이하의 시기
로 서울올림픽이 큰 이슈가 되지는 못했고, 2002년 한 일 월드컵과 겨울연가
시청이후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한편, 「50-60대 이상」은 1988년 서울올림픽과 2002년 한 일 월드컵 때, 충분
히 관심을 갖는 큰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 예상되지만,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
표2 한류에 대한 인지도
한류의 단어 의미
한류에 대한 인지도
10-20대
30-40대
령 50-60대이상
전체
연
한류의 단어 의미
들어 본 적
들어 본 적
있다
없다
붐
붐
(음식 등)
100.0%
98.4%
94.4%
98.3%
0.0%
1.6%
4.2%
1.4%
73.9%
78.7%
70.4%
74.0%
19.7%
14.8%
16.9%
18.0%
5.7%
1.6%
5.6%
4.8%
한국드라마 한국문화
기타
모르겠음
0.6%
4.9%
7.0%
3.1%
일본사회가 떠들썩할 정도 한류라는 용어가 사용되는데 일본인들은 과연 한
류라는 용어를 들어 본 적이 있는지, 또한 그 의미는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관해서 살펴보도록 한다.
272 日本文化學報……第 42輯
연령별로 「한류에 대한 인지도」 와의 관계를 본 결과, 관련이 없는 것으로 나
타났다. 연령대에 관계없이 95%이상이 들어 본 적이 있었다. 그러면 일본인들
은 한류를 과연 어떤 의미로 파악하고 있는지 표2를 보면 한류의 의미를 연령
층에 관계없이 「한국드라마 붐」이라고 70%이상이 생각하고 있었다.
다음은 일본인들이 한류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지 보기로 한다.
연령별로 「한류의 관심정도」와의 관계를 표3을 통해 보면, 관련이 있는 것으
로 나타났다. 「10-20대」의 경우 「그다지 관심 없다」가 46%로 가장 많았고,
「전혀 관심 없다」까지 합하면 65%정도가 관심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30-40
대」의 경우는 「그다지 관심 없다」가 38%, 다음으로 「조금 관심 있다」가 30%
정도 였다. 게다가 「전혀 관심 없다」와 「그다지 관심 없다」를 합쳐서 보면 관
심 없다가 51%, 관심 있다가 49%로 거의 비슷했다. 「50-60대 이상」의 경우,
「그다지 관심 없다」가 35%, 「매우 관심 있다」가 30% 순이였다. 「매우 관심
있다」와
「조금 관심 있다」를 합친 관심 있다와 「그다지 관심 없다」와 「전혀
관심 없다」를 합친 관심 없다로 나눠서 보면 관심 있다가 57%, 관심 없다가
43%로 관심 있다가 많은 것으로 나왔다. 이 표를 통해서 한류의 관심은 50-60
대 이상이 가장 많았고, 10-20대가 가장 관심이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다음은 한류가 일어난 시점에 관해서 연령과의 관계를 보기로 한다.
표3과 같이 연령과 한류가 일어난 시점 간에는 관련성이 나타났다. 「10-20대
」의 경우는 95%가
「겨울연가 시청이후」의 의견이였고, 「30-40대」는 「겨울연
가 시청이후」가 80%, 다음으로 「기타」의견과 「2002년 한 일 월드컵 이후」, 「50-60대」의 경우는 「겨울연가 시청이후」가 83%, 다음으로 「기타」가 많았다.
그리고 전 연령대에 있어서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표3 한류의 관심정도
한류가 일어난 시점
한류의 관심정도
매우
관심
있다
10-20대
연 30-40대
령 50-60대이상
전체
8.3%
19.7%
29.2%
15.9%
1988년
한류가 일어난 시점
2002년
조금
그다지
전혀 관심
서울
한 일
겨울 연가
관심있다
관심 없다
없다
올림픽
월드컵
시청 이후
27.4%
29.5%
27.8%
27.9%
45.9%
37.7%
34.7%
41.4%
18.5%
13.1%
8.3%
14.8%
이후
0.0%
0.0%
0.0%
0.0%
이후
2.0%
6.1%
0.0%
2.4%
94.6%
79.6%
82.5%
88.9%
**P<0.01
기타3)
3.4%
14.3%
17.5%
8.7%
**P<0.01
3) 여기에서 「기타」는 「잘 모르겠음」,「나도 모르게」,「TV에서의 김치소개이후」,「한국요리 붐
이 일어났을 때 쯤」등의 의견이었다.
일본사회에서의 한류열풍으로 인한 한국인과 재일코리안에 대한 인식변화 ···황 혜 경…273
않았으며, 50-60대는 2002년 한 일 월드컵 이후도 한류는 없었다고 생각했다.
(2)한국인의 인식에 관한 사항
지금부터는 연령과 각 항목과의 관련성을 보고, 또한, 한류이전과 한류이후에
어떠한 변화가 있는지에 관해서도 알아보고자 한다.
우선 「연령」과 「한국인의 인식(한류이전)」과의 관계를 보면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표4와 같이 「10-20대」의 경우, 한류이전의 한국인의 인식을
보면 「관심 없음」이 58%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긍정적」이 34%를 차지했
다. 「50-60대이상」은 「관심 없음」이 50%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긍정적」이
39%를 차지했다. 반면에
「30-40대」의 경우는 「긍정적」이 42%로 가장 많았
고, 「관심 없음」이 37%로 많았다. 한류이전의 한국인의 인식은 10-20대와
50-60대의 경우는 관심 없음이 많았고, 30-40대는 다른 연령에 비해 긍정적으
로 보는 것으로 나왔다.
표4 한국인 인식(한류이전
한류이후)
한국인 인식(한류이전)
매우
긍정
긍정적
관심
없음
10-20대
0.6% 34.2% 58.2%
30-40대
11.9% 42.4% 37.3%
령 50-60대이상 3.0% 39.4% 50.0%
전체
3.5% 37.1% 51.9%
연
부정적
5.1%
3.4%
6.1%
4.9%
한국인 인식(한류이후)
매우
매우
부정
긍정
1.9%
5.1%
1.5%
2.5%
2.5%
16.9%
14.5%
8.3%
긍정적
63.1%
55.9%
66.1%
62.2%
**P<0.01
관심
없음
29.3%
18.6%
17.7%
24.5%
부정적 매우부정
5.1%
3.4%
1.6%
4.0%
0.0%
5.1%
0.0%
1.1%
**P<0.01
표4의 「연령」과 「한국인의 인식(한류이후)」과의 관계를 보면 관련성이 나타
났다.
「10-20대」의 경우는 「긍정적」이 63%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관심
없음」이 29%로 많았다. 「30-40대」와 「50-60대 이상」의 경우, 「긍정적」이 각각
56%, 66%로 많았고, 다음으로 「관심 없음」이 19%. 18%, 「매우긍정」이 17%,
15% 순이였다.
30-40대와 50-60대의 경우는 10-20대와 비교해, 매우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
이 많았고, 관심 없음은 10-20대의 젊은 층이 많았다.
한류이후의 한국인의 인식을 한류이전과 비교해 보면(표4), 「10-20대」의 경우
한류이전과 비교해 「매우긍정」이 소폭증가, 「관심 없음」이 급감했고, 「긍정적」
이 급증해 긍정적으로 변화했음을 알 수가 있다. 또한 「부정적」은 한류이전과
한류이후에 차이가 별로 없었다. 「30-40대」는 한류이전과 비교해 「관심 없음」
이 줄은 반면, 「매우긍정」과 「긍정적」이 증가 했으며, 「부정적」은 변화가 없었
274 日本文化學報……第 42輯
다. 「50-60대 이상」은 「관심 없음」이 대폭하락, 「매우긍정」과 「긍정적」이 대폭
상승해 타 연령대와 비교해 가장 긍정적으로 변화했음을 알 수가 있다. 또한
「부정적」도 큰 폭으로 하락했음을 알 수가 있다. 50-60대 이상이 이렇게 대폭
긍정적으로 변화한 것은 한류, 즉 겨울연가 드라마의 영향이 크게 미쳤음을 추
측해 볼 수 있다. 표4를 통해서 전체적으로 한류가 한국인에 대해서 관심이 없
었던 일본인들까지 긍정적으로 변화시켰으나, 50-60대를 제외한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사람들은 거의 변화가 없었다.
표5 한국인의 친근감 정도(한류이전
한국인의 친근감 정도(한류이전)
친근감을
느낀다
10-20대
연
30-40대
령 50-60대이상
전체
7.0%
33.9%
17.7%
15.1%
조금
친근감을
느낀다
43.9%
37.3%
35.5%
40.6%
별로
친근감을
느끼지
않는다
36.9%
25.4%
33.9%
33.8%
친근감을
느끼지
않는다
12.1%
3.4%
12.9%
10.4%
***P<0.001
한류이후)
한국인의 친근감 정도 (한류이후)
친근감을
느낀다
14.6%
39.0%
40.3%
25.8%
조금
친근감을
느낀다
63.1%
44.1%
46.3%
55.1%
별로
친근감을
느끼지
않는다
15.3%
13.6%
9.0%
13.4%
친근감을
느끼지
않는다
7.0%
3.4%
4.5%
5.7%
***P<0.001
다음은 「연령」과 「한국인의 친근감 정도(한류이전)」와의 관계를 보면, 표5와
같이 두 사이에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0-20대」는 「조금 친근감을
느낀다」가 44%, 「별로 친근감을 느끼지 않는다」가 37%, 「친근감을 느낀다」와
「친근감을 느끼지 않는다」를 합쳐서 보면 친근감 쪽이 51%, 친근감이 없는 쪽
이 49%였다. 「30-40대」는 「조금 친근감을 느낀다」가 37%, 「친근감을 느낀다」
34% 순으로 많았고, 합쳐서 71%를 차지했다. 그리고 「별로 친근감을 느끼지
않는다」와 「친근감을 느끼지 않는다」를 합쳐서 29%를 차지했다. 「50-60대 이
상」은 「조금 친근감을 느낀다」가 36%, 「별로 친근감을 느끼지 않는다」가 34%
였다. 친근감 쪽을 합쳐서 보면 53%, 친근감이 없는 쪽으로 보면 47%였다. 연
령별로 보면 30-40대가 가장 친근감을 느꼈고, 10-20대와 50-60대가 30-40대
비해 친근감을 덜 느꼈다.
한류이후에 한류이전과 비교해 변화가 있는지 알아보기로 한다.
「연령」과 「한국인의 친근감 정도(한류이후)」와의 사이에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왔다. 표5를 보면
50-60대 이상으로 갈수록 친근감을 더 느끼고, 10-20대로
갈수록 친근감을 덜 느꼈다.
한류이전과 비교했을 때 한류이후에 「10-20대」는 친근감 쪽으로 큰 폭으로
상승했고, 친근감이 없는 쪽이 큰 폭으로 하락했다. 「30-40대」는 친근감 쪽으
일본사회에서의 한류열풍으로 인한 한국인과 재일코리안에 대한 인식변화 ···황 혜 경…275
로 소폭 상승했다. 「50-60대 이상」은 「친근감을 느낀다」가 18%에서 40%로 대
폭 상승했고, 「별로 친근감을 느끼지 않는다」도 34%에서 9%로 대폭 감소했
다. 한류로 인해 50-60대 이상과 10-20대의 일본인들에게 한국인에 대한 친근
감을 많이 주는 계기가 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표6 한국인이 이웃으로 이사 온다면 (한류이전
한국인이 이웃으로 이사 온다면
한국인이 이웃으로 이사 온다면
(한류이전)
(한류이후)
별로
한국인
과 사이
좋게
지냄
10-20대
30-40대
령 50-60대이상
전체
연
한류이후)
18.4%
35.6%
18.8%
22.0%
한국인
한국인
과 조금 뭐라고 과 사이
사이
말할수
좋게
좋게
없다
지내고
지냄
싶지
28.5%
25.4%
31.9%
28.7%
않다
2.5%
3.4%
4.3%
3.1%
50.6%
35.6%
43.5%
45.8%
별로
한국인
과 사이 한국인
좋게
과
지내고 사이좋
싶지 게 지냄
않다
0.0%
0.0%
1.4%
0.3%
22.2%
42.4%
33.3%
29.0%
한국인
한국인
과 조금 뭐라고 과 사이
사이
말할수
좋게
좋게
없다
지내고
지냄
싶지
39.2%
23.7%
39.1%
36.0%
않다
0.0%
0.0%
0.0%
0.0%
38.6%
33.9%
27.5%
35.0%
한국인
과 사이
좋게
지내고
싶지
않다
0.0%
0.0%
0.0%
0.0%
*P<0.05
한국인이 이웃으로 이사 온다면 한국인과 어떻게 지낼 것인가에 관해서 연령
별로 관계를 본 결과(표6), 한류이전에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령
에 관계없이 「뭐라고 말할 수 없다」가 가장 많았고, 30-40대의 경우는 같은
비율로 「한국인과 조금 사이좋게 지냄」이 많았다. 한류이후를 보면 두 사이에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0-20대」는 「한국인과 조금 사이좋게 지냄」
이 39%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뭐라고 말할 수 없다」순 이였다. 「30-40대」
는 「한국인과 사이좋게 지냄」이 42%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뭐라고 말할
수 없다」가 34%로 많았다. 「50-60대 이상」은 「한국인과 조금 사이좋게 지냄」
이 39%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한국인과 조금 사이좋게 지냄」 순이였다.
한류이전과 비교해 한류이후를 보면 전 연령대에서 한국인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큰 폭으로 증가했고, 뭐라고 말할 수 없다가 감소, 그리고 사이좋게 지내
고 싶지 않다는 1명도 나오지 않았다.
여기에서 주목할 수치는 「50-60대 이상」에서 「한국인과 사이좋게 지냄」의 수
치가 19%에서 33%로 큰 폭의 상승이다. 이 표6을 통해서 한류가 한국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50-60대 이상」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가 있다.
276 日本文化學報……第 42輯
(3) 한국관련 역사
정치
식문화에 관한 사항
지금부터는 개인 간의 관계를 넘어서 국가 간의 관계가 되는 「한 일 관계」,
「일본 역사 교과서 왜곡문제」, 「한국역사에 관한 관심도」, 「독도 소유권 문제
일본입장」에 관해서 보도록 한다. 연령에 따른 「한 일 관계(한류이전)」와의
관계를 보면,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0-20대」의 경우는 「뭐라고 말할
수 없다」와 「별로 양호하지 않다」가 거의 비슷한 수치로 가장 많았다. 「30-40
대」의 경우는 「조금양호」가 「뭐라고 말할 수 없다」보다 근소한 차이로 가장
많았다. 「50-60대 이상」의 경우는 「뭐라고 말할 수 없다」가 가장 많았고, 다음
으로 「조금 양호」와 「별로 양호하지 않다」가 같은 비율로 많았다. 한국과 일본
과의 관계에서 「양호」,「조금양호」를 합쳐서 양호하다는 생각과 「별로 양호하지
않다」, 「양호하지 않다」를 합쳐서 양호하지 않다를 비교해 보았을 때 30-40대
는 양호하다는 의견이 더 많았고, 10-20대와 50-60대 이상은 양호하지 않다는
표7 한 일 관계(한류이전
한류이후)
한 일 관계(한류이전)
양호
10-20대
연
30-40대
령 50-60대이상
전체
0.7%
9.8%
2.9%
3.3%
조금
양호
20.7%
29.5%
27.5%
24.4%
한 일 관계(한류이후)
뭐라고
별로
양호
말할수
양호
하지 양호
없다
35.7%
27.9%
33.3%
33.3%
하지않다
35.0%
23.0%
27.5%
30.4%
않다
7.9%
9.8%
8.7%
8.5%
5.6%
13.1%
14.7%
9.6%
조금
양호
50.3%
44.3%
48.5%
48.5%
뭐라고
별로
양호
말할수
양호
하지
없다
27.3%
24.6%
19.1%
24.6%
하지않다
14.7%
16.4%
13.2%
14.7%
않다
2.1%
1.6%
4.4%
2.6%
*P<0.05
의견이 많았다. 「뭐라고 말할 수 없다」와 「별로 양호하지 않다」는 10-20대가
가장 많음을 알 수가 있다.
한류이후의 「연령」과 「한 일 관계(한류이후)」를 보면 둘 사이에 관련이 없
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령에 관계없이 조금 양호하다는 의견이 가장 많았다.
한류이전과 한류이후를 비교해 보면, 「뭐라고 말할 수 없다」와 「양호하지 않
다」는 의견이 「양호하다」는 의견으로 바뀐 것을 수치를 통해서 볼 수가 있다.
특히 50-60대 이상과 10-20대의 한류이전의 「양호」와 「조금양호」의 수치가 급
증한 것을 볼 수 가 있다.
표7을 통해서 전 연령이 한류로 인해서 한 일관계가 많이 호전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일본사회에서의 한류열풍으로 인한 한국인과 재일코리안에 대한 인식변화 ···황 혜 경…277
표8 한국 역사에 관한 관심도(한류이전
한류이후)
한국 역사에 관한 관심도(한류이전) 한국 역사에 관한 관심도(한류이후)
매우
흥미
10-20대
연
30-40대
령 50-60대이상
전체
있다
3.2%
4.8%
8.6%
4.8%
흥미
있다
22.3%
29.0%
32.9%
26.3%
뭐라고
말할수
없다
39.5%
25.8%
30.0%
34.3%
전혀
매우
흥미
흥미
없다
12.7%
9.7%
10.0%
11.4%
있다
5.7%
6.5%
13.0%
7.6%
흥미
없다
22.3%
30.6%
18.6%
23.2%
흥미
있다
36.9%
48.4%
49.3%
42.4%
뭐라고
없다
30.6%
21.0%
27.5%
27.8%
전혀
흥미
말할수
흥미
없다
없다
8.3%
3.2%
2.9%
5.9%
18.5%
21.0%
7.2%
16.3%
*P<0.05
연령에 따른 일본인의 한국 역사에 관한 관심도를 보기로 한다. 「연령」과 「한
국역사에 관한 관심도(한류이전)」를 표8과 같이 보면 관련이 없는 것으로 나
왔다. 「10-20대」의 경우, 「뭐라고 말할 수 없다」가 40%로 가장 많았고, 「흥미
있다」와 「흥미 없다」가 각각 22%를 차지했다. 「30-40대」의 경우는 「흥미 없
다」, 「흥미 있다」 순으로 각각 거의 30%를 차지했고, 「뭐라고 말할 수 없다」
가 많았다. 「50-60대 이상」의 경우, 「흥미 있다」가 33%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
로 「뭐라고 말할 수 없다」, 「흥미 없다」 순이였다.
다음은 한류이후의 「연령」과 「한국 역사에 관한 관심도」와의 관계를 보면 두
사이에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왔다. 한류이후에 연령이 높아질수록 흥미가 있
었고, 연령이 낮아질수록 흥미가 없었다. 한류이전과 한류이후를 비교해보면,
전 연령층에서
「흥미 있다」가 큰 폭으로 상승했고, 「흥미 없다」가 큰 폭으로
감소했다. 한류로 인한 한국에 대한 관심이 한국역사에 관한 관심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표9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문제(한류이전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문제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문제
(한류이전)
(한류이후)
왜곡이
있다
10-20대
연
30-40대
령 50-60대이상
전체
한류이후)
7.0%
20.0%
14.1%
11.3%
부분적
왜곡이
있다
44.3%
41.7%
28.1%
40.1%
왜곡은
없다
25.9%
21.7%
45.3%
29.4%
절대
왜곡은
없다
22.8%
16.7%
12.5%
19.1%
왜곡이
부분적
왜곡은
있다
왜곡이 있다
없다
10.8%
15.0%
15.9%
12.8%
48.7%
48.3%
34.9%
45.6%
21.5%
20.0%
39.7%
25.3%
절대
왜곡은
없다
19.0%
16.7%
9.5%
16.4%
**P<0.01
그러면 한 일 관계에서 항상 마찰이 되고 있는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문제에
관해서 보기로 한다. 표9와 같이 「연령」과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문제(한류이
전)」와의 관계를 보면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왔다. 「10-20대」의 경우 「부분적
278 日本文化學報……第 42輯
왜곡이 있다」가 44%로 가장 많았고 「왜곡이 있다」와 「부분적 왜곡이 있다」를
합쳐 왜곡이 있다로, 「왜곡은 없다」와 「절대 왜곡은 없다」를 합쳐서 왜곡이 없
다로 나눠 보면, 각각 51%, 49%로 거의 반반 이였다. 「30-40대」의 경우는 「부
분적 왜곡이 있다」가 41%로 가장 많았고, 왜곡이 있다 없다로 나눠서 보면,
왜곡이 있는 쪽이 62%, 없는 쪽이 38%로 있다는 의견이 많았다. 「50-60대 이
상」의 경우 「왜곡은 없다」가 46%로 가장 많았고, 왜곡이 있는 쪽과 없는 쪽으
로 나눠서 보면, 있는 쪽이 42%, 없는 쪽이 58%로 없다는 의견이 더 많음을
알 수가 있다.
즉, 30-40대 일수록 일본 역사교과서가 왜곡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
고, 50-60대 이상 일수록 왜곡되지 않았다는 의견이 강했다.
그리고 한류이전과 이후를 비교해 보면, 전 연령이 한류이후에 왜곡이 있는
쪽으로 약간 증가해, 한류의 영향은 거의 받지 않았음을 추측할 수가 있다.
표10 독도 소유권 문제 일본입장(한류이전
매우
찬성
10-20대
30-40대
령 50-60대이상
전체
연
10.8%
8.9%
13.8%
11.1%
한류이후)
독도 소유권 문제
독도 소유권 문제
일본입장(한류이전)
일본입장(한류이후)
뭐라고
찬성
말할수
23.4%
35.7%
41.5%
30.1%
없다
63.9%
51.8%
38.5%
55.6%
반대
1.3%
3.6%
1.5%
1.8%
절대
매우
반대
찬성
0.6%
0.0%
4.6%
1.4%
10.8%
7.3%
16.9%
11.5%
뭐라고
찬성
말할수
반대
24.7%
38.2%
36.9%
30.2%
없다
63.9%
51.8%
38.5%
55.6%
1.3%
3.6%
1.5%
1.8%
*P<0.05
절대
반대
0.6%
0.0%
4.6%
1.4%
*P<0.05
표10과 같이 「연령」과 「독도 소유권 문제(한류이전)」와의 관계를 보면 관련
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0-20대」와 「30-40대」의 경우는 「뭐라고 말할 수
없다」가 각각 64%, 52%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찬성」이 각각 23%, 36%를
차지했다. 「50-60대 이상」의 경우 「찬성」이 42%, 다음으로 「뭐라고 말할 수
없다」가 39%로 가장 많았다. 연령이 높아질수록 찬성 쪽이 많아졌으며, 연령
이 낮아질수록 뭐라고 말할 수 없다가 많았다.
