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urnal of Japanese Culture 第 39 輯 2008. 11 韓國日本文化學會 Journal of Japanese Culture 目 次 ․한국과 일본의 기계번역 例에 관한 비교연구 ···························································· 辛 碩 基…5 -한국어의 일본어 역을 중심으로․類義形式「トキ」「コロ」の分析─時間性と空間性の観点から─ ································· 河 在 必…21 ․일본인과 한국인의 커뮤니케이션 차이 ··············································································· 강 영 부…41 -인사표현, 「どうも」,「どうぞ」와 그에 대한 한국어표현에서 나타나는 콘텍스트 의존도의 차이․大君の結婚問題に関する一考察 ─「隔てなき心」を中心に─ ····································· 金 玉 京…57 ․『源氏物語』の動物の一考察 ·································································································· 村松正明…69 ․『諸 ばなし』 五の六「身を捨て油壺」から『好色一代女』へ ························ 梁 先 希…89 ―『好色一代女』の出 点に する考察― ․일본계 미국소설에 반영된 태평양 전쟁 ·································································· 안 임 수…101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파란 바다 검은 바다(青い海黒い海)」론 ···················· 유 재 신…123 ― 신감각파적 사상과 문장표현 ― ․円地文子『妖』論─女の老いと性をめぐって─ ···························································· 崔 殷 景…145 珍…161 ․「犯罪」詩群と「浄罪詩篇」 ························································································ 黃 ․농촌지역의 자치조직을 통해 본 협동관계의 변용 ················································ 권 병 욱…177 ․우찌무라간죠(內村監三)의 사상과 생애 ··································································· 金 文 吉…193 -에비나단조(海老名弾正)사상과 관련하여․한국 대학생과 일본 대학생의 부모 부양의식 비교 ·································· 김윤정, 장세철…211 ․마치즈쿠리(まちづくり)와 일본 사회구조의 관계변화 연구 ····································· 金 漢 洙…231 ․分有される植民暴力の記憶 ······························································································ 中村 平…249 ―日本人ジャーナリストによる台湾先住民族の民族誌的記述― ․한일 신여성의 사회참여관 연구 ················································································ 우 정 미…275 ․에도시대 한 여성 지식인의 유교인식 ···································································· 林 泰 弘…291 -다다노 마쿠즈(只野真葛)의 獨考 를 중심으로․이용자입장에 선 사회복지제도 개혁에 관한 연구 ················································ 田 鎬 成…313 - 일본 사회복지기초구조개혁을 통해서 본장애인(아)복지행정제도를 중심으로 ․일본의 인구구조 변화에 따른 새로운 소비시장에 대한 고찰 ·················· 최성백, 변재웅…333 ■彙報 ······················································································································································· 349 ■韓國日本文化學會 任員名簿 ··················································································································· 361 ■韓國日本文化學會 新入會員名簿 ············································································································· 363 ■韓國日本文化學會 會則 ·························································································································· 365 한국과 일본의 기계번역 例에 관한 비교연구 -한국어의 일본어 역을 중심으로- 辛碩基* 1) (e-mail : [email protected]) 目 次 1. 서론 2. 본론 2-1. 기계번역 일반 2-2. 번역 프로그램에 의한 신문기사 번역 2-2-1. 명사・대명사・수사 2-2-2. 동사・형용사・부사 2-2-3. 문형・관용구 표현 2-2-4. 조사 2-2-5. 문체 3. 결론 1. 서론 최근의 IT 산업의 눈부신 발전에 따라서 컴퓨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발 전은 가히 놀랍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예전보다 더 많은 양의 데이터를 저 장할 수 있게 되었고 이를 활용하는 많은 소프트웨어의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컴퓨터의 활용 면을 살펴보면, 개인용 컴퓨터의 보급과 성능의 눈부신 * 건양대학교 일본언어문화학과 일본어학 6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발전에 의해, 예전에 주로 이루어졌던 문서작성이나 계산과 같은 단순한 작업 에서 인터넷의 발달에 따른 웹 서핑1) 쪽으로 흐르고 있다. 이에 따라 다른 나 라의 웹 페이지에의 접속이 많아지게 되는데, 이 때 발생하는 것이 자국어가 아닌 다른 나라의 언어로 된 홈페이지의 번역문제이다. 이러한 언어장벽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각국의 주요 인터넷 포털 사이 트2)는 웹 페이지의 번역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며 사용자의 설정여하에 따라 외국의 웹 페이지를 자동으로 모국어로 번역해서 사용자에게 제공하는 수준에 이르고 있다. 이렇듯 일반적으로 쉽게 접할 수 있는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번역 서비스 외에도, 현재 번역을 대행해주는 번역 사이트도 다수 존재하고 있으며, 사람이 아닌 컴퓨터에 의한 번역을 목적으로, 여러 번역 전문 소프트웨어의 개발도 활 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전문 번역 프로그램들은 현재, 주로 이공계나 의학 분야의 외국어 논 문 번역 등에 사용되고 있으며 특정한 분야의 전용 전자사전을 갖추고 있어 번역 성공률은 일반적으로 상당히 높다고 한다. 본고의 목적은 이렇듯 현재 인터넷 사용자에 의해 빈번하게 이용되고 있는 번역 프로그램 중에서 일반인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제공하고 있는 번역 프로그램의 번역 결과를 재료로 하여, 자동번역 결과의 품 질과 문제점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하는 데에 있다. 이러한 연구가 시급히 이루 어져야하는 이유는 한국과 일본의 일반인들이 정확하지 못한 번역 결과로 인 하여 잘못된 정보를 얻거나, 나아가 무심결에 갖게 되는 서로에 대한 오해와 불신을 불식시킬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이후 詳述하겠지만 너무나도 잘못된 번 역 결과를 일반인들은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사용하고 있는 현상을 시급히 개선하기 위한다는 점에 연구의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방법론적으로는 분석대상을, 우선, 한국과 일본의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번 역 프로그램에 의해 제공되고 있는 번역문으로 하고자 한다. 이들 양국에서 제 공되는 번역문의 비교분석을 통해, 양국의 번역문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나아 가 양국의 자동번역 수준을 검토하고, 또한 한국과 일본의 포털사이트의 번역 문의 품질 비교를 통해 앞으로 보다 나은 자동번역 서비스를 위한 방안을 모 색하고자 한다. 비교분석을 위한 번역 예는 한국과 일본의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1) web surfing : 흥밋거리나 관심사를 찾아 인터넷에 개설된 여러 사이트에 이리저리 접속하는 일. 2) 포털 사이트(portal site) 또는 웹 포털(web portal)은 월드 와이드 웹에서 사용자들이 인터 넷에 접 속할 때 거쳐 가도록 만들어진 사이트를 말한다. 포털(Portal)이라는 단어는 본래 ‘정문’ 또는 ‘입 구’를 뜻한다. 한국과 일본의 기계번역 例에 관한 비교연구 ····························································· 辛 碩 基…7 번역 프로그램에 의한 번역문을 대상으로 하는데, 이 중 우선 한국어를 일본어 로 번역한 文(이하 「韓日 번역문」으로 부름)만을 분석대상으로 하고자 한다. 2. 본론 2장에서는 한국과 일본의 포털사이트의 번역 프로그램에 의한 韓日 번역문 의 비교고찰을 하고자 한다. 현재의 한국과 일본에는 많은 인터넷 포털 사이트가 존재하고 있는데 구글 (Google)을 제외한 거의 모든 큰 규모의 유명 포털 사이트에서는 한국어와 일 본어의 상호 번역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에 필자는 한국과 일본에 존재하 는 거의 모든 포털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자동 번역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한국 어의 일본어 번역문 결과를 추출해 내었다. 이들 포털 사이트의 번역문은 조사 초기에는 각 포털 사이트마다 그 번역 결과가 다르게 나타날 것이 예상되었으나 거의 모든 포털 사이트가 완전히 동 일한 번역결과를 내었다. 즉 한국의 모든 포털 사이트에 탑재되어 있는 번역 프로그램의 번역 결과는 완전히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서 모든 포 털 사이트가 같은 번역 프로그램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한편 일본의 포털 사이트의 번역 결과도 대조를 위하여 조사해 보았는데, 의 외로 OCN(http://www.ocn.jp)이라는 포털 사이트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일본 의 포털 사이트는 한국의 포털 사이트의 번역문과 완전히 동일한 번역문을 만 들어 내었다. 일본에서는 한국의 번역 프로그램과는 다른 것을 사용하여 자동 번역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을 것으로 예상하였으나, 조사 결과 한국 포털 사이 트와 완전하게 동일한 결과물을 내었다. 결론적으로 OCN을 제외한 한국과 일 본의 포털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자동번역은 같은 공히 같은 번역 프로그램을 사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3) 한편 상기에서 언급한 일본의 OCN(http://www.ocn.jp)이라는 포털 사이트 에서는 전혀 다른 번역 결과를 보였다. 이 사이트에서 사용하고 있는 프로그램 은 일본의 高電社에서 제공하는 번역프로그램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따라서 이 사이트의 번역결과는 동일한 결과를 보인 한국과 일본의 포털사이트에서 사용 3) 각 포털 사이트에 문의한 결과 구체적인 프로그램명은 공개할 수 없다는 답변을 받아서 실제 사용 하고 있는 번역 프로그램은 밝힐 수가 없었다. 다만 필자의 조사 결과 한국의 「ez Trans XP(창 신소프트)」라는 번역 프로그램의 번역결과가 이들 포털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자동번역의 결과와 완전하게 일치하는 것으로 봐서 이 프로그램을 한국과 일본의 각 포털 사이트에서 공동으로 사용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8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하는 번역프로그램(ez Trans XP)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내었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거의 모든 한국과 일본의 포털 사이트는 하나의 번역 프 로그램(ez Trans XP)을 사용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으며 인터넷 포털 사이트는 프로그램 개발회사와 라이선스 계약을 맺고 프로그램을 공유하고 있 다고 예상할 수 있다.4) 2-1. 기계번역 일반 컴퓨터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번역을 할 때 일반적으로 다음의 단계별로 이 루어진다. 우선 원문(Source Language)를 形態素 별로 나누는 형태소 해석 단 계와 구문의 구조를 해석하는 구문 해석 단계 그리고 원문이 어떤 의미를 갖 고 있는 지를 파악하기 위한 의미 해석 단계로 나눠진다.5) 우선 가장 기본이 되는 형태소 해석 단계를 살펴보면, 한국어의 경우 일본어 와는 달리 띄어쓰기를 하기 때문에 일본어에 비해 형태소 해석이 용이하다고 할 수 있다. 스페이스와 스페이스 사이에 존재하는 말을 「語」 즉 단어로 인식하 도록 하면 되기 때문이다. 일본어는 이에 반해 띄어쓰기가 없기 때문에 仮名만 을 입력하여 변환하는 과정에서 종종 형태소 해석이 애매해지는 경우가 있다. a. ここではきものをぬいでください。 b. ここで履物を脱いでください。 c. ここでは着物をぬいでください。 (1) 이러한 난점은 仮名만을 입력하는 일본어문 작성에서는 빈번하게 나타나지만 한자 혹은 가타카나가 섞인 일본어 원문의 형태소해석은 히라가나 이외의 글 자에 의해 어느 정도 그 어려움이 해소될 수 있다. 상기에서 한국어는 띄어쓰기에 의해 단어의 인식이 일본어만큼의 어려운 점 은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하였으나 다음과 같은 잘못된 형태소 해석이 발생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4) 기계번역 연구는 전문적으로 이공계에서 자연언어처리를 전공하는 전공자에 의해 연구되고 있으며 국가차원에서는 국어 정보화사업인 '21세기 세종계획'이 2007년에 완료되어, 2억 어절의 말뭉치가 구축됐으며 60만개에 달하는 어휘를 갖춘 전자사전도 개발됐다. 다만 이러한 사전을 탑재한 번역 프로그램은 아직 개발되고 있지 않다. 따라서 본고는 현재 일반인이 쉽게 접할 수 있는 포털사이 트의 번역 예를 대상으로 비교 고찰하고자 한다. 5) 형태소 해석, 구문 해석, 의미 해석의 단계를 거쳐 문맥해석이나 언어학 분야의 語用論에 해당하는 지식 해석 단계가 있으나 의미해석 단계조차 언어학 분야에서도 많은 난점이 존재하고 있다. 의미 해석 단계 이후의 단계에 대한 검토는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기에 본고에서는 구문해석 단계 까지만 검토하고자 한다. 이에 대한 언급은 草薙(1988) pp.75~81참조. 한국과 일본의 기계번역 例에 관한 비교연구 ····························································· 辛 碩 基…9 (2) a. …가끔 칭찬을 받는다는 응답이 67.2%에 그쳐 큰 차이를 보였는데… …たまに褒め言葉を受けるという回答が 67.2%に止めて大きい差を見せたが… b. 엄마와 딸의 모습을 담은 사진전을… ママと娘の姿を盛った写真展を… c. …큰 영향을 끼치지만 대화와 이해 부족으로… 大きい影響をかけるが対話と理解不足で… d. …12월19일선거야말로 이 나라가 바르게 가느냐를 결정하는… …12月19日選挙こそこの国が正しく細いかを決める… e. …연설회에서 직접 사과하는 등 사실관계를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도… …合同演説会で直接謝るなど事実関係をどの位認めながらも… 상기의 오류들은 동음이의어의 처리가 문제인 것으로 생각된다. 즉 「받다=受 ける」, 「담다=盛る」, 「끼치다=かける」, 「어느 정도=どの位」와 같은 1대 1 대응식의 변환에 그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단순한 1대1 대 응식의 변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소위 말하는 단어의 「連語환경」을 프로 그램이 번역과정에서 사용하는 사전에 기술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를 위해서는 보다 정밀한 전자사전의 기술이 필요한데 이에 대한 기술이 아 직은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일본의 高電社의 번 역 프로그램에서는 상기의 초보적인 오류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는 형태소 해석 부분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다음의 구문 해석 단계는 단어가 구성이 되어 문을 형성할 때의 문 구조 해 석 단계인데, 이 단계에서 나타나는 문제로는 수식관계, 격조사, 副助詞, 생략 표현 등이 문제시되는데6), 한일 번역문 비교에서는 格助詞와 보조동사 등의 해석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3) a. 청소년에게 외모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주기 위한 … 青少年に外貌に対する正しい価値観を植えてくれるための b. 그 다음해 그는 집집마다 전화를 가설해 줬다. その翌年彼は家ごとに電話を仮設してくれた. c. 90년 빚이 160여 만 위안이던 식당을 인수해 알짜기업으로 만들었다. 90年借金が160余万慰安だった食堂を引き受けて選り抜き企業で作った. d. 1년이 지나자 손님이 하루 최대 3000명 수준으로 늘었다. 1年が経つとお客さんが一日最大 3000人水準で増えた. e. 폭력적인 콘텐츠가 범람해 시청률 지상주의로 치닫고 있다고… 暴力的なコンテンツが氾濫して視聴率至上主義で走り上げている"と… 즉 한국어를 일본어로 옮길 때의 「주다」의 해석은 인칭과 깊은 관련이 있는 6) 草薙(1985) pp.38~74 참조. 10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데 이러한 인칭의 해석을 하기위해서는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인칭관계의 해석이나 심지어 생략되어 있는 주어의 복원까지도 가능해야 올바르게 해석이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되나 현재의 기술수준으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授受動詞」의 해석은 한일 양국의 어떤 프로그램도 올바르게 해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助詞의 해석은 명 사와 술어와의 「連語環境」의 정확한 기술로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을 것으 로 생각되기에 조사의 해석 단계까지만을 구문해석에 포함하고자 한다. 이어서 마지막으로 의미해석단계인데, 의미해석에서는 입력문이 어떠한 의미 를 갖고 있는 지를 해석하는 단계이다. 여기서 말하는 의미에는 단어가 갖고 있는 고유의 어휘적인 의미와 문법어가 갖는 문법적인 의미를 말한다. 일반적 으로 보다 정확한 의미해석을 위해 단어나 문법어의 상세한 하위분류를 실시 하는데 이러한 하위분류는 해당 어휘를 둘러싼 다른 주변 단어와의 관계를 기 술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다른 단어와의 관계기술이라는 것을 구문해석 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서 종종 의미해석과 구문해석의 경계는 애매해지게 되 고 이러한 경계를 규정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구문해석과 의미해석을 하나의 단계로 보고자 하는데 상 기에서도 언급했듯이 의미해석을 포함한 구문해석은 현 단계에서는 거의 초보 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는 실정이어서 본고에서는 형태소 해석 단계와 助詞의 해석을 포함한 구문해석의 일부분에 머물고자 한다.7) 2-2. 번역 프로그램에 의한 신문기사 번역 이하 현재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한국과 일본의 인터넷 포털사이트 의 번역 프로그램에 의한 한일번역문을 비교분석하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번역프로그램에는 고유의 사전을 갖고 있고 또한 사용자가 임의 로 자신만의 사전을 구축할 수 있도록 사전 섹터가 따로 존재하는데 본고의 번역 例 작성 시에는 소프트웨어의 고유사전만을 사용하였다. 번역대상문은 신 문기사(정치, 경제, 사회, 문화, 사설)를 사용하였다8). 上記에서 한국어는 띄어쓰기에 의해 단어의 인식이 일본어만큼의 어려운 점 은 없을 것으로 언급하였으나 실제 번역 결과, 형태소 해석 단계의 수많은 오 7) 형태소 해석, 구문 해석, 의미 해석의 단계를 거쳐 문맥해석이나 언어학 분야의 語用論에 해당하는 지식 해석 단계가 있으나 의미해석 단계조차 언어학 분야에서도 많은 난점이 존재하고 있다. 의미 해석 단계 이후의 단계에 대한 검토는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기에 본고에서는 구문해석 단계 까지만 검토하고자 한다. 이에 대한 언급은 草薙(1988) pp.75~81참조. 8) 신문기사는 2007년 10월1일~15일 동아일보 인터넷판 기사를 사용하였다. 한국과 일본의 기계번역 例에 관한 비교연구 ··························································· 辛 碩 基…11 류들이 나타났다. 각각의 오류들을 품사별, 문형별, 기타(관용구, 문체) 등으로 분류하였다. 몇 가지 예를 들기로 한다. 번역 예를 제시할 때의 형식 (A/B)는 A가 한국과 일본의 대부분의 포털 사이트가 사용하고 있는 ez Trans XP(이하 한국의 번 역프로그램으로 부름)의 결과이고 B는 일본의 OCN 사이트가 사용하고 있는 高電社의 번역 프로그램(이하 일본의 번역 프로그램으로 부름)의 결과이다. 2-2-1. 명사・대명사・수사 명사, 대명사, 수사에서는 무수한 오류들이 나타났는데 이 중 대부분의 오류 들은 한국의 번역 프로그램에서 나타났다. (4) a. 허상을 과장하는 식(式/ような)의 기회주의적(機会主義的/日和見主義的) 행태는…. b. 어느 정도(どの位/ある程度)불안감을 느껴 왔다고 할 수 있다. c. 그의 2007년 신작 20여 점(20余点/20点余り)을 선보인다. d. 정 교수(本当に教授/チョン教授)는 “AK2를 활성화시키는…. e. 실물자산 선호 등 중장기 변수(変数/変化の要素)도 작용하고 있다. f. 내성을 키우려는 몸부림(身震い/苦闘)도 보인다. g. 검사받기 위해(検事受けるために/検査を受けるために) 병원을…. h. 군부독재 시대처럼 낙하산 인사(落下傘人事/天下り人事)가 없다…. I. 또 기술주(技術株/ハイテク株) 중심의 나스닥 종합지수도…. j. 중국이 조속히 위안화(慰安化/元貨) 절상을 단행해야 한다고 …. k. 한 누리꾼(一ヌリクン/あるインターネットユーザ)은 ‘명명명…. l. …맞다고 보지만 거품성장(泡成長/バブル成長)이나 경기(競技/景気) 후퇴 등…. m. 한편 정 후보는 “당과(糖菓/党と) 선거대책위원회가 따로 갈…. n. 처음부터 경선(経線/選挙戦)에 참여하지 않고 막판(どん詰まり/終盤) 에 끼어들어…. o.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自分/自身)은 “경선은…. 예문 (4)의 o.를 제외한 나머지 오류들은 한국의 번역 프로그램에서 나타난 반면 일본의 번역 프로그램에서는 문맥에 맞는 단어의 선택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한국의 번역 프로그램은 가령 「~식, 기회주의적, (20)여점, 변수」등을 비롯한 많은 한자로 구성된 단어를 그대로 옮기는 경향 이 있는 반면, 일본의 번역프로그램은 「~ような(~식), 日和見主義的(기회 주의적), 20点余り(20여점), 変化の要素(변수)」등과 같이 문맥에 맞게 잘 번 역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몇 개의 예에 불과 하지만 거의 모든 명사, 대명사의 번역에 있어서 이러한 경향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또한 12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기술주(4I)」나 「누리꾼(4k)」, 「거품성장(4l)」과 같은 최근에 생긴 단어에 대한 번역의 결과도 일본 쪽의 번역이 최근의 신조어를 잘 반영하고 있는 것 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즉 사전의 갱신에 관한 문제인데 일본 쪽 사전의 업데 이트가 잘 이루어지고 있는 반면 한국 쪽은 거의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것으 로 나타났다. 일본 번역 프로그램 쪽의 오류로 지적될 수 있는 것은 「자신」을 「自身」 으로 번역한 결과뿐이었다. 이는 사전의 간단한 수정으로 오류를 나타나지 않 게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2-2-2. 동사・형용사・부사 (5) a. b. c. d. e. 헌법이 유린당하고(踏み躙られて/蹂りんされて)법치가 사라져다…. 최재천 대변인은 “가치가 곧(すなわち/まもなく) 정책이다. 능력이 탁월하다는(卓越だという/卓越するという) 평가와…. 위원회 위원장을 지낸(勤めた/過ごした) 서울대 장호완 교수는…. 신 재생에너지 개발 등에 드라이브를 걸어야 한다(かけなければならない/ 歩かなければならない)…. 동사, 형용사 등과 같은 술어를 중심으로 하는 예문을 살펴보았는데, 이들 예문 중에서 5a~e는 한국의 번역 프로그램이 바른 결과를 낸 예이다9). 이 예 들 중에서 「탁월하다」와 같은 형용사를 일본어 번역 프로그램이 한어동사로 잘못 인식한 것은 사전을 구성할 때의 단순한 오류로 판단되기에 간단한 수정 으로 처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으로 한국어의 「곧」의 번역으로 「이제 곧」의 「まもなく」와 서로 동일하다는 의미의 「곧」이 있는데 이는 전후 문맥의 판단이나 「곧」을 전후한 連語환경을 검색해야하는 과정이 필요 한데 이는 문법적, 담화적 이론의 적용이 요구되기에 현 시점에서는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한국어 프로그램이 바른 결과를 낸 것은 우연한 결과 로 생각된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다음의 문을 번역해 보았다. 6) a. 기차가 앞의 역을 지나 곧 도착할 것이다. b. 汽車が前駅を通ってすなわち到着するでしょう. c. 汽車が前の駅をすぎて、まもなく到着するだろう。 예문 6) a.의 한국어문을 번역한 결과, 예상대로 한국 번역 프로그램은 6) b.의 9) 「유린당하고」의 번역예로 일본 번역 프로그램에서는 「蹂躙されて」를 들고 있는데 이 번역이 틀 린 것은 아니나 한국 번역프로그램의 「踏み躙られて」쪽이 보다 자연스럽다는 느낌을 주기에 한국 번역프로그램의 번역예를 바른 것으로 간주하였다. 한국과 일본의 기계번역 例에 관한 비교연구 ··························································· 辛 碩 基…13 결과를 보였고, 일본 번역 프로그램은 6) c.의 결과를 보였다. 따라서 한국어 「곧」에 대한 번역 결과는 그 의미의 여하에 따라 번역 결과가 바르거나 틀 리거나 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이 한국어 「곧」에 한해서는 한 국이나 일본의 번역 프로그램 모두 1대1 대응식의 사전구성을 하고 있다는 사 실을 지적할 수 있다. 다음으로 예문 5) d.의 「(위원장을) 지내다」의 번역 예를 검토해 보기로 하겠다. 예문 5) d.의 번역 예는 한국 번역 프로그램이 바르게 결과를 내었는 데 반해 일본 번역프로그램은 「(시간을) 보내다」의 「過ごす」로 잘못된 결 과를 내고 있는데 이 「지내다」라는 단어에 한해서 한국 번역 프로그램은 문 맥에 맞게 「勤める」와 「過ごす」를 구분하여 그 결과를 내었다. 7) a. 나는 중학교 때 늘 축구를 하며 지냈다. b. 私は中学校の時常にサッカーをしながら過ごした. c. 私は中学校の時, 常に班長を勤めた. 그러나 일본 번역 프로그램은 문맥의 의미와는 상관없이 「過ごす」만을 제시 하였다. 8) a. 나는 중학교 때 늘 축구를 하며 지냈다. b. 私は中学校の時いつもサッカーをしながら過ごした。 c. 私は中学校の時いつも班長を過ごした。 따라서 한국 번역 프로그램의 경우 「지내다」에 관해서는 문맥에 맞게 번역결 과를 제시하는 데 반해 일본 번역 프로그램의 경우는 단순한 1대1 즉 「지내 다」를 문맥에 상관없이 단순히 「過ごす」와 대응시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한국어의 「걸다」의 번역 예인데, 일본 번역 프로그램이 「(드라 이브를) 걸었다」의 「걸다」를 「あるく」로 오역한 경우이다. 다음과 같은 한국어의 「걸다」의 여러 예문을 번역한 결과 일본 번역 프로그램의 경우 「(소송을) 걸다」와 「(최면을) 걸다」의 경우, 「かける」대신에 「あるく」 를 사용하여 번역하였다. 9) a. b. 10) a. b. 11) a. b. 그는 부당 해고라고 회사에 소송을 걸었다. 彼は不当でと会社に訴訟を歩いた。 그는 관객들에게 최면을 걸어 모두 잠들게 했다. 彼は観客らに催眠を歩いて、皆寝つくようにした。 彼は不当解雇だと会社に訴訟をかけた. 彼は観客たちに催眠をかけて皆眠るようにした. 14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예문 11)의 한국 번역 프로그램의 경우는 모두 「かける」를 사용하여 바르게 옮긴 것을 알 수 있다. 일본 번역 프로그램이 「걸다」의 다른 예문은 바르게 옮기면서 예문 9)와 10)을 「歩く」를 사용하여 번역하는 이유는 현재로서는 알 수가 없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뜻을 갖고 있는 기본 동사의 경우, 동사를 중심으로 하는 명사구의 환경을 미리 사전에 기술해 놓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기에 이 부분에 대한 수정이 필요할 것 같다. 이러한 수정을 위해서 는 이들 동사 이외의 다른 동사에 대한 전반적인 번역의 수준여부를 살펴보아 야 할 것이다. 이상과 같은 몇몇 동사나 부사 등에서 일본 번역 프로그램의 오류가 나타나 기는 했으나 이를 제외한 거의 모든 예문에서는 일본의 번역 프로그램이 올바 른 결과를 내었다. 즉 상기에서 논한 것처럼, 한국 번역 프로그램은 술어를 둘 러싼 連語환경을 무시한 단순한 1대1 대응방식에 의해 번역결과를 내는 오역 의 과정을 거치고 있는 것이다. 몇 가지의 예를 들어보겠다. (12) a. b. c. d. e. 그 다음으로 교육과 가족 행복의 상실을 꼽았다(指折った/挙げた). 내용이 없다는 지적이 엇갈리고 있다(行き違っている/交錯している). 원자재 가격 상승세도 이어지고 있다(つながっている/続いている). 영토전쟁에서 밀리지않기(滞らないために/押されないために)위해…. 안정적인 성장’에 초점이 맞춰질 것으로 보인다 (合わせられるように見える/ 合わされるものと見られる)…. f. 검사받기 위해 병원을 찾으면(尋ねれば/訪れれば) “CT를 찍어…. g. 침입 가능성이라는 단기 요인도 있지만(いるが/あるが)…. 다만 위의 예문 중에서도 가령 「(‘영토전쟁’에서) 밀리다」의 경우, 일본 번역 프로그램이 바른 번역 결과를 제시하였으나(押される), 「사고가 나서 차가 많 이 밀리고 있다」와 같은 문의 번역결과도 똑같이 「押される」로 번역하고 있다. 따라서 예문 12)d.의 경우도 1대1 대응식의 번역과정을 거치고 있다. 따 라서 일본 번역 프로그램 역시 단어에 따라서는 1대1 대응식의 번역 과정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에 대한 연구와 辭典記述의 보완이 뒤 따라야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의 동사, 형용사 같은 술어 중에서 한자어가 들어가는 동사나 형용사의 경우, 한국의 번역 프로그램은 한자를 글자 그대로 즉 한국어식 한자를 그대로 일본어로 옮기는 경향이 보인다. 이러한 경향은 명사에서도 확인되었는데 이러 한 예는 여러 품사에 걸쳐 나타나므로 이에 대한 보완작업은 반드시 이루어져 야할 것으로 판단된다. 한국과 일본의 기계번역 例에 관한 비교연구 ··························································· 辛 碩 基…15 (13) a. 유리한 방향으로 만들기 위해 벌이는(する/行う) 경쟁은 치열한(熾烈 な/厳しい) ‘영토전쟁’을 방불케 한다. b. 안정적인(安定的な/安定した)성장에 초점이 맞춰질 것으로…. c. 대선후보의 구호는 숫자와 연관된(連関された/関連になった)것이…. d. 국가주석의 ‘과학 발전관’이 들어간(入って行った/入った)…. e. CT는 심장처럼 빨리 움직이는 장면도 담을(盛る/入れる) 수 있다. f. 높은(高い/偉い) 사람, 잘사는 사람은 대통령과 대통령후보들…. 예문 (13)a.~c.의 경우, 한국어식 한자를 그대로 일본어로 번역하는 경향을 확인할 수 있으며 또한 예문 (13) d. 의 경우는 「들어가다」를 글자 그대로 「入っていく」로 옮기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3)e. f.는 상기의 1대1 대응 방식에 의한 오류라고 할 수 있다. 2-2-3. 문형, 관용구 표현 여기에서는 표현문형이나 관용구와 관련된 예문을 살펴보고자 한다. (14) a. 선명하게 보일 수 있도록(見えるように/見えられるように)…. b. 시장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影をひそめてしまった/痕跡をなくしてしまった). c. 즉 우파·보수층의 표는 분산되기 마련이고(分散するものと決まっていて/ 分散するようになっていて)…. d. AK2 유전자를 손상시켰더니(損傷させたら/損傷させたところ)…. 상기의 예문 (14)a.~c.는 표현문형이나 관용구의 번역 결과 중에서 한국 번 역 프로그램이 바른 결과를 낸 예들이다. (14)a.의 「보일 수 있도록」의 경우, 일본 번역 프로그램은, 「~할 수 있다」라는 한국어문을 「可能」으로 해석하 여 「見える」를 「見えられる」형태로 번역하는 오류를 보이고 있다. 관용구로 생각되는 예문 중에서 (14) b. c.의 경우, 「자취를 감추다」, 「~ 하기 마련이다」와 같은 관용구의 경우, 한국 번역 프로그램 쪽이 바른 결과를 낸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문형이나 관용구는 거의가 정해져 있는 경우가 대 부분이기에 사전의 보완으로 충분히 해결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14) d. 의 경우는, 양 쪽 모두 바른 결과를 보이고 있는 예이다. 이러한 예문들은 모두 한국 번역 프로그램이 바른 결과를 낸 예문들이지만 이들 예문을 제외한 下記의 예문들은 일본 번역 프로그램 쪽이 바른 번역 예 를 나타내고 있다. (15) a. 이씨는 요즘 세상의 욕이란 욕은 다 먹고 있다(悪口と言う悪口はすべて食べ ている/悪口という悪口はみな言われている). 16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b. c. d. e. 전혀 사리에 맞지 않는다(全然私利に当たらない/理にかなわない). 언론에 재갈을 물려(言論にはみをくわえて/言論にクツワをはめて)국민의…. 한 누리꾼은 ‘명명명시리즈’라면서(シリーズと/シリーズとしながら) 조영제에 과민반응을 보일 수 있으므로(見せることができるので/見せることが あるので)…. 상기의 예문 중에서 특이한 점은 (15)e. 의 경우인데, 일본번역 프로그램에서 上 記의 (14)a. 의 「보일 수 있도록」과 같은 예문은 「見えられるように」와 같이 오역의 결과를 내었지만 (15)e.의 문은 「見せることがあるので」라는 바른 번역 결과를 나타내고 있다. 반대로 한국 번역 프로그램은 (15)e.의 예문을 가능으로 처리하여 번역하고 있다. 즉 「~할 수 있다」를 모두 가능으로 처리하여 「~見 せることができるので」라는 오역문을 내고 있다. 즉 한국번역 프로그램은 「~ 할 수 있다」의 문을 가능의 의미로 1대1 대응시키고 있는 반면 일본 번역 프로 그램은 문의 의미에 따라 결과를 달리 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표현문형이나 관용구 번역 부분에서도 한국어문을 있는 그대로 일 본어로 옮기려는 경향이 한국의 번역 프로그램에는 많이 보인다. (16) a. 이회창씨가 그것을 모를 리 없다(分からないわけない/分からないはずがない). b. 이탈도 결정적 요인이 될 수 있다(なることができる/なり得る). c. 전혀 사리에 맞지 않는다(全然私利に当たらない/理にかなわない). d. 증식해 암 같은 질병이 생긴다(疾病ができる/病気ができる). e. 정부 기업 할 것 없이(するまでもなく/関係なく) 세계 경제…. f. 전환중이라곤 하지만(転換の中とはしかし/転換の中とはいえ)…. 2-2-4. 조사 다음으로 助詞에 대해 살펴보면, 조사의 번역오류는 그리 많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어와 일본어가 助詞를 사용하고 있고 그 쓰임새가 비슷하기 때 문일 것이다.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것은 양국의 프로그램 공히 「で」와 「から」의 오류이다. (17) a.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で/から) ‘가치’로 승부하자”며…. b. 표준전쟁에서 패하자 시장에서(で/で)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c. 대학 안팎의 부당한 공격에서(で/で) 교수를 보호하기 위한 …. d. 에너지 다소비형 산업에서(で/で)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전환 …. e. 남북 평화 등을 자신이 추구하는 ‘5대 가치’로(で/と) 규정했다. 이러한 「で」와 「から」의 오류는 초급일본어 학습자에게서도 빈번하게 나타나는 오류인데, 동작이 일어나는 장소와 출발점이 한국어에서는 「~에 한국과 일본의 기계번역 例에 관한 비교연구 ··························································· 辛 碩 基…17 서」로 표현되기에 모국어의 간섭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번역 프로그램에서는 초급 학습자가 범하는 모국어의 간섭이란 것이 없기 때문에 조사를 둘러싼 구문환경을 사전에 정확히 기술하고 이를 프로그 램이 번역할 때 참조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가령 예문 (17)d.의 경우, 「에너지 다소비형 산업에서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전환 중이라곤 하지만….」 와 같이 「~에서」와 쌍을 이루어 나타나는 「~으로」를 프로그램에서 참조 할 수 있으면 「~で」로 오역하는 오류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17)b. 와 같은 예문에서는 「표준전쟁에서 패하자 시장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와 같이 동사술어구 (자취를 감추다)와의 참조를 통해서 오류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조사나 동사술어와의 참조를 통해서 조사의 오류를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기에 한국과 일본의 번역프로그램은 辭典의 보다 정확 한 기술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2-2-5. 문체 문체의 오류는 사전의 간단한 정비로 인하여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인데 다 음 예와 같이 한국의 프로그램은 구어체 표현을 우선시하고 있다. (18) a. 잘 들여다보면 그의 그림 속 오리 같다는(みたいだという/のようだという) 생각이 든다. b. 이런(こんな/このような) 경우 항암제를 써도 간암세포가…. c. 교육공약이 공교육을 어떻게(どんなに/どのように) 정상화…. 3. 결론 지금까지 한국과 일본의 포털 사이트가 제공하고 있는 번역 프로그램에 의 한 자동번역의 예를 비교 검토하였는데 그 번역 결과에 많은 오역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한국과 일본의 많은 포털 사이트들은 각각 서로 다른 프로그램을 사용하고 있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한 곳을 제외하고 같은 프 로그램을 사용하고 있었다. 한국과 일본의 거의 모든 포털 사이트가 사용하는 번역 프로그램에 의한 번 역은 여러 품사에 걸쳐 많은 오역을 보인 반면 高電社가 제공하는 번역 프로 그램을 사용하는 OCN의 번역 결과는 이에 비해 우수한 결과를 보였으나 양쪽 프로그램 모두 각각 사용하는 사전의 정비가 필요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 두 18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프로그램 모두 사전에 기술되어 있는 連語情報에 따라 번역을 실시하고 있는 데 그 상세함의 정도에 따라 번역 결과는 매우 다르게 나타났다. 여러 포털 사이트에서 사용하고 있는 번역 프로그램의 경우는 한국어 단어 를 문맥의 구문환경과 상관없이 1대1 대응식으로 일본어로 옮기는 경향을 확 인 할 수 있었다. 따라서 단어의 의미와 함께 문맥환경 즉 단어를 둘러싼 連語 환경의 정보까지도 사전에 충실하게 포함시켜서 명사고유의 어휘정보에 따른 올바른 번역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에 비해 高電社 제공의 프로그 램을 사용하고 있는 OCN의 경우에도 오류가 나타나기는 했으나 그 수가 적었 고 번역 결과도 우수하였다. 이러한 차이는 결국 프로그램이 사용하는 사전에 의해 좌우되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어휘의 連語情報를 보다 충실히 기술하는 것이 급선무인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나날이 새로 생겨나는 어휘의 업데이트 또한 충실히 하여 인터넷이라는 매체의 속도에 맞추어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품사적인 면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는데, 다른 품사에 비해 명사의 경우, OCN의 번역 성공률이 뛰어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명사를 사전에 탑재할 때 해당 명사의 의미뿐만 아니라 명사를 둘러싼 기본적이 구문환경에 대한 보 다 섬세한 기술이 필요할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상세한 사전에의 기술은 다 른 품사에게도 동일하게 요구되는 사항이다. 마지막으로 관용구의 경우는, 술어를 포함한 관용구를 하나의 단위로 생각하 여 사전에 정확하게 기술하는 것이 필요하다. 소위 말하는 「기능동사」의 보 다 면밀한 사전에의 기술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몇 십 년 전에 비해 현재는 컴퓨터 하드웨어의 눈부신 발전이 있기에 보다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사전에 기술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하드웨어 를 십분 활용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적인 사전의 세밀한 기술 및 이에 대한 연 구가 시급히 이루어져야할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연구와 개발이 이루어짐으 로 인하여 일반인이 쉽게 그리고 보다 정확한 자동번역 결과물을 얻어 이를 충분히 활용할 수 있게 될 것이고 오역으로 인한 불필요한 오해를 줄여 서로 에 대한 보다 정확한 정보제공과 공유가 가능할 것이다. 【参考文献】 草薙裕,『LISPによる自然言語処理』, 工学図書株式会社, 1988. ,『自然言語とコンピュータ言語』, 講談社, 1985. 한국과 일본의 기계번역 例에 관한 비교연구 ··························································· 辛 碩 基…19 要 旨 本稿は日本と韓国のポータル サイトで提供している外国語翻訳サービスの翻訳結果を比 較分析することを目的としている。このような比較分析を通して、普通に使われているサイト上の 翻訳サービスの質を検討すると共にさらによりよい翻訳のための提案を試みた。 比較のための検討資料としては新聞記事の翻訳結果を利用している。本稿ではまず韓国語 の日本語訳のみを検討した。翻訳結果物は韓国と日本のポータルサイトが提供している翻訳 サービスを利用して出した。最初の予測は、韓国と日本のポータルサイトはそれぞれ異なる翻 訳結果を出すだろうからそれぞれの結果が比較できるということであった。しかし、その結果物を 比較したら日本のOCN(高電社提供のプログラム使用)というサイトの結果を除いて、すべて の日本と韓国のポータルサイトの翻訳結果は同じであった。従って、結果的にはいくつの翻訳 結果が得られず二つの翻訳結果を比較することになった。 比較は機械翻訳における形態素解析のレベルにとどまっている。授受動詞の場合、主語の 人称と述語が関係しているのでこれらの動詞の翻訳は構文解析の処で行われるがポータルサイ トで提供している翻訳サービスではこのレベルまでには達していないのが確認された。ほとんどの 翻訳は、プログラムが使っている辞書に記述されている単語を構文や意味に関係なく一対一に 対応する単語を拾ってくるという単純なプロセスによって出されている。 分析は、韓国語を日本語に訳した翻訳文を品詞別に分けて比較をした。まず、名詞などの 体言は、圧倒的にOCNの方が正確であった。一見名詞などの体言は語形変化がないので翻 訳されやすいだろうという予測とは逆になかなか厄介な問題点が多かった。さらに新造語などの 更新の部分でもOCNの方がよい結果を見せた。そして、大部分のサイトが使っている韓国の翻 訳プログラムは韓国の漢語名詞などをそのまま日本語に訳すという誤りがよく見受けられた。次の 動詞をはじめとする用言の方では、名詞ほどではないが用言の翻訳でもOCNの翻訳の質が高 かった。一部誤った結果を出してはいるが、大体文脈にあっている結果を出している。これに対 して韓国の翻訳プログラムはやはり韓国の漢語動詞などのような漢字で出来ている述語を日本 語にそのまま訳すという傾向がまた見られる。この述語の場合は連語環境の正確な記述が両方 とも求められる。最後に慣用語句などの部分でも、韓国の翻訳プログラムの質は劣っている。 OCNにもいくつかの誤った結果はあったが、連語関係の正確な記述がより多くなされているところ がうかがえる。 これまでの分析を通して、大部分のポータルサイトが提供している翻訳サービスの質は極めて 低いということが分かった。これを改善するためには、翻訳プログラムの辞書の整備とアップデー トが必要であろう。より正確な形態素解析のために連語関係の記述を辞書に載せなければなら ないのである。 20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キーワード:ポータルサイト、自動翻訳文対照、形態素解析、プログラム辞書 連語環境、辞書記述 투 고 : 2008. 8. 31 1차 심사 : 2008. 9. 12 2차 심사 : 2008. 9. 27 類義形式「トキ」「コロ」の分析 ―時間性と空間性の観点から― 河 在必* (e-mail : [email protected]) 目 次 1.はじめに 1.1 本研究の目的 1.2 先行研究 1.3 本研究の立場 1.4 研究資料と研究方法 2.分析 2.1 時間的な側面の違い 2.2 出来事間の空間的な関係の違い 2.3 「トキ」と「コロ」が類似してくる場合 3.まとめと今後の課題 1.はじめに 1.1 本研究の目的 現代日本語における時間を表現する形式の一つに、形式名詞1)として扱われる「トキ2)」と * 大阪大学文学研究科日本語学講座、博士後期課程2年、現代日本語文法専攻。 鈴木(1972)p.203 名詞の語い的な意味が抽象化、形式化して、単独で文の部分にならず、実質 的な意味をおぎなう単語とくみあわさって、文の部分となる。 2) 実例を見ると、「その時」「そのとき」、「その頃」「そのころ」の形式があり、そこで、「そのトキ」 1) 22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コロ」がある。基本的に両形式は時間的な側面における違いをみせている 3)。用例1) は、個別の時間に位置づけられる人の動きとしての<一時的なこと>を表している。一方、 用例2)は人の長期間的な活動としての<非一時的なこと>を表しており、文が表している時 間的な側面の違いによって、「トキ」と「コロ」の使用が区別されている。 1)駅に止まってもいちいち目も覚めやしなかったが、途中、一度だけうっすら起きた。/ その時、哲生と正彦くんが小声で話していた。私の隣に哲生がいて、正彦くんは向か い側の席にいた。(予感․130) 2)古い話をしても参考にはならないかも知れませんが、この間、私がいちばん苦しかったの は二十代後半の、保母をしていた頃でした。家は姑一人が少しの田畑を守っている農 家で、私はその頃結核がなおったばかり、家の近くの保育所へ下の子供を連れて勤 めていましたが、農家の女性というのは実によく働くものです。(出合い․34) ところが、次の用例3)のように、一時的なことを表す場合にもかかわらず、「コロ」が使 われている場合がある。 3)「子供の意識がハッキリするまではついているつもりらしいす」勝又は鷹男の横顔を見 て、「声、かけなくていいんすか」/鷹男はうなずいた。今、声をかければ、恒太郎 の立場がなくなる。恒太郎が無事だということさえわかれば、それでよかった。勝又に あとを託して、鷹男は病院を出た。/その頃、竹沢家では、女たちが大騒ぎをしてい た。 (阿․105) 用例1)と3)を比較されたい。それぞれ「トキ」と「コロ」が使われているが、共に一時的 なことを表している。なぜ、3)では一時的なことを表すときに「トキ」ではなく「コロ」が使わ れているのだろうか。この場合、両者の違いは、「そのトキ」「そのコロ」の使われている 文の表している出来事と指示されている文の表している出来事との間の空間的な関係をみる ことで明らかになる。 本研究では、形式名詞である「トキ」「コロ」が指示表現とくみあわさった、「そのト キ」「そのコロ」「このトキ」「このコロ」「あのトキ」「あのコロ」を対象にし、「トキ」 と「コロ」の使用に、時間的な側面の違いだけでなく、出来事間の空間的な関係の違い もあることを述べる。 3) と「そのコロ」をそれぞれの代表形式として使うことにする。 用例に施した下線は発表者による。紙幅の都合により、改行部分をスラッシュ「/」で表す。 類義形式「トキ」「コロ」の分析 ······················································································· 河 在必…23 1.2 先行研究 「トキ」と「コロ」が「その」「この」「あの」とくみあわさる場合について、重要な指 摘をしているものとして、二つの研究を取り上げる。 (1)工藤真由美(1993 、1995) 工藤(1993、1995)では、文レベルにおける<時間的位置づけの仕方の相違>に関わ る意味 機能的カテゴリーを<テンポラリティー>と呼び、その表現形式として、文法的(形 態論的)カテゴリーとしてのテンスと、語彙的なものである時間副詞の二つのタイプが存在し ていると記述している。そして、「何を時間的位置づけの基準軸とするか」という観点から これらの表現形式をそれぞれ二つに分類している。 テンポラリティー 文法的(義務的) テンス 語彙的(任意的) 時間副詞 「終止」 「非終止」 絶対的 相対的 絶対的 相対的 時間副詞 時間副詞 (deictic) (non-deictic) テンス テンス 【工藤1995(p.178)】 同論文では、本研究で対象にしている形式のうち、指示表現とくみあわさった、「あのト キ」「あのコロ」と「そのトキ」「そのコロ」が、下の表のように、それぞれ絶対的時間副 詞と相対的時間副詞に分類されている(網掛けは筆者による)。 絶対的=ダイクティック 相対的=非ダイクティック いまに 、 今後 、 この後 、 ちかぢか、 明日 その後 (明後日)、来週、来月、来年 翌日(翌々日)、翌週、翌月、翌年 今頃、目下、現在、いま(は) その時 24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今日 、 今夜(今晩) 、 今朝 、 今週 、 今 その日(當日)、その夜、その朝、その週、そ 月、今年 の月、その年 近頃、最近、このごろ その頃 いましがた、さっき、この前、この間 その前 昨日(おとつい)、昨夜、先週、先月、去 前日、前夜、前の週、前年 年 あの時、あの日、あの頃 、當時 【工藤(1995):p.179】 そして、工藤はテクストタイプによって、テンス形式と時間副詞の使用に違いがあることを 指摘している。 <はなしあい>では、話し手の発話行為の現存の時を基準軸として出来事が位置づけられ、テ ンス形式は、現在 未来-過去として対立する。また同じく、発話時を基準軸とする出来事の時 間的位置づけに関わるダイクティックな時間副詞も使用される。 これに対し<かたり>では、テンス形式は現在 未来形が排除されて、過去形に限定され、ま た発話時を基準軸とするダイクティックな時間副詞が排除されて、出来事時を基準軸とする相対的 時間副詞が基本である。【工藤(1993):p.61】 (2)仁田義雄(2002) 仁田(2002)でも何を基準にしているかによって、時間表現を三つに分類し、本研究が対 象にしている「あのトキ」「あのコロ」、「そのトキ」「そのコロ」「このトキ」「このコ ロ」について、発話時を基準にするグループと、不定時を基準にする二つのグループに分 類している4)。この点に関する仁田(2002)の記述を簡略にまとめると、次のようになる5)。 4) なお三つ目のグループは、「絶対的時点の時の成分」と称されるもので、たとえば、「昭和三十三 年七月、1980年、紀元4世紀頃」などがこのグループに分類される。 5) 仁田はこれらの形式を「コ(名詞)」「ソ」「ア」という三つのグループに分け、グループごとにみられ る構文的特徴や用法について記述している。しかし、「トキ」と「コロ」の分析において重要な指摘 ではないため、詳細については割愛する。 類義形式「トキ」「コロ」の分析 ······················································································· 河 在必…25 【発話時を基準にする時の成分】 【不定時を基準にする時の成分】 発話時以前:あの時、あの頃 その時、その頃、この時、このころ 以上、「トキ」「コロ」が「その」「この」「あの」とくみあわさる場合の分析と関わる 研究を紹介した。工藤(1993、1995)と仁田(2002)はいずれも、これらとくみあわさった「ト キ」「コロ」について、「何を基準軸にしているのか」という観点から二つに分類してい る。工藤(1993、1995)ではさらに、これらの形式の使用とテクストタイプとの関わりについて も言及している。 1.3 本研究の立場 本研究では、「トキ」と「コロ」の研究を行う。両形式はくみあわさる単語(句)によっ て、副詞として扱われたり、接続助詞として扱われたりすることがあるが、本研究では、ひと まずこられを一括して形式名詞とみなしておく。分析の前提として、先の工藤(1993)が指摘 するように、テクストタイプによって時間副詞の使用に違いがあることをふまえ、テクストタイプ の違いにも注目して分析をすすめる。 なお、本研究では、客観的な根拠に基づいた考察を行うために、基本的に実例に基 づいて分析を行うことにするが、適宜内省による作例も用いる。 1.4 研究資料と方法 本研究では、現代日本語を研究対象にするため、第二次世界大戦後(1945年以降)に 発表された作品から用例を収集した。その際、テクストタイプによる違いを見るため、「会 話文」と「地の文」という異なるテクストタイプを含む小説と、両者の中間的な性質をもつノ ンフィクションの作品を資料とした。 今回収集した用例をテクストタイプ別及び形式別に分け6)、その量的分布をみると《表 1》のような分布を示す7)。 6) 7) 「このごろ」については、「最近」の意味をもった、一語化したものとして辞書の見出しに載っているこ とから対象外にする 1人称小説の地の文の中には、語り手の<わたし>が体験したことを回想して表す部分がある。この ような部分のテクストタイプの分類については保留する。(「トキ」:47例、「コロ」:5例)なお、会話 文には、いわゆる内的独白の例が含まれている 26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表1》テクストタイプ及び形式別の量的分布 小説(30作品) テクストタイプ 形式 その この あの 合計 ノンフィクション 合計 地の文 会話文 (30作品) トキ 488 198 449 1145 コロ 61 40 249 350 トキ 137 15 113 265 コロ 17 10 25 52 トキ 6 206 56 268 コロ 3 68 50 121 トキ 641 419 618 1678 コロ 81 118 324 523 《表1》から以下のような傾向が確認できる。 (1)すべてのテクストタイプにおいて、「トキ」が「コロ」より多く使われている。 (2)「そのトキ」「そのコロ」は、量的には地の文によく用いられるが、「このトキ」 「このコロ」や「あのトキ」「あのコロ」の出現数に比べると、地の文にも会話文 にもよく使われている。そして、「このトキ」「このコロ」は地の文で、一方、「あ のトキ」「あのコロ」は、会話文で多く用いられる。 (3)ノンフィクションでは、地の文と同じく「そのトキ」「そのコロ」、「このトキ」「この コロ」がよく使われているだけでなく、会話文のように、「あのトキ」「あのコロ」も よく使われている。 (2)は、工藤(1993)の、<かたり>では、発話時を基準軸とするダイクティックな時間副 詞が排除され、<はなしあい>では、逆にダイクティックな時間副詞が使用されるという指摘 を裏づけているといえよう。 以下の分析では、次のような観点から行なっている。 ① 「トキ」と「コロ」の使われている文が表す時間的な側面の違い ․一時的なことか、非一時的なことか。 ② 指示表現によって、指示される出来事と、「トキ」と「コロ」の使われている文が 表す出来事との空間的関係の違い ․同空間の出来事か、それとも別空間の出来事か。 類義形式「トキ」「コロ」の分析 ······················································································· 河 在必…27 ③「トキ」と「コロ」の違いがほとんどなくなる場合 ․どのような構文的条件のもとで、「トキ」と「コロ」の違いはほとんどなくなるのか。 ④ ①②③の分析結果の、くみあわさる指示表現及びテクストタイプによる制限 ․すべての指示表現の場合に共通しているか、特定のものに限られるか。 ․テクストタイプによる制限があるかどうか。 本研究の分析の観点の一つである時間的な側面、つまり<一時的なこと><非一時的 なこと>を表す文の例として、典型的なものを下に挙げておく。 <一時的なこと> 人やものの動き 変化 : 人の思考 知覚活動 : 太郎はご飯を食べた/太郎が木から落ちた/ベルが鳴った。 太郎はご飯が食べたいと思った/太郎は寒気を感じた/ 汽車の汽笛が聞こえた。 人の態度や心理状態 : 太郎の表情はけわしかった/私は太郎の言葉がうれしかった/ 私ははっとした気持ちだった。 自然現象 : 稲妻がピカッと光った/涼しい風が吹いた。 <非一時的なこと> 人の長期間的な活動: 太郎は大阪に住んでいた/太郎は阪大に通っていた/ 太郎は東京で働いていた。 人の特性 関係 : 私は納豆が嫌いだった/私は体力が弱かった/私は小学生だった/ 私は太郎ととなり同士だった。 2.用例の分析 2.1 時間的な側面の違い まず、「トキ」「コロ」が使われている文を、時間的な側面から分類した量的分布の結 果を《表2》に示す。表の中の数値は用例数で、括弧内の数値は「トキ」「コロ」それ ぞれの全用例におけるパーセンテージである8)。 8) 判断を保留している例が、「トキ」11例、「コロ」2例がある。 28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表2》時間的な側面の違いによる用例の量的分布 時間的な側面 文の種類 「トキ」が使われている文 「コロ」が使われている文 一時的なこと 非一時的なこと 814 26 (96.9%) (3.1%) 75 357 (17.4%) (82.6%) 《表2》の量的分布から確認できるように、基本的に「トキ」は一時的なことを表す場 合に9)、「コロ」は非一時的なことを表す場合に使われる。このような「トキ」と「コロ」の 使われ方は、指示表現の種類を問わず、「そのトキ」「このトキ」「あのトキ」、「その コロ」「このコロ」「あのコロ」のいずれの形式にも共通して見られる。また、テクストタイプ による制限はない10)。このような時間的な側面における「トキ」と「コロ」の違いから、周 知のごとく、「トキ」は「ある状態や動作の成立を表す一時点」を表し、「コロ」は「長 い一定の期間」を表していると言えよう。以下、用例を挙げる際、「トキ」「コロ」及びく みあわさる「その」「この」「あの」はゴシック体で示し、その文内の他の部分には実線 を施して示す。 4)「婚約の報告を受けたのは、ここでですか?」/「いえいえ、酒の席でした。うちはごら んのとおり零細企業ですから、忘年会や新年会なんかも淋しいものです。だから、そう いうときには、事務の女の子たちに、友達や彼氏を連れておいでと言っとるんですよ。二 人のめでたい話を聞いたのは、今年の新年会のときだったですからね。なあ、みっちゃ ん、あれは新年会だったよな?」/自分の机について熱心に辞書をひいているみっちゃん は、あわてて「はい、はい」と返事をした。/「そのとき、指輪も見せてもらった。ル ビーでしたかな。関根さんの誕生石だ」(火․51) 9) ただし「トキ」の場合、から格をとったり、「以来」が共起したりして、非一時的なことを表す場合があ る。 ․「結婚された?」/「ええ、成人の日に、母が自分で式場まで探してきて、絶対にしなさいっ て…」/自殺する二ヶ月前に、梓がそんなことをしていたとは、久我は夢にも思っていなかった。/「もし かしたらあのときから母は死ぬ気でいたのかもしれませ」/「まさか」(かり 412) 初対面の河上さんは、寡黙で無愛想のように見えたが目もと涼しく、きりりとした印象を受けた。/「今 度の仕事は、自分が好きでやっている仕事だから、とにかく書き上げたら読んでみてください」/と言わ れた。その時以私は『ドン ジョバンニ』を書き終えるまで、幾度も河上家を訪ねることになっ。 (井․97) 10) 用例5)7)は地の文、6)8)はノンフィクションの用例である 類義形式「トキ」「コロ」の分析 ······················································································· 河 在必…29 5)「そうなんです。でもそれが和賀さんの魅力なんですもの」/「それはありがたい、どうなる ことかと思っていたが」/二人は声を合わせて笑った。/この時、卓上の電話が鳴っ た。佐知子が出ようとすると、/「いいです。ぼくが聞く」/和賀英良がいちはやく送受 器を手に取った。(砂<上>․191) 6) その後、いつの間にか人が走り出てきて、そのうち救急車もパトカーも到着した。/しか し、あの時、刺されて倒れたあの人を、最初に見たのは、たぶん、わたしだったろうと 思う。血が、タラタラと流れ出るものではなく、ドバッ、ドバッと、ある間隔をあけてあふ れ出るものなのだということも、あの時知った。(駿․118) 7) 二人は町の小学校の同じ教室で机を並べていたが、特に仲が好いというわけでなかっ た。一昨年の夏、平塚の七夕祭りの人混みの中でばったり会ってから、急に口をきくよ うになったのである。/裏通りの喫茶店にはいり、一時間ばかり喋って、出て来るところ を、金田町の人に見られていた。そのころ宏は茅ヶ崎の自転車組立工場へ勤めな がら、平塚の定時制の高等学校へ通っていた。今年卒業したところである。(事件․ 10) 8) ヒッチハイクで街を出た。市街地にいれば食う物、宿泊する場所に金がかかる。一 旦、田舎に行ってしまえばどこにでも野宿ができるし、いざとなれば魚を獲って飢えをしの ぐことができる。それに何をしてもとがめられることはない。自由だ。/この頃、ぼくはテン トすら張らずにただ地面に横になって寝ていた。朝方寒くなるとセーターを着るのだ。日 本のように夜露がないので、露天に寝てもどうということはなかった。クレタ島では海岸の 砂の上に寝た。/毎朝、夜明け前に起き、薄明の海に潜った。 (旅․112) 9) ―ラジカセの件は、早川社長が推測しているような出来事だったんですか?/「そうで す。あのころ、うちのなかにはしょっちゅういろんな電化製品が積んであって、母から はそれには絶対触っちゃいけないって言われてたんですが、あのラジカセの箱だけ、 ちょっと離れた場所においてあったんで、これはいいのかなって思っちゃって」(理由․ 416) しかし、次の10)のように一時的なことを表すにもかかわらず「コロ」が使われる場合があ る。 10)「叔母さん!」/「―叔母さん…」クラスメートはなあんだという顔。青ざめた顔で床に 横たわる咲子の姿を、四人は呆然と見下ろした。/ちょうどその頃、里見家では、巻 30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子があべ川餅を作っていた。餅を大きく引き伸ばし、口に入れようとしたらちょうどそのと き、電話がなった。(阿․120) なぜ一時的なことを表すのに「トキ」ではなく「コロ」が使われているのだろうか。この疑 問に対する答えは、出来事間の空間的な関係をみることで明らかになる11)。次の2.2では、 「トキ」と「コロ」の例によって出来事間の空間的な関係の違いが見られることについて述 べる。 2.2 出来事間の空間的な関係の違い 2.1では、「トキ」と「コロ」の時間的な側面の違い、即ち「トキ」はその文が一時的 なことを表すときに、「コロ」は非一時的なことを表すときに使われていることを確認した。そし て、この使われ方には、くみあわさる指示表現及びテクストタイプによる制限がないことを述 べた。 ところが、一時的なことを表すにも関わらず、「コロ」が使われる場合がある。本節で は、この種の例について、出来事間の空間的な関係という観点から「トキ」の例と比較し た。そのうえで、その使われ方に指示表現の種類及びテクストタイプによる制限があるかどう かについて観察する。 結論からいえば、「トキ」は同空間における複数の出来事を表すときに使われ12)、この 使われ方はテクストタイプを問わず、また「そのトキ」「このトキ」「あのトキ」に共通して見 られる。一方、「コロ」は複数の出来事が別空間に生じるときに使われる。このような「コ ロ」の使用には、テクストタイプによる制限はないと考えられるが13)、くみあわさる形式には制 11) 次のように、指示表現がある時間を指し示しつつ、文が一時的なことを表す例も見られる。このような 場合、「コロ」は「だいたいの時」を表していると思われるが、今回の調査では、4例しか得られ ず、この用法についての考察は今後の課題にする。 ․ 初 江 も 口 調 を あ らた め 、 「公 一のこ とで し ょ うか」/ 「い や 、 奥 さ ん のこ とで す 」/ 「何 でし ょ う…」/「今晩、うかがってよろしいでしょうか」/「どうぞ…」/「公一クンは…?」/「合宿に行って ますけど、七時には るって言ってましたから」/「じゃあそのころうかがいます」/「お待ちし てます」(冬 102) 12) ただし、複数の出来事の間に因果関係がある場合には、空間的な関係はなくなる。次の例では点線 の部分が原因を、実線の部分がその結果を表している。 ․被告側が陪審を選択すること自体、つまり素人の判断をあてにすることは有罪である証拠である、な んて考える裁判官もいた。こうして陪審を望むものはなくなり、日本の陪審制は昭和十八年十五年の 命で消滅することになった。その時、横浜地裁は日本で最初の陪審法廷を持つ栄光を持った。そ れは二階中央の特号法廷として残っていて、戦級戦犯の裁判に役立った。今は主として公安関係の 裁判に使われ、演説会場になっているのである。(事件 99) 13) 今回収集した用例では、ノンフィクションで別空間を表す「このコロ」の例は見當たらなかった。しか し、ノンフィクションといっても、他の出来事時を基準軸にしている「そのコロ」の例があることから、「こ のコロ」を使って別空間のことを表す例がありうると考えられる。 類義形式「トキ」「コロ」の分析 ······················································································· 河 在必…31 限があって、他の出来事時を基準軸にする「そのコロ」「このコロ」に限られる。 以下、便宜的に、指示表現によって指示されている文を「A」、「トキ」「コロ」の用 いられる文を「B」として言及する。用例を挙げる際、Aには点線を、Bには実線を施して 示す。 「トキ」の用いられた用例11)~16)の場合、AとBは同空間の出来事を表しているが、 「そのコロ」「このコロ」の用いられた、用例17)~19)の場合、AとBが表すのは別空間 の出来事であって、「トキ」と「コロ」の使用に出来事間の空間的な関係の違いが表れ ている14)。 11) ザルキンを、沢木はCIAじゃないかといったが、十津川にはわからない。あのあと十津 川は一度だけ、ザルキンを見かけたが、そのとき、彼は車内のデッキでトランシー バ ー を 使 っ て い た 。 こ の列 車 に 同 乗 し て い る 仲 間と連 絡 を 取 っ て い た のだ と思 う。(シベ 144) 12)「あの、関根さんは、うちにお勤めして、初めて雇用保険に入ったんだって言ってました よ」/「本當かい?」/「うん―いえ、はい」/「それまでは入っていなかったんだっ て?」/「そうでした。あたしが採用されたとき、あたし一人じゃ手続きの仕方がわかん なくて窓口の人に怒られるといけないからって、関根さんが一緒に職安へついてきてくれ たんです。その時、話してましたから」 (火 67) 13)「友達できたら、家に遊びにきてもらってもええ?」/「そうや来てもらい来てもらい。おば あちゃん、おいしいお菓子作っとくから」/「わらびもちがええわ。私、おばあちゃんが 作ってくれるお菓子、大好きやねん」/私は祖母と一緒にいられることがうれしくて、一人 ではしゃいでいた。そして、このとき、この幸せはずっと続くものと思っていた。(だから․ 10) 14) 老女たちはみかんの攻勢を浴びながら、あわてふためいて自分の草履を探そうと右往 左往した。ふっとその中の一人が、小さな声で念仏を唱える。するとみなも唱和をす る。/「帰れ!帰れよオ!」/念仏を唱えながら、老女たちは、一人また一人と表へ飛 び出した。/ちょうどこのとき、ドアの外に、花束と果物の包みを抱えた巻子が立って いた。(阿․302) 15)「子供の頃、アンタよく寝ぼけたのよ。あれは小学一年生の時よ、日曜日で、おじい ちゃまたちお留守だからって、お父さんとお母さんと三人で昼寝してたのよ、そしたら、ア 14) なお用例11)14)17)は地の文、13)16)18)はノンフィクションの例である。 32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ンタ急にガバッて起き上がって、『あ、大変だ、学校おくれるよ』-ランドセル背負っ てでかけようとしたのよ」/「オレが?」/「お父さんたら『バカ、今三時だぞ、寝ぼけ るんじゃない!』縁側のとこで、こやって体ゆすって―あの時、お父さん、大工のトメ さんからもらった派手な浴衣着てたのよ」/杉男は口をはさもうとしたが、恒子はなおも上 擦った声で、/「アンタ、まだ寝ぼけてて。『ウソだ、行かないとおくれるよ』と言うもん だから、お母さん、紋付きに着がえて、一緒に学校へ行ったのよ」(家․430) 16) 転校するとすぐ、その学校出入りの洋服屋にいって誂えるのだが、すぐその日には間に 合わず、二、三日かかってしまう。あれが嫌だった。/そういえば、学期のはじめに記 念写真を撮ったが、あのとき、一人か二人は違った服を着ている子がいた。みん なが夏のセーラー服なのに、一人だけは黒っぽい冬服を着ている、といった具合であ る。(女․64) 17) 数日後、省司から電話がかかってきた。恒太郎は省司の家の近くの喫茶店へ出向 き、せがまれるままに宿題をみてやった。/「ちがうよ、パパ。ダメだなあ」/「むずか しいんだよ、この頃のは。こういうの習ったことないからねえ」/「こう!」/省司は身を 乗り出す。だが、「文句言うんなら、自分でやれ」と、恒太郎が言うと、省司はあ わてて、「文句言わないから-言わない。あ、うまい」/「おだてにはのらないぞ」/ 「やっぱし、ママのほうがうまいや」/なんだかんだと言い合いながらも、二人は実の親 子のようにむつまじい。/喫茶店の外では、地味な和服にショールで顔を隠した友子 が、胸をつまらせながら二人の姿を見つめていた。/ちょうどその頃、国立の家には滝 子が来ていた。踏み台にのり、金槌で壁に釘を打つ。ふっと手を止めて、/「あ、あ たしのこと笑わしてくれないかな」怪訝な顔をする勝又に、「なんかおかしいこと言っ て…」(阿․281) 18) しかし、身元は不明でそれ以上の事情はわからない。とりあえず、殺しということも考慮 に入れて、医務院で司法解剖をすることになった。/死因は溺死であったが、血液の化 学的成分を分析すると、淡水による溺死のデータが得られた。海水で溺死すると、海 水中の塩分が血液に吸収されてナトリウム、クロールなどが著明に増加するが、本件 では逆に血液は水で薄められ、血中塩分は減少していた。つまり川などで溺れた後、 東京湾に流れついたと考えるべきであった。/そのころ、女の身元も判明した。夫婦 げんかの末、夫に殴る蹴るの暴行を受け、彼女は死んでやると一言言い残して、 夜半に家を飛び出したという。(死体․94) 19)「どうしてああ熱心なんでしょうね。あんまり金になりそうもない事件ですが」/と野口判事 類義形式「トキ」「コロ」の分析 ······················································································· 河 在必…33 補は言った。/「金にならなくても、マスコミに乗りそうな事件をやれ、これは弁護士の第 一課だ。きみ達も将来転向する時の用意に、これくらいは心得ておいた方がいい」/谷 本判事の言葉には皮肉な調子があった。矢野判事補は首をすくめた。/この頃、菊 地弁護士はバス通りの一品料理屋の二階で、花井武志といっしょに、カレーライスを食 べていた。/午前の法廷が終って、廊下に出たところで、菊地は三人の新聞記者に囲 まれた。(事件․238) 今回収集した用例の中では見當たらなかったが、会話文においても、「コロ」の使用に よって、別空間のことを表すことは可能であろう。 20)「昨日、日本代表の試合あっただろう?すごかったよなぁ」「俺見てないんだ。その 頃病院に行ってたんだよ。急にお腹が痛くなってさ」(作例) 21)「山田兄弟について確認できたことは?」「兄慶介は午後3時ごろ、大阪駅から東京 に向かう新幹線に乗りました。このころ、弟大介は伊丹空港にいました。」(作例) このような「トキ」と「コロ」の特徴は、両形式を言い換えることで確認することができ る。以下の22)23)の「トキ」と「コロ」を言い換えてみよう。すると、前者は別の場面の出 来事に、後者は同場面の出来事になってしまう。 22) クズル オワに露営していた昨日の午後三時ころ、ギョヴェンにさされそうになった子ウ シがチャドルのまえを気がくるったようにはしりまわっていた。数頭の子ウシが競走でもする かのように全力疾走でかけてきては急にとまり、また逆の方向へはしりだすということをくりか えしていた。ときどき、虫をさけるため空中にとびあがったりする。/そのとき、ファトマナ もハティジェもヒツジの搾乳にいそがしくたちはたらいていた。 ⇒<そのころ> (遊牧․329) 23) 死体解剖を行なった。その頃、女の身元が分かった。(用例18からの作例) ⇒<その時> このように、他の出来事時を基準軸にしている「そのコロ」「このコロ」に、別空間のこ とを表す使われ方があることを述べた。しかし、この使われ方は、発話時を基準軸にしてい る「あのコロ」にはない。 24) しかし、さかえフラワーロードの有吉房雄は、ヴァンダール千住北ニューシティ建設當 34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時、確かに石田直澄とばったり出会い、前記のようなやりとりを交わしたと主張して譲らな い。/「そりゃあんた、今さら家族や本人が本當のことを言うわけがないやね。前々から あのマンションを欲しがってましたなんて、みっともなくてさ。本當のことはね、判る人間に しか判らないものなんだよ。だけど、誰がなんて言ったって、あたしはあのころ石田さん に会ったんだからね。これは事実だからさ」(理由․333) 以上、2.1の時間的な側面の違いに加えて、2.2では、「トキ」と「コロ」の用例に見ら れた出来事間の空間的な関係の違いについて述べた。しかし、「トキ」と「コロ」が常に 異なった使われ方をしているわけではない。ある構文的な条件のもとでは、「トキ」と「コ ロ」の間の違いがほとんどなくなる場合がる。次の2.3ではこの点について述べたいと思う。 2.3 「トキ」と「コロ」が類似してくる場合 2.1と2.2では、「トキ」と「コロ」の使われ方には、時間的な側面の違いと出来事間の 空間的な関係に違いがあることを述べた。しかし、構文的な条件や文の表す内容によっ て、両形式の間に違いがほとんどなくなる場合がある。本節ではこの点について考察した結 果を述べる。 次のような場合、「トキ」と「コロ」の違いがほとんどなくなり、両形式を言い換えることが できる15)。 (1)「そのトキ」「このトキ」「そのコロ」「このコロ」が「-には」の形をとり、述 語が「シテイタ」「シテイル」の形をとっている。 (2)「そのトキ」「このトキ」「そのコロ」「このコロ」がはだかの形か「-は」の形 で、「すでに」「もう」といった副詞が共起して、述語が「シテイタ」「シテイル」 の形をとっている。 (3)(1)か(2)の構文的な条件のもとで 、 「トキ」「コロ」が使われている文が 「ある時点以前に成立したことが持続していること」を表している。 25) また別の事例であるが、選挙中運動員が通りがかりの酔っ払いと口論けんかになり、 暴行を加えて死なせてしまった。これが報道されては落選すると、成り行きを心配した市 会議員候補の顔役は、知り合いの医師に頼み、脳出血、病死というニセの死亡診断 書を作成してもらい密葬した。/選挙に當選したが後日、殺された身内が警察へ通報し たため事件は発覚した。しかし、そのときには、遺体は火葬されて明確な証拠はなく 15) なお、「あのトキ」「あのコロ」が、このような条件で用いられている例はほとんど得られなかった(「あ のトキ」:1例、「あのコロ」:用例なし)。内省では「あのトキ」「あのコロ」の場合も同様であると 思われるが、この点に関する検証は今後の課題にする。 類義形式「トキ」「コロ」の分析 ······················································································· 河 在必…35 なっていた。綿密な捜査の結果、間違いなく殺しであることがわかった。(死体․119) 26) 十数年前、支店長と交際が始まる直前まで、彼女は年下の男と交際があった。一ヵ 月くらいの間、彼女はこれらの二人の男性と関係をもっていたのである。このオーバー ラップした一ヵ月の間に、彼女は若い男と別れて支店長を選んだが、そのときすでに 彼女は身ごもっていたのである。/妻以外の女との出会いで、無精子症の自分も子宝 に恵まれたことを、この上なく喜んだ支店長は、子を溺愛した。(死体 48) 27) 選挙に當選したが後日、殺された身内が警察へ通報したため事件は発覚した。しか し、このときには、遺体は火葬されて明確な証拠はなくなっていた。(用例25からの作 例) 28) 何これ…?わたしは唖然とした。/うちの子達は、いつもの生活空間で撮影する時でさ え、怯えて時間がかかるのに、こんなに部屋の中の様子を変えられ、そのうえ、フラッ シュなんかたかれたら、とんでもなくパニックする、と思ったからである。こういうことだと 知っていたら、うちの猫には無理だと言って、お断りしていただろう。/わたしの顔は、 曇った…というより、一気に不機嫌になった。/案の定、気が小さく、臆病で、異常に 人見知りなオサムは、怯えて、リビングから一番遠い、夫の部屋のベッドの下にもぐり込 んでしまった。こうなったら、引っぱり出すのだって、容易なことではない。/どういう撮影 なのか、ちゃんと確認しなかったわたしも悪いが、この時はもう、まわりのみんなと、この 撮影自体に否定的な気分になっていた。(駿․124) 29) 露営地での設営がおわると、ムスタファはウマでクル チェシメへひきかえしていった。 馬群の一頭がたりない、という。どうも、クル チェシメにその一頭がのこったらしい。夕 方おそく、ムスタファはクル チェシメでみつけたウマを一頭つれ、アク ビュクの露営地 にかえってきた。そのころには、夕闇があたりをすっかりつつんでいた。(遊牧․173) 30)「ジュンコ先生、マリカになにしたの?」/子どもの人格であるペインは、はっきりした大き な声でそう言った。/「マリカはなにしてる?」/私はどきどきしながらたずねた。/「後ろで 寝てる。」/「もう出てこないの?」/「もう寝てるの。すごく悲しいみたい。あの人たち の話がでたの?」/ペインとはいちばんよく話した。ペインの記憶はいちばん痛々しかっ た。あの人たち、とは常に、マリカのろくでもない両親のことだった。/「大丈夫、あの 人たちはもういないの。」/私は言った。/「マリカはこわいのよ。」/ペインは言った。/ 「こわいことはみんな私が代わってあげるって、言ってるのに」/ペインはその頃はもう落 ちついていたが、昔はこわくなると暴れてものを壊したり、自分の体を傷つけようとした。そ 36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の度に入院して、沢山の薬を飲み、外出が許されないつらい治療をした。(マ․17) 31)約三時間ほどかけて、やっと山頂にたどり着いた。このころには、日も暮れてい て、周りの空気は冷えこんでいた。(作例) 32) 2年間の浪人生活を経て、僕は大学に合格した。このころすでに彼女は別の男と結 婚し、一児の母となっていた。 (作例) 3.まとめと今後の課題 以上、「その」「この」「あの」とくみあわさる場合を対象にして、時間的な側面の違 い(2.1)と出来事間の空間的な関係の観点(2.2)から「トキ」「コロ」の違いについて述べ た。そして、両形式の違いがほとんどなくなる場合について述べた(2.3)。その内容をまとめる と、次のようになる。 (1) 時間的な側面の違い ․「トキ」は基本的に一時的なことを表す場合に使われる。一方、「コロ」は非 一時的なことを表すときに使われる。このような使われ方には、指示表現の種類 及びテクストタイプによる制限はない。 しかし、「コロ」が使われているにも関わらず、一時的なことを表す場合があ る。この場合、「トキ」と「コロ」の使用によって、(2)の出来事間の空間的 な関係の違いが表される。 (2) 出来事間の空間的な関係の違い ․「トキ」は複数の出来事が同空間に成立する場合に使われる。一方、「コ ロ」は複数の出来事が別空間にある場合に使われる。このような使われ方に は、「トキ」の場合、指示表現の種類及びテクストタイプによる制限はない。し かし、「コロ」の場合、テクストタイプによる制限はないが、くみあわさる指示表 現には制限があり、他の出来事時を基準軸にして用いられる「そのコロ」「こ のコロ」に限られる。 (3)「トキ」と「コロ」が類似してくる場合 ․述語の形式が「シテイタ」「シテイル」で、「そのトキ」「このトキ」、「そのコ ロ」「このコロ」が「-には」の形をとったり、はだかの形か「-は」の形をとっ て、「もう」「すでに」と共起したりする場合には、文が「ある時点以前に成立 したことが持続していること」を表すようになる。この場合、「トキ」「コロ」がそ 類義形式「トキ」「コロ」の分析 ······················································································· 河 在必…37 の「ある時点」を指し示し、両形式には違いがほとんどなくなる。 (1)と(2)の結果から、「コロ」の使用を、次のように考えられる。まず、基本的 な「そのコロ」「このコロ」の使用をみると、「そのコロ」「このコロ」は、非一時的なこと を表す際に使われ、一時的なことを表している他の出来事に対して背景的なことを表す。こ の場合、二つの出来事間の時空間的な関係は、時間的には重なりがあり、同時的な関 係にある。 しかし、空間的には同じ空間の関係ではない。このような出来事間の時空間の関係は、 「そのコロ」「このコロ」の使われる文の表すことが、一時的なことを表している場合でも同 様に考えることができる。つまり、「そのコロ」「このコロ」の使われる文の表すことは他の 出来事に対して、時間的には同時的な関係になるが、空間的には別空間の関係にある出 来事を表していると考えられる。 今後の課題としては、「トキ」「コロ」が使われている時間的従属複文における分析を する必要があると思われる。「トキ」の使われている従属複文の研究には、寺村(198 3)、言語学研究会(1989)、工藤(1995)などがある。このうち、「コロ」について の記述は、工藤(1995)に限られており、「トキ」と「コロ」は<時期限定の明確さ>で 違いがあると記述している。しかし、多くの場合、「トキ」を「コロ」に言いかえにくく、その ときの制約の条件について調べる必要があると思われる。 38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參考文獻】 奥田靖雄(1994)「動詞(その2)」『教育国語』2-12:27-42.むぎ書房. 奥田靖雄(1996)「文のことーその分類をめぐってー」『教育国語』2-22:2-14.むぎ書房. 工藤真由美(1993)「小説の地の文のテンポラリティー」『ことばの科学6』19-65.東京:むぎ書房. 工藤真由美(1995)『アスペクト テンス体系とテクスト‐現代日本語の時間の表現』東京:ひつ じ書房. 工藤真由美(2002)「現象と本質-方言の文法と標準語の文法-」『日本語文法』2-2:4661.くろしお出版. 言語学研究会 構文論グループ(1989)「接続詞「とき」によってむすばれる、時間的なつきそ い あわせ文」『ことばの科学6』233-266.東京:むぎ書房. 鈴木重幸(1972)『日本語文法 形態論』東京:むぎ書房. 寺村秀夫(1983)「時間的限定の意味と文法的機能」『副用語の研究』233-266.東京:明 治書院 仁田義雄(2002)『副詞的表現の諸相』東京:くろしお出版. 【用例出典】 (本文に挙げた用例の出展だけをあげる。なお、本文では下線を引いた部分で表している。) 上野正彦(2001)『死体は語る』文藝春秋 大石静(1998)『駿台荘物語』文藝春秋 大岡 昇平(1980)『事件』新潮社 大平光代(2003)『だから、あなたも生きぬいて』講談社文庫 西村京太郎(1996)『シベリア鉄道殺人事件』講談社文庫 浪記1』文芸春秋 <上>』新潮社 野田知佑(1999)『旅へ新 放 松原正毅(2004)『遊牧の世界』平凡社 松本清張(1973)『砂の器 宮尾登美子(1982)『もう一つの出会い』新潮社 宮部みゆき(1998)『火 車』新潮社 宮部みゆき(2004)『理由』新潮社 向田邦子(1999)『阿修羅のごとく』文藝春 秋 向田邦子(2000)『家族熱』文藝春秋 向田邦子(1998)『冬の運動会』文藝春秋 向田 邦子(1985)『女の人差し指』文藝春秋 吉本ばなな(1991)『哀しい予感』角川書店 類義形式「トキ」「コロ」の分析 ······················································································· 河 在必…39 要 旨 現代日本語の時間表現には形式名詞として扱われる「トキ」「コロ」がある 。 一般的に は、「トキ」は「時間の中の一点」を表し、「コロ」は「だいたいの時」「およその時」また は「長い一定の点」を表すとされていて、両形式の間には時間的な側面に違いがあるといわれ ている。しかし、両形式の間には時間的な違いだけでなく、出来事間の空間的な関係の違いも みられる。 本研究では、「トキ」と「コロ」が指示表現である「その」「この」「あの」とくみあわさった 形式を対象にして、「トキ」と「コロ」の使用に、時間的な側面の違いだけでなく、出来事間 の空間的な関係の違いもあることを明らかにする。 基本的に 、「トキ」は、個別の時間に位置づけられる運動(動作、 変化) 、 出来事としての <一時的なこと>を表すときに使われる。一方、「コロ」は反復習慣的なこと、あるいは、長 期間的な活動としての<非一時的なこと>を表すときに使われる。このような違いから、「トキ」 と「コロ」の間には、時間的な側面の違いがあると指摘されている。 しかし 、「コロ」が<一時的なこと>を表すときに使われる場合もある。 この場合 、「トキ」と 「コロ」の使用には、 指示表現で指示される他の出来事との空間的な関係の違いがみられ る。つまり、「トキ」が使われる文で表される<一時的なこと>は、指示される文で表される他 の<一時的なこと>と同じ空間の関係にある。一方、「コロ」が使われる文で表される<一時 的なこと>は、指示される文で表される他の<一時的なこと>と別空間の関係にある。 キーワード; 形式名詞、類義形式、絶対的時間副詞、相対的時間副詞 투 고 : 2008. 8. 31 1차 심사 : 2008. 9. 12 2차 심사 : 2008. 9. 27 일본인과 한국인의 커뮤니케이션 차이 -인사표현, 「どうも」,「どうぞ」와 그에 대한 한국어표현에서 나타나는 콘텍스트 의존도의 차이- 강영부* (e-mail : [email protected]) 目 次 1. 2. 3. 4. 5. 들어가며 담화의 4가지 요소와 그 관계 코드 의존의 문화와 콘텍스트 의존의 문화 콘텍스트 의존도의 차이에서 본 일본어와 한국어 맺음말 1. 들어가며 한국어와 일본어는 문장구조 등 여러 면에서 유사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다음 의 (1)~(4)에서 보는 것처럼 의미적으로 대응관계를 이르는 단어끼리도 그 커뮤니케이션의 방법(운용)에 있어서 차이를 보이는 경우가 있다.1) (1)昨日はどうも。 (2)昨日はどうもありがとうございました。 (3)*어제는 정말(대단히). (4)어제는 정말(대단히) 감사했습니다. * 경희대학교 외국어대학 부교수 1) *표는 그 표현이 해당 언어에 있어서 허용될 수 없다(unacceptable)는 것을, ?표는 해당 언어에 있어서 직감적으로 어색하다(unnatural)는 것을 나타냄. 이하에서도 같은 의미로 씀. 42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이러한 커뮤니케이션의 차이에 대해서 일한사전의 「どうも」의 항목에서는 어떻게 기술하 고 있을까? 우선 『시사엘리트사전』(시사영어사, 1995)에서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생각하 고 있는 마음을 나타낸다. 아래의 서술을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 정말, 매우, 참으로」라고 풀이하고 있다. 한편, 『Prime 日韓辞典 第3版』(두산동아, 2004)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의 미 분류를 하고 있으며 「①아무리 해도②어쩐지, 어딘지③아무리 생각해도, 아무래도④정말, 참으로, 대단히(감사, 사과 등을 표시하는 인사말 앞에서)」와 같은 다양한 의미를 들고 있 다. 이 중 특히 ④의 「どうも」의 경우 그에 따르는 인사말 「お世話になりました」「すみません」 「ありがとう」「失礼しました」가 생략되기도 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와 같이 두 사전에서 모 두 「どうも」 다음에 오는 서술-즉, 여기서는 인사말-을 생략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만 언급 하고 있을 뿐, 왜 그 부분이 생략될 수 있는지 생략된 경우의 「どうも」는 한국어와 어떻게 대응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설명이 없다. 한편, 「どうも」가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는 이유를 일본의 독특한 문화에서 찾으려는 시도도 있다. 그 대표적인 연구로서는 李(1984)와 Hasegawa(1994)를 들 수 있다. 우선, 李(1984)는 「どうも」가 다양한 의미를 나타내는 것은 일본의 「축소지향(縮み志 向)」의 문화와 관련되어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pp.74-76). 즉, (2)의 「どうも」이하 의 본래의 의미를 잘라 버리고 (1)과 같이 「どうも」만으로 축소시켜서 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어에서도 「왜 그래?」라고 물었을 때 장면에 따라서 「그냥 웃겨서(그래)/그냥 슬퍼서(그래)/그냥 답답해서(그래)/그냥 어지러워서(그래)...」와 같은 구체적인 서술부분(밑줄 친 부분)을 생략하고 「그냥」이라고 대답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축소지향」이 일본문 화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한국어에서 볼 수 있는 이러한 표현도 한국의 축소지향의 문화를 반영하고 있다고 보아야 하는지 명확하지 않다. 다음으로, Hasegawa(1994)의 경우는 일본에는 「다언설득(多言説得)」의 문화에 사는 미 국과는 달리 「以心伝心」이라는 말이 있어서 일본인들은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상대방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2). 이것을 위의 (1)(2)에 적용시킨다면 「どうも」 뒤에 오는 구 체적인 말 「ありがとうございました」를 굳이 코드화시키지 않더라도 일본인들은 「どうも」만으 로도 전달하고 싶어 하는 내용(정보)을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以心伝心」이라는 말은 일본어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어에도 있다. Hasegawa(1994)의 분석대로라면 한국어에서도 「이심전심」이라는 말이 있기 때문에 (4)의 「어제는 정말 감사했습니다」와 같이 일일이 말로 설명하지 않더라도 (3)의 「어제는 정 2) 長谷川(1994)에서는 「이심전심(以心伝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일본에는 「이심전심(以心伝心)」이라는 말이 있다.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미국은 일본과는 반대이다. 언어, 문화, 민족이 다른 이민국가이기 때문에, 상대가 이 해할 때까지 반복해서 이야기하지 않으면 상대는 이해해주지 않는다. 말하자면 「다언설득(多言説得)」 의 세계라 할 수 있다」(長谷川(1994), p.32)(필자역). 일본인과 한국인의 커뮤니케이션 차이 ··············································································· 강 영 부…43 말」만으로도 상대방이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따라서 그것으로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해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 한국인 화자의 입장에서 보면 (3)은 정보의 내용(양)이 불완 전(부족)하게 느껴지며 자연스럽지 못한 표현으로 받아들여진다. 즉, 「以心伝心」이라는 말 이 존재하는 문화와 그렇지 않은 문화라는 구별만으로는 일본어와 한국어에서 나타나는 (1)~(4)의 관계를 설명하기가 어렵다.3) 이상, 「どうも」의 의미를 일본문화와 관련시켜서 논한 대표적인 두 가지 선행연구를 검토 해보았다. 본 논문에서 제안하고자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A. 일본어의 「どうも」의 경우 그 이하의 부분이 생략되어도 전달하고자 하는 정보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일본인들 간에는 콘텍스트(context)4)를 통해서 그 생략된 부분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문화(콘텍스트에 의존하는 문화)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B. 일본어와 한국어 간에 (1)~(4)와 같은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일본인과 한국인 간의 커뮤니 케이션에 있어서 콘텍스트에 의존하는 정도가 다르기 때문이며 일본이 한국보다도 콘텍스트에 의존하는 정도가 높은 문화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일본어와 한국어 간에 (1)~(4)와 같은 차이가 나타나는 것은 한국에 비해서 일 본이 상대적으로 언어코드보다는 콘텍스트에 의존하는 경향이 더 높은 사회(문화)에 속하기 때 문이며, 일본인과 한국인이 같은 내용을 가지고 커뮤니케이션을 할 경우에 있어서도 그러한 문 화적 차이가 두 나라의 커뮤니케이션의 차이에 영향을 미치고 또한 그것이 각각의 언어표현에 반영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 경우 일본어가 한국어보다 콘텍스트에 의존하는 정도가 높다 는 것을 나타내 주는 예로서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본 논문에서는 일본어의 인사표현, 「どう も」「どうぞ」의 예에 한정해서 논하기로 한다. 3) 「以心伝心」이라는 말은 「마음으로 마음을 전한다」 즉, 쉽게 말하면 「말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마음만으로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질 수 있다」라는 뜻이지만, 그것도 서로의 표정이나 몸짓, 놓 여진 상황 등의 콘텍스트의 도움이 없이는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하다. 콘텍스트를 통해서 상대방 의 마음을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以心伝心」과 같은 커뮤니케이션의 특징을 가지고 있 는 언어일수록 콘텍스트에 의존하는 정도가 높다고 할 수 있다.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일본어와 한 국어에 모두 「以心伝心」이라는 말이 존재한다고 해도 문화의 차이 때문에 전달하는 정보에 차 이가 있을 수 있고 콘텍스트 의존성이 얼마만큼 높은가에 따라서도 차이가 있을 수 있다. 4) ‘context’는 문장(text)의 「문맥」 또는 담화(discourse)에서의 「장면」을 각각 의미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문장과 담화에 관계없이 두 의미를 포함하는 의미로서 「콘텍스트」로 통일해서 사용하 기로 한다. 여기서 말하는 콘텍스트란 담화에서 문장을 뺀 개념으로(橋内(1999).p.27), 커뮤니케이 션이 일어나는 물리적, 사회적, 심리적, 시간적인 환경(그 장소에서의 분위기나 상황, 언어 외의 의 미, 상대와의 유대관계 등) 모두를 가리킨다(鍋倉(1997)p.28). 44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2. 담화의 4가지 요소와 그 관계 Schiffrin(1994)에 의하면, 담화(discourse)는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 이루어지며, 인간은 정보를 전달하고 서로 동일한 의미와 상호행위의 해석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발 화를 한다고 한다. 이와 같이, 커뮤니케이션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기존에 다루던 참가자 (participants), 메시지(message), 매체(medium)라는 세 가지 요소뿐만 아니라 「상호주체성 (inter-subjectivity)」이라는 요소도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의 관계를 그림으로 나타내 면 다음의 〈그림1〉과 같다.5) 〈그림1〉커뮤니케이션의 요소와 과정 〈보내는 사람〉 → (참가자) ↑ ← 〈메시지〉 (매체) → ← 〈상호주체성〉 〈받는 사람〉 (참가자) ↑ 첫째로, 메시지는 ①새로 입수한 정보(보내는 사람만 알고 있는 정보)냐 이미 알고 있는 정보(쌍방의 공유물)이냐6), ②메시지의 출처(source)가 (언어화되기 이전의)생각이냐 발화자 의 의도(신념 또는 희망)냐, ③정보를 전달하는 경우에 있어서 주로 코드(언어체계)에 의존 하느냐 주로 콘텍스트에 의존하느냐와 같이 세 가지 측면에서 파악할 수 있다. 이 중 ③의 코드에 의존하는 경우의 전형은 식사(式辞)나 공식문서이며, 콘텍스트에 의존하는 경우의 전 형은 일상의 회화나 논의(論議)에서 나타난다. 둘째로, 언어커뮤니케이션의 매체에 대해서는 ①회화체 언어, ②문장체 언어, ③수화(手話) 라는 세 전달방법(channel 또는 mode)이 있는데, ①②만을 놓고 볼 때 모두 언어행동(음성 언어/문자언어) 그 자체와 그와 동반되는 비언어적 행동(음질, 몸짓, 손짓, 대인거리 등/글자 체, 글자의 배치, 필적 등)으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셋째로, 상호주체성(공동주관성)은 참가자끼리의 지식과 경험에 관계되는 개념이며, 커뮤 니케이션의 참가자인 전달자와 피전달자는 지식과 경험을 공유해서 유사한 해석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즉, 처음부터 상이한 참가자가 기본적인 지식(현실세계에 대한 지 식과 사용언어에 대한 지식)을 공유하고 있을 때에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 다. 커뮤니케이션 행동에 의해서 새로이 창조되는 것도 참가자끼리의 지식의 공유화라 할 수 있 으며, 이러한 점에서 상호주체성은 커뮤니케이션이 성립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라 할 수 있다. 5) Schiffrin(1994).p.386, 橋内(1999).p.30. 6) 새로 입수한 정보인 경우 정보를 보내는 사람의 체험담 등이 예가 될 수 있으며, 이미 알고 있는 정보인 경우 날씨에 관한 이야기 등이 예가 될 수 있다. 일본인과 한국인의 커뮤니케이션 차이 ··············································································· 강 영 부…45 3. 코드 의존의 문화와 콘텍스트 의존의 문화 한편, 이러한 커뮤니케이션을 이루는 요소들 간의 관계는 비단 한 언어문화권 속에서만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문화간 커뮤니케이션(intercultural communication)의 경우에 있어 서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커뮤니케이션은 콘텍스트에 영향을 받 는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자신이 놓인 콘텍스트로부터 화자의 발화의도를 의식적으로 판단 함으로써 상황에 맞는 커뮤니케이션을 하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상대를 정확하게 이해 하면서 전개하는 커뮤니케이션 활동은 많지 않고 특히 당사자들 간의 문화적 배경이 다른 경우는 더욱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이문화간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는 발화의 해석을 결정 해야 할 콘텍스트 자체의 해석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의 불일 치는 종종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의 콘텍스트 의존도의 차이에 의해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 다. Hall(1966)은 각 문화에 속해있는 개인이 메시지를 기호화하고 해독하는 과정에서 커뮤니 케이션이 콘텍스트에 의존하는 정도에 따라, 문화를 「콘텍스트 의존도가 높은 문화(High Context Culture : HC 문화)」와 「콘텍스트 의존도가 낮은 문화(Low Context Culture : LC 문화)」로 나누었다7). 또한 Hall(1976)에서는 이 HC 문화와 LC 문화의 관계를 문화콘 텍스트와 정보의 상호작용(즉, 콘텍스트와 언어정보 중 어느 쪽에 더 의존하는 문화냐)이라 는 면에서 다음의 〈그림2〉와 같이 나타내고 있다. 〈그림2〉문화콘텍스트와 정보의 상호작용 HC 콘텍스트 의미 LC (언어)정보 위의 〈그림2〉에서 알 수 있듯이 HC 문화란 메시지를 해석할 때에 콘텍스트에 의존하는 성향(정도)이 높은 문화를 말한다. HC 문화에서는 화자와 청자 간의 공유되어진 정보(지식 이나 경험)가 많기 때문에 명확히 말로 표현할 필요가 없고 때로는 말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커뮤니케이션이 성립하는 경우가 있다. 즉, 상대방의 의도를 「헤아릴」수 있는 문화라 할 수 있다. 7) Hall(1966)에서는 일본인은 포함되어있지만 한국인이 포함되어있지 않다. 한편, Hall, E.T and Hall, M.R(1990)에서는 한국인도 포함되어있으며 Hall(1966)에서도 그랬듯이 이 논문에서도 콘텍스트 의존 도가 가장 높은 사회에 사는 사람들이 일본인으로 나타나있다. 다음으로 중국인, 한국인, 아프리카 계 미국인, 미국 원주민, 아랍인, 그리스인, 라틴계, 이탈리아인, 영국인, 프랑스인, 미국인, 독일인, 스칸디나비아인, 독일계 스위스인의 순이라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46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한편, LC 문화는 개인주의가 발달해서 화자와 청자 간의 공유되어진 정보가 적은 문화를 말한다. LC 문화에서는 서로 공유하는 정보가 적기 때문에, 서로 명확히 말로 표현해서(또 는 문서로 써서) 커뮤니케이션을 하지 않으면 안 되며, 서로 상대방의 의도를 「헤아릴」수 없기 때문에 콘텍스트에 의존하지 않는 언어코드를 구사할 필요가 있다. 즉,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콘텍스트를 잘 판단해서 그에 적합한 말씨나 표현을 선택할 필요가 있다. HC 문화의 전형적인 예로 알려진 일본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하나 입으로 표현하지 않으면 통하지 않는 LC 문화의 커뮤니케이션은 이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반대 로 LC 문화에 속하는 미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헤아림(察し)」「이심전심(以心伝心)」에 의한 커뮤니케이션은 이해하기 힘들고 정보량이 부족한 것으로 느끼게 된다.8) 이처럼 언어 문화적 배경이 다른 사람끼리 커뮤니케이션을 할 경우에는 언어사용상의 관 습차이로 인해서 상대방의 의도와 다른 의미해석을 하게 되어 여러 가지 오해나 곤란, 즉, 이문화간의 미스커뮤니케이션(cross-cultural miscommunication)이 생기게 된다. 4. 콘텍스트 의존도의 차이에서 본 일본어와 한국어 일본어에서나 한국어에서나 어떤 특정한 콘텍스트에 한정적 유형적으로 나타나는 인사표 현(「こんにちは」「안녕하세요」등), 감사 사죄 축하 등의 표현(「すみません」「죄송합니 다」등), 응답표현(「かしこまりました」「알겠습니다」등), 전치(前置)표현(「お電話で失礼です が」「(직접 찾아뵙고 말씀드려야 하는데)전화로 죄송합니다만」등), 대화나 문장 속에 나타 나 그 구조나 전개방법 등에 대해서 설명하는 정형(定型)표현(「以上、甚だ簡単ですが、歓迎 のごあいさつとします」「이상, 간단합니다만 환영인사로 대신 합니다」등) 등 상투적인 어구 8) 鍋倉(1997)은 Hall(1976)의 문화콘텍스트와 정보의 상호작용을 기초로 HC에 속하는 일본문화와 LC 에 속하는 미국문화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놓았다(p.28. 한글 역은 필자. 표 형식은 생략하 고 내용만 소개한다). 〈HC 문화(일본)〉 민족적으로 동질이고 역사, 습관, 언어 등으로 보아 공유하고 있는 콘텍스트의 정도가 높기 때 문에 집단주의와 획일성이 발달되어있다. 커뮤니케이션 스타일은 언어에 있어서는 애매하고 추상적이면 비언어에 있어서는 미묘한 부분 이 많다. 「침묵은 금이다」의 발상. 〈LC 문화(미국)〉 다른 인종 민족에 의해서 구성되어있으며, 공유하고 있는 콘텍스트의 정도가 낮아서 개인주의 와 다양성이 발달되어있다. 커뮤니케이션 스타일은 언어에 있어서는 논리적이고 구체적이며 비언어에 있어서는 대략적인 경우가 많다. 「웅변은 금이다」의 발상. 일본인과 한국인의 커뮤니케이션 차이 ··············································································· 강 영 부…47 (routine formulae)가 많이 나타난다. 그런데 같은 콘텍스트에서 쓰이는 상투적인 어구라고 하더라도 언어에 따라서는 그것을 나타내는 방법과 형식이 다를 수 있으며, 특히 일본어와 한국어의 경우에는 콘텍스트 의존도의 차이에 의해서 표현방법이 다르게 나타나는 예들이 다양하게 존재한다. 본고에서는 그 중에서도 일본어의 주요 인사표현과 「どうも」「どうぞ」를 대상으로 고찰한다. 4.1. 주요 인사표현 여기에서는 화자가 청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정보 중에서 일부만 언어형식으로 나타내고 나 머지는 생략하는-즉, 콘텍스트에 의존하게 하는-형태의 일본어의 주요 인사표현에 대해서 살펴 보기로 한다. 일본어의 인사표현에는 한국어의 인사표현에서 볼 수 없는 콘텍스트 의존도가 높 은 예들이 많이 나타난다. 이들 예를 몇 가지 상황별로 나누어서 확인해보기로 한다. 우선, 만날 때의 인사의 경우, 일본어에서는 (5)(7)에서 보듯이 주제의 형식(~は)만 나타내고 나머지 안부 등을 나타내는 부분(「ご機嫌いかがですか/いかがお過ごしですか」등)에 대해서는 콘텍 스트에 의해서 파악한다. 이에 대해서 한국어의 경우는 (6)(8)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콘텍스트 에 의존하는 방법을 쓰지 않고 「안녕하세요」와 같이 안부를 묻는 부분을 명확한 언어코드를 가지고 나타낸다. (5)こんにちは。→こんにちはご機嫌いかがですか/いかがお過ごしですか。 (6)*오늘은.→안녕하세요(낮 인사) (7)こんばんは。→こんばんはご機嫌いかがですか/いかがお過ごしですか。 (8)*오늘 밤은.→안녕하세요.(밤 인사) 다음으로, 헤어질 때의 인사의 경우, 일본어에서는 (9)(11)의 「さようなら」「それじゃ」와 같 이 접속조사가 쓰인 형태, (11)의 「じゃ」와 같이 접속사부분만 쓰인 형태, (13)(15)의 「お先 に」「気をつけて」와 같이 부사부분만 쓰인 형태, (17)의 「お疲れ様」와 같이 명사부분만 쓰 이는 형태 등이 있다. 이 형식 이외의 부분은 콘텍스트에 의해서 파악한다. 한편 한국어에서 는 (10)(12)(14)(16)(18)의 「그럼 안녕(히 계세요)」「그럼 실례하겠습니다」「먼저 실례하겠 습니다」「조심해서 가세요(오세요)」「수고하셨습니다」와 같이 콘텍스트에 의존하지 않고 그 내용 전체를 언어코드에 의해서 표현한다. (9)さようなら。→さようならお元気に過ごしてください/またお会いしましょう。 (10)*그렇다면/*?그럼→그럼 안녕. 그럼 안녕히 계세요/그럼 또 뵈어요. (11)(それ)じゃ→それじゃお元気に過ごしてください/またお会いしましょう/失礼します。 (12)*그러면/*?그럼→그럼 실례 하겠습니다(가보겠습니다). (13)お先に→お先に失礼します。 (14)*먼저→먼저 실례하겠습니다. 48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15)気をつけて→気をつけてお帰りください。 (16)*조심해서→조심해서 (돌아)가세요. (17)お疲れさま→お疲れさまでした。 (18)*수고→수고하셨습니다. 세 번째로, 약속할 때나 밖에서 돌아올 때에 쓰이는 인사의 경우, 일본어에서는 (19)(21)과 같이 「また」「今度」「また今度」「只今」와 같이 부사부분만 나타내고 나머지는 콘텍스트 를 통해서 파악한다. 반면에, 한국어의 경우는 (20)(22)의 「또 다음번에 할게요/한잔해요」 와 같이 전부를 언어코드로 나타내는 경우와 「다녀왔습니다」와 같이 뒤의 부분만 나타내 는 경우가 있다9). (19)また今度→また今度にします/一杯やりましょう… (20)*또 다음번에→(?또)다음번에 할게요/한잔해요. (21)只今→只今帰りました)。 (22)*지금→(?지금)다녀왔습니다. 네 번째로, 처음 만난 자리에서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할 때 또는 오랜만에 만났 을 때 쓰이는 인사의 경우, 일본어에서는 각각 (23)(24)에서 든 것처럼 「どうぞよろしく」「ひさし ぶり」와 같이 형용사의 부사형이나 형용사의 어간부분만 나타내고 나머지 부분은 콘텍스트 로 파악한다. 한편, 한국어에서는 (24)(25)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부디)잘 부탁드립니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와 같이 모든 정보를 언어코드를 가지고 표현한다. (23)どうぞよろしく→(どうぞ)よろしくお願いします。 (24)*(부디) 잘→(부디)잘 부탁드립니다. (25)ひさしぶり→ひさしぶりにお目にかかります。 (26)*오랜만→오랜만에 뵙습니다.(오랜만입니다) 이 외에도 일본어에는 집에서 밖에 나갔다 돌아오는 사람을 맞을 때 쓰는 「お帰り」, 길 에서 만났을 때 쓰는 「これからどちらへ」, 처음 만났을 때의 인사로 쓰는 「はじめまして(「はじ めて」의 정중형)」 등 콘텍스트에 의존해서 쓰이는 정형화된 다양한 인사말들이 있다. 이들 에 대해서 한국어에서는 각각 「왔어?/다녀오셨어요?」「지금 어디 가세요?」「처음 뵙겠 습니다」 등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모두 언어코드를 가지고 표현한다10). 9) (21)에 대한 (22)의 표현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쓰는 경우에 한정된다. 즉, 일본어의 「只今」는 상하 에 관계없이 넓게 쓰이지만 한국어의 「다녀왔습니다」는 자식이 부모님이나 선생님 등 윗사람에게 또 는 부하가 상사에게 쓰이는 정도인 것 같다. 그 반대의 경우는 가족들(부인과 애들)을 향해서 「아빠 왔 다」와 같이 쓰는 경우 외에는 특별히 정해진 인사말이 없으며, 아무 말 없이 들어오면 오히려 아랫사 람이 「다녀오셨어요?」라고 말하면서 맞아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부부간에도 한 쪽이 돌아올 때 「오늘은 일찍 들어왔네?」「오늘은 많이 늦으셨네요?」「왔어?」 등 맞아주는 쪽이 먼저 말을 거는 경 우가 많다. 일본인과 한국인의 커뮤니케이션 차이 ··············································································· 강 영 부…49 (27)お帰り→お帰りなさい. (28)*돌아오→왔어?/다녀오셨어요? (29)(これから)どちらへ?→これからどちらへお出かけですか。 (30)*지금 어디로→(?지금)어디 가세요? (31)はじめまして→はじめてお目にかかります。 (32)*처음(으로)→처음(?으로)뵙겠습니다. 4.2. 「どうも」 위에서 본 인사표현과 더불어 콘텍스트 의존도가 매우 높은 일본어표현으로서 「どうも」가 있다. 鬼山(1999)는 이 「どうも」에 대해서 다의어적인 부사로 보고 단독으로 쓰일 때는 인사 표현으로서 「どうもありがとう」「どうもすみません」「どうも恐縮です」 등의 뒷부분을 생략하는 표 현이라고 말하고 있다(p.66). 한편, 李(1984)는 일본어의 사용법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일본인들은 인간에게서 머리만 남기고 나머지 손과 발을 잘라버리듯이 모두 생략해버리는, 세계에서도 희귀한 축소어를 쓰 고 있다고 주장했다. 李(1984)는 이것을 「「どうも」의 문화」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どう も」는 단순한 부사인데 일본인들은 「どうもありがとう」「どうも気の毒です」「どうもめでたい」「ど うもけしからん」 등의 본체의 의미를 잘라 없애고 「どうも」의 부분만으로 쓰기 때문에, 외국인 들에게는 왠지 이상하게 들리게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일본인들의 축 소하는 문화-즉, 「축소지향의 문화」-를 반영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pp.74-75). 이처럼 선행연구에서는 단독용법의 「どうも」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인사표현을 들어서 구체 적인 서술 부분이 생략되는 것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을 뿐이고 그것이 생략되는 이유에 대 해서도 일본문화의 관점에서 논한 李(1984) 외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앞에서도 언 급 했듯이 이러한 유형의 생략이 일본어에서만 관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단순히 일본의 축소지향이라는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는 단정할 수 없다. 본 논문에서는 위의 선행연구와 다른 입장을 취한다. 즉, 단독용법의 「どうも」가 다양한 의미를 나타내는 것은 「どうも」자체가 가지고 있는 다의성 때문이 아니라 「どうも」가 사용 되는 다양한 콘텍스트 때문이며, 뒤에 오는 구체적인 서술부분을 나타내지 않고도 「どうも」 만으로 서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것은 일본인의 경우 정보의 많은 부분을 콘텍스트에 의 존하는 문화(HC 문화)가 발달되어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11). 여기서는 「どうも」가 콘 10) (27)에 대해서 (28)과 같은 한국어를 대응시키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한국어에는 일본어와 같은 인사말 에 해당하는 정형화된 형식이 없거나 그렇게 인사하는 습관이 없는 경우도 있어서 대응관계를 나타내기 가 쉽지 않다. 즉, (27)의 경우 한국어에서는 「お帰り(なさい)」의 직역인 「돌아오너라」「돌아오세요」 와 같은 표현은 쓰고 있지 않다. 아랫사람에 대해서는 「다녀왔습니다」에 대한 대답으로 「그래」「왔 어?」 등 여러 가지 표현이 쓰이고, 윗사람에 대해서도 「다녀오셨어요?」, 부부간에도 「오늘 일찍 들 어왔네(들어오셨네요)」「왜 이렇게 늦었어?(늦으셨어요?)」 등 상황에 따라서 다양하게 쓰여서 마땅히 정형화된 표현이 없는 것 같다. 50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텍스트에 의존해서 쓰이는 예를 「사교상의 용법」과 「부정적인 판단용법」으로 크게 나누 고 각각에 대해서 상황별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4.2.1. 사교상의 용법으로서의 「どうも」 우선, 「どうも」가 사교상의 용법으로 쓰이는 것으로서는 다음의 ①~⑦에서 든 것처럼 감사, 축하, 위로, 애도, 사과, 작별 등의 예를 들 수 있다. 우선, 일본어의 경우는 (33)(35)(37)(39)(41)(43)(45)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どうも」는 콘텍스트에 따라서 「どうもあり がとう(ございます)」「どうもおめでとう(ございます)」「どうもお疲れ様です」「どうもお気の毒なことと存じま す/お悔やみ申し上げます」「どうもすみませんでした/申し訳ありませんでした」「どうも失礼(いた)します」 「どうもお世話になりました」 등의 여러 가지 의미를 나타낸다. 이처럼 일본인들은 「どうも」이하 의 다양한 표현에 대해서 언어코드를 사용하지 않고도 각각의 콘텍스트를 통해서 커뮤니케 이션이 가능하다. 이것은 일본의 HC 커뮤니케이션 문화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 다. 한편, 한국어의 경우는 (34)(36)(38)(40)(42)(44)(46)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일본어의 「どう も」의 경우처럼 「정말(대단히)」만을 사용해서 나머지 부분을 콘텍스트에 의존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각각의 콘텍스트를 언어코드 형식으로 표현해서 「정말 감사합니다」「정말 축 하드립니다」「정말 수고하셨습니다」「정말 애석하게 됐습니다/삼가 애도의 뜻를 표합니 다」「정말 죄송했습니다」「이만 실례하겠습니다」「정말 신세 많이 졌습니다」와 같이 쓰 지 않으면 안 된다. ①감사의 표현 (33)わざわざどうも。→わざわざ(来てくださって)どうも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 (34)*정말→일부러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②축하의 표현 (35)本日はどうも。→本日はどうもおめでとうございます。 (36)*오늘은 정말→(?오늘은)정말 축하드립니다. ③위로의 표현 (37)今日はどうも。→今日はどうもお疲れ様です。 (38)*정말(대단히)→오늘은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④애도의 표현 (39)この度はどうも。→この度はどうもお気の毒なことと存じます/お悔やみ申し上げます。 (40)*이번에는 정말→(?이번에는)정말 애석하게 됐습니다. ⑤사과의 표현 (41)昨日はどうも。→昨日はどうもすみませんでした。 