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2 部 -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翰林大學校 日本學硏究所 國際學術 SYMPOSIUM
The Art of Empire and Cultural Apparatus
: Visiual and Litercy Media in Cultural Power
帝國의 藝術과 文化裝置
- 視覺과 文字의 文化權力 -
■ 日時 年 月 日 金 ~ 日 土
■ 場所 翰林大學校 國際會議室
■ 主催 翰林大學校 日本學硏究所
■ 後援 韓國硏究財團
國際交流基金 ソウル日本文化センタ
: 2015
:
:
:
8
28
(
)
29
(
)
This work was supported by the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 Grant funded by the Korean Goverment. (2015S1A8A4A01022458)
The Art of Empire and Cultural Apparatus
: Visiual and Litercy Media in Cultural Power
帝國의 藝術과 文化裝置
- 視覺과 文字의 文化權力 -
4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행 사 일 정
2015년 8월 28일 (금)~29(토) / 한림대학교 국제회의실 / *동시통역 (최수나, 허지연)
28일(금)
09:30
접
수
10:00
개
회
개회사
10:10
10:50
11:30
12:00
서정완 한림대 일본학연구소장
제1부
사회 / 임성모 연세대
발표1
발표2
토 론
중 식
김용철 고려대
식민지 대만 관전(官展)의 대만 거주 일본인 심사원
가와타 아키히사 치바공업대
‘대동아’의 圖像學
이나바 마이 광운대
한림대 교직원식당
제 2 부, 제 3 부
13:00
발표3
내지와 외지를 잇는 서적 네트워크와 한반도의 소매서점
: 일본출판배급주식회사 시대를 중심으로
13:40
14:20
14:50
15:00
15:40
16:20
16:50
17:00
발표4
토 론
휴 식
발표5
발표6
토 론
휴 식
사회/ 송석원 경희대
일본어로 재화(再話)된 식민지기 대만의 高砂族 전설
히비 요시타카 나고야대
우이신 국립중정대
신승모 동국대
오윤정 서울대
백화점 동양품부와 제국의 ‘동양취미’
히라세
레이타
히메지시교육위원회
이미지(像)의 힘 : 근대 일본에서의 像의 보급과 일탈
강태웅 광운대
종합토론
참가자 전원
29일(토)
제4부
09:30
10:00
발표7
발표8
사회 / 조관자 서울대
식민지 박람회의 예술공연 : 퍼포먼스, 이벤트, 경합
파인더 속의 실험국가
: 일본의 전위사진과 보도사진이 표상한 만주국
10:30
발표9
11:00
휴
11:20
종합토론
13:00
폐
만주의 재발명 : 제국일본의 북만주 공간표상과 투어리즘
홍선영 한림대
최재혁 성신여대
조정우 한림대
식
회
참가자 전원
행사일정 5
PROGRAM
月 28日(金) ~ 29日(土)/ 翰林大學校 國際會議室
2015年 8
28日(金)
09:30
10:00
受 付
会
会の辞
開 禎完 翰林大 日本学研究所長
開
徐
第 1 部 10:10
10:50
発表
発表
11:30
討
12:00
中
1
2
植民地台湾官展の台湾居住日本人審査員
「大東亜」の図像学
金容澈 高麗大
河田明久 千葉工業大
論
稲葉真以 光云大
翰林大教職員食堂
食
会/ 宋錫源 慶熙大
司
第 2 部, 第 3 部 13:00
13:40
発表
発表
会/任成模 延世大
司
3
4
内地ー外地を結ぶ書者のネットワークと朝鮮半島の小売書店
日本語で再話された植民地期台湾高砂族伝説
日比嘉高 名古屋大
呉亦昕
説 の とその内容をめぐって
国立中正大
─『生蕃伝 集』 刊行
14:20
討
14:50
Tea break
15:00
5
15:40
発表
発表
論
6
16:20
討 論
16:50
Tea break
17:00
辛承模 東国大
貨
と 国の「東洋趣味」
像(イメージ)の力─近代日本における像の普及とその逸脫
日本百 店東洋品部 帝
11:00
11:20
13:00
会 / 趙寬子
司
10:30
姜泰雄
光云大
参加者全員 第 4 部
10:00
平瀬礼太 姫路市教育委員会
総合討論
29日(土)
09:30
吳允禎 ソウル大
ソウル大
発 表 7 植民地博覧会の芸術公演―パフォーマンス、イベント、競合
洪善英 翰林大
発 表 8 ファインダーの中の実験国家―日本近代写真と満洲国 崔在爀 誠信女子大
発 表 9 満州の再発明 ― 帝国日本の北満州空間表象とツーリズム
趙廷祐 翰林大
Tea break
総合討論
閉 会
参加者全員 6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목
차
第 1 部
□ 제 1 발표 : 식민지 대만 관전(官展)의 대만 거주 일본인 심사원 / 김용철 (고려대) ······················· 9
□ 제 2 발표 : ‘대동아’의 圖像學 / 가와타 아키히사 (치바공업대) ·················································· 21
■ 토
론 : 이나바 마이 (광운대) ····························································································· 33
第 2 部
□ 제 3 발표 : 내지와 외지를 잇는 서점 네트워크와 한반도 소매 서점 / 히비 요시타카 (나고야대) ·· 41
□ 제 4 발표 : 일본어로 재화(再話)된 식민지기대만 高砂族 전설 / 우이신 (국립중정대) ··················· 69
■토
론 : 신승모 (동국대) ······································································································ 87
第 3 部
□ 제 5 발표 : 일본백화점 동양품부와 제국의 ‘동양취미’ / 오윤정 (서울대) ···································· 91
□ 제 6 발표 : 이미지(像)의 힘 - 근대 일본에서의 像의 보급과 일탈 /
히라세 레이타 (히메지시교육위원회) ····································································· 107
■토
론 : 강태웅 (광운대) ·································································································· 133
■ 종 합 토 론 : 참가자전원 ········································································································· 135
第 4 部
□ 제 7 발표 : 식민지 박람회의 예술공연 – 퍼포먼스, 이벤트, 경합 / 홍선영 (한림대) ················· 139
□ 제 8 발표 : 파인더 속의 실험국가
- 일본의 전위사진과 보도사진이 표상한 만주국 / 최재혁 (성신여대) ······················ 169
□ 제 9 발표 : 만주의 재발명 – 제국 일본의 북만주 공간표상과 투어리즘 / 조정우 (한림대) ········ 227
■ 종 합 토 론 : 참가자전원 ········································································································· 251
■ 참가자 PROFILE ······················································································································ 257
목차 7
目
次
第 1 部
□ 第 1 發表 : 植民地台湾官展の台湾居住日本人審査員 / 金容澈 (高麗大) ········································ 9
□ 第 2 發表 :「大東亜」の図像学 / 河田明久 (千葉工業大) ································································· 21
■ 討 論: 稲葉真以 (光云大) ····································································································· 33
第 2 部
□ 第 3 發表 : 内地ー外地を結ぶ書者のネットワークと朝鮮半島の小売書店 / 日比嘉高 (名古屋大) ··················· 41
□ 第 4 發表:日本語で再話された植民地期台湾高砂族伝説
-『生蕃伝説集』の刊行とその内容をめぐって / 呉亦昕 (国立中正大) ··································· 69
■ 討 論:辛承模 (東国大) ········································································································ 87
第 3 部
□ 第 5 發表:日本百貨店東洋品部と帝国の「東洋趣味」/ 吳允禎 (ソウル大) ··········································· 91
□ 第 6 發表: 像(イメージ)の力─近代日本における像の普及とその逸脫 / 平瀬礼太 (姫路市教育委員会) ········· 107
■ 討 論: 姜泰雄 (光云大) ············································································································ 133
■ 綜合討論: 參加者全員, ··················································································································· 135
第 4 部
□ 第 7 發表 : 植民地博覧会の芸術公演―パフォーマンス、イベント、競合 / 洪善英 (翰林大) ··········· 139
□ 第 8 發表 : ファインダーの中の実験国家―日本近代写真と満洲国 / 崔在爀 (誠信女子大) ·· 169
□ 第 9 發表 : 満州の再発明 - 帝国日本の北満州空間表象とツーリズム / 趙廷祐 (翰林大) ············· 227
■ 綜合討論 ········································································································································· 251
■ 參加者 PROFILE ··························································································································· 257
식민지 대만 관전(官展)의 대만 거주 일본인 심사원 9
식민지 대만 관전(官展)의
대만 거주 일본인 심사원
김용철
고려대 일본글로벌연구원
10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식민지 대만 관전의 대만 거주 일본인 심사원
1. 머리말
1927년 일본의 식민지 대만에 대만미술전람회(이하 臺展)가 설치됨으로써 대만 미술계는 새
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전람회 설치 자체는 제국 관전의 이식이라는 측면이 강하지만, 그
것은 대만의 미술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관념산수를 비롯한 전근대적 서화 중심의
미술이 적극적인 서양화의 도입과 전통회화의 변모를 초래하게 되었고, 미술의 제도화에도 커다
란 전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미술가 개인 차원에서 보자면 대전은 미술학교가 부재한 상황에
서 미술가로 데뷔하는 등용문이었을 뿐 아니라, 미술가로서 사회적 명예와 지위를 획득하는 통로
였으며 그것은 경제적 신분 상승의 통로이기도 하였다.
대만 관전은 대전시기와 총독부미술전람회(이하 府展) 시기로 나뉜다. 시기별 운영주체와 성
격의 차이는 있지만, 대만 총독부의 절대적인 영향력과 제국 일본의 미술계와의 긴밀한 영향관계
라는 측면에서는 공통점을 가진다. 대전이 처음 설치되었을 때 그것을 주최한 대만교육회는 대만
총독부의 관변 단체였던 데 비해 부전은 총독부가 직접 주최한 미술전람회다.1) 심사원의 선정이
나 전람회 운영에 미친 총독부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고, 미술전람회가 가지는 행사의 권위나 입
상한 미술가들의 실력보증에 이르기까지 식민지 대만의 최고통치기관이었던 총독부의 존재가 개
입되어 있었다. 그에 비하면 대만 관전이 일본미술계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 사실은 관전에 출품
된 작품들의 경향이나 심사원의 면면 등 전람회의 내용적인 측면과 관련이 있다. 일본에서 수업
기를 거치거나 활동하던 대만 거주 일본인 심사원들이 심사원으로 선정되었고 일본 본토에서 활
동하던 일본인 미술가가 심사원으로 파견되었다. 미술학교가 부재한 상황에서 미술가를 지망한
대만인들은 일본에 유학함으로써 미술가로 성장할 수 있었고 그들 가운데 일부는 심사원으로 선
정되었다. 일본미술계에 종속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글에서는 대만 관전에 심사원으로 활동한 대만 거주 일본인 미술가들의 역할에 대해 규명
1) 대만교육회는 일본어보급을 위한 편찬, 교무에 주력한 교육자 단체로서 1898년 국어연구회가 모태가 되어 1901
년 결성되었다. 陳虹彣, 「日本統治下台湾における国語講習所用国語教科書の研究」, 『東北大学大学院教育学研究
科研究年報』54-2(2006), pp.63-89
식민지 대만 관전(官展)의 대만 거주 일본인 심사원 11
하려 한다. 식민지 대만의 관전에서 대만 거주 일본인 심사원의 존재가 중요한 것은 그들의 정체
성 때문이다. 그들은 제국의 식민정책을 구현한 제국의 대리인이면서 식민지 대만에 거주하며 대
만의 미술계를 대표하는 이중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 또한 1927년 대전의 설치에서 1938년 부전
으로의 이행, 1945년 종전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위상은 흔들림없는 식민지 관전의 심사원이었다.
심사원의 수가 늘어나거나 일본인 심사원의 파견이 있었지만, 심사원으로서 부동의 위치를 점하
였던 그들은 식민지 대만의 미술계를 명실상부한 문화권력이었던 것이다.2)
식민지 대만의 관전에서 대만 거주 일본인 심사원의 존재가 가진 중요성에 비하면 기존연구
에서는 중심주제로 부각된 적이 없고 식민지 관전의 일본인 심사원의 범주에서 다루어지거나 대
만 관전 연구에서 한 부분으로 언급되는 정도였다.3) 1980년대부터 본격화된 대만 관전의 연구
또한 미술운동의 관점에서 규명하려는 시도가 한 동안 주류를 이루었다.4) 대만 미술의 정체성에
주목한 이와 같은 연구를 대체하며 객관적인 자료를 토대로 한 연구는 1980년대 말이후 활발해
졌다.5) 이하 본론에서는 대만 관전이 설치된 이후 대전에서 부전으로 전환되고, 관전이 마지막으
로 열렸던 1943년까지의 시기를 통하여 그들의 역할과 당시 그들의 작품에 드러난 경향을 중심
으로 논하고자 한다.
2. 제국 관전 이식의 주역
식민지 대만에서 관전이 설치된 1927년은 신문화운동이 본격화된 시기다. 1910년대 중반까지
이어진 고사족(高砂族)의 저항이 소강상태에 들고 1920년대 전반을 지나며 중국대륙의 영향으로
백화문(白話文) 사용이 확산되었으며 문학이나 연극, 음악 등의 분야에서 새로운 문물이 대량으
로 수용되었다. 새로운 문물의 수용에서 일본이 중요한 경로였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지만, 이와
같은 움직임은 새로운 단체의 결성 등을 통하여 운동의 성격을 띠며 확산되었다.6)
대만 관전의 설치과정에는 대만 거주 일본인 미술가를 포함한 유력 일본인 인사들이 중요한
2) 中村儀一, 「台展, 鮮展と帝展」, 『京都教育大学紀要』75(1989), pp.259-276
3) 中村儀一, 「石川欽一郎と塩月桃甫」, 『京都教育大学紀要』76(1990), pp.177-193; 児島薫, 「朝鮮美術展覧会, 台湾
美術展覧会の「内地」からの審査員について」, 『官展にみる近代美術』(福岡アジア美術館・府中美術館・兵庫県立美
術館・美術館連絡会議, 2014), pp.192-194
4) 謝里法, 『臺灣美術運動史』(藝術家出版社, 1987)
5) 顔娟英, 「臺灣早期西洋美術的發展(一)」, 『藝術家』168(1989.5), pp.142-165 및 顔娟英, 「臺灣早期西洋美術的發
展(二)」, 『藝術家』169(1989.6), pp.140-160
6) 謝里法, 앞의 책, pp.10-72
12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역할을 수행하였다. 1926년 연말경부터 수 차례 회합을 통해 관전의 설치를 건의하기로 한 그들
은 대만총독부에 그 내용을 전달하여 관철시켰다.7) 관전 설치건의에 참여한 일본인 미술가들 즉,
이시카와 긴이치로(石川欽一郎), 시오츠키 도호(塩月桃甫), 고바라 코토(郷原古統), 그리고 당시
대만 총독 카미야마 만노신(上山満之進)의 출신지역이 모두 나가노현(長野県)이었던 사실도 특기
할만하다.8) 식민지 문화정책의 일환이었던 대만 관전의 설치에서 미술가들의 건의가 중요한 촉
발요인이 되었고 지연으로 묶인 관련자들의 연대감 역시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하였던 것으로 추
측된다.
물론 대만 총독부 역시 관전 설치 과정에서 수동적인 위치에 있지만은 않았다. 미술계를 비롯
한 문화 분야 유력 인사들의 건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역사와 문화 분야에서 취약한 대만지
역에 관전이 설치되면 정신문화의 발달을 기대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카미야마총독을 비
롯한 총독부 인사들이 그 내용을 수차례 언급하였다. 예를 들면 대전이 처음 설치되고 실제 운영
책임자였던 대만총독부 문교국장의 글에도 드러나 있다. 당시의 문교국장 이시쿠로 히데히코(石
黑英彦)는 「대만미술전람회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대전 설치의 목적을 밝혔다.9) 글에 따르면 대
만 거주 미술가들에게 감상연구의 기회를 제공하고 공중의 미적 사상 함양과 취미를 고취시키는
것이 대전 설치의 목적이었다. 그가 언급한 대만 거주 미술가들이 주로 일본인 미술가들을 가리
키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대전의 개설이 일차적으로는 대만 거주 일본인 미술가들에게
활동무대를 제공하는 의미를 가졌던 것이다. 아울러 식민통치의 성과를 과시하는 방편으로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점을 강조한 점으로 보아 대전은 철저하게 식민지 문화창달의 장치로서
설치된 것이었다. 관전의 효과를 강조하고 관전을 식민통치가 초래한 성과의 표지로 인식한 점은
근대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식민지 관전이 가지는 의미의 전형이다.
이는 조선이나 만주국과 같은 일본의 여타 식민지에 관전이 설치되는 과정과도 비교되는 점
이다. 식민지에 거주하는 유력 일본인 미술가들의 건의가 수용되어 관전이 설치된 점은 조선미전
의 경우와 마찬가지다.10) 하지만, “조선미술의 발달을 돕고 공중의 취미를 증진시키기 위해” 설
치된 조선미전의 경우와는 달리 대만의 경우는 대만 거주 일본인 미술가들의 존재를 강하게 암
시한 점에서 미묘한 차이를 보여준다.11)
7) 「臺灣美術展覽會號, 『臺灣日日新報』1927.10.28
8) 王白淵, 『學藝誌 藝術篇』臺灣省通志稿 卷6(1958), p.26
9) 石黒英彦, 「台湾美術展覧会に就いて」, 『台湾時報』(1927.5), pp.25-26
10) 이중희, 「조선미술전람회 창설에 관하여」, 『한국근대미술사학』7(1996), pp.29-56
11) 셰리파(謝里法), 「식민시대 대만 관전과 재야 단체전의 비교」, 『한국근대미술사학』15(2005), pp.71-81-85
식민지 대만 관전(官展)의 대만 거주 일본인 심사원 13
사실 식민지 대만의 관전이 처음 설치되는 과정은 후일 심사원으로 활동한 일본인 미술가들
의 존재가 부각되는 과정이었다. 당시 그들은 도화교사로 활동하고 있었고 총독부와도 긴밀한 관
계를 유지하고 있었다.12)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던 이시카와 킨이치로는 도쿄전신학교(東京電
信學校)를 졸업하고 코시로 타메시게(小代為重), 카와무라 키요오(川村清雄) 등의 영향을 받은 그
는 영국에 유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00년 북청사변 당시 중국 주재 일본 대사관의 통역관
으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육군 참모본부로부터 표창을 받기도 했던 그는 중국 체류 기간 동안 습
득한 중국어실력으로 대만 총독부의 통역관으로 부임하여 대만사범학교 전신인 국어학교에 부임
하였다.13) 1916년 일단 귀국하여 한 동안 일본에서 활동한 후 1924년 다시 대만으로 가 1932년
귀국할 때까지 거주하였다. 두 번째 대만행은 지인이었던 대만사범학교 시보타 쇼키치(志保田鉎
吉) 교장의 권유에 따른 결과로 전한다. 합계 10여년에 걸쳐 대만에 거주한 그가 ‘대만 미술운동
의 아버지’로 불린 사실이나 그의 가르침을 받은 대만인 제자들이 도쿄미술학교에 유학하여 대만
미술계의 지도자로 성장해간 사실 또한 대만 근대미술에 미친 그의 영향력을 웅변해준다.
이시카와에 비하면 시오츠키 토호는 서양의 야수파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은 화가로 특이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1912년 도쿄미술학교 도화사범과를 졸업한 그는 미술학교 교사와 문전 입선
등의 경력을 쌓은 후인 1921년 대만으로 갔다. 대만행의 이유는 명확하지 않으나 이후 타이베이
(臺北)고등학교와 타이베이(臺北) 제일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기이한 복장과 기행으로 유명했
던 그는 타이베이고등학교 재직 당시 홍갈색 양복을 입고 대머리를 가리기 위해 터키모자를 쓰
고 다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또한 식민지 관료적 분위기에 반대하였던 그는 자유주의사상을
제창하고 고산족의 제복 착용 및 황민화 교육 군국주의 행군 등에도 반대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시카와와 시오츠키가 서양화가로서 대만 관전의 심사원을 맡았던 데 비해 고바라 코토와
기노시타 세이가이는 일본화가로서 대만 관전의 동양화 심사원을 맡았던 화가들이다. 교토화단의
타케우치 세이호의 가르침을 받은 키노시타 세이가이는 전업화가로서 대폭의 산수화와 농채 화
조화에 능하였고 사생을 도입하고 입체감을 포현하는 등 현실적인 공간 묘사에 치중하였다. 도쿄
미술학교 도화사범과를 졸업한 고바라 코토 역시 대북 제삼고등여학교(第三高女)와 대중(臺中)
제일중학교 미술교사로 활동하였다. 스케일이 큰 산수, 화조 등 여러 장르를 소화했으며 첸진(陳
進) 등 다수의 대만인 여성화가들을 양성하였다.
12) 셰리파(謝里法), 「식민시대 대만 관전과 재야 단체전의 비교」, 『한국근대미술사학』15(2005), pp.71-81
13) 日本国立公文書館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문서번호:C09122781300
(http://www.jacar.go.jp/DAS/meta/MetaOutServlet)
14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1928년 처음 열린 대전은 대만교육회가 주관하였다. 1901년 결성된 이 단체는 원래 일본어
교육과 보급을 중심으로 편찬과 교무를 담당한 관변 단체로 총독부 학무과장이 부회장을 맡은
만큼 대만 총독부의 직할 기관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잡지 『대만교육』을 발행하고 일본어
강습회와 강연회 등을 개최하며 교육 분야의 실적을 쌓아갔다. 1924년 말에는 6000명에 가까운
회원을 확보하며 대만 전역으로 그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바로 이 단체가 대전의 개최를 주관했
던 사실 자체가 식민지 대만에서 미술전람회가 가진 특수한 성격을 말해준다. 대만교육회는
1923년 교육전람회를 개최했고 이듬해에는 일본인 미술가 야마모토 카나에(山本鼎)를 초빙하여
미술강연회를 개최했으며 1926년에도 일본인 미술가의 작품 300여점으로 미술전람회를 개최했
다.14) 이는 미술전람회가 사회교육의 일환으로 인식된 사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일본에서 관전이
처음 설치될 당시 교육 관장부서인 문부성이 주관했던 사실과 비교된다.
3. 대만 관전 향토색의 견인차
대만 관전의 주된 경향은 소위 대만향토색이다. 대전의 초기부터 나타난 대만향토색은 야자수
와 기와지붕 건물과 같이 대만의 풍토를 드러낸 모티프나 대만 원주민의 모습을 형상화한 인물
묘사가 주된 특징들이다. 대만 향토색을 주도한 화가들이 바로 대만 거주 일본인 심사원들이었
다. 그들의 작품경향은 대전 설치 이전부터 미술교사로 활동하던 그들이 대만인 학생들에게 영향
을 주어 확산되어갔다. 그들의 작품에서 시작된 대만 향토색이 이후 여타의 일본인 미술가, 대만
인 미술가들에게 확산되어 뿌리를 내린 것이다.15)
대만 향토색을 드러낸 작품경향은 시기적으로는 이미 대전이 설치되기 이전 일본인 심사원들
의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만 총독부 건물의 위용이 강조된 풍경화나 안개에 덮힌 평지와
고산지대를 대비시킨 풍경화에서 보듯이 이시카와 킨이치로의 풍경화에는 제국 일본의 화가가
식민지 대만에 대해 느끼는 이국취미가 반영되어 있다. 존재 여부를 알아채기도 어려운 인물의
묘사는 스펙타클한 자연경관이나 건물의 스케일을 부각시키는 점경으로 자리잡고 있을 뿐이다.
일본식 외광파의 영향이 남아 있는 온건한 풍경묘사와 시적 서정이 드러나 있음에도 대만 원주
민들의 삶에 대한 거리두기는 피할 수 없는 일면이었다.
인물묘사에서 특징적인 표현을 보였던 시오츠키 토호의 작품도 이국취미를 강조하기는 마찬
가지였다. 마티스나 루오와 같은 야수파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그는 맨발에 전통의상을 차려입은
14) 顔娟英編著, 『台湾近代美術大事年表』(雄獅美術, 1998), p.72 및 5.1,2,5,6
15) 린위춘(林育淳), 「일제시기 대만 관전의 양식 재고」, 『한국근대미술사학』15(2005), pp.188-200
식민지 대만 관전(官展)의 대만 거주 일본인 심사원 15
여성, 붉은 색조의 의복과 화려한 장식을 달고 있는 원주민 여성들의 모습, 그리고 붉은 대지를
배경으로 한 소떼들 등의 그림에서 마찬가지의 경향이 드러나 있다.16) 산지에 거주하는 원주민
여성의 모습을 부각시켜 침착하게 제시하던 대전 초기의 자세는 점차 형태를 단순화시키고 강렬
한 색채 중심의 이미지로 변화해갔다. 마치 고갱이 타히티 원주민들을 묘사한 그림의 경우를 연
상하게 되는 그의 작품들에는 진화된 이국취미가 색채 중심으로 정리되고 인물 개인에 대한 개
성에 대한 관심이 무시된 점 등이 특징이다. 제국주의 통치에 순응적이지 않고 자유주의적 사고
와 개성을 중시한 그였지만, 실제 작품에서는 이국취미가 내면화된 화가의 한계를 드러내었음을
말해준다.
고바라 코토의 작품에 등장하는 장대한 산수는 대만의 산악을 소재로 한 예가 대부분이다. 수
년에 걸쳐 대만 동해안, 고산지대를 답사하며 사생한 풍경을 바탕으로 한 그의 산수화는 ‘대만산
수’로 불리며 동양화 장르에서는 폭넓은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관념산수의 요소도 남아 있긴 하
나 사생을 가미한 스펙타클은 대만 동양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화조화나 인물화에까지
걸쳐 있는 그의 작품세계는 진진의 예에서 보듯이 대만인 화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어 일본화의
조형표현이 대만에서 뿌리를 내리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키노시타 세이가이 역시 사생을
바탕으로 원근표현과 입체감 표현을 시도한 산수화를 그렸고 대만 지역의 풍경을 담은 박력있는
회화 혹은 서정적인 회화를 비롯하여 일본의 전통적인 농채 화조화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화화세
계를 보여주었다.
대만 향토색을 표현한 이들 일본인 심사원의 회화경향이 대만인 미술가들에게 영향을 주고
대전의 아카데미즘으로 자리잡은 데는 미술교육자였고 심사원이었던 그들의 영향력이 작용한 결
과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고려해야 할 것은 그와 같은 경향을 받아들인 대만인 미술가들의 입
장이다. 대만인 미술가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대만의 자연환경이나 대만인의 복식 및 생활을 다룬
그림들은 지역 정체성을 그대로 표현한 예로서 그 영향을 받은 것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웬슈에
롱(顔水龍), 첸지치(陳植棋), 첸진 등 대만인 미술가들의 작품에 드러난 대만적 향토색은 그것을
수용한 대만인 미술가들의 주체성을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적극적으로 대만미술을 건설하려 한 대만인 미술가들에게 일본인 심사원들이 미술교육에서
초기 대전에서 보여준 대만 향토색은 강한 흡인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 대륙의 전통미
술이 가진 영향력이 미미했던 것도 중요한 배경이 되었지만, 대만미술의 건설이라는 과제가 대만
인 미술가들에게 준 동기부여가 컸던 만큼 소위 대만 향토색에 흡수되었던 것이다.
다만, 대
전 심사원을 지낸 일본인 미술가들과 대만인 미술가들 사이에 미묘한 차이도 있다. 일본인 미술
16) 顔娟英, , 「南国美術の殿堂建造」, 『帝国と美術』(国書刊行会, 2010), pp.341-378
16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가들의 경우 이국취미의 작용이 컸던 만큼 낯선 풍경, 낯선 광경에 대한 강조와 두드러졌다. 풍
경과 인물 등 소재를 불문하고 나타난 공통적인 현상이었던 것이다. 그에 비하면 대만인 미술가
들은 풍경에 얽힌 서사나 인물들의 개성 등 묘사대상에 대한 입장에서 일본인과는 구별되었다.
5. 총독부미술전람회 시기의 역할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과 함께 대전이 폐지되고 대만총독부가 운영주체가 된 총독부미술전
람회가 개설되었다. 이는 사회교육 차원에서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던 미술전람회의 성격이 바뀐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이 단계에 이르러 미술전람회는 한 단계 구체적인 전쟁선전의 장으
로 변한 것이다. 부전 시기 대만 거주 일본인 심사원들이 수행한 역할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사회정치적 측면에서의 역할이다. 그들은 일본에서 열린 성전미술전람회
(聖戰美術展覽會)에 출품하였고, 부전의 심사원으로서 전쟁분위기가 반영된 작품의 심사원으로
참여함으로써 부전을 지탱하는 기둥의 역할을 하였다.
두 번째로 작품을 통해 수행한 역할이다. 이는 당시 그들이 부전에 출품한 작품을 통해 살펴
볼 수 있다. 당시 그들의 출품작에 드러난 주제 및 내용과 조형적인 특징은 부전 시기 그들의 입
장을 뚜렷하게 반영해준다. 기노시타 세이가이와 시오츠키 토호는 부전 시기 각각 동양화와 서양
화의 심사원을 맡았다. 당시 그들의 작품은 직간접으로 전쟁과 연관지을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
었다.
사실 당시 많은 화가들이 전쟁에 대해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입장을 보여주었다. 전쟁기 회화
가 수행한 프로파간다기능을 부전 시기 대만의 미술품이 수행한 것이다. 그들의 작품에는 무장한
군인이 등장하거나 환송하는 군중, 육체노동에 참여한 여학생 등 인물 중심의 묘사가 많았다. 직
설적으로 전쟁상황을 묘사하고 전쟁선전에 가담한 그들 외에도 수색에 동원된 군용견이나 통신
용 비둘기 등 전쟁과 관련한 소재를 다룸으로써 전쟁상황을 묘사한 예들도 적지 않았다.
부전의 동양화부 심사원이었던 기노시타 세이가이는 이 시기에도 대만의 자연경관을 그린 산
수화를 출품했다. 제1회 부전에 출품된 <신고산지신(新高山之晨)>은 아침안개가 걷히는 신고산을
묘사한 것으로 이전시기와 같은 대만향토색의 경향을 보이고 있긴 하나 적극적인 전쟁분위기는
반영되어 있지 않다. 대만의 지역 정체성을 담고 있기는 하나 남방전진 기지로서 아시아태평양전
쟁에 동원되던 대만의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소극적인 대응자세라고 해야 할 것이다.
현재 도판으로 남아 있는 작품으로 보아 좀 더 복잡한 경우는 시오츠키 도호다. 그는 1938년
제1회 부전에 심사원으로서 <폭격행(爆擊行)>을 출품하였다. 하지만, 박력없는 그림이라는 혹평
식민지 대만 관전(官展)의 대만 거주 일본인 심사원 17
을 받은 그는 이후에도 애매한 성격의 그림을 출품하여 당시 그의 입장에 의문의 여지를 남긴다.
1941년과 그 이듬해에는 사용(莎勇, 莎韻)이라는 대만 소녀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작품을 두 차
례에 걸쳐 대규모 전쟁미술전람회에 걸쳐 출품하였다. 사용은 1938년 징집명령을 받은 일본인
교사의 환송을 위해 짐을 갖고 개울을 건너다 태풍에 불어난 개울물에 빠져 죽은 소녀였다. 사
후 그는 애국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최고의 선전사례가 되었다. 1941년 하세가와 총독은 ‘애국소
녀 사용의 종’이라고 새긴 큰 기념종을 만들어 사용의 출신지역에 설치해주었다. 고가 마사오가
작곡한 <사용의 종>이라는 가요가 대유행하였던 그 해에 시오쓰키 도호는 1941년 <사용의 종>
을 제2회 성전미술전람회에 출품하였고 이듬해에는 사용의 모습을 그린 <사용>을 출품하였다.
<사용의 종>은 주홍색 옷을 입은 사용이 종을 든 모습을 묘사한 그림으로 사용이 죽은 다음 하
세가와 총독이 하사한 종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실제사건과는 다른 광경을 ‘회화
적 재구성’을 통해 형상화한 것이다. 이듬해에 출품한 <사용>은 얼굴 부분이 클로즈업된 모습으
로 그려져 있다. 원주민 복장과 장식을 한 사용의 모습은 애띤 소녀의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으
나, 얼굴을 클로즈업시켜 그린 도호의 의도가 과연 어디에 있었는지는 분명히 파악되지 않는다.
표.1 대만관전의 심사원
회차
대전1회
대전2회
대전3회
대전4회
대전5회
대전6회
대전7회
대전8회
대전9회
대전10회
부전1회
부전2회
심사원
동양화
郷原古統 木下静涯
郷原古統 木下静涯 서양화
石川欽一郎 塩月桃甫
石川欽一郎 塩月桃甫
松林桂月
小林万吾
郷原古統 木下静涯 石川欽一郎 塩月桃甫
松林桂月
小林万吾
郷原古統 木下静涯 石川欽一郎 塩月桃甫
勝田蕉琴
南薫造
郷原古統 木下静涯 石川欽一郎 塩月桃甫
池上秀畝 矢澤眩月
郷原古統 木下静涯 和田三造 小澤秋成
塩月桃甫 小澤秋成
結城素明 陳進
廖継春
郷原古統 木下静涯 塩月桃甫 小澤秋成
結城素明 陳進
廖継春
郷原古統 木下静涯 塩月桃甫 廖継春
松林桂月 陳進
郷原古統 荒木十畝 藤島武二 顔水龍
塩月桃甫 藤島武二
川崎小虎
梅原龍三郎
木下静涯 結城素明 塩月桃甫 梅原龍三郎 村島酋一 伊原宇三郎
木下静涯 野田九浦 塩月桃甫 大久保作太郎
山口蓬春 中澤弘光
木下静涯 山口蓬春 塩月桃甫 大久保作太郎
松林桂月 有島生馬
18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부전3회
부전4회
부전5회
부전6회
木下静涯 野田九浦
木下静涯 山口蓬春 山川秀峰
木下静涯 町田曲江 吉田秋光
木下静涯 町田曲江 望月春江
塩月桃甫 齋藤與里
塩月桃甫 和田三造
塩月桃甫 辻永
塩月桃甫 *굵은 글씨는 대만 거주 일본인
6. 맺음말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대만 관전에서 활동한 대만 거주 일본인 심사원은 대만 관전의 설치,
전개에서 지대한 역할을 수행한 인물들이다. 서양화가 이시키와 킨이치로, 시오츠키 토호, 일본
화가 고바라 코토, 키노시타 세이가이 등은 대만 관전의 설치를 대만총독부에 건의하여 관철시켰
고 1927년 제1회 대전 이래 일본으로 귀국하기까지 심사원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시오츠키 토호
와 키노시타 세이가이는 마지막 관전인 1943년 총독부미술전람회까지 심사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들은 대만 미술교육의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였고 대만의 자연경관을 그린 풍경화나 대만인
을 묘사한 인물화 등을 통하여 소위 대만 향토색을 주도하였다. 중일전쟁 이후인 총독부미술전람
회 시기의 활동에서는 판단하기 애매한 측면도 있으나 적극적인 전쟁협력보다는 소극적인 자세
를 취한 것으로 해석된다. 대만근대미술사와 일본근대미술사 어느 쪽에서도 단편적으로밖에 조명
된 적이 없는 그들의 대만 관전 심사원은 ‘애매한 문화권력’으로서 동아시아근대미술사에서는 빼
놓을 수 없이 중요하고 또, 흥미로운 주제다.