한류이후의 「연령」과 「독도 소유권 문제(한류이후)」의 관계를 보면 한류이전
과 같이 한류이후에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 연령이 「뭐라고 말할
수 없다」가 가장 많았으며, 다음으로 「찬성」이 많았다. 한류이전과 마찬가지로
연령이 높을수록 찬성 쪽이 많아졌고, 연령이 낮을수록 뭐라고 말할 수 없다가
많았고, 한류이전과 이후를 비교했을 때 거의 변화가 없었다.
즉, 한류로 인한 일본인의 한국인과 한국에 대한 인식이 많이 호전되었지만,
일본사회에서의 한류열풍으로 인한 한국인과 재일코리안에 대한 인식변화 ···황 혜 경…279
한 일 관계에서 항상 문제시 되는 독도 소유권 문제 등의 역사 외교적인 문
제까지는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표11 한국요리 섭취도 (한류이전
한국요리 섭취도 (한류이전)
연
령
10-20대
30-40대
50-60대이상
전체
자주
가끔
먹는다
먹는다
5.7%
21.0%
7.1%
9.3%
44.3%
37.1%
32.9%
40.0%
거의
전혀
먹지
먹지
않는다
34.8%
37.1%
42.9%
37.2%
않는다
15.2%
4.8%
17.1%
13.4%
한류이후)
한국요리 섭취도 (한류이후)
자주
가끔
먹는다
먹는다
7.0%
23.0%
13.0%
11.8%
51.9%
41.0%
43.5%
47.6%
거의
전혀
먹지
먹지
않는다
30.4%
31.1%
31.9%
30.9%
않는다
10.8%
4.9%
11.6%
9.7%
**P<0.01
*P<0.05
다음은 「연령」과 「한국요리 섭취도 (한류이전)」와의 관계를 보면, 표11과 같
이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0-20대」의 경우 「가끔 먹는다」가 44%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거의 먹지 않는다」가 35%였다. 「30-40대」의 경우 「가
끔 먹는다」와 「거의 먹지 않는다」가 같은 비율로 각각 37%이고, 다음으로 「잘
먹는다」가 21%로 많았다. 「50-60대 이상」의 경우 「거의 먹지 않는다」가 43%,
다음으로 「가끔 먹는다」가 37%로 많았다. 「자주 먹는다」와 「가끔 먹는다」를
합치고, 「거의 먹지 않는다」와 「전혀 먹지 않는다」를 합쳐 먹는다 먹지 않는다
로 나눠서 보면 섭취율이 「30-40대」가 58%, 42%로 섭취하지 않는 사람보다
약간 많았고, 「10-20대」는 각각 50%로 같았고, 「50-60대 이상」은 40%, 60%로
섭취하지 않은 비율이 더 많았다.
그러면 한류이후에는 어떠한 변화가 있는지 보기 위해서 「연령」과 「한국요리
섭취도 (한류이후)」와의 관계를 보면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 연령이
「가끔 먹는다」가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거의 먹지 않는다」가 많았다. 섭취율
은 30-40대가 가장 많았고, 50-60대 이상이 가장 적었다. 그러나 한류이전과
한류이후를 비교해 보면 섭취율이 증가했음을 알 수가 있고, 무엇보다도
50-60대 이상이 많이 상승했음을 알 수가 있다.
표12 한국김치 선호도 (한류이전
한국김치 선호도 (한류이전)
매우
연
령
좋아한다
10-20대
31.8%
30-40대
28.3%
50-60대이상
24.2%
전체
29.3%
좋아한다 싫어한다
51.3%
56.7%
47.0%
51.4%
13.0%
15.0%
25.8%
16.4%
매우
한류이후)
한국김치 선호도 (한류이후)
매우
싫어한다 좋아한다
3.9%
33.1%
0.0%
31.7%
3.0%
25.0%
2.9%
30.9%
좋아한다 싫어한다
50.0%
60.0%
54.4%
53.2%
13.0%
8.3%
17.6%
13.1%
매우
싫어한다
3.9%
0.0%
2.9%
2.8%
280 日本文化學報……第 42輯
표12와 같이 「연령」과 「한국김치 선호도 (한류이전)」와의 관계를 보면 관련
이 없는 것으로 나왔다. 전 연령이 「좋아한다」가 50%전후로 가장 많았고, 다
음으로 「10-20대」와 「30-40대」의 경우는 「매우 좋아한다」 순이고, 「50-60대
이상」은 「싫어한다」가 26%, 「매우 좋아한다」가 24%로 비슷했다. 한류이후를
보면 전 연령이 「좋아한다」가 많고, 다음으로 「매우 좋아한다」 순이였다. 한류
이전과 한류이후를 비교해보면, 10-20대는 거의 변화가 없었고, 30-40대에서
50-60대 이상 순으로 약간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4) 재일코리안에 관련된 사항
다음은 한류로 인한 일본인의 재일코리안에 대한 인식을 연령별로 보기 위해
서 「재일코리안의 인식」, 「재일코리안의 친근감 정도」, 「주변에 재일코리안이
있다면 사이좋게 지낼 것인가」와의 관계를 보기로 한다.
재일코리안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전 논문 황(2008)참조.
표13 재일코리안의 인식(한류이전
재일코리안의 인식(한류이전)
매우
10-20대
연
30-40대
령 50-60대이상
전체
긍정
5.9%
9.1%
1.6%
5.5%
긍정적
37.9%
49.1%
49.2%
42.8%
관심
없음
51.6%
32.7%
44.4%
46.1%
부정적
3.3%
5.5%
4.8%
4.1%
한류이후)
재일코리안의 인식(한류이후)
매우
매우
부정
1.3%
3.6%
0.0%
1.5%
긍정
6.5%
10.9%
11.1%
8.5%
긍정적
49.0%
61.8%
66.7%
55.7%
관심
없음
40.5%
20.0%
19.0%
31.4%
부정적
2.6%
3.6%
3.2%
3.0%
매우
부정
1.3%
3.6%
0.0%
1.5%
*P<0.05
표13의 「연령」과 「재일코리안의 인식(한류이전)」과의 관계를 보면, 관련이 없
는 것으로 나타났다. 「10-20대」의 경우 「관심 없음」이 52%로 가장 많았고, 다
음으로 「긍정적」이 38%, 「30-40대」와 「50-60대 이상」의 경우 「긍정적」이 각
각 49%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관심 없음」이 33%, 44%를 차지했다. 전체
적으로 재일코리안에 관해서 관심이 없거나 긍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면 한류이후에는 어떠한 변화가 있는지 보기 위해서 「연령」과 「재일코리
안의 인식(한류이후)」과의 관계를 보면(표13),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령이 높아질수록 긍정적인 의견이 많았고, 연령이 낮을수록 관심 없다는 의
견이 많았다.
한류이전과 한류이후를 비교해 보면, 연령이 높아질수록 매우긍정과 긍정적이
급증했고, 관심 없음은 대폭 감소했음을 알 수가 있다. 한편, 전 연령에서 매우
부정이였던 수치는 전혀 변함이 없음을 알 수가 있다.
일본사회에서의 한류열풍으로 인한 한국인과 재일코리안에 대한 인식변화 ···황 혜 경…281
특히, 「50-60대 이상」의 경우 「매우긍정」이 2%에서 10%로 증가했으며, 「긍
정적」도 49%에서 67%로 급증, 「관심 없음」도 45%에서 19%로 급감했다. 이것
은 50-60대 이상의 사람들의 역사적인 요인과 배경으로 재일코리안에 관해서
무관심했던 사람들에게 한류는 재일코리안의 이미지를 바꾸는 큰 계기가 되었
음을 짐작할 수 가 있다.
표14 재일코리안의 친근감 정도(한류이전
재일코리안의 친근감 정도
재일코리안의 친근감 정도
(한류이전)
(한류이후)
친근감을
느낀다
연
령
10-20대
30-40대
50-60대이상
전체
한류이후)
10.8%
35.6%
16.2%
17.3%
조금
친근감을
느낀다
28.7%
33.1%
27.9%
41.2%
별로
친근감을
느끼지
않는다
49.5%
23.5%
48.3%
31.6%
친근감을
느끼지
않는다
9.8%
10.5%
7.6%
9.9%
***P<0.001
친근감을
느낀다
13.4%
40.7%
29.4%
22.9%
조금
친근감을
느낀다
45.2%
39.1%
54.9%
60.4%
별로
친근감을
느끼지
않는다
36.2%
15.6%
27.2%
12.5%
친근감을
느끼지
않는다
5.1%
3.4%
2.9%
4.2%
***P<0.001
다음은 「연령」과 「재일코리안의 친근감 정도(한류이전)」와의 관계를 표 14를
통해서 보면,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왔다. 「10-20대」와 「50-60대 이상」의 경우
「별로 친근감을 느끼지 않는다」가 각각 50%, 48%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조금 친근감을 느낀다」가 29%, 28%로 많았다. 한편 「30-40대」의 경우 「친근
감을 느낀다」가 36%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조금 친근감을 느낀다」가 33%
로 많았다. 30-40대의 경우는 거의 70%정도가 한류이전에도 재일코리안에게
친근감을 느끼고 있었고, 다른 연령층에서도 「별로 친근감을 느끼지 않는다」와
「친근감을 느끼지 않는다」를 합쳐 친근감을 느끼지 않는 쪽이 강했다.
한류이후의 「연령」과 「재일코리안의 친근감 정도 (한류이후)」와의 관계를 보
면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0-20대」와 「50-60대 이상」의 경우 「조금
친근감을 느낀다」가 가장 많아서 각각 45%, 55%였다. 다음으로는 「10-20대」
의 경우 「별로 친근감을 느끼지 않는다」가 36%, 「50-60대 이상」의 경우는 「친
근감을 느낀다」가 30%로 많았다. 「30-40대」의 경우는 「친근감을 느낀다」와
「조금 친근감을 느낀다」가 거의 각각 40%로 가장 많았다. 여기에서 「친근감을
느낀다」와 「조금 친근감을 느낀다」를 합쳐서 친근감을 느끼는 쪽으로 보면
50-60대 이상이 85%, 30-40대가 80%, 10-20대가 58% 순이였다. 50-60대 이
상, 30-40대, 10-20대 순으로 재일코리안에 대해서 친근감을 더 느끼고 있었
다.
282 日本文化學報……第 42輯
한류이전과 한류이후를 비교해 보면, 전체적으로 별로 친근감을 느끼지 않던
사람들이 한류로 인해서 친근감을 느끼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또한 연령별로
보면 한류이전과 다르게 50-60대 이상에서 가장 친근감을 보이고 있었다.
30-40대의 경우는 처음부터 친근감을 느꼈지만 한류이후 소폭 증가 한 반면
에, 50-60대 이상의 경우는 별로 친근감을 느끼지 않았던 사람들이 대폭으로
친근감을 느끼게 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한류이후 50-60대 이상의 이러한 변
화는 과거의 재일코리안에 대한 이미지를 한류로 하여금 재인식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표15 주변에 재일코리안이 있다면 사이좋게 지낼 것인가
(한류이전
한류이후)
주변에 재일코리안이 있다면
사이좋게 지낼 것인가 (한류이전)
별로
사이
좋게
지냄
10-20대
30-40대
령 50-60대이상
전체
연
19.1%
38.6%
17.6%
22,7%
조금
사이
좋게
지냄
33.8%
24.6%
29.4%
30.9%
뭐라고
말할수
없다
44.6%
33.3%
50.0%
43.6%
사이
좋게
지내고
싶지
않다
1.9%
3.5%
2.9%
2.5%
주변에 재일코리안이 있다면
사이좋게 지낼 것인가(한류이후)
별로
사이
좋게
사이
조금
뭐라고
지내고
좋게
사이좋
말할수
싶지
지냄
게 지냄
없다
않다
0.6%
0.0%
0.0%
0.4%
22.9%
43.1%
30.9%
29.0%
39.5%
27.6%
35.3%
36.0%
35.7%
27.6%
32.4%
33.2%
사이좋
사이좋
게
게
지내고
지내고
싶지
싶지
않다
1.3%
1.7%
1.5%
1.4%
않다
0.6%
0.0%
0.0%
0.4%
표 15와 같이 「연령」과 「주변에 재일코리안이 있다면 사이좋게 지낼 것인가
(한류이전)」와의 관계를 보면 두 사이에 관련이 없었다. 「10-20대」와 「50-60대
이상」의 경우, 「뭐라고 말할 수 없다」가 각각 45%, 50%로 가장 많았고, 다음
으로 「조금 사이좋게 지냄」이 34%, 29% 순이였다. 한편, 「30-40대」의 경우는
「사이좋게 지냄」이 39%로 가장 많았고, 「뭐라고 말할 수 없다」가 33%로 다음
순이였다.
한류이후의 「연령」과 「주변에 재일코리안이 있다면 사이좋게 지낼 것인가(한
류이후)」와의 관계를 보면 관련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10-20대」와 「50-60
대 이상」의 경우는 「조금 사이좋게 지냄」이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뭐라고 말
할 수 없다」 순이였다. 반면에 「30-40대」의 경우는 「사이좋게 지냄」이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조금 사이좋게 지냄」, 「뭐라고 말할 수 없다」가 많았다.
한류이전과 한류이후를 비교해 보면, 전체적으로 「뭐라고 말할 수 없다」가
「사이좋게 지냄」과 「조금 사이좋게 지냄」으로 변한 것을 알 수가 있다. 구체적
일본사회에서의 한류열풍으로 인한 한국인과 재일코리안에 대한 인식변화 ···황 혜 경…283
으로 「사이좋게 지냄」과 「조금 사이좋게 지냄」을 합쳐서 사이좋은 쪽으로 보
면, 한류이전에는 저 연령순으로 53%, 64%, 47% 이였다. 반면, 한류이후에
63%, 71%, 66%로 증가했음을 알 수가 있다. 이 수치를 보면 50-60대 이상의
경우 급증한 것을 볼 수 있다. 50-60대 이상의 경우 한류가 계기가 되어 재일
코리안에 대한 이미지가 긍정적으로 바뀌었고, 재일코리안과의 사귐에 있어서
도 많이 개방적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실증데이터를 통해서 입증한 것이다.
4. 연령별 고찰
지금까지의 결과를 통해서 각 연령별로 특징을 각각 나눠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10-20대
10-20대는 한류이전에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서 관심이 없던 사람들이 한류이
후에는 긍정적인 이미지로 바뀌었는데 그 이유에 관해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10-20대의 경우, 한국을 전 세계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던 1988년 올림픽은
조사 시점으로부터 17년 전으로 10-20대에게는 유아시절로 관심을 줄 수 없었
다. 한편, 2002년
한 일 월드컵은 5년 전 일로 한국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첫번째 계기가 되었고, 또한 한류가 그들에게 한국에 대해 더 관심을 갖게 한
계기가 되어 한류이후에 긍정적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가 있다. 즉, 무관심에서
관심을 갖게 한 큰 계기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2) 30-40대
30-40대의 일본인은, 한국인과 한국에 대한 이미지부터 거의 모든 항목에 있
어서 한류이전부터 다른 연령에 비해 두드러지게 긍정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그것에 관해서 2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번째, 일본 법무성 출입국 관리 통계에 따르면, 1991년 출국자 수는 1063만
명 정도로 성별, 연령별로 보면 40대 남성이 170만 명, 다음으로 20대 여성이
165만 명으로 많았다. 이 시기 일본인의 해외 여행지 중에서 아시아 중 한국이
1위 인 것으로 나왔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부터 한국으로의 출국자
가 90만이나 되었으며, 1989년부터 대폭 출국자가 늘어, 1990년과 1991년에는
절정을 이루고 있다. 이 시기는 일본의 버블경제에 따른 엔화가치가 급격히 상
승한 시기로 일본인들의 해외여행이 가장 많은 시기 중 한 시기이다4).
284 日本文化學報……第 42輯
조사 연령대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지금으로부터 거의 17년 전으로 40대 전
후의 많은 여성들이 한국에 다녀 온 것으로 알 수가 있다. 매스컴 등의 간접적
으로 한국을 경험했던 이들은 직접적인 여행을 통해서 한국의 1988올림픽 이
후의 발전된 모습, 쇼핑, 한국음식, 한국문화 등의 여러 가지 한국의 실질적인
모습을 볼 수 있었고, 그것으로 인해서 좋든 나쁘든, 한국 이미지를 한류이전
부터 갖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해 볼 수가 있었다.
두번째, 정(1999)의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의 이미지의 제3기를 생각해 볼 수
가 있다. 제3기는 1984년부터 1995년경으로, 이 시기는 한국에 대한 일본인의
관심을 문화적 오락적 대중적인 것으로 변화시키는 계기가 된다. 이때는 해
외도항 자유화에 따른 일본을 방문하는 한국인 수와 한국을 방문하는 일본인
수가 많았다. 한 일상호교류가 시작되어, 이문화로서의 관심이 높아졌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일본인의 한국에 대한 이미지는 ‘무서운 나라’ ‘불쌍한 나라’
에서 ‘보통 나라’ ‘발전한 나라’로 인식해, ‘이문화로서의 한국’으로 변화한 것으
로, 이 시기의 영향이 30-40대에게 많이 미쳤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따라서 본 조사의 30-40대의 연령층에 있어서는 각 항목에 있어서 한류이전
이나 한류이후가 크게 차이가 없고, 다른 연령층에 비해 한국인에 대한 이미지
등, 여러 항목에서 긍정적으로 보였다고 생각되어진다.
3)50-60대 이상
50-60대 이상은 한류이전에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서 관심이 없던 사람들이
한류이후에는 급격히 긍정적인 이미지로 바뀌었는데 그 이유에 관해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일본인의 한국에 대한 관심변화를 정(1999)의 제1기와 제2기에 의하면, 제1기
는 일본이 패전한 1945부터 한 일기본조약이 조인된 1965년까지로 일본인의
한국인에 대한 관점은 매우 부정적 이였으며, 그것은 한반도에 사는 코리안 보
다는 재일코리안에 대한 결과였다. 그리고 한국에 관해서는 무관심과 관심회피
로 여겨졌다. 제2기는 1965년 한 일 국교 정상화로부터 1984년까지의 약 20년
동안으로 이 시기의 한국은 일본인에게 있어서 정치적으로 관심은 고양되었지
만, 매력이 없는 나라였다. 가정이나 이웃 사이에서 소곤거리는 한국인에 대한
부정적인 소문, 거기에 재일코리안 사회에서 되풀이된 남북한의 상호비방과 중
상모략 등이 일본인에게는 이웃나라에 대한 무관심과 관심회피를 지속화 시켰
다.
4)장부영(1995) 관광 한국의 미래를 위한 일본인의 해외여행 동향분석 , 최고관리자 과정
논문집, 경상대학교 경영행정대학원, pp.138-139.
일본사회에서의 한류열풍으로 인한 한국인과 재일코리안에 대한 인식변화 ···황 혜 경…285
일본인의 한국인에 대한 인식을 구스노키 조사에서, 일본인 학생의 여러 민족
에 대한 호감도에서 1939년에는 5위를 차지했으나, 일본이 패전한 이후인 1949
년에는 15위로 가장 비호감으로 나타났다. 그 이유를 패전 전에 조선인과 공유
하고 있었던 운명공동체의 상실과, 패전 후 일본 사회에서 이루어진 조선인의
행위가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던 것으로 설명했다5). 그 조선인들 중 많은 사람
들이 한국으로 돌아갔지만, 돌아갈 경비가 없어서, 한국의 정치적 불안, 여러
가지 사정으로 귀국을 못한 조선인들은 일본에서 살아가는데 여러 가지의 차
별과 제약되는 요소가 많았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생계를 위해서 나쁜
소행을 일으키는 재일조선인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한 사회현상 때문
인지 정(1999)은 일본인들에게 ‘무법’ ‘악당’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는 것이 적
지 않았다고 한다. 그 당시 일본인이 조선인이란 말에서 연상한 이미지는 몇
년 전 일본 통치 아래에 있었던 한반도의 조선인에 대한 이미지라기보다 재일
조선인에 대한 이미지였을 것으로 생각했다. 1949년 조사에서 한국인은 ‘불결
하다’ ‘문화적으로 저급하다’ ‘교활하다’ ‘일본을 업신여긴다’ ‘일본을 증오한다’
‘추악하다’등의 이미지였다. 또한, 1960년대 한국인의 이미지로 와가쓰마와 요
네야마 조사에서, ‘불결’ ‘교활함’ ‘비굴’ ‘무례’ 등으로 이 시기도 일본인이 한국
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했다고 헸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위와 같은 시기에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의 인식은
부정적인 측면이 강했다. 이 시대를 피부로 접하며, 직접적으로 경험하거나, 부
모세대에게 전해들은 50-60대 이상의 일본인들은 한국인에 대한 이미지가 좋
을 수가 없었다. 그 과거의 이미지만을 가지고 평생 살아온 그들에게 한국의
1988올림픽이나, 2002년 한 일 월드컵은 큰 이슈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한류
열풍을 일으킨 겨울연가를 통해서 한국 사람의 부드러운 이미지, 그들을 통한
본인이 예전에 느꼈던 향수 등이, 그들의 마음을 녹이게 되었고, 한국의 이미
지를 재인식 할 수 있는 큰 계기가 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변화된 인식이 재일코리안에도 영향을 미쳐 재일코리안에 대한 인식
도 바꿀 수 있는 큰 계기가 되었다.
5. 결론
이상으로 한류로 인한 일본인의 한국인과 재일코리안에 대한 인식변화를 연
령별로 나눠서 관련성을 보았고, 또한 한류이전과 한류이후도 나눠서 차이를
5)정대균(1999) 『일본인은 한국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 강 pp.17-35.
286 日本文化學報……第 42輯
고찰해 보았다.
그 결과, 연령별로 「한국의 관심정도」에 있어서 관련이 보여져, 한류 붐을 경
험한 지금 시점에서 50-60대 이상이 가장 관심이 많았고, 다음이 30-40대 순
이였다. 또한, 「한국 관심 시점」과의 관계에서도 관련성이 보여져, 10-20대는
2002년 한 일 월드컵 이후가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겨울연가 순이였다.