11) 대우표현의 관점에서 보면, 「もうも」만으로는 너무 간략하며 상위자 등 경의를 표해야 하는 상대 에 대해서는 콘텍스트보다는 언어코드를 사용해서 완전한 문장으로 인사말을 사용해야 한다는 주 장도 있다. (鬼山(1976).p.100) 일본인과 한국인의 커뮤니케이션 차이 ··············································································· 강 영 부…51 (42)*어제는 정말→어제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⑥방문했다 돌아갈 때 쓰는 표현 (43)じゃ、どうも。→じゃ、どうも失礼します。 (44)*그럼 이만→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⑦신세를 많이 졌을 때 쓰는 표현 (45)その節はどうも。→その節はどうもお世話になりました。 (46)*그 때는 정말→그 때는 정말 신세 많이 졌습니다. 4.2.2. 부정적인 판단용법으로서의 「どうも」 다음으로 부정적인 판단 용법은 질문에 대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는데, 전자의 경 우는 (47)와 같이 「지식」에 대한 것, (49)와 같이 「가능」에 대한 것 등이 있고, 후자의 경우는 (51)과 같이 「일의 진척」에 대한 것 , (53)과 같이 「취향이나 일반적 상식」에 대 한 것 등이 있다. 이들도 「どうも」 이하부분인 「よくわかりません」「うまくできません」「うまくいきま せん」「好きではないんです/よくない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등에 대해서 굳이 언어코드를 사용하지 않아도 일본인들은 콘텍스트를 통해서 서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며 전혀 어색하지 않은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 판단용법의 특징은 격의 없는 사이에서는 「私はどうもね」「私にはど うもね」「仕事の方がどうもね」「個人的にはどうもね」와 같이 「~ね」의 형식으로 쓰이는 경우 가 많다는 점이다. 그런데 한국어에서는 「どうも」에 해당하는 「아무래도」「왠지」만으로 표현하고 「잘 모르겠습니다」「잘 못합니다」「잘 안 풀려서요」「좋아하지는 않습니다/바 람직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와 같은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지 않으면 불완전한 정보로 느 끼게 되며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하다. (47)私はどうも。→私はどうもよくわかりません。 (48)*저는 아무래도→저는 아무래도 잘 모르겠어요. (49)私にはどうも。→私にはどうもうまくできません。 (50)*저는 왠지→저는 왠지/어쩐지 잘 못합니다. (51)仕事のほうがどうも。→仕事のほうがどうもうまくいかなくて。 (52)*일이 왠지→일이 왠지 잘 안 풀려서요. (53)*(教室の外で生徒さんと)個人的にご一緒するのはどうも…。(Shall we ダンス?) → 個人的にご一緒するのはどうも好きではありません/よくないのではないでしょか。 (54)*(교실밖에서 수강생과)개인적으로 식사를 같이 하는 것은 아무래도… →개인적으로 식사를 같이 하는 것은 아무래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바람직하지 않을 것 같 습니다. 4.3. 「どうぞ」 선행연구에서 보면 奥山(1999)은 「남에게 차를 권하거나 물건을 제공하거나 하는 경우에 말이 짧은 만큼 몸짓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몸짓에 의한 콘텍스트의 중요성을 지적하고 있 고(p.66), 水谷他(1988)도 「「どうぞ」만으로 나머지 부분을 말하지 않는 것은 겸손한 태도를 52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나타내고 정중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どうぞ」만으로 끝나는 경우는 그 의도를 명확히 하 기 위해서 몸을 굽히거나 다른 몸짓을 사용하기도 한다」고 하면서 언어보다도 몸짓 등의 콘텍스트가 더 특별한 기능을 가진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pp.68-69). 이처럼 「どうぞ」도 앞에서 본 「どうも」와 함께 콘텍스트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한 표현이다. 한편 「どうぞ」가 콘텍스트에 의존해서 사용되는 예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러한 여러 유형에 대해서는 선 행연구에서 거의 언급이 되어있지 않다. 본문에서는 편의상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종류로 나 누어서 예를 들기로 한다. ①단독형의 「どうぞ」 ②부사구+「どうぞ」 우선 ①단독형의 「どうぞ」에 대해서는 (55)(57)(59)(61)(63)(65)(67)(69)(71)과 같이 권유를 나타내는 다양한 콘텍스트에서 사용된다. 이러한 표현이 가능한 것은 일본어에서는 「どう ぞ」라는 텍스트(text)에는 나타나지 않는 「~(て)ください」의 의미까지도 비언어적인 콘텍스 트를 통해서 파악할 수 있는 HC 문화가 형성되어있기 때문이다12). 이에 반해서 한국어에서 는 (56)(58)(60)(62)(64)(66)(68)(70)(72)와 같이 「どうぞ」에 해당하는 「어서/자」만을 사용하 고 「~(て)ください」에 해당하는 「~세요」의 의미를 콘텍스트를 통해서 파악하는 문화가 형성되어있지 않다. (55)どうぞ→どうぞあがってください/おあがりください。 (56)*어서→(어서) 올라오세요13). (57)どうぞ→どうぞ入ってください/お入りください。 12) 「どうぞ」가 항상 콘텍스트에 의존해서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다음의 (1)~(5)와 같이 화자가 전 달하고자 하는 의도를 콘텍스트를 통해서 파악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구체적인 서술부분의 일부 또는 전체를 언어코드화해서 나타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들 대부분은 「권유」라기 보다는 「부 탁」이나 「당부」를 나타내는 경우에 해당된다. 즉, 「どうか」「なにとぞ」와 유사한 의미로 쓰일 경우라 할 수 있다. (1)*どうぞ→どうぞごゆっくり(遊んでいってください)。 (2)*どうぞ→どうぞ(お体に/足下に)気をつけて(ください)。 (3)*どうぞ→どうぞお元気で(お過ごしください)。 (4)*どうぞ→どうぞ頑張ってください。 (5)*どうぞ→どうぞ(私たちに)おまかせください。 13) 여기서는 일본어의 「どうぞ」에 대해서 한국어의 「어서」를 대응시키고 있지만 실제로 「어서」 의 경우는 「どうぞ」에 비해서 손아래사람에게도 쓰일 뿐 아니라 재촉하는 느낌이 강해서 부드러 운 권유를 나타낼 경우에는 쓰이지 않는다. 그냥 「~세요」라는 형태로 쓰는 경우가 많다. 「어 서」에 이러한 특별한 어감이 있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서 여기서는 ( )로 나타내기로 한다. 그리고 「어서」와 함께 「부탁」이나 「당부」의 의미를 나타낼 때는 「부디」를 쓰는데 이들을 썼을 때 어색한 경우에는 ?를 붙인다. 일본인과 한국인의 커뮤니케이션 차이 ··············································································· 강 영 부…53 (58)*어서→(어서) 들어오세요(들어가세요). (59)どうぞ→どうぞ召し上がってください/お召し上がりください。 (60)*어서→(어서) 드세요. (61)どうぞ→どうぞ座ってください/お座りください。 (62)*어서→(어서) 앉으세요. (63)どうぞ→どうぞ(気軽に)見ていってください。 (64)*어서→(어서)(부담 갖지 마시고)보고 가세요. (65)どうぞ→どうぞご覧ください/ご覧になってください。 (66)*어서→(어서)구경하세요. (67)どうぞ→どうぞ(ご自由に)お持ち帰りください。 (68)*어서→(어서)(원하는 대로)가져가세요. (69)どうぞ→どうぞ(一度)試してみてください/お試しください。 (70)*어서→(어서)한번 입어보세요/해 보세요. (71)どうぞ→どうぞこの車に乗ってください。 (72)*어서→(어서)이 차에 타세요. 다음으로 ②부사구+「どうぞ」에 대해서는 권유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①단독형의 「どうぞ」 와 공통되나 ②부사구+「どうぞ」의 경우는 술어와 연결되는 부사구가 「どうぞ」 앞에 놓여 그 정보의 의미를 어느 정도 구체화시키고 나머지 부분의 의미를 콘텍스트를 통해서 파악한 다는 점에서 ①단독형의 「どうぞ」와 구별된다. 이에 해당하는 예는 일본어에는 다수 존재하 지만, 한국어에서는 이 경우에도 「어서/부디」 이하의 부분을 콘텍스트를 통해서 파악하는 커뮤니케이션 문화가 형성되어있지 않다. 그만큼 한국어의 「어서/부디」는 일본어의 「どう ぞ」와 비교해서 콘텍스트 의존도가 약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의 관계를 몇 가지 예를 통해서 나타내면 다음의 (73)~(86)과 같다. (73)お先にどうぞ→どうぞお先に歌ってください。 (74)*먼저 어서→(어서)먼저 부르세요. (75)私の車をどうぞ→どうぞ私の車を使ってください。 (76)*제 차를 어서→(어서)제 차(를) 쓰세요. (77)もう少しどうぞ→どうぞもう少し召し上がってください。 (78)*좀 더 어서→(어서)좀 더 드세요. (79)お土産にどうぞ→どうぞお土産にご利用ください。 (80)*선물로 어서/부디→(부디)선물로 이용해보세요. (81)今度ご家族でどうぞ→どうぞ今度ご家族でいらしてください。 (82)*다음에는 가족끼리 어서/부디→(부디)다음에는 가족끼리 오세요. (83)順番にどうぞ→どうぞ順番にお入りください。 (84)*순번대로 어서/부디→(부디)순번대로 들어와 주세요. (85)また次の機会にどうぞ→どうぞまた次の機会に挑戦してみてください。 (86)*또 다음 기회에 어서/부디→(부디)또 다음 기회에 도전해보세요. 이 이외에도 이에 해당하는 것으로서는 「私の車でどうぞ」「私の携帯でどうぞ」「あとでどう 54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ぞ」「またどうぞ」「こちらもどうぞ」「お気楽にどうぞ」「ご自由にどうぞ」「お休みの日にでもどうぞ」 「お好きなだけどうぞ」「こちらの方へどうぞ」「こちら(の控室/の喫煙室/お部屋)でどうぞ」「お手空きの 方からどうぞ」「1番のお客様からどうぞ」「お酒のおつまみにどうぞ」「借金(車)のことならこちら(の電話 番号)へどうぞ」「お子さんにどうぞ」「奥さんの分もどうぞ」「次の方どうぞ」와 같은 많은 예들이 있 다. 14) 5. 맺음말 이상, 일본과 한국은 모두 HC 문화에 속한다고 하지만 일본이 한국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언어코드보다는 콘텍스트에 의존하는 경향이 더 높은 사회(문화)에 속한다는 것과 그러한 사회 (문화)적 차이가 일본인과 한국인이 각각 커뮤니케이션을 행하는 경우에도 언어표현에 반영되고 있다는 것을 일본어의 주요 인사표현, 「どうも」「どうぞ」와 그에 대응하는 한국어 표현의 예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외에도 일본이 한국보다 콘텍스트에 의존하는 정도가 높다는 것을 뒷받침해주는 예들이 많이 존재한다. 선물을 주면서 쓰는 「つまらないものですが/つまらないものですが、どうぞお受け取りく ださい」(*변변치 않는 물건이지만/변변치 않는 물건이지만 받아주십시오), 식사를 권할 때 쓰는 「何もありませんが/何もありませんが、どうぞ召し上がってください」(*아무것도 차린 게 없지만/ 아무것도 차린 게 없지만 많이 드세요), 설명의 「そろそろ出かけないと/そろそろ出かけないといけな いな」(*슬슬 나가지 않으면/슬슬 나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 등 다양한 표현들이 많이 있다.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도 앞으로 좀더 구체적인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14) 비언어적 콘텍스트의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방법으로서 「よかったら/よろしかったらどうぞ」 「ほしかったらどうぞ」「お腹がいたくなったらこの薬をどうぞ」「危ないですから白線の内側へどうぞ」「この仕事時間 がかかりそうですからお先にどうぞ」 등 조건절이나 이유절이 앞에 오는 경우도 많다. 일본인과 한국인의 커뮤니케이션 차이 ··············································································· 강 영 부…55 【参考文献】 安部洋子他(2004) 『文化 社会 地域』東京法令出版 李御寧(1984) 『「縮み」志向の日本人』講談社文庫 池上嘉彦(2007)『日本語と日本語論』ちくま学芸文庫 石井敏 他(1999)『異文化コミュニケーション』有斐閣選書 鬼山益朗(1999)『状況分類別敬語用法辞典』東京党出版 川上郁夫他(2004) 『異文化理解と情報』東京法令出版 小池生夫編(2003) 「Ⅵ. 言語コミュニケーション」『応用言語学事典』研究社 斎藤明美(2005) 『ことばと文化の日韓比較』世界思想社 鈴木良次編(2006) 「4-4. 文化と言語」『言語科学の百科事典』丸善株式会社 鍋倉建悦(1997) 『異文化間コミュニケーション』丸善ライブラリー 日本語教育学会編(2005) 「4. ことばの運用」『新版日本語教育事典』大修館書店 野元菊雄(1988) 『日本人の言語行動』アルク 橋内武(1999) 『ディスコース』くろしお出版 長谷川勝行(1994) 『日本人の秘密』HIRA-TAI BOOKS 堀口純子(1997) 『日本語教育と会話分析』くろしお出版 牧野誠一1996)『ウチとソトの言語文化學』アルク 水谷修他(1988) 『外国人の疑問に答える日本語ノート1 ことばと生活』The Japan Times メイナード、泉子 K(1997)『談話分析の可能性:理論 方法 日本語の表現性』くろしお出版 メイナード、泉子 K(2005)『談話表現ハンドブック』くろしお出版 森本鉄郎(1985) 『日本語 表と裏』新潮社 Hall, 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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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of Computer-Mediated Communication, 11(1), article 13. 56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要 旨 本稿は、日本人と韓国人のコミュニケーションの違いについて、コンテキストに依存するか言 語コードに依存するかという面から考察したものである。 ホールは文化を低コンテキスト文化(Low Context Culture)と高コンテキスト文化(High Context Culture)の二つの文化類型に規定し、後者の上位の例として日本と韓国を順に挙げ ている。つまり、我々がコミュニケーションによって情報のやり取りをする時に、そのすべてが言語 コードによってなされるのではなく、ある部分はコンテキストに依存する形でなされわけであるが、 日本人と韓国人だけを見た場合、日本人の方が韓国人より相対的に言語コードよりもそれをとり まくコンテキストに頼る度合いが大きいということである。その代表的な例として、本稿では、挨拶 表現と「どうも」「どうぞ」の例を挙げ、韓国語との比較を行った。そして、日本人の方が韓 国人よりもコミュニケーションにおいてコンテキストに依存する傾向が強いことを明らかにした。 キーワード;日本文化、高コンテキスト文化、低コンテキスト文化、相互主体性、 異文化コミュニケーション、挨拶表現、どうも、どうぞ 투 고 : 2008. 8. 31 1차 심사 : 2008. 9. 12 2차 심사 : 2008. 9. 27 大君の結婚問題に関する一考察 ─「隔てなき心」を中心に─ 金 玉 京*1) (e-mail : [email protected]) 目 次 一 はじめに 二 源氏物語の「隔て」 三 「隔て」をめぐる薫と大君 四 大君の「隔てなき心」 五 大君の死 六 おわりに 一 はじめに 源氏物語の大君は、薫という男性の求婚を受け入れず、はかなく死んでゆく女性であ る。こうした大君のあり方は、よく「結婚拒否1)」という問題としてとりあげられ、それが第二 部の紫の上の男性不信や愛情不信から導かれたものと考えられてきた2)。しかし、晩年の 紫の上によって提起された問題は、女三宮の降嫁をきっかけに、それまでは深く考えていな * 韓南大学校 講師 平安文学専攻 1) 大君に関する多くの研究は、晩年の紫上の心情を受け継いだとする「結婚拒否」を前提にして行われてき、深沢 三千男氏の「結婚拒否は薫の〈先天的〉道心同様むしろ大君物語の前提条件なのであって、いかに拒否を維 持するかが重要な物語形成上の問題となって行った」という設問の仕方がそれを端的に表している。これは大君の 問題を「結婚拒否」に限定してしまう恐れがある。しかし、こうした立場から大君を論じる傾向は、いまだに根強 い。「宇治十帖物語の形成をめぐって」(『源氏物語の形成』桜楓社、1972、p.228)。武原弘「宇治十 帖研究序説─大君の人物像をどう把握するか─」(『国文学研究』1968、p.39)。 2) 森岡常夫「宇治の大君論」(『平安朝物語の研究増補版』風間書房、1967、p.107)、清水好子「源氏 物語の主題と方法」(『源氏物語研究と資料─古代文学論叢─』第一輯、武蔵野書院、1969、p.130) 58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かった源氏との夫婦関係における自分のはかなく不安定なあり方を実感したことによるもの で、源氏への不信そのものが物語の主な関心事ではなかった3)。大君の場合も、物語の 追求するところは、薫の気持ちに答えたいと思いながらも、それを受け入れられない大君の 心境や態度にあって、男性不信や愛情不信による「結婚拒否」そのものにあるわけでは ない。そもそも大君は薫との結婚を拒否しているのではなく、自分の置かれた境遇ゆえに結 婚をあきらめていたのである。大君が薫と結婚できないとする最大の理由は、結婚生活を 支える保護者のいない状況にあり、大君はそのことを繰り返し考えている4)。 今一つ、大君は薫と結婚できない理由として父の遺言を口にしている5)。この八宮の遺 言は、大君の「結婚拒否のモチーフ6)」ともいわれている。しかし、大君の父の遺言に従 う生き方は、妹の中の君や女房の弁の尼などの発言からも明らかなように、薫との結婚をさ ける理由としてはあまり説得力をもっていない7)。さらに大君本人も、「故宮も、さやうなる心 ばへあらばと、をりをりのたまひ思すめりしかど、(総角 240)」とあるように、父が薫と の結婚をほのめかしていたことを思い出しているなど、遺言の本意を理解している。大君は 父の遺言を自分に言い聞かせることで、あきらめた薫との結婚を自ら納得しているのであろ う。要するに、大君は父のときから親しくしてきた薫に好意を持っていながらも、自分の状況 からこの結婚は不可能だとあきらめ、その理由をあれこれ探して自らを納得しようとしていた。 決して薫との結婚を拒否しているのではない。 また、大君は薫と結婚できないと思っているものの、薫との関係をやめようとは思っていな い。「隔て」に関する大君の態度がそれをよく示している。しかし、どうして大君は薫との結 婚を避けながらも、彼と関わり続けようとするのか。 以下、本稿は「隔て」という語を中心にして、大君の薫との結婚問題におけるあり方を 3) 拙稿「孤独な紫上─若菜の源氏との対話場面─」(『日本語日本文学論叢』創刊号、2006、p.69)参考 4) 「みづからの上のもてなしは、また誰かは見あつかはむ(総角 240)」、「一ところおはせましかば、ともかくもさ るべき人にあつかはれたてまつりて、宿世というなるかたにつけて(総角 246)」など、大君は薫との結婚話に際 して、後見者のいないわが身の上を残念に思っている。─以下、源氏物語の本文引用ページは、新編日本古 典文学全集『源氏物語』による。これについては、すでに増田繁夫先生のご指摘がある。(「大君の死」 (『講座源氏物語の世界』第八集、有斐閣、1983、p.187) 5)「わが身ひとつにあらず、過ぎたまひにし御面伏に、軽々しき心ども使ひたまふな。おぼろけのよすがならで、人の言 にうちなびき、この山里をあくがれたまふな。ただ、かう人に違ひたる契りことなる身と思しなして、ここに世を尽くして んと思ひとりたまへ。(椎本 185)」 要するに、この八宮の遺言は、娘たちが宮家の人間としてその誇りを失うことなく生きることを願ったものである。 6) 野村精一「源氏物語の問題─宇治十帖の人間像(一)」(『国文学研究』1959、p.66) 7) 「一ところをのみやは、さて世にはてたまへとは聞こえたまひけむ。はかばかしくもあらぬ身のうしろめたさは、数そひた るやうにこそ思されためりしか。(総角 245)」、「故宮の御遺言違へじと思しめす方はことわりなれど、それ は、さるべき人のおはせず、品ほどならぬことやおはしまさむと思して、戒めきこえさせたまふめりしにこそ、この殿のさ やうなる心ばへものしたまはましかば、一ところをうしろやすく見おきたてまつりて、いかにうれしからましと、をりをりのた まはせしものを、(総角 249)」 大君の結婚問題に関する一考察 ················································································ 金 玉 京…59 明らかにしたい。 二 源氏物語の「隔て」 「隔て」という語は、「二つの物の間に境界を立てて、互いに見えず、行き来できなく するのが原義8)」で、空間 時間 心理的な距離を指すときに使われている。源氏物語 では、「隔て」をめぐっての様々な人間関係が描かれていて、中でも、源氏と夕顔 氏と紫の上 源 薫と大君の男女関係でもっとも多く用いられている9)。以下はこの物語に用い られている「隔て」の様相について考える。 まず、源氏と夕顔の関係における「隔て」を見てみたい。 二-1 源氏と夕顔 某院に夕顔を連れこんだ源氏は、いつまでも名前を隠して明かさない夕顔の他人行 儀な態度を恨む。要するにこの二人の関係は、互いの素姓をよく知らないながらも結ば れたという他の男女関係とは違う特殊さがある。「隔て」という語もまたこうした二人の 関係性をよく表すものとして用いられている。 げに、うちとけたまへるさま世になく、所がらまいてゆゆしきまで見えたまふ。「尽きせず隔て たまへるつらさに、あらはさじと思ひつるものを。今だに名のりしたまへ。いとむくつけし」との たまへど、「海女の子なれば」とて、さすがにうちとけぬさまいとあいだれたり。「よし、こ れもわれからなり」と恨み、かつは語らひ暮らしたまふ。(中略)たとしへなく静かなる夕の 空をながめたまひて、奥の方は暗うものむつかしと、女は思ひたれば、端の簾を上げて添ひ 臥したまへり。夕映えを見かはして、女もかかるありさまを思ひの外にあやしき心地はしなが ら、よろづの嘆き忘れてすこしうちとけゆく気色いとらうたし。つと御かたはらに添ひ暮らして、 物をいと恐ろしと思ひたるさま若う心苦し。格子とく下ろしたまひて、大殿油まゐらせて、「な ごりなくなりにたる御ありさまにて、なほ心の中の隔て残したまへるなむつらき」と恨みたまふ。 (夕顔 162~163) ここで源氏は、素姓を隠している夕顔に対して、繰り返し「隔て」という言葉を口にして いる。源氏は打ち解けているように見えながらも、自分の存在を明かさない夕顔に対していら 8) 大野晋 佐竹昭広 前田金五郎編『岩波古語辞典』(p.1150) 9) 源氏物語の「隔て」という語は、夕顔と雲居雁をめぐる内大臣と大宮親子関係、玉鬘をめぐる源氏と兵部卿宮や 須磨退去をめぐる源氏と朱雀院などの兄弟関係、あるいは源氏と内大臣、夕霧と柏木、薫と匂宮などの友人関 係、また右近と浮舟などの主従関係においても用いられていて、人間関係全般にわたって使われている。ただ、 その中でも夫婦や恋人同士の葛藤を表すのに集中的に使われている。 60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だたしさを感じ、自分の真情を訴えているのである。 さらに、夕顔の死後、夕顔の素姓を聞かされた源氏は、乳母子の右近に向かっても、 「さばかりに思ふを知らで隔てたまひしかばなむつらかりし(夕顔 184)」といったり、「我 はしか隔つる心もなかりき(夕顔 184)」といったりして、最後まで名前を隠していた夕顔 のことを恨み、自分は夕顔に対して隔てをつける気持はなく、ただ気兼の多い身の上である ため、どうしようもなかったと吐露している。 このように源氏と夕顔の場合は、男女の深い仲になったにもかかわらず、どこの誰か知ら れまいとしていた夕顔の心の距離を嘆く源氏の一方的な態度として「隔て」が繰り返され、 二人の特殊な関係性が浮かび上がってくる。 それでは、源氏と紫の上における「隔て」は、どのような用いられ方になっているのであ ろうか。 二-2 源氏と紫の上 源氏と紫の上の関係では、源氏に新しい女性問題が現れるたびに、「隔て」を契機に して、二人は互いの信頼の深さを確かめあっている。たとえば、源氏は明石の君との関係 が、うわさによって紫の上に知れ渡るのを「戯れにても心の隔てありけると思ひ疎まれたてまつ らんは、心苦しう恥づかしう(明石 259)」思い、自ら明石の君との関係を明かしてい る。そして、京の紫の上への手紙には次のように書いた。 例よりも御文こまやかに書きたまひて、奥に、「まことや、我ながら心より外なるなほざりごと にて、疎まれたてまつりしふしぶしを、思ひ出づるさへ胸いたきに、またあやしうものはかなき 夢をこそ見はべりしか。かう聞こゆる問はず語りに、隔てなき心のほどは思しあはせよ。誓ひ しことも」など書きて、 (明石 259) 源氏は、紫の上には隠し立てをしない、それは紫の上に対する心の深さを示すものであると し、自ら明石の君との関係を明かすこともそうした自分の気持の表れであると言っている。ま た、相手の紫の上もこうした源氏の気持をわかっている。たとえば、源氏の朝顔との関係が 新たに浮上し、その噂を聞いた紫の上は「さやうならむこともあらば隔てては思したらじ(朝 顔 478)」と思っている。紫の上は、源氏は自分に隠し立てをしないので、こうした女性 問題があれば、話すはずであると信じている。源氏は明石の君との場合も自ら明かしたの だから、紫の上はそう信じたいのである。しかし、今度の朝顔姫君の場合は、いろいろ言 い訳をする気色もなく、真剣な顔付きでいる。女性関係における源氏のそれまでとは違う態 度に紫の上の不安はつのる。しかも、朝顔は世間の声望も高く、源氏ともお似合いの間とし て世間の人々が言っている。源氏以外に身を寄せるところのない紫の上が不安を抱くのは 当然である。このように、「隔て」は、源氏の紫の上に対する心の深さを示すものであり、 大君の結婚問題に関する一考察 ················································································ 金 玉 京…61 紫の上もそれを信じることで、二人の関係はうまいこと維持されてきた。 ところが、女三宮の降嫁を境にして、紫の上の源氏との間における「隔て」に関する態 度は、以前とは異なってきた。というより、紫の上は、「姫宮の御事の後は、何ごとも、い と過ぎぬる方のやうにはあらず、すこし隔つる心添ひて、見知らぬやうにて(若菜上 7 9)」いた。つまり、この事件以前までの紫の上は、源氏の女性関係において隔てのない あり方で対していた。だからといって、源氏によって隔てがおかれたことを意味するのでもな い。それは源氏の「ただかく何となく過ぐる年月なれど、明け暮れの隔てなきうれしさのみこ そ、ますことなくおぼゆれ。(若菜下 208)」という言葉から確認できる。紫の上は源氏 に対して、心の壁をつくったまま、それを引きずっている反面、源氏は紫の上とはいつまでも 心の距離のない関係であると思い込んでいる。二人の関係の変化には、紫の上自らの成 長が大きく作用していて、それに気が付かない源氏との間に気持のすれ違いが生じてい る。要するに、女三宮の降嫁をきっかけに、源氏と紫の上との間には心の溝が生じてしま い、「隔て」はそうした二人の心のすれ違いを表すものとしても用いられている。 このように「隔て」という語は、主に夫婦や恋人の心のあり方を問題にするときによく使わ れていて、ときには、物語の転換に伴うものとしても重要な役割をしている。それでは、薫と 大君の関係における「隔て」は、どのように用いられているのか。 三 「隔て」をめぐる薫と大君 周知のごとく、八の宮の亡き後、薫はその娘たちを訪れ、後見役を果たしてその生活を 支える。大君は父の時から続けて付き合いをしてきた薫を大事にもてなし、いつのまにか二 人の間には親密な関係が築き上げられていた。そうする内に、薫は大君に心を寄せ始め、 「隔てなき」間柄を求めるようになる。しかし、大君は薫から「隔て」ある態度をとっている と恨まれるたびに、普通の男女としては考えられない応対の仕方をとっていると繰り返し強調し ている。 例えば、八の宮の一周忌に宇治を訪れてきた薫は、大君への恋情を訴え、それが受け 止められないと、大君に向かって「遠々しくのみもてなさせたまへば、かばかりうらなく頼みき こゆる心を違ひて恨めしくなむ」と、自分の深い信頼とは違う疎ましく他人行儀なあり方であ ると恨んでいる。それに対して大君は、次のように答えている。 違へきこえじの心にてこそは、かうまであやしき世の例なるありさまにて、隔てなくもてなしはべ れ。それを思しわかざりけるこそは、浅きこともまじりたる心地すれ。 (総角 226) ここで大君は、薫の気持に従うためにこそ、世間から噂されるほどの有り様で対応してい たのに、それをわかってくれないということは、薫の方に思慮の浅いところがあるからではない 62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かといっている。要するに大君は、薫を深く信頼している証として、女房の取次なしで薫に 応対していたのであり、そうした自分の気持が薫に理解してもらえないことに不本意さを感じて いるのである。他にも、薫が大君のもとに押し入って、つのる思いを訴えていたときにも、大 君は「かかる御心のほどを思ひよらで、あやしきまで聞こえ馴れしたるを、(総角 23 5)」と、薫の無理無体な行動を恨んでいる。さらに、八の宮の服喪の済んだ後宇治を訪 れた薫は、大君を説得させようと大君のもとへ弁の尼を送るが、その弁を前にして大君は次 のように語る。 人に似ぬ御心寄せとのみのたまひわたりしを聞きおき、今となりては、よろづに残りなく頼みき こえて、あやしきまでうちとけにたるを、思ひしに違ふさまなる御心ばへのまじりて、恨みたまふ めるこそわりなけれ。 (総角 248) 要するに大君は、現在の二人の関係は十分すぎるほど親密であると考えている。独身の 若い大君が肉親でもない薫に女房の取り次ぎなしに自分の声を聞かせて話し合うことは、当 時の男女のあり方としてありえないことであった。その意味で、大君は薫を身内同然と思って 好意を持ち、それを態度として示している。勿論大君は、薫の求めている「隔てなき」関 係に、ほぼ共感している。ただ、薫が弁に向かって、 (大君とは)ただかやうに物隔てて、言残いたるさまならず、さしむかひて、とにかくに定め なき世の物語を隔てなく聞こえて、つつみたまふ御心の隈残らずもてなしたまはむなん (総角 230) とあるように、「さしむかひて」という形には同意せず、納得もしていない。大君が空間的な距 離を置くことは、それ自体心理的な距離をつくった証であり、その空間的な壁を崩してこそ、まこと の心の「隔て」もなくなる、というのが薫の論理である。しかし、そこが大君とは違う。大君が、 自分の寝所に忍び込んだ薫に、「隔てなきとはかかるをや言ふらむ。めづらかなるわざかな(総 角 234)」とたしなめた所以がそこにある。大君は、すでに薫との間には心の壁はないとみて いる。 このように「隔て」は恋人や夫婦の間の心理的な葛藤状態を表すときによく用いられ、大君と 薫においてもそうした側面は認められる。ただ、この二人の関係における「隔て」は、単なる二 人の内的葛藤を描くためというよりも、むしろ「隔て」に対する大君の姿勢に注意すべきである。 四 大君における「隔てなき心」 大君は、薫の同じ人間としての親密な関係を強調して、「隔てなき心」を求めている言 大君の結婚問題に関する一考察 ················································································ 金 玉 京…63 葉に対しても、「かういとはしたなからで、物隔ててなど聞こえば、まことに心の隔てはさらに あるまじくなむ(総角 238)」と、物を隔てたまま対応していればこそ、心の距離も置かれ まいとしている。こうした大君の発言は薫の言いよりを逃れようとする口実ではない。二人の間 を遮断する「物隔て」を取り除くことは、世間からは結婚と見なされるもので、それは大君の 望む形ではない。 匂宮よりはじめて手紙の届いた頃から、大君は中君とちがって、「かやうのこと戯れて も、もて離れ給へる、御心深さなり(椎本 176)」と、相手に関心の対象になりうる余地 を、すこしも与えない用心深さをもっていた。これは、男女の交際や結婚を避けるためという よりも、はじめから俗世の普通の生活をあきらめていた大君の姿勢を示している。また大君 は、弁の尼に薫との結婚を勧められたときにも、 世に人めきて、あらまほしき身ならば、かかる御ことをも、何かはもて離れて思はまし。され ど、昔より、思ひ離れそめたる心にて、いと苦し (総角 248) と、頑なに結婚には思いもよらない姿勢をみせている。すでに大君は、子供の頃から没落し た家に育ったので、結婚をあきらめていた10)。その点からも、大君はいずれ出家するときの ためにも絆となる妻を持つまいとしていた薫にふさわしい相手であった。 ただ、いくら薫が道心深くて、八宮や大君のように俗世を離れた生活に憧れる存在で あっても、薫が俗世間の真っ只中に身を置いているかぎり、大君が薫と結婚することは、世 俗の中に身を置くことを意味する。大君は、宇治という俗世を離れたところで、経済的な後 援者もいない状況で薫と結婚することは、さらに苦しみを増やすことになると思った。匂宮と中 の君の結婚生活がそれを裏付けている。薫のあり方がいくら匂宮と違うといい、それを信じ ていても、大君自信の事情は少しも変わらない。そこで大君は、夫婦という社会的な観念 で結ばれた関係とは違う同じ人間としての深い心の結び付きによる関係を求めるようになっ た。「隔てなき心」に対する大君のあり方がその端的な例である。 あやしき下人をひかへてぞ御返へり賜ふ。 へだてなき心ばかりは通ふともなれし袖とはかけじとぞ思ふ11) 心あわたたしく思ひ乱れたまへる12)なごりにいとどなほなほしきを、おぼしけるままと待ち見たま ふ人は、ただあはれにぞ思ひなされたまふ。 (総角 275) 10)日向一雅氏は、大君の幼少期に詠んだ「うき水鳥の契り」の歌に、はやくから大君はわが身の境遇を憂わしいも のと思う独自な内面世界を育んできたことを指摘する。「宇治の大君─独身に徹しきった精神の品位」(『国文 学解釈と鑑賞』2004、8、p.113) 11)心にはへたてなくともなれし袖とはいひかたしと也歌は見えたるまま也(源氏物語古注集成14『岷江入楚』桜楓社、p.247) 12)ありのままに思ふすちをいひのへたるをいへり草子地の評也歌はいかなる時も心つかひあるへしと也(源氏物語古注 集成7『細流抄』おうふう、p.374) 64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これは、中の君の匂宮との結婚三日夜に薫から送られた歌に対する大君の返歌である。こ こで大君は、「へだてなき心ばかりは通ふとも」と、心だけは通じ合う関係であることをいい ながら、「なれし袖とはかけじとぞ思ふ」と、薫との間に肉体性は認めない13)。この歌は、 大君の「心あわたたしく思ひ乱れたまへる」状態で詠まれているために、あれこれ工夫して 自分の心情を何かにたとえて詠むという間接的な方法をとっていず、思ったことをそのまま纏め ただけの、歌の読み方としては「いとどなほなほしき」情趣の乏しい歌になっている。しかしそ の分、大君の薫との関係における素直な感情が吐露されていると見るべきである。 このように、二人の間に肉体的な関係を認めない大君の姿勢には、精神性を強調する 薫のあり方以上の精神性を求めていることがわかる。こうして男との間における内面性を重 視する関係を正面切って言っている女性は、この物語で大君の他に例を見ない。大君に とっては、薫との間に「隔てなき心」を維持することこそ、これまで築いてきた薫との関係を 保ちうる唯一の方法だと考えられたのである。こうした大君の薫との間の「隔てなき心」は、 果たして保たれるのであろうか。 五 大君の死 大君は中の君の不幸な結婚生活を嘆き、「いかで亡くなりなむ、と思し沈むに、心地も まことに苦しければ、物もつゆばかりまゐらず(総角 300)」状態になる。当の本人の中 の君は、匂宮との結婚生活をそれほど嘆いていないのに、大君はそれを自分のこと以上に 思いつめて、あげくは死を願うまでに至る。こうした大君のあり方は、阿闍梨から父の夢話 を聞かされている時にも、「いかで、かのまだ定まりたまはざらむさきに参でて、同じ所にもと 聞き臥したり(総角 321)」とあった。すでに大君は、「ただ亡からむ後のあらましごと (総角 300)」を朝晩思い続けていたり、薫との関係においても、「むなしくなりなむ後 の思ひ出(総角 319)」を意識したりするようになっていた。 やがて、病に臥した大君は、いよいよ出家を決心することになるが、しかしそれまた、生き 延びるための方法というよりも、死の延長としてあって、もはや薫との結婚を避けがたいと判 断しての結果であった。 みづからも、たひらかにあらむとも仏をも念じたまはばこそあらめ、なほかかるついでにいかで 13)「隔て」が歌に詠み込まれた用例は一七例で、主に「夜」や「夜の衣」などを伴って夫婦の仲のあり方を詠ん だり、「霧」「霞」などを伴って、二人の間を遮るものを表している。この大君の他に、「へだてなし」という語 が詠み込まれた歌は、尼になった女三宮の源氏への返歌「へだてなくはちすの宿を契りても君が心やすまじとすら む(鈴虫 375)」という一首のみである。また、「隔て」と「心」がともに用いられる例には、源氏の病気の 紫上に対する「契りおかむこの世ならでも蓮葉に玉ゐる露の心へだつな(若菜下 245)」という歌がある。さら に、大君物語以降、「隔て」という語が歌に詠み込まれる例は見当たらない。 大君の結婚問題に関する一考察 ················································································ 金 玉 京…65 亡せなむ、この君のかくそいゐて、残りなくなりぬるを、今はもて離れむ方なし、さりとて、か うおろかならず見ゆめる心ばへの、見劣りして我も人も見えむが、心やすからずうかるべきこ と、もし命強ひてとまらば、病にことつけて、かたちをも変へてむ、さてのみこそ、長き心をも かたみには見はつべきわざなれ、と思ひしみたまひて、 (総角 323) これは、病状の大君が、自分に付き添って懸命に看病している薫を見て思うところであ る。ここで注意すべきことは、大君の出家願望が単に薫との結婚をさけるための理由だけ ではない点である。大君は、薫の深い思いやりや優しさに触れれば触れるほど、期待が裏 切られたときの失望が大きくなることを恐れている。そして、そうならないためにも、自分には 出家以外の途は残されていないという思いがいよいよ強くなった。大君にとって出家が死と変 らないものであればこそ、大君の死は、薫との関係における「隔てなき心」を貫き通すため のものではなかったか。意図されたわけではないだろうが、大君が薫との関係で強調してき た「隔てなき心」は、結局大君の死によって成し遂げられることとなったのである。 大君の死ぬ間際に、薫に残した言葉は、 このとまりたまはむ人を、同じことと思ひきこえたまへとほのめかしきこえしに、違へたまはざらまし かば、うしろやすからましと、これのみなむ恨めしきふしにてとまりぬべうおぼえはべる (総角 327) というものであった。大君は、我が分身の中の君と結婚してくれなかった薫を恨んでいる。 大君にとって、中の君のみが死後の心残りであり、それゆえ自分は成仏できないと大君は薫 に言っている。大君が本当に男性一般に対して不信感を抱いたなら、薫を妹の中の君の 結婚相手として思ったはずもなく、最後になって薫にむかって自分の望みどおりに妹と結婚し なかったことを恨むわけがない。また、大君が匂宮の中の君への扱いを不誠実だと思ってい たことで、男性不信に陥り、さらに結婚するまいという思いを強めたとしても、それは薫という 男性には当てはまらない。 大君は結婚をあきらめていた本来の意思とともに、結婚によって俗世間のもの思いを増や したくない、もの思いの種となる結婚に踏み込みたくないと考えたのである。そして、薫と結婚 できないのなら、これまでのように、互いの気持を分かち合う間柄として、その関係を維持し ていきたい、と望むようになり、大君は最後まで薫に身をゆるすことなく、薫の見守る中で 「枯れゆくやうにて」この世を去っていったのである。 六 おわりに 以上のように、大君は薫との結婚をあきらめていながらも、「隔てなき心」を通して、薫と 66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関わり続けようとしている。大君は薫に対して、最初から精神的な結びつきを重視する関係 を希求していたというよりも、薫と築いてきた同じ人間としての親密な関係が、結婚することで 壊れてしまうのではないかを心配していた。不安感を抱きながらの生活よりは、いままでのよう に対等な関係のまま、互いを尊重しうる間柄として薫と関わり続けたいと大君は思っていたの である。大君がそう思うようになったのは、薫の結婚相手にふさわしくない自分の境遇を知っ ていたからに他ならない。 このように大君の薫に対する「隔てなき心」は、いわば、社会性を伴う夫婦という形を超 えた大君の新しい結婚観とでもいうべきものと考えられる。こうした大君と薫の関係は、いうま でもなく晩年の紫上が源氏との夫婦生活に限界を感じたことで望むようになった新たな関係に ほかならない。しかしそれは、あくまでも大君の死によってのみ可能であった。従って大君の 意味の一つには、晩年の紫上が志向していた単なる男女関係を越えた同じ人間としての深 い心の結びつきによる関係を築いたところにあると考えられる。 【参考文献】 源氏物語古注集成7『細流抄』おうふう 源氏物語古注集成14『岷江入楚』桜楓社 玉上琢彌(『源氏物語評釈』角川書店、1967) 森岡常夫「宇治の大君論」(『平安朝物語の研究増補版』風間書房、1967) 清水好子「源氏物語の主題と方法」(『源氏物語研究と資料─古代文学論叢─』 第一輯、武蔵野書院、1969) 石田穣二「大君の死について」(『源氏物語論集』桜楓社、1971) 深沢三千男「宇治十帖物語の形成をめぐって」(『源氏物語の形成』桜楓社、1972) 増田繁夫「大君の死」(『講座源氏物語の世界』第八集、有斐閣、1983) 大君の結婚問題に関する一考察 ················································································ 金 玉 京…67 要 旨 大君は薫の妻にふさわしい資格のない自分の境遇を見据えて、薫との間に社会的な側面を 重視する男女関係を断念し、より深い内面で結ばれた関係を求めるようになる。本稿は、そうし た大君の結婚に対する姿勢を「隔て」という言葉をキーワードにして考察した。源氏物語の中 で数多く用いられている「隔て」は、時間、空間、心理的な距離を表す語である。その中で 心理的距離を表す用例を調べてみると、夫婦や恋人同士の内的葛藤を表すときによく使われて いることがわかった。大君と薫の場合もそうした傾向は認められるが、しかし、他の用例とは違っ て大君の場合は、結婚に対する自己主張に近いものとしてあるのに特徴がある。それは、晩年 の紫の上と光源氏との関係における問題を深く追求した結果であると考えられる。つまり、大君 の物語では、男女不信や愛情不信によるいわゆる「結婚拒否」を問題にする次元を越えて、 より親密な心の繋がりで結ばれた人間的な男女関係による今までとは異なった結婚観を垣間見る ことができる。 キーワード;隔て、結婚拒否、男性不信、内面、死 투 고 : 2008. 8. 31 1차 심사 : 2008. 9. 12 2차 심사 : 2008. 9. 27 『源氏物語』の動物の一考察 村松正明*1) (e-mail:[email protected]) 目 次 1.はじめに 2.『源氏物語』に見える動物 3.紫の君と雀 4.女三の宮と唐猫 5.夕顔 浮舟と狐 6.おわりに 1.はじめに 『源氏物語』には「空蝉」や「胡蝶」のように、巻名として動物が用いられており、本文には、 馬 猫 狐 鹿などの獣類や、鴬 雁 時鳥 雀などの鳥類、それに蛍 蝶 蜩 鈴虫などの 虫類、氷魚などの魚類や、龍などの想像上の動物など、多種多様な動物が登場する。これら動物 は、植物とともに、各々の場面の季節感や情趣を醸し出す重要な要素となっており、各場面に立体 的な奥行きをもたらすばかりではなく、作中人物たちの心情にも少からず影響を与えており、彼らの心 情を象徴的に表したりもする。 『源氏物語』に見える動物の研究史を概観すると、先ず、喜多義勇氏が伝統的な景物としての動 物について考察を行ない、竹岡哲子氏は哺乳類や鳥類 虫類について、『枕草子』と比較しながら 考察した。また高嶋和子氏は数多くの動物について、物語の筋を追いつつ詳細に整理し、三苫浩輔 氏は巻名に見える動物について、民俗学的に魂との関係を考察した。更に、葛綿正一氏は紫と君と 雀、女三の宮と猫について、作中人物が動物へと生成変化する場面を中心に考察した1)。 *鮮文大学校 日語日本学科 教授 70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本稿は、動物が登場する場面の中でも、葛綿正一氏が考察したように、特に人が動物に、 あるいは動物が人へと変貌したかのごとく読みとれる場面について考察することにする。そこでは、動 物が登場人物の単なる比喩や象徴として描かれているのではなく、あたかも動物と人とが二重写しに なっているかのごとく読み取れるのである。それは若紫巻の光源氏が垣間見する場面における、紫の 君と雀、それに若菜上巻の柏木が垣間見する場面における、女三の宮と唐猫である。また、人が 動物に変貌したかのようには描かれてはいないが、人間に化けて騙すと信じられていた狐についても考 察することにする。それは夕顔巻の光源氏が夕顔の宿に通う場面や、廃院で物の怪が夕顔を取り殺 す場面、それに手習巻の僧都が宇治院で浮舟を発見する場面である。 なおテキストは、新編日本古典文学全集『源氏物語』(小学館)を用いた。 2.『源氏物語』に見える動物 『源氏物語』には、巻名として「空蝉」「胡蝶」「蛍」「鈴虫」などの動物が用いられてい る。「空蝉」は巻末の光源氏と空蝉の歌によるもので、「胡蝶」は紫の上と秋好中宮の贈答歌に よっている。また「蛍」は光源氏が蛍を放って蛍兵部卿宮に玉鬘の姿を見せたことや、玉鬘の歌に よるもので、「鈴虫」は女三の宮と光源氏との贈答歌によっている。このように巻名に用いられている 動物は何れも昆虫であり、全て巻中で詠まれた歌による命名である。 動物の名が作中人物の名として用いられている例は、「空蝉」と「蛍宮」、「雲居雁」の三例 だけである。「空蝉」の呼称は巻末の光源氏と空蝉の歌によるもので、「空蝉の羽におく露の木がく れてしのびしのびにぬるる袖かな」(空蝉1-p.131)と、我が身を蝉に託して詠んだ空蝉の歌のよう に、光源氏の執拗な求愛を拒み続けながら、木陰に忍び泣く人妻のイメージを表している。「蛍宮」 の呼称は光源氏が放った蛍の光で玉鬘の姿を見たことによるもので、源重之の歌「音もせで思ひにも ゆる蛍こそ鳴く虫よりもあはれなりけれ」(『後拾遺和歌集』夏-216)で、鳴き声を立てず思いの火 に燃える蛍が詠まれているように、蛍の光は玉鬘への燃える情念を象徴していると言えよう。また「雲居 雁」の呼称は夕霧との仲を裂かれて、「雲居の雁もわがごとや」(少女3-p.48)と、一人口ずさん だことによるものである。夕霧との仲を東宮に入内させようとする父によって裂かれた雲居雁は、哀愁を 伴った雁の鳴き声に思い乱れ、雲のかなたの雁に我が身をなぞらえて口ずさんだのである。 本文の中には、獣類として、馬(58) 猫(19) 狐(12) 鹿(12) 牛(3) 犬(2) 狼(2) 鼬(2)な どが、鳥類として、鴬(22) 雁(17) 時鳥(11) 水鳥(7) 鶴(5) 水鶏(4) 鷹(4) 千鳥(4) 鴛 1) 喜多義男「源氏物語と動物」(『日本文学研究資料叢書 源氏物語Ⅰ』有精堂、1969) 竹岡哲子「源氏物語に於ける動物」(『国文鶴見』6、鶴見女子大学日本文学会、1971.3) 高嶋和子『源氏物語動物考』国研出版、1999 三苫浩輔「源氏物語巻名に見える動物」(『沖縄国際大学文学部紀要 国文学篇』9-2、1981.1) 葛綿正一「源氏物語の動物」(『源氏物語講座』5、勉誠社、1991) 『源氏物語』の動物の一考察 ································································································· 村松正明…71 鴦(4)などが登場する。また虫類として、蛍(9) 蝶(9) 蜩(8) 蝉(6) 鈴虫(6) 松虫(4) 蜻蛉( 3) 蜘蛛(3)などが、魚類として、氷魚(2) 鮒(1) 鮎(1)などが登場する。更に、龍(1)や象(1)のよ うに想像上の動物も登場する2)。この中から幾つかの動物を取り上げて見てみることにする。 獣の中では「馬」が最も多く登場する。馬は主に乗り物として、特に人目を忍ぶ時や急用の時な どに使われた。例えば、光源氏が夕顔を訪れる時や、頭中将が末摘花邸を訪れる光源氏の跡をつ ける時、薫や匂宮が宇治を訪れる時などに乗馬の場面が見られる。また馬は祿や贈り物としても用い られた。例えば、光源氏の元服の際に加冠役の左大臣が帝より馬を賜っている。なお「駒」は馬の 歌語で、『枕草子』「歌の題は」でも、歌題の一つとして挙げられており、明石の入道の娘を訪 れる途中、光源氏は紫の上のことを恋しく思いつつ「秋の夜のつきげの駒よわが恋ふる雲居をかけれ 時のまも見ん」(明石2-p.255)と、思わず独り言を漏す。「つきげ(月毛)」は鴇の羽のように赤 みのある毛色のことで、光源氏は、紫の上の姿を一目見ようと、つきげの駒に空を駈けるように命じる のである。 「鹿」は『万葉集』の時代から「秋さらば今も見るごと妻恋ひに鹿鳴かむ山そ高野原の上」 (巻1-84、長皇子)のように、妻を恋しがって鳴く声が歌に詠まれてきたが、特に「奥山にもみぢ踏 みわけ鳴く鹿の声きく時ぞ秋はかなしき」(『古今和歌集』秋上-215、読人しらず)のように、秋の 悲しさを深く感じさせるものとされた。また鹿は「秋萩の散りのまがひに呼び立てて鳴くなる鹿の声の遥 けさ」(『万葉集』巻8-1550、湯原王)のように、萩と取り合わせて詠まれたりもした。『源氏物 語』では、例えば、光源氏は、山鳥がさえずりあい、花々が錦を敷いたような北山を、「鹿のたた ずみ歩くもめづらしく見たまふに、なやましさも紛れはてぬ。」(若紫1-p.219)と、鹿が歩く姿を見 て、次第に煩悶が払拭される。 鳥の中では「鴬」が最も多く登場する。鴬は春を告げ、花を愛する鳥で、『古今和歌集』の仮 名序では「花に鳴く鴬、水に住む蛙の声を聞けば、生きとし生けるもの、いづれか歌をよまざりける」 と、歌を詠むものの例として鴬と蛙が挙げられている。『源氏物語』では初音巻で、明石の君と姫 君とが「~鴬の初音きかせよ」、「~鴬の巣だちし松の根を~」(初音3-p.146)と歌をやり取りし ており、姫君を思う明石の君の親心と、母を慕う姫君の心が、鴬の声に託されて響き合っている。ま た若菜上巻では、柏木が「いかなれば花に木づたふ鴬の桜をわきてねぐらとはせぬ」(若菜上 4-p.146)と、女三の宮を「桜」に喩え、光源氏を「花に木づたふ鴬」、即ち、女性から女性へ と渡り歩く鴬に喩えて、女三の宮への愛情が薄い光源氏を批判する。 「雁」は、秋に北国から飛来して春に帰る渡り鳥で、「白雲に羽うちかはし飛ぶ雁のかずさへ見 ゆる秋の夜の月」(『古今和歌集』秋上-191、読人しらず)や、「霧たちて雁ぞ鳴くなる片岡の 朝の原は紅葉しぬらむ」(『古今和歌集』秋下-252、読人しらず)のように、しばしば月や霧と取 り合わされ、また常世の鳥ともみなされた。『源氏物語』では夕顔巻で、夕顔の家に宿った光源氏 が「白栲の衣うつ砧の音も~空とぶ雁の声とり集めて忍びがたきこと多かり。」(夕顔1-p.156) 2) 林田孝和他編『源氏物語事典』大和書房、2002、p.293 72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と、翌朝砧の音と雁の鳴き声を聞いて、秋の哀れさをしみじみと感じる。また須磨巻では、憂愁の 日々を過していた光源氏は雁の鳴き声にわびしさが触発され、「初雁は~」「~雁はその世の~」 「~なく雁を~」「~かりがねも~」(須磨2-pp.201~202)と、良清や惟光、右近将監らと歌を 唱和しつつ孤独を慰める。 「時鳥」は、四月は山里で忍び鳴きをし、五月に人里に飛来して鳴くとされていた鳥で、「五月 まつ花橘の香をかげば昔の人の袖の香ぞする」(『古今和歌集』夏-139、読人しらず)や「わ が屋戸の池の藤波咲きにけり山郭公いつか来鳴かむ」(『古今和歌集』夏-135、読人しら ず)、「ほととぎす我とはなしに卯の花の憂き世の中になきわたるらむ」(『古今和歌集』夏-164、 躬恒)のように、花橘や藤の花、卯の花などと取り合わされて詠まれた。特に、その鳴き声は懐旧や 思慕の情をかきたてた。『源氏物語』では幻巻で、紫の上を追慕する光源氏と夕霧が、花橘の香 と時鳥の声にかきたてられて、「なき人をしのぶる宵のむら雨に濡れてや来つる山ほととぎす」、「ほと とぎす君につてなんふるさとの花橘は今ぞさかりと」(幻4-pp.541~542)と、歌を詠み交わす。冥土 に通う時鳥は、光源氏父子と亡き紫の上とを結ぶ媒介となっている。 虫の中では「蛍」が最も多く登場する。蛍は夏の代表的な景物で、先に引用した源重之の歌 (『後拾遺和歌集』夏-216)や、「夕されば蛍よりけに燃ゆれども光見ねばや人のつれなき」 (『古今和歌集』恋2-562、紀友則)のように、蛍の光は燃える思いに見立てられ、恋の情念を 象徴するものとなった。『源氏物語』では蛍巻で、光源氏が一瞬の蛍火によって、玉鬘の容姿を 求婚者の蛍兵部卿宮に照らし出して見せる場面がある。光源氏の思惑どおり、蛍兵部卿宮は魂が 抜けたように感動し、「なく声もきこえぬ虫の思ひだに人の消つにはきこゆるものかは」(蛍3-p.201) と、燃える恋情を玉鬘に歌で訴える。 「蝶」は、春の歌語と考えやすいが、必ずしも春に限られたわけではなかったようである。特に花 に群れ飛ぶ蝶を模した舞いに「胡蝶の舞」があり、『源氏物語』では胡蝶巻で、秋好中宮の春 季の御読経に、紫の上が花を届けさせた際、「鳥、蝶にさうぞき分けたる童べ八人、容貌などこと にととのへさせたまひて、鳥には、銀の花瓶に桜をさし、蝶は、黄金の瓶に山吹を~」(胡蝶 3-p.171)と、鳥や蝶の装束をした女童に、それぞれ銀の瓶に生けた桜と、金の瓶に生けた山吹を 持たせ、仏に供花させる。そして鳥の装束をした女童は迦陵頻を舞い、蝶の装束をした女童は胡蝶 を舞う。 「蜩」は、夜明けと夕暮にカナカナと哀愁を帯びた鳴き声をあげる蝉で、「萩の花咲きたる野辺に ひぐらしの鳴くなるなへに秋の風吹く」(『万葉集』巻10-2231、読人しらず)のように秋の景物の 一つであり、「ひぐらしの鳴く山里の夕暮れは風よりほかにとふ人もなし」(『古今和歌集』秋上 -205、読人しらず)のように、山里の雰囲気を醸し出す。『源氏物語』では若菜下巻で、女三の 宮と柏木の密事が露見する直前、にぎやかな蜩の声に目を覚ました光源氏が、女三の宮と蜩の歌を 詠み交わす。蜩の声は密通事件発覚の前奏曲となっており、次第に「心さわがすひぐらしの声」 (若菜下4-p.249)と、光源氏の心を掻き乱す声となっていく。また幻巻では、亡き紫の上を偲びつ つ庭先の撫子を一人眺めていた光源氏が、「蜩の声はなやかなるに」(幻4-p.542)と、にぎやか 『源氏物語』の動物の一考察 ································································································· 村松正明…73 に鳴きしきる蜩の声を聞いて歌を詠む。蜩の声は光源氏の悲しみに拍車をかける役割をしている。 「松虫」と「鈴虫」は、秋の虫の代表であり、平安時代にはお互いの呼称が入れ替わっていた と言われる。鈴虫は「年経ぬる秋にもあかず鈴虫のふりゆくままに声のまされば」(『後拾遺和歌 集』秋上-268、公任)のように、鈴を「振る」と、年が「経る」が掛詞として用いられ、松虫は 「秋の野に人まつ虫の声すなり我かとゆきていざとぶらはむ」(『古今和歌集』巻4-202、読人しら ず)のように、「松」と「待つ」が掛詞として用いられた。『源氏物語』では鈴虫巻で、出家した 女三の宮に未練を抱いていた光源氏が、松虫と鈴虫について批評する。松虫については「いと隔て 心ある虫になんありける」(鈴虫4-p.382)と、人見知りをして六条院では鳴かないことに不満を抱 き、鈴虫については「鈴虫は心やすく、今めいたるこそらうたけれ」と、気安く陽気に鳴くことを推奨 する。そして「おほかたの秋をばうしと知りにしをふり棄てがたき鈴虫の声」と、鈴虫の声を女三の宮の 美しい声になぞらえて、女三の宮への未練を歌に詠み込む。 このように『源氏物語』に見える動物は、植物とともに、場面の情趣を構成する重要な要素の一 つとなっており、各場面に立体的な奥行きをもたらすだけではなく、作中人物たちの心情にも影響を与 え、さらには彼らの心情をも象徴的に表していると言えよう。 3.紫の君と雀 雀は日本各地に広く分布する鳥で、褐色と白色の雑ざった羽毛をもち、顔に大きい黒斑がある通 常の雀と、雄の頭が赤栗色で、顔に黒斑の無い「にゅうない雀」が棲息している。人里近くに棲む 鳥で、地味で目立たないけれども、古来、人々によく親しまれてきた。雀は春と夏には一つがいごと に別れて、村落や市街地に巣を作り、秋と冬には大群をなしつつ田園で生活する3)。 平安時代の法規『延喜式』(21 治部)を見ると、赤雀を上瑞、白雀を中瑞、五色の神雀と 冠雀を下瑞と規定しており、奈良や平安時代に編集された六国史には、赤雀や白雀などが献上され た記録が散見する4)。また『古事記』では、天若日子の葬儀の時、「雀を碓女と為」と、雀は 「碓女」(臼で米をつく女)として奉仕しており、これは鳥が霊魂の依代とされたこと、また鳥をトー テムとする氏族が葬儀に参加したことを示唆しているのだろう5)。 『枕草子』「鳥は」には、「頭赤き雀」と、頭の赤い雀が挙げられているが、これは頭が赤栗 色の「にゅうない雀」を指すものと思われる。また「うつきしきもの」として「雀の子のねず鳴きするにを どり来る」と、鼠の鳴き声を真似して呼ぶと、雀の子が踊るようにやって来る様子や、「へになどつけ 3) 寺山宏『和漢古典文学動物考』八坂書房、2002、p.269 4) 例えば『日本書紀』「皇極天皇、元年七月二十三日」には、蘇我入鹿の従者が白雀の子を捕まえたことや、 ある人が白雀を籠に入れて蘇我蝦夷に贈ったことなどが記されている。 5) 寺山宏、前掲書、p.271 74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てすゑたれば、親雀の虫など持て来てくくむるも、いとらうたし」と、雀の子を紐につないでおくと、親 雀が虫を持って来て、子雀の口に含ませる様子などが挙げられている。さらに「心ときめきするもの」 として「雀の子」が挙げられているが、それは孵化させて飼っている雀が無事に育つかどうか、心配 と期待の入り雑じった気持からであろう。また源通親も「おもへただ雀の雛を飼ひおきて育つるほどはか なしきものを」(『夫木和歌抄』巻27 動物)6)と、雀の子飼いを歌に詠んでおり、当時、雀の子 をペットとしてよく飼っていたものと推測される。 説話類では『今昔物語集』巻七「恵表比丘、無量義経渡震旦語第十三」が、無量義経に よって忉利天に生まれ変わる青雀の話であり、『古事談』「実方、雀となりて殿上小台盤に帰る 事」が、蔵人頭に任ぜられず、陸奥守になったことを怨んで雀に転生した藤原実方が、殿上の台 盤を食う話である7)。また『宇治拾遺物語』巻三「雀報恩の事」は、子供に腰を折られた雀が、 助けてくれた老婆に報恩するという話で、これが昔話「舌切雀」の原型となった。 『源氏物語』では、雀は、光源氏が紫の君を垣間見る場面にだけ登場する。瘧病を患った光 源氏は、加持を受けるため、三月の末に北山の聖のもとに赴く。その折り、光源氏は北山の僧都の 庵室に美しい少女を見い出す。 きよげなる大人二人ばかり、さては童べぞ出で入り遊ぶ。中に、十ばかりやあらむと見えて、(1) 白き衣、山吹などの萎えたる着て(2)走り来たる女子、あまた見えつる子どもに似るべうもあらず、(3) いみじく生ひ先見えてうつくしげなる容貌なり。髪は扇をひろげたるやうにゆらゆらとして、(4)顔はいと 赤くすりなして立てり。 「何ごとぞや。童べと腹立ちたまへるか」とて、尼君の見上げたるに、すこしおぼえたるところあ れば、子なめりと見たまふ。「雀の子を犬君が逃がしつる、(5)伏籠の中に籠めたりつるものを」と て、いと口惜しと思へり。このゐたる大人、「例の、心なしのかかるわざをしてさいなまるるこそいと心 づきなけれ。(6)いづ方へかまかりぬる、(7)いとをかしうやうやうなりつるものを。(8)烏などもこそ見つく れ」とて立ちて行く。髪ゆるるかにいと長く、めやすき人なめり。少納言の乳母とぞ人言ふめるは、 この子の後見なるべし。 尼君、「いで、(9)あな幼や。言ふかひなうものしたまふかな。おのがかく今日明日におぼゆる命 をば何とも思したらで、雀慕ひたまふほどよ。罪得ることぞと常に聞こゆるを、心憂く」とて、「こち や」と言へばついゐたり。 (10)つらつきいとろうたげにて、眉のわたりうちけぶり、いはけなくかいやりたる額つき、髪ざしいみじ ううつくし。(11)ねびゆかむさまゆかしき人かな、と目とまりたまふ。(略)幼心地にも、さすがにうちま もりて、(12)伏し目になりてうつぶしたるに、こぼれかかりたる髪つやつやとめでたう見ゆ。 (若紫1-pp.206~208) 二人の女房と女童が遊んでいるが、その中に十歳くらいで、白い単衣に山吹襲の上着を着た女 6) 源通親は平安末期から鎌倉初期の歌人で、勅撰集には『千載和歌集』以下に32首が採られている。『夫木 和歌抄』は藤原長清撰の私撰集で、延慶3年(1310)頃の成立とされており、巻27に「雀」の題を立てて10首が 収録されている。 7) 『今鏡』や『十訓抄』にも同話が収録されている。 『源氏物語』の動物の一考察 ································································································· 村松正明…75 の子は、他の子供たちとは比べものにならず、成長後の美貌が窺われる。髪は扇を広げたようにゆら ゆらとして、顔は手でこすって赤くなっている。尼君が「何事か。子供たちといさかいをしたのか」と 言って見上げた顔立ちに似たところがあるので、光源氏は娘かと思う。女の子は「雀の子を犬君が 逃がしてしまったの。伏籠の中に入れておいたのに」と言って残念がる。女房は「あのうっかり者が、 こんな不始末をして叱られるなんて、困ったものだ。雀はどこに行ったのでしょう。だんだん可愛らしく なってきたのに、烏などが見つけたら大変です」と口をはさむ。尼君が「何と子供っぽく、聞き分け が悪いですね。私が今日明日とも知れない命なのに、雀を追いかけているなんて。罰があたるといつ も言っているのに、情けない」と言い、「こちらへ」と言うと、女の子は膝をついて座る。顔つきがまこ とに愛らしくて、眉のあたりがほんのりとして、あどけなくかき上げた額の様子、髪の生え際がとてもかわ いらしい。これから成人していく様子を見届けたい人だなと、じっと見入っている。幼心にもさすがに尼 君をじっと見つめて、伏し目になってうつむいているので、こぼれかかった髪はつやつやと美しく見え る。 この垣間見の場面は、あたかも紫の君が雀の子に、或いは雀の子が紫の君に変貌したかのように 語られていると言えよう8)。先ず、紫の君と雀の子の容貌であるが、(1)「白き衣、山吹」、即ち、 白い単衣に山吹襲(表が薄朽葉、裏が黄色)の上着を着ていたが、これは腹が白くて羽が茶色 い雀に似ており、しかも「萎えたる」、即ち、糊が落ちて柔らかくなった着物は、雀の羽毛の柔らかさ につながると言えよう。また、(4)「顔はいと赤くすりなして立てり」と、泣いて手でこすって赤くなった紫 の君の顔は、頭が赤栗色の「にゅうない雀」、即ち、清少納言が好んだ「頭赤き雀」のイメージと 重なる。さらに、(2)「走り来たる女子」という紫の君の疾走ぶりは、伏籠の中から走って逃げ出した であろう雀の子の疾走ぶりを想像させ、(3)「いみじく生ひ先見えてうつくしげなる容貌」、即ち、光源 氏が想像した紫の君の成長後の美貌や、(11)「ねびゆかむさまゆかしき人」と、成長していく様を見 届けたいと光源氏に思わせた紫の君の姿は、女房が語った、(7)「いとをかしうやうやうなりつる」雀 の子、即ち、だんだんと成長して可愛らしくなってきた雀の子の姿とつながっていると言えよう。 このように紫の君と雀の子の容貌には共通点が多いが、それだけではなく、両者は置かれた境遇ま でも類似している。親鳥と離れ離れになってしまった雀の子は、(5)「伏籠の中に籠めたりつる」と、 鳥かごの代りに、本来香を焚き染めるのに使う伏籠の中に閉じ込められており、母を失った紫の君 は、本来は父兵部卿宮に引き取られるべきなのに、父宮の代りに母方の祖母である尼君に庇護され ていたのである。即ち「父兵部卿宮」が、紫の君が本来入れられるべき「鳥かご」に、「尼君」 が、代用の「伏籠」に該当するのである。 こうした容貌や境遇の類似点によって、まるで紫の君と雀の子が同化したように読み取れるのである が、実はそればかりではなく、後の物語の展開を暗示しているようにも読み取れる。例えば、女房 8) 葛綿正一氏は「物語の水準で言えば、語り手によって光源氏の視点から語られる紫君の疾走ぶりと、紫君によっ て語られる雀の疾走ぶりとはあくまでも別ものであって、一方が他方の比喩や象徴であるともいえない」としながら も、「走り抜ける雀=紫君。そして紫君と雀の子が重なり始めるやいなや、テクストはその生成変化をとめどなく肯 定していく」と述べている。前掲書、p.180 76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の、(6)「いづ方へかまかりぬる」と、雀の子の行方を案ずる言葉は、紫の君が行方不明になったこ とを父兵部卿宮に告げる場面を先取りしていると言えよう。紫の君は、父兵部卿宮に引き取られる前 夜、光源氏によって二条院に引き取られたが、父宮が紫の君の行方を尋ねるや、光源氏が厳重に 口止めしていたので、亡き尼君邸に残った女房たちは「行く方も知らず、少納言が率て隠しきこえた る」(若紫1-p.260)と、少納言が勝手に連れ出して、行方をくらましたと答えるのである。また、垣 間見の場に居合わせた女房は、(8)「烏などもこそ見つくれ」と、雀の子が烏にでも見つかったらと懸 念するが、これは紫の君(雀の子)が、光源氏(烏)の視線にさらされた垣間見を示唆すると同 時に、雀の子が烏にさらわれるように、紫の君が光源氏に略奪されて二条院に引き取られる事件をも 暗示していると言えよう。 なお、紫の君の行く末を心配した尼君は、(9)「あな幼や」と紫の君を叱り、光源氏は、(10)「つ らつきいとろうたげにて」と、紫の君の顔付きを愛らしいと思うが、このような紫の君の無邪気な幼さや 可愛さは、雀の子の幼さや可愛さと一致しており、心配のあまり泣き出す尼君を見つめて、(12)「伏 し目になりてうつぶしたる」と、しおれた紫の君の様子は、伏籠の中に閉じ込められていた雀の子の様 子を髣髴させる。 紫の君と雀の子は容貌や境遇が類似しており、あたかも紫の君が雀の子に、雀の子が紫の君に 変貌したかのように語られている。しかも、犬君が伏籠の雀の子を逃がしてしまった事件は、尼君邸で 保護されていた紫の君が光源氏によって盗み出される事件の暗示とも読みとれるのである。 4.女三の宮と唐猫 日本には古くから野生のヤマネコもいたらしいが、奈良時代のはじめごろ渡来したイエネコが飼育さ れるようになった。その渡来とは、中国から仏教伝来の際に、経典をネズミの害から守るためにネコが 添えられてきたことを指す9)。 平安時代の記録や物語などには宮中や貴族の屋敷で飼われた猫の話が見えるが、猫は主として 女性の愛玩動物として登場する10)。例えば『枕草子』「猫は」には、「猫は、表のかぎり黒く て、腹いと白き。」と、作者が背中の黒くて、腹の白い猫を好んだことが記されており、また「うえに 候ふ御猫は」には、「うえに候ふ御猫は、かうぶり給はりて、命婦のおとどとて、いとをかしければ、 かしづかせたまふが、~」と、一条天皇の傍で飼われていた猫が五位に叙せられ、「命婦のおと ど」と呼ばれて大切に養われたことが記されている11)。さらに「なまめかしきもの」には、「簀子の高 9) 鈴木日出男「猫」(『国文学 古典文学動物誌』学燈社、1994.10)p.16 寺山宏氏は、猫が平安時代に渡来したとしている。前掲書、p.354 10) 島内景二「ねこ」(秋山虔編『王朝物語辞典』東京大学出版会、2000)p.335 11)「命婦」は五位以上の女官の称で、「おとど」は婦人の敬称である。 『源氏物語』の動物の一考察 ································································································· 村松正明…77 欄のわたりに、いとをかしげなる猫の、赤き首綱に白き札つきて、いかりの緒くひつきて、引きありくも、 なまめいたる。」と、赤い首綱に縛られた猫が簀子の高欄の辺りを歩く優雅さが描かれている12)。 また『夫木和歌抄』(巻27 雑9)には「猫」と題して三首の歌があげられているが、そのうち の一首が花山天皇の御製の「敷島の大和にはあらぬ唐猫を君がためにぞもとめいでたる」である。 詞書に「三条の太皇太后宮より猫やあるとありしかば、人のもとなりしがをかしげなりしをとりて」とある が、「三条の太皇太后宮」は、父冷泉天皇の后だった晶子内親王のことで、義母から猫を依頼さ れた花山天皇は、和猫ではなく、当時特に珍重された中国伝来の「唐猫」を奉ったのである。 当時、輪廻思想は一般的なものだったようで、『更級日記』には人が猫に転生した話が記されて いる。孝標女が愛育していた猫が、姉の夢に現れ、自分は先年亡くなった侍従大納言(藤原行 成)の姫君であると告げるや、孝標女は姫君が猫に転生したものと信じこみ、大切に世話をした。ま た年を経た猫は「猫又」となり、人を食うと信じられていたようで、『徒然草』(89段)には「『奥 山に、猫またといふものありて、人を食ふなる』と、人の言ひけるに、『山ならねども、これらにも、猫 の経あがりて、猫またに成りて、人とる事はあなるものを』と言ふ者ありけるを~」と、年を経た猫が猫 又となって人を食う話が記されており、『古今著聞集』巻17「観教法印が嵯峨山庄の飼唐猫変化 の事」には、飼っていた唐猫が秘蔵の守り刀をくわえて逃げるや、人々はその猫を「魔の変化」かと 思うという逸話が記されている。このように猫に対しては、恐ろしい魔物のイメージも抱いていたようであ る。 『源氏物語』では蹴鞠の場面に猫が登場する。光源氏の四十賀や明石女御腹の皇子の産養 など、晴の儀式も一段落した頃、桜花の咲き乱れる六条院の庭で蹴鞠が催され、夕霧や柏木も参 加する。その時、女三の宮の飼っていた唐猫が大きな猫に追われて、御簾の下から走り出る。唐猫 の首につけた紐が御簾に引っ掛かり、御簾がまくれあがってしまう。はからずも御簾の傍で蹴鞠を見物 していた女三の宮は、立ち姿を柏木にさらしてしまう。 御几帳どもしどけなく引きやりつつ、人げ近く世づきてぞ見ゆるに、(1)唐猫のいと小さくをかしげなる を、(2)すこし大きなる猫追ひつづきて、(3)にはかに御簾のつまより走り出づるに、(4)人々おびえ騒ぎ てよそよそと身じろきさまよふけはひども、衣の音なひ、耳かしがましき心地す。猫は、(5)まだよく人にも なつかぬにや、(6)綱いと長くつきたりけるを、(7)物にひきかけまつはれにけるを、逃げむとひこじろふほ どに、(8)御簾のそばいとあらはに引き上げられたるを(9)とみに引きなほす人もなし。この柱のもとにあり つる人々も心あわたたしげにて、もの怖ぢしたるけはひどもなり。 几帳の際すこし入りたるほどに、袿姿にて立ちたまへる人あり。階より西の二の間の東のそばなれ ば、(10)紛れどころもなくあらはに見入れらる。紅梅にやあらむ、濃き薄きすぎすぎにあまた重なりたる けぢめはなやかに、草子のつまのやうに見えて、桜の織物の細長なるべし。御髪の裾までけざやか なお、これは藤原実資の『小右記』(長保元年九月十九日)にも「内裏の御猫、子を産む。女院、左大 臣、右大臣産養の事有り。~猫の乳母馬命婦~」と、女院(詮子)や左大臣(道長)が、宮中で生まれた 子猫に産養を行い、子猫の乳母として馬命婦が任じられたと記録されている。 12) 『古今著聞集』巻20「宰相中将の乳母が飼猫の事」にも「其猫たかさ一尺、力のつよくて綱をきりければ、 つなぐこともなくて、はなち飼けり」と記されており、当時は猫を屋内に繋ぎ飼いしていたようである。 78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に見ゆるは、糸をよりかけたるやうになびきて、裾のふさやかにそがれたる、いとうつくしげにて、(11)七 八寸ばかりぞあまりたまへる。(12)御衣の裾がちに、いと細くささやかにて、姿つき、髪のかかりたまへ るそばめ、いひ知らず(13)あてに(14)らうたげなり。夕影なれば、さやかならず奥暗き心地するも、い と飽かず口惜し。鞠に身をなぐる若君達の、花の散るを惜しみもあへぬけしきどもを見るとて、人々、 あらはをふともえ見つけぬなるべし。猫のいたくなけば、見返りたまへる面もちもてなしなど、いとおいら かにて、若くうつくしの人やとふと見えたり。(中略) わりなき心地の慰めに、猫を招き寄せてかき抱きたれば、いとかうばしくて(15)らうたげにうちなくも (16)なつかしく思ひよそへらるるぞ、すきずきしきや。 (若菜上4-p.140) 御几帳をだらしなく部屋の隅に片寄せて、すぐ傍に女房がいそうな気のするところへ、小さい唐猫を 大きな猫が追いかけてきて、急に御簾の下から走り出たので、女房たちは騒ぎ立てて身じろぎし、動 き回る様子や衣擦れの音がうるさいほどに思われる。猫は、まだ人によくなついていないのか、長い綱 がつけてあるが、それが物に引っ掛かり、まつわりついたので、逃げようと引っ張るうちに、御簾の端 が内部がはっきり見えるほどに引き開けられてしまう。すぐに直そうとする人もなく、柱の傍にいた女房た ちも慌てて、手も出せずに怖がっている。 几帳から少し奥まったあたりに袿姿で立っている人がいる。階段から二つ目の柱間の東端なので、 すっかり見通すことができる。紅梅襲で、濃い色と薄い色が幾重にも重なった色の変化も華やかで、 まるで冊子の小口のように見え、桜襲の織物の細長なのであろう。御髪が裾まではっきり見えるのは、 糸を縒りかけたように後ろに引かれており、髪の裾が切りそろえてあるのはとても可愛らしく、身の丈より も七、八寸ほど長い。着物の裾が長く余って、ほっそりと小柄で、体つきや髪の振りかかっている横 顔は上品で可憐である。夕方の薄明りで、奥の方が暗いのは残念である。蹴鞠に熱中する若君達 の、花の散るのも惜しまぬ様子を見ようと、女房たちは丸見えになっていることに気がつかない。猫がひ どく鳴くので、振り返った顔付きや態度などが、若く可愛い人だと柏木は直感する。 柏木はやるせない心の慰めに猫を抱きしめるが、移り香も芳ばしく、可愛らしい声で鳴くのも、猫が 慕わしい女三の宮のように思われるとは、何とも好色がましいことである。 この垣間見の場面は、あたかも唐猫と女三の宮が同化したかのように語られている13)。先ず、唐 猫と女三の宮の容貌である。唐猫は、(1)「唐猫のいと小さくをかしげなるを」と、小さく可愛らしい が、女三の宮も「いと御衣がちに、身もなくあえかなり」(若菜上4-p.73)と、着物に埋まってしまう 程に小柄である。また女三の宮は、(13)「あてに」と、上品で優雅に見えるが、舶来の唐猫も上品 で高級なペットである。しかも両者とも、(14)「ろうたげなり」とか、(15)「らうたげに」とかのように、 繰り返し「ろうたし」という語で形容されている。この「ろうたし」という語は「こちらが何かと世話をし ていたわってやりたい気持にかられる。また、そういう気持にさせるような相手のさま」14)という意味であ 13) 葛綿正一氏は「いたるところでテクストは、女三の宮から猫へ、猫から女三の宮へという連続変化を肯定してい る」と述べている。前掲書、p.180 14) 『日本国語大辞典』小学館、1976 鈴木日出男編『源氏物語ハンドブック』(三省堂、1998、p.192)には、「可憐だ、愛らしい、の意。弱いも の、劣ったものをかばってやりたいと思う気持ち」とある。 『源氏物語』の動物の一考察 ································································································· 村松正明…79 るが、唐猫は一貫して「ろうたし」と描写されており、女三の宮も降嫁から出家に至るまで何度も「ろ うたし」と形容されている15)。更に、唐猫は、(6)「綱いと長くつきたりける」と、長い綱につながれて 飼われているが、それは女三の宮の、(11)「七八寸ばかりぞあまりたまへる」と、身の丈よりも七八寸 程後ろに引いている長い髪や、(12)「御衣の裾がちに」と、小柄ゆえに裾を長く引いている様子など と共通している。 しかも、このような容貌だけでなく、両者は行動や状況にも共通点が見い出せる。例えば唐猫 は、(3)「にはかに御簾のつまより走り出づるに」と、突然御簾から走り出るところを柏木に見られる が、女三の宮も、(10)「紛れどころもなくあらはに見入れらる。」と、唐猫とほぼ同時に露に柏木に 姿をさらしてしまう。また唐猫は、(5)「まだよく人にもなつかぬにや」と、まだよく人になついていない が、女三の宮も六条院に降嫁してから一年ばかりで、まだそこでの生活に充分慣れていないものと思 われる16)。 このような理由から、女三の宮が唐猫に変貌したものとして、この垣間見の場面を読むと、小さくて 可愛らしい唐猫を追いかける、(2)「すこし大きなる猫」は、正妻として降嫁した若い女三の宮のことを 快からず思っている紫の上と見ることもできるし17)、或いは後に密通を謀った柏木と見ることもできよう。 また唐猫は、(7)「物にひきかけまつはれにけるを、逃げむとひこじろふほどに」と、御簾に引っ掛かっ て巻きついた綱から逃れようとするが、その様子は柏木との密通から逃れようとする女三の宮の姿を想 像させる18)。 このように垣間見の場面では、女三の宮と唐猫のイメージが重複しており、まるで女三の宮が唐猫 と成って走りぬけるような描写ぶりであるが、実はそれだけではなく、垣間見の前に起こった女三の宮 の降嫁事件や、後に起こる柏木との密通事件なども暗示していると読み解くこともできる。例えば、(2) 「すこし大きなる猫」を柏木として見ると、その大きな猫が小さな唐猫を追いかけることは、後に起こる 15) 例えば、女三の宮は「いとらうたげに幼きさまにて」(若菜上4-p.73)とか、「らうたきやうなれど」(若菜上 4-p.143)と描写されており、密通の場面でも「いとあはれにらうたげなり」(若菜下4-p.224)とか、「なつかしく らうたげに」(若菜下4-p.225)とかと描写されている。唐猫も「いとらうたくおぼえて」(若菜下4-p.157)と か、「いとらうたげになけば」(若菜下4-p.158)とか、「らうたげになくを」(若菜下4-p.158)と描写されてい る。 河添房江氏は「唐猫のイメージは、女三の宮のような高貴な女性が飼うにふさわしい、小さくて高級なペットといっ たものである」としている。(『源氏物語と東アジア世界』日本放送出版協会、2007、p.231) 16) 女三の宮が六条院に輿入れしたのは、前年の二月で、約一年一ヶ月前である。 父の朱雀院は「唐土の后の飾りを思しやりて、うるわしくことごとしく、輝くばかり調へさせたまへり」(若菜上 4-p.42)と、女三の宮の裳着を唐物の調度で盛大に催し、女三の宮の輿入れの際に、それら唐物が六条院に 運ばれるが、唐猫もその一つと推測される。 17) 島内景二氏は「小さな唐猫は女三の宮、それをいじめる大きな猫は女三の宮を快からず思っている紫の上の比 喩と解しうる」としている。前掲書、p.335 18) 女三の宮は柏木が近づくや、気が動転して恐ろしくなり、人を呼ぶが近くには誰もおらず、「わななきたまふさま、 水のやうに汗も流れて、ものもおぼえたまはぬ気色」(若菜下-p.224)と、わなわなと震えて、汗も水のように流れ て、気を失わんばかりの面持ちであった。 80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密通事件の暗示と見ることができるし、(4)「人々おびえ騒ぎてよそよそと身じろきさまよふけはひども、 衣の音なひ、耳かしがましき心地す」と、唐猫が御簾から走り出て、女房たちが驚いて動きまわる気 配や衣擦れの音がうるさいというのは、女三の宮の降嫁という六条院の秩序を、特に正妻である紫の 上の地位を脅かす事態に、紫の上や伺候する女房たちが動揺する様子と類似していると言えよう。 女三の宮の降嫁に際して、光源氏は「まだきに騒ぎて、あいなきもの恨みしたまふな」(若菜上 4-p.53)と、騒ぎ立てて嫉妬をしないようにと紫の上に言い聞かせるが、紫の上は「人笑へならむこと を下には思ひつづけたまへど」(若菜上4-p.54)と、世間の物笑いになることを怖れつつ、「対の 上も事にふれて、ただにも思されぬ世のありさまなり」(若菜上4-p.62)と、何かにつけて平静ではい られなく、伺候する女房たちも「おのがじしうち語らひ嘆かしげなるを」(若菜上4-p.66)と、めいめ いに話し合って嘆くのである。 また、(8)「御簾のそばいとあらはに引き上げられたる」と、御簾が内部がはっきり見えるくらいに引 き上げられ、(10)「紛れどころもなくあらはに見入れらる」と、露に見られたというのは、物語文学にお いて、垣間見、即ち「見る」ことは、「所有する」ことを意味するところから19)、これは後の柏木と の密通を暗示していると言える。更に、(9)「とみに引きなほす人もなし」と、引き上げられた御簾をす ぐに直そうとする人がいなかったと言うのは、密通を事前に防ごうとしたり、密通の後始末をしようとした 人がいなかったことを示していよう。 夕霧の咳払いで、女三の宮は奥に引き込み、引き上がった御簾は直される。女三の宮への恋しさ を鎮めようとした柏木が、唐猫を招き寄せて抱きあげると、女三の宮の移り香も芳しく、可愛らしい声 で鳴くので、(16)「なつかしく思ひよそへらるる」と、柏木は唐猫が女三の宮その人のように思わずに はいられなかった20)。 この後、柏木は女三の宮への叶わぬ思いに煩悶し、せめてもの慰めにと唐猫を借り受けて、女三 の宮の形代として愛玩する。柏木の情念は女三の宮から猫へと移ったのである。そして姉の落葉の 宮を妻に迎えるが、女三の宮への執着を絶ちきれない柏木は、六年後、葵祭の御禊の前日に小侍 従の手引きで女三の宮と通じる。その逢瀬の最中にも、唐猫は姿を現わす。 ただいささかまどろむともなき夢に、この手馴らしし猫のいとらうたげにうちなきて来たるを、この宮に奉 らむとてわが率て来たると思しきを、何しに奉りつらむと思ふほどにおどろきて、いかに見えつるならむと 思ふ。 (若菜下4-p.226) 柏木が少しうとうとすると、夢の中に手なずけていた猫が鳴きながら近づいて来る。柏木は女三の 19) 保戸塚朗氏は「物語における『垣間見』には、『見ること=所有すること』という神話的発想が色濃く残ってお り、男による女のかいま見は、『見る者』と『見られる者』の複雑な心理を描きつつ、恋物語の始発を形づくるう えで重要なモチーフとなる」としている。「かいまみ」(『王朝語辞典』東京大学出版会、2000、p.99) 20) 河添房江氏は「最初の垣間見では、見るという視覚だったのが、ここでは抱くという触覚、宮の移り香がはっきり と匂うという嗅覚や、鳴き声を聞くという聴覚まで広がり、まさに柏木の全感覚を揺さぶりながら、宮と唐猫が同化 し、柏木の情念を掻きたてていく」としている。前掲書、p.234 『源氏物語』の動物の一考察 ································································································· 村松正明…81 宮に返そうとして連れてきたのだが、何のために返したのだろうと考えているうちに目が覚める。そして 何故こんな夢を見たのだろうと思う。 古注釈書『岷江入楚』は、『細流抄』の「懐妊の事也」を引きつつ、「獣ヲ夢ミルハ懐胎ノ 相也」と、獣の夢は懐妊の予兆であると解釈しており、事実、女三の宮は柏木の子をみごもる。柏 木は何故唐猫を返したのか、夢の意味が分からなかったが、形代である唐猫を女三の宮に返したと いうことは、密通が成就した今、現実の女三の宮に逢えたので、もはや形代は必要なくなったことを意 味していよう。 5.夕顔 浮舟と狐 狐は古くから日本全土に棲息しており、人里にしばしば出没し、狡猾でよく人を騙す動物とされてき た21)。何か不思議な出来事が起こると、人々は狐の仕業ではないかと疑ったのである。例えば『和 名類聚抄』には「孫面曰、狐能二当妖恠一、至二百歳一化当レ女者也」と、狐はよく妖怪になり、 百歳になると女に化けるとある。また『万葉集』には狐を詠んだ歌が一首だけあり、長忌寸意吉麻 呂は「さし鍋に湯沸かせ子ども櫟津の桧橋より来む狐に浴むさむ」(巻16-3824)と、鍋に沸かした 湯を狐に浴びせると歌に詠んだ。狐を忌み嫌う歌人の気持ちが窺える歌である22)。 反面、狐は瑞獣としても珍重されたようで、『延喜式』(21 治部)では、「白狐」や「玄 狐」(赤みを帯びた黒い狐)、「九尾狐」などが祥瑞としてあげられている。例えば『続日本 紀』には、霊龜元年正月に遠江国から、また養老五年正月に甲斐国から「白狐」が朝廷に献上 され、和銅五年七月には、伊賀国から「玄狐」が献上されたことが記されている。後になって、狐 は稲荷大明神の使いで、稲荷を信ずると狐が功徳を授けると信じるようになり、遂には、稲荷大明神 そのものが狐であると信仰するに至るのである23)。 『日本霊異記』(上「狐を妻として子を生ましめし縁」)には、「狐」の語の語源説話が記さ れており、「来て寝よ」が「岐都禰」となり、やがて「狐」となったというのである。また『今昔物語 集』には変化の物としての狐の話が少なからず記されており、例えば、巻16「備中国賀陽良藤為 狐夫得観音助語第十七」は、人間と狐との婚姻と出産、そしてその破綻の話であり、巻27「高陽 川狐変女乗馬尻語四十一」は、人間に化けて失敗した狐妖の話、巻20「染殿后為天宮被嬈乱 21) ここから「狐につままれる」という言葉ができた。 22) 梶島孝雄氏は、この歌には「狐を妖獣と見なす気持が伺える」と述べ、「狐が人を化かすという言い伝えは中 国伝来のものである」として、『本朝続文粋』所収の大江匡房の「狐媚記」を挙げている。『資料日本動物 史』八坂書房、2002、p.535 23) 志村有弘氏は「京都、伏見稲荷大社の創立が、伊賀国から朝廷に玄狐が献じられた一年前の和銅四年とい うのも、霊狐信仰が成立して行く過程をうかがわせるものがある」としている。「狐」(『国文学 古典文学動 物誌』学燈社、1994.10、p.14) 82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語第七」は、染殿后に老狐がとりつく話である。『宇治拾遺物語』の「狐人に憑きてしとぎ食事」 も物の怪となった狐が人にとりつく話である。 近世に仮名草子『安倍晴明物語』や、説経節『信太妻』として語り伝えられた話は、安倍安 名が狐を助けたら、狐が人間の女性となって安名と契り、子をもうけ、その子が陰陽師として有名な 安倍晴明だという内容であり24)、室町時代の怪物退治談『玉藻前物語』は、天竺や唐土から飛 来した妖狐が美女に化現して、鳥羽上皇に寵愛される話である。美女は鳥羽院から「玉藻の前」 という名を与えられたが、陰陽師の安部泰成に正体を見破られて逃げ去り、那須野で殺されて「殺 生石」と化し、やがて玄翁和尚が法力で石を打ち砕くという話である。 『源氏物語』では、光源氏が夕顔の宿に通う場面や、荒廃した某の院で物の怪が夕顔を取り 殺す場面、横川の僧都が宇治院で怪しきものを発見する場面などで「狐」が語られている。先 ず、夕顔の宿の場面から見てみることにする。光源氏は身分が知れないよう、顔も定かには見せ ず、身をやつして夕顔の元に通う。 いとことさらめきて、御装束をもやつれたる狩の御衣を奉り、さまを変へ、顔をもほの見せたまはず、 夜深きほどに、人をしづめて出で入りなどしたまへば、昔ありけん(1)物の変化めきて、うたて思ひ嘆か るれど、(略) 「いざ、いと心やすき所にて、のどかに聞こえん」など語らひたまへば、「なほあやしう。かくのた まへど、世づかぬ御もてなしなれば、もの恐ろしくこそあれ」といと若びて言へば、げにとほほ笑まれた まひて、「げに、(2)いづれか狐なるらんな。(3)ただはかられたまへかし」となつかしげにのたまへ ば、女もいみじくなびきて、さもありぬべく思ひたり。 (夕顔1-pp.153~154) 光源氏はわざと装束も粗末な狩衣を着て、身なりを変えて、顔も見せずに、夜更けに人が寝静ま るのを待ってから出入りするので、昔話によくある物の変化めいていて、夕顔は気味が悪かったけれ ど、「気兼のいらない所でゆっくり話そう」と光源氏が誘うと、「やはり変です。普通とは違うもてなし だから、怖いのです」と子供じみた返事なので、それもそうだと笑顔になって、「どちらが狐だろう か。とにかく私に化かされていなさい」と光源氏が優しく言うと、夕顔もすっかりその気になってしまう。 (1)「物の変化」は、人間以外のものが人間の姿になって現れたもので、三輪山伝説などの神婚 説話の例があるが25)、夕顔は、身分を明かさずに人目を避けて通ってくる男に対して、昔の伝承に 出てくる「物の変化」のような印象を抱き、気味悪がるのである。そして光源氏が気兼のいらない場 所に移ろうと誘うと、夕顔は、光源氏の尋常ではないこれまでの行動から、誘いを怖がる。すると光 源氏は、(2)「いづれか狐なるらんな」と、お互いの身分を秘しての逢瀬を「狐の化かし合い」に喩 え26)、(3)「ただはかられたまへかし」と、自分に化かされてついてくるようにと誘う。夕顔は、正体の 24) 折口信夫氏は、この説話が室町期にすでに形を整えていたものとしている。「信太妻の話」(『折口信夫全 集』2、中央公論社、1955) 25) 三輪山伝説(『古事記』崇神天皇)は、大物主神を祀ってその祟りを鎮めた大田田根子が、大物主神と活 玉依毘売の神婚によって生まれた子の子孫であることを語る話である。 『源氏物語』の動物の一考察 ································································································· 村松正明…83 分からない男に連れ出されてもいいとさえ思うようになる。 このように夕顔は人目を避けて通ってくる光源氏を、物の変化かと思い、光源氏は夕顔とのお互い 身分を隠しての逢瀬を、狐の化かし合いに喩えるのである。光源氏も夕顔も、あたかも狐に成ったか のように相手を化かしつつ逢瀬を続けるのである。 次は、廃院で物の怪が夕顔を取り殺す場面である。夕顔は、廃院の荒れた門に生い茂った忍草 や、うっそうと茂った木立の景観に、不吉な運命を予感して脅える。 そのわたり近きなにがしの院におはしまし着きて、預り召し出づるほど、荒れたる門の忍ぶ草茂りて 見上げられたる、たとしへなく木暗し。(略)いといたく荒れて、人目もなくはるばると見わたされて、 木立いと疎ましくもの古りたり。(略) 宵過ぐるほど、すこし寝入りたまへるに、御枕上に(1)いとをかしげなる女ゐて、「おのがいとめでた しと見たてまつるをば尋ね思ほさで、かくことなることなき人を率ておはして時めかしたまふこそ、いとめざ ましくつらけれ」とて、この御かたはらの人をかき起こさむとすと見たまふ。(2)物に襲はるる心地して、 おどろきたまへれば、灯も消えにけり。(略) 帰り入りて探りたまへば、女君はさながら臥して、右近はかたはらにうつ伏し臥したり。「こはなぞ、 あなもの狂ほしのもの怖ぢや。荒れたる所は、(3)狐などやうのものの人おびやかさんとて、け恐ろしう 思はするならん。まろあれば、さやうのものにはおどされじ」とて引き起こしたまふ。(略) 引き動かしたまへど、なよなよとして、我にもあらぬさまなれば、いといたく若びたる人にて、(4)物に けどられぬるなめりと、せむ方なき心地したまふ。 (夕顔1-pp.159~166) 近くにある某の院に着いて、番人を呼び出す間、荒れ果てた門に軒忍が茂っているのが見上げら れ、言いようもなく木深い闇をつくっている。まったく荒れ果てていて、人影もなく遠くまで見渡され、木 立は気味の悪いくらい古びている。 宵を過ぎたころ、うとうとすると、枕元に美しい女が座って「私が立派な方と慕っているのに、訪ねよ うともせず、このように別段のこともない女を連れて可愛がるとは、実に心外で恨めしく思います」と言っ て、傍の女を引き起こそうとする、と夢を見る。何かの物に襲われるような気がして目覚めると、灯火も 消えている。 部屋に戻って手探りしてみると、夕顔はそのまま臥していて、右近は傍らにうつ伏している。「どうし たのだ。馬鹿馬鹿しい恐がりようではないか。こういう荒れた所では狐のようなものが人を脅かそうとす るのだ。私がいる以上、そんなものには脅かされないぞ」と言って右近を引き起こす。 夕顔を揺すってみたが、ぐったりして正気も失せている様子なので、ひどく子供っぽい人だから、物 の怪に気を奪われてしまったのだろうと、手の下しようのない気持である。 光源氏が少しうとうとすると、枕元に、(1)「いとをかしげなる女ゐて」と、とても美しい女が現れて、 夕顔を引き起こそうとする。その時光源氏は、(2)「物に襲はるる心地」と、物の怪に襲われるような 26) 狐が、妖狐として、美女に変じて男を惑わすものであることは、中国の文献において早くから見られ(『玄中 記』『捜神記』など)、特に唐代伝記『任氏伝』と夕顔巻との密接な関わりが指摘されている。『源氏物語 の鑑賞と基礎知識』8、至文堂、2002、p.87 84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気がして目覚める。そして(3)「狐などやうのものの人おびやかさんとて」と、狐などといったものが人を 脅かそうとしているのだと思う。夕顔を揺すってみたが、ぐったりしているので、(4)「物にけどられぬるな めり」と、物の怪に正気を奪われたと思う。 物語の作者は、荒れ果てた院の妖しさを描きながら、光源氏には感じさせなかったが、夕顔には 荒廃した院の妖気を感じさせ、不吉な運命を予感させ、脅えさせた27)。また枕元に現れた女には、 六条御息所でもあり、かつ廃院の物の怪でもあるという二重のイメージを与えつつ28)、光源氏には、 狐の仕業ではないかと思わせた。それは「狐が人をたぶらかす」という当時の認識が反映している。 その後、夕顔の四十九日の葬儀を終えた光源氏は、夢に夕顔と枕元の女が現れるや、「荒れ たりし所に棲みけんものの我に見入れけんたよりに、かくなりぬることと思し出づるにも、ゆゆしくなん」 (夕顔1-p.194)と、廃院に棲む物の怪の仕業だったと推定する。 最後に、横川の僧都が宇治院で怪しきものを発見する場面である。薫と匂宮という二人の貴公子 の板挟みとなった浮舟は、宇治川に入水を図る。一方、僧都は山籠もりしていたが、初瀬詣での帰 途に母が発病したので、下山し、宇治院で浮舟を発見する。 まづ、僧都渡りたまふ。いといたく荒れて、恐ろしげなる所かなと見たまひて、「(1)大徳たち、経 読め」などのたまふ。(略) 森かと見ゆる木の下を、疎ましげのわたりやと見入れたるに、白き物のひろごりたるぞ見ゆる。「か れは何ぞ」と、立ちとまりて、灯を明くなして見れば、もののゐたる姿なり。(2)「狐の変化したる。憎 し。見あらはさむ」とて、一人はいますこし歩みよる。いま一人は、「あな用な。(3)よからぬ物なら む」と言ひて、さやうの物退くべき印を作りつつ、さすがになほまもる。(略) 「(4)狐の人に変化するとは昔より聞けど、まだ見ぬものなり」とて、わざと下りておはす。(略) 心にさるべき真言を読み印を作りてこころみるに、しるくや思ふらん、「これは人なり。さらに非常の けしからぬ物にあらず。寄りて問へ。亡くなりたる人にはあらぬこそあめれ。もし死にたる人を棄てたりけ るが、蘇りたるか」と言ふ。「何のさる人をか、この院の中に棄てはべらむ。たとひ、まことに人なりと も、(5)狐、木霊やうのものの、あざむきて取りもて来たるにこそはべらめ。いと不便にもはべりけるか な。穢らひあるべき所にこそはべめれ」と言ひて、ありつる宿守の男を呼ぶ。(略) 「(6)狐の仕まつるなり。この木のもとになん、時々あやしきわざしはべる。(略)」「(7)狐は、さ こそは人をおびやかせど、事にもあらぬ奴」と言ふさま、いと馴れたり。(略) 僧都、「さらば、さやうの物のしたるわざか、なほよく見よ」とて、このもの怖ぢせぬ法師を寄せた れば、「(8)鬼か、神か、狐か、木霊か。かばかりの天の下の験者のおはしますには、え隠れたて まつらじ 。名のりたまへ、名のりたまへ」と 、衣をとりて引けば、顔をひき入れていよいよ泣く 。 (手習6-pp.281~284) 先ず、僧都が宇治院に出向く。ひどく荒れていて、恐ろしい所だと思い、「大徳たち、経を読 27) 死を予感した夕顔は「もの恐ろしうすごげに思ひたれば」(夕顔1-p.160)とか、「奥の方は暗うものむつかし」 (夕顔1-p.163)とか、「物をいと恐ろしと思ひたるさま」(夕顔1-p.163)とかと、次第に恐怖感を増していっ た。 28) 新編日本古典文学全集の頭注(夕顔1-p.164)は「怪異の正体は、後の源氏の推定や夕顔と御息所との人 間関係からみて、廃院に住む妖物とするべきだろうが、前後の文章は、故意に読者が妖物に御息所のイメージを 重ねて受け取るように書かれている」としている。 『源氏物語』の動物の一考察 ································································································· 村松正明…85 め」と言う。 森のように見える木陰を、気味の悪い所だと覗き込むと、白い物が広がっているのが見える。「あ れは何だ」と、立ち止まって灯を明るくして見ると、何かがいる様子である。「狐が化けたのだ。憎 い奴。正体を暴いてやるぞ」と言って、一人の僧が歩み寄る。もう一人は「やめなさい。たちの良く ない化け物だ」と言って、物の怪を退散させる印を結びながら、見つめている。 僧都は「狐が人に化けるとは昔から聞いているが、まだ見たことがない」と言って、わざわざ寝殿 から下りてくる。 心の中で呪文を唱え、印を結んで様子を見ているうちに、見極めががついたのか、僧都は「これ は人間だ。決して怪しい魔物ではない。傍に寄って尋ねてみよ。死人ではないようだ。或いは死人を 棄てておいたのが生き返ったのかもしれない」と言う。弟子の僧は「どうして死人を院の中に捨てたりし ましょうか。たとえ人だとしても、狐や木霊のような物がたぶらかして連れてきたのでしょう。まったく縁起 の悪いことです。穢れに触れる恐れがあります」と言って、番人の男を呼ぶ。 番人は「狐がしたのでしょう。この木の下で時々悪さをします」と言い、「狐はそうやって人を脅か しはするが、たわいのない奴で」と言い、とても慣れきった様子である。 僧都は「それでは、そのような狐の仕業かどうか、よく見定めよ」と言って、この物怖じしない法師 を近づけると、「鬼か、神か、狐か、木霊か。これほどの高名な験者がいるのだから、正体を隠す ことはできまい。名を名乗れ、名を名乗れ」と、衣をつかんで引っ張ると、女は顔を衣の中に隠してま すます泣く。 ある僧は木陰にいる白いものを、(2)「狐の変化したる」と、狐の化けたものだと思い、別の僧は、(3) 「よからぬ物ならむ」と、たちの悪い魔物だと思う。知らせを聞いた僧都は、(4)「狐の人に変化すると は昔より聞けど」と、狐が人に化けるとは昔から聞いていたが29)、まだ見たことがないと言って見に来る。 僧都は印を結び、真言を唱えつつ様子を見守る。もし白い物が物の怪であるならば、正体を現わ すはずであったが、何の変化もない。僧都が、白い物が人間であると見極めるや、ある僧は、(5) 「狐、木霊やうのものの、あざむきて取りもて来たるにこそはべらめ」と、狐や木霊がたぶらかして連 れてきたのだろうと語る30)。番人も、(6)「狐の仕まつるなり」と、狐がだまして連れてきたと語りつつ、 (7)「狐は、さこそは人をおびやかせど、事にもあらぬ奴」と、狐はたいした奴ではないと平然としてい る。そして僧都が、本当に狐の仕業かどうか確認するために、物怖じしない僧を近づけると、その僧 は、(8)「鬼か、神か、狐か、木霊か」と叫びながら、女の着物をつかんで引っぱり、女はますます 泣く。この女こそ宇治で失踪した浮舟である。 白い物が出現する直前、荒廃した宇治院に妖気を感じた僧都は、(1)「大徳たち、経読め」 29) 新編日本古典文学全集の付録(『源氏物語』6、p.419)は、『日本霊異記』上巻「狐ヲ妻トシテ子ヲ生 マシメシ話」、『今昔物語集』巻16-17話「備中国賀陽良藤為狐夫得観音助語」と、巻27-38話「狐変女 形値幡磨安高語」、『扶桑略記』寛平八年九月二十二日条の『善家秘記』逸文、大江匡房『狐媚 記』、『白氏文集』巻4「古キ塚ノ狐」、『捜神記』巻7などを挙げている。 30) 木霊は樹木に宿る精霊のことで、ここでは狐とともに木霊も人を欺くものとして挙げられている。 86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と、妖怪を追い払うため、僧たちに経を読ませる。ここでも作者は、夕顔巻の廃院のように、魔物が 出現しやすい怪しい雰囲気を準備したのである。最初、僧都一行は白い物を、狐の変化ではない かと疑い、それが人間であると判明するや、狐がだまして連れてきたと思う。ここにも「狐が人に化け る」、或いは「狐が人をたぶらかす」という当時の認識が反映している。 このように狐の場合は、雀や唐猫のように、実際の動物も登場していないし、作中人物が動物に 変貌したようにも描かれていない。しかし、光源氏と夕顔は、あたかも狐になったかのように、相手を化 かしつつ逢瀬を続けているし、光源氏は、狐が夕顔を取り殺したと思う。また僧都一行は、白い物 を、最初狐の変化かと疑い、それが人間と判明するや、狐がだまして連れてきたと思う。ここでの狐 は、亡き常陸宮の荒廃した邸「もとより荒れたりし宮の内、いとど狐の住み処になりて」(蓬生 1-p.327)のように、廃院や宇治院の怪奇さを助長しており、物語の作者は、荒れ果てた様子や作 中人物の恐怖心を描写することによって、狐や魔物などが出現しそうな雰囲気作りを念入りに行なって いる。 6.おわりに 『源氏物語』に見える動物たち、特に、雀と猫、狐について考察した結果、次のことが分かっ た。先ず、若紫巻の垣間見の場面は、紫の君と雀の子は容貌や境遇が類似しており、あたかも紫 の君と雀が同化したかのごとく描かれている。しかも雀を、紫の君が変貌したものとして見ると、紫の君 が現在置かれている状況や、二条院に迎えられた事件など、後に起こる出来事を暗示していると読 み解くことができる。 次に、若菜上巻の垣間見の場面では、唐猫が物語を展開させる契機となっているばかりではな く、唐猫と女三の宮の間には多くの共通点が見い出せるところから、まるで女三の宮と唐猫が同化し たかのごとく描かれている。しかも唐猫を、女三の宮が変貌したものとして見ると、先の六条院を揺さ ぶった女三の宮の降嫁事件や、柏木との密通事件など、後に起こる事件を暗示していると読み解くこ とができる。 このように二つの垣間見の場面は、人と動物が同化し、過去や現在、未来の物語を比喩的に暗 示していると読み取ることができるのであるが、狐は、人が動物に変貌したようには描かれていない。 夕顔巻では、光源氏と夕顔は、狐になったかのように相手を化かしつつ逢瀬を続け、光源氏は狐が 夕顔を取り殺したと思う。また手習巻では、僧都一行は、白い物を狐の変化かと疑い、それが人間 であると分かるや、狐がだまして連れてきたと思う。物語の作者は、何れの場面においても、狐が出 現しそうな妖しい雰囲気作りを念入りに行なっている。 『源氏物語』の動物の一考察 ································································································· 村松正明…87 【参考文献】 新編日本古典文学全集『源氏物語』1~6、小学館、1994 『源氏物語の鑑賞と基礎知識』1~43、至文堂、1998 新編日本古典文学全集『日本書紀』3、小学館、1998 日本古典文学全集『万葉集』小学館、1973 日本古典文学全集『枕草子』小学館、1974 新日本古典文学大系『古今和歌集』岩波書店、1989 新日本古典文学大系『拾遺和歌集』岩波書店、1990 新日本古典文学大系『後拾遺和歌集』岩波書店、1994 新日本古典文学大系『古事談 続古事談』岩波書店、2005 新日本古典文学大系『続日本紀』1 2、岩波書店、1989 新日本古典文学大系『今昔物語集』1~5、岩波書店、1999 片桐洋一『歌枕歌ことば辞典』角川書店、1983 『国文学 古典文学動物誌』学燈社、1994.10 秋山虔他編『源氏物語図典』小学館、1997 秋山虔他編『源氏物語必携事典』角川書店、1998 鈴木日出男編『源氏物語ハンドブック』三省堂、1998 高嶋和子『源氏物語動物考』国研出版、1999 秋山虔編『王朝語辞典』東京大学出版会、2000 寺山宏『和漢古典文学動物考』八坂書房、2002 林田孝和他編『源氏物語事典』大和書房、2002 梶島孝雄『資料日本動物史』八坂書房、2002 河添房江『源氏物語と東アジア世界』日本放送出版協会、2007 喜多義男「源氏物語と動物」(『日本文学研究資料叢書 源氏物語Ⅰ』有精堂、1969) 竹岡哲子「源氏物語に於ける動物」(『国文鶴見』6、鶴見女子大学日本文学会、1971.3) 三苫浩輔「源氏物語巻名に見える動物」(『沖縄国際大学文学部紀要 国文学篇』9-2、1981. 1) 宮崎荘平「王朝文学に猫を見た」(『国文学』学灯社、1982.9) 葛綿正一「源氏物語の動物」(『源氏物語講座』5、勉誠社、1991) 88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要 旨 『源氏物語』には四つの巻名に動物が用いられており、本文には様々な動物が登場する。これら動 物は、植物と同じく、場面の情趣を醸し出す重要な要素となっており、作中人物たちの心情にも影響を与 えつつ、彼らの心情を象徴的に表している。 本稿では、動物が登場する場面の中でも、特に、人が動物へ、或いは動物が人へと変貌したように 読みとれる場面として、若紫巻の紫の君と雀、若菜上巻の女三の宮と唐猫について、それに夕顔巻の夕 顔と狐、手習巻の浮舟と狐についても考察した。 若紫巻では、紫の君と雀が同化したかのように描かれており、しかも雀を、紫の君が変貌したものとして 見ると、紫の君が置かれている現況や、後の紫の君が二条院に迎えられる事件などを比喩的に暗示して いると読める。また若菜上巻では、唐猫が物語を展開させる契機となっているばかりではなく、女三の宮と 唐猫が同化したかのごとく描かれており、しかも唐猫を、女三の宮が変貌したものとして見ると、先の六条 院を揺さぶった女三の宮の降嫁事件や、柏木との密通事件など、後に起こる事件をも暗示していると読め る。 夕顔巻では、あたかもお互いが狐に成ったかのように、光源氏も夕顔も相手を化かしつつ逢瀬を続け、 光源氏は夕顔の死を、狐の仕業ではないかと疑う。また手習巻では、僧都一行は、初めは浮舟を狐の 変化ではないかと疑うが、それが人間であると分かるや、狐がだまして連れてきたのだと思う。物語作者 は、何れの場面においても、狐が出現しそうな妖しい雰囲気作りを入念に行なっている。 キーワード;動物、雀、唐猫、狐、変貌、同化、暗示 투 고 : 2008. 8. 31 1차 심사 : 2008. 9. 12 2차 심사 : 2008. 9. 27 『諸国ばなし』巻五の六「身を捨て油壺」 から『好色一代女』へ ―『好色一代女』の出発点に関する考察― 梁 先 希*1) (e-mail : [email protected]) 目 次 1.はじめに 2.物語 容における接点 3.構成上の接点 4.一人で暮らす女 5.「身を捨て油 」から『一代女』へ 6.おわりに 1. はじめに 貞享三(一六八六)年に刊行された『好色一代女』(以降、『一代女』と略す)は、 老女の懺悔物語の形式と、一代記風の長編小説の形式をとる。このような作品の構想には、 その内容から色道秘伝書である『たきつけ草』『けしずみ』を始め、『遊仙窟』『九相 詩』等の影響があるといわれる1)。このたび検討したところ、さらに貞享二年に刊行された『西 鶴諸国ばなし』との関連も見えてきた2)。『西鶴諸国ばなし』(貞享二年刊)巻五の六 *韓国外国語大 日本語科 講師 日本近世文学 1)『決定版対訳西鶴全集(三)』解説参照。 2)『決定版対訳西鶴全集(五)』解説は、『諸国ばなし』は、西鶴の他の作品と文章、内容の上で 共通している部分があるという。一方、宗政五十緒氏(『井原西鶴集(二)』解説、小学館) 90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身を捨て油壺」(以降、「身を捨て油壺」と略す)には、一人で暮らしてきた老女の 話が描かれている。この短篇の人物設定や主題には、『一代女』と類似点があり、前 者は後者の原形であるように思われる。そこで、本稿では、「身を捨て油壺」が『一代 女』の形象化や、その構想に与えた影響について考察したい。 2.物語内容における接点 まず、「身を捨て油壺」『一代女』のそれぞれの内容を略述し、両者の接点となる部 分を指摘することとする。 「身を捨て油壺」の内容は、次のごとくである。 河内の国の平岡の里に、昔は由緒のある人の娘で、容貌も人に勝れ、奇麗な女がいた。 この女はどういう因果か、一緒になった男はみんな死んでしまい、その男たちの数は十一人ま でとなった。その後は、女と付きあおうとする男も現れず、十八才の時から、自然に後家のよ うになってしまい、八十八才まで一人暮らしをしてきた。女は木綿作りの仕事をしているが、そ の生活は窮乏し、夜に神殿の油をぬすむまでとなる。一方、神官たちは、神殿の油がなくな るのを不思議に思い見張っていると、山姥のような鬼女が現れるのを目撃し、弓で殺してしま う。明くる朝、その死骸を見ると、例の評判の高い老女であり、誰一人も不憫に思う者はな かった。 また、『一代女』は、次のようである。 主人公は、もともとは由緒のある家に生まれ、宮仕えをしていたが、十三才の時、若い侍と 恋をしたのが発覚し、当人は宇治の実家に追放され、男は死刑となる。その後、舞子とな り、ある西国の夫婦に可愛がられ、息子の嫁に望まれるが、夫へ手を出したことから追い出 される。その後、美しい容貌であったことから大名の妾となるが、寵愛が過ぎるのを家老たち に疎まれ、実家に戻される。十六才の時、親の借金のため島原に身売りされ、太夫となる が 、 気ままな客あしらいのため評判が悪く 、 天神におとされる 。 三人の馴染みの客は没落 し、主人公は病気のために醜くなって客に見捨てられ、囲女郎にまで落ちぶれた。局女郎と なった一代女は、十三年の年季が明け、実家に帰る。その後、寺の大黒、女祐筆、町 は、『西鶴諸国ばなし』は、『好色一代男』『好色二代男』につぐ、西鶴の第三作の浮世草子と して刊行されたのであるが、制作順と刊行順とは必ずしも一致しないはずであるといい、原『好色一代 男』 原『好色二代男』 原『西鶴諸国ばなし』の成立の順序については、実証資料を欠くので述 べないが、西鶴の浮世草子諸作品の成立は、原『西鶴諸国ばなし』を原点において、この作品の諸 篇から、本書以後の諸作品は直線的に発展し、あるいは文脈の変更によって成立した、と考えるならば、 かなりの作品の成立についての理解が容易になると、指摘する。 『諸国ばなし』巻五の六「身を捨て油壺」から『好色一代女』へ ···························· 梁 先 希…91 家の腰元、武家の表使女、歌比丘尼 、お梳 、 お物師などを経て、ついに私娼に落ちぶ れ、暗物女、旅籠屋の客引き女、さらに新町で遣手となるが、そのあくどさから居づらくな り、町はずれ玉造に移る。生計に追われ、惣嫁となるが、誰も相手にしてくれる男もなく、や めてしまう。この時六十五歳であった。大雲寺に詣で、五百羅漢像を見て、昔馴染んだ男 たちを思い出し、気をうしなってしまう。広沢池に身を投げようとしたが、よしみのある人に引き 止められ、草庵に住み、念仏三昧の日を送る。 「身を捨て油壺」は短編、『一代女』は長編であり、内容面からも相当の差がある。し かし、両者には、大きく次の二点において、主題や人物設定に接点がある。 (Ⅰ)女一人で一生を過ごしてきた零落の老女が主人公であること。 (Ⅱ)両書の主人公とも、由緒ある家の娘で、天性の美貌に恵まれたこと。「身を捨 て油壺」の主人公は、過去につきあった十一人の男がみんな死んでしまうという 異常な運命にあり、『一代女』の主人公も、彼女と関係を結んだ男は死去する か、生命の危機に陥るか、または没落するなどしていること。 では、構成上にはいかなる接点があるのであろうか、次に取り上げたい。 3.構成上の接点 まず、両作品が展開される過程を対比してみよう(◎は類似点、×は相違点、☆は分 岐点)。 「身を捨て油壷」 『一代女』 ▶《発端》 × 「ひとりすぎ程、世にかなしき物はな し」と、話ははじまる。 × 「美女は命を断斧と古人もいへり」と、話 は始まり、嵯峨の庵に住む老女に、二人の若 い男が訪れ 、 彼女が語る過去の一生を聞 く、という。 ◎ 主人公は、「河内のくに、平岡の里に、 ◎ 主人公は、「そもそもいやしからず、…、 むかしはよしある人の娘 、 かたちも人にすぐれ 我自然と面子なよやかにうまれ付しとて」と 、 て、山家の花と、…」と、由緒のある家の娘 由緒のある家の子孫で 、 美貌に恵まれたこと で、美しい女であると描かれる。 が描かれる。 ◎ 主人公は、「いかなる因果にや、あいな ◎ 主人公は、「十一才の夏はじめより…」 92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れし男 、十一人迄 、 あは雪の消るごとく 、む と 、 官女となったが 、 青侍と恋愛したのが発 なしくなれば、…」と、異常な運命の女性とし 覚され、宮から追い出され、相手の男は死刑 て描かれる 。 この時、 主人公は十八才であ されたという。この時は十三才である る。 ▶《展開》 ☆ 「十八の冬より、おのづから後家立て、 ☆ 宇治の実家に追放された主人公は、 八十八になりぬ」と、主人公は、十八才から 「舞子」となる 。 「大名の妾」に選ばれ 、 一生を女一人で暮らしてきたという。 殿の寵愛をうけるが、衰弱されていく殿を心配 した家老たちによって、 主人公は追い出され る。十六才の時、家の借金のため、「島原 の太夫」となる 。 その後 、 「天神」「囲女 郎」「局 女郎」を経 て 、 「寺 の大 黒」 「女祐筆」「腰元」「表使女」「歌比丘 尼 」「お梳 」「介 添 え 女」「お物 師 」 「茶の間女」などに勤めるが 、 段々落ちぶ れ、「暗物女」「旅籠屋の客引き女」を経 て、「新町の遣手」となるが、みんなに嫌が られ 、 町はずれ玉造に移り 、「惣嫁」となる が 、 相手にされない 。 この時六十五才であ る。 ▶《結末》 × 生計を立てるために木綿作りをしていた老 × 大雲寺に詣で、五百羅漢像を見た老女 女(八十八才)は、灯火の油にことをかき、 は、昔男たちを思い出し、気をうしなう。広沢 平岡明神のお灯明の油を盗み、夜なべにして 池に投身しようとしたが、昔のよしみのある人に いた。が、結局その罪は死を招く。 とめられ 、 草庵での念仏三昧の日々をおく る。 上に、両作品の類似する箇所を示したが、相違点があるのも事実である。それは、 「身を捨て油壺」は、「姥か火」の伝説を素材にして、創り上げた不思議な世語りであ るに対し3)、『一代女』は、老女の懺悔物語 一代記という形式をとり、創られた好色物 であるためであろう。 3)延宝七(一六七九)年刊『河内鑑名所記』巻五「姥か火」には、次のようにある(『上方芸文叢 刊3』(1980)、八木書店)。 此因縁を尋に、夜る夜る平岡の明神の灯明の油を盗侍る姥有しに、明神の冥罰にやあたるらし。 彼姥なくなりて後、山のこしをとびありく光り物いてきて、折々人の目をおとろかしけるに、彼火炎の躰 ハ死しける姥か首よりしてふきいたせる火のことく見え侍る故ニ、かの姥か妄執の火にやとて、則世俗 に姥か火とこそつたへけれ。高安 恩知迄も飛行、雨けなとにハ今も出るとなり。 『諸国ばなし』巻五の六「身を捨て油壺」から『好色一代女』へ ···························· 梁 先 希…93 では何故、「身を捨て油壺」は、『一代女』の原形であるといえるのか。 両作品の内容の展開過程を三段階にわけた場合、両端の内容は異なるものの、冒頭 部の主人公に対する描写が類似している。「身を捨て油壺」では、「むかしはよしある人 の娘」とあるに対し、『一代女』は、「そもそもはいやしからず、母こそ筋なけれ、父は後 花園院の御時、殿上のまじはり近き人のすゑずゑ、世のならひとてをとろひ」と、具体化さ れているのは、前者が、長編に発展する以前の形であったことを推測させる。 また、第一節でもふれたように、両作品の主人公は、平凡な人生を歩む女性ではないこ とも合致する。両作品とも、主人公と関係をもった男たちは死去するか、落ちぶれてしまうの である。ここからも、「身を捨て油壺」から『一代女』へ発展した様子がうかがえる。 「身を捨て油壺」には、「いかなる因果にや、あいなれし男、十一人迄、あは雪の消る ごとく、むなしくなれば」とあるように、主人公が置かれた不幸な状況を、「因果」という言 葉を用い、運命であるがごとく説明している。これに対し、『一代女』は、巻一の一「老 女隠家」に、次のように記す。 初通よりして文章、命も取程に、次第々々書越ぬ。いつの比か、(一代女も)もだもだ とおもひ初、逢れぬ首尾をかしこく、それに身をまかせて、浮名の立事をやめがたく、 主人公が宮から追い出され、相手の男が死刑となった状況を、主人公の行動をもって説 明しているのである4)。つまり、主人公が置かれている状況について、具体的な原因とそれ に対応する結果を描きだす『一代女』の方が、「身を捨て油壺」より、進化した形であ ると言えるのではないだろうか。 一方、上の表で☆を付した箇所は、「身を捨て油壺」が、『一代女』へと、発展す る分岐点であると考えられる。「身を捨て油壺」の主人公の描写は、「十八の冬より、お のづから後家立て、八十八になりぬ」とあるように、十八才から八十八才までの七十年間 を後家のように暮らしたとあるだけで、他は何も描かれていない。珍奇談という性格もあり、 具体的に何かを描くより、それは想像の世界にまかせ、省略しておく方がむしろ面白いという こともあっただろう。しかし、その省かれた部分は、『一代女』に至り、存分に描写され、 それによって作品が活きている。全六巻二十四章という長編のなか、舞子(巻一の二 「舞曲遊興」)より、惣嫁(巻六の三「夜発付声」)に至る様々な職歴を記述した部 分が、「身を捨て油壺」で省かれた主人公の半生に該当すると想定されるのである5)。 4)『一代女』において、主人公の主な行動様式は、いたずらの行動、または過剰な性欲により、男たち を衰えさせ、零落させる一方、主人公の当人も落ちぶれていく(結果的に不幸な道を歩む)というので あった。たとえば、巻一の二「舞曲遊興」、巻一の三「国主艶妾」、巻二の四「諸礼女祐筆」、巻 三の一『町人腰元』、巻三の三「調謔哥船」、巻四の二『墨絵浮気袖』等々多数。 5)野間光辰氏(1983)(『刪補西鶴年譜考証』,中央公論社)は、『一代女』に対し、「正月人日、 嵯峨の好色庵に二人の若男が主の老女を訪ねて、その身の上物語を聞くといふ筋。大内の宮仕の身か 94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4.一人で暮らす女 ことに、「身を捨て油壺」が、『一代女』へと発展したと考えられるのは、『諸国ばな し』目録部、巻五の六「身を捨て油壺」には、次のごとくあるように、話の趣旨が「後 家」という一人暮らしの女にあることを表している点である。 ㊅ 身捨る油壺 後家 河内の国平岡にありし事 この点こそ、『一代女』にもっとも類似しているのである。次に、西鶴作品に描かれてい る「後家」の例を取りあげ、西鶴が「後家」をいかに捉えているのかを探ってみたい。 天和元(一六八二)年に刊行された『好色一代男』巻二の二「髪きりても捨られぬ 世」には、次のようにある。 「いたづらはやめられぬ世の中に、後家程心にしたがふものはなき」と、或人の語りぬ。 (中略)いつとなく前載は落葉に埋み、軒も葺時を忘れ、雨の洩夜、神鳴のなる時は、 ちかよりて、あたままで隠せし事、こはき夢見ては、「申々」と起せしなど、今おもへば、 独身はと悲しく、仏の道にこゝろざし、紋所の着物もうとみはてゝ、世をわたる種とて、元 来商いのとくい、殊更にあしらい、手づから十露盤をかんがえ、銀みる利発も、女は埒の あき難き事もありて、万、手代にまかすれば、いつとなく我になつて、様といふ尻声もなく、 大形は機嫌とりて、むやくしき事も、程すぎて、こゝちよき下主共の咄しより、與風こゝろ取 乱して、若きものなどゝ名の立こそおかし。 女の独り暮らしの悲しさ、辛さのため、いつのまにか、「こゝちよき下主共の咄しより、與 風こゝろ取乱して」と、手代などと、浮き名が立つようになったとある。 貞享元(一六八四)年刊『諸艶大鑑』巻五の五「彼岸参の女不思儀」には、次 のような「後家」が描かれている。 男女中に、けふの七不思儀は、二十四、五の後家と見えて、あたら黒髪を切て、風俗も 浮世を捨て、すてず。紋なし鶯茶の物を着とおもへば、下は紫鹿子のひつかへし、左に 壱本しきみをさげて、先立れしつれあひの事計おもふやうに見へしが、右の手より袖香爐出 して、下女につがせて、然も白歯なり。 ら島原の太夫となり、境遇の変化と共に次第に転落して、天神 鹿恋 寺小姓 大黒 女祐筆 腰 元 歌比丘尼 (中略)人生の暗黒面を体験して来た老女の懺悔物語である。(中略)本書の小説 的脚色を除いたものが、つまり『好色訓蒙図彙』(貞享三年刊) 『好色貝合』(同四年刊)の類 である」という。 『諸国ばなし』巻五の六「身を捨て油壺」から『好色一代女』へ ···························· 梁 先 希…95 これは、遊客が、天王寺彼岸参りする女たちを品定めする場面であるが、その最初の 対象が後家であったと記されている。「黒髪を切て」とあるが、「下は紫鹿子のひつかへ し」、「右の手より袖香爐出して、下女につがせて」とあるように色香が漂う。「然も白歯 なり」というのは、未婚の女性のように装ったというのであろう。 また、『諸国ばなし』より後年のものであるが、元禄元(一六八八)年刊『好色盛衰 記』巻五の一「後家にかゝつて仕合大臣」には、「此女に二つになる娘の行すへを思 ひやりて、若盛に後家たてすまして、身をかためけるを、今のいたづらの世にくらべて、此 人、女の鑑といへり」のように描かれた後家が、後に「こんな所は跡先のおもはく見かへら ず、木陰に立しのべは、後家手を取て引入る」とあるように、密通するありさまがある。 無論、右の例などの外、女独りの世帯であっても、その辛さを耐え、家を立派に再建し た後家の例もある6)。しかし、後家の心が乱れ、男と浮き名がたつのを、譬えた内容が、 『諸国ばなし』と同年刊『椀久一世物語』巻下の三「借着の袖はあはぬ昔」に「後家 と云ふ後家に霞のかゝらぬ後家もなし」とあるのを、注意しなければならない7)。 つまり、「後家」という語には、好色的な要素が濃厚であることがうかがえる。このこと が、「身を捨て油壺」から『一代女』へと、拡張させる一つの要因となったのではないか と、考えられるのである。 もう一つは、『好色一代男』巻三の六「木綿布子もかりの世」には、路上で客を引く 私娼の惣嫁について描いている。そこには、次のようになる。 「其所作は」と尋ける。或は縁遠き女、又は四十におよび独過の口鼻、昼はふせりて、 暮より身ごしらえして、古着をぬぎ捨、脇あけの鼠色、黒き帯にさまをかゆると、はや暗がり にてつかむ事ぞかし。(中略)見世門も明はなれ、それより足ばやに成て、露次に走入 ば、人の目をしのぶこゝろもやさし。(中略)死なれぬ命の難面くて、さりとは悲しくあさま しき事共、聞になを不便なる世や。泪は雨のふる夜は、下駄からかさまでも損料出して、 思へばかりのうら店、三十日も定なく、あそこに隠れ爰に替へて、家請の機嫌を取、小半 酒に両隣をかたぶけ、たばね木の当座買、頓而立きゆる煙なるべし。夜発の輩、一日ぐ らし、月雪のふる事も盆も正月もしらず。 6)『日本永代蔵』巻一の五「世は欲の入札に仕合」には、夫の死後、多額の借金が残され、しだい に貧しくなった家を、後家の知恵で再び興した内容が描かれている。 7) 「後家」について、『西鶴大矢数』巻一には、次のような例がみえる(『定本西鶴全集(第十一 巻下)』中央公論社)。 52遖乗たり春の山道 (第六) 53よい声で諷ふた所引霞 54人目も耻よ後家のいたづら 前田金五郎著(1986)『西鶴大矢数注釈(第一巻)』(勉誠社)によると、53の句の付合は、 「乗たり」→「諷ふた」、「春」→「引霞」であり、54の句の場合は、「霞」→「後家のいたづ ら」であって、54の句意は、「(前句を、よい声で諷っている所へ盃を取らせ、文字通り飲めや諷え のありさまである、と解釈し)、そんな遊興をして、人目を恥じなさいよ、後家の色事に」という。 96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惣嫁に勤める女たちを描写したなかに、「或は縁遠き女、又は四十におよび独過の口 鼻」とあるのに気づく。前述したように、「身を捨て油壺」の主人公が、十八才からは男 との縁もなく、独り暮らしの女となったのが想起されるくだりである。つまりここは、「身を捨て 油壺」の主人公が、独り暮らしの生計のため、惣嫁のような仕事に勤めたのかもしれない 可能性を想像させる場面となっているわけである。 以上、「身を捨て油壺」には、『一代女』へ発展されたと想定される面が潜んでいる のである。 5.「身を捨て油壷」から『一代女』へ 短篇の「身を捨て油壺」から長篇の『一代女』へと、その構想が発展している可能性 を述べてきたが、ここでは、その点について若干補足しておきたい。 まず『一代女』の構想から確認しておく。 ア、老女の過去を回想する懺悔物語の形式であること。 イ、女の一代記の形式であること。 老女の懺悔物語という構想は、先行文学に見られる懺悔物の形式を踏襲したものとさ れ、『七人比丘尼』『二人比丘尼』などに近い性格をもつといわれているが、直接的な 影響は、色道の秘伝書である、延宝五年刊の『たきつけ草』『けしずみ』から受けてい るとされる。それは、冒頭部分で、二人の若者の問答を、作者とおもわれる第三者が書き とめている様子は、『たきつけ草』に通じ、以前は遊女であった老尼から色道の話を聞くと いう形式は、『けしずみ』と同趣であるためである。その外にも、用字や趣向の上で、 『遊仙窟』『九相詩』などの影響がうかがえるとされる8)。 さて、女の一代記なる形式の構想については、先行作品の『一代男』と対比されること が指摘される一方9)、横山重氏(『好色一代女』一九八五年、岩波書店所収)は、 『椀久一世の物語』は実在の蕩児を描き、『好色五人女』は巷説に基づき、市井の 女性の恋愛事件を描いていることからも、西鶴の関心が一般社会に向けられており、一女 性の運命を描こうとしたのが、『一代女』を生むに至ったとする。 その上、『一代女』の主人公を、次のごとき職業につかせたのは、延宝六年成立の 『色道大鏡』巻十四「雑女部」10)、延宝九年刊行の『都風俗鑑』、また貞享三年 8)(注1)と同書には、その他、『玉造小町子壮衰書』や、謡曲「関寺小町」「卒塔婆小町」な どの影響も指摘される。 9)(注1)と同書及び、『井原西鶴集』(一)小学館、解説。 10)たとえば、『色道大鏡』巻十四「雑女部」には、次のような、職業の女性の生態が記述されている。 『諸国ばなし』巻五の六「身を捨て油壺」から『好色一代女』へ ···························· 梁 先 希…97 刊行の『好色訓蒙図彙』などの好色風俗の案内書の影響があり、また時代の好尚が あったためであるとする11)。 舞子、武家の妾、島原の太夫、島原の天神 囲女郎、新町の局女郎、若衆姿の寺 小姓 世間寺の大黒、女寺子の師匠、町人の腰元、大名の奥女中、歌比丘尼、武 家屋敷の女髪結、嫁入りの介添女、武家屋敷の裁縫女 町方の仕立物屋、武家屋 敷の茶の間女、 町方の中居女、 茶屋女 町人妾 、 風呂屋女、 扇屋の女房 糸繰 女 二瀬女、 蓮葉女、 暗物と据物(私娼)、 茶屋女(古市) 出女、 新町の遣 手 夜発 『一代女』の構想に影響を与えた作品に関しては、上のような内容が通説となっており、 首肯すべき説であると思われる。そうであるならば、何故、「身を捨て油壺」と『一代 女』との関連性は、今まで問題にされてこなかったのだろうか。それは、「身を捨て油 壺」が「姥か火」の伝説によった作品であるため、話の内容の半分が、それで占められ ていることなどが、理由として挙げられよう。 しかしながら、前述したように、独身女性の一生、しかも零落した老女を描いた、「身を 捨て油壺」と『一代女』の共通点を見逃してはならない。横山重氏の意見とも重なるが、 前述した通り、『一代男』では「惣嫁」に勤める女たちの描写のなかに、一生を独身で 過ごす女性が見られる。当時の社会においてそういった女性の存在が西鶴の目にとまり、 それが「身を捨て油壺」において主題として取りあげられ、『一代女』に至って、女一人 の一生という長編となり完結されたのであろう。つまり、『一代女』に対する構想は、『椀 久一世の物語』、『好色五人女』の完成の後に芽生えたというよりは、それ以前の、 『諸国ばなし』巻五の六「身を捨て油壺」を書き上げたときから存在したのではないかと考 えられるのである。 6.おわりに 『諸国ばなし』と『一代女』は、刊行年代が一年しか隔たらないことから考えてみて も、「身を捨て油壺」の内容や主題は、『一代女』を執筆していた作者の脳裏にあった と考えられる。多種多様の話を扱う『諸国ばなし』のなかで「身を捨て油壺」は、美女で 妻女、妾、扶助妾、月切女、出合者、寡婦、後家、腰本、御物師、半物付中居女、問屋 破須波、乳母、風呂女、茶屋女、旅籠屋女、比丘尼、熊野比丘尼、釜祓、瞽女、舞子、 鹿子結、糸屋者、扇屋弟子、綿帽子売、釣者、曹伽 11) 横山重校訂(1985)『好色一代女』(岩波書店)など、前掲の注釈書の解説。 98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ありながら、縁をむすんだすべての男達が死去するなど、結局ひとり暮らしをしてきた老女の 話であり、好色性がうかがえる「後家」という語が話の趣旨となっている。それゆえ、「身 を捨て油壺」は、好色物の『一代女』に発展する可能性を充分もっていたと言っても過言 ではないだろう。 なお、『諸国ばなし』と、それ以降の作品との関連性が指摘されているが12)、『一代 女』との関連性をも視野に入れ、検討すべきであろうことを最後に付け加えておきたい。 【参考文献】 『井原西鶴集(二)』小学館 『仮名草子集』「新日本古典文学大系74」(1991), 岩波書店 「河内鑑名所記(巻五)」『上方芸文叢刊3』(1980), 八木書店. p.478-479 『決定版対訳西鶴全集(三)』明治書院 『決定版対訳西鶴全集(五)』明治書院 『決定版対訳西鶴全集(十二)』明治書院 「好色物草子集」『近世文芸資料第十』(1968), 古典文庫 『定本西鶴全集(第十一巻下)』中央公論社. p.76 野間光辰編(1961)『完本色道大鏡』友山文庫. p.435-473 ――― (1983)『刪補西鶴年譜考証』, 中央公論社. p.321 前田金五郎(1986)『西鶴大矢数注釈(第一巻)』, 勉誠社. .p.372 吉江久弥(1964)「『本朝櫻陰比事』の原拠に西鶴自身のものがある」『近世文芸』第 十号, 日本近世文学会. p.21-26 横山重校訂(1985)『好色一代女』, 岩波書店 12)たとえば、『櫻陰比事』巻一の四「太鼓の中はしらぬが因果」のプロットや文章表現は、『西鶴諸 国ばなし』巻一の三「大晦日はあはぬ算用」のそれに酷似しており、前者は後者に拠ったものである、と いう吉江久弥氏(1964)「『本朝櫻陰比事』の原拠に西鶴自身のものがある」(『近世文芸』第十 号)がある。 『諸国ばなし』巻五の六「身を捨て油壺」から『好色一代女』へ ···························· 梁 先 希…99 要 旨 本論は、『好色一代女』と、それ以前に刊行された『西鶴諸国ばなし』巻五の六 「身を捨て油壺」との関連性を考察した。『一代女』の構想は、古典や先行書などの 影響があると言われてきた。たとえば、『一代女』巻一の一「老女隠家」の発端の部分 が、色道秘伝書の『たきつけ草』『けしずみ』と同じ趣向であることは定説化されてい る。しかし、その他の作品との関連性は未だ十分には論じられていない。このたびの考察の 結果、「身を捨て油壺」の人物設定や主題が、『一代女』のそれと、類似することが 判明した。それらを手がかりにし、『一代女』の原形が、『諸国ばなし』巻五の六であっ た可能性について論じた。巻五の六「身を捨て油壺」が、女一人で一生を暮らしてきた 老女の話であること、さらに話の趣旨が好色性がつよい「後家」にあることなどは、好色 物の長編『一代女』への発展をうかがわせるものであった。『諸国ばなし』刊行の一年 後、『一代女』が出版されたことを考えても、前者は、後者の構想に関係したと考えるべ きであろう。 キーワード;一代女、後家、好色性、一人暮らし、老女、原形 투 고 : 2008. 8. 31 1차 심사 : 2008. 9. 12 2차 심사 : 2008. 9. 27 일본계 미국문학에 반영된 태평양 전쟁 안 임수*1) (e-mail : [email protected]) 目 次 Ⅰ. Ⅱ. Ⅲ. Ⅳ. 들어가며 태평양전쟁 일본계 미국소설에 나타난 태평양전쟁 나오며 I. 들어가며 세계 각국의 인종이 모여 다름 속에서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이 라는 공동의 목표를 지향하는 나라가 미국이다. 처음 미국을 구성하기 시작한 나라들은 영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이었지만 이제는 아시안 인구의 구성 비 율도 상당한 수에 달해 현재 600만명 이상(2000년 통계)이 살고 있으며, 이 중 에서 필리핀계는 180만, 중국계 140만, 한국계 110만, 일본계 100만명 정도의 인구 구성을 보인다. 그래서 주로 태평양 지역에 많은 분포를 보이는 아시아계 미국인들도 하나의 정치세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은 아시아적 가치 라는 공통의 가치를 존중하면서 아시아인들끼리 단합과 협력을 모색하고 공직 자를 포함한 미국의 주류사회에 적극 진출함으로써 미국의 여러 소수민족 가 운데 모범적인 그룹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리고 본국에서의 관계를 떠나 같은 아시안 아메리칸이라는 동질성 때문에 한국계와 일본계, 그리고 중국계 미국인 들은 특히 가까운 유대를 형성하고 있는데 이는 도덕적, 문화적 가치의 뿌리를 공유하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세 나라 출신의 아시안 아메리칸들 * 관동대학교 교수 102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의 친밀한 유대관계는 오히려 본국에서의 상대방 국가와의 복잡한 문제 해결 에 도움을 줄 수도 있겠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나라와 불편한 관계에 있는 일 본계 미국인의 문학을 연구하는 것은 멀리 보면 한국과 일본의 거리를 좁히는 데 기여할 수도 있으며 마찬가지로 한국계 미국인의 문학을 연구하는 일본인 이나 일본계 미국인의 연구를 통해 한-일 관계를 증진시킬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비록 일본인이 아닌 일본계 미국인의 작품 연구이긴 하지만 본 연구 는 가깝고도 먼 일본인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일본계 미국 문학이란 대부분 일본에서 태어나서 부모 세대의 이민으로 미 국으로 와서 학교를 다닌 일본인 2세 미국인이 영어로 미국에서 발표한 작품 을 말한다. 