식민지 대만 관전(官展)의 대만 거주 일본인 심사원 19
《M E M O》
20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M E M O》
大東亜 の図像学
「
」
21
亜 の 像学
「大東 」 図
河田明久
学 工学部教育センター
千葉工業大
溝
戦
戦争のあいだ、日本ではおびただしい数の戦
争画が描かれました。 しかしその内、戦闘そのものを描いたこのような作品は「氷山の一角」にすぎま
せん。その水面下には、はるかに多くの、戦闘そのものを描かない作品の世界が広がっています。 そ
れらは直接的な戦争の描写ではありませんが、「日本の戦い」のより一般的な表現として、戦争画に描
かれた個々の戦闘の「意義」を下支えしていました。
今回は、そうした作品群に見られる二つの表現を取り上げ、戦時下の日本人が「戦う日本」そのもの
をどうとらえていたのか、を考えます。 取り上げる表現の一つ目は「指導者の身体」、 二つ目は
「家族」です。これらの表現には、当時の日本社会を覆っていた国民規模の自意識が映し出されてい
ます。 では、まず「指導者の身体」から見ていきましょう。
これは第二次世界大戦時のアメリカの漫画で、日独伊の枢軸国家が揶揄されています。左からファ
シスト・イタリア、ナチス・ドイツ、日本ですが、イタリアやドイツがムッソリーニ、ヒトラーといった国家指導
者の姿で表されるのに対し、右端の日本だけは誰の似顔でもありません。
これは、それぞれの国内事情の反映でもあるでしょう。 当時の西欧諸国、とりわけ全体主義的な体制
の国家では、国家指導者の姿が繰り返し表現されました。これはその一例で、ハインリヒ・クニルという画
家が描いたヒトラーの肖像画です。国家が主催する大規模な展覧会でも高い評価を得るのは決まってこう
いう作品であったと、ナチス・ドイツ、ファシスト・イタリア、スターリン時代のソビエト連邦、共産主義中国
の作例を通覧したイーゴリ・ゴロムシトクという研究者は指摘しています。
ところが、同時代の日本にはそうした作例が見当たりません。昭和天皇はもとより、東條首相を描い
た作品にしても、本格的な油彩画はこの二点だけです。しかもどちらも控えめな描かれ方で、これでは、
他の全体主義国家なら、かえって指導者への侮辱と見なされたかもしれません。 これに限らず、同時
代の日本の絵画には、指導者の表現に対して腰が引けたような作品が目立ちます。これは日本の軍政
下でビルマが独立する際の式典を描いた小磯良平の作品ですが、画面の焦点は手前、つまり末席にい
る参列者の後ろ姿に合わされていて、主人公であるビルマの首相は遠方に霞んでしまっています。 同
1937年の盧 橋事件から1945年の敗 にいたる長い
22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画家ならこうは描きません。どれほど参列者が多くても、それほど多くの人々が
誰のために集まっているのかがわかるよう、このように、演出に工夫を凝らすのが通例でした。
結論からいえば、これは「寓意」、ないしは「擬人像」というものの伝統の有無に関わる問題のよ
うに思われます。西洋には伝統的に、抽象的な概念や集合的な対象を、人の姿を用いて表すやり方が
根づいています。そういう国々では、国家や民族といった共同体や、その理念もまた特定の身体によっ
じような場面でも、西洋の
て表されます。これはどちらも、フランスの皇帝ナポレオン一世を描いた作品ですが、ここに表されている
国家の指導者に登りつめた一人の男であると同時に、国家そのものであり、国家の理念を一身に体
のは
現するモティーフでもあります。
抽象的な概念」や「集合的な対象」を特定の身体が表象する、という点では、ドラクロワのこの
有名な作品で民衆を率いているセミ・ヌードの女性も同様です。日本では間違って「自由の女神」と訳さ
れていますが、彼女は、正しくは女神ではなく「自由」そのものの寓意であり、かつ「フランス共和国」
の擬人像でもあります。
「フランス共和国の自由」といった壮大かつ抽象的な主題を特定の人体が担いうる、というこの西洋の
伝統は、20世紀に入っても健在でした。 ソ連のヒョードル・シュリピンという画家が描いたこの作品は、
スターリンの肖像ではなく、「祖国の夜明け」と題されています。このスターリンは、「国家を表す絵文
字に等しい」という点で、玉座のナポレオン一世や、民衆を率いるセミ・ヌードの女性の、直系の子孫と
「
いうことになります。
持国
然
国家は国民に対して、人間の姿をとって語りかける
また、こうした伝統を つ 々では当 ながら、
戦
これらはどちらも第一次世界大戦時のアメリカのポスターですが、星条旗を手にして、「戦時公債を買
え」、「海軍に志願せよ」と見るものに訴えかける画中の女性は、ドラクロワの作品で民衆を率いていた
例の女性を思い起こさせます。
第一次世界大戦で登場した有名な志願兵募集ポスターの表現も、この伝統の延長線上にありま
す。ポスターを見る若者に指を突きつけ「君を求めている」と語る左の軍服の男はBRITONS、つまり
「英国」そのものですし、左の作品に触発された右のポスターでこちらを指さすヤギ髭の男性は、言わ
ずと知れたアメリカの擬人像「アンクル・サム」です。
第一次大戦以降、国家総力戦を戦う国々ではどこも、さかんに志願兵募集のポスターが制作されま
した。左は第二次世界大戦時のアメリカの募兵ポスターですが、ご覧の通り、右の第一次世界大戦時の
デザインをそのまま踏襲しています。 ところが、興味深いことに、これと同じ頃の日本の募兵ポスターに
は、管見の限り、このスタイルが見当たりません。概して日本のポスターではメッセージを記した文字が躍
ことになります。わかりやすい例は 時下のポスターでしょう。
大東亜 の図像学
「
」
23
国 向
発
これも同様です。ともに島国であるイギリスと日本は、第二次世界大戦中、深刻な食糧不足に悩ま
されました。これらはどちらも、家庭菜園をつくろうと呼びかけるポスターですが、左のイギリスのポスター
には、大地にショベルを蹴り込む人の足が登場します。この足につながる人体は特定のイギリス市民であ
ると同時に、飢えに耐えて戦うイギリスそのものでもあるでしょう。これに対して右の日本のポスターでは、
カボチャをつくる人も、「つくれ」と命じる人も描かれていません。「寓意」や「擬人像」をめぐる伝統
の違いは、こんなところにも表れています。
もちろん、だからといってこれは、日本が、国家や、国家理念の視覚的な表現に無頓着であった、
という意味ではありません。では、「寓意」や「擬人像」の伝統をもたない日本で、日本という共同体
やその理念、当時の言葉でいえば「国体」はどう表されたのでしょうか。
再び結論からいえば、西洋の国々で国家指導者の身体や擬人像が担っていたのと同じ主題内容を
戦時の日本において担っていたのは、「富士山」や「朝日」、あるいは「桜」のような、象徴的な意
味合いを持ついくつかの自然の景物でした。右は、戦時下の日本で画家の戦争協力を主導した日本画
家、横山大観が、天皇による統治が始まってから二千六百年目にあたるとされる1940年を記念して開か
れた展覧会に出品した大作で、「日出処日本(ひ いずるところ にっぽん)」と題されています。
当時、防共協定を結んでいた日本とドイツは、折に触れて様々な贈答品をやり取りしていました
が、その品目にも、日本と西洋のちがいが際立つ、興味深い「非対称」が見られます。1938年に日
本から贈られた右の作品、横山大観の手になる「旭日霊峰」に対し、 同じ年にドイツから友好の証し
としてもたらされたのは、左のようなヒトラー総統の肖像写真でした。西洋の全体主義国家における「指
導者の身体」と、ちょうど同じ対称的な位置に、日本では「旭日」や「富士山」が置かれていたこと
るばかりで、 民に けてメッセージを している「主体」が描かれることはありませんでした。
がわかります。
絵文字のようなこの手のモティーフは、ドラクロワの作品に登場するセ
ミ・ヌードの女性と同様、他のモティーフと組み合わせることで、大きな物語を伝えることもできました。
これは日中戦争が始まった年、1937年に日本画家の川端龍子が描いた「朝陽来(ちょうようらい
)」、つまり「朝日が昇ってくる」というタイトルの作品です。 ところが、その朝日は不思議なことに
「昇る」のではなく、黄金のしぶきをあげて、山々の間を縫うように手前の長城線へと転がってくるように
描かれています。 タイトルの「朝陽来」は、「もうじき夜が明けるから泣くのはお止し…」と歌う中国の
民謡に由来するようですが、作者の川端によれば、その太陽は中国を「救う」ために駆けつけた日本そ
また「日本そのもの」を表す
のものの表現でした。
使
可能です。洋画家の藤島武二が描いたこの作品は昭和天皇の書斎に飾
あるいは、こういう い方も
24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旭 照六合(きょくじつ りくごう を てらす)」は天皇家の古代の事績を記
した書物「日本書紀」に由来する言葉で、「六合」は「くにのうち」と読みます。一方、描かれている
のは内蒙古の夜明けの光景で、そのロケーションは画面右下のラクダが暗示していました。一見のどかな
この風景画が、中国内陸部におよぶ日本の国威にも言及していたことは言うまでもありません。
ラクダと朝日のこの取り合わせには、もっとあからさまな例も見受けられます。川端龍子が1938年に
描いたこの作品では、ラクダの間に、鎧兜に身を固めた中世日本の武士がうずくまっています。 12世
紀末に非業の死を遂げたはずの源義経が、じつは生き延びて大陸に渡りチンギス・ハーンになった、と
いう日本の伝承を描いた作品で、川端自身、その説の荒唐無稽なことは認めつつも、ストーリー自体に
は「今日的な意味がある」と述べています。しかも川端の解説によれば、この義経は画面の外の「朝
日」に祈りを捧げている、とのことでした。 だとすれば、その意味内容はその翌年、日本画家の橋本
関雪が描いて宮中に納めたこの作品のメッセージとも重なり合います。橋本の画集などでは、「恵日東
臨(けいじつとうりん)」というタイトルの「けいじつ」を「えにち」と読んで、東晋時代の僧「えにち」
が仏典を携えて東の中国へと戻る帰路を描いた、と解説されることもある作品ですが、当時の社会的な文
脈を考えれば、東方に昇る朝日の恵みを受けてラクダの親子が安らいでいる、と見るほうが、よほど自然
ではないかと私は思います。
「富士山」のシンボリズムも同様です。ただしこちらは朝日のように、取ってつけたように中国大陸の
ラクダと組み合わせるわけにはいきませんから、単独で描かれる場合がほとんどでした。ただしそのぶ
ん、「日本そのもの」を象徴するモティーフとして、結晶度の高い表現が多いようです。
たとえば右の作品、横山大観の1942年の作品「正気放光(せいきほうこう)」では、富士山の手前
だけでなく、すぐ背後にも「波がしら」が表され、富士山が海中からそそり立つ火山島として、島国であ
る日本の国土全体を表象していることがわかります。
また左の川端龍子の1944年の作品「怒る富士」は、葛飾北斎の有名な浮世絵の構図を踏まえて描か
れた作品ですが、北斎の作品で富士山の中腹を取り巻いていた稲光が、ここではアメリカの襲来に対す
る富士山、つまり日本国民の怒りになぞらえられています。
戦時下の新聞や雑誌は、折にふれて富士山の写真を掲げましたが、それらを並べてみると、その
当時、富士山が担っていた意味が浮かび上がります。政治も、農業も、宗教行事も、その国のすべて
の営みは富士山に集約されるかのようです。この富士山に似たモティーフをほかの国にもとめるなら、先
にあげた、ソ連のシュリピンが「祖国の夜明け」で描いたスターリンが、最も近いかもしれません。
ちなみにソ連では、国家そのものの意志を体現する存在として、しばしばスターリンの戦う姿が描か
れましたが、日本の富士山にもよく似た表現があります。 平沢大暲という画家が戦争末期に描いたこの
られていました。タイトルの「 日
大東亜 の図像学
「
殴飛
」
25
富士山が、日本を空襲にやってきたアメリカ軍の爆
作品では、ヒトラーを り ばすスターリンのように、
撃機を撃退しています。
題 番
移
家
問題です。
ご存じの通り、19世紀末の日清戦争以来、日本が経験した数多くの戦争は、徴兵制度に基づく軍隊
が他の国の領土に出張って戦う戦争、つまり「国民軍による外征戦争」でした。いま問題にしているア
ジア太平洋戦争も、もちろんその一つです。日本の側からみたこの戦争の性格が、戦争を表す日本国
内のイメージに、「家族」の枠組みに依拠した「二種類」の表現の型をもたらしたのではないか、という
のが、以下の内容です。
その二種類の「家族」イメージを図であらわすと、こういう関係なります。重なり合う二つの円のう
ち、左側の一つ目は、本物の家族が日本でどう描かれたかという問題です。
一方、右側の二つ目の家族は本物ではなく、日本軍の占領地域の様子を「家族」の図式になぞらえ
てあらわすような、日本国内における表現手法を意味します。左側の緑色の四角と、右側の赤い四角に
挟まれたせまい隙間は、いわば東シナ海です。青い線で示した二つの「家族」の重なり合った部分
に、「日本兵」が位置している点にご注意ください。
ちなみに、ここでいう「家族」は、成人男性が家長として家庭、つまり妻、子ども、老いた親を養うと
いう、いわゆる「近代家族」のことです。この「近代家族」モデルは、日本を含む多くの国々におい
て、国家を構成する最小の集団と見なされてきました。そういう国々に戦前の日本のような徴兵制度があ
れば、労働に適した年齢の男性はみな潜在的な兵士ですから、概念上その国の軍隊は、国中の家庭か
ら家長を引き抜いて構成された集団ということになります。 そうした国が、国力のすべてをあげて総力戦
を戦うとき、個々の家庭における「兵士」と彼を送り出した「留守家族」をむすぶ強いきずなの表現
は、容易に、前線での戦闘とそれを支える銃後の戦争協力、つまり総力戦そのものの雄弁なメタファーと
なります。左側の円で示した、一つ目の「家族」イメージは、ここに由来します。その特徴を先取りして
言えば、日本国内における、「わかれつつ引き合う」家族の表現、ということになるでしょうか。
その典型はこういう作品に見られます。左下の作品では、母と子どもが農作業の手を休めて、前線
から送られてきた手紙に見入っています。女性の夫であり子供の父でもある送り主の男性は兵士として戦
地にいる、という設定です。右上の作品は「銃後の護り」と題されていますが、当時の文脈を知らなけ
れば、老人と子供が田を耕す平和な光景のどこが「銃後の護り」か、判断に苦しむかもしれません。ポ
イントはここでも成人男性の不在です。どちらの作品も、このような場面で最も頼りになるはずの成人男性
の不在と、それにもかかわらずたくましく生きる留守家族の、「わかれつつ引き合う」関係が、作品の主
さて、ここで話 を二 目の表現に しましょう。すなわち「 族」の表現をめぐる
26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題をなしています。
逆にいえば、成人男性をその愛する家族とともに表すような作品は、戦時下の日本ではほとんど描
かれませんでした。右の二点はその稀な例外ですが、お分かりの通り、ここに描かれている男性はすべ
て出征を控えた兵士か、そうでなければ一時帰国した兵士です。ちなみに、上が出征前で、下が帰国
後の場面です。と、そう断言できるのは男性のヒゲの有無によります。ささいな例ですが当時の日本にお
いて、兵士のヒゲは、戦地での苦労を示す社会的なアイコンでした。
ところで注意していただきたいのは、ここにあげた三点の作品に描かれている家族がすべて、二人
以上の子持ちで、いずれも一番年上の子供が女の子に描かれている、という点です。ここで描かれて
いるのは、一人目で女の子を授かったことに満足せず、さらに子供をもうけた夫婦ばかりだ、ということ
を、これは意味します。 もっとも私は、このことを指して「女性差別」だとか、「産めよ殖やせよ」と
いう当時の国策の反映だ、とばかり言うつもりはありません。同じような子供の組み合わせは、早くも日
清戦争を描いたイメージにも見受けられます。「できれば男の子が欲しい」という希望を暗示するこのよ
うなモティーフは、国策というより、むしろ表現者の無意識に根差していたでしょう。生殖年齢にある男
性が日々戦闘で命を落としつつある、という焦りにも似た思いが、こうした表現を支えていたように思われ
ます。
次検
先
側
家
占領地の様子
を伝えるイメージにしばしば見られる、「家族」モデルを意識した表現についてです。繰り返します
が、こちらは本物の家族ではなく、占領地の人々をあたかも家族ででもあるかのようにあらわすやり方の
さて、 に 討するのは、 ほどの図で右 にあげた二つ目の「 族」イメージ、
ことです。
社会が家族の集合体だとすれば、安定した家族はすなわち、安定した社会のひな型でした。
この認識をそのまま反転させて日本軍の占領地域に当てはめたものが、この二つ目の「家族」イメージ
だと言えばよいでしょうか。日本から送り出された成人男性、つまり兵士が現地の人々と「家族」のような
安定した関係を取り結ぶイメージは、占領が当を得ていることの証左であり、ひいてはそのような占領をと
もなう戦争それ自体の正当性をも示すことができると考えられました。この場合、家長にあたる日本兵は
当然「家族」である現地の住民から慕われねばならなりません。そして、その表現にうってつけであった
のが、一般に先入見を持たないとみなされがちな子どもたちでした。
当時のグラフ雑誌には左のような、占領地の子どもと睦みあう日本兵をとらえた写真が頻繁に登場し
ます。その際しばしば行われたのが、日本兵と現地の子どもを「父親と子供」に見立てるやり方でし
た。この写真のキャプションでも日本兵は、わが子に思いをはせながら現地の子どもを抱き上げたことに
日本の
なっています。
大東亜 の図像学
「
」
27
談
兵優 触
れ、すっかり日本軍が好きなってしまった現地の子供たちが、日の丸の落書きをして遊んでいるところ
だ、と作者は語っています。
《父に代りて》と題された1941年のこの彫刻では、そこからさらに一歩踏み込んで、文字通り、父
に成り代わって中国の戦災孤児を保護する日本兵の姿があらわされています。左にあげた作品解説にも
あるように、実際、当時の報道には中国の孤児を保護した日本兵の逸話があふれていました。逸話自体
が事実かどうかはわかりませんが、当時こうした逸話が国民に受けると考えられていた事実は疑えませ
ん。それは、繰り返しになりますが、占領軍が占領地の子どもを「親のように」保護し、子どもから「親
のように」慕われるというこの図式には、本来の領土から出張って戦っている国の国民が感じざるを得な
い内心の引け目、つまり自分たちは歓迎されていないのではないかという自意識からくる葛藤を癒す力が
右の作品で描かれているのは、いわば、その後日 のようなエピソードでしょう。日本 の しさに
あったからです。
前 述 通 近
戦争はほぼすべてが「外征戦争」でしたから、その手の
葛藤も、そこから導かれる戦場の「疑似親子」の主題も、その原型は早くも明治期の戦争に見ることが
できます。上の浮世絵版画と下の油彩画は、どちらも19世紀末の日清戦争の際、日本でもてはやされた
「樋口大尉」という将校の逸話を描いています。戦場で清国人の迷子に遭遇した樋口大尉は、その子
を小脇に抱えて保護しつつ清国軍を打ち破ったとされました。幼児を救ったのはたしかに美談でしょう
が、その程度のことが日本国内で大きな話題となり、一種のブームを巻き起こした背景には、やはり例の
葛藤があったと考えざるを得ません。逸話の後段で樋口大尉は、戦闘後に名乗り出た迷子の「実の
親」に対して、お前のような無責任な者は親として失格だ、と叱りつけます。日本人の琴線に触れたの
は、おそらくこのくだりでした。というのも、実の親に「失格」を言い渡した大尉は、「その子にふさわし
い真の親は私だ」と言い放ったのも同然だったからです。そしてその延長上には当然、実の親に見放さ
れ親を見限ったその子は、日本人である大尉を親のように慕うだろう、という期待が続きます。
なお余談ですが、これとよく似た報道を近年のイラク戦争の際の報道写真で見かけました。ロイター
が世界に配信したこの写真は、戦闘の混乱で生じた迷子を米軍の軍医が保護したところだというのです
が、こういうイメージこそ伝えるに値すると判断した人々の内心には、「樋口大尉」に熱狂した19世紀末
の日本人と同じ葛藤がひそんでいます。
面白いのは、数日後の同じ新聞に掲載されたAP通信発の、米軍の捕虜収容所の親子を写した右
下の報道写真です。おそらく先ほどの写真を配信してから、だれかが、そのあまりにも古典的なプロパガ
ンダ臭さに気付いたのでしょう。これはその解毒剤のような気がします。 キャプションの末尾では、「米
軍は親子が離れ離れにならないよう配慮した」と強調されていますが、ここをよろしく頼むと念を押してい
ちなみに にも べた り、 代日本の
28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米 広報官の顔が目に浮かぶようです。タイトルが「親子」ではなく、「父子」だという点にご注意
ください。米軍は決してイラクの成人男性を排除しない、「家長」の座を奪うつもりはないという姿勢が、
この取り合わせに暗示されています。
さて、このあとの発表内容はご想像のとおりです。話を日本の戦争にもどせば、日本国内で流通す
る占領地のイメージに関して、「子ども」に言えることは、「女性」にも当てはまりました。日中戦争当
時の新聞には、拉致してきた自国の女性を人間の盾として前線に並べたり、牢に押し込めて慰みものに
したりする非道な中国軍と、そうした苦境から彼女たちを救う正義の日本軍を対比的に強調した新聞記事
がしばしば見られます。1938年に発表されたこの作品では、文字通り「白馬の騎士」然とした日本兵と
なごやかに語らう中国人女性が描かれていますが、こうした主題を裏面から支えていたのは、前の新聞記
事のような、「夫」と呼ぶに値しない中国人成人男性の物語でした。 そして、これも「子ども」の場
合と同様、よく似た表現の型は、すでに日清戦争時に登場しています。右は当時のグラフ雑誌に載った
記事の挿絵で、日本軍占領地域に住む資産家の令嬢が日本軍の下士官に恋をしたというエピソードで
す。記事によれば彼女は母子家庭の一人娘で、母親もその恋の後押しをしており、全財産を持参金に
つけて娘を日本に嫁にやるつもりだ、とあります。メッセージは明瞭です。これほどの女性が任意の日本
人を配偶者に選んだ以上、その下士官は不特定多数の中国人男性の頭を押さえつけるかたちで「夫」
失格を言い渡していたことになるからです。
子ども、妻、とくれば当然、次は「老いた親」ですが、ここにも同じ図式が見て取れます。これ
は、中国南部に派遣された日本軍が自分たちのために刊行した写真集のなかの一頁です。燃え盛る市
街から中国人の老婆を背負って逃げるこの日本兵の姿が暗示するのは、戦火の中に彼女を置き捨てた
薄情な「息子」と、彼に成り代わってその責任を果たしつつある新たな「息子」との対比です。
かくして、日中戦争を伝える日本国内のイメージには、占領地の子どもと女性、それに老人ばかりが
頻出することになりました。左は報道写真を集めて1938年に開催された展覧会のポスターですが、このデ
ザインなどを見ても、当時の報道がいかにそうしたモチーフで埋め尽くされていたかがよくわかります。
最後に、占領地の人々を日本人「家長」のもとに集う「家族」のようにあらわすやり方が、人間以
外にも適用されていた例を紹介しておきましょう。これは、中国軍の有力者が住んでいた邸宅の写真です
が、グラフ雑誌に付されたその解説文は簡潔ながら、それが、元の所有者に「捨てられ」、今や日本
軍に「保護され」た、戦場の孤児のような存在なのだと強調しています。
それどころか、元の所有者に放棄され、新たな所有者の保護下に入った、という文脈で考えれば、
日本軍の支配下にある地域のすべてが、いわば「戦災孤児」のようなものであった、と言っても過言で
はありません。日本軍占領地域の現状を報告する当時の報道写真には、まちを見晴かす高台で警備に
る 軍の
大東亜 の図像学
「
」
29
兵姿
写真に添えられる記事ではつねに強調されるのは、
街を放棄して逃げた中国軍と、そこを保護する日本軍の対比でした。
そういう角度から見直してみれば、一見戦争とは関係なさそうに思える当時の作品についても別の見
方が可能になります。戦時下、日本軍の支配下にあった中国大陸には多くの画家が自発的に出向き、彼
の地の風物をさまざまな作品に描きました。これらはその一部です。画家たち本人の意図はどうあれ、ここ
にも戦争は影を落としています。というのは、言うまでもなく、彼らが安心してその場所をスケッチできたこと
からもわかるとおり、そこに描かれた広東や北京の街並みは、日本軍の保護下にあったからです。
同じことは文化財にも当てはまります。雲岡の石窟寺院を描いた1939年のこの作品は「文化を護
る」と題されています。中央の画面下に小さく描かれた日本兵に注目してください。石窟寺院に「背を
向けて」佇むこの人物は、石窟の「略奪者」ではなく、お気捨てられた寺院の新たな「保護者」のや
あたる日本 の がしばしば見られますが、そうした
くわりを演じています。
文脈でのみ理解可能な作品をひとつ、最後に紹介しておきましょう。これは1944年に陸軍の
注文で描かれた公式の戦争画で、タイトルは《洛陽攻略》です。洛陽郊外の龍門石窟寺院は、ほんら
い洛陽の守護のためにつくられたわけですから、現代の中国人は、画中の日本人将校が、その石窟寺
院の大仏に日本軍の戦勝を報告しているのはなぜか、またそうした表現を当時の日本人が抵抗感なく受
け入れていたのはなぜなのかが、さっぱりわからないかもしれません。しかし当時の日本国内の文脈によ
れば、この仏たちもまた元の保護者に見捨てられ、日本という新たな、真の保護者を得て息を吹き返した
存在でした。 この作品が描かれる直前、川田順という歌人は新聞紙上に発表したその名も「洛陽攻
略」と題する短歌で、日本軍の攻撃を前に、大仏を盾にとって立てこもった中国軍の卑劣さをあげつらっ
ています。ポイントはここでも、子供を見捨てて逃げた親と、その子供をあえて保護しようとする新たな親
の対比です。そうであればこそ、かつて清国の迷子が実の親よりも樋口大尉を慕ったように、この大仏も
また、今となっては日本軍をこそ加護の対象とするはずだという前提が、当時の日本にはあったということ
そうした
になります。
30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M E M O》
大東亜 の図像学
「
《M E M O》
」
31
32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M E M O》
第1部 討論 33
討
論
이나바 마이 (稲葉真以)
光云大學校 翰林院
34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카와타 아키히사 선생님의 <「대동아」의 도상학>에 대한 질의
광운대학교 이나바 마이
전쟁화는 국가주도로 전쟁을 제재로 그린 그림이고 일본에서는 메이지(明治) 이후 청일전쟁,
러일전쟁부터 아시아·태평양 전쟁에 이르기까지 많이 그려졌습니다. 특히 중일전쟁의 발발 이후
종군화가들에 의한 육군미술협회 결성 등으로 본격화되고 당시 이름이 있는 미술가들의 대부분
이 어떤 형태이든지 간에 전쟁화 제작에 종사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아시아·태평양 전쟁이 시작된 1940년대에는 수많은 전쟁화가 그려졌는데 그 중에서 대표
적인 작품들은 패전 직후 GHQ에 의해 접수되고 1951년 미국에 이송되며, 1970년 ‘무기한대여’
라는 형태로 일본에 반환되었습니다. 반환된 그림들은 도교국립근대미술관에 수장되어 1977년
일괄 공개될 예정이었는데 공개 직전에 갑자기 전람회 자체가 중지돼 버렸습니다. 이후 오랫동안
일종의 터부와 같은 존재로 소극적으로 공개되었지만 근년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카
와타 아키히사 선생님은 전쟁화 연구의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계시고 이번은 중일전쟁의 발
발 이후 본격화된 전쟁화의 도상을 「지도자의 신체」와 「가족」이라는 두 가지 관점에서 분석하셨
습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서양의 기술이나 사상, 양식 등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습니다. ‘화혼양
재(和魂洋才)’를 내걸고 근대화를 추진한 일본이었는데 카와타 선생님의 발표를 통해서 일본의
근대화 및 그것에 따른 제국주의에 있어서의 문제점이 확실히 떠올라 온 것 같습니다. 일본은 서
구 제국주의에 모방하면서 주변국을 식민지화하면서 침략해 갔는데 그 때 ‘오족협화(五族協和)’나
‘대동아공영권’ 등, 아시아주의적으로 분식된 지배 사상을 내세우고 식민지주의(및 점령)를 정당
화해 갔습니다. 거기서 생긴 모순, 즉 대의(大義) 없는 전쟁·침략·식민지화·점령의 실상이 전쟁화
에 여실히 나타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전쟁화라는 말로부터는 우선 전투장면을 그린 그림을 상
상하게 되지만 ‘전투장면을 그리지 않는 전쟁화’가 대단히 많았다는 것은 아주 흥미로운 사실이
며 그것이야 말로 전쟁화가 일본 제국주의의 ‘변명의 장치’가 된 것을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전투 장면을 그리지 않는 전쟁화’에 관한 카와타 선생님의 분석에 대해 첫 번 째, 전
쟁화의 명칭에 대해서 여쭤 보겠습니다. 일본에서는 전쟁화, 전쟁미술, 전쟁기록화, 작전기록화
등 명칭이 여러 가지 있는데 각각에 대해서 명확한 정의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두 번 째는 「지도자의 신체」가 그려지지 않은 점에 대해서입니다. 예전에 카와타 선생님께서
일본의 전쟁화에는 적의 모습이 확실히 나타나지 않다고 지적하신 적이 있습니다. 지도자의 모습
第1部 討論 35
도 적의 모습도 없는 일본의 전쟁화에 있어서의 주체의 부재와 ‘후지산’이나 ‘아침 해’ 등에 의한
상징적 표현과의 관계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시면 감사합니다.
세 번 째는 가족상에 관한 질문입니다. 이번에 카와타 선생님이 소개해 주신 점령지역의 상황
을 가족의 도식으로 그린 작품들은 어떤 형태로 발표되었습니까? 즉 전쟁 시기 성전미술전(聖戰
美術展)을 비롯한 많은 전시회가 개최되었는데 전시회 이외에 발표의 장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또한 그러한 그림들이 그 의도대로 당시 일본인들에게 구체적인 영향력이 있었습니까?
36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河田明久先生の<「大東亜」の図像学>に対する質疑
光云大学 稲葉真以
戦争画は国家主導のもとで戦争を題材として描かれた絵画で、日本では明治以降、日清戦争、
日露戦争からアジア・太平洋戦争にいたるまで数多く描かれました。特に日中戦争の勃発以降、
従軍画家たちが陸軍美術協会を結成するなど本格化し、当時名のある美術家たちのほとんどが、
なんらかの形で戦争画制作に従事していたと言っても過言ではありません。
特にアジア・太平洋戦争がはじまった1940年代にはおびただしい数の戦争画が描かれたのです
が、それらのうちの代表的なものは敗戦後GHQによって接収され、1951年にアメリカへ移送さ
れた後、1970年に「無期限貸与」というかたちで日本に返還されました。返還された絵画は東京
国立近代美術館に収蔵され、1977年に一括公開される予定でしたが、公開直前に突然展覧会その
ものが中止されてしまい、以後長い間一種のタブーのような存在として消極的に公開されました
が、近年は研究が本格的に進められています。河田明久先生は戦争画研究の中心的役割を担って
おられ、この度は日中戦争の勃発から本格化した戦争画の図像を、「指導者の身体」と「家族」
という二つの観点から分析されました。
日本は明治維新以後、西洋の技術や思想、様式などを積極的に取り込みました。「和魂洋才」
を掲げて近代化を図った日本ですが、河田先生の発表を通じて、日本の近代化およびそれに伴う
帝国主義における問題点がはっきりと浮かび上がってきたように思います。日本は西欧の帝国主
義に倣いつつ周辺国を植民地化しながら侵略していきましたが、その際に「五族協和」「大東亜
共栄圏」など、アジア主義的に粉飾された支配思想を掲げて植民地主義(及び占領)を正当化し
ていきました。そこで生じた矛盾、つまり大義なき戦争・侵略・植民地化・占領の実像が戦争画
に如実に現われていたということです。戦争画という言葉からはまず、戦闘場面を描いた作品を
想像しがちですが、「戦闘場面そのものを描かない戦争画」が非常に多かったことは非常に興味
深い事実であり、それらはまさに日本帝国主義の「弁明の装置」となっていたのではないかと思
われます。
そこで、「戦闘場面そのものを描かない戦争画」に関する河田先生の分析について、一つ目の
質問は、戦争画の呼称についてです。日本では戦争画、戦争美術、戦争記録画、作戦記録画など
さまざまな呼称がありますが、それぞれについて明確な定義があるのでしょうか。
二つ目は、「指導者の身体」が描かれなかった点についてですが、以前、河田先生が日本の戦
第1部 討論 37
争画において敵の姿がはっきりと現われないことを指摘されたことがあります。指導者の姿も敵
の姿もないという、日本の戦争画における主体の不在と、「富士山」や「朝日」などによる象徴
的表現との関係についてもう少し詳しくご説明いだたけたらと思います。
三つ目は、家族像に関してです。今回、河田先生が紹介された、占領地域の様子を家族の図式
になぞらえて描いた作品は、どのような形で発表されたのでしょうか。つまり、戦中、聖戦美術
展など多くの戦争画展が開催されましたが、そのような展覧会以外に、発表の場があったので
しょうか。また、当時の日本人にこれらの作品の意図通りの具体的な影響力があったのでしょう
か。
38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M E M O》
第1部 討論 39
《M E M O》
40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M E M O》
内地 外地を結ぶ書者のネットワ
クと朝鮮半島の小売書店
41
内地ー外地を結ぶ書者のネットワークと朝鮮半島の小売書店
-日配時代を中心に-
日比嘉高
日本 名古屋大学院 文学研究科
< 目 次 > 1.内地と朝鮮半島を結んだ流通網・略史
2.「鮮配」騒動と出版一元配給への道
3.日配朝鮮支店時代における朝鮮半島への配送ルート
4.日配朝鮮支店の体制
5.大戦末期の朝鮮半島における小売書店組合について
6.社会装置と文化の意味――おわりに代えて
この報告では、第二次世界大戦以前における日本内地と外地を結んだ書物流通ネットワークの考察を
行う。とりわけ、重点的に検討するのが日本出版配給株式会社(日配)成立以降における内地と朝鮮
半島とを結んだ流通網である。また関連して、この時期の朝鮮半島における小売書店のあり方について
も言及する。
日配の活動については、関係者が後年まとめた詳細な歴史『日配時代史』が存在する1)。ただしこの
資料は名前の示す通り、日配全体の業務や組織の変遷を、おおむね編年体で追いかけるものであり、
特定のテーマや地域については情報が分散していて輪郭が掴みにくい。今回は、『日配時代史』の記述
1) 荘司徳太郎、清水文吉『資料年表 日配時代史――現代出版流通の原点――』出版ニュース社、1980年10月。
以下『日配時代史』と表記する。
42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を参考にしながらも、そこに日配が刊行していた冊子『日配通信』『出版普及』『新刊弘報』『出版弘報』他
を交差させ、朝鮮半島を舞台とした書物流通の実態に迫りたい。
基本的には資料分析による事実の整理が多くなるが、小売書店や書物の取次機構といった社会的な装
置の上で立ち上がる文化の動態に迫るのが最終的な目標である。
なお、本発表第1、2節部分に関しては既発表の拙稿があるが、第3節以降の前提となるため、短く
再論していることをおことわりする2)。
1.内地と朝鮮半島を結んだ流通網・略史
まず最初に、近代における日本の書物流通の構造とそ
の変化について短く整理しておく。明治から大正の半ば
にかけては、出版社と小売書店とが連絡を取る直接取引
の時代だった。取引の中間に、その地域の卸売を兼ね
た大規模小売書店が介在することもあった。取次業者は
存在していたが、その力はまだ大きくなかった。この後、
東京堂や北隆館などの大手取次会社(元取次という)が
成長し、その独占的な権益を拡大していく。大正から昭
和初期にかけてのことである。
雑誌と書籍は、多少流通の形が異なった。全国的な
流通体制が早く整備されたのは、雑誌である。1910年代
には元取次を中心とする独占的流通体制が確立する。こ
れに対し、書物は中小の取次会社が長く残り、複雑な流
通経路を有した。日配成立以前の書物流通の構造は次
のように図式化できる(図1)。
書物流通の末端である、小売書店の組織に目を移そ
図1
う。京都や大阪、江戸などにおいては、すでに明治以前から同業者の組織が存在していた。近代にお
2)
日比「外地書店とリテラシーのゆくえ――第二次大戦前の組合史・書店史から考える――」『日本文学』日本
文学協会、第62巻第1号、2013年1月。日比「朝鮮半島における日本語書店の展開――戦前外地の書物流通
(1)――」『跨境 日本語文学研究』第1号、2014年6月。
内地 外地を結ぶ書者のネットワ
クと朝鮮半島の小売書店
43
いても、こうした大都市部では組合が早期に成立する(ただしこの時期の「本屋」は出版と小売を兼ねて
いた)。小売書店が結成した全国規模の組合の登場は、1920年まで待たねばならない。この年、全国
書籍商組合聯合会が成立する。値引き競争による濫売で、書店の経営が圧迫されることを防ぐというの
が、結成の大きな目的だった。全国組織が結成され、その主導で未組織の地方で組合の結成が促され
た。朝鮮半島においては、1921年に朝鮮書籍商組合が成立している。組合員以外の書籍販売は原則
として禁止されていたため、体制は強固となり、書物の全国的流通体制が固まっていった。
ここで、日本統治下の朝鮮半島における小売書店の歴史についても簡単に触れておこう。
1907年11月発行の『全国書籍商名簿』(東京書籍商組合事務所)に名前のある外地書店は、樺太が1
軒、台湾が12軒、清国が26軒、米国(バンクーバー、ハワイを含む)が32軒、朝鮮(標記は「韓
国」)が22軒となっている。朝鮮半島分の内訳は、京城に日韓書房(森山美夫)を含む4軒、仁川港
に2軒、釜山港に博文堂(吉田市次郎)を含む2軒、鎭南浦に3軒、咸興府北道に2軒、木浦に2軒、
大邱に2軒などである。店主はすべて日本人のようである。
1924年3月の『大正十三年一月現在 全国書籍商組合員名簿』(全国書籍商組合聯合会)では、朝鮮
半島の組合員数は99。書店のある地域的が広がったこと、内地書店の支店ができたこと、朝鮮人の書店
主が加入していることが見て取れる。
1938年3月の『全国書籍業組合員名簿』(全国書籍業聯合会編輯・発行)では、「朝鮮書籍商組合員」
として358名が記載されている。名前から朝鮮人と推定される組合員は、104名である。
『全国書籍商総覧』3)によれば、朝鮮半島でもっとも早く日本人が開店した書店は、会寧の会寧博文館
(店主・小池奥吉)で1892年のことであった。このあと1906年に釜山に吉田博文堂(店主・吉田市次
郎)ができ、すぐあとに京城の日韓書房(店主・森山美夫)がオープンする4)。外地向け書籍取次の最
大手、大阪屋号書店が支店を開いたのは、1914年だった。釜山の博文堂、京城の日韓書房、大阪屋
号書店京城支店の3店が、朝鮮半島の三大日本書店であり、1920年代以降の組合の結成をはじめとす
る業界の動向も、この店の関係者たちが牽引していった。
2.「鮮配」騒動と出版一元配給への道
3) 後藤金壽編輯『全国書籍商総覧』新聞之新聞社、1935年9月。
4) 創業当時の日韓書房については森山美夫「朝鮮の出版及読書界」『朝鮮』1913年4月、166頁。
44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書籍配給を国家的な統制のもとに置こうとする動きは、内地ではなく、先に外地において具体化した。
満洲で一元的配給組織設立の噂が立ったのは1938年のことであった5)。その翌年の出版関係の業界紙
『出版通信』(1939年4月10日)には、「今度は朝鮮書籍統制会社案 機関誌「京日」を主体に 総督府
趣意書を発表」という記事が掲載されている(1頁)。朝鮮総督府が会見で発表したという趣意書を読む
と、次のような狙いがはっきりする。
(1)「半島同胞に対しては内鮮一体観を徹底せしむると共に、更に深く日本精神の本質を了解せしめ
以て時局対処の心構を強からしむる」こと。(2)「内地優良出版物を低廉且迅速に移入し之が普及を
図り、内地文化を注入するは国語の奨励及朝鮮の皇国化の見地より極めて喫緊事」であること。(3)
「時局下検閲の統制上の必要に即応し良書の徹底普及を急速に実行するの要ある」こと。つまり、統治側
から見た「優良出版物」を普及させ、危険書を取り締まるという思想統制のために、出版物の流通機構そ
のものをコントロールしようという試みである。
具体的には「朝鮮総督府機関紙京城日報社を中心として東京出版協会、日本雑誌協会並従来朝鮮内
に取引を有する書籍雑誌取次書店等を糾合し、茲に朝鮮書籍統制会社を組織し一切の中間営業の介
在を廃し、朝鮮内に配給せらるゝ書籍雑誌の一元的統制を図り非常時局に対処」するという方向である。
もちろん、業界としては到底受け入れられるものではない。たとえば趣意書は、「外地割増販売」いわゆ
る外地定価を名指しして、それが「購買力一般に低き朝鮮の現状」からすれば阻害要因になっているとす
る。だが、外地定価は外地の書籍販売では生命線である。卸売価格を下げてもらわなければ到底商売
は割に合わない。また、この総督府の方針は主に朝鮮人たちを念頭において作られているようだが、日
本からの書籍雑誌の主たる購買者は、在朝日本人たちだったはずである。このあたりにも、総督府の思
惑と業界の実情とのずれがあったことだろう。しかも株式の割当や重役の配置を見ればわかるとおり、この
案は書籍雑誌の取次販売業界にとっては、京城日報社という総督府の機関誌によって業界が牛耳られ、
利権が大きく収奪されるという側面ももっていた。
反発は大きく、そのため総督府は強行的な手段に出る。現地業者に「総督府にて官憲筋立会の下に賛
成調印せしめ」までしたようだが6)、結局鮮配は成立しなかった。地元業者を力でねじ伏せたとしても、内
地の書籍雑誌の出版元、そして元取次たちを納得させられなかったからだろう。
結局、朝鮮半島の出版一元化は、内地において出版一元化が実現した後――すなわち日配成立後に
――に、その支店が置かれるというかたちで成就する。
5) 「満洲国に資本金二百万円の大配給会社を新設」『出版通信』1938年8月5日、4頁。
6) 「地元征服に成功 鮮配案徐々動く」『出版通信』1939年9月10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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では内地の動向はどうなっていたのだろうか。1931年の満州事変、1937年の盧溝橋事件と、日本軍の
中国大陸への侵出が本格化し、日中戦争が始まる。戦時色が強まっていくなか、政府は1937年8月に
国民精神総動員実施計画要綱を閣議決定し、内閣情報委員会を改組して内閣情報部を設置する。10
月には有力出版社50社以上が参加し、出版懇話会が結成される。これは内務省と出版業者との懇談会
だったが、次第に出版統制を志向する政府との調整機関となっていく。翌1938年には国家総動員法が
公布され、「東亜新秩序建設」「国防国家体制の確立」が目指され、出版界もこの動きのなかで激しい改
組再編の渦に飲み込まれていく。それは物質的コントロールと内容的コントロールの両面で行われた。す
なわち、物質的には用紙統制であり、内容的には検閲の強化である。満配、鮮配騒動が起こったの
は、この1938、9年のことであった。
ただし注意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は、統制は国家の側からのみ押しつけられたのではないということであ
る。『日配時代史』の記述は、この点で上からの統制という語りの方向が強すぎる。たとえば、1936年3月
には東京出版協会が「業界の機構改革問題」について提言をしている7)。また同じころ、全国書籍商組
合地方協会が、全国書籍商組合聯合会、日本雑誌協会、東京出版協会、大阪図書出版業組合、中
等教科書協会に対して「業界革新に関する建議案」を提示し、そこで経営費高騰や業者間競争による共
倒れを防ぐために「出版の統制」を求めている8)。
さて1940年5月に内閣情報部に新聞雑誌用紙統制委員会が設置される。同じ年7月、第二次近衛内閣
は基本国策要綱を閣議決定し、翌月には国民生活新体制要綱を発表した。ここでいう「新体制」がさまざ
まな物心両面で生活に浸透を図られ、出版業界にもその流れが及んでいく。基本国策要綱の閣議決定
の直後に、東京出版協会、日本雑誌協会、中等教科書協会に解散の指示が出、これらが合流して一
元的な出版統制団体である出版文化協会が結成される(12月)。そして出版物の配給統制団体となる
日本出版配給株式会社(日配)が、1941年5月に創立される。同じく物質面から統制を実行する日本
印刷文化協会(1941年10月)も創立される。
小売書店も同様に、統制の手が伸びた。既存の小売業者組合が新組合へと改組されていく。モデルと
なったのは日配誕生一ヶ月後の6月に創立総会が開かれた東京書籍雑誌小売商業組合で、この枠組み
を踏襲するかたちで、以降全国的に同様の組合が結成されていく。「出版新体制」全体の枠組みは、図
2のように示せる。
7) 『全国書籍業聯合会史』全国書籍業聯合会編集・発行、1941年12月、216頁、225頁。
8) 橋本求『日本出版販売史』講談社、1964年1月、534-537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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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図2> 1942年 出版物発行・配給・販売及用紙割當機構圖
3.日配朝鮮支店時代における朝鮮半島への配送ルート
ここからは具体的に、日配朝鮮支店時代において、どのように内地からの書物が流通していたのかを確
認していこう。
表1は、1935年の時点で朝鮮半島に存在する小売書店が、内地のどの取次店と関係があったのかを
一覧にしたものである。取引先が多岐にわたり、輻輳した流通経路だったことがわかる。日配の理想は全
国規模において、こうした複雑な流通経路を一つの会社が掌握し「一元化」することだった。そしてそれは
実際に実行されていくわけだが、当然大変な困難が伴った。その具体的なありさまはすでに『日配時代
史』でまとめられており、ここでは外地向けの書物流通に関連するところを略述しよう。
日配は、発送地域ごとに営業所を分けて担当した。日配発足間もない1943年8月時点において、新刊
書籍及び予約全集は、たとえば次のような地域分けだった。京橋営業所は関東以北(樺太含む)を、
淡路町営業所と神保町営業所は東京市内を、名古屋営業所は東海・静岡・福井を、という具合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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台湾、朝鮮、満洲、関東州、中国、南洋、小笠原島、伊豆大島は銀座営業所が担当だった9)。ただ
し日配の業務施行細則では、銀座営業所の管掌として「但シ九州、朝鮮、台湾各支店所管区域ニ付テ
ハ適宜分掌ノ任ニ当タルモノトス」と但し書きがある。実際、朝鮮支店の箇所には「朝鮮支店ハ朝鮮全道
ノ配給ヲ管掌ス」とある。おそらくは銀座営業所が内地の統括部署で、朝鮮における配給実務は朝鮮支
店が行っていたということだろう10)。
ただし、これは東京発行の書籍についての分担である。大阪書籍営業所の担当地域を見ると「但シ関
西出版物ニ限リ九州、朝鮮、台湾及外地ヲ含ム」とある。関西で刊行された書籍は、大阪書籍営業所の
担当で朝鮮へ送られていたことになる11)。また、1942年1月21日には、名古屋以西の関西出版物の扱
いを、銀座営業所経由から、大阪支店船場営業所に変更したとある。関東州、支那、九州、朝鮮、台
湾が含まれる(『日配時代史』20頁)。
教科書も別ルートであり、岩本町教科書営業所が朝鮮を含む外地へ送っていた(『日配時代史』113
頁)。中等教科書、青年学校教科書については、内地の東部の各道県に加え、樺太、台湾、朝鮮、
関東州、満洲、中国、その他外地は地方(東部・外地)教科書営業所の担当とされた12)。「赤本」と呼
ばれる特価本や絵本、カルタ類も、担当が異なった。外神田営業所(東京)と博労町営業所(大阪)
がそれぞれ「全地域」への配給を担った。
雑誌は朝鮮支店が担当した。日配の業務施行細則では、「朝鮮支店ハ九段営業所ヨリ中継、京城府内
配給ヲ管掌ス」とある13)。
9) 『日配時代史』所収の「発足時暫定期間中の日配営業所の書籍配給地域」による。115頁。
10) 『日配時代史』所収の「日本出版配給株式会社業務施行細則」による。111頁。
11) 「日本出版配給株式会社業務施行細則」による。
12)『日配通信』1941年9月15日、190頁。『日配通信』『出版普及』『新刊弘報』『出版弘報』からの引用は、
すべて金沢文圃閣による復刻版『出版流通メディア資料趨勢(二)――戦時日本出版配給機関誌編』にもとづ
き、ページ数もこれに従う。
13) 『日配時代史』所収の「日本出版配給株式会社業務施行細則」による。111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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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れらの担当区分も時期によって変動する。日配が「日本出版配給統制株式会社」になった1944年9月
以降は、駿河台営業所が朝鮮、台湾、関東州、満洲国向けを、軍用図書営業所が、中国、蒙彊、南
方を担当した(『日配時代史』47頁)。
4.日配朝鮮支店の体制
日配の朝鮮支店が開設されることが決まったのは、1942年10月頃だったようである。業界紙の『出版同
盟新聞』(1941年10月28日)が「機構整備に一段落を遂げた日配は、今回朝鮮への配給の完璧を期す
るため京城府に朝鮮支店を開設する事に決定、支店長には這般東海道へ復帰した前華中印書局常務
取締役たりし本店営業局勤務(参与)の鈴木多三郎氏を任命」と報じている。『日配時代史』によれば、
「朝鮮でも近く国民学校教育制が施行の運びとなっていて、初等教育校の就学率は六〇%に達していた
のでとくに教科書配給面の仕事が重視された」という(24頁)。実際、鈴木多三郞は『出版普及』に寄せ
た「逞しき朝鮮文化」というエッセイで、朝鮮半島における義務教育の進展と、教科書の普及の必要性に
ついて力説している14)。
社屋は、京城府明治町二丁目の旧大阪屋号書店朝鮮卸部を用いた15)。大阪屋号書店は1936年から
卸部を京城に置いていたが16)、日配が成立して大阪屋号書店の取次部門はそこに吸収合併された。日
配朝鮮支店は、この大阪屋号書店の人的、物質的資産を引き継いだことになる。
とはいえ、大阪屋号系の人脈が主導したのではない。支店次長は総統府警務局長の推薦により、京城
日報社の藤井安正が就任した。「藤井氏は京日政治部長、社会部長を経て現に論説委員で同社の中堅
幹部」だった17)。記述のとおり、支店長も元取次の一つ東海堂出身の鈴木多三郎であったから、支店の
首脳部はむしろ大阪屋号系を排していたとみて良いのかもしれない。
朝鮮半島にあった日配の関連組織は朝鮮支店だけではない。支店開設後さほど経たぬうちに(1943年
4月以前)、日配は都道府県出張所の一つを釜山府大倉町に開設している(『日配時代史』230頁)。
出張所は「当該小売商組合事務所内ニ之ヲ設置スル」(『日配時代史』232頁)とあるので、釜山の有力
書店吉田博文堂の内に設けられたのかもしれない。出張所は支店・営業所所在府県を除き設置されるも
14) 『出版普及』1942年3月1日、10頁。
15) 『出版同盟新聞』1941年12月3日。
16) 『出版通信』1936年6月5日。
17) 『出版同盟新聞』1942年2月17日、3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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ので、「①当該道府県官庁、諸団体及び小売商組との連絡②読者層及び読書傾向の調査③末端配給
網の調査④末端配給調整に関すること⑤共同施設の監督指導⑥特種出版物の配給指令に関すること」を
扱うとされていた(『日配時代史』232頁)。
5.大戦末期の朝鮮半島における小売書店組合について
小売書店はどうだっただろうか。先にも述べたように、内地においては、日配と同年の1941年に従来の
書籍雑誌商組合が小売商組合に転換されていた。この小売商組合も1944年に農商省の指示によって出
版物小売統制組合に姿を変える。「国防経済」という逼迫した戦時下の状況の中で、国が生産から分配
まですべてのルートを統御しようとした試みであった。1943年には情報局により出版事業整備要綱が発表
されており、出版業者の統廃合が進められる一方、小売業においても各道府県で企業整備=書店の転
廃業・休眠が行われた。同時に輸送と配給の簡略化をはかるために、「書籍共同仕入体」「共同荷受所」
の設置も進められた。
朝鮮半島においても、ほぼ同じ方向性だったのだろうと推測されるが、資料が少ない。今後更に調査を
続けなければならないが、現段階で判明していることをまとめておこう。
朝鮮書籍雑誌商組合が、「朝鮮書籍雑誌小売商組合」に改組したのかどうかは確認が取れていない。
ただし、同じく総督府による支配が行われていた台湾において、従来の任意組合が台湾総督府の指導
斡旋によって「台湾書籍雑誌小売商組合」に改組していたことが報じられている18)。おそらくは朝鮮総督
府も同様の指導を行っていたものと考えられる。
「企業整備」すなわち書店の強制的な転廃業・休眠については、次のような記事がある。
朝鮮には書籍雑誌の専門店と称されるほどの者は殆どないと云つてよい。全鮮二十一府、二百二十群二島
の行政区画の中にはなほ書店の存在さへない群島五十九を数へる状態にあり、大抵は他業兼営である。し
かし、出版量の減退、その他の諸条件は必然的に小売書店の整備を要請してゐることは朝鮮と雖も例外で
はない。たゞ今日の朝鮮は、角を矯めて牛を殺す如き文化普及網の整理よりも、ある意味ではかへつて拡
充に力を致さねばならぬ時期にあるので、整備の方法、様式にも自づから特殊性が存し、むしろ強力な文
化普及機構の一環としての配給網の開拓強化が要望されてゐる。
従つて小売店の企業整備は京城の如き大都市は別として、おほむね喫緊の要事とはせられず、昨十月ま
18) 「台湾業界の近状」『出版同盟新聞』1942年11月28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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でに整備を完了したところは京畿、咸北の二道にすぎず、慶南、憬北、忠北、黄海、全南北、咸南等の
各道に於ては、今春早々に大体格好がつくものと見られてゐる〔。〕京城は鉄道康正〔弘済〕会と特殊店をの
ぞき、整備前八十二店あつたものが三十二店残存となり、その六割が整備された形になつてゐる。その他
は殆んど従前の非組合員を対象とした戦線整備の程度を出でず、咸北の如きは今回の整備によつて日配の
取引店から僅か四店を減じたに過ぎない。19)
筆者は無記名だが、おそらく日配朝鮮支部の内部者だと思われる。書き手は、朝鮮半島の書店は「か
へつて拡充に力を致さねばならぬ時期」だと確認しながらも、結局は企業整備がどの程度進んでいるのか
ということを説明していく。この矛盾した書きぶりの中に、総督府の指示と、現場運営者の考えの齟齬を
見るのは、うがち過ぎだろうか。
なお、当時の朝鮮半島に所在した書店の売上などについてのデータも存在するが、時間が許せば報告
することとする。
7.社会装置と文化の意味――おわりに代えて
出版統制の時代は日本の敗戦によって終わりを告げる。1944年ごろから戦線は日本の近傍にまで接近
し、制海権を失い、都市への爆撃が始まる。朝鮮半島への書物流通も、当然のことながら滞っていく。
1944年頃においては、「外地に対する船舶輸送は、米潜水艦の跳梁で危険度が高くなり、一衣帯水の
朝鮮に対する配給も意の如くならず、ために、一般書籍の書店直流方式はやめて、日配朝鮮支店に一
括送本することになった」(『日配時代史』50頁)。これまでは日配営業所(駿河台)から各小売店へ「直
線出荷」されていたものが、11月21日以降は「京城日配支店の手で全島(〔ママ〕)へ配給される」ことに
なったのである20)。同時に代金の回収も朝鮮支店に移管した。
1945年3月には関釜連絡船が途絶える。これによって朝鮮、満洲、中国、南方への連絡と出版物輸送
は途絶した。しかし軍の要望に応え、日配は新潟港から積出し、朝鮮の羅津経由で大陸方面へ送ったと
いう。だがこのルートも同年5月には絶たれ、新潟港に積み荷が滞るという事態になった(『日配時代史』
207頁)。「処置に困った長野支店では、お寺の縁の下を借用して保管していたところ、夜な夜な泥棒が
19) 「外地出版文化の実情を探る(3) 圧縮に非ず飛躍を 期待さる鮮内出版物 朝鮮の巻(二)」『出版弘報』19
45年3月11日、318頁。
20) 『出版弘報』1944年11月11日、104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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あらわれて大分盗難にあってしまった」(同56頁)。
この頃はすでに東京でも大規模な空爆が始まっている。大阪や神戸、名古屋、福岡なども同様であ
る。出版社も、日配本社の各営業所も数多く被害を受け、店員たちは店よりも命を守らなければならない
状況になった。確認されているこの時期の日配の機関誌『出版弘報』は、6月6日が最後である。
*
最後に、今回行ったような物質的なレベルにおける出版流通の装置の追跡が、どのように文化の意味
内容の考察と交差しうるかということについて触れて終わりたい。
小売書店や取次業者に注目する書物流通の研究は、それ自体では文化的意味を取り扱わない。端的
に言えば、それはどのような内容の本が流通したのかを問わないからである。本を運ぶ物質的な社会装
置や技術の水準は、本に書き込まれた内容の水準とは質を異にするため、直線的には結びつけて考え
られない。
だがたとえば次のような言明を見てみる。「今日の朝鮮は、出版、配給の観点から見ても、なほ多くの
未完成なものを蔵した広大な地域であり、且つ厖大な人口を擁した未成熟で、複雑な文化地帯であ
る」。それゆえ、「一刻も早く皇国日本の完全なる一分身として育成強化しなければならぬこと、この線に
副ふて朝鮮の全能力を戦力化する。――内地出版物についても、鮮内出版物についても施策の関心は
専らこの点にかゝつてゐる」21)。
この語りは、出版物をめぐる施策が、朝鮮を「皇国日本の完全なる一分身として育成強化」し、その「全
能力を戦力化」するためにあると語っている。社会的装置はそれ自体は物質的だが、それを人間によっ
て駆動させるためには「意味」や「価値」が必要となる。出版の戦時体制への組み込みは、社会的装置の
組み込みであると同時に、意味の組み込みでもあった。
そして興味深いことに、この意味のレベルにおいて、社会的装置は決定不能な多義性を帯びる。たとえ
ば、次の表2を見てみる。圧倒的多数の読者が婦人雑誌と大衆雑誌を求めている。もちろん、この時期
の雑誌は国策推進の道具と化していたが、だが娯楽色が完全に払拭されていたわけではない。先の「朝
鮮の全能力を戦力化」せよと言っていた評論自らが、同じ文中でこう述べていた。
朝鮮出版会はいよいよ近く創立を見、本格的な出版・配給統制の衝に当たらんとしてゐるが、昨年までは緩
慢な出版行政の間隙に乗じて相当いかゞはしい出版物の氾濫を来たし、紙飢饉の折柄、読者の顰蹙を買
21) 前掲「外地出版文化の実情を探る(3)」319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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ふものも少なくなかつた。刊行物の大半は時局の啓蒙、科学的知識の普及、徴兵制への準備等を目標とし
て企画されたものであつたが、その多くは良心的工夫と表現に欠くるところがあつた。22)
筆者が「相当いかゞはしい」といい、「読者の顰蹙を買ふ」といったものが、どのようなものだったのかはこ
の文章からはわからない。それは、大衆の好奇心や歓心を買うためだけの、低俗な商業的娯楽物だった
かもしれない。あるいは、反体制的なニュアンスを奥にひそめたテキストだったかもしれない。
戦時国家は、社会を隅から隅まで統制しようとした。出版人たちは、組織に所属していればいるほど、
国家権力に沿うかたちに自からと、自からの所属する組織を変えていか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かくし
て、出版業の諸団体は国策と一体化し、権力の手先と化した。彼らはそれを強制されて行ったが、しか
し同時に組織人としてそれを自主的にも行った。それは批判されるべき歴史であり、反省を引き継ぐべき
過去である。そして、現代においてなお顧みるべき教訓でもある。
だが、そうした権力と統制の側だけみるのは、時代の一部分でしかあるまい。社会装置の上で駆動する
文化の動態は、より多様である。また、社会装置そのものはイデオロギーとは別に存続し機能しうる。たと
えば柴野京子が指摘したように、日配が実現した書物の一元配給システムは、戦後日本の高度な取次シ
ステムへと引き継がれた23)。
出版という世界は多くの水準の要素が重なり合い、かみ合って動いている。その複雑さを縮減することな
く、理解していくことが必要だろう。
22) 「外地出版文化の実情を探る(2) 沸る皇民魂 力強き皇国の分身 朝鮮の巻」『出版弘報』1945年2月21日、2
83頁。
23) 柴野京子『書棚と平台――出版流通というメディア――』弘文堂、2009年8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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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表2>雑誌分類賣行比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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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지와 외지를 잇는 서적 네트워크와 한반도의 소매서점
- 일본출판배급주식회사 시대를 중심으로 -
히비 요시타카(日比嘉高)
나고야대학원 문학연구과
<목 차>
1. 내지와 한반도를 잇는 유통망ㆍ약사(略史)
2. ‘선배(鮮配)’소동과 출판 일원 배급에의 길
3. 일배 조선지점 시대의 한반도로의 배송 루트
4. 일배 조선지점의 체제
5. 대전 말기 한반도의 소매서점조합에 대하여
7. 사회장치와 문화의 의미 - 맺음말을 대신해서
본 발표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일본 내지와 외지를 연결한 서적 유통네트워크에 대해 고
찰한다. 특히 중점적으로 검토하는 것은 일본출판배급주식회사(일배) 성립 이후의 내지와 한반도
를 연결하는 유통망이다. 또한 이와 관련해서 이 시기 한반도의 소매서점의 존재형태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일배의 활동에 대해서는 관계자가 훗날 정리한 상세한 역사인 『日配時代史』가 있다.1) 단, 이
자료는 제목이 나타내는 바와 같이 일배 전체의 업무나 조직의 변천을 대체로 편년체로 서술한
것이며, 특정한 테마나 지역에 대해서는 정보가 분산되어 있어 윤곽을 파악하기 곤란하다. 여기
서는 『日配時代史』의 기술을 참고로 하면서, 거기에 일배가 간행하고 있던 책자 『日配通信』,『出
版普及』,『新刊弘報』,『出版弘報』, 기타를 교차시켜 한반도를 무대로 한 서적유통의 실태를 파악하
1) 荘司徳太郎, 清水文吉,『資料年表 日配時代史-現代出版流通の原点-』(出版ニュース社, 1980). 이하
『日配時代史』로 표기한다.