30-40대는 겨울연가 이후, 2002년 한 일 월드컵이후 순이고, 50-60대 이상은
겨울연가 시청이후, 1988 올림픽이후, 2002년 한 일 월드컵이후로 나타났다.
그리고 전 연령에 관련 없이 대부분이 한류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고, 70%이
상이 한류의 의미를 한국드라마 붐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한류의 관심정도」를
보면 연령과 관련성이 나타나, 50-60대 이상이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30-40
대, 10-20대 순이였다.
다음은 「연령」과 「한국인 인식」 「한국인의 친근감 정도」 「한국인이 이웃으
로 이사 온다면」 「재일코리안 인식」 「재일코리안의 친근감 정도」와의 관계
를 본 결과, 한류이전에는 「한국인 인식」 「한국인의 친근감 정도」 「재일코리
안의 친근감 정도」에 있어서 관련이 있는 것으로, 「한국인이 이웃으로 이사 온
다면」 「재일코리안 인식」에 있어서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류이후
의 관계를 보면, 연령과 위 5개 항목에 있어서 전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타
났다.
그 결과 한류이전에는 다른 연령에 비해 30-40대가 눈에 띄게 긍정적으로 나
타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었다. 그러나 한류이후에는 30-40대보다 10-20대와
50-60대 이상이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50-60대 이상의 경우는 관심
없던 사람들이 위 5개 항목에 있어서 급격히 긍정적인 이미지로 바뀌고 있음
을 수치를 통해서 확인 할 수가 있었다. 즉, 한류로 인해서 전 연령대가 긍정
적인 변화를 가져왔지만, 특히, 50-60대 이상이 한류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세대라고 말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연령」과 「한 일 관계」 「한국 역사에 관한 관심도」 「일본 역사
교과서 왜곡문제」 「독도 소유권 문제 일본입장」과의 관계를 살펴 본 결과, 한
류이전에는 「한 일 관계」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문제」 「독도 소유권 문제
일본입장」에 있어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타나, 30-40대의 경우는 한국의 입
장에서 다른 연령대 보다 긍정적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한국 역사에 관한 관
심도」에 관해서 관련이 없는 것으로 나타나, 연령별로 큰 차이는 없었다.
한편, 한류이후를 보면 「한국 역사에 관한 관심도」 「독도 소유권 문제 일본
입장」에 있어서는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타나, 한국역사는 50-60대가 많은 관
심을 보였고, 독도 소유권 문제에 있어서는 한류이전과 한류이후가 변함이 없
었으며, 50-60대의 경우 오히려 완고하게 느껴져, 한류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
일본사회에서의 한류열풍으로 인한 한국인과 재일코리안에 대한 인식변화 ···황 혜 경…287
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한 일 관계」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문제」에 있
어서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나타나, 연령별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다음은 연령과 음식에 관련된 항목과의 관계를 본 결과, 한류이전 「한국요리
섭취도」에 있어서는 관련성이 나타나, 30-40대가 가장 자주 섭취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김치 선호도」에 있어서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나타나, 전 연
령이 좋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류이후에도 「한국요리 섭취도」는 변함없이
30-40대가 가장 많이 섭취했으며, 「김치 선호도」에 있어서도 한류이전과 큰
차이가 없었다.
이와 같은 결과를 통해서 각 연령별로 특징을 보면, 한류를 통해서 10-20대
는 무관심에서 관심으로, 30-40대는 긍정적에서 더 관심으로, 50-60대는 무관
심 또는 내재적인 부정적에서 많은 관심으로 변화된 것을 실증적 데이타를 통
해서 고찰 할 수가 있었다. 즉, 일본사회에 있어서 한류가 한국 한국인 재일
코리안의 이미지를 연령별로 긍정적으로 변화시켰으며, 특히, 과거의 역사적인
배경으로 인하여 한국에 대해서 극도로 보수적인 50-60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그 전환점이 되었음을 알 수가 있었다.
288 日本文化學報……第 42輯
【参考文献】
김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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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회에서의 한류열풍으로 인한 한국인과 재일코리안에 대한 인식변화 ···황 혜 경…289
要 旨
本稿は韓流による日本人の、韓国
韓国人
在日コリアンに対する認識の変化を年齢別に
わけて関連性をみた。さらに、それを韓流以前と韓流以後に分けて、その差異を考察したもの
である。
その結果、韓国と韓流の関心度においては、50-60代以上が一番関心が多く、次は30-40
代、10-20代順であった。また、韓国への関心視点をみると、年齢別に違う結果が出た。そし
て、年齢と韓国人の認識
韓国人の親密感
韓国人と仲良くするか
在日コリアンの認識
在日コリアンの親密感との関係を見た結果 、 韓流以前には韓国人の認識
感
在日コリアンの親密感においては関連みられ、韓国人と仲良くするか
韓国人の親密
在日コリアンの認
識においては関連がみられなかった。また、韓流以後には上記の5項目において全部関連がみ
られた。その結果、韓流以前には他の年齢と比べて30-40代が目立つほど肯定的に出た。一
方、韓流以後には30-40代より10-20代と50-60代の方がさらに変化された。特に、50-60代
以上の場合、興味がなかった人たちが上記の5項目において、急に肯定的に変化することが
数字からとられた。
また、年齢と韓 日関係 韓国歴史の関心度 日本歴史教科書歪曲問題 独島所有権
問題の日本立場において関連性を見た結果、韓流以前には韓日関係
曲問題
日本歴史教科書歪
独島所有権問題には関連性がみられ、30-40代の場合、他の年齢より韓国の立場
で肯定的にみられた。しかし、韓国歴史の関心度においては関連がみられなく、年齢別に差は
みられなかった。一方、韓流以後をみると、韓国歴史の関心度
独島所有権問題の日本立
場においては関連みられ、韓国歴史は50-60代が興味深く、独島所有権問題においては、他
の項目と違い、韓流以前と韓流以後が変わらず50-60代以上の方が頑固であって、韓流の
影響を全然受けてないことがわかった。そして、韓
日関係
日本歴史教科書歪曲問題にお
いては、年齢別に関連がみられなく、全年齢においての差はみられなかった。
最後に年齢と韓国料理摂取度
キムチ摂取度との関連を見た結果、韓流以前には関連が
みられ、 30-40代が韓国料理をよく摂取することになり 、キムチにおいては関連がみられなかっ
た。韓流以後にも韓国料理においては関連がみられ、同じく30-40代がよく摂取され、またキム
チの場合は関連がみられなく、韓流以前と韓流以後の差がみられなかった。
以上のような結果から年齢別の特徴を考えてみると 、 日本社会の韓流による韓国
人
韓国
在日コリアンにおいて、日本人の10-20代の場合は無関心から関心に、30-40代は肯定
的イメージからさらに関心に、50-60代は無関心あるいは内在されている否定的イメージから急
な関心に変化したことが今回の調査の数字からとられた。
290 日本文化學報……第 42輯
キーワード: 韓流、年齢、韓国、日本人、韓国人、在日コリアン、認識、韓 日関係
투
고 : 2009. 5. 31
1차 심사 : 2009. 6. 13
2차 심사 : 2009. 6. 27
『隠州視聴合紀』の名所和歌
伊藤政彦*
1)
(e-mail : [email protected])
目 次
はじめに
1.「和歌」と鎮魂
2. 流刑の島としての隠岐
3.『隠州視聴合紀』の和歌
(1) 流人たちに対する鎮魂
(2) 統治の安寧を祈る
(3) 新島守としての後鳥羽院への共感
(4) 後鳥羽院に対する追慕
おわりに
はじめに
1667年(寛文7)に出雲松江藩士斎藤豊宣が著した『隠州視聴合紀』は獨島/竹島領
有問題が議論される際に言及されることが多い。それは同書の冒頭「国代記」に見える
「然則日本之乾地、以此州為限矣」との記述に関し「此州」が鬱陵島を指すのか、
隠岐国を指すのか、その解釈によって同島の領有に関する論議の帰趨に少なからぬ影響を
与えるためである。1950年代に日本政府は『隠州視聴合紀』の上掲の記述をもって江戸
時代の日本人が竹島(鬱陵島)が日本の乾=西北の果てであると見、それよりも日本寄り
にある独島/竹島を自国に属するものと考えていたと主張する根拠とした。しかしこの問題につ
いては池内敏(2006)が『隠州視聴合紀』全体にあらわれる「州」の用例を綿密かつ詳
細に検討した結果、同書の他の部分において「州」は隠岐国を指す言葉として使用され
*우송정보대 관광일본어과 조교수
292 日本文化學報……第 42輯
ていることを明確にしたことからも明らかなように、同書の上引用の記述に見える「此州」は
隠岐国を指していると考えるのが妥当である。したがって『隠州視聴合紀』のこの記述を
もって日本の鬱陵島および独島/竹島の領有意識の根拠とするのは無理があると言わざるを
得ない。史料の一部分だけを切り取って判断するのではなく、全体を客観的に読むならば
結論は自ず明らかであろう。
さて、『隠州視聴合紀』が独島/竹島の領有論議の過程で世に広く知られるようにな
り、冒頭でも述べたように現在も同書は独島/竹島の領有問題に関連づけて言及されること
が大部分である。しかし斎藤豊宣は果たして獨島/竹島の領有権を明らかにすることを目的
として『隠州視聴合紀』を著したものなのであろうか。決してそうではあるまい。
『隠州視聴合紀』の構成はまず序および上述の巻1「国代記」がありここで中世以来
の隠岐国全体の歴史が述べられる。ついで巻2以下では隠岐の各地について郷
村
里の単位で地理的特徴が述べられ、それぞれの単位ごとに名所旧跡や故事が紹介され
る。いわば隠岐国の地誌である。すなわち巻2は島後の「周吉郡」について記し、巻3は
同じく島後の「穩地郡」について記す。巻4は島前紀として「知夫郡」と「海部郡」につ
いて一括して記している。1)こうした構成からみると表向きの同書の編纂目的は隠岐国の地
誌を明らかにすることであったように思われる。
それでは『隠州視聴合紀』はどのような事情を背景として編纂されたのであろうか。隠岐
はそれまで江戸幕府の直轄地であったが、松平直政が信州松本から移封され松江藩藩
主となった1638年(寛永15)から同藩の預かりとなった。2)そして1666年(寛文6)に第2代藩主
となった松平綱隆は藩主となるや直ちに父祖の年譜や藩士の由緒を正確に知るための諸書
編纂を藩儒に命じている。そして松平綱隆は父祖や藩士といった人に関する情報収集だけ
でなく土地、すなわち藩の管轄地域のうち未調査であった隠岐国についても詳しく知ろうとし
たと思われる。このような動きが『隠州視聴合紀』の編纂につながったと見られる。3)
上述のように『隠州視聴合紀』を著した斎藤豊宣は出雲松江藩の藩士で1667年(寛文
7)に藩主松平綱隆により隠岐郡代役を命じられている。斎藤は隠岐へ渡って任地をくまなく
巡視しながら古老から伝説や遺聞を集め、地理産物等について書き留めたのであり、それ
が『隠州視聴合紀』である。言うなれば任地に関して藩主へ報告するための報告書であ
る。このような事情を勘案したとき、異質に見えるのが隠岐の風土誌とは直接的に関係のな
いとも言える巻4の最後に収められている「名所和歌」と、神社や仏教寺院の名前を列記
した隠岐の「神名帳」および「国中仏寺」である。
本稿では『隠州視聴合紀』巻4に見える上述の「神名帳」「国中仏寺」「名所和
1) この後に付記として別途「焼火山縁起」と「文覚論」が収録されている。
2) 松尾寿ほか(2005)『島根県の歴史』山川出版社. p.202
3) 池内敏(2006)『大君外交と武威』名古屋大学出版会. p.330
『隠州視聴合紀』の名所和歌 ························································································ 伊藤政彦…293
歌」のうち特に「名所和歌」のもつ意味に対する考察を通して、同書が編纂された目的
について考えてみたい。
1.「和歌」と鎮魂
『隠州視聴合紀』巻4所収の「名所和歌」について考える前に、和歌の機能につい
て見る必要があるだろう。かつて日本人は和歌がどのような機能あるいは働きを持っていると
考えていたのだろうか。この問いに対する答えを端的に表わしている内容が『古今和歌
集』「仮名序」に見える。『古今和歌集』は日本で最初の勅撰和歌集で、その在り方
は以後ながく二十一代集をはじめとする日本の和歌文学の典範となり「仮名序」も以後の
和歌集序文の規範とされて日本の文学論の基礎ともなった。 この『古今和歌集』の「仮名序」では和歌の本質、機能、起源、歌体、題材など
について述べられている。
やまと歌は人の心を種として、万の言の葉とぞ成れりける。(中略)力をも入れずして天地を
動かし、目に見えぬ鬼神をも哀れと思はせ、男女の仲をも和らげ、猛き武人の心をも慰む
るは歌なり。
まず『古今和歌集』の「仮名序」はその冒頭で和歌の本質について「人の心を種とし
て万の言の葉とぞなれりける」すなわち和歌とは人間の心が言葉という形態であらわされたも
のであるとしており、和歌が人間の多様な感情の詩的表現であることを明らかにしている。
次にその機能としては、まず「力をも入れずして天地を動か」すとしている。ここで「天
地」は「天神地祇」を意味する。これは具体的には神に対する祭祀祭礼の際の歌を言
い、のちの時代の神祇歌や大嘗会和歌などに受け継がれている。また天神地祇すなわち
神々をも動かしたとされる和歌と言うと、例えば『小町集』にあるように小野小町が「(日の
照り侍りけるに、雨請ひの和歌詠むべき宣旨ありて)ちはやふる神も見まさば立騒ぎ天の戸川
の樋口開けたまへ」と詠み、雨を得たとする伝説などが想起されよう。
次に「目に見えぬ鬼神をも哀れと思はせ」る働きがあるとしている。「鬼神」とは人間の
目に見えないあの世の人の霊魂を指し、これらをも感激させるというのである。あの世の人の
霊魂、死者に対する歌と言えば上代の場合「万葉集」の部立てにある「挽歌」がこれに
当てはまるだろう。
尋常ではない死に方をした人の霊魂に対して古代人は恐れを抱いた。横死者の魂が祟
りをなす、すなわちデーモン的発動をすることが意識されたのである。こうした荒ぶる死霊を
294 日本文化學報……第 42輯
鎮めるためには葬りまつることが必要と考えられた。そうすることでデーモン的発動を防止する
ことが可能であると考えられたのであるが、4)このことは家を離れて行き倒れて死に、野ざら
しのまま葬られることなく放置されている「行路死人」の死霊に対しても同様であった。『万
葉集』におけるいわゆる「行路死人歌」もこのような「浮遊魂」を鎮魂するために詠まれた
のであり、こうした歌に貫かれている基本的性格については沢瀉久孝が『万葉集注釈』で
「いづれも家郷の妻に思ひを馳せてゐること趣を同じくしてゐる」としているように「家」や
「妻」がうたわれることが指摘されている。行路死人のことを家に、妻に知らせ、霊魂をま
つることで死霊が祟りを起すことを防いだと考えられよう。「鎮魂」とはカミやモノとしてあらわ
れる死者の霊が発現する過剰の威力を統御することであり5)、その手段として歌が用いられ
たのである。そしてそれは例えば次のような歌にも確認することができる。
をちこち
の
しま は おほけど
な ぐは し
さ みね の しま の
ありそ
も
に
いほりて
みれば
なみの おと の
(上略)彼此之 嶋者雖多 名細之 狹岑之嶋乃 荒磯面爾 廬作而見者 浪音乃 しげき はま へ
を
しき たへ の
まくら に
なして
あら とこに
ころふす きみ が
いへ しらば
ゆきて
も
つげむ
つま
しらば
茂浜邊乎 敷妙乃 枕爾爲而 荒床 自伏君之 家知者 往而毛將告 妻知者 き
も
とはまし
を
たま ほこ の
みち だ
に
しらず
おほほしく
まち か こふ ら
む
はしき
つま ら
は
來毛問益乎 玉鉾之 道太爾不知 鬱悒久 待加戀良武 愛伎妻等者(卷2-220) これは「讚岐狹岑嶋視石中死人柿本朝臣人麻呂作歌一首 幷短歌」の一部分であ
るが、人麻呂は「狹岑嶋」の岩の上で死んでいる人を見てこのような歌を詠んだ。野垂れ
死にした名も知らぬ人の霊魂に思いを馳せて鎮魂しているのである。和歌はこのように家郷
や家族のもとを離れて死んだ人の魂、すなわち「浮遊魂」を慰め祟りを防ぐ鎮魂の機能を
持つと古くから考えられていたのである。
2. 流刑の島としての隠岐
隠岐では家郷や家族のもとを離れ、恨みを呑んで死んだ人が多かったであろうことが容
易に想像できる。それは隠岐が古く奈良時代から江戸時代に至るまで流刑の地であったた
めである。日本における流刑は古くは『日本書紀』允恭天皇24年6月条に軽大娘を伊予
に流した記事などが見えるが、一定の法規として史書に見えるのは『続日本紀』聖武天
皇724年(神亀元)3月庚申条に
4) 神野志隆光(1992)『柿本人麻呂研究』塙書房. p.384
5) 多田一臣(1991)『万葉歌の表現』明治書院. p.169
『隠州視聴合紀』の名所和歌 ························································································ 伊藤政彦…295
庚申 、 定諸流配遠近之程 。 伊豆
方
伊予為中 、 越前
房
常陸
佐渡
隠岐
安房
常陸
佐渡
隠岐
土佐六国為遠 、 諏
安芸為近 。 (庚申 、 諸の流配の遠近の程を定む 。 伊豆
土佐の六国を遠とし、諏方
伊予を中とし、越前
安
安芸を近
とす。)
とあるのが初めである。隠岐はここで「遠流」の地の一つとされた。実際に740年(天平
12)には藤原広嗣の乱に連座して広嗣の第6子であった藤原田麻呂がこの地に流されてい
る(『続日本紀』延暦2年3月19日藤原田麻呂薨伝)。奈良時代にはこの他にも742年(天
平14)に名草直高根の女が隠岐国へ配流になっており(『続日本紀』天平14年10月14日
条)、752年(天平勝宝4)8月17日に京師の巫覡十七人を伊豆、隠岐、土佐等遠国へ配
流したとの記事が同じく『続日本紀』に見える。さらに763年(天平宝字7)12月29日には造
東大寺判官正六位葛井連根道が「酒を飲みて言語(かたら)ふこと時の忌諱に渉(わた)れ
るに坐(つみ)せられて」隠岐に配流となり、764年(天平宝字8)9月18日には藤原仲麻呂の
乱(恵美押勝の乱)に際して仲麻呂の妻子徒党34人が斬られた中で六子であった刷雄だ