아울러 미국에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여전히 일본인 커뮤니티에서 생활하면서 미국인과 일본인의 중간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거나 오히려 여전히 일본인의 정체성이 더 강한 사람들에 의하여 씌어진 작품들을 의미하 기도 하는 말이다. 일본인의 미국으로의 이민은 1900년대 초 하와이에 정착한 일본인이 미국 이민의 시초이다. 이들 중 일부는 미국 본토로 이주하거나 캐나다로 이주한 경 우와 1960년, 1970년대에 관광이나 유학생으로 미국에 왔다가 현지 미국인과의 결혼이나 취업 등으로 미국에 정착한 경우, 그리고 1980년대 이후 IT 기술의 발달로 고급 두뇌로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연구소 등에서 근무하거나 미 국의 초청을 받아 정착한 경우 등 여러 가지 경로를 보인다. 1893년에 수립된 하와이 공화국이 미국과의 합병에 동의한 1898년 이후 하 와이에는 본격적으로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확산되었다. 하와이의 농장주들은 값싼 노동력을 필요로 하여 시험적으로 중국인들을 고용했으며 중국인들은 하 와이 원주민과 달리 값싼 임금에도 열심히 일을 하여 농장주들에게 큰 이익을 주었기 때문에 농장주들은 그 이후 중국 본토로 가서 대규모로 중국인 노동자 들을 모집해서 데려왔다. 1882년 미국 본토에서 중국인 이민 금지법이 통과된 후에는 중국인 노동력 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일본의 가난한 남서부 지방에 모집단을 보내 하와이 이주를 지상낙원이라고 속여 많은 일본인 이민자들을 데려왔다. 메이지 유신 이후 봉건제도로부터 자본주의로의 체제로의 변화기에 높은 세금과 천재지변, 빈곤의 악순환을 겪고 있던 가난한 일본의 소작인들은 이민 모집단에 쉽게 포 섭되었다. 일본인들의 미국이민은 1924년까지 계속된 일본에서의 메이지유신이 시작된 1868년에 시작되었다. 1924년은 국적기원 법령의 엄격한 제한으로 인해 거의 모든 일본인들의 미국이민이 중단된 해였다. 일본인 1세대 이민자의 대다수는 미국 서부해안을 따라 정착했는데, 그곳에 서 농업이나 정원 일, 또는 어업이나 가사 업무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 일본계 미국문학에 반영된 태평양 전쟁 ····································································· 안 임수…103 본인 농부의 성공은 이미 존재하던 미국의 반아시아 정서에 큰 영향을 미쳐 1913년과 1920년에 캘리포니아에서 외국인 토지법령안이 제정되고 그 외의 지 역에서도 이와 유사한 법령이 통과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이 법안들은 시민 권을 받기에 부적절한 외국인에게 토지의 소유와 임대를 금지하였다. 특히 일 본인을 대상으로 한 이러한 법안들은 그룹으로서 귀화시민이 되지 못한 모든 아시아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1952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토지 법안은 헌법에 위배되는 것으로 판결이 나서 아시아 이민자들의 시민권이 승인될 수 있었다. 이렇게 20세기 초반에 하와이에 자리 잡기 시작한 일본계 미국인 커뮤니티 는 엄격한 일본식 위계질서와 높은 공동체 의식으로 다른 어떤 아시아계 이민 사회보다 번창하여 현재 하와이 인구에서 백인과 원주민을 빼고 가장 많은 인 구를 자랑하며 경제를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하와이를 지배하는 세력이 되어 있다. 아울러 서부 태평양 연안을 따라 캘리포니아에서 시애틀에 이르는 지역에도 많은 일본인 거주 지역이 있으며 특히 시애틀은 아시아 출신 인구 중에서 일 본계의 인구가 가장 많은 지역으로 이 지역 사회에서 아시아인들의 여론을 주 도하여 시애틀 시내의 공립학교에서 가르치는 외국어 중 불어와 독일어 등 유 럽어보다 일본어를 선택한 학교가 많은 것이 현실이다. 앞으로는 중국어를 선 택하는 학교가 더 많아질지도 모르지만 현재로서는 일본어가 우세이다. 한국어 를 가르치는 공립학교는 한 군데도 없는 것이 현재의 실정이어서 한국정부나 민간차원의 더 많은 노력이 요구된다. 그래서 연중 많은 일본인 커뮤니티의 행사가 끊이지 않는다. 예를 들면 매년 가을 시애틀에서 열리는 “미스 저팬” 행사는 일본인 커뮤니티에서 가장 큰 관 심을 끄는 행사로 인기없는 좌석의 입장료도 30달러에 달하는 것을 보면 일본 계 시민들의 높은 관심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선발된 미인들은 해외의 일본 미 인 대표로 일본 본토에서 열리는 “미스 저팬” 행사에 가족과 함께 초대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어 젊은 일본계 미국인 여성들에게 큰 관심을 끌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대표적인 일본계 미국 작가 밀턴 무라야마(Milton Murayama)의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내 몸』(All I Asking for is My Body), 존 오카다(John Okada)의 『노-노 보이』(No-No Boy), 모니카 소네(Monica Sone)의 『2세 딸』 (Nisei Daughter), 그리고 조이 코가와(Joy Kogawa)의 『오바상』(Obasan)을 중 심으로 일본계 미국인들이 태평양 전쟁 때문에 겪었던 정신적 육체적, 사회적 고 통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밀턴 무라야마는 하와이에서 태어난 일본계 이민 2세로 하와이를 대표하는 일본 계 미국작가이기도 하다.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내 몸』은 1975년 처음 출판된 이후 상당한 기간 동안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지만 1976년 무라야마가 태평양 북 104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서 아시안 아메리칸 작가협회(Pacific Northwest Asian American Writers' Conference)에서 이 작품의 일부를 낭독하고 소설전략에 대해 강연한 이후, 그 리고 하와이에서 가장 유망한 아시아계 미국문학 출판작으로 선정된 이후 미 국전역에서 이 책의 주문이 쇄도함으로써 대표적인 아시아계 미국소설로 대접 받고 있다. 존 오카다는 1923년 시애틀 출생으로 워싱턴 대학 재학 중 미국 육군에 자원입 대하여 하사관으로 제대했다. 종전(終戰) 후 워싱턴대학(University of Washington)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컬럼비아 대학에서 사회학 석사학위를 받은 후 그는 다시 워싱턴 대학에서 도서관학을 전공하여 시애틀 도서관에서 근무하고 로스앤젤레스의 캘리포니아 대학 도서관에서도 근무했다. 그의 첫 작품인 『노-노 보이』는 1957년 처음 출판 된 이후 1976년에 2판, 1979년 워싱턴 대학 출판부에 서 3판, 1993년 8번째 판이 나오는 등 오카다의 이 작품은 2차대전 중 일본계 미 국인들의 고통을 대변하는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모니카 소네는 1919년 시애틀에서 태어난 일본계 여성 작가로 부모가 백인 부두 노동자들을 고객으로 하는 호텔을 경영하였기 때문에 유년시절 백인들과 일상적인 접촉을 하면서 자라나 다른 일본계 미국인의 경우와는 다른 성장과정을 보인다. 1953년에 나온『2세 딸』은 일본계 미국 여성에 의해 집필된 최초의 자서전으 로 위의 두 작품과 달리 출판 당시부터 인종의 도가니(melting pot)를 적합하 게 묘사한 기념비라는 호의적인 반응을 받았다. 결혼하기 전의 성은 나카야마(Nakayama)였던 『오바상』의 작가 조이 코가와는 주인공 나오미처럼 브리티시 콜럼비아 내륙의 탄광촌 슬로칸에 강제로 배치되며 전쟁이 끝난 뒤 코가와의 가족은 앨버타의 코울데일에서 사탕무 농장으로 강제 이 주된다. 그러나 나오미 가족과는 달리 코가와는 가족과 함께 머물 수 있었다. 『오 바상』의 인물들에는 코가와의 가족과 친구들의 모습이 반영된다. 유치원 교사였 던 코가와의 어머니는 오바상과 나오미의 어머니의 모델이며 영국 국교회(Church of England)의 신부(priest)였던 그녀의 아버지는 나카야마 선생의 모델이 되었다. II. 태평양 전쟁 1937년 중일전쟁으로 일본의 공격을 받고 있던 중국에 1938년부터 미국과 영국의 원조가 시작된다. 그 결과 1939년 7월 미국은 중국 원조 방안의 하나로 일본에 미, 일 통상조약의 파기를 통고했다. 당시 일본은 전략물자의 상당한 부분, 예를 들면 선철의 90퍼센트, 동의 91퍼센트, 석유의 66퍼센트를 미국으로 부터 구입했으므로 통상조약의 파기는 일본에 커다란 타격이었다. 미국의 대 일본계 미국문학에 반영된 태평양 전쟁 ····································································· 안 임수…105 일본 석유 수출 금지와 함께 영국, 중국, 그리고 네덜란드까지 일본을 고립시 켜1) 일본은 외교 교섭을 통하여 미국의 결정을 번복시키려 했지만 타협을 보 지 못하고 드디어 미, 일 통상조약은 1940년 1월에 효력을 상실했다. 이후 미, 일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그렇지만 태평양 전쟁 직전의 미국의 입장은 1차 대전의 악몽 때문에 여전히 외교적 해결을 기대하고 있었다. 당시 미국의 입장은 다음과 같았다. 두 나라의 외교관들은 4월 이후 협상을 계속해왔다. 일본은 중국과 교전 상태에 있었으며 이 사실은 미국으로 하여금 태평양 지역의 불안정을 염려하 게 했다. 유럽은 이미 전쟁 상태에 있었으므로 세계의 정세는 지극히 위험했 지만 미국은 1차 대전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Diplomats between the two countries had been negotiating since April. Japan had been at war with China and the United States was worried about instability in the Pacific region. With Europe already at war, the world situation was xtremely dangerous. Americans didn't want a repeat of World WarI. (http/www.googole.co.kr/lawbuzz.com/tyranny) 인도차이나 반도의 침략과 3국 동맹(독일, 이탈리아, 일본)으로 미국은 일본 의 잠재적 적국이 되어 미, 일관계의 평화적 해결은 불가능했다. 그렇지만 미 국과 마찬가지로 일본도 미, 일 협상에 약간의 여지를 남겨 1941년 봄부터 워 싱턴에서 미, 일 회담을 가졌지만 4월 16일 미국 측은 외무장관 헐의 이름으로 된 헐 노트(Hull note)를 일본 측에 제시했다. 그러나 일본은 미국에서 제시한 헐 노트를 거부하고 미국에 반발하듯 그 해 7월에 사이공을 점령했다. 미, 일 통상조약의 폐기 이후 항공기용 휘발유를 비롯하여 전략물자의 금수(禁輸) 범 위를 확대해서 일본을 경제적으로 압박하고 있던 미국은 이와 같은 사태 진전 에 따라 미국 내의 모든 일본 자산을 동결하고 일본으로의 석유 수출을 전면 적으로 금지했다. 이에 일본은 9월 초 어전회의(御前會議)에서 10월 초까지 미국과 일본 사이 에 타결이 성립되지 않을 경우에는 미국과 영국에 대해 전쟁을 포고한다는 정 책을 결정하고 일본의 최저요구사항으로 미국의 중국에 대한 원조 포기와 미, 일 통상관계의 정상화를 미국 측에 제안했다. 이에 대해 미국은 11월 26일 1) 1940년 6월 독일이 프랑스와 네덜란드를 점령하자 일본은 아시아에서 주도권을 잡으려고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아시아 식민지를 침략하여 1940년 9월에는 프랑스의 식민지인 인도차이나를 점령하고 미국에 대한 견제로 독일과 이탈리아와 3국 동맹을 맺고 소련의 위협을 박기 위해 일, 소 중립조 약을 체결한다. 이와 같은 일본의 침략행위와 노련한 외교에 대항하기 위해 미국, 영국, 중국, 네 덜란드는 ABCD(America, Britain, China, Dutchland) 포위진으로 대일 경제 봉쇄정책을 폈다. 106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1941년) 중국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부터의 일본군의 철수, 3국 동맹의 해 체라는 이전의 요구를 되풀이했다. 미, 일 협상이 결렬될 것을 예상했던 미국 이었지만 루스벨트는 미, 일 협상을 타결하기 위한 최후의 노력을 기울여 1941 년 12월 6일 일본천황에게 평화를 호소하는 친서를 타전했다. 그렇지만 이미 미국과의 전쟁을 국론으로 결정한 일본2)은 11월 26일 기동 함대를 쿠릴열도에서 발진시켜 미국 태평양함대의 근거지인 진주만으로 향했 다. 일본의 기동함대는 12월 7일 미국 측의 제안에 대한 일본 측의 최후회답을 주미 일본대사가 미국 국무장관에게 통지하기 전에 진주만을 기습하여 순식간 에 정박 중인 전함 8척과 함정들을 격침하고 300대의 군용기 격파와 2,300명의 장병의 생명을 빼앗는 커다란 전과를 올렸다. 선전포고 없이 감행된 일본의 선 제기습을 미국은 ‘기만적 공격’이라고 맹렬하게 비난했다. 일본과 하와이의 거 리 때문에 일본의 기습 가능성을 전혀 예상치 못한 미국의 입장은 1941년 12 월 7일 일요일 새벽 레이더에 잡힌 많은 수의 비행기 편대를 본토에서 오는 B 17기일 것으로 판단한 레이더 장교 타일러 중위의 생각에서 분명히 알 수 있 다. 타일러 중위의 판독에는 오류가 있었다. 하와이 시간으로 아침 7시 15분, 오 파나 레이더 기사가 “이제껏 보지 못한 많은 수의 전투기가 시야에 포착 된 다” 라고 보고했을 때 타일러는 그 비행기들이 본토에서 하와이로 오고 있 는 미국 전투기 B-17기 들일 것으로 오판했던 것이다. Lt. Kermit Tyler was wrong about the readings. At 7:15 a.m. Hawaii time, when the Opana radar operator reported "a larger number of planes than he had not seen before on his scope," Tyler thought the planes were American "B-17's en route to the Islands from the mainland." (www. google.ac. kr/lawbuzz.com) 만약 타일러 중위가 7시 15분 레이더 담당자의 보고를 간과하지 않고 본토 에 문의하여 그 많은 전투기들이 일본 전투기임을 확인하고 이 때라도 신속한 조치를 취했다면 조종사들과 무방비로 노출되어있던 히컴 기지(Hickham Field)의 전투기들의 손실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며 또한 함정 폭 2) 1941년 10월 미국이 일본의 중국 철수와 삼국동맹의 무효를 주장하자 일본내각은 의견이 분열된 다. 이에 따라 신체제 운동을 추진하고 있던 고노에 내각이 퇴진하고 전쟁론자인 도조 히데키 육 군대장에 의한 신내각이 수립되며 이 내각은 완전히 전범 내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전쟁준비 에 전력을 기울였다. 일본의 전쟁 의사를 탐지한 미국은 일본에게 만주사변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냈으며 이에 대한 대책으로 일본은 개전을 결의하고 진주만을 공격 한 이후 12월 8일에는 말레이 반도를 침략하고 미국과 영국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었다. 일본계 미국문학에 반영된 태평양 전쟁 ····································································· 안 임수…107 격으로 인한 선원들의 손실도 줄일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어뢰 방지 장 치(torpedo net)조차 설치하지 않은 채, 포드 섬(Ford Island)에 나란히 정박해 있던 오클라호마(the Oklahoma), 웨스트버지니아(the West Virginia), 캘리포 니아 호(the California), 그리고 아리조나 호(Arizona)에 대한 일본의 기습폭격 으로 이 배 한 척에서만도 900명의 인명손실이라는 끔찍한 참상이 기록되었다. 아리조나 호의 손실은 그 날의 전력손실의 50%를 차지 할 만큼 컸는데 미 국 해군의 역사상 그렇게 많은 선원이 단 번에 침몰당한 일은 처음이었다. 이 날의 충격으로 해안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위치에 격침된 함정과 똑같은 모양 의 USS(U.S. Ship의 약자) Arizona가 현재도 1941년 당시와 같은 자리에 위 치하여 미국인이나 역사적인 사실을 알지 못하는 관광객에게나 다 같이 그 날 의 희생자들을 잊지 않으려는 미국의 굳은 의지를 보여준다. 진주만이 기습당한 다음날인 1941년 12월 8일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는 의회 의 상, 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대일 개전(開戰)을 촉구하는 교서를 읽었다. 교 서는 절제 속에 끓어 넘치는 분노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연설문은 애초에는 「세계 역사에 남을 날」(“A date which will live in world history”)라는 평 범한 어조로 시작될 것이었지만 「통한의 날」("Day in Infamy") 라는 기억에 남는 연설로 바뀐 것만 보아도 미국국민의 분노를 짐작할 수 있다. 어제, 1941년 12월 7일-우리의 수치로 기억될 날-미합중국은 일본 제국 으로부터 갑작스럽고 의도적인 해군과 공군의 공격을 받았다. 미국은 그 나라 와 평화적인 관계에 있었고 일본의 요청에 의하여, 태평양에서의 평화 유지를 바라면서 일본 정부의 황제와 대화를 계속하던 중이었다. 일본에서 하와이까 지의 거리로 보아 어제의 공격은 여러 날 또는 심지어 여러 주 전에 의도적 으로 계획되었다는 점이 분명하다는 사실이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우리의 전력에 대한 자신감으로-그리고 우리 국민의 무한한 결단으로-우 리는 틀림없이 승리를 쟁취할 것입니다-그러니 하느님 우리를 도우소서! 일요 일인 12월 7일, 일본이 감행한 이유 없고 비겁한 공격으로 미합중국과 일본제 국은 전쟁 상태가 존재한다는 판단에서, 나는 국회에 전쟁을 포고할 것을 요 청합니다. Yesterday, Dec. 7, 1941 - a date which will live in infamy -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was suddenly and deliberately attacked by naval and air forces of the Empire of Japan. The United States was at peace with that nation and, at the solicitation of Japan, was still in conversation with its government and its emperor looking toward the maintenance of peace in the Pacific. It will be recorded that the distance of Hawaii from Japan makes it obvious that the attack was deliberately planned many days or even weeks ago. With confidence in our armed forces - with the unbounding determination of our people - we will gain the inevitable triumph - so help us God. I 108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ask that the Congress declare that since the unprovoked and dastardly attack by Japan on Sunday, December 7, 1941, a state of war has existed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the Japanese empire. (President Roosevelt's Address to the Congress on Dec. 8, 1941) 이러한 루즈벨트의 선전포고 결의안 동의 요청에 의회 또한 유례없는 만장 일치(1명의 반대는 의미 없는 것으로 여겨짐)나 다름없는 찬성으로 가결하여 단 한 시간 만에 상원82표 대 0표로, 하원은 388표 대 1표로 대일 선전포고 결 의를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미국은 12월 9일 정식으로 일본에, 11일에는 독일 과 이탈리아에 선전포고하였다. 이제 제2차 세계대전은 전 세계의 전쟁으로 확 대되었다. 진주만을 잊지 말자는 말은 군인이거나 민간인이거나 간에 미국 사 회의 구호로 통용되었다. 진주만을 기억 합시다우리가 적군과 싸우러 갈 때우리가 알라모를 기억하듯이그렇게 진주만을 기억합시다. Let's remember Pearl Harbor As we go to meet the foe Let's remember Pearl Harbor As we did the Alamo. (www.lawbuzz.com/.../internment_camps.htm) 1941년 12월 7일의 진주만 공격은 일본에 대한 미국인들의 무조건적인 반감 과 혐오감을 불러 일으켰다. 진주만 공격 이후 일본계 미국인들은 미국에 대한 반역이라고 비난받고 스파이로 의심 받았다. 그 이후 일본계 미국인 커뮤니티 는『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내 몸』에 나타난 것처럼 수시로 감시를 받고 어 떤 목적이던 집회의 자유를 잃게 되었다. 그 중에도 영어를 쓰면서 성장한 2세 보다 여전히 일본어로 의사전달을 하던 일본계 1세가 미국 사회로부터 더 많 은 의심을 받게 되면서 일본계 커뮤니티 안에서 이전의 권위를 잃게 되어 일 본계 이민 2세에게 커뮤니티의 지도자 자리를 내어주게 되었다. 아들이 아버지 의 위치를 대신하게 된 것은 진주만 이후 대부분의 일본계 미국인 가정에서 일어난 큰 변화의 하나이다. 막대한 피해를 입은 갑작스런 일본의 대공습을 일본계 미국인들의 조직적인 가담으로 판단한 미국은 루즈벨트로 하여금 1942년 2월 19일 마침내 행정명령 조치 9066(Executive Order 9066)호를 발동하게 했다. 이 조치의 내용은 다음 과 같다 일본계 미국문학에 반영된 태평양 전쟁 ····································································· 안 임수…109 이 조치는 “적법한 군 지휘관”에게 국가에 군사적인 위험인물을 가려 내는 권리를 부여했으며, 따라서 만약 위험인물로 판명될 경우, 군으로 하여금 그 인물들이 영향력을 행사할 지역으로부터 제거할 권리도 부여되었다. 캘리 포니아 주 전역과 오리건 주와 워싱턴 주의 절반, 그리고 아리조나주의 3분의 1의 지역이 영향을 받았으며 따라서 “태평양 전선의 전쟁 구역”으로 선포되었 다. 이 “구역”에 거주하는 모든 일본인 후손은 미국 정부에의 불충을 의심받 았다. 정부 수사요원들이 일본계 미국 시민들에게 집과 직장을 떠날 것을 명령 함으로써 이 미국시민들은-아이들까지 포함하여-수용소로 소개(疏槪)되었다. 이들은 버스와 기차로 수송되어 전쟁 재배치 당국의 감시를 받았다. The order authorized the "appropriate Military Commander" to determine whether anyone posed a military risk to the country and, if so, authorized the military to exclude those persons from affected geographic areas. The entire State of California, half of Oregon and Washington and a third of Arizona were affected and were declared "war zones on the Pacific Frontier." Every person of Japanese descent living in those "zones" was suspected of disloyalty. As governmental directives ordered Japanese-Americans to leave their homes and businesses, these American citizens - including children - were evacuated to desert internment camps. Transported by buses and trains, they were placed under the control of the War Relocation Authority. (www.lawbuzz.com/.../internment_camps.htm) 이로서 태평양의 모든 일본계 선조를 가진 이들에게 진주만 공격 2개월 뒤 재배치(War Relocation Centers)라는 곳에 신고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미국 정 치가들이 이러한 결정을 내린 동기는 일본군이 미국의 서부 해안지역을 침범 할지도 모른다는 판단에서였으며 그들의 판단은 2달 전의 진주만 공격에 뿌리 를 두고 있었다. 워싱턴의 정치인들은 일본군이 서부해안에 상륙할 경우 일본 계 미국인들은 미국보다 일본에 더 충성심을 보여 그들을 도와 줄 것이라는 가정 하에 재배치라는 이름으로 이들은 집과 직장에서 멀리 옮겨져 수용되었 다. 이들은 군인들의 감시를 받았으며 물질적으로도 4억불에 상당하는 손실을 입었다. 결과적으로 12만 명이 넘는 일본계 미국인들이 수용되었는데, 그 중 65%는 미국에서 태어난 미국시민이었다. 급히 개조한 공진회나 경마장 트랙에 일시적으로 감금된 이후 10개 이상의 영구적인 전쟁 재배치 캠프가 황량한 내 륙지방에 건설되었다. 캠프에서의 생활조건은 열악했다. 18피트×20피트 크기의 방 한 칸에 4명 이상의 가족이 기거했으므로, 수용자들은 타르벽지로 바른 목 조막사에서 석탄난로 한 개로 난방을 했으며, 사적인 공간은 제공되지 않았다. 110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캠프생활의 스트레스는 가족관계를 와해시켜 1세들은 종종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2세들에게 공동체 지도자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캠프내의 갈등은 ‘충성 심 에 관한 설문조사’에 의하여 더욱 악화되었는데, 이는 1세, 2세, 남성 여성 모두에게 그들이 군에 복무할 의사를 진술하게 하고, 일본국에 대한 어떠한 충 성도 부정할 것을 요구했다. 모순되게도 일본계 미국인들이 겪은 강제수용의 경험은 전쟁 후 많은 2세들에게 완벽한 백인사회로의 동화를 촉진시키는 결과 를 가져왔다. III. 일본계 미국 소설에 나타난 태평양전쟁 3.1『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내 몸』의 경우 평소 일본인은 절대 잘못된 일을 하지 않는다는 대화사상에 빠져있던 하와 이 이민 일본인 1세인 토시오(Toshio)의 아버지3)는 토시오로부터 일본이 하와 이의 진주만을 공격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토시오가 잘못 들었을 것이 라며 믿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토시오는 진주만의 공격을 알고 난 이후 일본 의 잘못을 지적하고 현실적인 대응책을 모색하여 그 때부터는 집안의 일을 처 리하는 사람은 토시오이고 아버지는 아들의 명령을 듣게 되었다. 진주만의 기 습 이후 하와이 현지에 사는 일본계 미국인이 일본군과 내통하여 정보를 주었 다는 판단에서 군인이나 지역 책임자가 일본인 이민자인 토시오 가족을 의심 스러워 할 때 아버지에게 단스(서랍)속에 감추어 둔 일본 국기를 없애라고 명 령을 내리는 사람은 바로 토시오였다. 영어를 못하는 아버지가 미군을 상대해 봐야 공연히 알아듣지 못할 일본어로 말하여 그들의 의심을 부추길 염려가 있 다는 토시오의 판단에서 가족의 안전을 위해 가족의 행동방침을 결정하는 것 은 어느새 토시오로 바뀌게 된 것이었다.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모든 일본 책 들을 닭장에 감추고 일본인이 아닌 사람이 주위에 한 사람이라도 있을 땐 일 본말을 하지 마시라는 단호한 명령을 내림으로써 토시오는 가족의 생존을 모 색한다. 실제로 일어난 일본의 기습을 믿지 않으려는 아버지의 불신은 일본인 의 우월감에서 나온 것이며 다케모토(Takemoto) 선생님 또한 늘 그렇게 가르 쳤다. 키요시(Kiyoshi)는 존경하는 다케모토 선생님의 가르침으로는 무방비 상 3) 이 소설 내내 아버지는 이름이 나오지 않고 오야마(Oyama)라는 성으로만 불린다. 어머니 역시 그 냥 어머니로만 불릴 뿐이다. 다른 어른들도 이름은 나오지 않고 다케모토, 등으로 성으로만 소개 된다. 이것은 미국과 달리 일본 문화에서는 사회적으로 남자 어른은 이름으로 불리지 않고 성으로 만 불리기 때문이다. 일본계 미국문학에 반영된 태평양 전쟁 ····································································· 안 임수…111 태의 많은 인명을 살상한 일본의 진주만 공격을 설명할 수 없으며 그것은 분 명한 일본의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선생님은 계속 말씀하셨어요, ‘일본인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지?’ 라 고. 선생님은 요시츠네와 다른 사람들 이야기를 늘 해 주셨어요. 그들은 적 앞에 혼자 말을 타고 나가 그들의 이름과 계급을 큰 소리로 외친 다음 같은 계급의 적에게 앞으로 나와서 싸우자고 소리친다. 무사는 그의 말을 되돌리지 않는다, 그는 두 얼굴이 아니다, 두 번째 말은 필요 없다고 선생님은 되풀이해 서 말씀 하셨어요. 사무라이가 어떻게 선전포고도 없이 진주만을 공격할 수 있는 건가요?(20) 진주만 공격으로 일본계 미국인이 일본군과 내통하여 정보를 준다는 의심에 서 미국은 1943년 영어를 하는 일본인 2세들로만 구성된 군단을 만든다고 자 원입대를 요구했을 때 키요시는 결혼한 형 토시오를 집에 남기고 가족을 대표 해서 자원하게 된다. 표면적으로는 자원입대이지만 한 집에 한 아들씩 입대시 키지 않으면 미국에 충성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져 불이익이 올 것이 예상되는 반 강제성을 보인다. 이것은 진주만 폭격을 겪은 미국 정부로 하여금 일본계 미국인들이 미국을 배신하고 일본군에게 충성을 바칠 것이라는 확신에서 태평양 연안으로부터 이 들을 격리시킴으로써 일본군과의 접촉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하려는 목적 에서의 강제징집이었다. 3.2 『노-노 보이 』의 경우 1943년 2월 미국 육군은 하와이를 포함한 10곳의 일본인 집단거주 캠프 출신의 일본인 2세 청년들로만 구성된 전투부대(연대수준)의 결성을 위하여 각 캠프별로 자원봉사자를 조달하라는 전쟁수행본부의 지령을 수행하기 위해 수용캠프 내에서 징병을 시작했다. 확실한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일본인 부모를 둔 미국 시민권자 의 진술이라고 알려진 설문지를 통해 수용된 일본계 2세 남성을 대상으로 등록을 시행키로 결정했다. 핵심적인 27번과 28번의 설문은 다음과 같다. 27번: 당신은 어디서 명령을 받으면 어는 곳이던 미국 육군에서 전투 의무를 수행 할 용의가 있습니까? 28번: 당신은 미합중국에 무조건 충성을 맹세하며, 외국군이나 국내의 병력에 의 한 모든 공격에서 미국을 충실히 방어할 것이며 일본 황제나 다른 어떤 외국 정 부와, 권력, 또는 조직에 대한 어떤 형태의 충성이나 복종도 부인하겠습니까? No. 27. Are you willing to serve in the armed forces of the United States on combat duty, wherever ordered? 112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No. 28. Will you swear unqualified allegiance to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and faithfully defend the United States from any or all attacks by foreign or domestic forces, and forswear any form of allegiance or obedience to the Japanese emperor or any other foreign government, power or organization? (Wong and Sumida, 143) 위의 두 설문은 재배치 위원회(War Relocation Authority)와 전쟁 수행부(War Department)가 공동으로 만든 것으로, 이러한 문항은 국가 안보를 위한 행정 목적 으로 1942년에 들어 저항이 심해지고 있던 10개의 캠프로부터 문제아 (troublemakers)들을 골라내기 위함이었다. 그런 상황 하에서는 등록은 필수적이었 을 뿐 아니라 모든 17세 이상의 성인 남녀와 모든 1세 일본인에게로 확대되었다. 이 두 설문은 재배치의 초기 단계에 수용자들에게 미친 도덕적, 심리적 상처를 완전히 무시했기 때문에 질문에 강제로 답해야 했던 사람들 사이에 더 큰 공포와 반항을 일으키게 되었다. 모두 21,000명 중에서 약 4,600명이 분명하게 ‘No'라고 답했거나 응답을 거부했다고 알려졌다. 두 질문에 부정(No)의 답을 한 일본인 2세 들은 즉시 다른 수용자들과 격리되어 튤 레이크( Tule Lake)의 분리센터 (segregation center)에 다른 항목에서 ‘반역적’(disloyal) 이라고 분류된 수용자들과 함께 수용되었다. 격리 후 1년 뒤에 이들 ’no-no boy' 들은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수용과 징집의 결과의 하나는 일본계 미국인 커뮤니티와 가족의 와해와 일본계 미국인 가족의 세대 갈등의 악화였다. 전쟁 이전의 1세와 2세간의 세대갈등은 대 부분 시민권의 문제 때문에 생겼다. 일본법은 출생 장소와 무관하게 일본인 아버 지의 자녀들을 자동적으로 일본시민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이중(double citizenship) 시민권 현상은 되풀이되어 일본인 2세들에게 미국인으로의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미국법은 속지주의를 택하여 미국 땅에서 태어 난 사람은 부모의 국적에 관계없이 미국시민으로 인정했다. 그렇지만 일본인 1세 중 누구도 1952년 매커런 월터 법령(McCarren-Walter Act)이 통과되기 전까지는 미국 시민이 될 수 없었다. 이 법령 이전에 미국시민은 1790년의 귀화법과 많은 반 아시아 이민제약(1907년의 신사협정, 1913년의 캘리포니아 외국인 토지법, 1921 년의 워싱턴 외국인 토지법, 그리고 다양한 반 잡혼법)을 통해 백인으로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노 보이』 는 이치로(Ichiro)가 연방교도소에서 풀려나 시애틀의 일본인 커 뮤니티로 돌아오던 날 시작된다. 이치로가 집에 도착하자 미군으로 복무했던 다른 2세들은 이치로에게 경멸과 적개심을 보인다. 그들은 이치로의 병역거부를 미국인 으로의 입증에 실패한 것으로 생각하여 그를 무시한다. 그는 끊임없이 그를 괴롭 일본계 미국문학에 반영된 태평양 전쟁 ····································································· 안 임수…113 히던 두 개의 상반된 정체성 혼란에 다시 휩싸이고 일본인 2세로서 전쟁 동안 미 육군에서 복무하기를 거부했던 자신이 경멸스러워진다. 다른 한 편으로 1세인 이 치로의 어머니는 그의 병역거부를 지지한다. 그것은 그 자신의 감정을 무시할 뿐 아니라 그의 결정이 일본에의 충성심의 발 로라는 오해로 확인되기도 한다. 일본계 미국인 커뮤니티의 극단적인 태도는 이치 로가 돌아오는 집이 그의 분열된 자아만큼 분열되어 있음을 보여주며 그의 원천적 인 정체성 위기를 심화시킨다. 이치로의 도덕적 딜레마에 대한 답을 찾는데 강력 한 영향을 준 세 사람 중 한 사람은 다리에 말기 회저병(gangrene)으로 고통 받고 있으며 『노-노 보이』에게 공감하는 퇴역군인 겐지(Kenji)이며, 다른 한 사람은 일본에 우호적인 그의 어머니로 그녀는 인종적 차별에 대한 완강한 저항의 결과 자살을 선택한다. 또 한 사람은 남편에게 버림받고 사랑과 이해, 실용적 조언을 통 해 이치로에게 동정을 보이는 이치로의 어머니 에미(Emi)이다. 겐지와 그의 어머 니의 비교에서, 그들은 둘 다 소설의 전개과정에서 죽는데, 에미는 이치로의 과거 『노 노 보이』, 즉 그의 징집 거부의 오류와 일본계 미국인의 전쟁기간동안의 고 통에 무관심으로 남아있는 사회와의 관계에 대한 자각을 형성하는데 절대적이었 다. 이치로도 다른 대부분의 일본계 미국청년들처럼 공포 분위기 속에 질문의 의도를 올바로 파악하지 못하여 두 질문에 No 라고 답함으로써 반역적이라고 분류되어 거주지인 시애틀로부터 먼 내륙지방으로 격리, 수용되어 감시를 받고 준 포로와 같은 대우를 받은 경우에 속한다. 두 설문에 모두 부정적인 답을 한 4,600명 가운데 질문의 의도를 정확히 파 악하고 분명히 일본에 대한 충성심으로 미군에 복무하지 못한다는 답을 한 사 람은 극소수이고 나머지는 이치로의 경우처럼 뿌리 깊은 가정교육의 영향으로 선뜻 그러겠다고 답을 하지 못한 것이다. 자녀가 일본에 충성스러운 국민으로 성장하기를 바랐던 1세대 부모의 영향으로 2세 자녀가 선뜻 그러겠다는 답을 하지 못한 것은 부모를 부정하는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즉 이 경우의 no는 ‘미국에 충성하지 않겠다’가 아니라 ‘잘 모르겠다(I don't know)’, ‘분명한 답을 할 수 없다(I‘m not sure)’, 또는 ‘글쎄요(Well...)’처럼 모 호한 의미에 가까울 것이다. 아니면 문화적인 차이로 해석하여 서양의 사고방 식은 Yes와 No가 분명한 데 비하여 일본 문화(동양문화의 공통점)에서는 확 답을 하지 않고 여지를 남겨놓는 것이 미덕이었으며 자기주장을 앞서서 밝히 기 보다는 남에게 기회를 양보하고 다른 사람의 견해를 따르는 것이 전통적으 로 미덕으로 생각되어왔기 때문이다. 일본어 표현에서 유난히 ‘~라시이’(~인 듯 합니다), 또는 ‘~소우’(~같아 보입니다), ‘요우’(~처럼)으로 끝나는 표현들 이 많은 것도 일본인들의 간접적 표현방식에 대한 선호의 산물이라고 생각된 114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다. 3.3『2세 딸』의 경우 1941년 12월 7일의 진주만 공격은 미국의 반 일본적 정서를 대중적 히스테 리의 수준까지 도달하게 하였다. 일본계 미국인들은 반역자요, 스파이로 의심 받아 행정명령 9066에 의하여 태평양의 모든 일본계 부모를 가진 이들에게 재 배치의 명령이 내려졌다. 이들의 재배치 준비기간으로 주어진 것은 겨우 며칠 이었으며 몸에 지닐 수 있는 것만 소지하도록 허락된 상태에서 수용자들은 원 래의 가격 이하로 소유물을 팔아 생계비를 준비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4억 불 정도의 손실을 입었다고 한다. 카즈코(Kazuko)는 마치 그녀가 ‘2개의 머리를 가지고 태어난’ 것처럼 느낀 다. 백인 미국인들과 일본인들의 문화적 실행에 대한 차이에서 이토이(Itoi)의 가족묘사와 일본계 미국인 2세의 말의 언어학적 혼합을 통해 ‘미국인’과 ‘일본 인’ 사이의 선이 경직된 것이 아님을 암시한다. 그럼에도 소네는 종종 ‘일본인’ 으로 그녀가 동일시되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이것은 그녀가 미국 공립학교와 방과 후에 다니는 일본인 학교 사이의 차이를 설명하는 데서 나타 난다. 일본인 학교는 가족의 일본 여행 중에 만나는 일본인 사촌의 묘사에서도 그린 것처럼 순응, 억압, 복종과 연관된 장소이다. 일본에서 ‘외국인’처럼 느끼 는 것처럼 카즈코는 자기 자신의 미국화가 스스로 생각했던 것처럼 완전하지 않음을 완전히 ‘미국적이지 못한 습관’을 통해 깨닫게 된다. 정체성의 논의는 소네가 편견이라고 언급한 사건과 긴밀한 연관성을 보인다. 인종차별의 현실은 이토이가의 피신과 수용, 그리고 시애틀의 일본계 커뮤니티 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후반부에서 분명해진다. 그러나 설명을 암시해주는 비 평은 주로 지배문화 속으로의 동화의 필요성을 강조하는데 중점이 두어진다. 1953년에 출간된 『2세 딸』(Nisei Daughter)은 여전히 반일본적 정서가 높 았던 종전 직후에 씌어졌으며 이 시기는 일본계의 백인 주류 사회로의 동화의 압력이 일본계 커뮤니티의 내, 외부 모두에서 왔던 시기였다. 1942년 일본계 커뮤니티에서 생겼던 일, 즉 재배치와 강제수용이 ‘미래의 세대에게 잊혀지거 나 상실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씌어진’ 『2세 딸』이 배상 캠페인이 시작되던 1979년에 재판이 인쇄되었다는 사실은 이 책이 배상을 끌어내는데 상당한 영 향을 미쳤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1943년부터 대학생 나이의 2세들은 후원자가 있는 경우, 가족이 함께 사는 집단 캠프를 떠나 중서부나 동부 해안에서 학교를 다니도록 허용되었다. 많은 일본계들이 전후에 다시 서해안으로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출발은 일본계 미국문학에 반영된 태평양 전쟁 ····································································· 안 임수…115 일본계 공동체의 전후의 분산을 가속화시켰다. 동화의 무용함을 예시하는 대 신, 감금의 경험은 많은 2세들에게 더 완벽한 백인사회로의 동화의 필요성을 강화시켰다. 3.4 『오바상』의 경우 캐나다에 온 첫 일본계 이민자들은 1877년 이른 시기에 캐나다에 도착했지 만 1941년까지 약 2만 2천명 정도의 B. C.(브리티시 콜럼비아)에 있는 일본계 캐나다인은 여전히 외국인으로 간주되어 투표권이 없었으며, 법률가, 약사 등 의 전문직은 물론 공직에 진출할 수도 없었다. 서부 해안의 인종문제는 더욱 격렬하여 1907년 밴쿠버에서 약 5천명의 백인 노조 지도자들이 중국계와 일본 계 상점을 약탈하여 재산을 파괴하였을 때, 경제적 분개와 인종주의가 비등하 였다. 그러나 2차 대전의 발발과 함께 황화(黃禍)라는 수식어로 커져가던 적대 감은 일본계 캐나다인에게 집중되었다. 일본계 캐나다인의 수용과 재배치의 영향은 나오미 나카네(Naomi Nakane) 라는 미혼의 36세 소도시 교사의 관점으로 전해진다. 1942년 밴쿠버의 집에서 화목하게 지내던 나카네의 가족은 안락한 일상으로부터 결별되어 피폐해진다. 나오미의 아버지는 많은 다른 남자들처럼 브리티시 콜럼비아 오지(奧地)의 도 로보수관으로 보내져 거기서 폐렴에 감염되어 사망한다. 어머니는 전쟁 전 일 본을 방문하러 가지만 캐나다로 돌아올 수 없었다. 외가 쪽 친척 카토가(the Katos)는 토론토로 이주하여 브리티시 콜럼비아의 외딴 섬으로 피신한다. 그 러나 나오미의 양부모인 아야(Aya) 고모와 이사무(Isamu) 고모부, 그리고 오 빠 스티븐(Stephen)은 그리 행복하지 못한 처지가 된다. 그들은 외딴 슬로칸에 살다가 종전이 되자 앨버타의 초원으로 이주한다. 이런 사건들은 가족에게 피폐한 심리적 상처를 남긴다. 스티븐은 음악에 혼 신을 기울여 자신의 일본계 선조와 ‘지나치게 일본적인’ 가족을 벗어나기 위하 여 세계를 순회하는 다소 이름이 알려진 음악가가 된다. 항상 조용하고 내성적 인 나오미는 비사교적이고 감성적으로 성장한다. 고모와 고모부는 아이들이 혼 란스러워 할 정도의 침묵 속으로 후퇴한다. 『오바상』의 이야기는 나오미에게는 의미 없는 나가사키의 원폭투하 27주 년 기념일에 나오미와 이사무 고모부가 골짜기를 따라 걸어가는 장면으로 시 작된다. 한 달 후 고모부가 갑자기 죽어 세실(Cecil) 인근에 살고 있던 나오미 는 가장 먼저 늙어가는 고모에게 돌아간다. 그들이 다른 가족-스티븐과 에밀 리를 기다리는 동안 나오미는 일본계 캐나다인의 인권을 위해 일하는 적극적 이고 지치지 않는 활동가인 에밀리 이모로부터 온 소포 꾸러미에서 편지들과 116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에밀리 이모의 일기, 캐나다 정부의 일본계 캐나다인에 대한 부당함과 관련된 신문기사 등을 발견하게 된다. 이와 함께 나오미는 그녀 가족의 강요된 피난과 이산의 기억 이외에도 이웃의 백인에게 당했던 성적 학대의 기억을 다시 떠올 리게 되어 수치심과 죄의식에 빠지게 된다. 1941년 12월 7일 진주만의 공습 직후, 캐나다 정부는 그들의 시민권과 무관 하게 모든 일본계 선조를 가진 시민들이 1942년 2월 7일까지 적성국 거류 외 국인으로 등록해야 한다고 선포하였고, 이러한 조치는 일본계 캐나다인에게 놀 라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다른 그룹과 달리, 일본계 캐나다인들은 국가보안 이라는 이름하에 취해진 유례없는 조치의 표적물이 되었다. 12월 17일에는 태 평양 해안 보안리그가 조직되었는데 지역의 입법자들로 구성된 이 리그는 연 방정부가 일본계 선조를 가진 모든 사람을 철수시킬 것을 요구하였지만, 연방 정부는 이 조치를 정당하다고 인정하지 않았다. 참모부장이던 켄 스튜어트 (Ken Stuart)는 육군의 입장에서 볼 때, 일본계 캐나다인들은 캐나다의 국가보 안에 조금이라도 위협이 된다고 볼 수 없다고 증언했다(Adachi, 203). 군(軍)에서는 이처럼 일본계 캐나다인들을 경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브리티시 콜럼비아 정부로부터의 압력과 이들에 대한 일반국민들의 혐오 때문 에 캐나다 정부는 1942년 1월 16일, 결국 18세에서 42세의 모든 일본계 남성 ‘외국인’은 서부해안의 ‘보호구역’에서 100 마일 이상 떨어진 지역으로 이주해 야 한다고 선포했다. 가족의 해체는 고사하고, 이 조치는 약 17,000명의 가정의 가장들을 오지의 도로건설 업무로 보내 많은 가정을 경제적으로 파탄에 이르 게 했다. 강제적인 재배치 명령과 함께, 약 12,000척의 어선이 몰수되었으며 보 호지역에 머무는 사람은 어업이 금지되거나 고기잡이 허가가 보류되어 생계유 지가 어렵게 되었다. IV. 나오며 1943년부터 대학생 나이의 일본인 2세들은 후견인이 있는 경우, 캠프를 떠 나 중서부나 동부 해안에서 학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많은 일본계 미국인들은 전후에 다시 서부 해안으로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계 공동 체의 전후의 이산을 가속화시켰다. 전쟁 동안 일본계 미국인들이 겪었던 강제 수용의 경험은 많은 2세들에게 보다 완벽한 백인사회로의 동화의 필요성을 강 화시켰다. 일본 국민이나 일본계 미국인들을 캠프에서 석방시킨 것은 1945년 1월에 시 일본계 미국문학에 반영된 태평양 전쟁 ····································································· 안 임수…117 작되었다. 석방 당시 그들은 돌아갈 집도 직장도 없었고, 그들의 커뮤니티는 10분의 1로 격감했으며 어떤 사람들은 강제로 일본에 송환되기도 했다. 또 어 떤 사람들에게는 1946년에 끝난 캠프생활의 기억은 강제수용 그 자체만큼이나 깊은 외상을 남겨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모순적이게도 일본계 미국인들은 전 후의 회복 과정에서 새로운 ‘소수민족 모델’이 되어, 과거의 유형에 대한 변화 로 이어졌다. 1979년 미국의 인권운동에 고무되어 일본계 미국인 3세와 젊은 2 세들은 교정과 보상운동(The Redress and Reparations Movements)을 시작하 여, 결과적으로 미국 정부의 공식적 사과와 보상을 이끌어냈다. 교정운동의 가 장 큰 효과는 이것이 수 십 년간 부끄러운 침묵 속에 파묻혀 있던 주제인 강 제수용에 대한 대화의 문을 열었다는 것이다. 비록 1988년 레이건 대통령 재임 시에 2차 대전 기간 동안 수용소에 수용되 었던 일본계 미국인들에게 미국정부의 공식적인 사과와 함께 1인당 2만불씩의 배상금이 지불되기는 했지만, 노인과 어린이까지 감금했던 이 일은 아시아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말해준다. 태평양 전쟁은 결국 미국에 거주하는 일본계 미국 인들에게는 주위로부터 말 할 수 없는 고통과 차별을 받게 하였고 이로 인해 『오바상』이나 『2세 딸』의 경우에서처럼 가족의 해체와 이로 인한 가족의 경제적인 고통, 그리고 자신들을 범죄자처럼 느끼게 하는 죄의식을 안겨 주었 다. 특히 하와이에 거주하는 일본계 미국인들에게는 일본군과 내통한다는 의심 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일본인 커뮤니티 내부에서조차 내분과 갈등, 그리고 서로에 대한 불신감을 키우게 되는 커뮤니티 존립의 위험까지 가져오게 되었 다.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내 몸』의 경우에서처럼 태평양전쟁 이전에는 일본계 미국인들의 문제는 주로 커뮤니티 내부에서 연장자나 존경받는 인물에 의하여 조정되었지만 태평양전쟁 이후에는 그런 질서가 무너지고 보다 미국화 된 사람, 미국사회에 동화된 사람이 새로운 지도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태평양 전쟁은 일본계 미국인들의 결속력을 떨어뜨려 결과적으로 미국인으 로의 동화를 가속화시켰으며 격리, 수용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 또 는 그 가족들은 가족의 해체를 겪고 미국인으로의 동화에서 낙오되어 실패한 이민자로의 생을 살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해외에 거주하는 일본인과 그 자녀들까지를 일본시민으로 생각한다는, 자국민을 끔찍히 생각한다는 일본 정부의 야욕(진주만 공격) 때문에 이민생활로 힘든 죄 없는 ‘일본계 미국인들’ 만 전쟁이 끝날 때까지 3년 이상을 수용소에서 감시받고, 또한 그 후유증을 극 복하지 못해 사회의 낙오자가 되었던 것이다. 일본계 미국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일본정부의 군사적 야욕이 일본계 미국 인들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게 된 이해하지 못할 전쟁이 태평양 전쟁이며 118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일본계 미국인들이 일본 정부에게는 어떠한 형태로든 사과나 보상을 요구함이 없이, 미국정부에게만 사과와 보상을 받아냈다는 점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 분이다. 【参考文献】 고선윤 역 『3일 만에 읽는 일본사』서울: 서울문화사, 2007. 김애주 외 공역 『아시아계 미국문학의 길잡이』 서울: 한국문화사, 2003.65 연민수 편저 『일본역사』 서울: 보고사, 2005. 장태한. 『아시안 아메리칸』 서울: 책세상,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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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t what is special with Japanese American literature must be that they unanimously reveal Japanese Americans' internment and relocation after the Pearl Harbor Attack. Japan's stealthy attack arose hostility in the American public toward Japanese Americans in general. After the Attack, Americans believed that Japanese Americans would betray America and sure to be loyal to Japan. The Pacific War totally affected and changed lives of the Japanese Americans during the internment and relocation. These changes were faithfully described in the Japanese American literature. 1). In All I Asking is My Body After the Pearl Harbor Attack, Toshio, was shocked to know that Japan had secretly raided Pearl Harbor on a Sunday morning without warning. He had been educated that Japanese are special and never does shameful things. As his belief is betrayed, he decided to abandon Japanese citizenship against his father's advice. And after the attack, he takes place of his father's position in the family for the sake of his family. 2). In No-No Boy In the internment camp he was required to answer 2 questions on patriotism. His answer were 2 'No's not because of his patriotism to Japan but because of his weak confidence in his American identity. He had been strongly influenced by his pro-Japanese mother and thought his 'Yes' would 일본계 미국문학에 반영된 태평양 전쟁 ····································································· 안 임수…121 betray his mother. As Ichiro had been discharged from a prison(relocation camp), he came home, in Seatle to find his friends and neighbors despise him as a failure of approving himself as an American. 3) In Nisei Daughter The tensions caused to Itoi family as an aftermath. Kazuko was released to the Midwest in 1943 for college education. After Kazuko, visited her family in the internment camp, she was found to have overcome her identity conflict and also found to be a good example for accomplishing successful assimilation into mainstream American society. 4) In Obasan In Obasan, Naomi's family is fragmented and dispersed after the Pearl Harbor Attack. Her father was sent to interior British Columbia to road gangs and died from tuberculosis. Her mother who went to visit Japan, unable to return back to Canada, was disfigured by the atomic bombing of Nagasaki and died from her wounds. Obasan shows how Japanese Americans suffered from a forced internment through Naomi. This story ends with Naomi's return to the coulee implying her healing but it would be evident she could never be able to recover from her wounds. Consequently, the Pacific War ignited by Japan's long-prepared attack to the Pearl Harbor, is portrayed, very suspectful and discouraging in detail, Japanese American writings as a shameful history for Japan. Pacific War desolidates Japanese integrity and thus ironically foster assimilation into American society. Japanese Americans were victims of racial prejudice and had to suffer a lot only because he or she was second-generation Japanese. But it must be clear that all the sufferings the second-generation Japanese had undergone had been the aftermath of the 'Pacific War' and had accelerated their assimilation into the mainstream of American society. What is absurd must be that no Japanese accused their government of their suffering. Instead the Japanese Americans had pressed American government to admit their fault and thereby got compensation of 20000 dollars for their mistakes they had committed during the World War II. 122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キーワード;Pearl Harbor, The Pacific War, Japanese American , Relocation, Internment 투 고 : 2008. 8. 31 1차 심사 : 2008. 9. 12 2차 심사 : 2008. 9. 27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파란 바다 검은 바다(青い海黒い海)」論 -신감각파적 사상과 문장표현- 1) 유 재 신* (e-mail : [email protected] / [email protected]) 2) 目 次 1. 머리말 2. 혼돈의 시대 ― 시대적 특성 3. 가와바타와 신감각파이론 4. 작품세계 4.1. 구성 4.2. 주관의 문제 4.3. 자아의 혼돈 4.4. 만물일여의 세계 4.5. 이미지와 감각 5. 맺음말 1. 머리말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의 「파란 바다 검은 바다(青い海黒い海)」는 1925년 8 월 「분게슌쥬(文藝春秋)」에 발표되어, 1927년 3월 『이즈의 무희(伊豆の踊子)』(金星 堂刊)에 처음 수록되었다. 신감각파(新感覺派) 잡지라고 불리게 된 「분게지다이(文藝 時代)」에 초 단편 소설(掌の小説)1)을 제외하고는 가와바타가 처음으로 발표한 단편소 *忠南大学校 日語日文学科講師、日本近代文学 1) 초 단편 소설(掌の小 )이란 400자 원고지 몇 장에 불과한 작품으로, 170편이 넘는 가와바타의 초 단편 소설은 그의 문학의 원류를 엿볼 수 있으며 시적특성을 가진 것으로도 유명하다. 124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설인 만큼, 신감각파적 경향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하라 젠(原善)이 「신감각파 문학 이론의 실천으로서 쓰여졌다(新感覚派の文学理論の実践として書かれた).」2)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신감각적 표현이 많이 보이며 또 신감각파 이론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파란 바다 하얀 바다」는 발표했을 때 요코미츠 리이치씨가 아주 칭찬해 주었다. 그것이 인상에 남아있다. 그 후, 이 작품이 비평되거나 해설되는 것을 나는 볼 수 없 다. 나로서도 설명은 하기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지금 읽어보니 여러 가지 짚이는 단락도 있다. 나중의 「서정가」(1932) 등과도 통하는 데가 있다.3) 위와 같이 작가 자신이 기술하고 있는 것처럼, 이 작품은 발표 당시는 물론 이후에 도 크게 눈에 띄지 못했다. 선행연구도 적은 편인데, 요코미츠 리이치(横光利一)나 나 츠메 소세키(夏目漱石)의 문체, 표현의 영향관계를 비교한 것,4) 작가론적 자료 혹은 다 른 작품의 이해 속에서 부수적으로 언급한 것5) 등이 있으며, 작품자체를 대상으로 다 루고 있는 것은 비교적 근래에 나타나지만 역시 드물다고 볼 수 있다.6) 비평의 유무나 선행논문의 수가 작품의 가치와 비례한다고 할 수는 없어도 동시대의 작품 「이즈의 무희(伊豆の踊子)」나 「십육세의 일기(十六歳の日記)」 등에 비해 「파란 바다 검은 바다」에 대한 평가가 높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 작품이 주목받지 못한 이유는 문학적 가치보다, 작가도 밝히고 있듯이 작 품의 난해함도 적지 않은 요인을 차지하고 있다 할 수 있다. 자살과 소생의 반복적 구 조, 중층적 서술, 몽환적이고 난해한 환상 등 작품을 이해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많지 않은 연구논문의 절반 이상이 근래에 쓰여 졌다고 하는 것은, 연구 돌파구의 일 환이란 점을 고려해도, 이 작품이 새롭게 조명 받고 있는 것을 시사하고 있음을 알 수 2) 原善「『 い海 い海』―万物の照 / 合なき世界」(初出「作新 文」1989、12、『川端康成 ─その遠近法』大修 書店、1999、4、p48)이하 한국어 역은 필자 3) 川端康成「あとがき」(『伊豆の踊子 泉宿』岩波文庫、1952、2、『川端康成全集』33卷、新潮 社、1982、5,p633-634、본 논문 중 가와바타 작품의 모든 인용은 新潮社版『川端康成全集』 (1982-1984)에 의하며 이하 『全集』으로 표기한다. 4) 小川康子「『春は馬車に って』論─川端康成「『 い海 い海』との 連をめぐり」(湖〉南文 第 23 1989、3、p91-100)、小池 治「川端康成と夏目漱石─表現の系譜 『 い海 い海』『雪 』『伊豆の踊子』」(『川端文 への視界』第13 、1998、6、p10-24) 5) 羽鳥徹哉「川端康成と心 」(「 語と 文 」1970、5、『作家川端の基底』 育出版セン タ 、1979、1、p294-335)、小林一 「川端康成の初期作品─『花』を中心にして─」(『川 端康成 究─東洋的な世界─』明治書院、1982、9、p33-47) 6) 高 理子「川端康成『 い海 い海』孝─心中から自殺へ」(「瓔珞」1992、6、p71-76)、山 下 史「『 い海 い海』の世界」(「月刊 語 育」1998、2、p72-75)、吉田秀樹「『 い海 い海』論─新感 派馴化と〈岐阜一件〉の克服─」(『川端文 の世界1その生成』勉誠出版、 1999、3、p35-57、河野育子「川端康成『 い海 い海』孝」(「神女大 文」2004、3、p 66-72)、주2)도 이에 속한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파란 바다 검은 바다(青い海黒い海)」論 ····················· 유 재 신…125 있다. 아직까지 충분히 작품 자체가 논해지고 있지 않은 신감각파 이론과의 유기적 관 계나 인물분석, 표현 연구 등 고찰의 여지는 많이 남아있다. 본고에서는 우선 시대적 상황과 신감각파를 생각해 봄으로 작자의 문제의식을 파악하고, 나아가 작품의 구조와 표현을 분석함으로 그 문학성에 접근하여 작품 세계를 규명하고자 한다. 2. 혼돈의 시대 ― 시대적 특성 1925(大正14)년은 일본에 있어 다이쇼시대의 끝자락에 해당한다. 2년 전인 1923년 10 만여 명이 사망한 관동대지진이 일어났는데, 이는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시대를 촉발 하여 일본사회와 문학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 사회는 도시화와 근대화가 가속 되었 고 문학계에서도 새로운 동향이 이어졌다. 1924년 6월 프롤레타리아 문학잡지 「분게 센센(文芸戦線)」과 전위예술적 특성을 가진 시문학 잡지 「게 기무기가무푸루루루 기무게무(ゲエ ギムギガムプルルル ギムゲム)」의 발간에 이어, 10월 「분게지다이 (文芸時代)」가 창간된다. 가와바타는 이즈음 「다만 지진이 기성문예의 종점이고 신문예의 기점이 되는 것은 확실할 것이다. 지진전파, 지진후파라고 하는 식의 말이 살아있는 의미를 갖게 될지도 모른다.」7)라고 기술하고 있으며, 몇 년이 지나서도 「앞에서 말한 동인 열아홉 명의 작가와, 그들 이전의 작가─오늘날에도 더욱, 그 두 개의 작가군 사이에, 확실한 일선 이 느껴지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8)라고 회상하고 있다. 새로운 세대 의 문학이 출현하게 된 것인데, 그 특성을 가와바타는 「분게지다이」창간사에서 다음 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전략)「종교시대에서 문예시대로.」 이 말은 아침저녁으로 나의 마음속을 떠나지 않는다. 지난 세상에 있어서 종교가 인간 및 민중 위에 차지했던 자리를, 다가올 새로 운 세상에 있어서는 문예가 차지할 것이다. 이것을 믿는 것은 우리들의 사명감을 고무 하고, 생활감정을 바르게 해준다. 그리고 그렇게 믿는 것은 나 개인의 독단이 아니다. 사람들은 서양 예술론자의 정열적인 예언을 듣는 것이 좋다. 우리의 선조가 묘석 아래 에 그 시체를 묻고 서방정토의 영생을 믿고 잠든 것처럼, 우리들의 자손은 문예의 전 당 안에 인간불멸의 해결책을 발견하고 죽음을 초월할 것이다. 이 잡지는 그 전당으로 가는 아득히 먼 길의 한 장의 포석이다.9) 「분게지다이(文芸時代)」라는 잡지명도 가와바타의 제시에서 나온 것이다. 이전의 7) 川端康成「余燼文芸の作品」(「時事新報」1924、10、『全集』30 、p60) 8) 川端康成「『文芸時代』のころ」(「若草」1929、10、『全集』33 卷、p55) 9) 川端康成「『文芸時代』創刊の 」(「文芸時代」1924、10、『全集』32卷、p410-414) 126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종교시대에서 이제 문예가 사람들을 이끌어 가리라는 잡지의 특성과 포부가 잡지명과 더불어 설명되고 있으며, 이는 당시의 젊은 세대에게 환영받는다. 여기에는 가와바타의 예술지향주의 경향도 잘 드러나고 있지만 새로운 문예와 새로운 생활에 대해서는 가와 바타 자신도 문제의식을 안고 있었다. 그는 여기에서 「그런데 나에게는 생활은커녕 단지 하나의 생활조차 없는 것은 아닐까하고 스스로를 씁쓸해한다.」라고도 적고 있는 데, 이는 시대적 특성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 이 시대는 혼돈의 시대였다. 근대화를 통해 전통의 가치관과 문학 전통은 이미 상실 해 버렸고 젊은 세대들은 서양의 전통을 왜곡하는 일없이 이해하게 되었지만, 그 서양 문학이란 실제로는 추상적인 관념미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확실한 현실, 확실한 생 활을 갖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되었다. 고바야시 히데오(小林秀雄)는 이런 양상을 「고향을 잃어버린 문학(故郷を失つた文学)」이라고 표현했는데 가와바타의 「하나의 생활조차 없」다는 말과 서로 통하는 부분이 많다. 말하자면 도쿄에서 태어났으면서도 도쿄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것을 아무리해도 수 긍할 수 없다. 또 말하자면 자신에게는 고향이라는 것이 없을 것 같은 일종의 불안한 감정이다. (중략)나에게는 제일의 고향도, 제이의 고향도 아니 본래 고향이라는 의미를 모른다고 깊이 느꼈던 것이다. 추억이 없는 곳에 고향은 없다. 확고한 환경이 가져오 는 확고한 인상의 가짓수가 쌓이고 쌓여 만들어낸 강한 추억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고향이라는 말이 내포한 건강한 감동은 일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것도 내 어디를 찾 아도 찾을 수 없다.10) 고바야시는 이글에서 자신은 고향이라는 의미를 모른다고 하면서, 잡다한 빠른 변화 속에 「추억은 있지만 현실적인 내용이 없다」. 아름다운 자연에 감동하러 가는 것은 건전한 거라는 것에 어떤 확실한 현실적인 근거가 있냐고 물으며 산의 아름다움에 취 하는 것은 「추상적인 관념의 미」에 취하는 것과 비슷하다고도 서술하고 있다. 「자 신의 생활을 돌아보고, 거기에 무엇 하나 구체성이라는 것이 아주 결여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확실하게 발을 땅에 디디고 있는 인간, 사회인의 면모를 찾는 것은 쉽지 않 다」는 말에는, 전통과 가치관을 상실해 버린 불안한 동시대의 젊은 예술가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그들은 서양의 문명, 서양의 문학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한편 고향, 전통, 가치관을 상실해버렸기 때문에, 추상적인 생활과 추상적인 문학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 었던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기성문학의 대표적 작가 시가 나오야(志賀直哉) 문학은 생활에 기 반을 둔 작품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는 「문예적인 너무나 문예적인(文芸的な、余りに文芸的な)」11)라는 문장에서, 「시가씨의 작품은 무엇 10) 小林秀雄「故 を失つた文 」(「文芸春秋」1933、5、『新訂小林秀雄全集』3卷、新潮社、 1978、7、p29-37)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파란 바다 검은 바다(青い海黒い海)」論 ····················· 유 재 신…127 보다도 먼저 이 인생을 훌륭히 살아가고 있는 작가의 작품이다.」고 말하며, 그가 도덕 적으로 청결히 살고 있음과, 그런 속성이 시가 나오야 안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 고 서술하고 있다. 나아가 묘사의 리얼리즘도 「동씨(同氏)는 리얼리즘에 동양적 전통 위에 선 시적정신을 흘려 넣고 있다」고 평했다. 기성문학의 특성 중 하나가 삶과 문 학이 분리되지 않는 생활에 뿌리내린 문학임을 알 수 있다. 새로운 문학을 주도하는 새로운 세대는 주로 1900년을 전후로 출생했다. 그들은 예 술의 기반이 되는 확실한 인생관, 세계관, 미의식이 미약했다. 동양과 서양의 구별이 기성세대와 같이 확실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서양문학의 전통을 왜곡 없이 이해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일본이라는 현실에 살고 있는 그들이기에 실질적인 세계관, 미의식을 갖는다는 것이 어려웠다. 일본어를 사용하고 일본에서 생활하는 한 완전한 서양화란 있을 수 없다. 관념적인 인간, 의식과 현실이 일치되지 못하는 혼돈과 불안정함이 이들 의 특징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앞에서 인용한 가와바타의 창간사에도, 「자신의 생활 을 돌아보고, 거기에 무엇 하나 구체성이라는 것이 아주 결여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확실하게 발을 땅에 디디고 있는 인간, 사회인의 면모를 찾는 것은 쉽지 않다」고 서 술하고 있는데, 이 말은 그만의 느낌이 아니라 시대적 특성으로 파악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또한 이들은 공통의 목표를 상실한 시대이기도 하다. 메이지와 다이쇼 시대는 국가 라는 공동체의 목표를 추구했었다. 하지만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시대로 변하면서 그들의 공동체 의식은 희박해졌다. 혈연과 지연공동체가 붕괴해 가며 점점 개체로서 이리저리 부유하는 불안이 뒤따르게 된다. 일본과 서양이라는 두 개의 문화를 동시에 받아들임으로 감수성과 미의식, 가치관도 혼란스러워진다. 「나」자신이 불명료하게 되 고 정체성, 신체성이 혼란스러워진 것 또한 이 시대의 특징일 것이다. 사실 이즈음부터 사소설(私小説)이 감소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확신이 없는 시대, 혼돈의 시대, 불안의 시대, 이것이 이 시대의 특성으로 저류하고 있었음을 먼저 밝혀둔다. 3. 가와바타와 신감각파이론 가와바타와 신감각파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그 명명(命名)의 근저 가 된 「분게지다이」를 빼고는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분게지다이」는 요코미츠 11) 芥川龍之介「文芸的な、余りに文芸的な」(「改造」1927、4、『現代日本文 大系43芥川龍之介 集』筑摩書房、1969、8、p322-353) 128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리이치, 가와바타 야스나리, 가타오카 뎁페이(片岡鉄兵) 등의 동인잡지로 창간되었다. 치바 카메오(千葉亀雄)가 이들의 경향을 기교와 관능을 합성했다고 평하며 「신감각파 의 탄생」12)이라고 명명했는데, 이것이 문단에서 신감감파로 통용되는 계기가 되었다. 외부로부터의 명명은 이 잡지의 내실을 규정하는데 한계를 갖고 있었지만, 새로운 생 활, 새로운 문예를 시도한 이들의 경향은 당시 문단에 어필하여 프롤레타리아 문학잡 지 「분게센센(文芸戦線)」과 더불어 문예혁명 운동으로 환영받았다. 신감각파란 명명을 가와바타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간단하게 말해 「신감각주의의 본질을 근본부터 확실히 나에게 알려줄 사람은 없을까」에서 「신감각주의야말로 자 연주의에 대한 최초의, 그리고 정당한 반동이라는 견해를 나는 갖고 있다」라고 가와 바타의 언설은 변해간다. 요시다 히데키(吉田秀樹)13)는 이것을 「점차로 순화(馴化)시 켜간다」라고 지적하지만, 가와바타에게 있어 신감각주의는 신문예 제창(提唱)이라는 내발적 필연성에 외적 자극이 더해져 성립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신감각파이론을 발표한다. 자신이 있기에 천지만물이 존재한다. 자신의 주관 안에 천지만물이 있다. 이런 마음 으로 사물을 보는 것은 주관의 힘을 강조하는 것이고, 주관의 절대성을 신봉하는 것이 다. 여기에 새로운 기쁨이 있다. 또 천지만물 안에 자신의 주관이 있다. 이런 기분으로 사물을 보는 것은 주관의 확대이며, 주관의 자유로 유동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고를 진전시키면, 자타일여가 되고, 만물일여가 되어, 천지만물은 모든 경계를 잃고 하나의 정신으로 융화한 일원의 세계가 된다. 또 한편 만물 속에 주관을 유입시키는 것은 만물이 정령을 갖고 있다고 하는 생각으로, 바꿔 말하면 다원적인 만유영혼설이 된다. 여기에 새로운 구원이 있다. 이 두 개는 동양의 오랜 주관주의가 되고, 객관주의 가 된다. 아니 주객일여가 된다.(「신진작가의 신경향 해설」)14) 신감각파의 아방가르드적 성격과 가와바타 자신의 인식론을 밝히고자 한 문장이지 만, 위의 인용문에서 가와바타의 《만물일여 윤회전생》이라는 사상의 원형을 볼 수 있음은 널리 알려져 있다. 자타일여, 주객일여란 서양의 주체와 객체로 분리되는 대립 적 사고에 대하여, 동양적 상호관계, 즉 인식대상과의 융화로 바꿔 말할 수 있을 것이 다. 가와바타의 사상으로서만이 아니라, 신감각주의의 표현의 근거라고 기술하고 있는 것처럼, 의인법이나 비유의 묘사라는 문예표현에까지 이는 미치고 있다. 또 주관과 자 유라는 말에서도 기성문단과의 차별화를 꾀하는 가와바타의 방향성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이론을 표명한 이후, 신감각파 문예지 「분게지다이」에 발표한 것이 바 로 「파란 바다 검은 바다」인 셈으로 이 작품은 가와바타에게 있어 그의 이론의 실천 이라는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심감각파 이론의 실 12) 千葉 雄「文芸時評 新感 派の誕生」(「世紀」1924、11、p144-149) 13) 주6) 吉田秀樹 참조 14) 川端康成「新進作家の新傾向解 」(「文芸時代」1925、1、『全集』30卷、p172-183)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파란 바다 검은 바다(青い海黒い海)」論 ····················· 유 재 신…129 천이라는 면에서는 하라 젠(原善)의 선행연구가 있어 생략하는데, 신감각주의 표현에 있어 가와바타의 다음과 같은 문장은 주목해야할 필요가 있다. 말이라는 것을 지나치게 신뢰하고 있는 사람에게서 새로운 표현은 생기지 않는다. (중략) 인간의 정신 활동은 인간이 가진 말의 범위를 우왕좌왕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 니다. 철학이든 종교든 조금 깊은 정신적 탐구는 곧바로 언어의 저편으로 나가 버린 다. (중략) 현실을 강하게 응시한 사람은 현실의 저편에 나와 버렸다. 다시 말해 혼의 심연을 엿보았다.(「표현에 대하여」)15) 여기서는 사물의 본질과 현실은 일상적 표현, 통상적 시각으로는 표현할 수 없으므 로, 더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언어의 틀에 도전하는 작가의 자세와 문 학의 숙명을 이야기하고 있다. 요코미츠 리이치가 「신감각파의 감각적 표징이란, 한마 디로 말하자면 자연의 외상을 박탈하여 사물 자체로 뛰어드는 주관의 직감적 촉발물을 말한다.」(「感覚活動」)16)라고 표현했듯이, 이는 신감각파가 기발함과 참신한 표현을 위해, 의인법 비유법 과장법 등을 다용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4. 작품세계 4.1. 구성 「파란 바다 검은 바다」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있다. 〈제일의 유언〉〈제이 의 유언〉〈작자의 말〉이라는 부제가 각각 붙어 있는데, 유언부분은 「나」라는 인물 이 중심이 되어, 자살하기 전에 독백형식으로 쓴 문장이다. 그리고 〈작자의 말〉이 그 것을 설명하는 형태로 되어있다. 전체적으로는 액자형 혹은 중층구조라 할 수 있다. 「나」의 이야기가 중심 이야기인데, 그의 유언 안에도 몇 개의 이야기가 회상이나 환 상의 형태로 전개된다. 표층적으로는 〈제일의 유언〉→(동반 자살)→〈제이의 유언〉 →(자살)→〈작자의 말〉과 같이 직선적인 시간 진행에 따라 배치되어 있지만, 「나」 의 이야기는 의식이 흐르는 대로 회상, 환상이 뒤섞여 무질서하게 서술되고 있다. 우선 「나」의 이야기부터 살펴보자. 고아인 「나」는 현재 27세이다. 4년 전에 17세 의 기사코와 약혼했지만 깨져버린다. 작년 가을 기사코가 20세가 된 것을 깨닫고, 자신 이 알고 있는 17세의 기사코와의 거리감에 당황하지만, 환상 속에서 기사코와 죽은 자 신의 아버지를 보고, 그 놀라움도 사라져 버린다. 그 후 백모의 조카 리카코를 사랑하 여 고백했지만 실연을 당한다. 슬퍼해야할 그 순간이지만, 그는 기뻐하는 자신을 보며 15) 川端康成「表現に就いて」(「文芸時代」1926、3、『川端康成全集』32卷、p501-503 16) 光利一「感 活動(感 活動と感 的作物に する非難への逆接)」(「文芸時代」1925、2、 『現代日本文 大系51 光利一 伊藤整集』、1970、8、p192) 130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정상적이지 않은 감정에 불안을 느낀다. 그리고 올 5월 열병으로 의식을 잃고 있었을 때 기사코와 리카코의 이름을 불렀는데 리카코가 머리맡에 온 순간, 리카코의 이름만 불렀다고 한다. 열병에서 살아 돌아온 「나」는 7월의 그날 강어귀에서 별장 소녀의 하품에 놀라고, 갈대 잎을 보고도 놀란다. 그리고 리카코를 만나러 강어귀를 떠난다. 이것이 〈제일의 유언〉의 내용이다. 그리고 리카코를 만나 3일후 만월의 밤 바닷가에서 「두 사람이 죽어도 하나의 검은 바다가 없어지지 않는 것을 믿으면서」, 「나」는 리카코와 동반 자살을 시도한다. 안 고 있는 리카코의 가슴을 찌르고 자신도 리카코 위에 쓰러졌지만 그녀의 체온을 느끼 고 공포에 펄쩍뛰었다. 「나」는 의식을 잃으면서, 빠른 속도의 환상을 보고 「리카코 는 살아있다」고 느낀다. 한낮의 바닷가에서 의식을 회복했더니 리카코는 죽고 자신만 살았다. 나는 그때의 환상의 세계를 동경하며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이것이 〈제 이의 유언〉이다. 〈작자의 말〉은 「나」의 이야기의 해설적인 역할을 하면서, 〈제일의 유언〉이 동 반자살을 하기 전에 쓰인 것, 〈제이의 유언〉이 자살 작전에 쓰인 것을 보충 설명한 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는 것을 독자에게 보고하는 것으로 「나」의 자살을 완결시키고 있다. 이 〈작자의 말〉이 없다면 사실 「나」의 죽음이 완결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열병→소생→동반 자살→소생→자살→(소생)과 같이 〈제일의 유언〉 과 〈제이의 유언〉만으로는 「나」의 또 다른 소생담(蘇生談)이 성립할 가능성이 남 아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작자의 말〉에 의해 「나」의 소생은 부정되었으므로, 이 작품에 있어서 이 부분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나」의 죽음을 알리는 것으로, 「나」의 이야기의 종결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17) 따라서 「나」의 이야기와는 다른 또 하나의 「작자」의 이야기가 있다. 「작자」는 「나」의 소생의 가능성을 현실적으로는 부정하는 한편, 「그는 〈리카코의 생존에 대한 상징의 세계〉에 다시 살았을 것이다」라고, 생과 사의 경계 속에서는 그의 재생을 긍정하고 있다. 4.2. 주관의 문제 고아, 실연, 죽음 등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는 이 작품이지만, 그중에서 가장 주목해 야하는 것은 주관과 객관의 문제이다. 가와바타가 그의 신감각파이론에서 주관과 객관 의 문제를 대립적 관계에서 상호관계, 융화관계로 설명하고 있음은 앞에서 언급했는데, 「파란 바다 검은 바다」에는 그것이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17) 이에 대해 요시다 히데키(吉田秀樹, 주6) 참조)는 「살아 돌아온 나를 다시 죽음으로 모는 것 은 작자가 아니라 〈작자〉인 것이다. 이러한 구조로 서술되는 것으로, 사고무친한 의식을 묻고, 매듭을 지으려 하는 이야기인 것이다」라고, 가와바타와 연관지어, 사소설에서 벗어난 신감각파에 의 적응을 논하고 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파란 바다 검은 바다(青い海黒い海)」論 ····················· 유 재 신…131 하나의 갈대 잎입니다. 그 선이 점점 확실해져 왔습니다. 모처럼 가까워진 섬이, 그 때문에 점점 멀리 물러 나 버렸습니다. 갈대 잎이 내 눈 가득히 퍼져왔습니다. 내 눈은 하나의 갈대 잎이 되 어 버렸습니다. 이윽고 나는 하나의 갈대 잎이었습니다. 갈대 잎은 엄숙히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 갈대 잎이 강어귀랑 넓은 바다랑 섬들과 반도의 큰 경치를, 내 눈 속 에서 완전히 지배하고 있는 게 아닙니까. 나는 싸움에 걸려들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서서히 쫓아오는 갈대 잎의 힘에 눌려져 가는 것이었습니다. (『全集』2권, p207) 이 문장은 신감각파적 사상과 표현으로 가끔 거론되는 부분인데, 여기서는 원근법과 의인법을 통한 주관과 객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저 멀리 섬에 있는 갈대를 보던 중, 시선이 갈대에 집중이 되자 갈대는 점점 확실해지고 섬들과 그 밖의 풍경은 아련히 원 경이 되어버린다. 일반적으로는 가까이 있는 것일수록 크게 보이고 멀리 있는 것은 작 게 보인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보인다. 이것이 서양적 원근법이기도 하다. 원근법이 정확하게 적용된 서양화는 누가 보더라도 객관적이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옳은 것일 까? 동양화, 특히 일본의 그림 같은 경우에는 가까이 있고 멀리 있는 것이 중요한 것 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화가에 의해 강조하고 싶은 부분이 크게 그려져 있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동양적 주관의 세계이다. 실제로 우리가 무언가에 집중하면, 그것이 멀리 있더라도 그것이 더 잘 보이고 더 크게 보이거나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이것이야말 로 주관의 힘이라 할 수 있고, 동양적 객관의 세계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주관의 문제가 있다. 갈대를 보고 있는 것은 「나」이지만, 그 갈대를 보는 중에 「나」는 갈대가 되어 버린다. 갈대가 사람처럼 어떻다고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나」가 갈대가 되어 버린 것이다. 내 눈을 가득 채우는 갈대는 이미 객 체가 아니라 나와 함께 동화된 하나의 주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주체와 객체의 융화, 이것이 주객일여, 만물일여의 세계인 것이다. 이 작품에는 시간의 흐름에 있어서도 주관의 문제가 나타나 있다. 시간이라는 것은 아주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똑같이 흐르고 있는 것일까 하는 회의가 나타 나 있다. 〈제일의 유언〉에 기사코의 이야기가 나온다. 17세 때 약혼이 파기된 기사코 는 현재 스무 살이 되어있겠지만, 「나」의 기억엔 17세의 기사코인 채로 남아있다. 기 사코가 스무 살이 되었다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지만, 「나」의 주관적 세계에서는 여전히 17세의 모습 그대로인 것이다. 기사코와 죽은 아버지의 환상에서도 생(生)과 사(死)의 세계에 대한 반전이 그려져 있다. 인형과 같이 투명한 기사코에게 「나」의 아버지가 찾아와 이야기를 나눌 때 「나」는 그것을 그들의 외측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기사코의 화장대 위의 화장수였던 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네가 있는 생의 세계에는 두 명의 기사 코가 있는가. 또는 한 명의 기사코도 없는가. 혹은 너 혼자밖에 없는가.」라고 「나」 132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의 세계를 꿰뚫어 본다. 그는 또 「죽은 사람은 생존에 대한 신용이 약하다」고도 말 하는데, 현실과 비현실, 생과 사의 세계가 뒤섞여 있는 환상이다. 「나」의 빈사상태의 체험은 더욱 특이하다. 리카코와 동반 자살을 했을 때, 「나」 는 환상 속에서 「리카코는 살아있다」라고 리카코의 생존을 느꼈지만, 의식을 회복한 순간,「리카코는 죽었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나」의 죽음의 세계에선 리카코가 생 존하고, 「나」의 삶의 세계에선 리카코가 죽은 것이었다. 「만약 내가 살아 돌아오지 않았다면 어떨까요. 나에게 있어 이 세계는 〈살아있는 리카코〉의 드넓은 바다였지 않을까요?」라고 「나」가 말하는 것처럼, 「나」의 죽음이라는 주관적 세계에서는 객 관적 현실과 다른 현실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것을 「리카코의 생존의 상징의 세 계」라고 부르며, 시간과 공간을 정복한, 풍부하고 자유로운 세계라고도 말한다. 현실이란 생의 일부일 뿐이며, 현실은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부분적인 생의 일부일 뿐이라는 의식이 여기서는 강하게 엿보인다. 과연 지금의 세계가 당연한 것일까. 현실 이란 일부분이며, 가상의 세계일 수 있다. 이에 진정한 세계를 찾고자 「나」는 다시 자살을 시도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생의 전체를 회복하려는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에도가와 람포(江戸川乱歩)는 생전에 사인을 해줄 때마다, 「현실은 꿈, 밤의 꿈이야말로 진실(うつし世は夢 夜の夢こそまこと」이라는 문구를 함께 적어주었다는데, 이 와 비슷한 발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세계, 즉 생의 전체를 어떻게 손 에 넣을 수 있는가하는 것인데, 「나」가 자살한 것처럼 과연 죽음 밖에 답이 없는가 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진정한 세계가 정말로 추구해야할 매력적인 세계인가 하는 것 이다. 인간에게 있어 진정한 세계도 역시 관념적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다만, 가와바 타의 모티브는 현실을 부정함으로 주체와 객체의 대립적 사고를 벗어나, 혼돈 속에서 라도 새로운 세계를 그려내고자 했던 것이라 생각된다. 객관적이고도 주관적인 현실, 확고한 〈나〉를 상실해 가는 시대에서 그가 주창한 새로운 세계상, 즉 주객일여, 만물 일여의 세계가 여기에서 시도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4.3. 자아의 혼돈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절대적 객관을 끝없이 해체하며 상징화하는 주객일여 만 물일여 지향의 이 작품에서 「나」가 결국 자살해야 하는 필연성은 명확하지 않다. 하 지만, 그것은 「나」라는 인물의 특이성에서 찾을 수도 있는데, 다음은 「나」라는 인 물을 좀 더 구체적으로 분석해 보고자 한다. 「나」의 특징은 우선 고아이며, 평범하지 않은 자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태어난 그날부터 어머니의 품에 잠들 수 없었다.」라는 문장과, 「네가 태어나기 전 에 너와 헤어진 나」라고 자처하는 「죽은 아버지」의 환상 장면에서, 「나」가 양친 의 기억조차 갖지 못한 고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고아라고 하는 것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파란 바다 검은 바다(青い海黒い海)」論 ····················· 유 재 신…133 만이 아니라, 그에 따른 「평범하지 않」다는 자기인식을 가지고 있다. 「나」의 특이 한 현실인식은 주목할 만하다. 요즘, 나는 매일 강어귀의 모래벌판으로 낮잠을 자러 가고 있습니다. 바다에는 헤엄 치는 사람이 드문드문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에, 일부러 사람들 눈이 없는 강어귀까지 가는 것입니다. 나는 한 달 정도 전에 여자가 부르는 소리로 이 세상에 살아 돌아왔을 뿐인 몸이라서, 여름 해를 정면으로 받으면서 알몸으로 모래 위에 잠드는 것은 아주 해롭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런 식으로 자신을 파란 하늘에 활짝 내놓고 자는 것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좋습니다. 게다가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인생의 수면부족자인지도 모릅니 다. 인생에서 누워 잘 수 있는 의자를 찾고 있는 남자인지도 모릅니다. 나는 태어난 그 날부터 어머니의 품에 잠들 수 없었으니까.(p206) 이 작품의 서두에 해당하는 부분인데, 「나」는「태어나면서부터 인생의 수면부족 자」, 「인생에서 누워 잘 수 있는 의자를 찾고 있는 남자」로 자신을 받아들이고 있 다. 이 말에서 정신적으로 안정되지 않는 위태로운 고독감이 느껴지는데, 그 원인을 「태어난 그 날부터 어머니의 품에 잠들 수 없었으니까」라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나」의 고독, 불안의 감정은, 다름 아닌 어머니의 품에 잠들지 못한 결여감에 기인하 고 있으며, 그것이 타인 혹은 사회와 동떨어진 소외감에 이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 다. 게다가 이 세상에 살아 돌아왔다는 인식은 그의 이질감을 증폭시킨다. 「나」는 일 부러 사람들의 눈이 없는 곳에 와서 자신을 파란 하늘에 내맡긴다. 그의 이질감은 다 음 문장에서 더욱 강하게 나타나 있다. 리카코를 내려주고 나서, 나는 자동차 속에서 싱글싱글 미소 지었습니다. 기쁜 마음 이 보글보글 차올라 와서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실연을 했으니까 슬퍼하지 않으면 안 돼.」 그렇게 생각하고 자신을 꾸짖었습니다. 또, 이 동떨어진 감정의 움직임에 불안을 느 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뱃가죽으로 물속에 고무공을 누르고 있는 듯한 간지러운 기 분이 들었을 뿐, 곧 푸우 하고 내뱉어 버렸습니다. 「슬퍼할 때에 기뻐하는 자신은 칭찬할만한가. 다리를 북으로 옮기면서 남으로 가는 자신은 칭찬할만한가. 이것은, 신이여 다녀왔습니다. 하는 기분이야. 」 그런 식으로 장난하면서 나는 혼자서 미소 짓고 있었습니다. 유쾌하고 유쾌해서 견 elf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밝은 기분은 그날 하루뿐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다 음날부터 슬펐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리고 나서는, 자신에 대한 어렴풋한 의심이, 나의 주변을 태풍처럼 지나가고 있었습니다.(p212) 실연을 해서 슬퍼해야할 때, 기쁜 마음이 드는 「나」. 「실연을 했으니까 슬퍼해야 해」하면서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감정을 자신에게 찾고자 하지만 그것은「나」와 무관 하다. 이 특이한 감정에 나는 불안을 느낀다. 객관적 사실과 나의 주관적 진실이 전혀 다를 때 「나」는 당황하게 되고, 「자신에 대한 어렴풋한 의심」은 혼돈과 불안을 야 134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기하지 않을 수 없다. 「파란 바다 검은 바다」의 「나」는「보통(並)」이라는 세상, 즉 객관적 현실세계와 거기에 동화되지 못하는 주관적 자신을 인식함으로, 불안과 소 외감을 내재하고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안에는 객관적 현실이란 것이 과 연 옳은 것인가 하는 의문이 있지만, 자신의 주관적 세계에도 확신을 가질 수 없는 자 아가 있다. 자아의 혼돈과 불명료함을 여기서 엿볼 수 있다. 4.4 만물일여의 세계 4.2에서 언급한 대로 갈대 잎 묘사는 신감각파 이론의 표현이라 할 만한데, 거기서 「나」는 자신의 주관과 객관이 융화된 즉 만물일여의 세계를 경험한다. 하지만 「나」자신이 거기에 위압감을 느끼고 있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서서히 쫓아오는 갈대 잎의 힘에 눌」린 나는, 「추억의 세계 속으로 도망쳐 버」리는 것이다. 이에 대 해 하라 젠(原善)은 「그 만물이 융화된 범신론적 세계 속에 편입되어 있는 〈나〉자 신이, 거기에 위화감을 계속 안고 있다.」18)라고 설명하고 있고, 야마시타 마사시(山下 真史)는 「〈나〉가 〈싸움에 걸려들〉은 것처럼 느낀다는 것은, 공간이나 시간을 둘러 싼 통상의 사고와 주관에 충실한 느낌이 자신 속에서 서로 싸우는 사태를 가리키고 있 는 것」19)이라고도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나」의 내부에선 불안과 갈등이 계속되고 있는 것인데, 그 가장 큰 원인은 「나」의 고독한 자의식에 있다. 원근법이라든가, 실연했을 땐 슬프다는 객관적 세계를 남들처럼 인식한다면 「나」는 그대로 현실 세계에 안주 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주관적 세계에 충실한 주객일여의 세계를 느끼고 긍정하고 나면 그 다음은 불안과 소 외감이 뒤따른다. 「자신에 대한 어렴풋한 의심」이 「나」의 자의식을 갉아먹기 때문 이다. 따라서 그는 추억 속으로 도망치기도 하고, 파란 하늘에 자신을 활짝 내놓고 자는 것이다. 파란 하늘에 자신을 내놓고 잔다는 말은 서두의 문장, 「하얀 돛을 본 순간 나 는, 그 품에 새를 날려 보내고 있을 때의 파란 하늘처럼 무심했습니다.」란 말과 겹쳐 져, 무심(無心)을 향한 지향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여기서 「잔다」와 「무심」은 「인 생의 수면부족자」「인생에서 누워 잘 수 있는 의자」란 표현과 조응하여, 불안이나 소외감, 그리고 갈등이 없는 이상세계로 이해된다. 「파란 바다 검은 바다」에 주객일여의 세계가 그려져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나」에게 있어서는 「나」의 불안과 소외감을 재삼 인식시키는 현실이기도 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나」의 자의식은, 서두의 「절름발이 소녀」와 「앉은뱅 이 소년」의 묘사에서도 엿볼 수 있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언뜻 보기에 「나」의 이 18) 原善 주2) 참조 19) 山下 史 주6) 참조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파란 바다 검은 바다(青い海黒い海)」論 ····················· 유 재 신…135 야기와 무관해 보이지만, 「나」라는 인물을 분석하는데 있어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중 요한 부분이다. 「절름발이」와 「앉은뱅이」는 보통의 건강한 정상인들과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호칭 자체에 차별의식이 있으며, 결여된 불완전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 데 낮잠에서 깬 「나」는 해질 무렵의 파도 빛을 보고 바로「절름발이 소녀」를 떠올 린다. 그것도 「나」가 「여자가 부르는 소리로 이 세상에 살아 돌아온 인간입니다」 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나서 바로다. 그것은 이 소녀에게 무언가 걸리는 것, 아니면 유 사한 것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20) 소녀와의 유사점, 그것은 불완전함, 결여라는 자기인 식이 아닐까. 현실에 소외감을 갖고 있는「나」였기에, 사회에서 차별받는 입장의 그녀 에게 일종의 동질감을 느꼈다고도 볼 수 있다. 가족을 핵으로 하는 인간사회에서 태어 나면서부터 소외받고, 또 실연을 통해 스스로 가족을 만드는 것도 불가능하게 된 외적 요인은 물론이고,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내적 소외감도 이를 자극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묘사는 조금 특이하다. 곧 절름발이 소녀의 소형 자동차가 모래사장을 달려오는 시각이겠죠. 그 소녀는 별 장지기의 딸입니다. 별장 주인은 역시 앉은뱅이 소년입니다. 소년은 다리가 서지 않기 만 한 것은 아니라고 보입니다. 매일 해질 무렵이 되면 소년과 소녀를 태운 소형 자동 차가 바다에서 튀어 오른 물빛 공처럼 바닷가를 달리는 것입니다만, 소년은 아래턱만 움찔움찔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 소년에게는 가정교사가 붙어있습니다. 나는 그 남자 를 당구장에서 두 세 번 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소녀는 마을의 학교에 다니고 있습 니다. 그날도 강어귀의 모래벌판으로 가는 도중에,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소녀를 만났습 니다. 소녀는 목발 위에 치켜 올린 어깨를 박쥐 날개처럼 홰치면서 절룩절룩하고 춤추 듯이 모래사장을 걷고 있었습니다. 모래나 파도 위는 그림자 없는 칠월이었습니다. 돌 연 소녀는 큰 하품을 했습니다.(p205-206) 다카세 마리코(高瀬真理子)는 이 문장을 가리켜 「여기에 전개되는 현실은 이상하고 기분 나쁘다」, 「질서 정연한 현실 세계와 비교하면, 비틀어지고 전도(轉倒)된 세 계」21)라고도 말하고 있는데, 과연 그럴까? 다카세씨가 서술하고 있는 것처럼 위의 표 현은 일반적 감각에서 보면 기분이 나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의 감각에서는 친 근감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볼 수도 있다. 「바다에서 튀어 오른 물빛 공」,「절룩절룩 하고 춤추듯이」와 같은 표현에선 생기와 활동성이 느껴진다. 그것은 특이한 울림을 20) 가와바타는 「그런데, 정신분석학자는, 이 명확하지 않은 자유연상에서, 심리통찰의 열쇠를 발견 했다」라고 「新進作家の新傾向解 」(주14)에서 설명하고 있는데, 이 말은 여기서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21) 高 理子 주6)참조 136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가진 의성어의 리듬감과 신감감적 표현의 이미지 효과인데, 그것이 결여되고 불완전한 두 사람의 인물에 의외의 긍정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비틀어진 세 계에 있는 두 사람에게 굴절된 현실과 결여라는 동질의식을 느끼고 있다고 할 수도 있 다. 이 두 사람에 대한 연상은 결코 엉뚱한 것이 아니라 「나」의 자의식에서 유래한 자연스런 연상인 것이다. 열병은 「나」에게 하나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자신에 대한 어렴풋한 의심을 「나의 열병이 멋지게 배반했」다고 그는 말한다. 높은 열로 의식을 잃었던 「나」는 기적을 체험하고 소생한다. 리카코가 머리맡에 왔을 때 무의식으로 직감하고 그녀의 이름을 부른 체험은, 의식보다 무의식이 객관보다 주관이 진실을 파악하는 힘 을 갖고 있다는 자각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자신의 불안과 소외감이 구제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다. 「죽을 가치가 있다」는 중얼거림에서 이를 읽을 수 있는데, 야마 시타 마사시(山下真史)씨는 이것을 「세계가 반전하는 경험」이라 말하고 있다. 하지만 「리카코에게 자신의 이름이 불리고, 자신의 손을 잡히면서, 이 세상에 살아 돌아」22)왔다 해도, 의식을 가지고 생활하는 현실에 큰 변화는 없다. 「나」가 불안과 소외감으로부터 해방되는 순간은 역시 잘 때와 무심일 때뿐이다. 따라서 「나」는 그 순간을 지속시키기 위해 동반자살이라는 죽음을 선택한다. 하지만 그날 밤, 달이 너무나 밝았던 것도 잘못된 것이었을까요. 모래가 너무나 하 얗던 것도 잘못된 것이었을까요. 만월은 하얀 모래밭을 공기가 없는 것 같은 색으로 맑게 비추고 있었습니다. 달빛이 물방울처럼 똑바로 내릴 만큼 조용한 탓인지, 하늘이 움직이는 소리가 아련히 들렸습니다. 나의 그림자는 백지에 떨어진 먹처럼 검었습니 다. 내 몸은 하얀 모래에 불쑥 선 한 줄의 날카로운 선이었습니다. 모래사장이 하얀 천과 같이 사방에서 팽팽하게 말아 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나와 리카코는 그 삼일동안 송사리의 시체처럼 완전히 지쳐있다는 것을 어째 서 알아차리지 못했을까요. 그것을 모르는 만큼 나는, 「인간은 이렇게 새하얀 땅 위에 서서는 안 되는 거야.」 라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벤치 위로 발을 움츠려 버렸습니다. 리카코에게 도 발을 벤치 위에 올리게 했습니다.(p218) 두 사람이 죽는 밤의 장면이다. 여기에는 세상에 대한 위압감이 강하게 드러나 있 다. 「나」는 새하얀 땅 위에 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발을 벤치 위로 움츠린다. 자신 을 백색 위의 검은 선으로 생각하고 그 검은 먹을 지우려하고 있다. 자신의 존재를 지 우려는 듯, 발을 움츠리는 것에서는 「나」의 자기 소거(消去)라는 갈망을 읽을 수 있 22) 「태어난 그 날부터 어머니의 품에 안긴 적이 없었다.」와 비교하면, 이번 소생은 구원받을 길 없는 고독과 소외감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보이지만, 리카코가 어머니는 될 수 없는 것과 「나」와 결혼 할 수 없는 기혼자라는 것 등, 현실적으로 「나」가 구원받을 가능성 역시 극히 희박하다 할 수 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파란 바다 검은 바다(青い海黒い海)」論 ····················· 유 재 신…137 다. 파란 하늘과 같은 「무심」은 자신이 없어지는 「무아」에 이어지고, 그것은 죽음 에 이르게 된다. 「나」는 「검은 바다를 봐보렴. 나는 검은 바다를 보고 있으니까 나는 검은 바다야. 당신도 검은 바다를 보고 있으니까, 내 마음의 세계도 당신의 마음의 세계도 이 검은 바다야.」라고 말하고, 「두 사람이 하나의 검은 바다와 같이 서로 믿으면서」 동반 자 살을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의 죽음은 말 그대로 둘이 하나가 되는 죽음이 되지 못했다. 「나에게 모르는 말은 하지 말아주세요. 서로 믿으며 죽고 싶으니까. 정신 나간 소리를 하지 않아도 죽을 때 죽읍시다.」라는 리카코의 말에서 두 사람의 어긋남은 이미 확연 히 드러난다. 이치에 맞는 말보다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따라 죽는다는 태도가 리카코 에게서 보인다. 이것은 「나」와 대조적이다. 현실 혹은 객관적 세계의 반전을 바라며 죽음을 선택한 「나」가 이론을 가지고 그 객관성을 설명하려는 아이러니가 드러나고 있다. 몸도 마음도 하나가 되기 위한 두 사람의 자살 의도는 처음부터 붕괴되고 있었 던 것이다.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주객일여, 만물일여의 세계는 「나」의 말(이론)에 서는 성립하고 있어도 실제로는 불가능했다. 「나」가 살아 돌아와 보니 「바다는 새 파란」것이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불가능했던 세계를 「나」는 빈사상태에서 실현한다. 「나」는 「나와 함께 세계가 큰 고동을 울리는」 것을 느끼며, 「풍부하고 자유로운 환상의 단 편」에서, 「리카코는 살아있다」고 느낀다. 「나」의 말로 하자면 「리카코의 생존의 상징의 세계」를 경험하지만, 그 순간 「나」의 자의식은 사라져 버리고 그 속에 융화 되어 있었던 것이다. 비록 순간이었지만, 현실과 이론을 초월한 융화의 세계, 만물에 동화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나」가 다시 자살하는 이 유는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만물과 융화된 자기소거의 세계를 찾아, 「리카코는 죽었 다」라는 통렬한 자기인식의 삶의 세계를 버리는 것이다. 4.5. 이미지와 감각표현 이제까지는 「나」의 독특한 인물상에 유래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고찰해 보았는데, 다음은 표현을 중심으로 그 이미지와 감각의 세계에 대해 생각해 보겠다. 가와바타의 문학은 제목 속에 내용이 집약되어 있거나 상징성을 갖고 있어, 제목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경우가 많은데, 이 작품도 그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파란 바다 검은 바다」라 는 타이틀에 있어서, 청(靑)과 흑(黑)의 색채 이미지와 바다의 이미지는 작품해석에도 깊은 관련이 있다. 「파란 바다」가 삶의 세계, 「검은 바다」가 죽음의 세계를 상징하 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청과 흑이 바다라는 말에 의해 통합되고 있는 것도 간과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바다는 모든 것을 수용하고, 또 생성하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세계 문화상징사전』23)에서는 「대양은 원초의 바다, 혼돈, 무형성無形性, 질료로서의 존재, 138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끝없는 운동을 상징한다. 또한 모든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는 생명의 원천, 현현顯現된 가능성의 총체, 헤아릴 수 없는 신비, 〈우주령宇宙靈〉, 〈태모胎母〉를 뜻한다.」고 표현하고 있다. 끝없는 운동이란 한 방울의 물, 강, 바다와 같이 순환하는 자연, 즉 생 과 사의 윤회와 회귀의 이미지를 포함하고 있는데, 여기서도 그것은 통한다고 말할 것 이다. 「파란 바다 검은 바다」는, 삶의 세계와 죽음의 세계가 각각 객체 대 객체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본질에 있어서는 일원의 세계, 일여(一如)의 세계인 것을 나타내고 있다. 「나」는 「검은 바다」가 되기를 바라며 자살했다. 「살아 돌아와 보니, 바다는 새 파란」 삶의 세계였다. 그렇다면 「나」에게 있어 「나」의 전체상(全體像)은 삶의 세 계와 죽음의 세계 양쪽을 포함한 것일 것이다. 삶이라고 하는 현실이 해체되고 현실 이외의 죽음까지도 포함한 세계야말로, 존재의 전체상, 생명의 본질의 세계였다 할 수 있다. 「파란 바다」의 삶의 세계는, 생명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생명의 전체상은 삶과 죽음을 포함한 일원의 세계이며, 파랑과 검정을 포함한 바다라는 본질 의 세계로 상징된다. 「자타일여가 되고, 만물일여가 되어, 천지만물은 모든 경계를 잃 고 하나의 정신에 융화한 일원의 세계」(「신진작가신경향해설」)가 이 작품에서 바다 로 이미지화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바다가 갖는 상징성, 융화와 일원으로서의 이미지 는 이와 같이 작품 전체에 탁월하게 연결되어, 그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는 것이다. 또 바다의 연장선상에 있는 물의 이미지도 이 작품에서는 많이 볼 수 있다. 작품 첫 문장이 「돛단배의 뱃사공입니다」이고, 이어 「나」는 「강 물결 위의 외치는 소리에 멍하니 잠에서 깨어」난다. 〈제일의 유언〉의 배경은 「강어귀」인데, 「해변」「파 도」「배」「모래사장」「넓은 바다」등 바다와 연관된 용어가 빈출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표현을 주목해 보면, 바다나 강이 갖는 자연스런 흐름의 이미지보다, 역 류하는 이미지가 많이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면 「해질녘 가까이의 바람을 기다리고 있던 범선이 강을 올라왔던 것이겠죠.」라든가, 「매일 해질 무렵이 되면, 소년과 소녀 를 태운 꼬마 자동차가 바다에서 튀어 오른 물빛 공처럼 해변을 달리는 것입니다만」 등의 문장이 있다. 이것은 「이 세상에 살아 돌아온 인간」이라는 표현과 함께, 역류하 는 세계, 반전하는 세계를 나타내고 있다. 주관 대 객관의 이원론적 세계를 붕괴시키고 반전시키는 작품의 지향성이, 역류의 이미지에서도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나」가 갈대 잎의 배경에서 추억의 세계로 도망가는 것도 시간적으로는 과거로 거 슬러 올라가는데, 그 추억 속의 환상마저도 거꾸로 시간이 흐른다. 「나」는 기사코의 환상을 본다. 「그렇지만 이 인형은 맑고 투명했습니다. (중략) 꽃병이 인간으로 태어 나려고 어머니로 할 만한 소녀를 쫓고 있는 밤」과 같이, 시각적 또 수사학적으로 표 현하고 있는 문장에도 역류하고 전도된 세계가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 역류의 세계 23) J.C.쿠퍼, 이윤기역『세계문화상징사전』 도서출판 까치, 1994, 5, p253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파란 바다 검은 바다(青い海黒い海)」論 ····················· 유 재 신…139 는 「나」가 의식을 잃어갈 때, 가장 잘 나타나 있다. 그때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모든 것, 불처럼 뜨거운 작은 시내로 보인 유혈이랑, 뼈가 우는 소리랑, 거미집을 전해져 오는 물방울처럼 몇 개나 계속해서 흘러오는 아버 지의 얼굴이랑, 소용돌이를 치며 날아도는 외침 소리랑, 거꾸로 되어서 떴다 가라앉았 다하는 고향의 산들 따위, 어느 것에서도 나는, 「리카코는 살아있다.」는 한 가지 것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리카코의 생존」이라고 할 물결에 빠져버려서 발버둥치고 있었습니 다. 그리고 어느새 그 물결 위에 가볍게 떠서 흔들흔들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p216) 이 문장은 직유와 은유, 의인법, 과장법이 겹쳐 사용된 신감각적 표현이라 할 수 있 지만, 여기에서도 물의 이미지가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 빈사상태의 환상 중에, 「작 은 시내」「유혈」「물방울」「물결」「흘러」 등의 물과 관련된 단어가 상당히 많다. 그리고 그것들은 「날아」「떴다 가라앉았다」「가볍게 떠서」「흔들흔들 흔들리고」 라는 부유(浮遊)의 표현과 서로 어우러져, 태내 및 양수의 이미지를 끌어내고 있다.24) 시각과 청각, 피부감각 등이 어우러진 공감각적 표현은 많은 이미지를 낳고 있지만, 특 히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태내의 양수를 연상시키는 이미지이다. 「나」의 죽음의 체 험이 태내회귀와 상통하고 있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역류하는 삶의 세계, 일원 의 세계라는 의미에 있어 당연한 표현일 것이다. 또한 「나」의 독특한 자의식을 생각 할 때도 그 고독과 소외감의 원점인 태내로의 회귀가 필연적인 것일 지도 모른다. 태 내의 양수야말로 생명과 생명 이전의 세계를 잇는 세계이며 생명의 근원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물과 바다의 이미지가 여기에 겹쳐지는 것은 말할 필요 없을 것이다. 또 하나 주목할 만한 것은 생명의 본질, 근원에 접근해가는 감각의 문제이다. 삶의 세계가 해체되고 삶과 죽음이 융화된 세계야말로 「나」에게 있어서는 생명의 본질, 생의 전체상인 것은 앞에서 분석했는데, 그 세계의 큰 특징은 언어(의식 혹은 이성이 라 해도 좋다)를 넘은 감각이 우선하는 세계에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감각이란 의식으로서 해석되기 전의 느낌 자체라는 의미로서, 다른 말로 순수감각 혹은 직관이 라 해도 좋을 것이다. 동반 자살이후 소생하여 의식을 되찾았을 때, 즉 「나」의 생의 세계에서 「나」는 리카코는 죽었다고 언어(이성)로 의식한다. 이와는 반대로 빈사상태로 의식을 잃어 갈 때는 리카코는 살아있다고 《느껴졌다》. 이와 같이 생의 세계=언어(의식)에 비하여, 가사(假死)=느낌(무의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생명의 본질로 회귀할수록 언어로 구축된 사고적 세계가 아니라, 언어 이전의 느낌, 직관이 강하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생의 일 24) 가와노 이쿠코(河野育子, 주6)는 「신체에 보이는 부유감(浮遊感)」으로, 「붕하고」나 「날다」 「날리다」라는 표현을 지적하고 있다. 이것들도 「나」의 재생 순간의 묘사, 즉 「최초는 나는 밝 은 빛 속으로 확 떠올랐습니다.」