56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고자 한다.
기본적으로는 자료 분석에 의한 사실 정리가 많겠지만, 소매서점이나 서적의 유통기구 등 사회
적인 장치에서 생겨나는 문화의 동태(動態)에 대해서도 살펴보는 것이 최종적인 목표이다.
본 발표의 제1, 2절 부분에 관해서는 기발표의 졸고가 있으나, 제3절 이후의 전제가 되므로 간
단하게 재론함을 미리 밝혀둔다.2)
1. 내지와 한반도를 잇는 유통망ㆍ약사(略史)
먼저 근대 일본의 서적유통 구조와 그 변화에
대해 간단히 정리해둔다. 메이지(明治)에서 다이쇼
(大正) 중반에 걸쳐서는 출판사와 소매서점이 연
락을 취하는 직접 거래의 시대였다. 거래 중간에
그 지역의 도매를 겸한 대규모 소매서점이 개재하
는 경우도 있었다. 유통업자가 존재했지만, 그 힘
은 아직 크지 않았다. 그 후 도쿄도(東京堂)나 호
쿠류칸(北隆館) 등 대형 유통회사(대유통업체(元取
次)라 함)가 성장하여 독점적인 권익을 확대해간
다. 다이쇼에서 쇼와(昭和) 초기에 걸쳐서의 일이
다.
잡지와 서적은 다소 유통의 형태가 달랐다. 전
국적인 유통체제가 빨리 정비된 것은 잡지이다.
1910년대에는 대유통업체를 중심으로 하는 독점
적 유통체제가 확립한다. 이에 비해 서적은 중소
유통회사가 오래 남아 복잡한 유통경로를 갖고 있
었다. 일배 성립 이전 서적유통의 구조는 왼쪽
그림1
그림과 같이 도식화할 수 있다(그림1).
2) 日比,「外地書店とリテラシーのゆくえ-第二次大戦前の組合史・書店史から考える-」,『日本文学』62-1
(2013.1)(日本文学協会);日比,「朝鮮半島における日本語書店の展開-戦前外地の書物流通(1)-」,『跨境 日本語文学研
究』1(20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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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유통의 말단인 소매서점의 조직으로 눈을 돌리자. 교토나 오사카, 에도(江戶=도쿄) 등에서
는 이미 메이지 이전부터 동업자 조직이 존재해 있었다. 근대에도 이러한 대도시부에는 조합이
일찍부터 성립한다(단 이 시기의 ‘책방’은 출판과 소매를 겸했다). 소매서점이 결성한 전국 규모
의 조합의 등장은 1920년까지 기다려야 했다. 이 해에 전국서적상조합연합회가 성립한다. 가격인
하 경쟁에 의한 투매(投賣)로 서점 경영이 압박을 당하는 것을 막는다는 것이 결성의 큰 목적이
었다. 전국 조직이 결성되고, 그 주도로 조직화되지 않은 지방에서 조합의 결성이 촉진되었다.
한반도에서는 1921년에 조선서적상조합이 성립했다. 조합원 이외의 서적 판매는 원칙적으로 금
지되었기 때문에 체제는 강고해지고, 서적의 전국적 유통체제가 확립되어갔다.
여기서 일본 통치하 한반도의 소매서점의 역사에 대해서도 간단히 언급해둔다. 1907년 11월
발행 『全国書籍商名簿』(도쿄서적상조합사무소)에 이름이 있는 외지 서점은 가라후토(樺太)가 1곳,
대만이 12곳, 청국이 26곳, 미국(밴쿠버, 하와이를 포함)이 32곳, 조선(표기는 ‘한국’)이 22곳이
다. 한반도 분의 내역은 경성에 일한서방(日韓書房, 森山美夫)을 포함한 4곳, 인천항에 2곳, 부산
항에 박문당(博文堂, 吉田市次郎)을 포함한 2곳, 진남포에 3곳, 함흥부에 2곳, 목포에 2곳, 대구
에 2곳 등이다. 점주는 모두 일본인인 것 같다.
1924년 3월의 『大正十三年一月現在 全国書籍商組合員名簿』(전국서적상조합연합회)에서 한반
도의 조합원 수는 99명이다. 이 자료로부터는 서점이 있는 지역이 확대된 것, 내지 서점의 지점
이 생긴 것, 조선인 서점주가 가입해있는 것 등을 알 수 있다.
1938년 3월의 『全国書籍業組合員名簿』(전국서적업연합회 편집, 발행)에는 ‘조선서적상조합원’
으로 358명이 기재되어 있다. 이름에서 조선인으로 추정되는 조합원은 104명이다.
『全国書籍商総覧』3)에 의하면 한반도에서 가장 일찍 일본인이 개점한 서점은 회령의 회령박문
관(會寧博文館, 점주 小池奥吉)으로 1892년의 일이었다. 그 후 1906년에 부산에 요시다박문당
(吉田博文堂, 점주 吉田市次郎)이 생기고, 바로 이어 경성의 일한서방(점주 森山美夫)이 개점한
다.4) 외지를 대상으로 한 서적 유통의 가장 대형점인 오사카야고서점(大阪屋号書店)이 지점을 연
것은 1914년이었다. 부산의 박문당, 경성의 일한서방, 오사카야고서점 경성지점의 3곳이 한반도
의 3대 일본서점이며, 1920년대 이후 조합의 결성을 비롯한 업계의 동향도 이 서점의 관계자들
이 견인해갔다.
3) 後藤金壽 編,『全国書籍商総覧』(新聞之新聞社, 1935).
4) 창업 당시의 일한서방에 대해서는 森山美夫,「朝鮮の出版及読書界」,『朝鮮』1913년 4월, 166쪽.
58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2. ‘선배(鮮配)’소동과 출판 일원 배급에의 길
서적 배급을 국가적인 통제 하에 두려는 움직임은 내지가 아니라 외지에서 먼저 구체화되었다.
만주에서 일원적 배급조직 설립의 소문이 돈 것은 1938년의 일이었다.5) 그 이듬해 출판 관계의
업계지 『出版通信』(1939년 4월 10일)에는 “이번에는 조선서적통제회사안(案)/ 기관지 『京日』을
주체로/ 총독부 취의서를 발표”라는 기사가 게재되어 있다(1쪽). 조선총독부가 회견에서 발표했
다는 취의서를 읽으면 다음과 같은 목적이 분명히 드러난다.
(1)“반도 동포에 대해서는 내선일체관을 철저히 하는 동시에 나아가 일본정신의 본질을 깊이
이해시킴으로써 시국 대처의 자세를 강화”시킬 것. (2)“내지의 우량 출판물을 저렴하고 신속하게
이입(移入)하여 보급을 꾀하고 내지 문화를 주입하는 것은 국어의 장려 및 조선의 황국화 견지에
서 매우 긴요한 일”이라는 것. (3)“시국 하 검열의 통제상 필요에 즉응하여 양서의 철저 보급을
급속히 실행할 필요가 있다”는 것. 즉 통치 측에서 본 ‘우량 출판물’을 보급시키고 위험서를 단
속한다는 사상통제를 위해 출판물의 유통기구 자체를 통제하려는 시도이다.
구체적으로는 “조선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사를 중심으로 도쿄출판협회, 일본잡지협회 및 종래
조선 내에 거래가 있는 서적잡지 유통서점 등을 규합하여, 여기에 조선서적통제회사를 조직해서
일체의 중간 영업의 개재를 없애고, 조선 내에 배급되는 서적잡지의 일원적 통제를 꾀하여 비상
시국에 대처”한다는 방향이다.
물론 업계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취의서는 ‘외지 할증판매’, 이
른바 외지 정가를 가리켜 그것이 “일반적으로 구매력이 낮은 조선의 현상(現狀)”에서 보면 저해
요인이 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외지 정가는 외지의 서적 판매에서는 생명선이다. 도매가격을
인하해주지 않으면 도저히 장사는 수지가 맞지 않는다. 또한 이 총독부의 방침은 주로
조선인들을 염두에 두고 작성된 듯하나, 일본에서 오는 서적잡지의 주된 구매자는 재조 일본인들
이었다. 이 점에서도 총독부의 생각과 업계의 실정 사이에 갭이 존재했을 것이다. 더욱이 주식의
할당이나 중역 배치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안은 서적잡지의 유통판매업계에 있어서는 경성일
보사라는 총독부 기관지에 의해 업계가 좌우되고, 이권이 크게 수탈당하는 측면도 갖고 있었다.
반발은 컸고, 그로 인해 총독부는 강행적인 수단으로 나왔다. 현지 업자에게 “총독부에서 관헌
입회하에 찬성 조인을 시키기”까지 한 모양이나,6) 결국 선배(鮮配)는 성립하지 못했다. 현지 업
자를 힘으로 덮쳐눌렀다 하더라도 내지의 서적잡지 출판사와 대유통업체들을 납득시키지 못했기
5) 「満洲国に資本金二百万円の大配給会社を新設」,『出版通信』1938년 8월 5일, 4쪽.
6) 「地元征服に成功 鮮配案徐々動く」,『出版通信』1939년 9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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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때문일 것이다.
결국 한반도의 출판 일원화는 내지에서 출판 일원화가 실현된 후, 즉 일배(日配) 성립 후에 그
지점이 설치되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그럼 내지의 동향은 어떠했을까.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노구교(盧溝橋)사건으로 일본군의
중국대륙으로의 침출(侵出)이 본격화하고, 중일전쟁이 시작된다. 전쟁색이 짙어져가는 가운데 정
부는 1937년 8월에 국민정신총동원실시계획요강을 각의 결정하고, 내각정보위원회를 개편하여
내각정보부를 설치한다. 10월에는 유력 출판사 50사 이상이 참가하여 출판간화회(懇話會)가 결성
된다. 이것은 내무성과 출판업자의 간담회였으나, 점차 출판 통제를 지향하는 정부와의 조정기관
화 되어 간다. 이듬해 1938년에는 국가총동원법이 공포되고, ‘동아신질서 건설’, ‘국방국가체제의
확립’이 지향되면서 출판계도 이 움직임 속에서 극심한 개조, 재편의 소용돌이에 휩쓸려간다. 그
것은 물질적 통제와 내용적 통제의 양면에서 행해졌다. 즉 물질적으로는 용지 통제이며, 내용적
으로는 검열의 강화이다. 만배(滿配), 선배(鮮配) 소동이 일어난 것은 바로 이 1938, 39년의 일이
었다.
단, 주의해야 할 것은 통제는 국가 측에서만 강요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日配時代史』의 기
술은 이 점에서 위로부터의 통제라는 어조가 지나치게 강하다. 예컨대 1936년 3월에는 도쿄출판
협회가 ‘업계의 기구개혁문제’에 대해 제언을 하였다.7) 또한 같은 무렵 전국서적상조합 지방협회
가 전국서적상조합연합회, 일본잡지협회, 도쿄출판협회, 오사카도서출판업조합, 중등교과서협회에
대해 ‘업계 혁신에 관한 건의안’을 제시하고, 거기서 경영비 등귀나 업자간 경쟁에 의한 공멸을
막기 위해 ‘출판의 통제’를 요구하였다.8)
한편, 1940년 5월에 내각정보부에 신문잡지 용지통제위원회가 설치된다. 같은 해 7월, 제2차
고노에(近衛)내각은 기본국책요강을 각의 결정하고, 다음 달에는 국민생활신체제요강을 발표했다.
여기서 말하는 ‘신체제’가 물심양면으로 다양하게 생활에 침투를 꾀하고, 출판업계에도 그 흐름
이 미치게 된다. 기본국책요강의 각의 결정 직후에 도쿄출판협회, 일본잡지협회, 중등교과서협회
에 해산의 지시가 내렸고, 이들이 합류해서 일원적인 출판통제단체인 출판문화협회가 결성된다
(12월). 그리고 출판물의 배급통제단체가 되는 일본출판배급주식회사(일배)가 1941년 5월에 창립
된다. 마찬가지로 물질면에서 통제를 실행하는 일본인쇄문화협회(1941년 10월)도 창립된다.
소매서점도 마찬가지로 통제의 손길이 미쳤다. 기존의 소매업자 조합이 신조합으로 개편되었
다. 모델이 된 것은 일배 탄생 한 달 후인 6월에 창립총회가 열린 도쿄서적잡지소매상업조합으
7) 全国書籍業聯合会 編,『全国書籍業聯合会史』(全国書籍業聯合会, 1941), 216쪽, 225쪽.
8) 橋本求,『日本出版販売史』(講談社, 1964), 534-5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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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이 틀을 답습하는 형태로 이후 전국적으로 같은 종류의 조합이 결성되어 간다. ‘출판신체제’
전체의 구도는 <그림2>와 같다.
<그림2> 1942년 출판물의 발행ㆍ배급ㆍ판매 및 용지할당 기구도
3. 일배 조선지점 시대의 한반도로의 배송 루트
이제부터는 구체적으로 일배 조선지점 시대에 내지로부터의 서적이 어떻게 유통되고 있었는지
를 확인해가기로 한다.
<표1>은 1935년 시점에서 한반도에 존재한 소매서점이 내지의 어떤 유통점과 관계가 있었는
지를 일람한 것이다. 거래처가 다기에 걸쳐있고, 혼잡한 유통경로였음을 알 수 있다. 일배의 이
상은 전국 규모로 이러한 복잡한 유통경로를 하나의 회사가 장악하여 ‘일원화’하는 것이었다. 그
리고 그것은 실제로 실행되어 가는데, 당연히 상당한 곤란이 따랐다. 그 구체적인 상황은 이미
『日配時代史』에서 정리하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외지 대상의 서적유통에 관련되는 점을 약술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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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1>한반도의 서점과 그 거래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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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1>은 1935년 시점에서 한반도에 존재한 소매서점이 내지의 어떤 유통점과 관계가 있었는
지를 일람한 것이다. 거래처가 다기에 걸쳐있고, 혼잡한 유통경로였음을 알 수 있다. 일배의 이
상은 전국 규모로 이러한 복잡한 유통경로를 하나의 회사가 장악하여 ‘일원화’하는 것이었다. 그
리고 그것은 실제로 실행되어 가는데, 당연히 상당한 곤란이 따랐다. 그 구체적인 상황은 이미
『日配時代史』에서 정리하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외지 대상의 서적유통에 관련되는 점을 약술한
다.
일배는 발송 지역마다 영업소를 나누어 담당했다. 일배가 발족한 지 얼마 안 된 1943년 8월
시점에서 신간 서적 및 예약 전집은 다음과 같은 지역으로 나뉘었다. 교바시(京橋)영업소는 간토
(關東) 이북(가라후토 포함)을, 아와지초(淡路町)영업소와 진보초(神保町)영업소는 도쿄 시내를,
나고야(名古屋)영업소는 도카이(東海)ㆍ시즈오카(静岡)ㆍ후쿠이(福井)를 담당한다는 식이다. 대만,
조선, 만주, 관동주, 중국, 남양, 오가사와라제도(小笠原諸島), 이즈오시마(伊豆大島)는 긴자(銀座)
영업소가 담당했다.9) 단, 일배의 사업시행세칙에는 긴자영업소의 관장(管掌)으로서 “단 규슈, 조
선, 대만 각 지점의 소관(所管) 구역에 대해서는 적절히 분장(分掌)하는 것으로 한다.”고 단서가
붙어있다. 실제로 조선지점 부분에는 “조선지점은 조선 전도의 배급을 관장한다.”고 나온다. 아마
도 긴자영업소가 외지의 총괄 부서이고, 조선에서의 배급 실무는 조선지점이 담당하고 있었다는
의미일 것이다.10)
단, 이것은 도쿄 발행 서적에 대한 분담이다. 오사카 서적 영업소의 담당 지역을 보면 “단, 간
사이(關西) 출판물에 한해 규슈, 조선, 대만 및 외지를 포함한다.”고 나온다. 간사이에서 간행된
서적은 오사카 서적 영업소의 담당으로 조선에 보내졌다는 것이 된다.11) 또한 1942년 1월 21일
에는 나고야 이서(以西)의 간사이 출판물의 취급을 긴자영업소 경유에서 오사카지점 센바(船場)영
업소로 변경했다고 나온다. 관동주, 중국, 규슈, 조선, 대만이 포함된다(『日配時代史』, 20쪽).
교과서도 다른 루트였는데, 이와모토초(岩本町) 교과서영업소가 조선을 포함한 외지로 보내고
있었다(『日配時代史』, 113쪽). 중등교과서, 청년학교 교과서에 대해서는 내지의 동부 각 도현(道
縣)에 더해 가라후토, 대만, 조선, 관동주, 만주, 중국, 기타 외지는 지방(동부ㆍ외지) 교과서영업
소가 담당했다.12) ‘아카혼(赤本)’으로 불리는 특가본이나 그림책, 카르타류도 담당이 달랐다. 소
9) 『日配時代史』 수록 ‘발족시 잠정기간 중 일배 영업소의 서적 배급지역’에 의함. 115쪽.
10) 『日配時代史』 수록 ‘일본출판배급주식회사 업무시행세칙’에 의함. 111쪽.
11) ‘일본출판배급주식회사 업무시행세칙’에 의함.
12) 『日配通信』1941년 9월 15일, 190쪽. 『日配通信』,『出版普及』,『新刊弘報』,『出版弘報』로부터의 인용은 모두 金沢
文圃閣에 의한 복각판 『出版流通メディア資料趨勢(二)-戦時日本出版配給機関誌編-』에 의거하며, 페이지 수도
이에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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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칸다(外神田)영업소(도쿄)와 바쿠로마치(博勞町)영업소(오사카)가 각기 ‘전지역’으로의 배급을 담
당했다.
잡지는 조선지점이 담당했다. 일배의 업무시행세칙에는 “조선지점은 구단(九段)영업소로부터
중계, 경성부 내 배급을 관장한다.”로 되어있다.13)
이들 담당 구분도 시기에 따라 변동한다. 일배가 ‘일본출판배급통제주식회사’가 된 1944년 9월
이후는 스루가다이(駿河台)영업소가 조선, 대만, 관동주, 만주국을, 군용도서 영업소가 중국, 몽강
(蒙疆), 남방을 담당했다(『日配時代史』, 47쪽).
4. 일배 조선지점의 체제
일배의 조선지점 개설이 결정된 것은 1942년 10월경이었던 것 같다. 업계지인 『出版同盟新聞』
(1941년 10월 28일)이 “기구 정비가 일단락된 일배는 이번에 조선으로의 배급 완벽을 기하기 위
해 경성부에 조선지점을 개설하기로 결정, 지점장에는 이번에 도카이도(東海堂)로 복귀한 전 화
중인서국(華中印書局) 상무취체역이었던 본점 영업국 근무(參與) 스즈키 다사부로(鈴木多三郎) 씨
를 임명”했다고 보도했다. 『日配時代史』에 의하면 “조선에서도 머지않아 국민학교 교육제가 시
행될 예정으로, 초등교육교(校)의 취학률은 60%에 달하고 있었으므로 특히 교과서 배급면의 일
이 중시되었다.”고 한다(24쪽). 실제로 스즈키 다사부로는 『出版普及』에 게재한 「늠름한 조선문
화」라는 에세이에서 조선에서의 의무교육의 진전과 교과서 보급의 필요성에 대해 역설하였다.14)
사옥은 경성부 메이지초(明治町) 2丁目의 구 오사카야고서점 조선도매부를 사용했다.15) 오사카
야고서점은 1936년부터 도매부를 경성에 두고 있었으나,16) 일배가 성립한 뒤 오사카야고서점의
유통부문은 그리로 흡수 합병되었다. 일배 조선지점은 이 오사카야고서점의 인적, 물질적 자산을
계승한 셈이 된다.
그렇긴 해도 그것을 오사카야고 계의 인맥이 주도한 것은 아니다. 지점 차장에는 총독부 경무
국장의 추천으로 경성일보사의 후지이(藤井安正)가 취임했다. “후지이 씨는 경성일보 정치부장,
사회부장을 거쳐 현재 논설위원으로, 동사(同社)의 중견간부”였다.17) 앞서 기술한 것처럼 지점
13) 『日配時代史』 수록 ‘일본출판배급주식회사 업무시행세칙’에 의함. 111쪽.
14) 『出版普及』1942년 3월 1일, 10쪽.
15) 『出版同盟新聞』1941년 12월 3일.
16) 『出版通信』1936년 6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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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 대유통업체의 하나인 도카이도(東海堂) 출신의 스즈키였으므로 지점의 수뇌부는 오히려 오
사카야고 계를 배제했다고 봐도 좋을지 모른다.
한반도에 있던 일배의 관련조직은 조선지점만이 아니었다. 지점 개설 후 얼마 지나지 않아
(1943년 4월 이전) 일배는 도도부현(都道府県) 출장소의 하나를 부산부 오쿠라초(大倉町)에 개설
했다(『日配時代史』, 230쪽). 출장소는 “해당 소매상 조합사무소 내에 이를 설치한다”(『日配時代
史』, 232쪽)고 나오므로, 부산의 유력 서점 요시다박문당 내에 설치되었을지도 모른다. 출장소는
지점ㆍ영업소 소재 부현(府縣)을 제외하고 설치되는 것으로, “⓵해당 도부현(道府縣) 관청, 제 단
체 및 소매상 조합과의 연락, ⓶독자층 및 독서경향의 조사, ⓷말단 배급망의 조사, ⓸말단 배급
조정에 관한 일, ⑤공동시설의 감독 지도, ⑥특종 출판물의 배급 지령에 관한 일”을 취급한다고
되어 있었다(『日配時代史』, 232쪽).
5. 대전 말기 한반도의 소매서점조합에 대하여
소매서점은 어떠했을까. 앞에서도 서술한 바와 같이 내지에서는 일배와 같은 해인 1941년에
종래의 서적잡지상조합이 소매상조합으로 전환되었다. 이 소매상조합도 1944년에 농상성(農商省)
의 지시에 의해 출판물 소매통제조합으로 모습을 바꾼다. ‘국방경제’라는 궁박한 전시 하 상황
속에서 국가가 생산에서 분배까지 모든 루트를 통제하려는 시도였다. 1943년에는 정보국에 의해
출판사업정비요강이 발표되어 출판업자의 통폐합이 진행되는 한편, 소매업에서도 각 도부현에서
기업정비=서점의 전ㆍ폐업, 휴면이 행해졌다. 동시에 수송과 배급의 간략화를 꾀하기 위해 ‘서적
공동구입체’, ‘공동하물인수소(荷物引受所)’의 설치도 추진되었다.
한반도에서도 거의 같은 방향성이었으리라고 추측되나 자료가 많지 않다. 앞으로 더 조사를 해
야겠지만, 현 단계에서 판명된 것을 정리해둔다.
조선서적잡지상조합이 ‘조선서적잡지소매상조합’으로 개편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단, 마
찬가지로 총독부에 의한 지배가 행해지고 있던 대만에서 종래의 임의 조합이 대만총독부의 지도
알선에 의해 ‘대만서적잡지소매상조합’으로 개편된 것이 보도되었다.18) 아마 조선총독부도 같은
지도를 했으리라고 생각된다.
‘기업정비’ 즉 서점의 강제적인 전ㆍ폐업, 휴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17) 『出版同盟新聞』1942년 2월 17일, 3쪽.
18) 「台湾業界の近状」,『出版同盟新聞』1942년 11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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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는 서적잡지의 전문점으로 칭할 정도의 서점이 거의 없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전국 21
부(府), 220군(郡), 2도(島)의 행정구획 중에는 여전히 서점의 존재조차 없는 군ㆍ도가 59개소를
헤아리는 상태이며, 대개는 다른 업종과 겸영이다. 그러나 출판량의 감소, 기타의 조건들이 필연
적으로 소매서점의 정비를 요청하고 있음은 조선일지라도 예외가 아니다. 다만 오늘날의 조선은
교각살우(矯角殺牛)와 같은 문화 보급망의 정리보다는 어떤 의미에서는 도리어 확충에 힘을 써야
할 시기에 있으므로 정비의 방법, 양식에도 자연히 특수성이 존재하며, 오히려 강력한 문화 보급
기구의 일환으로서 배급망의 개척, 강화가 요망되고 있다.
따라서 소매점의 기업정비는 경성과 같은 대도시는 별도로, 대개는 긴요한 일로 여기지 않아
지난 10월까지 정비를 완료한 곳은 경기, 함북의 2도에 불과하고, 경남, 경북, 충북, 황해, 전남,
전북, 함남 등 각 도에서는 올 봄 초에 대체의 형태가 잡힐 것으로 보인다. 경성은 철도강정회(鐵
道康正[弘濟]會)와 특수점을 제외하고 정비 전 82개점이었던 것이 32개점으로 줄어 전체의 6할이
정비된 형태가 되었다. 기타는 거의 종전의 비조합원을 대상으로 한 전선(戰線) 정비의 정도에 머
물렀고, 함북의 경우는 이번 정비에 의해 일배의 유통점 중 겨우 4개점을 줄인 데 불과하다.19)
무기명의 기사이지만 필자는 아마도 일배 조선지부의 내부자로 보인다. 이 필자는 한반도의 서
점은 “도리어 확충에 힘을 써야 할 시기”라고 확인하면서도 결국은 기업정비가 어느 정도 진행
되고 있는가를 설명해간다. 이 모순된 기술 속에서 총독부의 지시와 현장운영자의 생각의 어긋남
을 보는 것은 지나친 천착일까.
당시 한반도에 소재한 서점의 매상 등에 대한 데이터도 존재하는데, 시간이 허락하면 발표하겠
다.
7. 사회장치와 문화의 의미 – 맺음말을 대신해서
출판 통제의 시대는 일본의 패전에 의해 종말을 고한다. 1944년경부터 전선은 일본의 근방까
지 접근한다. 제해권을 상실하고 도시로의 폭격이 시작된다. 한반도로의 서적 유통도 당연히 정
체되어 간다.
1944년경에는 “외지에 대한 선박 수송은 미 잠수함이 날치는 바람에 위험도가 높아져 근린의
조선에 대한 배급도 여의치 않았다. 때문에 일반 서적의 서점 직류(直流)방식은 그만두고, 일배
19) 「外地出版文化の実情を探る(3) 圧縮に非ず飛躍を期待さる鮮内出版物 朝鮮の巻(二)」,『出版弘報』1945년 3월 11
일, 3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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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지점으로 일괄 배송하게 되었다”(『日配時代史』, 50쪽). 이제까지는 일배 영업소(스루가다이)
로부터 각 소매점으로 ‘직선 출하’되고 있던 것이 11월 21일 이후 “경성 일배 지점의 손으로 전
국에 배급”되게 되었던 것이다.20) 동시에 대금의 회수도 조선지점으로 이관했다.
1945년 3월에는 관부연락선이 중단되었다. 이로 인해 조선, 만주, 중국, 남방으로의 연락과 출
판물 수송은 끊어졌다. 그러나 군의 요망에 따라 일배는 니이가타항(新潟港)에서 출하하여 조선
의 나진 경유로 대륙 방면으로 보냈다고 한다. 허나 이 루트도 같은 해 5월에는 끊어지고, 니이
가타항에 짐들이 적체되는 사태를 낳았다(『日配時代史』, 207쪽). “처치 곤란했던 나가노(長野)지
점에서는 절의 툇마루 아래를 빌려 보관하고 있던 중 밤마다 도둑이 들어 대부분 도난당하고 말
았다”(『日配時代史』, 56쪽).
이 무렵은 이미 도쿄에서도 대규모 공습이 시작되었다. 오사카, 고베, 나고야, 후쿠오카 등도
마찬가지였다. 출판사도, 일배 본사의 각 영업소도 많은 수가 피해를 입었고, 점원들은 가게보다
도 목숨을 지켜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확인된 이 시기 일배의 기관지 『出版弘報』는 6월 6일이
마지막이다.
끝으로 이번에 검토한 물질적 레벨에서의 출판 유통장치의 추적이 어떻게 문화의 의미내용의
고찰과 교차될 수 있을까라는 문제에 대해 언급하면서 마치고자 한다.
소매서점이나 유통업자에 주목하는 서적 유통의 연구는 그 자체로는 문화적 의미를 다루지 않
는다. 단적으로 말해 그것은 어떠한 내용의 책이 유통되었는지를 묻지 않기 때문이다. 책을 운반
하는 물질적인 사회장치나 기술의 수준은 책에 기술된 내용의 수준과는 질을 달리 하기 때문에
양자를 직결시켜서 생각할 수 없다.
허나 예컨대 다음과 같은 말을 생각해보자. “오늘날의 조선은 출판, 배급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여전히 많은 미완성의 것을 내장한 광대한 지역이며, 방대한 인구를 안고 있는 미성숙하고 복잡
한 문화지대이다.” 그러므로 “한시라도 빨리 황국 일본의 완전한 한 분신으로서 육성, 강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이 선에 따라 조선의 전 능력을 전력화(戰力化)한다. --내지 출판물에 대
해서나 조선 내 출판물에 대해서나 시책의 관심은 오로지 이 점과 연관되어 있다.”21)
이 서술은 출판물을 둘러싼 시책이 조선을 “황국 일본의 완전한 한 분신으로서 육성, 강화”하
여 그 “전 능력을 전력화”하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다. 사회적 장치는 그 자체는 물질적
이지만, 그것을 인간에 의해 구동(驅動)시키기 위해서는 ‘의미’나 ‘가치’가 필요하다. 출판의 전시
20) 『出版弘報』1944년 11월 11일, 104쪽.
21) 앞의 「外地出版文化の実情を探る(3)」, 319쪽.
内地 外地を結ぶ書者のネットワ
クと朝鮮半島の小売書店
67
체제로의 편입은 사회적 장치의 편입인 동시에 의미의 편입이기도 했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이 의미의 레벨에서 사회적 장치는 결정 불능한 다의성을 띈다. 예를 들
면 다음의 <표2>를 보자. 압도적 다수의 독자가 여성잡지와 대중잡지를 찾고 있다. 물론 이 시기
의 잡지는 국책 추진의 도구가 되었으나, 오락색이 완전히 불식된 것은 아니다. 앞의 “조선의 전
능력을 전력화”하라고 말한 평론 스스로가 같은 글 속에서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조선출판회는 드디어 조만간 창립되어 본격적인 출판ㆍ배급통제의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작년
까지는 완만한 출판행정의 간극을 틈타 상당히 의심스러운 출판물의 범람을 초래했고, 종이 기근
인 시절에 독자의 빈축을 사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간행물의 태반은 시국의 계몽, 과학적 지식의
보급, 징병제로의 준비 등을 목표로 해서 기획된 것이었으나, 그 대부분은 양심적 고민과 표현을
결여하는 점이 있었다.22)
필자가 “상당히 의심스러운”이라거나 “독자의 빈축을 사는”이라고 한 것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이 문장으로부터는 알 수 없다. 그것은 대중의 호기심이나 환심을 사기 위한 저속한 상업적 오락
물이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반체제적인 뉘앙스를 안에 숨긴 텍스트였을지도 모른다.
전시(戰時) 국가는 사회를 구석구석까지 통제하려고 했다. 출판인들은 조직에 소속되어 있을수
록 국가권력에 맞추는 형태로 자신과 자신이 소속한 조직을 바꾸어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리
하여 출판업의 단체들은 국책과 일체화하고, 권력의 하수인이 되었다. 그들은 그것을 강제 받아
행했지만, 그러나 동시에 조직인으로서 그것을 자주적으로 행하기도 했다. 그것은 비판 받아야
할 역사이며, 반성을 계승해야 할 과거이다. 그리고 현대에 여전히 되돌아 봐야 할 교훈이기도
하다.
허나 그러한 권력과 통제 측만 보는 것은 시대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사회장치 위에서 구동하
는 문화의 동태는 보다 더 다양하다. 또한 사회장치 자체는 이데올로기와는 별도로 존속하고 기
능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시바노 교코(柴野京子)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일배가 실현한 서적의 일원
배급시스템은 전후 일본의 고도 유통시스템으로 인계되었다.23)
출판이라는 세계는 다양한 수준의 요소가 중첩되고 얽히면서 움직이고 있다. 그 복잡함을 줄이
거나 덤 없이 이해해가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22) 「外地出版文化の実情を探る(2) 沸る皇民魂 力強き皇国の分身 朝鮮の巻」,『出版弘報』1945년 2월 21일, 283쪽.
23) 柴野京子,『書棚と平台-出版流通というメディア-』(弘文堂,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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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2>
日本語で再話された植民地期台湾の高沙族伝説
植
で
された
日本語 再話
民地期台湾 高砂族伝
の
説
説 の とその内容をめぐって -
-『生蕃伝 集』 刊行
Wu Yishin (呉亦昕)
臺灣 國立中正大學校
69
70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日本語で再話された植民地期台湾の高沙族伝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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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語で再話された植民地期台湾高砂族伝説
:『生蕃伝説集』の刊行とその内容をめぐって
中正大学台湾文学研究所 呉亦昕
1) はじめに
台湾の異民族支配は、 17世紀のオランダに始まり、スペイン、鄭氏王朝、清国と続き、19世紀
末に日本の植民地となる。当時の台湾住民は漢民族系移民と原住民族から成っていて、 日本帝国
は法制上漢民族を「本島人」、原住民族を「蕃人」や「高砂族」、そして日本人を「内地人」と
称して、差別政策を行っていた。1)原住民族は「特別行政区域」2)に閉じ込められ、「蕃地無主
論」に基づく理蕃政策の下で同化政策を強要されてきた。
周知のように、近代の植民地主義の特色は経済的支配関係のみではなく、支配・被支配関係を
維持するために、「知」的道具を用意したことにも見られる。多民族多言語の植民地台湾におい
て、総督府はその統治を円滑に行なうために、支配者・被支配者の間の意思疎通、また被支配者
の国民性の涵養及び自国民に同化させようと国語(日本語)教育3)を推し進めていくほか、第4代
総督児玉源太郎とその民政局長後藤新平の任(1898年)から、大規模な植民地土地・慣習調査事
業をはじめた。こうして、土地及び言語の支配で有形・無形の統治が成り立ちつつあり、被支配
1) 「蕃人」や「生蕃」などといった差別的呼称の代わりとして「高砂族」という呼称は1923年に提唱されて以来徐々に普及
してはいったものであるが、公的に採用されることになったのは1935年の台湾博覧会以後のことである。台湾総督
府は同年の種族欄の記載要項として、台湾住民を「内地人」と「本島人」とに大別して、「本島人」を「福建族」「広東族」
「其の他の漢族」「平埔族」「高砂族」とすることを戸口調査規定で定めた(畠中市藏『台湾戸口制度大要』東京:松華堂
書店、1936年、130ページ)。現在、台湾では高砂族を「原住民族」と公式的に改称している。
2)
台湾総督府は台湾原住民族の居住する中央山脈一帯を一般法令の施行区域外とし、警察関係部局の管轄下に置い
た。「蕃地」と通称する。
3) 初等教育機関において、「本島人」向けには「公学校」、「内地人」向けには「小学校」、そして「蕃人」向けには警務局の
管轄する「蕃童教育所」あるいは文教局の管轄する「蕃人公學校」が設けられた。台湾教育会編『台湾教育沿革誌』(台
北:台湾教育会、1939年)参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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者の文化を記述する営みも植民地支配国の研究者の手中に握られることになってしまった。
特に「蕃地調査」のために、台湾領有直後から多くの人類学者、民族学者、民俗学者たちが台
湾に渡って、中央政府や台湾当局の支援で山岳部に入り、自然、調査報告書をはじめ、図譜、研
究論文や探検譚など台湾原住民族の言語、社会、文化に関する記述を数多く生産し、これらのテ
クストのなかでは、もとより理蕃政策遂行のためになされたものもあるが、高度な学術的成果も
含まれている。こうして、台湾原住民族知識が日本統治期においてはじめて体系的に構築され、
帝国日本の近代学知システムに包摂されつつある。日本の人類学者が日本語で台湾原住民族文化
を記述したということは、一種の「文化翻訳」4)(cultural
translation)であると思われる。そし
て、このような台湾原住民族知識の生産を支える帝国日本の学知システムの背後には、西洋や中
国から翻訳・解釈・受容されたものも含まれている。いわば複層的文化翻訳行為であると考えら
れる。
一方、皮肉なことに、帝国日本における台湾原住民族文化に対する知的営為が大量になされた
ことは、台湾原住民族の固有文化が植民地統治によって喪失や消滅の危機にさらされていること
をも意味している。特に文字をもたなかった原住民族の社会、文化を支える口承伝統(Oral
Tradition)は、文字化によってその口承性を失い、また日本統治期から戦後にわたって長い間統
治者の文化や言語政策に圧制されていたことで、ほとんど瓦解寸前に追い込まれた。しかしまた
一方では、日本植民地政府そして人類学者によって行われた台湾原住民族の調査、分類と統制
も、現在でみるような原住民族のアイデンティティ意識を刺激し、形成していくきっかけとなっ
た。
やがて台湾原住民族の権利回復運動及び文化復興運動が盛り上がりを見せ始めた1990年代に
なって、原住民族は自らの口承伝統を復元もしくは再構築を試みる動きが見られる。口承文学の
伝統を巧みに文学作品のなかに織り込んだことも、台湾原住民族現代文学の一つの特徴となって
いる。今度は日本統治期の調査を重要な一次資料として参考せざるを得ない状況に置かれる。ま
た、原住民族の口承文学に関する日本語資料のなかで、特に日本統治期における「高砂族伝説集
の双璧」と称された『生蕃伝説集』5)と『原語による台湾高砂族伝説集』6)は台湾の学術界でも高
4) 人類学者は「未開民族」の言語を学び、彼らの観念によって考え、彼らの価値観に従って感ずることを学び取る。
そこで人類学者は、自分の文化の、概念上のカテゴリーや価値観によって、また人類学の全般的な知識によっ
て、「未開人」との生活体験を、批判的に捉え、これに解釈を加えているのである。言い換えれば、人類学者
は、一つの文化を別の文化に翻訳するわけである。文化翻訳は、こういう文化人類学における研究営為を指す言
葉として使われてきた。エヴァンス=プリッチャード, E.E. 著、吉田禎吾訳、『人類学入門』(東京:弘文堂、1
970年)、22ページ。
日本語で再話された植民地期台湾の高沙族伝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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く評価されている。
本稿では、『原語による台湾高砂族伝説集』と比べて文学性の高い『生蕃伝説集』を研究対象
を選び、このテクストの生成経緯や内容を整理しながら、文化翻訳の視野から、原住民族の口承
文学がいかに日本語で翻訳され、表現されたか、またそれはどんな意味を持つのかに焦点をあて
て考察していきたい。
2) 『生蕃伝説集』の生成
特定の文化における伝説にみられる諸テーマの分布と、その文化が関心を置いている社会的事
柄との間には、明らかな相関性が存在している。前述したように、台湾の原住民族は、文字を持
たず、口承伝統で共通の宗教的価値や社会制度を維持し、歴史、風俗習慣を受け継いできた。そ
のため、自分たちの歴史や物語を自らは記しておらず、17世紀以降、台湾にやってきた統治者や
宣教者たちにより記されていくことになる。たとえば、1628年にオランダ東インド会社の牧師
Georgius
Candidiusの現在の台南一帯のシラヤ族の生活に関する調査報告『Discours
ende
cort
verhael van 't Eylandt Formosa』7)が発表され、Sinkan社の神話や伝説がいくつか記されている。
あるいは清の巡臺御史黃叔璥が漢文で著した『台海使槎錄』(1722年)8巻のなかに、西部の平野
部に住む原住民族部落の言語、風習について記述した『番俗六考』(第5-7卷)と『番俗雜記』
(第8卷)がある。『番俗六考』のなかに34曲の平埔族群伝承歌謡が収録されている。
台湾原住民族に対する本格的研究は日本の台湾統治時代に始まる。1895年、「東京人類学会」
のメンバーである伊能嘉矩(1867年-1925年)は、台湾総督府蕃界事務調査嘱託、民政部警察本署
の勤務に就いた。8)同年12月、台北での「台湾人類学会」の創立に参加し、『東京人類学会雜
誌』に台湾人類学会のメンバーの調査記録や論文を掲載する「台湾通信」欄を設けた。伊能は、
オランダー時代以降の文献を整理し、また1897年5月から12月にかけて台湾全島の原住民族現地調
査を行い、『台湾蕃人事情』(1900年)、『台湾蕃政志』(1904年)、『台湾文化志』(1928年)など
を完成して、台湾原住民族歴史研究及び人類学研究の開創者となる。彼は『台湾蕃人事情』9)に
5) 佐山融吉、大西吉寿『生蕃伝説集』(台北:杉田重蔵書店、1923年)。
6) 小川尚義、淺井惠倫『原語による台湾高砂族伝説集』(東京:刀江書院、1935年)。
7) 英語訳:Campbell, William (ed.), 1903, Formosa under the Dutch: descriptions from contemporary records. London:
Kegan Paul, Trench, Trubner & Co.