けが幼少より禅行を修めたことにより死を免れ隠岐国へ配流されている(『続日本紀』)。
次いで764年(天平宝字8)10月9日には藤原仲麻呂と共謀したかどにより船親王が配流さ
れ、785年(延暦4)9月24日には藤原種継暗殺に連座して大伴家持の子右京亮大伴永主
が隠岐国へ流されている(『日本紀略』)。このように奈良時代を通じて隠岐は主に政治
犯の配流の地となっていた。
さらに平安時代に入って927年(延長5)年に成った『延喜式』にも
凡流人応配者依罪軽重、各配三流謂近中遠処、従京計文。延流移人者、省定配所
申官具録犯状、下符所在並配所。其路程者従京為計。伊豆 去京 七百七十里 安房一千百九十里 常陸 一千五百七十五里 佐渡 一千三百二十五里 隠岐 九百十里
とあって平安時代以降も一貫して流人たちが送られたことがわかる。平安時代には遣唐副
使としての乗船を拒否した小野篁が838年(承和5)に、承和の変で時の仁明天皇に対し謀
反を企てたとされた伴健岑が842年(承和9)に、応天門の火災に際して放火犯とみなされた
伴中庸などが866年(貞観8)に、安和の変で謀反を企てたとの密告をされた藤原千晴が
969年(安和2)に、同族の平維衡と伊勢国の覇権をめぐって抗争し自身の非を認めなかった
平致頼が998年(長徳4)にそれぞれ隠岐へ流されている。
中世に入ってからも継続して隠岐は配流の地であったが、特筆すべきは鎌倉時代、
1221年(承久3)に流された後鳥羽上皇と1332年(元弘2)に配流された後醍醐天皇であろ
う。
296 日本文化學報……第 42輯
後鳥羽上皇は当時台頭しつつあった武士政権である鎌倉幕府に対抗して強硬な政策を
取ってきたが、ついに1221年(承久3)5月14日に時の鎌倉幕府執権であった北条義時追
討の院宣を出し、畿内、近国の兵を召集して「承久の乱」を起こした。しかし鎌倉幕府
の大軍に完敗してしまう。6月15日に鎌倉幕府軍は京都に入って首謀者の処分を始め、後
鳥羽上皇は7月6日に鳥羽殿に移されて13日にはわずかに藤原清房、西御方、伊賀局、
和気長成、藤原能茂など数名とともに京都を出発、8月5日に配流先の隠岐国阿摩郡苅
田郷の行在所に到着したのであった。6)上皇は19年にわたる在島の末、京都に戻ることなく
1239年(延応元)にこの隠岐の行在所で崩御した。後鳥羽上皇は『隠州視聴合紀』にも
随所で紹介され、後でも触れるようにその和歌が「名所和歌」に採られている。また後醍
醐天皇は1324年(正中元)の「正中の変」そして1331年(元弘元)の「元弘の変」という2
度の倒幕計画に失敗して1332年(元弘2)に隠岐へ流された。井上寛司氏の調査によると
古代中世の隠岐の流人は文献上に見える確実な例だけでも古代40名、中世11名にのぼ
るという。 7)「上御一人」と呼ばれた天皇や上皇をも含めた多くの人々が隠岐へ配流さ
れ、そのうちには赦されることなく隠岐でこの世を去った流人も少なくなかったことであろうと思
われる。
時代が下って江戸時代に入ってからも蹴鞠と和歌の家として知られた飛鳥井家の飛鳥井
雅賢が1608年(慶長13)に遊蕩の罪に問われて隠岐に流されている。また1661年(寛文元)
には京都智積院住職出入につき罪を得た僧存識、諶盛、尊与らが隠岐に配流されるなど
している。
また『隠州視聴合紀』が著わされた時代よりも後になるが、江戸幕府第8代将軍の徳
川吉宗により編纂が計画推進された江戸時代の基本法典である『公事方御定書』の遠
島の条には
江戸より流刑の者、大島、八丈島、三宅島、新島、神津島、御蔵島、利島右七島
の内に遣はし、京、大坂、西国、中国より流罪の分は薩摩五島島々 、隠岐、天草に
遣はす
とあって京、大坂、西国、中国からの流人を隠岐に流すことが定められている。貞享
(1684~1688)のころまでは僧侶を含めて士分以上の身分の流人が多かったが、その後は
一般庶民の流刑地にもなった。このように隠岐は古代から近世にいたるまで天皇から名もな
き無数の人々が流された。
江戸時代の場合、直接的には村養いの形で各村の庄屋が流人の監督にあたったという
6) 田中豊治(1979)『隠岐島の歴史地理学的研究』古今書院. p.119
7)
井上寛司(1991)「文献からみた古代 中世の隠岐の流人」『隠岐流人に関する研究』平成2年度科学研究
費補助金(一般研究B)研究成果報告書所収. p.46
『隠州視聴合紀』の名所和歌 ························································································ 伊藤政彦…297
が、流人は結局のところ郡代、代官の監督下に置かれていたから隠岐郡代役であった斎
藤豊宣も古今の流人について見聞するところが多かったであろうことが推察されるのである。
3. 『隠州視聴合紀』の和歌
(1) 流人たちに対する鎮魂
さて、はじめにも述べたように『隠州視聴合紀』の巻4には「名所和歌」が収録されて
いる。それぞれ「鼓嵩」「隠岐海」「隠岐小島」「小峯島」「中港」「隠岐外山」
「高田山」「籬島」「西里」「成澤池」「御陵 葛田山」と題された和歌であるが、
ここでは斎藤豊宣がそれらの和歌をどのような意図のもとに『隠州視聴合紀』に収録したの
かについて考えてみたい。まず、前章でみたような隠岐に流された人々の魂を慰めるために
ここに収められたと思われるのが第4首目と第5首目の歌である。
4 夕されは小峯の島になく千鳥 あら磯なみにしほや盈らむ8)
「小峯島(さみねのしま)」を詠んだ第4首目の歌の作者は『隱州視聽合紀』には「孔
感」とあるが、この歌は1261年(弘長元)の「宗尊親王百五十番歌合」には藤原顕盛の
歌として収められている。藤原顕盛は安達顕盛(1245-1280)のことと思われる。顕盛の母
は飛鳥井雅経の女であるが、雅経は後鳥羽院の歌壇で活躍した歌人でもあった。1201
年(建仁元)には和歌所寄人となっており、勅撰和歌集である『新古今和歌集』の撰者の
一人でもある。こうした祖父を持つ顕盛も当時の鎌倉歌壇の構成員の一人として「宗尊親
王家百五十番歌合」に参加したものであろう。小峯島は『隱州視聽合紀』卷2周吉郡
布施村條に
布施村は寅卯は海にして浜に向ひて人家あり(中略)岸をはなれて七八町ばかり小峰嶋と云
あり高き事七十尋上に松樹ありて北の方割立が如し廻れば百三十間俗此を左婦嶋と云則
夕されば小峰の嶋と讀し島なり音の誤りて如此と云なり
と見えており、ここで斎藤が「夕されば小峰の嶋と讀し島なり」と紹介しているのが「名所
和歌」のこの第4首目の歌を指している。歌意は「夕方になるとさみねの島に千鳥が鳴く。
荒磯波に潮が満ちてきているのであろうか」となろう。
8) 「名所和歌」は続々群書類集本の『隠州視聴合紀』から引用し、それぞれの歌には便宜上収載の順番によっ
て1から11までの番号をつけた。
298 日本文化學報……第 42輯
ところで歌枕の「さみねのしま」と言えば隠岐の小峯島よりも『萬葉集』に收められてい
る柿本人麻呂の「讚岐狹岑嶋視石中死人柿本朝臣人麻呂作歌一首 幷短歌」いわゆ
る「石中死人歌」に詠まれた讚岐の「狹岑の島」が古来有名である。
をちこち
の
しま は おほけど
な ぐは し
さ みね の しま の
ありそ
も
に
いほりて
みれば
なみの おと の
(上略)彼此之 嶋者雖多 名細之 狹岑之嶋乃 荒磯面爾 廬作而見者 浪音乃 しげき はま へ
を
しき たへ の
まくら に
なして
あら とこに
ころふす きみ が
いへ しらば
ゆきて
も
つげむ
つま
しらば
茂浜邊乎 敷妙乃 枕爾爲而 荒床 自伏君之 家知者 往而毛將告 妻知者 き
も
とはまし
を
たま ほこ の
みち だ
に
しらず
おほほしく
まち か こふ ら
む
はしき
つま ら
は
來毛問益乎 玉鉾之 道太爾不知 鬱悒久 待加戀良武 愛伎妻等者(卷2-220) 人麻呂は「狹岑の嶋」の岩の上で寂しく倒れている名も亡き死人を見てこのような歌を詠ん
だ。野垂れ死にした人の霊魂である「浮遊魂」に思いを馳せ、鎮魂しているのである。す
なわち万葉の「狹岑之嶋」は人麻呂が家族らのもとを離れて獨り寂しく死んだ人に對する
同情の心を詠んだその舞臺である。斎藤豊宣は「さみねのしま」といえば想起されるであろ
うこうした事情をもふまえ、隠岐に流されて家族のもとを離れて寂しく死んでいった人たちのこと
をも念頭に置きつつこの歌を「名所和歌」に収めたのではないかと思われる。なお、この第
4首目に見える「小峯の島」を独島/竹島とする見解もあるようだが、それは何の根拠もない
唐突な考えであって、上でも見たようにこの和歌に歌われている「小峯の島」は斎藤自身
も上の引用文ではっきりと述べているように隠岐島後の布施村の海上7~8町の距離に浮か
ぶ左婦島を指していると考えるのが妥当であろう。
ところで、この歌に詠み込まれている「千鳥」は『万葉集』以来その鳴き声に注目して
詠まれたものが多いが、この歌も例外ではない。夕刻や夜間、明け方に響く千鳥の声はし
みじみとした心情をかきたてるものとして詠まれ、題材としては懐旧、望郷、恋情を主題とする
歌に多く詠まれた。9)
こうした類型は平安文学にも継承されており、たとえば『源氏物語』須磨巻での千鳥の
描写には流離の地での物寂しく人恋しい心情が託されていることも付言しておくべきであろ
う。同様に第5首目の
5 敷島や中のみなとの小夜ちとり つまよひたてゝ浦つたひ行
にも「千鳥」が詠み込まれている。この歌の作者公朝(?~1296)は鎌倉時代中期の人物
で姉小路実文の子として生まれ、のちに北条朝時の猶子となった人物である。10)出家して
9) 秋山虔 編(2000)『王朝語辞典』東京大学出版会. p.274
10) 中川博夫(1983)「僧正公朝について─その伝と歌壇的位置─」『国語と国文学』60-9, 東京大学国語国文
学会. pp.33-40
『隠州視聴合紀』の名所和歌 ························································································ 伊藤政彦…299
園城寺で別当まで至った僧侶で、主に鎌倉歌壇で活躍した歌人である。この歌の大意は
「敷島の中の湊の夜に鳴く千鳥はつれあいを呼び立てて浦を伝いながら行く」となる。この
歌は『風木和歌抄』巻25の「湊」の項に収録されているが、そこには讃岐の中の湊と記
されている。この讃岐の「中の湊」は上でみた柿下人麻呂の「石中死人歌」に次のよう
に見える。
たま も
よし
さぬ き のくに は
くに から か
みれども
あかぬ
かむ から か
ここだ
たふとき
あめつち
ひ つき と ともに
たり
玉藻吉 讃岐國者 国柄加 雖見不飽 神柄加 幾許貴寸 天地 日月與共 満
ゆかむ
かみ の
み おも と
つぎ きたる
なか の みな と
ゆ
ふね うけ て
わが こぎ くれ ば
げ りゃく
将行 神乃御面跡 次来 中乃水門従 船浮而 吾榜来者(下略)(卷2-220) しかしながらここでは讃岐ではなく隠岐の中の湊、すなわち隠岐の島前を構成する島の一つ
である中の島にある湊として斎藤は収録している。それは『隠州視聴合紀』巻4、知々井
浦の項に
知々井浦は海の入こと遙にして山崎に松村あり。左り殊に指出たる此を知々井御崎と云克
く東北の風を防ぐ故に旅泊の輻湊する所なり老人の曰昔より傳て此処を中の湊と云此も亦
名場なり(下略)
とあることからも明らかである。
千鳥の鳴き声を配偶者を呼ぶ声と見るのはすでに『万葉集』巻6の1062番歌に「浦渚
には千鳥妻呼び」(田辺福麻呂)などと見えるように古代から続くイメージである。この歌もつ
まを呼ぶ千鳥に配流の地で家族を思慕したであろう流人の心情が仮託されているものとして
斎藤豊宣がここに収めたと見てよかろう。
さらに指摘すべきはこの歌の作者公朝が上で見た藤原顕盛と同様、1261年(弘長元)の
「宗尊親王家百五十番歌合」に参加している点である。同歌合は将軍宗尊親王主宰の
鎌倉歌壇の中で最大規模の催しであり、それに名を連ねている者を同歌壇の主要構成員
と見なすことができるのである。公朝が宗尊親王歌壇における主要構成員であったことは
「百五十番歌合」のみならず1261年(弘長元)9月9日の「中務卿親王家百首」「中務
卿親王家五十首歌合」(夫木抄)「中務卿親王家歌合」などにもその名を連ねていること
から窺い知ることができる。
また将軍宗尊親王と公朝の親交は親王が1266年(文永3)に鎌倉幕府への謀反の疑い
ありとして将軍を解任、京都へ追放された際に、公朝が宗尊親王を思慕する歌を詠んでい
ることからもわかる。11)
11) 中務卿親王都へのほり給てのちよみける 「今はたゝ月と花とに音をそなく あはれしれかし人を恋つゝ」(『拾遺
風体和歌集』巻7離別)
300 日本文化學報……第 42輯
公朝の「名所和歌」第5首目の作品とともに上の顕長の第4首目の歌も「宗尊親王百
五十番歌合」所収の作品であることは上述の通りであって、こうした事実は齋藤豊宣が鎌
倉歌壇の宗尊親王周辺の歌に関心を持っていたとの推察を可能にする。宗尊親王は1272
年(文永9)の二月騒動に連座して佐渡へ流され、近臣らも隠岐その他へ配流されている。
斎藤が生きた同時代の後水尾歌壇の中心にあった後水尾天皇はのちにも述べるように江戸
幕府からの強い圧迫のもとに生きた天皇であり、後鳥羽院に強い共感を持つと同時に同じよ
うに鎌倉幕府によって配流の憂き目に遭った宗尊親王の鎌倉歌壇にも親近感を抱いていた
のであろう。こうした事実が齋藤豊宣をして鎌倉歌壇の歌を「名所和歌」に収録せしめた
のではないかと推察される。
いずれにせよこの第4首目と第5首目の歌を通じて豊宣は「千鳥」に象徴される、遠い
隠岐に流されて恨みをもって死んでいった霊魂たちに思いを致し、これを鎮魂することで自ら
の隠岐統治の安寧を祈ったものと思われるのである。
(2) 統治の安寧を祈る
『隠州視聴合紀』「名所和歌」の第7首目から第10首目は島後都万の高田明神に
奉納された「隠岐高田明神百首和歌」所収の作品である。
7 春さむき山は高田のたかけれは 雪のしたよりたつかすみかな
8 なみまより山とみへつゝ夕くれの まかきかしまにたつかすみかな
9 いつる日の高田の山はあらはれて にしさととほくたつ霞かな
10 春にはやなる澤の池のうす氷 なをとけやらてさゆるころかな
まず「高田山」と題する准三后(二条良基)の第7首目の歌は「春になっても寒い山は高田
山で、その名の如く高いので雪が残り、その雪の下から霞が立つことである」12)という内容
であり、「籬島」と題した前左大臣(九条経教)の第8首目は「波間から山と見えていた夕
暮れの籬の島に霞が立っている」という情景を詠んでいる。籬島は歌枕としては陸奥の籬
島が古来有名であるが、ここでは『隠州視聴合紀』巻3都万県の項に
西山の外は海にして恩部島あり此を籬島と号して彼准三后の詠ぜし島也
とあるように都万の「恩部島」を指している。一般に和歌において「籬島」は
さてもなほ籬の島のありければ立ち寄りぬべく思ほゆるかな (『後撰和歌集』恋2清蔭)
あけくれは籬が島をながめつつ都恋しき音をのみぞ泣く (信明集)
12) 7首目から10首目までの歌意は小原幹雄(1992)『隠岐高田明神至徳百首和歌注釈』報光社.から引用した。
『隠州視聴合紀』の名所和歌 ························································································ 伊藤政彦…301
のように「籬」の語が人をへだてるイメージを持っているため、陸奥における都恋しさの念を
表現するのによく用いられたという。13)ここにも都を遠く離れて隠岐に流された後鳥羽院など
のイメージが投影されていると見てよかろう。
次に「西里」と題された淨阿上人の作品である第9首目は「高々と出て来る朝日に高
田の山が現れて、西里一帯に遠く霞が立っている」という内容である。西里は高田山の
西方の麓にある集落である。
「成澤池」と題された秀長(菅原秀長)の第9首目の歌意は「春に早くもなる成澤池の
薄氷はなおすっかり融けきらないで、寒さのきびしいこの頃であることよ」となる。成澤の池は
『隠州視聴合紀』巻3都万県の項に
此を高山(ママ)と云西の麓に一林あり高田明神の社なり伝て曰此峰に鳴澤池と云あり人至
ることなし故に水源を知者なし其末流は社の左に出づ馬牛に至まで飲ことなし
と見え高田山に成澤池という神聖な池があったことを伝えている。
このように「名所和歌」のうち「隠岐高田明神百首和歌」所収のこれら4首の和歌には
いずれも島後
都万付近の地名が詠み込まれているが、特に7首目の歌に関しては「国
見歌」としての性格を持っていることが大西俊輝氏によって指摘されている。14)古代におけ
る国見は元来は権力者が高所から国土を俯瞰して農作物の豊穣や人々の生活の平安を
予祝する行為であった。斎藤も新たに着任した任地である隠岐での統治の安寧と五穀豊
穣を祈念する意味でこの歌を「名所和歌」に収めたのではなかろうか。
さらにこれら4首の和歌のうち3首に「たつ霞」が詠み込まれている。かつては山川から立
ち昇る雲や煙は自然の霊魂、つまり「国魂」の活動する姿と考えられており、国見歌にお
ける「立つ」という表現については『万葉集』の舒明天皇の国見歌(巻1-2)に見える「け
ぶり立ち立つ」「かまめ立ち立つ」が沸き上がる地霊の息吹きのイメージを持つことが先学
により指摘されている。15)この歌においても「霞たつ」姿を歌うことがとりもなおさず国讚めに
なるのであり、祝福と生成のイメージを象徴しているのである。
また7首目、8首目、9首目はいずれも結句が「たつかすみかな」となっており、この点に
ついては「儀式ばった」作歌態度を思わせると先学により指摘されている16)が、上述の事
13) 片桐洋一(1999)『歌枕歌ことば辞典』笠間書院 p.380.
14) 大西俊輝(2007)『続日本海と竹島』東洋出版. p.269
15) 土橋寛(1965)『古代歌謡と儀礼の研究』岩波書店. p.342
16) 小原幹雄(1968)「隠岐高田明神至徳百首和歌の考察」関西大学 島根大学共同調査会編『隠岐』, 毎
日新聞社. p.533
302 日本文化學報……第 42輯
実も考え合わせると、これは古代の国見の儀式にも通ずる予祝的作歌態度と言い換えること
ができるであろう。
ところで「隠岐高田明神百首和歌」は1387年(至徳4)に隠岐を訪れた京都四条京極
金蓮寺(四条道場)の五代浄阿が高田明神に泊った際に「花も夏に成沢の池の蓮哉」と
いう明神の夢想を得て感激し、帰京後に當時歌壇の実力者であった二条良基らを説いて
勧進、奉納されたものである。17)斎藤豊宣も『隠州視聴合紀』巻3都萬県の項でこの百
首和歌ついて「最遠島の珍宝也」としている。この「高田明神百首和歌」は二条良基
の手によるものと思われる次のような序文を伴っている。
(前文ヲ欠ク)めぐみ筑波山よりもしげし、我が君人を得給へることいかでか延喜天暦におとら
む、十旬の雨よくくさ木をやしなひ五日の風あまねくあめつちをやはらぐ、此時にあたりてもろ
もろの明神国をたすけ代を□ぼり給ふ事まことにいちじるし、隠岐の国はむかしの聖主道をも
てあそび給ひし遺風もさだめてこのさかひに叡襟をとどめ給ひけむかし、かれといひこれといひ
機縁純熟せりといふべし、このゆゑに金蓮寺上人かの神のつげをうけて渇仰のあまり百首の
和歌千句の連歌を勧進して明神の法楽にそなふ、なるさは池の蓮八功徳水にひらけたかだ
山の松七重宝樹をあらはすものなり、かつはかの国ををさむる人たちまちに合浦の珠を□し
邵国の棠をのこせるがごとし、しかあればいよいよ神明の加護も久しく聖代の徳化もあらたな
るべしとなり すなわち、この序文ではまず当時の天皇が人材を得ることが醍醐、村上兩天皇の時代
に天皇親政が行われ、王朝政治
王朝文化の最盛期として理想の時代とされた延喜
天暦(10世紀)に劣らず、気候が順調で天下が泰平であることを述べる。こうした状況のもと
諸々の明神が国を助けていることする。ついで、かつてこの地に流された後鳥羽院の遺風
のとどまる隠岐を訪れた浄阿が百首和歌と千句連歌を奉納したことで成沢池の蓮が八功徳
水(極楽の池と須彌山と七金山との内海にある水)に開き、高田山の松は七重宝樹(極楽
浄土の宝樹)をあらわすものであるとする。次の「合浦の珠」「邵国の棠」はそれぞれ中
国の故事を指す。前者は合浦郡では珠を産したが前守が貪欲で珠は郡外へ去り、孟甞
が太守となるやその善政により去った珠が再び還ったという故事(『後漢書』循吏伝)であ
り、後者は周の召公の善政に感じて民がその宿った甘棠の樹を伐らなかった(『詩経』)と
いう故事を指す。いずれも善政が布かれていることを強調するものである。そしていよいよ神
明の加護も久しく聖代の徳化もあらたであると結んでいるのである。
これはすなわち隠岐をはじめとする世の中に善政が布かれていることを称えているものであ
り、こうした意味合いのもとに奉納された百首和歌は隠岐郡代役の任にあった斎藤豊宣に
17) 吉永登 東郷富貴子(1957)「隠岐高田明神百首和歌について」『文学論集』第6巻第3 4合併号, 関西
大学 p.106.