와 같은 표현을 포함해서 생각하면, 넓은 의미로 탄생 직전의 양 수 안의 상태와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40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부인 현실세계는 의식 즉 말에 의해서 사고되고 구축되는 세계이지만, 생의 전체에 다 가가는 빈사상태는 사고 이전의 감각(느낌)이 우선하고 있다. 언어보다 느낌이 더 본질 적이라는 것은 내가 의식을 회복할 때 더 명확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역시--그 말이 이 세상의 빛과 사물의 세계의 밝음보다도 먼저 느껴졌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최초는 밝은 빛 속으로, 확하고 떠올랐습니다. 그때는 칠월 해변의 한 낮이었습니다. 하지만, 설령 내가 한밤중의 어둠 속에서 살 아 돌아왔다고 해도, 이 느낌은 같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맹인이라도 밝음과 빛의 느 낌은 가지고 있겠죠. 우리들은 어둠 속에서 눈을 떠도, 역시 밝음과 빛의 느낌이 생기 는 것이니까. 그리고 우리들은 이것을 눈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 느끼는 것 이니까. 생존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빛과 밝음을 느끼는 것이다 라고도 생각됩니 다.(p216) 눈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 느낀다는 표현은 인간이 가진 순수한 직관적 감각이야말로 생명의 본질에 더 가까운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이 작품 에는 생명의 본질에 다가서려는 직관적 감각이 그려지고 있는데, 그것은 공감각 (synesthesia)의 세계로 이어지고 있다. 「나」가 의식을 잃어갈 때 그 「풍부하고 자 유로운 환상의 세계」에서는, 「색이 소리가 되고, 소리가 색」이 된다. 시각과 청각이 섞이고 융화된 세계야말로, 더 근원적이고 직관적 세계의 모습을 보여준다. 기무라 사 토시(木村敏)가 『분열증의 현상학』25)에서, 「소리와 색 양자가 거기에서 태어나는 것 같은, 보다 근원적인 일종의 감각이 인간에게 갖추어져 있어, 그것이 인간과 현실세 계의 근본적인 연결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라고 오감 이전의 공감각적 세계를 말하 고 있듯이, 「파란 바다 검은 바다」에 있어서의 공감각적 세계는 신감각이론의 실천 이라는 기교로서만이 아니라, 본질적, 근원적 세계에 다가서려는 내용적 필연성과도 연 결되어 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들 공감각적 표현은 수사학적 의미에서도, 시각과 청각, 체내감각 등이 공명 함으로 인해 혼돈과 융화의 이미지를 전달하고 있는데, 이는 만물일여의 세계상을 감 각적으로 이미지화 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신감각적 표현은 복잡하고 기발한 표 현이 되지만, 이미지의 확대로써 감각에 호소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객관적이고 일 상적이지 않은 만큼 직관적이며 생명력 있는 표현이 되기도 하는데, 이것이 신감각파 이론에 나타난 작가의 사상이란 것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그런데, 언어나 의식보다 본질적인 직관적 감각을 긍정하면서도, 그것을 현실에 있어 서는 「유서」라는 형태로 「나」가 결국 언어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사실이 다. 「그때의 기분을 말로 표현하려면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을 뿐입니다」라고 「나」 25) 木村敏『分裂症の現象 』弘文堂、1975、6、p138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파란 바다 검은 바다(青い海黒い海)」論 ····················· 유 재 신…141 가 밝히고 있는데, 이것은 「작자」에게도 공통하는 것이며, 가와바타에게도 공통하는 문제이다. 언어를 가지고 표현하는 문예의 영원한 딜레마이기도 하지만, 사물의 본질과 현실을 더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언어의 틀에 도전하는 작가의 자세를 이 작품에서 비추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5. 맺음말 이상 「파란 바다 검은 바다」를 세밀히 분석해 보았다. 혼돈과 불완전성을 특징으 로 하는 시대성과 신감각파이론의 특성을 살펴보고, 이 작품에 나타난 문예적 세계도 규명해 보았다. 서양적 주객대립의 사고로는 수용되지 않는 신진작가의 새로운 세계관이 이 작품에 저류하고 있으며, 「나」라는 인물에서 시대적 불안과 소외감의 자아상을 엿볼 수 있 다. 또한 새로운 시대를 여는 새로운 문학을 제창한 가와바타의 내발적 필연성에서, 신 감각파라 명명된 외부적 자극에 의해 성립된 가와바타식 신감각파이론이 구현된 작품 인 것은 살펴본 바와 같다. 따라서 이 작품은 동시대의 지표로서의 의의를 갖고 있으 며, 가와바타의 만물일여적 세계관과 윤회 회귀적 시간관, 본질에 더 근접하려는 언어 관과 감각관 등의 사상적 특성이 함축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제일의 유언〉과 〈제이의 유언〉, 〈작자의 말〉이라는 액자형 구조로 구성된 이 작품은, 열병, 소생, 동반자살, 소생, 자살로 이어지는 재생담이 「작자」에 의해 종결 되지만, 여기에는 주객일여, 만물일여의 세계가 지향되고 있다. 세상과 현실로부터 소 외되어 있다는 자의식을 가진 「나」는 빈사상태에서 세계가 반전하는 경험을 하고 거 기에서 자기구제의 순간을 획득한다. 그 순간은 생과 사의 경계가 무너진 일원의 세계, 융화의 세계이며, 언어(이성) 이전의 근원적 감각, 생명의 본질로 회귀하는 세계이기도 하다. 그리고 표현(rhetoric)에 있어서도 회상과 환상의 자유연상이나, 복합적 비유, 직 유의 다용, 공감각과 이미지의 상징성 등이 신감각파 이론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며 작 품세계를 만들어 내고 있다. 특히 언어(이성)보다 우선하는 직관적 세계는 작품이 가진 생명의 본질에의 동경이 라는 필연성과 깊이 연결되어 있는데, 언어에 우선하는 감각을 긍정하면서도, 그것을 유서라는 언어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에, 작자 가와바타의 딜레마와 지향성도 비추 어 읽을 수 있다. 언어에 우선하는 감각이라는 사고 이면에는 언어 불신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 언어에의 불신이야말로 신감각파적 표현의 요인이 되고 있다고도 생각된다. 「파란 바다 검은 바다」는 생과 사의 세계를 일체로 보고, 사(死)의 측면에서 생의 세계를 집요하게 그려낸 작품 중 하나이며, 만물일여, 윤회전생 사상의 저류에 무아와 일원의 세계를 향한 갈망이 그려진 작품인 것이다. 작품에 대한 평가는 결코 높지 않 142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으나, 그 환상적 작풍이나 수사적 표현의 심층에 그려져 있는 독특한 작품세계는 가와 바타 문학에 있어서, 근대문학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전략)「나」를 없애고 「무」가 되는 것입니다. 이 「무」는 서양풍의 허무가 아니 라, 오히려 반대로, 만물이 자유롭게 통하는 하늘, 무애무변(無涯無辺), 무진장의 마음 의 우주인 것입니다.(「아름다운 일본의 나 ― 그 서설」1968, 12)26) 「파란 바다 검은 바다」에서 꿈꾸었던 세계는, 작가의 만년의 문장에도 깊은 영향 을 남기고 있다. 26) 川端康成「美しい日本の私」(「朝日新聞」「 日新聞」、1968、12、16、『全集』28卷、p35 2)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파란 바다 검은 바다(青い海黒い海)」論 ····················· 유 재 신…143 【参考文献】 〈전집류〉 川端康成(1924)「余燼文芸の作品」「時事新報」(『川端康成全集』30巻. p60) 川端康成(1924)「『文芸時代』創刊の辞」「文芸時代」(『川端康成全集』32卷. p410-414) 川端康成(1925)「新進作家の新傾向解説」「文芸時代」(『川端康成全集』30卷. p172-183) 川端康成(1926)「表現に就いて」「文芸時代」(『川端康成全集』32卷. p501-503) 川端康成(1929)「『文芸時代』のころ」「若草」(『川端康成全集』33卷. p55) 川端康成(1952)「あとがき」『伊豆の踊子 温泉宿』岩波文庫(『川端康成全集』33卷. 新潮社. 1982, 5. p633-634) 川端康成(1968)「美しい日本の私」「朝日新聞」「毎日新聞」(『川端康成全集』28卷. p352) 千葉亀雄(1924)「文芸時評 新感覚派の誕生」「世紀」p144-149 横光利一(1925)「感覚活動(感覚活動と感覚的作物に対する非難への逆接)」「文芸時代」(『現代日 本文学大系51横光利一 伊藤整集』1970, 8. p192) 芥川龍之介(1927)「文芸的な、余りに文芸的な」「改造」(『現代日本文学大系43芥川龍之介集』筑 摩書房, 1969, 8. p322-353) 小林秀雄(1933)「故郷を失つた文学」「文芸春秋」(『新訂小林秀雄全集』3卷, 新潮社, 1978, 7. p29-37) 〈단행본〉 木村敏(1975)『分裂症の現象学』弘文堂 p138 J.C.쿠퍼, 이윤기역(1994)『세계문화상징사전』 도서출판 까치 p253 〈논문〉 羽鳥徹哉(1970)「川端康成と心霊学」「国語と国文学」(『作家川端の基底』教育出版センター, 1979, 1. p294-335) 小林一郎(1982)「川端康成の初期作品─『花』を中心にして─」『川端康成研究─東洋的な世界─』 明治書院. p33-47 原善(1989)「『青い海黒い海』―万物の照応/総合なき世界」「作新国文」(『川端康成─その遠近 法』大修舘書店 p48) 小川康子(1989)「『春は馬車に乗って』論─川端康成『青い海黒い海』との関連をめぐり」「湖南文学」 第23号 p91-100 高瀬真理子(1992)「川端康成『青い海黒い海』孝─心中から自殺へ」「瓔珞」p71-76 山下真史(1998)「『青い海黒い海』の世界」「月刊国語教育」p72-75 小池清治(1998)「川端康成と夏目漱石─表現の系譜․『青い海黒い海』『雪国』『伊豆の踊子』」 『川端文学への視界』第13号 p10-24 吉田秀樹(1999)「『青い海黒い海』論─新感覚派馴化と〈岐阜一件〉の克服─」『川端文学の世界1 その生成』勉誠出版 p35-57 河野育子(2004)「川端康成『青い海黒い海』孝」「神女大国文」p66-72 144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要 旨 本論は川端康成の「青い海黒い海」を、時代性や新感覚派理論に結びついてその文芸的な 世界を精密に究明したものである。西洋的な主客対立の考え方には受容できない新進作家の新しい 世界観がこの作品の中に底流しており、「私」という人物からは時代的混乱や不安の自我像が窺 える。またこの作品は新しい時代を開く新しい文芸を提唱した川端の内発的な必然性に、新感覚派 命名という外部的追い討ちによって成立した新感覚派理論を意欲的に具現した作品でもある。した がって、この作品は同時代のメルクマールとしての意義をもっており、川端の万物一如の世界観、 輪廻 回帰的時間観、本質に近づこうとする言語観と感覚観などの思想的な特性などが含蓄され た作品であると言えよう。 この作品は〈第一の遺言〉と〈第二の遺言〉、そして〈作者の言葉〉という重層構造を持って いる。熱病、蘇生、心中、蘇生、自殺という「私」再生談は「作者」によって終わるが、その中 には主客一如、万物一如の世界が志向されている。世間と現実からかけ離れているという自意識を 持っている「私」は、瀕死状態で世界が反転する経験をし、そこに自己救済の瞬間を獲得する。 その瞬間は生と死の境界が崩れた一元 融合の世界であり、認識以前の根源的感覚を通じて生 存の本質に近づいた世界であった。そして、その表現(レトリック)においても、回想と幻想の自由 連想や複合的比喩、直喩の多用、共感覚とイメージの象徴性などが、新感覚派理論と緊密な関 係を持って、作品世界を織り出している。特に言語(理性)に優先する感覚(直観)の世界は、こ の作品に描かれている生命の本質への憧れという必然性に深くかかわっている。言語に優先する感 覚を肯定しながらも、それを遺言という言葉をもって表現せざるを得ないことに、作者川端のジレンマと 志向をも重ねて読み取れるだろう。今まで作品に対する評価はあまり高くなかったけれども、その幻想 的な作風、修辞的な表現の深層に描かれている独特な作品世界は川端文学において、そして近代 文学において重要な意味を持つ作品である。 キーワード:新感覚派、万物一如、疎外感、自意識、直観、生と死、言語観 투 고 : 2008. 8. 31 1차 심사 : 2008. 9. 12 2차 심사 : 2008. 9. 27 円地文子『妖』論 ─女の老いと性をめぐって─ 崔 殷景* (e-mail : [email protected]) 目 次 1.はじめに 2.円地文子について 3.中年の夫婦 4.女の老いと性 5.坂と老い 6.おわりに 1.はじめに 日本近代文学において老いと性の問題は、例えば倦怠を迎えた老人の性の可能性を 扱った谷崎潤一郎の『瘋癲老人日記』や『鍵』、または川端康成の『山の音』やネク ロフィリ─的肉体描写を施すまで老人の性と死に対する不安を描いている『眠れる美女』な ど、主に男の老いと性慾に関する作品が多く見られる。それで本稿では、これまで看過し てきた女の老いと性の問題に注目する。中でも女の性を真正面から扱っていると評価されて いる円地文子と円地の作品に焦点をあてて考察する。まず、円地と同時代に活躍していた 三島由紀夫の文章1)を借りて作家円地の位相を窺ってみたいと思う。 作者の筆は豊麗で艷美である。しかも一点の筆のゆるみもなく、それが作品に堅固な存 在感と、一種云おうようない花やかさを与えている。この花やかさの原因の一つは、各場 *東亜大学校 講師 1)三島由紀夫(1974)「円地文子」(初出「現代の文学20」(1964)、引用『作家論』(1974) 中公文庫.p.206 146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の情景を編み込む作者の丹念な言葉の択みの方から来ており、このようなニュアンスに充ち てしかも存在感のゆたかな言葉は、疑いもなく作者が日本古典の教養から得て来たもので ある。言葉のひとつひとつが、家伝の品々のように磨き込まれ、何一つ生な言葉の使われ ていないところに生ずるこのような眺めはもうこれからの日本文学には見られないものとなるで あろう。 上記の引用文は三島の『作家論』の中の「円地文子」編の一部である。三島は円 地の具体的な作品を取り上げながら、彼女特有の古典から得た華麗なる文章について評 価している。女性作家についてはあまり認めていないと知られている三島であるが、円地文 子だけは絶讃していた。三島も述べているように、円地文子は日本近代の女性作家の中 では一番文章が上手いといわれている。また、女性心理を深く見つめ、その奥底に秘めら れた哀れさや執念を巧みに描く作風で高い評価を得ている。が、作家と作品の研究はまだ 盛んに行われていないといえる。評論家の奥野健男は円地について「今日において日本の 伝統的な短編の技法をマスターしている数少ない作家の一人」であると述べている。そして 奥野は円地の作品には「きっちりとまとまった過不足のない」「一種の快感」2)を味わうこと ができると言い加えている。果してわれわれが円地の作品を通して味わえる「快感」とはどう いうものであろうか。それを明らかにしていきたい。 本稿では日本近代文学史においても多大な足跡を残し、数々の名作を生み出した円地 文子という作家とその作品を読み直し、新たな視点を提示していきたい。その具体的な考察 材料として短編小説『妖』(「中央公論」1956年9月)を取り上げていく。『妖』は 円地が51歳のときに書いた作品で、題名からも察することができるように、作品には中年夫 婦の倦怠した家庭生活と妖しい性というものが描写されている。ここでは中年女の視線に寄 り添って描かれていく様々な形の「老い」と「性」について考えてみたい。それで円地文 子の独特な作品世界に触れながら、中年における性の問題とどういうふうに関わっていくの かを探ってみたい。 2.円地文子について 作品研究に入る前に作者円地について簡単に述べておきたい。何故ならば彼女が歩ん できた人生の軌跡は彼女の小説より迫力に満ちており、当然のように作品にも大きく影を落と していると考えられるからである。 円地文子は1905年に著名な国語学者の上田萬年の次女として生まれた。国語学者の 2)奥野健男(1959 8)「永遠に怖れられる女─円地文子の文学」、『文学界』 円地文子『妖』論 ··········································································································· 崔 殷 景…147 父をもち、江戸時代のにおいを身につけた祖母の影響もあってか、彼女は小さい頃から能 狂言、歌舞伎、邦楽に加えて古典に精通していた。そして、十代のおわりからは築地小 劇場を旗揚げした小山内薫にあこがれ、戯曲を書きはじめる。1926年には『ふるさと』で 劇作家として活動を開始するようになり、処女作上演の記念パーティーの席上で小山内が 倒れて死去したことは有名な逸話である。このように、劇作家として出発した円地は結婚を 境に小説家に転じるようになる。25歳の時に円地は新聞記者の円地与志松と結婚し、翌 年長女素子を出産すると同時に小説家として動き出す。しかし、当時は小説家としてあまり 評価されておらず苦労していた。それが56年『朱を奪うもの』や『妖』などを発表すること によってついに文壇的地位を確立するようになる。これについて小笠原美子は、円地が 『妖』以前まで描いてきた女性像は作者「自身から反省的に対象化されて行動力を阻害 された女達であ」り、「女達が行動に踏み切れなかったのは、その情熱や生命力が様々 なものによって抑えつけられていたためで」3)あると述べている。そういう行動する女達の原動 力になるのは、それぞれであろうが、おそらく作者自身の積極的な意識表現が反映されて いるのであろう。つまり、円地は『妖』以降の女性像には生命力を甦らせる方法を見い出 せるようになったといえる。 円地は1957年、代表作といわれる『女坂』を上梓し、第10回野間文芸賞を受賞して から次々と名作を発表していった。また1967年から73年にかけて完成した『源氏物語』の 現代語訳は高く評価される力作である。円地は1985年に文化勲章を受章するなり、多数 の賞を総なめにするほど作家活動と作品性を認められていた。が、1986年、享年81歳で 他界してしまう。 このように、円地の生涯は何一つ不自由なものなどなかったようにも見える。しかし、60年 間という長い作家生活で文学の方においても個人生活においても波乱万丈であったといえ る。実のこと、円地は幼い頃から病弱であって生涯数々の病気に見舞われていた。彼女 は33歳の時に結核性乳腺炎で乳房を切断し、なお1946、41歳には子宮癌で子宮を摘出 することになる。このように、円地が精力的に作家活動に乗り出したのは、乳房や子宮と いった、いわば女性器官をなくしてからである。古屋照子によると、「女の器官を失った円 地にとって、女性の肉体は限りない郷愁の源泉だった」とし、「失ってみてその尊厳と神秘 が初めて身に沁みて感じられ、それを表現することに情熱をおぼえた」4)と指摘している。こ うした身体、いわば性的器官の喪失は作家として円地にも影響を与え、ジェンダーとしての 女が批判的に描かれている作品が多々ある。もちろん、そこには作者自身の視線がかなり 意識されていると考えられる。 特に彼女が中年になってから発表していた小説には既婚者としての、あるいは中年の女と 3)亀井秀雄 小笠原美子 共著(1981)『円地文子の世界』、創林社.p.58 4)古屋照子(1996)『円地文子─妖の文学』、沖積舎.p.213 148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しての苦しみや悲しみが滲み出ている。彼女の作品には『女面』、『女坂』、『朱を奪 うもの』や『妖』など、「女」に関する題名が多いのも目をひくところである。それは円地 がいかに「女」という性に執着していたかという証でもある。 すなわち円地の作品に登場してくる女に注目し、女が直面している「老い」と「性」の 問題について考えてみたい。このように、作品を構成する重要な要素としての「老い」や 「性」の問題は作者円地の意識とも深く関係していると思われる。本稿で扱う『妖』にも 肉体の問題や本性などが表現されており、中年女性の心理の動向が繊細に描かれてい る。では、次の節から具体的に考察していく。 3.中年の夫婦 「中年」の辞書的意味は「青年と老年との中間の年頃」で「40歳前後の頃」であ る。なお日本厚生労働省の一部資料によると、青年期は15から24歳、壮年期は25から44 歳であり、そして中年期は45から64歳であると定義されている。こうした定義を借りることもな く、『妖』に登場する夫婦はまさに中年期の年頃である。終戦後の東京、神崎啓作と千 賀子は二人の娘を九州とアメリカへと嫁がせて、今は夫婦二人きりの生活を営んでいる。し かし夫婦とはいえ、啓作と千賀子は家庭内別居同様の状態で、愛し合う様子は見当たら ず、単に共同生活を黙々と行っている。作中には中年夫婦の倦怠な日常が浮き彫りになっ ている。次に引用した文章にはこうした神崎夫婦の関係が端的に表われている。 啓作と千賀子が話せば、必ずこの程度の食い違いは一つ一つの会話から生まれるので ある。啓作は平気だったが、千賀子はそういう理解のずれを語学に通じない外国人同士 の対話のように焦れったがり、隅々までテンポのあった会話にしようとあせるので、実際には 行きちがいは一層烈しくなった。(p.83)5) 上記のように、夫婦の会話は「食い違い」を見せ、同じ母国語を使っていてもまるで 「外国人同士の対話」のように、結局は気持ちが「通じない」状態である。夫婦は一つ の屋根の下に暮しているものの、コミュニケーションの不通のため、お互いに理解し合えない 関係になっているのである。言い換えれば、啓作と千賀子とは夫婦であり家族であるにもか かわらず、あたかも他人同士のような「行きちがい」を感じているといえる。こうした中年夫 婦における思いのズレはいつから、またどこに起因しているのであろうか。一つの手掛かりは 「花瓶」というものから探ることができる。 5) 本文の引用は『妖 花食い姥』(1997) 講談社文芸文庫による。 円地文子『妖』論 ··········································································································· 崔 殷 景…149 啓作の自慢の呉須赤絵の花瓶には厭な思い出がからんでいた。夫婦だけの秘密でも あったが、同時にそのことが前から言葉の通じ合わなかった啓作から、一層はっきり千賀子 を引き離した。(p.84) この作品において「呉須赤絵の瑞瓢形花瓶」がもつ意味性は大きい。先行研究で ゾーイ ジェスティコ6)は、啓作の「エロスの対象として花瓶の意味」を論じ、花瓶の形とメ タファ─の役割を語っている。すなわち、花瓶に対する啓作の「深い執着」と千賀子の嫉 妬心を解釈し、作品全般における花瓶の役割を考察している。 作品から読み取れるように、「呉須赤絵の花瓶」は啓作にとって自慢の骨董品であり、 また千賀子にとっては「厭な思い出」の象徴として位置付けられている。いったいどういうこ とで夫婦が一つの花瓶に対し異る感想を持つようになったのであろうか。作中に啓作は若い 時から骨董に凝っており、彼の蒐集品は終戦後に神崎家の生活費の資源にもなっていた。 しかし、次女品子が病気の時、「呉須赤絵の花瓶」を売れば療養費に当てることができ たのに、彼は最後まで花瓶を手放さなかった。その代わりに妻の千賀子に春本の英訳の仕 事を暗黙に勧めたのである。啓作が骨董集めに夢中になって月収の大部分を書画や陶器 といったものに使っているあいだ、千賀子は二人の子供に愛情を注いでいったのである。千 賀子は銀行勤めだった夫が殖民地の国々を20年近くまわっているうちに、初めの10年ほど は一緒についていったが、あとは子供の教育を名目にして東京を動かなくなり、しばらく夫婦 は離れ離れの生活をしていた。このように啓作と千賀子の間にはすでに10年という時間の隔 たりができている。要するに千賀子にとって最愛の存在は遠く離れている夫よりも自分の子供 である。と同じく、夫の啓作には花瓶がそれであるといえる。それで啓作は娘の療養費とし ても最愛の対象である花瓶を売ることはできなかったのであろう。このように、お互いにそれぞ れ違う価値観と生活志向は相手との「食い違い」をもたらすとともに、しまいには相手に対 する無関心へと変わっていくのである。本文には千賀子に対する啓作の無関心ぶりが具体 的に描写されている。 まして、 別居同様なこの数年の生活では 、 千賀子が義歯を入れて口もとが変わろう が、遠視の眼鏡をかけたりはずしたりしようが、啓作は妻の容姿について一向無関心なの であった。(p.91) 例えば、夫の啓作は千賀子が断髪したときも二ヶ月も気付かないままにいた男であり、妻 の容姿の変化にはまったく鈍感である。このように、夫婦の日常における些細な行きちがい は際限なく続いてゆくのである。これに関しては「エロスがはたらいていないとき、男はそれほ 6)ゾーイ ジェスティコ(2004)「円地文子『妖』論─花瓶の役割を中心に─」、「詞林」 (31号) 大阪大学古代中世文学研究会.pp.73-75 150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ども女の姿に気をとめていない」7)からであるという意見もあるが、お互い相手に対し興味も 示していない夫婦の間に性(エロス)とは、まるで中年になって髪が抜け落ちてしまい、薄く なっていくように、衰えていくものであろうか。ところが、夫婦はエロスの対象から遠くなってい くといっても、二人は改めて共通の部分を認知し、関係を築いていく。 作中の夫啓作は妻の千賀子より10歳も年上である。ということは、夫の方が妻より老いに 近いといえる。上記の引用のように、啓作の方が千賀子より先に義歯をしており、最近は薄 れていく髪を心配して養毛剤さえ使っている。このように、皮肉なことにも中年の二人は老い ていく身体の変化に共感している。そして老化現象により、年齢や男女の差を越えてお互い に近似性、あるいは同質性までを見出していく。 食べ物の種類でもこういう同じ状態の歯に合うものを選む点で、昔は嗜好の違っていた 啓作と千賀子の間が、いつの間にかどちらからともなく近よっていた。(中略)こうして同じ ような食物をつつき合いながら、同じような入歯の入った姥口をすぼめ合って、別々の老年 が一つの家の中で止むを得ず互いの自我を摩滅させて行くのかと思うと、千賀子は老いる ことの呪わしさに呻き出しそうな昂奮を覚えたのである。(p.105) 引用からわかるように、気の合わない二人ではあるが、いつの間にか些細な嗜好までが 近寄っていたのである。しかし、二人が例え老いという同質性を感じたとしても夫婦の間に再 び愛情が芽生え始めることはない。強いていえば、夫婦は相手を性的対象として見ている のではなく、他者という鏡に映し出されている自分の姿を見ているのであろう。それゆえにこそ 相手に性的魅力や性欲を感じるというより、鏡に映されている老いた姿に狼狽の色を隠せな かったり、または冷ややかな視線を送る。このように、二人は今までの関係を保ちながら、 更なる夫婦関係の変容を見せていく。ここで作品の最後の部分を引いておこう。これまで食 い違いを見せてきた中年夫婦という似た者同士の暗黙の交感が読み取れる。 狐につままれたような呆けた顔で、寝間着の啓作と千賀子は雨後の濡れ光る坂道の真 中に立っていた。顔を見合わすと何とも言えぬ奇妙な笑いが、二人の同じようにすぼんだ口 のあたりに浮んでいた。(p.110) ある日の夜、千賀子が寝入った時に「けたたましく鳴るベルの音に眼を覚ま」してしまう。 啓作も起きてきて、二人が外へ出て窺うと、若い男女が神崎家の門によりかかってキッスを していたせいで、家中にベルの音が鳴り響くというハプニングが発生したのである。引用文 は啓作の怒鳴る声に驚いて「坂の下へ駈け降りてゆく」若い二人を寝間着姿の夫婦が 「奇妙な笑い」を浮べながら眺めている場面である。ここで中年夫婦と若い男女の姿は妙 な対照を成している。若い男女の「ぴったりよりかかっていた身体」と別居同様な生活をして 7)河合隼雄(1993)『中年のクライシス』、朝日新聞社. p.102 円地文子『妖』論 ··········································································································· 崔 殷 景…151 いる夫婦の日常は比較に値する。そして義歯を外した「同じようにすぼんだ口」をしている 夫婦は不思議な感情に包まれ、二人は自分と似ている相手の姿に思わず笑ってしまったの である。そして二人は遠く逃げていく若い男女の姿から過去の自分自身を改めて思い出し ていたかもしれない。なかでも千賀子にとって若い二人の影は次のような思いをもたらしてい る。 千賀子はまだ夢のつづきのように、坂を駈け降りてゆく白い二つの影を見ていた。寝入る まで考えていた物語の中の空想が現実に重なって来て千賀子を惑わさせた。(p.110) 上記のように、夜中に啓作と千賀子が見ていた青春の姿は、少なくとも千賀子には二重 の意味をもって映っているのであろう。「坂の下へ駈け降りてゆく」男女の影は、確かに現 実のことでありながら、また現実ではないようである。それはまるで「空想」と「現実」が重 なる夢幻的光景のように映される。要するに千賀子が見ていた「駈け降りてゆく」青春の影 は、老いを迎えつつある夫婦の現実を浮かび上がらせるための陰影である。と同時に、中 年の二人から逃げていく性愛(エロス)という幻影ではないのであろうか。 心理学者の河合隼雄は「お互いに似たところでは関係がつながっていて、違うところで は発展していく」8)と語っている。啓作と千賀子とは共通の老化という同質性が二人を結び 付けている。一方で、相手とは異る価値観のもとで各々の生活を営んでいくのであろう。要 するに、中年の夫婦にとって若さの喪失は必ずしも不幸ではないようである。相手と共に年 老いることが老いることの辛さを忘れさせてくれる。老いによる心身の変化と共に夫婦のあり 方も変化していくといえようか。 4.女の老いと性 先に言及した古屋は、円地の作品について「女の性の欲望が滲むように描かれてい る」としながらも、「そうしたエロチシズムには、きまって肉を越えた精神的な苦悩や憧憬がう かがわれる」9)と述べている。こうした指摘は『妖』にも当てはまるのであろう。この短篇に おける視点人物は千賀子であり、また作品は彼女の認識によって描かれている。それで千 賀子という女が対峙している老いや性の問題が浮上してくる。古屋がいうように、この作品 には女の「性の欲望」、あるいは老化現象から得られる「精神的な苦悩や憧憬」が表 われている。 いうまでもなく「老い」は誰も避けて通れない事であり、それによって身体機能は低下し、 様々な変化を与える。このような身体や容貌などの変化は精神的な面にも影響を及ぼして 8)河合隼雄(1998)『こころの声を聴く』、新潮文庫. p.130 9)古屋照子(1996)『円地文子─妖の文学』、沖積舎. p.214 152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おり、性的な問題とも大きく関わっていく。ということで、この節では中年女性の老いと性に 対する態度、すなわちそれらの問題をどういうふうに受け入れているのか、なお、老いと性の 問題はどういうふうに関連していくのかを明らかにしていきたい。 『妖』には中年夫婦の老い衰えゆく身体的徴候が頻繁に描写されている。特に千賀子 の視線から窺える老いの様相は多様である。それは次のようである。 千賀子は年の割に白髪のないのを秘かに自慢していたのだが、髪のうすくなるのは染め ることの出来る白髪よりも遥かに情けない女の老い方を予想させた。(p.92) 眼を凝らして見ると、濃すぎてうっとうしがった眉も睫毛もいつか薄れて、眼の縁から額へ かけて変に冷たい落ちつきのひろがっている中年の顔を千賀子は憎んだ。(p.95) 眼鏡だの義歯だの、やがては他人の髪でつくった髢だの、肉体と別のさまざまなものを 鎧兜のように身につけて、猶若く見せたい美しくありたいと渇くほど願う自分は、一体何もの なのであろう。(pp.98-99) 作中の千賀子の年齢は明確に表示されていないものの、具体的な外見描写を通して彼 女の現在の姿が容易に想像できる。引用したように、白髪を始め、眼鏡、義歯、髢など は作中に「老い」の表象のように描写されている。千賀子は髪、眼、歯、肌に至るま で、すでに肉体の衰えを経験している。彼女は女の老いについて「情けない」と意識し、 加齢によって醜くなっていく自分のことを「憎んだ」りもする。そして、いつの間にか老いてい る自分に対して「一体何ものなの」かと虚しい自問にまで至る。これは中年を生きている千 賀子にとって老いとはアイデンティティに関する深刻な問題であることを意味する。以前の千 賀子は老いることなど気にせず、むしろ誇りにまで思っていた。ところが、千賀子がこのよう に自分の容貌について敏感に意識し始めたのはあるきっかけがあった。それは夫の啓作が 妻に発した一言からである。長女が外国に出発した日の夜、啓作は珍しく千賀子に馴れ 寄ってくる。千賀子が「啓作の眼色」にときめきさえ感じていたとき,夫の「髪の生え際が めっきり薄くなった」という無神経な一言に彼女は傷ついてしまう。一方の啓作は妻の心を傷 つけたことなど全く気づいていない。 やっと妻の容姿について「骨董品に対するような細かい眼を利か」した啓作であるが、こ れに妻は夫のやさしさを感じるというより、かえって不快感を覚え、老いることに対して敏感に 反応していくようになる。 一方、『妖』にはもう一人の人物が登場している。「遠野滋之」という33、4歳になる 「新制大学の国文の教師」の男である。千賀子は春本の英訳の仕事から、今は『伊勢 物語』の英訳を手がけており、遠野はこの四、五年来の古典英訳の協力者である。ここ では千賀子の仕事と、遠野という人物に注目していきたい。何故ならば、それらは千賀子 の精神的な変化に影響を与えているからである。作中の千賀子は英訳の仕事をしてから、 円地文子『妖』論 ··········································································································· 崔 殷 景…153 性について積極的に意識するようになり、関心を持ち始める。次の引用からは性に関する 千賀子の微妙な心の揺れが読み取れる。 描かれている文章が美しいのではなくて、男によって女の幸福になる瞬間というものを遂に 現実の生活で知らなかった千賀子には、恰もそれが肉体の交歓を通して実現されたかのよ うに書かれていることで、心身が揺れ立つのである。(p.89) 夫の財布にどれほどの札が入っているか知らないように、千賀子は二階の鍵のかかる部 屋に一人で冷たい陶器や書画の幅と一緒にいる啓作が、一体どんな風に性の欲求を始 末しているのかまるで知らないのである。(pp.90-91) 千賀子は夫と同じ屋根の下に生活をしているものの、夫婦は各自二階と中二階に部屋を 持ち、「それぞれ相手を気にしないことで陰気に平穏に」生活を送っている。千賀子が翻 訳の仕事に集中し、それで稼いで自分の生活を営んでいるように、啓作も骨董品に夢中に なっている。千賀子と啓作は夫婦でありながら、お互いの収入から性的欲望に至るまでわ からずじまいである。こうした二人は当然のように肉体関係を持ってない。前に触れてきたよう に、啓作の骨董品に対する深い執着は性的(エロス)対象として解釈することができるの であろう。啓作の空間である「鍵のかかる部屋」とは、まるで彼の「愛している骨董品」 に対する隠密な欲望の象徴のようにも読める。 一方、千賀子は翻訳の仕事から作品の恋物語に魅せられて、「現実の生活で知らな かった」「女の幸福」を願望する。ここでいう「女の幸福」とは肉体の営みからくる性的 交歓を指し示している。千賀子は結婚生活のなかで満たされることのない欲望を作品という 架空世界の人物を通して目覚めさせられ、そのうえ彼女自身が物語を書いて登場人物に 内的欲望を仮託していく。簡単にいえば、千賀子が書いた物語というのは若い人妻と音楽 学生との不倫の内容である。人妻は彼の貧しい生活を援助するために夫の「呉須赤絵の 花瓶」を持出して彼に渡そうとする。そのとき、「抱擁した男の手から」花瓶が落ちて「真 二つに割れてしまう」ことで物語は終わっている。ここでは千賀子の物語に登場している 「呉須赤絵の花瓶」に注目していきたい。というのは、それが夫啓作の愛している骨董品 と重なっているからである。さらに千賀子は男女の愛し合うさまを描きながら、啓作に「復讐 している快感を味わえ」たとしている。言い換えれば、千賀子は幻想的世界ではあるもの の、夫の愛情の対象である花瓶を割ることによって、現実的な喜悦を感じることができたの であろう。千賀子にとって「肉体の交歓を通して実現され」る「女の幸福」とは夫から与え られるものであり、愛と性の飢えもまた夫によって癒されることができると認識している。しか し、千賀子は衰え行く肉体を夫から指摘され、彼とは心の距離を改めて感じており、夫の 視線から性的魅力を持たない存在としての自分を確かめていたのである。それは中年の女 は女性性からも離れていくことを意味するのであろうか。そのためか千賀子は夫に「髪の薄 154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れを見てとられてから」、「髪形や化粧に身を入れるようにな」り、老いによる身体の変化 に反発をあらわにする。つまり、千賀子にとって髢や化粧などは老いを隠すための「鎧兜」 であり、「猶若く見せたい美しくありたいと渇くほど」の切実な願望である。 このように、千賀子は老いることと性の問題を緊密に関連づけ、肉体を〈性的存在〉と 認識している。ところが、千賀子のこうした観念に新たな視点を提示してくれる人物が遠野 である。先に言及しているように、遠野は「千賀子の翻訳のアシスタントとして千賀子の単 調な生活に刺激を与える」人物である。作中に遠野は戦争中、「ソヴェート」での抑留 生活のため歯が抜け落ち、若い年齢なのに義歯をしている。千賀子は義歯という共通点か ら年齢差にもかまわず遠野に親近感を覚える。ある日、恋愛物語を話し合っている途中に 千賀子が遠野に義歯のせいで「奥さんと接吻する時」変ではないかと聞く。千賀子は以 前から内心に遠野の義歯を意識し、「結婚の不可能な男」であると思っていたのである。 それで遠野の結婚生活を直接に聞いてみたのであろう。しかし、遠野は円満な夫婦関係を 強調しながら、前と違う千賀子の積極的な言動に驚きを隠さない。 要するに、千賀子にとって義歯は老いの表象であると共に性的不能の象徴として内在し ていたのである。しかし、遠野の場合は義歯によって性的問題が発生することもなく、日常 的には特に意識されることもないのである。ということは、義歯は老いの表象にはなるもの の、性的能力とは直接関係のないのであろうか。千賀子は濃い化粧で衰え行く自分の姿 に抵抗し、女性性を表出している。そして、女としての本性を架空の世界において描出して いったのである。これはいつまでも女として、性的存在でありたいという千賀子の秘かであり ながら強力な願望の表現であるといえよう。 5.坂と老い 同時代の平林たい子は『妖』を傑作であると評価し、「作品の密度の濃さは、この主 題が、内的に充分成熟していたことを示して」いるといっている。さらに円地らしいモデルを 「突き放してとてつもない老女の型をつくり上げた内的な操作は想像もできないほどこみ入っ て独創的なものである」10)と言い加えている。平林の言葉通り、『妖』には中年期を生き ている女の内的描写が細かく施されているのがわかる。なかでも、千賀子の居場所と関わ る描写は彼女の精神的な苦悩と心情とを表現する重要な役割を果していると思われる。作 中において千賀子の主な活動の空間になる場所とは「坂」とそれに面して新たに増築した 中二階の部屋がそれである。特に『妖』は「坂」についての印象的な文章で始まってい 10) 平林たい子(1965)「『妖』解説」『円地文子文庫 第一巻』講談社、(引用 亀井秀雄 小笠原美子 共著(1981)『円地文子の世界』創林社、p.51) 円地文子『妖』論 ··········································································································· 崔 殷 景…155 る。次のようである。 その静かな坂は裾の方で振袖の丸みのように鷹揚なカーヴをみせ、右手に樹木の大い 高土手を抱えたまま、穏やかな勾配で高台の方へ延び上がっていた。片側には板塀やコ ンクリート塀がつづいていたが、塀の裏側は更に急な斜面に雪崩れ込んで崖下の家々は 二階の縁がようやく坂の面と並行する低さだった。いわば坂は都心にしては広い丘陵地帯 の一辺を縁どって低地の人家との間に境界をなしている形である。遠い昔には恐らく台地の 一斜面に過ぎなかったのが、いつか中腹に帯のようにひろがった道が人や馬の踏み固める ままに自然の切通しになったものであろうか。(p.81) 冒頭の一部を長く引いてしまったが、このように、『妖』には「坂」を中心とした風景描 写が細かく施されている。そして、「坂」に関する描写は冒頭を始め、作品全体を通して 多々見ることができる。ここで「坂」は単なる風景描写の装置のみではなく、作中において 重要なイメージを持っているといえる。前にあげているように、作者円地には代表作といわれ る『女坂』という長編小説がある。『女坂』は明治初期を背景に封建的な夫のために妾 を探す妻が登場している。この作品は真実の愛を知ることもなかった悲しい女の一生と怨念 を描いているとして傑作と評されている。小説の題名にもなっている「女坂」とは、小説内 容に似通う象徴的な意味を含んでいる。すなわち、家を守るために犠牲になり、理不尽な 生き方を強いられた女の忍従の姿を表象する言葉である。このように、円地が描く「坂」 は女の姿と親密に関連しているようにみえる。果して『妖』における「坂」は千賀子とどうい うふうに関わっており、何を象徴するのであろうか。簡単にいってしまえば、千賀子にとって 「坂」は自宅が位置している場所的な特徴というより、もっと深い意味を内包している。作 中において千賀子と「坂」との関係を見てみると、「坂とは幼馴染みであった」(p.82)、ま たは「坂と親しくなった」(p.95)など、あたかも「坂」というのがお互い分かり合える対象の ように描かれている。このように、千賀子は「坂」という対象に慣れ親しんで強い愛着を見 せている。これについて河合隼雄は「「坂」こそ、千賀子の恋人なのである」11)と分析し ている。作中の千賀子は「四十年近い昔」から「坂」の近くに住み慣れており、「坂」 に絡む思い出もたくさんある。次の引用には千賀子の「坂」に対する特別な感情が滲み出 ている。 人気のない坂に立つと、それらの記憶はまざまざ千賀子の中に甦ってきた。(中略)ぼ んやりここに立っている自分が、この坂を上り降りするように自由に過去と現在の間を行き通 うような錯覚を千賀子は度々感じた。そうしてそのことは老衰の来るのを無理にも堰きとめた い千賀子に、無限に甘美なゆめを授けた。(p.97) 11)河合隼雄(1993)『中年のクライシス』、朝日新聞社. p.105 156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坂」の情景について河合は「女性のエロスを妖しく描き出してくれている」12)といってい る。エロスが「全体を融合している」ように、「坂」は「すべての人々を含み、過去も未 来も含」んでいると説明している。このような解釈は穏やかな「坂」の描写や千賀子がよく そこに出て「恋人を待っていた」と冗談を言ったりする場面からも読み取れる。 ところで、千賀子は「坂への狭い崖地にもたせかけて立っている」自宅の中二階に新し い部屋まで増築して、毎日のように「坂」を歩いている人々の「人間臭い音に耳を預けて いる」状況である。「坂」と面した中二階の部屋とは、いわば千賀子の生活場となってい る。啓作が二階に「鍵のかかる部屋」をもっているように、中二階の部屋はもっぱら彼女の 空間となっている。先にも見てきたように、骨董品好きの啓作は骨董品が所狭しと並んでい る「鍵のかかる部屋」で居心地のよさを感じている。では、千賀子も同じく自分の部屋に 居心地のよさを求めているのであろうか。次の引用から探ってみる。 坂と母屋との中段になる部屋もそこにひとり寝るようになってから、思いの外、千賀子にさ まざまなことを教えた。(中略)そこに寝ると、千賀子は路面から三尺ほど低い坂の腹に ぴったりくっついて横たわっていることになる。それは棺の中にねているような異様な静かさに 千賀子を誘い入れた。(p.98) 千賀子は娘たちを嫁がせてから中二階へと生活の中心場所を移動したのである。彼女 の愛情の対象であった子供を手放し、いわゆる親の責任を果してからやっと自分と向き合う ことになったのである。そんな千賀子にとって中二階の部屋は自分の根城のような意味合い で内在している。しかし、上記した一節からもわかるように、千賀子はもっとも安らげる場所 であるべき部屋の中で「棺の中」にいるような感じを覚える。「棺」という表現は他にも何 回も見られるが、例えば「棺のようなベッドの上」(p.99)や「自分は動かないで棺の中にで もいるよう」(p.107)であるという描写がそれである。ここでは千賀子が真の自分でいられる 空間、すなわち中二階の部屋を「棺」に例えていることに注意していきたい。何故彼女は 一番落ち着く場所であるべき自分の部屋をまるで死を連想させるような「棺の中」として連 想してしまうのか。繰り返し述べてきたように、千賀子は幼馴染みの「坂」と共に生きてき た。なお、彼女の部屋もそんな「坂」と近くに位置しているからこそ意味があると思われる。 千賀子と幼馴染みの「坂」は彼女の生きてきた人生を効果的にイメージしている。さらに 「過去と現在の間を行き通うような錯覚」を与えている場所である。これまで見てきたよう に、現在の千賀子は中年の老いを深刻に意識し、老衰に対する不快感をあらわにしてい る。彼女自身の空間、すなわち「坂」に面している中二階の部屋とは過去と中年期の現 在、あるいは現在と死を暗示する未来が混在する場所として位置づけられるのであろう。 つまり、千賀子にとって幼い時の思い出の場所が老いの次に訪れてくる〈死〉の場所と 12)河合 雄(1993)『中年のクライシス』朝日新聞社. p.106 円地文子『妖』論 ··········································································································· 崔 殷 景…157 して転換される。それで「坂」に面する、あるいは「坂」と隔離されている中二階の部屋 は「棺の中」にいるような孤独な中年の千賀子の現在を喚起しているのである。と共に、 創作作業という幻想的世界を提供してくれる現実離れの時空間としても働きかけているといえ る。 6.おわりに 題名にもなっている「妖」の辞書的意味を探してみると、「あやしいこと。不吉なこと」と 書いてある。古屋は「妖」という字に「無気味さとか暗い肉感、女の蠱惑的な笑み」13) がひそめていると述べている。確かに「妖」から受ける字感は「健康な明るさ」とは遠いか もしれない。このように、本稿の短編『妖』には中年女性の隠微な官能や妖気さえ漂い、 その題名の雰囲気を裏切らないのである。 作品には老いを迎えつつある女の性(エロス)への衝動が描かれており、千賀子という 中年女は抑圧された欲望を創作という放恣な夢として表出していった。作者円地文子は日 本近代文学者の中でももっとも女の性と身体を明確に書いていた作家として評価されてい る。『妖』にも千賀子に寄り添う語り方で彼女の内面的な苦悩や身体における老いの様 相が具体的に描写されている。千賀子は眼鏡を始め、義歯や髢などを「鎧兜」のように 身につけている。そして「老いることの呪わしさに」昂奮するように、髪形や化粧に身を入れ る。作中において中年女性の厚化粧は余計に無気味さを強調し、変な妖気さえ感じさせ る。しかし、こうした千賀子の行動は女としての自分のことを忘れないという行為であり、若さ や美しさに対する憧れの表現でもある。言い換えれば、それは老いと死の問題を意識する からこそ生じる抵抗、いわば生への欲望や切実さの表現であるといえる。 『妖』から見られるように、老いによる女性性の喪失という観点からは千賀子と、女性器 官を失ってのち女性への執着を文学に注ぎ入れた作者円地との共通点を見い出すこともで きるであろう。これについて野口裕子は「千賀子の意識は決して作者円地文子の意識で はない」といいながらも、千賀子の姿は「抑え切れずに「噴出」させてしまった円地の 「本性」の叫び」14)として読んでいる。中年の円地が千賀子を通して本性をあらわにして いたように、千賀子も自分の内的欲望を架空の「若い人妻」に仮託していたのである。そ ういう意味でいうと千賀子は確かに作者のペルソナであろう。 以上のように、『妖』において性的欲望は肉体的変化とともに衰えていくのではなく、む 13)古屋照子(1996)『円地文子─妖の文学』、沖積舎. p.176 14)野口裕子(1997)「円地文子著『妖』の構造をめぐって」、「日本文芸研究」関西学院大学日本文学 会.p46 158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しろ「自然な凋落」を堰きとめたいという生への欲望と相通じており、性に執着していくことが わかった。 【参考文献】 변학수(2004) 『프로이트 프리즘 문학 그리고 영화』、책세상.pp.121-135 진중권 미와 교코(2008)『성의 미학』、세종서적.pp.15-70 황해옥(2003)『엔치 후미코 문학 속의 여성의 연구』、同德女子大學校 박사학위논문 pp.48-70 今井泰子 禎子外編著(1996)『短編女性文 近代─ 補版』、おうふう.pp.215-236 岩淵宏子 北田幸 外編著(2005)『はじめて ぶ日本女性文 史近現代編』、ミネルヴァ 書房.pp.258-260 江口 (2005)「円地文子『冬紅葉』における老い」、「阪大比較文 」(3 )大阪大 比較文 .pp.117-130 井秀雄 小笠原美子 共著(1981)『円地文子の世界』、創林社.pp.48-63 河合 雄(1993)『中年のクライシス』、朝日新聞社.pp.95-110 河合 雄(1998)『こころの を く』、新潮文庫.p.130 ゾ イ ジェスティコ(2004)「円地文子『妖』論─花 の役割を中心に─」、「詞林」(31 ) 大阪大 古代中世文 究 pp.72-81 野口裕子(1997)「円地文子著『妖』の構造をめぐって」、「日本文芸 院大 日本文 究」 西 .pp.37-47 古屋照子(1996)『円地文子─妖の文 』、沖積 .pp.161-226 三島由紀夫(1964)「円地文子」初出「現代の文 公文庫.pp.203-214 」(20)、引用『作家論』(1974)中 円地文子『妖』論 ··········································································································· 崔 殷 景…159 要 旨 本稿では、これまで日本近代文 に焦点をあててみた。なかでも 究において看過してきた女の老いと性の問題 の名作を生み出した円地文子という作家と短編 『妖』(「中央公論」1956年9月)を取り上げて考察した。『妖』には老いを迎え つつある女の性(エロス)への衝動が描かれており、千賀子という中年女は抑 さ れた欲望を創作という放恣な夢として表出していった。特に千賀子に寄り添う語り 方に注目し、具 的に描 されている女の を分析した。千賀子は眼鏡を始め、義 た。そして「老いることの呪わしさに」 や 面的な苦 や身 における老いの 相 などを「鎧兜」のように身につけてい 奮するように、 いた。作中において中年女性の厚化粧は余計に無 味さを 形や化粧に身を入れて 調し、 な妖 さえ感 じさせる。しかし、こうした千賀子の行動は女としての自分のことを忘れないとい う切 な行 であり、若さや美しさに する憧れの表現でもある。言い換えれば、 それは老いと死の問題を意識するからこそ生じる抵抗、いわば生への欲望や切 の表現であるといえる。 キーワード;円地文子、妖、女、性、老い、坂 투 고 : 2008. 8. 31 1차 심사 : 2008. 9. 12 2차 심사 : 2008. 9. 27 さ 萩原朔太郎の「犯罪」詩群の問題 -「浄罪」と「犯罪」のモチーフ 黄 珍* 1) (e-mail : [email protected]) 目 次 1.はじめに 2.「殺人事件」―派手な一人芝居劇 3.「浄罪詩篇」以後の「犯罪」詩群 3.1 酒精中毒者の死 3.2 干からびた犯罪 3.3.1 蛙の死 3.3.2 幼児は神になる 4.「犯罪」詩群と「浄罪詩篇」との関連 5.おわりに 1.はじめに 萩原朔太郎の第一詩集『月に吠える』には「犯罪」をモチーフにした詩が四つある。 「雲雀料理」章に収録された「殺人事件」と「かなしい月夜」章に収録された「酒精 中毒者の死」「干からびた犯罪」「蛙の死」である。「犯罪」詩群とも言うべきこれら の詩には、殺人という具体的な事件があり、加害者と被害者が共存している。「犯罪」 詩群の初出雑誌と発表年月、原題等を整理すると次のようになる。 ①「殺人事件」(『地上巡禮』大正三年九月) * 인제대학교 일어일문학과 162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②「酒精中毒者の死」(『詩歌』大正四年六月、原題は「酒精中毒者の死體」) ③「干からびた犯罪」(『詩歌』大正四年六月) ④「蛙の死」(『詩歌』大正四年六月) 「殺人事件」の発表は大正三年九月で、「酒精中毒者の死」「干からびた犯罪」 「蛙の死」の三篇の発表は大正四年六月である。これらの詩はいずれも殺人事件を詩材 として扱っている。しかし、「殺人事件」と、「酒精中毒者の死」「干からびた犯罪」 「蛙の死」の三つの詩には、詩情にかなりの差が感じられる。「殺人事件」と三つの詩 の発表の間には約八ヶ月の隔たりがあるが、それだけでこれらの詩に認められる詩情の差 を説明するには無理がある。 「殺人事件」発表から三つの詩が発表されるまでの約八ケ月間は、「浄罪詩篇」が 書かれていた時期でもあった。「浄罪詩篇」は、初出の末尾に〈―浄罪詩篇―〉と付 記がある詩や、「浄罪詩篇ノオト」にその草稿が見られる詩を指す。制作期間は大正三 年末から大正四年初頭にかけての約三 四ヶ月であると推測される。 本稿では『月に吠える』に収録された「犯罪」に関する四つの詩を分析する。さらに、 「浄罪詩篇」を挟んでその前後の時期に「犯罪」詩群が発表されていることを手がかり に、「浄罪詩篇」の詩情が「犯罪」詩群とどのように関連しているか、また「犯罪」詩 群に認められる詩情の差、その原因がどこにあるかについても考察した。 2.「殺人事件」─派手な一人芝居劇 大正三年九月『地上巡礼』創刊号に発表された「殺人事件」は、朔太郎によって最も 早い時期に書かれた口語自由詩として知られている。 先行研究には、「殺人事件」は「朔太郎のえがいた生理的幻想の殺人事件」である とし、「じぶんの恋人がすでに他人によって性的に奪われたのを追跡してゆく」という「現実 的な意味」と「性的な願望」の立場に立った吉本隆明論や2)、「殺人事件」には一種 の「怖くない悪夢」の世界が投影されているとする吉原幸子論がある。3) また、福田清 人は「朔太郎自身探偵であり、殺人者であり、恋人を殺された男の三役を演じるという設 定」「優雅な殺人を犯したダンティな曲者」などと述べている。4) 厳密に言えば「殺人事件」は『月に吠える』に収録されたものの、習作期の性格を持 つ「愛憐詩篇」期に含まれるべき作品である。『月に吠える』の主な流れから少々離れ 2) 吉本隆明(1962)「〈萩原朔太郎―その世界〉―擬制の終焉」『擬制の終焉』現代思潮社、182頁。 3) 吉原幸子(1978)「殺人事件」『国文学解釈と教材の研究』學燈社、86頁。 4) 福田清人(1967)『萩原朔太郎 人と作品』清水書院、112頁。 「犯罪」詩群と「浄罪詩篇」 ······························································································· 黄 珍…163 た詩風をもつ詩であると言える。 「殺人事件」の初出の末尾には〈一九一四、八、一二〉の付記があり、初出の原詩 と『月に吠える』に収録された際の詩を比較してみると、いくつかの修正が見られる。 初出では第一連の〈つめたいきりぎりすが鳴いて居る、〉のあとに、〈九月上旬(はじめ) の殺人。〉の一行がある。また、第二連の最初の行も初出は〈九月上旬(はじめ)のある 朝〉となっているが、『月に吠える』への収録の際は〈しもつき上旬(はじめ)のある朝〉と 修正されている。 〈九月上旬(はじめ)〉が〈しもつき上旬(はじめ)〉に変わった経緯については、〈九 月〉を陰暦の仮名に変える時にながつきと書くつもりが、〈しもつき〉にしてしまったとも推測 されるが、大岡信は次のように述べている。 「玻璃の衣装」、「晶玉」の床、「まつさをの血」などの、まことに彼好みの素材に 一貫している冷たさ、透明さ、貧血症的昂揚感に最も適う季節として、ここでは霜月以外 にありえないのを直覚した 。 (中略)透明な怪盗による殺人事件は 、 まだ夏の火照りが 残って血がざわめている「九月上旬」では、彼の美感に照らして恰好がつかなかった。5) 大岡は、朔太郎が〈九月〉を〈しもつき〉に変更したのは、「殺人事件」の詩情に 「つめたい」質感を一層高めるための工夫であったとしている。すなわち、 詩人の制作意 図による詩語の選択であったことである。朔太郎の「美感」には、〈玻璃の衣装〉〈晶 玉〉〈まつさをの血〉に最もふさわしい季節として〈九月〉よりは、〈しもつき〉のほうが適 していると「直覚」したのである。 「殺人事件」という題目からも窺えるように、この詩は殺人事件を詩材にした作品で、恋 人の女が自分の部屋で殺されたという設定で始まっている。人が殺されたという事件性だけ をみれば、「殺人事件」は非常に恐ろしく不気味な詩になるべきである。しかし、この詩は 透明感あふれる詩語により、青く澄んだ秋の空が連想され、爽やかで不思議な魅力を醸し 出している。 「殺人事件」は浅草の活動写真から生まれた詩であることがよく知られている。この詩 は、あたかも活動写真を見ているような気分を読み手に与えるが、それは、作者が当時見 たであろう地味な色ではなく、非常に鮮やかな色の活動写真である。その場面の風景や事 物の感覚までが実感として沸いてくるような詩であると言えよう。 殺人事件 とほい空でぴすとるが鳴る。 またぴすとるが鳴る。 5) 大岡信(1981)『萩原朔太郎』筑摩書房、134頁-135頁。 164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ああ私の探偵は玻璃の衣装をきて、 こひびとの窓からしのびこむ、 床は晶玉、 ゆびとゆびとのあひだから、 まつさをの血がながれてゐる、 かなしい女の屍體のうへで、 つめたいきりぎりすが鳴いてゐる。 しもつき上旬(はじめ)のある朝、 探偵は玻璃の衣装をきて、 街の十字巷路を曲つた。 十字巷路に秋のふんすゐ。 はやひとり探偵はうれひをかんず。 みよ、遠いさびしい大理石の歩道を、 曲者はいつさんにすべつてゆく。 遠い空でピストルが鳴り、また、ピストルが鳴る。この二発の銃声から「殺人事件」は始 まっている。二発の銃声は、事件の発生であり、事件の完成でもある。 〈とほい空でぴすとるが鳴る。/またぴすとるが鳴る。〉、これは単に遠い空でピストルの 音がしたというだけではなく、ピストルが鳴った瞬間、その銃声が遠い空にまで鳴り響いて いったことを表しているようである。すなわち、たちまち遠いところまでピストルの音が広がって いったイメージが自然に思い浮かんでくるところから、〈とほい空〉は、おそらく青く高く澄ん でいる秋空であろう。 語り手の視線は、ピストルの音が鳴り響く遠い空から徐々に事件が起こった場所へと近づ いてくる。そして、殺された恋人をクローズアップする。面白いのは、語り手の視線に伴って 〈探偵〉も〈玻璃の衣装〉を着て、恋人の〈窓〉から忍び込み、事件の現場に登場し たことである。 恋人の部屋の〈床〉には〈晶玉〉が散らばっており、恋人が殺されている。横たわって いる恋人の指と指の間から〈まつさを〉な血が流れ、その死体の上では〈つめたいきりぎり す〉が鳴いている。 一般的に探偵とは、「ひそかに他人の事情や犯罪の事実などをさぐる」6)人のことで、他 人の秘密を調査したり、罪を犯した者を突き止めたりするのが主な仕事である。秋晴れのあ る日、事件が起こり、その現場へやって来た私の〈探偵〉もこの範疇に入るであろう。事 件が起り、〈探偵〉が登場するのは、探偵小説やミステリ映画ならありふれた場面であ る。しかし、「殺人事件」に登場する〈探偵〉は、本来の探偵からは微妙にずれてい 6) 新村出編(1992)『広辞苑第四版』岩波書店、1633頁。 「犯罪」詩群と「浄罪詩篇」 ······························································································· 黄 珍…165 る。常識からかけはなれた感じの〈探偵〉と言えるだろう。 〈探偵〉は〈玻璃の衣装〉を着ている。〈玻璃〉は水晶や硝子のことであるから、 〈玻璃の衣装〉は透明な秋の青空が映るような衣装のことである。〈探偵〉は、秋の青 空とその透き通った感覚までが伝わってくるような〈玻璃の衣装〉を着て、恋人の部屋へと 忍び込んでいるのだ。 大岡は、「この探偵は、「玻璃の衣装」を着て透明人間に変り、窓から忍び入ってたっ た今彼女を殺した張本人ではないか」とし、〈探偵〉が「透明人間」に変って、〈窓〉 から忍び入ったとしている。 7)大岡が語る「透明人間」は、その姿は見えなくても身体は 持っているはずである。しかし、〈玻璃の衣装をきて、/こひびとの窓からしのびこ〉んだ 〈探偵〉からは、全くその身体が感じられない。〈探偵〉は、あたかも〈窓〉のドアを開 けることなく、透き通った〈窓〉ガラスをそのまま透過するようにして忍び込んでいるのだ。 要するに、〈探偵〉は秋の日に恋人の部屋へとやって来た密かな侵入者である。その登 場の仕方も不思議な〈探偵〉である。 大岡が〈探偵〉を〈玻璃の衣装〉を着た「透明人間」として語ったのは、〈玻璃の衣 装〉と「透明人間」のイメージを同一な物として捉えたからであろう。この詩が活動写真の 一場面のような語り方であることを指摘した。カメラのレンズの透明さと〈玻璃の衣装〉の透 明さがイメージ的に合致しているからである。透明なカメラのレンズが風景を映すように、透 明な〈玻璃の衣装〉を着た〈探偵〉の視線により、恋人の部屋の風景が映されている。 語り手の視線は〈探偵〉の視線と重なっているのである。 恋人の〈窓〉から忍び込んで恋人の部屋を語り、〈秋のふんすゐ〉と〈曲者〉を語る 〈探偵〉は、〈殺人事件〉を仕掛けた人物でもある。〈私の探偵〉は〈私〉が雇った 〈探偵〉ではなく、〈探偵〉の〈私〉である。恋人も〈私〉の恋人である。〈遠いさび しい大理石の歩道を、〉〈いつさんにすべつてゆく〉曲者も、〈私〉の分身である。「殺 人事件」は、密かな侵入者が演じる派手な一人芝居劇であったのだ。 では、霜月のある朝、〈玻璃の衣装〉を着た〈探偵〉が感じる〈うれひ〉とは、どんな ものであろうか。 大岡は、〈探偵〉が〈うれひ〉を感じる理由は「愛する者をつい殺さねばならなくなった 者の憂愁」であると述べている。8)しかし、恋人の部屋の様子を語る〈探偵〉の視線には 恋人への想いが全く感じられない。殺された恋人は、部屋の一風景として淡々と描かれて いるだけである。恋人の死と〈探偵〉の〈うれひ〉を結び付けるには無理があり、大岡の 「憂愁」は悲しみの感情で、〈探偵〉が覚える〈うれひ〉とは明らかに違う感情である。 この詩は殺人という怖しい出来事を詩材にしているにも関わらず、その詩情には清涼感が 7) 大岡信(1981)『萩原朔太郎』筑摩書房、136頁。 8) 大岡前掲書、136頁。 166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あり、美しく透明感にあふれている。それは〈とほい空〉〈玻璃の衣装〉〈晶玉〉〈まつ さをの血〉〈きりぎりす〉〈秋のふんすゐ〉など、秋を感じさせる詩語の多用による効果であ ろう。 〈探偵〉の着ている〈玻璃の衣装〉や〈床〉に散らばっている〈晶玉〉は、透き通っ た秋の青空をそのまま感じさせる詩語である。また、殺された恋人の死体の上で鳴いている 〈つめたいきりぎりす〉も、死体の冷たさを表している。〈かなしい女の屍體のうへで、/つ めたいきりぎりすが鳴いてゐる。〉というフレーズは、〈とほい空〉〈玻璃の衣装〉〈晶 玉〉〈まつさをの血〉などの詩語と絡み合い、冷めたい死体の感覚を一瞬にして、爽やか で涼しい秋へとその印象を一転させている。ここまで来ると、殺人という事件性は秋の詩語 によって一掃され、消滅してしまう。 要するに、「殺人事件」は殺人事件を扱ったのではなく、透明感あふれる詩語を用いて 秋の季節感を歌った詩であるのだ。ピストルの音を遠くまで響かせる清明な秋の青空、 〈床〉に散らばる〈晶玉〉の破片、恋人の指の間から流れてい〈まつさを〉な血、〈つ めたいきりぎりす〉の鳴き声、そして〈秋のふんすゐ〉、このような雰囲気がひときわ印象的 に〈探偵〉の胸を打ったのではないだろうか。 3.「浄罪詩篇」以後の「犯罪」詩群 『月に吠える』には「殺人事件」以外にも「犯罪」をモチーフにした詩がいくつかあ る。「酒精中毒者の死」「干からびた犯罪」「蛙の死」である。これらの詩は、「浄 罪詩篇」期の前に発表された「殺人事件」と比べて、詩情にかなりの差が見られる。 「酒精中毒者の死」「干からびた犯罪」「蛙の死」の詩情を探ってみよ。 3.1 酒精中毒者の死 大正四年六月号『詩歌』に掲載された「酒精中毒者の死」の原題は「酒精中毒者 の死體」である。〈酒精中毒者(よつぱらい)〉が仰向きに死んでいる。死体の〈まつしろ い腹〉からは、えたいの知れないいろいろなものが流れている。〈白つぽけた殺人者の顏 が、/草のやうにびらびら笑つてゐる。〉の詩句からは、〈酒精中毒者(よつぱらい)〉が 他殺されたことが分かる。 「犯罪」詩群と「浄罪詩篇」 ······························································································· 黄 珍…167 酒精中毒者の死 あふむきに死んでゐる酒精中毒者(よつぱらい)の、 まつしろい腹のへんから、 えたいのわからぬものが流れてゐる、 透明な青い血漿と、 ゆがんだ多角形の心臓と、 腐つたはらわたと、 らうまちすの爛れた手くびと、 ぐにやぐにやした臓物と、 そこらいちめん、 地べたはぴかぴか光つてゐる、 草はするどくとがつてゐる、 すべてがらぢうむのやうに光つてゐる。 こんなさびしい風景の中にうきあがつて、 白つぽけた殺人者の顔が、 草のやうにびらびら笑つてゐる。 死体から流れているえたいの知れない贓物の模様と状態は、この〈酒精中毒者(よつぱら い)〉が異様な存在であったことを示している。たとえば、〈ゆがんだ多角形の心臓〉は 〈酒精中毒者(よつぱらい)〉がかなり歪んだ心理の所有者であったことを語っている。ま た、〈腐つたはらわた〉〈らうまちすの爛れた手くび〉〈ぐにやぐにやした臓物〉の詩句か らは、内臓が腐り、体の一部がただれるほど、酒に〈爛れた〉病人の〈酒精中毒者(よ つぱらい)〉像が連想される。〈酒精中毒者(よつぱらい)〉の死というよりは、苦悩した病 人の死であると言えるだろう。 〈白つぽけた殺人者の顏〉だけで、〈酒精中毒者(よつぱらい)〉が他殺されたと断定 するのにも疑問は残る。〈白つぽけた殺人者の顏〉を〈殺人者の顔〉ではなく、〈酒精 中毒者(よつぱらい)〉自身として読むことができるのではないだろうか。 〈こんなさびしい風景の中にうきあがつて、/白つぽけた殺人者の顔が、/草のやうにび らびら笑つてゐる。〉から連想されるのは、殺人者ではなく、〈酒精中毒者(よつぱらい)〉 の〈顔〉である。要するに、〈酒精中毒者(よつぱらい)〉は殺されたのではなく、自ら心 理的な自殺を図り、決行したのである。 〈白つぽけた殺人者の顔〉は、「地面の底の病気の顔」の原題である「白い朔太郎 の病気の顔」の白い〈顔〉ともイメージが重なっている。「殺人事件」で《密かな侵入 者》を演じた〈探偵〉が派手な一人芝居をやり遂げたように、「酒精中毒者の死」もそ の延長線上で読むことが可能だろう。 168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3.2 干からびた犯罪 大正四年六月号『詩歌』に発表された「干からびた犯罪」は、だいぶその雰囲気は異 なるが、内容的には「殺人事件」の続篇のような詩である。 〈いく年〉も前から〈倒れた椅子〉があり、〈凶器〉があり、〈屍体〉があり、〈血〉 があり、〈窓〉があり、〈探偵のくらい顔〉があり、〈さびしい女の髪の毛〉が震えてい る。 干からびた犯罪 どこから犯人は逃走した? ああ、いく年もいく年もまへから、 ここに倒れた椅子がある、 ここに兇器がある、 ここに屍体がある、 ここに血がある、 さうして青ざめた五月の高窓にも、 おもひにしづんだ探偵のくらい顔と、 さびしい女の髪の毛とがふるへて居る。 しかし、〈どこから犯人は逃走した?〉のか、〈犯人〉の姿は見えない。解決されない 殺人事件と色彩感のない〈殺人〉の現場だけが〈干からびた犯罪〉として残されている。 未解決の犯罪を扱っているという点で、この「干からびた犯罪」は、あの「殺人事件」と つながっているのである。 福田清人は「「殺人事件」の中の「玻璃(ガラス)の衣装」や「晶玉の床」「大 理石の歩道」などの、『スバル』調の舞台衣装はなく、『月に吠える』にもっとも特徴的 な生理的、神経的な感覚が強調されている。」と、「殺人事件」からだいぶ変わった詩 風を指摘している。9) 「殺人事件」が秋晴れの清清しさに満ちた詩情を持つなら、「干からびた犯罪」は暗 い〈探偵〉の内面と〈殺人〉現場を索漠たる言葉で語り、文字通りの〈干からびた〉詩 情を醸し出している。 3.3.1 蛙の死 「蛙の死」は大正四年六月号『詩歌』に発表された詩である。『月に吠える』へ収 9) 福田清人(1967)『萩原朔太郎 人と作品』清水書院、111頁。 「犯罪」詩群と「浄罪詩篇」 ······························································································· 黄 珍…169 録される際、〈幼年思慕篇〉という付記が末尾に加えられている。 「蛙の死」は〈子供〉が〈蛙〉を殺した設定になっている。被害者が人間ではなく、 〈蛙〉であるから、「犯罪」としては成立しないのかもしれない。しかし、語り手は〈蛙が 殺された〉と、〈蛙〉の死を「犯罪」の感覚で語っている。 蛙の死 蛙が殺された、 子供がまるくなつて手をあげた、 みんないつしよに、 かわゆらしい、 血だらけの手をあげた、 月が出た、 丘の上に人が立つてゐる。 帽子の下に顔がある。 幼年思慕篇 「蛙の死」は〈蛙が殺された〉という詩句で始まっている。〈蛙〉を殺したのではなく、 〈蛙が殺された〉のであるから、語り手の心情の軸は殺された〈蛙〉に傾いているのだろ う。 殺した〈蛙〉を真ん中に置いて〈子供〉たちはまるくなっている。そして、〈かわゆらし い〉〈血だらけ〉の手をあげ、歓声を上げている。〈蛙〉の死骸と血だらけの手を上げる 〈子供〉たちの後ろから〈月〉が出る。その〈月〉を背景に、丘の上に人が立ってお り、その人の〈帽子の下〉の〈顔〉がクローズアップされる。 〈蛙〉の死骸を囲んで血だらけの手を上げる〈子供〉たちの不気味な行為からは、原 始宗教の儀式のようなグロテスクな一面も感じられる。 〈幼年思慕篇〉という付記があることから、この詩は詩人の幼い時の「思い出」を題材 にしたと推測される。小野隆は「作品末尾の付記〈幼年思慕篇〉が示すように幼年には 潑刺としたものがあるはずで、その健康さに朔太郎は〈思慕〉をよせている。」と述べてい るが、この「健康さ」に〈思慕〉をよせたという箇所には疑問がのこる。10) 「子供の笑顔は天使の笑顔」という言葉もあるように、子どもは純粋な存在である。しか し、子どもというものは残酷な存在でもある。子どもの残酷さは大人のそれとは異なり、善悪 の認識も区別もないところにその特徴がある。平気で虫を殺し、ペットなどをいじめながら天 真爛漫に笑う。子どものその行動には悪意が感じられない。悪意がないから何もかも平気 に出来て純真に笑えるのかもしれない。 10) 小野隆(1982)「月に吠える」『国文学解釈と鑑賞』至文堂、67頁。 170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しかし、〈子供〉に殺された〈蛙〉のように、被害を受ける立場からすると、子どもの残 酷な行為に伴う明るい笑顔は恐ろしいかぎりである。〈白つぽけた殺人者の顔が、/草の やうにびらびら笑つてゐる〉ような不気味さが漂う。 前述したように、この詩は〈蛙が殺された〉という詩句で始まっている。なぜ語り手は 〈子供〉ではなく、殺された〈蛙〉の立場で語っているだろうか。小野隆が述べているよう に、この詩が幼年時代の「健康さ」に〈思慕〉をよせる詩であるなら、殺された〈蛙〉で はなく、むしろ〈子供〉の立場で語るべきではないだろうか。 血だらけの手をあげて歓声を上げる〈子供〉たちの笑顔からは、何の悪意も感じられな いことを指摘した。もちろん、〈蛙〉を殺した〈子供〉の行為は「犯罪」として成立するこ ともないだろう。〈子供〉にとって、〈蛙〉を殺したその行為は、日常の小さな楽しい遊び に過ぎない。しかし、殺された〈蛙〉側から見ると、その純真無垢な笑顔の裏に隠れてい る〈子供〉の残酷さほど恐ろしいものはない。善悪の概念も分からず、認識も区別も出来 ないからこそ恐ろしいのである。絶対残酷という境地があるなら、子供の残酷さを言うのでは ないだろうか。 3.3.2 幼児は神になる 朔太郎は「浄罪詩篇ノオト」で「「幼児は神になる。」幼児が幼児として成長するとき にはいつかきつと神になる。成人は到底神になれない。」と書いている。11)「幼児」には 神聖なものがあり、「幼児」が大人にならず、「幼児」のままでいればその神聖さを失わ ないという意味である。結局、人間というものは、大人になると、幼年時代に持っていた神 聖さをなくしてしまうのであろう。 旧約聖書の『創世記』二章と三章には、アダムとイブの物語が書かれている。アダムと イブは最初の人類である。アダムとイブは神の言葉に従わず、エデンの園の中央にある 「善悪を知る木の実」(以降「善悪果」と表記)を食べてしまう。原罪とは、人間の先祖 が犯した最初の罪のことである。すなわち 、神に逆らい、禁断の木の実を食べてしまった アダムとイブの行為に由来する。そして、人類最初の罪を犯したアダムとイブは、楽園から 追放された。以後、人間は生まれながらに罪を負っているとされた。 子どもは「善悪果」を食べる前のアダムとイブの姿ではないだろうか。神に逆らい、アダ ムとイブが「善悪果」を食べる前には、世の中に罪というものはなかった。善悪の概念がな かった。彼らがどんなことをしても、その行動に罪を見い出すことはなかっただろう。キリスト教 的に考えると、「善悪果」を食べる以前は善の世界のようであるが、実際は善でも悪でも なかったはずである。もちろん、善悪が共存する世界でもなかった。「善悪果」以前は、 11) 『萩原朔太郎全集十二巻』(1977)筑摩書房、5頁。 「犯罪」詩群と「浄罪詩篇」 ······························································································· 黄 珍…171 善悪の概念もないから、人間が善悪を意識しなくても良い世界だったのではあるまいか。 善悪の概念はアダムとイブが「善悪果」を食べた瞬間に生まれた。「善悪果」を食 べ、目ざめた彼らは、以前は意識することのなかった自分たちの裸に気づき、羞恥心を感 じる。また、善悪の概念を知り、神に逆らったことも悟る。人間に善悪の概念が生まれ、罪 が生じた瞬間である。 朔太郎の詩「蛙の死」は、人間の原罪を連想させずにおかない恐ろしさを秘めている。 無残に〈蛙〉を殺し、その死骸を囲んで血だらけの手を上げている〈子供〉の姿には、 原罪を犯す前のアダムとイブの面影が重なって見える。 しかし、子どももいつかは大人になる。大人になる過程で徐々に物心が付き、善悪の概 念も分かり、分別する力も生じる。もしかすると、子どもが大人になるための通過儀礼が 「善悪果」の摂取ではないだろうか。 人類史上、「善悪果」の摂取無しに、大人になった者はいないだろう。大抵の大人 は、善悪の概念、罪への認識を持つものだ。そしてある日、幼年時代の「思い出」が甦 る。物心も付かない頃の、意味も分からずに行った無邪気な行為が、ある瞬間、恐ろしい 「犯罪」の「思い出」としてよみがえるのである。 「蛙の死」の最も注目すべきところは、〈蛙〉を殺した子どもたちが〈かわゆらしい、/ 血だらけの手をあげ〉ているその後ろからのぼる〈月〉と、その〈月〉を背景に子どもたち の行為をじっと見つめている人の存在である。〈月〉がのぼり、〈丘の上〉に人が立ち、 〈帽子の下〉に〈顔〉がある。その〈顔〉は〈帽子〉に隠れ、輪郭さえも分からない。 大岡信は「この帽子をかぶっている顔のはっきりしない人物は、殺された蛙自身なのでは ないのか。蛙を殺した子供らは、丘の上にたちまち顕現した蛙の霊魂の、冷やかで静かな 復讐に今さらされているのではないのか。帽子の下に顔のあるこの人物は、子供らに向かっ て次の瞬間歩み出そうとしているのではないのか。」とし、〈帽子の下〉の〈顔〉を 〈蛙〉として解釈している。12) しかし、〈帽子の下〉の〈顔〉は、〈子供〉だった人物の大人になった〈顔〉ではな いだろうか。〈幼年思慕篇〉という付記が付いてあるが、〈思慕〉と言うにはあまりにも恐 ろしい「思い出」である。 4.「犯罪」詩群と「浄罪詩篇」の関連性 以上、「殺人事件」と「酒精中毒者の死」「干からびた犯罪」「蛙の死」を読んで みたが、 これらの詩の詩情を比較してみると、その差は明らかである。 12) 大岡信(1981)『萩原朔太郎』筑摩書房、142頁-143頁。 172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殺人事件」は「殺人」という恐ろしい事件を詩材にしているにも関わらず、透明感あふ れる詩語の多用により、 実に爽やかな詩情を醸し出している。それに対して「酒精中毒者 の死」「干からびた犯罪」「蛙の死」の三つの詩は、不気味で索漠とした印象を与え る。 「酒精中毒者の死」は、仰向きに死んでいる〈酒精中毒者(よつぱらい)〉の姿と〈草 のやうにびらびら笑つてゐる〉〈白つぽけた殺人者の顏〉が不気味に描かれているし、 「干からびた犯罪」は、色彩感のない殺人現場の風景と〈探偵〉の暗い内面が〈干か らびた〉詩語で描かれている。特に「蛙の死」は、殺した〈蛙〉を囲んで〈血だらけ〉 の手をあげている〈子供〉の残酷さと、その光景をじっと見つめている〈帽子の下〉の 〈顔〉をクローズアップし、〈思慕〉と言うにはあまりにも無惨な恐ろしい「思い出」が描 かれている。 なぜ同じ詩材を扱っているにもかかわらず、このような詩情の差が生じているだろうか。 「犯罪」詩群 と「浄罪詩篇」はそれぞれ「犯罪」と「浄罪」がそのモチーフで、 「罪」を媒介にしている点では類似している。しかし、「犯罪」詩群には、〈殺人〉とい う具体的な「罪」のモチーフがあり、詩の中に加害者と被害者の面影が強く現れているの に対し、「浄罪詩篇」には、〈懺悔〉の行為はありながら、その底辺にあるべき「罪」 への認識が感じられない。「罪」がどのようなものであり、どこから生じるのか、何のために 「懺悔」を行うのかなどの「罪」への認識が不明であるのだ。 「犯罪」詩群と「浄罪詩篇」の初出を整理すると、《「犯罪」詩群A→「浄罪詩 篇」→「犯罪」詩群B》のような図式が成立する。つまり、「浄罪詩篇」期に得られた 詩的成果がその後に書かれた「酒精中毒者の死」「干からびた犯罪」「蛙の死」など の詩群に影響しているのである。 ここで注目すべきは、「浄罪詩篇」期を通じて朔太郎が求めていた真の「浄罪」が、 得られたのかどうかである。 萩原朔太郎は次のように、「浄罪詩篇」において〈懺悔〉を求め続けていた。 なみだたれ、 なみだをたれ、 いまはや懺悔をはれる肩の上より、 けぶれる竹の根はひろごり、 するどき青きもの地面に生え。 ―「竹」(Ⅰ) けふの霜夜の空に冴え冴え、 松の梢を光らして、 かなしむものの一念に、 懺悔の姿をあらはしぬ。 「犯罪」詩群と「浄罪詩篇」 ······························································································· 黄 珍…173 いみじき笛は天にあり。 ―「笛」 ま冬をこえて光るがに、 おかせる罪のしるしよもに現はれぬ。 みよや眠れる、 くらき土壌にいきものは、 懺悔の家をぞ建てそめし。 ―「冬」 遠夜に光る松の葉に、 懺悔の涙したたりて、 遠夜の空にしも白ろき、 天上の松に首をかけ。 ―「天上縊死」 つみとがのしるし天にあらはれ、 ふりつむ雪のうへにあらはれ、 木木の梢にかがやきいで、 ま冬をこえて光るがに、 おかせる罪のしるしよもに現はれぬ。 ―「冬」 あふげば小鳥の巣は光り、 いまはや罪びとの祈るときなる。 ―「卵」 「竹」(Ⅰ)の〈いまはや懺悔をはれる肩の上より、/けぶれる竹の根はひろごり 、〉、「笛」の〈かなしむものの一念に、/懺悔の姿をあらはしぬ。〉、「天上縊死」 の〈遠夜に光る松の葉に、/懺悔の涙したたりて、〉とあるように、詩人は「浄罪詩篇」 において切実に〈懺悔〉を求め続けているのである。 しかし、詩人は「浄罪詩篇」の最終型といえる「地面の底の病気の顔」で、〈竹〉の 現象を〈病気〉として捉えている。 地面の底の病気の顔 地面の底に顔があらはれ、 さみしい病人の顔があらはれ。 地面の底のくらやみに、 うらうら草の莖が萌えそめ、 174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鼠の巣が萌えそめ、 巣にこんがらかつてゐる、 かずしれぬ髮の毛がふるえ出し、 冬至のころの、 さびしい病氣の地面から、 ほそい青竹の根が生えそめ、 生えそめ、 それがじつにあはれふかくみえ、 けぶれるごとくに視え、 じつに、じつに、あはれふかげに視え。 地面の底のくらやみに、 さみしい病人の顔があらはれ。 〈地面の底に顔があらはれ、/さみしい病人の顔があらはれ。〉とあるように、〈懺 悔〉の儀式である〈竹〉の現象を〈病気〉として捉えているのである。〈懺悔〉の意が 託されている〈竹〉の現象を〈病気〉として捉えた詩人の認識は、「浄罪詩篇」期を経 ても真の〈懺悔〉に達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ことを示している。朔太郎は「浄罪」を得るこ となく、「浄罪詩篇」期を乗り越える方法として「浄罪」からの回避を選んだのである。 5.おわりに 『月に吠える』は「浄罪詩篇」期の「浄罪」を脱し切ったところで獲得した詩境を下地 にして作り上げた詩集である。以後の『月に吠える』詩篇に「浄罪詩篇」期に獲得した 詩的精神が投影されるのは当然である。それに加え、「浄罪」を得られなかったという詩 人の負の認識は、「浄罪詩篇」期以後の詩情の流れに大きな影響を与えている。 つまり、「浄罪詩篇」期以後、「酒精中毒者の死」「干からびた犯罪」「蛙の死」 のような索漠とした詩群が生まれたその背景には、真の「浄罪」に至らなかったという認識 が含まれているのである。詩人の負の認識が、「酒精中毒者の死」の心理的な自殺、 「干からびた犯罪」の不気味な風景、「蛙の死」の恐ろしい「思い出」として現れたと 考えられる。 「犯罪」詩群と「浄罪詩篇」 ······························································································· 黄 珍…175 【参考文献】 ①吉本隆明(1962)「〈萩原朔太郎―その世界〉―擬制の終焉」『擬制の終焉』現代 思潮社 ②吉原幸子(1978)「殺人事件」『国文学解釈と教材の研究』學燈社 ③福田清人(1967)『萩原朔太郎 人と作品』清水書院 ④大岡信(1981)『萩原朔太郎』筑摩書房 ⑤新村出編(1992)『広辞苑第四版』岩波書店 ⑥小野隆(1982)「月に吠える」『国文学解釈と鑑賞』至文堂 ⑦『萩原朔太郎全集十二巻』(1977)筑摩書房 176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要 旨 萩原朔太郎の『月に吠える』には、殺人という具体的な事件があり、加害者と被害者が共 存している詩群がある。本稿では「浄罪詩篇」を挟んでその前後の時期に「犯罪」詩群が 発表されていることを手がかりに、「浄罪詩篇」の詩情が「犯罪」詩群とどのように関連してい るか、また「犯罪」詩群に認められる詩情の差、その原因がどこにあるかについて考察した。 「殺人事件」は「殺人」という恐ろしい事件を詩材にしているにも関わらず、透明感あふれる 詩語の多用により、実に爽やかな詩情を醸し出している。それに対して「浄罪詩篇」期以後に 発表された「酒精中毒者の死」「干からびた犯罪」「蛙の死」の三つの詩は、不気味で 索漠とした印象を与える。なぜ同じ詩材を扱っているにもかかわらず、このような詩情の差が生じ ているだろうか。 「犯罪」詩群と「浄罪詩篇」はそれぞれ「犯罪」と「浄罪」がそのモチーフで、「罪」を 媒介にしている点では類似している 。 しかし 、 「犯罪」詩群には 、 〈殺人〉という具体的な 「罪」のモチーフがあり、詩の中に加害者と被害者の面影が強く現れているのに対し、「浄 罪詩篇」には〈懺悔〉の行為はありながら、その底辺にあるべき「罪」への認識が感じられな い 。 「犯罪」詩群と「浄罪詩篇」の初出を整理すると、 《「犯罪」詩群A→「浄罪詩 篇」→「犯罪」詩群B》のような図式が成立する。つまり、「浄罪詩篇」期に得られた詩的 成果がその後に書かれた「酒精中毒者の死」「干からびた犯罪」「蛙の死」などの詩群に 影響しているのである。 『月に吠える』は「浄罪詩篇」期の「浄罪」を脱し切ったところで獲得した詩境を下地にし て作り上げた詩集である。以後の『月に吠える』詩篇に「浄罪詩篇」期に獲得した詩的精神 が投影されるのは当然である。それに加え、「浄罪」を得られなかったという詩人の負の認識 は、「浄罪詩篇」期以後の詩情の流れに大きな影響を与えている。 つまり、「浄罪詩篇」期以後、「酒精中毒者の死」「干からびた犯罪」「蛙の死」のよ うな索漠とした詩群が生まれたその背景には、真の「浄罪」に至らなかったという認識が含まれ ているのである。詩人の負の認識が、「酒精中毒者の死」の心理的な自殺、「干からびた 犯罪」の不気味な風景、「蛙の死」の恐ろしい「思い出」として現れたと考えられる。 キーワード;犯罪、浄罪、懺悔、透明感、一人芝居、不気味、原罪、 투 고 : 2008. 8. 31 1차 심사 : 2008. 9. 12 2차 심사 : 2008. 9. 27 농촌지역의 자치조직을 통해 본 협동관계의 변용*․** 1) - 한일 농촌마을의 비교를 중심으로- 권 병욱*** (e-mail : [email protected]) 目 次 1. 2. 3. 4. 들어가는말 조사지의 개요 농촌마을의 자치조직의 역할과 구성 협동관계의 조직 5. 결론과 시사점 Ⅰ. 들어가는 말 현실경제에 있어서 세계화, 개방화정책은 세계질서구조 속에서 거스를 수 없 는 경향으로 제기되고 있다. 농업측면에서 WTO 및 FTA 체결에 의한 농축산 물 개방의 압력도 당연한 귀결이다. 아울러 국내 농축산물의 시장경쟁력약화와 농촌사회의 경제적 여건을 염려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농축산물 개방이 농촌사회의 삶의 질을 저하시키는 요인이며 인구감소 및 고령화를 촉진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농업경쟁력의 악화로 인한 소득의 감소는 농촌지 역의 청장년층의 이농현상을 심화시키고 그 결과 노인 노동력에 대한 의존도 가 증가하여 농촌지역의 생산활동 둔화와 생산성 저하에 따른 농촌사회의 급 * 본 논문의 제목은 일본 지역사회학에 발표된 陸 麗君(1996)의 자치조직으로부터 본 부락내의 협동 관계의 변용에서 인용하였으며, 본 논문에서 일본의 사례는 전적으로 동 논문에 의존하였다. ** 본 논문은 학술진흥재단의 연구비지원사업(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마을연구단)“ 충남지역 마 을공동체의 정체성(2차년도)”의 연구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마을연구단 전임연구교수 178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격한 해체를 가져올 것이라는 우려가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농 촌 인구의 감소와 인구구조의 변화에 따른 지역사회에 대한 충성심과 일체감, 신뢰가 강조되던 전통사회와는 달리, 2차적 관계가 지배하는 공간으로 변하여 합리성을 중시하는 인간관계와 그에 부응하는 협동관계의 변화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 연구는 한일농촌사회에서 자치조직을 중심으로 하는 협 동관계의 변화과정을 분석하고 그 전망을 추론하는 것이다. 농촌생활의 영위에 서 협동관계는 대단히 중요한 생산수단이며 생활의 방편이다. 개별적으로 해결 할 수 없는 사건들이 상호협동을 통하여 해소되고 공동의 목표가 달성되는 토 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협동을 통한 문제해결장치는 매우 다양하지만 본 연 구에서는 마을의 자치조직에 의한 협동관계로 한정하여 분석할 것이다. 연구에 활용된 연구방법은 문헌자료의 검토와 인터뷰이다1). 전자는 일본의 농촌사회의 자치조직에 의해 조절되는 협동관계의 이해와 검토에, 후자는 우리 나라 농촌사회의 협동관계에 대한 연구에 활용하였다. 본 연구의 구성은 다음 과 같다. 2장에서는 우리나라의 조사지H마을과 일본의 A마을에 대한 개황을 기술하고 있다. 3장에서는 양마을의 자치조직의 구조와 자치조직이 수행하는 역할을 살펴보았다. 4장은 각 자치조직이 실시하는 협동관계의 내용과 변화과 정을 분석하였으며 5장에서는 이러한 변화가 시사하는 점을 요약하고 향후 경 향을 추론해 보았다. 2. 조사지의 개요 본 연구에서 조사지의 선정이유는 약간씩 상이하다. H마을은 학술진흥재단의 연구과제를 수행하기 위하여 선정된 지역으로, 전형적으로 농업에 기반한 농촌 마을이면서 동일종교를 삶의 근간으로 하는 교우촌으로 그 종교를 기반으로 자치조직과 협동관계가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반면 에 일본의 A마을은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면서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농작 업에 있어서의 협동이 잔존하고 생활면에 있어서도 마을내에 긴밀한 연대가 존재한다고 하는 점에 주목하였다. 1) 한일양국 마을의 비교연구에서 일본의 사례는 陸麗君(1996), 自治組織からみた部落內の協同關係の變 容, 地域社會學會年報 8集 181-203에 전적으로 의존하였으며, 한국의 사례조사는 2006년 말부터 2008년 초에 걸쳐 이루어진 사례지역(H리)의 마을 주민들과 임원들에 대한 인터뷰조사에 기초하 였다. 농촌지역의 자치조직을 통해 본 협동관계의 변용 ··················································· 권 병욱…179 H마을은 충남북부지역에 위치하는 논농사를 중심으로 하는 마을이다. 일찍 부터 수리시설이 발달하여 수작농업에 적합한 환경이었으며, 전체 주민이 동일 한 신앙을 근거로 단결과 협동이 잘 이루어지고 있다. 농촌생산활동 역시 주민 들의 상호보완적 협동활동에 의해 해결해온 마을이다. 1996년에 H마을의 총가 구수는 134가구이며 마을인구는 전체 422명으로 남자가 205명 여자가 217명으 로 여자의 비율이 약간 높다. 총 134가구 가운데 논농사를 전업으로 하는 가구 가 70호이고 겸업농이 20호인데, 겸업농은 마을내의 농지내에서 농업을 운영하 면서 동시에 상업이나 임금노동에 종사하는 가구를 이른다. 농가 경작지의 대 부분이 논으로 경작규모는 최대 25,000평에서 1,000평까지 다양하게 분포하며 평균 경작규모는 3,000여 평에 이른다. 또 각 가구는 500-100평 남짓한 텃밭을 소유하고 있어 배추나 무등을 재배하여 일상생활의 보조적 기능을 수행한다. 마을의 인구는 1970년대 이후 점진적으로 감소하였다. 특히 1990년대 이후 H 마을의 인구감소경향은 현저하여 마을노동력의 구성이나 협동관계에 변화를 초래하고 있다. 농촌사회의 생산활동이 마을 내에 거주하는 주민들에 의하여 조직되는 협동관행에 의해 유지된다고 할 때, 인구의 변화는 그러한 재래적 관 행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농촌사회에 상존하는 인구는 마을 내의 공동생활 을 영위하며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거나 협력과 친목을 도모하는 근간을 이루 며 그러한 활동을 통하여 스스로의 욕구를 충족시키 때문이다. 한편 A부락은 일본 나가노현(長野縣) 마츠모토(松本)시의 남부에 위치하는 마을로 107가구가 거주한다. 농가호수는 57호이고 그 가운데 전업농가가 6호, 겸업농이 51가구이다. 1990년 현재 경작지 규모를 살펴볼 때 0.3ha 즉 1,000평 미만인 가구가 12가구이며 1,000-1,600평 미만인 가구가 10가구, 1,600평에서 3,000평 미만의 경작지를 보유한 농가가 24가구로 가장 많다. 3,000평에서 4,600평 미만이 8가구, 4,600평 이상이 3가구로 구성되어 있다. A마을에는 전통적인 자치조직이 존재하여 그 자치조직을 통하여 마을내의 협동관행을 조직하고 주민들의 삶에 개입하기도 한다. 3. 농촌마을 자치조직의 구성과 역할 한 사회의 자치조직은 다수의 구성원을 가지고 있으며 각 구성원은 선별기 준에 의하여 성원자격을 획득하고 그 성원을 규제하는 규범을 가지고 있다. 농 촌사회의 조직이란 일정의 지역 내에서 생활을 영위해 가면서 문제를 해결하 거나 협력, 친목을 도모함으로써 구성원의 욕구를 충족한다(Moore 1970, 235). 180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농촌사회에서 이러한 역할을 담당하는 조직은 매우 다양하다. 특히 성별 혹 은 연령별로 친목과 협동을 목표로 하는 조직들이 있으며, 이들은 특별한 목적 을 달성하기 위하여 구성원간의 협동을 유인하는 조직들이 있다. 이러한 조직 의 구성원은 조직의 목적에 공감하고 조직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협력의 사를 가진 사람들이며, 조직의 발전과 유지를 위한 규율을 준수해야 하는 의무 를 갖는다. 이러한 마을 조직의 중심이 되는 것이 자치조직이다. 자치조직은 상위의 행정조직에 의해 의도적으로 조직되는 공식조직(formal organization)으 로 지위와 역할이 부여된다. 마을 내의 모든 가정을 포섭하며 거주자들을 구성 원으로 마을이 직면하는 공동의 문제해결을 도모하고 마을의 중요한 사안에 대한 의사결정을 수행하는 최고 의결기관이다. 따라서 의사진행과 결과를 도출 하기 위한 적법한 절차를 준수하며 의사 진행자를 둔다. 마을에 따라 이러한 자치조직의 명칭은 약간씩 차이를 나타내며 시대에 따라 명칭과 역할이 달라 지기도 한다. H마을의 자치조직은 마을총회라고 호명하며 모든 가구가 마을총회의 성원으 로 각 가정 당 한 명이 참석하여 총회를 구성한다. 민주적인 절차로써 선거에 의해 선출된 이장이 마을을 대표하며 총회의 의장이 되며 이장 밑으로 총무와 감사를 두어 마을회의의 진행을 보좌하고 동재(洞財)를 관리하며 감독한다. 그 리고 마을의 하위단위로 10~15가구로 이루어지는 반(班)이 있으며 반장이 반 을 대표한다. 반장은 이장의 지명이나 반 구성원들의 권고에 의해서 임명되어 이장과 총무, 감사, 새마을지도자, 부녀회장, 개발위원들과 더불어 마을 임원을 구성한다. H마을은 현재 1명의 이장과 그 휘하에 7개 반 7명의 반장, 그리고 각 반에 1인의 개발위원을 두어 개발위원회를 구성하고 있다. 개발위원들은 반 장들과 더불어 마을의 행사나 사업을 기획․결정을 하고 총무는 총회의 의사 기록 및 재정업무를 총괄하며 회의를 진행한다. 마을총회를 주관하는 이장은 행정기관에서 하달하는 공문서의 전달, 홍보, 지시․감독역할을 수행한다. 과거에는 주민의 거주실태를 파악하고 출생사망신 고등의 호적업무를 대행한 행정의 말단기관이었다. 최근에는 행정간소화라는 명목으로 업무이관이 이루어 졌다. 한편 사회노동력의 일부를 관장하여 마을자 체의 사업이나 환경정비등의 부역에 노동력을 동원하기도 한다. 그 외에 마을 에는 새마을지도자와 부녀회장이 동사(洞事)에 참여하여 마을의 대소사를 주 관하는데 이들 새마을 지도자와 부녀회장은 1970년대 정부주도형 새마을운동 을 지휘, 감독하던 마을의 리더로서 그 위상도 매우 높았지만 새마을 운동의 쇠퇴와 더불어 그 역할이 매우 축소되었다. 그러나 부녀회장의 경우 마을의 대 소사에서 부녀자들을 조직하고 음식을 준비하거나 노인들을 접대하는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농촌지역의 자치조직을 통해 본 협동관계의 변용 ··················································· 권 병욱…181 그림1 한일 농촌마을의 자치조직 표 마을총회 町會 이 장 會長 새마을 총무 지도자 隣組長 감사 부녀회장 협 협 협 협 의 의 의 의 원 원 원 원 개 부 회 공 발 발 정 민 위 위 위 회 관 원 원 원 장 1 2 3 4 5 6 7 반 반 반 반 반 반 반 개 개 개 개 개 개 발 발 발 발 발 위 위 위 위 원 원 원 원 (우리나라) H마을의 자치조직도 계 장 부 공 민 관 장 (일본) A마을의 자치조직 이러한 경향은 일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일본 농촌사회의 대부분의 경우 자치기구는 마을의 수리나 공유산림등을 물질적 기반으로 한 촌락공동체적인 집단에 의해서, 또 부락이 하나의 농업생산의 근간이 되었다는 점에 의해 보강 되고 유지되어온 것이다. 이러한 자치기구는 시대에 따라 그 명칭을 달리하면 서 전 부락주민의 생산, 소비, 사회관계라는 생활의 모든 면을 포괄하고, 독자 적인 자치조직으로서 마을의 운영을 구축해 왔다.(松原, 余田 소화43년,p80). 이러한 자치조직은 村寄合라는 명칭으로 유지되어 오다가 자치제 초안이 제시 되면서 부락총회로 그리고 町會 로 변화해 왔다. 이 자치조직을 중심으로 子供 組, 若者組, 中老組등 연령집단에 따른 조직들이 존재하며 부락행사를 주도 하 는 것이다. 따라서 부락은 의사결정을 위하여 부락총회를 개최하며 하부조직으 로 조(組)를 구성하고 부락독자의 재정을 통하여 사업을 전개하였다. A마을의 경우 1954년까지 마을의 자치조직을 부락회(部落會)라고 칭하고 그 182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조직을 관장하고 운영하는 대표자를 구장(區長)이라고 불렀다2). 물론 마을에 따라 구장이라고 호명하는 대신에 조장이 그 역할을 대신 하기도하는데, 구장 은 부락의 자치운영 자체이며 부락의 통일을 도모하고 부락주민의 생산, 소비 생활상 사회생활의 원활한 운영을 도모하고 행정기관의 말단 조직으로서 징세 나 통계조사, 토목 및 위생사업등 상급기관의 하청사무를 담당한다. 그러나 1954년 8월 이후 인근의 마을과 합병되면서 부락회를 町會라 하고 그 대표자 를 町會長라고 부르게 되었다. A마을의 町會는 정기총회와 중대사가 발생할 경우 개최되는 임시회의로 나 누어진다. 부락임원의 선출, 예ㆍ결산의 심의 결정, 부락행사의 승인 등이 이루 어지고 부락의 규약이 결정된다. A마을의 경우 이러한 마을총회를 신년회라는 이름으로 명명하고 있다. 따라서 신년회는 한해의 町會의 결산보고와 차년도의 예산심의 및 결정이 이루어지며 마을임원을 선출한다. 이는 당해의 初總會를 일컫는 것으로 마을의 전 가구를 대상으로 실시하며 그 행사의 준비는 부녀들 이 하고 대부분의 남성들이 참가하여 친목을 도모한다. 이러한 町會의 역할과 기능은 H마을과 매우 흡사하다. 그러나 町會의 조직은 정점에 町會를 위치시 키고 町會長과 隣組長, 네명의 선출직 협의원으로 이루어지는데 이 협의원들이 副町會長과 회계, 공민관장과 부 공민관장을 겸하면서 마을의 협동관계를 조직 하고 지휘하는 것이다. 4 협동관계의 조직 1) 70년대 이전의 협동관계 마을은 다양한 퍼스넬리티의 구성원들로 이루어지고 그 구성원들은 각자의 문제해결을 위한 다양한 장치들을 고안한다. 마을은 교류의 장이며 문화의 장 이다. 주민들끼리 친목을 도모하기도 하고 애경사를 위로, 축하하며 문제 해결 을 위해 협동을 수반한다. 제반 행사가 마을의 구성원들과 복잡하게 연대하는 장치들에 의해 발전되고 완성되어지는 것이다. 주민들이 직면하는 개별적인 문 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계(契)를 조직하기도 하며 공동의 문제를 꾀하기 위하 여 다양한 성원들을 동원하기도 한다. 주로 마을 전체의 공동작업이나 공동의 2) 1889년(明治22년) 町村制실시에 의해 인접하는 몇 개의 村을 합하여 町村이 되고 각 촌은 행정구 역으로서 부락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에 이르기 까지 부락은 그 기능이 약해 지면서도 마찬가지로 자치적 기능을 유지해 왔다. 당시 부락의 자치기구는 부락회로서 전 부락주민의 생산, 소비, 사회관계 전반을 포괄하는 부락 3역(구장, 부구장, 회계)와 협의원, 조장(組長)으로 구성된다. (松原治郞, 余田博通(소화43년) [農村社會學] 川島書店 농촌지역의 자치조직을 통해 본 협동관계의 변용 ··················································· 권 병욱…183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공식적인 마을의 자치조직에 의해 요청되는 전통적인 협동방식이 유용하게 활용되어 온 것이다. H마을은 농사를 주 경제원으로 살아가는 농촌마을로 주민들의 대다수가 논 농사에 의존하고 있으며 논농사를 중심으로 서로 협동관계를 조직하고 운영해 왔다. 농사와 관련한 마을의 협동관행에는 ‘품앗이‘, ‘두레’와 ‘부역’등 재래적 방식이 있다. 품앗이란 가입과 탈퇴가 자유로운 작업집단으로 성원의 규모가 작고 자유롭게 편성되어 유동적이기 때문에 자치조직의 통제를 벗어난다.(崔在 律 1988). 대신 두레는 모심기와 논매기(제초작업)에 활용된 노동조직으로 1960년대 말까지 존속되었던 전통적인 농사관행이다. 이 두레의 결성은 마을총 회에서 이루어지며 노동력을 확보하고 제공하기 위하여 각 가정의 대표자가 참석한다. 그러나 60년대 말이 되면서 이 관행이 사라지고, 이후로는 반별로 조직된 ‘둥굴레’가 마을의 협동 작업을 주도한다. 둥굴레는 서해안 지역에서 주로 발견되며 협동노동을 중심으로 하는 노동력 을 동원하는 조직인데 H마을에서도 이러한 관행이 있었던 것이다. H마을의 둥굴레는 4개 반을 중심으로 하는 네 개의 둥굴레가 조직되었는데 1개 반을 15-16가구로 상정할 때 1가구당 가용 노동인구 약 2-3명의 출력을 고려하면 1 개 둥굴레 당 약 30명에서 많게는 40명이 성원이 된다. 이 둥굴레는 주로 논농 사의 중심을 이루는 모찌기, 모심기, 논매기등에 활용되었는데 둥굴레를 운영 하는 반장이 이를 관장하였다. 반장은 마을회에서 위임되어 반원들에 의하여 선출되며 둥굴레를 총괄하고 반장 밑으로 총무를 두어 둥굴레의 출력(出力)을 분배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노동력으로 보상받지 못하는 경우 출력자(出力者) 들의 일일임금은 마을총회에서 결정되었다. 한편, H마을에서 농로의 보수나 수로 관개시설의 정비(보메기)에 노동력을 동원하는 일은 부역을 통하여 이루어 진다. 마을의 이장이 부역의 시간과 장소 를 정하여 주민들에게 공지하면 주민들은 삽과 곡괭이를 지참하고 행사에 참 여하며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그 외에도 마을의 도로보수나 마을회관의 보수 사업, 마을의 제초작업도 마을회에서 주관하는 부역을 통하여 노동력을 동원한 다. 이러한 협동작업을 기피한다고 해서 강력한 제재나 처벌이 가해지는 것은 아니다. 마을의 유지와 효율성을 도모하고자 하는 재래적인 관행에 의해서 협 동을 조직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행은 일본의 A마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A마을의 경우에는 주민 들 상호간에 노동력을 제공하여 협동관계를 모색하는데, 마을총회의 동원에 의 한 부역과 ユイ(結)가 대표적이다.3) 町內에서는 주민들이 공동으로 관리 이용해 3) ユイ: 모심기, 지붕 새로이으기, 된장담기등 일시에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작업을 할 경우 상 184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야 하는 일들이 존재한다. 그것을 자치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공동노동이 필요하며 자치적으로 공동노동을 조직한 것이 마을일에 노동력을 동원하는 부 역이다. 부역은 주로 도로보수나 용수로의 정비등에 이용되거나 사방공사나 공 유재산시설의 보수, 공유산림이나 경지에 출역하여 협력적으로 문제를 해결하 는 마을의 장치인 셈이다. 한편, ユイ(結)는 농가 노동상의 일종의 노동력의 대차관계로 우리나라의 품 앗이와 유사하다. 특히 농번기에 있어서 보족적으로 結에 참가함으로써 다른 가구들과 결합하며, 유대를 강화해 가는 농촌노동력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통상적으로 농업노동에 있어서 대개 동등한 노동력의 교환, 호조(互助) 의 관행을 지칭하지만 임노동이 일반화하기 이전의 노동조직을 이해하는데 대 단히 중요하다(松原외 113). 물론 일본사회에서도 우리나라의 두레에 해당하는 부락단위의 공동노동력을 동원하는 닌소쿠(人足)가 존재한다4). 그러나 A 부락 의 경우 結는 주로 묘판 만들기, 모내기, 수확하기등의 농작업에 활용된 관행 으로 A부락에서는 52가구(85.2%)가 이를 통한 농작업에 있어서의 노동력을 조 달한다. 대개 한 가구가 독자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에 대하여 결합되는 관 계로 지붕 이으기, 집수리, 장례식 등에서도 유이를 통하여 협동하는 것이다 (直江 1972, 768) 町會는 ユイ(結)의 방식을 부락민들이 합의를 통하여 형성하였으며 모심기에 있어서 일일 총 노동시간의 결정이나 노동력으로 보상받지 못하는 경우의 일 당에 대한 금액을 결정하였다. 이 경우 부락민들의 이해관계와 직접적으로 관 련되기 때문에 부락민들은 이를 결정하는 총회에 직접 참여하였다. 그 외에도 농업생산과의 관련하여 농촌생활면에서 전개되는 활동이 있다. 대체로 가을 운 동회와 경로의 날 행사 그리고 망년회나 신년회등이 이에 속한다. 이러한 행사 들은 마을의 전 가구를 대상으로 하는데 부락총회의 성격을 띠는 신년회를 마 치면 술을 마시면서 서로의 삶의 이야기를 나누고 분위기를 돋우며 서로 마을 의 구성원임을 확인하는 교류의 장이 되는 것이다. 농한기에 접어들면 각종 학 습회가 개최된다. 취미나 교양을 위한 강좌등이 실시되는 것이다. 한편 마을의 환경정비를 위한 수로의 정비를 통하여 농지용수로서만이 아니라 소방용수로 서 사용하기 위하여 농가 비농가를 막론하고 1년에 한번 隣組단위로 청소에 참가하는 것이다. 이처럼 60년대 말 70년대에 초에 있어서 농업생산에 있어서 노동력의 조절 호간에 노동력을 빌리는 것. Naoe niroharu(1972) 結, 大가民俗學會편 日本民俗事典 718, 통문당 4) 이것은 한 집에 한명씩 노동력을 제공하여 공동작업을 수행하는 조직으로 마을의 도로보수, 길닦 기, 공동청소등에 이용되었다. 그러나 유이는 농작업 가운데세도 모심기와 추수에 가장 잘 이용되 었다고 관찰되고 있다. 그러나 자치조직과의 관련 속에서 이 관행은 기록되고 있지 않다. 농촌지역의 자치조직을 통해 본 협동관계의 변용 ··················································· 권 병욱…185 과 조달이라는 업무가 자치조직으로서의 마을총회, 혹은 町會의 중요한 업무였 다. 다시 말해서 이들 자치조직은 두레(둥굴레)나 ユイ(結) 집단단위에서 담당 했던 생산상의 협동관계를 마을단위에서 통합․유지하는 역할을 수행한 것이 다(陸 1996, 181). 아울러 마을의 자주적인 운영을 통하여 실시되는 각종 노동 력 동원사업이 마을회 혹은 町會를 통하여 이루어 졌다. 2) 전통적인 협동관계의 쇠퇴기(1970-1980년 경) 70년대는 한일 양국에 있어서 사회적 경제적 변화가 급격하게 밀려든 시기이 다. 특히 일본의 경우, 신무(神武)경기 혹은 이와토(岩戶)경기라고 할 만큼 급 격한 고도성장기에 접어들면서 농업생산이나 농촌사회에 급격한 변화가 밀어 닥친 것이다. 산업사회의 일자리를 찾아 離農현상이 일반적인 경향이 되면서 농촌사회의 축소와 노동력 부족이 직접적으로 농촌사회의 변화를 초래한 것이 다. 반면에 한국에 있어서 이 시기는 농촌 잘 살기 운동의 일한으로 전개된 새 마을 운동과 산업사회로의 진입을 위한 과도기로서 수출증대를 통한 경제적 자립을 지향했던 복합적 시기로 특징지워진다5). 새마을운동 초기에 대부분의 마을은 개발위원회를 결성하고 각 마을의 환경 개선사업을 주민 협동으로 추진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주로 지붕 개량, 담장 쌓기, 농로 확장 및 보수 등이 주요 사업이었으며 마을에서는 새마을 지도자를 선출하여 원활한 사업의 추진을 도모하였다. 새마을운동은 대통령의 지시로 마 치 법과 같은 강제성을 띠고 진행된 운동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마을 주민들 은 자발적이라기보다는 비자발적 혹은 강제적으로 동원되었던 시기인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마을회의 조정에 의한 협동관계의 내용은 마을 진입로 확장, 마 을 앞 소하천 뚝 보수 및 관리, 마을 청소 및 하수구 파내기, 공동우물 및 공 동 빨래터 만들기 등으로 정리된다. H마을의 새마을 운동은 농로 확장, 지붕 개량, 마을 진입로 확장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마을의 사업은 반 강제적이지 만 무상 협력을 도모하고 총동원 체제를 구축하여 추진되었다. 한편, 70년대 초에 우리나라의 심각한 식량사정을 해결하기 위하여 다수확종 인 통일벼를 개발하여 전국적인 보급에 급급했지만 통일벼의 생산을 위한 농 약이나 각종 동력식 농기구의 보급은 전통적인 협동방식으로서 두레나 둥굴레 의 쇠퇴를 초래하고 노동생산성이 급격하게 증가한 동력기계의 이용이 활발해 진 것이다. 이 당시 H마을의 협동관계에서 마을회가 주도하는 경험은 새마을 운동의 조정에 따른 것이다. 물론 이 시기에도 마을의 대소사를 논의하는 마을 5) 새마을 운동은 1970년대 초,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주도로 시작된 농촌 개량운동으로 근면ㆍ자조ㆍ 협동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생활환경을 개선하고 소득증대를 목표로 하는 범국민 운동이다. 186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총회의 개최나 마을회관의 설립에 따른 마을 주민들의 동원은 존재했지만 마 을의 노동력의 협력방식으로서의 두레나 둥굴레의 쇠퇴는 현저한 것이다. 대신 농기계의 보급에 따라 기계를 중심으로 하는 개인별 협동관계가 등장하면서 전통적 협동관행과 병존하게 된다. 그러나 자치조직에 의한 협동노동의 위세는 마을의 공동작업으로 국한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일본의 A마을의 경우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전통적인 협동관행으로서의 ユイ (結)의 급격한 쇠퇴기를 맞이하게 된다. ユイ(結)의 쇠퇴를 초래한 직접적인 요 인은 동시기에 동력 전직기의 보급의 영향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즉 A부락의 경우 대부분의 농가가 동력 전직기를 구입하여 ユイ(結)에 의한 모심기가 불필 요 해 졌던 것이다. 따라서 町會의 ユイ(結)에 관한 합의 형성과정의 필요성이 사라지고 이 시기에 있어서 A부락의 농업생산에 있어서 협동관계는 ユイ(結)에 의한 공동 모심기라는 형태로부터 몇몇 가구단위의 기계의 공동구입, 공동이용 이라고 하는 형태로 변화한다. 특히 1971년의 쌀의 생산조정이 본격적으로 실 시되면서 농업기계의 보급에 의한 농작업의 성력화, 농업외 고용의 증가라는 요소들이 가해져 A부락의 겸업농의 수가 증가하고 농업을 중심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전업농가와 제 1종 겸업농가의 비율은 급격히 저하했다6). 따라서 농 업생산은 부락의 공통관심사의 위치로부터 멀어지게 된 것이다. 결국 기존의 町會의 노동력 조절기능이나 협동관계의 통합․유지라고 하는 역할은 그 존립 기반을 상실하고 町會의 활동이 농업생산의 국면으로부터 소외되고 町會의 활 동은 필연적으로 생활의 국면으로 한정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町會의 역할을 강화한 것은 마을 근처에 공장공원단지와 공장단지가 입지하면서 부락내의 토지소유자와 건설업자간에 발생한 토지매수 의 교섭에서 마을의 자치회의 중개 조정을 담당하는 일이다. 물론 단지가 완성 된 이후에도 町會는 새롭게 이주해 오는 주민들과의 문제해결에 솔선해야 만 했다. 특히 단지에 새로운 자치조직의 조성에 따른 혼주화의 문제는 부락의 축 제에 참가시키는가 하는 문제에 돌입하게 되면서 町會에 의한 협동관계의 양 상은 크게 바뀌게 된다. 즉 종래의 町會가 농가를 중심으로 구성된 농촌 고유 의 자치조직이라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고 한다면 이 시기에 있어서의 町會는 농가와 비농가를 함께하는 지역주민이라고 하는 형태로 포섭하는 지역사회의 자치조직이라는 성격을 띠게 된 것이다(陸 1996, 193) 3) 마을자치조직의 새로운 움직임(1980년대 이후) 6) 1972년에 마츠모토(松本)시에 오오쿠보(大久保)공장공원단지와 1973년에 西南공장단지가 건설되면 서 지역의 노동력의 고용에 미친 역할은 크다. 陸은 전업농가와 제 1종 겸업농가의 비율이 34% 저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陸 p 190) 농촌지역의 자치조직을 통해 본 협동관계의 변용 ··················································· 권 병욱…187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우리나라는 급속한 경제 성장과 함께 후진국대열에 서 벗어나면서 수입개방의 압력을 받고 우루과이 라운드(1986-1993)로 대표되 는 수입개방의 압력에 따른 농축산물 가격하락의 영향권에 놓이게 된다. 특히 UR협상에서 농업분야는 각국이 가장 첨예한 대립을 보였던 분야로 한국은 쌀 을 포함하여 285개 품목 대부분이 97년 7월 1일로 자유화하기로 합의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국제사회의 움직임 가운데 우리나라 농촌의 사활을 위한 움직임이 가 속화 되었다. 특히 90년대를 전후한 마을의 협동관계는 지난 70년대와는 별개 의 형태로 구축되었다. 새로운 형태의 협동관계를 형성한 것은 다양한 작목반 의 결성으로 나타난다. 작목반은 각 군청의 기술센터의 지원에 의존하는데 축 산농가의 경우 축종별 작목반이 있고 통합형 시설 원예작목반이 있다. 이러한 조직들은 생산물을 농협의 지원에 의하여 계통출하를 원칙으로 하며 사업의 이해관계에 따라 조직된다. H마을의 주민 간 협동관계에서도 작목반을 통해 조직되는 경우를 볼 수 있 다. 논농사 중심마을로서 벼를 재배하고 있는 일부의 가구가 가입하여 구성원 간의 협동관계를 조직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기에 마을회에 의한 농업생산에 서의 협동관계는 거의 보이지 않고 단지 마을 안길 청소하기, 마을 꽃길 가꾸 기 등 환경정비에 크게 의존한다. 전 주민에 의한 협동관계의 단서는 마을 어 른들에 대한 경로잔치와 면 대항 체육대회 정도이다. 이러한 행사가 개최되면 마을회와 청년회, 부녀회가 협동적으로 일을 치루는 것이다. 경로의 날 행사나 마을 대항 체육대회는 대부분 마을의 전 주민이 참여하여 마을의 단결된 모습 을 선전하거나 협동을 통하여 단결력을 외부에 과시하기도 한다. 따라서 마을 회는 젊은이들을 격려하고 정진시키는 것이다. 이 시기에 마을의 자치조직에 의한 협동관계를 강화한 것은 마을의 공동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조직한 경우 이다. 즉 H마을 하수 종말 처리장 시설의 설립이 계획되면서 공동의 님비현상 에 대응하는 주민들은 반대데모를 주관하거나 처리장 시설자와의 보상교섭에 마을회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된 것이다. 일본의 경우 이 시기의 마을내의 협동관계는 1981년에 시작된 부락범위의 기계의 공동이용이 그것이다. 그리고 농업생산에 있어서 새로운 협동관계의 결 성과 더불어 마을자치회의 활동에도 새로운 움직임이 모색되는데 A부락의 御 嶽講의 부활이다.7) 御嶽講는 木曾의 御岳山에 있는 御嶽神社의 御嶽권현을 신 7) 講는 촌락공동체 가운데 매우 중요한 위치와 의미를 가지며 그 형태는 실로 다양하며 사람들의 생 활, 집단사회, 종교, 신앙, 신사와 지연, 사람들의 자세 등 촌락공동체에서 살고 있는 연구하는데 간과할 수 없는 위치에 있으며, 講는 신앙을 함께하는 사람들의 집단으로서 결성된 것과 신앙을 모토로 하지 않는 경제나 정신의 상호협력을 같이하는 집단으로 결성된 것으로 나누어진다. 講에 188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앙하는 講이다. A 부락에서는 전 가구 참가로 講頭가 선두에 서고 여름과 가 을에 두 번 실시하는데 이 행사를 실시하는 단위는 隣組이다. 8월의 행사에서 는 제비뽑기로 정해진 当屋가 질병을 퇴치하는 효능이 있다고 하는 감주를 만 들고 마찬가지 방식으로 정해진 代參者 3인이 木曾의 御岳山에 간다. 이 참배 에 소요되는 비용은 각 가정으로부터 걷는 講金으로 충당한다. 이러한 행사가 60년대 초에 부락주민들의 고령화등을 이유로 소멸되었다. 중심적인 것은 이 행사에서 참배가 대참자(代參者)들에 의해 이루어 졌다가 1980년경부터 代參 은 町會의 업무가 되고 그 임원이 代參을 실시하게 된 것이다. 또 그 시기부터 대참의 비용역시 講金으로부터 町會費로 이관 실시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마 을의 행사를 부활시키고 주역을 담당한 町會의 의도는 마을 주민들간의 희박 해진 협동관계와 주민간 연대감을 새롭게 도모하고 대화와 교류의 장을 강화 하고자 하는 의도에 다름 아니다. 5 결론과 시사점 이상으로 살펴본 한일 농촌사회의 자치조직과 그 조직들을 토대로 전개되어 온 협동관계를 개괄해 보았다. 주목할 것은 한일 양국의 농촌에 있어서 협동관 계는 전통적인 규범이나 관습에 기초한 농업생산에 있어서의 협동관계에서 농 업기계 등 농기구의 보급에 따라 농업생산에서 담당해 왔던 협력관계의 역할 기반을 상실한 점이다. 즉 H마을의 협동관계가 마을총회의 조정에 의한 두레 혹은 둥굴레를 중심으로 하는 관습적인 협동관계에서 농기계를 중심으로 하는 개인별 협동관계로의 변화이다. 물론 마을내의 공공사업으로서 마을총회의 동 원에 의한 부역의 양상은 그 내용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을내에 활용 되고 있다. 또 특정시기로써 새마을 운동기를 맞이하여 제도적으로 협동관계가 조직되는데 정부의 강력한 지시에 의한 마을내의 환경정비로 마을 주민들에 대한 의무로서의 협동관계라고 할 수 있다. 한편,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마을총회의 결의에 의한 협동관계는 경로잔치나 마을 대항체육대회, 경로관광이 주종을 이룬다. 주로 음식의 준비나 식장의 정 돈, 노인들의 초대가 행사의 주 내용이 된다. 특이한 것은 마을 내에 새로운 시설의 진입에 다른 공동대처의 국면에서 나타나는 협동관계의 변용도 눈에 의해서 일가족이 서로 이산을 나누어야 하는 일이나 자본이 없어 불가능했던 일이 가능해져 회사 로 까지 발전한 경우, 일생 한 번의 효행이 가능해 졌다고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마음을 끈다. 특히 신앙과 관계없이 생활의 상호부조나 마음을 위로하는 것으로 頼母子(たのもし)講、むじん、등 신뢰관계로 형성된 講가 대표적이다. 농촌지역의 자치조직을 통해 본 협동관계의 변용 ··················································· 권 병욱…189 띤다. 일본의 A마을의 경우 우리나라와 유사한 진행을 보이는데 초기의 협동관계 는 관습적인 結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규범에 의한 협동관계에서 그 후 농기 계의 보급에 따라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협동관계로 변용되어지고 80년대 이후 전통적인 행사의 부활에 따른 협동관계로 변모해 가고 있다. 다시 말하면 한일 농촌사회에서의 협동관계란 시기적으로 사회의 변화에 따라 시대에 부응 하는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된다. 정책의 흐름이나 마을의 변화와 발전을 도모 하고자 하는 계획이 어떻게 전개되느냐에 따라 협동관계도 그 양상을 달리 하 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을 시야에 둘 때 향후 마을내의 협동관계는 1차적 연대를 토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을 주민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합리 성이라는 미명아래 변용되어질 것을 추론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일본의 예에 서 보여지듯이 전통의 부활에 따라 발생하는 새로운 협동관계에 주목할 필요 가 있다. 이러한 협동관계를 문화적 협동관계로 규정하며 다양한 지역축제의 양상이 그 성격을 나타낼 것이다. 190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参考文献】 국립민속박물관(1994), 『한국의 두레』국립민속박물관 학술총서 13 金東一(1982), 『農村住民의 삶의 質』, 한국농촌개발연구원 권병욱(2005), 「신뢰의 경제사회학적 분석」아시아연구 문옥표(1996), 일본의 농촌사회-관광산업과 문화변동- 서울대학교 지역연 구총서(5), 서울대학교 출판부 박서호(2001), 『지역개발론』오정문화사 안용산(1993), 『금산의 두레노동』금산문화원 양회수(1967), 『韓國農村의 村落構造』고려대 출판부 이만갑(1981), 『韓國農村社會硏究』, 다락원 陸 麗君 ( 19 9 6 ), 「 自 治組 織 か ら み た部 落內の 協 同關 係 の 變容 」 地域 社 會學 會 年報 8 集 181-203 直江廣治(1972) 「結」, 大가民俗學會편『日本民俗事典』718, 통문당 長谷川昭彦(1981), 「相互扶助慣行と農村自治」『村落社會硏究』 17 中川 剛(1980), 『町內會』中央公論社 松原治郞, 余田博通(昭和43年) 『農村社會學』川島書店 Coleman, J(1990), Social Capital in the Creation of Human Capital, American journal of Sociology, Vol 94 Gouldner, A(1960), The norm of Reciprocity: A preliminary Stat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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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ory and Society, 27:151-208 농촌지역의 자치조직을 통해 본 협동관계의 변용 ··················································· 권 병욱…191 要 旨 本 硏究は韓國と日本の農村地域において見られる協同關係の變化と受容を調べたものであ る。伝統的に言えば、兩國の協同關係は農業生産に基づいて成される。單獨には 解決でき ない問題が村の自治組織により、共同に解決され, 住民間の紐帶を強める方式をとっている。 このような伝統的な慣行は両国に非常に類似な形で残されていることを確かめたのが本研究の 大きな收穫である。にもかかわらず、このような慣行も時代によって変容していく。 産業社会の渡来や進行にともない、現代的な 農器具の普及がそんな慣行の変化を導いた 重要な要因である。70年代の前には農村地域の農事慣行こそが 協同關係の 典型であると 言えば 80年代以後には 農機械の 所有によって作り出した 協同關係が特徵的である。まだ 80年代 以後には村の傳統のよみかえり、また 環境問題に村自体の抵抗の手段としての協同 が現れる。このような 變化は最近、わが社会にでも頻繁に見られる。 キーワード;協同關係、紐帶、町會、두레、ユイ(結)、御嶽講、産業社 투 고 : 2008. 8. 31 1차 심사 : 2008. 9. 12 2차 심사 : 2008. 9. 27 우찌무라간죠(內村鑑三)의 생애와 사상 -에비나단조(海老名弾正)사상과 관련하여- 金文吉* 1) (e-mail : [email protected] ) 目 次 1. 2. 3. 4. 5. 6. 7. 서론 우찌무라간죠의 생애와 활동 우찌무라간죠의 비전(非戰)사상과 에비나 단조(海老名弾正) 우찌무라간죠의 평화사상 조선의 무교회(無敎會) 전래 결론 참고문헌 1. 서론 우찌무라 간죠(內村鑑三)은 明治時代 日本 프로테스탄트 기독교회의 대표적 인 지도자로 그의 사상의 독창적인 것을 연구할 때 일본 구미아이 교회 (組 合敎會) 에비나단조(海老名彈正)요코하마교회(横浜敎會) 우에무라마사히사(植 村正久)를 손꼽을 수 있다. 굴지의 인물이란 것을 나타내기 위해 우찌무라는 3인을 평가하기를 요꼬하 마 교회의 우에무라마사히사는 교회주의자, 구미아이교회의 에비나단조는 국가 주의(國家主義), 자기 자신은 精神主義者라고 평가하는 것을 보아도 잘 알 수 가 있다.1) *1)부산외국어대학교 일본어과, 교수, 일본역사 1) 우찌무라는 자기 자신의 이야기처럼 정신주의자라는 꼬리표가 붙여있는 것처럼 전후 연구하는 젊 은이들이 수없이 많고 연구 업적만 열거해도 태산이다. 모두 열거하고 연구사를 정리하기는 힘드 는 형편이지만 다음과 같은 연구업적이 있다. 1960년대 우찌무라연구회에서 출판한 「 內村鑑三 聖 194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일본사 가운데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을 수 없는 봉건사회 체제를 잘 다 저나간 사무라이 정치가 무너지고 서구 열방의 문호를 호응하여 새로운 체제, 明治維新기에 많은 사상가들이 태어나고 활동하는 시기에 우찌무라는 일찍이 일본적인 기독교 무교회(無敎會)를 조직하여 전후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사상 가 반열위에 올려놓고 많은 학자가 연구하고 있는 실태이다. 우찌무라가 유명한 사상가로 등단하게 된 동기는 자기 자신의 독특한 신앙 과 사상의 뿌리가 있지만 위에서 언급한 구미아이교회의 에비나단조 즉 국가 주의, 전쟁주의자 신도(神道)적인 사상가가 있었기 때문이다.2) 필자는 일본 기독교의 지도자로서 일본적인 “무교회”를 창출, 우찌무라가 전 쟁기에 비전론(非戰論)을 주장하여 지금까지 세계인의 이목을 끌고 연구자들 이 연구에 몰두한 일본이 낳은 사상가 중에 거물급인 우찌무라간죠의 비전론 에서 평화주의자로 활동한 우찌무라를 연구하는데 목적을 둘까 한다. 2. 우찌무라의 생애 우찌무라는 1861년 3월23일 아버지 우찌무라 긴노스케(內村金介)의 장남으 로 태어났다. 긴노스케는 에도막부의 하급사무라이의 한사람이었다. 그가 태어 난 곳은 에도(江戶)다카사키(高崎)로 도쿠카와이에야스(德川家康)가 막부를 세 우고 막부 체제를 견고하게 하기 위해 무사들의 자녀를 모아 양성하는 교육의 도시이기도 하다. 당시의 무사들의 자녀교육은 유교였다. 유교가운데서 실학 사상을 중심으로 서당공부가 전부였다. 에도시대 서당은 데라꼬야(寺子屋)였 다. 우찌무라 아버지는 우찌무라간죠를 유교 교육을 받아 남달리 막부중심의 사무라이로 키워보겠다고 열심히 서당에서 글을 가르쳤다. 우리나라의 기독교수용사에도 찾아볼 수 있지만 일본의 초대기독교를 받아 드린 계급의 신분들은 모두가 사무라이 가정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우찌 무라도 사무라이 가문에서 자라 유교사상의 서당공부를 열심히 하던 중 일본 에도 서양문물이 들어와서 기독교가 전래되었다. 명치유신이 일어난 후 일찍이 書註解全集 」17券이 敎文館에서 출판하게 되어 우찌무라 연구가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일본기독 교 사상사, 일본사에 지명도가 높은關根正雄이 「內村監三」이라는 연구서가 1967년도에 淸水書 院 출판함으로 일본사상사 연구에 우찌무라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고 이어서 일본역사가로 알려 진 態野義孝 「日本キリスト敎神學思想史」에 “內村鑑三의 信仰, 思想論評”을 출판하게 되어 우찌 무라 연구회의 핵심이 되어 이 모임을 이끌게 되었다. 