8) 伊能嘉矩の年譜(復刻版『台湾蕃人事情』、東京:草風館、2000年)参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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おいては、従来の「生蕃」、「熟蕃」の分類を廃除し、はじめて台湾全体の原住民族を言語・文
化・習俗によって「4群8族21部」に分け、以後の台湾原住民研究に強く影響を与えた。
1896年、東京帝国大学人類学教室の標本整理係を担当した鳥居龍藏(1870年-1953年)は、人類
学調査担当として台湾に派遣された。以後、1900年まで断続的に4回台湾山岳部や離島の原住民族
部落の観察調査を行った。鳥居は台湾での調査の際、はじめて写真撮影の手法を導入し、原住民
族の体格、体型の観察記録やデータ収集に力を入れており、各地の遺跡調査や各部族の生活に関
する詳細な記録も残した。彼の研究成果は殆んど『東京人類学会雜誌』に発表され、代表作『紅
頭嶼土俗調査報告』(1902年)は日本最初の民族誌と称された。
鳥居の來台期間によく助手を務めた森丑之助(1877年-1926年)は、1895年にすでに渡台した
が、鳥居の影響で原住民族の人類学調査を始めた。森が残した著作はタイヤル民族誌『台湾蕃族
志』第1卷(1917年)と写真集『台湾蕃族図譜』2卷(1915)しかないのだが、彼は自力で20年間
をかけて「蕃界調査」を行い、何種類の原住民族言語に精通しており、「台湾蕃通」、「台湾蕃
界調査第一人」、「台湾蕃社総頭目」などの名号が付けられ、明治末から大正中頃にかけて、原
住民族に関する知識の権威的な存在であった。10)そして、1920年に佐藤春夫が台湾に旅する際に
は、「打狗滞在中、台北の丙午先生(引用者注:森丑之助の字は丙午)が吾二下さつた懇書は、
最も短時日に台湾の見るべきところを尽くさせてやらうといふ親切の溢れたものであつた」11)と
当時総督府博物館の館長に勤めた森丑之助の世話になっており、山地旅行の手配や贈書などで台
湾原住民族に関して多くの教示を得て、のちの「魔鳥」などの作品の執筆にも影響を受けたと考
えよう。
前述した台湾早期人類学調査の三傑といわれた伊能、鳥居、森の三人のほか、蕃情研究会
(1898年)、台湾慣習研究会(1900年)など総督府の主導の下で「理蕃」を目的とする調査機構
も大規模の調査活動を展開する。また、1901年に設置された臨時台湾旧慣調査会は漢民族や平埔
族の調査を一段落した後、1909年2月に「蕃族科」(1919年に台湾総督府蕃族調査会に改編)を増
設し、「漢化」が進んでいない「生蕃」にを族別に分けて風俗、言語、生産方式、社会組織や宗
9) 伊能嘉矩・粟野伝之丞共著『台湾蕃人事情』(台北:台湾総督府民政部文書課、1900年)。
10) 例えば、1912年に刊行された『日本大百科事典』(三省堂)の「台湾蕃族」という項目は、森によって執筆され
たものであった。また、台湾総督府が1913年より終戦まで公式に用いた民族分類法(アミ、タイヤル、サイ
シャット、ブヌン、ツォウ、パイワン、ヤミの七分類)は、森丑之助によるものを基礎としていた。宮岡真央子
「解説 時代を隔てた二人の学術探険家―森丑之助と楊南郡先生」(楊南郡著、宮岡真央子など編訳『幻の人類学
者 森丑之助―台湾原住民の研究に捧げた生涯』東京:風響社、2005年)を参照。
11) 佐藤春夫「かの一夏の記」『霧社』(東京:昭森社、1936 年)。
日本語で再話された植民地期台湾の高沙族伝説
75
教信仰について本格的調査を始める。1913年、「蕃族科」の最初の書面化された成果として、佐
山融吉12)が『蕃族調査報告書』(第8卷 阿眉族、卑南族)を発表した。その後もほぼ年に一巻と
いうペースで1921年まで合わせて8巻の『蕃族調査報告書』を出版した。13)佐山は『蕃族調査報告
書』においては伊能嘉矩に見倣って族名の音訳を漢字で表記し、阿眉族(アミ族)、卑南族プユ
マ族、曹族(ツォウ族)、紗績族(セデック族)、紗績族外太魯閣蕃((タロコ族))、大么族
(タイヤル族)、武崙族(ブヌン族)、排彎族(パイワン族)、獅設族(サイシャット族)など
計9族に分類した。原住民族口承文学に関しては、「宗教」、「伝説(童話)」、「歌謠、舞踊と
樂器」に分けて記述した。佐山自身は原住民族の伝説や口碑にかなり関心を持っているようで、
『蕃族調査報告書』を編集する傍ら、『東京人類学雑誌』に〈諾冊二尊の話に似たる台湾蕃人阿
眉族の口碑〉(1914年2月)、〈鯨に乗りて女護島に到りし話:台湾生蕃〉(1914年3月)、〈台
湾生蕃阿眉族の口碑〉(1914年4月)、〈台湾紅頭嶼の口碑〉(1915年9月)、〈ムカンカルング
リ、ムクプガデキヤツクの話(台湾太魯閣蕃の話)〉(1918年1月)、〈山に入りて再び歸らざり
し人の話〉(1918年1月)、〈湯気と空気とにて生活する人の話(台湾太魯閣蕃の話)〉(1918年
1月)などの文章を寄稿していた。
1923年11月、佐山融吉が10年間かけて採録したものを台北第一中学校の同僚である大西吉寿が整
理、加筆を施したという形でまとまった台湾原住民族伝説集『生蕃伝説集』が台湾で出版され
た。同書は、はじめての台湾原住民族伝説に関する専門書として注目され、台湾総督府図書館選
定図書に選ばれたほか、それ以後出版された日本語の原住民族伝説集の形式や内容にも影響を与
えた。14)
12) 佐山融吉の生涯についてまだ不詳だが、台湾総督府職員録系統によると彼は東京出身で、1912年に來台、1913か
ら1918年の間台湾総督府臨時台湾旧慣調査会蕃族科の補助委員を勤め、1919年に学務部囑託に転任する。1920年8
月にまた台湾総督府蕃族調査会補助委員として任命され、同年の年末から1924年まで台北中学校(後台北第一中
学校)、台北師範学校や台北商業学校の教師として台北に滞在していた。台湾総督府職員録系統を参照:http://wh
o.ith.sinica.edu.tw/mpView.action
13)
前6巻は「臨時台湾旧慣調査会」、後2巻は「台湾総督府蕃族調査会」によって発行された。蕃族科及び蕃族調査会の
重要な成果としては、『蕃族調査報告書』のほかに小島由道など『蕃族慣習調査報告書』(全5巻、1915年-1922年)
と岡松参太郎『台湾蕃族慣習研究』(全8巻、1921年)が取り上げられる。
14) たとえば、入江暁風の『神話台湾生蕃人物語』(基隆:成舎印刷所、1928年)や瀨野尾寧と鈴木質共著の『蕃人童話
伝説選集』(台北:台湾警察協会台北支部、1930年)などは民族の分類、話の分類、文学表現形式において『生蕃伝
説集』からの影響が見受けられる。ちなみに、佐山融吉は1929年に出版された『日本昔話集 下巻』(東京:アルス、
1929年)の「台湾篇」の執筆を担当した。同書にはアイヌ篇の担当者は金田一京助、琉球篇は伊波普猷、朝鮮篇は田
中梅吉。そして『日本昔話集 上巻』の著者は柳田国男。
76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生蕃伝説集』は、台湾原住民族の伝説・説話を創世神話・蕃社口碑・剏始原由・天然伝説・
勇力才芸・怪異奇蹟・情事情話という七つのテーマに分類し、南洋類話を400話近くを収める。大
正期になって、「蕃人」や「生蕃」は軽蔑の意味がこもった不適切な用語であるという理由か
ら、「高砂族」という名称が一般的に採用されたが、本書の書名について、大西は次のように
語った。
(前略)著者は生蕃といふ文字を何等軽蔑の意味に使つてゐない、否寧ろ云ひ慣れたこの語か
ら、天真爛漫な卒直無邪気な人々を聨想する事に一種の懐かしみをさへ感じる。のみならず何よ
りも生蕃とか蕃人とかいはれた人々が、此の如き立派な神話伝説を持つてゐる事を誇るために、
云ひならされた此の語に多少の執着までも覚えるのである。これ直ちに「高砂族」とまでいひ換
へる勇気に欠けたわけである。(凡例、4-5ページ)
山路勝彦がすでに指摘したように、19世紀の西欧社会には「堕落した」近代文明に対して「自然
状態」のまま生活している無文字社会の住民を「高貴な野蛮人」という言葉で過度に賛美する風
潮がある。当時の日本人が「未開民族」である台湾原住民族を「天真爛漫」、「無邪気」とみな
したのも、これと同じ着想に基づくものと思われる。このような表現は、大正デモクラシーのも
とで展開した児童文化運動を多いに連想させる。昭和期になってからは「可愛い子供」というレ
トリックが使われた。15)『生蕃伝説集』16)の実際の執筆者大西吉寿はこの本を執筆する経緯につ
いて次のように記し、「可愛い蕃人」を連発する。
昨年八九月の交です。北部の蕃界の旅を終へた私は狭苦しい城南の仮寓で同僚の佐山君と話し
てゐました。蕃界は何うでした。台湾で蕃界ほど愉快な処はない、蕃人ほど可愛い人々はないと
思ひます。かうした事から面白い蕃界の話は綿々として尽きないのでした。そして到頭何か蕃人
の事を書かうではないかといふことにまで進んだのです。佐山は蕃族調査に十年の日子を費し、
足跡蕃界に洽く幾度か死生の境に彷徨うで厖大な報告書を成した人ですし、私もやはり蕃人につ
いては相当興味を持つてゐるものですから、よろしいそれではやりませうとて余暇を盗み倉卒筆
15) 山路勝彦、『台湾の植民地統治――〈無主の野蛮人〉という言説の展開』(東京:日本図書センター、2004年、
33ページ)を参照。
16) 大西吉寿の生涯についてもまだ不詳だが、台湾総督府職員録系統によると京都出身。1920年8月から台湾總督府台
北中学校教諭を担当する。1930年に台北商業学校囑託、1933年から1936年のあいだ台北州州立基隆高等女学校教
諭、1937年に台北州州立台北第二商業学校教諭を歴任する。台湾総督府職員録系統を参照:http://who.ith.sinic
a.edu.tw/mpView.action
日本語で再話された植民地期台湾の高沙族伝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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を馳せたのが此の書です。(はしがき、1ページ)(下線は引用者、以下同様)
生蕃は決して恐ろしい民族ではなく、寧ろ可愛い同胞なのです。彼等は日本人とは嘗て同祖か
ら出た、そして遠い昔に弓を表物として別れたとさへいつてゐます。彼等は僻陬の孤島に在つて
文化に後れた為に凶蕃となり終わつたのですが、教導さへよろしければ、やはり忠実な弟たりう
る事は我が理蕃政策の示す所です。武勇を尚ぶ事、義を重んずる事の穿き違ひさへ匡してやれば
それでよいです。さうです彼の源平時代の我等の先祖、彼等勇敢なる志士は生蕃の馘首と何れだ
けの違つた事をしたでせう。(はしがき、2ページ)
そして、『生蕃伝説集』が出版された年まで台湾総督府警務局長を務めた竹内友治郎は「序」を
寄せ、この本の理蕃政策においての意味を次のように語った。
理蕃三十年、初め征御を以てし今は撫育に進む。撫育には各族各社に就て歴史風俗習慣を詳に
するの要あり。
新著生蕃伝説集なる。之を閲するに如上の要求に充たされんとするものあり。其の上に全編お
伽噺的叙述なるを以てより以上に民族性を発見するを得んか。
我国民性乃至は文明を彼民族に移植するの可能、不可能、及幾許の共通点を有する哉は撫育
上、教育上、先づ研究すべき問題たらすはあらず。(序、1-2ページ)
つまり、伝説を通して「可愛い蕃人の事」を理解し、その民族性を発見することによって「文
明」へと導くという趣である。また、大西は、執筆に際して、「生蕃の伝説を取り扱つたものは
従前全くないではありませんが、或は一般的でなく、或は余り抄録されてゐたりするのが遺憾」
なので、それらの缺を補いたく、「私が遽しく筆を駆つたものですから遺漏や杜撰は決して少な
く」なく、「体裁から云つても文学的でもなく、学術的でもなく、いはばその中間を夢中に走つ
たやうなもの」であると大西はことわっておいた。(はしがき、4頁)
もう一つ注目すべきは、大西は次のように台湾原住民族の伝説を日本口承文学に類比するこ
とである。
生蕃の伝説を概観しますと、実にプリミテイヴなとでもいひますか、ナイイヴなとでもいひま
すか、兎に角野趣津々としていひ知れぬ懐かしさを感じるのです。併し同じ生蕃といつても南蕃
と北蕃とにより、又は土人文化に接する程度の如何によつて多少趣を異にしてゐます。例へばタ
イヤルやサゼクのものに万葉の直截雄勁な趣があるとすると、パイワンやアミには新古今の華麗
78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巧細緻な風があり、ソォやブヌンのものには古今の優雅平明の調があるのです。八族それぞれ繚
乱たる説話の花を咲かせ宛然として生蕃文化の花園にあるの観があります。(中略)仮令そこに
は幾多の杜撰があらうとも集め成した花は何人かの観賞に値するものがあるかも知れない。(は
しがき、3ページ)
ここからは、大西は帝国日本の口承文学との比較から『生蕃伝説集』の加筆を行ったことがわか
る。また、『生蕃伝説集』は従来の学術的調査報告と違って、読者の享受を念頭に入れて文学的
に書いたという大西の創作立場もうかがえよう。
『生蕃伝説集』の内容と形式
『生蕃伝説集』のなかに収録された各族説話の大部は佐山融吉『蕃族調査報告書』から取り上
げたもので、平埔蕃の資料は伊能嘉矩の報告により、南洋類話はJames
George
Scottの
Indo-Chinese Mythology ( The Mythology of All Races, Vol. XII. Marshall Jones Company, 1918)
及びRoland B. DixonのOceanic Mythology ( The Mythology of All Races, Vol. IX. Marshall Jones
Company, 1916)を抄訳した。全書の分類には厳密な一定の標準がないが、下表のようになってい
る。
表1 生蕃伝説集の内容分類
第一 創世神話
第二 蕃社口碑
アミ族
ゾオ族 タイヤル族 ヤミ族 ブヌン族 平埔蕃 パイワン族 サゼク族 ハモ神 サイセット族 タイヤル族
サゼク族 卑南蕃
大嵙崁蕃 霧社蕃
太麻里蕃
合歡蕃 タウダア蕃
巴塱衞蕃
マリコワン蕃
トロック蕃
ルカイ蕃
北勢蕃
内太魯閣蕃
南勢蕃
外太魯閣蕃
潮州蕃
ハツク蕃
タウサイ蕃
枋藔蕃
シカヤウ蕃
パトラン蕃
スポン蕃
サラマオ蕃
木瓜蕃
オポオポヂャン蕃
萬大蕃
ブヌン族
サブデック蕃
メバラ蕃 巒蕃
南澳蕃 タケバカ蕃
フチョル蕃
パリヂャリヂャオ蕃
サイセツト族
日本語で再話された植民地期台湾の高沙族伝説
第三 刱始原由
第四 天然傳説
アミ族
溪頭蕃
丹蕃
カラパイ蕃
郡蕃
パスコワラン蕃
干卓萬蕃
ヤミ族
シヤカラウ蕃
卓社蕃
平埔蕃
ロクヂヤウ蕃 ゾオ族
汶水蕃
阿里山蕃
西部平埔蕃
太湖蕃
カナブ蕃
東部平埔蕃
屈尺蕃
四社蕃
南部平埔蕃
キナジー蕃
祭祀
パイワン族
穀物の由來
籠造リ
厭勝
粟酒
舟筏
チカワサイの祖
ワリシパット
機織
火の起原
煙草
蛇模樣の話
燧石
交易
麻絲の傳來
馘首
武器
鳥追ひ
馘首の禁
楯
壽命の話
刺墨
鍛冶
便所の事
狩獵
鞣法
血族相婚の禁
女子出獵の禁忌
製鹽
交道
獸の始
自然現象
土器
シレク 猪と豚 洪水 カイツピチ鳥 猪の腸
地震 トウトウノ鳥 鹿
山崩 ピヂツ 兎と鹿
豪雨 ラリヤバン鳥 羗仔と鹿
虹 靑鳩 鹿の卷毛 風 プガヲ鳥
花鹿
風雨雪 オワァオ鳥 山羊
雪 コワオ鳥とタンキ
豹
雷電 ロツ鳥 里漏社の船
北部平埔蕃
豹と熊 日月 鳥 熊の骨 月中の黑影
プンナイ鳥 鼠 星辰 鷲 鼹鼠 七星 鷹 蛇 明星 鳶 大蛇 夫婦星 イシココ鳥 靑蛇
卑南溪 パットス鳥 蛇占 大武山と霧頭山 トルフイとガガイ
螢 山 鶉
蟬 平地 リナス鳥
蜂 植物に關するもの
ルルピン鳥 蜜蜂 靈樹 キキリン鳥 蚤 木精 テクラシ鳥 虱 茄苳の血 カカガン鳥 虱買ひ 榕樹の根 比翼鳥 蚤の殺人 79
80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第五 勇力才藝
第六 怪異奇蹟
第七 情事情話
大樹 烏の羽毛 南京虫 檳榔とビラ
猿 南京虫造リ 槺榔子 猿飼ひ 穿山甲 松 犬 グヂヂョ 山芭蕉 犬の助言 蚯蚓の糞 甘藷 犬の舌 蜥蜴と蟹
カツメ草 猿と穿山甲 蜥蜴と蝦 粟の王將 山猫と穿山甲 蟹 粟 兔と穿山甲 龜 動物に關するもの
太陽征伐 猪 アケエヤムウムア アウイランゲ 月輪征伐 蛇の子 ロブゴツの話
アヤタメの話 山幸
大凧
イルルン社の英傑 ソオエイの話
大南社の勢威
カラペアトの遠征
雷神キワイ
獸の怪 田螺の美人 ボトンリナマイ神 鹿の骨
ルパヘの話 イドック神
サリクの話 或少女の話 イロク神
怪物一束 天助 チアウダイ
怪力 小人の話 リワイナピラ
塔山の白石 巨人傳說 芭蕉になつた嫁 妖怪の朮婚
ピツワカの話
天少女
亡者の話 天地の交戰 龍女
靈火 風婆
不思議な棒
怨靈
猿の箕 タプタベラスの祖 親子の爭鬪 歩くタウカン
先
タナオポノク
神通の世 二神の奇遇 カイシナピラ 木材の憤怒 エゴフツ神
鉢卷の怪 人食ふ犬
昇天 天を射た話 尾ある人 熊に攫はる 河狩の怪 地中交通
ササウジャジョイ 首男
ラウリヤンの話
ヤロポンゴロス 骨人
鯨に吞まれた男
サウリバンアポヲル
畸形 イツの話 靈蛇 サルムッジの話 女護島 蛇食ひの話
蘇生 湯氣の國
蛇に呑まれた少女
ピナナゼパン 女人社
蛇の子物語 姙婦と韮
イミンマッカッの話
サゴアナの話
奇人
マツクイの話 大潭 不思議なオクラオ
妖怪の手 靈池 糞喰ひ小僧 生首
蕃王 燒芋の行方
兄妹相婚 プラス交換 鹿の情婦 イワタンの話 ダングルの話 鼠と契る 寢臺の杙 日本語で再話された植民地期台湾の高沙族伝説
第八 南洋類話
妻覓ぎ
珍らしい禁令 鳩を愛する男 樫の木と榛の木 淚川 鮒の色男 老翁の戀 粟播祭哀話 蛇性の淫 比翼池 男孕む
蛙の化身 サウラルヤンの話 猿の情人
蜂の求婚 嫉妬 犬と契る 蚯蚓と娘 大陽物 豚と交情 惱める女 小陰部 猪と淫婦 薯を弄ぶ娘 恐ろしいピッピ 熊に戱る 芭蕉の幹 陰部の位置 ポリネシア
羽衣傳說
火の話 創世神話 女護島
猿と鱶 太陽と月 鼠と水雞
猿と靑鷺
天地の交會 タガロとメラグブト
猿と龜 太陽征伐
オーストラリア
首狩の話 火の話
人類の始祖
蟹の話 ヒクとカウエル
太陽の話
天女
ミクロネシア
月の話
猪と契る
開闢
火の話
地中の王
火の話
死の話
蜂の美女
メラネシア
七少女
食人鬼
世界の始
熊の孤兒 孤兒の話
月の模様
食人鬼
印度支那
日月の話
インドネシア
壽命の話
火の話
創世話
龍女傳說
若返リ法
月中の黑影
蛇の卵
食人鬼の話
洪水の話
81
各テクストの地の文は日本語で記述、地名や専門用語などは原語の音訳をカタカタで表記する。
話を忠実に再現するためか、「我が社」「我等」などの語りで記述されたものは殆んどである
が、各テクストの後に付けたりする「註」は、日本人大西の視点で書かれた。彼自身の意見や感
想もよく見られる
話者の名については、創世神話と蕃社口碑には明記されているが、他の項には挙げられていな
い。また、読者の比較考察のために、族によって説話の前後から、あるいは同一蕃社でも話者に
よって多少色彩を異にするもの、つまり各テクストには複数のヴァージョンを詳細な註が綿密に
施された。また日本の説話との対照や繋がりについても「註」でしばしば強調される。たとえ
ば、「第二章 蕃社口碑」の「平埔蕃 毛少翁社」項は、次のように記述されている。
毛少翁社 昔台湾の北部一帯の地には東洋(日本人)が占拠して、今の台北平野は殆ど皆その領有
82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であつたが、その後現在の台湾人が大陸地方から潮のやうに移住して来たので、東洋は海に泛び
或は山に退いた。山に入つたものは蕃と雑居して自然とこれに模化してしまつた。我が社は実に
その東洋の子孫なのである。
翁文卿
註 北部台湾に日本人の足跡を印した事は歴史的事実である。此の社が起原を我が国人に関係づけてゐ
るのは面白い。東洋といふ名称も何ものかを語つてゐるやうだ。
そして最初東洋の「バキ、トノナン」といふものの子「キパオ」が海に航し台湾に漂着したのだと
いつゐる。(第二 蕃社口碑、233-234頁)
もう一つ注目すべきは、『生蕃伝説集』の装幀や挿絵を担当するのは、植民地台湾の文芸で強
い影響力を持つ画家塩月桃甫(1886年-1954年)であることである。塩月は1921年に台北第一中学
校の教師として來台し、翌年台北高等学校を兼任する。來台初期はよく入山して原住民族の生活
を観察していた。1923年に個展を開き、「蕃人生活を主題にした美善の極まり」と賞賛された。
「特色ある南方芸術」を提唱するフォービズムの塩月は、単純化された線と粗くて力強い筆づか
いで、『生蕃伝説集』に意匠の凝らされた生命力のあふれる挿絵を備えた。
図1:『生蕃伝説集』表紙
図2:太陽征伐(口絵)
図3:スラとナカヲ(2ページ)
図4:蛇と太陽(160ページ)
日本語で再話された植民地期台湾の高沙族伝説
83
図6:〈火祭〉第三回台湾美術展覧会、1929年(台湾美術
図5:馘首の由来(264ページ)
展覧会作品資料庫)
3) 結び
以上見てきたように、原住民族という「他者」の学術的表象は、帝国日本の学知システムの形
成ないし近代国民国家の建設、強化におけるナショナリスティックな脈絡と密接に関わった。理
蕃政策の最中に出版された『生蕃伝説集』は、忠実的に原住民族の口承文学を日本語で再現しよ
うと試みたが、このような人類学的文化翻訳を介してテクスト化された文学的記述行為は、皮肉
にも話の口承性を消滅に追い込んだのである。随所に見て取れる帝国の眼差しによって、原住民
族の素朴さを称揚する『生蕃伝説集』の再現した「蕃人」たちとその話は近代における時間的空
間的「他者」として保存され、読者の郷愁を喚起するものとして繰り返し再生産していく。この
ような植民地伝説の再現は、「鏡」として、帝国日本の知的営為を照らし出すことができよう。
本稿は資料の提示及び整理の段階で終わってしまい、緻密なテクスト分析は出来なかったが、
最後に結びとして、今後の課題を述べることにする。従来、口承文学を研究した場合、もっぱら
話型の比較分析などに集中し、コンテクストが軽視される傾向がある。『生蕃伝説集』が出版さ
れた時代背景を見てみると、総督府の理蕃政策は1916年から蕃童教育所及び蕃人公学校を中心と
する教育同化期(1916年-1937年)に入り、『生蕃伝説集』に収録された伝説は佐山融吉が1913年
から1921年の間に採録したもので、話の中に国語教育から受けた影響はまだ少ないと思われる。
それは今度国語教師大西吉寿によって日本語読者に読ませるために再編された。再編する際には
何を選んで何を排除したか、どのように日本語で文学的に表現するか、『蕃族調査報告書』と比
べながら分析していくことによって、『生蕃伝説集』の個性を浮き彫りすることになる。
もう一方では、1920年代の日本「内地」においては、資本主義の急速な発展と成長の背後には
84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労働争議が深刻化し、さらに、関東大震災とその後の「帝都復興」が、ひとつの時代や文明の終
末と再生のイメージと重なり、この時代に複雑な影を落としている。そして、知識界において明
治維新以後の西洋化に限界を感じて、日本や中国、朝鮮など西洋と異なった東洋の文化を再認識
しようとする傾向が強まった。柳田国男の民俗学や柳宗悦の朝鮮「民芸美」への傾倒はその一例
である。このようなコンテクストは、『生蕃伝説集』の生成と内容とは如何なる関係を成してい
るか、これからも考察していきたい。
日本語で再話された植民地期台湾の高沙族伝説
《M E M O》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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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 E M O》
第 部 討論
2
討
論
辛承模
國 學校 日本學硏究所
東 大
87
88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M E M O》
第 部 討論
2
《M E M O》
89
90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M E M O》
백화점 동양품부와 제국의 ‘동양취미’ 91
백화점 동양품부와 제국의 ‘동양취미’
오윤정(吳允禎)
서울대학교 아시아언어문명학부
<목 차>
1. 들어가며
2. ‘동양취미’에 대하여
3. 동양취미, 일본의 오리엔탈리즘
4. 동양품부, 카라모노야의 유산
1. 들어가며
1921년 미쓰코시를 시작으로 일본 백화점들이 중국, 조선, 대만, 싱가포르, 자바 등에서 들여
온 미술 및 공예품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에 이르면 일본의 거의 모든 백화점에는 동양
미술 및 공예품을 취급하는 부서가 설치된다. 1920년대부터 동양 미술 및 공예품이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얻게 된 데에는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주변국에 대해 일본이 획득한 제국주의적 우월
감의 확산뿐 아니라, 역사적으로 일본 지배계층의 미적 취미를 표상해 온 카라모노(唐物)를 신흥
중산층 가정에서도 소유하게 된다는 계급적 함의가 동시에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제국 일본의
‘동양취미’는 일본이 서구로부터 이식한 ‘동양’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적 태도가 일본이 과거 가졌
던 중국 중심의 ‘동양’ 문화에 대한 경외 유산과 착종하면서 널리 유행하게 되었음을 본 발표에
서 논의하고자 한다.
92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2. ‘동양취미’에 대하여
동양품부는 1900년대 초반 일본에 등장한 백화점들이 1920년대 사업을 확장해 가는 중에 탄
생했다. 미쓰코시의 경우 1921년 매장 확대와 함께 악기, 스포츠 용품, 도서 등으로 그 취급 품
목을 늘리면서 동양품부 역시 설치했고, 다카시마야는 다음 해인 1922년 오사카에 새 매장을 신
축하면서 지나부를 오픈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조선, 만주, 중국, 대만으로의 관광붐이 일어났으
며 그에 힘입어 아시아 각 지역의 지리, 역사, 문화, 풍습을 소개하는 대중서와 기행문학이 출판
시장에서 인기를 끌었다. 만선(満鮮) 여행객들이 기념품으로 사 온 나전칠기나 고려청자 재현품
등에 대중적 관심이 쏟아지면서 관광안내서에는 현지의 골동상, 기념품 가게에 대한 정보가 실렸
다. 대중의 욕구와 시장의 흐름에 민감한 백화점은 일찌감치 동양 미술 및 공예품의 시장가치를
감지하고 동양품부 설치했다. 동양품 사업을 선도한 미쓰코시와 다카시마야는 공통으로 당시 부
상하는 ‘동양취미’에 부응하고자 동양품부의 설치를 결심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미쓰코시의 PR지
1922년 10월호에 실린 「동양취미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당시 백화점이 ‘동양취미’
를 어떻게 이해하고 그에 접근했는지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어 기사 일부를 인용한다.
・한마디로 ‘동양’이라 말해도 그 의미는 가지각색입니다. 원래 ‘동양’이라고 하는 것은 유
럽인들이 유럽을 표준으로 하여 이름 붙인 것이기 때문에 서아시아지방부터 인도, 지나 전
부를 가리키며 일본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본에서 본다면 서방에 해당하는 서아
시아지방과 같은 곳을 ‘동양’이라 부르는 것은 이상하며, 엄밀히 말해서 인도나 지나로서도
이상한 번역입니다만 유럽인들이 선수를 써 ‘동양’이라 일러두었기에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동양’이라 이르면 우리는 일본을 시작으로 지나, 인도 등을 주로 포함하
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미쓰코시의 동양품부는 일본 본토를 제외한 지나, 조선, 대만, 자
바, 인도 지방의 산물과 제품을 모으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미쓰코시 각 부를 나누는 법은 대체로 그 물품의 종류 및 용도에 따라 정해집
니다만 동양품부의 물건은 그 산지에 의해 나누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가구가 있는
반면 식기도 있고 문방구가 있는 반면 주머니도 있어서 종류 및 용도가 매우 다종다양한
품목을 섭렵하기에 그 매장은 흡사 작은 백화점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산지가 일정하기 때문에 그 산지의 특색, 이른바 로컬컬러가 현저하게 나타나고,
백화점 동양품부와 제국의 ‘동양취미’ 93
그에 따라 각종의 물건이 통일되어 있는 것입니다. 즉 지나의 물건에는 지나의 특색이 있고
인도의 물건에는 인도의 특색이 각종 물건을 통해 존재하고 있습니다.
・또 취미의 면에서 본다면 소위 동양취미를 갖고 있어 그것으로 통일되어 있습니다. 그렇
다고는 하지만 동양취미라고 하는 것 안에도 지나의 물건에는 지나취미가 있고, 조선의 물
건에는 조선취미가 있고, 인도의 물건에는 인도취미가 있고, 대만의 물건에는 대만취미가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지나취미는 동양취미의 중심이라고 해야 마땅하기에 우리나라에서도
근래 일부에서 한창 유행하고 있습니다. 지나는 과연 옛 문화를 발달시킨 나라답게 그 취미
에는 다른 나라는 미칠 수 없는 점이 있고, 우리나라의 취미도 예로부터 그 영향을 받은 것
이 매우 많아서 오늘날 일본취미라고 칭하는 것의 원류의 대부분이 지나에 있다고 말한다
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바야흐로 한결같이 서양취미가 성하는 때에도 지나취미와 공명하
는 바가 있는 것은 선조의 취미가 유전된 우리에게는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1)
우선, ‘동양’이라는 개념을 ‘오리엔트’(Orient)의 번역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쪽바
다’ 를 가리키는 한자어 ‘동양’(東洋)은 중국 상인들이 자바 주변 바다를 가리키기 위해 처음 조
어되었다고 하나, 19세기 중반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 1811-1864)의 유명한 “동양은 도덕 서
양은 예술(기술)”(東洋道徳, 西洋芸術)과 같은 표현에서는 서양에 대한 대구로 사용되었음도 알
수 있다. 이처럼 ‘동양’의 의미와 범위는 고정되지 않고 변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미쓰코
시의 기사에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1920년대 적어도 대중의 상식 안에서, 백화점이 대중의 상
식을 대변한다고 한다면, 그 어원은 잊히고 ‘동양’은 서구의 시선에서 본 오리엔트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에서 주목할 것은 일본이 서구의 시점에서 보는 ‘동양’의 일부로 스스로를 소속시키면서
동시에 스스로를 나머지 아시아로부터 분리하고자 하는 노력과 욕망이 동양품부의 취급품목 구
성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는 점이다. 일본 백화점이 ‘동양취미’의 붐을 타고 동양품부를 설치한
것은 19세기 후반 유럽의 백화점들이 당시 유럽에서 크게 유행하던 자포니즘(Japonisme)과 시누
아즈리(Chinoiserie)의 인기에 힘입어 오리엔탈 섹션(Oriental section)을 점내에 설치한 것과 비
교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 백화점의 동양품부에서 일본 물건이 완벽하게 배제되는 것은 영국과
프랑스 백화점의 오린엔탈 섹션에서 중국 물건과 더불어 빠질 수 없는 중요 품목으로 일본 물건
이 취급되었던 것과 대조를 이루어 흥미롭다. 이미 여러 학자가 지적했듯이 일본은 오리엔트에
대한 서구의 제국주의적 시선을 내면화하고 서구가 차지하던 오리엔탈리즘 주체의 자리에 스스
1) 「東洋趣味について」, 『三越』 (1921.10), 24-25쪽.
94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로를 세움으로써 나머지 아시아를 “일본의 오리엔트”로 상정하고 있었고 이 같은 의식은 백화
점 동양품부의 구성에서도 그대로 발견된다.
다음은 전체 백화점 내에서 동양품부의 배치에 관해 이야기 한다. 중국, 조선, 대만, 자바, 인
도의 물건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부서가 그 물건의 용도나 종류가 아니라 지리적・문화적 단위로
묶여 분리되어 있는 일본 백화점의 구조는 제도적 그리고 인식론적 측면에서 만국박람회의 그것
과 꼭 닮았다. 19세기 서구 열강들이 경쟁적으로 개최한 만국박람회는 식민지 파빌리온을 본 전
시 주제관과 분리해서 배치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티머시 미첼이 주장한 것처럼 만국박람회는 오
리엔트를 서구가 주체가 되어 관찰하고 소비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어내는 문화장치이다.2) 만
국박람회의 식민지 전시가 그 구조와 배치를 통해서 오리엔트를 스펙터클이자 상품으로 만들어
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 백화점은 ‘동양’ 그 자체를 소비의 대상으로 제시했다. 오복부에서
오복을 판매하고, 가구부에서 가구를 판매하는 것처럼 동양품부에서는 ‘동양’을 판매했다. 동양품
부에서 팔리는 각각의 물건들은 중국, 조선, 대만, 자바, 인도 등의 환유가 되었다. 조선물건과
조선민족 사이에 필연적 동질성이 존재함을 가정하고 각 물건이 각각의 고유한 지방색 (로컬컬
러)을 갖고 있다고 간주하는 것은 각 국 혹은 각 지역을 문화적으로 균질하고 단일한 총체로 인
식하는 사고를 반영한다. 결국, 각 지역 취미의 특수성, 로컬컬러에 대한 강조는 곧 서구의 오리
엔탈리즘이 근거하고 있는 문화 본질주의를 반복했다.
서양 근대의 시선을 내면화하고 나머지 아시아를 “일본의 오리엔트”로 타자화하던 태도에 흥
미로운 반전이 일어난다. 프랑스와 영국의 백화점이 오리엔탈 섹션의 마케팅 전략으로 오리엔트
에 대한 이국적 환상을 만들고 오리엔트를 낭만적으로 신비화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었던 것과
달리 일본 백화점은 ‘동양’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이국성(exoticism)을 강조하는 수사를 거의 사
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 백화점은 동양문화 특히 중국문화를 일본문화의 원천으로 칭송하고
‘동양’의 예술적, 정신적 전통을 찬양하는 전략을 취했다. 일본과 아시아의 동일성을 강조하는 발
언은 앞서 일본을 나머지 아시아와 분리, 아시아를 대상화하려던 태도와 모순을 일으킨다. 이 같
은 ‘동양’에 대한 양가적 태도는 서구라는 대타자의 존재에서 기인한다. ‘지나취미’를 포함 ‘동양
취미’의 유행이 중국을 대표로 하는 아시아 문화와 일본의 문화가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다는 내
재적 필연에서 비롯한 것처럼 서술하고 있지만, 마지막 문장에서 암시되듯 실은 ‘서양취미’에 대
한 대항으로써 ‘동양취미’가 소환되었다. 서구 식민제국주의와 일본 식민제국주의의 차이는 식민
본국과 식민지 간의 문화적, 인종적 거리의 차이가 아니라 서구라는 대타자의 존재의 유무에 있
2) Timothy Mitchell, “Orientalism and the Exhibitionary Order,” in Colonialism and Culture, Nicholas B. Dirks, ed. (The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1992), 293쪽.
백화점 동양품부와 제국의 ‘동양취미’ 95
듯이, 유럽 백화점의 오리엔탈 섹션과 달리 일본 백화점의 동양품부가 타 아시아 문화의 이국성
대신 자문화와의 친연성을 강조한 것은 대타자 서구 때문이었다. 따라서 일본의 ‘동양취미’는 주
체와 타자의 이항대립, 배타적 분리를 전제로 하는 서구의 오리엔탈리즘과 온전히 동일한 방식으
로 작동할 수 없다. 일본을 ‘동양’의 내부이자 외부에 동시에 두는 ‘동양’ 담론 자체의 내적 모순
이 일본의 오리엔탈리즘, ‘동양취미’의 메커니즘 역시 중층적으로 만들었다.
3. ‘동양취미’, 일본의 오리엔탈리즘
백화점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판매전략을 통해 동양품에 대한 대중의 소비 욕구를 자극했을까?
우선 일본이 아시아 주변국과 하나의 문화를 공유하고 있다면 어떻게 일본이 주체가 되어 나머
지 아시아를 미학화, 미적 소비의 대상으로 삼는 ‘동양취미’가 성립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동양취미’에서 일본의 주체의 위치는 나머지 아시아 문화의 내용의 타자성이 아니라
그 문화에 대한 일본의 학문적 이해와 지식의 우월성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연출된다. 즉 아시아
공유의 문화를 근대 문명의 시각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서구적/근대적 지식과 학문체계를 습
득한 아시아 유일의 ‘문명국’ 일본뿐이라는 주장을 통해서 일본이 미적 소비의 주체가 되고 나머
지 아시아는 관찰・해석・감상의 대상이 되도록 했다. 근대적 지식의 선점을 통해 정체 상태의
아시아에 대해 우위를 확보하고자 하는 일본 제국주의의 전략이 백화점 동양품부의 판매전략에
서도 그대로 반복되었다.
백화점이 다른 소매상점과 차별화되는 지점은 판매하는 상품의 문화적 의미와 가치를 가공해
내는 노력과 능력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카탈로그, 팸플릿, 기관지, 포스터, 전람회, 진열 등을
통해서 새로운 상품에 대한 담론과 유행을 만들어 낸다. 백화점은 상품에 대한 교육을 통해 소비
욕구를 창출하고 궁극적으로 판매를 늘리는 전략을 이미 개점 초기부터 서양 박래품 판매와 홍
보를 통해 발전시킨 경험이 있었고 동양품에 역시 적용했다. 동양품부를 설치하면서 백화점은 적
극적으로 전문가의 조언을 구했다. 예를 들어 다카시마야는 당시 가장 권위 있는 지나학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고토 아사타로(後藤朝太郎, 1881-1945)를 지나부의 자문위원으로 초빙하고 그 상
품의 선택이나 기획전시의 주제 등에 대해 조언을 구했다. 백화점은 고객에게 전문가로부터 얻은
아시아 각 지역의 문화와 풍습에 대한 정보를 기관지, 강연회, 전시 등을 통해 제공했다. 판매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지만 동양품에 대한 고객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동양 미술에 대한
학술적 전시들도 개최되었다.
96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1921년 5월 동양품부를 오픈하기 한 달 전 미쓰코시는《불교미술자료전람회》라는 제목의 전시
를 개최했다. 이 전시에는 고고학자 세키노 타다시(関野貞, 1868-1935), 불교학자 도키와 다이죠
(常盤大定, 1870-1945), 중국학 연구자 고토 아사타로, 의사이자, 문인이자 미술사학자였던 기
노시타 모쿠타로(木下杢太郎, 1885-1945), 미술가 기무라 쇼하치(木村荘八, 1893-1958)가 중국
의 운강, 용문, 천룡산 석굴 등을 최근 여행하는 중에 남긴 사진, 드로잉, 탁본 등이 소개되었다.