『隠州視聴合紀』の名所和歌 ························································································ 伊藤政彦…303
とっても自身の統治の安寧と神明の加護を祈るという点で共感を持てるものであったろう。
このように隠岐を治める新任統治者として「国見歌」的な意味で自らの統治を予祝する
意味で、また統治の安寧を祈り寿ぐ意味で斎藤は第7首目から第10首目に「高田明神百
首和歌」のうちの4首を配したものと考えられる。
(3) 新島守としての後鳥羽院への共感
上述のように斎藤豊宣は1667年(寛文7)に松江藩主松平綱隆により隠岐郡代役を命じら
れている。天領と呼ばれた江戸幕府の直轄地は代官支配地と大名預所にわけられたが、
大名預所とは近くに代官所のない場合に、近隣の大名にその管理を依頼したものを指
す。18)松江藩において隠岐郡代は隠岐島後に3年在勤、「役組外」格の士で120石、
島後 西郷に陣屋をかまえて隠岐の統治に当たった。19)
ところで斎藤豊宣が新たに隠岐に赴任するに際して「新島守」として共感を感じたであろ
う人物が後鳥羽院であった。後鳥羽院は当時台頭しつつあった武士政権である鎌倉幕府
に対抗して強硬な政策を取ってきたが、ついに1221年(承久3)5月14日に時の鎌倉幕府執
権であった北條義時追討の院宣を出し、畿內近国の兵を召集して「承久の乱」を起こし
た。しかし鎌倉幕府の大軍に完敗して7月8日に42歳で出家、7月13日に19万人の大軍を
率いて上京した義時の嫡男泰時により隱岐島(隱岐国海士郡中ノ島)に流された。以後、
京都に戻ることなく1239年(延応元)2月に60歳で隠岐国阿摩郡苅田郷で崩じている。名所
和歌の2首目に収められた後鳥羽院の
2 われこそは新島守よ隱岐のうみ あらきなみ風こゝろしてふけ
という著名な歌は『遠島御百首』所収の作品であり、のち南北朝時代に成立した歴史物
語の『増鏡』では院が隱岐に流されて間もない頃に、遠い都に思いを馳せつつ詠んだとさ
れている。歌意は「私こそは新しい島の番人であるぞ。隠岐の海の荒々しい波風よ。充
分配慮して吹け」20)というものである。「新島守」とは「辺境防備の新兵」とするのが一
般的だが「新任の島司」とする見解もある。21)斎藤豊宣も隠岐を治める任務を帯び「新
任の島司」として着任した自身の立場と、かつての後鳥羽院の「新島守」の立場を重ね
合わせ、共感をもってこの歌を名所和歌に収めたものであろう。
ところで「名所和歌」には豊宣の後鳥羽院に対する「新島守」としての共感を示したと
18) 永海一正(1972)『近世隠岐島史の研究』報光社. p.60
19) 中原健次(1997)『松江藩格式と職制』松江今井書店. pp.153-154
20) 樋口芳麻呂ほか校注(1991)『中世和歌集 鎌倉編』(新日本古典文學大系46) 岩波書店. p.214
21) 井上宗雄(1988)『増鏡』(上) 講談社. p.160
304 日本文化學報……第 42輯
見られる歌がもう1首ある。それは第1首目の「鼓嵩」と題する紀輔時の
1 かゝり火の所さためす見へけるは なかれつゝみのたけはなりけり
という歌である。この歌の作者の紀輔時は生没年未詳、父は『古今和歌集』の撰者紀
貫之の子で梨壷五人の一人である内蔵介時文である。この歌は『古今和歌集』および
『後撰和歌集』に次ぐ勅撰和歌集で所謂「三代集」の一つである『拾遺和歌集』(寬
弘3年=1006年ごろの成立)の卷第7物名に收められている。
『拾遺和歌集』の詞書に見える「つゝみのたけ」は藤原公任の私撰集である『拾遺
抄』宮内庁書陵部本では「つゝのみたけ」となっており、『拾遺和歌集』の和歌の本
文もまた「つゝのみたけ」となっているものもある。「つゝのみたけ」とすると「筒の御岳」
であり、肥後の山かとするが確実な所は分からない。一方「つゝみのたけ」とする場合は
「鼓の岳」であり伊勢、隱岐、筑前などとする説があるが、これも確実なところは分からな
い。22)筆写の過程で「つゝのみたけ」と「つゝみのたけ」が混同され混乱が生じたもの
であろう。『拾遺和歌集』ではこの歌は「物名」という部立ての卷に入っている。「物
名」は事物を歌の中に隠し詠む一種の言語遊技であり、この歌に即して見ると「つゝみの
たけ」の場合「流れつゝみの焚けばなりけり」となり「つゝのみたけ」の場合「流れつつ
のみ焚けばなりけり」と4句目と5句目にかけてそれぞれ隠し詠んでいることになる。歌意は
「つゝのみたけ」の場合「篝火が場所を定めることなくあちらこちらに見えるのは、流れ流
ればかりしながら焚くからであったのだ」となり、一方「つゝみのたけ」の場合「篝火が場
所を定めることなくあちらこちらに見えるのは、流れる身で焚くからであったのだ」となろう。
こうした詮索はともかくとして『隠州視聴合紀』を著した斎藤豊宣は「名所和歌」の筆
頭にこの歌を配した。つまりこのことは斎藤がこの歌の「鼓嵩」が隠岐にあると考えており、
実際に「鼓嵩」と呼ばれる山が当時隠岐にあったという事を表わしている。
大西俊輝氏は「鼓嵩は、島前の海部郡に在る今の高峯という説がある。だがその岸辺
の塘(つつみ)から高峯を仰ぎ見ることは出來ない」23)として隱岐第一の靈山「燒火山」を
「鼓嵩」に比定している。「燒火山」はその名の示す通り「火」と關係のある山であり、
隠岐軍団と本土の山陰道鎮撫使を結ぶ烽(とぶひ)の一中継地点でもあると同時に、24)古く
から海の民の間における「燒火信仰」の中心であった。焼火信仰とはすなわちこの焼火
山の神は海上で遭難しそうになった時に祈ると神火が現れ、その方向に向かって船を進め
れば難を逃れ無事に港に入ることができるという信仰である。また、大晦日には毎年変わら
22) 小町谷照彦校注(1990)『拾遺和歌集』(新日本古典文學大系7) 岩波書店. p.111
23) 大西俊輝(2007)『続日本海と竹島』東洋出版. p.252
24) 田中豊治(1979)『隠岐島の歴史地理学的研究』古今書院. p.81
『隠州視聴合紀』の名所和歌 ························································································ 伊藤政彦…305
ず神火が海上から現れて焼火神社の前の神木に飛来し、それが年中不断の常灯になると
いう信仰もあった。さらに、この「燒火信仰」の一つの形態に「日の入りのお燈明」があ
る。
「オトウミョウ」の薪は削りかけ三本 、棒に結わえたもので 、先ず燧石を三度チョンチョン
チョンと打ち、然る後火をつける。それを右手に高く掲げ、トモのカジ柱の所に立って大声
で次の様に唱える。──「お燈明、お燈明、お燈明オキの国タクシ(焼火)權現様に手向
けます。よい漁に会わせ、よいアラシに会わせてくなはれ。千日の上日和」。かく唱へ終る
や、その火を三回頭上に大きく振り回して海中に投じ、(中略)右の式をカシキが行って居る
時には船頭始め乗組全員舷に立って祈念をこらすのである。25)
こうした信仰は遠く東北地方に至るまで廣く行なわれていた。この「日の入りのお灯明」
は東北地方で近代に入ってから行なわれていたものだが、焼火信仰の中心ともいえる焼火
山の存在する隠岐でも年6回前後の航海をする北九州、瀬戸内への廻船が仕立てられる
際には献灯の式が行なわれたという。26)
海上に浮かんだ船の上で燈される燈明はまさしく「所定めず」にともされる火であり、この
風景あるいは遭難しかけた船舶から望見されたとされる篝火の姿に當時隱岐で知られていた
「鼓嵩」をかけたものとして斎藤はここに収録したのであろう。
さて、この歌と後鳥羽院の関係であるが、『隠州視聴合紀』に付記として収録されてい
る「知夫郡焼火山縁起」に次のような記述がある。
承久年中 後鳥羽院狩于斯也 日既暮矣 暴風起波瀾立 王乃詠曰「朕古曾波新嶋守
與隠岐濃海荒幾浪風心志而吹」於是風浪漸収 然而夜闌月役 官船不知所之 漂泊
於中流 風波又欲起 王心念天 時遥火在雲間 其余光照海 黄郎得便扈従奉賀也
すなわち、承久3年(1221)に後鳥羽院が配流先の隠岐に向かう途中、日が暮れてから
海上で暴風に遭った。そこで後鳥羽院がすでに上で見た「われこそは新島守よ隱岐のうみ
あらきなみ風こゝろしてふけ」の歌を詠ずると風波が静まり、その後暗闇の中で方向を失った
が、院が海上船中より祈願をこめると雲間に神火が示現してそれをたよりに隠岐に着くことが
できたとする伝承である。ここで「新島守」としての後鳥羽院を隠岐へと導いたのは言うま
でもなく焼火の神火である。
ここでは「われこそは」の歌は『増鏡』とは異なり後鳥羽院が隠岐に配流されてゆく船
中で詠まれたことになっており、斉藤もこの伝承を承知していた。隠岐第一の霊山と後鳥羽
25) 小坂勝昭編(2002)『離島「隠岐」の社会変動と文化』御茶の水書房. p.167
26) 大島正隆(1962)「海上の神火」『隠岐郷土研究』第7号, 隠岐郷土研究会. p.23
306 日本文化學報……第 42輯
上皇を隠岐に導く神火を詠んだこの歌は「名所和歌」の冒頭歌としてふさわしいと言える
し、隠岐へ新たに赴任した豊宣が「新島守」としての後鳥羽院への共感をもってこの歌を
第1首目に配したとも考えられるのである。
(4) 後鳥羽院に対する追慕
上で斎藤豊宣の「新島守」としての後鳥羽院に対する共感をもとに収められたと思われ
る歌について見たが、「名所和歌」にはこの他にも後鳥羽院の歌が1首収録されている。
3 なみまなき隱岐の小島の浜ひさし ひさしくなりぬ都へたてゝ
なみの ま
ゆ
「隠岐小島」と題されているこの歌は『萬葉集』の「浪間從
あはず
し
みゆる
こ じま の
所見小嶋之
はま ひさ ぎ
濱久木
ひさしく なり ぬ
きみ に
て
久成奴
君爾不相四手」(卷11-2753)を本歌とするもので元来『増鏡』所収の作品で
ある。配流先の隠岐における孤影悄然たる後鳥羽院の姿を髣髴させる歌である。27)
歌意は「波の絶え間もない隠岐の小島の浜辺の家に住んでから久しくなった。遠く都を
隔てていて」となる。絶えることなく波が打ち寄せる隱岐の小島で遠く離れた都に思いを馳
せる心を詠んだ歌である。この後鳥羽院の歌を収録することを通じて齋藤豊宣は自らの意
に反して隠岐へ流された院への追懐の念を表していると見ることができよう。後鳥羽院に対
する追慕の念を表わす歌はこの他にも第6首目の
6 くも霞うみより出てあけそむる 隱岐のとやまや春をしるらん
がある。「隠岐外山」と題されたこの歌は後水尾院の作品である。『後水尾院御集』
春に収められているこの歌はまた、隠岐国奉納歌二十首の巻頭歌である。28)『読史愚
抄』1632年(寛永9)3月条に
水無瀬中納言氏成。参後鳥羽院隠岐御墳墓 。或作去月廿日。 此序院被納御製和
哥。二十首。
と見え、さらに同書の1639年(寛永16)2月22日条には
後鳥羽院四百回聖忌。水無瀬前中納言氏成、参隠岐御墳墓。去寛永九年亦参。俱
27) 井上宗雄(1988)『増鏡』(上) 講談社. p.165
28) 芦田耕一(1991)「村上助九郎氏所蔵『和歌』─解題と翻刻─」『山陰地域研究』(伝統文化)7, 島根大
学山陰地域研究総合センター. p.40
『隠州視聴合紀』の名所和歌 ························································································ 伊藤政彦…307
私儀。此次、公家被献御剣馬。自院被献御法楽和歌者。
とある。春の訪れへの喜びと後鳥羽院ゆかりの地である隠岐に対する賞賛の気持を詠んだ
第6首目のこの歌は、上記のいずれかの機会に水無瀬氏成によって後鳥羽院の墓前に奉
納されたものである。
後水尾院は後鳥羽院を慕い、並々ならぬ共感を感じていた。その理由について鈴木健
一氏は後鳥羽院と後水尾院のいずれもが
(1)政治的な挫折を経験した。
(2)歴代の天皇のなかでも文学活動を熱心に行なった一人である。
ことを挙げている。29)すなわち、後鳥羽院は5歳で即位し、19歳で院政を開始した。そして
42歳の時に承久の乱により隠岐に配流され、そのまま京都に戻ることなく隠岐で亡くなってい
る。一方、後水尾院は16歳で即位し、1629年(寛永6)に34歳で譲位した。1615年(元和
元)に『禁中並公家諸法度』が制定されるなど、即位当初から天皇としての政治活動は
制約を受けていた。譲位の理由は表向きは腫れ物に悩まされたためとされているが、その裏
には紫衣事件など江戸幕府との関係の悪化があったと思われる。このように後水尾院は自
身と同様に朝幕関係の軋轢に悩んだ後鳥羽院に親近感を抱いていたのである。両者ともに
文学、特に和歌に秀でていたという点も共通点である。
後水尾院は毎年後鳥羽院の命日である2月22日に後鳥羽院ゆかりの地である水無瀬
離宮で水無瀬宮法楽和歌会を開いていたが、後鳥羽院没後400回忌に当たる1638年
(寛永15)には特に「後鳥羽院四百年忌御会」を開き、
こひつゝもなくや四かへりもゝちどり 霞へだてて遠きむかしを
という歌を詠んで後鳥羽院を偲んでいる。この歌は「今年の春の千鳥たちは(後鳥羽院を)
恋い慕いつつ鳴くのだろうか。霞に隔てられて遠く霞んでいるあの四百年の昔を」という意
味である。 30)以上のような事実からも後鳥羽院が後水尾院歌壇において特別な存在で
あったことがわかる。「名所和歌」第6首目の歌も後鳥羽院が配流された隠岐の人里近
い山の春を詠んだものではあるが、奉納の経緯をみても後水尾院の後鳥羽院への思慕、
追悼の念が込められた歌と見てよかろう。
最後に「名所和歌」第11首目の「御陵 葛田山」と題された藤波友忠の
や あ り イ
11 隱岐の海の憐れを思ふ人はかりと とへとこたへすうら風やふく
29) 鈴木健一(1996)『近世堂上歌壇の研究』汲古書院. p.125
30) 松野陽一 上野洋三校注(1996)『近世歌文集(上)』(新日本古典文學大系67)岩波書店. p.16.
308 日本文化學報……第 42輯
であるが、この歌も上の第6首目の後水尾院の歌を巻頭歌とする隠岐国奉納歌二十首の
うちの1首で、この歌は奉納歌の掉尾を飾る最終歌である。「御陵」とは島前
中ノ島の
後鳥羽院の廟所を指す。豊宣は『隱州視聽合紀』卷4海部郡森鄕に
畦道を分過れば三町ばかりにして山下に源福寺有是を葛田山と云後鳥羽上皇の御陵なり
門に二王有り(中略)此より四十間ばかり石甃を山に上る半過てりに入左右松竹凄々として
綠蘿籬に蔓り又一小門あり鞠躬として入れば拜所の前に至る御廟其後に高し欄干を設て
堦上に登る四方は皆喬木にして竹籬を引圍む其間は小石磷々たり遊客も來こと希に落ち
葉も勤めて不掃見に落淚感慨自生ず
と後鳥羽院の廟所を訪れた際の様子を記し、自らの意に反して隠岐に流された院に対する
「感慨」を表現している。
斎藤豊宣は隠岐に流されて失意のうちに亡くなった後鳥羽院の霊魂を追慕し、慰める歌
を「名所和歌」に掲げることにより自身の隠岐統治の無事と安寧を祈ったものであろう。こ
のように『隱州視聽合紀』の名所和歌は後鳥羽院が隠岐へ上陸する際の神火をもっては
じまり、後鳥羽院の陵墓で院の魂を慰める歌で締めくくられているのである。
おわりに
和歌は言うまでも文学の一ジャンルであるが、純粋に文学としてだけではなく何らかの役
割を期待されていた。上でも述べたように『古今和歌集』の「仮名序」は和歌が「目に
見えぬ鬼神をもあはれと思はせ」る力、すなわち目に見えないあの世の人の霊魂をも感激さ
せる力を持つものと認識されていたことを示している。また『万葉集』のいわゆる行路死人
歌などの異常な死を遂げた人物を対象とする歌群からは歌にこの世を去った人の霊魂を慰
めてアレやタタリが発現しないように鎮魂する呪力が備わっていると見られていたことを知ること
ができる。
以上の事実を念頭に置くと、斎藤豊宣が『隠州視聴合紀』に11首の「名所和歌」を
収録した理由は単に隠岐の名所や歌枕を紹介するためだけでなく、他の理由があったので
はないかと思われるのであり、本稿では「名所和歌」がいかなる目的で収められたのかに
ついて考察を試みた。
すなわち斎藤は1首目と2首目の和歌を通じ、かつて隠岐に配流された後鳥羽院に対して
新たに赴任した「新島守」としての自身の立場を重ね合わせて共感を示した。
『隠州視聴合紀』の名所和歌 ························································································ 伊藤政彦…309
そして3首目、6首目、11首目の3首の和歌を通じ、19年という長い歳月を隠岐で過ご
し、おそらくは都を思いながら苅田郷の配所で寂しく世を去った後鳥羽院への追慕と鎮魂の
念を示した。
また、後鳥羽院のみならず隠岐は古くから流刑の地であって無数の人々が配流されてお
り、隠岐郡代として流人を監督する位置にあった斎藤は4首目と5首目の和歌を収録してこ
れらの家郷を離れて隠岐に流されてきた流人たちの心に思いを致すとともに鎮魂し、同時に
朝幕関係の桎梏に苦しんだ宗尊親王への関心もしめしている。
そしてさらに世の中に善政が布かれていることを称える意味も込めて島後都万の高田明神
に奉納された百首和歌からの国見的な詞章を想起させる7首目から10首目までの4つの和
歌を名所和歌に収録することで斎藤豊宣は自身の統治の安寧と神明の加護を祈り、寿い
だのであった。以上のようなことが斎藤豊宣が『隱州視聽合紀』に「名所和歌」を収録
した理由であると推察されるのである。
また冒頭でも述べたように『隱州視聽合紀』は独島/竹島の領有問題が論議される際に
言及されることが大部分であるが、はじめにも指摘したように同書の国代記の「然則日本
之乾地、以此州為限矣」という記述の「此州」は隠岐国を指すと考えられ、鬱陵島や
独島/竹島の領有意識を明らかにしているのではない。したがって斎藤が同書を編纂した意
図は鬱陵島や独島/竹島の領有を主張するといった点にあったのではなく、自身の新たな任
地である隠岐の地誌に関する情報を藩主に報告すると同時に、配流者など死者の魂を慰
ることで自身の統治の無事と安寧を願う点にあったのではないかということを本稿では名所和
歌の分析を通じて指摘した。本稿が『隱州視聽合紀』を読む際に多様な角度から接近
することも可能だということを示すささやかな試みになったとすれば幸いである。
【参考文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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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 日本文化學報……第 42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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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世の隠岐の流人」『隠岐流人に関する研究』
平成2年度科学研究費補助金(一般研究B)研究成果報告書所収.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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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尾寿ほか(2005)『島根県の歴史』山川出版社. p.202
松野陽一
上野洋三校注(1996)『近世歌文集(上)』(新日本古典文學大系67)岩波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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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島正隆(1962)「海上の神火」『隠岐郷土研究』第7号, 隠岐郷土研究会. p.23
中川博夫(1983)「僧正公朝について─その伝と歌壇的位置─」『国語と国文学』60-9,
東京大学国語国文学会. pp.33-40
吉永登
東郷富貴子(1957)「隠岐高田明神百首和歌について」『文学論集』第6巻第
3 4合併号, 関西大学. p.106
『隠州視聴合紀』の名所和歌 ························································································ 伊藤政彦…311
要 旨
1667年(寛文7)に出雲松江藩士斎藤豊宣が著したとされる『隠州視聴合紀』は獨島/竹島
領有問題が議論される際に言及されることが多いが、同書は果たして獨島/竹島の領有権を明
らかにすることを目的として書かれたものなのであろうか。決してそうではあるまい。『隠州視聴合
紀』の著者とされる斎藤豊宣は出雲松江藩の藩士で1667年(寛文7)に藩主松平綱隆により隠
岐郡代役を命じられている。斎藤は隠岐へ渡って任地をくまなく巡視しながら古老から伝説や遺
聞を集め、隠岐の地理、産物等について書き留めたのであり、それが『隠州視聴合紀』で
ある。言うなれば任地に関して藩主へ報告するための報告書である。このような事情を勘案した
とき、異質に見えるのが隠岐の風土誌とは直接的に関係のないとも言える巻4の最後に収められ
ている「名所和歌」である。
本稿では『隠州視聴合紀』巻4に見える上述の「名所和歌」のもつ意味に対する考察を
行なった。斎藤豊宣は『隠州視聴合紀』の「名所和歌」を通じて隠岐の歌枕を紹介だけで
なく1首目と2首目の和歌を通じてかつて隠岐に配流された後鳥羽院に対して新たに赴任した
「新島守」としての自身の立場を重ね合わせて共感を示した。そして3首目、6首目、11首目
の3首の和歌を通じ、19年という長い歳月を隠岐で過ごし、苅田郷の配所で寂しく世を去った
後鳥羽院への追慕と鎮魂の念を示した。また、後鳥羽院のみならず隠岐は古くから流刑の地
であり、無数の人々が配流されており、隠岐郡代として流人を監督する位置にあった斎藤は4
首目と5首目の和歌を収録してこれらの家郷を離れて隠岐に流されてきた流人たちの心に思いを
致すとともに鎮魂し、同時に朝幕関係の桎梏に苦しんだ宗尊親王への関心もしめしている。そし
てさらに世の中に善政が布かれていることを称える意味も込めて島後都万の高田明神に奉納さ
れた百首和歌からの国見的な詞章を想起させる7首目から10首目までの4つの和歌を名所和歌
に収録することで斎藤豊宣は自身の統治の安寧と神明の加護を祈り、寿いだのであった。以
上のようなことが斎藤豊宣が『隱州視聽合紀』に「名所和歌」を収録した理由であると推察
されるのである。
キーワード : 隠岐、隠州視聴合紀、名所和歌、流人、鎮魂、統治の安寧
투
고 : 2009. 5. 31
1차 심사 : 2009. 6. 13
2차 심사 : 2009. 6. 27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13
合評會
-일본어 교육 분과
-
강영부*
1)
본 일본문화학보 제42집 일본어교육 분야에 투고된 논문은 총 4편이며
일본어교육에 관련된 다양한 테마를 다루고 있다. 이 중 일본 근대국가 성
립시기의 국어교육 정책과 그 틀 안에서의 한자 정책에 대해서 논한 「近
代日本の「
語」
育と政策」과 한일 화제도입 전략(strategy)의 운용을
정중성(politeness)이라는 관점에서 비교대조한 「話題導入ストラテジ
韓日
照
の
究」의 2편이 수정을 거친 후 게재가 확정되었다.
첫 번째 「近代日本の「
語」
育と政策」에 대해서는 일본의 근대국가
성립 당시에 국어정책 안에서 어떻게 다루어졌는가라는 문제가 초점이 되
기 때문에 나머지 부분을 축소하고 그 부분을 중심으로 기술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고 또한 한국에서의 관점에서 필자의 견해를 피력할 필요가 있
으며 근대 일본의 국어교육을 현재의 권리와 자율을 강조하는 시민상의 의
미에서 새롭게 연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도 나왔다. 두 번째 「話
題導入ストラテジ
の韓日 照
究」에 대해서는 충분한 데이터를 수집해
서 완벽한 이론적 배경을 토대로 처리분석하고 있는 점은 평가할 수 있지
만 조사대상이 여자 대학생간의 대화로 한정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점으로
지적되었고 「ポライトさ」나 「ポライトである」와 같은 용어의 사용에
대해서도 문제점이 제기되었다.
다음으로 한국인 유학생의 감상문을 중심으로 문제점을 다룬 「日本語
育に
する一考察-外
人留
生の感想文に見られる問題点から-」 와 국내
에서 시판되는 일본어 교재의 학습단계별 레벨표시제도 도입의 필요성에
대해서 논한 「日本語
材の出版における
習段階レベル表示制度の導入に
する一考察」의 2편의 경우는 대폭적인 수정작업이 필요해서 이번에 게
* 경희대학교 교수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14
재가 보류되었다.