이외에도 오늘날까지 많은 연구가 쏟아져 나오는 실정을 감안할 때 우찌무라는 일본사상가 중의 사상가이다. 2) 졸저 「근대일본 기독교와 조선- 에비나단조의 사상과 행동」1998.6.24 9p 明石出版社 우찌무라간죠(內村鑑三)의 생애와 사상 ···································································· 金 文 吉…195 서양문물의 신학문의 학교가 여러 곳에 세워질 때 우찌무라는 기독교학교인 삿포로(札幌)농학교에 들어갔다. 삿포로 농학교는 미국 선교사 클라크 (w.s.clark)란 선교사가 학교를 세웠다. 3) 클라크는 원래 농학박사로서 명치정부에 위탁받아온 선교사이다. 여기서 우 리가 좀 생각하고 넘어갈 것은 우리나라 선교는 우리나라 사람이 해외에 나가 서 선교사를 불러 들어와서 선교가 되었지만 일본 같은 경우는 명치정부가 정 책적으로 초빙하여 기독교가 전래되었던 곳이 많다. 삿포로 농학교도 마찬가지 이지만 구마모토 선교도 서양양학교(西洋洋 學校) 를 세우고 귀족의 자녀들을 교육시키기 위해서 초빙되어온 선교사들이였다. 삿 포로는 명치유신 때 까지는 일본열도에서 제외된 지역이었다. 다시 말해서 일 본사람들이 삿포로를 자기 나라라고 생각지 않았다. 명치유신이후 일본정부가 개척지로 삼고 농업을 개발하기 위해서 선교사를 불렸던 것이다. 삿포로 즉 홋 카이도(北海道)뿐만 아니라 오키나와(沖繩)도 마찬가지로 개척된 시기는 명치 정부가 들어선 이후 부터였다. 그곳을 동시에 개척할 때 정한론(征韓論)을 내 세워 조선도 동시에 東洋開拓이란 차원에서 침략을 시작했던 것이다. 우찌무라가 江戶인 토쿄에서 개척지인 홋카이도를 간 의도는 홋카이도 개척 자인 클라크 선교사에게 생물학을 배우기 위해 떠났던 것이고 나중에 꿈은 홋 카이도를 자기 나름대로 신도시로 만들어보겠다는 원대한 꿈을 안고 갔을 것 이다. 그곳에서 공부한 우찌무라는 시회적인 학문과 원대한 꿈은 점차 식어가 고 클라크가 전하는 기독교 정신에 심취되어갔다. 결국 1879년 클라크 밑에서 세례를 받고 훌륭한 기독교인이 되었다. 1884년 삿포로 농학교를 졸업한 우찌 무라는 기독교사회에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 미국 애머스트대학과 하트포드신 학교(HTS)에 입학하기 위해 미국으로 갔다. 미국에 도착한 우찌무라는 어느 누구보다 기도생활과 장차 일본을 선교하려 는 꿈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하였다. 미국 하트포드신학은 성서영감설과 복음주 의신학을 주장했던 보수적인 면이 강했다. 4년간의 미국생활은 우찌무라에게는 장차 일본에서 일하고자 하는 학문적인 기반과 교회선교의 전략을 확실히 다 지고 1888년에 귀국했다. 우찌무라가 미국서 공부하고 있는 4년 동안 일본의 정국은 눈부실 만큼 달라 져 있었다. 무엇보다도 천황제 국가의 법적기구가 확립되어 1890년 10월30일에 3) 일본은 외국선교사가 선교할 때 지역을 배당 받아 선교했다. 이런 방법은 한국에도 최초로 선교할 때 지역분담제였다. 일본은 3곳을 나눠서 선교하고 대표적인 기독인재를 배출했다. 삿포로는 클라 크의 중심으로 우찌무라를 배출하고 요꼬하마를 중심으로 브라운 (S.R.Brown)이 선교하여 우에무 라 마사히사를 배출했다. 그리고 구마모토(態本)가 중심이 되어 젠즈(L.L. Janes)가 선교하여 구미 아이교회 에비나를 배출했다. 이 3곳을 3반도의 기독교선교라 한다. 반도라는 말은 벨트(Belt) 즉 지역이란 뜻인데 일본발음으로 반도라 한다. 196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교육칙어(敎育勅語)”가 내려졌다. 교육칙어는 두 가지 측면의 정서적인 면에 서 내려진 것으로 안으로 일본국내의 자유민권 운동 억압과 밖으로는 정한론 에 대비한 범국민적 정신함양이었다. 교육칙어의 초안은 앞장에서 이미 이야기 했던 바와 같이 구마모도 양학교 (西洋學敎)에서 공부한 모도다에이후(元田永孚)와 이노우에고와시 (井上毅)였 다. 이들은 물론 구마모토 양학교에서 공부하고 천황제국가의 봉화불을 당긴 “하나오카(化岡)사건”의 인물이었다.4) 교육칙어의 내용은 위(국가)로는 충군애국(忠君愛國)정신을 가르치는 것이고 아래(국민)로는 가부장제도(家父長)즉, 가족전제(家族專制)교육이다. 충국 애국정신이라는 것은 “군(君)”은 천황의 호칭으로 천황을 절대 존경, 절대복종이란 것이고 가부장 제도는 집에서는 어른을 섬기는 것이고 사회에서 는 남녀노소 구별을 뚜렷이 하자는 것이다. 교육칙어가 내려져 각 학교에서는 천황사진과 교육칙어의 이념을 벽에 나란히 걸어놓고 학생들로 하여금 조례와 종례시 반드시 이곳에 절을 하도록 교육시켰던 것이다. 우찌무라는 미국에서 귀국하여 생물선생으로 도쿄 제일고등학교(지금은 동 경대학전신)에서 교직 생활을 했다. 특히 교육칙어가 내려질 때 어느 교사보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우찌무라는 모든 선생이 수업시간에 학생들을 자리에서 일어서게 하고 교육칙어를 외우고 천황사진에 참배시키는데 우찌무라는 그렇 게 하지 않았다. 뒤에 있던 학생 중 하나가 교실 문을 박차고 나가 경찰서에 우찌무라를 고발했다. 우찌무라는 자신이 지도하는 제자들에 의해 고발당했다 는 것은 그 당시 일본국민들의 정서생활이 어떠했는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1891년 4월20일 우찌무라는 고발당해 경찰서에 연행되었고 그 후 교직생활 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이것이 일본 근대사에서 “우찌무라간죠의 후케이 사 건”(內村鑑三 不敬事件)이라한다. 하루아침에 백수가 된 우찌무라는 도쿄, 교 토, 오사카 등, 일본 열도를 다니며 “그리스도의 재림”과 “말세사상”을 전하며 그리스도의 포교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가 미국에서 배운 복음주의신학 즉, 조직신학을 기반으로 하여 일본 현실 사회를 폭로하는「기독신도의 위로」라 는 책을 통하여 우찌무라의 신앙사상과, 일본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서 대해서 많은 호응과 국민들의 지지를 얻게 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일본인의 정서에 새로운 국가의식을 심는 애국심 “二의 J”를 제시했다. 4) 하나오카 사건은 구마모도 양학교 에비나단조를 선두로 해서 명치국가(천황제국가)를 받들어 나아 가자는 단체. 이 사건은 무력행위가 있어서 일시적으로 일어나서 구마모도 양 학교는 폐쇄되고 임 원들이 교토 도오지사 영학숙(京都) 同志社 英學塾)에 들어갔다. 우찌무라간죠(內村鑑三)의 생애와 사상 ···································································· 金 文 吉…197 “ I for Japan, Japan for the World The world for Jesus christ and all for the God"5) 이라 선포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일본을 위하고, 일본은 세계를 위한다. 세계는 하나님을 위해서“ 라는 일본국가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동시에 가르치는 운동으로 유명 한 말이 되었다. 지금도 우찌무라간죠의 묘의 비문은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 다. 우찌무라는 일본을 남달리 사랑하지만 천황제국가 천황을 우선으로 섬기는 우상숭배사상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 위치에서 일본국민을 사랑하는 마음의 시 민운동과 겸하여 기독교정신을 심었다. 1900년 2월 아시오 광독사건(足尾鑛毒事件)에 힘을 기울였다. 아시오 광독사 건은 에도(江戶)시대부터 일본광산으로 유명한 곳이다. 아시오 광산에서 생산 되는 철(鐵)은 근대 일본 문명을 눈부시게 발전시켰다. 철의 생산으로 인하여 배출되는 폐수가 도치키현(栃木縣) 군마현(郡馬縣) 사이다마현(埼玉縣), 지바 (千葉縣) 도쿄(東京)등 여러 지역의 하천을 오염시켜 농민들의 농사뿐만 아니 라 심지어 폐수에 의해 죽어가는 사람이 많이 있었다. 철의 생산은 국가가 장 악했기 때문에 아시오 철광에서 배출되는 폐수로 인한 피해에 대해서 그 누구 도 나서지 못할 때 우찌무라는 『만조보(萬朝報』를 통해서 국민건강의 해악 을 고발하며 군중 속에 직접 뛰어 들었고 환경운동에 불을 지핀 최초의 인물 로 활약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러 전쟁의 부당성 즉 “비전론(非戰論)을 내세 워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낸 우찌무라는 많은 인재를 양성하게 되 었다. 사회정치면에서 오스키사카에(大杉榮)를 비롯해서 수많은 사회주의자들 이 나왔으며 문학자로서도 구니끼다도쿠호(國本田獨歩)를 비롯해서 수십 명이 등장하여 일본 근대문학의 획을 긋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조선 유학생인 김교신(金敎臣)도 우찌무라간죠의 사상을 본받아 조선에 우찌무라간죠의 종교 “무교회(無敎會)”가 생겨 오늘날에도 중국, 대만, 한국, 아시아 뿐만 아니라 세 계의 “무교회”가 있고 신자수만해도 상당히 많은 편이다. “무교회”도 서양제국 국가에서는 일본어 그대로 “Mukyokai”라 등록하여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 많은 세상에 많은 업적과 뿌리 깊은 사상을 심은 우찌무라 였고 세계적 인 무교회를 창시한 우찌무라는 1930년 3월28일 서거하였다. 5) 졸저 「內村鑑三의 平和思想과 조선 무교회의 동향. 아시아기독교 다원성」제26호 129p 京都大 아시아 기독교 연구회 2004.3 198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3. 우찌무라 간죠의 비전사상(非戰思想)과 에비나 단조 우찌무라의 사상은 앞에서 지적한바 있지만 러·일전쟁에 있어서 일본구미아 이교회(組合敎會)에비나단조의 “전쟁론”과 “성전(聖戰)”에 대치되는 입장에 섰 기 때문에 우찌무라의 “비전론”이 성립되었고 일본이나 세계에 널리 알리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에비나가 존재했기 때문에 우찌무라가 존재했고 우찌무라 가 존재했기 때문에 에비나가 존재하는 양존양론(兩存兩論)의 대립자가 되었 다. 에비나의 “전쟁론” 우찌무라의 “비전론”의 의미를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것 은 雨論의 의미를 연구해야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이다. “전쟁론”자의 입장인 에비나단조6)와 “비전론”자인 우찌무라 간죠는 모두가 기독교 지도자로 목사였다. 성경에 보면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 진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마26:52)에도 기록되어있고 “나는 너희에게 이 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 등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인간을 사랑하고 인류평화 사상이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에비나단조는 전쟁의 정당성에서 “성전(聖戰)”을 외치고 우찌무라는 절대 로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는 비전(非戰)을 외친 것이다. 이런 사상의 대립은 일본 명치국가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고 또는 어제 오늘의 단순한 문제로 처리할 수 없는 전쟁 병역거부 문제들이다. 베트남 전쟁, 중동전쟁, 아프칸 전쟁, 남북한 문제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논 쟁이 있었고 앞으로도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들 은 언제 어디서부터 풀어야 하는 것 인가. 멀리 거슬러 올라가서 생각해본다면 4세기의 콘스탄티 누스 대제에 의해서 제정된 즉 콘스탄티 공회 회법 이전에 는 고대 교회에 있어서는 절대 평화주의 병역거부였다. 기독교가 국교로 승인 된 이후(16~17세기)는 전쟁을 긍정하고 병역을 의무화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 다. 그러나 반대했던 소수파는 그때나 지금이나 전쟁반대와 병역거부운동이 전 개되고 있다. 우찌무라는 원래 “비전론”자는 아니다. 일·청 전쟁 때는 기독교지도자 중에 서 누구보다 전쟁의 타당성을 주장한 사람이다. 일청전쟁이 박두할 때 그가 쓴 「地人論」을 영어로 써서 미국사회에 알리고 다시 1889년 「日本國의 天職」 이라는 책을 일본어로 써서 일본국민들에게 알렸다. 그의 집필에서 그가 생각 6) 에비나단조 연구는 지금까지 우찌무라 연구에 비해서 비교적 적은 편이나 최근에 연구된 것은 吉 馬川明子「海老名彈正의 政治思想」(1982) 졸저 「近代日本ギリスト敎と朝鮮-老名彈正의 思想과 行動」(1998)이 있다. 우찌무라간죠(內村鑑三)의 생애와 사상 ···································································· 金 文 吉…199 하는 일본은 “조그마한 섬나라의 일본은 강한 서구나라가 언제 침범해 올지 모르니 군사를 강화하고 强兵大國, 군비를 비축하여 국토방위에 힘쓰자” 라고 주장했다. 이런 생각은 후쿠자와유기찌(福澤諭吉)의 脫亞入歐) 사상과 일치되는 점이고 당시 일본지식인들의 대다수가 일본이 아시아를 벗어나서 서구사회의 침략을 막고 서구사회를 지배하자는 견해였다. 우찌무라는 다시「淸日戰爭의 義」란 제목으로 청일전쟁에 기여하는 책자를 펴내 화재거리가 되었다. 이 책을 다시 영어로 번역하면 「Justification of the Corean War」라 하고 미국사회에 알 렸다. 그가 주장하는 내용은 “공자맹자의 나라 중국은 이미 저물어가는 해와 같다. 고풍을 고집하여 문명을 모르고 있다. 세계를 알리고 문명국으로 만드는 것은 대국인 일본에게 있다. 이것이 일본국의 사명이다” 하고 주장하면서 일본의 국 위를 상당히 높게 평가하고 일본인은 일등국민이라는 의식을 강하게 느끼고 있고 못사는 나라 중국과 조선을 일깨워 주는 것은 일본의 사명인 줄 생각했 다. 7) 다만 우찌무라는 국수주의자가 아니고 국권주의자도 또는 부국강변자도 아 니다. 다만 공자의 사상을 버리고 기독교정신을 심어 문명국을 만드는 것이 기 독 국가인 일본의 사명이라는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일청전쟁을 막상 당하고 겪어봤던 우찌무라간죠는 그의 주장을 전부 바꾸게 되었다. 1896년 5월22일 미국에 사는 친구 베루(Belu)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중국전 쟁은 끝났다. 무사히 끝난다고 한다. ”義戰化“는 부끄러운 마음 금지 못하겠 다.” 라고 적고 우찌무라 간죠는 청일전쟁에 대해서 깊이 반성하고 하나님 앞 에 회개한 것이다.8) 우찌무라는 적어도 그가 주장했던 청일전쟁은 중국은 사랑하고 문명국가로 만들어야 하는 꿈을 가지고 청일전쟁을 주장했으나 전쟁이 바로 사람을 죽이 고 중국을 지배하면서 인권을 유린당한 처사를 볼 때 해적들이 하는 행위처럼 보여 가슴깊이 뉘우치고 반성하면서 그는 일·로 전쟁에는 “비전론자”로서 “전 쟁론자”와의 싸움이 시작된다. 우찌무라가 전쟁반대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을 때 구미아이교회9) 에비나단조 7) 田畑忍의 「內村鑑三에 있어서 平和主義 思想 の 展開」27p 동지사대학 사회문제연구소. 1979 8) 졸저 109 p 9) 일본 구미아이교회의 일본선교는 1886년 4월에 미국회중교회(congragution church) 선교사가 관 서(關西)지방에 선교하여 교단이 처음 생겼다. 명치시대 때 여러교파가 합하여 일치교회(一致敎會) 가 생겨나 일치교회에 가입하지 않고 독자노선을 걸었다. 초대 회장은 고자기히로미찌(小崎弘通) 다음은 에비나 단조였다. 명치 신신학 운동에 가담하고 1895년 나라(奈良)대회 때는 조선전도에 도 힘을 쏟아 부어 교파가 크게 활성화되었다. 200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는 1894년 5월2일 구미아이교회 총회가 오사카 청년회의소에서 열렸다. 총회는 전쟁을 앞두고 모두가 어수선할 때라 모든 회원이 긴장된 상태였다. 에비나 단 조는 그때 총회장의 신분으로 대중 앞에 설교를 하였다. 설교제목은 “사슴을 中原에서 쫓아내자”는 제목이였다. 사슴은 서방 여러 국가를 의미하고 中原이라 하는 것은 중국을 가리켰다. 그 때 설교 내용은 “어떤 외국인 말하기를 중국을 지배하는 것이 세계를 지배한 다. 중국의 문제가 세계의 문제가 되고 영국, 일본, 러시아, 블란서, 독일, 미국 이 중국에서 싸워야 한다. 이것은 오로지 경제적인 문제보다 종교적인 문제가 더 많이 대두된다. 불교, 유교, 예수교, 회회교 세계의 4대 종교가 싸우는 것이 다.”10) 원래 달변가인 에비나단조는 그때는 더욱 힘을 내여 설교할 때 모든 회원 이 감동을 받고 일제히 전쟁에 동참하고 전쟁을 위해서 특별기도회도 가졌다. 목사의 신분으로 교회에서 전쟁기도가 계속되는 구미아이교회를 본 우찌무 라간죠는 전쟁의 부당성을 강조하고 목사가 전쟁을 치르기 위한 기도와 전쟁 에 보낼 위문품을 모으고 헌금을 하는 것을 볼 때「내가 비전론가가 된 이 유」를 밝히며 일본열도를 다니면서 전쟁에 반대하는 설교를 하였다. 그가 전 쟁에 반대하는 이유를 4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성서에 전쟁을 하지 말라고 되어있다. 또는 십자가의 복음이 때에 따 라 전쟁을 허용했다는 것은 나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다. 둘째, 무저항주의가 승리했다는 경험에서 셋째, 일청전쟁이 결국 有害無益이 되었다. 넷째, "The springfield Republican" 이라하는 미국 신문에서 平和主義的 주 장과 평화주의의 논설에서 감화를 받았다. 11) 이런 4가지 이유에서 우찌무라는 비전론자에서 에스카레트해서 전쟁절대반대 자가 되었고 교인들이 전쟁을 위해서 기도한다든가 전쟁에 나가면 대 죄악이라 했다. 전쟁을 위해서 기도하는 자와 전쟁에 동참하며 동조하는 기독인은 기독교 인이 아니고 죽어서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는 다시 신약성경 마태복음26장 52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라는 예수의 말을 인용해서 당시 예수를 잡아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이기 위해 군병들이 예수께 10) 졸저 108 p 11) 內村鑑三 『萬朝報』1903. 6.30 우찌무라간죠(內村鑑三)의 생애와 사상 ···································································· 金 文 吉…201 다가올 때 예수와 함께 한 한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귀를 잘라 떨어뜨 리고 예수님께서 그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진 자는 검으로 망한다는 것을 인용하면서 무기를 가지고 사람을 죽인 것은 예수님께서 말렸지 않느냐 전쟁은 필연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살인하지 말라”는 것도 십계명에 분명히 나오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 키지 않는 것이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너를 위하여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 예수는 절대 사랑이 아니냐. 예수를 믿고 기도하는 우리들이 어떻게 사람을 죽이려는 전쟁을 부르짖느냐 이웃인 중국을 사랑하고 이웃인 러시아를 사랑해야 되지 않겠느냐 신약성서에는 예수님의 사랑을 단편 으로 보여주는 것이요, 구약시대 이스라엘 역사가운데 이사야 란 선지자는 싸 움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의 피해를 보고 눈물을 흘리며(사2:4) “이 나라 저 나 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치 아니하리 라”12)는 기도를 상기하면서 이 지구촌에 전쟁이 하루빨리 물러가고 전쟁이 없 는 시대가 오기를 우찌무라는 간절히 기도했다. 또 우찌무라는 “이 땅에서 활 과 칼을 꺽어 전쟁을 없이했고 구약성서에 기록된 선지자 스가랴가 기도한 ”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 가 이방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라는 것을 기억하고 우찌무라의 기도가 일본과 러시아의 전쟁이 하루빨리 끝나고 평화의 날이 오기를 기다렸다. 결국 우찌무라는 성경을 인용해서 전쟁 절대반대 운동을 전개했다. 이때 전 쟁 절대론을 주창한 에비나는 일러 전쟁을 앞두고 전쟁의 필연성을 주장하면 서 1904년 4월에 그간 편집한 『新人』이란 잡지에 “성서의 전쟁주의”란 글을 발표하였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성서에 있어서 전쟁을 부인한 곳은 한곳도 없다. 생각하기에 달렸다. 세례요 한을 보라 당시 찾아오는 사람들 중에 군인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예수가 이 땅에 왔을 때도 로마 군인들이 찾아오지 아니하였는가. 예수께서 그들에게 직 업을 버리라고는 하지 않았다. 사도행전에도 로마 군인들에게 세례를 베풀지 아니하였느냐 신약성경에 한곳도 전쟁을 하지 말라는 곳이 있느냐. 나는 한곳 도 전쟁을 치지 말라는 곳을 발견하지 않았다.13) ” 그리고 이스라엘 역사인 구약성서를 보라. 모두가 전쟁이고 전쟁사가 아닌 가. 애급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민족들이 홍해를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 여호수아란 유명한 장군이 있었지 않느냐. 여호수아는 군복을 입고 전쟁의 필 12) 우찌무라 간죠 「新希望」명치 38년 10월10일 61.p 13) 에비나단조 「성서의 전쟁주의」『新人』제5권 4호 6p .1904년 4월 202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요한 무기로 단장하였고 이스라엘 민족들은 모두가 군대 장병이 아니냐 하나 님의 지시로 가나안의 첫 성 여리고 성을 쳤지 않느냐. 그때 장군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지시대로 작전을 지휘해서 무사히 강한군대 여리고 군대를 물리치지 아니했는가.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군대는 점차 전진하면서 전쟁을 치고 결국 가나안땅 하나님의 땅 복지의 땅을 건설하지 않았는가. 우찌무라 간죠의 성서 인용으로 전쟁을 반대하는 것은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14) 라고 말했다. 에비나는 “성서전쟁주의” 에 한층 더 조직적인 것은 군 입대 장병들에게 권 유하는 설교에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에 따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싣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학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 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3~17) 파병하는 장병들에게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육신의 무장과 정신의 무장 을 같이 필승15)을 다짐했던 것을 보나 우찌무라와 에비나의 성경적 논쟁은 신 앙의 뿌리와 그들의 가지고 있는 조직신학에서 찾을 수 가 있다. 우찌무라는 미국에 애머스트대학과 하트포드신학교(HTS)에서 복음적인 신 학을 배워 보수적인 입장에서 전쟁을 반대하는 비전론자에서 절대 반대하는 자가 되었고 에비나 단조는 미국 회중교회가 선교한 자유주의 신학과 구마모 도양학교의 젠즈 선교사에게 배운 국가주의사상이 결합되어 에비나단조 나름 대로 전개시킨 신학이 “성서전쟁주의”였다. 명치시대 일본은 어느 교단과 교파에서 일률적으로 받아드리지는 않았지만 개개인의 신앙 일부신학교에서는 신 신학이 유행이 되었다. 당시 신신학은 미 국사회에서 들어온 “유니티리안” 신학사상이였다. “유니티리안” 신학사상은 당 시 지도자들에게 상당히 많은 호응을 받았다고 하니 에비나단조도 그 중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 정리를 해보면 우찌무라 간죠는 일본국내에서는 도쿄 제일고등학교 에서 물러나와 전쟁을 반대하는 자 중 절대반대자 였고 사회주의자와 정치 문 화인을 모아 일본적인 무교회를 조직하여 해외에는 평화주의자로 전환하게 되 었다. 우찌무라의 무교회는 우연히 생겼고 조직된 것은 아니다. 에비나 교회에 대치되는 교회가 무교회였다. 전쟁을 주장하는 에비나의 구미아이교회는 많은 사람이 모이고 교회도 매우 웅장했다. 모이는 집회 때 마다 전쟁의 필승을 다 14) 졸저 112p 15) 상동 우찌무라간죠(內村鑑三)의 생애와 사상 ···································································· 金 文 吉…203 지는 기도이고 전쟁을 옹호하며 지지하는 설교였다. 당시 일본의 기성교회는 모두가 전쟁을 위한 모임의 교회였고 드리는 헌금이 위문금이 되었다. 잘못된 기성교회를 향한 반기를 든 것이 당시의 무 교회였다. 교회는 교회당이 없어야 하는 것. 모이지 않도록 하는 것. 헌금을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교회 가 무교회였다. 16) 이때 무교회의 신앙노선에 조선인으로서는 김교신을 들 수 있고 조선에도 무교회가 조직되어 평화사상을 주장하는 인재를 양성하였다. 에비나의 경우는 전쟁 절대주의자 “성서 전쟁주의자”로 일본적인 기독교 신 도적 기독교로 변질되어 일본적인 기독교가 해외로 진출 되었다. 4. 우찌무라간죠의 평화사상 우찌무라의 신학사상은 전쟁 절대반론을 전개하는 가운데 러일 전쟁이 끝날 무렵 한층 심화하여 “세계 평화사상”으로 전개시켰다. 한편 에비나 단조도 그가 주장한 “성서전쟁주의” 사상이 날로 높아가는 가 운데 자기 자신의 신학을 제창하여 기독교 신도사상에 귀인하게 되었다. 그가 주장하는 신도적 기독교는 성서에 명기된 하나님의 말씀(요한복음1장1절)과 日本의 魂(일본 다마시)를 접목시켜 神道的 기독교(일본적 기독교)로 변신하게 된다. 즉 겉으로는 보통 기독교로 보이지만 안으로는 일본신도인 것이다. 러· 일 전쟁은 일본국의 승리로 끝날 무렵 에비나자신도 희귀하게 생각함으로 일 본의 혼(야마도다마시)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보다 더 우희로 생각했다. 유럽의 기독교의 말씀(혼)이 세계로 전개한 것처럼 일본의 혼도 세계를 향 하여 나가야한다고 한일합방을 눈앞에 두고 한일합방은 하나님이 우리 일본에 게 주신 선물이고 일본국이 한국을 지도하여 문명국으로 만드는 의무를 가지 고 있다고 했다. “일본은 종래의 섬나라의 인식을 버리고 신국흥민(新國興民)의 기상을 부활 시켜야 되고 대 일본국의 장래는 아침에 해가 동두천에서서 떠오르는 것 처럼 한국인은 이 영광에(한일합방) 참여하여 일본국민의 이름을 받고 신국( 神國)의 이름을 받아야 한다. 일한(日韓)합병을 찬양17) 해야 하고 또는 에비나는 ”일한 민족은 동일민족이고 동일국민이다. 그러나 外國선교사는 합동하여 단결해야 하고 일본은 신국(에비나의 신도적 기독교)사상을 지상에 건설해야 하는 큰 사명을 가지고 있다 18) 고 하면서 에비나단조의 “신도적 기독교”의 입장에서 16) 근대사상연구회 「우찌무라 간죠의 말」168p 신문학서방 쇼와 52 17) 에비나 단조 「韓日合邦을 축하하다」『新人제 11권 9호. 1910 204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일본의 혼의 팽창론을 주장했다. 이때 우찌무라는 말하기를 “나라를 얻었다고 즐거워하는 민족이 있는가하면 나라를 잃었다고 슬퍼하는 국민이 있다. 그러나 즐거워하는 것도 일시적이고 슬퍼함도 일시적이다. 만약 전 세계를 획득했다 해도 그 영혼이 상실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만약 우리 영토가 팽창하여 세계를 얻었다 하더라도 우리 영 혼이 상실하며 슬픔이 더하리라.19) 에비나가 영토를 확장하는 것은 일본”신의 건설“ ”신의 나라“라고 하지만 실 은 우찌무라 간죠는 ”신의 나라“라는 것은 신자가 신의 이름을 가지고 자기 노력에 의해 건설되는 이상적인 사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신의 나라“는 그 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하여 피조물이 새로워지는 것이 ”신의 나라“요 ”성국( 聖 國)“이라 하고 에비나의 신국사상에 공격하는 것이다. 에비나의 ”신의 나라“를 육신적인 형이하학(形而下學)적인 사상이고 우찌무라의 경우는 형이상학(形而 上學)적인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이 땅위에 오신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견대립 속에 우찌무라의 신의 나라 설립은 예수의 재림을 주장하는 ”예수 재림, 평화 사상“을 이 지상에 실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였다. 그의 평화사상은 이스라엘 민족의 재림 사상 즉 이사야1장 4절~6절에 보면, “슬프다 이 나라여.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 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이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 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상한 것과 터진 것과 매로 맞는 흔적 뿐 이거늘 그 것을 짜며 싸매여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20) 우찌무라의 평화사상은 인간이 세우는 것이 아니라 인류를 창조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지상에 옴으로 평화가 깃들고 평화가 바로 신의 나라이라고 믿고 있었으며 지상의 예수 그리스도가 오기를 인간이 기도하고 노력하여야 한다는 즉, 이스라엘의 황폐한 민족과 국가위에 새로운 국가관을 심기위해 이사야란 선지자가 나타났던 것처럼 일청전쟁, 일러전쟁, 제1차 전쟁시에 폐자국이나 승 자국이나 모두가 범죄한 나라요 행위가 부패한 민족이라 지적하고 먼저 그가 주장한 평화사상은 영국,독일,이탈리아, 일본 등 모든 나라에 “無軍備主義”를 제창했다. “무군비주의”는 전쟁에 필요한 무기를 비축하지 말자는 운동이다. 우찌무라 경우는 에비나와 다른 점은 위로는 하나님의 섭리에 재림사상의 평 화주의, 아래로는 군비주의 타파였다. 18) 졸저 153p 19) 졸저 151p 20) 우찌무라간죠 「성서의 연구」p.4 1917년 8월 우찌무라간죠(內村鑑三)의 생애와 사상 ···································································· 金 文 吉…205 오늘날에도 전쟁반대 평화주의 사상운동은 어느 나라에서나 찾아볼 수 있고 자주 일어나는 지상과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찌무라처럼 형이상학적(形而上 學的)인 운동이 일어나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5. 조선의 무교회 전래 러·일전쟁이후 에비나단조의 신도적 기독교가 조선에 전래되어 총독부와 결 탁함으로 교세는 날로 확장되어 갔다. 기성교회를 매입하는 방법으로 교회수가 많아졌고 일본구미아이교회 지도자들도 조선에 많이 파견되었다. 당시 에비나 단조가 파견한 와다세 쓰네요시(渡瀬常吉)가 전도책임주임이었다. 일본적인 기 독교 신도적 기독교를 전하기 위해 京城學堂이란 일본학교를 만들어 친일사상 을 가르치는 교회가 되어 일제 감정기에 친일파는 거의 일본 구미아이교회, 에 비나단조의 영향이었다. 한편 우찌무라 간죠의 평화사상도 식민지 조선을 거쳐 아세아에 전래되었다. 조선의 우찌무라 간죠의 무교회가 전래된 것은 황해도 해주 출신인 金貞植이 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일찍이 예수 믿는 가정에 태어나서 신자가 되어 황해 도 YMCA에서 일을 하던 중 1906년 일본 YMCA에 출장을 갔다. 도쿄거리에 서 강연하는 평화주의자 우찌무라 간죠를 만나 무교회의 신앙과 평화사상에 깊은 감명을 받아 귀국 후 최초의 조선 무교회 신자가 되었다. 그후 일본에서 우찌무라 간죠를 만나 신자가 된 인물들은 金敎臣, 柳永穆, 咸錫憲, 朱斗用 등 여러 일본 유학생이 있었다. 金貞植이가 최초 신자였을 뿐 우찌무라 간죠의 무교회 사상을 조선에 심고 조선 무교회가 생긴 것은 함경남도 함흥 출신 金敎臣이었다. 김교신은 1920년 우찌무라 간죠밑에 공부하여 1927년 귀국하여 조선에 최초로 조선 무교회의 모임이 시작되었다. 그가 우찌무라 간죠에게 배운 것은 예수 재림사상과 평화 주의사상을 듣고 감동을 받고 우찌무라가 쓴 「求安錄」을 읽고 깊게 감화를 받아 무교회 신앙을 알게 되었다고 간증하고 있다.21) 김교신은 무교회지도자로 일하면서 함흥여자 고등학교 지리교사로 교편생활 도 하였다. 우찌무라의 「성서의 연구」잡지를 펴내 많은 사람들이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 중에 김교신도 감화를 받아 귀국하여 우찌무라와 똑같은 성 격을 지닌 「성서조선」이란 잡지를 펴내게 되었다. 창간호의 취지를 보면 21) 졸저 「우찌무라 간죠의 평화사상과 조선무교회의 동향」『아세아, 기독교, 다원성』126p 교토 대학 현대기독교사상회. 2004 206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나는 무교회주의란 것을 넓은 의미로서는 정신적인 면을 해소하기 위함이 요. 구약신약성서를 관통하는 정신, 그리스도, 바울, 루터의 정신. 또는 우주에 꽉차있는 정기(正氣)를 풀기 위함이다. 나의 무교회란 것은 진정의 기독교를 의미하는데 있고 무교회란 것은 진정한 크리스찬을 의미하는 것이다. 교회가 있고 없고, 세례를 받던 안 받았던 그런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무교 회주의는 복음주의 신자이다. 나의 무 교회는 우찌무라간죠 선생께 배운 ”최 선“(最善) ”최미“(最美) ”최고“(最高)란 것이다. 이것이 기독신자의 정신이고 신앙이다. 구원하신 예수를 명확히 아는 무교회주의자의 사명이기도 하다.22) 그는 무 교회 신앙만이 구국하는 길이고 무교회 정신만이 나라를 진정 사랑 한다는 정신이라 하고 우찌무라 간죠의 나라사랑인 ”二의 J" 즉 “ I for the Japan, Japan all the World, The World for Jesus christ and all the God" 다시말해서 나는 일본을 사랑한다. 일본은 세상 모든 민족을 사랑한다. 세상 모든 민족은 하나님과 예수를 사랑한다. 라는 사상을 닮아 김교신의 무 교회 국가관은 “Bible and Korea, Bible to Korea, Korea on Bible" ”성서와 조선, 성서를 조선에, 조선은 성서 위에”란 슬로건을 걸고 민족주의자 가 되어 민족교회에 앞장선 것이다. 그는 안으로(국내)는 민족교육 밖으로(일 본총독부)는 독립운동의 전력을 기우렸다. 1930년 “황민화” 반대운동 “內線一致” 반대 “신사참배”반대 등 김교신의 무 교회가 일치단결하여 조선총독부와 정면으로 싸우게 되었다. 1942년 3월30일 일본경찰에 연행되어 심문을 받을 때 「나는 그리스도와 끊어 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 조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황국시민서사(皇 國市民 誓詞)는 후일에 망국시민서가 될 날 이 올 것이다. 23) 라는 예언을 자주한 바 있다. 김교신은 우찌무라 간죠의 사상과 같이 이사야가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 하고 예언했던 평화주의자로 연계한 것이 조선이고 『성서조선』이었다. 」 당시 총독부는 김교신의 무교회 일파를 눈에 가시와 같이 여기고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탄압이 가할수록 무교회의 세력은 날로 높아가면서 일반인의 왕래 가 전혀 없는 전남 고흥군 소록도 한센병원에 사는 한센 병 식구들에게 까지 22) 김교신『성서조선』창간호 1927년 7월호 23) 유달영「김교신과 조선」162p. 『김교신과 한국』김교신 저작집 간행 1972 우찌무라간죠(內村鑑三)의 생애와 사상 ···································································· 金 文 吉…207 무교회가 전해졌다. 24) 김교신의 무교회는 인간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고 성서를 절대 신봉하는 신조를 배운 소록도 한센병 환우들은 김교신을 구세주로 착각할 만큼 믿음을 가졌고 많은 환우들이 “성서조선”을 탐독했다. 그중의 한 신자는 김교신의 위대함과 선교에 힘을 더 써주시기를 바라는 마 음에 1935년 6월 14일자 편지에 “ 오! 선생이여 오직 당신만은 썩어진 교파사상에서 초월하여 계심을 나는 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은 오직 홀로서 그리스도의 정신을 가지고 있고 탈선 신앙가들의 핍박에서도 오히려 매진하고 있는 용사임을 선생의 사상지 인 아니 신앙의 표현인”聖朝“(성서조선의 준말)를 통하여 알고 남았습니다.” 라는 신앙을 간증한 편지가 있었고 전국적으로 많은 이들의 간증의 편지가 “성서조선”에 수록되어 있다.25) 당시 김교신의 “성서조선”을 “성조”라 했고 김교신의 이름이 “성조선생” 으로 통했다. 일제강점기에 눈에 가시와 같이 여긴 총독부는 1942년 3월에 「성서조선」 을 폐간시켰다. 폐간이유는「성서조선」158호에 “부활의 봄” 과 “우물의 개구 리”란 제목이 치안법에 저촉된 것이다. ‘부활의 봄“ 과 "우물 안의 개구리”는 김교신의 글로 천황제국가가 폐망되고 새로운 아침이 밝아온다는 글의 내용이 었다. 김교신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무기형을 언도 받아 수감 중이던 1945년 4월18일 아침에 안타깝게도 조국의 광복을 끝내 보지 못한 채 형무소에서 서 거했다. 한편 에비나단조의 일본적인 기독교의 조선전도는 1919년 3.1 민족독립운동 이 일어날 즈음 교세의 확장으로 천황제국가의 많은 공천을 하였지만 에비나 단조가 죽은 후 교세는 점점 약해지고 渡瀬常吉은 조선인 柳一宣에게 교단을 맡기고 귀국하여 1945년 일본은 패전을 맞이했다. 6. 결론 본문에서 언급했듯이 명치시대 기독교 지도자로서 손꼽을 수 있는 사람으로 24) 졸저 「일제통치하에 있어서 조선 무교회의 양상고찰」-김교신과 소록도- 403p 『일본문화 학 보』 제28호 한국 일본문화학회 25) 김교신 『성서조선』77호. 1935.6월 1일 208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에비나단조와 우찌무라 간죠였다. 이 두 사람 관계는 끊을 수 없는 관계이다. 그들이 두각을 나타낸 것은 러일전쟁 때이다. 국가주의자 에비나단조는 러일전 쟁을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고 “성전”이라 생각하고 전쟁을 위한 온갖 힘을 기 우렸다. 우찌무라간죠는 에비나의 전쟁사상은 성경에 위배된다며 “전쟁반대”를 전개시켜 “비전”에서 “절대반대”로 정면으로 맞서 싸웠다. 러일전쟁이 승리로 에비나의 신학은 “신도적 기독교”로 탈바꿈을 했다. 우찌무라는 에비나 교회를 비판하는 나머지 “무교회”를 선언하고 교회 없는 교회로 전환했다. 한일합병에 있어서 에비나는 팽창신학으로 생각하여 조선에 신도적 기독교 를 심어 일제 강점기에 강한 교단이 되어 조선인을 일본인화 하는 정신교육에 앞장섰으며 그의 교회는 친일양성소로 변했다. 당시 친일파는 모두가 일본구미 아이교회(에비나단조교회) 신자들이었다. 쇼와천황을 위한 신사참배도 일본구 미아이교회가 앞장섰다. 한편 김교신의 무교회는 일본 구미아이교회를 대항하는 교회로 전환했다. 결 국 에비나단조의 신학사상이 우찌무라 간죠의 신학사상의 싸움이 조선에서 치 열하게 일어난 것이다. 패전의 우찌무라의 사상과 김교신의 조선무교회는 지금 도 두 분의 숨소리를 들을 수가 있지만 에비나 단조의 조선 구미아이교회는 패전에 앞서 망하고 조선의 그 어느 곳에서도 그 존재의 자취를 찾기란 매우 어렵다. 일본에서는 해방 후 구미아이교회의 잘못을 깨닫고 회계운동과 더불어 구미아이교단에서 일본기독교단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오늘날 일본은 오랜 기 독교역사에 비해 기독교인의 비율이 제일 낮은 국가가 되었다. 우찌무라간죠(內村鑑三)의 생애와 사상 ···································································· 金 文 吉…209 【参考文献】 1.김문길「근대일본기독교와조선-에비나단조사상과행동-」明石出版 社.1998.6.24 2.김문길「쓰다센과 조선」일본세계사상사 출판 2003. 3 3.김문길「일제통치하에 있어서 조선무교회의 양상고찰」- 김교신과 소록도-『일 본문화 학회』제28집 한국 일본문화학회 4.김문길「조선무교회기독교와 사회정의-김교신 중심으로-」 『아시아·기독교 다원성』제3호 2005. 3. 현대기독교사상 연구회 5.김문길「우찌무라의 평화사상과 조선무교회의 동향」 『아시아·기독교 다원성』제2호 2004. 3. 현대기독교사상 연구회 6.근대일본사상회 「우찌무라간죠의 말」八老印刷 쇼화52년 7.內村美代子 편 「우찌무라간죠 사상선서」1집 (비전론편) 羽田書店 1949 8.鈐木範久 「우찌무라간죠 3일록」7권 (평화의 길) 1995 9.田畑忍「우찌무라 간죠에 있어서 평화주의 사상전개」 『기독교사회문제연구』기독교사회문제연구소 10.新堀邦司「김교신의 사상과 저항」신교출판사(주) 2004 210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要 旨 内村は明治キリスト教指導者として日露戦争に反対する非戦論者であった。彼は日清戦 争の時は非戦論者ではなかったが,同じキリスト教会の同僚であった海老名弾正が日露戦 争のためにお祈りし献金するのを間違っていると考え,戦争反対、或は非戦論を主張した。 結局、内村は教会に集まって戦争のためのお祈りと戦争のための献金の違憲性を感じ、 教会に集まるのを反対しながら無教会を主張することになった。内村の無教会は戦争に反 対する社会主義者の安息所になりながら日韓併合反対、世界平和主義者へとエスカレー トしていったのである。 彼の平和主義思想は聖書に基づいておりキリスト再臨思想から探すことができた。特にイ スラエルの亡国思想を払拭し、予言されたイザヤ先知者の言葉を多く引用して朝鮮国民達 とアジア諸国家の為に多くのことを行った。 朝鮮人の中で金教臣と言う人が日本留学中に内村に会い朝鮮でも無教会が伝来して あちこちに無教会ができ、多くの信者が訪れ出していた。 一方、海老名の戦争論者も日露戦争の勝利はイエスの意思であると考え、日韓併合 への賛成と朝鮮に海老名が運営していた日本組合教会が設けられた。結局、海老名の 組合教会は日本的基督教を伝導したことになり天皇制国家のための国家主義的な信徒を 増加させた。当時、朝鮮の信者達は海老名の組合教会に多く参加したし、信者達は殆ん ど親日派の人に変わっていった。また、内鮮一致と神社参拝に成功的に向けられるように なった。内村はアジア諸国家が戦争のない平和主義者として一生涯を送った。反対に、 海老名は国家主義的なキリスト教主義者としてアジア共栄圏思想に貢献した事を物語って いるキリスト思想研究に関わる論文である。 キーワード;明治期の 日本基督敎, 内村鑑三 生涯, 内村鑑三と 海老名弾正の 戰爭論, 内村鑑三の 平和論, 海老名弾正の 日本膨脹論, 韓國無敎會 傳來 투 고 : 2008. 8. 31 1차 심사 : 2008. 9. 12 2차 심사 : 2008. 9. 27 한국 대학생과 일본 대학생의 부모 부양의식 비교 김윤정*, 장세철**1) * (e-mail : [email protected]) ** (e-mail : [email protected]) 目 次 Ⅰ. 서론 Ⅱ. 연구방법 Ⅲ. 연구결과 1. 한국 대학생과 일본 대학생의 특성 비교 2. 한국 대학생과 일본 대학생의 부모 부양의식 3. 한국 대학생과 일본 대학생 판별 함수 4. 대학생의 부양의식에 대해 영향을 미치는 변인 Ⅳ. 논의 및 제언 1. 논의 2. 제언 Ⅰ. 서론 한국은 2008년 현재 65세 이상 노인인구가 전체 인구의 10.3%를 차지하는 UN이 분류한 고령화 사회(aging society)이다. 이러한 인구학적 변화와 더불 어 가족구조도 변화하고 있어 현재의 가족구조는 3세대 가구의 감소, 1세대 가 구의 증가 및 노인 1인 가구의 증가현상을 특징으로 한다. 물론 한국사회는 서 * 주저자 : 김윤정(한서대학교 노인복지학과 부교수) **교신저자 : 장세철(한서대학교 노인복지학과 부교수) 212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유럽보다는 늦게 저출산과 고령사회를 경험하였으나, 문제는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고령사회로의 진입이 빠르다는데 있다. 이에 따라 한국 사회는 증가한 노년인구를 누가 부양할 것인가에 대해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특히 노인인구가 전체인구의 20-30% 이상을 차지하게 되는 2020년, 2030년대 에 노인을 부양하게 될 현재의 대학생의 노인부양의식은 미래 한국사회의 노 인문제에 있어 상당히 중요한 문제이다. 노인인구나 가족구조의 변화 등 인구 학적인 측면에서의 변화만이 아니라 이미 노인부양에 대한 의식이 변화하고 있다는 점이 미래의 부양자의 부양의식에 더욱 관심을 갖게 하는 부분이다. 부양의식이란 한 개인이 부양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전반적인 태도나 의식 으로, 기존의 선행연구들은 부양의식을 다차원적인 차원으로 구분하여 개념화 하고 분석하고 있다. 대체로 정서적 부양의식, 신체적 부양의식, 경제적 부양의 식으로 나뉘는데, 정서적 부양의식은 부모에 대한 정서적 위로나 위안, 친밀감, 존경, 문제해결 등과 관련되어 있다. 신체적 부양의식이란 편찮으신 노부모에 대한 신체적 수발과 관련되어 있고, 경제적 부양의식이란 노부모에 대한 용돈 드리기, 병원비 드리기, 생활비 드리기 등과 관련되어 있는 부양의식을 말한다. 이러한 부양의식은 기성세대에 비해 청소년이 높다는 일치된 결과를 보이고 있다(김윤정, 함정현, 이창식, 2005). 특히 대학생들의 부양의식은 기성세대의 부양의식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를 김윤정 등(2005)은 다음 몇 가지 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 현재의 자녀들은 부모로부터 일방적인 지원을 받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은으로 부양의식이 높을 수 있으나, 현재의 부모세대는 노 부모 부양으로 인한 부양스트레스를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심리적 고갈로 부양의식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둘째, 대학생들은 직접적인 부양을 하 지 않은 상황에서 부모와의 동거로 인한 이점을 보다 더 크게 생각하는 경향 이 있다는 점을 들어 대학생들의 부양의식이 기성세대 보다 높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서구 물질문명과 개인주의 사조로 인하여 종래 우리 사회의 근간을 이루었던 효의 전통이 퇴색하고 있고, 부모 부양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기 보 다는 비용과 혜택의 측면에서 보는 입장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조윤주, 이숙 현, 2004). 이러한 성향은 산업화의 진행정도나 그 사회의 가족가치관, 노인에 대한 이미지 등에 따라 차이가 날 것이다. 특히, 노인에 대한 정의는 연대기적, 기능적 혹은 문화적 기준으로 정의될 수 있는데 연대기적, 기능적 정의 모두 ‘문화적인 것’이다(Thane, 2000). 즉, 노 인, 노년의 정의 자체가 사회문화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사회적 또는 도덕 적 가치가 내재해 있는 노인부양의식 역시, 문화에 따라 다를 것으로 볼 수 있 다. 즉, 인간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은 문화의 산물이기 때문에, 문화적 전 한국 대학생과 일본 대학생의 부모 부양의식 비교 ··········································· 김윤정, 장세철…213 통과 가치는 여러 사회적 관계 및 의식에 영향을 미치는데(Vygotsky, 1987 ; 이기숙, 정미라, 김현정, 2006 재인용), 한국과 일본은 동양문화의 유교정신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방식이나 부모에 대한 태도, 부양 의식에서는 유사한 측면이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와는 달리 한국과 일본의 사회문화적 환경, 사회보장제도는 차이가 나므로, 이렇게 다른 환경속에서 살 아가는 양국의 부양의식도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부양의식이 문화에 따라 차이가 나는가에 대한 실증적 조사 연구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단지 한국과 일본간의 성공적 노화에 대한 인식에 는 차이가 있음을 보고한 연구와, 한국과 일본간의 대인적 욕구에 차이가 있음 을 보고한 연구를 찾아 볼 수 있었다. 즉, 김윤정(2008)은 한일대학생의 성공 적 노화에 관한 비교연구에서 두 집단의 성공적 노화의 지각에 상당한 차이가 있어서, 한국 대학생은 노년기에 성공적인 노화를 이루기 위해서 ‘관계지향적’ 인 측면을 중요시 하지만, 일본 대학생은 ‘개인주의적’인 측면을 중시한다고 보 고하였다. 또한, 제승용과 김연권(1997)은 한국과 일본 대학생을 대상으로 하 여 대인적 욕구를 비교한 결과 일본 대학생에 비해 한국 대학생의 원조욕구가 강하다고 보고하였다. 따라서 양국의 문화적 차이점과 유사점, 그리고 성공적 노화나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와 관련된 선행연구들을 통해 한국과 일본의 부 양의식에는 차이점과 유사점이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한편, 대학생들의 부양의식은 성별, 거주지, 조부모와의 경험에 따라 차이가 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대체로 남학생의 부모 부양의식이 여학생에 비해 높고, 농촌지역에 거주하는 청소년의 부양의식이 도시지역에 거주하는 청소년의 부 양의식보다 높다는 것이 일반적인 결과이다(김영호, 2001; 김윤정, 이창식, 2006). 또한, 청소년의 노인에 대한 태도에 대한 인식 등과 관련된 연구들을 보면 조부모의 관계에 따라 달라지는 것으로 나타났다(김윤정, 이창식, 강인, 2004). 즉, 조부모와 자주 만날수록, 그리고 조부모와 친밀할수록 노인에 대한 태도가 긍정적이다. 따라서 부양의식도 조부모와의 관계에 따라 달라질 것으로 예측해 볼 수 있어, 본 연구에서는 조부모와의 관계 변수에도 관심을 두었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비교 문화적 관점에서 한국의 대학생과 일본의 대학 생을 대상으로 부양의식의 차이를 비교 분석하는데 연구의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첫째, 한국 대학생과 일본 대학생의 사회인구학적 특성 및 조부모와의 관 계, 부모부양 의식의 차이를 살펴보고, 둘째, 한국 대학생과 일본 대학생의 부 모 부양의식에 영향을 미치는 변인을 검증하는데 연구의 목적이 있다. 214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Ⅱ. 연구방법 1. 연구 대상 및 자료 수집 본 연구는 한국 대학생과 일본 대학생의 부모부양의식의 차이를 비교하기 위해, 한국 대학생 300명, 일본 대학생 300명을 대상으로 2007년 6월부터 10월 까지 설문조사를 실시하였다. 응답에 문제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최종적으로 한국과 일본의 대학생 각 290명의 자료를 분석에 이용하였다. 한국 대학생은 서울, 경기, 충남 지역의 대학생을 대상으로 하여 교양수업시 간에 설문조사를 실시하였고, 일본 대학생은 일본의 후쿠오카 현립대학의 사회 복지계열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여 설문조사를 실시하였다. 각 설문조사에는 담 당교과목 교수님들이 직접 설문조사를 하였다. 2. 측정도구 측정도구는 한국어로 작성하여 일본어로 번역하였다. 일본어로의 번역은 일 본에서 박사학위를 받는 공동연구자와 현재 일본에서 사회복지전공으로 박사 과정에 재학중인 학생이 참여하였고, 번역된 설문지를 현지의 대학원생에게 확 인시키는 절차를 걸쳤다. 1) 부양의식 부양의식은 김윤정(2000)의 척도를 이용하였는데, 김윤정(2000)은 선행연구를 토대로 하여 부양의식을 신체적 부양의식, 경제적 부양의식, 정서적 부양의식 으로 나누었다. 정서적 부양의식은 ‘노부모가 외롭지 않게 방문하거나 함께 이야기를 해야한 다’, ‘노부모가 어려운 일이나 괴로움이 생겼을 때 조언을 해 주거나 문제를 해 결해 주어야 한다’, ‘노부모가 즐겁도록 바둑이나 장기 등 함께 오락시간을 가 져야 한다’, ‘노부모가 친목회 등의 모임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등 의 7문항으로 구성하였다. 신뢰도 Cronbach's α=.96이다. 신체적 부양의식은 ‘식사준비, 청소, 빨래, 집안일 등을 해 드려야 한다’, ‘노 부모가 몸져누워 있을 때 일을 대신해 드려야한다’ 등의 4문항으로, 신뢰도 Cronbach's α=.93이다. 경제적 부양의식은 ‘노부모에게 매월 일정액의 용돈을 드려야 한다’, ‘노부모 한국 대학생과 일본 대학생의 부모 부양의식 비교 ··········································· 김윤정, 장세철…215 가 몸이 편찮으실 경우 병원비를 지원해 드려야 한다’, ‘노부모가 참여하는 취 미생활이나 노인대학, 친목회활동 등에 필요한 경제적 지원을 해야한다’의 3문 항으로 신뢰도 Cronbach's α=.94 로 나타났다. 2) 조부모와의 관계 조부모와의 관계를 알아보기 위해서, ‘4명의 조부모님 중 살아계시는 조부모 님은 몇 분이나 계십니까?’ 라는 질문을 통해 조부모님의 수를 파악하고, ‘가장 친밀한 조부모님과는 한 달에 몇 번 정도 만나십니까?’ 라는 질문으로 조부모 와의 만남빈도를, ‘가장 친밀한 조부모님과는 한 달에 몇 번 정도 전화하십니 까?’라는 질문으로 조부모님과의 전화 빈도를 측정 하였다. 3. 연구 대상자들의 사회 인구학적 특성 연구대상자들의 특성을 살펴보면, 여학생이 66.4%, 남학생이 33.6%로 여학 생의 수가 과반수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대학생의 나이는 18-19세가 가장 많았으며, 평균나이는 21.03세였다. 대학생들은 중소도시에 가장 많이 거주 하 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중소도시에 거주하는 비율이 47.1%였다. 또한, 생존 조부모수는 평균 2.07명이었으며, 1명, 2명, 3명인 경우가 대체로 20% 대로 고루 분포되어 있다. 조부모와의 만남빈도 및 전화 빈도는 조부모와 동거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측정하였는데, 조부모와의 만남 빈도는 한 달 평균 2.15번이고 한 달에 2번 이상 만나는 경우가 전체의 45.2%로 절반 가까이 된 다. 조부모와의 전화는 한 달 평균 2.11번이고 한 달에 2번 이상 전화를 하는 경우가 전체의 45.2%로 만남빈도와 동일한 것으로 나타났다(표1). 따라서 가장 친밀한 조부모와의 전화 빈도 및 만남빈도 등 접촉빈도가 한 달에 2번 정도로 대학생과 조부모와의 관계가 긴밀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216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표1> 대상자들의 사회 인구학적 특성 특성 구분 빈도(명) 백분율(%) 평균(SD) 성별 (n=580) 남 여 195 385 33.6 66.4 - 나이 (n=576) 18-19세 20-21세 22-23세 24세 이상 193 163 122 108 32.9 27.8 20.8 18.4 21.03(2.401) 거주지역 (n=586) 대도시 중소도시 농촌 226 276 84 38.6 47.1 14.3 - 조부모수 (n=583) 0명 1명 2명 3명 4명 58 138 162 158 67 9.9 23.7 27.8 27.1 11.5 2.07(1.168) 조부모와의 만남횟수 (n=431) 한 달에 1번 미만 한 달에 1번 한 달에 2번 이상 175 146 265 29.9 24.9 45.2 2.15(.854) 조부모와의 전화 빈도 (n=431) 한 달에 1번 미만 한 달에 1번 한 달에 2번 이상 198 123 265 33.8 21.0 45.2 2.11(.882) Ⅲ. 연구결과 1. 한국 대학생과 일본 대학생의 특성 비교 1) 사회인구학적 특성의 차이 한국 대학생과 일본 대학생의 사회인구학적 특성을 비교한 결과는 표 2에서 부터 표 5까지이다.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대학생의 나이와 거주지역에서의 차이가 유의하였고, 이에 따라 추후 판별분석에서는 이 변수들을 포함시켜서 분석하였다. 한국과 일본 대학생의 성별분포는 유의한 차이가 없었다(표2). 한국 대학생과 일본 대학생의 부모 부양의식 비교 ··········································· 김윤정, 장세철…217 <표2> 한국 대학생과 일본 대학생의 성별 분포 차이 성 별 계 남 여 한국 88(30.3) 202(69.7) 290(100.0) 일본 107(36.9) 183(63.1) 290(100.0) χ2 = 2.789 <표3> 한국 대학생과 일본 대학생의 나이 차이 구분 N M(SD) 한국 288 22.89(1.96) t값 *** 29.177 일본 288 19.18(.903) *** p<.001 한국과 일본 대학생의 나이 차이는 한국이 22.89세로 일본의 19.18세 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표3). <표4> 한국 대학생과 일본 대학생의 거주지역 차이 거주 지역 계 대도시 중소도시 농촌 한국 159(54.6) 96(33.0) 36(12.4) 295(100.0) 일본 67(22.7) 180(61.0) 48(16.3) 291(100.0) χ2 값 = 64.707*** *** p<.001 한국과 일본 대학생의 거주지역 별 분포차이는 한국 대학생은 대도시 54.6% 로 가장 많았고, 중소도시, 농촌 순이었으나, 일본 대학생은 중소도시 61.0%로 가장 많았고, 대도시, 농촌 순으로 나타났다. 즉 한국 대학생들은 대부분 대도 시에 거주하고 있는 학생들이었고, 일본 대학생들은 중소도시에 거주하고 있는 학생들이 가장 많았다(표4). 이는 표집상의 문제이다. 한국의 경우 서울 및 수 218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도권에서 설문조사를 많이 한 반면, 일본은 후쿠오카 한 지역에서만 설문조사 를 했기 때문이다. 2) 한국 대학생과 일본 대학생의 조부모와의 관계의 차이 한국과 일본 대학생의 조부모 수의 차이를 살펴보면, 한국은 1명이 32.3%로 가장 많았고, 2명 29.2%, 3명 18.8%, 0명 15.3% 순이었으나, 일본은 3명 35.3% 로 가장 많았으며, 2명 26.4%, 4명 18.3%, 0명 4.7% 순으로 나타났다. 조부모 가 없는 경우 한국 대학생들은 15.3%로 일본 대학생들의 4.7%보다 월등히 높 은 것으로 나타났다(표5). 한편, 한국 대학생과 일본 대학생간의 조부모와의 만남이나 전화 빈도에는 유의한 차이가 없었고 표로 제시하지 않았다. <표5> 한국 대학생과 일본 대학생의 조부모 수의 분포 차이 조부모 수 계 0명 1명 2명 3명 4명 한국 44(15.3) 93(32.3) 84(29.2) 54(18.8) 13(4.5) 288(100.0) 일본 14(4.7) 45(15.3) 78(26.4) 104(35.3) 54(18.3) 295(100.0) χ2 값 = 73.274*** *** p<.001 2. 한국 대학생과 일본 대학생의 부모 부양의식 한국 대학생과 일본 대학생의 부모 부양의식의 차이를 좀 더 자세히 알아보 기 위해 각 문항별 차이비교를 해본 결과 모두 유의미한 차이가 나타났다(표6). 자세히 살펴보면, 대체로 한국 대학생은 전체 문항이 3점 후반대에서 4점대 로 부양의식 각 문항에 ‘그렇다’의 응답을 한 것으로 나타났으나, 일본 대학생 은 1점 후반대에서 2점 초반대로 ‘그렇지 않다’의 응답을 한 것으로 나타나 상 당히 대조적이었다. 또한, 한국 대학생의 부양의식이 가장 높은 문항은 ‘부모가 편찮으신 경우 병원비를 대 드려야 한다'는 문항이고, 그 다음이 ‘노부모가 어려운 일이나 괴 로움이 생겼을 때 조언을 해 주거나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한다’의 문항이다. 일본의 경우에는 ‘노부모에게 시사적인 얘기나 최근의 뉴스를 이야기 해 드려 한국 대학생과 일본 대학생의 부모 부양의식 비교 ··········································· 김윤정, 장세철…219 야 한다’와 ‘노부모에게 매월 일정액의 용돈을 드려야 한다’의 문항의 부양의식 이 다른 문항에 비해서는 다소 높았다. <표6> 한국 대학생과 일본 대학생의 부양에 관한 문항별 차이 (n=586) M(SD) 문 항 t값 한국 일본 4.44(.610) 1.73(.912) -37.526 4.39(.648) 1.56(.802) -40.492*** 4.06(.748) 1.87(.962) -26.687 3.70(.860) 2.23(1.074) -15.776 3.89(.856) 2.21(1.032) -18.429 4.04(..820) 1.94(.992) -24.098 노부모가 친목회 등의 모임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4.29(.706) 2.07(.929) -28.404*** 노부모가 현실을 이해하고 사회생활에 적응할 수 있게끔 도와주어야 한다. 4.24(.670) 1.92(.883) -31.272 4.06(.778) 1.79(.896) -28.077 4.33(.702) 1.79(.869) -37.097 4.33(.702) 1.62(.810) -23.045 4.13(.796) 2.12(1.027) -19.677 4.01(.844) 2.23(1.037) -26.725 4.55(.588) 1.86(.899) -38.253 4.24(.724) 2.40(1.159) -20.693 노부모가 외롭지 않게 방문하거나 함께 이야기를 해야 한다. 노부모가 어려운 일이나 괴로움이 생겼을 때 조언을 해 주거나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한다. 노부모가 즐겁도록 바둑이나 장기 등 함께 오락시간을 가져야 한다. 노부모에게 시사적인 얘기나 최근의 뉴스를 이야기해 드려야한다. 식사준비, 청소 빨래, 집안일 등을 해 드려야 한다. 노부모와 함께 외식을 해야 한다. 노부모가 필요로 하는 물건이 있으면 언제라도 지원해 드려야 한다. 노부모가 몸져누워 있을 때 일을 대신해 드려야 한다. 노부모의 식사, 세수나 목욕, 용변, 취침 또는 집안에서의 거동을 도와드려야 한다. 영수증처리(공과금 납부 등), 현금관리 등을 도와드려야 한다. 노부모에게 매월 일정액의 용돈을 드려야 한다. 노부모가 몸이 편찮으실 경우 병원비를 지원해 드려야 한다. 노부모가 참여하는 취미생활이나 노인대학, 친목회 활동 등에 필요한 경제적 지원을 해야 한다. *** *** *** *** *** *** *** *** *** *** *** *** *** *** p<.001 그런데 한국 대학생의 부양의식이 높은 문항은 일본 대학생의 부양의식이 낮고, 한국 대학생의 부양의식이 다른 문항에 비해 낮은 문항은 일본 대학생의 220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부양의식이 다른 문항에 비해서는 높은 것으로 나타나서, 부양의식에서 두 문 화권의 차이를 보다 명확하게 볼 수 있다. 즉, t값을 중심으로 살펴봤을 때, ‘노부모가 어려운 일이나 괴로움이 생겼을 때 조언을 해 주거나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한다’의 문항에서 한일 대학생의 부양의식이 차이가 가장 컸는데, 이 문항은 한국 대학생의 부양의식 문항 중 2번째로 높은 점수를 받은 문항이지 만, 일본 대학생이 가장 부정적으로 응답한 문항이다. 다음으로는 ‘노부모가 몸 이 편찮으실 경우 병원비를 지원해 드려야 한다’는 문항의 t값이 두 번째로 큰 데, 이 문항은 한국 대학생의 점수가 가장 높은 문항이다. 다음으로 두 집단 간의 차이가 적은 문항들을 살펴보면, ‘노부모에게 시사적 인 얘기나 최근의 뉴스를 이야기 해 드린다’의 문항으로 한국 대학생의 경우 3.70점으로 다른 문항에 비해 점수가 가장 낮은 문항인데 반해, 일본 대학생의 경우는 2.23점으로 다른 문항에 비해 점수가 가장 높은 문항이다. ‘식사준비, 청소, 빨래, 집안 일 등을 해 드린다’의 문항 역시 두 집단 차이가 다소 적은 문항이었다(표6). <표7> 한국 대학생과 일본 대학생의 부양의식 차이 구분 N M(SD) 정서적 부양의식 한국 159 4.166(.508) 일본 290 1.904(.735) 신체적 부양의식 한국 159 4.09(.620) 일본 290 2.04(.822) 경제적 부양의식 한국 159 4.367(.587) 일본 290 2.10(.912) (n=586) t값 *** -38.339 *** -29.719 *** -31.907 *** p<.001 또한 부양의식의 하위요인별로 묶어서 한국 대학생과 일본 대학생의 부모부양의 식의 차이를 알아본 결과, 모두 유의미한 차이를 나타냈다(표7). 즉, 정서적 부양의 식은 5점 만점에 한국이 평균 4.166점, 일본이 평균 1.904점으로 한국이 높았고, 신 체적 부양의식은 한국이 4.09점, 일본이 2.04점으로 한국이 높았으며, 경제적 부양 의식도 한국은 4.367점, 일본은 2.10점으로 한국이 월등히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즉, 한국과 일본 대학생의 부모 부양의식의 차이에서 정서적 부양의식, 신체부양의 식, 경제적 부양의식 모두 한국 대학생이 일본 대학생보다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 대학생과 일본 대학생의 부모 부양의식 비교 ··········································· 김윤정, 장세철…221 3. 한국 대학생과 일본 대학생 판별 함수 한국과 일본 대학생 두 집단을 구분하는 변수를 찾아내기 위해 판별분석 (Discriminant analysis)을 실시하였다. 표8에서 제시한 예측변수들은 Wilks Lamda에 근거한 방법이 사용되었으며, enter analysis를 사용하였다. 본 연구 에서 사용한 모델은 유의한 것으로 나타났으며(Chi-square=597.211, p=.000), 대학생의 나이, 조부모의 수, 조부모와의 만남, 정서적 부양의식, 경제적 부양 의식, 신체적 부양의식이 두 집단의 판별함수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 다. 즉, 한국 대학생이 일본 대학생에 비해 나이가 높고 정서적 부양의식, 경제 적 부양의식, 신체적 부양의식이 높으나, 일본 대학생은 한국 대학생에 비해 생존해 계시는 조부모의 수가 많고 만남 빈도 역시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 한, 전체 9개의 변수 중 정서적 부양의식의 차이가 가장 심하였고, 경제적 부 양의식, 신체적 부양의식 순으로 집단 간 차이를 보였다(표8). 따라서 한일 대학생은 나이와 조부모의 수, 조부모와의 만남, 부양의식에서 의 차이가 두드러지나 그 중에서도 정서적 부양의식에서의 차이가 가장 두드 러지는 것으로 보인다. <표8> 한국 대학생과 일본 대학생의 판별 함수 한국 대학생 일본 대학생 F값 성별(남=1) .294(.457) .379(.487) 2.527 나이 22.842(1.894) 19.750(.789) 거주지(도시=1) .887(.318) .914(.282) -.038 *** 282.834 .407 .590 -.019 *** -.113 * -.055 조부모 수 1.996(.912) 2.491(.946) 21.914 조부모 만남 1.303(2.441) 2.043(3.498) 5.135 조부모 전화 1.616(2.936) 1.250(2.384) 1.334 .028 *** 정서적 부양의식 4.145(.514) 1.926(.764) 1000.568 경제적 부양의식 4.345(.595) 2.075(.942) 730.027 신체적 부양의식 4.072(.607) Wilks' Lambda= .164 * 판별함수의 집단 내 구조계수 예측변수들 p<.05, *** p<.001 2.063(.883) *** .654 *** .594 602.595 *** Chi-square=597.211 .766 222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4. 대학생의 부양의식에 대해 영향을 미치는 변인 1) 한국 대학생의 부양의식에 대한 영향변인 한국 대학생의 부양의식에 대한 영향변인을 알아보기 위해 성별, 나이, 거주 지와 조부모와의 관계 변수로 회귀분석을 실시한 결과, 성별과 나이가 부양의 식에 유의한 영향을 미치는 변인으로 나타났고 모델의 설명력은 5.8%를 나타 냈다. 즉 한국 대학생의 부양의식은 여학생보다 남학생일 때 부양의식이 더 높 았고, 나이가 어릴수록 부양의식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표9). <표9> 한국 대학생의 부양의식에 대한 영향변인 (n=288) β 변인 B (Constant) 5.076 성별(남=1) 나이 거주지(도시=1) .176 -.045 .110 .170 -.183 .077 2.533 ** -2.665 1.322 -.045 .009 .022 -.101 .040 .119 -1.710 .618 1.822 조부모와의 관계 조부모 수 조부모 만남 조부모 전화 t *** 13.060 * ** F = 2.904 2 ** R =.058 * p<.05, ** p<.01, *** p<.001 2) 일본 대학생의 부양의식에 대한 영향변인 일본 대학생의 부양의식에 대한 영향변인을 알아보기 위해 성별, 나이, 거주 지와 조부모와의 관계 변수로 회귀분석을 실시한 결과 일본 대학생의 부양의 식에 대한 영향변인으로 성별이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고, 이 모델의 설 명력은 6.7%였다. 즉 일본 대학생의 부양의식은 여학생보다 남학생이 부양의 식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표10). 한국 대학생과 일본 대학생의 부모 부양의식 비교 ··········································· 김윤정, 장세철…223 <표10> 일본 대학생의 부양의식에 대한 영향변인 (n=288) β 변인 B (Constant) 1.762 성별(남=1) 나이 거주지(도시=1) .260 .010 -.056 .236 .016 -.039 4.087 .285 -.678 .003 -.012 -.001 .006 -.079 -.005 .099 -1.296 -.087 조부모와의 관계 조부모 수 조부모 만남 조부모 전화 t 2.655** *** ** F = 3.425 2 ** R = .067 ** p<.01, *** p<.001 Ⅳ. 논의 및 제언 1. 논의 본 연구에서는 한국 대학생과 일본 대학생 각기 290명을 대상으로 부양의식 의 차이를 파악하는데 연구의 목적이 있다. 주요 연구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 대학생과 일본 대학생의 부모 부양의식에 관한 세부 문항별 차이 비교에서, 한국 대학생은 ‘매우 그렇다’ 5점과 ‘그렇다’ 4점에 가까운 3.70에서 4.55점까지로 부양의식 점수가 상당히 높은 반면 일본 대학생들은 1.56에서 2.40점까지로, ‘전혀 그렇지 않다’ 1점과 ‘그렇지 않다’ 2점에 가까워 부양의식 점수가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 대학생의 부양의식이 높은 것은 선행연구 (김윤정, 이창식, 2006; 김윤정, 함정현, 이창식, 2005)와 같은 결과이다. 특히, 각 문항을 구체적으로 살펴봤을 때, 한국 대학생의 부양의식이 높은 문항을 일 본 대학생은 가장 낮은 점수를 부여했고, 한국 대학생의 부양의식이 가장 낮은 문항에 일본 대학생은 가장 높은 점수를 부여해서 두 집단의 부양의식이 차이 를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224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일본 대학생의 부양의식이 낮은 것은 다음 세 가지 측면에서 설명이 가능하 다. 먼저, 사회보장제도의 차이에서의 설명으로 이는 기존의 일본학자들의 주 장이다. 일본과 중국학생을 대상으로 한 KA 등(2006)의 연구에 의하면 일본 학생의 비공식적 부양에 대한 인식이 중국에 비해 낮았는데, 이는 중국이 일본 에 비해 사회보장제도가 약하기 때문이라고 연구자들은 설명하고 있다. 또한 일본과 미국의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연구(HIRAKA 등, 2006)에서도 노인문제 에 대한 인식에서는 두 나라 차이가 없었으나, 부양의식에 있어서는 일본 대학 생이 미국 대학생에 비해 더 부정적이었다. 미국의 경우 공적부양제도보다는 사적부양에 의존하는 비율이 높다 보니 가족부양자로서 대학생의 부양의식이 높고, 중국의 경우 역시 공적부양제도의 미비로 가족원에 의한 부양의식이 높 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와는 달리 일본의 경우 고령자의 소득 안정화 정책에 따라 국민연금이나 퇴직금제도, 공무원과 교직원의 사립연금이 정착되어 있고, 이에 따라 노인에 대한 부양을 가족이 아니라 사회의 몫이라는 풍조가 강하다 고 주장을 하고 있다(박광덕, 2005). 따라서 이러한 사회보장제도의 정착이 노 인에 대한 노후를 가족이 책임져야 한다는 부양의식을 약화시키는데 한 몫을 했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비교문화심리적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설명해 볼 수 있다. 이영희(2001)는 한국의 ‘家’와 일본의 ‘이에’는 차이가 난다고 주장하였다. 한국 의 경우 가부장적 가족주의가 다른 유교문화권보다 강하고 이에 따라 정부에 대한 충성심보다는 가족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나라이다. 따라서 모든 가치는 부모부양에서부터 시작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에 의식적으로든 무의식 적으로든 부모에 대한 부양의식은 하나의 사회적 규범을 형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이에’의 경우 반드시 혈연에 의한 가족에 의해서 가족이 계승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자신의 부모에 대한 부양의식 역시 낮은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볼 수 있다. 또한 일본 대학생에 비해 한국 대학생이 원조 욕구도 강하고 의존욕구도 강하기 때문에(제승용, 김영권, 1997) 부모로부터 원 조를 받고 다시 노년의 부모에게 원조를 제공하는 부양의식이 일본의 대학생 의 비해 더 높을 것이다. 거기에 한국 대학생이 삶에서 관계지향적인 측면을 중요시 하지만, 일본 대학생은 개인주의적인 측면을 강조한다는 한다는 결과 (김윤정, 2008)에서도, 부모와의 관계를 이어가는 것으로 볼 수 있는 부양의식 이 일본 대학생에 비해 한국 대학생이 더 높은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본 설문지의 부양의식이 사회적 바람직성과 같은 부양과 관련된 규범을 측정했기 때문에 한일대학생의 차이가 심화되지 않았는가도 고려해 볼 수 있다. 즉, 한국은 체면치레와 같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현상에 대해 긍정 적으로 응답하는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부양의식이 과장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한국 대학생과 일본 대학생의 부모 부양의식 비교 ··········································· 김윤정, 장세철…225 둘째, 한일대학생의 판별함수에서 한일대학생은 나이와 조부모의 수, 조부모 와의 만남, 부양의식에서의 차이가 두드러지나 그 중에서도 정서적 부양의식에 서의 차이가 가장 두드러지는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정서적 부양의식에서 두 나라의 차이가 가장 컸다는 결과는 일본의 노인부양에 있어 시사하는 바가 크 다. 즉, 기존의 일본학자들(HIRAKA 등, 2006; KARASAWA, 2006)이 일본의 부양의식이 미국이나 중국대학생에 비해 낮은 것을 일본의 사회보장제도가 잘 정착되어 있기 때문으로 설명하고 있으나, 이러한 사회보장제도의 정착에서만 부양의식이 낮은 것을 찾아서는 안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즉 본 연구에 의하면 일본 대학생은 한국 대학생에 비해 신체적, 경제적 부양의식만이 아니 라 정서적 부양의식까지도 현저하게 낮다. 정서적 부양의식이란 신체나 경제와 는 달리 가족에게 남아있는 고유의 기능으로 미래의 부양자인 대학생들이 이 부분의 의식까지도 낮다는 것은 일본의 노인문제에 미치는 파장이 클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일본의 경우 가족부양에 대한 태도가 강할수록 계속 부양할 의 지가 높았다는 연구결과(KARASAWA, 2006)는 점을 고려할 때 일본 노인부 양의 앞날이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따라서 일본의 부양의식이 낮은 것은 단순 히 사회보장이 잘 되어 있기 때문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대학생의 부양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방안을 강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또한 일본 대학생이 한국 대학생에 비해 조부모의 수나 만남의 빈도는 높지 만 부양의식은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즉, 조부모의 생존여부나 만남이 부양의 식에 오히려 부정적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선행연구와 일맥상통하는 결과이다. 이보현(2006)의 연구에서 부모의 생존여부 및 만남빈도와 부양의식 간에는 유의미한 차이가 없었다. 따라서 조부모가 생존해 있거나, 자주 만난다 고 해서 부양의식이 향상되는 것이 아니라는 본 연구의 결과는 조부모와의 친 밀감과 같은 질적인 측면이 더욱 중요하다는 주장(Cartestensens, Mason, Caldwell, 1982; Harshomo, Manaster, 1982)을 뒷받침하고 있다. 즉, 자주 만나 는 것이 곧 더 친밀하다는 의미는 아니며, 또한 자주 만나는 것이 부양의식으 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대학생의 부양의식을 함양하기 위 해서는 단순한 접촉의 빈도를 늘리기 위한 노력보다는 조부모를 더 이해하고 조부모의 노화를 더 수용하도록 하는 교육을 통해 친밀감을 향상시킬 필요가 있을 것이다. 셋째, 대학생의 부양의식에 영향 미치는 변인을 알아본 결과, 한국의 경우는 성별과 나이가 부양의식에 유의한 영향을 미쳤으나, 일본의 경우는 성별만이 유의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한국의 경우 남학생인 경우와 나이 가 어릴수록 부양의식이 높았는데 이는 노인부양의식과 관련된 선행연구(김윤 정, 이창식, 2006; 김윤정, 함정현, 이창식, 2005)와 일치하는 결과이다. 일본의 226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경우도 남학생인 경우 부양의식이 높았다. 이처럼 한일 모두 남학생의 부양의 식이 높은 것은 유교문화권에서 남성의 부양의식이 높기 때문으로 해석이 가 능하다. 이와는 달리 여학생의 부양의식이 낮은 것은 부양의 주체로서의 부담 과 스트레스 때문으로 설명되어지며, 나이가 적을수록 부양의식이 높은 것은 아직까지 부양에 대한 피상적인 사고와 자기 부모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노 부모 부양의식으로 이어졌을 것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2. 제언 본 연구를 종합해 보면, 한국과 일본의 미래 부양자인 대학생을 대상으로 하 여 그들의 부양의식을 비교하고 영향변인을 살펴봤다는데 연구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특히 한국의 사회풍토나 가치관이 일본과 유사해지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일본 학생의 부양의식이 상당히 낮은 것은 미래 한국사회에 함의하는 바가 크다. 즉 일본의 경우 노년기 부양에 대한 사회적 제도가 정착화 됨에 따 라 젊은 층의 노인부양의식이 낮아지는 것으로 설명이 가능했는데, 그렇다면 한국 역시 그러한 전철을 밟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현재 한국은 일본 과 마찬가지로 사회보장제도가 발달하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2008년 7월 부터 전국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이며, 또한 이미 시행중 에 있는 기초노령연금, 국민연금 등이다. 또한 한국인의 가치관 역시 원조적이 고 의존적인 가치관에서 독립적인 가치관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부양자의 부양의식도 낮아질 것으로 추측이 가능하다. 그러나 한국 중년기 이상의 경우 일본이나 중국에 비해 유교적 가치관이나 가족주의 가치관이 강하게 남아 있고, 부양의 책임이 ‘모든 자녀에게 있다’는 응답이 56.8%인 반면 ‘국가나 사회에 있다는 응답’은 4.4%이기 때문에(강현정, 김윤정, 2006), 노년기 부양을 온전히 사회의 몫으로 돌리는 경우 노년기의 삶 의 질에 위협이 될 수 있다. 즉 현재 우리나라 중노년기의 경우 자녀와의 관계 가 삶의 질에서 절대적이기 때문에 사회보장제도가 발전하는 것과는 별도로 미래 부양자의 부양의식을 유지하고 함양하는 교육이 계속적으로 유지될 필요 가 있다. 마지막으로 본 연구의 제한점을 밝히면 다음과 같다. 첫째, 본 연구의 대상 자인 한국 대학생과 일본 대학생 간에는 나이나 거주지에서의 차이가 유의하 였기 때문에, 이러한 변수를 통제변수로 사용하여 판별분석을 실시하였다. 그 럼에도 두 집단이 완전히 동일한 집단으로는 볼 수 없기 때문에 본 연구의 결 과를 일반화하는데 주의가 필요하다. 둘째, 설문조사에 있어, 한국의 대학생은 한국 대학생과 일본 대학생의 부모 부양의식 비교 ··········································· 김윤정, 장세철…227 여러 지역에서 표집을 하였으나 일본의 경우는 한 지역의 대학생만을 대상으 로 했다는 점도 본 연구의 제한점이다. 셋째, 본 연구의 대상자인 대학생의 부 모가 조부모를 부양하고 있는지, 부모세대의 부양의식은 대학생과 어떠한 차이 가 있는가를 고려했다면 대학생의 부양의식이 미래사회에 함의하는 바를 명확 하게 설명할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후속 연구에서는 본 연구의 이러한 제 한점들을 보완한다면 한일간의 부양의식의 차이를 보다 잘 설명할 수 있을 것 으로 기대한다. 【参考文献】 강현정, 김윤정 (2006). 노부모 부양 기혼 여성의 노인복지시설입주 예측 요인에 관한 연구. 한국지역사회생활과학회지, 17(4), 97-112. 김영호 (2002). 청소년의 노부모 부양의식 실태에 관한 연구: 울산광역시 고등학생 을 대상으로. 울산과학대학 연구논문집, 29(2), 41-59. 김윤정 (2000). 사회적 지지관점으로 본 가족부양이 노인의 정신건강에 미치는 영 향.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김윤정 (2008). 한일대학생의 성공적 노화 지각 비교. 한국노년학, 28(3), 567-584. 김윤정, 이창식 (2006). 청소년의 부양동기와 부양의식간의 관계. 한국청소년학회, 13(6), 101-125. 김윤정, 강인, 이창식 (2004). 청년 중년 노년 세대별 노인에 대한 태도. 한국가정 관리학회지, 22(1), 65-75 김윤정, 함정현, 이창식 (2005). 부양의식의 세대차이와 결정변인에 관한 연구-청 소년과 그들의 부모를 대상으로. 청소년학연구, 12(4), 243-261. 이기숙, 정미라, 김현정 (2006). 한국, 중국, 일본 유아들의 일상생활에 대한 비교연구. 한국심리학회지:사회문제, 12(5), 81-98. 이보현 (2006). 청소년의 효의식과 부양의식이 부모부양행동에 미치는 영향. 한서 대학교석사학위논문. 이은경 (1999). 대학생의 가족주의 가치관과 부모 노후의 부양의식에 관한 연구. 대한가정학회지, 37(1), 45-65. 이희자, 김영미 (1996). 청소년의 부모부양의식과 중년기 부모의 노후준비도. 대한 가정학회지, 34(2), 117-128. 228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제승용, 김영권 (1997). 대인적 욕구에 대한 한일대학생의 비교문화심리학적 연구. 일본학보, 39, 313-327. 조윤주, 이숙현 (2004). 대학생 자녀가 지각한 부모와의 정서적 관계와 부모 부양 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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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한국 대학생과 일본 대학생의 부모 부양의식 비교 ··········································· 김윤정, 장세철…229 要 旨 本研究は韓国の大学生と日本の大学生、各各の290名を対象にアンケート調査を実施し、 両国における大学生の扶養意識の差及び扶養意識に関連する変因を把握することに研究の目 的がある。 まず、韓国大学生の扶養意識が日本大学生の扶養意識に比べて高かった。すなわち、韓 国大学生の扶養意識は5点満点で3.70から4.55までに扶養意識点数がかなり高い一方、日本 大学生たちは1.56から2.40点までに扶養意識点数が低いものと現れた。このような結果を社会 保障制度発達の差と比較文化心理的な差から起因することで説明した。 二番目、韓日大学生の判別函數で韓日大学生は年齢と祖父母の数、 祖父母との会うこ と、扶養意識での差が目立つがその中でも情緒的な扶養意識での差がいちばん目立つことと 見える。情緒的な扶養意識と言うのは身体や経済とは違って家族に残ってある固有の機能で未 来の扶養者である大学生たちがこの部分の意識までも低いと言うことは日本の老人問題に及ぶ 影響が大きいことに予想される。従って,日本の扶養意識が低いものは単に社会保障がよく整え ているからに解釈するより大学生の扶養意識を高めるための方案を考える必要があるだろう。 三番目、大学生の扶養意識に影響及ぶ変因を調べた結果、韓国の場合は性別と年齡が 扶養意識に有意した影響を及ぼしたが、日本の場合は性別だけが有意した影響を及ぼすことと 現れた。 本研究は、韓国と日本の未来扶養者である大学生を対象にして彼らの扶養意識を比べて影 響変因をしろべたことに研究の意義を探すことができる。日本と同じように社会保障制度が発達 している現時点で日本大学生の扶養意識が低いものは韓国社会に含意するところが大きい。 従って社会保障制度が発展することとは別に未来扶養者の扶養意識を維持し、涵養する教育 が継続的に維持される必要がある。 キーワード;扶養意識、社会保障制度, 韓日大学生, 未来扶養者 社会保障、扶養者活動 투 고 : 2008. 8. 31 1차 심사 : 2008. 9. 12 2차 심사 : 2008. 9. 27 마치즈쿠리(まちづくり)와 일본 사회구조의 관계변화 연구 金 漢 洙* (e-mail : [email protected]) 目 次 1. 머리말 2. 行政主導에 의한 마치즈쿠리 2.1 정부주도에 의한 도시계획 2.2 마치즈쿠리 운동의 태동 2.3 行政이 마치즈쿠리 운동 주도 3. 住民主導에 의한 마치즈쿠리 3.1 마치즈쿠리 운동의 전환점 3.2 공동운영에 의한 마치즈쿠리 4. 結論 1. 머리말 일본에서 ‘마치즈쿠리(まちづくり)’1)라는 단어는 일상적인 하나의 운동으로 자 리매김 되어가고 있다. 가까이에서는 지역의 커뮤니티나 행정지원과 같은 것에 서 국가 수준의 정책에 이르기까지 마치즈쿠리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 * 전북과학대학 관광계열 교수 1) 마치즈쿠리(まちづくり) : 한국에서는 ‘마을가꾸기’나 ‘마을만들기’로 변역되어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마치즈쿠리는 도시계획의 계획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계획이나 마을가꾸기의 모든 분 야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어휘의 의미는 街와 町라는 단어에 つくり가 합성되어 만들어 진 것이다. 街づくり, 町づくり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지만 정확하게 세분한다면 街는 하드웨어적 인 이미지가 있고 町는 소프트웨어적인 이미지가 있다. 본고에서는 이 두 가지 의미를 포함하여 사용한다. 이하 ‘마치즈쿠리’로 표기한다. 232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주지의 사실이다. 그 범위는 복지, 치안, 환경 보존, 교통 문제, 지역경제, 유통, 관광전략, 지역 커뮤니티, 건설 등 다양한 영역까지 확대되어가고 있다. 또 교 육현장인 초등학교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 각 교육기관에 있어서도 마치즈쿠 리와 관련해 활발하게 교육 및 실천을 하고 있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일본에서 활발하고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는 마치즈쿠리는 명확하게 정의를 내리지는 못하지만 집약해서 말한다면, 어느 지역이 안고 있는 과제에 대해서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 또는 그 양면으로부터 과제의 해결을 도모하려고 하는 프로세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매우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는 마치 즈쿠리지만 크게 3가지의 의미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마치즈쿠리의 첫 번째 의 미는 주민이 참가한 도시계획의 의미이며, 두 번째 의미로는 상점가꾸기(商店 街づくり)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주로 거리가꾸기(街づくり)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것은 상업자와 도시계획의 복합적인 중심시가지의 재개발 사업 등을 말한다. 그리고 세 번째의 의미는 마을부흥(むらおこし・まちおこし) 등의 지역 활성화라는 의미에서의 마치즈쿠리이다. 주로 대도시 인구 집중화로 과소화 현상이 일어나 활력을 잃어가는 지역의 특성을 살려 매력을 높임으로서 인구증가와 지역 활 성화를 도모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특히 마치즈쿠리의 대표적인 사례는 오이타 켄(大分縣)의 一村一品運動2)이나 도시형 리조트의 제공3) 등 지역경제가 열악 한 지역에서 활성화되었다. 본 논문에서는 먼저 도시공간으로서의 하드웨어적인 ‘마치(街)’4)와 지역사회 로서의 소프트웨어적인 ‘마치(町)’를 나타내는 마치즈쿠리를 분석하여 마치즈쿠 리 운동에 대한 官主導의 과정에서 民主導로 실행되기까지의 관계변화를 고찰 해보고자 한다. 2. 行政主導에 의한 마치즈쿠리 2.1 정부주도에 의한 도시계획 일반적으로 마치즈쿠리라는 단어는 행정주도로 추진되는 도시계획에 대한 반발로 주민주도로 진행되는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원 2) 오아타켄(大分県) 지사인 히라마츠 모리히코(平松 守彦)가 발안한 것으로 전국으로 23개 道府縣 에 확산되었던 운동. 3) 오이타켄(大分県) 유휴인(湯布院)의 영화제나 음악제가 성공사례로 제시되고 있다. 4) 마치(まち)는 街, 町라는 한자로 나타낼 수 있다. 사전적 의미로 町는 지방자치단체의 하나인 쵸(町) 이며, 우리나라 邑 정도 크기의 행정구역명칭이다. 즉 집이 많이 군집하여 있는 도회지이다. 街는 보통 상가 따위의 밀집된 번화한 거리를 말한다. 본고에서는 이 두 한자의 의미를 공통으로 사용 한다. 이하 마치로 표기한다. 마치즈쿠리(まちづくり)와 일본 사회구조의 관계변화 연구 ·································· 金 漢 洙…233 래 도시계획이라는 말은 1919년에 일본에서 처음으로 도시계획법이 만들어졌 을 때에 공용어가 되고 일반화된 말이다. 도시계획이라는 단어는 그 이전부터 있었고 일본의 메이지(明治)정부가 도시 근대화를 위해 서양의 건축가들을 초 청하여 서양적인 건물을 건축하는 가운데 도입되어 온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1886년에는 도쿄(東京)의 중심을 독일의 베를린이나 프랑스의 파리와 같은 화 려한 도시로 만들자고 하는 계획안이 입안되기도 했었다. 그런 토대 위에 1988 년에 시행된 ‘東京市區 改正條例’를 가지고 일본의 근대도시계획이 탄생되었다 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즉 ‘도시계획’ 이전 상응하는 용어는 市區改正이었지 만, 그 사고방식은 일본의 서양화에 대한 대응 속에서 서양으로부터 도입되었 다고 말할 수 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서양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레벨향상을 위해 강력하 게 국가계획을 추진했다. 원래 영국의 도시계획 등은 먼저 주민이 느끼고 있는 생활상의 불편이나 희망사항을 듣는 공청회를 가지고 거기서 나온 의견을 토 대로 행정과 전문가가 계획의 초안을 수립하여 주민들에게 확인을 받아 최종 적인 결정을 통해 법을 시행하는 시스템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서양과의 큰 격 차를 줄여가기 위해서 모든 것을 중앙집권적으로 강력하게 이끌어가야 할 필 요가 있었다. 그래서 일본 정부는 內國勸業博覽會 등의 행사를 통해서 주민에 대한 계몽을 추진하는 행사유도정책을 전개하면서 아울러 적극적으로 도시계 획을 추진해 갔다. 이러한 도시계획은 한국의 과거 박정희 정부에서 실시했던 ‘새마을 운동’의 전개과정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戰後 일본은 다양한 가치관의 변화를 받아들이면서 1945년부터 50년대 전반 에 걸쳐 새로운 국가체제가 정비되었다. 당시 일어났던 시민운동으로서는 노동 운동․농민운동․문화운동․기업의 민주화운동 등이 있다. 이와 같은 시민의 가치관의 전환, 민주화, 다양화를 배경으로 하여 시민과 마치즈쿠리를 분리하 는 제도적 개혁이 단행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쵸나이카이(町内会)․부라쿠 카이(部落会)’의 폐지와 지방자치법의 개정이다. ‘쵸나이카이(町内会)․부라쿠카 이(部落会)’는 行政機関의 말단기관으로서 전쟁 중에는 국내통제에 이용되었다 는 이유로 폐지되었지만, 이 제도개혁에 의해 커뮤니티 레벨의 의식과 커뮤니 티 레벨의 정치가 분리되는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쵸나이카이(町内会)’ 는 실질적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지역 자치의 중심으로 현재도 기능하고 있지 만 그 역할은 상당히 한정적인 상태에 머물고 있다. 지방 자치법의 시행·개정에 대해서는 1947년에 시행된 후 민주화와 지방분 권을 기본적 방향으로 개정이 거듭되어 왔지만, 50년대에 접어들면서 미국의 정책 전환에 의해 결국은 市町村의 합병5)이 촉진되는 것과 동시에 국가의 권 한을 강화한 제6차 개정으로 이어졌다. 234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戰後 국가체제의 개혁은 시민 레벨의 새로운 가치관이 태어나면서도 시민과 마치즈쿠리가 나눠지는 방향으로 나갔다. 일본의 마치즈쿠리는 국가의 체계화 된 여러 시책하에서 관·행정주도로 추진되어 왔다. 국가·都道府県의 개입·관여 (토지이용의 계획 등 포괄적인 지도감독권이나 국가로부터의 보조금·부담금에 의한 컨트롤)가 있었고 省廳·都道府県의 담당부서 조직의 종적구조로 되어 있 어 주민에 가까운 지방공공단체에는 결정권이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여러가지 제약 아래 개성을 살린 다양한 마치즈쿠리나 주민 그리고 주민에 가 까운 지방공공단체의 의향을 반영한 마치즈쿠리를 만들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지역주민이나 대표 등 마치즈쿠리의 리더십에 의한 지역주 민의 참가·협력·협동으로 개성적인 경관이나 다양한 지역자원 등을 살린 개성 있는 마치즈쿠리를 실현해 왔던 경우도 극소수 있었다. 2.2 마치즈쿠리 운동의 태동 일본은 전후의 혼란기를 중앙집권적인 국가정책 및 도시계획에 의해 대응하 면서 경제성장기에 돌입해 나갔다. 원래 중앙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추진해온 도시계획은 구체적으로는 도시계획법에 규정되어 있는 내용이다. 도시계획법은 전부 합쳐서 97조와 부칙으로 되어 있는 긴 법률이지만 내용적으로는 ① 도시 계획의 목적 ② 도시계획이라는 이름아래 실시되는 내용 ③ 도시계획을 정하 는 수속 등으로 분류 되어 있다. 그리고 도시계획은 총괄도, 계획도 및 계획서 에 따라 규정되어 이것을 알기 쉽게 나타낸 것이 도시계획도이다. 하지만 도시 계획에 관한 이러한 정의는 ‘용도지역의 색칠이’라든가 ‘도로계획’이나 ‘구획정 리’ 등의 경직된 기준으로 계획되는 딱딱한 것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살기 좋 은 ‘마치’를 바라는 주민들에게 있어서는 그와 같은 도시계획은 냉담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러한 도시계획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마치즈쿠리라는 표 현이 만들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마치즈쿠리라는 용어가 최초에 공식적으로 사용된 것은 1952년에 당시의 히 토츠바시(一橋)대학 교수이었던 마스다 시로(增田 四郞)교수가 월간지『都市問 題』에서 「都市自治의 한 가지 문제점(都市自治のひとつの問題点)」6)이라는 원 고로 구니타치(國立)에서 전개되고 있던 운동에 관해서 언급했던 것이 최초라 고 와타나베 준이치(渡辺俊一)는 지적하고 있다. 또한 주민운동으로서의 마치 즈쿠리(街づくり)라는 단어가 실전에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62년에 나고야시 5) 현재 일본에는 1,821 지역의 기초자치단체가 있는데 이것은 1888년 明治 대합병 때 71,314개를 15,859 지역으로 통합하고, 다시 1953년의 昭和 대합병 때 3,472 지역으로 통합한 다음 마지막으로 平成 대합병 때 지금과 같이 통합했다. 6) 月刊『都市問題』1952년5월, 제43권, 제2호. 마치즈쿠리(まちづくり)와 일본 사회구조의 관계변화 연구 ·································· 金 漢 洙…235 (名古屋市)의 사카에히가시(榮東)지구 도시재개발운동이었다고 말해진다. 그리 고 마치즈쿠리가 행정의 문서에서는 1983년에 책정된 ‘교토시(京都市) 기본구 상’에서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7) 일본은 고도성장을 배경으로 개발위주 정책에 따른 반발이나 도시과밀, 교 통, 공해 등 각종문제에 대한 시민운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시민 의식과 동떨 어진 형태로 진행된 지역개발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계획이 시민의 쾌적성을 파괴 또는 위협하는 상황이 되어 시민들이 일어섰던 것이다. 또한 미시마시(三 島市)의 석유화학산업단지 유치 반대운동이나 나카노쿠(中野区) 가미사기노리 미야(上鷺宮)지구 재개발 반대운동 등 크고 작은 많은 운동이 전개되었다. 행정·기업이 제휴한 개발 행위에 대해서 계획단계로부터의 시민참가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는 문제점이 公害라고 하는 형태로 사회문제화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 대응해서 공해대책 기본법, 도시계획법 등이 정비되었지만 모두 중앙정부에서 일방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도시계획법은 ‘국가가 실시하는 역할이다’고 하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都道府県 및 市町村이 실시하는 도시계획에 관해서는 각 기관의 위임사항이라고 생각하여 필수과업이라는 고정관념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도시에 있어 가장 큰 영향 을 가지는 도시계획이 시민으로부터 단절될 뿐만 아니라 市町村에서도 도시계 획이 분리되는 형태로 제도화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일본은 개발위주의 정책에 대한 반대운동이나 거주환경에 위협을 받아 저항 운동으로서 마치즈쿠리운동이 태동하게 되었다. 이러한 주민운동이 각지의 공 해반대운동과 연합하여 주민운동의 성장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 결과 전국적으 로 전개된 ‘구획정리대책’의 노력에 의해 주민을 주체로 하여 주민 생활상의 가치관에 근거한 마치즈쿠리가 주장·전개하게 되었다.8) 마치즈쿠리는 도시계 획에 주민참가를 유도하려는 행정으로부터의 접근이 대부분이었다. 마치즈쿠리 에 대한 새로운 움직임은 마치즈쿠리에 대한 주도권은 행정측에 있으면서도 그 계획에 주민참가가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고 하는 점이다. 특히 큰 계기가 된 것은 자치성이 실시한 시범 커뮤니티 사업이며 커뮤니티의 형성을 목표로 행정계획에 대해서 주민이 참가하는 방법이 모색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고베 (神戸市) 마루야마(丸山)지구의 시범 커뮤니티를 비롯하여 커뮤니티 센터 등 지역의 사회간접자본의 운용을 중심으로 하는 시민활동 그리고 마치즈쿠리위 7) 교토시기본구상(京都市基本構想)(京都市Grand Vision), http://web.kyoto.inet.or.jp/people/my10 s4/firstcityplan.htm 교토시(京都市)기본구상의 전신인 교토시(京都市) 총합계획 시안은 1963년에 완성. 8) NPO·특정비영리활동법인 ‘구획정리·재개발대책 전국연락회의’(1968년 설립)에 의하면, 현재까지 일 본 전국에서 1400군데의 구획정리와 120군데의 재개발이 진행되어 왔지만 그 대부분은 주민무시· 주민희생으로 추진되어 왔다. 참고: http://homepage3.nifty.com/kukakurenrakukaigi/ 236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원회나 마치즈쿠리협의회 등의 시민참가의 조직화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2.3 行政이 마치즈쿠리 운동 주도 마치즈쿠리가 행정에 대항할 수 있는 기능은 주민뿐만 아니라 대학이나 종 합연구소, 도시계획의 전문가 등 여려 조직들이 일시적이 아닌 상설적인 조직 으로 만들어져 갔다. 이 때 활동자금으로 ‘마치즈쿠리 공익신탁’ 등의 시스템도 시도하게 되었다. 마치즈쿠리는 직면한 과제에 대한 개선 운동의 필요성에 의 해 지역고유의 창조적 요소를 가미 하면서 다양한 테마로 전개 되었던 것이다. 지역복지마치즈쿠리, 환경마치즈쿠리 등 지역 속에서 실천적인 방법이 고안되 고 법제도적으로도 지탱된 시범적 노력에 의해 마치즈쿠리의 성공사례가 방법 적인 측면으로부터 축적되었던 것이다. 또 하나 마치즈쿠리의 큰 특징은 ‘마치나미(町並み)9)보존운동’의 시작과 활 성화였다. 원래 마치나미(町並み)는 지역의 고유성의 상징이며 지역 문화, 역 사, 풍토가 종합화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마치나미(まちなみ)를 보존· 재생하는 것을 통해서 커뮤니티의 재생을 도모해 나가려고 하는 것이 마치나 미(まちなみ)보존운동이다. 마치나미(まちなみ)보존운동은 기후켄(岐阜県)의 다카 야마(高山)나 나가노켄(長野県)의 츠마고메(妻籠)를 발단으로 일본 전국에 퍼 졌다. 이러한 운동을 토대로 ‘주민헌장’이나 ‘주민협정’이라고 하는 도시계획법 등에 기초를 두지 않는 임의의 협정에 의한 마치즈쿠리방법이나 市町村에 의 한 條例에서, 계획적인 형태의 마치즈쿠리 조례 및 건축협정 등의 일정한 제도 적 강제력을 가지는 새로운 방법이 개발되었다. 또한 마치나미(まちなみ)보존운 동에는 지방중소도시가 모두 작은 도쿄(東京)을 지향하고 도시계획이 추진되 어 가던 것에 대한 반발이라고 볼 수 있다. 일본의 제2차세계대전 후 1955년경까지 계속되었던 戰災復興計劃에 의해 도 시의 위생(건강성)과 방재성·방화성(안전성)에 대해서는 많이 개선되었고, 그 후 지속된 고도성장기에서도 산업의 진흥은 정부의 도시계획의 중심적 과제였 다. 그 결과 도시계획에 가장 중요시된 내용은 ‘편리함’이었고, 급격한 도시화 로 이어졌다. 급속한 도시화에 대한 대응은 너무 서둘러 추진했기 때문에 효율 화에만 편중한 나머지 획일화나 표준화를 초래하여 각 도시의 개성이나 매력 이 상실되는 방향으로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많은 인구유입에 의한 도시화는 편리성의 제공 대신에 커뮤니티의 혼란과 소외를 초래했고 주민은 그 속에서 개인과 지역에 대한 정체성을 찾기 시작했 9) 마치나미(町並み): 거리에 상점이나 집이 즐비하게 늘어선 곳. 마치즈쿠리(まちづくり)와 일본 사회구조의 관계변화 연구 ·································· 金 漢 洙…237 던 것이다. 도시계획이나 마치즈쿠리의 단계로, 첫째 도시의 위생(건강성)과 방재성·방화성(안전성), 둘째 도시의 편리성과 쾌적성이 어느 정도 충족되면, 셋째 개성과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요구의 단계로 들어가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요시다 타미오(吉田 民生)10)의 『흔들리는 도시(揺らぎの都市)』에서 도시 화 및 高度 도시화 단계의 기본적 특징의 비교로서 다음과 같이 도시의 발전 단계의 차이를 정리하고 있다. 표 1. 도시화 및 高度 도시화 단계의 기본적 특징 비교 구분 도시화 단계 高度 도시화 단계 01 가치 지향 물질적·경제적 풍요로움 정신적·문화적 풍요로움 02 생활 욕구 균질·표준화 개성·차별화 03 생활 행동 수동적·평균적 행동 능동적·주체적 선택 행동 04 생활 스타일 공생활 중시형 사생활 중시형 05 생활 거점 단속형 복속형 06 생활 시스템 공동처리 시스템 의존형 전문처리 시스템 의존형 07 지역 사회 스타일 동질형(균일한 조직) 이질적(다양한 개인) 08 라이프 디자인 인생 50년형 인생 80년형 09 도시 디자인 젊은이 중심(경제성·기능성) 노인, 어린이, 장애자도 포함한 (多階層型)(快適性) 10 직업 디자인 직업 중심 인간 중심 11 서비스 생산 스타일 생산자·공급자 우위 소비자·수요자 우위 12 서비스 생산 시스템 대량생산(규모의 이익) 다품종소량생산(다양성의 이익) 13 지역 경제 스타일 하드 산업화 소프트 산업화 14 지역 진흥 스타일 外發型 內發型 15 정보화 스타일 거점적 정보화 산업, 사회, (online 중심) 16 정보 통신 관계 도쿄(東京)발신·지방 수신형 지역상호 수·발신형 17 지역간 관계 경쟁·단독형(Standalone) 경쟁·협조형(Network화) 18 자원 이용 스타일 多소비성(無限性) 복합이용(有限性) 10) 요시다 타미오(吉田 民雄), 『揺らぎの都市』, ぎょうせい, 1989, p.184. 가정의 정보화 238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19 자원 배분 스타일 산업중시형 생활중시형 20 도시 기능 대도시권 집중형 중추·중핵도시 집적형 21 정부간 관계 集權型 分權型 22 사회 스타일 세로형·계층형 가로형·네트워크형 23 지방 정부 스타일 큰 정부 적정규모의 효율적인 정부 24 정치 스타일 대표 민주제 참가 민주주의 25 자치 스타일 고정적 분업관계 유동적 협업관계 일본은 전후 대도시의 급격한 인구 유입으로 고도경제선진국으로 접어들면 서 생활환경은 더욱 악화되었다. 세계 경제대국으로 진입했지만, 대규모 난개 발에 의한 주거와 생활환경 악화 그리고 심각한 공해문제로 생활환경이 위에 나타난 것처럼 변화하게 되었다. 즉 하드웨어적인 측면만 고려한 산업화로 인 간의 삶이 악화되면서 새로운 탈출구를 찾는 일환으로 소프트웨어적인 측면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찾게 되었고 이런 요인이 마 치즈쿠리의 가치의식에도 변화되어 행정에 대응해 나갔던 것이다. 행정측의 대응을 보면 고도성장기에 일어난 도시문제에 대한 반성으로 중앙 정부나 지방자치단체도 조금씩 지역의 매력이나 환경의 질을 고려하는 사업이 나 시책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쾌적성’이라는 생각을 마치즈쿠리에 도입하는 것에 노력하는 것과 아울러 그 定量的인 평가방법의 연구를 추진했 다. 그 결과 ‘쾌적성’은 자연이나 공기·물의 깨끗함, 조용함, 자연환경의 친화성 등에 의해 구성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당시 일본인들이 생각한 ‘쾌적한 환경’은 공해행정이나 자연보호행정의 틀 안에 있는 것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쾌적성(Amenity)의 개념에는 포함 되었지만 사람들의 활력이 넘치는 삶이라는 관점을 포함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즉 현실의 마치에 사는 사람들의 쾌적함의 실감과는 괴리가 있었다고 생각된 다. 지역의 곳곳에는 지역주민의 생각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것에 회의를 느껴 의회나 행정을 설득하려는 노력도 있었다. 그러나 정책적으로 실현되어도 주체 가 과거처럼 행정이 그대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주민들의 관심은 멀어졌다. 결국 도시계획 마치즈쿠리 성과는 널리 보급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또한 도 시 개성의 상실이나 커뮤니티 붕괴 등의 문제는 그대로 방치해 두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나 90년대 후반부터는 시대적 흐름이 지역개발보다는 주민참가 를 요구하게 되었으며 행정이 인재육성을 요구하게 되어 주민이 주체가 된 마 치즈쿠리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마치즈쿠리(まちづくり)와 일본 사회구조의 관계변화 연구 ·································· 金 漢 洙…239 3. 住民主導에 의한 마치즈쿠리 3.1 마치즈쿠리 운동의 전환점 마치즈쿠리 운동의 전환점이라고 말할 수 있는 단계는 행정에 의한 마치즈 쿠리가 아닌 주민이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시기를 말한다. 즉 이전의 행정주도 형의 시민참가·주민참가라는 단계에서 시민주체로 활동하는 마치즈쿠리운동이 증가하게 되었다. 또한 과도한 경제개발로 인한 거품경제붕괴와 그것에 이어지 는 디플레이션(Deflation)현상이 일어났다. 개발중심의 도시계획은 자동차 산업 의 발달과 아울러 교외의 대형쇼핑센터, 아파트 단지, 시의 행정기관이나 대형 병원 등의 교외이전을 초래했다. 신도시의 확대로 구도시 중심지역의 밀도 저 하와 재래시장(중심시가지)의 낙후뿐만 아니라 사회간접자본에 투자를 요구하 게 되어 결과적으로 행정의 재정을 압박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거품경제 붕괴로 행정의 재정은 극도로 악화되어 갔다. 결국 중앙정부에서도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중앙정부가 실시하는 국토 에 관한 여러 정책의 체계인 ‘국토총합개발계획’ ‘국토이용계획’ 아래서는 지역 진흥이나 도시에 관한 각종 계획이 개별 규제법에 따라 책정되고, 전국에서 소 도시 지역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국토계획에 의한 사업이 추진되어 왔다. 이것 은 국가가 국토의 균형 있는 발전을 목표로 하여 국가주도로 도시 정비나 過 少·離島·山村의 지역진흥을 전개하게 되었다. 그리고 1998년의 제5차의 전국총 합개발계획 ‘21세기의 국토의 그랜드 디자인(일21世紀の国土のグランドデザイン )’11)에서는 기본목표로 ‘다축형 국토구조 형성의 기초 만들기’를 내걸고 지역 스스로의 선택과 책임에 따라 실시되는 지역 만들기를 중요시하는 것으로 계 획했다. 주목할 것은 ‘국가와 지방의 협력에 의한 비전 작성’이다. 지금까지 대 부분 정책은 국가주도로 지방의 의견을 청취하는 구조를 가지지 않았다. 그러 나 ‘전국총합개발계획’으로부터 국가에 의한 전국계획과 국가와 都道府県 등으 로 연대·협력하여 책정하는 광역지방계획을 의미하는 ‘국토형성계획’으로 전환 하여 계획에 대한 다양한 주체(지방공공단체, 주민)를 참여시키는 시스템을 도 입했다는 점이다. 지방공공단체의 주체적인 노력을 존중하면서 국가가 본래 다 해야 할 역할을 고려하여 그 책임을 다하는 새로운 국토조성의 전환이 시작됐 던 것이다. 11) 일본의 國土總合開發法(현재는 국토형성계획법)에 근거한 2010년부터 2015년까지의 제5차 국토 종합 개발 계획이다. 1998년 3월 31일 내각 회의에서 결정되었다. 명칭을 ‘제5차 전국총합개발계 획’이나 ‘5전총’ 등 과거의 명칭과 같은 방식으로 정하지 않은 것은, 지금까지 국가가 주도하는 개 발 중심의 국토 계획과는 차이가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한 국토총합개 발법이 국토형성계획법으로 명칭을 변경하는 등 국토 계획 행정이 전환하는 흐름의 효시가 되었 다. 부제로는 ‘지역의 자립의 촉진과 아름다운 국토의 창조’를 채택하였다. 240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큰 전환기가 된 또 하나의 계기는 일본에서 NPO12)라고 하는 개념이 정착하 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예전에는 행정과 기업 중 어느 쪽도 아닌 시민조직은, 자금력이나 기술력, 활동의 계속성 등이 미약하여 마치즈쿠리에 대한 주체가 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주류였다. 그러나 그러한 고정관념이 70~80년대에 일어난 시민참가의 성공에 의해 조금씩 변화되었고 또한 외국의 NPO단체의 영향 등으로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한층 더 마치즈쿠 리 운동의 네트워크화가 그 움직임에 박차를 가했고 서로의 정보·노하우 교환 이나 인재 교류에 의해 독립한 활동 주체로서의 지위를 확립해 나갔던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을 상징하고 있는 활동이 ‘세타가타(世田谷)마치즈쿠리센터’나 그랜드 워크(Ground work)13)의 일본에서의 전개, 또 시가켄(滋賀県) 나가하마 (長浜)에서의 ‘마치즈쿠리회사 쿠로카베(黒壁)’이며 마치즈쿠리에 대해 독립적 주체적 활동을 실시하고 있다. 특히 그랜드 워크 발상지인 영국과의 네트워크 및 일본에서의 각 활동의 네트워크를 살려, 활동 노하우나 자금, 인재 등의 면 에서 서포트하는 체제를 쌓아갔다. 또 네트워크의 관점에서는 일본 각지에서 전개되고 있는 NPO 네트워크가 향후 더욱 중요성을 가질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네트워크는 다양한 조직이 네트워크 하고 있기 때문에 타업종 교류와 같이 새로운 활동이 태어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마치즈쿠리 활동과 환경보 호 활동, 교육 활동, 문화 활동 등 필요에 따라 제휴하여 그때그때의 테마로 만들어 가는 네트워크인 것이다. 