기노시타 모쿠타로와 기무라 쇼하치는 전시에서 선보인 시각 자료들을 묶어서 『대동석불사』라는
저서를 다음 해 출판했고, 세키노 타다시와 도키와 다이죠 역시 1925년 『지나불교사적』시리즈 1
권을 통해서 이 시각 자료들을 출판했다. 출판보다도 앞서 미쓰코시 전시를 통해 소개된 자료들
은 일본에서 공개된 적이 없는 새로운 것들이었다. 미쓰코시 자체의 평가에 따르자면, 이 전시는
관련 분야에 있는 학자들에게 소중한 연구자료를 소개했을 뿐 아니라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도
큰 호응을 얻었다. 사실 중국 석굴사원에 대한 일본 지식인들의 관심은 유럽 고고학자들에 의해
촉발되었다. 20세기 초 유럽학자들이 실크로드 위에 위치한 중국 석굴사원을 찾아 조사하고 유물
을 본국으로 가져가는 일들이 있었고 이는 일본이 자신들의 연구자를 현장으로 보내 조사에 착
수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수 세기에 걸쳐 중국이 일본의 문화적 멘토의 역할을 해 왔음을 고
려했을 때, 일본이 주체가 되는 중국 역사 유물과 유적에 대한 발굴과 조사는 제국 일본이 동아
시아 지역 내에서 문화적 헤게모니를 역전하기 위해 취한 많은 문화 정책 중 하나임은 여러 번
지적되었다. 중국인들의 무관심 속에 오랜 시간 방치되고, 유럽학자들의 관심 하에 발굴과 동시
에 훼손되고 있는 아시아의 문화재를 서구와 대등한 근대문명적 시각에서 학문적으로 접근하고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은 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근대적 학문체계가 갖추어진 일본에만 있다는 주
장이 제기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백화점이 새로운 학문적 성과를 대중에게 소개하는 데에 있어서 선도적인
위치에 있었으며 거기서 오는 문화적 권위를 사업에 효과적으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근대적 학문
지식과 미적 감식안을 갖고 있는 일본 지식인들이 중국 불교 유적을 직접 방문해서 조사한 결과
를 소개한 미쓰코시의 전시가 단지 대중의 중국 불교미술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을 뿐 아니
라 일본이 아시아의 대표로 그것을 연구하고, 수집하고, 전시하고, 감상하고, 소비할 배타적 권위
를 갖고 있다는 인식을 대중에게 심어주었다. 백화점은 서구의 침입, 자국의 무관심 등에 의해
위기에 처한 아시아의 위대한 문화유산을 일본이 대표하여 지키고 보호한다는 지적∙문화적 자
신감을 동양 미술에 대한 소비 욕구로 전이시키고자 했다.
일본의 ‘동양’ 문화의 보호자로서의 특권은 일찍이 오카쿠라 텐신(岡倉天心, 1863-1913)의
1903년 저서 『동양의 이상』(The Ideals of the East)에서 주장된 바 있다. 이 책에서 텐신은 서
백화점 동양품부와 제국의 ‘동양취미’ 97
구 문명에 대한 아시아 문명의 우위와 아시아의 통일성을 주장할 뿐 아니라, 아시아 사상과 문화
를 보존하는 데 있어서 일본의 지도적 역할을 강조했다. 그러나 런던에서 영어로 출판된 『동양의
이상』이 일어로 초역된 것은 20년 가까이 흐른 1922년의 일이다. 이는 “아시아 문명의 박물관”
으로서의 일본의 역할에 대해 일본 사회 내에서 대중적 관심이 생기게 된 것이 그즈음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혹은 텐신의 이상이 실현 가능한 것으로 일본 내에서 인식되는 시기가 그즈음이
었다고 할 수 있다. 1922년 1월호 『중앙공론』(中央公論)은 “지나취미의 연구” 특집을, 1922년 9
월 문예동인지 『시라카바』(白樺)는 “이조도자특집호”를 발행했고, 1922년 8월에는 『지나미술』(支
那美術)이라는 제목의 월간 미술잡지가 발간되었으며, 1922년 9월에는 조선에 진출한 일본 미술
상들이 연합하여 경성미술구락부를 설립했다. 서로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개별적 주체들의 중국
과 조선에 대한 문화적 관심을 증명하는 일련의 움직임이 1922년을 전후로 나타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20년대 동양 미술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비약적으로 증가하는 것은 일본 제국주
의의 팽창으로 새롭게 재편된 아시아의 지배질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의 ‘탈아입구’론으로 상징되는 메이지 일본의 대아시아
정책이 청일전쟁(1894-1895)과 러일전쟁(1904-1905)의 연이은 승리를 통해 얻은 커다란 자신감
을 바탕으로 변경되었다. 더 이상 일본은 자신을 서구와 동일화하기 위해 중국과 조선을 차별화
하느라 애쓸 필요가 없었다. 아시아 내에서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우위가 확고해진 일본은 중
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새롭게 일본 중심으로 체계화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 작
업은 학계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서양문물을 수입하여 익히는 데 초점이 맞추어졌던 학계의 관심
이 ‘동양’에도 기울여졌다. 1910년대부터 가속화된 동양학의 발달은 서양문명으로부터는 독립적
이며 아시아에 대해서는 지적으로 우월한 일본의 자기 정체성을 창출하는 데에 이바지했다. 동양
학의 부흥은 메이지 학계의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반성이자 중화주의 대해 일본이 갖고 있던 오
랜 열등감의 극복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편 서구 문학과 미술을 동경하던 지식인들 사이
에서도 서구화에 경도된 스스로에 대한 반성과 함께 ‘동양’에 대한 관심이 일어났다. 그 대표적
인 예가 앞서 언급한 시라카바 동인들의 ‘서양취미’에서 ‘동양취미’로의 전환일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의 “그것은[미적 평가] 그것들을 제작한 인간들을 식민지화했거나, 혹은 언제라도 식민지화할
수 있다는 사실에 의해서만 가능했다”라는 주장처럼 일본의 아시아 주변국에 대한 미적 존경은
상대에 대한 정치・경제적 지배, 지적・도덕적 우위를 확인한 후에 가능한 것이었다.3) 1920년대
는 일본이 아시아 주변국에 대한 우월감에서 오는 심리적 여유를 기반으로 중국를 비롯한 아시
아 문화를 미적으로 존경하는 것, 미적 대상으로 애호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는 시기였다. 그리고
3) 가라타니 고진, 『네이션과 미학』,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 b, 2009). 161쪽.
98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그것은 가라타니 고진의 주장처럼 일본이 아시아에 대해 취할 수 있는 가장 식민주의적 태도 중
하나였다.
1910년대 말에서 1920년대 나타난 일본 미술계의 남화(南画) 재평가 현상 역시 이러한 일본의
자신감 획득과 무관하지 않다.4) 1880-90년대에 걸쳐 국민국가 일본을 대표하는 미술로 니혼가
(日本画) 전통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중국 문인화에 뿌리를 두고 있는 남화가 어니스트 페놀로사
(Ernest Fenollosa, 1853-1908)와 오카쿠라 텐신에 의해 철저히 배제되고 부정되었다. 후에 『동
양의 이상』에서 보인 주장과 모순적이게도 텐신은 남화를 ‘지나숭배’ 혹은 ‘지나벽’으로 비판하고
1889년 창간한 일본미술사연구지 『고카』(国華)와 동년 개교한 도쿄미술학교의 커리큘럼에서 배
제했다. 메이지기 중국적 기원 때문에 배제되고 가려졌던 남화가 다이쇼기 ‘동양문화권’을 소환
하면서 그 핵심적 요소로 재발굴, 재평가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남화 재평가는 일본 내의 남
화 전통에 다시 주목할 뿐 아니라 당대 중국의 문인화가에 대한 관심으로도 연장되었다. 1920년
대에서 30년대에 걸쳐 미쓰코시와 다카시마야는 우창숴(吳昌碩, 1844-1927), 왕이팅(王一亭,
1867-1938), 치바이스(齊白石, 1864-1957)와 같은 당대 중국 문인화가들의 전시를 정기적으로
개최했으며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
‘동양’에 대한 자신감을 ‘동양’에 대한 소비로 연결시키는 백화점의 전략은 《불교미술자료전람
회》 같은 특별전뿐 아니라 동양품부의 평소 판매방식에서도 발견된다. 동양 미술품을 수집하고
감상할 문화적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해서 백화점은 동양 미술에 대한 지적이고 학술적인 정보를
고객들에게 꾸준히 제공했다. 동양품부의 카탈로그에는 상품 이미지뿐 아니라 그 상품에 대한 미
술사적 지식을 함께 담았다. 다카시마야 지나부는 1924년 7월 송・원대 도요지의 발굴품과, 명
의 청화, 청의 오채 등 골동도자기 100여 점을 진열 판매하는 《지나도자화병진열회》를 개최했다.
타블로이드 크기의 팸플릿에는 화병의 사진과 가격뿐 아니라 중국 도자의 기원, 미적 가치와 만
드는 법, 요(窯)와 지역 등의 차이에 따른 종류 구별 등 중국도자사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함께
실렸다. 이 전시는 큰 호응을 얻어 교토, 오사카, 고베뿐 아니라 먼 지방에서까지 도자기 애호가
들이 찾아와 관람하였고, 진열된 작품은 매진되었다. 전시의 대성공에 힘입어 다카시마야는 같은
해 11월 이번에는 명・청대 도자기에 집중한 전시를 개최했다. 역시 진열품을 소개하는 팸플릿이
제작되었고 이번에는 청자에 초점을 둔 보다 심화된 도자사 지식이 소개되었다.
1930년대에 이르면 백화점들은 적극적으로 카탈로그에 들어갈 에세이를 당대 유명 동양미술
전문가들에게 의뢰했다. 예를 들어 동양도자연구소를 설립한 오쿠다 세이치(奥田誠一,
1883-1955), 오사카시미술관의 큐레이터 히로세 도손(廣瀬都巽, ?-?), 오사카시미술관의 큐레이
4) 千葉慶, 「日本美術思想の帝国主義化:一九一〇—二〇年代の南画再評価をめぐる」, 『美学』54.1, (2003).
백화점 동양품부와 제국의 ‘동양취미’ 99
터이자 동방문화학원의 연구자였던 고바야시 다이치로 (小林太市郎, 1901-1963), 도쿄미술학교
교수였던 다나베 고지 (田邊孝次, 1890-1945), 도쿄미술학교 교장과 제국미술원장을 지낸 미술
행정가 마사키 나오히코 (正木直彦, 1862-1940) 등이 백화점에서 열린 동양 미술 전람회 도록에
글을 썼다. 백화점은 자신들이 판매하는 동양미술의 상품가치를 더욱 높이기 위해 전문가들에게
원고를 청탁했고 그 결과물은 동양 미술사에 대한 대중 교육의 역할을 했다. 그리고 동시에 ‘동
양’에 대한 식민지식을 축적하는 데 일조했다. 결국, 일본이 나머지 아시아를 대표하고, 보호하
고, 심지어 지배하는 자격의 근거인 ‘문명국’으로서의 정체성이란 사실 이 모두에 선행된 것이
아니라 실은 이처럼 아시아의 문화를 조사하고, 수집하고, 소비하는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졌다.
1934년 7월 도쿄 시로키야와 같은 해 10월 오사카 다카시마야에서는 《조선고도사료대전람회》
/《동양고도기대전람회》라는 제목의 전시가 열렸다. 이 중 《조선고도사료대전람회》는 아사카와 노
리타카(浅川伯教, 1884-1964)가 20년간 조선 도자에 대해 연구한 연구 결과를 소개하는 전시였
다. “조선 고도자의 신”(朝鮮古陶磁の神様)으로 불리는 아사카와 노리타카는 그의 아우 아사카와
타쿠미(浅川巧, 1891-1931)와 함께 조선 도자 연구의 선구자로 잘 알려졌을 뿐 아니라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 1889-1961)에게 조선 도자를 소개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이 전시에서는 아사
카와가 한반도 전역의 400개 이상의 도요지를 돌며 수집한 도편이 연대, 지역, 형태, 기법 등에
따라 분류되어 전시되었다. 전시장 벽면에는 관객들의 전시 내용 이해를 돕는 패널들이 설치되었
고 그중에는 아사카와가 직접 그린 조선 가마의 구조와 생산과정을 설명하는 패널도 포함되었다.
이 전시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점은 오사카 다카시마야 전시 도록에 실린 한 장의 사진에 있다.
이 사진에는 영친왕 이은과 영친왕비 마사코가 아사카와의 설명을 들으며 전시를 관람하고 있는
모습이 담겼다. 사진은 한 달 앞서 도쿄에서 열린 시로키야 전시를 찾은 두 사람의 모습을 담았
다. 조선의 왕이 직접 전시를 보러 왔다는 사실은 전시의 권위를 높이고 홍보하는 데 분명 높은
선전 효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이 사진에서 누가 이 미술사적 연구와
전시의 주체이며 누가 이 전시가 교육하는 대상인가가 명시화된다는 점이다. 조선의 왕은 일본인
이 수집하고, 연구하고, 전시한 그의 ‘고국’의 미술품에 대해 일본에서 일본인 연구자로부터 학습
하고 있다. 전시를 주최한 것은 조선도기연구회로 이 단체는 1929년 아사카와의 연구를 후원하
기 위해 결성되었다. 도록의 첫 번째 페이지에는 연구회의 설립취지서가 재수록 되었다. 예상대
로 한반도의 신구 도요지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수행하고 소멸 위기에 처한 조선 도자 전통을
지켜낼 수 있는 것은 일본뿐이라는 요지의 취지서이다. 식민정책으로부터 원칙적으로 자율적인
백화점에서 열린 학술적이고 교육적인 외양의 전시였지만 결과적으로 일본의 조선에 대한 지적
권위를 생산하고 일본의 조선 지배를 자연화하는 데에 기여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100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일본 백화점의 동양품부는 일본 식민제국주의의 팽창을 배경으로 탄생하고 발전했다. 백화점은
단지 식민관료와 지식인들이 구축한 이데올로기적∙정치적 담론으로서의 ‘동양’을 전용하는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동양품부의 판매, 선전, 교육 등을 통해 ‘동양’이라는 지리・문화적 상상체가
대중의 의식 안에 구체화, 실체화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동양미술의 미적・지적 소비가 아시아
주변국에 대한 일본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근거로 작동하는 동시에 일본의 문화적 패권을 강화함
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아시아 지배를 위한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와 권력관계를 재생산했다.
4. 동양품부, 카라노모야의 유산
동양품부라는 시장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동양취미’를 향유하는 소비자의 존재가 전제된다. 더
구나 소수의 컬렉터나 미술 애호가만을 상대로 하는 전문 미술상이 아닌 백화점이 동양품부 설
치를 결심할 때에는 동양품이 대중적 소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1920년대 시
작된 ‘동양취미’ 붐은 봉건 엘리트의 취미를 모방하고자 한 일본 신중산층의 욕망과 무관하지 않
다. 구체적으로 여기서 신중산층이 따라 하고자 했던 취미는 카라모노 애호를 말한다. 카라모노
는 문자 그대로는 중국 당나라 물건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단어는 중국뿐 아니라 한국과 동남아
시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물건들을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말로 그 외연이 점차 확대되어 사용되
었다. 중세에서 근세에 걸친 카라모노 애호는 일본인들의 아시아 물건에 대한 취미가 일본이 제
국주의적 야망을 갖고서야 나타난 새로운 현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카라모노라 불린 동
양 미술 및 공예품은 수 세기에 걸쳐 일본 지배계층의 예찬을 받으며 일본의 문화실천 내에 깊
숙이 자리 잡고 일본 미술사의 일부를 이루어 왔다.
카라모노라는 단어가 문헌에 등장한 가장 이른 예는 808년이지만 카라모노에 대한 관심은 가마
쿠라 시대 아시아 대륙과의 무역이 활발해지고 중국의 선승들이 일본에 도착하면서 증가하고, 무
로마치 시대 엘리트 사이에서 크게 폭발한다. 아시카가(足利) 쇼군의 중국, 한국 물건에 대한 애
정은 대단한 것이었고 카라모노는 무로마치 막부의 권력 표상 장치이자 무가, 공가, 사찰 간에
서로를 견제하고 또한 동시에 관계를 쌓는 수단으로도 기능했다. 도코노마(床の間), 치가이다나
(違い棚), 츠게쇼인(付書院) 등 일본 전통건축 객실장식(座敷飾り)의 핵심적 공간이 엘리트 가옥
에 설치되기 시작한 것이 이 시기로 바로 카라모노를 진열하기 위해 처음 고안되었다. 당시 엘리
트 가옥의 객실은 송・원대 회화와 청동 혹은 청자나 청화백자로 만든 꽃병, 촛대, 향로, 문방구
등의 카라모노로 장식되었다. 즉, 일본에서 미술품을 수집하고, 진열하고, 감상하는 문화적 실천
백화점 동양품부와 제국의 ‘동양취미’ 101
이란 카라모노에 대한 애호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5세기 후반 다도가 지배
계층의 중요한 사교활동의 일부로 자리 잡은 것 역시 카라모노 유행에 이바지했다. 카라모노는
다회 중에 진열하고 감상할 목적으로 주로 수집되었다. 카라모노를 수집하는 데 필요한 부와 지
식은 상급 사무라이와, 승려, 공가의 귀족 등 특권층에게만 허락되었기 때문에 카라모노의 소유
는 곧 사회적 지위의 기표가 되었다.
도쿠가와 막부의 쇄국정책에도 불구하고 카라모노 애호 현상은 나가사키를 통해 수입되는 카
라모노를 통해 에도 시대에도 지속되었다. 17세기 이르면 카라모노를 향유하는 새로운 집단이 부
유한 도시 상인들 사이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들은 다도와 카라모노 수집에 참여함으로써 지
배 계층과 나란히 설 수 있는 지위를 획득할 수 있기를 꿈꾸는 이들이었다. 카라모노에 관심을
갖는 수집가들의 계층이 확대되고 그 수가 늘어나면서 이 늘어가는 수요에 힘입어 도시에 카라
모노야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카라모노야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박래품을 취급했다. 그중에는 다
도구, 향로, 청동기, 화병, 칠기, 도자기, 중국회화, 문방구, 금은세공품, 양단, 사라사, 러그, 가구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카라모노야에서 취급하던 품목들이 상당 부분 백화
점 동양품부에서 판매하던 품목과 일치한다는 점이다.
東洋品部
支那 : 墨、筆、陶器、漆器、香爐、紫檀製品、竹細工、カーペット、繻子、絽、扇子
臺灣:大甲製蓙、パナマ製品、煙草入、下駄表、楠細工、籐細工、樟脳
朝鮮:李王家美術製作所作品(陶器及び螺鈿細工)
爪哇:更紗、水牛細工
新嘉坡 : 帽子、手縫皿敷、籐ステッキ、白檀沈香莨入5)
카라모노와 같은 구성을 보이는 백화점 동양품부의 상품들 역시 도코노마를 중심으로 한 실내
장식에 필요한 물건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20세기 초 일본에 출현한 백화점의 주 고객은 신흥
도시 중산층 가정이었다. 백화점은 이들이 동경하는 근대적 생활방식을 영유하는 데 필요한 상품
들을 제공했다. 그중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 것이 실내장식과 관련된 상품들이었다. 더는 개
인의 사회적 위치가 타고난 신분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는 시대에 사람들이 서로를 판단하는 기
준 중 하나로 취미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한 가정의 실내장식을 통해 드러나는 취미는 그 가정의
사회적 지위를 보여주는 지표일 뿐 아니라 사회적 지위를 결정짓는 요소로서도 기능했다. 따라서
5) 「増築落成し新部門開く」, 『三越』 (1921.7), 5쪽.
102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실내장식에 필요한, 그중에서도 특히 도코노마를 장식하는 오브제와 미술품이 중산층 가정의 중
요한 소비 품목으로 등장했다. 신흥 중산층에게는 과거 원칙적으로 엘리트 가옥에만 허락되던 도
코노마가 있는 집에서 사는 것이 공통의 꿈 중 하나였다. 메이지 유신으로 도코노마 설치에 대한
규제가 풀리면서 도코노마는 일본식이던 화양절충식이던 건축적 양식과 관계없이 중산층 주택에
널리 보급되었다. 중산층 주택에는 예외 없이 서재나 객실에 도코노마가 설치되었다. 도코노마를
가옥에 설치할 수 있는 지배계층의 배타적 권리에 대한 봉건적 규제가 풀리면서 도코노마라는
건축적 공간 그 자체뿐 아니라 그 공간을 둘러싼 문화적 실천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 역시 모두
가 가질 수 있게 된다. 도코노마가 설치된 집에 살면서 그 공간과 관계된 문화적 실천에 참여함
으로써 신중산층은 자신들의 문화적 취미를 과시하고 사회적 지위를 승인받고자 했다.
도코노마의 보급은 그 장식에 필요한 미술품의 수요를 급증시켰다. 동양품부를 개설하기 전 이
미 백화점에서는 당대 일본 미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판매하는 미술부를 통해 실내장식에 필요
한 물품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1907년 미쓰코시가 제일 먼저 미술부를 개설한 후 다른 백화점들
이 차례로 미술부를 오픈했다. 고객들이 진열된 미술품으로 자신들의 집을 꾸몄을 때 어떠한 분
위기가 연출될 지 상상할 수 있도록 일본식 다다미방으로 모델룸을 설치하고 미술품을 전시하기
도 했다. 더불어 백화점은 기관지 등을 통해 객실장식이란 어떠한 의미를 가지며, 미술품을 적절
하게 진열하는 방법은 무엇인지에 대한 교육을 하기도 했다. 다카시마야는 「객실 장식법」이란 시
리즈를 기관지『미술화보』에 연재했다. 그 안에는 계절에 따라 어떤 그림이 진열되어야 하는지,
도코노마와 치가이다나에는 화병과 다른 장식품들이 어떻게 배치되어야 하는지 등 매우 상세한
안내가 담겨있다.
동양품부의 설치로 백화점은 당대 일본 작가들이 제작한 미술품과 공예품에 한정되었던 미술
부의 레퍼토리를 중국, 조선, 대만, 동남아시아에서 들여온 미술 및 공예품으로 보충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도코노마가 본래 카라모노를 진열하기 위해 처음 고안된 건축적 공간이라는 사실
을 고려한다면 동양품부는 단지 신중산층 가정의 도코노마에 장식되는 미술품에 다양성을 가져
왔을 뿐 아니라 도코노마 장식을 보다 그 ‘원형’에 가깝도록 만들었다. 유럽의 부르주아들이 귀
족 취미를 흉내내 실내를 장식했던 것처럼 일본의 신중산층은 봉건 엘리트들의 도코노마를 모델
로 자신들의 도코노마를 장식하고자 했다. 실제로 당시 신중산층이 참조하던 많은 실내장식법 지
침서들이 모범으로 삼고 있는 것은 무로마치 시대에 쓰인 『군다이칸소초기』(君台観左右帳記)라는
메뉴얼이다. 이 책은 아시카가 쇼군의 수장품을 관리한 노아미(能阿弥, 1397-1471)와 소아미(相
阿弥, 1465-1523)가 서술한 것으로 중국 회화와 공예품에 대한 감정에서 객실장식의 방법에 이
르기까지 카라모노 수집, 감상, 감정에 대한 정보가 들어있는 비전서이다. 『군다이칸소초기』로
백화점 동양품부와 제국의 ‘동양취미’ 103
전해지는 봉건 엘리트의 취미에 가까울수록 그 취미는 더욱 권위 있고 진정한 것으로 여겨졌다.
백화점은 동양품부에서 제공하는 미술품들이 카라모노로 도코노마를 장식하던 봉건시대 지배계층
의 문화실천을 보다 유사하게 실현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을 놓치지 않고 동양품부 홍보에 이용
했다. 예를 들어 1941년 다카시마야는 말레이군도/뉴기니에서 들여온 골동도자기를 전시, 판매한
《지나남방고도자전관》을 개최하면서 이 남방 도자기들이 아시카가 시대 이래 다인들이 열광적으
로 사랑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가 오사카 성에서 다이묘들을 불러 전
관을 개최한 물건이었음을 강조했다.
일본의 신중산층이 과거 경제적・문화적 자본을 갖추고 있는 지배계층만이 향유할 수 있던 카
라모노 수집이라는 문화실천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은 제국 일본과 아시아 주변국 간의 정치・
경제적 힘의 불균형이 전례 없이 많은 수의 미술품을 아시아 각 지역에서 일본으로 흘러들어 가
도록 만든 덕분이다. 조선에서는 청일전쟁 이후, 중국에서는 의화단 운동(1899-1901) 이후부터
각각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 고미술 및 골동품이 대량으로 상대적으로 싼 가격에 시장으로 쏟아
져 나오기 시작했다. 동양품부에서는 당대에 만들어진 미술품뿐 아니라 고미술과 골동품을 함께
취급했는데 이는 당대 일본 미술가들이 제작한 신작만을 취급하던 미술부의 사업과 흥미로운 대
조를 이룬다. 미술부가 고미술품을 다루지 않은 것은 위조품 판별의 어려움이라는 부분도 있었지
만, 중산층 가정에서 소비하기에 일본 내에서 거래되는 고미술품의 가격이 너무 비싸고 그 수량
역시 제한되었기 때문이었다. 백화점 동양품는 일찌감치 조선과 중국에 진출한 전문 일본 미술상
들이 형성해 놓은 미술시장에 합류해서 일본의 중산층 가정에 중국과 조선의 고미술품을 제공했
다. 앞에서 소개한 1924년 다카미사야에서 열린 중국 도자기 전시에 출품된 골동도자기의 가격
이 싸게는 3엔에서 비싸게는 500엔까지 다양했지만 50엔 이하의 물건이 절반 이상이었다. 당시
은행원 초임급이 50엔에서 70엔 사이였음을 고려하면 신중산층 가정의 수입에 있어 적은 금액은
아니지만, 구매를 엄두 내지 못할 가격은 아니었다. 구 엘리트들이 소장했던 소위 명물(名物)이라
불리는 카라모노의 경매 가격이 수 만 엔에 이르던 것을 상기하면 백화점에 전시된 중국과 조선
의 고미술품들이 순식간에 매진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백화점이 동양품부에서 판매할 물건을 확보하는 과정에는 현지 미술상뿐 아니라 일본 식민정
부가 직간접적으로 개입하기도 했다. 다카시마야의 『미술화보』 1924년 7월호에는 “복주(福州)의
색 입힌 칠기는 지나대관의 주문에도 응하기 어려운 정도로 귀한 물건인데 복주 일본총영사관의
후의로 입수하는 것이 가능했다”라는 설명이 등장한다. 한편 1934년부터 1940년까지 7회에 걸쳐
다카시마야와 마쓰자카야에서 열린 《조선고미술공예전람회》와 같은 경우는 조선인 미술상 이희
섭이 경영하는 문명상회가 수집한 조선고미술공예품을 조선총독부의 공식 후원하에 일본으로 가
져와 전시・판매했다. 동양품부가 취급한 미술품은 물론 고미술에 한정되지 않았다. 고미술품의
재현품 그리고 당대 미술공예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질의 미술품이 취급되었다. 미쓰코시는 동
양품부를 개설할 당시 조선의 경우 이왕가미술제작소로부터 그 미술공예품을 제공받았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배하에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대한제국 황실에서 사용할 기물을 전담으로 제작
하기 위해 1908년 설립된 왕실기물제작소에서 만들어진 공예품이 백화점을 통해 일본 중산층 가
정으로 들어가는 일은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제국 일본과 식민지 혹은 점령지 사이의 비대칭적 권력관계가 일본의 신중산층에게 구입 가능
한 동양미술품과 그것을 감상하는 데 필요한 문화적 지식을 동시에 제공했다. 신흥중산층은 역사
적으로 일본 지배계층의 취미를 표상해 온 카라모노를 소유함으로써 봉건 엘리트에게 부여되었
던 사회적 특권을 자신들도 누리게 되었다는 심리적 만족을 할 수 있었다. 동양 미술 및 공예품
소비는 일본의 제국으로서의 정체성을 세우는 데 이바지했을 뿐 아니라 신흥 중산층의 계급 정
체성 확보에도 기여했다.
백화점 동양품부와 제국의 ‘동양취미’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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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代日本における像の普及とその逸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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像(イメージ)の力
-近代日本における像の普及とその逸脱
平瀬 礼太
姫路市教育委員会 美術史硏究者
< 目 次 >
1.天皇像の普及
2.敵愾心の標的としての像
3.銅像の立つ位置 4.二宮金次郎、楠公、そして彫刻の姿
5. おわりに
1 天皇像の普及
国家権力を背景に、一般に流布したという意味で最もわかりやすい像=イメージはいわゆる「御真
影」、日本の天皇と皇后の写真であろう。学校などに下賜されて、教員や学生は毎日欠かさず拝礼す
る。まずはこの御真影にまつわる事例を紹介する。
明治初期の1872年頃に御真影の下付ははじまっている。ただし、1878年の新聞記事を見ると吉原の
ある上等娼妓の部屋に「主上と皇后宮のお写真が立派にかけて有る」と記され、下付されたものではなくと
も、天皇皇后の肖像が流布し、明治政府の意向が非公式に行き渡るようになっていたことを示している
(『読売新聞』1878年4月16日)。
小野雅昭『御真影と学校』(2014年 東京大学出版会)によると、もともと御真影は優良学校のみが下
賜を申請している。教育勅語発布を目前に、文部省が天皇制イデオロギー教化・浸透のために御真影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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及を企て、1891年の文部省訓令第4号では、「管内学校へ下賜セラレタル天皇陛下 皇后陛下ノ 御影
並教育ニ関シ下シタマヒタル 勅語ノ謄本ハ校内一定ノ場所ヲ選ヒ最モ尊重ニ奉置セシムヘシ」とされた。
1890年、文部省の下賜に関する照会に対し、宮内省は全公立小学校への下賜には難色を示し、既に
下賜済の御真影の複写を認める。これらの普及に地域差(道府県により0%~100%)は大きかった。
1910年代になると御真影下付申請資格が緩和され、私立学校にも資格が付与される。大正天皇即位に
際して、文部省は積極的に御真影「拝戴」姿勢に転じるが、「奉安」施設の不備を掲げて拒否する学校が
多くを占め、遍く普及する状況には程遠かった。
1890年代は御真影への不敬行為が増加する一方で、1896年6月15日の明治三陸地震では、佐藤陳
が御真影を捧げ出す美談が話題となり、舞台化されるほどの評判となっている。御真影が命と引換に護ら
れる状況が一般にイメージされるようになっていた。実際に1918年、京城の龍山本町小学校が全焼した
際、既に御真影は他の教員により移されていたが、焼失したと思った校長の鈴木志津衛は御真影室に飛
び込み、奉置所の正面に座して殉死した。1923年の関東大震災に際しては御真影にも当然の危機が迫
り、殉職する校長を讃える美談=悲劇が多数生れている。一方で高知県香美郡山田町小学校では教員
男9名女9名のうち6組の男女教員が御真影奉安所で密通し、2組は夫婦になるという不祥事が起こってい
る。この他御真影を用いて人を貶め、陥れる事件も度々おこっている。
頻発する御真影の焼失や盗難対策のために「奉護」が重視され、少しずつ独立奉安殿が普及したが、
これは政府機関が奨励したものではない。1928年の昭和天皇御真影下付に際しては申請資格条件を撤
廃する代わりに「奉安設備有之」を絶対条件としている。しかし御真影の多数の汚損が見つかり、また
1935年の天皇機関説事件、その後の国体明徴運動により天皇の神格化が進んだことも重なって、神殿
型鉄筋コンクリート造奉安殿が奨励され、全ての教育機関に御真影をいき渡らせ、学校儀式の挙行を強
制した。しかしこれは同時に毎日の拝礼を不可視の像に強制する奇妙な形式を強いることも意味した。
樋浦郷子「植民地朝鮮の「御真影」-初等教育機関の場合-」によると朝鮮の御真影について1922年朝
鮮総督府令の学校規定には、本国や台湾にはあった「御影に対し奉り最敬礼」の文言がなかった。さら
に1937年段階で朝鮮人対象校に、奉護施設なきまま「下賜」したことは、学校に「御真影」を保管できな
い状況を意味していた。初等学校には朝鮮人教員のみで構成される学校や、日本人教員が少数の学校
も多く、奉安殿が作られたとしても宿直等で「奉護ノ万全ノ期ス」ことは不可能とされた。日本人校では、
そもそも「奉護」のための宿直の輪番等を充足させるほど教職員が在職する学校数が限られていたという。
リスクマネジメントができない中で、御真影の威力は期待できなかったということである。
終戦間近い1944年、本国の都市部では国民学校児童よりも先に御真影が疎開する。像の力が人間に
優ることが当然とされる状況が生れたが、その超越的な御真影も不敬行為に怯え、地域性を無視し得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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かったのである。
銅像はどうだったのか。天皇像や皇族の像が屋外に建てられることは稀である。雨露にさらされ、冒涜
される可能性があることは、銅像建設の妨げとなったに違いない。多量に製作された明治天皇像も一部
を除くと室内向けに作られていた。大正天皇、昭和天皇の銅像も流布しない。例外となったのは神武天
皇の像である。1880年代末、皇城門外立像を募集した際は二重橋の入口に跨って神武天皇が軍馬に
乗っている図案が候補となり、天皇に奏上したが、諸国帝王来遊の際に馬足の下を歩いて宮城に入るの
は問題ではないかと天皇自身が疑問を呈したため中止になり、結局楠公像となったというエピソードが
あった(『美術園』1889年8月25日)。銅像の設立が本格化するのが1890年代からと考えると、この神武
天皇像は早期から設立案が浮んでいたということになる。因みに神武天皇の視覚的表象が増加するのは
1870年代後半からであると千葉慶は指摘する(「近代神武天皇像の形成 明治天皇=神武天皇のシンボ
リズム」『近代画説』第11号 2001年)。
陸羯南が主宰して1889年に創刊した新聞『日本』は国民主義の立場からジャーナリズム運動を展開した
ことが知られる。創刊から間もない1889年4月には神武天皇祭に合わせたと思われる「神武天皇御繍像」
を付録として配布した。日本の歴史画は武家や僧侶が多く、国家に関わるものが稀で、神武帝も想像で
よく「野蛮な酋長のようなもの」が描かれたが、努めて当時の事物を参照し、当時の文物が既に発達して
いたと想定して荘厳を期したという。考証にあたった川崎千虎は、髭は旧記に加えて聖徳太子の像を参
酌し、他の事物も古刹の所蔵品や、古事記、日本書紀、本朝軍器考図式、上代衣服考などを参考にし
ている。
この付録に連動して同月に『日本』社告で日本歴史上人物の絵画もしくは彫刻を公募する。1890年2
月11日の紀元節を期し、尊王愛国の精神を喚起し、美術を奨励することが目的で、絵画の題は神武天
皇即位の図、日本武尊東征の図、蒙古敗軍の図、彫刻の題は神武天皇、護良親王、楠正成と決まっ
ていた。彫刻の部で受賞したのが竹内久一である。その神武天皇像は1890年4月から開催された第3回
内国勧業博覧会においても二等妙技賞を受けた。竹内は、ちょうど紀元2550年の記念の年で史学的に
は歴史研究が盛んな頃であり、国会も開設されるこの時に彫刻すべきは「畏くも大八洲統一の聖主たる、
皇祖の尊像より外には無い」と考えたという(「皇祖御立像製作の感想」『日本及日本人』530号 1910
年、および「先帝陛下と神武天皇」『書画骨董雑誌』52号 1912年)。御真影普及の時期と重なることにも
注目しなければなるまい。
製作について国学の大家などは、「国体を汚す」などとして話してくれず、皇統が連綿と続く中「御神
孫」が「御祖宗」に似ることは不思議ではなく、「下賎」なものをモデルに使うような尊厳を汚すことはでき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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いので明治天皇の写真を模したという。紀元2550年の記念に日本歴史や国体を注入した一大製作をし
たことは竹内の誇りであった。因みに同年には神武天皇が即位した場所に橿原神宮が創設され、金鵄勲
章も制定されている。
第3回内国勧業博覧会には池田清助名義で神武天皇銅像が出品され、同じ頃には島村俊明も神武天
皇像を制作、島村の教えを受けた北村四海は1895年の日本美術協会展に木彫の神武天皇像を出品し
て一等賞を得た。1896年には徳島市の眉山にある大瀧山上公園に日清戦役従軍記念の神武天皇像が
建設され、1899年には豊橋の神武天皇立像が征清の戦勝紀念として建てられ、鋳造後に日本美術院に
おいて公衆の「参拝」を許したことが知られる。いずれにせよ世紀末までに神武天皇像が一般化していた
ことがみてとれよう。
御真影は文部省の意向で浸透が図られるが、奉護の問題が一般化を妨げ、地域差も生んだ。結局、
神殿型鉄筋コンクリート造奉安殿の登場で不可視化された「御真影」が1930年代中盤以降の状況におい
てようやく浸透した。一方で天皇の立体像は神武天皇(≒明治天皇)の姿として西洋的近代国家像と神
秘的象徴をミックスした形で国家体制の整う1880年代後半から普及する。こちらは御真影とは異なり、皇
室を基礎とした国家を念頭に置きながらも民間、地方ベースで制作され、像を通じた景仰は地方や、あ
る特定の層の間でのみ享受されている1)。
2 敵愾心の標的としての像
敵愾心の醸成を目的に使われる像も戦中の特徴である。1943年4月、東京・日本橋の隣組運動会で
はアメリカのルーズベルト大統領がバケツ・リレーの標的となっていた。6月の愛知県の消防吏錬成大会の
防火訓練でもチャーチル、ルーズベルトの的めがけて放水が行われている。遡って1943年1月にはルー
1) 同じ神武天皇でも伊藤彦造の絵は全く趣を異にする。「血潮で描く神武天皇の御尊像・・・伊藤彦造氏は絵画報国の一
念から自分の血をしぼつて神武天皇のお姿を描き奉り、広く国民の胸にうつたへやうと最初左腕にメスをあてゝ流るゝ血を
筆に受けて絵絹に描き込んでゐたが、生理的相関関係から右手にふるえがきざしたので其後は両腿並に肩寄の背中から
採血し神武天皇の御膝下あたりまで描いたが、すでに全身十数ヶ所に上る傷と貧血のため遂に倒れ一時休養して元気の
回復を待ち再び続けるはずである。完成の上は大阪毎日新聞社を通じて陸軍省に寄贈したいとの希望である」(『塔
影』8巻4号 1932年4月)。伊藤は日支事変に際して国民が涙ぐましい慰問金、兵器献納の美挙を続けるにつけ、貧
乏画家としては絵筆をとるしかなく、建国のはじめの神武天皇の姿を魂と血のあらん限り注ぎ込んで皇恩に報いたいと念
願したとい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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ズベルトとチャーチルの似顔絵が貼り付けられた「米英の突撃目標人形」ができる。体の下部には「屠
れ!」「撃滅!」の貼り紙が付けられ、その前を竹刀や棒を手にした青年がエイッと人形を狙うのである。
長野県では「米鬼・英鬼」と描かれたルーズベルトとチャーチルの吊り看板が設置され、市内は本土決戦
態勢のみなぎったとげとげしい空気だったという(川上今朝太郎『銃後の街 -戦時下の長野・1937~
1945』1986年 大月書店)。埼玉県秩父でも町角にチャーチルの藁人形を置き、道行く人に突かせると
いう行為が記録されている。人形の左横には「米英撃滅 老も若きも共に一突」と記された看板が立てられ
た(清水武甲『秩父戦中の記録』1977年 木耳社)。
このような冒涜のための肖像としては森寛齋描く「人体的異人図」が知られる。1863(文久3)年5月10日
が攘夷決行の期日とされ、長州藩は下関海峡で米・蘭・仏等の外国艦船を砲撃した。1年後の同日に長
州藩主毛利敬親は下関攘夷戦争の1周年を記念して臣下と祝宴を開き、藩地にあった少壮の尊攘志士
達は森に異人図2面を依頼、これを銃撃して祝意を表した。この図はその後忘れられるが、戦中に復活
を遂げる。「見事、撃ち抜いた胸板 米英蘭めこの通り! 八十年ぶりに公開される尊攘秘帳 撃滅一途
“人体的異人図”」(『京都新聞』1943年10月26日)と、当時の敵国米英蘭と幕末の尊皇攘夷運動を重
ね合わせて、国民士気昂揚を促す観点で京都帝国大学尊攘堂の展示に供され、メディアに取り上げら
れる。
これらの冒涜行為は、単純に敵愾心を醸成する方法で戦意高揚、さらには間接的に国家体制への意
識強化を図ったのである。もちろん像を撃って具体的に敵に何かが起こるはずはない。しかも国家が直
接手を下すものではなく、大衆が主体となったものが多い。しかし実際の敵とは違い、絶対に攻撃される
こともなく、見る側の一方的な敵意を受け容れてくれる敵の像は、非常に都合の良い敵愾心養成メディア
であったといえるだろう。そして視線の一方向性という意味では、不可視の像でありながら視線の中心とし
て機能した御真影と対をなすものと考えることもできよう。
3 銅像の立つ位置 権威を代弁する象徴として有効に機能する「銅像」が紹介されたのは『西洋聞見録』(1869年)のような
海外事情を紹介する書籍ということになるが、それでは近代日本において単純に誰の銅像を立てれば国
家の権威を浸透させるために都合が良いかと考えたのなら、明治天皇や神武天皇、明治維新の功績者
などの名が挙がるのではないか。しかし実際にはどうであったのか?完成したかどうかは問わずに、明治
以降どのような銅像の設置が計画されたのか初めに見てみよ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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まず、1870年代後半には和気清麻呂、織田信長の銅像を設置する案が出されるが、実現はしなかっ
た。1880年には金沢兼六園内に西南戦争郷土戦没者を慰める明治紀念之標(日本武尊、石川県戦士
尽忠碑)が建てられる。日本最初の銅像とするのであるが、神話上の存在であり、宗教的な像を中心に
江戸期においても様々な像が作られていたことを考え合わせると、近世の延長線上の碑表とみなすことも
可能であろう。本格的に銅像が話題となるのは1880年代のことである。
1880年代に入って計画されたのは大村益次郎、佐久間象山、西郷隆盛、神武天皇、日蓮、楠木正
成、亀井玆監、伊藤博文、毛利忠正、聖徳太子、井伊直弼などである。1890年代には桓武天皇、山
田顕義、徳川慶喜、福沢諭吉、近藤真琴(国語学者、教育者)、可美真手命(うましまでのみこと 軍
神とみなされた)、北里柴三郎、青山胤通、皇太子、豊臣秀吉、北白川宮、ジェンナー、有栖川宮、
川田男爵、前島密、神武天皇、北垣国道などである。このラインナップを見れば、皇室から将軍、明治
維新の功績者、教育者に医学者など一様でないことは一目瞭然であろう。偉人を顕彰する銅像の概念が
移入され、彫刻技術の向上も背景に銅像ブームと言える状況は生れていたが、功績者を顕彰することに
変わりはなくとも、国家が銅像制作を奨励するわけでもなく、ある偉人を顕彰したい人々がばらばらに各
地に設置するという状況にあったのである。
その中でも相反する評価から長期間に及び紛糾の続いた井伊直弼銅像設置の経緯を例にとってみよ
う。井伊直弼(1815-60)は1858(安政5)年に大老となって一橋慶喜擁立派を抑えて徳川慶福(家
茂)を将軍に内定し、日米修好通商条約を勅許なしに締結するという強引な手法をとった。安政の大
獄で吉田松陰らを処刑するなど弾圧を進めるが、1860年に桜田門外の変で水戸浪士らに暗殺されてい
る。欧米流近代国家建設への方向転換に多大な貢献を成した先覚者として高く評価できるにせよ、攘
夷論者弾圧の印象が強い。この井伊の銅像が建設されるということが微妙な問題をはらむこととなる。相
馬永胤(旧彦根藩士)「横浜掃部山井伊直弼公銅像建設沿革」(1909年)などを参考に経緯を確認
したい。
1881年に井伊の記念碑建設計画が立ち上がり、上野公園、芝公園、靖国神社付近が候補となる
が、支障あって横浜戸部不動山(後の掃部山)が次の候補となるも、東京が良いとの意見が強く、初め
から波乱含みの様相を呈している。1883年に上野東照宮境内付近が候補となるが、許諾が得られず、
再度横浜戸部不動山に決まって払下げを所有者の鉄道局長に出願して許可を得た。ところが突然藩閥
政府の圧迫で中止となる。ここから10年の時を経る。1893年に神奈川県知事から内務省警保局長に碑
表建設の照会があったが、ここでも井伊の執政上の是非が識者の非難を免れず、また井伊を暗殺した者
が靖国神社に祭られていることが問題となった。内務大臣から伊藤博文総理大臣宛に閣議要請があり、
結局不許可とな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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懲りずに1899年、有志者が日比谷公園建設の使用許可を得、東京市の参事会で可決する
が、今度は横浜建設を唱えるものがあり、懸案のまま宙を浮く。井伊建碑問題の長期化が形像取締規
則2)発令(1900年)の一因となったといわれ、内務省もしくは地方長官の許可を必要とするこの規則の
2) 銅像等を取り締る規則の変遷をみてみると、井伊銅像問題の紛糾をきっかけに1900年5月19日に内務省令第十八号形像
取締規則が出されて銅像建立には東京・京都・大阪では内務大臣の、地方都市では地方長官の許可が必要となってい
る。1929年11月に福岡県知事が神社境内に永遠に記念すべき戦役記念碑や御大典記念碑の建設は可能か照会した
が、翌年9月の神社局長の回答は不可であった。1935年7月には境内の建造物は祭神または国家と直接関係あるものに
制限され、1938年2月の各府県長官宛の内務省警保局長・神社局長通牒では「支那事変」に関する招魂社や記念碑の建
設計画が各地にあるが、事変の終局を予知できない状況では建設を競うことになるため、なるべく個々の建設を避けて市
町村などが共同で市町村内全戰死者合同の記念碑を建設することとした。1939年2月には記念碑、忠霊塔の建設はい
ずれか一方にして一市町単位で一基とし、碑表建設は私有地で行わないと、さらに忠霊塔建設の場合は軍として支援
し、単なる忠魂碑ではなく「永遠に護国英霊を祀る中心とする」こととしている。
このように銅像や建碑の濫作を統御するための形像取締規則であったが、1930年代からは日本と中国との戦争が記念碑の 需要を促進し、その制御が必要になっていたことを示している。