첫 번째 「日本語 育に する一考察-外
人留 生の感想文に見られる
問題点から-」에 대해서는 한 명의 유학생의 감상문에 나타나는 오용이
한국인 유학생 전체의 오용을 대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조사대상을 더 늘
려야 하며 그 경우 유학생의 속성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분류해야 한다는
지적이 있었고 분석기준의 일관성(첨삭에 대한 기준 및 오류분석에 관한
이론적 배경)이나 논문체제 면에 있어서도 문제점이 제기되었다. 두 번째
「日本語
材の出版における
習段階レベル表示制度の導入に
する一考
察」에 대해서는 연구의 취지에 대해서는 모두 공감했으나 그 취지를 뒷받
침 할 충분한 자료의 제시나 분석이 더 필요하며 좀 더 심도 있는 논의와
함께 일본어 표현의 오류에 대한 전체적인 수정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왔
다. 이들 두 논문에 대해서는 이러한 지적사항을 참고로 수정이 이루어진
다면 좀 더 학술가치가 높은 논문이 될 것으로 사료된다.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15
韓國日本文化學會 任員名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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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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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田大
申玟澈
韓南大
金直洙
烏山大
朴喜南
大田大
林盛奎
白石大
梁東國
祥明大
邢鎭義
又松大
鄭旭盛
南서울大
金昌男
金剛大
全成龍
淸州大
權寧成
淸州大
金泰永
江陵大
崔長根
大邱大
安容柱
鮮文大
尹在石
한밭大
都基弘
韓南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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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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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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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 550-5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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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3146-1933
(041) 580-2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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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 731-3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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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 229-8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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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 640-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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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3) 850-6065
019-553-5733
(041) 530-2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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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 821-1354
011-9038-1354
010-3432-5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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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熙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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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韓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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圓光大
裵貞烈
韓南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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威德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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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日本文化學會 會則
제1 장 총칙
제1조(명칭) 본 학회는 ‘한국일본문화학회’라 칭한다.
제2조(목적) 본 학회는 일본 관련 제학문의 연구를 위한 국내외 회원간의 학술 교류를
통하여 일본학 연구의 활성화와 학문 발전을 도모하고, 국제간 교류를 통한
상호 협력과 이해 증진에 기여하도록 한다.
제3조(사업) 본 학회는 제2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다음 각 항의 사업을 수행한다.
1. 정기적인 학술연구발표회(연 2회)
2. 학술지 발간(연 4회)
3. 학술 진흥을 위한 세미나 및 심포지엄 개최
4. 외국 학회와의 학술교류 및 공동연구
5. 외국의 대학도서관 및 학술단체와 학술지 교류
6. 일본문화의 소개
제4조(위치) 본 학회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별도의 학회사무실 및 지부를 두며, 상
시 업무를 담당하는 사무국장을 둘 수 있다.
제2 장 회원
제5조(자격) 본 학회의 회원은 일본어문학을 비롯한 일본학 연구에 종사하는 자나 관심
을 갖고 있는 자로 한다.
제6조(구분) 본 학회 회원의 구분은 「회원 규정」에 따른다.
제7조(가입요건) 본 학회에 신규로 회원가입을 원하는 자는 원칙적으로 기존 회원의 추
천을 받아야 한다.
제8조(권리와 의무) 본 학회의 회원은 다음과 같은 권리와 의무를 갖는다.
1. 임원의 선거권 및 피선거권(단, 명예회원은 제외)
2. 학회활동 참여의 권리와 회칙 준수의 의무
3. 회비 납부의 의무
제9조(징계) 회원이 의무를 수행하지 않고 본 학회의 명예를 현저히 손상하였을 경우에
는 이사회의 결의를 거쳐 회원자격의 박탈이나 정지 등 징계할 수 있다.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20
제 3 장 기구 및 임원
제10조(기구) 본 학회는 다음과 같은 기구를 둔다.
1. 집행위원회(회장, 부회장, 상임이사)
2. 이사회
3. 해외지부
제11조(임원) 본 학회는 원활한 운영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임원을 둔다.
회장(1인), 부회장(약간 명), 상임이사(약간 명), 해외이사 및 이사(적정인
원), 감사(2인)
제12조(임원의 선출) 회장 및 감사는 총회에서 선출하고, 기타 임원은 회장이 위촉한다.
제13조(임원의 임기) 임원의 임기는 2년으로 하되 연임할 수 있다.
제4 장 총회
제14조(종류) 본 학회의 회의에는 총회, 이사회, 각종 위원회가 있다.
제15조(총회의 소집 및 의결)
1. 본 학회는 매년 1회 정기총회를 개최하고, 필요에 따라 회장이 임시총
회를 소집할 수 있다.
2. 총회는 다음의 의안을 심의․의결한다.
(1) 회장 및 감사의 선출 및 해임
(2) 회칙 개정
(3) 사업계획의 수립
(4) 예산과 결산의 승인
(5) 기타 중요사항
3. 총회에서의 의결은 출석회원 과반수 이상으로 한다.
제16조(이사회의 소집 및 의결)
1. 이사회는 실무이사회와 확대이사회가 있으며, 회장이 필요하다고 인정
할 시 이를 소집한다.
2. 실무이사회는 회장, 부회장, 상임이사로 구성하고, 확대이사회는 회장,
부회장을 포함한 전이사가 대상이 된다.
3. 이사회는 제규정의 개정, 회칙 개정의 발의, 회장 위임사항의 심의, 자
문위원의 추대, 특별 및 명예회원의 승인, 기타 중요한 사항을 처리한다.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21
제17조(각종 위원회의 구성 및 임무)
1. 회장은 분야별 업무의 능률적 수행을 위해 각종 위원회를 설치할 수 있다.
2. 위원회는 위원장과 위원으로 구성하며, 위원장은 회장의 제청으로 이사
회에서 선임한다.
3. 위원회의 안건은 출석 위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의결한다.
제5 장 사업
제18조(재정) 본 학회의 재정은 회원의 회비와 기타 수입금으로 한다.
제19조(회비책정) 본 학회의 회비는 총회에서 결정한다.
제20조(회계연도) 본 학회의 회계 연도는 3월부터 익년 2월까지로 한다.
제21조(국제학술교류상 선정) 본 학회의 학술발전에 지대한 공헌이 인정되는 해외회원
을 대상으로 회장의 추천에 의해 이사회에서 결정한다.
제6 장 부칙
제22조(회칙개정) 본 회칙의 개정은 정기총회에서 출석인원 3분의 2 이상의 동의를 얻어
확정한다.
제23조(시행세칙) 본 회칙 시행에 필요한 제규정은 이사회의 의결을 얻어 시행하되, 본
회칙에 명시되지 않은 사항은 관례에 따른다.
제24조(시행일) 본 개정 회칙은 2003년 10월 1일부터 시행한다.
제25조 개정된 규정은 정기총회의 의결을 거쳐 2007년 5월 1일부터 시행한다.
제26조 개정된 규정은 정기총회의 의결을 거쳐 2008년 10월 25일부터 시행한다.
Journal of Japanese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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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본문화학회 편집위원회 규정
제1 장 총 칙
제1조 본 위원회는 ‘한국일본문화학회 편집위원회’라 칭한다.
제2조 본 위원회는 한국일본문화학회 회칙 제17조에 의거하여 설치한다.
제3조 본 위원회가 관장하는 학회지 『일본문화학보』는 다음과 같은 지침 하에 발행한다.
1. 연 4회(2월호, 5월호, 8월호, 11월호)로 발행한다.
2. 발행 날짜는 해당호의 월 말일을 원칙으로 한다.
3. 기타 발행 과정은 ‘『일본문화학보』 발행 계획’에 준한다.
제 2 장 편집위원회 구성
제4조 편집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구성한다.
위원장, 편집간사, 국내외 위원
제5조
편집위원회 위원장은 편집위원 중에서 회장의 제청으로 이사회에서 선임한다.
편집위원회 위원장은 위원회를 대표하며, 편집간사는 학회지 논문의 심사 및 편
집을 통괄한다. 임기는 공히 2년으로 한다.
제6조 편집위원회 위원은 이사회의 인준을 받아 회장이 임명한다. 임기는 2년이며, 본
인의 동의를 얻어 연장 가능하다.
제7조 편집위원은 아래와 같은 기준에 따라 선정한다.
1. 대학의 부교수 이상 또는 이에 상응하는 자격을 갖춘 자, 혹은 해당 전공분
야에서 20년 이상의 연구경력을 가진 자로서 학술 연구 실적이 뛰어난
국․내외 회원 중에서 선정한다.
2. 각 학문분야의 대표성을 고려하여 선정한다.
3. 분과위원회의 분과이사는 당연직으로 임명한다.
제3 장 기능
제8조 편집위원회는 학회지 『일본문화학보』의 체제, 발행횟수, 발행부수, 논문의 분
량, 투고 및 심사규정 등 학회지 발행과 관련한 제반 사항을 결정한다.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23
제9조 편집위원회 편집간사는 각 분과이사와 협의 하에 학회에 투고된 논문의 심사위
원을 선정․의뢰하고, 편집위원회는 심사위원의 심사결과를 토대로 논문게재 여
부를 결정한다.
제10조 제8조에 제시된 사항 이외에 편집위원회가 의결한 사안은 이사회의 인준을 거친
후에 효력이 발생한다.
제 4 장 편집위원회 회의
제11조 편집위원회 회의는 학회지 발간 계획에 따라 위원장이 소집한다.
제12조 연 4회의 정규 편집회의 이외에 필요할 경우에 위원장이 임시 편집회의를 소집할
수 있다.
제13조 편집회의는 원칙적으로 출석위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의결한다.
제 5 장 논문 평가 기준
제14조 게재 논문은 학회에서 구두 발표된 것을 원칙으로 하되(단, 구두 발표 후 2년간
유효), 이사회의 추천이 있는 경우에는 그 기고 논문도 심사 후 게재할 수 있다.
제15조 논문의 심사는 항목별 평가와 종합평가로 이루어진다.
제16조 논문심사에 적용되는 평가 항목은 다음과 같다.
1. 내용의 적절성
2. 내용의 독창성
3. 형식의 적절성
4. 전개의 논리성
5. 연구방법의 적절성
제17조 종합평가는 항목별 평가를 근거로 심사자가 다음의 5등급으로 평가한다.
1. 학술논문으로서 매우 우수하다.
2. 학술논문으로서 우수하나 간단한 수정이 필요하다.
3. 학술논문으로서 내용 및 체제면에서 수정사항이 많고 수정 후 재심이 필요
하다.
4. 학술논문으로서 내용 및 체제면에서 상당한 수정이 필요하여 수정 후 재신
청을 요한다.
5. 학술논문으로서 부적격하다.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24
제 6 장 논문심사 기준 및 절차
제18조(심사 기준) 편집위원회에서는 투고 논문에 대한 3인의 책임심사위원의 심사 결
과와 지적 사항에 대한 집필자의 처리 결과 및 투고 규정의 준수를 바탕으로, 다
음과 같이 해당 논문의 게재 여부를 결정한다.
1. 게재 가
심사위원 평가평점 23점 이상인 논문이 대상이 된다.
2. 수정후 게재
심사위원 평가평점 20~22점인 논문이 대상이 된다.
3. 수정후 재심
심사위원 평가평점이 15~19점인 논문이 대상이 된다.
4. 게재 보류
심사위원 평가평점이 10~14점인 논문이 대상이 된다.
5. 게재 불가
심사위원 평가평점이 9점 미만인 논문이 대상이 된다.
제19조(심사 절차) 논문심사는 다음과 같은 2단계 절차로 이루어진다.
1. 1차 심사(심사위원 심사)
a. 제출된 논문에 대하여 3인의 책임심사위원에게 심사 의뢰한다.
b. 편집위원회에서는 심사위원 평가평점이 23점 이상인 논문은 <게재 가>, 20~
22점인 논문은 <수정후 게재>, 15~19점인 논문은 <수정후 재심>, 10~14
점인 논문은 <게재 보류>, 9점 미만인 논문은 <게재 불가>의 판정을 내린
다.
c. 투고자에게 1차 심사 결과보고서와 심사결과를 통보하고, <1심 통과> 판정
을 받은 논문은 수정․가필을 요구한다.
2. 2차 심사(편집위원회 심사)
a. 1차 심사 통과 논문에 대하여 2인의 편집위원에게 수정 이행 및 투고규정
준수 여부의 심사를 의뢰한다.
b. 심사위원회 평가평점을 합한 종합평점을 감안하여 <게재 가>와 <수정후
게재> 논문을 최종 결정한다.
c. 투고자에게 확정된 심사 결과를 통보한다. <수정후 재심>, <게재 보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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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5
논문은 재차 수정을 요구한다.
d. 투고 논문의 게재율에 관한 편집위원회의 의결 사항은 종합평점에 우선한다.
제20조(심사 시기) 투고된 논문에 대한 심사는 연 4회(3월․6월․9월․12)월에 실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제21조(논문 게재호) 최종 심사에 통과한 논문의 게재호는 편집위원회에서 결정하며, 동
일 집필자의 연속호 게재는 불허함을 원칙으로 한다. 또한 집필자가 복수인 경
우, 제1필자를 상단에 표기하고 공동필자는 하단에 표기한다.
제7 장 기타
제22조 편집위원회 및 분과별 업무를 처리하기 위하여 편집위원회와 별도로 분과 위원회
를 둔다.
제8 장 부칙
제1조 본 규정은 이사회의 의결을 거쳐 1999년 10월 9일부터 시행한다.
제2조 본 규정에 명시되지 않은 사항은 일반 관례에 따른다.
제3조 개정된 규정은 이사회의 의결을 거쳐 2002년 3월 1일부터 시행한다.
제4조 개정된 규정은 이사회의 의결을 거쳐 2006년 8월 1일부터 시행한다.
제5조 개정된 규정은 이사회의 의결을 거쳐 2008년 8월 1일부터 시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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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본문화학회 연구윤리 규정
제1 장 총 칙
제1조 (개요)
본 한국일본문화학회(이하 ‘학회’라 한다)는 한국에서의 일본학 연구 및 교육
활동을 활성화하기 위한 학술단체로 설립되었다. 본 학회는 학술활동의
일환으로 회원들의 학술연구결과를 엄정한 심사를 통해 선정하여 학술대
회에 참여시키고, 그 결과를 학회지에 게재시키고 있다. 본 학회는 지속
적으로 높은 수준의 학술지 발표를 통하여 학회의 발전 및 궁극적으로
한일 양국의 문화교류 및 발전을 도모하고자 한다. 이를 위하여 회원들
의 학술연구 수행 및 연구논문 발표 시 국제수준의 연구윤리를 준수함이
우선적으로 중요하며, 학회는 회원들의 진정한 학문적 발전을 위하여 학
회연구윤리규정을 제정하고자 한다.
제2조 (목적)
본 규정의 목적은 본 학회의 학회지 및 학술대회 발표 논문에 관한 연
구윤리의 규정을 엄격히 정하고 명문화함으로써 신뢰받는 연구풍토를 확
립하고, 회원들의 바른 학술활동을 유도하여 학회의 위상을 효율적으로
제고하기 위함이다.
제 2 장 연구윤리위원회의 조직
제3조 (위원회 설치)
본 학회는 연구윤리 규정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학회 내에 연구윤
리위원회(이하 ‘위원회’라 한다)를 설치한다.
제4조 (위원회 구성)
1. 위원회는 편집위원장, 부회장, 총무이사, 학술이사, 편집이사 및 3인
이상의 편집위원을 포함하여 15인 이내의 위원으로 구성한다.
2. 위원장은 편집위원장이 겸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필요에 따라서
는 위원회 내에서 회장이 임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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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조 (임기)
위원의 임기는 각 위원의 직책임기에 따른다
제 3 장 연구윤리위원회의 운영 및 권한
제6조 (운영 범위)
1. 학회 연구윤리와 관련된 제반 규정들을 세우고 실행한다.
2. 연구윤리 위반에 대한 제보를 접수하고 이를 규정에 따라 처리한다.
3. 제보자 및 피조사자의 인격과 명예에 대한 사항을 규정하고 이를 준
수한다.
4. 최종 조사결과에 대한 공문을 상임이사회에 통보한다.
5. 상임이사회의 최종 판정결과에 따라서 후속 사항 및 징계사항을 집
행한다.
제7조 (연구자의 연구윤리)
1. 연구자는 각자가 수행하는 연구행위 및 연구물에서의 표절, 조작, 위
조 및 변조, 이중출판 등을 심각한 범죄행위로 간주하고 이러한 부정
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2. 연구자는 제1항에 제시한 부정행위로 의심되는 사례를 발견했을 경
우 적절한 방법으로 이를 학회에 보고해야 한다.
3. 연구자는 자신의 이익과 타 연구자 또는 타 기관의 이익이 상충하거
나 상충할 가능성이 있을 경우 이를 공표하고 적절히 대응해야 한다.
제 4 장 심의 절차 및 징계
제8조 (심의 절차)
1. 위원회는 제보된 사안을 접수일로부터 60일 이내에 심의․의결․집
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2. 제보자의 신원 및 제보내용에 대해서는 비공개를 원칙으로 하되, 공
공기관의 요청이 있을 경우에는 통보할 수 있다.
3. 위원회는 제보된 사안의 적부를 자체 심사평가하며, 전문적 의견이
필요한 경우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검토를 의뢰할 수 있다.
4. 위원회는 판정을 내리기 전에 피제소자에게 연구윤리 저촉혐의 내용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28
을 알려주고 충분한 소명기회를 준다.
5. 심의 결과 제보된 사안이 부적절하거나 피제소자의 소명이 타당하다
고 인정될 경우, 피제소자의 무혐의를 제보자와 피제소자에게 즉시
통보한다.
6. 심의 결과 연구윤리 저촉이 사실로 인정될 경우, 심사결과를 제보자
와 피제소자에게 각각 통보하고, 피제소자로 하여금 일정 기간 내에
재 소명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7. 위원회는 피제소자의 혐의가 인정될 경우, 부정행위의 형태, 범위 및
고의성을 판별하여 보고서를 작성한다.
8. 위원회의 징계의결은 재적위원 3분의 2 이상의 출석과 출석위원 과
반수의 찬성으로 행한다.
9. 명시된 기간 내에 피제소자의 소명이 없거나 소명의 타당성이 인정
되지 않을 경우, 징계 내용을 최종 결정하여 이를 피제소자에게 공식
통보하는 한편, 학회 홈페이지를 통하여 공지한다. 단, 징계를 받은
논문 중 기관의 연구비를 받은 논문은 당해 기관의 확인 요청 여부
와 관계없이 당해 기관에 징계 결과를 통보한다.
제9조 (징계)
연구윤리 위반이 공식적으로 확정된 저자나 논문에 대해서는 그 위반행
위의 경중에 따라 다음 중 하나 또는 복수의 항목에 해당하는 징계를 가
하도록 한다.
1. 학회 견책 서한 발송
2. 해당 연구결과물에 대한 취소 또는 수정 요구
3. 3년간 투고자격 제한
4. 제명
5. 소속기관에의 통보
6. 법률기관에의 고발 등
제 5 장 기타
제10조 연구윤리 위반 혐의가 인정된 경우, 논문 투고 및 심사에 사용한 제반 경비를
반환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제11조 본 규정은 이사회의 의결을 거쳐 2008년 8월 1일부터 시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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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문화학보』 투고 규정
1. (논문)
일본어문학, 일본어교육, 일본학, 한일어 대조연구, 한일비교 문학 등 廣義의 일본문
화와 관련한 참신하고 창의적인 것이어야 한다.
2. (사용언어)
한국어나 일본어로 작성한다.
3. (원고작성)
국내 회원 및 해외 회원 공히 반드시 워드프로세서 <글> 로 작성하는 것을 원칙으
로 한다. 원고는 <글>의 <편집 용지>에서 (사용자 정의 폭 180, 길이 255)를 선택
하고, 위 20, 아래 10, 머리말 13, 꼬리말 13, 왼쪽 23, 오른쪽 23, 제본 0으로 조정한
후 작성한다. 논문 내용의 각 글자 크기는 다음과 같다.
논문 제목 - 신명조(약자) 20, 진하게, 가운데 정렬
소제목 - 신명조(약자) 15, 가운데
필자 명, e-mail - 신명조(약자) 12, 오른쪽 정렬
목차 - 신명조(약자) 12, 진하게, 가운데
목차 내용 - 신명조(약자) 10, 줄간격 140
큰제목 - 신명조(약자) 15, 진하게, 줄간격 155, 가운데
본문 - 신명조(약자) 10.5, 줄간격 155
인용문 - 신명조(약자) 10, 줄간격 155, 왼쪽 여백 (한글2002는 20, 한글97은 4)
각주 - 신명조(약자) 9, 줄간격 130
기타 간격 등의 설정은 <한국일본문화학회 논문 작성 요령>에 나와 있는 논문 편집
형식을 참고한다.
4. (원고분량)
원고지 200자×100매 내외로 한다. 이는 투고규정에 따라 작성한 문서 약 19매에 해당
하며, 15매~22매를 원칙으로 한다. 원고가 요지문을 포함하여 22매를 초과할 경우에
는 1매당 1만원의 게재료를 추가로 부담한다.
5. (요지문)
참고문헌 뒤에 600-800자 정도의 요지문을 기재한다. 요지문은 반드시 외국어(영문
혹은 일어) 로 작성한다.
6. (키워드)
요지문 밑에 그 논문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키워드(Key-Word) 6-10단어를 요지문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30
과 동일 언어로 명기한다.
7. (외래어)
일본어를 한글로 표기할 때는 한글맞춤법의 <외래어표기법>에 따른다.
8. (논문작성 요령)
a. 저서는 『 』, 논문이나 단편은 「 」 로 표시한다.
b. 注는 각주로 하며, 인용 또는 참고한 쪽수를 명기한다.
c. <참고문헌>은 필자명(연도), 논문명(또는 저서명), 게재지 권 호, 발행처의 순으로
배열하되, 마지막에 참고 혹은 인용한 쪽수를 필히 기재한다.
예) 安增煥(2001) 「言語와 文化」 『日本文化學報』 11, 韓國日本文化學會. 110쪽
影山太郞(1993) 『文法と語構成』ひつじ書房. 212頁
Stein, Dieter(1995) “Subjectivity and Subjectivisation” : Cambridge
University Press. p.113
d. 배열은 한국어 문헌, 일본어 문헌, 영어 문헌의 필자명을 기준으로 각각 가나다,
오십음, 알파벳 순으로 한다. 내용적으로 <사전류>, <전집류>, <단행본>, <잡지>,
<논문> 순으로 기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9. (원고제출)
원고는 e-mail로 제출한다. 원고의 표지는 별지로 하여, 투고자의 인적사항(성명, 영
문성명, 소속, 직위, 전공분야)과 논문의 영어제목, 연락처(우편번호, 주소, 전화,
e-mail) 및 구두발표일과 발표장소, 투고일을 기입한다. 또한 집필자가 복수인 경우,
제1필자와 공동필자를 함께 표기한다.