또한 네트워크는 새로운 활동의 창조뿐만 아 니라 노하우나 자금 등에서 각 활동 조직의 서포트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 에 시민 활동으로서의 활동의 계속성도 높아진다. 3.2 공동운영에 의한 마치즈쿠리 12) NPO(Non profit Organization 혹은 Not-for profit Organization의 약칭): 特定非営利活動法人, 特 定非営利活動促進法에 따라 특정비영리활동을 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하여, 동 법에 따라 설립 된 법인. 2004년 15000개를 넘는 NPO법인이 여러 가지 활동을 하고 있지만 그 중 3분의 1은 마 치즈쿠리에 관한 NPO단체이다. 13) 그랜드 워크(Groundwork): 새로운 지역발전을 위한 기반조성, 지역으로부터의 실천행동을 의미 하며, 지역을 구성하는 주민 행정 기업의 3자가 파트너십을 형성하여, 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 인 자연환경이나 지역사회를 정비·개선해 나가는 활동. 1980년대 초에 영국의 농촌사회의 쇠퇴를 배경으로 環境省에 의해 설립된 조직이며, 주민·기업·행정이 파트너십을 갖고 지역환경의 개선을 통해서 경제 및 사회의 재생을 도모하여 지속가능한 지역사회를 구축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이 목적 아래 각 지역에 실천단체(grandwork trast)가 설립되어, 전문성을 갖춘 스텝과 함께 지역의 재생과 활성화를 향해 파트너십 형의 프로젝트를 전개하고 있다.기타 National trust(국가유산을 대상)이나 civic trust(지역유산을 대상)이 있지만, 대부분 역사적 유산이나 아름다운 환경이 주된 대상이며, Groundwork는 악화된 환경의 복구, 개선, 재생이 활동의 중심. 일본에서는 1990년대에 시즈오카켄(静岡県) 미시마시(三島市)나 시가켄(滋賀県) 고라쵸(甲良町), 후쿠오카켄(福岡県) 후쿠 오카시(福岡市)등에서 주민의 봉사활동으로써 영국을 모방한 파트너십 형으로 지역환경개선활동이 시작되었다. www.groundwork.or.jp 마치즈쿠리(まちづくり)와 일본 사회구조의 관계변화 연구 ·································· 金 漢 洙…241 현재 ‘마치’에 사는 사람들을 둘러싸는 사회상황은 경제의 정체, 인구의 감 소·저출산, 고령화 사회의 진전, 핵가족화 및 종래의 지역사회 붕괴, 정보화 사 회의 진전, 중대범죄의 증가, 지구규모의 환경문제 등 복잡하고 다양화되어 있 고, 마치즈쿠리에 있어서는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 나갈 수 있 을 것인가가 중요하고 긴급한 과제라고 말할 수 있다. 최근의 행정조사결과14)에서 알 수 있듯이 국민이 감각적으로 소중하다고 보 고 있는 관점은 고도성장에 따른 도시의 발전시 도입하려고 노력해 왔던 여러 문제 이외에 ‘쾌적환경’도입시 검토되지 않았던 ‘사람의 활력·개성’에 대한 관 점이 중요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또한 대도시의 경제자원이나 인적자원의 집중 적인 가속에 의한 지방도시의 쇠퇴나 도시구조의 변화에 의한 시가지 중심부 의 空洞化가 진행되는 측면도 있어서, ‘마치’ 그 자체의 ‘활력·개성15)’에 대해서 도 관심에 넣어야 할 것이다. 즉 지금까지 마치즈쿠리에 있어서 간과되었던 ‘사람이나 마치의 활력·개성’의 관점을 담은 토대위에서 ‘쾌적한 마치란 어떠한 마치인가’라는 것을 생각하고 마치즈쿠리를 실행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오사카(大阪)대학의 사와키 마사노리(澤木 昌典)교수는 마치즈쿠리에 대해서 지역에서 주민에 의한 자율적(자립적)이며 계속적인 환경개선(문리적 및 사회 적 환경도 포함)에 관한 운동16)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정의에 대한 설 명으로 왜 ‘주민’이 주체인가. 그것은 마치즈쿠리(まち가 좋아지는 것)의 성과에 대한 가장 큰 수익자(수익자)는 주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왜 ‘자율적’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마치즈쿠리는 취미나 사리사욕(에고)에 의한 것이 아니고(=자 기책임이 있음) 지역의 공익을 목표로 하는 활동이며, 이것을 위해 스스로의 손으로 지역의 공익을 향해 문제해결하는 시스템이 필요하고, 조직으로서 자율 적으로 실행하고 있으면 행정과 대등한 대화나 협동이 가능하게 되기 때문이 라고 말하고 있다. 일본 중앙정부는 앞에서도 밝혔지만 제5차 전국총합개발계획이 ‘21세기의 국 토의 그랜드 디자인’을 작성하여 도시계획의 방향을 크게 전환시켰는데 기본이 념에 다음 5가지의 지방재생원칙을 세우고 있다17). ① 보완성의 원칙: 지역의 실정을 가장 잘 아는 주민, NPO, 기업 등이 중심 이 되어 지방공공단체와의 연대 아래서 입안된 실현성이 높은 효과적인 계획 14) 『平成18年度環境影響評価技術手法調査業務 報告書』, 環境省, 2007. 3. 15) 『「地域づくりに対する期待度に関する調査」結果』, 国土交通省, 2007. 특히 중요하다고 기대되고 있는 분야로서 안전, 삶, 활력, 환경의 4가지 분야를 설정하여 설문지 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이 중 “활력”에 관한 구체적인 항목으로는 도시/지역의 재생, 역사나 지역특성을 살린 지역 만들기, 지역산업의 활성화, 매력적인 경관형성, 선진적인 지역 만들기에 대한 지원 등이 열거되어 있다. 16) http://www.city.sakai.osaka.jp/naka/tayori041030.html 17) 『地方再生戦略』,地域活性化統合本部会合, 2008. 1. 改定 242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에 대해서 중앙정부가 지원한다. ② 자립의 원칙: 지역의 자원이나 지혜를 살려서 경제적으로 또한 사회적으 로 자립을 향해 노력하는 계획을 집중적으로 지원한다. ③ 공생의 원칙: 지방과 도시가 사람․물건․돈의 교류 및 연대를 통해서 서로 도와주고 공생을 지향하는 조직을 우선적으로 지원한다. ④ 종합성의 원칙: 중앙정부의 지원은 관계 부서의 벽을 배제하여 지역의 창의에 따른 계획을 종합적으로 지원한다. ⑤ 투명성의 원칙: 지원의 대상이 되는 계획의 책정 지원의 계속 및 계획종 료시 평가에 대해서는 제3자의 평가를 넣어 객관적인 기준에 근거해서 실시한 다. 이와 같은 원칙에 입각하여 구체적으로는 TMO18)에 의한 중심시가지활성화 를 위한 제도19) 등을 마련했다. 인구 과소화로 중심시가지 空洞化 현상으로 중심시가지의 활성화를 위해 행정과 민간사업자가 협력하여 ‘마치즈쿠리주식회 사’ 등 제3의 운영조직을 출범시켜 스스로가 만든 발전계획(TMO구상, 중소소 매상업, 고도화, 사업구상 등)에 대해서 심사를 거쳐 채용되면 관할관청의 부 서를 넘어 종합적으로 지원을 하는 시스템이다. TMO는 구체적으로는 영업관 리업무나 판매촉진업무 그리고 상가의 도로포장과 시설정비사업을 포함한 환 경관리업무 등을 추진하게 된다. 또한 주목할 내용으로서는 이 사업에 대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지원이 이뤄지지만 그 중에 ‘상가 활성화 조언자 파견사 업’ ‘중심시가지 활성화 타운매니저 파견사업’ ‘타운매니저 양성연수’ 등의 지원 이 있다. 이 지원책으로 지금까지 해 왔던 행정 및 민간에서의 마치즈쿠리운동 을 조사해 보면 성공하고 있는 지역에는 마치즈쿠리운동을 이끌어갔던 리더가 큰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마치즈쿠리의 분야는 市町村 행정의 권한위양의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한 조 직이나 단체이다. 오늘날 지방분권추진위원회의 심의 의결을 통해 마치즈쿠리 의 행정분야에서도 지방분권이 촉진되어 분권형 행정시스템을 통한 지역주민 및 지방공공단체의 자기결정·자기책임이 기본으로 되어 있다. 행정의 통폐합으 18) TMO: Town Management Organization, 상가의 조합, 행정, 마치즈쿠리회사, 기타 중심시가지에 관한 여러 가지 조직이 조정의 장이 되어, 중심시가지의 활성화, 유지를 위한 활동을 마치즈쿠리 의 관점에서 종합적으로 기획, 조정하고, 그 실현을 도모하기 위한 기관. 필요에 따라서 TMO자체 도 사업을 실시하는 주체가 된다. 영국과 미국에서 보급되고 있으며, 비영리법인인 CDC(지역개발 회사) 등에 의해 운영되는 경우가 많다. 또한 TMO의 지원조직으로서 타운센터·매니지먼트협회 (ATCM, 영국), 국제타운협회(IDA, 미국) 등을 비롯한 NPO 등이 있고, 계속적·조직적인 운동이 추진되고 있다. 19) 마치즈쿠리 三法(中心市街地活性化法, 大規模小売店舗立地法, 都市計画法) 1998년 제정. 마치즈쿠리(まちづくり)와 일본 사회구조의 관계변화 연구 ·································· 金 漢 洙…243 로 인한 국가 조직은 이미 대폭적인 감축을 시작했다. 지역주민과 주민에 가까 운 지방공공단체가 자율적인(자기결정·자기책임) 마치즈쿠리를 실시해 나가는 시대이다. 주민과 다양한 주체(행정, 민간사업자 등)의 협동으로 여러 가지 개 성적인 지역자원이나 경관을 살린 지역의 매력을 재발견하고 또한 새롭게 창 출해서 지역간 경쟁을 촉진할 필요가 있다. 마치즈쿠리에 성공하면 지역은 활 성화하고 지속가능성이 높지만 한편 노력이 늦어지면 재생 불가능한 지역이 출현할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일본의 마치즈쿠리운동은 사회구조의 변화에 따라 전통적인 농촌형 지 역사회에서 탈피하여 도시형 지역사회로의 이행을 통해 새로운 도시형 세계로 의 변혁을 추구하려고 하고 있는 있다. 그리고 분권형 지방의 시대(행정주도 형)에서 자립형 지역의 시대(시민주도형)로의 전환의 추세라고 볼수 있다. 이 러한 마치즈쿠리운동이 전환기를 맞이한 배경에 대해서 모리 타케오(森 巌夫) 나 마츠노 히로시(松野 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20), ① 도시화: 지방도시에서 종래의 인구적 요소, 특히 젊은층의 도시로의 유출 에 의한 도시화(양적 도시화)에서 지방도시 사회의 사회구조·생활구조 자체가 도시화(질적 도시화)로 변화하고, 지역사회의 문화·라이프 스타일이 도시적 세 계로 접근하게 되었다. ② 산업화: 산업기반의 충실·산업구조의 고도화(기술혁신에 의한 산업기술의 고도화)에 의한 경제적 풍요로움이 실현되었다. ③ 정보화: 지역사회내·지역사회간의 정보 네트워크가 확대되어 각종 정보의 교류기회가 실현되었다. ④ 과학화: 과학기술·정보기술의 진전에 의해 지역과 지역의 벽이 없어지고, 지역간 교류·지역간 네트워크가 추진되고 여러 지역의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가치를 공유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⑤ 고학력화: 대학 진학자수의 증가에 의해 고도의 전문교육을 받은 사람들 이 많아졌다. ⑥ 고령화: 지방도시 중에서도 농촌지역의 고령자가 증가하고 지역의 인구 구성에 불균형이 생겼을 뿐만 아니라 사회구조·산업구조·생활구조에 여러 가 지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런 변화의 배경요인은 오늘날 마치즈쿠리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공통적 인 과제로서 설정되어 있는 것과 동시에 과제 대응을 통해서 마치즈쿠리운동 의 질적 기반이 전환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즉 권리를 우선시하는 요구형인 20) (社)日本青年会議所 監修,『講座 まちづくり開発入門』, ぎょうせい, 1992. pp.36-36. 244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주민운동’에서 권리·의무 이행을 함께하는 참가형인 ‘시민운동’으로 전환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민간기업과 경영은 불가분한 관계이지만, 오늘날에는 비영리조직에도 경영기 법을 도입하는 경향이 늘고 있는 추세이다. 비영리조직도 특별한 존재가 아니 고 일반 민간기업에 가까워지고 있다. 최근 일본에서도 대학의 파탄이나 NPO 의 해산 등이 늘고 있다. 지금까지 경영기법이나 기업회계 등의 민간기업경영 (매니지먼트)과는 거리가 멀었던 비영리조직·비영리부분에서도 경영이 우수하 지 않으면 조직의 목표 실현이 곤란하다는 견해가 형성되어 왔다. 그래서 비영 리조직·비영리부분에서도 경영(매니지먼트)을 통한 효율성에 역점을 두게 되었 다. 결국 지역도 마찬가지로 경영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다. 지역경영론을 전공 하는 도모나리 신이치(友成 眞一)는 경영을 ‘가지고 있는 자원을 최대한 활용 하여 목적달성을 극대화하는 행위’라고 정의하고 위에서 말한 官, 學, 地域은 지금까지 사용하지 않았던 자원을 활용해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즉 이제 행정과 학교, 기업, 지역주민이 하나가 되어 상생하지 않으면 지역 활성 화는 성공할 수 없다는 인식을 갖게 된 것이다. 결국 마치즈쿠리는 사람(인재) 만들기라는 말도 있듯이 외부에서의 지원이 아니고 필요성을 인식한 지역 주민의 자발적인 활동에 따라서 마치즈쿠리의 성공 여부는 결정된다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 중앙정부의 출 장소적인 성격을 띠고 있던 지방자치단체는 지역주민의 대표기관으로서 성격 을 강하게 갖게 되었고, 지역주민도 행정에게 일방적으로 맡겨놓기만 하는 것 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지역의 계획과 운영에 참여하는 시대가 되었다. 지금은 중앙정부나 지방자치단체를 포함한 지역의 여러 단체가 개별의 테마를 가지고 여러 가지 형태로 지역에 존재하면서 서로 연대하여 특유의 구성단체를 형성 해서 전체로서 다양한 과제를 대상으로 ‘지역운영’을 해 나가는 공동운영의 단 계라고 볼 수 있다. 4. 結論 마치즈쿠리 운동의 분야는 市町村이나 행정이 주민에게 권한을 넘겨줘야 발 전할 가능성이 높은 영역이다. 본고에서 고찰해본 것과 같이 과거 행정주도로 마치즈쿠리를 실시하면 지속적이지 못하며 일회성에 그치고 환경문제 공해문 제 등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치즈쿠리(まちづくり)와 일본 사회구조의 관계변화 연구 ·································· 金 漢 洙…245 전후 일본의 마치즈쿠리는 국가의 체계화된 여러 시책 아래서 官·행정주도 로 추진되어 왔다. 그래서 국가·都道府県의 과도한 개입과 관여로 省廳·都道府 県의 담당부서 조직이 종적구조로 되어 있고 주민에 가까운 지방공공단체는 결정권이 거의 없어 개성을 살린 다양한 마치즈쿠리를 하기에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주민이 주도한 마치즈쿠리는 행정 주도하에서 발생 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지만 주민의 책임도 커졌다. 즉 오늘날 중앙정부는 지방정책을 수립할 때 지방분권추진위원회와 긴밀하게 협조하고 있고, 마치즈 쿠리의 행정분야에서도 지방분권이 촉진되어 분권형 행정 시스템을 통한 지역 주민 및 지방공공단체의 자기결정·자기책임이 기본이 되게 되었다. 결국 중앙 정부의 행정 주도로 추진된 도시계획에서 벗어나, 이제는 정부와 주민의 관계 가 관리, 대립, 의존의 관계가 아니라 각자의 입장에서 지역에 대한 마치즈쿠 리를 함께 계획하여 운영해 나가는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 마치즈쿠리 운동을 하고 있는 지역주민들은 마치즈쿠리가 사람에 의해 성공 여부가 결정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과거처럼 官의 지원에만 의존하지 않고, 필요성을 인식한 지역 주민들의 자발적인 활동에 따라 官과 民이 협력해 야 치즈쿠리운동이 성공한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마치즈쿠리 운동의 현재는 지역주민과 주민에 가까운 지방공공단체가 자율적인 마치즈쿠리를 실시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즉 행정에서는 지역인재 육성 프로그램을 지역 지도자 와 같이 협의하며 만들어 가고 주민과 다양한 주체들의 협력으로 여러 가지 개성적인 지역자원이나 경관을 살린 지역의 매력을 재발견하고 또한 새롭게 창출해서 지역간 경쟁을 촉진하는 단계에 왔다고 볼 수 있다. 246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参考文献】 ․ 延藤安弘(2001),『「まち育て」を育む』,東京大学出版会. ․ 佐藤 滋 編(1999.), 『まちづくりの科学』, 鹿島出版会. ․ 山崎丈夫(2000), 『まちづくり政策論入門』,自治体研究社. ․ 環境省(2007.3.), 『平成18年度環境影響評価技術手法調査業務報告書』. ․ 吉野正治(1997), 『市民のためのまちづくり入門』, 学芸出版. ․ 延藤安弘(2001),『「まち育て」を育む』, 東京大学出版会. ․ 佐藤 滋 編(1999),『まちづくりの科学』,鹿島出版会. ․ 森田三郞(1990),『祭りの文化人類學』, 世界思想社. ․ 吉野正治(1997),『市民のためのまちづくり入門』, 学芸出版. ․ 吉田民雄(2005),『都市行政の新しい設計』, 中央経済社, ․ 野正治(1995),『市民のためのまちづくり入門』, 学芸出版社. ․ 国土交通省(2007),『「地域づくりに対する期待度に関する調査」結果』. ․ 日本建築学会編(2004),『まちづくり教科書 第1卷 まちづくりの方法』, 丸善. 마치즈쿠리(まちづくり)와 일본 사회구조의 관계변화 연구 ·································· 金 漢 洙…247 要 旨 本稿では都市空間としてのハードウェア的な‘街’と、地域社会としてのソフトウェア的な‘町’をあら わすまちづくりを分析し、まちづくりに対する行政と住民との関係がどのように変化してきたから考察し てみた。 日本は戦後の政府により推進された都市計画では、環境問題は全く考慮されることがなく開発 中心の政策を施行されてきた。その結果、開発中心の政策に対して住民は反対運動や居住環境 が脅威にさらされていることに対する抵抗運動としてまちづくり運動は誕生することとなった。その後、 このような住民運動が各地の公害反対運動などとも連携し、住民運動の成長期を向かえることと なった。 行政主導による急速な開発は都市の個性の喪失やコミュニティーの崩壊などの問題はそのまま放 置されることとなった。しかしながら社会の流れが地域開発よりも住民参加を要求するようになり、行政 は人材育成の側面から支援を行いつつ住民が主体となるまちづくり運動へと発展することとなった。 結局、日本のまちづくり運動は社会構造の変化にともない伝統的な農村型地域社会を脱皮し、 都市型地域社会へと変化をおこし、更には新しい都市型世界のまちづくりの変革を求めている。そ して分権型の地方の時代(行政主導型)から自立型の地域の時代(市民主導型)へと転換をなしつ つある。また、行政では地域の人材を育成するプログラムを地域の指導者たちと協議を行いつつ 進めるなど、多様な主体との協力により様々な個性的な地域資源や景観を生かした地域の魅力を 再開発し、または新しく創出することにより、地域間の競争を促進する段階へと本格的に入ってきた のである。 キーワード;まちづくり, まち, 都市計劃, 町並み, NPO, TMO, 地域コミュニティー 투 고 : 2008. 8. 31 1차 심사 : 2008. 9. 12 2차 심사 : 2008. 9. 27 分有される植民暴力の記憶 -日本人ジャーナリストによる台湾先住民族の民族誌的記述- 中村 平* (e-mail : [email protected]) 目 次 1. 2. 3. 4. 問題提起 日本人が台湾先住民族の記憶を聞く、記憶と向き合うということ 日本人ジャーナリストにより分有される植民暴力の記憶 終わりに 1. 問題提起 いわゆる「日本人」である私は、人類学的フィールドワークを通して、タイヤルを中心と した台湾先住民族に出会い、日本による植民統治経験を聞き書きしてきた。かれらの私 日本人への語りかけに、どう応えていけばよいのかという問題意識が私を捉えて離さない。 そしてこの私自身の問題は、現在日本人が台湾先住民族から和解が呼びかけられている 状況において思考されるべきであろう。 台湾先住民族自身によって自己の歴史を模索し取り戻す試みが、1990年代から、シン ポジウムや民族議会設置をめぐる動き等の公的な場において活性化している1)。そこでは、 * 漢陽大学校 国際文化大学日本言語文化学科 専任講師。 日本学、文化人類学。 1) 例えば、民族の歴史を探求する以下のようなシンポジウムを参照。「エスニックグループ相互関係及びタイヤル族 文化変遷」学術シンポジウム(2000年7月花蓮、内容は日本の「タロコ蕃討伐」について)、「民族古老馬 紹 莫那(マサオ モナ)をしのぶ:廖守臣先生記念」学術シンポジウム(2000年9月花蓮)、「国際学術 シンポ:平埔エスニックグループと台湾社会」(2000年10月台北)、「布農族歴史文化」シンポジウム (2000年11月台北)、「タイヤル族エスニックグループ意識の形成とアイデンティティ、分裂」学術シンポジウム (2002年11月台北)。また2004年には、公共電視台ドラマ「風の中の緋桜:霧社事件(風中緋桜:霧社事 件)」(後援:文化建設委員会)が公開された。 250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日本人が呼びかけられてもいる。例えばシャッ ナブ(Siyac Nabu)口述 ワリス ウカ ン(Walis Ukan)訳注の、「非人の境遇――セデック民族が霧社事件を見る」2)をみ よう。これは2000年10月21日台北にて行われた、「霧社事件七十周年国際学術シンポ ジウム」(台湾キリスト長老教会総会主催)で発表されたものである。 シャッ ナブ氏はいわゆる霧社「蜂起蕃」のカッツク集落出身であり、1930年の霧社事 件当時2歳で、母親の背中に負ぶわれて難を逃れた。セデック民族トゥキダヤ群(いわゆ る「蜂起蕃」はこのうちの一部)の立場から、「台湾原住民族の『和解の祭』を行お う」という呼びかけをしている。霧社事件、第二霧社事件でお互いに殺しあったセデック民 族のトゥキダヤ群、トダ群、タロコ群の3群だけでなく、その周辺のブルナワン(親愛)集 落、タイヤル民族、ブヌン民族との間で和解の祭を行いたい。日本の代表と政府の代表 を招き、お互いの肩を抱き合って、一つの手で共に一杯の酒を持ち、一つの心で酒を飲 む。そうした彼我の分ない「和解の祭」の儀式を行おうと(同上:68)。 日本人はこの寛恕の呼びかけに、どう応えることができるのだろう。この和解の儀式に参 加する際には、本や映像や知人の話から断片的に聞きかじってきた日本植民史を想起せ ざるを得ないだろう。そして、自らが知りえない過去の事態を想像しようと必死になるのではな いだろうか。日本人は、忘却してしまった「自らの」歴史に分け入っていくことによって、あ るいは先住民と付き合うことによって図らずもその歴史と記憶に圧倒され、それを分有してしま うことの中で、台湾先住民族の呼びかけにかろうじて応えていけるのではないか3)。 台湾の植民地経験 戦争経験を語る先住民族の声に対して、日本政府を始めマジョリ ティ日本人は基本的に忘却し、それらをないものとしてきた。そこには、敗戦がトラウマとな り、戦後の経済成長を目指して新しい日本でやっていくという意識や、植民地と戦争の経 験を「悪夢」として葬り去ってしまおうとする心理があったであろう。圧倒的忘却でないところ では、植民統治をおしすすめてきた側から、統治の成功が語られてきた。また現在に至るま で、日本植民主義の色彩を濃く残した形で、つまり自らの既存の主体を慰撫する形でナル システィックに先住民族の声に向きあう動きが存在する。しかしそれと同時に、植民統治の 忘却や、成功の物語に抗する歴史記述は日本の言論界にあって続けられてきた。本稿は その中でも、植民暴力(colonial violence)の記憶を分有してしまい、自らの既存の主 体が動揺する様を描き、同時に現前させる「日本人」ジャーナリストのテクストを中心に台 湾先住民族と日本双方の植民地 戦争経験を振り返る。 2) セデック語の題は、Niqan ka dheran uka ka Sediq: Pccebu Sediq ka dTanah Tunux、中国語訳は、 「非人的境遇――賽徳克族看霧社事件」である。セデック民族は、2008年4月に中華民国政府により先住民 族としての認定を受けた。 3) 当事者すらも表象不可能な暴力の経験と記憶は、非当事者により理解すること(共有すること)は不可能である。 そうした経験と記憶は、ただ部分的に分かち持たれるという意味で「分有」されるのみである。中村(2007)では 岡真理(2000a)に依拠しつつ、暴力の記憶の分有を植民統治の影響の克服へ向けて主題化した。 分有される植民暴力の記憶 ········································································································ 中村 平…251 台湾先住民族と出会い「日本人」を名指され、日本の所業に思いをはせ、日本人と は何か、台湾先住民族とは何かを同時に思考する著作が、日本側の言論においても連綿 と続いてきている。そうした著作と著者は、台湾先住民族と日本が植民主義的でない形で つながる可能性を追い求めてきた。それらは、暴力に抑圧された声に対して「無能のままに 応答しようとする」(岡 2000a)困難な試みであり、植民暴力の記憶を分有するものである。 日本において1990年代から歴史修正主義的な動きが台頭する現在、植民の歴史の忘 却から歴史の積極的な書き換えという事態に至っている背景があり(高橋 2001)、本稿 の主張はそれに介入する試みとなる。同時に、「日本人は~すべき」という倫理的命題を 啓蒙的観念的に立ち上げずに、植民統治と戦争に対する応答責任を記述と語りの遂行的 プロセスに設定するものとして、この問題を語る。以下で見るように、応答責任は具体的な 顔を持った人々との交流にあって取られるものである。 2. 日本人が台湾先住民族の記憶を聞く、 記憶と向き合うということ 本稿は日本人ジャーナリストによる台湾先住民族の記憶の聞き書きを読んでいくが、それ らは人類学的な意味において豊かな民族誌的記述(ethnographic writing)となってい る。ここでは「民族誌」という言葉を、J.クリフォード(2002)にならい、自己と他者が 様々な文化的差異や感情を持って出会う場を詳細に記述するものという意味で使用する。 観察し記述する者の自我の変容、日本人性の変容という点から台湾先住民族と日本人 の関わりについての記述を考えよう。確固として見えた自己(もしくは日本人)の中に、他者 の存在をどれだけ認めるようになったか、あるいは逆に、戦前 戦中と同じ「日本人」として の「一視同仁」を標榜しながら、戦後いかに旧植民地の「日本人」を忘却しようとしてきた のか。野田正彰『戦争と罪責』(1998)は、この点に示唆的である。 1944年生まれの野田正彰は精神科医を経て、比較文化精神医学を専攻する大学教員 である。戦中派軍人と面接し、また彼らが残した文章の分析を通して、日本人の戦争 (体験)との向き合いかた、もしくはその精神構造を検討している。日本軍と日本社会 の、自他の悲痛に対し無感覚なさま(同上:207)、あるいは傷つく心(同上:213,31 6)の欠如を指摘する。戦後世代が、戦中派の父親たちが明確に言語化できなかった戦 争体験に真摯に向かいきれなかった事態を、野田は、戦後世代に、父親の世代の経験を 「聞きとる力」もしくは「聞く力」が欠如していたためとしている。他者や「相手の顔」を 生き生きと「具体的に、詳細に」知る(同上:356)ことによって、他者にすこしだけ感情 移入でき、自分の強張った精神に亀裂を入れることができるという。 252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他者を知る、他者の経験を聞きとる野田の指摘の重要性は、日本植民主義がもたらし た以下のような認識からも明らかとなろう。宮本延人他八名による「高砂族の統治をめぐる 座談会」(1954年)には、台湾の植民地統治を担った特権的日本人の典型的な考え 方が示されていると考えられる。元「理蕃課長」と人類学者が、日本の理蕃政策を他西 洋諸国の植民地政策と比較し積極的評価を加えている4)。台北帝大土俗人種学教室に 学んだ馬淵東一。「兎に角、よくいえば親切、悪くいえばおせっかいに過ぎるというのが台 湾の理蕃政策についての感想」であり、政策は初等教育には熱心で、就学率アップのた めにたいへんな努力を惜しまなかった。「うるさ過ぎても暖かみが」あり、特に欧米の植民 統治と比較すると「成績がよかった方だ」(同上:190)。鈴木秀夫(元総督府理蕃 課長)は、「私は台湾の高砂族は生きた天然記念物だという気がする。しかし、いくら愛 すべき風俗習慣をもっているからといって、無智のままにそれをおいておくわけにはいかない。 生活も高め教育も進めなければならない」(同上:188)。 終戦の9年後に行われた座談会は、こうした日本の植民統治への肯定で終っている。こ こにおいて評価されるのは日本的「近代化」の成績を気にする思考であり、野田の言うよ うな、植民暴力がもたらした悲しみや痛みを考えていこうとする姿勢は見られない。植民暴力 はここにおいて既に忘却され始めている5)。 こうした植民世代の継続する認識の一方で、日本政府は1956年、『経済白書』で 「もはや戦後ではない」と宣言し、朝鮮戦争の「特需」などの背景により高度経済成長 に突き進んでいった。資本主義的「近代化」にまい進することが、日本人に植民の歴史 を忘却する要因であったといえる(高橋 1999)。 しかし同時に、漢族系台湾人による日本に対する戦争補償責任の追及は、戦後ずっと 鋭くなされてきた。台湾人によるものとしては林景明(1970; 1973; 1997)、高山輝男 もとい さ え さ と (郭幸裕)『「天皇の赤子」たちは、いま』(1985)、基佐江里編『旧台湾出身日 本兵秘録 聞け!血涙の叫び』(1986)、廖木全「生死を共にした私たちへの差別」 (1992)、李憲章「戦後の悲劇を他人事のように眺めてきた日本国の責任は、どこまでも 4) 参加者8名は、平沢亀一郎(元総督府理蕃課技師)、井上伊之助(元山地伝道者、医師)、佐山融吉 (元蕃族調査会補助委員)、瀬川孝吉(元総督府理蕃課のちに同農務課勤務)、鈴木秀夫、横尾広輔 (元総督府理蕃課視学官)、馬淵東一、宮本延人(元台北帝大土俗人種学教室講師)。各発言につい ては、戴国煇(1981)による詳細な批判を参照。 5) ここで付記しておきたいのが、土橋和典(1928年台湾生まれ)の『忠烈抜群 台湾 高砂義勇兵の奮戦』 (1994)や、門脇朝秀(1914年朝鮮生まれ)と彼の主催する「あけぼの会」による『台湾高砂義勇隊:そ の心には今もなお日本が、、、』(1994)に代表されるような著作である。おそらく広義に日本における戦友会 関連出版物、戦記ものに連なるこの著作は、台湾先住民族が日本のためによく戦ってくれた、尽くしてくれたという トーンに基本的に彩られるものである。植民者の心性に強く色づけられているこうした著作においては、暴力の記 憶の分有がなされるというよりは、今現在のために犠牲になった人々の追悼に力点がある。「日本人」の既存の 主体はそこで安定化に向かっている。またこれらは、後述の戴国煇による批判の対象となろう。 分有される植民暴力の記憶 ········································································································ 中村 平…253 重い」(1995)、簡茂松『俺は日本兵』(浜崎 2000)、林水木『戦犯に囚われた 植民地兵の叫び』がある。どれも、力強く直截な言葉による日本の戦争責任の追究と指 弾の書である。日本政府と主流社会の無関心な対応は、漢族系台湾人のこうした厳しい 糾弾を引き起こしてきた。 35年の植民統治の時間を経た後に台湾先住民族によって引き起こされた大きな事件 が、1930年の霧社事件である。統治側の言説が出版される一方、霧社事件の生き残り のアウイヘッパハ口述(許介鱗 林光明解説)の『証言霧社事件――台湾山地人の 抗日蜂起』(1985)、同じく生き残りのピホワリス(高永清)『霧社緋桜の狂い咲き― ―虐殺事件生き残りの証言』(1988)が事件を先住民族側から描いている6)。 戦争補償についての日本人による応答としては、1975年結成の「台湾人元日本兵の補 償問題を考える会」による裁判支援があった7)。1977年の地裁提訴から、1992年の最高 裁による補償請求棄却までの経緯がある(木村 2001、台湾人元日本兵士の補償問題 を考える会編 1993)。また漢族系台湾人の戦争補償責任の追及は、鈴木明(1974ab; 1977)、福永美知子『心果つるまで:日本に戦犯にされた四人の台湾のお友だち』 (2002[1995])などの著作で取り上げられてきた。 こうした中、1970年代になされた戴国煇の日本人に対する批判は、まだその有効性を 持っている。戴は1931年「中国台湾省」生まれで(祖籍は広東省梅県、著者によ る)、1955年から日本に住み大学教員などを歴任した。なぜ武力制圧によって鎮圧された 台湾先住民族が高砂義勇隊として日本のために戦い、戦わざるをえず、いまなお日本精 神を語り、日本人の心のオアシスとなっている(されている)のか。それを徹底的に思考し ない限り、日本は台湾先住民に対する日本の近代を直視しえたことにならないというのだ (戴 1979)。霧社蜂起事件研究とは過去の研究ではなく今日の問題を研究することであ り、日本人の「義務」であり、「高山族」に同情してかれらを「救う」ことよりも、日本人 「自らを救う」ことにつながるほうが緊急課題であるとした(戴 1981、初出1973)。 1935年台湾で生まれ、1946年に日本に引揚げた加藤邦彦の『一視同仁の果て台湾 人元軍属の境遇』(1979)は、台湾人元軍属の戦争経験、高砂族の志願兵、霧社 事件、皇民化政策、日本で働いた台湾人少年工、日本に帰化した軍属、靖国神社の 対応を取り上げる。1978年7月2日に第二のスニヨン(中村輝夫)事件が発生した。苗栗 出身の曹輝楽さんが終戦後もフィリピンに住み続け、35年ぶりに台湾に帰国したという事件 である。しかしこの事件は日本では報道されず、まったく注目されない(同上:80-3)。 6) 本稿は、植民側の日本人がいかに被植民側の経験を想像してきたかに焦点を当てるため、これらの分析は別の 機会に行いたい。また「台湾人」民間研究者による霧社近辺の日本植民史に関する著作としては、鄧相揚 (2000a, b; 2001)を参照。 7) 同会は、1974年にインドネシアのモロタイ島で台湾先住民族アミの「中村輝夫」(アミ名 スニヨン)日本兵 (陸軍一等兵)が「発見」され、その際の日本政府の対応をめぐって結成された。 254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エピローグにおいては、「タイヤール族」7名(新竹県五峰郷桃山村村長ら)の靖国神 社訪問をとりあげる。「戦死した夫や兄弟の魂を返してほしい」という切実な訴えは、神社 の職員にまじめに取り上げてもらえず、追い払われた8)。 林えいだいは1933年福岡県生まれのノンフィクション作家で、精力的に霧社事件と高砂 義勇隊の真相を明らかにしようとしている。BC級戦犯、松代大本営、朝鮮人強制連行、 オランダ人強制収容所などに関しての著作があり、1994年から高砂義勇隊の取材を始める (1995: はじめに)。霧社事件、高砂義勇隊をはじめとして、植民地の生活を伝えるさま ざまな写真を収録した『写真記録台湾植民地統治史:山地原住民と霧社事件 高砂義 勇隊』(1995)を出版した。 『証言台湾高砂義勇隊』(1998)では、第一回から七回までの高砂義勇隊を、12 人の隊員の証言から浮かび上がらせている。『台湾の大和魂』(2000)は、二人の高 砂義勇隊員の声が描かれ、隊員の目からみた戦闘状況の詳細な描写を行う。高砂義勇 隊の非情さと冷徹さを語るものはこれまでにほとんどなかったが、ニューギニアで終戦後に高 砂義勇隊員に命乞いをする日本人将校の描写は目を引く(同上:76)。ここでは「大和 魂」と日本人らしさをめぐって、日本人と高砂族の間に逆転状況がおきている。 日本のマスコミ報道は、李光輝氏(スニヨン、中村輝夫)が「発見」されたとき、32 年間という時間の長さに驚きを示したばかりで、彼が何故逃亡兵の烙印を押され、モロタイ 島で生き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かのかの本質を伝えなかった(同上:1)。彼ら老兵たちが 「われわれ日本人」に問いかけていることは何か、その燃えるような瞳に、日本人と政府は しかと応えなければならないのだ(同上:286)、と林は述べる9)。 8) 「厳として存在した歴史的事実は、やがて風化し埋もれて、支配者にとって都合のよい断層を形成するであろう。 断層の中に閉じ込められてしまったうめきは空中撮影によっては探査できない。地下水のように浸み入って、その表 土を洗い流してみて、はじめて露わになる。露わとなった断層の中には累々たる白骨が横たわっていた。私は一 体、一体洗骨改葬するような思いでこの一文を書き始めた」(同上:261)。 9) (元高砂義勇隊員たちは)日本人が来ていることを知ると、山を越えて訪ねてくる。何十年ぶりかで日本人と話せ て懐かしいといって、夜が明けるまで私に向かって戦争体験を語るのだった。/「あなたたちはどうしてそんなに優し いんですか? ほんとに日本に恨みはないのですか?」/と、つい私はたずねてしまう。/「どうしておまえはそん な馬鹿な質問をするんだ。日本に恨みなんか持つわけがないじゃないか。われわれは志願して戦争に行ったんだ。 日本人と同等に扱ってもらったんだ。軍人になることが高砂族の青年の誇りだった」/と彼らの一人は答える。 (中略)「大和魂は台湾にある」/と叫ぶのは、三十年前、天皇に建白書を書いて皇居に飛び込んだ老人 だ。天皇誕生日だったため、精神異常者扱いされて釈放、この事件は報道されなかった。/戦争によって大きな 犠牲を払いながら、日本国から棄てられても、今なお大和魂を叫ぶ台湾人の心とは何なのか。(中略)(彼ら は)内心では日本政府の戦後処理について、激しい怒りを持っているのだ。/一緒に酒を飲む機会があるが、 彼らは酔っ払うと激しい口調で日本政府を批判する。/「日本政府は、俺たちが死ぬのを待っているのか、許せ ない!」/とつい本音が出る。台湾人は、口では日本人は懐かしいといいながら、本心では日本政府のやり方 は許せないという気持は強い。/私が何故台湾人と朝鮮人の皇軍兵士にこだわるのか。その理由は、天皇の軍 隊だった彼らが、日本政府によって利用されたあげく、今日まで棄民され続けているからにほかならない。/彼らは 日本軍人 軍属として戦場に狩り出され、命をかけて戦ってきた。にもかかわらず戦後、サンフランシスコ講和条 約によって、日本国籍ではなくなったということで、日本政府は棄民してきた。確定債務を今に至るまでないがしろ 分有される植民暴力の記憶 ········································································································ 中村 平…255 『台湾秘話霧社の反乱 民衆側の証言』(2002)で、林は霧社事件に切り込んだ。 霧社事件との出会いは、1990年に行った旧満州 関東軍の七三一部隊と特務機関につ いての調査からである。日本統治下の台湾で小学校教員をしていた方の紹介で、下山一 氏(林光明、霧社の日本人警察とタイヤル女性の間に生まれた)やオビン タダオ氏 (花岡二郎の妻、高彩雲)を紹介してもらい、文通を始めた。霧社事件の生存者の話 を聞き、事件の「真相」を「解明」(同上:7)するために訪台する。 17歳でモーナ ルーダオと共に日本人を襲い 、 高砂義勇隊にも赴いたパワンナウイの言 葉。「おまえにいうとくが、この清流では高砂義勇隊と特別志願兵の話は聞けるだろうが、こと 霧社事件に関しては誰も話はしないよ。もう忘れたいんだ。日本人をどれほど恨んでいるか、恨 みの気持ちは百年経っても消えることはなかろうよ。もう絶対に来ないでくれ!」/それを聞くと、 私は頭をがんと打ちすえられたような強い衝撃を受けて、目の前が真っ暗になった。ただ興味を 持って台湾にやってきただけではすまされないので、加害者としての日本人の心を問われていると 思った。(中略)筆談による林光明(下山一)の言葉は以下だ。「台湾に来て霧社事件を 調べる日本人はせっかちで、旅行ついでに霧社にくる人が多いんです。半端な気持なら、私 だって何も話す気にはなりませんよ」(中略)「あなたが本気で取り組むなら、すべてを話しま す。もう私も先が見えているから、日本人のあなたが霧社事件の真実を後世に伝えてください」 /林光明の切ない気持がひしひしと伝わってきた(同上:7-9)。 1932年生まれの作家、早乙女勝元による『台湾からの手紙 霧社事件 サヨンの旅か ら』(1996)は、自らのフィールドワークと史料により霧社事件とサヨンの事件を追ったもの である。早乙女は2002年に東京にオープンした「東京大空襲 戦災資料センター」の館 長を務めている。「南京」「重慶」「ハルビン」「延安」と共に、「母と子でみるシ リーズ」として「過去の日本の侵略の実態を告発」するものとして編まれた著作である。 中村勝「マラカム!高峰の焼畑・狩猟民」(1996、中村2003所収)による問題提起 は、植民(地)主義に関わるテーマを、日本資本主義の発達 浸透とかかわらせて論じる 視角を打ち出している。中村は1944年東京生まれで大学教員を歴任し、1995年に一年強を にしてきた、日本政府の責任が問われている。台湾に対する確定債務とは、日本人が台湾人に対して負っている もので、それを半世紀以上も放っておいたこと自体が、人道上許せないのである。/(中略)私は台湾で取材 する中で、日本政府に対する彼らの怒りが爆発寸前にまできていたことを知っていた。(1996年の交流協会襲撃 の)新聞の記事を読んで、とうとうやったかという思いだった。/「われわれにとって、(弔慰金の換算率である) 百二十倍が問題じゃない。これまで五十年間放置してきた、日本政府の無責任さをいっているんだ。まず政府が 謝罪することじゃないのか」(高聡義さん)。/(中略)日本軍人になることを誇りに思い、今なお大和魂とか日 本精神を説く彼らの前に私は言葉を失った。台湾の中に突然日本が現れてとまどってしまう。まるで過去の日本の 亡霊をみるような気がして、その純粋な気持が哀れにさえ思えてくる。/老兵は消えていくのみであろうか。それで は戦死した台湾人は犬死にになる。せめて戦争犠牲者に償いをするのが、人間としての道ではなかろうか(同 上:4-10、スラッシュは原書での改行を示す)。 256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台湾で調査した。中村の視角は、霧社事件後の河上丈太郎10)と河野密11)(1931)、戦 後の山辺健太郎(1971)、ねず まさし(1970, 1997)、朴慶植(1971)らの日本資 本主義と帝国主義批判を深化させたものと言える。戴国煇の問題提起に対するひとつの重要 な解答になっていよう。 中村は、自らの父親がかかわり、傷ついた戦争と戦争責任の問題から出発し、その解 明を明治以降の「近代化」の歴史に求める。日本資本主義が「発達」してきた歴史 は、その裏に被植民者がこうむった暴力の歴史をあわせもつ。中村は、日本資本主義 「発達」の歴史を、勝者ではなく傷ついた者たちからの視点からとらえ返そうとする。勝者 である日本人が認識する歴史は、被植民者の認識からかけ離れたものである可能性があ るからだ12)。 中村は近著『「愛国」と「他者」』(2006)において、父親を台湾先住民族に殺 害されたキリスト教「生活伝道者」井上伊之助と、東京大学総理で「道徳進化論」を 主張した加藤弘之を対比し、先住民族を含めた「台湾人」と日本人の精神的脱植民化 の道程を模索した。1874年の「台湾出兵」、日清戦争後期から始まる統治初期台湾住 民の「討伐」、「理蕃五箇年事業」といった「暴虐」はその思想的背景のひとつを加 藤の「愛国」論に求めることができるが、井上や須田清基といった日本人生活伝道者 は、台湾先住民/日本人という自他を同時に「生きられる」生と生活実践を貫いた。植 民化に抗する実践に肉薄する研究といえる13)。 10) 1889-1965年。1928年より、当時合法的社会主義政党であった日本労農党の代議士を務め、戦後は日本社 会党委員長を歴任。 11) 1897-1981年。日本労農党員、戦後は日本社会党員を歴任。 12)「筆者があえてこうした台湾近現代史研究にむかった理由は、筆者なりに日本の戦争責任のあり方を自問するとこ ろにある。一九三七年中日戦争下、一二月の『南京総攻撃』に加担した、父親の苦悩の戦後史。『平成』 改元時にその意味があらためて問われた、集団への忠誠という日本天皇制のあり方と、企業への忠誠という戦後 日本資本主義の社会的風土との関係。(中略)そうした筆者の戦後昭和史の問題意識は、くり返すように明治 維新後の近代化とともにあった。アジアの周辺社会に対する破壊的な戦争行為の歴史的意味を、自分の追体験 として問い直す作業にむすびついていく」。「日本人として小さな負い目を覚えながらも、日本(与那国島)から 最も近いこの国のひとびととおこなう共同作業は、破壊的な日本資本主義の犠牲となったものの消されてはならない 歴史を再興することである」(2003: 59-60)と基本姿勢が述べられている。本論文を基にした中村勝 洪金 珠著、チュワス ラワ口述『山深く情は揺れる――タイヤル族女性チュワス ラワの一生』(1997、中国語) は、「アタヤル」(タイヤル)の高齢者女性のライフ ヒストリーから、タイヤルの社会経済生活と、それに対し 多大な影響を与えた日本植民地政策の歴史を描写する試みである。洪は1960年台北生れの漢族系台湾人であ る。チュワスの物語は、「タイヤル族―日本民族―中国民族―台湾民族」の狭間にあって生を求めるような民 族アイデンティティを思考する際に、最も素晴らしい「事例」になっているとする(同上:5-6)。この言葉遣いに 見られるように、中村が学び取ってきた社会科学的学問のあり方は、対象を理論的名辞の中に位置づけ、意味 づける傾向が強い。この姿勢は、第三節に見る受動的な暴力の記憶の分有とは若干の温度差を有する。理論 的名辞(あるいは概括用語)についてはモートン(2005: 62)、 山(2002)を参照。 フ チ イ 13) この他、傅琪貽(2006)、北村嘉恵(2008)により台湾先住民族の蒙った暴力の経験に肉薄する重要な研 分有される植民暴力の記憶 ········································································································ 中村 平…257 1952年生まれのフォトジャーナリスト伊藤孝司は『棄てられた皇軍:朝鮮 人 台湾の軍 軍属たち』(1995)という写真集を出版した。反核、韓国 朝鮮人被爆者、樺太 での韓国 朝鮮人、在韓日本女性、長良川、「従軍慰安婦」、アジアの戦争被害者 をテーマに写真展を開いてきた。韓国7回 人)を訪問 朝鮮1回(取材者63人)、台湾4回(79 取材した。「被害者たち」と出会った「私は、写真家 ジャーナリストして だけではなく、日本人として何をすべきなのか、何ができるのかと絶えず問い詰められてい る」。そうした出会いを通じて、「大きな重荷」を背負い込んで日本に戻って来る(同 上:125)と述べている。 以上の著者たちは、自らが日本人であることと植民統治 戦争責任を出発点において 明確にを自覚し、旧植民地の人々にその責任を取るために調査や聞き取りを行ってきた。 一方、それにかなり近接した位置にありながら、若干異なる位置から台湾先住民族と日本 人の関係についての記述を行ってきた書き手がいる。台湾先住民族に出会い歴史の重み を知らされ、日本人性とその責任に「図らず」出会ってしまう14)。そんなに自覚していなかっ た、自分が日本人であることとその責任を図らずも引き受けさせられてしまう所に大きな力の ベクトルを持った書き手たちである。それは受動的な体験である。そしてその受動的体験 を、書くことにより別の人へと開いてゆく。するとそれは既に、能動的な行為と呼びうるものに なる。以上の著者たちにおいて、「資本主義批判」や「植民統治責任、戦争 戦後 責任を取る」といった能動性が探求の出発点において強いとするならば、以下の書き手た ちには、出会いにより主体が構築されていくという側面が強く見られ、主体変容の受動性が 濃く打ち出されているといえる15)。それは、被植民者が蒙った暴力を、明確に定義すること はできないかもしれないが、自らの神経系があらわになって感知する事態なのだ。この暴力 はさらに、被植民者が蒙ったというだけでなく、植民者が自ら発動し自ら巻き込まれていった ものでもある。 これから紹介するテクストは、日本人が台湾先住民族の歴史的な傷や傷あとを前提とし て探求に赴くというよりは、若干の問題意識を持ち現場に向かった者たちが、深刻な歴史の 傷や傷あとに図らずも出会ってしまう中で、書かれている。言葉の元来の意味における「メ ディア=媒体」に自らが生成し、聞いてしまった記憶を別の人に伝達しようとする。次節で 詳説する、大田君江・中川静子、佐藤愛子、石橋孝、柳本通彦といった書き手に顕著 究がなされている。暴力の記憶の分有とこれらの歴史学諸研究のすり合わせについては、別に論じたい。 14) 「日本人とは何か」という問いは、他者からの呼びかけに答えようとするところに生まれる。港道隆はそれを、「自 分が他者に呼びかけられるか否かを自由に選択することはできない。しかし自分がそれを認知しない限り、責任は 場を持つことがなく、責任ある応答はされない。呼びかけは他者と自分の間に関係を設定する」(港道 1994: 257)と述べている。 15) 中野敏男はこれを別の言葉で、「実際に応答する以前に「主体」が求められるとき、そのこと自体によってすで に、応答によって反省と自己変革が進むということが拒否され、それゆえ実質的な応答そのものが拒否されてしま う」(中野 2001: 307)と述べている。 258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である。ここでは、近似した位置にいる別の書き手の「日本」との関わりの認識に、もう少 し触れておきたい。 中川浩一 和歌森民男『霧社事件:台湾高砂族の蜂起』(1980)は、卒業論文 作成に当たった中村玲子の祖父の「蕃地」体験という「ルーツの探索欲」(同上:20 2)を追うところから始まる。霧社事件の生き残りの高永清との話から、「贖罪の気持をこ めて、霧社事件の実相を明らかにしなくてはならないと私たちが決意した」(同上:213) とする。産経新聞台北支局長を務める川崎真澄(1959年生まれ)は、『還ってきた台湾 人日本兵』(2003)を著した。国籍条項により日本人と同等の戦争補償を受けられな かった台湾人日本兵を取材する中で、「日本人とはいったい、何者なのか」(同上:2 2)という問いに突き当たらざるを得なかった。 池田士郎(1946年生まれ)は1980年代前半から、台湾先住民族のアミの人たち、特 に高砂義勇隊として日本のために南洋で戦った人たちの話を聞き書きしてきた。大江健三 郎『沖縄ノート』(1970)において頻繁に繰り返される、「このような日本人でないところ の日本人へとかえることはできないか」を引きながら、「戦後、半世紀以上も語る機会を奪 われていた人々の語りに耳を傾けることは、日本人としての私の義務ではないだろうか」 (池田 2004: 182)としている。大江の言う「このような日本人でないところの日本人へと かえること」は、「帰る」でもあり「変える」でもあるだろう。日本人は、植民地において、あ るいは植民地をめぐって、植民される人々と自分を差異化しながら、自らを創ってきた。この ような日本人でないところの日本人へと、「かえる」ことはできないのだろうか。自己成型の 経路を辿り直し、これまでと違った自分の可能性を再発見するようなこうした探求を、端的に 「遡行」といってよいだろう(中村 2007を参照)。本稿は、遡行を遂行する民族誌的な 記述に注目していくが、それらは台湾先住民族の民族誌的記述にあっても行われてきた。 意図せざる、もしくは実際の人との交流を通じて形づくられてゆく、自己の変化しつつある 日本人性が、こうした書き手に表れている。そして遡行においては、明確な言葉で語られる ある程度確定した「歴史」よりも、トラウマ的な「記憶」が前景化される。 岡真理の『記憶/物語』(2000a)は、記憶の「分有」という事態に注意を促す。 人が記憶を領有するのではなく、「<出来事>が人を領有する」(同上:78)。 「<出来事>の記憶を分有するという営為とは、この他者の呼びかけの声にその無能さと 受動性において応答するものにほかならない」(同上:98)。 他者の声に応答することについて、岡はこう述べている。パレスチナの作家、ガッサン カナファーニー(1936-1972年)の小説は、「言葉という権力を用いて他者を表象し私た ち自身の主体的ポジションを確認するという構図」、それ自体が転倒される可能性を持って いる点で、パレスチナ人の経験に対する応答の実践である。テクストそれ自体の中に、主 体位置と既存の権力関係の転倒の契機が書き込まれていなくてはならない。記述の主体自 身が、実は呼びかけられたものであること、そして、呼びかけたものに対する応答それ自体 分有される植民暴力の記憶 ········································································································ 中村 平…259 の不可能性が、テクストに書き込まれていなくてはならない(岡 2000b: 256)。 本稿が探求する植民暴力の記憶は、日本人に対して「加害の意識を持ちなさい」と 「啓蒙」することにより、分有されるものでは決してない。暴力の記憶は岡が言うように、意 識し頑張って表象/理解しようとしてもそれを超えたものとして、意図せざる形で人に到来す る。植民統治責任、戦争責任を思考する際には、暴力の記憶が到来する、具体的な出 会いを通した自己と他者の関係に注目することが大切になる。具体的な出会いには、人類 学的「フィールドワーク」で物理的に出会うことだけではなく、記述を通しての出会いが含ま れよう。次節では、台湾先住民族の植民暴力の記憶を分有してしまっている日本人ジャー ナリストの民族誌的テクストを読み直していく。それらのテクストは、台湾先住民族の植民暴 力の記憶について日本主流社会の忘却の潮流に、結果的に抗してきているのである。 3. 日本人ジャーナリストにより分有される植民暴力の記憶 大田君江 大田君江 中川静子(中村ふじゑ) 中川静子「霧社を訪ねて」(1969)は、1963年に霧社を訪問し、霧社 事件の生存者 高愛徳氏の証言を詳細に聞きとる。中川は1934年生まれで、後に中村 ふじゑと名前を変えた。「私は、あんたたちが日本人だから、いろいろ言いたいんだ。この 事件を知ることは、日本の将来のために必ず役に立つ」(同上:246、ページ数は1981 のもの)と高氏は言う。「霧社への旅は、私たちに大きな課題を投げかけたのであった」 (同上:251)としている。この文章はカットされた部分を補完して、中川静子『日本帝国 主義下の台湾霧社事件』(1970)として出版された。日中友好協会のパンフレットとして 出版された本書は霧社事件と題されたものではあるが、自分の「台湾との出会い」という 書き出しで始められ、自己の立ち位置を意識したものである。 中川は敗戦時に知り合いの「台湾のおにいちゃん」が家族と共に台湾に帰り、日本人 の「おにいちゃん」の家族が台湾から引き揚げてきたことから、「ばく然と」日本と台湾が 「特殊な関係」にあったことを知る。「六〇年安保」闘争の連日のデモに参加したもの の、虚脱感が残る。そんな中、「外国旅行でもしてみようじゃないか」と友人と考えて、 1961年から62年の六ヶ月間、台湾を訪れた。台湾に行くと言うと、周囲の友人から「中 国人民に対するウラギリ行為」と思われたことに違和感をもった。日本では「人民的な立場 からの台湾へのアプローチはなされていなかった」(中川 1970: 52)としている。 「幼くして終戦をむかえた私」には戦争責任は関係のないことだと考えていた。しかし台 湾に来て、「私の父は太平洋戦争の時、日本軍に従軍して戦死した」「日本時代に抗 日運動をしたために、捕えられ、拷問をうけ、そのきずあとがいまだに身体にやきついている 260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人を私は知っている」といった声に出会いはじめる。「私たちは、日本の犯した罪と真正面 から向かいあうことになった」(同上:3)。 1962年3月、気になっていた霧社事件について「現地の人たちから直接」話を聞くた め、そして蜂起に参加した人たちの次世代が事件をどう受けとめているかを知るため、霧社 に向かった。中川の文章では、霧社で出会った下山豊子氏の描写と、事件に関する研 究書の整理とが交互に重なり合う。下山豊子氏は、事件当時霧社分室主任で殺された 佐塚愛祐警部補の娘で、下山宏氏と結婚していた。下山豊子氏の母親はタイヤル女性 タイモである。また下山宏氏は、タイヤル女性ピッコ ヤワイ 人警官 タウレハを母とし、父は日本 下山治平である(詳しくは、中村ふじゑ 2000を参照)。 中川は、日本に帰国後、下山豊子氏の姉で、ヤワイ タイモ氏の長女である下山佐 和子氏を訪問した。佐和子さんは、霧社事件後、台中の女学校を出て日本の音楽学校 へ進み、やがて歌手となって台湾に講演に来ることになった。その時ヤワイ タイモ氏は、 娘に「はずかしい思いをさせないように」と、台北帝大附属病院で手術を受け、額の入れ 墨をとりさったという(中川 1970: 35)。また、他にも好きな人がいたという母ヤワイ タイモ と父 佐塚警部の結婚について、佐和子氏はこう語る。「母は、父をよろこばせることに 一生懸命だったわ。父をよろこばすことは、日本人全体をよろこばすことで、日本人がよろ こべば、それで山の人はしあわせになると信じてね。ですから父を怒らすことを非常に恐れて いた。母はいつも、自分の結婚の意味をかみしめて生活していましたね」(同上:37)。 霧社で中川は、ダッキス ナウイ(改姓名 花岡二郎、霧社事件で自殺)の妻であっ た、事件の生き残りの「初子さん」(オビン タダオ)に出会う。後に、中村ふじゑ『タイ ヤルの森をゆるがせた台湾 霧社事件:オビンの伝言』(2000)の主人公となるオビンと の、最初の出会いだ。中川は、初子さんや、霧社の人々と出会う中で、高砂義勇隊への 志願について次のような認識を深める。「起ちあがつては圧しつぶされ、起ちあがつては圧し つぶされ、ついに自分たちの抵抗がむだだと悟ったとき、高山族は体制のなかで人一倍働く ことによつて、自己の存在を強調しようとしたのではなかつたろうか」(中川 1970: 24)。 霧社事件の生き残りが集められた川中島(霧社から直線で約15キロ)に赴いた中川ら は、決起時に決起集落の少年だった高愛徳氏に会う。山地警察の横暴さ、頭目モー ナ ルーダオの内地(日本)観光の話、事件前に密かに行われていた集まりの話、「こ こ(決起:中村注)まで来るのに五年かかった」という高氏の父(事件で死亡)の話、 事件当日、運動会会場で太鼓係をしていた高氏が目撃した惨状。「このとき忘れられな い二つの場面がある」という。 「逃げようとする日本人の警官が、自分を攻撃してくる相手が友だちと気づいたらしい。きつ と、かつて討伐にいつしよに出たことでもあつたんでしよう。手で顔をふせいで、『撃つな、撃つ な!』と叫んでいる。すると、その友だちが『友だちだからこそ、いま、おまえを撃つんだ。こう 分有される植民暴力の記憶 ········································································································ 中村 平…261 なつたのも日本の罪、だから、おれがおまえを撃つ』と、どなりながら、名前を叫んで、『動く な! 一発で殺すぞ!』と発射したんだ」。 「もう一つの場面では、師の恩というものを知りましたよ。十五歳ぐらいの高学校の卒業生だつ たが、ねらつた相手が梶原先生とわかつて、どうしても撃てない。すると、となりにいた年上の者 が、『なぜ撃たなかつた!』と彼をなぐつた。そうしたら、その子は『撃てない、撃てない』と泣 きながら言っていた」(同上:44)。中川は、別れ際に高氏にこう言っている。「私たちは、 日本へ帰ったら、できるだけ多くの人に霧社事件について伝えると約束した」(同上:50)。 以上は1970年の文章だが、それから30年後の2000年に中川は、中村ふじゑ名により 『タイヤルの森をゆるがせた台湾 霧社事件:オビンの伝言』を上梓する。1978年に霧社 を再訪問した後、事件の生き残りであるオビン タダオの元に足繁く通い、事件前後の経過 とその背景としての日本植民地支配の暴力、高砂義勇隊と戦争動員の経験、先住民族慰 安婦、日本の敗戦と1947年の二 二八事件と白色テロの先住民族への影響、日本人団 体「霧社会」との交流などが聞き書かれて完成した集大成である。中村はいつしかオビンを 毎年のように訪ねるようになるが、オビンは中村に彼女の経験を話す際、「わたしの胸、単 純じゃないのよ、(中略)心が燃えて、苦しくて、話すと怖くなるの」と言ったという。 オビンは霧社事件のことを語るようになり、1996年に日本人30名ほどに話をした翌日に倒 れ、数日後に亡くなる。中村は本書の最後を、「倒れるまで語り続けようとした母の物語 を、今度はわたしが書こうと、わたしは墓前で誓った」と結んでいる。オビンの死を含めて原 稿をいったん書き上げた時、中村は彼女の死を深く実感し、取り乱してしまいすぐに出版でき ず、いったん原稿を引き出しにしまったという。オビンとは、母と子の関係にまでなっていた中 村の深い心情がここに見られる。 本書に結晶したオビンとその周辺の人々への聞き書きの経験は、中村ふじゑを日本の植 民統治と戦争の責任問題に対する、応答の実践に強く引き込んだ。『語られなかったアジ アの戦後:日本の敗戦 アジアの独立 賠償』、『写真図説 日本の侵略』、『アジ アの新聞が報じた自衛隊の海外派兵と永野発言 桜井発言』といった書籍への分担執 筆を、1990年代に相次いで行う。2000年前後からは、「日本軍性奴隷制を裁く女性国 際戦犯法廷」の開催とリンクして、台湾先住民族「慰安婦」問題について積極的に関わ る16)。台湾の元「慰安婦」裁判を支援する会においてたびたび学習会を開き、ニュース レター『FIFTY YEARS OF SILENCE―50年間の沈黙―』に文章を投稿した17)。こ のような実践の背後に、数十年間に渡る台湾 霧社周辺の人々への詳細な民族誌的な 聞き書きが行われていたのだ。 16) 本「法廷」については「戦争と女性への暴力」日本ネットワークのHPを参照。 http://www1.jca.apc.org/vaww-net-japan/index.html 17) 台湾の元「慰安婦」裁判を支援する会HPを参照。提訴は2005年に最高裁により棄却された。中村の「日本軍 の「慰安婦」にされた台湾の阿媽(あまー)たち」も載せられている。 http://www.jca.apc.org/taiwan-ianfu-support/ 262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佐藤愛子 佐藤愛子(1923年生まれ)によるルポルタージュ『スニヨンの一生』(初出1983) は、1974年にモロタイ島で「発見」され、既にこの世を去っていた高砂義勇兵スニヨン(中 村輝夫=史尼育唔=李光輝)の声を聞こうとし、彼の「戦争」経験と、台湾に帰ってから 1979年に亡くなるまでの四年間の経験を想像するものだ。ここで「戦争」に括弧を付すの は、スニヨンにとっていつまでが彼の戦争体験であったか留保せざるを得ないからである。 佐藤は、既に亡くなっていたスニヨンだけではなく、その妻 中村正子=李蘭英の視点 と経験を大事にし記述している。スニヨンが帰ってこず、李蘭英は10年待って外省人の黄 金木と再婚した。佐藤はまた、この黄金木の気持ちに思いを寄せた記述を展開する(同 上:121-30)。本書は、日本人と台湾先住民族だけでなく、外省人をも描いている。ス ニヨンの再登場により、黄金木は李蘭英と別れることを余儀なくされたのだ。佐藤は李蘭英 にスニヨンのモロタイ経験を聞くが、李蘭英はただ「(スニヨンは話を)しないです……」と だけ答えている(同上:116)。佐藤はその語りきれない経験を想像する。その想像は漢 しゅ と く せ い 民族の饒舌な案内人 皺徳盛がしばしば発する、「蕃社の人はタンジュンね」という言葉 と対照的に配置されている(同上:108, 130, 216)。 「彼は何十年も受け身で生きて来た。なぜこんな目に遭わなければならないのだと問いたくて も 、相手はどこにもいなかった 。 黙って 、 ひとりで耐えるほかにどんな方法もなかった。 耐えるこ と 、 それが彼の生きることだった 。 耐えるのをやめた時 、 彼は死ぬのだった 。 それで彼は耐え た。もはや自分が耐えているとは感じないで耐えていたのだろう」(同上:171)。 佐藤は、経験の語りえなさを強調してルポを終えている(同上:208-10)。「たとえ (30年間のモロタイのジャングルの経験を:中村注)語ったところで、それが何だったという うが のだろう。彼と彼以外のすべての人との間に穿たれている溝が埋まるわけがないことを、彼 は知っていたのだ」(同上:215)。 佐藤は台東の李蘭英訪問時に、自分が「日本が彼らに対して犯した罪」を謝罪したと 明らかにしている(同上:129)。また、あとがきでは「我々日本人が既に見失ってしまっ た人間らしさに触れたことが、私のこの作品に対する情熱の根源になった」(同上: 221-2)としている。『スニヨンの一生』はスニヨンの体験と、スニヨンを取り巻く人々の思 いを理解しようとする稀有のものとなっている。これらの人々の蒙った暴力的な事態や、人々 の思いは佐藤に分有されるものとなった。 石橋孝 石橋孝は1924年横浜市生まれで、小学生時代を台湾の澎湖島で過ごした。石橋の 『旧植民地の落し子 台湾「高砂義勇兵」は今』(1992)は、主に霧社「タイヤル族」へ 分有される植民暴力の記憶 ········································································································ 中村 平…263 の訪問から、霧社事件、高砂義勇隊、サヨンの鐘について言及している。石橋は在学 中、軍隊へ行き、シベリヤ抑留五年の経験を持つ。1988年会社を辞職後、台湾の山地 を「踏査」した。本書は、「彼ら(「高砂族」)の証言集でもあり、台湾植民地史の 上で、支配される側に立った少数民族の「悲しい歴史」でもある(同上:7)。 「第二次大戦の終結は、私たちと台湾を完全に分断し、行きたいにも行く手段、方法がな かったから 、終戦後 、はじめて台湾を訪れるまでには私の場合、 三〇年近くの歳月がかかっ た。(中略)(霧社事件関係で自分が[引用者注])読んだものは全部、日本人が、日 本人としての立場から述べているものばかりで、一〇〇〇人の命を失った「タイヤル族」の主張 は、どこにも見当らない。「霧社事件」から六〇年になろうとしているのを期に、私は長年抱い てきた「霧社事件」に対する疑惑を直接、事件に関わった「タイヤル族」に会って、偽りのない 証言を聴くことによって晴らしたいと思った」(同上:47-8)。 石橋は、統治権力は時として、それを「誤って使う」ことがあるとし、「タイヤル族」に 対する日本人の「人権無視」を想像する。山地人でモーナ ルーダオの姪にあたる女性 が、警察の追及を事件後に受けた。彼女は埔里の製糖会社に勤める日本人男性の妻 で、台中の女学校に通う娘もいた。警察の追及の途中、モーナの姪は二度の自殺を図 り、二度目に死んだ。石橋はこの話を、霧社の漢人系台湾人女性から聞いた。その漢人 系台湾人女性は、父から聞いた話だと断りながら、警察が「タイヤル族」を処刑する場面 の「情景を書くにしのびない」凄惨な状況を、長い時間をかけ話したという(同上:48-5 2)。石橋は、清流(川中島)の霧社事件「蜂起蕃」の生存者である、アウイヘッパ ハを訪ねた経験をこう記している。 「アウイは日本の警察のことを話すのをためらう。彼は日本人を殺害していないのだから、彼 が、日本人の女、子供を追い廻したぐらいで、日本の警察を恐れる理由は何もない。しかし、 現実に彼は、日本の警察を恐れている。戦後四〇年以上も経ち、台湾とは関係もない日本の 警察を、 彼はどうして怖がっているのだろうか 。(中略)/「高さん 、 あんた、 おかしいです よ。いま台湾に、日本の警察はいないのですよ。あなたの心の中にある日本の警察は“幻”です よ」/「では心配いらないよね。話をしてもいいんだね。でも大丈夫かなあ」/「男らしく話しま せんか。あなたは私に昨夜、男らしくないと言ったくせに、……」/それでもアウイは話しだそうと しない。/結局、彼が話したのは、別のことだった。/事件中、山の中を放浪しているとき、 パーラン社の男の説得で投降し、石川巡査部長の取調べを受けたのは、彼が一五歳のときで ある。/彼は部長に「自分は絶対に日本人を殺していない」と言ったが、霧社の警察に身柄 を送られる。彼は、いちおう上手に切り抜けることができたが、他の同僚のなかには、養蚕用の 穴に連れて行かれて処刑された者もいる。彼は、斬殺されたときのダーッという音が、いまでも、 耳底に焼きついている。/「どうして我々は、裁判もなしに、簡単に殺されなければならなかっ たのか」/と、彼は憤慨した」(同上:113-5)。 264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事件の二年後アウイは川中島駐在所で、午前四時まで警察の執拗な追求を受けた。 や 「殺してくれ、ボクは日本人を殺っていないのに、あんたたちがそんなにボクを疑うのなら、今 すぐ、殺してくれ」/駐在所で、アウイは叫んだ。結果的に彼は釈放されたが、血の凍りそうな 恐怖を覚え、家に帰っても数日間、寝たまま起き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終戦後、台湾に日本 警察がいなくなっても、彼の脳裏から警察の幻影が消えることはない。そうでなければ、気の強 い彼が「日本の警察がこないか」など、どちらかというと、山地人「タイヤル族」の誇り高い 「セイダッカ」として、卑屈な態度をとるはずがない(同上:119)18)。 アウイの恐怖は、アウイが1940年に「田中愛二」という日本名となっても続いた。というよ り統治権力に接した際、恐怖がふと呼びさまされるのである。川中島の青年団長であった 彼が、山地の一代表として、台北で、総務長官も出席する会に参加したときのことだ。そ の席で彼は勇敢にも総督府の統治政策批判を述べた。「一視同仁」なのになぜ我々は マ マ “蛮人”と呼ばれるのか、それは道理が通らない、霧社事件で裁判もなしに死刑にされた高 砂族がたくさんいる、なぜ日本の国の憲法外に高砂族はあるのか、と問いかけたのだ。意 外にも同席していた海軍大佐は、「いい質問だ」とほめたが、その翌日、アウイだけが呼 び出された。 「あの時はほんとうにギクリときたなあ。霧社事件の後で警察に呼び出しを受け、午前四時ま ママ で取り調べをされたときの日を思い浮かべて、長官や大佐はボクを賞めてくれたが、ボクの発言 を気にした役人が、ボクを牢屋に閉じ込めてしまうのではないかと、恐怖が先に立って、鳥膚が 立ったよ」。実はアウイが呼び出されたのは、彼の正確な日本語に目をつけた総督府の役人 が、ラジオ放送に彼を起用しようとしたためであった(同上:120-4)。 石橋は言う。どこに行っても、「種族」が異なっても、「高砂族」は親切だった。日本 の山地政策に厳しい不満を唱えても、彼らは酒を勧めて、泊まっていきなさいと言ってくれ た。日本人に対してこんなに友好的な民族は、世界のどこを見渡しても他にはいないのでは ないか、と私は思う。台湾の山地で実際に起こった「人種差別」を知ったときから、意見 を日本人に発表するチャンスの少ない彼らに代わり、私は、彼らの声を日本の人にも知って もらいたいと思った(あとがき)。このように石橋の詳細な記述は出来事と読者をつなぐメディ 18) 石橋はアウイの恐怖を以下のように説明する。石橋は日本に帰ってから、アウイが台湾大学教授に、以下のよう に告白していたことを知る。「山の中を歩き回っているとき、あまりお腹が空いたので、たまたま横たわっていた日本 人の死体から、腿の肉を切り取って、なきながら生のまま齧った。それは、まだ暖かだった」。しかし石橋は彼の 告白を信じないという。なぜなら、アウイは「『霧社事件』の戦闘の場面を話すとき、夢中になるあまり『タイヤル 族』の一方的な勝利ばかりを話す。一つのことにのめり込んで行くと周囲が見えない。だれかに煽てられると、やっ たことのないことまで、自分がしたような妄想を持つ。アウイは、山地民族が抗日に立ちあがった『霧社事件』の 生き残りと讃えられて、つい、そんな言葉を口にしたのではないか、と思いたいが、真実は、彼にしか分からない」 (1992: 120)。 分有される植民暴力の記憶 ········································································································ 中村 平…265 アとなり、聞き書きの現在にまで継続する霧社事件の恐怖を描き、霧社の「タイヤル」の 体験に内側から迫るものとなっている。 柳本通彦 柳本通彦は1953年生まれのフリージャーナリストで、アジアプレス インターナショナル台 湾代表であり、台湾に長く住んできた。柳本はこれまで『台湾 霧社に生きる』(1996)、 「悲劇の高砂義勇隊とその妻たち」(2000a)、『台湾先住民 戦」』(2000b)、『台湾 山の女たちの「聖 タロコ峡谷の閃光――とある先住民夫婦の太平洋戦争』 (2001)を通して、話や生活をともにしてくれた台湾先住民族に対して応答しようとしてい る。その主題は霧社事件、高砂義勇隊、先住民族「慰安婦」である。邱若竜の中国 語による漫画『霧社事件:台湾先住民、日本軍への魂の闘い』(1993)の翻訳も行っ た。また同じテーマで、「私は日本のために戦った」(NHK教育ETV特集)など数々 のドキュメンタリーやニュース映像を作成してきた。 先住民族慰安婦についての証言を掘り起こす作業、柳本によれば、それは「従軍慰安 婦」の定義や分類を行うことではない。レッテル張り以前に、まず個々の女たちの声をその ままに、「雛でもかえすように胸で温めてみる」(2000b: 214)ことである。最初の先住民 族慰安婦女性との出会いからすでに三年の月日がたつが、この間に二人の女性が亡くな る。彼女らは死ぬ間際まで、柳本に自らの生い立ちを語り続けたという。それは柳本にとっ て、「わたしという人間を通して、日本人に伝えようとした遺言」(2000b: 236)であったよ うに思える。 2006年の『ノンフィクションの現場を歩く:台湾原住民族と日本』においては、戦争補 償問題についてより積極的にこう述べる。軍事郵便貯金については、1994年、当時の120 倍という額で義勇隊員らに支払われ、形式上は一応の決着をつけた形になった。 貯金の件はこれで終ったのですが、いまおじいさんたちが求めているのは、日本のために戦っ た自分たちに何らかの「証し」がほしいということです。戦死した台湾人には日本政府から二百 万円の弔慰金を支払いましたが、生きて還った人には何もないのです。だから彼らの気持ちとして は百万円でも五十万円でもいい、あるいは紙切れ一枚でもいい、またはブリキの勳章でもいい、 とにかく何らかの「証し」がほしい。そうでないとあのときに自分が命をかけて戦った意味がなく なってしまう、年をとればとるほどに心の整理がつかない気がしてくるのだと思います。(中略)こ れは歴史認識の問題ではなく、日本人としての道徳の問題だと思います(2006: 56-7)。 柳本の著作が事件の真相を明らかにすることのみならず、被植民者や植民者を問わず ひとりひとりにとっての植民地と戦争の経験がいかなるものであったかを描くことにその重点を置 いていることは、下山操子(1945年生まれ)の編訳を行った『故国はるか:台湾霧社に 残された日本人』(1999)にも明らかである。下山操子の父 下山一は、日本人警官 266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下山治平と「マレッパ」の頭目の娘「ペッコタウレ」(中村ふじゑの「ピッコ タウレハ」 に同じ)が日本の「政策として」結婚し、その間に生まれている。本書は、戦後も霧社に 残り、残らざるをえなかった下山一家の三女 操子から見た歴史であり、そのライフヒスト リーである。下山操子は1955年に中華民国に帰化をしており、本書の題名に「日本人」 とあることは、読者に「日本」「タイヤル」「台湾先住民」「中国」「台湾」という名 詞の意味するものを問い返すものである19)。 4. 終わりに 濃淡の差はあるが、大田君江 中村ふじゑ(中川静子)、佐藤愛子、石橋孝、柳 本通彦の各記述に共通するのが、台湾先住民族の蒙った植民暴力の記憶に直面し、直 面させられてうろたえながらもそれを記述する姿である。暴力のリアルさに身をそむけることな く、同時に人びとの傷をいくらかでも再度えぐり返していることを気遣いつつ、それらを記述して いる。野田正彰の言う「聞きとる力」が、ここに登場していよう。そして話を聞き書く中で、 著者達は自分が日本人であることと、日本人とは何かという根本的な問題に向き合ってい る。本稿ではその向き合いとその言語化を「遡行」と呼んできた。中村ふじゑに見られるよう に、友人として、あるいは「母」として台湾先住民族の記述を行うそのあり方は、日本人を 啓蒙したり、糾弾する語り口とは遠い。 多くの日本人が、台湾において台湾先住民族の蒙った植民暴力を聞いてきたはずであ る。本稿ではできるだけ多くのそうした暴力の記憶を取り上げた。こうした暴力の記憶について の民族誌的記述は、それを読んだ読者をも記憶の分有という事態に巻き込んでいくだろう。 日本植民主義に対する批判が「悪の糾弾」や「侵略の告発」という語り口でなされる時、 暴力の記憶の分有は背景に追いやられよう。そうした語り口は植民暴力の圧倒性を看過するも のであり、何かの手段のために暴力をカードとして利用しているからである。植民主義に対する 批判は、暴力の記憶の分有にあり、そのトラウマ的事態を和らげるように再記述(口述)して いくことでなされるのではないだろうか。脱植民化(decolonization)はこのように設定されるの 19) 以上のジャーナリストのほか、『「南京大虐殺」のまぼろし』(1973)を執筆した鈴木明の『高砂族に捧げ る』(1976)は、1975年に台湾山地を訪問し書かれた、高砂族と日本人の関係性を問題提起するルポルター ジュである。本書も植民暴力を分有するものとなっている。鈴木は1929年生まれ、東京放送社員を歴任。戴国 煇は本書を、「傷跡は舐める」が「傷跡の由ってくるメカニズム」にはメスを入れることが少なく、鈴木自身の 「民族の歴史的立場」が明確でないと批判している(1979: 184-5)。確かに植民統治の歴史に対するある 種のあきらめと肯定と、のぞき見趣味に似た「高砂族に対する好奇心」ははっきりと認められ植民主義の分析には 欠けているが、同時に鈴木の豊富で詳細なルポルタージュからは「高砂族」と台湾人の怨念に似た声が聞こえ てくる。「日本国民の各位様へ」と題された台湾人陸軍雇員と高砂義勇隊員の手紙の引用などに見られるよう に、台湾の人々の声を日本人に伝えようとし暴力の記憶を分有している(鈴木 1976 :206-10)。 分有される植民暴力の記憶 ········································································································ 中村 平…267 ではないか。 第二節においては、記憶を聞き書くこと、その中での既存の主体の変化の可能性や、 既存の権力関係の転倒の契機について触れた。中村ふじゑがオビンの聞き書きを通じて母 と子の関係を感じ取ったことは、「日本人」と「台湾先住民族」(あるいは「タイヤル」 「セデック」)という「民族主体間の対話」という構図に収まりきらないものを示している。ま た複数の記述が、日本人警官とタイヤルの間に生まれた人々を描いている。そのような 人々の位置は、単純な「日本人と台湾先住民族」という二項対立の構図には収まらない。 植民暴力の分有の重要なきっかけは、まずもって、「日本人とは何者か」「何をしてき たのか」という問い(遡行)にあると言える。これまでに見た台湾先住民族についての民族 誌的記述にあって、つまり日本人の遡行において植民暴力の記憶が分有されている。暴 力の記憶を分有してしまった者たちは、未来に向けての明確な意図や政治 政策的青写 真を持たぬまま、そうした記憶を書かざるを得なかった。暴力を書こうとして書いたわけではな く、出会ってしまった暴力の記憶を背負ってしまい、自らが媒体(メディア)となる中でそうし た記憶を書いてきたし、書かされてきたとも言えるのである。 東アジアにおいて力を持つ存在であるマジョリティ日本人にとっては、他者との関係を未来 において作っていく上において「日本人とは何者か」という問いが重要だろう。しかし同時 に、暴力の記憶はそのように硬く身構えなくとも、台湾先住民族との日常の付き合いの中で ふと出会ってしまうものでもある。このことが、以上に見てきた大田君江 中村ふじゑ(中川 静子)、石橋孝、柳本通彦の著作から理解される。さまざまな形で出会ってしまった暴力 の記憶をすぐさま政治的な主張に利用するのではなく、その暴力の記憶がいかに癒されうる のかを反芻しつつ、自らが分有した暴力の記憶を言葉にし、それらをリアルに描き出してい る。本稿はそれらを「分有される植民暴力の記憶の民族誌的記述」として概念化した。 日本人は台湾先住民族との関係を過去いかに作ってきて、現在いかに作り直そうとしている のか。この問題を分かち合う場は、本稿で見てきた植民暴力の記憶が分有される民族誌 記述が、書かれ、読まれ、語られる中で作られるものである。 268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参考文献】 アウイヘッパハ述 許介鱗 林光明解説(1985),『証言 霧社事件――台湾山地人の抗日 蜂起』東京:草風館 池田士郎(2004),「元高砂義勇隊マヤウ カッテの戦争の記憶」山本春樹、黄智慧、パス ヤ ポイツォヌ、下村作次郎編『台湾原住民族の現在』東京:草風館、175-185頁 石橋孝(1992),『旧植民地の落し子 台湾「高砂義勇兵」は今』東京:創思社 磯村生得(1981),『われに帰る祖国なく 或る台湾人軍属の記録』時事通信社(1998新装版) 伊藤孝司(1995),『棄てられた皇軍:朝鮮 台湾の軍人 軍属たち』東京:影書房 大田君江 中川静子(1969),「霧社を訪ねて」『中国』69(特集――台湾高山族の反乱 <霧社事件>)(抜粋されて戴編1981にも所収) 岡真理(2000a),『記憶/物語』東京:岩波書店 (2000b),『彼女の「正しい」名前とは何か:第三世界フェミニズムの思想』東京:青 土社 加藤邦彦(1979),『一視同仁の果て 台湾人元軍属の境遇』東京:勁草書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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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it is related to the problem of taking responsibility of colonial rule and war. Bun-yuu might be translated to “part-sharing” or “possession,” meaning the situation that events or memories occupy person (OKA 2000). This paper recognizes bun-yuu of memories of colonial violence is highly related to taking responsibility of colonial violence. Post WWII Japanese mainstream society’s attitude to colonial history and the colonized people basically is “forgetting” in the background of capitalist economic development. Some Japanese who engaged colonial rule among Taiwanese indigenous peoples or lived in Taiwan strongly justified colonial policy. In this situation, some Japanese journalists till now have been exploring what Japanese have been doing in colonial Taiwan, including violent events and memories among indigenous peoples. Their texts have been challenging and even resisting the major Japanese attitude toward colonial violence and its memories, as a result. Those texts are written by Japanese journalists including NAKAGAWA Shizuko (NAKAMURA Hujie) (1934-), SATO Aiko (1923-), ISHIBASHI Takashi (1924-), YANAGIMOTO Michihiko (1953-). There is a question on “what and who Japanese is and what they have done” throughout those texts and this is the critical question when East Asian capitalistic majority Japanese make relationship with Asian others in future. But at the same time violent memories sometimes are what happen to “advent” (or, come) to people in 分有される植民暴力の記憶 ········································································································ 中村 平…273 everyday conversations unintentionally, not only in formal, highly political situations. Above texts show this. This paper conceptualizes those texts as “ethnographic writings which perform bun-yuu of memories of colonial violence,” and tries to create a decolonial space where “we” (including readers) can share how Japanese have been shaping and reshaping the relationship with Taiwanese indigenous peoples until present, for the undecided future. キーワード;Taiwan, Indigenous People, Japanese Colonialism, Decolonization, Violence, Memory, Journalist, Ethnographic Writing, Responsibility, Minzoku Subject 투 고 : 2008. 8. 31 1차 심사 : 2008. 9. 12 2차 심사 : 2008. 9. 27 한일 신여성의 사회참여관 연구 우정미*1) (e-mail : [email protected]) 目 次 1. 머리말 2. 근대 여성과 사회참여 3. 한일 신여성의 사회참여관 3.1 참정권 3.2 남녀동등 교육권 3.3 계몽활동 4. 맺음말 1. 들어가면서 근대 한일 양국의 여성들은 스스로 원하는 바이든 아니든 내외적인 영향을 받으면서 여성의 권리에 자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개인적이든 단체 활동을 하든 여성 자신들의 생각을 관철시키고자 적극적으로 사회참여를 전개한다. 생활 주변부에서 시작하여 여성 교육이나 계몽 중심에서 부인해방운동까지 그 범위가 확대되어 간다. 일본의 쌀소동1)에서 보여지 듯 꼭 교육을 받은 여성들 * 1)부산대학교 외래강사 1) 시베리아출병이 예측되는 가운데 쌀의 매점매석이 성행하고 쌀값이 폭등하자 富山県에 서 한 어촌 주부가 쌀의 외부유출을 반대하다가 마침내 폭동으로 발전하여 전국적으로 확대된 것으로 어떤 조직성을 가지고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곧 쌀소동의 주체는 남자 로 옮아간다. 아사오 나오히로 저, 이계황 외3 역(2003), 『새로 쓴 일본사』, 창비. p.476 276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만이 아니라 삶의 위협을 느끼면 여성들도 힘을 모아 단체행동을 할 수 있음 을 보여주고 있지만 대개 단체나 운동의 중심은 교육받고 깨어있는 의식을 가 진 여성들이 대다수였다. 그러면 이러한 여성들은 어떤 의식을 가지고 단체 활동이나 개인적으로 사회활동에 참여했는가? 본고에서는 이러한 근대 신여성들의 사회 참여관에 대해서 연구하고자 한다. 사회 참여의 형태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본고에서는 경제성 획득을 위한 직 업 활동은 제외하고 권익이나 계몽, 생활개선에 참여하는 범위 내에서 알아보 고자 한다. 선행연구로는 양국 신여성들의 사회 참여관을 비교연구는 아직 되 어 있지 않고, 부인운동의 계보나 종류 그리고 그러한 단체들의 활동을 중심2) 으로 하는 연구가 많았다. 그러나 이들 연구는 개별적이고, 자국에 한정되어 있다. 본고에서는 양국의 여성들의 사회참여 의식을 직접적으로 비교해 보고 자 한다. 연구방법은 한국의 여성 잡지 『신여성』(新女性)3)과 일본의 여성 잡지 『후 진코론』(婦人公論)4) 속에서 신여성이 담론의 주체가 되는 사회운동에 대한 기사를 분류 검토하여, 비교사 관점5)에서 분석해 보고자 한다. 2) 김정연(1996), 「근우회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스가하라유리(2003), 「1920년대 여성운동와 근우회」, 연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오숙희(1987), 「한국여성운동에 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오형숙(1975), 「개화기 여성단체의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장혜영(2004), 「한국 기독교 여성의 민족운동」, 전주대학교 석사학위논문. 정선우(2003), 「개화기 진명부인회 성격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조경미(1989), 「1920년 여성단체운동에 관한 연구」, 숙명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阿部恒久(1982) 成田竜一,「婦人運動の展開」,『近代日本の統合と抵抗』3,日本評論社. 阿部恒久(1978),「女性と米騒動」,『女たちの近代』 拍書房. 山本邦夫(19660),「大正期に於ける女子の運動1,2」,『明治大学教養論集』30,34 石月静恵(1980),「婦人運動の展開」,『大正期の権力と民衆』, 法律文化社. 村上伸彦(1975), 「婦人問題と婦人解放運動」, 『日本歴史18』, 岩波書店. 井上馨(1986), 「大正期における婦人参政運動について」,『中村学園研究紀要18』. 小野沢あかね(1995),「大正デモクラシー期の廃娼運動の論理」,『歴史学研究668』. 3) 1923년 9월 개벽사에서 발간한 것으로 23년 9월~26년 10월까지 31호, 중간에 정간되었 다가 31년 1월에 속간되어 34년 8월에 폐간될 때까지 약 42호, 도합 73권 내외가 발행 되었다. 발행부수, 판매 부수, 유통 경로, 독자층은 확실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대략 만 부 정도 발행되고, 독자층은 주로 여학생이었다. 연구공간 수유+너머(2005), 『매체로 본 근대 여성 풍속사 신여성』, 한계레신문사, 부록 4) 『婦人公論』은 1916년 1월 중앙공론사에서 부인종합잡지로서 발행하였다. 동지는 15 년전쟁하인 1944년 3월에 『中央公論』존속과 바꾸어 폐간을 피할 수 없었지만 패전 후 1946년 4월에 재발행된 이래 현재도 계속 발행되고 있다. 近代女性文化史研究会(1996),『婦人雑誌にみる大正期』, 大空社. p.12 5) 아날학파 블로흐(Marc Bloch)에 의해 西洋 中世史를 중심으로 実証을 들어가면서 정리한 著書 『比較史の方法』(高橋清徳 訳)에 의하면 比較史라는 것은 ‘하나 혹은 약간의 차이나는 社会状況 에서 언뜻 보아 그 사이에 일정의 類似性이 存在한다고 생각되는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현상을 한일 신여성의 사회참여관 연구 ··················································································· 우 정 미…277 『신여성』과 『후진코론』은 여성 잡지이다. 우선 잡지라는 매체는 당시 사 회상이 빠른 시간 내에 전달된다는 강점이 있고, 두 잡지는 양국 신여성의 출 현을 알린 『신여자』(新女子)와 『세이토』(青鞜)의 뒤를 이었다는 점, 당시 여성들의 의식이 많이 반영된 잡지라는 점에서 양국 여성들의 의식 연구에 적 합한 사료라고 생각한다. 본 연구는 현대 여성운동에 대한 원형을 제시할 것이며 근대 초기 여성의 사회 참여관에 대한 이해는 현대 여성 운동을 바르게 이해하는데 일조를 할 것이다. 2. 근대 여성과 사회참여 1910년대 일본에서는 여성의 자아의식 형성기로 부인운동 준비기라고 할 수 있는데 1910년 청탑 창간은 그 개시를 고하는 사건이었다. 여성의 자아가 사 회적으로 주목받으면서 사회적 존재로서의 여성 문제에도 눈을 돌리게 되고 여성해방 문제를 스스로 다각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신부인협회 (20년3월 발족)는 10년대의 움직임을 사회 운동화했으며 부인운동을 발전시켰 다. 우선 운동의 최대 관심사인 치안경찰법 제5조 개정 운동을 전개하고 22년 4월 정담연설회를 주최하여 거기에 참가할 권리를 획득했다. 1920년대 초에는 제1차 세계대전 하에서 자본주의 전개로 인한 물질문명이 크게 확장됨과 동시에 여성-주부가 생활의 주된 담당자로서 사회적인 위치를 부여 받게 되었다. 쌀 소동의 온나잇키(女一揆)는 그 같은 사회의식을 단숨에 확립시켰다. 1920년대 후반은 부인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히려 치안유지법체제에 강하게 규제된다. 관동대지진을 계기로 급속하게 확립된 이 체제는 천황제 및 독점자본의 이익을 옹호하는 체질을 가 지고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운동 내부에 좌파 우파의 분열구조를 창출 하고, 좌파를 체제 측에 끌어당기려고 했다. 이 시기의 특징은 관동대지진과 대 공황 아래 극도로 심각한 생활난에서 가정경제를 지키려는 운동이 여성들의 손 으로 이루어져 가정을 발판으로 하는 다양한 운동이 전개되었다.6) 한국의 여성운동 내지 여권 운동은 그 시대적 배경이 일제치하였으므로 서구 가려내고, 골라 낸 현상 각각의 発展過程을 証明하고, 그것들 사이의 類似点과 相異点을 확정하고, 가능한한 類似 혹은 다름이 発生한 理由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했다. マルク․ブロック著 高橋清徳 訳(1978), 『比較史の方法』, 創文社. p.2 6) 阿部恒久(1982), 「婦人運動の展開」『近代日本の統合と抵抗3』日本評論社. pp.217-220 278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와 달리 우리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그 최대의 과제로 삼은 점에서 일종의 민 족해방운동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당시의 한국은 외래 세력의 압박에 있었 으므로 여성들은 여성 해방을 부르짖는 것 보다는 먼저 조국을 외래 세력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려고 하였다. 즉 한국에 있어서 최초의 여성 운동은 여권 신장을 위한 운동도 아니고 여성 해방 운동도 아닌 한국 사회의 특수 사정 내 지는 시대적 배경에 의한 민족운동 내지는 독립운동이었다. 따라서 일제 치하 에 있어서 한국의 여성 운동은 남자와 대립적 관계에 서는 것이 아니라 남자 와 협조적 관계에 있었다. 1919년 3․1운동을 전후하여 여성단체들의 활동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1920년대 이후부터는 주로 기능별로 세분화된 여성 단체가 나타났으며, 여성의 지위 향상 을 위한 제 단체의 조직이 구체화하였다. 독립운동 전까지의 여성 운동은 주로 기독교 계통의 여성 근대화 운동에 힘을 기울였고, 3․1운동을 기하여 한국 여성 운동은 단순한 신문화 여성운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민족 해방의 시급함을 깨 닫고 정치적 방향으로의 눈부신 활약으로 나타난다.7) 3.1운동이후 한국인들은 문 화운동이란 형태로 일본에 대항하였는데 이는 여러 단체를 중심으로 구습타파와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한민족 전체의 질적 수준을 높혔다. 이와 맥을 같 이 하여 각종 여성단체가 잇따라 설립되었고 이를 중심으로 여성들 역시 인습타 파, 교육, 경제적 자립을 목적으로 하는 운동을 전개하기에 이른다.8) 1930년 이후부터의 한국 여성 운동은 1920년대에 비하여 절망적이었다. 1920 년-1930년대에 이르는 각종 여성단체의 사회 참여를 통한 많은 계몽활동이 있 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여성에 있어서의 근대화는 매우 부진했다. 각종 여성 단체의 활동과 부르짖음은 우리 여성의 문화적 면에 많은 계몽을 가져왔고,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에 커다란 힘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 한 사회 참여 운동도 몇몇 지식층의 여성에 불과한 것으로 일반 여성에게 사 회적 지위를 확립시키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9) 3. 한일 신여성의 사회참여관 3.1 참정권 1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에서는 여권이 확장되는 데, 그 영향이 아시아여성의 7) 안선호(1976), 「우리나라 여성 운동의 사적 고찰」『법경논총』11호. pp.142-146 8) 菅原百合(2003),「1920년대의 여성운동과 근우회」, 연세대 석사논문. p.3 9) 안선호(1976), 앞의 논문. p.148 한일 신여성의 사회참여관 연구 ··················································································· 우 정 미…279 각성에 많은 자극이 되었다. ‘부인의 각성을 기다리는 것을 오늘날만큼 급했던 때는 없다.’10) ‘権利를 빼앗긴뒤에 빼앗은者가 얼른 내주는법은 극히적다. 빼앗 긴그者가 다시차저내야만 되는것이다...(중략)..도로차질이는 女子自身이다. 男 子의 同情이나 救助도 바랄것이못된다’11) ‘자각(自覚)이필요합니다. 렬뎌한자각 이잇서야함니다. 세상에나아와 사업을하거나 집안에들어가살림을하거나 또는 젼문이상의공부를하거나 범백사에 먼저필요한것이 렬뎌한자각임니다. 12) ’ ‘가 장 중요한 것은 부인 스스로가 자기를 알고, 자기의 사명을 깨닫는 것은 모든 발달의 출발점입니다.’13) 그러나 자각만으로는 사회적인 권리를 가지기에는 부 족하니 여성들의 힘을 모아 단체운동으로 그 권리를 찾고자 하는 노력이 전개 되었다. 사회적으로 열악한 처지에 있는 여성들을 위해 우선 먼저 법률개정이 필요하 다. 법률 개정을 여성들에게 유리하게 하기 위해서는 여성의 입장을 대변해 줄 수 있는 의회 후보자를 선택하는 길이다.14) 여성에게 선거권을 주어야 하는 이유로는 ‘부인에게도 공민의 자각이 필요하 기 때문.’15)이고, ‘모든 체계-개인생활, 가정생활, 국민생활, 세계생활-에 새로 운 창조를 시험하기 위해서 인간은 자기 외의 어떠한 권력에도 압도되지 않을 만큼의 자유 독립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 이 창조능력을 이용하여 모든 생활 체계에 공헌하기 위해서 개개인이 이 능력을 개전(開展)할 기회를 균등하게 갖는 권리 즉 평등의 권리를 가지고16) 있기 때문이다. 여성들에게 선거권이 주어지면 제반적인 부인문제를 포함하여 자선운동이나 금주운동, 폐창운동 등의 문제 해결에도 제도적인 접근이 가능할 것이라도 생 각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1890년 ‘집회 및 정사법(集会及政社法)’ 5조 1항과 2항에 여성의 정당결사 가입과 정치 연설회 참가를 금지하고 있고, 1900년 이 법은 ‘치안경찰법’으로 개칭되었으나 여성에 대한 규제는 개정되지 않은 채 지 속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 법의 개정 없이는 여성들의 참정권의 진보는 기약할 수 없었다. 10) 11) 12) 13) 14) 15) 16) 婦人公論, 1919.4권.3호 「我国の婦人参政権問題」, p.4 新女性, 1925.3권.2호 2월호 「人間本位의 婦人問題」, pp.2-5 新女性, 1924.2권.3호 4월호 「女学校卒業生들에게간절한부탁한마듸」, pp.18-20 婦人公論, 1918.3권.5호 「われ等の行くべき途」, p.28 婦人公論, 1916.1권.1호 「現代婦人の行くべき道」, pp.1-8 婦人公論, 1919.4권.3호 「普通選挙の話」, p.83 婦人公論, 1919.4권.3호 「婦人も選挙権を要求す」, p.9 280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부인 참정권운동이 치안경찰법 제5조에 의해 구속되고 있는 것을 안다면 일 본 부인계에 있어 부인참정권운동은 명백히 불가능한 사실이다. 남편의 선거 운동을 위해서 호별방문하거나 제국의회 2층에서 실제 정치를 방청할 수 있 는 일본 여자가 근처 공회당이나 극장에서 개최되는 정당 집회에 출입할 수 없다. 그래서 일본여자는 참정권운동을 위해, 우선 이 비민주적이고 비문화적 인, 비인격적인, 치안경찰법 제5조 여자에 관한 규정을 철폐하는 것이 당면의 급무이다. 여자는 우선 청원에 의해서 이 시대착오적이고 불합리한 악법을 없 애기 위해서 크게 의회를 압박해야 한다.17) 치안경찰법에 의해 구속을 받고 있는 이상 부인참정권 운동은 불가능하니 그 철폐가 우선되어야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여성 스스로 정치 법률에 대 해서 연구가 필요하다고 했다. 히라쓰카 라이초(平塚らいてう)가 이끄는 신부인 협회18)의 노력으로 1922년 45회 의회에서 치안경찰법 제5조 개정안이 통과되 어서 ‘女子及’19)이라는 석 자가 삭제되었다. 여자도 정담연설회에 출석하고 또 발기인이 되고, 혹은 연설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작은 일이지만, 사실은 일본에 있어서 부인참정의 일보를 가져온 것이라 고 생각한다.20) 치안경찰법의 개정으로 여성들도 자유롭게 정사에 가입 할 수 있게 되었고, 의회로 진출하여 여성의 권익을 대변하기 위한 발판은 마련하였지만 1925년 보통선거가 실시될 때에는 여성은 제외되었다. 여성의 선거권은 1945년 일본 17) 婦人公論, 1919.4권.12호 「過去一箇年に於ける我国婦人思想界の回顧」, p.14 18) 新婦人協会(1919.11.24-1922.12.8)는 부인의 사회적 정치적 권리획득을 목표로 하여, 히 라쓰카 라이초(平塚らいてう), 이치카와 후사에(市川房枝), 오쿠무메오(奥むめお) 등을 중 심으로 결성된 일본 최초의 부인단체이고 이 협회와 관련하여 화류병남자결혼제한청원 (花柳病男子結婚制限請願) 운동과 신부인협회에 공명하여 여교원들을 중심으로 히로시 마 현 내에 결성된협회지부에 현(県) 당국에서 압력을 가한 히로시마(広島) 사건, 치안 경찰법 5조개정운동(治警五条改定運動)이 유명하다. 19) 治安警察法 제5조의 全文은 다음과 같다. 治安警察法第5条 第五条 左ニ掲クル者ハ政事上ノ結社ニ加入スルコトヲ得ス 一、現役及召集中ノ予備後備ノ陸海軍軍人 二、警察官 三、神官神職僧侶其ノ他諸宗教師 四、官立公立私立学校ノ教員学生生徒 五、女子 六、未成年者 七、公権剥奪及停止中ノ者 2.女子及未成年者ハ公衆ヲ会同スル政談集会ニ会同シ若ハ其ノ発起人タルコトヲ得ス 20) 婦人公論, 1922.7권.5호 「婦人参政の第一歩としての治警改正」, p.1 한일 신여성의 사회참여관 연구 ··················································································· 우 정 미…281 패전 후 미군정에 의해서 주어질 때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한국에서의 여성 참정권 운동은 국권이 상실된 상황에서 참정권 획득 보다는 오히려 생활개선 운동 쪽으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으나 참정권을 위한 실질 적인 활동은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왜 필요한가를 강조하여 주지시키고 있음은 당시 시대적 조류에서 한국도 비켜 갈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래의 기사들은 남자와 같은 인격체를 가지면서도 사회적인 불평등, 동등하 지 않은 권리가 여성들에게 있으며, 그것을 찾으려면 여성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女子도 自由를 가진한 人格이다. ..(중략)... 男子의 가질만한 自由를 女子도 가 질 수 잇는 것가티 男子의 가질만한 権利면 女子도 지어야할 것은 勿論임니 다. 機会를 充分히 엇지못하게됨은 男女差別上 習慣에 基因됨이 甚히크다하지 마는 그 習慣이일즉 撤廃된 社会에서라도 亦然함은 다른 까닭아니라곳 女子 에게 特権이요 또 免하지 못할 天職인 子女生産教育의 責任을 가진 까닭이라 고하겟슴니다.21) 甚한差別이잇거니와 今日의朝鮮에는 特히이것이甚하다. 첫재로女子는 法律上 에잇서서 未成年者나또는禁治産者와 꼭가튼待遇를밧는다.男便이잇는女子는 男 子의承諾이업시 남과契約할権利가업고 財産을処分할権利가업고 子女에게対하 아 男便과同等의親権을 行使하지못한다.22) 신녀성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지금균등(均等)한대우를주지안는다. 정치에참여할 권리가업고 교육에도균등이업스며 심지어연애에이르기까지 자유가업다. 그럼 으로여러분은 련애에도 자유가잇서야하고 정치에참여하야 자긔들의리해관계 를따라 당연히버릴것은버리고 취할것은엇도록 해야될것이며 위선사람의 지적 (知的)소양에 가장중요한 교육(教育)뎍방면에도 절대의균등이잇도록 로력해야 할것이다. 그에게서남녀의동등이 참으로실현되고 세상은그만큼 리상에갓가워 질것이다.....(중략)...그러니이제부터라도 녀자가참된해방을 원한다하면 또는 참 된자유를 찻고저한다면 생황운동에서 시작지 안으면 안된다고말하고십다.23) 참정권 요구를 위한 한일 양국 여성들의 모습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일본에 서는 단체를 만들고 참정권을 얻기 위해서 법률개정에 주력하지만 한국은 이 미 주권을 상실한 나라였다. 그 상황에서 참정권을 요구하는 것은 오히려 민 족적인 상황을 제대로 이해 못하는 것이 된다. 다만 실질적인 참정권을 얻기 위한 활동에는 제약이 있지만 여성들도 참정권을 가져야 하며, 가지기 위해서 21) 新女性, 1924.2권.8호 10월호 「婦人参政権問題」, p.15 p.20 22) 新女性, 1926.4권.3호 3월호 「婦女의社会的地位」, p.9 23) 新女性, 1926.4권.4호 4월호 「女学生여러분에게告하노라」, p.7 p.8 282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는 우선 여성 스스로의 각성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우고 있다. 침체 적인 한국과는 달리 일본은 선거에 의해 구성된 제국의회가 출범한 이래 많은 시간이 흐른 뒤였고, 다이쇼데모크라시라는 분위기 속에 소수 약자들이 단체 를 만들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 여성들도 스스로 단체를 만들고 회원이 되어서 여성의 권익을 대변해 주는 대표자를 의회로 보 내고자 했고, 의회로 가기 위한 첫 걸음에 치안법 개정으로 성과를 보고 있다. 3.2 남녀동등한 교육권 근대 일본에서의 여성교육은 1872년 학제에 의해 시작되었다. 1886년에는 소 학교 4학년까지는 의무교육이 실시되었고, 1897년에는 여자 취학율이 50%를 넘어섰다.24) 1899년에는 고등여학교령으로 각 현에 고등여학교가 설치되어 남 자에 비해서 부족하나마 여성에게도 근대교육이 점차 확대되고 있었다. 한국 에서는 공교육이 실시되기 전에 1886년 이화학당으로 시작되는 미션계 여학교 와 찬양회에 주도되어 설립된 순성여학교를 비롯한 민간계 여학교가 여성의 교육을 주도하였다. 관립여학교인 한성여학교는 1908년이 되어야 설립된다. 한일 양국 여성 교육은 전근대적인 상황에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제도적인 체 제를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남자 중학교에 해당하는 고등여학교의 수업의 수준은 남자 중등교육에도 못 미칠뿐더러 여성의 교육은 현실과 동떨 어진 부분이 많았다. 이것에 대하여 남녀 동등한 교육과 고등여학교 제도 개 선을 요구하였다. 당시 일본 여성 교육의 실제 모습은 현재의 여학교 교육은 결혼을 유일한 목적으로서 아버지의 손에서 남편의 손 으로 넘겨지는 부인을 만드는 것에 잘 맞추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중 략).....중등정도의 학교에 진학하면 남녀 생도에 대한 대우가 완전히 달라집니 다. 수학 국어 물리 화학 교과서는 특별히 표지에 여자이거나 여자용이라는 문자가 붙여져 있어 여학교 교육 정도는 남자 그것에 비해서 굉장히 낮습니 다.25) 위와 같은 교육 속에서도 여성들이 의식은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내용이 아래와 같은 기사인데 24) 土屋忠雄 외2(1993),『日本教育史』, 学文社. pp.352-354 25) 婦人公論, 1921.6권.8호 「公開狀」「文部大臣中橋徳五郎氏へ」, p.46 한일 신여성의 사회참여관 연구 ··················································································· 우 정 미…283 국가사회에 대한 책임에 대하여, 여자도 남자와 같은 책임감을 가지게 되었 고, 여자의 실력 수양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 교육상 남자와 동등한 교육을 받 고 싶다는 것, 또 여자의 직업도 종래보다도 더 넓은 길을 열려고 하는 등의 경향이 일어나고 있고, 이러한 자각은 억누르려고 해도 제어할 수 없는 것이 니, 오히려 그 길을 개척해가야 한다.26) 사회의 일원으로서 책임의식을 여성들도 가지고 있고, 여성 스스로 실력 수 양이 필요하고, 교육, 직업의 확대를 기대하는 의식이 팽배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부인은 고등교육을 받을 자격이 없고 그들을 원래 능력저급하다고 보는 것은 근거없는 망상이다.....(중략) ....지금의 남자의 고등교육만을 획책하고 부인을 위해서는 하등의 대학 문호를 개방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유감천만이다. 남자 를 위해서는 3,4개의 대학이 있고, 10여개의 고등학교가 있지만 부인을 위해서 동급의 학교를 하나도 설립하고 있지 않은 것은 정말 시대에 뒤떨어져도 너 무 뒤떨어진 것이 아닌가?27) 위의 기사에서는 더 많은 여학교가 설립되어야 하고, 여성을 위한 상급학교 또한 신설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여자 학제를 개선해야 하고, 수업 내용 또한 차별이 없어야 하며 수준 또한 남자와 동등해야 한다고 아래의 기사에서 말하고 있다. 남자 중학교보다도 저급한 열등여학교를 고등여학교라고 부르는 것은 이제 그만두어야 한다. 현재 고녀를 바꾸어 여자중학교로 칭하고 졸업생은 남자 중 학 졸업생과 같은 정도의 전문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그 수준을 높혀야 한 다. 부인이기 때문에 학과를 평이하게 하는 것은 여성을 모욕하는 것이다.28) 또한 ‘실과고등여학교는 물론 고등여학교에 있어서도 여자로 하여금 사회적 으로 눈을 뜨게 하는 데까지는 신경을 쓰고 있지 않다’29)며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남녀가 같은 수준의 교육을 받기를 원하고 있으며, 현 사회에서 요구하 는 것을 체득할 수 있는 교육을 요구하고 있다. 또한 상급학교 진학이 원활하 도록 많은 학교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의 여성들도 배움의 장이 확대되는 것과, 배움의 질이 현실에 적합하고 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는 교육이기를 원했다. 26) 27) 28) 29) 婦人公論, 婦人公論, 婦人公論, 婦人公論, 1919.4권.8호 1919.4권.9호 1919.4권.9호 1918.3권.3호 「世界の舞台に出た日本婦人の使命」, p.41 「早稲田慶応の門戸開放は単に其序幕のみ」, p.16 「早稲田慶応の門戸開放は単に其序幕のみ」, p.17 「日本婦人! 社会的に眼を開け!」, p.30 284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女子도사람인以上에는 女子다운教育을한다는것보다는 사람다운教育을하여야 될것이며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다운品格을유지케하랴면 不可不 独立된 生活 을 維持할만한 能力과 技能부터 鍛錬하여야될것이외다30) 또 여학생의 배움에 대한 열정을 아래와 같은 기사에서 엿볼 수 있다. 우리조선녀자교육도날로날로 진보되고 딸하서 넷달녀학생의 보통과졸업을 만 족하던것이 오날에잇서서는 고등보통학교도 만족치를아니하고 더욱더욱 상급 학교로 가려고하는경향! 다른무엇보다도 일반학과에힘쓰는것을 엿볼수잇슴니 다....(중략)....지금의 녀학생들에게는 기예(技芸)보담도학과(学科)를더 요구함니 다.31) 그러나 실제의 교육현장에서 실시되는 여자 중등교육의 질은 남자 중등에 미 치지 못하는 수준이었고32) 실제성과 현실성에서 벗어난 교육33)에 아래와 같은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오늘날学校와 会社와는全혀分離되여잇슴니다 学校는学校대로社会와는 아조따 른 別個의立体로되여잇슴니다 우리学校教育은너무나 封銷的이고 保守的이라 는거슨 一般社会가아는바임니다만은 우리를 가르키는 女学校들은 너무나 封 建的態度를取함니다 社会를버서나는学校의教育이무슨必要가잇겟슴닛가34) 또한 상급학교로 진학을 하고 싶어도 진학할 학교가 없었다. 참말로 입학할곳이업는것이사실임니다. 보통학교우에 소위 고등보통의五년급 이잇는외에 소학교교원양성소인 사범학교가한가지밧게는 여자를위하야의시설 이하나도업슴니다. 새로운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녀성은 결코 편지ㅅ장이나쓰 고 신문ㅅ장이나보는지식으로 브억이나직혀주는예전식현처(賢妻)는아니임니 다. 엇더케고등보통학교뿐으로 될수잇겟슴니가 고등보통학교이상의 여자교육 시설이하나도업는것이 소위사회유지자들사이에 의론거리도되지못하는것을보 면35)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여성을 배출하기 위해서는 상급학교가 필요 하고, 아울러 고등보통학교를 나누어서 초급3년, 고급3년으로 할 필요가 있으 30) 31) 32) 33) 34) 35) 新女性, 新女性, 新女性, 新女性, 新女性, 新女性, 1925.3권.1호 1월호 「내가女学校当局者이면」, p.18 1925.3권.1호 1월호 「十年前女学生과 只今女学生」, pp.15-16 1931.5권.4호 5월호 「女学校卒業生移動座談会」, pp.66-69 1933.7권.1호 1월호 「処女座談会」, pp.19-20 1926.4권.1호 1월호 「社会科学을우리에게」, p.12 1925.3권.11호 11,12월합본 「新女性의五大煩悶」, pp.14-27 한일 신여성의 사회참여관 연구 ··················································································· 우 정 미…285 며, 교육의 내용도 시급히 개선되어야 한다36)고 주장한다. 교육내용 중에는 ‘모성중심교육’을 피력하는데 그 이유로 ‘긴급한 국민에게는 무엇보다도 만흔 조혼 어머니가 필요하다‘37)라고 하였다. 이것은 주권을 상실한 나라의 미래를 보장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양국에 있어서 고등여학교는 남자 중학교에 해당이 된다. 그러나 교육 내용 은 남자 중학교에 비해서 현저히 떨어지면서 이름만 고등여학교라 한 것은 여 자가 이 정도 배우는 것은 고등과에 속한다는 의미에서 지어졌다. 근대 초기 여성을 위한 교육제도를 만들 때 남성의식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것은 근대 교육을 받은 여성들의 숫자가 늘어가고, 중등정도의 수준을 마친 여성들의 배 움에 대한 갈증은 양국 다를 바가 없다. 교육 수준 향상과 학교제도의 개선이 급무라고 주장하는 것도 같다. 다만 양국의 차이라면 일본은 한국보다 일찍 시작한 의무교육으로 인하여 동시대 여자 식자층이 한국보다 훨씬 컸었고, 학 교 수도 많았다. 교육의 내용면에서 한국은 일본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 었지만 한국 실정에 맞는 민족교육과 차세대를 위한 모성중심의 교육이 실시 되었다. 3.3 계몽활동 1910-20년대 일본 사회는 다양한 계층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어 자신들의 권익을 찾고자 하였다. 여성을 중심으로 하는 단체 활동도 예외가 아니었으나 참정권 요구나 동등 교육권을 요구하는 등 권리 획득을 위한 사회참여 외에도 개인적인 힘으로 사회 계몽활동에도 적극적인 참여를 하고 있다. 1) 여자의 경제적 독립은 모성이 보호되고 자녀를 낳고 동시에 키우는 것이 공적인 사업이 되고, 국가가 모친에 충분한 보수를 지불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것에 의해서만이 부인은 가정생활과 직업생활 사이에 일어나 는 힘든 모순에서 벗어날 수 있으므로 제가 볼 때는 모성 보호야 말로 여자 의 경제적 독립을 완전히 실현하는 유일한 방법이고 모성을 보호하지 않고 여자의 경제적 독립을 말하는 것은 공론이다.38) 2) 폐물이용은 소극적인 방법이다. 경제의 한 부분으로 얘기해도 소극적인 경 제이다. 폐품 이용을 가정적으로 행하는 것 보다는 이러한 폐품을 폐품으로 하지 않고 훌륭하게 활용할 수 있는 방면으로 넘기고 사회적으로 폐품이용의 길을 찾아야 한다. 폐품이용은 말할 것도 없이 머릿속에 두어야 할 일은 분명 36) 新女性, 1931.5권.5호 6월호 「女子教育改新安」, pp.8-12 37) 新女性, 1925.3권.1호 1월호 「내가女学校当局者이면」, p.19 38) 婦人公論, 1918.3권.8호 「母性保護問題に就いて再び与謝野晶子氏に寄す」, p.41 286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하지만 가정적으로 폐물 이용보다는 사회적 국가적인 폐품 이용이 훨씬 현명 한 방법이다. 39) 3) 공창은 정부가 인정한 것이고 이것을 갖고 노는 것은 남자의 특권이다. 동 시에 죄악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부덕문란의 죄악을 죄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만큼 무서운 도덕 유린이 어디에 있겠는가?40) 1)은 모성보호 논쟁에 있어서 국가가 모성을 보호해야 한다는 히라쓰카의 주 장이다. 사회적인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던 논쟁이었고, 2)는 폐품이용을 하는 데 있어 개인적인 것보다 사회적인 차원에서 재활용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 을 3)은 메이지 시기 때부터 국제적인 문제가 되기도 했던 공창의 비도덕성과 비윤리성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부인의 건강과 건강한 아이 출산을 위해서 산아제한은 필요한데, 이것이 비도덕적으로 이용될 우려도 있지만 한 개인의 입장에서 보아도, 가족의 입장에서 보아도 국가의 입장에서 보아도 또한 국제 상에서 보아도 상상이상으로 중요하다41)는 산아제한 운동이 있다. 이 외에도 신부인협회가 주관했던 ‘화류병남자 결혼제한청원’운동이 있고, 사회적인 편견 을 극복하려는 수평사 운동에도 관심과 동조를 하고 있다. 일본 여성의 다양한 사회관심도와 참여에 비하면 한국 여성의 사회참여는 다 양성을 갖지 못하고 있지만 생활개선이나 농촌부인 계몽 활동에 적극적이었 다. 우리네의衣服은身体発育과自由動作에障碍가업지안타 龋를들면女子의옷은第一 重要한部分인乳房을束縛하여왓다 그것은衛生에도多大한害毒이밋칠뿐더러肉体 美에도적지안은損失이다 그뿐아니라 풀을먹여서죽어라하고 다듸미질을하야풀 칠한白紙帳가튼옷을걸치는것이空気流通에는利害関係가밋친다할지라도 第一몸 을動作하는데에거북살스럽고 쉽게傷하는弊가잇다 그外에곳칠것이만치마는 그 것을먼저改良에着手할必要가잇다42) 위의 내용은 한복의 불편함을 개량하여 건강상과 편리함을 도모하자는 내용 이다. 이런 생활 개선 운동과 더불어 농촌 여성에 대한 계몽운동에 적극적인 참여를 하는데 우선 왜 농촌 부인을 계몽해야 하는가하는 문제제기를 들여다 보면 39) 40) 41) 42) 婦人公論, 1918.3권.8호 「廃物利用展覧会を観る」, p.62 婦人公論, 1921.6권.3호 「芸妓春奴さまへ」, p.23 婦人公論, 1920.5권.8호 「我国の現状に照して観た避妊不可論」, pp.41-42 新女性, 1924.2권.11월호 「美観上으로보아서」, p.9 한일 신여성의 사회참여관 연구 ··················································································· 우 정 미…287 朝鮮女性은無知에만이우럿다 더욱農村婦人은貧窮에도우럿스려니와 無知에도만이 우럿다 無知한農村婦人들의앞레는 暗黒과破滅만이잇고 光明과創造가업다. 農村 婦人의自覚이잇고 그들이動하는때가 우리女性에活気가돌고 그리고우리의運命이 決定될것이다. 그들의게知識을준그것이 무엇보담도우리의急務임을아라야겟다43) 농촌 부인에게 지식을 주고 그들을 일깨우는 것은 그들을 위하는 것이 아니 라, 우리 스스로를 위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각 위에 ‘農村의早婚의 悪習부터 打破할것, 食物과営養価値에対한常識을 発達식할것, 衛生에 対한思想 을 涵養식할것, 運動에 対한観念을 振作식할것, 産前産後에 対한摂養方式을 知 得케할것, 睡眠과 娯樂의 機会를 지을것’44) 등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고 목표 달성을 위해서 농촌으로 돌아가서 우리婦人運動의入口인啓蒙運動으로부터 始作하자. 우리가学校에서밧은教育, 至 誠그것을다시郷村에잇서学에주리여하는文盲의女性들에게가르켜주자 깨우처주 자 高尚한科学的知性이所用되지안는다. 오즉初歩이니諺文뿐이라도좃타.45) 농촌의부녀를모아놋코 강습회를하십시오 누에를처보십시오 밧테가서 어머니 와가티 김을매십시오 어린동생들과가티 강변에나아가 소나말를멱여보십시오 흙냄새를 슬컷맛터보십시오 그리하야 자연의 맛이엇던가 농촌의맛이엇던가 도회처에비해서 얼마나 조흔가를 실지로 체험해보고46) 이런 계몽활동에 힘입어 여학교 학생들은 방학을 이용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야학을 열어 언문을 가르치고, 위생관념도 고취시키고, 각성시키고자47) 하였 다. 또한 아래의 기사가 말하는 부인과 건강한 자녀를 위한 산아제한 운동도 있었다. 인유의반수를 점영하고잇는부인의행복을 일우게하며 출생된자녀에게대해서도 어머니로서의 완전한책임을 다하게하여 무제한한출산(出産) 때문에 죽어업서 지는 어머니와 子女가 엄시할수일슬뿐안이라 넘치는출산으로해서생기는 모든 사회적해악을 소멸식힐수가잇다48) 일본 사회 특수적인 폐창운동이나 수평사 운동을 제외한 모성보호운동, 폐품 43) 44) 45) 46) 47) 48) 新女性, 新女性, 新女性, 新女性, 新女性, 新女性, 1926.4권.1호 1925.3권.1호 1925.3권.8호 1925.3권.8호 1925.3권.8호 1932.6권.3호 1월호 1월호 8월호 8월호 8월호 3월호 「농촌부인과계몽운동」, p.40 「緊急動議함니다」농촌여성문제에대하야, p.8 「郷村에도라가는女学生諸君에게」pp.2-5 「시험삼아호믜(鋤)를쥐여봅시다」, p.11 「夏期休暇에帰郷하는京城女学校学生의抱負」, pp.13-16 「朝鮮女性과産児制限」, p.12 288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활용, 산아제한, 소비자운동 같은 것은 미약하긴 하지만 한국에서도 그러한 운 동이 여성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그것과 같은 사회적인 관 심을 모아 어떤 성과를 거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여성 인권의 보호, 모체의 보호를 기조로 하는 계몽적인 글들은 끊임없이 여성들을 자극하고 있었다. 다 양성을 가지고 있는 일본에 비하여 한국의 여성들은 농촌계몽활동에 적극적으 로 참여하고 있다. 무지한 농촌 여성들을 일깨우는데 가장 필요한 것은 글자 를 깨우치는 것이라 여겨 여학교 재학 중이거나 졸업생들이 농촌 여성들에게 언문을 가르치고, 그들에게 지식을 주고 일깨워 주려고 했다. 4. 맺음말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사회구성원의 한 사람으로 사회참여 할 때 다양한 잣 대가 있겠지만 본고에서는 참정권 요구와 남녀동등 교육권의 요구, 계몽활동 적인 면에서 살펴보았다. 참정권 요구에서 일본여성은 참정권을 얻기 위한 노 력은 체계적이고, 구체적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치안경찰법 5조 1,2항의 개정 을 하였고, 그것이 발판이 되어서 입법의 장으로 여성들이 갈 수 있는 길을 만들었다. 한국의 여성들에게 참정권은 국권 회복이 되지 않은 시기라서 요구 할 상황이 아니었지만 왜 필요한가에 대한 이론적인 알림의 노력은 있었다. 시간적인 차이는 있지만 양국 여성들이 요구한 남녀동등 교육 요구는 비슷했 다. 이름은 고등여학교이나 실질적인 교육은 현실과 동떨어지고 남자의 교육 수준에도 훨씬 떨어져 사회구성원의 일원으로서의 역할을 해 낼 수 없는 교육 에 대한 비판과 남녀 동등한 교육 요구는 양국 여성들의 의식이 성숙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일본과 달리 한국여성에게는 민족의식과 차세대를 위 한 여성교육이 강조되는 면이 있었다. 계몽활동 면에서도 일본은 다양한 방면 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실질적인 활동에도 적극적이나 한국은 거기에 비하 면 단조롭다. 일본의 영향을 받은 제 방면의 계몽의식 고취는 있으나 실천에 있어서는 미비했다. 