そして戦中で最も銅像に決定的に影響を与えたのは1943年3月5日の閣議決定「銅像等ノ非常回収実施要綱」であろ
う。これは調査した全国9236個の銅像のうち、国宝等をのぞき8957個の回収を命ずるという、3%しか残存を許さない非常
の措置であった(実際にはその通りにはなっていないが、それでもこれに含まれない銅像を含め、大量の銅像が回収さ
れた)。
終戦後の銅像の処理も興味深い。1946年5月に、ソウルにある日本のモニュメントは直ちに移動すべきと地域問題室?が
見解を示し、アメリカの工兵隊が設備が整い次第撤去しはじめる計画であったという。同年11月1日 に内務文部次官通
達「公葬等について」11月27日に警保局長通牒「忠霊塔・忠魂碑等の措置について」が出され、忠霊塔、忠魂碑、
戦没者のための記念碑や銅像建設を禁じ、現存のものも学校や公共施設からは撤去し、軍国主義的字句や碑文の抹消
を命じている。1947年3月1日に第8軍より「戦死者、軍国主義者、超国家主義者への葬礼、追悼式、記念碑」指令
があり、各部隊の司令官及び東京神奈川軍政部、中国四国軍政部の指揮官は指示が守られているかを監督するように、
しかし占領軍による偶像破壊に見えないよう配慮しろとのないようであった(Operational Directive No.21 )。これに
対して6月14日にCIE(民間情報教育局)から参謀長への返答は、翌年(1948年)までに記念碑等の脱軍国主義化
を終了させることができるとは思えない、日本政府の記念碑移動に関する通牒は軍服を着た全ての像を移動させる程に包
括的ではない、そうするには日本政府への指令が必要だが、そういう指令は日本文化破壊という占領軍に対する非難を
生むかもしれない、役人は皇室メンバーや帝国建設に顕著な功績を残した個人を記念した記念碑や彫像の移動について
は非常に嫌がっている、軍事的な外見だけで軍国主義的といえるかどうかが問題だ、軍国主義に対する貢献は大きくな
いのに軍服で表現されている高官や、明らかに超国家主義的な人が民間の服装で描かれたりしている、(東京都の)撤
去審査委員会の討議は外見が最も重要な要因と考えられていないことを示している、日本人にとって偶像破壊的に見える
運動からは、特に戦死者の記念碑に関しては反占領的感情が容易に動員される、というものであった。軍国主義・超国
家主義を排除したいGHQ側ではあったが、実際にはしたたかな日本の役人や、間接統治体制への配慮、撤去コストなどを
念頭において、非常に歯切れの悪い回答を出していることは注目すべきであろう。
最終的に「芸術的価値のある記念碑や彫像は破壊するよりむしろ公共の場でないところへ移動することを提案し、承認され
る5613の記念碑のうち、354の彫像は撤去され、890 の記念碑と17の彫像はあまり目立たない場所へ移動され、908 の記
念碑と29の彫像の外観は変更され、あるいは銘が変更された」(『GHQ占領史 21 宗教』日本図書センター)
とい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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おかげで井伊建碑の許可が困難となる。
まだ懲りない相馬永胤ら有志者は1909年の横浜開港50年記念までに落成し、盛大な除幕式挙行を予
定する。しかし政府当局は、某旧藩の者が、維新の時に足利尊氏木像が梟首されたのと同様の行為を
為しかねないと憂慮し、警戒体制を敷く。そんな状況下で銅像除幕式の当日に大臣は一人も来会せ
ず、式後に予定していた公衆の観覧も禁止した。
開国と近代化の道を開拓した井伊の銅像は、国家にとってさして問題はないはずである。近代国家建
設へ邁進する中で、西洋化と反西洋の相克を背景とした幕末の彦根藩対(吉田松陰を殺された)長州・
水戸藩の反近代的な対立が明治末まで尾を引いたのである。
26年後の1935年、8名の男が桜田門外の変記念日にこの井伊銅像の首を取ろうとしたという。また、小
説家の吉川英治はこの銅像の首が除幕式の数日後になくなったと記したが、こんな事実に反する度々の
噂は、価値観の相違に揺れるこの銅像の性格をよく語っている。
次は伊藤博文(1841~1909)である。明治維新の功臣、初代総理大臣として現代でも語り継がれる
伊藤は、明治十四年の政変、内閣制度創設、明治憲法制定、日清戦争の下関条約締結など重要な場
面でしばしば登場し、要職を歴任した。
日露戦争の最中、1904年10月に神戸の湊川神社境内拝殿東方に伊藤の銅像が建設され、除幕式が
挙行された。湊川神社は忠臣楠木正成ゆかりの神社で、伊藤は初代兵庫県知事としてこの地に縁があっ
た。この4日後の『読売新聞』は「嗚呼醜臣軟猴之図」と、銅像について揶揄する記事を載せる。西郷隆
盛像の犬にひっかけて猫を連れた伊藤の戯画であるが、生前に、しかも忠臣楠公を祀る神社内に銅像を
建てることが問題とされている。
翌年9月の日露講和条約に際してこの銅像に前代未聞の事件が起きる。講和条件に不満の民衆は騒
擾化し、東京日比谷の派出所焼打ちをはじめ大混乱となるが、神戸ではあろうことか、民衆が鉄鎖で伊
藤銅像を転覆させて一斉に喝采し、怒鳴りながら市中を引き回し、色好みで知られる伊藤に因んで福原
花街まで運んだ。雑誌『太陽』(1905年11月1日号)は生前に銅像を建てられたのも稀ならば、生前に
銅像を壊されたことも伊藤が初めてと記す。銅像建立が明治の流行であり、最初は尊重されたが、増加
すると有難味も減る、伊藤は大人物であるが、国民一般に徳望がない、銅像を建ててやりたいほどは有
難く思っていないのが破壊の一因、と記者は記す。
銅像は関係者に匿われ、隠居したまま1909年10月に伊藤は中国東北部のハルビンで暗殺される。さ
すがにこの後は伊藤を揶揄するばかりの調子はあらわれない。それどころか神戸や大磯、京城、ハルビ
ンと伊藤の銅像計画は後を絶たず、その人気をうかがわせる。神戸では大倉山に再建が決まり、1911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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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月に銅像除幕式は実施された。
1930年には山口県萩市の伊藤旧宅隣に元兵庫県知事で同県出身の服部一三の遺志により寄附され
た銅像が設置された。実はこの萩の銅像こそ引き廻しの銅像である。服部は、伊藤が神戸の一大恩人で
あるにも関わらず、不始末(引き廻しのこと)を起こして相済まない心地がし、密かに銅像を移して朝夕
仰慕していたという。しかしこの銅像は戦中に供出されたため、現在の像は戦後に萩焼で造られたもので
ある。
引廻しの刑に処されて復活した銅像も他に例を見ない。結局は大倉山乃銅像も戦中に供出され、現
在では台座を見るのみではあるが、神戸の伊藤の銅像は、銅像の何たるかを如実に現す。その人物に
対する民衆の思いが投影され、時には生きた人物ではなく銅で作られた「ひとがた」であるがゆえに過剰
な思念の向かう場となり、捌け口となって想像を超えた処置を受ける。銅像を引廻したところで何も変わら
ないが、銅像に何かを為すことが象徴的な行為として多大な効果を及ぼす。引廻しの原因は屈辱的講和
という面も大きいが、民衆のフラストレーションのやり場として、色好みで品格にかけるとも思われた英傑の
銅像はうってつけのシンボリックな材料であった。
4.二宮金次郎、楠公、そして彫刻の姿
乱立する銅像の中で独特の普及の形をとったのが、二宮尊徳像と、楠木正成像である。1930年代に
外地も含めた日本全国の学校に広まる二宮像であるが、二宮尊徳は必ずしも体制順応タイプの人物で
あったわけではない。そのために、幼児の寸暇を惜しんで勉学を怠らぬ勤労・勤勉の象徴として、前線
に立つのみならず、銃後を守る人々にも理解しやすい勤労・勤勉・倹約のモデルとして二宮「金次郎」像
が津々浦々に設置されることになる。元はといえば製造関連業者が二宮金次郎像普及を進めたものであ
り、国家的強制があったわけではないが、有志者の寄贈等により設置されて、夥しい数となっていた。楠
木正成は忠誠の志が尊皇思想に尊ばれ、国のために身を擲つべき戦中体制に模範の人格と讃えられた
がために全国に普及した。性格の異なる二宮と楠木が相補関係となり、これに御真影をあわせて三位一
体で学校に設置されたのである。姫路市広畑小学校の「聖域」に見られるように、学校の教師や生徒は
御真影や二宮、楠木像などを毎日拝することにより、敬国観念を身体化していくしくみとなっていた。
しかし設置からごく短期間、1940年代はじめに金属回収の一環で二宮、楠木像とも供出する事態とな
る。しかし、当事者たちは、国家危急の期に銅像が兵器となって応召する名誉の機会と意味を転じさ
せ、供出の厳かな式典を巧みに活用して人心を戦時体制に導くに好都合の機会としたことは、銅像壮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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会や台座に代わりに「大東亜戦争ノタメ応召」と記された立て札からも明白である。国民へ親しみのもたれ
る像であればあるほどその心理的効果は絶大であったであろう。
これらの像に不敬行為がなかったわけではない。例えば大阪の布施第四小学校の楠公像が1937年3
月に盗まれた。当直の訓導は辞表を出し、楠公は叩き潰されて古物商宅で見つかった。逮捕者が「半島
人(朝鮮半島出身者の当時の呼称で、侮蔑的意味合いを含まれて使われることも多い)」であったことが
同胞を刺激し、朝鮮半島出身の2名の資産家が再建を訴えた。呼応して沢山の朝鮮半島出身者から醵
金申し出が相次ぎ、2500名が寄附をする「内鮮融和」の大美談とされたのであった。
最後に芸術ジャンルとしての「彫刻」は戦中にどのような様相を呈していたかを見てみよう。もともと絵画
などと比べて圧倒的に人物像が多いジャンルではあるが、戦中では全般に写実性を重視しながらも、題
材は戦時を窺わせるものが多くなる。直接的な「聖戦」「神風」「出陣」などから「銃後漁村の指導者」「坑内
敢闘」「挺身女群」など産業戦士、銃後の人物を対象にするものが格段に増える。勤皇烈士彫刻のような
特殊な題材も大々的に扱われ、また軍人などを題材とする作品、作戦記録彫塑なども生まれて、絵画と
ともに戦時美術と呼び得るジャンルを形成している。
その一方で、絵画から裸体が排除される中で、彫刻では芸術の基本、肉体美として男女裸像が戦中
にも残存する。1941年の第4回新文展彫刻部門の戯画「裸人群像」に描かれるとおり、1943年の新文展
に至るまで、筋骨逞しい男性の裸像が増えたとはいえ、全般に女性の裸像が大半を占め、時節柄異様
な光景を生み出していたようだ。
日本近代美術史上でもよく知られた座談会「国防国家と美術」(『みづゑ』1941年1月)は鈴木庫三少
佐による「言ふことを聴かなければ絵具とカンバスは思想戦の弾薬なりといつて配給を止めてしまふ。さう
して展覧会を押へてしまへばそれつきりです」というあからさまな発言で知られるが、その座談で鈴木は裸
体芸術について「裸体なら裸体を通じて今日の国防国家的な思想感情を生かせばよい。或る画家の描い
た肺病やみのやうなものはいかない・・・」と発言している。彫刻家はそのとおりに「裸体で戦時精神を表
現」したわけである。
戦後に再建した忠犬ハチ公の作者として知られる安藤士(たけし)の「銃後の決意」(1943年 第6回
新文展)や雨宮治郎の「簡素」(1943年 第6回新文展)を見れば、表面的な造型以上に題材、いやタ
イトルが肝要であったことが端的にわかるであろ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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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おわりに
御真影、そしてそれに連なるものとしての二宮尊徳像、楠木正成像は学校に浸透し、毎日儀式的に
拝まれることにより、それらに内包させた価値を共有させ、国家意識の肉体化に寄与した。しかし奉護の
問題で奉安殿に収納される御真影は益々その不可視性を高め、1930年代に急速に普及した尊徳像や
楠公像は、供出されて「お国のために」短い命を全うし、溶解されることで残存した銅像以上に銅像として
の象徴的価値を生み出した。どちらも見えなくなることで最大限の価値を生み出すことはイメージとしては
皮肉なことであろう。 銅像は、偉人の像といえ、私的価値観に基づいて制作されるが故に時代の変化、人物への評価が変
われば大きく意味を変え、半永久的物理的特質を備えていたとしても、意味上の変化を妨げることはでき
ない。普遍的価値を長期に渡って継続的に表出し得た像は稀であり、結局は日常省みられなくなって供
出(応召)時が像の最も貢献する時となってしまったものが多い。
一方、芸術展の彫像は美術ジャンルの中で最もしぶとく命脈を保ったともいえるかもしれない。表現の
自由度の限界はあれ、最後まで芸術性を担保に裸像を作り続け、そのまま戦後へと連続していく。
国家が像を通じてある意識を普遍化しようとしても簡単にその通りにいくわけではない。銅像では国家は
規制により濫立を調整する程度の影響力に止まり、芸術分野では指導性を発揮するに至らず、芸術家も
倫理的拘束をうまくすりぬける対応を示した。そうすると、やはり御真影は、抜け道があったとしても、普
及度においても浸透度においても最も効果的なメディアであったということになるであろう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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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 E M 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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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像,이미지)의 힘-근대일본에서의 상의 보급과 일탈
히라세 레이타
히메지시교육위원회 미술사가
<목 차>
1. 천황상(像)의 보급
2. 적개심의 표적으로서의 상
3. 동상이 서는 위치
4. 니노미야 긴지로(二宮金次郎), 난코(楠公), 그리고 조각의 모습
5. 맺음말
1. 천황상(像)의 보급
국가 권력을 배경으로 일반에게 유포되었다는 의미에서 가장 알기 쉬운 상(像)-이미지는 소위
말해 ‘어진’, 즉 일본의 천황과 황후의 사진일 것이다. 학교 등에 전달되어 교원과 학생들은 매
일 빠짐없이 이에 대한 배례를 한다. 우선 이 어진과 관련된 사례를 소개하겠다.
메이지 초기인 1872년경부터 어진의 교부가 시작되었다. 단, 1878년의 신문기사를 보면 요시
하라의 어느 상등의 창기(娼妓) 방에 “주상과 황후님의 사진이 훌륭하게 걸려 있다.”라고 쓰여
있어 교부된 것이 아니더라도 천황, 황후의 초상이 유포되어 메이지 정부의 의향이 비공식적으로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요미우리신문』1878년 4월 16일)
고노 아키라(小野雅昭)『어진과 학교』(도쿄대학교 출판회, 2014년)에 의하면 원래 어진은 우수학
교에서만 하사를 신청했다. 교육칙어 발포를 목전에 두고 문부성이 천황제 이데올로기 교육화·
침투를 위해서 어진 보급을 기획했고 1891년의 문부성훈령 제4호에는 “관내 학교로 하사된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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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황후폐하의 어진 및 교육에 관해 내리신 칙어의 등본은 교내에 일정한 장소를 정해 가장
소중하게 모셔두어야 한다.”고 되어있다.
1890년, 문부성의 하사에 관한 조회에 대해 구나이성(宮內省)은 모든 공립 초등학교로의 하사
에는 난색을 표하고 이미 하사된 어진에 관해서는 복사를 인정한다. 이 보급에는 큰 지역차(도후
현에 따라 0%∼100% )가 있었다. 1910년대가 되면 어진 교부에 대한 신청자격이 완화되어 사립
학교에도 자격이 부여된다. 다이쇼천황의 즉위를 맞이하여 문부성은 적극적으로 어진을 수용하
도록 하는 자세로 전환하지만 ‘봉안’ 시설이 갖춰지지 않은 것을 들어 거부하는 학교가 많았고
철저히 보급된 상황과는 거리가 멀었다.
1890년대는 어진에 대한 불경행위가 증가하는 한편, 1896년 6월 15일의 메이지 산리쿠 지진
에서는 사토진(佐藤陳)이 어진을 구해내는 미담이 화제가 되어 무대화될 정도로 평판이 좋았다.
생명과 맞바꿔 어진을 보호하는 상황이 일반에게 이미지화되어 있었다. 실제로 1918년, 경성의
용산 혼쵸 초등학교가 모두 타버렸을 때 이미 어진은 다른 교원에 의해 옮겨져 있었는데 소실되
었다고 착각한 교장 스즈키 시쓰에(鈴木志津衛)는 어진실에 뛰어 들어 봉치소의 정면에 앉아 순
사했다. 1923년의 간토대지진 때에는 어진에도 당연히 위험이 찾아왔고 이로 인해 순직하는 교
장을 칭송하는 미담-비극이 수없이 만들어졌다. 한편으로 고치현 가미군 야마다쵸 초등학교에서
는 교원인 남성 9명, 여성 9명 중에 6쌍의 남녀교원들이 어진 봉안소에서 밀통해 2쌍이 부부가
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그 외에 어진을 이용해 사람을 업신여기거나 곤경에 몰아놓는 사건도
종종 일어났다.
빈발하는 어진 소실과 도난에 대한 대책으로 ‘봉호(奉護)’가 중요시 되어 조금씩 독립 봉안전이
보급되었지만 이것은 정부기관의 장려에 의한 것은 아니다. 1928년의 쇼와천황의 어진 교부 때
는 신청자격 조건을 철폐하는 대신에 ‘봉안 설비가 있을 것’을 절대 조건으로 하였다. 그러나 어
진의 파손이 다수 발견되었고 또한 1935년의 천황 기관설 사건, 그 후의 국체 명징 운동으로 천
황에 대한 신격화 진행이 겹치면서 신전형 철근 콘크리트로 만든 봉안전이 권장되었고 모든 교
육기관에 어진을 보내 강제적으로 학교 의식을 거행시켰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은 매일 행하는
배례를 눈에 보이지 않는 상(像)에 강요하는 기묘한 형식의 강요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히우라 사토코(樋浦郷子)「식민지 조선의 ‘어진’-초등 교육기관의 경우-」에 의하면 조선의 어
진에 대해 1922년 조선총독부령의 학교규정에는 ‘내지’나 대만에는 있었던 ‘사진을 받들어 최대
한의 경례’라는 문구가 보이지 않는다. 더욱이 1937년 단계에서 조선인 대상 학교에 봉호 시설이
없는데도 ‘교부’한 것은 학교에 ‘어진’을 보관할 수 없는 상황임을 의미하고 있었다. 초등학교에
는 조선인 교원만으로 구성되어 있는 학교나 일본인 교원이 적은 학교도 많고 봉안전이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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졌다고 해도 숙직 등에서 ‘봉호의 만전을 기한다.’ 는 것은 불가능했다. 일본인 학교에서는 원래
‘봉호’를 위한 숙직의 윤번 등을 충족시킬 수 있을 정도의 교직원이 제직하고 있는 학교 수는 한
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위기관리가 불가능한 상태에서 어진의 권위는 기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종전이 얼마 남지 않은 1944년, ‘내지’의 도시부에서는 초등학교의 아동보다도 어진이 먼저 소
개(疏開)된다. 상의 힘이 인간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당연시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인데 이 초월
적인 어진도 불경행위를 두려워했고 지역성을 무시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동상의 경우는 어떠했을까? 천황상이나 황족의 상을 옥외에 세우는 일은 드물다. 분명 비와 이
슬을 맞으며 모독을 당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 동상 설립에 방해를 가져왔을 것이다. 대량으로
제작된 메이지 천황상도 일부를 제외하면 실내용으로 만들어졌었다. 다이쇼천황, 쇼와천황의 동
상도 유포되지 않았다. 예외가 된 것은 진무(神武)천황의 상이다. 1880년대 말, ‘궁성문외입상(宮
城門外立像)’을 모집했을 때는 니쥬바시 입구에 걸쳐 진무천황이 군마를 타고 있는 도안이 후보
로 올라 천황에게 주상되었는데 여러 나라의 제왕이 찾아 올 때 말의 다리 밑을 걸어서 궁으로
들어오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겠느냐며 천황자신이 의문을 제기해 중지되었고 결국 난코(楠公)동
상이 세워지게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미술원』1889년 8월 25일)동상의 설립이 본격화하는 것
이 1890년대부터라고 본다면 이 진무천황상은 이른 시기에 설립 안이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참
고로 진무천황의 시각적 표상이 증가하는 것은 1870년대 후반부터라고 치바 게이(千葉慶)는 지
적한다.(「근대 진무천황상의 형성 메이지천황=진무천황의 심벌리즘」『근대화설(画説)』제11호,
2001년)
구가 가쓰난(陸羯南)이 주재하여 1889년에 창간한 신문『일본』은 국민주의의 입장
에 서서 저널리즘 운동을 전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창간 직후인 1889년 4월에는 진무천황제
(祭)에 맞추어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진무천황어수상(神武天皇御繍像)’을 부록으로서 배포했다.
일본의 역사화는 무사나 승려가 많고 국가에 관한 것은 드물며 진무천황도 상상에 의해 자주 ‘야
만스러운 추장처럼’ 그려졌다. 애써 시대적인 사물들을 참조하면서 당시의 문물이 이미 발달했었
다고 상정하여 장엄하게 그리도록 노력했다고 한다. 고증을 담당한 가와사키 치토라(川崎千虎)는
수염은 옛 기록에 더하여 쇼토쿠 다이시(聖徳太子)의 상을 참작하고 다른 사물들도 고찰(古刹)의
소장품과 고사기(古事記), 일본서기(日本書紀), 본조군기고도식(本朝軍器考図式), 상대의복고(上代
衣服考) 등을 참고로 했다고 한다.
이 부록과 연동하여 같은 달에 『일본』사고(社告)에서 일본 역사상의 인물들의 회화 혹은 조각
을 공모한다. 1892년 2월 11일의 기원절(紀元節)을 기하고 존왕애국의 정신을 환기시켜 미술을
권장할 것을 목적으로 한 공모였는데 회화의 제목은 진무천황 즉위의 그림, 야마토 다케루(日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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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尊)의 동국정벌의 그림, 몽고패군의 그림이었고, 조각의 제목은 진무전황, 모리요시 신노(護良
親王), 구스 마사시게(楠正成)로 정해져 있었다. 조각 부문에서 수상한 사람이 다케우치 규이치
(竹内久一)였다. 그의 진무천황상은 1890년 4월부터 개최된 제3회 국내권업박람회에서도 2등 묘
기상을 수상했다. 마침 기원 2550년의 기념의 해로 사학적으로는 역사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고 국회도 개설되는 이 시기에 마땅히 조각해야 하는 것은 ‘황송스럽게도 오야시마(일본)의 통
일의 성주인 황조(皇祖)의 존상밖에 없다’고 다케우치는 생각했다고 한다.(「황조입상제작의 감상」
『일본 및 일본인』530호, 1910년, 및 「선제폐하와 진무천황」『서화골동잡지』52호, 1912년) 어진
보급의 시기와 겹치는 점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제작에 대해서 국학의 대가들은 ‘국체를 더럽힌다.’고 하여 말해주지 않았고 황통이 연면히 이
어지는 가운데 ‘신의 자손(御神孫)’이 ‘조종(御祖宗)’과 닮는 것은 신기한 일도 아니며 ‘하천’한
자를 모델로 하여 존엄성을 더럽힐 수는 없었기에 메이지천황의 사진을 본떴다고 한다. 기원
2550년의 기념으로 일본역사와 국체를 주입시키는 일대제작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다케우치의 자
랑이었다. 참고로 같은 해에 진무천황이 즉위한 장소에 가시하라 진구(橿原神宮)가 창설되었고
긴시(金鵄)훈장도 제정되었다.
제3회 내국권업 박람회에는 이케다 세이스케(池田清助)명의로 진무천황 동상이 출품되었고 같
은 시기에 시마무라 슌메이(島村俊明)도 진무천황상을 제작, 시마무라의 가르침을 받은 기타무라
시카이(北村四海)는 1895년의 일본 미술 협회전에 목조의 진무천황상을 출품하여 1등상을 수상
했다. 1896년에는 도쿠시마시의 비잔에 있는 오다키산(大瀧山) 공원에 청일전쟁 종군기념의 진무
천황상이 건설되었고 1899년에는 도요바시(豊橋)의 진무천황 입상이 청국을 정벌하고 승리를 차
지한 기념으로서 세워졌고 주조 후에 일본미술원에 두어 대중의 ‘참배’를 허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하튼 세기말까지 진무천황상이 일반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어진은 문부성의 의향에 의해 침투가 진행되었지만 봉호의 문제가 일반화를 방해했고 지역차
도 발생시켰다. 결국, 신전형 철근 콘크리트로 된 봉안전의 등장으로 비가시화 된 ‘어진’이 1930
년대 중반 이후의 상황에서 침투하게 된다. 한편으로 천황의 입체상은 진무천황(≒메이지천황)의
모습으로서 서양적 근대국가상과 신비적 상징을 섞은 형태로 국가체제가 갖추어지는 1880년대
후반부터 보급된다. 이쪽은 어진과는 달리 황실을 기초로 한 국가를 염두에 두면서도 민간, 지방
을 기반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상을 통한 경앙(景仰)은 지방이나 어느 특정한 계층사이에서만
향수되었다.1)
1) 같은 진무천황이라도 이토 히코조(伊藤彦造)의 그림은 완전히 느낌이 다르다. “피로 그리는 진무청황의 존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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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적개심의 표적으로서의 상
적개심을 조성할 목적으로 사용되는 상도 전시(戰時)의 특징이다. 1943년 4월 당시 도쿄·니혼
바시의 말단조직 운동회에서는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 양동이 릴레이에서 표적이 되었었다. 6
월의 아이치현의 소방관 연성대회에서도 처칠, 루즈벨트의 과녁을 겨냥하여 방수를 실시하였다.
거슬러 올라가 1943년 1월에는 루즈벨트와 처칠의 초상화가 붙은 ‘영미(英美)의 돌격 목표 인형’
이 만들어진다. 신체의 하부에는 “물리치자!”, “격멸!”이라고 쓰인 종이가 붙여져 있고 그 앞에서
죽도와 몽둥이를 손에 든 청년이 인형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나가노현에서는 “미국도깨비· 영
국도깨비”라고 쓰인 루즈벨트와 처칠의 간판이 건물에 매달려 있고 시내에는 본토결전태세의 험
악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고 한다. (가와카미 게사타로(川上今朝太郎)『후방의 마을 –전시하의
나가노·1937∼1945』,1986년, 대월서점) 사이타마현 치치부에서도 길목에 짚으로 만든 처칠의 인
형을 설치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찌르게 했다는 행위가 기록에 남아 있다. 인형의 왼쪽 옆에
는 “영미 격멸 노인도 젊은이도 모두 한 번씩 찌르기”라고 쓰인 간판이 세워져 있었다.(시미즈
부코(清水武甲)『치치부 전시중의 기록』, 1977, 목이사)
이와 같은 모독을 위한 초상으로서는 모리 간사이(森寛齋)가 그린 「인체적 외국인도(人体的異
人図)」가 알려진다. 1863(문구3)년 5월 10일을 양이결행의 기일로 하여 죠슈번(長州藩)은 시모노
세키해협에서 미국, 네덜란드, 프랑스 등의 외국 함선을 공격했다. 1년 후의 같은 날, 죠슈번주인
모리 다카치카(毛利敬親)는 시모노세키 양이전쟁의 1주년을 기념하여 신하들과 축하연을 열었고
번지(藩地)에 있던 소장파 존양지사(尊攘志士)들은 모리(森)에게 ‘외국인도’ 2장을 의뢰하여 총격
함으로써 축하의 뜻을 표명하였다. 이 그림은 그 후 잊히지만 전시 중에 부활을 이룬다. “멋지게
관통시킨 가슴팍, 미국 영국 네덜란드놈들 이대로다! 80년 만에 공개된 존양비장 격멸일도 ‘인체
적 외국인도’”(『교토신문』1943년 10월 26일)라고 당시의 적국인 미국 영국 네덜란드와 막말의
존왕양이 운동을 연결시켜 국민의 사기 고양을 촉진시키는 관점에서 교토제국대학 존양당의 전
시에 제공되어 미디어에 실리게 된다.
토 히코조씨는 회화보국의 일념으로 자신의 피를 짜내 진무천황의 모습을 그렸고 널리 국민들의 마음에 호소하
려고 처음부터 왼팔에 메스를 대 흐르는 피를 붓으로 받아 생견(生絹)에 그린 것인데 생리적 상관관계로 오른손
이 떨려왔기 때문에 이후 양쪽 허벅지 및 어깨 쪽 등에서 채혈하여 진무 천황의 무릎 밑 부분까지 그렸으나 이
미 전신 십 여 곳이 넘는 상처와 빈혈 때문에 결국 쓰러졌고 잠시 휴식을 취해 건강을 회복한 다음에 다시 그릴
것이다. 완성하면 오사카 매일신문사를 통해 육군성에 기증하고 싶다는 희망을 갖고 있다.”(『탑영(塔影)』8권 4호,
1932년 4월) 이토는 중일전쟁 때에 국민들이 눈물겨운 위문금, 병기헌납의 선행을 계속해서 행하는 것을 보고
가난한 화가로서는 화필을 잡을 수밖에 없었고 건국의 시초인 진무천황의 모습을 영혼과 피가 다하도록 쏟아 부
어 황은에 보답하고 싶다고 기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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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모독 행위는 단순히 적개심을 조성시키는 방법으로 전의(戰意)고양, 나아가서는 간접적
으로 국가체제에 대한 의식강화를 도모한 것이다. 물론 상을 공격한다고 해도 구체적으로 적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국가가 직접 나선 것이 아니라 대중들이 주체가 되어
행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실제의 적과는 달리 절대로 공격당할 일도 없이 바라보는 쪽의 일방적
인 적의를 받아주는 적군의 상은 상당히 적절한 적개심을 양성시키는 미디어였다고 말할 수 있
을 것이다. 그리고 시선의 일방향성이라는 의미에서는 보이지 않는 상이면서 시선의 중심으로서
기능한 어진과 한 쌍을 이루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3. 동상이 서는 위치
권위를 대변하는 상징으로서 유효하게 기능하는 ‘동상’이 소개는 『서양견문록』(1869년)과 같은
해외사정을 소개하는 서적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근대 일본에서 단순히 누구의 동상을 세
우면 국가의 권위를 적절하게 침투시킬 수 있는가 라고 생각해 본다면 메이지천황이나 진무천황,
메이지유신의 공로자 등의 이름이 오를 것 같은데 실제로는 어떠했을까? 완성의 유무는 물문하
고 메이지 이후 어떠한 동상들의 설치가 계획되었었는지 먼저 확인해 보자.
우선 1870년대 후반에 와케노 기요마로(和気清麻呂),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동상을 설치
하자는 안이 나왔으나 실현되지는 못했다. 1880년에는 가나자와 켄로쿠엔 안에 서남전쟁 향토전
몰자를 위로하는 메이지 기념지표(야마토 다케오(日本武尊), 이시가와현 전사진충비)가 세워진다.
이는 일본 최초의 동상으로 여겨지고 있는데 신화 속의 존재이고 종교적인 상을 중심으로 에도
기(江戸期)에 있어서도 다양한 상이 만들어졌었다는 점을 동시에 고려한다면 근세의 연장선상의
비표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본격적으로 동상이 화제가 되는 것은 1880년대이다.
1880년대에 들어 계획된 것은 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郎),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 진무천황(神武天皇), 니치렌(日蓮), 구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 가메이 고
레미(亀井玆監),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모리 다카치카(毛利忠正), 쇼토쿠 타이시(聖徳太子), 이
이 나오스케(井伊直弼) 등의 동상이다. 1890년대에는 간무천황(桓武天皇), 야마다 아키요시(山田
顕義),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 곤도 마코토(近藤真琴, 국어학
자, 교육자), 우마시마데노미코토(可美真手命, 군신으로 간주되었다), 기타사토 시바사부로(北里柴
三郎), 아오야마 다네미치(青山胤通), 황태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기타시라 가와노미야
(北白川宮), 젠나, 아리스 가와노미야(有栖川宮), 가와다남작(川田男爵), 마에지마 히소카(前島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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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무천황, 기타가키 구니미치(北垣国道) 등이다. 이 리스트를 보면 황실부터 시작해 장군, 메이지
유신의 공로자, 교육자, 의사 등 일정하지 않음은 일목요연하다. 위인을 현창하는 동상의 개념이
이입되고 조각기술의 향상도 배경이 되어 동상 붐이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 생겨난 것인데 공로
자를 현창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하더라도 국가가 동상제작을 권장하는 것도 아니었고 어느 한
위인을 현창하고 싶은 사람들이 따로따로 각지에 설치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그 중에서도 상반되는 평가로 인해 장기간 동안 분규가 끊이지 않았던 이이 나오스케의 동상
설치의 경위를 예로 들어보자. 이이 나오스케(1815-60)는 1858(안정5)년에 대로(大老)가 되어 히
토쓰바시 요시노부(一橋慶喜) 옹립파를 누르고 도쿠가와 요시토미(徳川慶福-家茂)를 장군으로 내
정하였고 미일수호 통상조약을 칙허 없이 체결하는 등의 강인한 수법을 취했다. 안정의 대옥(大
獄)사건에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등을 처형하는 등의 탄압을 추진하지만 1860년의 사쿠라몬가
이(桜田門外)의 변에서 미토 로시(水戸浪士)들에게 암살당한다. 구미(歐美)류의 근대국가 건설로
의 방향전환에 다대한 공헌을 한 선각자로서 높이 평가할 수 있다고는 하나 양이론자들을 탄압
했다는 인상이 강하다. 이러한 이이 나오스케의 동상이 건설된다는 점이 미묘한 문제를 가져오게
된다. 소마 나가타네(相馬永胤, 舊彦根藩士)「요코하마 가몬야마 이이 나오스케공 동상건립 연혁
(横浜掃部山井伊直弼公銅像建設沿革)」(1909년)등을 참고로 경위를 확인해 보자.
1881년, 이이의 기념비 건설 계획이 시작되어 우에노공원, 시바공원, 야스쿠니신사 부근이 후
보지가 되지만 장해가 있어 요코하마 고부후도야마(가몬야마)가 다음 후보로 올라오게 된다. 그
러나 한편에서는 도쿄가 좋겠다는 의견이 강해 처음부터 파란을 예고하는 양상을 보였다. 1883
년, 우에노 동조궁경내 부근이 후보로 올랐지만 허락을 받지 못하고 다시 요코하마 고부후도야마
로 정해져 매각을 소유자인 철도국장에게 신청하여 허가를 얻었다. 그러나 돌연 번벌(藩閥)정부
의 압박으로 중지되고 말았다. 이로부터 1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다. 1893년, 가나가와현 지사가
내무성 경보국장에게 비표건설의 조회를 부탁했는데 여기에서도 이이의 집정(執政)상의 시비가
식자(識者)들의 비난을 면치 못했고 또한 이이를 암살한 자가 야스쿠니신사에 안치되어 있다는
것도 문제가 되었다. 내무대신이 이토 히로부미 총리대신에게 각의를 요청하였고 결국 불허가 처
리되었다.
집요하게도 1899년 유지자들이 히비야공원 건설의 사용허가를 얻어 도쿄시의 참사회에서 가결
되지만 이번에는 요코하마 건설을 주장하는 자들이 있어 현안의 상태로 중단된다. 이이건비문제
의 장기화가 형상단속규칙2)발령(1900년)의 일원이 되었다고 하는데 내무성 혹은 지방장관의 허
2) 동상 등을 단속하는 규칙의 변천을 살펴보면, 이이(井伊)동상문제의 분규를 계기로 1900년 5월 19일, 내무성령
제18호 형상단속규칙이 내려져 동상건립에 있어서 도쿄·교토·오사카에서는 내무대신의 허가가, 지방도시에서는 지방
126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가가 필요한 이 규칙 덕분에 이이건비의 허가가 곤란해졌다.
장관의 허가가 필요하게 되었다. 1929년 11월, 후쿠오카현 지사가 신사경내에 영원히 기념해야 할 전쟁기념비와 즉
위의 대전기념비를 세우는 것이 가능한가를 조회했는데 다음해인 9월에 내려진 신사국장의 회답은 불가였다. 1935
년 7월에는 경내의 건조물은 제신(祭神) 또는 국가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는 것만으로 제한되었고 1938년 2월, 각
부현 장관 앞으로 전달된 내무성경보국장·신사국장의 서찰에서는 ‘중일전쟁’에 관한 초혼사(招魂社)와 기념비의 건설
계획을 각지가 갖고 있지만 전쟁의 종국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건설을 다투게 되기 때문에 가능한 개개의
건설을 피해 시읍면 등이 공동으로 시읍면 내 전 전사자합동 기념비를 건설하도록 했다. 1939년 2월에는 기념비와
충령탑의 건설은 어느 한쪽으로 정해 시읍단위로 하여 한 개만 세우고 비표건설은 사유지에서 만들지 않는다고 하
였다. 게다가 충령탑 건설의 경우는 군으로서 지원하고 단순한 충혼비가 아니가 ‘영원히 보국영령을 모시는 중심으
로 삼기로 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동상과 건비의 난작을 통제하기 위한 형상단속규제로 1930년대부터는 일본과 중국과의 전쟁이 기념비
의 수요를 촉진시켜 그 통제가 필요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전쟁 중, 동상에 가장 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1943년 3월 5일의 각의결정 ‘동상 등의 비상회수 실
시요강’일 것이다. 이것은 조사한 전국 9236개의 동상 중, 국보 등을 제외한 8957개의 동상 회수를 명령한 것으로
3%의 동상만을 남기겠다는 비상의 조치였다.(실제로는 그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에 포함되지 않은 동상을
포함에 대량의 동상이 회수되었다.)
패전 후의 동상의 처리 과정도 흥미롭다. 1946년 5월, 서울에 있는 일본의 기념비는 즉시 이동시켜야 한다고 지
역문제실?이 견해를 내놨고 미국의 공병대가 설비가 갖춰지는 대로 철거를 시작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같은 해 11
월 1일, 내무문부차관의 통지 ‘공장(公葬)등에 대해서’, 11월 27일에 경보국장의 통첩 ‘충령탑·충혼비 등의 조치에
대해서’가 내려져 충령탑, 충혼비, 전몰자를 위한 기념비와 동상건설을 금지할 것, 현존하는 것들도 학교와 공공시설
로부터는 철거할 것과 군국주의적 문구나 비문을 말소할 것을 명령받는다. 1947년 3월 1일, 제8군에 의해 ‘전사자,
군국주의자, 초국가주의자에 대한 장례, 추도식, 기념비’ 지령이 내려지는데 각부대의 사령관 및 도쿄 가나가와의 군
정부(軍政部), 쥬고쿠 시코쿠의 군정부의 지휘관은 지시가 지켜지고 있는지를 감독하도록, 다만 점령군에 의한 우상
파괴로 보이지 않도록 배려하라는 내용이었다.(Operational Directive No.21 )이에 대해서 6월 14일, CIE
(민간정보교육국)가 참모장에게 보낸 답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있었다. 즉 이듬해(1948년)까지 기념비 등의
탈군국주의화를 종결시킬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일본정부의 기념비 이동에 관한 통첩은 군복을 입은 모든
상을 이동시켜야 할 정도로 포괄적이지는 않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정부에 대한 지령이 필요하지만 그러한 지령은
일본문화의 파괴라는 점령군에 대한 비난을 야기할 지도 모른다, 공무원들은 황실 멤버나 제국건설에 현저한 공로를
남긴 개인을 기념하는 기념비나 동상의 이동에 대해서는 매우 안 좋은 감정을 갖고 있다, 군사적인 외견만으로 군
국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는 지가 문제이다, 군국주의에 대한 공헌은 크지 않은데 군복으로 표현되어 있는 고관도
있고 명백하게 초국가주의적인 사람이 민간의 복장으로 그려져 있는 경우도 있다, (도쿄도의) 철거심사위원회의 토
의는 외견이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인에게 있어 우상파괴로 보이는
운동, 특히 전사자의 기념비에 관한 것은 반(反)점령적 감정이 쉽게 동원된다. GHQ측은 군국주의·초국가주의를 배제
하고 싶었겠지만 실제로는 만만치 않은 일본의 공무원들이나 간접 통치체제에 대한 배려, 철거 비용 등을 염두에
두고 상당히 모호하게 대답하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한 하다.
최종적으로 “예술적 가치가 있는 기념비나 조각상은 파괴하는 것보다 오히려 공공의 장소가 아닌 곳으로 옮길 것
을 제안했고 승인된 5613개의 기념비 중 354개의 조각상은 철거되었고 890개의 기념비와 17개의 조각상은 별로 눈
에 띄지 않는 장소로 옮겨졌다. 또한 908개의 기념비와 29개의 조각상은 외관이 변경되었거나 혹은 명칭이 바뀌었
다.”(『GHQ점령사 21 종교』,일본도서센터)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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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끈질기게 밀고나가는 소마 나가타네 등의 유지자들은 1909년의 요코하마 개항 50년 기
념 때까지 준공하기로 하고 성대한 제막식 거행을 예정한다. 그러나 정부당국은 모구번(某舊藩)
자가 유신 때에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 목상이 효수(梟首)된 것과 같은 일을 버릴 지도 모
른다고 우려해 경계체제를 실시하였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동상준공식 당일에 대신들은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았고 식후에 예정되어 있었던 대중의 관람도 금지되었다.
개국과 근대화의 길을 개척한 이이의 동상은 국가에게 있어는 별반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근
대국가 건설로 매진하는 가운데 서양화와 반서양의 상극을 배경으로 한 막말의 히코네번 對 (요
시다 쇼인을 살해당한)죠슈· 미토번의 반근대적인 대립이 메이지말까지 꼬리를 끌었던 것이다.
26년 후인 1935년, 8명의 남자가 사쿠라다 몬가이의 변 기념일에 이 이이 동상의 머리를 치려
고 했다고 한다. 또한 소설가인 요시가와 에이지(吉川英治)는 이 동상의 머리가 준공식 며칠 후
에 사라졌다고 쓰고 있는데 이러한 사실과 다른 빈번한 소문은 가치관의 차이로 흔들리는 이 동
상의 성격을 잘 말해 주고 있다.
다음은 이토 히로부미(1841-1909)의 경우이다. 메이지유신의 공신, 초대 총리대신으로서 현대
에서도 거론되고 있는 이토는 메이지 14년의 정변, 내각제도 창설, 메이지헌법 제정, 청일전쟁의
시모노세키 조약체결 등 중요한 장면에 자주 등장하였고 요직을 역임했다.
러일전쟁 중인 1904년 10월, 고베의 미나토가와신사의 경내 배전동방에 이토의 동상이 건설되
어 준공식이 거행되었다. 미나토가와신사는 충신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연고지인 신사로 이토는
초대 효고현 지사로서 이 지역과 인연이 있었다. 준공식 4일 후, 『요미우리신문』은 “아, 추신연
후의 그림(嗚呼醜臣軟猴之図)”이라고 동상에 대해서 야유하는 기사를 싣는다. 사이고 다카모리의
개를 연상하여 고양이를 데리고 있는 이토의 희화(戯画)인데 생전에 게다가 충신 난코(楠公)가 안
치되어 있는 신사 안에 동상을 세우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이듬해 9월, 러일 강화조약을 맞이하여 이 동상에 전대미문의 사건이 일어난다. 강화조약에 불
만을 갖은 민중들이 들고 일어나 도쿄 히비야의 파출소를 태우는 등 대혼란을 가져오는데 고베
에서도 민중들이 쇠사슬로 이토의 동상을 전복시켜 환호하고 고함을 치면서 시내를 돌아다녔고
호색가로 알려진 이토와 관련된 후쿠하라 윤락가까지 행진하였다. 잡지『태양』(1905년 11월 1일
호)은 생전에 동상이 세워진 것도 보기 드물지만 생전에 동상을 파괴당하는 것도 이토가 처음이
라고 했다. 동상 건립이 메이지의 유행이었고 처음에는 존중되었지만 증가하면 고마움도 줄어든
다, 이토는 위대한 인물이지만 국민 일반에게는 덕망이 없다, 동상을 세워주고 싶을 정도로 고맙
게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파괴의 하나의 원인, 이라고 기자는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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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은 관계자에 의해 숨겨졌고 은거에 들어간 이토는 1909년 10월에 중국 동북부의 하얼빈에
서 암살당한다. 뭐라고 해도 그 후로는 이토를 야유하는 듯한 상황은 생기지 않았다. 그러기는커
녕 고베나 오이소, 경성, 하얼빈 등에서 이토의 동상계획이 끊이질 않아 그의 인기를 느끼게 했
다. 고베에서는 오쿠라야마에 재건이 정해져 1911년 10월에 동상 준공식이 거행되었다.