10. (원고교정)
편집위원회에서는 필요에 따라 집필자에게 원고의 가필․수정을 요구할 수 있으며,
원고의 교정은 집필자가 책임진다.
11. (심사비 및 게재료)
논문 투고를 희망하는 자는 학회 계좌에 심사비로 6만원을 입금하여야 하며, 게재가
확정되면 집필자는 소정의 게재료를 부담한다. (일반논문:10만원, 연구비수혜논문:20
만원)
12. (별쇄본)
게재된 논문에 대하여 학회지 2부를 증정한다. 단, 별쇄본의 인쇄비용은 집필자가
부담한다.
13. (기타)
복잡한 도표 및 투고 규정 위반 등으로 인하여 출판 비용이 많이 들 경우에는 집필
자에게 그에 대한 비용을 청구할 수 있으며, 접수된 원고는 반환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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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본문화학회 논문 작성 요령
【편집용지】 <사용자 정의 폭180, 길이255> 위20(19.99), 머리말13(12.99), 왼쪽23, 오른
쪽23, 제본0, 아래10, 꼬리말13(12.99)
【논문제목】
【소제목】
한국일본문화학회(신명조(약자) 20, 진하게, 가운데 정렬)
한국일본문화학회(신명조(약자) 15, 가운데)
** 4줄 (소제목이 없으면 5줄) **
【필자명】
洪 吉 東*(신명조(약자) 12, 오른쪽 정렬)
【e-mail】
([email protected])(신명조(약자) 12, 오른쪽 정렬)
(필자가 2인 이상인 경우, 제1필자를 상단에, 공동필자를 하단에 표기한다. 필자명
끝에 *표를 위 첨자 “*”(“모양”→“글자모양”에서 “속성-위 첨자”를 선택)로 한 후
소속, 직위, 전공분야를 각주로 기입한다. 각주번호 “1)”은 블록을 씌워 “글자모양”
에서 글자색을 흰색으로 지정하여 감추고, 본문에서 각주가 시작될 때는 “모양”의
“새 번호로 시작”에서 각주번호를 “1”로 한다.)
** 2줄 **
目
次 (신명조(약자) 12,진하게, 가운데)
신명조(약자) 10 , 줄간격 140
** 2줄 **
【큰제목】
1. 연구 목적 및 방법 (신명조(약자) 15, 진하게, 줄간격 155, 가운데 정렬)
** 1줄 **
【본 문】
이 논문은 상대일본어의.....大野씨는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신명조(약자) 10.5, 줄간격 155)
** 1줄 **
〔인용문〕 상대에 있어서...
(신명조(약자) 10, 줄간격 130, 왼쪽 여백(한글2002는 20, 한글97은 4))
** 1줄 **
이처럼 상대일본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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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줄 **
2. 상대 일본어의 특징 (신명조(약자) 15, 진하게, 줄간격 155, 가운데 정렬)
** 1줄 **(작은 제목과 본문사이는 떼지 않음)
【각 주】 ―――――――――
* 한국대학교 조교수 일본고전문학
1) 이에 대해 ****은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신명조(약자)
9, 줄간격 130)
(인용 및 참고자료에 대해서는 발행년도와 쪽수를 표기한다.)
** 2줄 **
5. 맺음말
** 1줄 **
이 논문에서는....
** 2줄 **
【참고문헌】 (신명조(약자) 15, 진하게, 줄간격 155)
** 1줄 **
․ 허웅(1985)『국어음운학』, 샘문화사. p.131-133 (신명조(약자) 10, 줄간격 155)
* 전체글꼴은 신명조 또는 신명조 약자, 전체줄각격은 155, 각주 130 표 140.
* <필자명(연도) 논문명(또는 저서명), 게재지 권 호, 발행처>의 순서로 배열
* 문헌 배열: 국문, 일문, 영문 순으로 하여 필자명을 기준으로 각각 가나다, 오십음, 알파벳 순.
* 인용 또는 참고한 쪽수를 명기
** 쪽을 바꿔서 **
【요지】(신명조(약자) 15, 진하게, 줄간격 155)
** 6줄 **
本論は、上代日本語を通して...... (신명조(약자) 10, 줄간격 155)
( 작성언어 : 영어 또는 일본어. 분 량 : 1장 내외)
** 1줄 **
* 키워드 : 검색의 편의를 위해 주제어(key word)를 명시(요지문과 동일 양식으로 6-10단어)
** 2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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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회 발표에 관한 규정
1. (발표자격)
본 학회 정회원으로서 대학원생이거나, 교원 경력 5년 이상인 자, 또는 이사회의 추
천을 받은 자로 한다. 단, 석사과정의 대학원생인 경우는 지도교수 혹은 해외지부장
의 추천이 필요하며, 발표 요지문을 해당 분과에서 심사 후 채택 여부를 결정한다.
2. (발표신청)
해당 분과이사나 학술이사에게 구두로 신청할 수 있으나, 가능한 한 학회 홈페이지상
의 신청 양식을 이용하도록 한다.
3. (신청기한)
춘계대회 발표 희망자는 3월 15일, 추계대회 발표 희망자는 9월 15일까지 신청하도록 한다.
4. (발표 요지문)
a. <발표요지문>은 한국어 또는 일본어로 작성한다.
b. 분량은 A4용지 4장(가로쓰기) 이내로 한다.
c. 마지막에 발표자의 근무처․전공․주소․전화번호․e-mail 주소를 기입한다.
d. 춘계대회 때는 3월 31일까지, 추계대회 때는 9월 30일까지 제출한다.
e. 원고는 가능한 한 e-mail(첨부파일)로 하여 학술이사에게 전송한다.
f. 우편의 경우는 학술이사나 학회 사무실로 발송한다.
g. 발표 요지문 제출과 함께 발표 요지집 인쇄비로 10,000원을 학회 통장으로 입금한다.
5. (외국 교류학술지 투고)
구두발표 신청 시 외국 학술교류학회지(일본비교문화학회 『비교문화연구』)에 투고
를 희망하는 경우는 국내회원이 대상이 된다. 교류학회 측의 투고요청 희망자수 범위
내에서 본 학회의 내부 선정 기준에 의하여 대상자를 선정․추천한다.
<발표요지문 인쇄비 및 게재료 입금처>
외환은행 611-017701-086
(日本) 郵便局 00920-9-147169
박희남(일본문화학회)
韓國日本文化學會 日本支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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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학회와의 학술교류에 관한 규정
1. (日本) 表現學會
a. 표현학회는 한국일본문화학회로부터 추천 받은 1명에 대하여, 전국대회(연 1회)에
서 연구발표의 기회를 제공한다.
b. 한국일본문화학회는 표현학회로부터 추천 받은 수명에 대하여, 학술대회(연 2회)에
서 연구발표의 기회를 제공한다.
c. 표현학회는 한국일본문화학회로부터 추천 받은 발표 논문에 대하여 학회지 『表現
硏究』에 게재할 수 있다.
d. 한국일본문화학회는 표현학회로부터 추천 받은 발표 논문에 대하여 학회지 『日
本文化學報』에 게재할 수 있다.
2. 日本比較文化學會
a. 일본비교문화학회는 한국일본문화학회로부터 추천 받은 회원에 대하여, 전국 대회
(연 1회)에서 연구발표의 기회를 제공한다.
b. 한국일본문화학회는 일본비교문화학회로부터 추천 받은 회원에 대하여, 학술 대회
(연 2회)에서 연구발표의 기회를 제공한다.
c. 일본비교문화학회의 학회지 『比較文化硏究』에 한국일본문화학회 국내회원의 논
문을 게재할 수 있다.
d. c항의 논문은 한국일본문화학회에서 구두 발표한 논문 중에서 학회가 추천하며,
투고자의 추천에 있어서는 학회의 내부 규정에 따라 해당자를 선정한다.
e. 추천 논문의 심사와 게재료는 일본비교문화학회의 규정에 따른다.
f. 한국일본문화학회는 학회지 『日本文化學報』에 일본비교문화학회로부터 추천 받
은 논문을 게재할 수 있으며, 추천 논문의 심사는 해당 학회의 규정에 따른다.
g. 일본비교문화학회는 전국대회(연 1회)에서 발표하는 한국일본문화학회로부터의 추
천 회원에 대하여 1년 간의 회비를 면제한다.
h. 한국일본문화학회는 학술대회(연 2회)에서 발표하는 일본비교문화학회로부터의 추
천 회원에 대하여 1년 간의 회비를 면제한다.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35
해외이사에 관한 규정
1. (자격)
본 학회에 1회 이상 출석하여 연구발표를 한 외국 학자 중에서, 본 학회의 연구 활동
에 관심을 가지고 협력하는 자로 한다.
2. (활동)
a. 자국 내에 본 학회를 소개하고 학회의 활동 내용이나 정보 등을 제공한다.
b. 본 학회의 연구발표회에서 발표를 희망하는 자를 모집한다.
c. 본 학회의 학회지 게재 대상 논문을 심사할 수 있다.
d. 본 학회의 자국내 회원을 관리한다.
3. (임기)
2년 단위로 하고, 본인의 동의를 얻어 연장 가능하다.
4. (임명)
이사회에서 심의․결정하고, 회장이 위촉한다.
5. (시행)
본 규정은 1997년 5월 5일부터 시행한다.
해외지부에 관한 규정
1. 본 학회는 학문을 통한 국제교류와 학회활동의 국제화를 위해 해외에 지부를 둘 수 있다.
2. 해외지부는 본 학회의 취지에 찬동하고 적극적으로 협조할 수 있는 해외이사를 중심
으로 결성한다.
3. 해외지부의 운영은 지부장이 총괄하며, 회원도 자체 관리한다.
4. 해외지부장은 이사회의 추천을 받아 회장이 위촉한다.
5. 해외지부장의 임기는 2년이며 본인의 동의를 얻어 연임도 가능하다.
6. 해외지부는 정기적인 연구회를 개최하고, 그 결과를 본 학회에 보고한다.
7. 해외지부에서는 본 학회의 전국대회(연 2회)에 발표자를 추천한다.
8. 해외지부로부터의 추천 발표자는 1년 간의 회비를 면제한다.
9. 본 학회에서는 해외지부에 투고 논문에 대한 심사를 의뢰할 수 있다.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36
회원규정
본 학회의 모든 회원은 [국내회원](국내에 소속이나 근무처가 있는 내국인이나 외국
인)과 [해외회원](국외에 소속이나 근무처가 있는 외국인이나 내국인)으로 구분하며, 가
입 내용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단, 한국인 유학생은 국내회원으로 분류한다.
1.(정회원)
본 학회의 회원 가입을 필한 자. 단, 3년 간 회비를 납부하지 않을 경우에
는 정회원의 자격을 상실한다.
2.(준회원)
회원 중 정회원의 자격을 상실한 자.
3.(종신회원) 본 학회의 발전에 기여한 회원 중에서 이사회의 동의를 얻은 자로, 소정의
종신회비(30만원)를 납부한 회원으로, 실무이사를 겸하고 있는 경우 이사
회비는 2만원으로 한다.
4.(특별회원) 본 학회의 발전에 기여한 회원 중에서 이사회의 추천을 받은 자.
5.(명예회원) 본 학회 초청강연자 중에서 이사회의 추천을 받은 자.
6.(단체회원) 소정의 단체회비(8만원)를 납부하는 국내외 학술단체 및 기관. 단, 해외의
[학술지교류단체]도 단체회원의 범주에 포함한다.
회원명단 상에 상위점이나 변경사항이 있는 회원께서는 즉시 학회 사무실
로 연락 바라며, 3년 동안 회비를 납부하지 않는 경우에는 회원명단에서
자동 삭제되니(재가입 要) 이 점 양지하시고 협조 부탁드립니다.
학회비 납부 안내 (가입비 1만원 / 년회비 3만원)
* 이사회비 년5만원
외환은행 611-017701-086 박희남(일본문화학회)
(日本) 郵便局 00920-9-147169 韓國日本文化學會 日本支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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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7
『日本文化學報』發行 計劃
∙
∙
∙
∙
∙
∙
∙
∙
∙
原稿 投稿 依賴 (5月初․11月初)
論文 原稿 마감 (2月末․5月末․8月末․11月末):1次 提出
論文 審査 (3月․6月․9月․12月)
審査委員 審査結果 通知 (3月中旬․6月中旬․9月中旬․12月中旬)
論文 修正原稿 마감 (3月末․6月末․9月末․12月末):2次 提出
編集委員會 最終 揭載可否 通知 (4月初․7月初․10月初․1月初)
1次 校正:筆者
2次 校正:編集委員會
發行 (5月31日․8月31日․11月30日․2月28日)
學會 住所 및 連絡處
☞ 韓國
學會事務局
(300-150) 대전광역시 동구 정동 31-1
신영와코루빌딩 201호(메트로문화사)
Tel (042)488-9155
Fax (042)488-9156
☞ 日本
本學會의 關西支部 : 藤井寺市春日丘3-8-1 大阪女子短期大學 水谷隆硏究室
關東支部 : 東京都日野市大坂上4-1-1 實踐女子大學 山內博之硏究室
中部支部 : 名古屋市昭和區山里町18番地 南山大學 坂本正硏究室
☞ 학회 Homepage address : //www.bunka.or.kr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38
編輯委員會
編輯委員長
編輯幹事
編輯委員
: 片茂鎭(檀國大)
: 全成龍(淸州大)
: 具見書(平澤大)
權五曄(忠南大)
金順槇(全南大)
朴正義(圓光大)
安增煥(韓南大)
李康民(漢陽大)
李暻洙(放通大)
鄭昌石(同德女大)
陳明順(靈山大)
坂本正(南山大)
島村恭則(秋田大) 牧野和夫(實踐女子大)
分科委員會
*
〔日本語學分科〕 辛碩基(建陽大)
張元哉(啓明大)
尹錫南(建陽大)
金東郁(白石大)
黃光吉(檀國大)
趙來喆(順天大)
吳美寧(崇實大)
崔彰完(가톨릭大)
安熙貞(威德大)
*
康永富(慶熙大)
金聖京(柳韓大)
金潤喆(群山大)
李京哲(東國大)
崔英淑(大邱韓醫大)
尹岡丘(慶尙大)
李珍鎬(圓光大)
裵貞烈(韓南大)
金泰燾(韓瑞大)
金裕千(詳明大)
南二淑(群山大)
李濬燮(慶北大)
李市埈(崇實大)
閔丙勳(大田大)
吳起燻(靑巖大)
李貞熙(威德大)
金希中(東南保健大)
權赫建(東義大)
임태균(聖潔大)
林容澤(仁荷大)
林永彦(全南大)
金泰永(江陵大)
崔長根(大邱大)
朴正義(圓光大)
具見書(平澤大)
鄭応洙(南서울大)
鄭昌石(同德女大)
權柄旭(忠南大)
金英順(建陽大)
朴宰秀(韓國科學技術情報硏究院)
〔日本語敎育分科〕
金仁炫(朝鮮大)
安秉杰(南서울大)
〔古典文學分科〕
李夏子(順天大)
*
金祥圭(釜慶大)
鄭順紛(培栽大)
〔近代文學分科〕
*
박승호(白石文化大) 韓光洙(淸州大)
김태연(慶州大)
〔日本學分科〕
吳俊永(空軍士官學校)
*
*
※ ( 는 分科理事)
◉ 會則および規定
▸ 學會會則
▸ 編輯委員會規定
▸ 投稿規定
▸ 學會發表に關する規定
▸ 海外理事に關する規定
▸ 海外支部に關する規定
▸ 會員規定
◉ 『日本文化學報』發行計畵
◉ 各種樣式
◉ 2007年度 學會日程表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40
會則および規定
韓國日本文化學會 會則
第1 章 總 則
第1條(名称) 本學會は 「韓國日本文化學會」 と称する。
第2條(目的) 本學會は日本關連諸學問硏究のための國內外相互の學術交流を通じて、日本學
硏究の活性化と學問の發展を図り、國際交流を通じた相互協力と理解增進に寄与
する。
第3條(事業) 本學會は第2條の目的を達成するために各項の事業を行う。
1. 學術硏究發表會(年2回)
2. 學術誌發刊(年4回)
3. 學術振興のためのセミナー及びシンポジウムの開催
4. 外國學會との學術交流及び共同硏究
5. 外國の大學図書館及び學術団体との學術誌交流
6. 日本文化の紹介
第4條(位置) 本學會の目的を達成するために學會事務室及び支部を置き、常時業務を担當する
事務局長を置くことができる。
第2 章 會 員
第5條(資格) 本學會の會員は日本語文學をはじめとする日本學硏究に從事する者や關心を持つ
者とする。
第6條(區分) 本學會の會員の區分は「會員規定」に從う。
第7條(加入要件) 本學會に新規に加入をしようとする者は旣會員の推薦を受けることを原則とす
る。
第8條(權利と義務) 本學會の會員は次のような權利と義務を有する。
1. 役員の選擧權及び被選擧權(但し、名譽會員を除く)
2. 學會活動參加の權利と會則遵守の義務
3. 會費納付の義務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41
第9條(懲戒):會員が會員の義務を遂行せず、本學會の名譽を著しく損なった場合は、理事会の
決議を経て、会員資格の剥奪または停止など懲戒することができる。
第 3 章 機構及び役員
第10條(機構) 本學會には次のような機構を置く。
1. 執行委員會(會長、副會長、常任理事)
2. 理事會
3. 海外支部
第11條(役員) 本學會の円滑な運營のために次のような役員を置く。
會長(1名)、副會長(若干名)、常任理事(若干名)、海外理事及び理事(適
宜)、監事(2名)
第12條(役員の選出) 會長及び監事は總會で選出し、その他の役員は會長が委囑する。
第13條(役員の任期) 役員の任期は2年とするが再任することができる。
第4 章 會 議
第14條(種類) 本學會の會議には總會、理事會、各種委員會がある。
第15條(總會の招集及び議決)
1. 本學會は每年1回の定期總會を開催し、必要に応じて會長が臨時總會を招集
することができる。
2. 總會は次のような議案を審議․議決する。
(1) 會長及び監事の選出․解任
(2) 會則改定
(3) 事業計畵の樹立
(4) 予算と決算の承認
(5) その他の事項
3. 總會での議決は出席會員の過半數の贊成による。
第16條(理事會の招集及び議決)
1. 理事會には實務理事會と擴大理事會があり、會長がこれを召集する。
2. 實務理事會は會長、副會長、常任理事により構成され、擴大理事會は會
長、副會長を含む全理事が對象となる。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42
3. 理事會は諸規定の改定、會則改正の發議、會長委任事項の審議、諮問委
員の迎え入れ、特別․名譽會員の承認、その他重要事項を處理する。
第17條(各種委員會の構成及び任務)
1. 會長は分野別業務の能率的遂行のため各種委員會を設置することができる。
2. 委員會は委員長と委員から成り、委員長は會長の任命動議により理事會で選任する。
3. 委員會の案件は出席委員の過半數の贊成により可決される。
第5 章 財 政
第18條(財政)本學會の財政は會員の會費とその他の收益金による。
第19條(會費)本學會の會費は總會で決定する。
第20條(會計年度)本學會の會計年度は3月から翌年2月までとする。
第21條(國際學術交流賞選定)本學會の學術發展に多大な貢獻が認められる海外會員を對象
とし學會長の推薦により理事會において定める。
第6 章 付 則
第22條(會則改正)本學會の會則の改正は定期總會で出席者の3分の2以上の同意
を得て確定する。
第23條(施行細則)本會則の施行に必要な諸規定は理事會の議決を得て施行する。本會則に
明示されていない事項については慣例に從う。
第24條(施行日)本改正會則は2001年10月1日から施行する。
第25條 改正された規定は、定期総会の議決を経て、2007年5月1日から施行する。
第26條 改正された規定は、定期総会の議決を経て、2008年10月25日から施行する。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43
韓國日本文化學會 編輯委員會規定
第1 章 總 則
第1條 本委員會は「韓國日本文化學會編集委員會」と称する。
第2條 本委員會は韓國日本文化學會會則第17條により設置する。
第3條 本委員會が管掌する學會誌『日本文化學報』は次のような指針のもとに發行する。
1. 年4回(2月号、5月号、8月号、11月号)發行する。
2. 發行日は當該月の末日を原則とする。
3. その他の發行過程は「『日本文化學報』發行計畵」による。
第 2 章 編集委員會の構成
第4條 編集委員會は次のように構成する。
委員長、編集幹事、国內外委員
第5條 編集委員會委員長は編集委員の中から会長の提請により理事会で選任する。編集委員
會委員長は委員會を代表し、編集幹事は學會誌に投稿された論文の審査及び編集を統
括する。任期は共に2年とする。
第6條 編集委員會委員は理事會の認定を経て會長が任命する。任期は2年とし、本人の同意を
得て延長が可能である。
第7條 編集委員は次のような基準により選定する。
1. 大學の副敎授以上またはこれに相當する資格を持つ者。或いは該當專攻分野で20
年以上の硏究経歷を持つ者で學術硏究實績が優れた國內外會員。
2. 各學問分野の代表性を考慮して選定する。
3. 分科委員會の分科理事。
第3 章 機 能
第8條*編集委員會は學會誌『日本文化學報』の樣式、發行回數、發行部數、論文の分
量、投稿及び審査規程など學會誌發行と關連した諸事項を決定する。
第9條1編集委員會の編集幹事は各分科理事との合意のもとに投稿論文の審査委員を選定․依
賴し、編集委員會は審査委員の審査結果を踏まえて論文揭載の可否を決定する。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44
第10條1第8條の事項以外に編集委員會が議決した事案は、理事會の認定を経たのちに効力が
發生する。
第 4 章 編集委員會會議
第11條1編集委員會會議は學會誌の發行計畵により委員長が召集する。
第12條1年4回の定期編集會議以外に、必要に応じて委員長が臨時編集會議を招集することができ
る。
第13條1編集會議は原則として出席委員の過半數の贊成で議決する。
第 5 章 論文評価基準
第14條 揭載論文は學會の硏究發表會で發表されたものとするが(但し、口頭發表後2年間有
効)、理事會の推薦がある場合にはその寄稿論文も揭載することができる。
第15條 論文の審査は項目別評価と總合評価からなる。
第16條 評価項目は次の通りである。
1. 内容の適切性
2. 内容の独創性
3. 形式の適切性
4. 展開の論理性
5. 研究方法の適切性
第17條 總合評価は項目別評価をもとに審査者が次の5段階で評価する。
1. 學術論文として非常に優秀である。
2. 學術論文として優秀であるが一部修正を要する。
3. 學術論文として內容․形式面で修正を要する部分が比較的多く、修正後再審査を
要する。
4. 學術論文として內容․形式面で相當な修正が必要であり、修正後再申請を要す
る。
5. 學術論文として不適格である。
第 6 章 論文審査基準․審査過程
第18條(審査基準) 編集委員會では投稿論文に對する3名の責任審査委員の審査結果と、指摘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45
事項に對する執筆者の處理結果及び投稿規定の遵守を基準として、次のように論文の揭
載可否を決定する。
1. 揭載可
審査委員評価23点以上の論文が対象になる。
2. 修正後掲載
審査委員評価20~22点の論文が対象になる。
3. 修正後再審査
審査委員評価15~19点の論文が対象になる。
4. 揭載保留
審査委員評価10~14点の論文が対象になる。
5. 揭載不可
審査委員評価9点未満の論文が対象になる。
第19條(審査過程) 論文の審査は次の2段階の過程からなる。
1. 一次審査(審査委員審査)
2. 二次審査(編集委員會審査)
第20條(審査時期) 投稿された論文の審査は年4回(3月、6月、9月、12月)實施することを原則とする。
第21條(論文揭載号) 最終審査に通過した論文の揭載号は編集委員會で決定する。
第 7 章 その他
第22條 編集委員會及び分科別の業務を處理するため編集委員會とは別に分科委員會を置く。
第8 章 付 則
第1條 本規定は理事會の議決を経て1999年10月9日から施行する。
第2條 本規定に明示されていない事項については慣例に從う。
第3條 改正された規定は理事會の議決を経て2002年3月1日から施行する。
第4條 改正された規定は理事會の議決を経て2006年8月1日から施行する。
第5條 改正された規定は理事會の議決を経て2008年8月1日から施行する。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46
『日本文化學報』 投稿規定
【海外會員用】
1. 原稿は<アレアハングル>かMs-Wordで作成する。
2. 原稿の分量は原稿用紙400字×50枚以內とする。<アレアハングル>の文書作成の初期畵面で
作成する場合は、A4用紙15枚から22枚までとする。要旨を含めて22枚を超えるときは、超過分1
枚當り1万ウォンの揭載料を徵收する。
3. 原稿は<アレアハングル>の<編集用紙>で<使用者定義 幅180、縱255>を選擇し、上20、下1
0、ヘッダー13、フッター13、左23、右23、製本0に調整した後作成する。フォントは韓國語文は新
明朝、日本語文は新明朝略字とする。各文字のポイント數は次の通りである。
論文題目 - 新明朝(略字) 20、 太字、 中央寄
副題 - 新明朝(略字) 15、 中央寄せ
筆者名, e-mail - 新明朝(略字) 12、 右寄せ
目次 - 新明朝(略字) 12、 太字、 中央寄せ
目次の內容 - 新明朝(略字) 10、 行間隔 140、 中央寄せ
大見出し - 新明朝(略字) 15、 太字、 行間隔 155、 中央寄せ
本文 - 新明朝(略字) 10.5、 行間隔 155、 兩側混合
引用文 - 新明朝(略字) 10、 行間隔 155、 兩側混合、左余白:ハングル2002は20、ハ
ングル97は4
脚注 - 新明朝(略字) 9、 行間隔 130、 兩側混合。 表 - 行間隔 140
その他の設定は<『日本文化學報』 論文作成要領>を參照する。
4. <參考文獻>の後に600字未滿の要旨(英文あるいは日本語)を記入する。
5. 要旨のすぐ下にその論文を理解するために必要なキーワード(6~10語)を要旨と同一の言語で明
記する。
6. 原稿上の図表やイメージ資料は必要に応じて原本を添付する。
7. 注は脚注とし、必ず引用․參考したページを明記する。
8.