그렇지만 농촌부인 계몽운동에는 적극적인 참여를 하였고, 그것은 한국 여성들에게 일종의 사명감 같은 것이었다. 1910-20년대 일본의 활발한 단체 활동의 영향은 한국사회에도 적지 않은 영 향을 미치긴 하나 한국은 식민 상태였기 때문에 여성운동 이전에 사회 운동 자체가 통제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3.1운동이후 일본의 식민지에 대한 통치방 법의 전환을 계기로 여성의 사회참여와 그것을 이끄는 사회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긴 하나 일본 여성들이 가지고 있었던 다양성과 실천성에는 미치지 못 한일 신여성의 사회참여관 연구 ··················································································· 우 정 미…289 하는 한계가 있다. 【参考文献】 『婦人公論』1916년 발간 『新女性』1923년 발간 김정연(1996), 「근우회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신영숙(1989), 「일제하 한국여성사회사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스가하라유리(2003), 「1920년대 여성운동와 근우회」, 연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p.3 아사오 나오히로 저, 이계황 외3 역(2003), 『새로 쓴 일본사』, 창비 p.476 안선호(1976), 「우리나라 여성 운동의 사적 고찰」,『법경논총』11호 p.148 오숙희(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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について日本は限られている環境のなかでも政党加入、集会に参席できる法律的な根拠を獲得したが韓国 は国権のない状態であって積極的な活動はできなかったが理論的に分かろうとした。男女同等の教育を要求 するのに韓国と日本はほとんど同じである。これは当時、すでに両国女性の意識が成熟していることをあらわ すことだと思う。教育内容については韓国女性には民族意識の高揚と次世代のための女性教育すなわち母 性教育を強調する面があった。啓蒙活動の面では日本は多様な方面に関心をもっていて、実際の活動にも 積極的であるが韓国は日本の女性にくらべると簡単であった。日本の影響をうけながら諸方面への啓蒙意 識はもっていたが行動力はあまり高くなった。しかし農村の婦人啓蒙運動には積極的に参加していた。それは 韓国の新しい女たちには一種の使命感のようなものであった。 1910-20年代、日本の活発な社会諸運動は韓国社会にも多くの影響を及ぼしたが、韓国は植民地の状 態であったので女性自身の諸運動(諸活動)以前に社会運動そのものが日本から制限されていた。しかし 3․1運動以後から日本の文化政策の下で女性の社会参与は活発になったが日本の女性が持っていた多 様性と行動力までは及ばなかった。 キーワード;新しい女、『婦人公論』,『新女性』, 参政権、 教育権、 啓蒙活動 투 고 : 2008. 8. 31 1차 심사 : 2008. 9. 12 2차 심사 : 2008. 9. 27 에도시대 한 여성 지식인의 유교인식 -다다노 마쿠즈(只野真葛)의 獨考 를 중심으로- 林 泰弘* 1) (e-mail : [email protected]) 目 次 1. 머리말 2. 獨考 의 사회문화적 배경 2.1 마쿠즈의 아버지 2.2 마쿠즈 시대의 사람들 2.3 다키자와 바킨과 독고 2.4 독고 집필의 개인적인 배경 3. 유교에 대한 비판 3.1 성인의 도 3.2 이기론 3.3 인의예지 3.4 공자 성당 4. 마쿠즈의 유교적 사유방식 4.1 완전부정이 아닌 대안의 제시 4.2 유교 도덕적인 삶의 추구 5. 맺음말 1. 머리말 다다노 마쿠즈(只野真葛, 1763-1825)는 에도시대의 수필가, 철학자, 시인, 여류사상 가 등으로 알려져 있다. 막부 말기에 불행한 삶을 살면서도, 특히 여성들에게는 여러 가 지 사회적인 제약이 많았던 시기에, 사회문제에 대해서 과감한 비평을 함으로써 ‘사회비 판자’, ‘고독한 도전자’,1) ‘여성해방의 선구자’2) 등의 평을 듣기도 하였다. 마쿠즈의 저작으로는 昔ばなし(옛날이야기) (1811-1812), 奥州ばなし(동북지방 이 *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 동아시아 근대사상 전공 1) 門玲子, 「只野真葛その文学と思想―孤独な挑戦者」, 江戸期おんな考 7, 桂文庫, 1996 참조. 2) 宮沢民子, 「幕藩制解体期における一女性の社会批判―只野真葛の「独考」を中心に」, 研究 423, 1975.8, p.17. 歴史学 292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야기) , 独考(독고) (1817), 磯づたい(물가를 따라서) (1818), キリシタン考(크리스찬 고찰) 등이 있다.3) 여기서는 이 가운데 독고(独考, ひとりかんがえ, 혼자 생각 4)를 중심 으로 그 속에 나타난 유교에 관한 인식을 살펴보고자 한다. 다다노 마쿠즈에 대해서는 일본에서도 아직 연구가 활발한 편이 아니다. 주로 문학연 , 그동안 그의 사상에 대해 구자 또는 여성학 연구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해왔는데 서는 약 10여 편의 연구논문이 발표되었다. 비교적 빠른 시기의 연구로는 미야자와 타미코(宮沢民子)의 「幕藩制解体期における 一女性の社会批判―只野真葛の「独考」を中心に」(1975년)가 있다.5) 이 논문은 마쿠 즈의 사상형성에 관해서, 자연관과 인간관, 사회사상 그리고 여성사상에 대해서 다루었 는데, 여성해방 운동, 계급투쟁 및 사회구조적인 모순 문제의 차원에서 마쿠즈 사상을 분 석한 것이다. 1980년대와 90년대 연구는 주로 스즈키 요네코(鈴木よね子)에 의해서 이루어 졌다. ①「只野真葛「奥州ばなし」―異界発見の一過程」, ②「反真葛論―「独考」一件をめ ぐって」, ③「「独考」試論―その方法と実学 国学の影響」, ④「近世後期における主体 と表現―只野真葛をめぐって」 등의 논문이 그것이다.6) 이중에서 논문②는 독고 에 보이는 마쿠즈 자신의 자전적인 기록을 100% 그대로, 사실의 모습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문제가 있다는 점을 분석하였다. 독고 는 소설가 다키 자와 바킨이나 사회 대중을 염두에 두고 집필된 것으로, 그녀의 사적인 기록인 다른 자 료와 비교해보면, 마쿠즈에게는 ‘세상에 알려지고 싶다’는 욕망이 의외로 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동시에 현실과 분열되고 있는 한 인간의 모습이 자주 나타난다고 하였 3) 마쿠즈의 문장은 鈴木よね子校訂의 只野真葛集 (叢書江戸文庫30, 国書刊行会, 1994)에 거 의 다 수록되어 있다. 이 논문에서 원문 인용은 주로 이 책을 이용한다. 참고로 비교적 잘 알려져 있는 마쿠즈의 일부 문장은 다음과 같이 단편적으로 번역되었거나 출판되어 있다. 須永朝彦訳, 「影の病 : 「奥州波奈志」より」, 東雅夫編, 書物の王国 , 国書刊行会, 1999; 中山栄 子校注, むかしばなし:天明前後の江戸の思い出 , 平凡社, 東洋文庫433, 1984; 上田秋成, 「磯 つたひ」, 婦人文庫刊行會, 婦人文庫 第4回 文集 1914년. 마쿠즈 관련 서간 자료도 門玲子 등의 只野真葛あての妹萩尼からの書簡(翻刻)」( 江戸期おんな考 12, 2001); 門玲子의 「只野真 葛の夫伊賀あて書簡」( 江戸期おんな考 11, 2000)에 일부가 소개되어 있다. 4) 독고 는 Janet R. Goodwin, Bettina Gramlich-Oka, Elizabeth A. Leicester, Yuki Terazawa, Anne Walthall 등이 영문으로 번역하여 “Solitary Thoughts: A Translation of Tadano Makuzu's Hitori Kangae”라는 타이틀로 Monumenta Nipponica (56:1, 2001), 56:2, 2001)에 실었는데, 번역에 이 자료도 참고하였다. 5) 이 논문은 関民子의 江戸後期の女性たち (1980年, 亜紀書房)에 「幕藩制社会の総体的批判 者の登場―只野真葛とその思想」라는 글로 재수록된 것으로 추측됨. 6) ①鈴木よね子, 「只野真葛「奥州ばなし」―異界発見の一過程」, 都大論究 23, 1986.3; ②鈴木 よね子, 「反真葛論―「独考」1件をめぐって」, 日本文学 36-1, 1987.1; ③鈴木よね子, 「「独考」 試論―その方法と実学 国学の影響」, 都大論究 通号24, 1987.3; ④鈴木よね子, 「近世後期にお ける主体と表現―只野真葛をめぐって」, 日本文学 44-10, 1995.10. 에도시대 한 여성 지식인의 유교인식 ······································································· 林 泰 弘…293 다.7) 논문③은 독고 가 경세실학(經世實學)과 국학의 영향을 받아 집필되었다는 점을 검 토한 논문이다. 경세실학은 가이호 세이료(海保青陵, 1734-1800) 사상과 비교하여, 세 이료가 주자학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사회인식의 수단을‘내가 나를 본다(我觀我)’, ‘나는 사물이다(我爲物)’라는 명제를 세우고 ‘자기를 객관시 할 것’과 ‘자기 중심주의로 부터 해방될 것’ 등 두 가지 자기수양 방법을 제시한 것은 마쿠즈가 ‘천지 간의 박자’를 발견 한 계기가 유사하다고 보았다. 그것은 ‘현상을 대상화하는 사유방식’으로, 첫째는 사람의 마음이 몸을 빠져나가서 하늘에서 세상을 보는 것이며, 둘째는 ‘이상함’, ‘혼자 생각함’ 등 을 기본적인 사유 방법으로 제시한 것이다. 국학의 영향은, 1) 남자는 남는 부분이 있으 며 여자는 모자라는 부분이 있다는 고사기 의 문구를 이용한 ‘육체의 사상’을 거론 한 점, 2) 독고 의 ‘國’은 ‘번(藩)’이나 ‘일본’뿐만 아니라 ‘황국(皇國)’의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는 점, 3)가모노 마부치(賀茂真淵, 1697-1769)의 국의고(國意考) 로부터 세계관, 인간관 등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든다. 예를 들면 마부치가 제시한 사상에는 어떤 일정한 법칙성을 가지고 있는 자연의 리듬이 ‘사시(四時)’나 ‘천지(天地)’와 함께 존재하 는데, 독고 의 ‘천지간(天地間) 박자’도 그렇다는 것이다. ④번 논문에서 스즈키는 마쿠즈의 문장을 ‘자신의 이야기’로 정의하고, 문학작품으로 서는 에도시대에 보기 드믄 사례라고 지적하였다.8) 아울러 다음과 같이 그러한 특징을 분석하고 있다. 마쿠즈의 문장은 “쓰는 행위로부터 생겨났지만, 텍스트로서 일정한 형태 를 가지지 않는 것이다. 단독이아니라 많은 텍스트의 집합체 가운데 존재하여 재생산․ 변형․재구성이 가능하다. 그러나 재생산․변형․재구성이라고 하는 반복적인 작업 가 운데, 소위 텍스트가 서로 다를 뿐만 아니라 말하는 뉴앙스도 조금씩 다르다.”9) 스즈키 요네코는 이러한 일련의 연구 끝에 只野真葛集 (1994, 国書刊行会)을 출 판하기도 하였는데, 그의 마쿠즈 연구는 비교적 치밀하고, 마쿠즈의 심리를 분석하는데 뛰어난 특징이 있다. 스즈키 요네코 이후로는 本田和子의 「父になり得ぬ娘の嘆き」,10) 門玲子의 「只野真 葛その文学と思想―孤独な挑戦者」(1996), 高橋恵의 「只野真葛の思想」,11) 別所興一 의 「只野真葛の貨幣經濟認識と儒教批判」,12) Bettina Gramlich-Oka, 2004.6, 7) 鈴木よね子, 「反真葛論―「独考」1件をめぐって」, p26. 8) 鈴木よね子, 「近世後期における主体と表現―只野真葛をめぐって」, p.43 참조. 9) 鈴木よね子, 「近世後期における主体と表現―只野真葛をめぐって」, p.51. 10) 本田和子, 「父になり得ぬ娘の嘆き」, 江戸の娘がたり , 朝日新聞社, 1992. 11) 高橋恵, 「只野真葛の思想」, 年報日本思想史 創刊号, 2002.3. 12) 別所興一, 「只野真葛の貨幣經濟認識と儒教批判」, 自然と実学 2 (特集 貨幣支配文明の克服 と東アジアの実心実学―第六回東アジア実学国際シンポジウム), 2002.3. 294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Kirishitan Kô by Tadano Makuzu: a late Tokugawa woman's warnings”,13) 前 田勉의 「只野真葛の思想―国学と蘭学との交錯」14) 등이 발표되었다.15) 이중 다카하시 메구미(高橋恵)의 연구는 마쿠즈가 독고 를 쓰게 된 간절한 동기는 무엇이었는가 하는 점을 주목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그동안 연구는 마쿠즈가 1)세상에 출세하고 싶다는 욕구 2) 집안의 명예를 계속 유지하고 싶다는 욕구에 의한 것이라고 보 았다. 아울러 다카하시는 “효심이 없었다면 마쿠즈의 생각, 마쿠즈의 사상은 문장으로 표현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사상은 당시의 사상인 유교를 충실히 실천한 결과, 불행하게 되었다고 하는 자기 체험으로부터 얻어진 것이었다. 그 때문에 마쿠즈의 사상은 당시 체 제를 비판하는 유교비판이었다. 따라서 마쿠즈의 독고 는 치열한 효심에 의해서 집필된 것이지만 그 내용은 유교를 비판한 것이라는 특징을 지닌 것이다”16)라고 지적하였다. 결 국 마쿠즈의 유교 비판 이면에는 유교적인 ‘효심’이 자리 잡고 있다고 본 것이다. 벳쇼 코이치(別所興一)의 논문은 2002년에 동아시아 실학 국제심포지엄에서 발표된 것으로 실학의 측면에서 마쿠즈의 사상 배경, 인간관, 화폐경제 인식과 유교 비판 등의 문제를 검토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마쿠즈는 유교를 단순히 중국인이 만든 하나의 법 (法)을 차용한 것이라고 비판하고, 일반인에게는 장식도구와 같은 것으로 , 실생활에 도 움이 되지 않고 자칫 잘못했다가는 오히려 다칠 수 있는 가르침이라고 보았다고 했다. 또 마쿠즈는 유교와 불교사상을 상대화한 새로운 경지에 도달했는데, 그것은 일종의 깨 달음의 경지로, 사람이 자신의 몸에서 마음을 자유스럽게 하여 하늘 위에서 인간 사물을 바라보는 경지였다고 지적하였다.17) 이 글은 그동안의 이러한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마쿠즈의 유교인식을 분석, 재검토하 고자 한다. 특히 유교에 대한 비판을 완전한 부정이 아닌 대안제시의 측면에서 고찰한다. 13) Bettina Gramlich-Oka, 2004.6, “Kirishitan Kô by Tadano Makuzu: a late Tokugawa woman's warnings”, Bulletin of Portuguese-Japanese Studies, Vol8, Universidade Nova de Lisboa. 14) 前田勉, 「只野真葛の思想―国学と蘭学との交錯, 日本文化論叢 (12), 2004.3. 15) 이외에도 개설적인 내용의 논저를 소개하자면, Bettina Gramlich-Oka, 2001, “Tadano Makuzu and her Hitori kangae”, Monumenta Nipponica 56; 門玲子, 「江戸時代の女流思想 家 只野真葛」, 藤原書店, 環 6, 2001.7; 今井伸子, 「只野真葛考」, 鶴見日本文学 7, 2003.3 등이 있다. 1930년대에 출판된 마쿠즈의 전기 只野眞葛 (中山榮子著, 丸善株式會社, 1936)도 마쿠즈 연구에 중요한 서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국립중앙도서관에서도 전자북 으로 공개하고 있는 이 자료는 마쿠즈의 일생, 저서, 연표, 가족 관계 등이 상세히 소개되 어 있다. 마쿠즈와 관련한 소설도 葛の葉抄-あや子、江戸を生きる- (永井路子저, PHP文 庫)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어 있다. 16) 高橋恵, 「只野真葛の思想」, p.46. 17) 別所興一, 「只野真葛の貨幣經濟認識と儒教批判」, 발표원고 중 p.5 참조. 에도시대 한 여성 지식인의 유교인식 ······································································· 林 泰 弘…295 2. 獨考 의 사회문화적 배경 2.1 마쿠즈의 아버지 다다노 마쿠즈는 센다이번(仙台藩)의 무사집안 출신으로 의사인 구도 헤이스케(工藤 兵助, 1734-1800)의 딸이다. 헤이스케는 원래 기슈(紀州)번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나중에 센다이번으로 양자를 가, 구도 집안의 대를 이었다.18) 구도 헤이스케는 딸인 마쿠즈가 한문 공부를 못하게 하였다. 독고 의 첫머리에 마쿠 즈는 이렇게 적고 있다. 돌아가신 아버님은 그분 나름의 생각이 있어서, 내가 한문 읽는 것을 금지해 나는 그것을 읽어도 뜻을 잘 알지 못한다. 더구나 불교 문장은 한 줄도 모른 다. 그러나 부처도 성인(聖人)도 모두 세상의 마음 쓸 일로부터 벗어난 사람 들이라고 생각한다. 이것만을 마음의 길잡이로 삼아, 최근 몇 년간 한가한 틈 을 타 깊이 생각을 거듭하였다.19) 아버지의 반대로 한문을 공부하지는 못했지만 불교(부처)와 유교(聖人, 성인)에 대한 어느 정도의 교양은 갖추었던 것 같다. 인용문을 보면 나름대로 부처와 성인에 대한 개 념정의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남동생으로부터 유교의 기본적인 경전에 대해 서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었다. 대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을 두는 곳이 있어서 거기에 매달려 한평생 을 다하는 것이다. 마쿠즈처럼 이상하게 마음을 두는 곳도 없이 이 세상을 사 는 사람은 또 없을 것이다. 사물에 대해서 알고 싶더라도 거기에 집중해서 서 있을 수가 없다. 문장을 읽는 것은 좋아하지만 중국의 문자를 모르니 읽을 수 도 없다. 모토스케(남동생)가 사서(四書) 이야기를 한번 들려주었을 뿐이라, 마음에 남아 있는 것도 없다.20) 동생 모토스케로부터 ‘사서’에 대해서 잠깐 배운 적인 있으나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이 없다고 하였다. 한문을 모르니 아무리 상세한 설명을 들어도 깊이 있는 이해는 어려웠을 것이다. 마쿠즈는 독고 를 집필하면서 자신의 공부가 너무 부족한 것을 절감하였는데, 그 점 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언급하였다. 18) 前田勉, 「赤蝦夷風説考」, 日本思想史辭典 , (ぺりかん社, 2001), p.3 19) 只野真葛, 獨考 (鈴木よね子校訂, 只野真葛集 ) p.261. 20) 只野真葛, 獨考 , p.290. 296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간신히 생각해낸 것을 모두 풀어내고자 하였다. 과연 가슴이 후련하지 않는 기분으로 너무도 이상한 혼자만의 생각을 기록하였다. 속된 말로 표현한 곳도 있는데, 마음이 너무 빨라 따라가기 힘든 부분은 모두 구어체를 섞어 썼다.21) 생각을 바로 글로 정리하기 어려운 부분은 생각나는 대로 속된 말을 사용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2.2 마쿠즈 시대의 사람들 마쿠즈 아버지는 마쿠즈가 한문 공부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자신은 당시로서 는 상당한 지식인이었다. 마쿠즈는 독고 에서 자기 아버지를 난학자(蘭學者)22)로 소개 하였는데, 구도 헤이스케는 러시아사람들에 대한 풍문을 정리하여『붉은 오랑케에 대한 풍문 고찰(赤蝦夷風説考, 아카에조 후세쯔코)』라는 책을 저술한 바 있다. 이 책은 1783년에 완성된 것으로 러시아 사정과 러시아의 남하에 따른 대응책을 정리, 제시하고 있다. 러시아의 문자나 토산물 등에 대한 이야기도 실려 있는데, 헤이스케는 이 책을 통해서, 러시아는 일본을 침략하려는 음모를 가진 것이 아니라 일본과 교역을 원하 고 있다고 주장하고 홋카이도에서 벌어진 노략질을 단속하기 위해서 광분하기 보다는 교역을 공인해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또 교역 자금으로 홋카이도의 금은 광산을 개발해, 채굴하도록 주장하였다.23) 당시로서는 상당히 진보적인 견해였는데 이러한 개방적인 생각은 그의 딸 마쿠즈에게 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독고 에는 그러한 영향을 추측할 수 있는 문장들이 여기 저기에 보인다. 예를 들면, ‘중권(中巻)’ 부분에 러시아와 일본의 관계, 당시의 경제사회 적인 동향에 대해서 비판적인 논의가 보인다. 구도 헤이스케는 특히 당시 나카가와 준안(中川淳庵), 카쓰라가와 호슈(桂川甫周), 오오쓰기 겐타쿠(大槻玄沢)24)등 난학자들과도 깊은 교류가 있었다. 앞서 소개한 그의 책도 사실은 이들 난학자들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은 것이었다. 그 자신은 네델란드어를 읽지 못했다.25) 다다노 마쿠즈가 살았던 시기는 명치유신으로부터 약 40여년전으로, 일본 최초로 전국 을 일주하고 측량하여 지도를 만든 이노우 타다타카(伊能忠敬, 1745-1817), 우키요에 (浮世絵)로 유명한 카츠시카 호쿠사이(葛飾北斎, 1760-1849), 소설가 다키자와 바킨 21) 只野真葛, 獨考 , p.261. 22) 只野真葛, 「獨考」巻の中, 鈴木よね子校訂, 只野真葛集 , p.282. 23) 前田勉, 「赤蝦夷風説考」, p.3. 24) 오오쓰기 겐타쿠는 1774년에 『解体新書』를 번역한 스기타 겐파쿠(杉田玄白,1733-1817) 로부터 난학을 배워, 『重訂解体新書』(1798)를 간행한 바 있다. 25) 前田勉, 「赤蝦夷風説考」, p.3. 에도시대 한 여성 지식인의 유교인식 ······································································· 林 泰 弘…297 (滝沢馬琴, 1767-1849)등이 활약하던 시기였다. 2.3 다키자와 바킨과 독고 바킨은 특히 마쿠즈가 나이 55세 되던 해에 집필한 독고 를 직접 읽고 그것을 비판 하여 독고론(獨考論) , 마쿠즈라는 여인(真葛のおうな) 등을 쓰기도 하였다. 원래는 마쿠즈가 자신의 문장을 출판하기 위해서, 당시 이미 유명하게 된 소설가 바킨에게 독 고 를 읽고 교정을 부탁하였다. 당시 막부는 아무나 함부로 서적을 출판하지 못하게 하 였는데, 그러한 엄격한 막부의 출판 통제를 피하기 위한 방법이었다.26) 마쿠즈는 바킨에게 독고 를 보내면서 다음과 같은 부탁을 하였다. 만약 이 글을 싫어하고 비난할 정도라면 그런 사람은 두려워할 가치도 없습 니다. 자비스러운 생각이 가슴에 넘치고 슬픔의 눈물이 소매를 적십니다. 우 리나라 사람들은 각자 자기 혼자의 몸만을 풍족하게 하려고, 외국에 대해 두 려움도 느끼지 못하고 나라의 낭비도 개의치 않습니다. (중략) 이러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 마쿠즈는 사람들의 미움을 받더라도 마음이 아프거나 서운해 하 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시어, 삼가 이 글을 읽어주시길 바라옵니다.27) 바킨은 처음에는 마쿠즈의 의뢰에 호감을 가지고 대응하였다. 그러나 마쿠즈가 독고 를 세상에 보이려고 마음먹었을 때 걱정하였던 일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바킨에게서 일어났다. 바킨은 어느 날 갑자기 독고 의 내용이 너무 과격하고 세상의 인식과는 너무 동떨어 져있다고 판단하고, 출판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신랄하게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비판이 글로 정리된 것이 그의 독고론 이었다. 결국 마쿠즈가 심혈을 기울여 집필한 독고 는 출판되지 못하고 마쿠즈는 깊은 충격을 받고 그로부터 약 5년 뒤에 세상을 떠나 고 말았다. 독고 가 세상에 일찍이 소개되지 못한 이유다. 바킨은 나중에 마쿠즈의 소식이 궁금하여 주위에 알아보았다가 마쿠즈가 이미 세상을 등진 것을 알고 자신의 행동에 대한 후회와 마쿠즈에 대한 미안함으로 마쿠즈라는 여 인 이라는 글을 써서 마쿠즈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2.4 독고 집필의 개인적인 배경 독고 의 첫머리에 마쿠즈는 이렇게 자신의 글을 소개하였다. 이 글은 모두, 수줍어하거나 얌전한 내용보다는 지나칠 정도로 솔직하고 과격 26) 中山榮子著, 27) 只野真葛, 只野眞葛 , 丸善株式會社, 1936, p.85 참조. 獨考 , p.260. 298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한 내용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을 낮추고 지 나친 말은 삼갑니다. 그러나 마쿠즈처럼, 서른다섯 살 때 한평생 살았다고 깨 끗하게 단념하고, 이 외진 땅으로 내려오면서 저승으로 가는 길이라고 굳게 각오하였다면 다릅니다.28) 자신의 글이 너무 과격한데 그 이유는 죽음의 문턱까지 가는 고통스러운 삶까지 경험 한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독고 는 바로 마쿠즈 자신의 불행한 삶, 즉 가족의 불행과 자신의 결혼생활에 대한 고통스러운 경험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그것이 사회 적으로 승화되어 일본 사회 내부의 혼란을 자신의 일로 걱정하고 정리하여 극복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나온 산물이었다. 마쿠즈는 앞의 인용문에 이어서 다음과 같이 독고 를 세상에 내보이고자하면서 다음 과 같이 자신의 각오를 밝혔다. “이제 벌써 세상을 등진 것도 한참 되고, 또 지난 시절을 경험하지 못한 몸이라고 생각한다면,(이미 세상을 등졌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사람들의 비난과 미움을 사더라도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29) 한때는 정신적인 고통으로부터 자살을 꿈꾸는 상태까지 이르렀다가 그러한 고통 끝에 우연히 어떤 깨달음을 얻고 다년간 고심하던 생각을 단숨에 써내려간 것이 바로 독고 라고 하는 작품이었다.30) 여자라고 하는 것은 아이를 갖고 차례차례 낳고 키우면서 나이를 먹게 되지 만, 나에게는 그런 일도 없었다. 아무도 모르는 시골에 홀로남아 같이 이야기 나눌 만한 친구도 없었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는 대로 만물이 형성되는 모습 이나 사람이 평생 동안 변해가는 모습을 이리저리 생각해보면서, 그것을 마음 의 위안으로 삼거나 하였다.31) 독고 라는 글은 한문을 읽지 못하는 마쿠즈가 자기 나름대로 인간과 국가, 사회 나아 가 세계에 대해서 이리저리 궁리한 끝에 정리해낸 것이다.32)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 만의 독특한 사상을 구축해낼 수 있었다. 아울러 1800년대 초기 일본의 일반 사람들에게 유교가 어떻게 인식되고 있었는지 하는 점도 이 독고 를 통해서 이해해볼 수 있을 것이 다. 28) 只野真葛, 獨考 , p.260. 29) 只野真葛, 獨考 , p.260. 30) 別所興一, 「只野真葛の貨幣經濟認識と儒教批判」, pp.1-2 참조. 31) 只野真葛, 獨考 , p.290. 32) 마쿠즈는 “어렸을 때부터 이세 이야기(伊勢物語) 를 읽고 그것을 배워서 썼다”고 언급 하여 일본 고전작품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지식이 있었다.(只野真葛, 獨考 , pp.290-291.) 에도시대 한 여성 지식인의 유교인식 ······································································· 林 泰 弘…299 3. 유교에 대한 비판 마쿠즈가 유교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고 하는 점은 그동안 여러 연구자가 지적해왔다. 연구자들이 지적한 대목을 중심으로 독고 의 유교비판 사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33) 3.1 성인의 도 마쿠즈는 유교의 도(道), 즉 성인의 도가 마치 장식도구나 공식 행사 때 쓰는 마차와 도 같이, 일상생활에서는 그다지 쓸모없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성인의 도(道)는 옛날부터 공적인 일에만 사용된다면 사실 도(道)로서 손색이 없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사람이 만들어낸 ‘도’로 중국으로부터 빌려서 사 용하는 것이다. 그것은 겉으로 보여주기 위한 장식품, 예를 들면 넓은 도로에 서 수레를 이끄는 것과 같다. 공적으로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는 그 수레에 싣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당장 급할 때 이용하기 위해서 그 대강을 한차 례 분명히 해두고, 문밖에 준비해두어 집안일에는 사용해서는 안 된다. 도구가 다루기 힘들어 다치는 일도 있다. 좋은 점 나쁜 점도 모르고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니다.34) 유교의 가르침이 공적인 일에는 쓸모가 있을지 모르나 일상생활에서는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해를 끼치기도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또 이어서 마쿠즈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성인의 가르침은 대략, 사람의 마음은 잘 단속한다면 하는 일을 잘 수행할 수 있다, 그래서 금(禁)줄을 쳐서 스스로를 인도하는 수단으로 삼아라고 하는 것 이다. 그러나 정말로 별 볼일 없는 나쁜 놈들이 멋대로 할 경우, 마음을 굳게 단속한 쪽이 뒤처지게 되고 언제나 손해를 입는다. 하지만 성인의 가르침을 진심으로 간직하고 즐거이 생각되는 때는 나도 모르게 내 손으로 마음을 겹 겹이 둘러싸서 단속한다. 이 때문에 오히려 우리나라 사람들의 기분에는 더 둔해지고, 천지(天地)의 박자(拍子)에도 거스르고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두렵 도다. 두렵도다.35) 여기서 ‘천지의 박자’란 마쿠즈가 스스로 깨달았다고 하여 제시하는 천지간에 작용하 는 리듬과 같은 어떤 원리를 말한다. 유학의 가르침을 정성껏 따르게 되면 오히려 나쁜 33) 특히 別所興一의 「只野真葛の貨幣經濟認識と儒教批判」 제4장 ‘마쿠즈의 유교비판’을 참조. 34) 只野真葛, 獨考 , p.268. 35) 只野真葛, 獨考 , p.268. 300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사람들에 의해서 이용을 당하거나 그들 보다 뒤처지게 되고 손해를 입는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예로 마쿠즈는 상인 집안 출신의 첩이 무사 집안에 들어와 해를 끼치게 되는 사 례를 들었다. 유교적인 도덕이 현실과 만났을 때 벌어지는 나쁜 경우로, 그는 “옛날부터 지금까지 첩 때문에 집안이 불행하게 되는 일이 드문 일은 아니다. 누구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지만 나로서는 매우 이상하다. 천한 여자 때문에 귀한 분이 마음을 괴로워하는 것은 왜일까? 정말로 그 이유를 분명히 알았으면 좋겠다”36)고 하였는데, 바로 이러한 상황에 서 ‘귀한 분’은 마음을 괴로워하게 되고 천한 여자는 그러한 상황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또 금전적인 손해 사례를 이렇게 들기도 하였다. 옛날에는 나라를 다투고, 서로 싸워서 토지를 빼앗으려고 하는 난세(亂世)였 다. 지금은 금은재화를 빼앗는 마음의 난세가 되었다. 사람의 마음은 눈에도 보이지 않고 소리도 나지 않는 물건이다. 그래서 누구도 그런 마음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가난한 하층민들은 육체적으로 고통스러워 그러한 마음을 미리 알 수 있었다. 높은 사람이나 또 덕이 있는 사람의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부유하기 때문에 그런 마음을 알 수 없다. 또 세상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고, 아랫사람들에게 베풀기를 인(仁)의 시작(端)이라고 여긴다. 그러면서 금이나 쌀과 같은 보물을 사람들이 좋아하는 대로 내맡겨서 마치 좁쌀을 주듯이 그 것들을 나누어 줘버린다. 참으로 애처롭다.37) 하층민들은 시대가 변함에 따라서 그 시대에 잘 적응을 하는데, 높은 사람이나 덕이 있는 사람의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 오히려 유학의 가르침을 따라서 사람들에게 베풀기를 잘하여 금이나 쌀과 같은 보물들을 함부로 허비한다고 하였다. 유 학의 도덕적인 가르침이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를 주고 있다고 비판한 것이다. 3.2 이기론 마쿠즈는 유학, 특히 주자학의 이기론(理氣論)을 언급하거나 비판하지는 않았다. 그 자신이 한문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자학의 이기론에 대해서 자세히 알았을 가능 성도 없다. 물론 그의 남동생을 통해서 간단한 설명을 들었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한 그는 “천지 사이에 태어난 사람은 낮과 밤의 수(數)와 천지의 박자를 기본으로 하여, 무슨 일이나 이것에 합치되게 하고, 합치되지 않는 일에는 관련되지 않게 한다면, 일생동안 평안하게 살 수 있다. 불교의 가르침도 유교의 도도 인위적으로 만든 법도이지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다. 움직이지 않은 진리는 순환하는 해와 달, 그리고 낮과 밤의 수 36) 只野真葛, 獨考 , p.266. 37) 只野真葛, 獨考 , pp.270-271. 에도시대 한 여성 지식인의 유교인식 ······································································· 林 泰 弘…301 와 천지간에 떠도는 박자다”38)라고 하여 주자학의 이기론에 비견할 만한 ‘밤과 낮의 수’, ‘천지간의 박자’를 제시하였다. 천지사이에서 살고 있는 사람은 낮과 밤의 수(數)에 있어서 모두 동일하다. 번창하게 되고, 쇠퇴해가는 것도 이 수를 제외하고는 생각할 수 없다.39) 마쿠즈는 밤과 낮의 수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지 설명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수는 모든 사람들에게 모두 동일하게 적용되며, 그 수에 따라서 모든 것은 번창하고 쇠 퇴해간다고 하였다. 북송 유학자 소강절(邵雍, 1011-1077)이 천하 사물의 근본은 수 (數)라고 하여 그 수에 의해서 상(象)이 생기고 상에 의해서 천하 사물의 형체가 생긴 것이라고 주장하였는데,40) 이 소강절의 수와 마쿠즈가 말하는 밤 낮의 수가 어떤 관련이 있는지 명확하지는 않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 수가 유교의 리(理)와 기(氣)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된다는 것이다. 마쿠즈는 구체적으로 자신이 존경하는 유학자들을 제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 구마자와 반잔(熊沢蕃山)과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 두 유학자는 세상 사 람들이 뛰어나다고 하지만, 그들이 써놓은 글을 보고 그 학문의 실력을 칭찬 하는 것뿐이다. 지금에 이르러 그들이 이루어놓은 업적이라는 것이 전해지지 않은 것은 참으로 유감스럽다. 그것은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대군을 재촉해서 이끌고 조선국을 쳐서 점령하고는 무슨 이유도 없이 내던져버린 것 과 같다. 그 한사람만을 가지고 말한다면 재능과 지혜가 뛰어나 그 때문에 자 기 한 몸을 고생시킨 것뿐으로 참으로 힘들지 않았을까?41) 구마자와 반잔(1619-1691)은 에도시대, 17세기 후반에 살았던 사람으로 주자학 보다 는 양명학에 더 흥미를 가졌다. 아라이 하쿠세키(1657-1725)는 마쿠즈보다 100년 정도 앞선 사람으로 정통 주자학자였다. 이들을 ‘유학자’라고 지칭하고 그들이 이룬 학문적인 업적이 뚜렷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비판한 것이다. 마쿠즈가 이렇게 자기보다 앞선 유명 유학자들은 비판한 것은 바로, 뚜렷한 업적이 없었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그들이 마쿠즈 가 언급한 밤과 낮의 수라든지, 천지간의 박자를 잘 이해하지 못한데 따른 것이다. 학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낮과 밤의 수를 무시하고 천지의 박자에 매 달리지 않기 때문에 마음을 관통하는 것이 없다. 뿐만 아니라 아무리 높은 배 움을 갖고 있더라도 한세대를 끝으로 부서져 흩어져 버리니, 별 이익이 없지 38) 只野真葛, 獨考 , p.269. 39) 只野真葛, 獨考 , p.295. 40) 풍우란저, 박성규역, 중국철학사 하, 까치, 2003, p.455. 41) 只野真葛, 獨考 , p.295. 302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않는가? 설익은 학자의 경우라면 여기저기 잘못 생각한 곳이 많고, 많이 모이 면 모일수록 지혜는 나오지 않고 따지는 것만 많다. 이것이 학자들의 전체 모 습이다.42) 북송시대의 신유학을 집대성한 주자(朱子, 1130-1200)에 따르면, 온갖 리가 있기 때 문에 온갖 사물이 있는 것이다. 각각의 리가 없으면 각각의 사물도 존재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리는 일반적으로 이렇게 설명된다.43) 어떤 일이 생기면 그 안에 그 일의 리가 존 재하며, 또 어떤 물질이 생기면 곧 그 안에 그 물질의 리가 존재한다. 자연의 사물에만 각각 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사물, 즉 계단이나 벽돌 등에도 각각의 리가 있다. 한편 구체적인 사물을 만들어 내는 것은 기(氣)다. 리는 원리적인 것을 말하는 것으로 논리적으로 보면 리는 또 다른 하나의 세계지만 실제적으로 보면 리는 구체적인 사물 안 에서 존재한다. 기가 응집하지 않으면 리는 붙어있을 대상이 없으니 리는 구체적인 사물 로 표현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리와 기는 항상 같이 존재하며, 모든 인간과 사물도 리와 기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이기론을 염두에 두고 유학자들은 인간과 사회, 정치와 도덕, 수양의 문제를 논한다. 마쿠즈는 이러한 이기론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이 유학자들이 낮과 밤의 수를 무 시하고 천지간의 박자에 매달리지 않기 때문에 아무런 이익을 주지 못한다고 비판한 것 이다. 3.3 인의예지 마쿠즈는 또 ‘인의예지(仁義禮智)’라는 유교 덕목을 다음과 같이 새롭게 해석하였다. 유교에서 ‘인의예지’는 리로 부터 출발한 도덕적인 원리다. 앞서 소개한 리와 기는 인간 에게는 적용되는데, 리는 인간 안에서 성(性)이라고 하는 리의 총화로 존재한다. 모든 리 가 합해져 성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 성(性)안에 인의예지의 도적적인 원리가 들어 있 는 것이다. 다만 이 인의예지라는 성은 리이기 때문에 만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으며 느 낄 수도 없다. 그것의 존재를 추측하게 해주는 것이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 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이라고 하는 정(情)이다. 측은지심을 통해서 인(仁)이라고 하는 리가 있음을 알 수 있고, 수오지심을 통해서 의(義)라고 하는 리가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사양지심을 통해서 예(禮)라고 하는 리가 있음을 알 수 있고, 시비지심을 통해서 지(智)라고 하는 리가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44) 그런데 마쿠즈는 이러한 ‘인의예지’를 비판하고, 자기 나름의 ‘인의예지’를 정의하였다. 42) 只野真葛, 獨考 , p.295. 43) 주자의 사상에 대해서는 풍우란저, 박성규역, 중국철학사 하, p.534, 542 참조. 44) 풍우란저, 박성규역, 중국철학사 하, pp.555-556 참조. 에도시대 한 여성 지식인의 유교인식 ······································································· 林 泰 弘…303 인의예지라고 하는 것도 사람 마음의 자세에 따라 중국의 문장가들이 이름을 붙인 것이다.(원문주: 이 부분은 모두 서문이다. 단지 ‘의(義)’의 안과 밖의 의 미를 말하고 있는데, 무익하다고 생각할 뿐이다.) ‘인(仁)’은 (원문주: 마쿠즈 처럼) 자신의 몸을 버리고 세상 사람들을 위해서 좋은 업보를 남기고자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예(禮)’도 저절로 존재하는 마음의 자세다. 새나 짐승조차 도 그 단초(端)를 가지고 있지 않는가? ‘지(智)’란 사물을 잘 아는 것이지 않 을까? 단지 ‘의(義)’라고 하는 글자에 해당하는 마음의 자세는 가슴에 모여 강 하게 드러나는, 세간에서 말하는 소위 ‘성질’이다. 그러한 것을 좋은 일에 표현 하는 것을 ‘의(義)’라고 하고, 나쁜 일에 표현하는 것을 ‘폭(暴)’이라고 한다. 글 자로는 선악의 차이가 있지만 사람의 몸 안에서는 동일한 것이다. 인의예지를 이렇게 완전히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였다. 인(仁)은 마쿠즈 처럼 자신의 몸을 버려 세상 사람들을 위해 좋은 업보를 남기려고 생각하는 것, 예(禮)란 저절로 존 재하는 마음의 형태로, 새나 짐승도 그 단서를 가지고 있는 것, 지(智)란 사물을 잘 아는 것, 의(義)란 가슴에 모아서 강하게 대항하는 것으로 소위 세속에서 말하는 화를 잘 내 는 것이다. 마쿠즈가 이처럼 인의예지에 대해서 자기 나름의 해석을 하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동 기와 이유에서 였다. “문자란 좋은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만든 것이기 때문에 악 한 사람의 몸속은 알 수 없다. 마쿠즈는 나쁜 버릇을 고치려고 수행을 시작한 이래, 스스 로 마음 자세가 몇 가지 부분으로 나뉜다는 것을 알고 이것을 분명하게 하였다” 마쿠즈는 특히 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기도 하였다. 그럼 설명해보자. 같은 마음에 선악이라고 하는 두 가지 이름이 있음으로 해 서 사람이 혼란하게 되는 일이 있다. 맹자의 책에서 ‘의(義)는 내적인 것이다, 외적인 것이다’라고 논의하였는데, 이는 완전히 두 가지 개념에 미혹된 것이 다. 착한 일에 사용하여 마음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실 그것이 ‘내적’이 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나쁜 쪽으로 사용한 사람은 사실 자기 멋 대로겠지만, 그 중에서도 노력하여 착한 일에 함께 참여하는 사람들은 ‘외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45) 의에 대한 맹자의 설명까지 비판하면서, 의를 내외로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지 적하였다. 마쿠즈는 이렇듯이 유학 사상을 자기 나름대로 비판하는 자세를 보였다. 3.4 공자 성당 마쿠즈는 유교 사원인 ‘공자 성당(聖堂, 유시마성당을 말함)’의 기능을 비판하기도 하 였다. 특히 그는 유교사원을 나라의 낭비를 걱정하는 학자들의 집회소로 바꾸어 서로 의 45) 只野真葛, 獨考 , p.292. 304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견을 교환하고, 성당의 문 앞에 투서 상자를 두어서 귀천을 가리지 않고 넓게 여러 사람 의 의견을 듣자고도 주장하였다. 세상을 이겨낸 사람의 마음씨는 사물의 낭비를 싫어하는데 있다고 생각된다. 불법을 정진하면서 독신으로 지내는 것은 오로지 낭비를 없애기 위한 생각에 서 나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혜는 다소 떨어지더라도 나와 남을 구분하지 않고 어느 경우나 낭비를 싫어하는 속마음을 가진 사람은 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옛날에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세우는 풍습은 나중에 없 어졌다든지 공자성인은 그것을 낭비가 되는 것이라고 비난하였다는 것을 들 었다. 지금 성당의 이름으로 위압적인 건물을 짓고, 거기다 사람의 형상을 만 들어 성인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것은 본래 모습의 공자성인과 그 영령에 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중앙에서 시작하여 각 지방 곳곳에서도 그러 한 일이 일어나는 것은 그렇게 받들어 모시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점이 있어서 일 것이다.46) 우선 마쿠즈는 이렇게 공자의 형상을 만들어 세우고 유교사원을 짓는 것을 낭비라고 지적하고 그러한 일이 공자의 이미지에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 이 대안을 제시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금(金)을 다투는 난세라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이렇게 성당을 짓는 행위는 금전과 보물을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낭비하는 일만 되어 나 라에 이득이 없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위압적인 분위기로 제사를 지내 기 시작하여, 이후 이 성당에서 나라의 낭비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모아 천지를 꿰뚫는 엄숙한 생각을 발전시키는 곳으로 삼는다면 좋지 않을 까? 각 지방에 세우는 성당에서도 그것을 배워 사심을 버리고 하루 밤낮의 수를 기본으로 하여 천지간의 박자에 따라 일본국의 이익이 되는 일을 서로 생각해내면서 이것을 모아 좋고 나쁨을 정해, 배우들처럼 만대(萬代)가 지나 도 변하지 않는 업적을 이루어내면 좋지 않을까? 그러면 성인도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으실 것이다. 성당 문 밖에도 귀천을 가리지 말고 생각한 것을 바 치는 상자를 놓아두어, 여러 사람의 생각을 모아서 서로 비교해서 본다면 나 라의 이익이 되는 것도 많을 것이다.47) 이왕에 짓는 성당을 잘 발전시켜서 일본의 이익이 되는 일을 서로 생각하고 토론하는 장소로 삼으면 어떻겠는가하고 제안한다. 그리고 성당 문 밖에 투고함을 세워두고 여러 사람의 생각을 모으는 장소로 삼자고 한다. 46) 只野真葛, 獨考 , p.293. 47) 只野真葛, 獨考 , p.293. 에도시대 한 여성 지식인의 유교인식 ······································································· 林 泰 弘…305 4. 마쿠즈의 유교적 사유방식 4.1 완전부정이 아닌 대안의 제시 마쿠즈의 유교 비판을 읽어 보면, 그것이 비판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판의 끝에 대안을 제시하기도 하고, 비판과 함께 또 다른 기대감을 나타내기도 한다. 완전한 부정이아니라 따뜻한 비판, 애정 어린 비판이라고 여길 만한 부분이 많다. 먼저 앞 장에서 살펴본 ‘성인의 도’(3.1절)에 대한 비판을 살펴보자. 마쿠즈는 ‘성인의 도’가 현실 생활에 별로 쓸모없으며 가끔 해를 끼치기도 한다는 비판을 하였으나, 그 도 가 ‘공적인 일에만 사용된다면 도로서 손색이 없다’고 하거나 ‘공적으로 어려운 일이 생 겼을 때는 그 수레에 싣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다’라고 하기도 하고, ‘당장 급할 때 이 용하기 위해서 그 대강을 분명히 해두고’라는 등등의 언급을 하고 있다.48) 사적인 일상 생활에서는 도움이 안 된다고 하면서도 공적인 일에서는 그 효용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 다. 또 ‘성인의 가르침에 따라 사람의 마음을 잘 단속한다면 하는 일을 잘 수행할 수 있다’ 고 하면서, 그러나 나쁜 놈들이 멋대로 할 경우에는 그런 사람들이 손해를 본다고 지적 한다.49) 이러한 언급은 ‘성인의 가르침’을 탓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나쁜 사람들을 탓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나쁜 사람들의 악한 행동까지 대응해줄 수 있는 성인의 가르침이 있다면 좋을 것이다. 마쿠즈는 자신이 제시한 ‘천지의 박자’사상에 그런 기대감을 가지고 있다. 그는 낮과 밤의 수 및 천지의 박자에 합치되게 살 수 있다면 일생동안 평안하게 살 수 있다고 한다.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 것이다. 인의예지에 대한 비판(3.3절)도 마찬가지다. 기존에 유학자들이 제시한 인의예지를 비 판하거나 무시하고 자신이 새롭게 정의한 인의예지의 뜻을 제시하였다. ‘인의예지’라는 덕목을 완전히 부정하고 그것들이 필요 없는 덕목이라고 보지 않고, 그 덕목의 정의를 자기 나름대로 새롭게 고쳐 제시한 것이다. 인의예지에 대한 비판이 비판으로만 머물러 있지 않다. ‘공자 성당’(3.4절)에 대한 비판도 마찬가지다. 그러한 사업이 금전과 보물을 낭비하게 할 것이라고 하면서도, 그러한 사업의 중지를 요구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공자 성당을 이용하여 ‘천지를 꿰뚫는 엄숙한 생각을 발전시키는 곳’으로 만들어가자고 제안하였다. 그곳에 사람을 모으고, 투고함을 세워서 사람들의 의견을 모아 서로 비교해보면 국가를 위해서 이익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전국적으로 세워지는 공자상과 공자묘에 대해서 비 판을 하고 있기는 하나, 또 한편으로는 세상 사람들의 의견을 모으는 장소로서 공자 성 당이 기능할 수 있기를 바란 것이다. 이것은 나아가 유교가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내심 기대한 것이라고도 해석해 볼 수 있다. 48) 只野真葛, 獨考 , p.290. 49) 只野真葛, 獨考 , p.268. 306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4.2 유교 도덕적인 삶의 추구 마쿠즈가 유교에 대해서 따끔한 비판도 하기는 했지만 사실 그가 그렇게 유교를 비판 하기 시작한 것은 남동생이 사망하고, 그 자신만의 독특한 사상을 세워서 독고 를 집필 하기 시작한 이후부터다. 우리 형제자매는 성인의 도를 지키려다, 일곱 형제 모두 매우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해를 거듭하여 생각을 정리하여 후대 사람들을 위해서 써두는 것이 다.50) 마쿠즈는 자기 집안의 형제들이 유교의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하였다고 한다. 남동생 모토스케(工藤源四郎)는 일곱 남매 중에 네 번째로 유일한 남동생이었다. 장녀인 마쿠 즈는 항상 그가 집안의 기둥이 되어 가문을 잘 이어갈 것 기대하고 있었으나34세의 젊 은 나이에 요절하였다. 구도 겐지로(工藤源四郎), 실지 이름은 모토스케라고 한다. 뜻이 청아하고 건 강하였으며, 중국 성인의 가르침을 굳게 지켜, 세상 사람들에게는 특이한 사람 이었다.51) 동생은 의사였는데,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환자들의 간호에 몰두하다 사망하였다. 마 쿠즈가 에도에서 멀리 떨어져 다다노(只野)집안으로 시집을 가게 된 것은 바로 이 남동 생의 힘이 되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신랑 다다노 이가(只野伊賀) 집안은 센다이 번에서 비교적 격이 높은 무사집안이었다. 마쿠즈의 결혼은 이렇게 자기 가문을 위한 희생이기 도 하였다. 아울러 아버지의 간곡한 부탁을 마다하지 않은 효심이 작용한 것이기도 하였 다.52) 마쿠즈가 추구한 삶이 어떠한 것이었는가는 독고 전편의 구조와 내용을 살펴보아도 잘 알 수 있다. 독고 는 상권, 중권, 하권의 3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현재 전해지는 독 고 는 원본이 아니라 초록 본으로, 원본은 관동대지진 때 소실되었다고 한다.53) 상권을 보면 모두 다섯 부분으로 나뉘는데54) 1) 첫 번째는 ‘풀지 못한 의문 세 가지’에 대해서 소개하는 글로 ①달의 크기가 변하는 이유, ②여자 배우의 행동, 그리고 ③첩이 50) 只野真葛, 獨考 , p.268. 51) 只野真葛, 真葛がはら (鈴木米子編, 只野真葛集 ) p.500 52) 高橋恵, 「只野真葛の思想」, pp.45-46. 53) 鈴木よね子, 「「独考」試論―その方法と実学 国学の影響」, p.72. 54) 글의 내용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부분도 있는데 이 부분은 鈴木よね子, 「「独考」試論 ―その方法と実学 国学の影響」, 73-75에 소개된 목차를 참조한다. 에도시대 한 여성 지식인의 유교인식 ······································································· 林 泰 弘…307 집을 시끄럽게 하는 이유 등에 대한 자신의 의문을 소개하였다. 그리고 2) 자신이 ‘하고 싶은 일 세 가지’를 소개하였다. ① 여자의 모범이 되었으면 하는 것, ②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을 알았으면 하는 것, ③ 다른 사람의 이익이 되었으 면 하는 것이다. 그리고 3) ‘성인의 도란’, 4) ‘마음이 어지러운 세상’과 5) ‘금전이 있는 곳’ 등이다. 마쿠즈는 본문을 시작하기 바로 전에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하였다. 세상에는 이상한 일도 많으나 사람들이 잘 따지는 일들은 그 때문에 어찌되 었든 이해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논의하지 않는 것 가운데, 나로서 는 지극히 이상하게 생각되는 일이 두세 가지 있었다. 몇 년이 지난 뒤, 드디 어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에 대해서 더 이상 얽매이지 않게 되었다.55) 이러한 말을 잘 살펴보면 마쿠즈는 자신이 의문을 가지고 있던 몇 가지 일들에 대해서 지난 몇 년간 생각을 거듭하여 결국 나름대로 해답을 찾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해답이 바로 독고 에 기술되어 있는 것이다. 이 상권은 독고 의 서론 부분으로 몇 가지 의문과 자신의 소망, 그리고 나름대로 찾아낸 해답의 일부분을 싣고 있다. 특히 ‘마음이 어지러운 세상’과 ‘금전이 있는 곳’이라는 타이틀을 보면 마쿠즈가 사회와 경제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앞의 ‘의문’을 보면 인간의 행 동과 자연의 운행에도 관심이 많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상권 전체에 적힌 내용을 보면 마치 유학자의 문제관심과 매우 유사하다. 예를 들면 북송의 유학자 주렴계의 「태극도설」을 읽어 보면, 먼저 태극운동에 대해서 논하고 음양 및 오행에 대해서 언급한다. 그리고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원리를 지적하고 거기에서 만물이 태어난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만물가운데 사람을 이야기 하고, 사람들이 만들 어내는 선악, 만사를 지적하고, 그중의 모범인 성인의 이야기를 하고 끝낸다. 마쿠즈의 관심이 달에서 시작한 것은(1-①) 바꿔 말하면 우주론에 대한 관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자배우에 대한 관심은,(1-②) 자신과 달리 남성에 대해서 더 적극 적이고 자유분방하게 활동을 해도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기지 않은 점을 들어 인간의 본 성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첩은 왜 집안을 혼란하게 만들까 하는 점에 대한 의문은,(1-③) 인간의 본성과 인간관계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예를 들 면, 첩과 관련하여 마쿠즈는 이러한 분석을 한다. 무사(武士) 집안에서 자란 여성을 위해서 이 글을 남긴다. 상인 집안 출신의 첩들에 대해서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그들은 어떠한 남자라도 멋지게 내던질 수 있는 솜씨를 가진 여자라면 나는 첩이 되고 싶다고 한다. 눈으로 보면서도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주인님은 순수하신 마음에서 순진한 여자라고 생각하 55) 只野真葛, 獨考 , p.261. 308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기 때문에 언제나 내동댕이쳐지거나 짓밟혀 창피한 꼴을 당하시게 된다. 불러 들인 그날부터 시작하여 때를 보아서 주인님을 가지고 공기놀이하는 돌멩이 로 삼으려고 노린다. 이러한 마음을 가진 여자에게 거금을 주어 불러들인 것 이야 말로 지나친 낭비인 것이다. 첩이된 여자들이 원하는 것은 주인 집안은 말할 것도 없이, 그 주인이 다스리는 영토 전체를 기울게 할 정도로 자기 멋 대로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여자와 소인(小人)의 마음이다.56) 공자가 언급한 ‘여자와 소인’의 문제를 자기 나름대로 정리해본 것이다. 여자와 소인은 다루기 어려운데, 가까이 하면 공손치 않고, 멀리 하면 원망하게 되는 것이다.57) 마쿠즈 는 첩과 주인의 관계를 살펴보면서, 무사(귀족)와 상인(평민)의 문제를 포함하여 인간과 가정, 사회 문제를 동시에 정리해본 것이다. 마쿠즈가 하고 싶은 일 3가지인 ①모범이 되었으면 하는 것, ②깨달음이라고 하는 것 을 알았으면 하는 것, ③다른 사람의 이익이 되었으면 하는 것은 바로 성인의 경지와 성 인의 덕에 대한 관심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그 뒤의 3) ‘성인의 도란’, 4) ‘마음이 어 지러운 세상’과 5) ‘금전이 있는 곳’에 대한 글도, 성인 또는 인간 혹은 사회에 관한 언급 으로 이 역시 유학자들이 관심을 갖는 내용이다. 독고 의 ‘중권’은 자기 마음이 떠올라 땅에서 벗어난 일, 여성들의 위대함, 일본, 일본 인, 유러시아 등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하권’은 ‘여성의 가르침’, ‘금전의 행방’, ‘물건 값이 불안정한 이유’, ‘마음의 자세’, ‘물 건의 낭비를 싫어함’, ‘말을 처음배울 때 읽어 주어야할 문장의 대강’, ‘여자와 소인’, ‘속 셈을 해야 할 큰 수’ 등의 내용이 실려 있다. ‘여자와 소인’ 중에 한 구절을 읽어보면 다 음과 같다. 상인 집안의 여자는 군자(君子)를 원수처럼 생각한다. 몸종이나 짐꾼 같은 소 인들은 고용된 대가로 목숨을 부지하면서 고용한 주인을 비웃는 것이 무척 심하다. 이것은 무슨 이유일까? “나는 모른다”고 하였다.(바킨의 주: 이것은 공자가 한말을 나타낸다.) 주인의 허락이 있어서 하고 싶은 일을 다 하면서도, 주인은 이 하인 놈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만 때리기에는 힘이 없고 꾸짖기에는 별 이득이 없다. 하인은 도망가는 길, 빠져나갈 구멍을 알고 있어 잘도 달아난 다. 봉급을 주인으로 삼고 고용한 주인을 돈주머니로 생각한다. 조금이라도 싫은 소리를 하면 주인을 버리고 도망하는 것을 정면으로 내걸고 일하는 것 이다.58) 이러한 인정머리 없는 것들을 같이 데리고 사는 것은 무슨 이익이 있 는가? 오직 사람들의 면목만을 생각할 뿐이다. 이것은 낭비라고 할 수 있다. 러시아에서는 하인을 데리고 있지 않는다고 한다.59) 56) 只野真葛, 獨考 , p.267. 57) 논어 (양화편) : 子曰, 唯女子與小人, 爲難養也. 近之則不孫, 遠之則怨. 58) 只野真葛, 獨考 , p.298. 에도시대 한 여성 지식인의 유교인식 ······································································· 林 泰 弘…309 무사(귀족)집안의 딸인 자신의 입장에서 상인(町民, 평민)집안의 여자, 혹은 몸종이나 하인들의 성품을 언급한 것이다. 주인(영주)인 무사를 ‘군자’로 지칭한 것을 보면, 그리고 앞서 지적한 여러 가지 유교적인 발언을 살펴보면, 마쿠즈는 매우 유교적인 환경에서 자 라고 그러한 교육을 받았음을 추측해볼 수 있다. 동시에 그가 목표로 삼았던 일이나 독 고 에서 서술된 여러 내용을 종합해보면 그는 매우 유교 도덕적인 삶을 추구하였다는 것 을 살펴볼 수 있다. 5. 맺음말 마쿠즈가 살았던 에도 말기의 사상적인 분위기는 주자학을 극복하고자 하는 분위기가 매우 강했다. 중국 사상을 철저하게 배제하고자 했던 국학, 주자학을 실천적으로 극복하 고자 했던 양명학, 송대․한대의 유학을 극복하여 좀 더 앞선 선진 시대의 문헌을 중시 했던 고문사학(古文辭學) 모두 마쿠즈가 살았던 시대에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다다노 마쿠즈는 그의 독고 에서 여러 가지 유교 비판을 시도 하였지만, 유교를 완전히 부정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그러했던 것을 아니었다. 그의 비판 에는 오히려 유교 사상에 대한 기대감을 느낄 수 있다. 본론에서는 유교의 도(성인의 도) 에 대한 비판, ‘인의예지’ 및 공자 성당 등에 대한 비판을 살펴보았는데, 그러한 비판 가 운데서도 마쿠즈는 자기 나름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인의예 지의 가르침을 새롭게 해석하고자 하였고, 유교의 우주론(이기론)에 대신해서 ‘천지간의 박자’와 ‘낮과 밤의 수’라고 하는 새로운 사상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는 또 당시에 ‘공자 성당’을 짓는 것에 대해서 물자 낭비라고 비판하였는데, 성당 건 설을 완전히 부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자성당을 나라 언론의 중심 기관으로 만들어 새로운 기능을 부여하자고 하였다. 이렇게 보면 마쿠즈의 유교에 대한 언급은 비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유교의 가르침을 자기사상의 출발점으로 삼고 새로운 현실에 대응하고자 하는 의도가 더 컸다고 할 수 있 다. 유교에 대해서 비판을 하면서도 마쿠즈는 자신과 자신의 집안이 크게 의존하고 있었 던 유교사상에 대해서 마지막까지 그 유용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의 사상은 어디까지 나 유학적인 틀 안에서 형성되고 발전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59) 只野真葛, 獨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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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icester, Yuki Terazawa, Anne Walthall(2001) “Solitary Thoughts: A Translation of Tadano Makuzu's Hitori Kangae”, Monumenta Nipponica (56:1), 56:2 Bettina Gramlich-Oka(2001) “Tadano Makuzu and her Hitori kangae”, Monumenta Nipponica 56 Bettina Gramlich-Oka, 2004.6, “Kirishitan Kô by Tadano Makuzu: a late Tokugawa woman's warnings”, Bulletin of Portuguese-Japanese Studies, Vol8, Universidade Nova de Lisboa. 에도시대 한 여성 지식인의 유교인식 ······································································· 林 泰 弘…311 要 旨 只野真葛は 獨考 の中で、儒教に対して様々な批判を行っている。ところが、彼女の批判 は、儒教を完全に否定する批判ではなく、むしろ儒教に対して期待感を促すような批判であっ た。本論では、儒敎の道、すなわち「聖人の道」に対する真葛の批判、「仁義禮智」思 想に対する批判などを探ってみた。筆者はそれらの批判の中で、真葛は自分なりの対案を提示 していることを確認した。彼女は仁義禮智の教えについて、新しい解釈を試みていたり、あるい は儒教の宇宙論、すなわち理氣論に代わって「天地間の拍子」や「昼夜の数」という新しい 思想を提示したりしていた。 真葛は、また当時の「孔子聖堂」の建設に対して、物資浪費として批判していたが、聖堂 建設そのものを完全に否定していたわけではなく、むしろ孔子聖堂を国の言論の中心機關として 機能するようにせよと主張していた。 このようなことを持って判断すれば、真葛の儒敎に関する言及は、「批判」であるというより は、むしろ儒教の教えを自己思想の出發點として捉え、新しい内容と加え、現実の世界に対応 しようとした意図が多かったと言えよう。儒敎に対して批判を行いながら、真葛は、自分自身と自 分の家族が大きく依存してきてきた儒敎思想に対し、最後までその有効性を疑っていなかった。 要するに、彼女の思想は、あくまで儒學的な思想の枠組みの中で形成され、發展していたと言 えよう。 キーワード;只野真葛、獨考、儒教、儒學、江戸時代、知識人 투 고 : 2008. 8. 31 1차 심사 : 2008. 9. 12 2차 심사 : 2008. 9. 27 이용자의 입장에 선 사회복지제도 개혁에 대한 연구 - 일본 사회복지기초구조개혁을 통해서 본 장애인(아) 복지행정제도 예를 중심으로- 田 鎬 成*1) (e-mail : [email protected]) 目 次 1 2 3 4 머리말 사회복지기초구조개혁의 개요 제도개혁 후 장애인관련제도의 변화 우리나라에 시사하는 점 1 머리말 우리나라 헌법 제34조에 따르면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라고 규정하여 모든 국민의 생존권을 보장하고 있다. 또 제10조에서 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가진다」라고 규정하여 행복추구권을 보장하고 있다. 최근 언론을 통하여 보도되는 일부 사회복지시설인 장애인(아)입소시설의 실태를 통하여 보면 위에서 언급한 생존권이나 행복추구권이 정말로 보장되고 있는가 하는 의심마저 든다. 기본적 인권은 온데간데 없고, 입소시설 측의 횡 포와 지도⋅감독권을 가진 해당관청의 무성의⋅무책임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이곳을 이용해야 하는 장애인(아)들은 그 고통을 호소할 곳 조차 마땅치 않은 * 성공회대학교 외래교수 사회복지학과 314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실정이다. 또한 이런 사건은 좀처럼 외부로 나타나기 쉽지 않은 측면도 있다. 이와 같은 일은 비단 최근의 실태만이 아닌 과거에도 있어 왔고 향후에도 일 어날 가능성이 크다 하겠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건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우리사 회에서 장애인은 투명인간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사회 에 장애인은 틀림없이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인식하지 못하거나 또는 인식하려고자 하지 않는 것이리라. 또한 사회적 약자를 위한 사회복지사 업이 아닌 자기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해당시설 운영책임 자의 도덕성과 책무성의 결여 및 지도/감독권을 가진 해당관청의 무성의⋅무 책임 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문제해결을 위해서는 지도⋅감독권을 가진 해당관청이 신념을 가지고 그 책무를 이행 할 필요가 있을 것이나 이 또한 근 본적인 문제해결 대책은 될 수 없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보다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문제해결을 위한 하나의 방책으로 2000년 일본에서 단행된 사회복지기초구조개혁의 중점사항인 사회복 지서비스의 이용제도화에 따른 지원비제도와 장애인자립지원제도를 연구고찰 하고자 한다. 2 사회복지기초구조개혁의 개요 1) 개인이 존엄을 가지고 그 사람다운 자립된 생활을 보낼 수 있도록 지원한다 는 사회복지의 이념에 기초하여 사회복지기초구조개혁이 추진되었다. 이 개혁 은 1951년 사회복지사업법 제정 이래도 큰 변화 없던 사회복지사업, 사회복지 법인, 조치제도 등의 사회복지 공통기반제도에 대하여 향후 증대/다양화가 전 망되는 국민의 복지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검토하는 취지에서 이루어졌다. 구체적인 방향으로는 개인의 자립을 기준으로 그 선택을 존중하는 제도확립 과 질 높은 복지서비스의 확충 및 지역에서의 생활을 종합적으로 지원하기 위 한 지역복지의 충실에 있다. 제도개혁의 주 내용은 크게 첫째 이용자의 입장에 선 사회복지제도의 구축, 둘째 서비스의 질 향상, 셋째 사회복지사업의 충실/활성화, 넷째 지역복지의 추진의 네 가지로 나뉘어져 있다. 1) 후생성의 「社会福祉基礎構造改革について(社会福祉事業等改正法案大綱骨子)」, 「社会福祉基礎 構造改革について(中間まとめ)」, 「社会福祉基礎構造改革について(主要な論点)」、「社会福祉基 礎構造改革を進めるに当たって(追加意見)」등을 정리한 것임. 이용자의 입장에 선 사회복지제도 개혁에 대한 연구 ··········································· 田 鎬 成…315 먼저 이용자의 입장에 선 사회복지제도의 구축을 보면, 이전까지 행정이 행 정처분에 의해 서비스 내용을 결정하는 것을 이용자가 사업자와 대등한 관계 에 서서 서비스를 선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조치제도를 이용제도로 전환 시킨 것이다. 따라서 이용자보호를 위한 지역복지권리옹호제도와 불만해결 구 조를 도입하는 제도를 창설하였다. 둘째로 서비스의 질 향상을 위하여 질 좋 은 서비스를 지원하기 위한 인재양성 및 확보와 사업의 투명성 확보를 정비하 였다. 셋째로 사회복지사업의 충실/활성화를 위하여 사회복지사업의 범위를 확 충하고 사회복지법인의 설립요건을 완화하며, 다양한 사업주체의 참여촉진, 복 지서비스의 제공체제의 충실 및 사회복지법인의 운영을 탄력화하였다. 마지막 으로 지역복지 추진을 위하여 지역복지계획의 책정과 지적장애인복지 등에 관 한 사무를 시읍면2) 에 위양 및 사회복지협의회, 공동모금, 민생위원/아동위원 의 활성화를 도모하였다. 이 제도의 시행으로 개정이 요구되는 법률로는 사회복지사업법, 신체장애 인3) 복지법, 지적장애인복지법, 아동복지법, 민생위원법, 사회복지시설직원등퇴 직수당공제법, 생활보호법, 노인복지법, 공익전당포법 등이 있다. 제도 시행은 원칙적으로는 2000년 4월부터이며, 조치제도에서 이용제도로의 변경과 지역복지계획 책정 및 지적장애인복지 등에 관한 사무의 시읍면으로의 위양은 준비기간을 고려하여 2003년 4월부터 시행되었다. 이와 같은 개혁이 이루어지기까지의 과정을 크게 '사회복지의 기초구조개혁 에 대하여(주요한 논점)'과 '사회복지기초구조개혁에 대하여(중간정리)' 그리고 '사회복지기초구조개혁을 진행함에 있어(추가의견)'으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 과 같다. 먼저 1997년 11월 25일 사회복지사업 등의 방향에 관한 검토회에서 '사회복 지의 기초구조개혁에 대하여(주요한 논점)'를 정리하였다. 그 개혁의 방향은 ①대등한 관계의 확립, ②개인의 다양한 수요에 대한 종합적인 지원, ③신뢰와 납득을 얻을 수 있는 질과 효율성, ④다양한 주체에 의한 참여촉진, ⑤주민참 가에 따른 복지문화의 토양형성, ⑥사업운영의 투명성 확보였다. 이를 구체적 으로 개혁해 나가기 위한 주요 검토사항 중 하나는 조치제도였다. 조치제도 검토사항에 대한 의사록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현행 조치제 도는 일반적으로 사업의 효율성이나 창의연구를 재촉하는 유인이 부족하여 이 용자에게는 서비스의 선택이나 이용편리 측면에서 문제가 있으며, 사업자 보조 이기에 투명성이 결여되어 부패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다. 이 때문에 행정처분 2) 기초지자체로 일본에서는 市町村라고 함. 3) 일본에서는 장애인을 障害者(장해자)로 표기하고 있음. 장애자(障碍者)로 표기하는 이도 있지만 법 률로는 障害者로 되어 있음. 본 원고에서는 편의상 모두 장애인으로 표기함. 316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을 함으로써 서비스를 제공하던 조치제도를 재검토하여 개인이 스스로 선택한 서비스를 제공자와의 계약으로 이용하는 제도를 기본 틀로 할 필요가 있다. 이 경우, 서비스의 이용에 필요한 비용을 전부 이용자 자신이 부담하는 것은 적당하지 못하며, 사회연대를 기본으로 하는 공적 조성을 행함으로써 이용자를 부양하는 구조가 필요하다. 이를 통하여 사업자에게도 좋은 서비스를 효율적 으로 제공하는 것이 경영상태 개선으로 이어지며, 공적인 비용 부담의 대상이 되는 서비스와 병행하여 보다 쾌적한 환경이나 부가적인 서비스를 스스로의 부담으로 구입할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 자기결정능력이 떨어지는 자에 대 해서는 그의 권리를 옹호하여 본인의 의향을 존중한 서비스의 이용이 가능한 제도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여기서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이용자 입장에 서서 복지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시점일 것이다. 이것이 바탕이 되어 1998년 6월 17일, 중앙사회복지심의회 사회복지구조개혁 분과회가 '사회복지기초구조개혁에 대하여(중간정리)'를 정리하였다. 주 내용 은 다음과 같다. 먼저, 개혁의 필요성을 저출산고령화, 가정기능의 변화, 저성 장경제로의 이행, 사회복지에 대한 국민의 의식변화 및 국민전체의 생활안정을 지켜줄 수 있는 사회복지제도로의 기대 등 복지를 둘러싼 정황과 현행4) 기본 적인 틀 구조는 패전직후 생활곤궁자대책을 전제로 한 것으로 오늘까지 50년 간 유지되어, 현행대로는 증대, 다양화한 복지수용에 충분히 대응하기가 곤란 한 점 및 아동복지법의 개정과 개호보험법의 제정 시행 등 사회복지제도를 둘 러싼 변화에 두고 사회복지의 기초구조를 발본적으로 개혁하여야 한다고 강조 하였다. 개혁의 기본방향과 기본이념은 [표1]에서 보는 바와 같으며, 7가지의 기본방 향으로부터 국민이 스스로의 생활을 스스로의 책임으로 영위하는 것을 기본으 로 하며 스스로의 노력만으로는 자립이 불가능한 자에 대해서는 사회연대라는 시점에서 지원, 개인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가지고 가정이나 지역 내에서 그 사람다운 자립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을 이념으로 삼고 있다. 그 렇다면 여기서도 특히 유의하여서 볼 점은 서비스의 이용자와 제공자의 대등 한 관계 확립이라 하겠다. 즉, 복지서비스의 제공은 일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 는 조치제도의 변화를 요구 하는 것이다. 조치제도는 서비스대상자에 대하여 해당행정의 판단에 의해 서비스를 제공하는 구조로, 이 제도 하에서는 서비스 이용자가 행정처분이 대상이 됨으로 서비스 이용자와 서비스 제공자(시설 등) 와의 권리의무 관계가 불분명, 서로가 대등한 관계에 있다고는 보기 어려웠다. 4) 중간정리(1998년) 시점. 이용자의 입장에 선 사회복지제도 개혁에 대한 연구 ··········································· 田 鎬 成…317 [표1] 개혁의 이념 개혁의 기본방향 1.서비스 이용자와 제공자의 대등 한 관계 확립 2.개인의 다양한 수요를 지역에서 종합적으로 지원 3.폭 넓은 수요에 따른 다양한 주체 의 참여촉진 4.신뢰와 납득을 얻을 수 있는 서비 스의 질과 효율성의 향상 5.정보공개 등에 따른 사업운영의 투 명성 확보 6.증대하는 비용의 공평하고 공정한 부담 7.주민의 적극적인 참가에 따른 복지 문화의 창조 ⇨ 사회복지의 이념 국민이 스스로의 생활을 스스로의 책임으로 영위하는 것을 기본 스스로의 노력만으로는 자립된 생 활을 유지할 수 없는 경우는 사회 연대라는 생각에 입각한 지원 개인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가지 고 가정이나 지역 내에서, 그 사람 다운 자립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지원 출처:中央社會福祉審議會 社會福祉構造改革分科會(1998) 「社會福祉基礎構造改革に ついて(中間まとめ)」. 따라서 향후에는 이용자와 제공자 간의 권리의무관계를 명확히 함으로써 이 용자 개인의 존엄을 중시하는 구조로 만들 필요가 있다. 구체적으로는 개인이 스스로 서비스를 선택하여 제공자와의 계약에 의한 이용제도를 기본으로 이에 발생하는 비용에 대해서는 제공된 서비스 내용에 따라 이용자에 주목한 공적 조성을 할 필요가 있다. 다만, 계약에 의한 이용제도의 적용이 곤란한 이유가 있는 자에 대해서는 각자의 특성에 맞는 적절한 제도로 할 필요가 있다. 또한 공적 조성의 대상이 되는 서비스와 병행하여 보다 쾌적한 환경이나 부가적인 서비스를 스스로의 부담으로 구입할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 물론 계약제도 로의 이행에 따라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며 자기결정능력이 떨어지 는 자 등의 권리옹호 구조 등 계약제도를 보완하여 적절한 서비스 이용을 가 능한 제도가 필요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마지막으로 1998년 12월 8일 중앙사회복지심사회 사회복지구조개혁분과회가 정리한 '사회복지구조개혁을 진행함에 있어 (추가의견)' 을 살펴보면 ①이용자 의 입장에 선 복지제도의 구축, ②사회복지사업의 추진, ③지역복지의 충실의 세 가지가 강조되었다. 이곳에서도 역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첫 번째로 꼽은 이용자의 입장에 선 복지제도의 구축이라 하겠다. 이 중에서도 특히, 사업자에 대한 조치비를 이용자에 대한 이용료조성으로 변경함에 있어 이용자의 부담능 력에 대한 충분한 배려가 이뤄져야 함과 동시에 이용자의 선택권이 보장되는 조성의 구조이어야 한다. 다만 이 경우 사업자에게도 확실한 사업운영이 가능 318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하도록 배려해야 한다. 또한 이용자의 선택이 실제로 확보되도록 이용하기 쉬 운 수속절차와 함께 다양한 서비스가 제공되도록 시설 등의 공급체제의 정비 를 촉진한다. 그리고 이용자 및 사업자 서로가 납득할 수 있는 해결책을 원만 하게 찾아낼 수 있도록 서비스의 특성에 대응하는 중립적인 제삼자가 관여하 는 적절한 불만해결의 구조이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3 제도개혁 후 장애인관련제도의 변화 기술한 바와 같이 2000년도에 이루어진 사회복지기초구조개혁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가장 핵심적인 내용 중의 하나가 패전 이후 50여 년간 행하여져 오 던 조치제도를 이용자의 입장에 선 이용제도로의 개혁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사회복지기초구조개혁을 바탕으로 장애인(아) 복지제도는 지원비제도, 장애인 자립지원법 등의 새로운 제도가 탄생하게 된다. 1) 지원비제도 [그 림1] 기 본적 구 조 지 방정 부 장 (지정 도 시/핵 심시 장 ) 기초 지 자체 1 2 *1 6 이 용자 1 2 3 4 지 원비 수 급신 청 수 급결 정 계약 서 비스 제 공 3 4 5 7 지 정 사업 자 /시설 5 이용 자 부담 지불 6 지원 비 지불 (대리 수 령)청 구 7 지원 비 지불 (대리 수 령) *1 지 정 출 처: 厚 生 労働 省 社会 ・援 護 局障 害保 健 福祉 部 、「 支援 費 制度 担当 課 長会 議 資料 (支 援 費 制 度事 務 大要 )」 、 2001年 8月 23日 。 지원비제도는 2000년 시행된 사회복지기초구조개혁의 일환으로 그 시행을 이용자의 입장에 선 사회복지제도 개혁에 대한 연구 ··········································· 田 鎬 成…319 위한 준비기간을 고려하여 2003년 4월부터 본격시행되었다. 근본 취지는 「노 말라이제이션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하여 이제까지 행정처분으로 장애인서비스 를 결정해 왔던 조치제도를 고쳐 장애인이 서비스를 선택하고 서비스의 이용 자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시설 또는 사업자와 대등한 관계에 서서 계약에 기초 한 서비스를 이용」5) 한다는 것이다. 기본적인 구조6) 는 우선 ①장애인복지서비스이용에 대하여 지원비 지급을 희망하는 자는 필요에 따라 적절한 서비스 선택을 위해 기초지자체에 상담지 원을 받고 지원비신청을 한다. 이에 ②신청을 받은 기초지자체는 지급이 적절 하다고 인정될 때 신청자에 대한 지급결정을 한다. ③지원비 지급결정을 받은 자는 지방정부 지사 등의 지정을 받은 지정사업자 또는 시설과 계약하여 서비 스를 이용한다. ④서비스를 이용한 후에 본인 또는 부양의무자는 지정사업자 또는 시설에 대하여 서비스 이용에 대한 비용 중 본인 및 부양의무자의 부담 능력에 따라 정해진 이용부담액을 지불함과 동시에 기초지자체는 서비스이용 에 요한 비용 전체금액 중에서 이용자부담을 공제한 금액을 지원비로 지급한 다. 이때 해당 지원비를 지정사업자 또는 시설이 대리수령하는 방식을 취한다. 단, 어쩔 수 없는 이유로 [그림1]과 같은 방법의 적용이 곤란한 경우에는 기초 지자체가 조치에 의해 장애인복지서비스의 제공이나 시설로의 입소를 결정할 수도 있다. 다음으로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기초지자체 및 사업자의 역할관계를 살펴보 자7). 먼저 중앙정부의 역할은 제도 전체의 틀을 잡고 제도가 원만하게 이루어 질 수 있도록 지방정부8) 및 기초지자체에 지원을 한다. 그 다음 지방정부의 역할은 기초지자체에서 제도가 원만하게 이루어지도록 필요한 지원을 함과 동 시에 사업자/시설의 지정 및 지도/감독을 한다. 또한 기초지자체는 지역주민 에 가까운 행정주체로서 장애인에 대한 지원체제의 정비에 노력함과 동시에 이용자의 입장에 서서 세세한 대응으로 지원비의 지급결정 등을 행한다. 마지 막으로 사업의 역할을 보면 이용자의 심신의 상황 등에 응하여 적절한 서비스 를 제공함과 동시에 그 질 평가를 행하는 등 항상 이용자의 입장선 서비스제 공에 노력한다. 5) 후생노동성 사회원호국 장애보건복지부 장애복지과 「장애인시책에 관련된 지원비제도에 대하여 (지원비제도Q&A집 2001년 3월6일)」중에서 발췌. 6) 『平成18年版 障害者白書』內閣府, 87頁. 7) 厚生勞動省社會․援護局障害保健福祉部 (2001년)「支援費制度擔當課長會議資料(支援費制度事務大 要)」、8月23日 4頁. 8) 본고에서는 편의상 명칭을 지방정부로 사용하며 우리나라의 경우 특별시/광역시, 도등에 해당. 일 본에서는 도도부현(都道府縣)이라 함. 320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표2] 대상이 되는 서비스 거택 생활 지원 시설 훈련 등 지원 신체장애인 지적장애인 장애아 •신체장애인 거택개호등 사 업(홈 헬프 서비스) •신체장애인 주간보호사업 •신체장애인 단기입소사업 •아동거택개호등사업 (홈 헬프 서비스) •아동주간보호사업 •아동단기입소사업 •신체장애인 갱생시설 •신체장애인 양호시설 •지적장애인 거택개호등사업 (홈 헬프 서비스) •지적장애인 주간보호사업 •지적장애인 단기입소사업 •지적장애인 지역생활원조사업 •지적장애인 갱생시설 •지적장애인 통근 기숙사 •신체장애인 수산시설 (소규모 통소수산시설을 제외) •지적장애인 수산시설 (소규모 통소수산시설을 제외) 출처:社会福祉の動向編集委員会 編集(2008)『社会福祉動向2008』中央法規、202頁. 주 대상이 되는 서비스는 신체장애인복지법에서 신체장애인갱생시설, 신체장 애인양호시설, 신체장애인수산시설(정령으로 정해진 시설에 한함), 신체장애인 거택개호등사업, 신체장애인주간보호사업, 신체장애인단기입소사업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리고 지적장애인복지법에서는 지적장애인갱생시설, 지적장애인수 산시설(정령으로 정해진 시설에 한함), 지적장애인통근기숙사, 심신장애인복지 협회가 설치하는 복지시설, 지적장애인거택개호등사업, 지적장애인주간보호사 업, 지적장애인단기입소사업, 지적장애인지역생활원조사업(그룹 홈) 등이 여기 에 속한다. 마지막으로 아동복지법에서는 장애아관계만으로 아동거택개호등사 업, 아동주간보호사업, 아동단기입소사업 등이다. 한편, 지원비 지급결정은 먼저 이용자로부터의 신청에 의해 기초지자체가 후 생 노동성령9) 에서 정하는 사항을 감안하여 결정한다. 거택생활지원비의 지급 은 수급기간과 수급량을 시설훈련 등의 지원비는 수급기간과 장애정도구분을 결정한다. 거택생활보호지원비 수급량을 정하는 단위기간은 거택개호, 주간보 호 및 단기입소가 1개월이며, 지적장애인지역생활원조(그룹홈)는 수급결정시에 정하는 지급기간이다. 수급기간은 먼저 거택생활지원비는 거택보호, 주간보호 및 단기입소는 1년, 지적장애인 지역생활원조(그룹홈)의 경우에는 3년이며. 또 시설훈련등지원비는 3년이다. 다만, 지급기간이 종료되었을 때에는 새로 지원비를 신청하여 지급결 정을 받아 계속하여 서비스를 지원받을 수 있다. 지급결정에 이의가 있을 경 9) 후생노동성령으로 정해진 사항은 「신청을 한 장애인(아)의 장애 종류 및 정도 기타 심신의 상황, 해당 장애인(아)의 개호를 행하는 자의 상황, 해당 장애인(아)의 거택생활지원비의 수급상황, 해당 장애인(아)의 시설훈련등 지원비의 수급상황, 해당장애인(아)의 지웝지급에 관계되는 것 이외의 서 비스 이용상황, 해당 장애인(아)의 이용의향의 구체적 내용, 해당 장애인(아)이 처해져 있는 환경, 해당 지정거택(시설)지원의 제공체제의 정비상황」이다. 이용자의 입장에 선 사회복지제도 개혁에 대한 연구 ··········································· 田 鎬 成…321 [표3] 후생노동성령으로 정해진 수급기간 종류 거택 생활 지원 비 거택보호, 주간보호 및 단기입소 기간 「1년」+「거택지급결정을 한 날로부터 해당 일이 속하는 달의 말일까지」 (거택지급결정을 한 날이 달의 첫날인 경우를 제외) 비고 *신체장애인복 지법 제17의 5 제4항, *지원비제도 시행 전에 행하여진 준비지급결정 *지적장애인복 에 대해서는,「18개월」로 하는 경과조치도 병 지법제15조의6 행해서 규정 제4항 지적 장애 인 지역 생 활 원 조(그룹 홈) 「3년」+「거택지급결정을 한 날로부터 해당 *아동복지법 일이 속하는 달의 말일까지의 기간」(거택지급 제21조의 11 결정을 행한 날이 달의 첫날인 경우를 제외) 제4항 * 신 체 장애 인 복 지법 제17조의 「3년」+「시설지급결정을 한 날로부터 해당 11 제4항, 일이 속하는 달의 말일까지」 (시설지급결정을 시설훈련등지원비 한 날이 달의 첫날인 경우를 제외) * 지적 장애 인 복 지법 제15조의 12 제4항 ※단, 지급기간의 종료하였을 때에는 다시 지원비 지급결정을 받음으로서 계속하여 서 비스를 받을 수 있다. 출처:(厚生労働省社会․援護局障害保健福祉部、「支援費制度担当課長会議資料」、2002 年)에서 필자편집작성. 우에는 지급결정을 안 날의 다음 날부터 60일 이내에 해당 기초지자체에 이의 신청을 할 수 있으며, 상급행정기간인 지방정부나 중앙정부에 심사청구나 재심 사청구는 할 수 없다. 지원비제도에서의 이용자부담 기준 설정에 관한 원칙10) 은 거택생활지원(지 적장애인지역생활원조는 제외) 이나 시설훈련등지원을 받은 자는 이용한 서비 스에 대하여 본인 또는 부양의무자의 부담능력에 따라 후생노동성장관이 정하 는 기준을 넘지 않은 범위 내에서 기초지자체장이 정하는 기준에 따라 이용자 부담액을 지불하게 된다. 그 구체적 설정기준은 ①저소득자에 배려하고, 소득 에 관계없이 필요할 때에 필요한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이용자부담체계로, ②재택서비스 이용자와 시설서비스 이용자와의 부담 균형을 도모, ③전체적으 로 이제까지의 공비부담수준을 유지하는 것이다. 10) 厚生勞動省 社會․援護局障害保健福祉部 (2001年)「支援費制度擔當課長會議資料(別冊)」、8月23 日 15~16頁. 322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2) 장애인자립지원제도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2003년 4월부터 시행 된 지원비제도는 종래의 조 치제도에서 이용제도로 이행됨으로 인하여 일정 서비스체제의 변화로 새로운 이용자가 급증하였다. 그러나 이로 인한 신규이용자에 대한 대응의 불가피성 과 동시에 정신장애인, 특히 특정질환(난병)이나 고차뇌기능장애등이 지원비제 도에서 제외된 점, 게다가 장애종류별로 제도화 되어옴으로써 그에 따른 복잡 한 시설과 사업체계 점등 이용자의 니즈(needs)에 정확히 대응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고 할 수 있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이에, 「장애인기본법의 기본적 이념에 따라 다른 장애인 및 장애아의 복지 에 관한 법률11) 과 함께 장애자 및 장애아가 가지고 있는 능력 및 적성에 따 라 자립된 일상생활 또는 사회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필요한 장애복지서비 스에 관계된 급여, 기타 지원을 행하여 보다 더 장애인 및 장애아 복지 증진을 도모함과 동시에 장애의 유무에 관계없이 국민이 상호 인격과 개성을 존중하 여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지역사회 실현에 기여」하기 위한 목적으로 장애인자 립지원법이 성립되어 2006년 10월1일부터 시행12) 되었다. 장애인자립지원법의 포인트는 ①장애인의 복지서비스를 일원화, ②지역에 한 정된 사회자원을 활용할 수 있도록 규제완화, ③장애인이 좀더 일할 수 있는 사회로, ④공평한 서비스 이용을 위한 수속과 기준의 투명화/명확화, ⑤이용한 서비스의 양과 소득에 따른 공평한 부담과 국가의 재정책임의 명확화로 증대 하는 복지서비스 비용을 모두가 부담하여 부양하는 구조 강화로 크게 5가지로 나누어진다. 좀 더 구체적으로 [표4]의 장애인자립지원법의 포인트를 보면, 첫째, 장애인 의 복지서비스를 일원화하였다. 신체/지적/정신 장애 등으로 제각각 존재하던 제도간의 격차를 해소하고, 또한 지원비제도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정신장애 를 대상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서비스 실시주체가 지방정부와 기초지자체로 이분화 되어있던 것을 실시주체는 기초지자체로 일원화하고 지방정부는 이를 뒤에서 지원하는 구조로 하였다. 둘째, 지역에 한정된 사회자원을 활용할 수 있도록 규제완화, 즉 이용자 본 위의 서비스체계로 재편하였다. 장애종류별로 복잡한 시설과 33종의 사업체계 를 6개의 사업으로 재편하고 지역생활지원, 취로지원과 중도장애인을 대상으로 하는 서비스를 창설하였다. 또한 입소기간의 장기화에 따라 본래의 시설목적 과 이용자의 실태와의 괴리문제를 규제완화를 통하여 진전시키고 기존의 빈 11) 신체장애인복지법, 지적장애인복지법, 정신장애인복지법, 아동복지법. 12) 새로운 이용수속, 재택복지서비스에 관련된 국가 등의 부담(의무적 부담화)에 관한 사항, 복지서 비스나 공비부담의료의 이용자부담의 재검토에 관한 사항 등은 2006년 4월1일부터 시행되었음. 이용자의 입장에 선 사회복지제도 개혁에 대한 연구 ··········································· 田 鎬 成…323 [표4] 장애인자립지원법의 포인트 장애인 시책을 3종류의 장애를 일원화 이용자 본위 서비스체계로 재편 취로지원의 발본적 강화 지급결정의 투명화 명확화 안정적인 재원 확보 법 시행 전 법 시행 후 •3종류의 장애(신체,지적,정 •3종류의 장애 제도 격차를 신) 제각각의 제도체계(지 해소하고 정신장애 인 적장애인은 지원비제도의 을 대상에 대상외) •기초지자체에 실시주체를 •실시주체는 지방정부, 기초 일원화하고 지방정부는 이 지자체으로 이분화 를 배후지원 •장애종류별로 복잡한 시설, •33종류로 나누어진 시설체 사업 체계 계를 6개의 사업으로 재 •입소기간의 장기화등에 따 편. 이와 더불어 '지역생활 라 본래의 시설 목적과 이 지원' '취로지원'을 위한 용자의 실태와 괴리 사업이나 중도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서비스를 창 설 •규제완화를 진전시켜 기존 의 사회자원을 활용 •양호학교 졸업자의 55%는 •새로운 취로지원사업을 창 복지시설에 입소 설 •취로를 이유로 시설퇴소자 •고용시책과의 연계를 강화 는 겨우 1% •전국 공통의 이용 규칙(지 •지원의 필요도에 관한 객 원의 필요도를 판 정하 관적인 척도(장애정도구 는 개관적인 기준)이 없음 분)를 도입 •지급결정의 프로세스가 불 •심사회의 의견청취등 지급 투명 결정 프로세스를 투 명 화 •신규 이용자가 급증할 전 •국가의 비용부담 책임을 망 강화(비용의 1/2 부 담) •불확실한 국가의 이용부담 •이용자도 응분의 비용을 구조 부담하고 모두가 같 이 부양하는 구조로 출처:『平成19年版 障害者白書』内閣府, 265頁. 교실, 빈 점포 등의 사회자원을 활용하였다. 셋째, 장애인이 보다 더 일할 수 있는 사회로 만들기 위해 취로지원을 발본 적으로 강화시켰다. 양호학교 졸업자의 55%가 복지시설에 입소하는 문제해결 을 위해 새로운 취로지원사업을 창설하였으며, 또 취로를 사유로 시설을 퇴소 하는 자가 1%밖에 되지 않는 문제해결을 위하여 고용시책과의 연계를 강화하 였다. 324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넷째, 공평한 서비스 이용을 위한 수속과 기준의 투명화․명확화하였다. 이 전까지 없었던 지원의 필요도를 판정하는 전국 공통의 이용규칙에 관한 객관 적인 척도(장애정도구분)를 도입하였으며, 불투명하던 심사회의 의견청취 등 지급결정의 프로세스를 투명화하였다. 다섯째, 증대하는 복지서비스 비용을 모두가 부담하여 부양하는 구조로 안정 적인 재원을 확보하였다. 신규이용자가 급증할 것을 전망하여 국가의 비용부 담책임을 비용의 1/2부담으로 강화하였으며, 불확실한 국가의 이용부담 구조문 제해결을 위해 이용자도 응분의 비용을 부담하고 모두가 같이 부담하여 부양 하는 구조로 전환하였다. 위 5가지 포인트 중에서도 특히, 이용자 본위의 서비스체계로의 재편([표5]) 을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시행 전에는 중증심신장애아시설, 신체장애인요양시 설, 정신장애인생활훈련시설 등 33종류의 기존시설 및 사업체계를 요양개호, 생활개호, 자립훈련, 취로이행훈련, 취로계속훈련 및 지역활동지원센터의 6개 주간활동으로 재편하였다. 6개의 주간활동은 크게 개호급여와 훈련등급여 및 지역생활지원사업으로 나 뉘어져 있으며, 그 안에서 개호급여는 (의료형)요양개호와 생활개호, 훈련등급 여는 기능 및 생활의 자립훈련과 취로이행훈련 및 취로계속훈련, 지역생활지원 사업은 지역활동지원센터로 세분된다. 이에 덧붙여 거주지원으로 시설로의 입 소 및 거주지원서비스가 더해져 24시간을 통한 시설생활에서 주간활동의 장과 생활의 장으로 분리된 지역생활로의 체계로 변화되었다. 또한 입소기간의 장기화 등 본래의 시설기능화 이용자의 실태와의 괴리 해 소를 위해 이용자에 가까운 곳에서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구조를 구축하였다. 이와 같은 새 체계로의 이행에 2006년부터 5년간의 유예기간을 두었다. 한편, 장애인이 이용한 서비스의 비용은 기초지자체가 그 비용의 100분의 90 을 지급하고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이용자가 부담(원칙1할)한다. 9할의 비용 부담에 대하여서는 기초지자체는 기초지자체가 행한 자립지원급여 지급에 요 하는 비용을 지급하고, 지방정부는 기초지자체가 요하는 비용의 4분의 1을 부 담하며, 국가(중앙정부)는 기초지자체가 요하는 비용의 2분의 1을 부담하게 된 다. 이용자의 입장에 선 사회복지제도 개혁에 대한 연구 ··········································· 田 鎬 成…325 [표5] 이용자 본위의 서비스 체계로 재편 ㅇ장애인의 상태나 니즈에 따절한 지원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지도록 장애종류 별로 분립된 33종류의 기존시설/사업체계를 6개의 주간활동으로 재편 •「지역생활지원」,「취로지원」과 같은 새로운 과제에 대응하기 위한 새로운 사업을 제도화 •24시간을 통한 시설생활에서 지역생활로(주간활동의 장과 생활의 장 분리) •입소기간의 장기화 등 본래의 시설기능과 이용자의 실태의 괴리를 해소. 이 를 위해 한사람 한사람의 이용자에 대하여 가까운 곳에서 효과적/효율적인 서 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구조를 구축 시행 전 시행 후 주간활동 거주지원 이항에서 하나 또는 중증심신장애아시설 복수의 사업선택 (연령초과아동) [개호급여] 진행성 근육위축증요양등 급여사업 신체장애인요양시설 갱생시설(신체/지적) 새 체 계 로 이 행 복지공장 (신체/지적/정신) 정신장애인 생활훈련시설 2. 생활개호 [훈련 등 급여] (기능훈련/생활훈련) 수산시설 신체/지적/정신) ※의료시설에서 실시 3. 자립훈련 4. 취로이행훈련 대략 5년 정도 의 경과 조치 기간 내에 이행 5. 취로계속훈련 (A형(취로형), B형) [지역생활지원사업] 정신장애인지역생활지 원센터(주간보호부분) 시설로의 입소 및 거주지원서비스 (케어홈, 그룹홈, (신체/지적/정신) 소규모통원수산시설( 1. 요양개호(의료형) 6. 지역활동지원센터 장애인주간보호 출처:『平成19年版 障害者白書』內閣府, 266頁. 복지홈) 326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3) 양제도의 고찰 2000년 사회복지기초구조개혁은 신체장애, 지적장애 및 정신장애 각각에 대 하여 주민에게 가장 가까운 기초지자체를 중심으로 한 서비스제공체제를 구축 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서비스제공체제를 이전까지의 "조치"에서 "계약"으 로 전환하여 자기결정과 이용자의 입장에 선 체제를 명확히 하였다. 이로써 지원비제도는 행정에 의한 ‘행정처분’이라는 획일적인 서비스를 탈피하고 이용 자가 스스로 원하는 서비스를 선택하여 이용자본위의 시스템을 확립하는 커다 란 성과를 이루어냈다. 즉, 장애인의 자기결정을 존중하고 서비스를 이용한 후에 본인 또는 부양의 무자는 지정사업자 또는 시설에 대하여 서비스 이용에 대한 비용 중 본인 및 부양의무자의 부담능력에 따라 정해진 이용부담액을 지불함과 동시에 기초지 자체는 서비스이용에 필요한 비용 전체금액 중에서 이용자부담을 공제한 금액 을 지원비로 지급하는 대등한 관계설정을 확립하였다. 그러나, 문제점으로는 먼저, 장애인에게 공급되는 서비스양이 절대적으로 부 족하다는 점이다. 이는 이용자인 장애인이 질 높은 서비스를 선택한다는 본래 의 취지와 동떨어지는 것이다. 둘째, 행정의 책임을 보다 더 명확히 할 필요가 있었다. 다시 말해서 서비스 알선이나 상담업무에 그치지 말고 보다 더 적극 적으로 행정이 나서 제도 정착에 책무를 강화할 필요성가 요구되었다. 세 번 째, 이용자의 자기결정 능력이다. 행정에 의한 조치서비스에서 이용자 스스로 에 의한 계약제도로의 정책전환에 따른 긍정적인 측면의 이면에는 복잡한 절 차로 인하여 신청에서 계약에 이르기까지 장애인 본인 스스로 할 능력이 부족 한 자 특히, 정신장애인 등 자기결정 능력이 부족한 자에 대한 성년후견제도의 제도 정비가 요구되었다. 마지막으로 지역 간의 격차를 들 수 있겠다. 시장원 리의 도입으로 인하여 시설의 종류에 따라서는 어느 한 지역에 시설이 편중, 필요한 서비스를 받고자 하여도 해당시설이 없어 서비스를 받을 수 없는 경우 가 발생, 이는 지역생활로의 정책전환에 역행할 소지가 충분히 있어 지역 간의 격차해소가 요구되었다. 이러한 문제점이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행정조치에 의한 서비스제공 에서 이용자 스스로의 의한 계약제도로의 획기적인 전환은 일본사회복지제도 체계에 커다란 향상을 가져왔다고 할 수 있겠으나, 서비스이용자의 급증에 따 른 장애인복지관련 재원부족으로 인하여 짧은 기간에 파탄에 이른다. 지원비제도의 위와 같은 여러 문제점을 보완하여 이루어진 것이 새로운 장 애인자립지원제도라 하겠다. 특징으로는 기존의 신체․정신․지적로 분류되던 장애종류의 틀을 깨고, 그 종류에 관계없이 종합적인 서비스를 제공받아서 서 비스를 공통으로 이용함으로써 지역의 사회복지자원을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 이용자의 입장에 선 사회복지제도 개혁에 대한 연구 ··········································· 田 鎬 成…327 다는 점이다. 또한, 이용자부담원칙을 기존의 ‘응능부담13)’에서 ‘응익부담14)’으 로 전환한 것이라 하겠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장애인 본인에게 일정비율을 요구한 것에 있다하 겠다. 이는 부족한 재원을 어느 정도 확보하려는 측면에서 나온 것이나 서비 스 이용자가 대부분 소득수준이 낮음에도 불구하고 고용의 확보나 충분한 소 득보장이 없는 상태에서는 장애인에게 커다란 부담을 안겨줄 수 있기 때문이 다. 또한 그 이면에는 2000년에 실시된 개호보험15)과의 통합과도 맞물려 있다 하겠다. 2000년에 실시된 일본의 개호보험의 피보험자는, 65세 이상의 제1피보 험자와 40세 이상 64세 이하의 제2피보험자로 나뉘어져 있다. 다시 말하자면, 개호보험의 피보험자는 40세 이상인 셈이다. 재원확보 차원에서 개호보험 도 입초기부터 20세 이상을 피보험자로 하고자 하였으나, 여러 정치적 상황상 현 실화되지 못하고 있었다. 이와 관련된 개호보험제도와 장애인복지제도와의 관계를 보면, 65세 이상의 장애인은 이미 개호보험제도의 대상에 되어 있다. 이 경우 제도 적용관계는 개호보험제도가 우선 적용되며, 장애인복지제도는 외출도움(지원)이나 주산시 설과 같이 개호보험에는 없는 서비스나 정신성 장애인에 대한 개호보험 지급 한도액을 넘어선 서비스 등 그 필요성에 따라 급여가 추가된다. 향후 있을 개 호보험제도 개정에서는 개호보험제도를 우선 적용할 범위를 65세 미만에까지 확대할 것인지의 여부가 과제이기도 하다. [표4] 시대별 재원 및 시설선택권 비교 재원 이용자의 시설이용선택권 출처:필자작성. 행정조치시대 조치제도 세금 없음 이용계약시대 지원비제도 자립지원제도 세금 세금+자기부담 있음 있음 장애인자립지원제도가 가까운 미래에 개호보험과 통합된다고 가정할 때, 개 호보험의 피보험자는 자연스럽게 20세 이상으로 확대될 것이며, 현재 이용자 13) 부담능력이 없는 자에 대해서는 세금이나 사회보험료를 감면하고, 소득이 많은 자에게는 보다 더 많은 부담률의 세금이나 사회보험료를 과함으로써 소득재분배 기능을 함. 14) 소득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관련비용의 일정비율을 부담시키는 것. 15) 우리나라의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에 해당. 328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부담률이 1할인 개호보험제도가 재원확보 차원에서 점차적으로 그 비율을 높 여가고자 하고 있음을 감안할 때, 향후 서비스 이용장애인의 부담비율 또한 이 에 맞게 높아질 것이다. 현재, 장애인이 이용한 서비스의 비용은 기초지자체가 그 비용의 100분의 90을 지급하고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이용자가 부담(원 칙1할)한다. 종합정리하자면, 과거 행정에 의한 일방적인 조치제도 시대에는 재원이 세 금이었기에 장애인이 부담분은 없었으나, 시설이용선택권이 부여되지 않았다. 그 후 이용계약시대로 넘어오면서 지원비제도 시기에는 재원부분에서는 조치 시대와 마찬가지로 세금으로 충당되었으며 시설에 대한 선택권도 주어졌지만, 이용자의 급증으로 인한 재원부족으로 결국 파탄, 이를 보충하기 위하여 곧이 어 장애인자립지원제도가 시행되었다. 자립지원제도의 재원은 세금과 이용자 자기부담율에 의하여 충당되었으며, 시설에 대한 이용선택권은 지원비제도와 동일하나 기술한 바와 같은 여러 가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4 우리나라에 시사하는 점 우리나라 장애인관련시설은 크게 장애인 생활시설, 장애인 지역사회재활시 설, 장애인 직업재활시설, 장애인 유료복지시설의 네 가지로 구분된다. 특히, 장애인 생활시설과 장애인 직업재활시설에 대하여 살펴보자. 먼저, 생활시설은 장애인이 필요한 기간동안 생활하면서 재활에 필요한 상담/치료/훈련 등의 서 비스를 받아 사회복귀를 준비하거나 장기간 요양하는 곳이며, 시설운영에 따른 소용경비는 기본적으로는 지자체의 보조금으로 충당하며, 필요에 따라서는 운 영자의 자부담으로 한다. 그리고, 직업재활시설은 일반 작업환경에서 일하기 어려운 장애인이 특별히 준비된 작업환경에서 직업훈련을 받거나 직업훈련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시설이며, 시설운영에 따른 소요경비는 지자체의 예산으로 충당하며 필요에 따라서는 운영자의 자부담으로 한다. 여기서 생활시설에 입소가능한 대상자 및 그 절차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 자. 입소대상은 원칙적으로 국민기초생활보장수급자로 법정 등록장애인이며,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자가 아닌 경우에는 법정 등록장애인으로 부양의무자가 없거나 부양의무자가 있어도 부양능력이 없거나 부양을 받을 수 없는 자이다. 그리고 입소의뢰절차는 입소대상 자격기준에 합당한 자로서 복지실시기관이 직권 또는 장애인이나 그 가족 등의 입소 신청에 의하여 당해 장애인을 입소 의뢰하고자 할 때에는 검진, 상담 또는 가정실태 조사 등을 행하고 해당 시설 이용자의 입장에 선 사회복지제도 개혁에 대한 연구 ··········································· 田 鎬 成…329 장에게 입소 의뢰를 하게 된다. 특히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자가 아닌 경우에는 개인적 환경을 고려하여 입 소시설에의 욕구가 큰 경우에 한하여 개별상담에 의해 판정된 경우, 입소에 따 른 비용을 실비로 징수하고 시설입소를 허용하는 실비입소제도가 있다. 그 입 소 절차는 장애인 또는 그 보호자 등의 입소신청이나 복지실시기관의 실비입 소 의뢰가 있어야 하며, 해당 장애인에 대한 상담, 잔존능력 평가 등을 실시하 여 입소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이러한 장애인에 대한 시설에 입소에 있어서 주목하여야 할 점은 제도 용어 상으로는 장애인 본인이나 그 보호자에 의한 신청에서 출발하지만, 실질적으로 는 행정에 의한 조치에 기인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장애인복지법에서도 복 지의 조치(제3장)라고 규정하고 있으며, 재활상담과 입소 등의 조치(제34조)에 서는 장애인복지실시기관16)은 장애인에 대한 검진 및 재활상담을 하고, 필요 하다고 인정되면 조치를 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해당 장애인이 시설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본인의 의지에 의한 해당시설과의 계약관계가 아닌 행정에 의한 조치처분을 받고 있다고 할 수 있 겠다. 한편, 최근에 발표된 장애인들의 새로운 요구를 기본적 삶의 보장문제와 더 불어 해소하기 위한 장애인정책의 패러다임 전환을 위한 “장애인지원 종합대 책”(2006년 6월 28일)을 주목하고자 한다. 이 중에서도 중증장애인의 자립생활 을 위한 활동지원으로 활동보조인 제도17)로 그 서비스제공방식은 바우처모델 의 도입이었다. 이 바우처제도는 보건복지부18)에 의하여 대대적으로 홍보되었으며 특히, 보 건복지부 2007년 12월 보도자료에 따른 바우처제도의 의미 및 시행성과에 대 하여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19) “서비스가 필요한 수요자에게 특정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이용권(바우처)를 지 원하는 바우처제도는, 바우처 지원을 통해 수요자가 원하는 공급기간을 선택하고, 공급자간 경쟁을 통한 질 높은 서비스 시장을 형성 촉진, 특히 효율적이고 투명 한 바우처 관리를 위해 e-바우처(전자카드식 바우처)시스템을 구축․운영하고 있 으며, 이에 따라 실시된 지역사회서비스혁신사업, 노인돌보미, 중증장애인활동보조 등 사회서비스 바우처 사업이 안정적으로 정착되고 있으며 시행 초기 많은 성과 가 있었다. 16) 17) 18) 19) 보건복지부장관, 특별시/광역시/도지사/특별자치도지사 또는 시장/군수/구청장. 2007년 4월 실시. 제도시행 당시. 보건복지부, 12월4일 보도자료. 330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또한, 지역사회서비스혁신사업을 추진한 결과 주민들의 수요에 부응하는 다양한 사회서비스개발 성과가 있었으며, 본인이 원하는 서비스를 선택적으로 이용하게 함으로써 노인․장애인 서비스 이용자 10명 중 9명이상이 만족하는 높은 수요자 만족도를 달성하였고, 다양한 공급기관이 출연하는 등 사회서비스 공급기관간 경 쟁을 촉발하였고, 여성․중고연령자 등 고용취약계층을 위한 일자리 창출 및 지방 대 졸업자의 취업에 도움을 주는 등 수요자 중심 사회서비스 확충과 e-바우처라 는 관리체계를 결합한 결과 다양한 사회서비스 개발 등 가시적인 효과가 있었다. 보건복지부는 e-바우처 방식의 성과를 확인한 만큼 향후 다른 분야에도 확대해 나가고 사회서비스 e-바우처 브랜드 개발 등을 통해 국민적 이미지 개선도 적극 추진할 방침임을 밝혔다.” 위 보도자료 내용만 보면 마치 e-바우처는 더 없는 좋은 제도와 같이 홍보 하고 있다. 물론, 앞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용자가 서비스를 선택할 수 있 게 하였다는 점이나 시설중심의 서비스에서 재가중심의 서비스로의 이동 등은 평가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제도변화과정에서 겪었던 여러 가지 문제점 특히, 서비스 이용자에 대한 자기부담율과 이와 관련된 재원확보문제 및 장애아(인)를 포함한 이용자의 자기결정능력 여부에 따른 후견인제도의 확 립과 공급기관 평가제도(제삼자기관에 의한)와 그에 대한 행정책임의 명확화, 인재육성 등은 향후 우리가 풀어나가야 할 과제임에 틀림없다. 이용자의 입장에 선 사회복지제도 개혁에 대한 연구 ··········································· 田 鎬 成…331 【参考文献】 보건복지부(2007)『2008 장애인 활동보조지원사업 안내』 제80회 국정과제회의 본보고서(2006) 「선진복지국가 구현을 위한 장애인지원 종 합대책」 보건복지부 재활지원팀(2008) 「장애인생활시설 입소대상 및 절차」 보건복지부 보도자료(2007) 「e-바우처를 통한 사회서비스 확충 성과」, 12월4일 보건복지부(2007) 『2006년 보건복지백서』 보건복지부(2008) 『2008년도 장애인복지사업안내』 변용찬 외(2005) 「장애인 이용시설 복지서비스 실태 및 개선방안 연구 -장애인복 지관을 중심으로-」한국보건사회연구원 최성은/최석준(2007) 「바우처 사업 효과 분석 및 평가방안 연구」한국보건사회연 구원 厚生労働省「社会福祉基礎構造改革について(社会福祉事業等改正法案大綱骨子)」 厚生労働省「社会福祉基礎構造改革について(主要な論点)」 厚生労働省「社会福祉基礎構造改革について(中間まとめ)」 厚生労働省「社会福祉基礎構造改革を進めるに当たって(追加意見)」 厚生労働省社会援護局障害保健福祉部(2001)「支援費制度担当課長会議資料(支援費 制度事務大要)」 厚生勞動省 社會․援護局障害保健福祉部 (2001年)「支援費制度擔當課長會議資料 (別冊)」 厚生労働省編(2007)『平成19年版 厚生労働白書』 坂本洋一(2006)『図説よくわかる障害者自立支援法』中央法規 社会福祉の動向編集委員会 編集(2008)『社会福祉動向2008』中央法規 障害者生活支援システム研究会(2007)『障害者自立支援法と人間らしく生きる権利 障害者 福祉改革への提言2』かもかわ出版 中央社会福祉審議会社会福祉構造改革分科会(1998)『社会福祉基礎構造改革につい て』全国社会福祉協議会 内閣府『平成18年版 障害者白書』 内閣府『平成19年版 障害者白書』 332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要 旨 本研究は、しばしば問題となっている社会福祉施設の運営責任者の責務の欠如や行政シス テムの欠如によって、利用者であるはずの障害者が多大な苦痛を受けており、その社会福祉 行政システムの根本的な制度改革に焦点をあてた 。 そこで 、 その根本的な解決策を探るた め、社会福祉サービスの利用制度化という改革を成し遂げた日本の'社会福祉基礎構造改革 'に注目する。この改革は、主として、日本において第二次世界大戦後、ずっと変わらず行政 によって行われたる措置制度を、利用契約制度へと大きく前進させた画期的な政策転換であっ た。この一環として、障害兒(者)福祉制度は、行政の一方的な措置から障害兒(者)が自身 に合う施設を選択し、契約して利用できる支援費制度が実施された。しかし、利用者の急増に よる財政的な問題などでまもなく破綻、それを継ぐ制度として障害者自立支援制度が施行され た。主に不足する財源確保という側面から利用者に一定の負担を求めるこの制度も、殆んどの サービス利用者の所得水準が低く、雇用確保や充分な所得保障のない状態では、利用者で ある障害者に大きな負担になるなど、多くの問題と介護保険制度との統合の話も途切れないまま である。一方、我が国では近年、障害者支援総合対策の社会福祉サービスの一環として、 バウチャー制度を実施している 。 政府はまるでバウチャー制度は最もなものとして宣伝している が、日本の社会福祉改革によって支援費制度から障害者自立支援制度への実施過程におい てのサービス利用者に対する自己負担率や財源確保の問題、利用者の自己判断能力の欠 如による後見人制度の確立、サービス供給機関への評価制度およびそれに対する行政責任の 明確化など、さまざまな課題が残されていることを念頭におく必要があろう。 キーワード : 社会福祉制度 政策、福祉行政システム、障害者福祉政策、支援費制度、障害者自立 支援制度、バウチャー制度、措置制度、利用契約制度、社会福祉サービス 투 고 : 2008. 8. 31 1차 심사 : 2008. 9. 12 2차 심사 : 2008. 9. 27 일본의 인구구조 변화에 따른 소비시장 변화에 대한 고찰 변재웅*․최성백** 1) (e-mail : [email protected], [email protected]) 目 次 Ⅰ. 서론 Ⅱ. 일본 인구구조의 변화와 특징 Ⅲ. 일본 소비시장의 변화 Ⅳ. 결론 Ⅰ. 서론 일본의 지속적인 경제성장은 일본 국내의 소비구조에도 많은 영향을 미쳐왔 다. 최근 일본 소비확대의 주류층은 단혼세대(団塊世代)가 중심이 되고 있다. 이들은 중류층 생활자로 도시에서 성장하고 교육받은 정규직 직장인들이 대부 분이다. 이 세대의 특징은 부부 역할을 분담하고 대출로 집을 구입하며 자녀의 교육투자를 적극적으로 하는 층으로 현재 퇴직했거나 퇴직을 앞둔 団塊世代들 이다. 또한 이들의 라이프스타일은 라이프사이클 모델에 따라 이루어 졌기 때 문에 소비구조를 분석하는 데는 비교적 쉬었다. 그러나 1990년 버블경제의 붕 괴로 소비구조에 큰 변화가 생겼다. 여성의 사회진출 증가와 자유로운 생활 그 리고 단신자층의 증가로 소비시장이 다양한 층으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소비의 다양화는 시장접근의 다양성을 의미한다. * 계명대학교 통상학과 **대구가톨릭대학교 통상학과 334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기업성공의 중요한 관건은 이러한 다변화의 소비시장을 예측하는 것이다. 변 화를 예측하고 시장을 선점하는 것은 기업의 안정적인 생산 활동을 보장하고 고용증대에도 긍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문제는 어떤 상품을 미래 예상 상품 으로 선점하느냐가 기업 성공에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점이다(MIS, 2005). 최근 유가의 급등으로 상품판매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운데 도요타 자동차의 하이브리드카 판매증가와 기능성 자전거의 판매증가 등은 소비시장 의 변화 트렌드(trend)를 실감하게 한다. 그동안 기업에 영향을 미치는 소비환 경의 변화에 따라 그 시대를 주도했던 상품의 키워드(keyword)도 重厚長大→ 輕薄短小→美創遊感의 흐름으로 전개되고 있다1). 그러나 이러한 상품의 키워 드 변화는 무엇보다 그 사회의 인구구조의 변화에 따라 영향을 많이 받는다. 인구증가가 급격한 상승국면일 때는 소비재 상품들의 판매증가를 기대할 수 있으나, 인구감소가 현저 할 때는 소비재 상품보다는 개인적인 개성상품의 판 매가 증대된다. 따라서 오늘날 미창유감(美創遊感) 시대의 유망상품의 키워드 를 전망해 보는 것도 의미 있다. 