1930년에는 야마구치현 하기시에 있는 이토의 옛날 집에 같은 현 출신자이자 효고현의 지사를
역임했던 핫도리 이치죠(服部一三)의 유지로 기부된 동상이 설치되었다. 사실은 이 하기시의 동
상이 바로 끌려 다니던 동상이었다. 핫도리는 이토가 고베의 일대 은인임에도 불구하고 불미스러
운 일(동상을 끌고 다닌 것)이 일어나 미안한 마음에 몰래 동상을 옮겨 조석으로 앙모(仰慕)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동상은 전시 중에 공출되었고 현재의 상은 전후에 하기야키(하기시에
서 만들어 지는 도기)로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끌려 다니는 형벌에 처해 부활한 동상은 달리 유례가 없다. 결국은 오쿠라야마의 동상도 전시
중에 공출되어 현재로서는 받침대밖에 볼 수 없지만 고베의 이토의 동상은 동상이 어떠한 존재
인가를 여실이 보여주고 있다. 그 인물에 대한 민중의 마음이 투영되어 때로는 산 인물이 아니라
동으로 만들어진 ‘사람의 형태’이기 때문에 과잉의 사념이 향해지는 대상이 되고 배출구가 되어
상상을 초월하는 처분을 당한다. 동상을 끌고 다닌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없지만 동상에 뭔가를
행하는 것 자체가 상징적인 행위로서 다대한 효과를 가져 온다. 끌고 다닌 이유는 크게는 굴욕적
인 강화라는 점에 있었지만 민중의 욕구불만이 쏟아지는 장소로서 호색가로 품격이 부족하다고
도 여겨진 영걸의 동상은 최적의 상징적인 재료였다.
4. 니노미야 긴지로(二宮金次郎), 난코(楠公), 그리고 조각의 모습
난립하는 동상 중에서 독특한 보급의 형태를 보인 것이 니노미야 다카노리(二宮尊徳, 金次郎)
상과 구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 楠公)상이다. 니노미야상은 1930년대에 외지(外地)를 포함한
일본 전국의 학교로 퍼지게 되는데 이 니노미야 다카노리가 반드시 체제순응 타입의 인물이었던
가 하면 꼭 그렇지는 않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아이의 분초를 아껴 면학을 게을리 하지 않는 근
로·근면의 상징으로서 전선에 섰을 뿐만 아니라 후방을 지키는 사람들에게도 알기 쉬운 근로·근
면·검약의 모델로서 니노미야‘긴지로(金次郎)’상이 방방곡곡에 세워지게 된다. 원래는 어떤가하면
제조관련업자가 니노미야 긴지로상의 보급을 추진한 것으로 국가적인 강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
며 유지자들의 기증에 의해 엄청난 숫자의 동상이 설치되었다. 구스노키 마사시게는 충성의 뜻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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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황사상으로 떠받들어져 나라를 위하여 몸을 내던져야 할 전시체제에 모범적인 인격으로서 높
이 평가되었기 때문에 전국으로 보급되었다. 성격이 다른 니노미야와 구스노키가 서로 보완하는
관계가 되었고 여기에 어진이 첨가되면서 삼위일체로 학교에 세워지게 되었던 것이다. 히메지시
히로하타 초등학교의 ‘성역(聖域)’에서 볼 수 있듯이 학교 교사와 학생들은 어진과 니노미야, 구
스노키 에게 매일 절을 올리고 있었는데 그럼으로써 경국관념을 육체화 하는 구조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설치된 지 얼마 안 되는 1940년대 초에 금속회수의 일환으로 니노미야상, 구스노키상
도 공출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나 관계자들이 국가가 위급할 때 동상이 무기가 되어 소집에
응했다는 명예를 얻을 기회로 전환시켜 장엄한 공출의 식전을 교묘하게 활용해 민심을 전시체제
로 이끄는 절호의 기회로 삼았다는 것은 동상 장행회나 받침대에 ‘대동아전쟁을 위해 응소’라고
대신 쓰인 팻말로부터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국민들에게 친근감을 주는 동상일수록 그 심리적
인 효과는 절대적이었을 것이다.
이들 동상에 대한 불경해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오사카의 후세 제4초등학교의 난
코상이 1937년 3월에 도둑맞았다. 당직이었던 훈도는 사표를 냈고 동상은 산산조각이 되어 고물
상에서 발견되었다. 체포자가 ‘반도인(한반도출신을 일컫는 당시의 명칭으로 모멸적인 의미가 포
함되어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음)’이었다는 점이 동포를 자극해 한반도 출신인 두 명의 자산가가
재건을 호소했다. 이에 호응해 갹금을 내겠다는 한반도 출신자들의 많은 신청이 있었고 결국
2500명의 기부가 이루어져 ‘내선융화’의 미담으로서 크게 퍼트려졌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예술장르로서의 ‘조각’이 전시 중에 어떠한 양상을 보이고 있었는지 에 대해서 알
아보자. 원래 회화 등과 비교해서 압도적으로 인물상이 많은 장르이지만 전쟁 중에는 전반적으로
사실성을 중시하면서도 소재는 전시를 느끼게 하는 작품들이 많았다. 직접적인 ‘성전’, ‘가미카제
(神風)’, ‘출진’등부터 시작해 ‘후방의 어촌 지도자’, ‘경내감투(坑内敢闘)’, ‘정신여군(挺身女群)’
등의 산업 전사나 후방의 인물들을 대상으로 한 조각들이 각별하게 늘어나게 된다. 근황열사(勤
皇烈士)조각과 같은 특수한 소재도 대대적으로 취급되었고 또한 군인 등을 소재로 한 작품, 작전
기록조소 등도 만들어져 회화와 더불어 전시미술이라고 불릴 수 있는 장르를 형성하였다.
그 한편으로 회화에서 나체가 배제되는 가운데 조각에서는 예술의 기본, 육체미로서 남녀의 나
체상이 전쟁 중에도 남게 된다. 1941년의 제4회 신문전조각부분의 희화 ‘라인군상(裸人群像)’에
그려진 것처럼 1943년의 신문전에 이르기까지 근육과 골격이 튼튼한 남성의 나체상이 늘었다고
130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여성의 나체상이 대부분을 차지해 시대상과는 걸맞지 않는 색다른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던 것 같다.
일본의 근대미술사상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좌담회「국방국가와 미술」(『미즈에』1941년 1월)은
스즈키 구라조(鈴木庫三)소령의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그림도구와 캔버스는 사상전(思想戰)
의 탄약이라며 배급을 중단시켜버린다. 그리하여 전람회를 억압하면 그걸로 끝입니다.”라는 명백
한 발언으로도 유명한데 그 좌담회에서 스즈키는 나체예술에 대해서 “나체라면 나체를 통해서
오늘날의 국방국가적인 사상 감정을 살리면 된다. 어느 화가가 그린 폐병앓이와 같은 것은 좋지
않다…”고 발언했다. 조각가는 그 말대로 ‘나체로 전시정신을 표현’한 것이다.
전후에 재건한 ‘충견 하치고’의 작가로서 알려진 안도 다케시(安藤士)의「후방의 결의」(1943년,
제6회신문전)와 아메노미야 지로(雨宮治郎)의 「간소」(1943년, 제6회신문전)을 보면 표면적인 조
형이상으로 소재, 아니 제목이 중요했던 것을 단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5. 맺음말
어진 그리고 이와 연계되는 니노미야 다카노리상과 구스노키 마사시게상은 학교에 침투되어
매일 의식적인 배례를 받음으로써 그 안에 내포되어 있는 가치를 공유시켰고 국가의식의 육체화
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봉호의 문제로 봉안전에 보관되게 된 어진은 점점 비가시성을 높였고
1930년대에 급속하게 보급된 마사시게상과 난코상은 공출되어 ‘나라를 위한’ 짧은 생을 다하였고
용해됨으로써 남아 있는 동상이상으로 동상으로서의 상징적 가치를 창출하였다. 양쪽 모두 보이
지 않게 됨으로써 최대한의 가치를 창출했다는 점은 이미지로서는 아이러니한 일이라 아니할 수
가 없다.
동상은 위인의 상이라 하더라도 사적인 가치에 의해 제작되기 때문에 시대의 변화, 인물에 대
한 평가가 바뀌면 그 의미도 크게 변해 반영구적인 물리적 특질을 갖추고 있다고 하더라도 의미
상의 변화를 막을 수가 없다. 보편적인 가치를 장기간에 걸쳐 계속적으로 표출시킬 수 있는 상은
드물며 결국은 평소에 소홀하게 취급당하다가 공출(응소)때에 가장 큰 공헌을 하게 된 것도 사실
이다.
한편, 예술전의 조각상은 미술장르 중에서도 가장 끈기 있게 수맥을 지켰다고 말할 수 있을 지
도 모르겠다. 표현의 자유도의 한계는 있으나 최후까지 예술성을 담보로 계속해서 나체상을 만들
었고 그대로 전후로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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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상을 통해서 어떤 의식을 보편화시키려고 했다고 해도 간단하게 뜻한 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동상에 있어서 국가는 규제에 의해 난입을 조정하는 정도의 영향력에 머물러 있었
고 예술분야에서는 끝내 지도성을 발휘하지 못했으며 예술가도 윤리적 구속을 잘 빠져나가는 대
응을 보였다. 그렇다면 역시 어진은 빠져나갈 길이 있었다고 해도 보급정도에 있어서도 침투정도
에 있어서도 가장 효과적인 미디어였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132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M E M O》
討論
討
論
姜泰雄
光云大學校 東北亞文化産業學部
133
134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M E M O》
綜合討論
1
綜 合 討 論 1
參加者全員
135
136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M E M O》
綜合討論
《M E M O》
1
137
138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M E M O》
식민지 박람회의 예술공연- 퍼포먼스, 이벤트, 경합 139
식민지 박람회의 예술공연
- 퍼포먼스, 이벤트, 경합
홍선영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목 차>
1. 들어가는 말
2. ‘연예관’이라는 문화장치
3. 연예관 흥행의 주역
4. 맺음말
1. 들어가는 말
1915년 10월과 1916년 4월에 경성(京城)과 타이페이(台北)에서는 각각 ‘시정5년기념 조선물산
공진회’와 ‘시정20년기념 타이완권업공진회’가 열렸다. 이들 식민지 도시에는 공진회를 계기로 각
각 근대식 연극장 ‘연예관(演藝館)’이 완성되었으며 공진회가 열리는 50일 동안 다양한 장르의
공연이 무대에 올려졌다. 1862년 런던만국박람회 이래 공진회 및 박람회의 성격은 1900년대 이
후 중요한 변모를 이루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축제성’이다. 상설기관인 박물관, 미술관 등과
달리 제한된 기간 동안 열리는 비일상적인 축제공간이기 때문이다.1) 1903년 제5회 내국권업박람
회 당시 ‘여흥’의 필요성을 통감하여 회장 내에 ‘연무장’이라는 극장을 만들어 ‘흥행장’은 박람회
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고 결과적으로 관객을 모으는 원동력이 되었다. ‘여흥’의 등장은 입장인원
에서 한계점에 가까워진 상황을 한꺼번에 타개하였고 새로움을 잃어버리고 있던 박람회에 신풍
1) 國雄行, 『博覧会と明治の日本』, 吉川弘文館, 2010, p.4.
140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을 불어넣었다. 일본에서 박람회는 1903년 제5회 이후에는 지자체나 기업이 주체가 되어 박람회
를 개최해 나가게 되었다.2) 따라서 박람회는 보다 ‘유원지화’해갔으며 축제성 이벤트를 담보하는
것은 무엇보다 극장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장르의 공연 및 퍼포먼스들이었다.
그런데 1915년 조선총독부가 ‘시정5년’을 기념하여 개최한 공진회는 정궁인 경복궁을 메인 무
대로 삼았다. 조선왕조의 중심부를 공원화하고 일반에 공개함으로써 식민권력의 억압적 상황을
이면에 감추면서 식민지통치의 성과를 과시하고자 한 제국일본의 문화장치였다. 그러므로 왕궁에
서의 공진회 개최는 총독부의 시정을 대내외에 선전하는 장이었다.3) 특히 1915년 조선물산공진
회는 ‘총화적인 근대산업의 달성도를 제시’하려 의도하였으며, 상품을 보여주고 소비 심리를 자
극하기 위한 박람회의 공간’4)으로 자리매김하려는 목적을 뚜렷이 제시한 행사였다. 그러므로 시
정5년이라는 식민지조선의 불안한 정국 하에서 경복궁 내 연예관이라는 극장은 제국일본의 문화
권력이 작동하는 공간이자 다양한 장르와 이중 언어의 공연들이 서로 공존하고 있었고 지배/피
지배의 공연주체들이 복잡하게 경합하는 공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5년 공진회 기간 동안 연예관에 초빙된 일본공연단에 대한 연구는 전무
하다. 다만 연예관에서의 <살로메>에 관한 연구가 덴카츠 일좌(天勝一座)의 공연에 국한시킨 언
급이 존재하며, 본고는 그 밖의 다른 공연단의 존재와 공연내용을 확인하고 연예관 무대에 등장
한 예술 공연의 성격과 의미를 고찰하고자 한다. 1910년대 경성의 일본인 연극에 관한 극장상황
과 공연실태에 관한 연구는 자료의 어려움으로 인하여 단편적인 기록과 데이터를 모아 제한적인
판단을 할 수 밖에 없으므로 재조 일본인 연극과 문화에 대한 구체적인 실상을 파악하는데 한계
가 있었다. 그러나 1915년 공진회 기간 중에 행해진 연극 공연 및 퍼포먼스가 관급행사로 진행
되었던 바, 오늘날까지 공공 기록이 남아있고 이들 자료에 기초하여 퍼포먼스의 내용, 공연을 주
최하는 단체와 제반 과정에 대한 추론을 가능하게 한다. 구체적으로는 첫째 연예관 공연의 레퍼
토리, 공연단의 면모, 1915년 경성 일본 예술인 및 관련 단체들의 공연과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도출해내고자 한다.
연구방법으로 당시의 신문자료와 공진회 보고서 등의 기록을 통해 연예관 공연이 어떻게 실
현 가능했는가를 검증한다. 또 공연단의 프로그램 및 레퍼토리에 대한 정리, 그리고 공연을 주관
한 인물 및 단체에 대해서 검토함으로써 공연 전반에 대해서 가늠할 수 있다. 이때 몇 가지 쟁점
2) 위의 책, p.184-p.202
3) 李泰文 「1915年「朝鮮物産共進会」の構成と内容」『慶應義塾大学日吉紀要言語·文化·コミュニケーション』No.30, 慶
應義塾大学日吉紀要刊行委員会, 2003. p.25-61. 이 밖에 주윤정, 「조선물산공진회(1915)에 대한 연구」『한국학대
학원석사학위논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3)등 참조.
4) 이각규, 『한국의 근대박람회』, 커뮤니케이션북스, 2010, p.168-p.173.
식민지 박람회의 예술공연- 퍼포먼스, 이벤트, 경합 141
이 존재한다. 전문적인 공연예술인의 동원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이들 공연단들의 레퍼토리가 의
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등이다. 경성 연예관에서 드러나는 예술장르 간의 긴장관계, 공연주체 간
경합관계, 문화권력의 문제를 주목하게 될 것이다.
2. ‘연예관’이라는 문화장치
1915년 연예관 공연에 관한 선행연구에서는 덴카츠 일좌(天勝一座)의 전위연극과 퍼포먼스에
주목함으로써 조선총독부 ‘시정5년’이라는 역사적 시점에 조선왕궁에서의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
메> 공연이 갖는 문화적 의미와 제국일본의 문화영유(文化領有)의 방식임을 지적한 바 있다.5) 참
고로 1923년 10월 5일부터 10월 24일까지 20일간 조선농회 주최, 조선총독부 후원으로 ‘조선
부업품공진회’가 역시 경복궁에서 개최되었으며 이는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의 축소판이었다고
한다.6) 1926년의 조선박람회, 1929년의 시정20주년 기념 조선박람회 등이 개최된 장소 역시 경
복궁이었다. 【자료1 연예관 배치도】
연예관은 경복궁의 서쪽 문에 해당하는 영추문(迎秋門) 가까이에 위치하여 가장 넓고 광화문에
서 입장한 공진회의 입장객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위치가 선정되었다.7) 주변의 경관과 조
화로우면서 ‘제체시온(secession)’ 양식의 건축물로 지어졌으며 외벽은 석회 칠을 하여 화이트의
화사한 건축물이었다. 이 당시 공진회의 전시시설에서 새로이 신축된 건물들은 르네상스 양식을
지조로 하면서 제체션 양식이 가미된 백색 건물들이었다. 또 이와같이 르네상스 양식에 제체시온
양식을 가미한 수법은 비슷한 시기 일본의 박람회 건축에서도 등장한 것인데 1914년 대정박람회
에서 나타난 박람회 건축물은 아르누보와 제체시온 양식의 것으로 분류된다고 한다.8) 총 건평이
229평이라는 큰 규모이며 1층 내부는 무대쪽 정면은 평면 바닥이며 후면으로 갈수록 경사가 있
어 관람석의 시야를 고려한 설계이다. 연예관이라는 극장의 특성은, 1915년 시점에 경성(용산 포
함)에는 단성사, 광무대 이외에 일본인 관객을 주로 대상으로 하는 극장이 수관(壽館), 수좌(壽
座), 황금관(黃金館), 어성좌(御成座), 대정관(大正館), 유락관(有樂館), 낭화관(浪花館) 등이 있었
5) 홍선영,「제국의 文化領有와 外地巡行―天勝一座의 <살로메> 景福宮 공연을 중심으로」, 『일본근대학연구』
33집, 한국일본근대학회, 2011.
6) 이각규, 『한국의 근대박람회』, 커뮤니케이션북스, 2010, p.167.
7) 京城協贊會, 『始政5年記念 朝鮮物産共振會 京城協贊會報告書』, 1916, p.112.
8) 강상훈, 「일제강점기 박람회 건축을 통해 본 건축양식의 상징성」, 『건축역사연구』제15권3호, 2006, p.12.
142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지만 규모와 설비 면에서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었다.9) 이처럼 이미 연극장 및 요세, 활동사진관
이 경성 내에 십여 곳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큰 규모의 극장이 등장한 것은 ‘시정5년’의
조선통치 성과를 과시하는데 있어 극장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다
음은 연예관의 외관과 내부 설계도이다. 【자료2 연예관 설계도】
위의 설계도를 참조하여 극장 내부를 보다 상세하게 살펴보면, 1층은 평면 바닥의 양쪽 날개
에 반주자석이 마련되어 있으며 2층은 전부 객석으로 채워졌다. 이 건축물의 특징은 유럽의 장점
을 채택하면서도 일본 극장 고유 형태인 하나미치를 설치함으로써 일본 연극과 서양 연극의 흥
행이 가능하도록 했을 뿐 아니라 활동사진의 영사 또한 가능하도록 설계되었다. 연예관은 현재
남아있지 않으므로 내부 장식 역시 당시의 기록을 통해 추측할 수 있을 뿐인데, 천정 중앙이 돔
형태를 이루고 천정에 조명을 설치하였다. 2층의 천정과 벽 전체에 천을 걸어 화려한 내부장식을
하였으며 음향에도 최선의 조건을 마련하였다. 정면에 장식된 미인화가 있고 이를 중심으로 조명
을 비춘 점 등을 미루어 짐작컨대 상당히 관객의 시선을 끄는 화려한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한편 공진회장 내부에는 연예관 이외에 5평 넓이의 150석 규모의 객석을 갖춘 ‘활동사진관’이
있었으며, ‘조선연극장’이라는 명칭으로 별도의 공연장이 건설되었다. 건평 120평, 천막 지붕과
판자 벽이라는 연예관에 비해서는 다소 소박한 건축물로 존재하였다. 다만 연예관이 설계도와 사
진을 비롯한 상세한 기록이 산재한 것에 비해 조선연극장에 대한 기록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는
점에서 기록주체들의 인식이 아쉽기만 하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9월 11일부터 10월 31일까지 51일간 연예관 및 조선연극장, 야외활동사
진관에서 다양한 장르의 공연들이 진행되었다. 공진회 공식 행사(개장식, 개막식, 폐막식, 각 전
시장의 전시) 이외에도 연예관, 조선연극장, 야외 활동사진관 등에서 진행된 제반 엔터테인먼트
행사 프로그램 가운데 연예관 무대에 오른 레퍼토리를 중심으로 조사한 결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10)
9) 홍선영, 「경성의 일본인극장 변천사: 식민지도시의 문화와 극장」일본문화학보 43호, 2009.
10) 京城協贊會, 『始政5年記念 朝鮮物産共振會 京城協贊會報告書』, 1916, p.150-p.155.
식민지 박람회의 예술공연- 퍼포먼스, 이벤트, 경합 143
【표1】 연예관의 일본공연단 공연내용
주간/야간
월일
장르
공연단
공연 제목
비고
*曲名임
9월11일
手踊, 唄
中券
御代の栄 ついのよるべ 공진회 축하회(개장
식)
9월12일
手踊, 唄
京城券
10월3일
手踊, 唄
中券
10월4일
手踊, 唄
京城券
御代の栄 ついのよるべ 10월8일
手踊, 唄
京城券
御代の栄 五条橋
10월9일
手踊, 唄
中券
御代の栄 ついのよるべ
-10월2일
御代の栄 ついのよるべ 御代の栄 ついのよるべ 주간
*10월 2일까지
교
대로 공연함.
*철도국
千里祝賀會
*10월 7일까지
교
대로 공연함.
*이하 10월 31일까
10월10일
手踊, 唄
京城券
御代の栄 五条橋
지 中券 京城券이
ついのよるべ, 御代
の栄, 五条橋를 교
대로 공연함.
10월8일
무용
内地人
少女
劍舞 <本能寺>, <飛雨>, <捨子>
*29일 우천 휴연
大小奇術
バイオリン獨奏
曲藝<筒中の美人> 10월10일
연극,
-19일
마술
天勝一座
グローイングドール 絹中の美人 サロメ劇 二重トランク 美人閣
大胆な芸者 야간
10월23일
話芸
博多
二ワ加
北来土産虎の売込 宝探し祝ひの餅まき 三番叟(鶴, 亀)11)
お伽劇<新浮れ胡弓> 大小奇術
滑稽奇術
10월27일
연극,
-31일
마술
天勝一座
筒中の美人 指輪の変転 グローイングドール 不思議のドア 滑稽イタヅラボーイ
11) (さんばそう) 일본전통 예능의 하나. 시키산바(式三番(能の翁))에서 오키나 춤(翁の舞)에 이어 춤추는 역할,
혹은 그 춤을 말함. 노(能)에서는 오키나(翁)라는 역할 명이고 교겐가타(狂言方)가 담당한다. 혹은 노의 오키나를
삼바소(三番叟) 부분만 무용으로 만든 가부키 무용을 가리키기도 한다.
144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연예관의 경우, 1일 2회 공연 주간 공연 예기(藝妓), 기생(妓生)의 무용[手踊]이, 야간 공연은
덴카츠 일좌(天勝一座)의 기술극(奇術劇)인 <살로메>, 하카타 니와카(博多俄)12), 기생 및 조선인
연무 등의 공연이 진행되었다. 보다 상세하게는 주간공연의 중심은 일본 예기의 전통무용과 민요
이고 나카권번(中券), 경성권번(京城券)이라는 이름의 권번에 소속된 경성 거주 일본 예기들의 공
연단이다13).
【자료3】 「오늘의 연예관」『京城日報』1915.10.4
12) 하카타니와카는 규슈 하카타에 전해지는 구연 예능(話芸)의 일종이다. 하카타니와카의 특징은 하카타니와카 가
면을 쓰고 한다는 점, 하카타 방언을 사용한다는 점, 반전(オチ)을 원칙으로 하는 동음이의어(同音異義語)로 마무
리하는 점이다. 혼자서 하는 히토리 니와카, 1분 이내 정도의 히토구치 니와카, 두 명이 주고받는 만담형식의 가
케아이 니와카(掛け合いにわか) 등이 있고, 촌극 혹은 극 형식을 띤 단모노 니와카(段ものにわか) 등의 종류가
있다.
13) 일본어로 ‘券番’ 보다 ‘検番’ 표기가 일반적이다. ‘겐반(検番, 券番)’은 그 지역의 요리점(料理屋) 게이샤(芸者
屋), 마치아이(待合)의 세 가지 관련 업계가 모인 삼업조합(三業組合)의 사무소를 속칭하는 말이며, 혹은 ‘検番
芸者’의 약칭으로도 쓰인다.
식민지 박람회의 예술공연- 퍼포먼스, 이벤트, 경합 145
【자료4】 타이페이 연예관의 흥행내용(1916.4.10.∼4.29)
昼間 台北検番芸妓舞踊 1916年4月10日∼4月19日 <名勝双六>全7場
夜間 支那劇大合同団 4月10日∼4月19日 ※北京大劇団「上天仙班」一行
昼夜 中野連鎖劇 4月20日∼4月24日 新喜劇<夢の浮橋>、<鏡>、その他数種。
旧喜劇<鼻六>、<勧進帳>、<千両幟>、<出世凧>、<千石舟>、その他。
連鎖劇<思はぬ縁>、その他。
新劇<嫁いじめ>、<作戦>、<越後獅子>、<兄の心>、その他。
昼夜 お伽劇と家庭劇 4月20日∼4月29日 お伽劇<今太閤幼物語>(巖谷小波作)、
<かちかち山>(久留島武彦作)、<公園の御隠居さん>(巖谷小波作)
家庭劇<小公子>3幕(巖谷小波訳)
※東儀鉄笛(無名会)、石川木舟、以下30余名。
昼夜 天勝一行、4月30日∼5月9日 <水芸>、奇術応用劇<サロメ>
1915년 덴카츠 일행의 경성흥행은 경성일보에 의해 상세하게 보도되었으며, 공진회 기간동안
내내 덴카츠의 흥행 내용과 특히 연극 <살로메>는 주목받았다. 경복궁 내에 위치한 연예관은 식
민지 조선의 관객과 만나는 장소였으며 또한 왕궁공연의 상징성을 띠고 있었다.14) 덴카츠의 <살
로메> 공연을 공연을 비롯하여 이상의 레퍼토리는 이미 선행연구에서 구체적으로 분석하였으므
로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하나, 20년 전 일본의 박람회에서 구로다 세이키(黒田清輝)가 나체화
<朝妝>를 출품했을 때와도 유사한 화제성을 불러일으켰다.15) 특히 조선왕실 관람은 그것이 가
지는 상징성으로 인하여 경복궁에서의 조선관객을 향한 <살로메>공연에 긍정적인 영향을 초래했
다. 또 언어가 불필요한 ‘신체 퍼포먼스’라는 전위적 요소로 인하여 일본 내 공연에 못지않게 식
민지 관객의 ‘흥미’를 이끌어냈고, 신파극 배우 가와카미 사다얏코(川上貞奴)의 살로메와 신극배
우 마쓰이 스마코(松井須摩子)의 살로메를 앞지름으로써 장르 간 ‘순수성’ 경합을 무효화하는 성
과를 거둘 수 있었다.16)
표1에서 정리한 다양한 장르의 퍼포먼스 즉, 마술을 가미한 연극, 전통무용, 거리예능은 각각
14) 홍선영,「제국의 文化領有와 外地巡行―天勝一座의 <살로메> 景福宮 공연을 중심으로」, 『일본근대학연
구』33집, 한국일본근대학회, 2011.
15) 구로다 세이키가 출품한 박람회는 1894년 교토에서 열린 제4회 내국권업박람회였다. 國雄行, 『博覧会と明治の
日本』, 吉川弘文館, 2010, p.148 참조.
16) 홍선영, 「예술좌의 만선순업과 그 문화적 파장」『한림일본학』15, 2009.
146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입장료에서도 차이를 보였다. 각 공연단의 장르별로 입장료를 정리하면, 주간과 야간 공연은 공
연단이 동일하더라도 입장료가 다르다. 예기·기생의 전통무용은 주간 공연이 야간 공연의 두 배
로 특등석 30전, 일등석 20전, 이등석 15전 등이고 야간은 20전, 10전, 5전으로 반액이다. 연예
관 공연 가운데 가장 입장료가 비싼 공연은 덴카츠 일좌로 특등석 1원을 비롯하여 일등, 이등,
삼등석이 각각 70, 50, 30전이므로 연예관 공연 전체를 통틀어 가장 고가의 공연이다. 나머지 하
카타 니와카와 같은 화예(話藝)는 활동사진과 함께 10전, 5전 정도의 가장 저렴한 구경거리로 볼
수 있다. 【자료5 연예관 예술공연 입장료】
이처럼 입장료의 차별화는 레퍼토리에서 일정하게 히에라르키를 반영한 것이다. 공연 실현과
정에서 예술의 히에라르키 문제가 드러났으며 마술·연극/일본전통무용/조선전통무용/민속예능의
순으로 일정하게 장르 간 히에라르키 실재함에 대한 증거이다. 특히 주간과 야간의 입장료가 배
차이가 나는 이유는 주간공연에서는 일본전통무용과 조선전통무용을 공연하였고, 야간공연에서는
조선전통무용 공연만을 진행했으므로 프로그램에서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일본전통무용이
오로지 주간공연에만 배치되었고 조선전통무용이 야간공연에 배치한 것은 주간에 진행되고 있는
공진회의 관람객이 주요 대상임을 의미하는 것이며, 공진회장 내부에 위치한 연예관의 일본전통
무용 공연이야말로 가장 비중 있는 프로그램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자료6「演藝案內」『京城日
報』1915년 10월 6일】
그러나 표1에서 확인하듯이 시정5년을 기념한 공진회 기간 동안에 연예관 무대에는 일본전통
연극인 노와 가부키 공연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연예관 공연에서 이른바 ‘고급’ 예술의 배제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단언하기 어렵지만, 공진회 흥행의 축제성을 담보할 레퍼토리로서 일
본을 대표하는 노, 가부키가 선택되지 않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연예관 공연의
입장객 상황을 통해 흥행의 주역이 된 레퍼토리를 확인하고 연예관 무대에 대한 관객 반응의 스
펙트럼을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자료7 연예관입장인원】
각 공연단과 장르에 따른 입장객 수를 비교해보면 덴카츠 일좌의 공연이 매번 천명 이상의 관
객을 동원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전통무용에 대한 관객에서는 현저한 차이를 발견할 수
없다. 다만 관객 구성의 문제가 중요하게 대두하게 되는데 현재로서는 조선인 관객과 일본인 관
객의 통계자료가 없다. 다만 공진회 관람입장 ‘인원통계’에 의하면, 주간 일본인 관람객이 20만
6천여 명, 조선인 관람객이 47만 2천여 명이다. 그리고 야간은 일본인 관람객이 9만 3천여 명,
조선인 관람객이 25만 4천여 명이다.17) 공진회 관람객과 연예관 관객의 비율이 그대로 일치할
17) 주간 일본인206,039 조선인472,503 중국인3,326 외국인1,905 무료88,953 계 772,745/ 야간 일본인 93,502
조선인254,651 중국인1,333 외국인938 무료41,214 계 39,638 / 합계1,164,383명이다. 京城協贊會, 『始政5年記
식민지 박람회의 예술공연- 퍼포먼스, 이벤트, 경합 147
수는 없지만 비슷한 비율을 적용할 수 있다면 주간공연에서는 일본인 관객의 비중이 많고 야간
공연에서 조선인 관객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많았음을 추측할 수 있다. 당시에는 공진회 주최측에
서 각도 장관 및 각부현 지사에게 의뢰장을 발송하여 단체관람을 유도하였으므로 이러한 추론은
크게 벗어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18)
이상에서 공연단의 구분, 장르의 문제, 입장료, 관객의 구성 문제를 살펴보았는데 연예관이라
는 장소는 흥행성과 오락을 추구하였으며 이는 식민권력의 ‘지배’ 논리와 대립하지 않았음을 짐
작케 한다. 3. 연예관 흥행의 주역들
경성은 3, 4월의 봄에 바람과 비가 많지만 9월부터 11월의 가을에는 청명한 하늘이 상쾌한 날
씨가 이어져 공진회가 열리는 시기 또한 이러한 기후와도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1915년 공진
회의 회장 내에는 여러 시설과 설비들이 들어섰는데 공진회 진열관 서쪽을 구획하여 경회루를
중심으로 전체 면적 약 3만 5천 평에 이르는 구역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연예관 이외에 (1)조선연
극장, (2)불사의관(不思議館) (3)곡마관 (4)동물원 (5)미로관(迷路館) (6)활동사진, (7)유희(遊戱),
(8)그네(ブランコ廻り) 등의 다양한 축제 공간과 설비가 마련되었다. 그렇다면 51일간의 일본전통
무용, 마술, 연극, 거리예능 등 다양한 장르의 공연단을 경성으로 불러모아 연예관 공연을 실현
시킨 주체들은 누구이며 그것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연예관 공연을 기획하고 ‘흥행사’ 역할을 한
인물로는 먼저 구기모토 도지로(釘本藤次郞)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구기모토는 공진회 기간
중 연예관을 비롯한 회장 내에서 이루어지는 흥행물 전반과 각종 행사 등에 관한 사항을 결정하
였으며, 그 가운데 연예관의 공연에 관한 전반을 기획하고 실행한 인물이다. 사가현(佐賀県) 가라
츠시(唐津市) 출신, 1867년 생으로 당시 49세의 재조 일본인 사업가로서 1895년 도한하여 경성
에서 철물 판매업에서 시작하였다고 알려져 있다.19) 구기모토상점을 운영한 상업인으로서 1915
년에는 경성 상업계의 거물로 성장하였고 그가 연극을 애호한 인물이라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경
성의 흥행계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20) 1915년 공진회 기간의 흥행기획의
念京城協贊會報告書』, 1916, p.152-p.181 참조.
18) 조선 각도 단체인원 보통단체 5만7천750명, 학생단체 2만3천156명, 내지 단체인원(실업단, 시찰단) 1천28명
등의 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단체관람이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같은 책, p.120-p.121.
19) 高橋刀川, 『在韓成功之九州人』, 虎与号書店, 1908, p.160.
148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경험을 기반으로 하여 구기모토는 1929년 ‘시정20년기념 조선박람회’ 당시에도 다시금 경성 공
연계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다만 패전 이후의 행적이 드러나지 않아 전체적인 인물상을 파
악하는데는 한계가 있다.【자료8 1929년 조선박람회경성협찬회 이사장 釘本藤次郞】
두번째로 주목할 인물은 나카무라 요시헤(中村与資平, 1880∼1963)이다. 나카무라는 1880년
시즈오카현 하마마쓰(静岡県 浜松市)에서 태어나 1905년 도쿄제국대학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1907년 제일은행 한국총지점(1910년 이후 조선은행 본점) 건축에서 임시건축부공무장(臨時建
築部工務長)을 맡은 것에서 식민지건축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1908년에 경성에 이주하여 1912
년 조선은행 본점을 준공하고 조선은행 건축고문이 되었고 이때 경성 황금정(黃金町)에 나카무라
건축사무소를 개설하였다. 1917년에는 다롄, 1921년 유럽 시찰을 거쳐 1922년 도쿄로 돌아가 나
카무라공무소(中村工務所)를 열었고 1934년 나카무라 요시헤 건축사무소(中村與資平建築事務所)
로 개칭하여 운영하며 다양한 건축물을 남긴 일본의 대표적인 건축가이다. 1915년 공진회 당시
는 경성에 위치한 나카무라건축사무소의 대표로서 경성의 주요한 건축물의 설계를 맡아서 진행
한 건축가이다. 식민지조선과 구만주 및 시즈오카(静岡) 현 등에서 은행, 공공건축 설계를 다수
남긴 것으로 알려진 그는 1921년 천도교중앙대교당, 1937년 덕수궁 미술관(당시 이왕가미술관)
등의 식민지 건축물을 설계하였고 1915년 연예관 설계의 장본인이 아닌가 짐작하게 한다. 다만
1915년에 완공된 연예관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소실되는 바람에 설계도와 사진 등의 자료가 현존
함에도 불구하고 설계자를 단정할 수 있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아 현재로서는 추측에 머무를 수
밖에 없다. 【자료9 中村与資平】
끝으로 1910년대 경성에서의 재조 일본인 연극의 현황을 파악하는데 결정적인 자료인 『경성안
내(京城案內)』(1915.9) 의 출간에서 등장하는 이시하라 도메키치(石原留吉)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경성안내기와 공진회 기념 그림엽서의 발행 등 공진회 기간 동안 홍보를 담당한 것으로 보
인다. 그가 간행한 책자 『경성안내』는 공진회 관람을 위해 경성에 온 이들을 위하여 최근 경성의
제반 정세 및 명소유적 등을 정확하게 소개할 의도로 협찬회가 편찬하여 판매 혹은 증정한다. 그
밖에도 한 쪽 분량의 경성안내에는 경성안내 책자의 일부 내용을 실고 회장 안내도, 여관, 요리
점, 오락장 등을 기술하여 이를 단체관람객 증정용으로 제작하였다.21) 이시하라 도메기치(石原留
吉; 1875-?)는 가가와현(香川縣) 출신으로 1904년 문관고등시험에 합격하여 관리의 길로 들어섰
다. 1909년부터 한국으로 건너와 1910년부터는 경성부에서 근무하였으며 이후 신의주부, 원산부
부윤(府尹)을 역임하였고 이후 일본에 돌아가 다카마쓰(高松) 시 시장을 역임(1924∼1928)을 역
20) 「釘本藤次郎, 京城商業会議所会頭」, 『京城日報』, 1924년 1월 1일자.
21) 京城協贊會, 『始政5年記念京城協贊會報告書』, 1916,p.109-110
식민지 박람회의 예술공연- 퍼포먼스, 이벤트, 경합 149
임한 관리이다. 하지만 구기모토 도지로, 나카무라 요시헤에 비해서 일본에 귀국한 이후의 행적
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어서 베일에 싸여있다.【자료10 石原留吉】
이상 연예관의 공연을 기획한 구기모토, 연예관 설립을 주도한 나카무라, 경성부 관리로서 연
예관 공연의 홍보와 자금을 담당한 이시하라 등, 연예관 예술공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들 세
인물들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었는데 ‘경성협찬회’라는 조직이다. 즉 이들은 1915년 당시 각각 경
성협찬회라는 조직에서 여흥계, 설비계, 서무계의 책임자라는 핵심적인 위치에 있었다. 다음은
공진회의 ‘익찬’을 위해 설립된 조직, 정식명칭 ‘시정5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회’ 설립취
지이다.
올 가을 시정오년 조선물산공진회 개최에 있어 경성협찬회를 설립함으로써 협찬의 실질을 강구하
여 회장 내부는 물론 [경성]부 내 여러 요소에 각종 장식을 준비하여 맑은 경성 천지를 진동시킨다
는 계획이다.22)
이처럼 공진회 사업의 익찬, 공진회 융성을 도모하고, 관람자의 편의를 도모할 목적으로 설립
된 경성협찬회의 조직성격, 조직구성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1914년 설립이 추진되어 1915년 1월
발기인 총회를 거쳐 공식 출범하였다. 조선총독부 및 경기도청이 선임 혹은 추천하는 이들 중 경
성 거주자 17명으로 1914년 12월 임시 발기모임을 개최하여 움직임이 구체화하였다. 이 후 경성
부 내 유지 154명을 발기인으로 하여 이듬해 1월 11일 발기인 총회를 개최하였다. 협찬회 규칙
등을 참조하면, 구성은 회장과 부회장, 상의원을 선임하여 총독에 신고하고, 상의원회(商議員會)
의 상의원(常議員)을 호선, 이사장, 이사, 정동(町洞)위원을 위탁하고 사무원을 채용하였다. 임원
에는 회장 1명, 부회장 4명을 총회에서 선출하였고, 이사장 1명, 이사10명, 위원 약간 명은 회
장이 촉탁하였으며, 상의원(常議員) 10명, 상의원회(商議員會) 호선, 상의원(商議員) 50명을 총
회에서 선출하거나 회장이 충원하는 방식으로 경성협찬회는 조직되었다.23) 협찬회의 사업은 크
게 관람객의 모집, 교통·숙박의 편의, 관람 외국인에 대한 편의, 내빈 접대, 조선 내 명승지 소개,
기타 공진회 관련 인정되는 사업 등이다.
24)
이상의 사업과 업무를 위한 경비는 협찬회의 회원
22) 石原留吉,『京城案內』京城協贊會, 1915, p.279.
23) 京城協贊會, 『始政5年記念京城協贊會報告書』, 1916,p.8-10
24) 1 관람자의 권유 및 공진회장 외 관람객의 알선을 한다. 2 선차[교통], 여관 기타에 관하여 관람자의 편리를
도모한다. 3 관람외국인에 대한 통역설명 등의 편의를 도모한다. 4 내빈 접대 및 그 설비를 도모한다. 5 각종
여흥의 설비 또는 권유, 각종 대회의 개최를 권유한다. 6 명승구적 등의 소개를 도모한다. 7 그 외 공진회 성
공을 위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사업.
150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갹출금, 기부금, 보조금 등으로 충당하고 공연입장료 등의 수입으로 충당하였다. 특히 회원의 급
에 따라서 갹출하는 금액이 달라지는데 명예회원 500원, 특별유공회원 250원, 정회원 20원, 찬
조회원 2원을 할당하였다.
25)
협찬회 회원은 갹출금의 금액에 따라 공진회 입장권을 증정받는데,
천원 이상은 백장, 백원 이상은 열 장의 입장권을 받을 수 있다.26) 협찬회는 시정5년기념 조선
물산공진회 폐회 이후 사무 완료와 함께 해산하였다.27)
조직의 주요인사로 먼저 협찬회 회장 요시하라 사부로(吉原三郎 1854-1916)28)는 1889년 도
쿄대 법과를 졸업하고 서기관, 도지사 등을 거쳐 내무차관으로 1918년에 퇴임한 식민지 관료이
다. 식민지 조선과 관련한 행적으로 1908년 12월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총재에 취임하여 1913년
12월에는 총재가 되었다. 1916년 10월까지 총재 재임 중에 1915년 공진회의 문화조직인 경성협
찬회를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부회장은 경성부윤 김공충(金谷充), 자작 조중응(趙重應), 경성일
본인상업회의소 회장(전임) 하라 가쓰이치(原勝一), 경성일본인상업회의소 회장(후임) 하라다 긴노
스케(原田金之祐), 경성상업회의소 회장 백완혁(白完爀), 끝으로 이사장 이노우에 고사이(井上孝
哉)29) 등이 경성협찬회의 주요 인적 네트워크이다.
이들 임원진 이외에 경성협찬회를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중추라인 가운데 공연단 유치와 연예
관 설립, 문화공연 전반에 대한 사업의 실무적인 진행에 관여했던 데가 서무계, 회계계, 권유계,
설비계, 여흥계이다. 첫째, 서무계(서무계장 石原留吉)는 안내기, 기념 그림엽서의 발행, 이시하라
도모키치는 경성협찬회 이사이자 서무계장을 역임하였다. 회계계(회계계장 郡山智)는 관람권 발
25) 보조금 조선총독부 1만2천8백 원, 이왕가의 하사금 6천2백 원. 갹출금 총 7만5천7백9십7원 38전(p.19) 잡
수입 관람권, 야간입장권, 연예관 및 각종 흥행요금, 경성안내(책자) 및 그림엽서 판매대금, 매점, 음식점, 임
대료, 승인요금, 광고료 등으로 충당하였다고 한다. 보조금에 관한 명령서 협찬회장은 다음 사항에 관해서는
공진회 사무총장(정무총감 山県伊三郎 심사장을 겸함)의 인가를 얻을 것. 제 축조물의 설계, 제 흥행 및 제
행사물 등의 제목. 京城協贊會, 『始政5年記念京城協贊會報告書』, 1916, p.15∼p.16.
26) 京城協贊會, 『始政5年記念京城協贊會報告書』, 1916, p.102
27) 京城協贊會, 『始政5年記念京城協贊會報告書』, 1916, p.4
28) 吉原三郎(1854-1916) 1889 도쿄대 법과 졸업, 서기관, 가가와현지사, 오카야마현지사 등을 거쳐 1906년
내무차관으로 1918년 퇴임. 1908년12월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총재 취임. 1913년 12월 동양척식주식회사 총
재 취임(~1916년10월) 露崎弥編『吉原三郎追懐録』(1937) 秦郁彦編『日本近現代人物履歴事典』(東京大学出
版会 2002) 참조.
29) p.12-13, 井上孝哉(いのうえ こうさい 1870-1943) 일본 관료, 정치가. 중의원 의원. 기후현(岐阜県) 출
신, 도쿄제국대 졸업 후 고등문관시헙 행정과 합격. 내무서기관을 거쳐 1908년 사가현(佐賀県) 지사, 1917년
도야마현(富山県) 지사, 1919년 가나가와현(神奈川県) 지사. 1936년 오사카부 지사, 1937년 내무차관 등 역
임. 1910년 동양척식주식회사 이사로서 도항하여 이후 8년여 동안 조선에 있으면서 1915년 경성협찬회 이사
장을 역임하였다.