<參考文獻>は、筆者名(年度)、「論文名」(または『著書名』)、揭載紙と卷号、發行所の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47
順とする。最後に參考あるいは引用した頁を必ず明記する。
例) 西隈俊哉(2001), 「-AS使役に關する一考察」, 『日本文化學報』11, 韓國日本文化
學會, 110面.
影山太郞(1993), 『文法と語構成』, ひつじ書房, 212頁.
Stein, Dieter(1995), “Subjectivity and Subjectivisation” : Cambridge
University Press. p.113
9. <參考文獻>の配列は韓國語、日本語、英語の文獻の順とし、筆者名を基準にして、それぞれ
アイウエオ、abc順にする。
10. 原稿はe-mailで提出する。
11. 原稿の表紙は、所定の別紙(論文投稿用)に論文タイトル(英文タイトル倂記)、筆者名(漢字、
ローマ字式表記倂記)、筆者の勤務先(所屬)․專攻․住所․電話番号․e-mail、口頭發表
した場所と發表日、投稿日を明記する。
12. 投稿論文の査讀に所要される費用は学会で負担する。但し、揭載が確定した場合は執筆者は
所定の揭載料を負担する。
13. 揭載された論文に對しては學會誌2部を贈呈する。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48
『日本文化學報』 論文作成要領
【編集用紙】
<使用者定義 幅180, 縱255> 上20(19.99), 下10, ヘッダー13(12.99), フッター13(12.99),
左23, 右23, 製本0
【論文題目】
韓國日本文化學會(新明朝(略字) 20, 太字, 中央寄せ)
【副 題】
韓國日本文化學會(新明朝(略字) 15, 中央寄せ)
** 4行空け (副題がない場合は5行空け) **
【筆者名】
洪 吉 東(新明朝(略字) 12, 右寄せ)
【e-mail】
([email protected])(新明朝(略字) 12, 右寄せ)
** 2行空け **
目 次 (新明朝(略字) 12, 太字, 中央寄せ)
新明朝(略字) 10 , 行間隔 140
** 2行空け **
【大見出し】1.
硏究の目的と方法 (新明朝(略字) 15, 太字, 行間隔 155, 中央寄せ)
** 1行空け **
【本 文】
この論文は上代日本語の.....大野氏は次のように述べている
(新明朝(略字) 10.5, 行間隔 155, 兩側混合)
** 1行空け **
〔引用文〕上代において.....
(新明朝(略字) 10, 行間隔 130, 兩側混合, 左余白:ハングル2002は20、ハングル97は4)
** 1行空け **
このように、上代日本語の.....
** 2行空け **
2. 上代日本語の特徵 (新明朝(略字) 15, 太字, 行間隔 155, 中央寄せ)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49
** 1行空け **(小見出しがある場合, 小見出しと本文の行間は空けない)
【脚 注】 ―――――――――
1) これについて ****は次のように論じている。(新明朝(略字) 9, 行間隔 130, 兩側混合)
(引用及び參考資料については發行年度とページ數を明記する。)
** 2行空け **
5.
結び
** 1行空け **
本論文では....
** 1行空け **
【參考文獻】 (新明朝(略字) 15, 太字, 行間隔 155, 中央寄せ)
** 1行空け **
․影山太郞(1993) 『文法と語構成』, ひつじ書房, 212頁。(新明朝(略字) 10, 行間隔 155, 兩側混合)
* 筆者名(年度) 論文名(あるいは著書名), 揭載誌 卷 号, 發行所〉の順に配列する。
* 文獻配列は韓國語、日本語、英文の文獻の順とし、筆者名を基準にして、それぞれ가나
다、アイウエオ、abc順にする。
* 參考あるいは引用したページは必ず明記する。
** ページを変える **
【要 旨】(新明朝(略字) 15, 太字, 行間隔 155, 兩側混合)
** 6行空け **
本論は、上代日本語を通して...... (新明朝(略字) 10, 行間隔 155, 兩側混合)
* 作成言語 : 英語あるいは日本語
*分
量 : 1枚前後
** 1行空け **
【キーワード】論文を理解するために必要なキーワード(6~10語)を要旨と同一の言語で明記。(新
明朝(略字) 11, 行間隔 155, 兩側混合)
** 2行空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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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0
學會發表に關する規定
1. (發表資格) 口頭發表者の資格は本學會の正會員で、大學院生、敎員経歷5年以上の者、
または理事會の推薦を受けた者とする。但し、修士課程の大學院生の場合は、指導敎授か海
外支部長の推薦が必要である。提出した發表要旨文を該當の分科で審査の上、採擇の可否
を決める。
2. (發表申請) 該當の分科理事や學術理事に口頭で申請可能だが、できるだけ學會ホームペー
ジ上の申請樣式を利用する。
3. (申請期限) 春季大會は3月15日、秋季大會は9月15日までとする。
4. (發表要旨文)
a. <發表要旨文>は韓国語または日本語で作成する。
b. 分量はA4用紙4枚(橫書)以內とする。
c. 最後に發表者の勤務先․專攻․住所․電話番号․e-mailアドレスを記入する。
d. 春季大會は3月31日、秋季大會は9月30日までに提出する。
e. 原稿はe-mail(File添附)で該當の分科理事か學術理事に提出する。
f. 發表要旨文の提出とともに發表要旨集の印刷費として10,000ウォンを學會の口座に入金す
る。但し、海外會員の場合は、發表の當日受付に支拂うこともできる。
<學會の口座>
外換銀行
611-017701-086 朴喜南(日本文化學會)
(日本) 郵便局 00920-9-147169
韓國日本文化學會 日本支部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51
海外理事に關する規定
1. (資格) 本學會に1回以上出席して硏究發表した日本の學者の中で、本學會の硏究活動に關
心を持ち、ご協力してもらえる方。
2. (活動)
(1) 日本國內において本學會を紹介し、學會の活動內容や情報などを提供
(2) 韓國國內で行われる年二回の硏究發表會で發表を希望する人の窓口役割
(3) 學會誌揭載對象論文の審査
(4) 日本國內の會員の管理
3. (任期) 2年單位とし、本人の同意を得て延長可能。
4. (任命) 理事會で協議․決定し、會長が委囑する。
5. (施行) 本內規は、1997年5月5日から施行される。
海外支部に關する規定
本學會のすべての會員は、「國內會員」(韓國內に所屬や勤務先のある內國人や外國人)と「海
外會員」(外國に所屬や勤務先のある外國人や內國人)とに分け、加入の內容により次のように分
類される。ただし、日本での留學生は國內會員とする。
1. (正會員) 本學會の會員として登錄を濟ませた者。但し、3年間の會費を未納する場合は、正會
員の資格を失う。
2. (準會員) 會員の中で、正會員の資格を失った者。
3. (終身會員) 理事會の同意を得た者で、所定の會費(30万ウォン)を納付した會員。
4. (特別會員) 本學會の發展に貢獻した人の中で、理事會の推薦による方。
5. (名譽會員) 本學會の招聘講演者の中で、理事會の推薦による方。
6. (団体會員) 所定の會費(年8万ウォン)を納付する國內外の學術団体および機關。但し、海外
(日本)の「學術誌交流団体」も団体會員の範囲に含む。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52
會員規定
1. 本學會は、學問を通した國際交流と學會活動の國際化のために、海外に支部を置くことができ
る。
2. 海外支部は、本學會の趣旨に贊同し、積極的に協力してくれる海外理事を中心に結成する。
3. 海外支部の運營は支部長が總括し、會員も各支部で管理する。
4. 海外支部長は、理事會の推薦により會長が委囑する。
5. 海外支部長の任期は2年で、本人の同意により連任も可能である。
6. 海外支部は定期的に硏究會を開催し、その結果を本學會に報告する。
7. 海外支部では、本學會の全國大會(年2回)での發表者を推薦する。
8. 海外支部からの推薦發表者は1年間の會費を免除する。
9. 本學會では海外支部に投稿論文の査讀を依賴することができる。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53
『日本文化學報』 發行計畵
∙ 投稿 依賴 (5月初․11月初)
∙ 論文原稿 締切り (2月末․5月末․8月末․11月末):1次 提出
∙ 論文審査 (3月․6月․9月․12月)
∙ 審査委員審査結果 通知 (3月中旬․6月中旬․9月中旬․12月中旬)
∙ 論文修正原稿 締切り (3月末․6月末․9月末․12月末):2次 提出
∙ 編集委員會 最終揭載可否 通知 (4月初․7月初․10月初․1月初)
∙ 1次校正:筆者
∙ 2次校正:編集委員會
∙ 發行 (5月31日․8月31日․11月30日․2月28日)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54
各 種 樣 式
〔諸樣式は學會のホームページにある。ここでは一部の樣式のみを提示する。〕
<樣式總目次>
No 樣式番号
樣
式
名 担當理事
用途
1.學會-01k 會員加入申請書 總務
國內會員用
2.學會-01j
會員加入申請書 總務
海外會員用
3.學會-02k
會員學術情報 總務
國內會員用
4.學會-02j
會員學術情報 總務
海外會員用
5.學會-03j
海外団体會員加入申請書 總務
6.學會-04j
海外団体會員確認書
總務
7.學-01k
學會發表申請書
學術
國內會員用
8.學-01j
學會發表申請書
學術
海外會員用
9.學-02k
學會發表推薦書 學術
國內會員用
10.學-02j
學會發表推薦書 學術
海外會員用
11.學-03j
學會參加予定書 學術
海外會員用
12.學-04k
發表申請受理結果書 學術
國內會員用
13.學-04j
發表申請受理結果書 學術
海外會員用
14.編-01
口頭發表論文審査意見書(分科編集委員用)
編集
15.編-02
口頭發表論文審査評価書(分科審査用)
編集
16.編-03k
論文審査評価書(責任審査委員用)
編集
國內用
17.編-03j
論文審査評価書(責任審査委員用)
編集
海外用
18.編-03hn
論文審査評価書(交流學會審査用) 編集
交流學會用
19.編-04
論文審査結果書(編集委員會用)
編集
20.編-05
最終審査結果書(編集委員會用) 編集
21.編-06k
論文審査評価書(再審用) 編集
國內用
22.編-06j
論文審査評価書(再審用) 編集
海外用
23.編-07
再審論文審査結果書(編集委員會用) 編集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55
<會員加入 申請書>
樣式 <學會-01k>
會員加入 申請書
(國內會員用)
姓
名
漢 字
英 字
生年月日
性 別
男( ) 女( )
勤務處․所屬
職
位
敎授( ) 講師( ) 大學院生/博士課程(
其他(
)
專攻分野
細部專攻
郵便番號 (
住
連 絡 處
)․碩士課程( )
-
)
所
電話番號
(FAX)
携帶電話
e-mail
(其他 加入學會名 等)
學會活動
上記와 같이 貴 學會의 會員 加入을 申請합니다.
200
.
.
.
申請人 :
推薦人 :
韓國日本文化學會長 貴下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56
<學會發表申請書>
樣式 <學-01k>
學會發表 申請書
(國內會員用)
大會名 韓國日本文化學會 200
發 表 者 名
年度
第
所屬(勤務處)
回 國際學術硏究發表會
職
位
敎
授
講
師
大學院生
博士課程
碩士課程
(漢字)
(英字)
其他 (
□
□
□
□
)
論 文 題 目
發表希望分科
日本語學(
) 日本語敎育(
) 日本近代文學(
)
日本古典文學( ) 日本學( )
外國(日本)
( ) 日本比較文化學會 學會誌
學術交流學會誌
『比較文化硏究』<日本語․日本文化>篇
投稿 希望
住所 및 連絡處
住所(連絡處)
電話番號
携帶Phone
E-mail
<참고사항>
(1) 發表者는 本學會의 正會員으로서, 大學院生인 경우는 碩士課程 在學中인 者 以上으로 한다. 단 碩士
課程에 在學中인 경우는 指導敎授나 海外支部長의 推薦書가 필요하며, 發表要旨文을 해당 分科에서
審査 후 採擇 與否를 決定한다.
(2) 外國 學術交流學會誌 投稿 希望者는 國內會員이 對象이 되며, 交流學會側의 投稿要請希望者數 범위
내에서, 本學會의 內部 選定 基準에 의하여 對象者를 選定 推薦한다.
(3) 發表者는 發表要旨集 印刷費로 10,000원을 學會에 納付한다.
(4) 기타 자세한 內容은 學會 홈페이지(www.bunka.or.kr)의 <알림판>을 參照할 것.
200 年
月
日
韓國日本文化學會 貴中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57
<學會發表 推薦書>
樣式 <學-02k>
學會發表 推薦書
(國內會員用)
大會名
韓國日本文化學會 200
年度 (春季․秋季) 國際學術硏究發表會
發表希望者名
所
(漢字)
屬
大學校
大學院
碩士課程
專攻 (英字)
推 薦 者
發 表
論 文 題 目
指導敎授:
勤務處:
推
薦
內
職位:
容
上記者에 대한 貴 學會에서의 發表를 위와 같이 推薦하는 바입니다.
推薦者 署名
200 年
月
日
韓國日本文化學會 貴中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58
(責任審査委員用)
樣式 <編-03k>
論文 審査 評價書
심사위원
이
름
논
문
제
소
속
대학
학과
목
심사
심사 내용
항목
내용의
적절성
심 사
내용의
독창성
기 준
형식의
적절성
전개의
종합
평가
판정
E
①점
․연구 주제, 방법, 결과 등의 독창성
․일본어 또는 영문 초록, 참고문헌, 표,
그림 양식 등의 일본문화학보 논문 투
고 요령의 준수 정도
․일본/일본어 분야 논문으로서의
구성 및 내용 전개 방식의 적합성
연 구
방법의
적절성
․연구 문제 제기의 적절성
․연구 설계의 적절성
․연구 결과 및 해석의 적절성
․매우 우수함.
․수정이 거의
필요 없음.
게 재
판 정 등 급
B
C
D
④점 ③점 ②점
․일본어학/일본문학/일본학/일본어교육
이론과 실제에 관한 내용 적절성
․언어학, 문학 및 인접 학문에 관한 논
문인 경우 일본/일본어 관련의 적절성
논리성
(점수) (23~25)
최종
A
⑤점
․우수함.
․보통임
․미흡함.
․매우 미흡함.
․수정사항이 비 ․수정사항이 비 ․수정후 재신청을 ․게재 불가한
교적 적고 사소
교적 많고 수정
요하는 논문임.
논문임.
한 것들임.
후 확인을 요하
는 것들도 있음.
(20~22)
(15~19)
(10~14)
(5~9)
수정후
게 재
수정후
재 심
게재
보류
게재
불가
* 각 심사항목의 점수를 합산하여 점수란에 총점을 기입하시고 최종판정란에 ○ 표시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 최종 판단을 내리시기 전에 종합평가란의 기술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200 년
월
일
韓國日本文化學會 編輯委員會 貴下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59
(責任審査委員用)
樣式 <編-03-1k>
<論文 審査 評價書 別紙>
※ 具體的 指摘事項 및 修正․加筆 要求事項을 記入하시오.
논문 제목
총 평
수 정
요 구
사 항
韓國日本文化學會 編輯委員會 貴下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60
2009年度 學會日程表
實行豫定日
活
動
內
容
擔當理事
2. 15(日)
消息誌09-1 (通算53 ) e-mail 發送
涉外/總務
2. 28(土)
『日本文化學報』第40輯(2月 )發刊 및 學振登錄
編集
2. 28(土)
『日本文化學報』第41輯(5月 )原稿마감
分科
3. 6(金)
第7回 韓國日本學聯合會發表申請마감
3. 14(土)
第33回 際學術大會發表申請마감/常任理事會/編集理事會
3. 31(火)
第33回 國際學術大會發表要旨마감
4. 6(月)
消息誌09-2 (通算54 ) e-mail 發送
4. 11(土)
常任理事會
總務
4. 25(土)
第33回 國際學術大會
學術
5. 2(土)
常任理事會/編集理事會
總務/編集
5. 29(金)
第7回 韓國日本學聯合會發表要旨마감
分科
5. 31(日)
『日本文化學報』第41輯(5月 )發刊 및 學振登錄
編集
5. 31(日)
『日本文化學報』第42輯(8月 )原稿마감
6. 13(土)
常任理事會/編集委員會
總務/編集
6. 15(月)
消息誌09-3 (通算55 ) e-mail 發送
涉外/總務
7. 3(金)~4(土)
第7回 韓國日本學聯合會(第34回 國際學術大會)
分科
分科/總務,編集
學術
涉外/總務
分科
聯合
7. 18(土)
編集委員會/理事修練會
8. 31(月)
『日本文化學報』第42輯(8月 )發刊 및 學振登錄
8. 31(月)
『日本文化學報』第43輯(11月 )原稿마감
分科
9. 11(金)
學術誌發行支援申請
總務
9. 12(土)
第35回 學術大會發表申請마감
9. 12(土)
擴大理事會/編集委員會
編集/總務
編集
分科
總務/編集
9. 30(水)
第35回 學術大會發表要旨마감
10. 5(月)
消息誌09-4 (通算56 ) e-mail 發送
涉外/總務
學術
10. 10(土)
常任理事會/編集委員會
總務/編集
10. 24(土)
第35回 學術大會
學術
11. 7(土)
常任理事會
總務
11. 30(月)
『日本文化學報』第43輯(11月 )發刊 및 學振登錄
編集
11. 30(月)
『日本文化學報』第44輯(2月 )原稿마감
分科
12. 12(土)
常任理事會/編集委員會
2010. 1. 9(土)
常任理事會
總務/編集
總務
2. 8(月)
消息誌10-1 (通算57 ) e-mail 發送
2. 28(日)
『日本文化學報』第44輯(2月 )發刊 및 學振登錄
涉外/總務
編集
2. 28(日)
『日本文化學報』第45輯(5月 )原稿마감
分科
Journal of Japanese Culture
∙第 42 輯∙
發行日
2009년 8월 31일
發行處
韓國日本文化學會
(300-150) 大韓民國 大田廣域市 東區 貞洞 31-1
新榮BLDG. 201號
Tel (042)488-9155
Fax (042)488-9156
<학회계좌번호>
외환은행 611-017701-086 박희남(일본문화학회)
(日本)郵便局 00920-9-147169 韓國日本文化學會 日本支部
製作處
메트로문화사
Tel (042) 488-9155 Fax (042) 488-9156
e­mail : [email protected]
※비매품
ⓒ 韓國日本文化學會2009 Printed in korea
ISSN 1226-3605
* 이 학술지는 2008년도 정부재원(교육과학기술부 학술연구조성사업비)으로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
원을 받아 출판되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