한국은 그동안 선진국에 비해 한국 토종 브랜 드 개발에 소홀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기업들은 미래상품에 대한 예측과 관련시장의 확보가 중요하다. 그동안 인구변화에 이에 따른 경제ㆍ사회적 변화 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있다. 고령화와 경제적 효과에 관한 연구는 Cutler, Poterba, Sheiner, and Summers(1990)가 고령화에 대한 문제, Masson and Tryon(1990)은 선진국의 고령화에 따른 거시 경제적 효과, Weil(1992b)은 고령화의 경제적 영향, Lee(1980, 1991)는 인구 고령화에 따른 사회 및 경제의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 구가 있다. 인구와 경제성장에 관련한 연구로는 Mankiw, Romer, and Weil(1992)의 인구와 경제성장에 관한 연구, UN(1987)의 성별 연령별 인구증 가 추정, World Bank(1992)의 인구와 경제발전에 대한 연구가 있다. 그리고 Summers and Heston(1991)의 인구의 국제비교와 영향에 관한 연구가 있다. 인구구조의 변화와 자본축적에 관한 연구는 Heller(1989)는 고령화와 저축 및 연금의 변화에 대한 7개 선진국 사례연구, Weil(1992a)은 인구구조의 변화와 저축에 대해서, Auerbach, Alan, and Kotlikoff(1992)는 자본축적에서 인구구조 변화의 영향에 대해서 각각 연구하였다. 그동안 인구구조의 변화에 관한 관련 분야의 연구는 주로 거시적 관점에서 연구되었으나, 본 연구에서 추구하는 소비시장의 변화에 관한 미시적 분석에는 소홀했다. 본 연구는 일본의 인구구조 변화와 이에 따른 소비시장 변화에 관한 분석을 통하여 한국의 미래 소비시장의 변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1) 이범일 외, “미래유망상품(인구구조 변화를 중심으로)”, 삼성경제연구소, 1994. 10. 일본의 인구구조 변화에 따른 소비시장 변화에 대한 고찰 ··················· 변재웅․ 최성백…335 기대한다. 일본의 경우 타선진국에 비해 특히 단신자층의 증가 속도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숫자면에서도 일본시장의 중요한 소비층으로 성 장하고 있다. 일본 인구구조 변화, 특히 단신자층을 중심으로 다양한 관점에서 일본 소비시장의 변화를 분석한다. Ⅱ. 일본 인구구조 변화와 특징 1. 일본 인구구조의 변화 일본사회는 근대화․경제발전에 따라 “다산다사→다산소사→소산소사”의 순 으로 인구구조가 변화하고 있다. 2차 대전 이후 일본의 인구증가는 <표1>에서 알 수 있듯이 지속적으로 증가하였다. 전후 1945년에는 일본의 총인구는 약 7,200만인데, 1967년에는 1억명, 2008년 현재 1억 2772만명으로 증가하였다. 그 러나 인구증가율을 보면 과거에 비해 급격히 둔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975년부터 2004년까지 인구증가는 연평균 0.5%로 둔화되었다. 한 국가 나 지역의 인구증가는 출생자수에서 사망자수를 뺀 자연증가와 전입자수에서 전출자수를 뺀 사회증가 등 2가지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 일본은 미국 등 선진국과는 다르게 국제인구가 적기 때문에 대부분 자연증 가에 해당된다. 지금까지 일본의 인구증가는 출생자수가 사망자수를 상회하여 인구가 증가하였으나, 현재는 반대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925-49년에는 총 4,800만명(団塊世代 포함)이 출생했으나, 사망한 사람은 2,600만 명이었다. 그 차이 2,200만명은 대부분 이 기간의 인구증가이다(統計 局, 2007). 그리고 1950-1974년에는 4,600만명(団塊쥬니아 포함)이 출생했으나, 사망자 는 1,800만 명이었다. 1974년 이후 25년간은 団塊쥬니아세대는 団塊世代와 같 은 출산의식의 감소로 출생자수가 3,500만 명으로 크게 감소한다. 일본의 인구 는 2차 대전 이후 혼란기에서 일시적 인구증가를 보이다가 그 이후로는 증가 추세가 급격히 둔화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일본의 산업화에 따른 삶의 질적 향상과 자녀 교육비부담 등의 경제적 부담, 그리고 여성의 사회진출에 따른 출 산 영향 때문이다(駒村康平, 2000). 따라서 현재 일본의 인구증가는 둔화 추세 로 2010년부터는 인구감소 추세가 예상됨에 따라 사회 및 소비 형태에도 적지 않은 변화와 영향이 예상된다. 336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표1> 일본의 인구증가 추이 연 도 1945 총수 71,998 84,115 90,007 94,302 99,209 104,665 111,940 117,060 121,049 123,611 125,570 인구증감 연 도 총수 인구증감 1950 - 12,117 2000 2005 1955 5,892 2010 1960 4,295 2015 1965 4,907 2020 1970 (단위: 천명) 5,456 2025 1975 7,275 2030 1980 5,120 2035 1985 3,989 2040 1990 2,562 2045 1995 1,959 2050 126,926 127,708 127,473 126,266 124,107 121,136 117,580 113,580 109,338 104,960 110,593 1,356 782 -235 -1,207 -2,159 -2,971 -3,556 -4,000 -4,242 -4,378 -5,633 자료:總務省(2007),“日本の将来推計人口", 国立社会保障․人口問題研究所(2007) 노동인구는 한 국가의 중요한 산업 활동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소비의 주체 이다. 따라서 인구구조의 변화는 노동력 증감에도 영향을 준다. 인구구조의 변 화와 노동인구의 감소에 대해 분석하면, 일본의 경우 이미 인구구조의 변화로 노동력 공급에 대해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 노동인구의 감소는 무엇보다 저 출산에 기인한 것이다(須藤一紀, 2005). 일반적으로 노동력의 공급과 출산율은 상호 밀접한 관계가 있다. 출산율이 증가하면 노동인구의 증가로 산업 활동을 원활하게 되어 여성의 출산은 산업화 사회에 중요한 노동력의 공급원이다. 그러나 여성의 사회 진출로 노동력 공급 부족을 완화시키는 긍정적인 면도 있으나, 이는 여성의 출산율 저하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여성 노동력과 출 산은 높은 사회화를 위해 필요하다. 미혼이나 아이를 가지지 않는 것으로 노동 의 질이 향상하는 것이 아니고, 사회참가와 생활의 변화를 통해 출산율 향상과 더불어 양립되어야 한다(厚生省大臣官方統計情報部, 2007). 일본 인구감소의 특징은 경제적 요인 외에도 사회적, 심리적인 요인도 크게 작용한다는 점이다. 오늘날 전통적인 가족형태가 붕괴되고 핵가족화의 가속화 로 육아는 여성 혼자 담당하는 불균등 관계가 지속되었다. 여성의 사회활동은 확대되고 있으나, 남성의 낮은 육아참가 그리고 충분한 육아 후원제도의 미흡 이 저출산의 큰 요인이다. 이를 반영하듯이 일본의 출산율이 1%대로 하락한지 오래되었다. 저출산 국가이지만 전통적으로 성별 역할 분업의 강한 가치관이 여성의 출 산을 기피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다양한 사회 및 경제적 불안은 개인의 미래설계를 불안하게 하는데 이것도 저출산의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또 한 일본도 한국과 같이 지방대학 출신자의 취업기회 상실의 문제가 있다. 지방 의 경우는 취업의 기회가 적어 수도권으로 이동하게 된다. 그 결과 혼기를 놓 일본의 인구구조 변화에 따른 소비시장 변화에 대한 고찰 ··················· 변재웅․ 최성백…337 치게 되어 출산율 저하의 악순환 구조가 되었다. 따라서 저출산으로 급격한 인 구감소와 노인인구의 증가는 오늘날 일본 인구구조 변화의 큰 특징이다. 1) 단혼세대( 団塊世代) 최근 일본 인구구조 변화의 다른 특징은 인구감소와 더불어 団塊世代2)의 정 년퇴직이라는 큰 변화이다. 이들 団塊世代들은 2007년부터 60세가 되어 정년을 맞이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최근 일본에서 화제가 되는 “2007년 문제”로 일본 사회와 경제면에 큰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인구구조에서 본 団塊世代의 특징을 살펴보면, 전후 출생자수는 1947년 이후 5년 연속으로 연간 200만 명이 넘었으나, 일반적으로 団塊世代란 1947년에서 1949년까지 태어난 세대를 말한 다. 2008년 7월 현재 59-61세의 인구는 680만명 정도로 총인구의 5%에 해당된 다. <표2> 참조. 이들 団塊世代는 일본의 고령자비율의 상승에 크게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고령자인 65세 이상의 인구비율은 이 세대가 62-64세 가 되는 2011년에는 23.4%이지만, 1949년 출생자가 65세가 되는 2014년에는 26.5%로 상승되어 2011년 이전에 비해 큰 폭의 상승이 예상된다. <표2> 団塊世代의 출생수와 현재 인구 생 년 2005년 10월 인구(천명) 출생자수 (천명) 계 남 여 현재 연령 (2008년) 1947 2,679 2,181 1,079 1,101 61 1948 2,682 2,293 1,136 1,157 60 1949 2,697 2,309 1,145 1,164 59 합계 8,058 6,783 3,360 3,423 자료: 厚生労働省, “人口動態調査”, 総務省統計局, “2005年 国勢調査”. 이들 団塊世代는 경제적 여유가 있어 소비의 핵심층으로 등장할 것으로 예 상된다. 사실 일본의 소비성향 증대는 50-60대 이상 연년층의 영향이 크게 작 용한다. 이들 연령층의 소비는 보건의료를 비롯하여 교양오락이나 교통, 통신 등의 분야에서 다른 분야까지 확대되고 있는 추세이다. 이런 소비성향의 형태 는 첫째, 시대와 세대를 초월한 연령의(라이프스타일)효과, 둘째, 태어난 해가 달라서 나타나는 세대효과가 있다. 세대효과 측면에서 세대가 젊을수록 소비성 2) 団塊世代란 용어의 처음 등장은 堺屋太一의 소설(1976년)에서 제1차 베이붐 세대를 団塊世代라는 이름을 처음 사용하였다. 団塊世代는 2차 대전 이후 출생한 세대로 많은 유행과 수요의 창출하고, 과다경쟁, 과잉시설을 일본사회에 남기면서 노년을 맞이하게 된다는 근대소설이다. 338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향은 낮게 나타난다. 인구구조의 변화는 2010년까지 거시적인 소비성향을 더욱 향상 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될 것이다. 지출항목별 소비점유율은 디지털가전이 나 여행, 교양 및 오락소비는 시간이 흐를수록 세대가 젊을수록 소비가 높게 나타나지만 연령효과에서는 고연령층의 소비가 높게 나타난다. 이러한 인구구 조의 변화는 경제전체의 소비점유율의 변화로 나타나게 되고, 경제전체의 소비 형태가 상품에서 서비스로 특히 기초적 소비에서 오락과 건강관련 서비스로 이동되고 있다. 따라서 団塊世代의 퇴직으로 일본사회나 소비시장에는 적지 않 은 변화가 예상된다. 2) 초 고령사회 일본사회는 노인인구의 증가로 초 고령사회에 진입했다. 국립사회보장․인구 문제연구소(사인연,2007)의 추계에 의하면 2055년 일본의 인구는 8,993만 명으 로 전망한다. 이것은 2007년 1억 2700만 명에 비해 전체의 20%에 해당하는 인 구가 감소하게 된다(總務庁長官官方高齡社會対策室, 2007). 현재 65세 이상 노인 인구의 비율은 일본사회와 경제의 대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따라서 노인인구 증가는 사회문제가 되는 동시에 새로운 소비시장의 한 형태를 의미한다. 초고령사회의 진행과 함께 노인층 단신화의 급격한 증가 문제가 있다. 2005 년 국세조사의 단독세대수는 1,446만 가구이고 부부와 자녀와 함께하는 표준세 대가 1,465만 가구이다. 国立社会保障․人口問題研究所(2007)의 추계에서는 2006년부터는 단독세대가 1,462만 가구이고 표준세대가 1,449만 가구로 양자의 관계가 반대로 전환되었다. 이런 현상은 앞으로도 계속 확대되어 2025년에는 단독세대가 1,716만 가구이고 표준세대가 1,200만가구로 각각 예상된다. 일본에 서 단독세대가 각 세대의 유형 중에서 가장 높고, 단독세대의 대부분은 독신자 들이다. 대가족이 핵가족으로 전환되고 그런 핵가족 속에서 독립한 자녀들이 혼자서 생활하는 경우도 일본에서는 흔한 일이다. 이에 따라 2000년에 평균세 대인원은 2.7명이었으나 2025년에는 2.4명으로 감소할 것이다. 일본사회는 거시적으로 저출산, 노인인구의 증가와 미시적으로 단신 사회화 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 큰 특징이다. 한편 노인인구의 소비능력은 보 면, 현재 고령자세대의 평균소득금액은 연 335만 엔으로 전국세대평균 655만 엔의 절반에 불과하다. 그러나 고령자세대는 평균세대인원이 감소하고 있기 때 문에 1인당 평균소득금액은 211만 엔으로 총세대 평균 222만 엔과 큰 차이가 없다. 또한 고령자세대의 생활의식 조사에서도 생활이 어렵다고 느끼는 비율은 총세대 평균보다 오히려 낮았다. 그리고 고령자세대의 가계지출을 살펴보면 총지출에서 지출비율이 높은 항 목은 의료, 보건의료, 교양, 오락, 교제비 등이고, 지출이 적은 항목은 자동차관 련, 의복비, 교육비 등이다. 식생활, 쇼핑, 가사에 대해서는 연령이 증가할수록 일본의 인구구조 변화에 따른 소비시장 변화에 대한 고찰 ··················· 변재웅․ 최성백…339 점차 감소경향이 있으나, 60세 이상 세대는 반대 현상이 나타났다. 이것은 세 대주가 퇴직하고 자녀도 출가하여 자신들을 위해 지출하려는 의식이나 고령화 에 따른 가사에 관심이 높아졌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고령자 관련 소비 시장은 확대될 것으로 생각된다. 2. 단신자의 증가와 형태 일본의 단독세대수는 1980년에 710만 세대이며, 평균 세대인원은 3.22명이였 다. <표3> 참조. 그 후 평균세대인원의 감소와 단독세대수의 증가가 진행되어 2000년에는 단독세대수는 1,290만 세대로 크게 증가하였으나, 평균 세대인원은 2.67명으로 감소하였다. 이 수치는 2030년대에 이르면 단독세대수는 1,820만 세 대로 증가하고, 평균 세대인원은 2.27명으로 감소하게 된다. <표3>에서와 같이 1980년에 비해 2030년에 이르면 단독세대수는 80% 이상 증가하게 된다. 일본 은 저출산, 초고령 사회의 사회적 문제와 단독세대의 증가라는 과제가 있다. <표3> 가족유형별 일반세대의 비율과 평균 세대인원 일 연 차 총 수 단 독 총수 1980 1985 1990 1995 2000 2005 2010 2015 2020 2025 2030 35,824 37,980 40,670 43,900 46,782 49,063 50,287 50,600 50,441 49,837 48,802 7,105 7,895 9,390 11,239 12,911 14,457 15,707 16,563 17,334 17,922 18,237 21,594 22,804 24,218 25,760 27,332 28,394 28,629 28,266 27,452 26,358 25,122 1980 1985 1990 1995 2000 2005 2010 2015 2020 2025 2030 100.0 100.0 100.0 100.0 100.0 100.0 100.0 100.0 100.0 100.0 100.0 19.8 20.8 23.1 25.6 27.6 29.5 31.2 32.7 34.4 36.0 37.4 603 60.0 59,5 58.7 58.4 57.9 56.9 55.9 54.4 52.9 51.5 반 세 대 핵 가 족 세 대 부부와 홀 부모와 부부 자녀 자녀 세대수(1,000세대) 4,460 15,081 2,053 5,212 15,189 2,403 6,294 15,172 2,753 7,619 15,032 3,108 8,835 14,919 3,578 9,637 14,646 4,112 10,085 14,030 4,514 10,186 13,256 4,824 10,045 12,394 5,013 9,762 11,524 5,072 9,391 10,703 5,027 비율(%) 12.5 42.1 5.7 13.7 40.0 6.3 15.5 37.3 6.8 17.4 34.2 7.1 18.9 31.9 7.6 19.6 29.9 8.4 20.1 27.9 9.0 20.1 26.2 9.5 19.9 24.6 9.9 19.6 23.1 10.2 19.2 21.9 10.3 그 외 7,124 7,282 7,063 6,901 6,539 6,212 5,951 5,771 5,655 5,557 5,443 평균세대 인원 3.22 3.14 2.99 2.82 2.67 2.56 2.47 2.42 2.36 2.31 2.27 19.9 19.2 17.4 15.7 14.0 12.7 11.8 11.4 11.2 11.2 11.2 자료: 国立社会保障․人口問題研究所(2007), 『日本の世帯数の将来推計(全国推計)』 340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표4>는 평균세대인원과 단독세대비율의 국제비교인데, 일본은 다른 국가와 비교할 때 단독세대의 비율이 낮지 않다. 특히 동아시아는 서양과 달리 대가족 중심 사회인 점을 감안하면, 일본의 단독세대 비율은 상대적으로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경제적 측면만을 생각한다면 또 다른 소비시장이 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다음은 단독세대의 증가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표4> 평균세대인원과 단독세대비율의 국제비교 평균세대 단독세대 인원(인) 비율(%) 2.3 38 2005 2.0 46 덴마크 2006 2.2 38 영국 2006 2.4 29 독일 2006 2.1 39 오스트리아 2005 2.4 34 미국 2005 2.6 26 캐나다 2006 2.5 27 한국 2005 2.9 20 일본 2005 2.5 29 일본 (추정) 2030 2.2 37 국가 연도 노르웨이 2005 스웨덴 자료: 國立社會保障․人口問題硏究所(2007),『日本の世帯数の将来推計(全国推計)』 1) 황혼이혼과 단신자의 증가 최근 일본의 이혼율은 증가 추세이다. 이혼이 높다 낮다의 판명 기준은 이혼 율이다. 이혼율은 1000명의 이혼 건을 수치로 나타낸 것으로 일본의 이혼율은 2.08로 다른 선진국에 비해 크게 높지 않다. 하지만 최근 황혼이혼이 증가하고 있는데, 일본에 700만 명이 넘는 団塊世代의 퇴직이 중요하게 작용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団塊世代의 이혼으로 인하여 일본사회는 단신사회화라는 문 제점이 있다. 2) 고령화와 단신자의 증가 일본은 총인구대비 노인인구가 차지하는 비율은 이미 선진국 중에서 가장 높다. 그런데 노인인구 중 특이한 점은 70대 여성의 단독세대가 증가하고 있다 는 점이다. 일본의 경우, 여성의 평균수명은 85.5세로 남성의 78.6세 보다 훨씬 일본의 인구구조 변화에 따른 소비시장 변화에 대한 고찰 ··················· 변재웅․ 최성백…341 높다. 또한 과거 남아의 유아 사망률이 높아 출생 때의 남녀구성비가 106 대 100이었다. 하지만 현재는 유아 사망률의 감소로 그 효과가 남성의 미혼율을 증가시킨 것으로 추정된다. 그 결과 출생 시 남녀구성비가 달라 남성 단독세대 의 증가와 고령여성의 단독세대 증가로 이어지고 있다(石川達哉, 2007). 団塊世代가 수도권에 편중되어 일본 수도권의 고령 단신여성 인구가 급속하 게 확대요인이 된다. 이들 고령층을 대상으로 하는 소비시장은 기업들에게 시 사하는 바가 크다. 일례로 동경의 한 상점에서는 과거 고령자 중심의 매출이 대부분이 이었지만, 지금은 그들의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로 매출이 30%로 감소 하였다.3) 전후 출생자의 고령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사인연의 발표에 의하면 수도권의 고령 싱글이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다. 특히 동경의 증가가 상대적으 로 많지만, 수도권 주변지역인 찌바, 사이다마에서는 2000년과 비교하여 2025 년까지 2배 이상 증가가 예상된다(김태일, 1994). 따라서 대도시 주변지역의 인 구 고령화가 소비형태에 상당한 변화를 예고한다. 3) 미혼율과 단신자의 증가 대부분의 선진 국가에는 전체 인구대비 독신이 많다. 일본도 예외가 아니어 서 미혼율이 상당히 높은 편이다. 특히 30대 전후의 団塊쥬니어의4) 미혼율 이 급상승하여 남성은 47.1%, 여성은 32%이다. 1995년 남성(37.3%)과 여성 (19.7%)의 비율과 비교하면 20% 이상 증가하였다. 일본 제일생명경제연구소에 의하면 2015년에는 30대 전후의 남성 미혼 비율은 53%에 달할 것으로 예측하 고 있다(日本經濟新聞社, 2001). 지금까지 미혼대국은 스웨덴, 프랑스 등이 있다. 그러나 이들 나라는 종래 법률혼인 이외에 사회보장제도로 보장되는 동거혼이 있다. 구미의 많은 젊은이 들은 동거혼을 통한 결혼을 선택하는 경우를 생각하면 실제 미혼율은 통계수 치보다 아주 낮다. 따라서 일본은 이미 선진국 제일의 독신대국이다. 4) 단신자의 사고 방식 변화 결혼은 싱글들에게 크게 중요하지 않고 그들은 기회가 되면 결혼 한다고 생 각하는 “自然體”이다. 단신자는 자유로운 시간을 만끽할 수 있는 자연체를 선 호한다. 미혼율의 상승은 장래 단독세대 증가의 요인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2005년 30-40대의 미혼율은 남성이 47.7% 여성이 32.2%이다. 1980년대 급격한 미혼율의 증가는 부모의 소득증가로 파라사이트 싱글 3) ダイヤモンド社, “週刊ダイヤモンド, 2007. 5. 4) 団塊쥬니어란 일본의 2차 베이붐 세대를 칭하는 의미로, 이들은 1971년에서 1974년에 걸쳐 약 4년 간 매년 200만 명이 태어나 일본의 핵심 소비주체로 등장했다. 342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parasite single)5)이 증가되고 있다. 실제 단혼세대에 독신아이가 있는 경우는 75%이고, 파라사이트 싱글을 부양하는 경우는 50%이다. 두 가정 중 한 가정 은 30세 전후의 미혼 자녀를 부양하고 있다. 따라서 파라사이트 싱글은 비정규 고용률을 높인다. Ⅲ. 일본 소비시장의 변화 1. 일본 소비계층 2008년 상반기 일본 편의점 매출이 백화점 매출을 추월했다. 1974년 동경에 도구 세븐일레븐 1호 편의점이 처음 등장한 이후 처음으로 백화점을 능가하는 매출을 달성했다. 이는 향후 일본에서 소비의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다.6) 소비계층은 여러 단계로 구분이 가능하지만, 일반적으로 미래의 소비층을 예 측할 때 몇 가지 층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신세대층이다. 이들은 새로 운 감각을 지닌 젊은 층을 지칭하는데 이들의 소비특징은 소유가치보다는 사 용가치를 추구하고 생활을 즐기기 위한 시간가치를 중시한다. 또 필수품보다는 사용함으로써 즐길 수 있는 필요품 구매에도 관심을 가지며 물적 재화에 서비 스가 결합된 복합소비를 추구하는 층이다. 두 번째는 취업주부층이다. 이들 층의 소비 형태는 맡은 일 때문에 시간절약 형 상품을 선호하고 가족연대에 도움이 되는 상품들을 선호한다. 그리고 사회 활동으로 인한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건강 욕구를 만족시켜 주는 상품을 선호 한다. 세 번째는 아동층이다. 오늘날 과거에 비해 자녀를 적게 낳지만 대신 자녀에 게 소비감각을 키우려는 부모의 의도에 의해 이들이 자율적으로 구매를 할 수 있도록 하는데 유념한 상품이 유망하다. 네 번째는 실버층이다. 실버층은 일본 경제성장의 주역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으며, 최악의 빈곤과 고도성장을 함께 겪은 세대로서 전환세대의 특성을 지 닌다. 최근 실버층은 과거 모든 재산을 자녀에게 물려주는 단순한 피부양자의 모습과는 상반된 생활양식이 있다. 이들 층은 젊음을 추구하려는 욕구를 만족 시켜야 하고, 물리적인 상품의 구입보다는 레저, 관광 등의 시간소비 욕구를 5) 파라사이트싱글(parasite single)은 부모와 함께 살면서 독신 생활을 하는 사람이다. 6) 상반기 전년도 동기간 백화점의 매출은 2.7% 감소한 3조 6171억 엔으로 하락했으나, 편의점은 상 반기 동기간 매출이 3.2% 증가한 3조 6559억 엔으로 388억 엔이 더 많다. 편의점이 백화점을 추 월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産經新聞, 2008. 8. 6.) 일본의 인구구조 변화에 따른 소비시장 변화에 대한 고찰 ··················· 변재웅․ 최성백…343 만족시켜야 한다. 또 거동불편으로 인해 행동의 부자유스러움으로 편리성이 제 공 되어야 한다. 다섯 번째는 단신자층이다. 이들 층은 기존제품의 새로운 수요 창출을 요구하 는 층이다. 이들의 소비관점에서는 특히 주거생활, 식생활 등에서 시간절약과 편리함을 제공해야하고, 구속받지 않는 자기만의 여유시간 이용에 도움이 되어 야 한다. 이들의 소비는 새로운 소비 형태를 가늠하는 중요한 층이다. 이것을 반증하든 최근 일본의 소비시장에는 새로운 영향을 미치고 있다. 소비 장소에 따라 연령별 소비형태가 상이하게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면 식 료품의 소비행동은 団塊쥬니어세대 이하의 젊은 층은 다른 연령층보다 슈퍼나 개인상점 등에서 구입 빈도가 낮고 편의점 등과 같은 최근 상품과 편리한 상 품을 취급하는 곳에서 구입 빈도가 높다. 반대로 60세 이상은 다른 연령층보다 도 슈퍼나 개인상점등에서 구입하는 빈도가 높고 편의점 등의 이용 빈도가 낮 다. 한편 団塊세대를 포함한 50세대는 60세 이상보다는 편의점에서의 상품 구 입 빈도가 높다. 중고령 층은 지역실정에 익숙함과 그동안 인간관계의 유지로 지역 슈퍼나 상점을 이용하는 빈도가 높다. 단독세대의 증가로 소비형태가 변화하고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가 생길 가능 성이 높아지고 있다. 최근에 싱글을 위한 비즈니스 사업이 서서히 확대되고 있 다. 예를 들면 독신남성 사이에서 히트상품인 우주전함모형, 싱글여성은 애견 이 인기상품이여서 이들을 위한 싱글 상품 시장은 더욱 확대 될 것이다. 문제는 모든 단신자가 소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많은 독신자는 부 모와 함께 생활하며 비정규고용에 만족 한다는 조사도 있다. 2005년 부모와 함 께 생활하는 파라사이트싱글(parasite single)의 수는 20-30대만 1200만 명이 다. 이들은 핵심적인 소비층이 될 수도 있지만, 부모와 함께하는 싱글 층으로 소비 형태 주체로서 경제력이 문제이다. 2. 소비형태의 변화 1) 단신사회의 소비변화 단신세대의 증가로 간장이나 마요네즈 등과 같은 조미료 식품의 소비에는 한계가 있다. 가공식품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많은 브랜드는 団塊世代와 함께 패밀리 시장으로 확장되어 왔다. 그래서 표준세대수의 감소는 시장의 감소로 연결된다. 냉동식품의 경우 고령자의 이용이 증가하고 있다. 일본 단신 사회화의 일면 이다. 일례로 1999년에 판매한 녹미채를 끓인 것과 우엉무침 등 일본야채가 대 히트였다. 조식이나 석식에 하나 더 먹고 싶다는 수요에 따라 성공한 사례이 344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다. 단신화 사회에 고전하는 산업은 자동차 업체이다. 일본의 신차 등록 감소 의 원인은 젊은 싱글 세대가 자동차와 멀어지는 것이 그 원인이다. 1980년대 후반 핵가족화에 따라 일본 자동차업계는 쿠페(coupe)가 팔릴 것으로 예측했 다. 하지만 실제 1990년대 주력 차종은 미니밴이었다. 현재는 표준세대의 수가 감소하는 상황에서 미니밴은 더 이상 증가할 가능 성이 없어졌다. 최근에는 団塊世代를 대상으로 오픈카의 신차판매가 인기다. 사례에서 보듯이 새로운 소비시장이 등장하더라도 그것을 극대화 할 수 있는 전략이 부재하면 그것이 성공과 연결되지 않는다는 시사점을 알 수 있다. 2) 단혼쥬니어층의 소비변화 현재 미혼자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30대 전후는 단혼쥬니어세대이다. 그들 은 취업빙하기에 해당하는 “가난한 제비세대”이다. 그래서 남성의 대부분이 경 제적 사정을 미혼의 이유로 들고 있다. 한편 여성의 40%가 연수 600만엔 이상 의 남성과 결혼을 희망하고 있으나, 조건이 맞는 25-34세 미혼남성은 동경에 도 3.5% 정도이다. 그러나 団塊쥬니어의 단신자는 가처분 소득의 대부분은 시 장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남성은 브랜드 지향이 저하되고 감각이 여성적이고 유년기 구입하지 못한 플라스틱모델(plastic model)7)등의 구입에 투자하는 리 벤지(revenge)소비가 유행하고 있다. 또한 단신여성도 소비의욕이 활발하다. 3) 고령단신층의 소비변화 인구감소에 따라 식량, 의류, 주택 등의 상품 수요가 감소한다. 특히 어린이 관계 상품과 젊은 층 대상 상품이 감소할 수 있으나, 고령자 층의 소비수요에 따라 전체 소비수요가 변동 될 수 있다. 특히 고령자인구의 증가는 소비확대에 영향을 미친다. 일례로 동경도내 뉴타운 주변 점포 주민은 총인구의 약 40%가 65세 이상 고령자이다. 이곳은 특히 고령화가 진행 된 곳인데, 업계 최대의 세븐일레븐재 팬이 多摩뉴타운에 1981년 출점 한 이후, 이 지역의 변화에 따라 중심 판매품 도 변화하고 있다. 이전은 500엔 정도 가격의 도시락이 인기였으나, 손님의 고 령화와 건강지향 성향으로 약 400엔 가격의 작은 건강도시락이 인기이다. 또한 서양과자보다 일본전통 과자 제품의 판매가 증가하고 있다. 특히 혼자 사는 고 령자가 증가하는 가운데 고양이를 기르는 고령자도 증가하여 고양이 관련 용 품과 식품 판매가 증가하고 있어 이곳 상품진열대에서 고령화의 진행을 알 수 있다. 7) 플라스틱모델이란 플라스틱으로 만든 조립제품이다. 일본의 인구구조 변화에 따른 소비시장 변화에 대한 고찰 ··················· 변재웅․ 최성백…345 또 다른 예는 점원이 거동이 불편하나 혼자 있는 고령자를 위해 고객의 요 청에 따라 직접 방문하여 주문 상품을 전달한다. 多摩의 점포는 이전부터 이런 서비스를 실시 해 왔는데, 이는 시대의 흐름과 지역의 고령화라는 특수성을 고 려한 결과이다. 4) 지역 단신자의 소비변화 오늘날 편의점은 가계의 매출과는 상관없는 공공요금의 수납대행까지 직접 가서 주문을 받는다. 고객과 장기적인 관계 구축을 위한 전략인데, 용무를 대 행하는 서비스이다. 이러한 결과로 매출도 계속 증가하고 있는데, 지속적으로 이런 서비스를 제공해 줌으로써 축적된 정보는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는 편의 점의 경쟁력으로 작용한다. 고령화와 단신사회에서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어려우나 대행용무로서 인간관계의 단절성을 극복하는데 기여한다는 장점이 있다. Ⅳ. 결론 최근 유가급등으로 상품판매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운데 도요타 자동차의 하이브리드카의 판매증가와 기능성 자전거의 판매증가 등은 소비 시장의 예측의 중요성을 시사한다. 그동안 소비환경의 변화에 따라 그 시 대를 주도했던 상품의 키워드도 重厚長大→輕薄短小→美創遊感의 흐름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품의 키워드 변화는 무엇보다 그 사회의 인구구조의 변화에 따라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 인구증가가 급격한 상승 국면일 때는 소비재 상품들의 판매증가를 기대할 수 있으나, 인구감소가 현저 할 때는 소비재 상품보다는 개인적인 개성 상품의 판매가 증대된다. 본 논문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의 인구구조 변화의 큰 특징은 단신자의 급격한 증가이다. 그들이 일본의 인구구조 변화에 재편의 요인으로 작용하 고 단신자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의 소비시장도 큰 변화가 예상된다. 346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参考文献】 이범일 외(1994), 「미래유망상품(인구구조 변화를 중심으로)」삼성경제연구소. 김태일(1994), 「인구구조의 변화로 본 고령화 동향과 연령별 주택수요의 예측에 관한 연구-한일비교분석」『대한건축학회 논문집』, 제10권 제10호, 대한건축 학회. 社会保障審議会(2007),「人口構造の変化に関する特別部会」 MIS(2005), 「消費構造の変化と市場機会」, マネジメントサホントインティテュート. 統計局(2007),『人口推計月報』. ダイヤモンド社, “週刊ダイヤモンド, 2007. 5. 國立社會保障․人口問題硏究所(2007),『日本の世帯数の将来推計(全国推計)』. 駒村康平(2000), 『やさしい経済学ー少子高齢化の影響』, 日本経済新報社. 日本經濟新聞社(2001), 「サラリーマンアンケート調査」. 總務庁統計局(각년), 『家計調査』. 總務省(2007),“日本の将来推計人口". 国立社会保障․人口問題研究所(2007) 總務庁長官官方高齡社會対策室(2007), 『高齢者一人暮し․夫婦世帯に関する意識調査』 厚生省大臣官方統計情報部,(2007), 『国民生活基礎調査』. 須藤一紀(2005),『ピークが迫る日本の人口ーよくわかる日本の人口ー』, 第一生命經濟 硏究所レポート. 石川達哉(2007),「高齡者世帶における消費貯蓄の構造」『ニッセイ基礎研 REPORT』 産經新聞社, 産經新聞, 2008. 8. 6. ダイヤモンド社, “週刊ダイヤモンド, 2007. 5. 厚生労働省, “人口動態調査”, 総務省統計局, “2005年 国勢調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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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 Bank, World Development Report, Oxford University Press: 1992. 348 日本文化學報……第 39 輯 要 旨 The Effect of Japan's Demographic Change on the Sustainable Consumption Many observers have noted that over the next several decades, large and unprecedented shifts will occur in the demographic make up of all of the major industrialized countries. And this demographic change will affect the pattern of consumption and its behaviour. The fraction of the population in Japan that is elderly and single family will be growing dramatically, while the fraction of the population made up of children will decline. Japan began the postwar period with a far lower fraction of elderly population than the rest of the G7, but it overtakes the US and Canada between 1990 and 1995, and the rest of the G7 in 2005. The overall rate of population growth in Japan will become negative. This change can be expected to have large economic effects, the Japanese consumption pattern and its behaviour per se. In this paper, we examine the effect of the Japanese demographic change on the consumption pattern and its behaviour, and found that the demographic change will affect the pattern of consumption behaviour over the last two decades. We expect that the future demographic change will affect the pattern of consumption and its related industries. キーワード: Japanese demographic change, Japanese consumption pattern and its behaviour, Parasite single 투 고 : 2008. 8. 31 1차 심사 : 2008. 9. 12 2차 심사 : 2008. 9. 27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49 彙 報 (2008. 5. 1 ~ 2008. 10. 31) 【이사회】 2008. 8. 7 확대이사회 장소 : 한밭대학교 인문과학대학 회의실(9동 326호) <보고 사항> 1. 제32회 국제학술대회(2008년 10월 25일) 개최 장소 건양대학교로 결정 2. 제33회 국제학술대회(2009년 4월 25일) 개최 장소 한남대학교로 결정 초청강연자 田島毓堂先生(愛知学院大学) 3. 『일본문화학보』제38집 - 충남대학교 임종석 교수님 정년퇴임기념호로 발행 <의결 사항> 1. 연구윤리규정 제정 ․연규윤리규정 제정에 따라 회칙 「제2장 회원 제9조(징계)」를 다음과 같이 수정 제9조(징계) 회원이 의무를 수행하지 않고 다음과 같은 행위로 본 학회의 명예를 현저히 손상하였을 경우에는 집행위원회(이사회)의 결의를 거쳐 회원자격을 박탈이 나 정지 등 징계할 수 있다. 1. 논문의 표절 2. 논문 중복 게재 3. 기타 현저한 학회 명예 손상 시 ↓ 제9조(징계) 회원이 의무를 수행하지 않고 본 학회의 명예를 현저히 손상하였을 경우에는 이사회의 결의를 거쳐 회원자격의 박탈이나 정지 등 징계할 수 있다. 2. 편집위원회 규정 수정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50 2008. 10. 11 상임이사회 장소 : 건양대학교 건양회관 4층 일문과 전용강의실 <보고 사항> 1. 제32회 국제학술대회 준비 상황 *대회장 준비 - 건양대 측에 의뢰 접수 및 안내 데스크 (연회비, 가입비, 이사회비, 요지집 발간비, 요지집 등 영수증 비치) 축사, 플래카드, 발표 및 심포지움 장소, 식당, 안내, 출판사 코너 등 *심포지움 : 13:00 ~ 15:30 場所: 명곡정보관(무궁화장홀) *포스터 및 요지집 제작 2. 학회 사무국 개설 *사무국: 대전광역시 동구 정동 31-1 신영와코루빌딩 201호 (메트로문화사) 전화: 042-488-9155 팩스: 042-488-9156 <안 건> 1. 신임 해외이사 위촉 - 染谷智幸(茨城キリスト教大学文学部) 2. 편무진(단국대)교수 편집위원장 위촉 3. 도기홍(한남대강사) 사무국장 위촉 4. 학회 홈페이지 활성화를 위한 시스템 구축 5. 학회 회원 관리 철저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51 【편집이사회】 2008. 6.14 편집회의 1. 제37집(5월호) 5월 30일 발간 보고 *어학: 5편, 교육: 1편, 고전문학: 3편, 근대문학: 5편, 일본학: 2편, 총 16편 게재 2. 제38집(8월호) 투고논문 1차 심사 심의 *1차 심사 결과서 송부 *1차 심사 통과 논문에 대해 수정 및 가필 의뢰 2008. 6.28 편집회의 1. 제38집(8월호) 투고논문 2차 심사 심의 2. 제38집(8월호) 최종 게재논문 결정 *어학: 3편, 교육: 2편, 고전문학: 4편, 근대문학: 6편, 일본학: 4편, 총 19편 2008. 9.13 편집회의 1. 제38집(8월호) 8월 30일 발간 보고 *어학: 3편, 교육: 2편, 고전문학: 4편, 근대문학: 6편, 일본학: 4편, 총 19편 게재 2. 제39집(11월호) 투고논문 1차 심사 심의 *1차 심사 결과서 송부 *1차 심사 통과 논문에 대해 수정 및 가필 의뢰 2008. 9.27 편집회의 1. 제39집(11월호) 투고논문 2차 심사 심의 2. 제39집(11월호) 최종 게재 논문 결정 *어학: 2편, 교육: 1편, 고전문학: 3편, 근대문학: 4편, 일본학: 9편, 총 19편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52 【학 술】 韓國日本文化學會 第32回 國際學術發表大會 ■ 日 時 : 2008年 10月 25日(土) 09:30-18:00 ■ 場 所 : 건양대학교 명곡정보관 및 각 분과별 발표장 【總會 심포지움 學術發表會】 ㆍ接受 및 登錄 : 09:30 ~ 10:00 ㆍ學術 發表會 : 10:00 ~ 12:10 ㆍ中 : 12:10 ~ 13:00 食 ㆍ總會 및 심포지움 : 13:00 ~ 15:30 場所: 명곡정보관(무궁화장홀) 開 會 辭 : 宋晩翼 韓國日本文化學會 會長 祝 辭 : 金熺洙 建陽大學校 總長 심포지움 主題 : 영토주권과 일본학의 검토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의 모순성” ㆍ學術 發表會 : 15:40 ~ 18:00 ㆍ懇談會 및 食事 : 18:00 ~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53 【總 會】 場所 : 명곡정보관(무궁화장홀) ■ 午 後 時 司 間 13:00-13:30 內 開 會 辭 : 宋晩翼 祝 :金直洙(烏山大) 容 韓國日本文化學會 會長 辭 : 金熺洙 建陽大學校 總長 【심포지움】 場所 : 명곡정보관(무궁화장홀) ■ 午 後 時 座 長 : 곽진오(東北亞歷史財團 獨島硏究所) 間 13:40-14:00 14:00-14:20 14:20-14:40 發 表 者 題 目 司 会 : 홍성근(東北亞歷史財團) 北澤正誠의 竹島考證에 인용된 한국자료에 관 한 검토 김호동 (嶺南大) 權五曄 川上健三說의 虛實 (忠南大) 崔長根 (大邱大) 북방영토와 독도문제의 성격상 차이점 분석 14:40-14:50 14:50-15:30 Coffee Break 김호동/權五曄 崔長根/홍성근 綜 合 討 論 座 長 : 곽진오(東北亞歷史財團 獨島硏究所) 【分科別 學術發表會】 (場所 : 建陽會館 428號) 語學分科 ■ 午 前 時 座 長 : 片茂鎭(檀國大) 間 發 表 者 10:00-10:30 金直洙 (烏山大) 10:30-11:00 片茂鎭 (檀國大) 11:10-11:40 鄭榮美 (淸州大) 題 目 司 会 : 朴喜南(大田大) 일본요리분야에서 사용되는 어휘의 고찰 指定討論:尹錫南(建陽大) 일본 명치시대의 한국어학습서에 보이는 가나(假 名)에 의한 한국어 전사(轉寫)표기에 관한 고찰 指定討論 : 邢鎭義(又松大) 司 会 : 金昌男 (金剛大) 誘い会話における話題導入ストラテジーの日韓対照研究 指定討論 : 竹永洋子(建陽大)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54 11:40-12:10 小川明美 (南서울大) 助詞カ ヤの疑問詞および推量表現との関係についての 通時 的研究 指定討論 : 辛碩基(建陽大) ■ 午 後 時 座 長 : 片茂鎭(檀國大) 間 15:40-16:10 16:10-16:40 16:40-17:10 發 表 者 柳京子 (祥明大) 宋誓天 (江陵大講師) 高橋 強 (常葉学園大) (場所 : 建陽會館 423號) 題 目 司 会 : 辛碩基(建陽大) 韓国人の日本語学習者における言いあやまり研究 ーおもに子音(無声音,有声音)についてー 指定討論:李香蘭(圓光大) 感情を表す慣用表現に関する考察 指定討論 : 金直洙(烏山大) 多文化共生と協働に関する一考察 指定討論 : 片茂鎭(檀國大) 日本語 育分科 ■ 午 前 時 座 長 : 安秉杰(南서울大) 間 10:30-11:00 11:00-11:30 11:30-12:00 發 表 者 麻生迪子 (九州大大学院) 高恵善 (早稲田大 大学院) 邢鎭義 (又松大) (場所 : 建陽會館 425號) 題 Speakingにおける語彙習得 指定討論 : 東ヶ崎祐一(慶煕大) 日本語教材における前置き表現の考察 指定討論 : 権寧成(清州大) 近代日本における日本語教育と漢字政策 指定討論 : 村上智里(金剛大) 近代文學分科 ■ 午 前 時 目 司 会 : 安容柱(鮮文大) 座 長 : 金順 間 發 表 者 10:00-10:30 金恩暎 (忠南大) 10:30-11:00 尹 一 (釜慶大) 題 (全南大) 目 司會 : 陸根和(大田大) 엔도 슈사쿠와 모성적인 존재(母なるもの) 指定討論:陸根和(大田大) 에르네스트 루낭의 『예수전』과 ‘시라카바’문학 의 관계 指定討論:林盛奎(白石大)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55 11:10-11:40 明惠英 (全南大講師) 11:40-12:10 朴京洙 (全南大博士課 程) 司會 : 林盛奎(白石大) <부름> 받은 여자들 ─「幻の兵士」(최정희)와 「気づかざりき」(佐多稲子)의 <응 답> 指定討論:李智淑(忠南大) 격동기 작가 정인택의 사상변화와 방향전환 指定討論:金鶴童(忠南大) ■ 午 後 時 座 長 : 金順 (全南大) 間 15:40-16:10 16:10-16:40 發 表 者 李福任 (韓南大) 金鶴童 (忠南大) 16:50-17:20 尹惠暎 (忠南大) 17:20-17:50 朴裕美 (忠南大) 17:50-18:20 趙美姬 (威德大) (場所 : 建陽會館 408號) 題 目 司會 : 吳俊永(空軍士官學校) 시바료타로(司馬遼太郞)의 역사관(시바사관) 고찰 指定討論:尹 一 (釜慶大) 일제의 패전과 친일작가 張赫宙의 작가적 모색 指定討論:李貞熙(威德大) 司會 : 李貞熙 (威德大) 소세키(漱石)와 오가이(鴎外)의 청년상 指定討論:吳俊永(空軍士官學校) 『세이토(青鞜)』의 연애담론 - 성과 사랑을 둘러싼 논쟁을 중심으로 指定討論:洪善英(翰林大)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연구 指定討論:李顯周(仁荷大) 古典文學分科 ■ 午 前 時 座 長 : 南二淑(群山大) 間 發 表 者 題 目 司 會 : 李珍鎬(圓光大) 金玉京 『源氏物語』における女性観 (韓南大 講師) 指定討論: 金裕千(祥明大) 司 會 : 金泰燾(韓瑞大) 雨と「つれづれ」ー平安朝の恋愛文化という側面か 都基弘 らー 11:10-11:40 (韓南大 講師) 指定討論:梁先希(韓國外大 講師) 『이세모노가타리(伊勢物語)』「히나(鄙)」에 대한 고선윤 11:40-12:10 一考察 (韓國外大 講師) 指定討論:閔丙勳(大田大) 10:30-11:00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56 ■ 午 後 時 座 長 : 南二淑(群山大) 間 15:40-16:10 16:10-16:40 發 表 者 目 司 會 : 吳起燻(靑巖大) 『今昔物語』에서『地蔵菩薩霊験記』로의 傳承의 李市埈 方法ー지장신앙의 철저화와 지옥상의 변화를 중심 으로ー (崇實大) 指定討論:金敬姬(大德大) 『源氏物語』「知らぬ国」考ー絵合における『うつほ物 金孝淑 語』提出の意味ー (早稲田大学院) 指定討論:村松正明(鮮文大) (場所 : 建陽會館 410號) 題 日本學分科1 ■ 午 前 時 座 長 : 權五曄(忠南大) 間 11:00-11:30 11:30-12:00 發 表 者 張味京(全南大) 金順槇(全南大) 羅義圭 (日本立敎大) 題 目 司 會 : 魯成煥(蔚山大) 일제감정기 일본어 교과서로 본 식민지 교육정책 指定討論:田鎬成(聖公会大) 陰画としてのアジア主義(1821年~1880年) 指定討論:朴正義(圓光大) ■ 午 後 時 座 長 : 權五曄(忠南大) 間 15:40-16:10 16:10-16:40 16:50-17:20 17:20-17:50 發 表 者 長迫英倫 (蔚山大) 魯成煥 (蔚山大) 伊藤政彦 (又松情報大) 鈴木貴久子 (京東大) 題 目 司 會 : 朴正義(圓光大) 벚꽃 이미지의 원형에 대한 일고찰 指定討論:魯成煥(蔚山大) 아메노히보코의 신격에 대한 일고찰 指定討論:伊藤政彦(又松情報大) 司 會 : 朴正義(圓光大) 京東大学『隠州視聴合紀』の名所和歌 指定討論:鈴木貴久子(京東大) 内村鑑三」に見る再臨信仰-日本の宗教的背景の中 で指定討論:林永彦(全南大)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57 (場所 : 建陽會館 412號) 日本學分科2 ■ 午 前 時 座 長 : 朴正義(圓光大) 間 10:30-11:00 11:00-11:30 11:30-12:00 發 表 者 金漢洙 (全北科学大学) 兪起濬(公州大) 池鎭浩(建陽大) 權柄旭 (忠南大) 題 目 司 會 : 林永彦(全南大) 일본 마치즈쿠리의 성공사례분석연구 指定討論:兪起濬(公州大) 일본 삼림 체험형 교육프로그램에 관한 연구 指定討論:金漢洙(全北科学大学) 한일 농촌사회의 사회적 자본 연구 指定討論:林永彦(全南大) ■ 午 後 時 座 長 : 朴正義(圓光大) 間 (全南大) 目 司 會 : 權柄旭(忠南大) 다민족 다문화시대 일본의 출입국 정책의 변화 指定討論:田鎬成(聖公会大) 일본의 재외동포정책 指定討論:金英美(同德女大) 16:50-17:20 田鎬成 (聖公会大) 司 會 : 金泰永(江陵大) 일본사회의 복지행정 정책변화 연구 指定討論:千寛煕(全南大) 17:20-17:50 金英美 (同德女大) 고지능 기능장애에 관한 일본제도의 사례연구 指定討論:兪起濬(公州大) 15:40-16:10 16:10-16:40 發 表 者 林永彦 (全南大) 千寛煕 題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58 合評會 - 근대문학 분과 - 이 정 희*1) 이번 호 『일본문화학보』에는 근대문학 관련 논문이 4편 실렸다. 우선 특기 할만한 것은 색깔 있는 논문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일본문학 젊은 연구자들의 출현과 영문학 하시면서 미국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 일 본계 작가들 작품세계를 다룬 논문이 눈에 띈다. 이들 논문에 대해서 심사 위원들의 심사평을 토대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먼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파란 바다 검은 바다( い海 い海)』 론」은 그다지 연구되지 않은 작품을 분석하여 신감각파적인 사상과 문장 표현에 대하여 논리정연하게 고찰하고 있다. 게다가 작품분석에 있어서 ‘주객일여’ ‘만물일여’라는 세계를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작품에 대비시켰다 는 점은 뛰어난 감각이라 하겠다. 단, 논문을 구성함에 있어서 각 장의 제 목이나 소제목을 붙이는 것도 논을 전개하는 만큼이나 중요하다고 보는데, 본 논문은 이런 면에서 좀 소홀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으로 「円地文子『妖』論-女の老いと性をめぐって-」는 소설의 화 자인 여주인공을 통해 중년 여성이 가지게 되는 여러 문제들-나이 들어감 에 따라 달라지는 육체적 정신적 변화에 의해 나타나는 현상들-을 작가 자신의 문제와 잘 비교해서 해석한 것 같다. 줄어드는 머리숱과 늘어나는 주름, 그리고 인간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노화에서 오는 공포를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극복해 내려는 주인공의 처절한 모습은 논자가 결론 에서 말하고 있듯이 삶에 대한 강한 욕망일 수로 있다. 여성이라면 누구나 가 죽는 그날까지 여성으로 남고 싶어 하고 여성성을 유지하고 싶어 한다. 설사 생명의 위협을 받는 병으로 여성기관을 잃었다고 해도 그 자신이 여 성임에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과 노화를 상대로 삶에 * 위덕대학교 일본어학부 교수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59 의 욕망과 절실함을 창작을 통해 이루고자 한 작가의 태도는 아름다운 중 년의 모습이라고 해도 좋겠다. 그런 작가와 작품을 본 논문은 잘 읽어냈다 고 본다. 또, 「萩原朔太 『犯罪』詩群と『 罪詩篇』」는 萩原朔太 る』에서 「犯罪」를 작품 모티브로 한 시군(詩群)과 「 『月に吠え 罪詩篇」에 나타 난 「罪」의 인식을 중심으로 분석하여 시정의 차이를 고찰하였다. 그러나 본고에 거론한 선행연구가 이미 30년 정도 전의 것으로 최근의 연구 동향 이 반영되지 않았다는 점도 지적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일본계 미국문학에 반영된 태평양 전쟁」은 재미일본인이 쓴 미국문학을 텍스트로 해서 일본계 미국인들이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겪 었던 정신적, 육체적, 사회적 고통을 고찰한 것으로 학계에 여러모로 자극 이 될만한 논문이라 생각한다.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인 일본어 그 초점을 두고 재미일본 작가의 세 작품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범 국가인 일본의 재미국민들이 받아야했던 차별과 억압에 대해, 그리고 그 차별과 억압을 통해 미국 사회에 빠른 속도로 동화되어 갈 수 밖에 없었다 는 해석은 설득력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또 다른 의미에서 피해국민이라 할 수 있는 한국인이 과연 일본 계 미국인 문학에 나타난 일본 정신과 일본인의 사고를 제대로 고찰해 낼 수 있을 지에는 의구심이 든다. 그러므로 일본계 미국인들이 일본정부에는 조금의 원망도 없이 미국 정부에만 사과와 보상을 받아낸 점에 대해서 이 해하기 힘들다는 논자의 의견은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라 하겠다. 어처면 본 논문에 인용된 세 작품이 쓰여지게 된 계기가 어찌 보면 전쟁의 피해자 였던 자신들의 입장을 모두에게 알리기 위한 방편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61 韓國日本文化學會 任員名簿 職 責 姓 名 所 屬 會 長 宋晩翼 한밭大 鄭 洙 南서울大 片茂鎭 檀國大 陸根和 大田大 申玟澈 韓南大 金直洙 烏山大 朴喜南 大田大 林盛奎 白石大 梁東國 祥明大 邢鎭義 又松大 鄭旭盛 南서울大 金昌男 金剛大 全成龍 淸州大 權寧成 淸州大 金泰永 江陵大 崔長根 大邱大 安容柱 鮮文大 尹在石 한밭大 副會長 總 務 財 務 涉 外 實 務 理 學 術 事 編 輯 評 情 報 連絡處 電 話 (042) 821-1351 011-9808-8292 (041) 580-2173 017-425-7319 (041) 550-3192 011-9580-1412 (042) 280-2257 016-440-2257 (042) 629-7332 010-3096-0312 (031) 370-2636 010-6473-8889 (042) 280-2256 010-8485-5119 (041) 550-2417 019-415-3278 (041) 550-5124 011-742-6025 (042) 630-9798 010-3146-1933 (041) 580-2179 010-8819-6559 (041) 731-3455 010-8604-6768 (043) 229-8346 019-475-3338 (043) 229-8344 016-480-1018 (033) 640-2157 011-469-0892 (053) 850-6065 019-553-5733 (041) 530-2422 011-9823-4132 (042) 821-1354 011-9038-1354 e-mail [email protected] [email protected] [email protected] [email protected] [email protected] [email protected] [email protected] [email protected] [email protected] [email protected] [email protected] [email protected] [email protected] [email protected] [email protected] [email protected] [email protected] [email protected]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62 職 責 姓 名 所 屬 辛碩基 建陽大 安熙貞 威德大 康永富 慶熙大 金聖京 柳韓大 李珍鎬 圓光大 裵貞烈 韓南大 李貞熙 威德大 吳俊永 空軍士官學校 林永彦 全南大 金英順 建陽大 語學分科 日本語敎育 分 科 理 古典文學 事 近代文學 日本學 連絡處 電 話 (041) 730-5385 016-9559-6561 (054) 760-1534 010-2609-0515 (031) 201-2243 010-9818-8133 (02) 6342-3287 011-9171-5608 (063) 850-6533 011-656-4778 (042) 629-7339 (054) 760-1531 011-9701-0627 (043) 290-6323 010-7701-3272 (062) 530-2703 010-9883-2428 (041) 730-5386 010-8978-5386 e-mail [email protected] [email protected] [email protected] [email protected] [email protected] [email protected] [email protected] [email protected] [email protected] [email protected]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63 韓國日本文化學會 新入會員名簿 會 員 名 고 선 윤 고 혜 선 김 영 미 김 은 영 김 현 주 박 경 화 유 노 자 장 미 경 高橋 強 所 由美 長迫英倫 村上智里 職 場 專 住 攻 所 TEL 016-282-1604 e-mail 한국외대강사 일고전문학 135-808 早稲田大院生 서울시 강남구 개포4동 현대2차아파트 209-602 일어교육 080-3531-8446 [email protected] 177-0044 동덕여대강사 東京都 練馬区 上石神井 1-18-5 上石神井Duplex R`s106 사회복지 02-2147-1856 [email protected] [email protected] 138-790 충남대강사 서울시 송파구 잠실3동 레이크팰리스 106-401 일근현대문학 010-5658-5100 [email protected] 120-758 충남대 서울시 서대문구 남가좌2동 현대아파트 109-603 일어교육 010-2308-7983 [email protected] 305-764 배재대대학원 대전시 유성구 궁동 220 일본문화 011-209-8818 [email protected] 305-755 배재대 대전시 유성구 어은동 한빛아파트 121-302 일본문화 011--9821-9826 [email protected] 302-774 전남대강사 대전시 서구 둔산2동 파랑새아파트 101-1005 일근대문학 062-673-9657 [email protected] 503-758 常葉学園大学 광주시 남구 봉선2동 삼익아파트 203-1402 英語教育、日本文化 054-261-1983 [email protected] 420-0913 공주대 静岡県 静岡市 葵区 瀬名川 1-23-30-2 メルべ-ユ B202号 일근대문학 041-853-0117 [email protected] 314-754 울산대 충남 공주시 옥룡동 옥룡주공아파트 202-1102 일본문화 052-259-2547 680-749 금강대 울산시 남구 무거동 산29 울산대학교 외국인사택 323 일어교육 010-5244-8156 [email protected] 320-931 충남 논산시 상월면 대명리 14-9 [email protected] 韓國日本文化學會 會則 제1 장 총칙 제1조(명칭) 본 학회는 ‘한국일본문화학회’라 칭한다. 제2조(목적) 본 학회는 일본 관련 제학문의 연구를 위한 국내외 회원간의 학술 교류를 통하여 일본학 연구의 활성화와 학문 발전을 도모하고, 국제간 교류를 통한 상호 협력과 이해 증진에 기여하도록 한다. 제3조(사업) 본 학회는 제2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다음 각 항의 사업을 수행한다. 1. 정기적인 학술연구발표회(연 2회) 2. 학술지 발간(연 4회) 3. 학술 진흥을 위한 세미나 및 심포지엄 개최 4. 외국 학회와의 학술교류 및 공동연구 5. 외국의 대학도서관 및 학술단체와 학술지 교류 6. 일본문화의 소개 제4조(위치) 본 학회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별도의 학회사무실 및 지부를 두며, 상 시 업무를 담당하는 사무국장을 둘 수 있다. 제2장 회원 제5조(자격) 본 학회의 회원은 일본어문학을 비롯한 일본학 연구에 종사하는 자나 관심 을 갖고 있는 자로 한다. 제6조(구분) 본 학회 회원의 구분은 「회원 규정」에 따른다. 제7조(가입요건) 본 학회에 신규로 회원가입을 원하는 자는 원칙적으로 기존 회원의 추 천을 받아야 한다. 제8조(권리와 의무) 본 학회의 회원은 다음과 같은 권리와 의무를 갖는다. 1. 임원의 선거권 및 피선거권(단, 명예회원은 제외) 2. 학회활동 참여의 권리와 회칙 준수의 의무 3. 회비 납부의 의무 제9조(징계) 회원이 의무를 수행하지 않고 본 학회의 명예를 현저히 손상하였을 경우에 는 이사회의 결의를 거쳐 회원자격의 박탈이나 정지 등 징계할 수 있다.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66 제 3 장 기구 및 임원 제10조(기구) 본 학회는 다음과 같은 기구를 둔다. 1. 집행위원회(회장, 부회장, 상임이사) 2. 이사회 3. 해외지부 제11조(임원) 본 학회는 원활한 운영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임원을 둔다. 회장(1인), 부회장(약간 명), 상임이사(약간 명), 해외이사 및 이사(적정인 원), 감사(2인) 제12조(임원의 선출) 회장 및 감사는 총회에서 선출하고, 기타 임원은 회장이 위촉한다. 제13조(임원의 임기) 임원의 임기는 2년으로 하되 연임할 수 있다. 제4 장 총회 제14조(종류) 본 학회의 회의에는 총회, 이사회, 각종 위원회가 있다. 제15조(총회의 소집 및 의결) 1. 본 학회는 매년 1회 정기총회를 개최하고, 필요에 따라 회장이 임시총 회를 소집할 수 있다. 2. 총회는 다음의 의안을 심의․의결한다. (1) 회장 및 감사의 선출 및 해임 (2) 회칙 개정 (3) 사업계획의 수립 (4) 예산과 결산의 승인 (5) 기타 중요사항 3. 총회에서의 의결은 출석회원 과반수 이상으로 한다. 제16조(이사회의 소집 및 의결) 1. 이사회는 실무이사회와 확대이사회가 있으며, 회장이 필요하다고 인정 할 시 이를 소집한다. 2. 실무이사회는 회장, 부회장, 상임이사로 구성하고, 확대이사회는 회장, 부회장을 포함한 전이사가 대상이 된다. 3. 이사회는 제규정의 개정, 회칙 개정의 발의, 회장 위임사항의 심의, 자 문위원의 추대, 특별 및 명예회원의 승인, 기타 중요한 사항을 처리한다.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67 제17조(각종 위원회의 구성 및 임무) 1. 회장은 분야별 업무의 능률적 수행을 위해 각종 위원회를 설치할 수 있다. 2. 위원회는 위원장과 위원으로 구성하며, 위원장은 회장의 제청으로 이사 회에서 선임한다. 3. 위원회의 안건은 출석 위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의결한다. 제5 장 사업 제18조(재정) 본 학회의 재정은 회원의 회비와 기타 수입금으로 한다. 제19조(회비책정) 본 학회의 회비는 총회에서 결정한다. 제20조(회계연도) 본 학회의 회계 연도는 3월부터 익년 2월까지로 한다. 제21조(국제학술교류상 선정) 본 학회의 학술발전에 지대한 공헌이 인정되는 해외회원 을 대상으로 회장의 추천에 의해 이사회에서 결정한다. 제6 장 부칙 제22조(회칙개정) 본 회칙의 개정은 정기총회에서 출석인원 3분의 2 이상의 동의를 얻어 확정한다. 제23조(시행세칙) 본 회칙 시행에 필요한 제규정은 이사회의 의결을 얻어 시행하되, 본 회칙에 명시되지 않은 사항은 관례에 따른다. 제24조(시행일) 본 개정 회칙은 2003년 10월 1일부터 시행한다. 제25조 개정된 규정은 정기총회의 의결을 거쳐 2007년 5월 1일부터 시행한다. 제26조 개정된 규정은 정기총회의 의결을 거쳐 2008년 10월 25일부터 시행한다.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68 한국일본문화학회 편집위원회 규정 제1 장 총 칙 제1조 본 위원회는 ‘한국일본문화학회 편집위원회’라 칭한다. 제2조 본 위원회는 한국일본문화학회 회칙 제17조에 의거하여 설치한다. 제3조 본 위원회가 관장하는 학회지 『일본문화학보』는 다음과 같은 지침 하에 발행한다. 1. 연 4회(2월호, 5월호, 8월호, 11월호)로 발행한다. 2. 발행 날짜는 해당호의 월 말일을 원칙으로 한다. 3. 기타 발행 과정은 ‘『일본문화학보』 발행 계획’에 준한다. 제 2 장 편집위원회 구성 제4조 편집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구성한다. 위원장, 편집간사, 국내외 위원 제5조 편집위원회 위원장은 편집위원 중에서 회장의 제청으로 이사회에서 선임한다. 편집위원회 위원장은 위원회를 대표하며, 편집간사는 학회지 논문의 심사 및 편 집을 통괄한다. 임기는 공히 2년으로 한다. 제6조 편집위원회 위원은 이사회의 인준을 받아 회장이 임명한다. 임기는 2년이며, 본 인의 동의를 얻어 연장 가능하다. 제7조 편집위원은 아래와 같은 기준에 따라 선정한다. 1. 대학의 부교수 이상 또는 이에 상응하는 자격을 갖춘 자, 혹은 해당 전공분 야에서 20년 이상의 연구경력을 가진 자로서 학술 연구 실적이 뛰어난 국․내외 회원 중에서 선정한다. 2. 각 학문분야의 대표성을 고려하여 선정한다. 3. 분과위원회의 분과이사는 당연직으로 임명한다. 제3 장 기능 제8조 편집위원회는 학회지 『일본문화학보』의 체제, 발행횟수, 발행부수, 논문의 분 량, 투고 및 심사규정 등 학회지 발행과 관련한 제반 사항을 결정한다.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69 제9조 편집위원회 편집간사는 각 분과이사와 협의 하에 학회에 투고된 논문의 심사위 원을 선정․의뢰하고, 편집위원회는 심사위원의 심사결과를 토대로 논문게재 여 부를 결정한다. 제10조 제8조에 제시된 사항 이외에 편집위원회가 의결한 사안은 이사회의 인준을 거친 후에 효력이 발생한다. 제 4 장 편집위원회 회의 제11조 편집위원회 회의는 학회지 발간 계획에 따라 위원장이 소집한다. 제12조 연 4회의 정규 편집회의 이외에 필요할 경우에 위원장이 임시 편집회의를 소집할 수 있다. 제13조 편집회의는 원칙적으로 출석위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의결한다. 제 5 장 논문 평가 기준 제14조 게재 논문은 학회에서 구두 발표된 것을 원칙으로 하되(단, 구두 발표 후 2년간 유효), 이사회의 추천이 있는 경우에는 그 기고 논문도 심사 후 게재할 수 있다. 제15조 논문의 심사는 항목별 평가와 종합평가로 이루어진다. 제16조 논문심사에 적용되는 평가 항목은 다음과 같다. 1. 내용의 적절성 2. 내용의 독창성 3. 형식의 적절성 4. 전개의 논리성 5. 연구방법의 적절성 제17조 종합평가는 항목별 평가를 근거로 심사자가 다음의 5등급으로 평가한다. 1. 학술논문으로서 매우 우수하다. 2. 학술논문으로서 우수하나 간단한 수정이 필요하다. 3. 학술논문으로서 내용 및 체제면에서 수정사항이 많고 수정 후 재심이 필요 하다. 4. 학술논문으로서 내용 및 체제면에서 상당한 수정이 필요하여 수정 후 재신 청을 요한다. 5. 학술논문으로서 부적격하다.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70 제 6 장 논문심사 기준 및 절차 제18조(심사 기준) 편집위원회에서는 투고 논문에 대한 3인의 책임심사위원의 심사 결 과와 지적 사항에 대한 집필자의 처리 결과 및 투고 규정의 준수를 바탕으로, 다 음과 같이 해당 논문의 게재 여부를 결정한다. 1. 게재 가 심사위원 평가평점 23점 이상인 논문이 대상이 된다. 2. 수정후 게재 심사위원 평가평점 20~22점인 논문이 대상이 된다. 3. 수정후 재심 심사위원 평가평점이 15~19점인 논문이 대상이 된다. 4. 게재 보류 심사위원 평가평점이 10~14점인 논문이 대상이 된다. 5. 게재 불가 심사위원 평가평점이 9점 미만인 논문이 대상이 된다. 제19조(심사 절차) 논문심사는 다음과 같은 2단계 절차로 이루어진다. 1. 1차 심사(심사위원 심사) a. 제출된 논문에 대하여 3인의 책임심사위원에게 심사 의뢰한다. b. 편집위원회에서는 심사위원 평가평점이 23점 이상인 논문은 <게재 가>, 20~ 22점인 논문은 <수정후 게재>, 15~19점인 논문은 <수정후 재심>, 10~14 점인 논문은 <게재 보류>, 9점 미만인 논문은 <게재 불가>의 판정을 내린 다. c. 투고자에게 1차 심사 결과보고서와 심사결과를 통보하고, <1심 통과> 판정 을 받은 논문은 수정․가필을 요구한다. 2. 2차 심사(편집위원회 심사) a. 1차 심사 통과 논문에 대하여 2인의 편집위원에게 수정 이행 및 투고규정 준수 여부의 심사를 의뢰한다. b. 심사위원회 평가평점을 합한 종합평점을 감안하여 <게재 가>와 <수정후 게재> 논문을 최종 결정한다. c. 투고자에게 확정된 심사 결과를 통보한다. <수정후 재심>, <게재 보류>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71 논문은 재차 수정을 요구한다. d. 투고 논문의 게재율에 관한 편집위원회의 의결 사항은 종합평점에 우선한다. 제20조(심사 시기) 투고된 논문에 대한 심사는 연 4회(3월․6월․9월․12)월에 실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제21조(논문 게재호) 최종 심사에 통과한 논문의 게재호는 편집위원회에서 결정하며, 동 일 집필자의 연속호 게재는 불허함을 원칙으로 한다. 또한 집필자가 복수인 경 우, 제1필자를 상단에 표기하고 공동필자는 하단에 표기한다. 제7장 기타 제22조 편집위원회 및 분과별 업무를 처리하기 위하여 편집위원회와 별도로 분과 위원회 를 둔다. 제8장 부칙 제1조 본 규정은 이사회의 의결을 거쳐 1999년 10월 9일부터 시행한다. 제2조 본 규정에 명시되지 않은 사항은 일반 관례에 따른다. 제3조 개정된 규정은 이사회의 의결을 거쳐 2002년 3월 1일부터 시행한다. 제4조 개정된 규정은 이사회의 의결을 거쳐 2006년 8월 1일부터 시행한다. 제5조 개정된 규정은 이사회의 의결을 거쳐 2008년 8월 1일부터 시행한다.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72 한국일본문화학회 연구윤리 규정 제1 장 총 칙 제1조 (개요) 본 한국일본문화학회(이하 ‘학회’라 한다)는 한국에서의 일본학 연구 및 교육 활동을 활성화하기 위한 학술단체로 설립되었다. 본 학회는 학술활동의 일환으로 회원들의 학술연구결과를 엄정한 심사를 통해 선정하여 학술대 회에 참여시키고, 그 결과를 학회지에 게재시키고 있다. 본 학회는 지속 적으로 높은 수준의 학술지 발표를 통하여 학회의 발전 및 궁극적으로 한일 양국의 문화교류 및 발전을 도모하고자 한다. 이를 위하여 회원들 의 학술연구 수행 및 연구논문 발표 시 국제수준의 연구윤리를 준수함이 우선적으로 중요하며, 학회는 회원들의 진정한 학문적 발전을 위하여 학 회연구윤리규정을 제정하고자 한다. 제2조 (목적) 본 규정의 목적은 본 학회의 학회지 및 학술대회 발표 논문에 관한 연 구윤리의 규정을 엄격히 정하고 명문화함으로써 신뢰받는 연구풍토를 확 립하고, 회원들의 바른 학술활동을 유도하여 학회의 위상을 효율적으로 제고하기 위함이다. 제 2 장 연구윤리위원회의 조직 제3조 (위원회 설치) 본 학회는 연구윤리 규정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학회 내에 연구윤 리위원회(이하 ‘위원회’라 한다)를 설치한다. 제4조 (위원회 구성) 1. 위원회는 편집위원장, 부회장, 총무이사, 학술이사, 편집이사 및 3인 이상의 편집위원을 포함하여 15인 이내의 위원으로 구성한다. 2. 위원장은 편집위원장이 겸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필요에 따라서 는 위원회 내에서 회장이 임명한다.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73 제5조 (임기) 위원의 임기는 각 위원의 직책임기에 따른다 제 3 장 연구윤리위원회의 운영 및 권한 제6조 (운영 범위) 1. 학회 연구윤리와 관련된 제반 규정들을 세우고 실행한다. 2. 연구윤리 위반에 대한 제보를 접수하고 이를 규정에 따라 처리한다. 3. 제보자 및 피조사자의 인격과 명예에 대한 사항을 규정하고 이를 준 수한다. 4. 최종 조사결과에 대한 공문을 상임이사회에 통보한다. 5. 상임이사회의 최종 판정결과에 따라서 후속 사항 및 징계사항을 집 행한다. 제7조 (연구자의 연구윤리) 1. 연구자는 각자가 수행하는 연구행위 및 연구물에서의 표절, 조작, 위 조 및 변조, 이중출판 등을 심각한 범죄행위로 간주하고 이러한 부정 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2. 연구자는 제1항에 제시한 부정행위로 의심되는 사례를 발견했을 경 우 적절한 방법으로 이를 학회에 보고해야 한다. 3. 연구자는 자신의 이익과 타 연구자 또는 타 기관의 이익이 상충하거 나 상충할 가능성이 있을 경우 이를 공표하고 적절히 대응해야 한다. 제 4 장 심의 절차 및 징계 제8조 (심의 절차) 1. 위원회는 제보된 사안을 접수일로부터 60일 이내에 심의․의결․집 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2. 제보자의 신원 및 제보내용에 대해서는 비공개를 원칙으로 하되, 공 공기관의 요청이 있을 경우에는 통보할 수 있다. 3. 위원회는 제보된 사안의 적부를 자체 심사평가하며, 전문적 의견이 필요한 경우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검토를 의뢰할 수 있다. 4. 위원회는 판정을 내리기 전에 피제소자에게 연구윤리 저촉혐의 내용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74 을 알려주고 충분한 소명기회를 준다. 5. 심의 결과 제보된 사안이 부적절하거나 피제소자의 소명이 타당하다 고 인정될 경우, 피제소자의 무혐의를 제보자와 피제소자에게 즉시 통보한다. 6. 심의 결과 연구윤리 저촉이 사실로 인정될 경우, 심사결과를 제보자 와 피제소자에게 각각 통보하고, 피제소자로 하여금 일정 기간 내에 재 소명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7. 위원회는 피제소자의 혐의가 인정될 경우, 부정행위의 형태, 범위 및 고의성을 판별하여 보고서를 작성한다. 8. 위원회의 징계의결은 재적위원 3분의 2 이상의 출석과 출석위원 과 반수의 찬성으로 행한다. 9. 명시된 기간 내에 피제소자의 소명이 없거나 소명의 타당성이 인정 되지 않을 경우, 징계 내용을 최종 결정하여 이를 피제소자에게 공식 통보하는 한편, 학회 홈페이지를 통하여 공지한다. 단, 징계를 받은 논문 중 기관의 연구비를 받은 논문은 당해 기관의 확인 요청 여부 와 관계없이 당해 기관에 징계 결과를 통보한다. 제9조 (징계) 연구윤리 위반이 공식적으로 확정된 저자나 논문에 대해서는 그 위반행 위의 경중에 따라 다음 중 하나 또는 복수의 항목에 해당하는 징계를 가 하도록 한다. 1. 학회 견책 서한 발송 2. 해당 연구결과물에 대한 취소 또는 수정 요구 3. 3년간 투고자격 제한 4. 제명 5. 소속기관에의 통보 6. 법률기관에의 고발 등 제 5 장 기타 제10조 연구윤리 위반 혐의가 인정된 경우, 논문 투고 및 심사에 사용한 제반 경비를 반환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제11조 본 규정은 이사회의 의결을 거쳐 2008년 8월 1일부터 시행한다.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75 『일본문화학보』 투고 규정 1. (논문) 일본어문학, 일본어교육, 일본학, 한일어 대조연구, 한일비교 문학 등 廣義의 일본문 화와 관련한 참신하고 창의적인 것이어야 한다. 2. (사용언어) 한국어나 일본어로 작성한다. 3. (원고작성) 국내 회원 및 해외 회원 공히 반드시 워드프로세서 <글> 로 작성하는 것을 원칙으 로 한다. 원고는 <글>의 <편집 용지>에서 (사용자 정의 폭 180, 길이 255)를 선택 하고, 위 20, 아래 10, 머리말 13, 꼬리말 13, 왼쪽 23, 오른쪽 23, 제본 0으로 조정한 후 작성한다. 논문 내용의 각 글자 크기는 다음과 같다. 논문 제목 - 신명조(약자) 20, 진하게, 가운데 정렬 소제목 - 신명조(약자) 15, 가운데 필자 명 - 신명조(약자) 12, 오른쪽 정렬 목차 - 신명조(약자) 12, 진하게, 가운데 목차 내용 - 신명조(약자) 10, 줄간격 140 큰제목 - 신명조(약자) 15, 진하게, 줄간격 155, 가운데 본문 - 신명조(약자) 10.5, 줄간격 155 인용문 - 신명조(약자) 10, 줄간격 155, 왼쪽 여백 (한글2002는 20, 한글97은 4) 각주 - 신명조(약자) 9, 줄간격 130 기타 간격 등의 설정은 <한국일본문화학회 논문 작성 요령>에 나와 있는 논문 편집 형식을 참고한다. 4. (원고분량) 원고지 200자×100매 내외로 한다. 이는 투고규정에 따라 작성한 문서 약 19매에 해당 하며, 15매~22매를 원칙으로 한다. 원고가 요지문을 포함하여 22매를 초과할 경우에 는 1매당 1만원의 게재료를 추가로 부담한다. 5. (요지문) 참고문헌 뒤에 600-800자 정도의 요지문을 기재한다. 요지문은 반드시 외국어(영문 혹은 일어) 로 작성한다. 6. (키워드) 요지문 밑에 그 논문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키워드(Key-Word) 6-10단어를 요지문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76 과 동일 언어로 명기한다. 7. (외래어) 일본어를 한글로 표기할 때는 한글맞춤법의 <외래어표기법>에 따른다. 8. (논문작성 요령) a. 저서는 『 』, 논문이나 단편은 「 」 로 표시한다. b. 注는 각주로 하며, 인용 또는 참고한 쪽수를 명기한다. c. <참고문헌>은 필자명(연도), 논문명(또는 저서명), 게재지 권 호, 발행처의 순으로 배열하되, 마지막에 참고 혹은 인용한 쪽수를 필히 기재한다. 예) 安增煥(2001) 「言語와 文化」 『日本文化學報』 11, 韓國日本文化學會. 110쪽 影山太郞(1993) 『文法と語構成』ひつじ書房. 212頁 Stein, Dieter(1995) “Subjectivity and Subjectivisation” : Cambridge University Press. p.113 d. 배열은 한국어 문헌, 일본어 문헌, 영어 문헌의 필자명을 기준으로 각각 가나다, 오십음, 알파벳 순으로 한다. 내용적으로 <사전류>, <전집류>, <단행본>, <잡지>, <논문> 순으로 기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9. (원고제출) 원고는 e-mail로 제출한다. 원고의 표지는 별지로 하여, 투고자의 인적사항(성명, 영 문성명, 소속, 직위, 전공분야)과 논문의 영어제목, 연락처(우편번호, 주소, 전화, e-mail) 및 구두발표일과 발표장소, 투고일을 기입한다. 또한 집필자가 복수인 경우, 제1필자와 공동필자를 함께 표기한다. 10. (원고교정) 편집위원회에서는 필요에 따라 집필자에게 원고의 가필․수정을 요구할 수 있으며, 원고의 교정은 집필자가 책임진다. 11. (심사비 및 게재료) 논문 투고를 희망하는 자는 학회 계좌에 심사비로 6만원을 입금하여야 하며, 게재가 확정되면 집필자는 소정의 게재료를 부담한다. (일반논문:10만원, 연구비수혜논문:20 만원) 12. (별쇄본) 게재된 논문에 대하여 학회지 2부를 증정한다. 단, 별쇄본의 인쇄비용은 집필자가 부담한다. 13. (기타) 복잡한 도표 및 투고 규정 위반 등으로 인하여 출판 비용이 많이 들 경우에는 집필 자에게 그에 대한 비용을 청구할 수 있으며, 접수된 원고는 반환하지 않는다.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77 한국일본문화학회 논문 작성 요령 【편집용지】 <사용자 정의 폭180, 길이255> 위20(19.99), 머리말13(12.99), 왼쪽23, 오른 쪽23, 제본0, 아래10, 꼬리말13(12.99) 【논문제목】 【소제목】 한국일본문화학회(신명조(약자) 20, 진하게, 가운데 정렬) 한국일본문화학회(신명조(약자) 15, 가운데) ** 4줄 (소제목이 없으면 5줄) ** 洪 吉 東*(신명조(약자) 12, 오른쪽 정렬) 【필자명】 (필자가 2인 이상인 경우, 제1필자를 상단에, 공동필자를 하단에 표기한다. 필자명 끝에 *표를 위 첨자 “*”(“모양”→“글자모양”에서 “속성-위 첨자”를 선택)로 한 후 소속, 직위, 전공분야를 각주로 기입한다. 각주번호 “1)”은 블록을 씌워 “글자모양” 에서 글자색을 흰색으로 지정하여 감추고, 본문에서 각주가 시작될 때는 “모양”의 “새 번호로 시작”에서 각주번호를 “1”로 한다.) ** 2줄 ** 目 次 (신명조(약자) 12,진하게, 가운데) 신명조(약자) 10 , 줄간격 140 ** 2줄 ** 【큰제목】 1. 연구 목적 및 방법 (신명조(약자) 15, 진하게, 줄간격 155, 가운데 정렬) ** 1줄 ** 【본 문】 이 논문은 상대일본어의.....大野씨는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신명조(약자) 10.5, 줄간격 155) ** 1줄 ** 〔인용문〕 상대에 있어서... (신명조(약자) 10, 줄간격 155, 왼쪽 여백(한글2002는 20, 한글97은 4)) ** 1줄 ** 이처럼 상대일본어의..... ** 2줄 **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78 2. 상대 일본어의 특징 (신명조(약자) 15, 진하게, 줄간격 155, 가운데 정렬) ** 1줄 **(작은 제목과 본문사이는 떼지 않음) 【각 주】 ――――――――― * 한국대학교 조교수 일본고전문학 1) 이에 대해 ****은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신명조(약자) 9, 줄간격 130) (인용 및 참고자료에 대해서는 발행년도와 쪽수를 표기한다.) ** 2줄 ** 5. 맺음말 ** 1줄 ** 이 논문에서는.... ** 2줄 ** 【참고문헌】 (신명조(약자) 15, 진하게, 줄간격 155) ** 1줄 ** ․ 허웅(1985)『국어음운학』, 샘문화사. p.131-133 (신명조(약자) 10, 줄간격 155) * 전체글꼴은 신명조 또는 신명조 약자, 전체줄각격은 155, 각주 130 표 140. * <필자명(연도) 논문명(또는 저서명), 게재지 권 호, 발행처>의 순서로 배열 * 문헌 배열: 국문, 일문, 영문 순으로 하여 필자명을 기준으로 각각 가나다, 오십음, 알파벳 순. * 인용 또는 참고한 쪽수를 명기 ** 쪽을 바꿔서 ** 【요지】(신명조(약자) 15, 진하게, 줄간격 155) ** 6줄 ** 本論は、上代日本語を通して...... (신명조(약자) 10, 줄간격 155) ( 작성언어 : 영어 또는 일본어. 분 량 : 1장 내외) ** 1줄 ** * 키워드 : 검색의 편의를 위해 주제어(key word)를 명시(요지문과 동일 양식으로 6-10단어) ** 2줄 ** [필자연락처] 住 所:( - ) 電 話: e-mail : * 거주지가 국내인 경우는 한국어로, 일본인 경우는 일본어신명조약자로 기입한다.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79 학회 발표에 관한 규정 1. (발표자격) 본 학회 정회원으로서 대학원생이거나, 교원 경력 5년 이상인 자, 또는 이사회의 추 천을 받은 자로 한다. 단, 석사과정의 대학원생인 경우는 지도교수 혹은 해외지부장 의 추천이 필요하며, 발표 요지문을 해당 분과에서 심사 후 채택 여부를 결정한다. 2. (발표신청) 해당 분과이사나 학술이사에게 구두로 신청할 수 있으나, 가능한 한 학회 홈페이지상 의 신청 양식을 이용하도록 한다. 3. (신청기한) 춘계대회 발표 희망자는 3월 15일, 추계대회 발표 희망자는 9월 15일까지 신청하도록 한다. 4. (발표 요지문) a. <발표요지문>은 한국어 또는 일본어로 작성한다. b. 분량은 A4용지 4장(가로쓰기) 이내로 한다. c. 마지막에 발표자의 근무처․전공․주소․전화번호․e-mail 주소를 기입한다. d. 춘계대회 때는 3월 31일까지, 추계대회 때는 9월 30일까지 제출한다. e. 원고는 가능한 한 e-mail(첨부파일)로 하여 학술이사에게 전송한다. f. 우편의 경우는 학술이사나 학회 사무실로 발송한다. g. 발표 요지문 제출과 함께 발표 요지집 인쇄비로 10,000원을 학회 통장으로 입금한다. 5. (외국 교류학술지 투고) 구두발표 신청 시 외국 학술교류학회지(일본비교문화학회 『비교문화연구』)에 투고 를 희망하는 경우는 국내회원이 대상이 된다. 교류학회 측의 투고요청 희망자수 범위 내에서 본 학회의 내부 선정 기준에 의하여 대상자를 선정․추천한다. <발표요지문 인쇄비 및 게재료 입금처> 외환은행 611-017701-086 (日本) 郵便局 00920-9-147169 박희남(일본문화학회) 韓國日本文化學會 日本支部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80 외국학회와의 학술교류에 관한 규정 1. (日本) 表現學會 a. 표현학회는 한국일본문화학회로부터 추천 받은 1명에 대하여, 전국대회(연 1회)에 서 연구발표의 기회를 제공한다. b. 한국일본문화학회는 표현학회로부터 추천 받은 수명에 대하여, 학술대회(연 2회)에 서 연구발표의 기회를 제공한다. c. 표현학회는 한국일본문화학회로부터 추천 받은 발표 논문에 대하여 학회지 『表現 硏究』에 게재할 수 있다. d. 한국일본문화학회는 표현학회로부터 추천 받은 발표 논문에 대하여 학회지 『日 本文化學報』에 게재할 수 있다. 2. 日本比較文化學會 a. 일본비교문화학회는 한국일본문화학회로부터 추천 받은 회원에 대하여, 전국 대회 (연 1회)에서 연구발표의 기회를 제공한다. b. 한국일본문화학회는 일본비교문화학회로부터 추천 받은 회원에 대하여, 학술 대회 (연 2회)에서 연구발표의 기회를 제공한다. c. 일본비교문화학회의 학회지 『比較文化硏究』에 한국일본문화학회 국내회원의 논 문을 게재할 수 있다. d. c항의 논문은 한국일본문화학회에서 구두 발표한 논문 중에서 학회가 추천하며, 투고자의 추천에 있어서는 학회의 내부 규정에 따라 해당자를 선정한다. e. 추천 논문의 심사와 게재료는 일본비교문화학회의 규정에 따른다. f. 한국일본문화학회는 학회지 『日本文化學報』에 일본비교문화학회로부터 추천 받 은 논문을 게재할 수 있으며, 추천 논문의 심사는 해당 학회의 규정에 따른다. g. 일본비교문화학회는 전국대회(연 1회)에서 발표하는 한국일본문화학회로부터의 추 천 회원에 대하여 1년 간의 회비를 면제한다. h. 한국일본문화학회는 학술대회(연 2회)에서 발표하는 일본비교문화학회로부터의 추 천 회원에 대하여 1년 간의 회비를 면제한다.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81 해외이사에 관한 규정 1. (자격) 본 학회에 1회 이상 출석하여 연구발표를 한 외국 학자 중에서, 본 학회의 연구 활동 에 관심을 가지고 협력하는 자로 한다. 2. (활동) a. 자국 내에 본 학회를 소개하고 학회의 활동 내용이나 정보 등을 제공한다. b. 본 학회의 연구발표회에서 발표를 희망하는 자를 모집한다. c. 본 학회의 학회지 게재 대상 논문을 심사할 수 있다. d. 본 학회의 자국내 회원을 관리한다. 3. (임기) 2년 단위로 하고, 본인의 동의를 얻어 연장 가능하다. 4. (임명) 이사회에서 심의․결정하고, 회장이 위촉한다. 5. (시행) 본 규정은 1997년 5월 5일부터 시행한다. 해외지부에 관한 규정 1. 본 학회는 학문을 통한 국제교류와 학회활동의 국제화를 위해 해외에 지부를 둘 수 있다. 2. 해외지부는 본 학회의 취지에 찬동하고 적극적으로 협조할 수 있는 해외이사를 중심 으로 결성한다. 3. 해외지부의 운영은 지부장이 총괄하며, 회원도 자체 관리한다. 4. 해외지부장은 이사회의 추천을 받아 회장이 위촉한다. 5. 해외지부장의 임기는 2년이며 본인의 동의를 얻어 연임도 가능하다. 6. 해외지부는 정기적인 연구회를 개최하고, 그 결과를 본 학회에 보고한다. 7. 해외지부에서는 본 학회의 전국대회(연 2회)에 발표자를 추천한다. 8. 해외지부로부터의 추천 발표자는 1년 간의 회비를 면제한다. 9. 본 학회에서는 해외지부에 투고 논문에 대한 심사를 의뢰할 수 있다.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82 회원규정 본 학회의 모든 회원은 [국내회원](국내에 소속이나 근무처가 있는 내국인이나 외국 인)과 [해외회원](국외에 소속이나 근무처가 있는 외국인이나 내국인)으로 구분하며, 가 입 내용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단, 한국인 유학생은 국내회원으로 분류한다. 1.(정회원) 본 학회의 회원 가입을 필한 자. 단, 3년 간 회비를 납부하지 않을 경우에 는 정회원의 자격을 상실한다. 2.(준회원) 회원 중 정회원의 자격을 상실한 자. 3.(종신회원) 본 학회의 발전에 기여한 회원 중에서 이사회의 동의를 얻은 자로, 소정의 종신회비(30만원)를 납부한 회원으로, 실무이사를 겸하고 있는 경우 이사 회비는 2만원으로 한다. 4.(특별회원) 본 학회의 발전에 기여한 회원 중에서 이사회의 추천을 받은 자. 5.(명예회원) 본 학회 초청강연자 중에서 이사회의 추천을 받은 자. 6.(단체회원) 소정의 단체회비(8만원)를 납부하는 국내외 학술단체 및 기관. 단, 해외의 [학술지교류단체]도 단체회원의 범주에 포함한다. 회원명단 상에 상위점이나 변경사항이 있는 회원께서는 즉시 학회 사무실 로 연락 바라며, 3년 동안 회비를 납부하지 않는 경우에는 회원명단에서 자동 삭제되니(재가입 要) 이 점 양지하시고 협조 부탁드립니다. 학회비 납부 안내 (가입비 1만원 / 년회비 3만원) * 이사회비 년5만원 외환은행 611-017701-086 박희남(일본문화학회) (日本) 郵便局 00920-9-147169 韓國日本文化學會 日本支部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83 『日本文化學報』發行 計劃 ∙ ∙ ∙ ∙ ∙ ∙ ∙ ∙ ∙ 原稿 投稿 依賴 (5月初․11月初) 論文 原稿 마감 (2月末․5月末․8月末․11月末):1次 提出 論文 審査 (3月․6月․9月․12月) 審査委員 審査結果 通知 (3月中旬․6月中旬․9月中旬․12月中旬) 論文 修正原稿 마감 (3月末․6月末․9月末․12月末):2次 提出 編集委員會 最終 揭載可否 通知 (4月初․7月初․10月初․1月初) 1次 校正:筆者 2次 校正:編集委員會 發行 (5月31日․8月31日․11月30日․2月28日) 學會 住所 및 連絡處 ☞ 韓國 學會事務局 (300-150) 대전광역시 동구 정동 31-1 신영와코루빌딩 201호(메트로문화사) Tel (042)488-9155 Fax (042)488-9156 ☞ 日本 本學會의 關西支部 : 藤井寺市春日丘3-8-1 大阪女子短期大學 水谷隆硏究室 關東支部 : 東京都日野市大坂上4-1-1 實踐女子大學 山內博之硏究室 中部支部 : 名古屋市昭和區山里町18番地 南山大學 坂本正硏究室 ☞ 학회 Homepage address : //www.bunka.or.kr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84 編輯委員會 編輯委員長 編輯幹事 編輯委員 : 片茂鎭(檀國大) : 權寧成(淸州大) : 具見書(平澤大) 權五曄(忠南大) 金順槇(全南大) 朴正義(圓光大) 安增煥(韓南大) 李康民(漢陽大) 李暻洙(放通大) 鄭昌石(同德女大) 陳明順(靈山大) 坂本正(南山大) 島村恭則(秋田大) 牧野和夫(實踐女子大) 分科委員會 * 〔日本語學分科〕 辛碩基(建陽大) 張元哉(啓明大) 尹錫南(建陽大) 金東郁(白石大) 黃光吉(檀國大) 趙來喆(順天大) 吳美寧(崇實大) 崔彰完(가톨릭大) 安熙貞(威德大) * 康永富(慶熙大) 金聖京(柳韓大) 金潤喆(群山大) 李京哲(東國大) 崔英淑(大邱韓醫大) 尹岡丘(慶尙大) 李珍鎬(圓光大) 裵貞烈(韓南大) 金泰燾(韓瑞大) 金裕千(詳明大) 南二淑(群山大) 李濬燮(慶北大) 李市埈(崇實大) 閔丙勳(大田大) 吳起燻(靑巖大) 李貞熙(威德大) 金希中(東南保健大) 權赫建(東義大) 임태균(聖潔大) 林容澤(仁荷大) 林永彦(全南大) 金泰永(江陵大) 崔長根(大邱大) 朴正義(圓光大) 具見書(平澤大) 鄭応洙(南서울大) 鄭昌石(同德女大) 權柄旭(忠南大) 金英順(建陽大) 朴宰秀(韓國科學技術情報硏究院) 〔日本語敎育分科〕 金仁炫(朝鮮大) 安秉杰(南서울大) 〔古典文學分科〕 李夏子(順天大) * 金祥圭(釜慶大) 鄭順紛(培栽大) 〔近代文學分科〕 * 박승호(白石文化大) 韓光洙(淸州大) 김태연(慶州大) 〔日本學分科〕 吳俊永(空軍士官學校) * * ※ ( 는 分科理事) ◉ 會則および規定 ▸ 學會會則 ▸ 編輯委員會規定 ▸ 投稿規定 ▸ 學會發表に關する規定 ▸ 海外理事に關する規定 ▸ 海外支部に關する規定 ▸ 會員規定 ◉ 『日本文化學報』發行計畵 ◉ 各種樣式 ◉ 2007年度 學會日程表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86 會則および規定 韓國日本文化學會 會則 第1 章 總 則 第1條(名称) 本學會は 「韓國日本文化學會」 と称する。 第2條(目的) 本學會は日本關連諸學問硏究のための國內外相互の學術交流を通じて、日本學 硏究の活性化と學問の發展を図り、國際交流を通じた相互協力と理解增進に寄与 する。 第3條(事業) 本學會は第2條の目的を達成するために各項の事業を行う。 1. 學術硏究發表會(年2回) 2. 學術誌發刊(年4回) 3. 學術振興のためのセミナー及びシンポジウムの開催 4. 外國學會との學術交流及び共同硏究 5. 外國の大學図書館及び學術団体との學術誌交流 6. 日本文化の紹介 第4條(位置) 本學會の目的を達成するために學會事務室及び支部を置き、常時業務を担當する 事務局長を置くことができる。 第2 章 會 員 第5條(資格) 本學會の會員は日本語文學をはじめとする日本學硏究に從事する者や關心を持つ 者とする。 第6條(區分) 本學會の會員の區分は「會員規定」に從う。 第7條(加入要件) 本學會に新規に加入をしようとする者は旣會員の推薦を受けることを原則とす る。 第8條(權利と義務) 本學會の會員は次のような權利と義務を有する。 1. 役員の選擧權及び被選擧權(但し、名譽會員を除く) 2. 學會活動參加の權利と會則遵守の義務 3. 會費納付の義務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87 第9條(懲戒):會員が會員の義務を遂行せず、本學會の名譽を著しく損なった場合は、理事会の 決議を経て、会員資格の剥奪または停止など懲戒することができる。 第 3 章 機構及び役員 第10條(機構) 本學會には次のような機構を置く。 1. 執行委員會(會長、副會長、常任理事) 2. 理事會 3. 海外支部 第11條(役員) 本學會の円滑な運營のために次のような役員を置く。 會長(1名)、副會長(若干名)、常任理事(若干名)、海外理事及び理事(適 宜)、監事(2名) 第12條(役員の選出) 會長及び監事は總會で選出し、その他の役員は會長が委囑する。 第13條(役員の任期) 役員の任期は2年とするが再任することができる。 第4 章 會 議 第14條(種類) 本學會の會議には總會、理事會、各種委員會がある。 第15條(總會の招集及び議決) 1. 本學會は每年1回の定期總會を開催し、必要に応じて會長が臨時總會を招集 することができる。 2. 總會は次のような議案を審議․議決する。 (1) 會長及び監事の選出․解任 (2) 會則改定 (3) 事業計畵の樹立 (4) 予算と決算の承認 (5) その他の事項 3. 總會での議決は出席會員の過半數の贊成による。 第16條(理事會の招集及び議決) 1. 理事會には實務理事會と擴大理事會があり、會長がこれを召集する。 2. 實務理事會は會長、副會長、常任理事により構成され、擴大理事會は會 長、副會長を含む全理事が對象となる。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88 3. 理事會は諸規定の改定、會則改正の發議、會長委任事項の審議、諮問委 員の迎え入れ、特別․名譽會員の承認、その他重要事項を處理する。 第17條(各種委員會の構成及び任務) 1. 會長は分野別業務の能率的遂行のため各種委員會を設置することができる。 2. 委員會は委員長と委員から成り、委員長は會長の任命動議により理事會で選任する。 3. 委員會の案件は出席委員の過半數の贊成により可決される。 第5 章 財 政 第18條(財政)本學會の財政は會員の會費とその他の收益金による。 第19條(會費)本學會の會費は總會で決定する。 第20條(會計年度)本學會の會計年度は3月から翌年2月までとする。 第21條(國際學術交流賞選定)本學會の學術發展に多大な貢獻が認められる海外會員を對象 とし學會長の推薦により理事會において定める。 第6 章 付 則 第22條(會則改正)本學會の會則の改正は定期總會で出席者の3分の2以上の同意 を得て確定する。 第23條(施行細則)本會則の施行に必要な諸規定は理事會の議決を得て施行する。本會則に 明示されていない事項については慣例に從う。 第24條(施行日)本改正會則は2001年10月1日から施行する。 第25條 改正された規定は、定期総会の議決を経て、2007年5月1日から施行する。 第26條 改正された規定は、定期総会の議決を経て、2008年10月25日から施行する。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89 韓國日本文化學會 編輯委員會規定 第1 章 總 則 第1條 本委員會は「韓國日本文化學會編集委員會」と称する。 第2條 本委員會は韓國日本文化學會會則第17條により設置する。 第3條 本委員會が管掌する學會誌『日本文化學報』は次のような指針のもとに發行する。 1. 年4回(2月号、5月号、8月号、11月号)發行する。 2. 發行日は當該月の末日を原則とする。 3. その他の發行過程は「『日本文化學報』發行計畵」による。 第 2 章 編集委員會の構成 第4條 編集委員會は次のように構成する。 委員長、編集幹事、国內外委員 第5條 編集委員會委員長は編集委員の中から会長の提請により理事会で選任する。編集委員 會委員長は委員會を代表し、編集幹事は學會誌に投稿された論文の審査及び編集を統 括する。任期は共に2年とする。 第6條 編集委員會委員は理事會の認定を経て會長が任命する。任期は2年とし、本人の同意を 得て延長が可能である。 第7條 編集委員は次のような基準により選定する。 1. 大學の副敎授以上またはこれに相當する資格を持つ者。或いは該當專攻分野で20 年以上の硏究経歷を持つ者で學術硏究實績が優れた國內外會員。 2. 各學問分野の代表性を考慮して選定する。 3. 分科委員會の分科理事。 第3 章 機 能 第8條*編集委員會は學會誌『日本文化學報』の樣式、發行回數、發行部數、論文の分 量、投稿及び審査規程など學會誌發行と關連した諸事項を決定する。 第9條1編集委員會の編集幹事は各分科理事との合意のもとに投稿論文の審査委員を選定․依 賴し、編集委員會は審査委員の審査結果を踏まえて論文揭載の可否を決定する。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90 第10條1第8條の事項以外に編集委員會が議決した事案は、理事會の認定を経たのちに効力が 發生する。 第 4 章 編集委員會會議 第11條1編集委員會會議は學會誌の發行計畵により委員長が召集する。 第12條1年4回の定期編集會議以外に、必要に応じて委員長が臨時編集會議を招集することができ る。 第13條1編集會議は原則として出席委員の過半數の贊成で議決する。 第 5 章 論文評価基準 第14條 揭載論文は學會の硏究發表會で發表されたものとするが(但し、口頭發表後2年間有 効)、理事會の推薦がある場合にはその寄稿論文も揭載することができる。 第15條 論文の審査は項目別評価と總合評価からなる。 第16條 評価項目は次の通りである。 1. 内容の適切性 2. 内容の独創性 3. 形式の適切性 4. 展開の論理性 5. 研究方法の適切性 第17條 總合評価は項目別評価をもとに審査者が次の5段階で評価する。 1. 學術論文として非常に優秀である。 2. 學術論文として優秀であるが一部修正を要する。 3. 學術論文として內容․形式面で修正を要する部分が比較的多く、修正後再審査を 要する。 4. 學術論文として內容․形式面で相當な修正が必要であり、修正後再申請を要す る。 5. 學術論文として不適格である。 第 6 章 論文審査基準․審査過程 第18條(審査基準) 編集委員會では投稿論文に對する3名の責任審査委員の審査結果と、指摘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91 事項に對する執筆者の處理結果及び投稿規定の遵守を基準として、次のように論文の揭 載可否を決定する。 1. 揭載可 審査委員評価23点以上の論文が対象になる。 2. 修正後掲載 審査委員評価20~22点の論文が対象になる。 3. 修正後再審査 審査委員評価15~19点の論文が対象になる。 4. 揭載保留 審査委員評価10~14点の論文が対象になる。 5. 揭載不可 審査委員評価9点未満の論文が対象になる。 第19條(審査過程) 論文の審査は次の2段階の過程からなる。 1. 一次審査(審査委員審査) 2. 二次審査(編集委員會審査) 第20條(審査時期) 投稿された論文の審査は年4回(3月、6月、9月、12月)實施することを原則とする。 第21條(論文揭載号) 最終審査に通過した論文の揭載号は編集委員會で決定する。 第 7 章 その他 第22條 編集委員會及び分科別の業務を處理するため編集委員會とは別に分科委員會を置く。 第8 章 付 則 第1條 本規定は理事會の議決を経て1999年10月9日から施行する。 第2條 本規定に明示されていない事項については慣例に從う。 第3條 改正された規定は理事會の議決を経て2002年3月1日から施行する。 第4條 改正された規定は理事會の議決を経て2006年8月1日から施行する。 第5條 改正された規定は理事會の議決を経て2008年8月1日から施行する。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92 『日本文化學報』 投稿規定 【海外會員用】 1. 原稿は<アレアハングル>かMs-Wordで作成する。 2. 原稿の分量は原稿用紙400字×50枚以內とする。<アレアハングル>の文書作成の初期畵面で 作成する場合は、A4用紙15枚から22枚までとする。要旨を含めて22枚を超えるときは、超過分1 枚當り1万ウォンの揭載料を徵收する。 3. 原稿は<アレアハングル>の<編集用紙>で<使用者定義 幅180、縱255>を選擇し、上20、下1 0、ヘッダー13、フッター13、左23、右23、製本0に調整した後作成する。フォントは韓國語文は新 明朝、日本語文は新明朝略字とする。各文字のポイント數は次の通りである。 論文題目 - 新明朝(略字) 20、 太字、 中央寄 副題 - 新明朝(略字) 15、 中央寄せ 筆者名 - 新明朝(略字) 12、 右寄せ 目次 - 新明朝(略字) 12、 太字、 中央寄せ 目次の內容 - 新明朝(略字) 10、 行間隔 140、 中央寄せ 大見出し - 新明朝(略字) 15、 太字、 行間隔 155、 中央寄せ 本文 - 新明朝(略字) 10.5、 行間隔 155、 兩側混合 引用文 - 新明朝(略字) 10、 行間隔 155、 兩側混合、左余白:ハングル2002は20、ハ ングル97は4 脚注 - 新明朝(略字) 9、 行間隔 130、 兩側混合。 表 - 行間隔 140 その他の設定は<『日本文化學報』 論文作成要領>を參照する。 4. <參考文獻>の後に600字未滿の要旨(英文あるいは日本語)を記入する。 5. 要旨のすぐ下にその論文を理解するために必要なキーワード(6~10語)を要旨と同一の言語で明 記する。 6. 原稿上の図表やイメージ資料は必要に応じて原本を添付する。 7. 注は脚注とし、必ず引用․參考したページを明記する。 8. <參考文獻>は、筆者名(年度)、「論文名」(または『著書名』)、揭載紙と卷号、發行所の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93 順とする。最後に參考あるいは引用した頁を必ず明記する。 例) 西隈俊哉(2001), 「-AS使役に關する一考察」, 『日本文化學報』11, 韓國日本文化 學會, 110面. 影山太郞(1993), 『文法と語構成』, ひつじ書房, 212頁. Stein, Dieter(1995), “Subjectivity and Subjectivisation” : Cambridge University Press. p.113 9. <參考文獻>の配列は韓國語、日本語、英語の文獻の順とし、筆者名を基準にして、それぞれ アイウエオ、abc順にする。 10. 原稿はe-mailで提出する。 11. 原稿の表紙は、所定の別紙(論文投稿用)に論文タイトル(英文タイトル倂記)、筆者名(漢字、 ローマ字式表記倂記)、筆者の勤務先(所屬)․專攻․住所․電話番号․e-mail、口頭發表 した場所と發表日、投稿日を明記する。 12. 投稿論文の査讀に所要される費用は学会で負担する。但し、揭載が確定した場合は執筆者は 所定の揭載料を負担する。 13. 揭載された論文に對しては學會誌2部を贈呈する。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94 『日本文化學報』 論文作成要領 【編集用紙】 <使用者定義 幅180, 縱255> 上20(19.99), 下10, ヘッダー13(12.99), フッター13(12.99), 左23, 右23, 製本0 【論文題目】 韓國日本文化學會(新明朝(略字) 20, 太字, 中央寄せ) 【副 題】 韓國日本文化學會(新明朝(略字) 15, 中央寄せ) ** 4行空け (副題がない場合は5行空け) ** 洪 吉 東(新明朝(略字) 12, 右寄せ) 【筆者名】 ** 2行空け ** 目 次 (新明朝(略字) 12, 太字, 中央寄せ) 新明朝(略字) 10 , 行間隔 140 ** 2行空け ** 【大見出し】1. 硏究の目的と方法 (新明朝(略字) 15, 太字, 行間隔 155, 中央寄せ) ** 1行空け ** 【本 文】 この論文は上代日本語の.....大野氏は次のように述べている (新明朝(略字) 10.5, 行間隔 155, 兩側混合) ** 1行空け ** 〔引用文〕上代において..... (新明朝(略字) 10, 行間隔 155, 兩側混合, 左余白:ハングル2002は20、ハングル97は4) ** 1行空け ** このように、上代日本語の..... ** 2行空け ** 2. 上代日本語の特徵 (新明朝(略字) 15, 太字, 行間隔 155, 中央寄せ) ** 1行空け **(小見出しがある場合, 小見出しと本文の行間は空けない)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95 【脚 注】 ――――――――― 1) これについて ****は次のように論じている。(新明朝(略字) 9, 行間隔 130, 兩側混合) (引用及び參考資料については發行年度とページ數を明記する。) ** 2行空け ** 5. 結び ** 1行空け ** 本論文では.... ** 1行空け ** 【參考文獻】 (新明朝(略字) 15, 太字, 行間隔 155, 中央寄せ) ** 1行空け ** ․影山太郞(1993) 『文法と語構成』, ひつじ書房, 212頁。(新明朝(略字) 10, 行間隔 155, 兩側混合) * 筆者名(年度) 論文名(あるいは著書名), 揭載誌 卷 号, 發行所〉の順に配列する。 * 文獻配列は韓國語、日本語、英文の文獻の順とし、筆者名を基準にして、それぞれ가나 다、アイウエオ、abc順にする。 * 參考あるいは引用したページは必ず明記する。 ** ページを変える ** 【要 旨】(新明朝(略字) 15, 太字, 行間隔 155, 兩側混合) ** 6行空け ** 本論は、上代日本語を通して...... (新明朝(略字) 10, 行間隔 155, 兩側混合) * 作成言語 : 英語あるいは日本語 *分 量 : 1枚前後 ** 1行空け ** 【キーワード】論文を理解するために必要なキーワード(6~10語)を要旨と同一の言語で明記。(新 明朝(略字) 11, 行間隔 155, 兩側混合) ** 2行空け ** [筆者連絡先] 住 所: 電 話: e-mail :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96 學會發表に關する規定 1. (發表資格) 口頭發表者の資格は本學會の正會員で、大學院生、敎員経歷5年以上の者、 または理事會の推薦を受けた者とする。但し、修士課程の大學院生の場合は、指導敎授か海 外支部長の推薦が必要である。提出した發表要旨文を該當の分科で審査の上、採擇の可否 を決める。 2. (發表申請) 該當の分科理事や學術理事に口頭で申請可能だが、できるだけ學會ホームペー ジ上の申請樣式を利用する。 3. (申請期限) 春季大會は3月15日、秋季大會は9月15日までとする。 4. (發表要旨文) a. <發表要旨文>は韓国語または日本語で作成する。 b. 分量はA4用紙4枚(橫書)以內とする。 c. 最後に發表者の勤務先․專攻․住所․電話番号․e-mailアドレスを記入する。 d. 春季大會は3月31日、秋季大會は9月30日までに提出する。 e. 原稿はe-mail(File添附)で該當の分科理事か學術理事に提出する。 f. 發表要旨文の提出とともに發表要旨集の印刷費として10,000ウォンを學會の口座に入金す る。但し、海外會員の場合は、發表の當日受付に支拂うこともできる。 <學會の口座> 外換銀行 611-017701-086 朴喜南(日本文化學會) (日本) 郵便局 00920-9-147169 韓國日本文化學會 日本支部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97 海外理事に關する規定 1. (資格) 本學會に1回以上出席して硏究發表した日本の學者の中で、本學會の硏究活動に關 心を持ち、ご協力してもらえる方。 2. (活動) (1) 日本國內において本學會を紹介し、學會の活動內容や情報などを提供 (2) 韓國國內で行われる年二回の硏究發表會で發表を希望する人の窓口役割 (3) 學會誌揭載對象論文の審査 (4) 日本國內の會員の管理 3. (任期) 2年單位とし、本人の同意を得て延長可能。 4. (任命) 理事會で協議․決定し、會長が委囑する。 5. (施行) 本內規は、1997年5月5日から施行される。 海外支部に關する規定 本學會のすべての會員は、「國內會員」(韓國內に所屬や勤務先のある內國人や外國人)と「海 外會員」(外國に所屬や勤務先のある外國人や內國人)とに分け、加入の內容により次のように分 類される。ただし、日本での留學生は國內會員とする。 1. (正會員) 本學會の會員として登錄を濟ませた者。但し、3年間の會費を未納する場合は、正會 員の資格を失う。 2. (準會員) 會員の中で、正會員の資格を失った者。 3. (終身會員) 理事會の同意を得た者で、所定の會費(30万ウォン)を納付した會員。 4. (特別會員) 本學會の發展に貢獻した人の中で、理事會の推薦による方。 5. (名譽會員) 本學會の招聘講演者の中で、理事會の推薦による方。 6. (団体會員) 所定の會費(年8万ウォン)を納付する國內外の學術団体および機關。但し、海外 (日本)の「學術誌交流団体」も団体會員の範囲に含む。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98 會員規定 1. 本學會は、學問を通した國際交流と學會活動の國際化のために、海外に支部を置くことができ る。 2. 海外支部は、本學會の趣旨に贊同し、積極的に協力してくれる海外理事を中心に結成する。 3. 海外支部の運營は支部長が總括し、會員も各支部で管理する。 4. 海外支部長は、理事會の推薦により會長が委囑する。 5. 海外支部長の任期は2年で、本人の同意により連任も可能である。 6. 海外支部は定期的に硏究會を開催し、その結果を本學會に報告する。 7. 海外支部では、本學會の全國大會(年2回)での發表者を推薦する。 8. 海外支部からの推薦發表者は1年間の會費を免除する。 9. 本學會では海外支部に投稿論文の査讀を依賴することができる。 Journal of Japanese Culture 399 『日本文化學報』 發行計畵 ∙ 投稿 依賴 (5月初․11月初) ∙ 論文原稿 締切り (2月末․5月末․8月末․11月末):1次 提出 ∙ 論文審査 (3月․6月․9月․12月) ∙ 審査委員審査結果 通知 (3月中旬․6月中旬․9月中旬․12月中旬) ∙ 論文修正原稿 締切り (3月末․6月末․9月末․12月末):2次 提出 ∙ 編集委員會 最終揭載可否 通知 (4月初․7月初․10月初․1月初) ∙ 1次校正:筆者 ∙ 2次校正:編集委員會 ∙ 發行 (5月31日․8月31日․11月30日․2月28日) Journal of Japanese Culture 400 各 種 樣 式 〔諸樣式は學會のホームページにある。ここでは一部の樣式のみを提示する。〕 <樣式總目次> No 樣式番号 樣 式 名 担當理事 用途 1.學會-01k 會員加入申請書 總務 國內會員用 2.學會-01j 會員加入申請書 總務 海外會員用 3.學會-02k 會員學術情報 總務 國內會員用 4.學會-02j 會員學術情報 總務 海外會員用 5.學會-03j 海外団体會員加入申請書 總務 6.學會-04j 海外団体會員確認書 總務 7.學-01k 學會發表申請書 學術 國內會員用 8.學-01j 學會發表申請書 學術 海外會員用 9.學-02k 學會發表推薦書 學術 國內會員用 10.學-02j 學會發表推薦書 學術 海外會員用 11.學-03j 學會參加予定書 學術 海外會員用 12.學-04k 發表申請受理結果書 學術 國內會員用 13.學-04j 發表申請受理結果書 學術 海外會員用 14.編-01 口頭發表論文審査意見書(分科編集委員用) 編集 15.編-02 口頭發表論文審査評価書(分科審査用) 編集 16.編-03k 論文審査評価書(責任審査委員用) 編集 國內用 17.編-03j 論文審査評価書(責任審査委員用) 編集 海外用 18.編-03hn 論文審査評価書(交流學會審査用) 編集 交流學會用 19.編-04 論文審査結果書(編集委員會用) 編集 20.編-05 最終審査結果書(編集委員會用) 編集 21.編-06k 論文審査評価書(再審用) 編集 國內用 22.編-06j 論文審査評価書(再審用) 編集 海外用 23.編-07 再審論文審査結果書(編集委員會用) 編集 Journal of Japanese Culture 401 <會員加入 申請書> 樣式 <學會-01k> 會員加入 申請書 (國內會員用) 姓 名 漢 字 英 字 生年月日 性 別 男( ) 女( ) 勤務處․所屬 職 位 敎授( ) 講師( ) 大學院生/博士課程( 其他( ) 專攻分野 細部專攻 郵便番號 ( 住 連 絡 處 )․碩士課程( ) - ) 所 電話番號 (FAX) 携帶電話 e-mail (其他 加入學會名 等) 學會活動 上記와 같이 貴 學會의 會員 加入을 申請합니다. 200 . . . 申請人 : 推薦人 : 韓國日本文化學會長 貴下 Journal of Japanese Culture 402 <學會發表申請書> 樣式 <學-01k> 學會發表 申請書 (國內會員用) 大會名 韓國日本文化學會 200 發 表 者 名 年度 (春季․秋季) 國際學術硏究發表會 所屬(勤務處) 職 位 敎 授 講 師 大學院生 博士課程 碩士課程 (漢字) (英字) □ □ □ □ 其他 ( ) 論 文 題 目 發表希望分科 日本語學( ) 日本近代文學( ) 日本古典文學( ) 日本學( ) 外國(日本) ( ) 日本比較文化學會 學會誌 學術交流學會誌 『比較文化硏究』<日本語․日本文化>篇 投稿 希望 住所 및 連絡處 住所(連絡處) 電話番號 携帶Phone E-mail <참고사항> (1) 發表者는 本學會의 正會員으로서, 大學院生인 경우는 碩士課程 在學中인 者 以上으로 한다. 단 碩士 課程에 在學中인 경우는 指導敎授나 海外支部長의 推薦書가 필요하며, 發表要旨文을 해당 分科에서 審査 후 採擇 與否를 決定한다. (2) 外國 學術交流學會誌 投稿 希望者는 國內會員이 對象이 되며, 交流學會側의 投稿要請希望者數 범위 내에서, 本學會의 內部 選定 基準에 의하여 對象者를 選定 推薦한다. (3) 發表者는 發表要旨集 印刷費로 10,000원을 學會에 納付한다. (4) 기타 자세한 內容은 學會 홈페이지(www.bunka.or.kr)의 <알림판>을 參照할 것. 200 年 月 日 韓國日本文化學會 貴中 Journal of Japanese Culture 403 <學會發表 推薦書> 樣式 <學-02k> 學會發表 推薦書 (國內會員用) 大會名 韓國日本文化學會 200 年度 (春季․秋季) 國際學術硏究發表會 發表希望者名 所 (漢字) 屬 大學校 大學院 碩士課程 專攻 (英字) 推 薦 者 發 表 論 文 題 目 指導敎授: 勤務處: 推 薦 內 職位: 容 上記者에 대한 貴 學會에서의 發表를 위와 같이 推薦하는 바입니다. 推薦者 署名 200 年 月 日 韓國日本文化學會 貴中 Journal of Japanese Culture 404 (責任審査委員用) 樣式 <編-03k> 論文 審査 評價書 심사위원 이 름 논 문 제 소 속 대학 학과 목 심사 심사 내용 항목 내용의 적절성 심 사 내용의 독창성 기 준 형식의 적절성 전개의 종합 평가 판정 E ①점 ․연구 주제, 방법, 결과 등의 독창성 ․일본어 또는 영문 초록, 참고문헌, 표, 그림 양식 등의 일본문화학보 논문 투 고 요령의 준수 정도 ․일본/일본어 분야 논문으로서의 구성 및 내용 전개 방식의 적합성 연 구 방법의 적절성 ․연구 문제 제기의 적절성 ․연구 설계의 적절성 ․연구 결과 및 해석의 적절성 ․매우 우수함. ․수정이 거의 필요 없음. 게 재 판 정 등 급 B C D ④점 ③점 ②점 ․일본어학/일본문학/일본학/일본어교육 이론과 실제에 관한 내용 적절성 ․언어학, 문학 및 인접 학문에 관한 논 문인 경우 일본/일본어 관련의 적절성 논리성 (점수) (23~25) 최종 A ⑤점 ․우수함. ․보통임 ․미흡함. ․매우 미흡함. ․수정사항이 비 ․수정사항이 비 ․수정후 재신청을 ․게재 불가한 교적 적고 사소 교적 많고 수정 요하는 논문임. 논문임. 한 것들임. 후 확인을 요하 는 것들도 있음. (20~22) (15~19) (10~14) (5~9) 수정후 게 재 수정후 재 심 게재 보류 게재 불가 * 각 심사항목의 점수를 합산하여 점수란에 총점을 기입하시고 최종판정란에 ○ 표시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 최종 판단을 내리시기 전에 종합평가란의 기술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200 년 월 일 韓國日本文化學會 編輯委員會 貴下 Journal of Japanese Culture 405 (責任審査委員用) 樣式 <編-03-1k> <論文 審査 評價書 別紙> ※ 具體的 指摘事項 및 修正․加筆 要求事項을 記入하시오. 논문 제목 총 평 수 정 요 구 사 항 韓國日本文化學會 編輯委員會 貴下 Journal of Japanese Culture 406 2008年度 學會日程表 實行豫定日 活 動 內 容 擔當理事 2. 15(金) 消息誌08-1号(通算49号) e-mail 發送 2. 29(金) 『日本文化學報』第36輯(2月号)發刊 및 學振登錄 編集 3. 7(金) 第6回 韓國日本學聯合會發表申請마감 分科 3. 10(月) 『日本文化學報』第37輯(5月号)原稿마감 3. 15(土) 第30回 際學術大會發表申請마감/常任理事會/編集理事會 3. 31(月) 4. 7(月) 4. 12(土) 4. 26(土) 第30回 國際學術大會發表要旨마감 消息誌08-2号(通算50号) e-mail 發送 常任理事會 第30回 國際學術大會 涉外/總務 分科 分科/總務,編集 學術 涉外/總務 總務 學術 5. 3(土) 常任理事會/編集理事會 5. 30(金) 第6回 韓國日本學聯合會發表要旨마감 分科 5. 31(土) 『日本文化學報』第37輯(5月号)發刊 및 學振登錄 編集 5. 31(土) 『日本文化學報』第38輯(8月号)原稿마감 6. 2(月) 消息誌08-3号(通算51号) e-mail 發送 涉外/總務 常任理事會/編集委員會 總務/編集 6. 14(土) 7. 11(金)~12(土) 第6回 韓國日本學聯合會(第31回 國際學術大會) 總務/編集 分科 聯合 7. 19(土) 編集委員會/理事修練會 8. 31(日) 『日本文化學報』第38輯(8月号)發刊 및 學振登錄 編集 8. 31(日) 『日本文化學報』第39輯(11月号)原稿마감 分科 9. 12(金) 學術誌發行支援申請 總務 9. 13(土) 9. 13(土) 9. 30(火) 第32回 學術大會發表申請마감 擴大理事會/編集委員會 第32回 學術大會發表要旨마감 編集/總務 分科 總務/編集 學術 10. 6(月) 消息誌08-4号(通算52号) e-mail 發送 涉外/總務 10. 11(土) 常任理事會/編集委員會 總務/編集 10. 25(土) 第32回 學術大會 學術 11. 8(土) 常任理事會 總務 11. 30(金) 『日本文化學報』第39輯(11月号)發刊 및 學振登錄 編集 11. 30(金) 『日本文化學報』第40輯(2月号)原稿마감 分科 12. 13(土) 常任理事會/編集委員會 2009. 1. 10(土) 常任理事會 總務/編集 總務 2. 6(金) 消息誌09-1号(通算53号) e-mail 發送 2. 28(土) 『日本文化學報』第40輯(2月号)發刊 및 學振登錄 涉外/總務 編集 2. 28(土) 『日本文化學報』第41輯(5月号)原稿마감 分科 Journal of Japanese Culture ∙第 39 輯∙ 發行日 2008년 11월 30일 發行處 韓國日本文化學會 (300-150) 大韓民國 大田廣域市 東區 貞洞 31-1 新榮BLDG. 201號 Tel (042)488-9155 Fax (042)488-9156 <학회계좌번호> 외환은행 611-017701-086 박희남(일본문화학회) (日本)郵便局 00920-9-147169 韓國日本文化學會 日本支部 製作處 메트로문화사 Tel (042) 488-9155 Fax (042) 488-9156 email : [email protected] ※비매품 ⓒ 韓國日本文化學會2008 Printed in korea ISSN 1226-3605 * 이 책은 2007년도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에 의하여 출판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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