식민지 박람회의 예술공연- 퍼포먼스, 이벤트, 경합 151
매, 안내기 엽서의 발매, 각종 입장료 담당, 권유계(권유계장 大村友之丞) 오무라 도모노조(大村
友之丞)는 경성에서 조선연구회(朝鮮研究會)의 이름으로 1911년 『朝鮮貴族列傳』 , 『京城回顧録』
(1922), 『朝鮮講演』제1집(朝鮮日報社, 1910) 등의 저서를 남겼으며, 조선연구회는 1910년 아오야
나기 난메이(靑柳南冥), 호소이 하지메(細井肇) 등과 함께 만들어진 단체로 조선총독부의 지원을
받는 예하단체나 다름없었다. 설비계(설비계장 中村與資平)가 연예관 건설, 설비에 관한 사항, 접
대계(접대계장 馬詰次男)가 있고, 여흥계(여흥계장 釘本藤次郞)가 제 흥행물 및 각종 행사 등에
관한 사항, 연예관 연기에 관한 사항을 담당하였다.30) 설비계(설비계장 中村與資平)는 연예관 건
설과 설비에 관한 사항을 책임졌고, 끝으로 여흥계(여흥계장 구기모토 도지로釘本藤次郞)는 흥행
물 및 각종 행사 등에 관한 사항과 연예관 공연에 관한 사항을 결정하였다.
경성협찬회 이사이자 서무계장을 맡았던 이시하라 도메키치는 자신이 편찬한 경성안내서『경성
안내』에서 다음과 같이 연예관 공연단 중 인적 구성을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 이 책은 협찬회가
공진회장 내의 매점, 음식점의 설비, 각종 흥행물을 선택하여 공연전반에 대해서 관할한다는 점
을 언급하면서 이러한 업무 가운데 ‘연예관’의 설립이 대표적인 사업내용으로서 상세하게 소개하
였다. 또 연예관 공연의 중심 레퍼토리가 되었던 일본예기(경성권번, 중권번)의 공연을 위한 주요
스텝, 즉 작사, 작곡, 춤지도를 위한 스텝을 도쿄에서 초빙한 구체적인 내역조차 다음과 같이 공
개하고 있다.
특히 출연한 일본인과 조선인(원문-日鮮人)은 향리(鄕裏) 최고의 미인 명화(名花)를 모았으며
작사 半井桃水, 노래[節付]는 富士田音蔵31), 작곡[作曲]에 杵屋勝太郎32), 춤 지도[振付]에 花柳
徳太郎33), 花柳芳之助, 그리고 연주[鳴物]에 六郷新十郎 등이 참여하였다.34)
30) 서무계 石原留吉, 회계계 郡山智)는 관람권 발매, 안내기 엽서의 발매, 각종 입장료 담당, 둘째 권유계(권유계장
大村友之丞), 설비계(설비계장 中村與資平)가 연예관 건설, 설비에 관한 사항, 접대계(접대계장 馬詰次男)가 있
고, 끝으로 여흥계(여흥계장 釘本藤次郞). p.74 참조.
31) (ふじた おとぞう, 1874―1928)나가우타(長唄)의 우타가타(唄方) 명인. 1904년 5세 습명함. 유명극장 市村座,
明治座, 歌舞伎座 등에서 다테우타(立唄)로서 활약하였다. 이치무라자(市村座) 전속 하야시가시라(囃子頭-연주자
들의 리더)가 되었으며 또 3대 杵屋栄蔵와 鶴命会를 설립하여 나가우타 계에 공헌했다.
32) (きねや かつたろう, 1885-1966). 도쿄 출신, 나가우타(長唄)의 샤미센 연주(三味線方) 명인이다. 1911년 4代
勝太郎 습명(襲名). 이후 연주회에 전념하여 뛰어난 연주역량과 함께 엄격한 지도로 유명하다.
33) (はなやぎ とくたろう 1878-1963). 근대시기 일본무용가. 초대 花柳寿輔의 처조카로서 나중에 양자가 된다.
한때 오사카(大阪)에서 가부키 배우 수업을 쌓는다. 초대 寿輔 사후 이에모토(家元)를 이어받아 2대 寿輔 습명
후에는 하나야기류 분가(花柳流分家)를 이루었다.
34) 『始政5年記念朝鮮物産共進會京城協贊會報告書』, 경성협찬회, 1916년, p.161.
152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공진회 기간 동안의 공연은 모두 새롭게 작사 작곡된 곡의 작사자, 작곡자, 춤지도, 연주에 참
여한 인물들을 거명하고 소위 동도(東都=도쿄) 일류의 실력을 갖춘 예술인을 모아놓은 최신 경향
의 무대임을 알리고 있다.35) 1915년 연예관에서 발표한 우타의 신곡(新曲)들은 전통 음악에 심
취했던 나카라이 도수이(半井桃水)36) 만년의 작품들이며, 현재 남아있는 텍스트는 「つひのよる
べ」「御代の栄」「五条橋」「千里の風」네 곡이다. 당시 공연단의 부분적인 무대사진과 프로그램 및
인적구성에 대한 당시 기록으로 남겨져 있어서 공연단의 내용적인 부분에 대하여 유추해 볼 수
있다.【자료11 사진】 이 가운데 가사 중 일부를 인용하겠다.
천황치세의 번영[원문-御代榮]
하늘 아래 구석구석 비추는 태양(=일본)의 은혜는 한층 짙은 녹음이 번창하도다.
늙은 소나무 그늘에 둥지를 튼 어린 학[시정5년]의 천세를 부르는 목청 또한 청아하구나.
둥지를 떠난 지 5년[시정5년]이 되는 오늘을 어제와 비교하면 근심은 옛 꿈이 되었고,
이제 흥겨운 정사(政事)로 인해 태평성대를 이루어 온 세상 백성들이 풍요롭도다.
독수리 날고 호랑이 우는 산야도 거창한 거리가 되지 않았는가!
훌륭한 솜씨로 개화시켜가는 계림(鷄林=조선)의 모습을 와서 지켜보라!37)
35) 石原留吉,『京城案內』, 京城協贊会, p.254.
36) (なからい とうすい, 1861-1926). 메이지 다이쇼 시대의 소설가. 나가사키 현 쓰시마 시 출신으로 유년 시절을
의사인 부친을 따라 부산 왜관에서 보냄. 1880년『魁新聞』의 창간과 함께 입사했다가 이 신문의 폐간 후에는 부
친이 있는 부산으로 다시 건너감. 1888년 東京朝日新聞社에 입사, 「唖聾子」(1889)로 호평을 얻었고 1891년 장
편「胡砂吹く風」(조선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가 대표작, 樋口一葉의 문학적 스승이었다. <춘향전>의 최초 일본어
번역자(『大阪朝日新聞』1882년6월 20회 연재)로서 알려져 있다.
37)
天が下あまねく照らす日の本の恵みはいとど深緑栄え/久しき松かげにねぐら定めし雛鶴の千代よぶ声もしほらし
や。/巣立ちはなれて五年のけふに昨日を比ぶればうきは昔の夢にして、/今は楽しき政、五風十雨の時を得て四方
の民くさ生しげも、/鷲棲む山も虎吠る野も大路小路となりわひや、/たくみの業の開け行く、鶏の林に来ても見よ
かし。(京城協贊會, 『京城案內』, 1915), p.253∼p.260.
식민지 박람회의 예술공연- 퍼포먼스, 이벤트, 경합 153
4. 맺음말
20세기 초 ‘제국’일본의 知를 축적하고 전파하기 위하여 제국대학, 도서관, 박물관 등이 있었
다면, 식민지 문화의 領有를 위해서는 극장이 설립되었다. 극장에서는 연극단과 흥행단, 활동사
진 등 다양한 장르의 흥행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박람회가 가지는 다양한 성격 가운데 ‘박람회는
구경거리’(國雄行), 즉 일상적이지 않은 이벤트이면서'시정5년기념'이라는 국가제전과 융합되었
다. 1915년 경성 최장기 흥행은 일본 예기들에 의한 무용 공연이었으며 그들의 노래(唄)는 지배
의 정통성을 전한다. 본고는 극장이라는 ‘文化’ 전파의 공간에서 펼쳐진 퍼포먼스에 주목함으로
써 그들이 담당한 ‘제국’의 문화적 파장을 조명하고, 이러한 문화적 접경지대에 나타나는 히에라
르키의 긴장관계를 주목하였다. 특히 1915년 연예관 공연은 경성의 일본인 연극계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첫째는 연예관이라는 대형 공연장의 출연, 둘째, 50 여 일간의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공연이 이루졌다는 점 등에서 그러하다. 또 시기적으로 뒤를 이어 1915년 11월 예술좌의 경성공
연 등 거물급 극단의 출연 등을 들 수 있다. 【자료12 「今日の奉祝会」『京城日報』 1915년 11월
17일 3면】
본고에서 검토한 1915년 경성 연예관 공연의 예술단, 공연장르의 문제, 관객구성의 문제 등을
살펴보고 흥행성과 오락성을 담보하면서 문화지배를 통한 오락과 통치가 공존한다는 사실을 확
인할 수 있었으며 재조선 일본인의 문화역량을 결집시킨 ‘경성협찬회’라는 조직적 운영이 동반되
었다는 점을 밝혔다. 결국 1915년 경성 연예관 공연은 예술장르 간의 긴장관계, 공연주체 간 경
합관계, 문화권력의 문제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154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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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路勝彦,『近代日本の植民地博覧会』, 風響社, 2008
식민지 박람회의 예술공연- 퍼포먼스, 이벤트, 경합 155
植民地博覧会の芸術公演
: パフォーマンス、イベント、競合
洪善英
翰林大 日本學硏究所
<目次>
1. はじめに
2. 演芸館という文化装置
3. 演芸館興行の主役たち
4. むすび
1. はじめに
1915年10月の京城、1916年4月の台北では、それぞれ「始政5年記念朝鮮物産共進会」と 「始政20
年記念台湾勧業共進会」が開かれた。このとき、各都市には劇場「演芸館」が登場し、共進会が開かれる
間、様々なジャンルの舞台が上げられた。國雄行によると、1862年ロンドン万国博覧会以来、共進会お
よび博覧会の性格において重要な変貌があり、それは「祝祭性」を帯びていったという。博物館や美術館
などと異なり、限られた期間に広げられた非日常的な空間として発見されるのである。とりわけ、日本では
1903年第5回内国勧業博覧会(大阪)の当時、「余興」の必要性が注目され、会場内に「演舞場」という
劇場も登場した。その結果、入場者数が頭打ちに近づいた内国博の状況を一挙に打開し、目新しさを
失いつつあった内国博に新風を吹き込んだのである1)。日本での博覧会は、1903年第5回以降は地方
1) 國雄行, 『博覧会と明治の日本』, 吉川弘文館, 2010, 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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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治体や企業が主体となって博覧会を開催していくことになった2)。したがって博覧会の「祝祭性」はます
ます進んでいき、それを担うのは博覧会を舞台に繰り広げられる様々なパフォーマンスやイベントだっ
た。
一方、植民地都市では1915年、正宮である「景福宮」をメインステージに共進会が開かれた。朝鮮王
朝の中心部を公園化し、一般に公開することにより、植民地権力の不安定を潜めつつ「始政5年」の成果
を内外に宣伝する場となるはずだった3)。とくに1915年の朝鮮物産共進会は、「総括的な近代産業の達
成度を提示」しようと試み、「商品消費を刺激するための空間」4)として位置づけられた。
本発表では、不安な政局下で景福宮のなかに新築された「演芸館」という劇場において様々なジャンル
や異文化の舞台芸術が競い合い、また二重言語が交差し、支配/被支配の主体が複雑に共存するという
異質の有り様を浮彫りにしたい。
しかし、当時演芸館に招聘された劇団や公演団などの興行団体にかんする研究は現在ほとんど見当
たらない。ただ天勝一座による<サロメ>劇などの上演に限定した言及があるのみである。ここではほかの
興行団の存在やその興行内容を確認し、演芸館舞台に登場したパフォーマンスの性格とその意味を考察
したい。というのは、1910年代における京城日本人演劇に関する実態に迫るためには今までは断片的な
記録やデータを集めて制限された判断をするしかなかった。そこで在朝日本人演劇や文化に対する実態
を把握するのに限界があった。
ところが、1915年演芸館で行われた演劇やパフォーマンスにかんしては公的催しの一部として進めら
れたため、記録が多数残っており、これらのデータに基づき、興行内容や興行実現の諸過程について
推察することができる。具体的にはまず演芸館における上演レパートリー、劇団の存在などを探り、1915
年京城における芸術公演の意味合いを明らかにしたい。
研究方法としては当時の新聞記事や共進会報告書などの記録を参照しつつ演芸館公演がどのように
実現されたのかを検討する。また興行団のプログラムとレパートリーをまとめ、公演を主管した人物や団体
についても紹介し、演芸館公演の全体像を掴んでいきたい。そのとき、いくつかの争点が残る。専門の
興行団体の招聘はいかに可能であったか、これらの上演レパートリーが意味する地点はどこにあるか、で
きるだけ、演芸館にあらわれた芸術ジャンル間緊張、演じる/観る主体の競合に視点を据え、それぞれを
めぐる文化権力の問題に迫る必要がある。
2) 前掲書, p.184-p.202
3) 李泰文 「1915年「朝鮮物産共進会」の構成と内容」『慶應義塾大学日吉紀要言語·文化·コミュニケーション』No.30, 慶
應義塾大学日吉紀要刊行委員会, 2003. p.25-61. 이 밖에 주윤정, 「조선물산공진회(1915)에 대한 연구」『한국학대
학원석사학위논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3)등 참조.
4) 이각규, 『한국의 근대박람회』, 커뮤니케이션북스, 2010, p.168-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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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演芸館という文化装置
1915年演芸館公演に関する先行研究では、天勝一座の前衛演劇とパフォーマンスに注目すること
で、朝鮮総督府始政5年という歴史的時点に朝鮮王宮でのオスカー・ワイルド<サロメ>上演の持つ意味
と帝国日本の文化領有のあり方を指摘している5)。ちなみに1923年10月5日から10月24日までの朝鮮農
会主催、朝鮮総督府の後援で「朝鮮副業品共進会」が、やはり景福宮で開催されたという6)。1926年の
朝鮮博覧会、1929年の始政20周年記念朝鮮博覧会などが開催された場所も景福宮だった。【資料1 演
芸館配置図】
演芸館は景福宮の西側の入り口に当たる迎秋門の近くに位置し、最も広く光化門から入場した観覧者
が簡単にアクセスできるような地点が選ばれた。周辺の景観と調和しながら「セセッション(Sezession)」様
式の建築でホワイトの華麗な建物である7)。この当時、共進会の展示施設は、ほとんどルネッサンス様式
にセセッション様式が加味された建物であるという。また、このような手法は同じ時期日本の博覧会建築
でも登場したもので、1914年大正博覧会で設置された建築は、アールヌーボーとセセッションのものに分
類される8)。
総面積が229坪という大規模であり、一階の内部はステージの正面が平土間で、後方に至るほど傾斜
があり、1,000席の観覧の視界を考慮した設計になっている。1915年時点で京城(龍山含む)には、団
成社、光武臺に加えて日本人向けの劇場が壽館、壽座、黃金館、御成座、大正館、有樂館、浪花館
などがすでにあったが、規模と設備の面で圧倒的に優位にあった演芸館という劇場が登場したのであ
る9)。このように劇場や寄席、活動写真館が十カ所以上存在していたにもかかわらず、大劇場が登場し
たことは、「始政5年」の成果を成功的に提示するにあたって劇場という空間がいかに重要であるかを物
語っている。次は、演芸館の外観と設計図である。【資料2 演芸館設計図】
上記の設計図を参照して劇場の内部をより詳細に見てみると、一階の平土間、その両側の翼に伴奏
席が設けられており、二階はすべて客席が設けられていた。この建築物の特徴は、ヨーロッパの長所を
採用しながら日本の劇場固有の花道、奈落が設置され、日本演劇と西洋演劇の上演が可能にし、活動
写真の上映もできるように設計された。演芸館は現在残っていないので、内部の装飾も残された記録から
5) 홍선영,「제국의 文化領有와 外地巡行―天勝一座의 <살로메> 景福宮 공연을 중심으로」, 『일본근대학연구』
33집, 한국일본근대학회, 2011.
6) 이각규, 『한국의 근대박람회』, 커뮤니케이션북스, 2010, p.167.
7) 京城協贊會, 『始政5年記念 朝鮮物産共振會 京城協贊會報告書』, 1916, p.112.
8) 강상훈, 「일제강점기 박람회 건축을 통해 본 건축양식의 상징성」, 『건축역사연구』제15권3호, 2006, p.12.
9) 홍선영, 「경성의 일본인극장 변천사: 식민지도시의 문화와 극장」일본문화학보 43호,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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推測するしかない。天井の中央はドーム形、天井に照明を設置した。二階の天井と壁全体に布をかけて
豪華な装飾をし、音響の調和も最高の条件を用意したという。正面に美人画が飾られ、これを中心に照
明を映した点など、かなり観客の視線を引く工夫が整えていた。
一方、共進会場内部には、演芸館のほかに広さ5坪、150席規模の客席を備えた「活動写真館」があ
り、さらに「朝鮮演劇場」という名称でもう一つの劇場が建設された。総面積120坪、テント屋根と板張りと
いうやや素朴な建築物として存在したようである。ただ演芸館が設計図や写真をはじめ詳細な記録が散
在するに比べて朝鮮演劇場は全く資料が残っていないため、記録主体の甘さに惜まれるばかりである。
当時の記録によると、9月11日から10月31日までの51日間演芸館と朝鮮演劇場、野外活動写真館で
様々なジャンルの上演が行われた。共進会の公式行事(開場式、開会式、閉会式、各展示場の展
示)以外にも演芸館、朝鮮演劇場、野外活動写真館などで行われた諸エンターテイメントやイベントのプ
ログラムの中から演芸館の舞台に上がったレパートリーを中心に調査した結果をまとめると次の通りであ
る10)。
10) 京城協贊會, 『始政5年記念 朝鮮物産共振會 京城協贊會報告書』, 1916, p.150-p.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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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表1】 演芸館における日本公演団体の興行内容
昼/夜
ジャンル
9/11
手踊, 唄
中券
手踊, 唄
京城券
10/3
手踊, 唄
中券
10/4
手踊, 唄
京城券
御代の栄 ついのよるべ 10/8
手踊, 唄
京城券
御代の栄
10/9
手踊, 唄
中券
9/12
-10/2
昼間
興行
月日
その他
演目
団体
御代の栄 ついのよるべ 御代の栄 ついのよるべ 御代の栄 ついのよるべ *曲名
*10月2日まで
交代上演
*鉄道局千里
祝賀會
*10月7日まで
上演
五条橋
御代の栄 ついのよるべ
*10/31まで
10/10
手踊, 唄
京城券
御代の栄 五条橋
中券、京城券、
交代.
10/8
舞踊
内地人
少女
劍舞 <本能寺>, <飛雨>, <捨子>
大小奇術
バイオリン獨奏
曲藝<筒中の美人> 10/10
演劇
天勝一
-19
奇術
座
グローイングドール 絹中の美人 サロメ劇 二重トランク 美人閣
大胆な芸者 夜間
10/23
話芸
博多
二ワ加
北来土産虎の売込 宝探し祝ひの餅まき 三番叟(鶴, 亀)11)
お伽劇<新浮れ胡弓> 大小奇術
滑稽奇術
10/27
演劇
天勝一
筒中の美人 -31
奇術
座
指輪の変転 グローイングドール 不思議のドア 滑稽イタヅラボーイ
11) (さんばそう)
*29日雨天休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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演芸館の場合、1日2回公演を原則にし、まず昼間公演は芸妓、妓生の手踊、夜間公演は天勝一座
の奇術劇<サロメ>、博多俄12))、京城旧派俳優組合の演舞などの公演が行われた。ここで確認される
のは昼間公演の中心に日本伝統舞踊と民謡があり、中券·京城券という芸妓検番に所属された京城居住
の日本人公演団体である13)。
【資料3】 「今日の演芸館」『京城日報』1915.10.4.
12)博多地方で行われる即興の寸劇。目かずらをつけるのが特徴で盆踊りから発生し、幕末から明治にかけて流行し
た。
13) ‘検番’ともい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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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4】 台北演芸館の興行内容(1916.4.10.∼4.29)
昼間 台北検番芸妓舞踊 1916年4月10日∼4月19日 <名勝双六>全7場
夜間 支那劇大合同団 4月10日∼4月19日 ※北京大劇団「上天仙班」一行
昼夜 中野連鎖劇 4月20日∼4月24日 新喜劇<夢の浮橋>、<鏡>、その他数種。
旧喜劇<鼻六>、<勧進帳>、<千両幟>、<出世凧>、<千石舟>、その他。
連鎖劇<思はぬ縁>、その他。
新劇<嫁いじめ>、<作戦>、<越後獅子>、<兄の心>、その他。
昼夜 お伽劇と家庭劇 4月20日∼4月29日 お伽劇<今太閤幼物語>(巖谷小波作)、
<かちかち山>(久留島武彦作)、<公園の御隠居さん>(巖谷小波作)
家庭劇<小公子>3幕(巖谷小波訳)
※東儀鉄笛(無名会)、石川木舟、以下30余名。
昼夜 天勝一行、4月30日∼5月9日 <水芸>、奇術応用劇<サロメ>
1915年天勝一座の京城興行は『京城日報』などに詳細に報道され、共進会の期間中上演された演劇
<サロメ>は注目された。演芸館は植民地朝鮮の観客と会う場所であり、また景福宮内に位置したために
「王宮」公演という象徴性を帯びていた14)。天勝一座の<サロメ>上演をはじめ、複数のレパートリーにつ
いてはすでに検討されたのでここでは省くが、20年前の日本の博覧会で黒田清輝が裸体<朝妝>を出品
したときに似たような話題性を巻き起こした15)であろう。とりわけ朝鮮王室の観覧は、それの持つ破格のイ
メージによって朝鮮人の観客を向けた<サロメ>公演に多大な影響をもたらした。また、言葉の不要な「身
体パフォーマンス」という前衛的要素により、日本国内の上演に劣らないほど植民地観客の「興味」を引き
出し、川上貞奴の新派サロメや松井須摩子が演じる新劇サロメという、「純粋さ」の競い合いを無効にして
しまうような「ジャンル混合」の迫力は大したものであったといえよう16)。
表1で見る様々なジャンルのパフォーマンス、すなわち、奇術劇、伝統舞踊、話芸、見世物において
それぞれ入場料は差があった。公演団体の演目別入場料をまとめると、昼間と夜間は公演団が同じ場合
でも、入場料が異る。芸妓・妓生の伝統舞踊は昼間公演が夜間公演の2倍、特等席30銭、一等席20
14) 홍선영,「제국의 文化領有와 外地巡行―天勝一座의 <살로메> 景福宮 공연을 중심으로」, 『일본근대학연
구』33집, 한국일본근대학회, 2011.
15) 黒田清輝が出品した博覧会は、1894年に京都で開かれた第4回内国勧業博覧会であった。 國雄行, 『博覧会と明治
の日本』, 吉川弘文館, 2010, p.148.
16) 홍선영, 「예술좌의 만선순업과 그 문화적 파장」『한림일본학』15,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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銭、三等席15銭であり、夜間は20銭、10銭、5銭で半額になる。最も入場料の高価は天勝一座で特等
席1円、一等二等三等席それぞれ70、50、30銭で、公演全体をひっくるめて最も高い。博多俄のような
話藝は、活動写真と一緒に10銭、5銭程度の最も手頃な価格の見世物であった。【資料5 演芸館入場
料】
しばしば入場料の差はジャンル間「高級」「低級」といったヒエラルキーを反映したりもするのである。演
劇·奇術/日本伝統舞踊/朝鮮伝統舞踊/民俗芸能の順にジャンル間区別が値打ちされてしまうのである。
とくに昼間と夜間の入場料に倍の差が出る理由は、昼の公演では日本の伝統舞踊と朝鮮の伝統舞踊が
配置され、夜の公演では朝鮮の伝統舞踊のみで、プログラムの割り当てに相違があった。日本の伝統舞
踊がひたすら昼間公演のみに配置された点、朝鮮の伝統舞踊が夜間公演に配置された点は、昼間に行
われている共進会の観覧客向けであることを意味し、演芸館において伝統的な日本舞踊公演こそ最も優
遇されたジャンルであることが推測される。【資料6「演藝案內」『京城日報』1915년 10월 6일】
しかしながら、表1で確認するように演芸館の舞台には、日本の古典である能楽や歌舞伎は見当たらな
い。とはいえ、演芸館でいわゆる「高級」芸術が排除されたと断言することは難しい。ただ日本古典演劇
が選ばれていなかった点を確認することができる。すると、先に進めて演芸館の入場者の状況を介して興
行の主役となったレパートリーを確認し、演芸館舞台に対する観客の反応などを推察できるだろう。【資料
7 演芸館入場人員】
各公演団体やジャンルに応じた入場者数を比較してみると、天勝一座の公演が毎回1,000人以上の観
客を動員したことが確認できる。そして伝統舞踊の観客数においては著しい差が発見されない。ここで、
観客の構成の問題がさらに浮彫りにされるが、朝鮮人の観客と日本人の観客の確かな統計はない。た
だ、「観覧立場人員統計」によると、昼間日本人観覧客が20万6千人、朝鮮人の観覧客が47万2千人で
ある。そして、夜間は日本人の観客が9万3千人、朝鮮人の観覧客が25万4千人であるという17)。共進
会の入場者と演芸館の入場者の割合がそのまま一致することはありえないが、同様の比率を適用すること
ができるなら昼間公演では日本人の観客の割合が多く、夜間公演では朝鮮人の観客の割合が多かった
点だけが推測できよう。当時、各府県知事に依頼状を発送し団体観覧を誘導していたので、この推論は
大きく外れないと思われる18)。
以上、公演団体の区分、ジャンルの問題、入場料、観客構成の問題を注目したところ、演芸館という
文化装置は、余興や娯楽を追求しつつ植民地権力の「文化支配」と対立しなかったことが推察できよう。 17) 晝間 日本人206,039 朝鮮人472,503 中國人3,326 外國人1,905 無料88,953 計 772,745/ 夜間 日本人 93,502
朝鮮人254,651 中國人1,333 外國人938 無料41,214 計 39,638 / 合計1,164,383名이다. 京城協贊會, 『始政5年
記念京城協贊會報告書』, 1916, p.152-p.181。.
18) 前掲書 p.120-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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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演芸館興行の主役たち
京城は3月4月の春に風と雨が多く、9月から11月の秋には晴天のさわやかな天気が続き、共進会が開
かれるもっともよい気候を与えたという。また会場の内​​には、複数の施設や設備があり、共進会陳列館の
西側を区画して慶会楼を中心に全体の面積は約3万5千坪に及んだ。具体的には演芸館に加えて(1)
朝鮮演劇場、(2)不思議館、(3)曲馬館、(4)動物園、(5)迷路館、(6)活動写真、(7)
遊戱、(8)ブランコ廻り、などの様々な祝祭空間が用意された。それでは51日間の日本の伝統舞踊、
魔術、演劇、話芸など多様なジャンルの興行団を京城に集め、演芸館公演を実現させた興行主につい
て触れたい。演芸館公演を企画し「興行師」の役割を果たした人物として、まず釘本藤次郞に注目した
い。共進会の期間中、演芸館をはじめとする会場内で行われた興行や演物などにかんする諸事項を決
定し、その中で演芸館の公演に関する全般を企画し実行した人物である。
佐賀県唐津市出身、1867年生れ当時49歳の在朝日本人実業家として1895年渡韓し京城で鉄物商売
を始めたと知られている19)。釘本商店を運営し1915年には大物に成長し、一方では演劇をを愛好したと
いう記録が残っており、京城の芝居興行に直接関連があった人物であることが推測できる20)。1915年、
共進会の期間の興行の企画の経験をベースにして彼は1929年に「始政20年記念朝鮮博覧会」当時も再
び重要な役割を果たした。ただし敗戦以降の行跡がわからなく、全体的な人物像を把握するには限界が
ある。【資料8 1929年朝鮮博覧会 京城協賛会理事長 釘本藤次郞】
次に注目すべき人物は中村与資平(1880~1963)である。中村は1880年静岡県浜松市で生まれ、
1905年に東京帝国大学建築学科を卒業して1907年第一銀行韓国総支店(1910年以後、朝鮮銀行本
店)の建築で臨時建築部工務長を務めたことから、植民地建築との縁が始まった。1908年に京城に移
住して1912年、朝鮮銀行本店を竣工し、朝鮮銀行建築顧問となり、このとき、京城黃金町に中村建築
事務所を開いた。1917年には大連、1921年のヨーロッパ視察を経て1922年に東京に戻り中村工務所を
開いた。1934年中村與資平建築事務所に改称して運営し、様々な建築物を残した日本の代表的な建
築家である。1915年当時は京城に位置する中村建築事務所の代表として京城の主要な建築物の設計を
引き受けて進行した。植民地朝鮮と旧満州と静岡県などで公共建築設計を多数残したことが知られてお
り、1921年天道教中央大教会堂、1937年徳寿宮美術館(当時李王家美術館)などの植民地時代の建
築物を設計し、さらに1915年の演芸館の設計にもかかわっていたと推測される。ただし1915年に完成し
た演芸館が何らかの理由で消失したこともあり、設計図や写真などの資料が残っているにもかかわらず、
19) 高橋刀川, 『在韓成功之九州人』, 虎与号書店, 1908, p.160.
20) 「釘本藤次郎、京城商業会議所会頭」、「京城日報」、1924年1月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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設計者を確定できる記録は発見されず、現時点では推測に留まるしかない。【資料9 中村与資平】
最後に1910年代京城における在朝日本人演劇の現状を把握するのに重要な資料である『京城案内』
(1915)を刊行した石原留吉を注目したい。京城案内記や共進会記念絵葉書の発行など、共進会の
期間中に広報を担当したものと思われる。彼によって出版された『京城案内』は、共進会観覧のために京
城に来た人々のために最近京城の諸情勢と名所旧跡などを詳しく紹介し、販売や贈呈のために編纂し
た。ほかにも一枚の京城案内はパンフレットの内容に会場案内図、旅館、料理店、娯楽場などを記述
し、これを団体観覧客贈呈用に製作した21)。石原留吉(1875-?)は香川県出身で1904年文官高等
試験に合格し役人の道を歩んだ。1909年韓国へ渡ってき1910年から京城府で勤務した。その後、新義
州府、元山府の府尹をへて、日本に帰ってからは高松市長(1924~1928)になった人物であった。し
かし、釘本藤次郎、中村與資平に比して、帰国してからの行跡については知らされてない。【資料9 石
原留吉】
演芸館の上演を企画した釘本、演芸館設立にかかわった中村、京城府の役人として演芸館上演の
広報や資金を担当した石原など、演芸館興行に重要な役割を担った三人は、「京城協賛会」という組織と
深く関わったという共通点が見られる。すなわち当時、京城協賛会で余興系、設備系、庶務係の責任者
であったのである。
次は、共進会の「翼賛」のために設立された組織、「始政5年記念朝鮮物産共進会硬性協賛会」の設
立趣旨である。
今秋施政五年朝鮮物産共進会に就ては京城協賛会成立して頻りに協賛の実を講じ、会場内は固より府
內要衝の地には種々なる装飾を施こし、天晴れ京城の天地を聳動せしめんとの計画にて衆智を集めて熱
心を企画しつつあり、22)
と紹介された。共進会事業の翼賛、共進会の隆盛を図り、見物人の便宜を図る目的で設立された京
城協賛会の性格やその構成について述べたい。京城協賛会の設立は1914年から始められ、1915年1月
発起人総会を通して正式に発足した。朝鮮総督府や京畿道庁から選任または推薦された人物のなか京
城府居住者の17人によって1914年12月臨時勃起会が開催され、本格的に活動が始まった。その後、
京城府内の発起人154人によって翌年1月11日に発起人総会が開催された。
ところが、協賛会の規則によれば、選任された会長と副会長、常議員は総督に届け、商議員會の常
21) 京城協贊會, 『始政5年記念京城協贊會報告書』, 1916,p.109-110
22) 石原留吉,『京城案內』京城協贊會, 1915, p.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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議員を互選、委託された理事長、理事、町洞委員および採用された事務員から構成されている。役員
は、会長1名、副会長4名を総会で選出し、理事長1名、理事10名、委員若干名は会長が嘱託すること
になった。京城協賛会は常議員10人、商議員會の互選、および総会で選出、または会長により委囑さ
れた50人の商議員で組織された23)。協賛会の事業は観覧客の募集、交通・宿泊の便宜、観覧外国人
のための案内、来賓接待、朝鮮内の景勝地の紹介、その他共進会の関連事業などである24)。協賛会
の事業や業務のための経費は、会員の醵出金、寄付金、補助金と上演入場料などの収入で賄ってい
た。特に会員のレベルによって金額が異なる。名誉会員500円、特別有功会員は250円、正会員は20
円、賛助メンバーは2円が割り当てられた。25)協賛会の会員には金額によって共進会入場券を贈呈され
る。千円以上は100枚、1百円以上は10枚の入場券が貰えたのである26)。協賛会は施政五年記念朝
鮮物産共進会の閉会以後解散された27)。
さて、組織の主要人物は協賛会会長吉原三郎1854-1916)は1889東京大学法科大学院を卒業
し、書記官、香川県知事、岡山県知事などを経て、1906年内務次官になり、1918年退任した官僚であ
る。彼は1908年12月東洋拓殖株式会社の副総裁になり、1913年12月は総裁に就任して1916年10月ま
で務めた。在任中である1915年には共進会の文化組織であった京城協賛会を主導したと思われる。副
会長は京城府尹の金谷充、子爵趙重應、京城日本人商工会議所会長の原勝一と原田金之祐、京城商
工会議所会長の白完爀、それから理事長の井上孝哉28)などが京城協賛会の主な人的ネットワークであ
る。
そのほか、京城協賛会を実質的に動かす中枢ラインの中で公演団の誘致や演芸館の設立、上演に
関する事業の実務的な進行を担当したところは庶務係、会計係、勧誘系、設備系、餘興系である。庶
務係(庶務係長:石原留吉)は案内記、記念絵はがきの発行、石原留吉は京城協賛会理事兼庶務係
長を務めた。会計系(会計係長:郡山智)は、チケット発売、案内記はがきの発売、各種入場料を担
23) 京城協贊會, 『始政5年記念京城協贊會報告書』, 1916,p.8-10
24) 1 관람자의 권유 및 공진회장 외 관람객의 알선을 한다. 2 선차[교통], 여관 기타에 관하여 관람자의 편리를
도모한다. 3 관람외국인에 대한 통역설명 등의 편의를 도모한다. 4 내빈 접대 및 그 설비를 도모한다. 5 각종
여흥의 설비 또는 권유, 각종 대회의 개최를 권유한다. 6 명승구적 등의 소개를 도모한다. 7 그 외 공진회 성
공을 위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사업.
25) 京城協贊會, 『始政5年記念京城協贊會報告書』, 1916, p.15∼p.16.
26) 京城協贊會, 『始政5年記念京城協贊會報告書』, 1916, p.102
27) 京城協贊會, 『始政5年記念京城協贊會報告書』, 1916, p.4
28) 井上孝哉(いのうえ こうさい 1870-1943)
166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当した。勧誘系(勧誘係長:大村友之丞)の大村友之丞は京城で朝鮮研究会の名称で1911年「朝鮮
貴族列傳」、「京城回顧録」(1922)、「朝鮮講演」第1集(朝鮮日報社、1910)などの著書を残してお
り、朝鮮研究会は、1910年靑柳南冥、細井肇などによと共に組織されたもので総督府の支援を得る隷
属団体に違いない。
設備系(設備係長:中村與資平)は演芸館の建設や設備に関する事項を担った。娯楽系(餘興係
長:釘本藤次郞)は興行物や各種行事などと演芸館の上演に関する事項を担当した。庶務係石原留
吉、会計系郡山智)は、チケット発売、案内記葉書の発売、各種入場料を担当、第二勧誘系(勧誘
係長:大村友之丞)、設備系(設備係長:中村與資平)が演芸館の建設、設備にに関する事項、接
待系(接待係長:馬詰次男)があり、設備系(設備係長:中村與資平)は演芸館建設を担当した。
京城協賛会理事兼庶務係長を務めた石原留吉は自ら編纂した京城ガイドブックである「京城案内」で
演芸館公演団の人的構成を詳細に記している。共振会場内の売店、飲食店の設備、各種興行物の選
定に至るまで協賛会が管轄したという。それらの業務の中で「演芸館」の設立が最も重要な事業であり、
その具体的な内容を詳しく紹介している。また、演芸館公演の重なレパートリーであった京城巻番、中巻
番の上演のために、作詞、作曲、節付のステップを東京から招聘した具体的な事情などを詳述してい
る。
特に出演の日鮮人は温柔鄕裏第一の美人名花を集め、歌は半井桃水氏の作に係り、節付は富士田音
蔵29)、杵屋勝太郎30)両氏、振付は花柳徳太郎氏31)、鳴物は六郷新十郎の責任にて仕組まれたる32)
新しく作詞作曲された曲の作詞者、作曲家、節付、演奏に参加した人物の名前をあげており、「東
都第一流の人々の意を凝らし思ひを集めたる最新趣向」であることを知らせている33)。1915年演芸館で
発表された歌の新曲は、伝統的な音楽に傾倒していた半井桃水34)の晩年の作品であり、現在残ってい
るテキストは、「御代の栄」、「つひのよるべ」、「五条橋」、「千里の風」の四曲である。当時公演団の舞
台写真やプログラム及び人的構成に関する記録が残されているのでその内容についてもある程度知ること
ができる。【資料10写真】。次は当時中検番、京城検番の芸妓たちに歌われた唄の一部である。
29) ふじた おとぞう(1874―1928)
30) きねや かつたろう(1885-1966)
31) はなやぎ とくたろう(1878-1963)
32) 『始政5年記念朝鮮物産共進會京城協贊會報告書』, 경성협찬회, 1916년, p.161.
33) 石原留吉,『京城案內』, 京城協贊会, p.254.
34) なからい とうすい(1861-1926).
식민지 박람회의 예술공연- 퍼포먼스, 이벤트, 경합 167
御代榮
天が下あまねく照らす日の本の恵みはいとど深緑栄え
久しき松かげにねぐら定めし雛鶴の千代よぶ声もしほらしや。
巣立ちはなれて五年のけふに昨日を比ぶればうきは昔の夢にして、
今は楽しき政、五風十雨の時を得て四方の民くさ生しげも、
鷲棲む山も虎吠る野も大路小路となりわひや、
たくみの業の開け行く、鶏の林に来ても見よかし。35)
4. 結び
20世紀初め、「帝国」日本の知を蓄積し、伝播するために帝国大学、図書館、博物館などがあったと
したら、「帝国」文化を領有するために劇場が建設された。劇場では劇団と興行団、活動写真など様々な
ジャンル混合が行われた。そして博覧会の様々な機能の中で「博覧会とは見世物」(國雄行)、つまり日
常的ではないイベント=「始政5年記念」という国家祭典と融合された。1915年京城で最も長期の興行は、
日本芸妓による伝統舞踊であり、彼らの唄は支配の正統性を伝えようとしたのである。本発表は、劇場と
いう「文化」伝播の空間で行われたパフォーマンスを通して、彼らが担当した「帝国」の文化的痕跡を明ら
かにし、文化的境界地帯に見られるヒエラルキーの緊張関係に注目した。特に1915年演芸館公演は京
城の日本人の演劇界においては画期的な出来事であった。演芸館という大型劇場の出現、50日間以上
の持続かつ安定的な公演がなされたという点である。また、そこから刺激され1915年11月、芸術座の京
城公演など新劇の出演などが挙げられよう。【資料11 「今日の奉祝会」『京城日報』 1915年 11月 17日
3面】
本発表で検討した1915年京城演芸館上演の芸術団、公演ジャンルの問題、観客の構成の問題など
は興行と娯楽を担保しつつ、文化支配による「娯楽」と「統治」が共存していることが確認できよう。さらに
在朝日本人の文化力量を集結させた「京城協賛会」という組織的な運営が伴われたという点を明らかにし
た。1915年京城演芸館公演は芸術ジャンル間の混合や公演主体間の緊張関係のなかにヘゲモニの競
い合いが露呈されていたのである。
35)京城協贊會, 『京城案內』, 1915, p.253∼p.260.
168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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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더 속의 실험국가- 일본의 전위사진과 보도사진이 표상한 만주국 169
파인더 속의 실험국가
- 일본의 전위사진과 보도사진이 표상한 만주국
최재혁 (崔在爀)
誠信女子大學校
<목 차>
1. 들어가며
2. 전위사진 진영의 만주 인식
3. 보도사진 진영의 만주 인식
4. 대외용 그래프 잡지의 만주 표상
5. 나가며
1. 들어가며
사진은 대상과 세계를 있는 그대로 투명하게 담아내고 있는 듯 보이지만 실은 재현 주체(촬영
자)와 타자(피사체) 사이에서 작동하는 불균형한 역학관계 아래 성립하는 매체다. 이러한 (의도된)
투명성은 사진의 내장된 이데올로기를 표면화하지 않고도 자연스레 수용·유통될 수 있게끔 만든
다. 제국의 식민지 표상 장치 중에서 무엇보다 사진이 광범위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이유도 여기
에 있다. 오리엔탈리즘과 엑조티시즘의 차별적 시선이 반영된 사진은 그 대표적인 사례겠지만,
‘기록’이라는 본연의 성격에 충실해 보이는 사진-인류학과 민속학, 고적조사의 명목으로 촬영된
사진-역시 지배를 위한 ‘지의 구축’에 기여하는 아카이브로 활용되었다.(도1) 한편 기록성을 제1
의 목적으로 내세운 보도사진 역시 객관적 사실의 전달이 아니라 지배의 정당화와 전쟁 수행을
위한 선전, 선동에 적극적으로 쓰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도2)
170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도1 鳥居龍蔵 <身体測定写真> 1914 年
도2 『写真報道 戦ふ朝鮮』 1945 年
파인더 속의 실험국가- 일본의 전위사진과 보도사진이 표상한 만주국 171
‘왕도낙토의 이상향’, ‘대륙 진출의 생명선’이라는 수사를 통해 미화, 선전된 만주국은 1930~40
년대 일본사진계의 중요한 테마였다. 일본인 사진가의 만주 사진 역시 앞서 서술했던 오리엔탈리
즘에 대한 차별적 시선, 아카이브가 지닌 기록성, 선전 공작을 위한 보도 등의 성격을 가지고 있
지만 그 속에는 일방적인 식민지 지배전략만으로는 충분히 설명하기 힘든 다원적인 시선이 교차
하고 있었다. 카메라를 든 주체에 따라 ‘거주자(재만일본인)’와 ‘방문자’ 사이에는 ‘생활공간’과
‘여행지’라는 차이가 가로 놓여 있었고 ‘거주자’ 사이에도 신세대와 구세대의 갈등이 존재했다.
또한 같은 ‘방문자’라고 할지라도 보도사진과 (예술영역에서의 사진을 추구한) 전위사진 진영은
접근 방법이 서로 달랐다.
사진 전문잡지 『포토 타임스』1940년 3월호에는 <대륙현지보고좌담회>라는 기사가 게재되었
다. 1938년 함께 만주 촬영여행을 떠났던 보도사진가 와타나베 쓰토무(渡邊勉, 1908~78)와 전위
사진가 아베 요시후미(阿部芳文, 1913~71)의 귀국 보고회 형식으로 마련된 이 자리에는 내각정
보부의 관료를 비롯하여 양 진영의 사진가와 평론가가 참석했다.1) 두 사진가에게 만주국은 촬영
지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진론을 표명하고 적용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지도적 입장에
서서 만주에 거주하던 사진가들과 교류하고 만주의 상황을 내지에 소개하는 역할을 수행했던 이
들의 활동은 일본과 만주국을 둘러싼 사진계의 양상을 쌍방향으로 조망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
공한다. 이에 본 발표에서는 카메라를 든 주체의 착종과 경합에 초점을 맞추어 제국의 문화권력
으로 작동한 사진 이미지를 확인하고 그들이 작업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 만주를 자의적 공간으
로 해석했는지를 밝히고자 한다.
2. 전위사진 진영의 만주 인식
보도사진과 전위사진은 모두 1930년 초반 무렵부터 활발하게 전개된 신흥사진(新興寫眞)2)에 뿌
리를 두고 있었지만 전자는 사회성, 후자는 개인의 주관성을 기반으로 하는 정반대 지향을 가졌
다. 예컨대 전위사진가 아베 요시후미는 좌담회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1) 「大陸現地報告座談会」, 『フォトタイムス』, フォトタイムス社, 1938年11月. 출석자는 내각정보부의 하야시 겐이
치(林謙一), 동맹사진부 우치야마 린노스케(内山林之助), 사진조형연구회 다키구치 슈조(瀧口修造), 나고야사진문
화협회 사카다 미노루(坂田稔)였다.
2) ‘신흥사진’이란 미술(회화)의 표현과 효과를 모방하려 했던 기존의 예술사진(회화주의 사진, pictorialism)과 결별
을 도모하고 사진 독자의 표현을 추구하고자 했던 경향으로 독일의 신즉물주의의 영향 아래 전개되었다.
172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와타나베 군이-인용자) 하얼빈에서는 문화의 제작의욕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신경(新京-현재의 창춘長春)에서 제작의욕을 아주 잃었습니다. 신경에는 하
나의 정치적인 의지는 있었지만 내가 시도하고 싶을 만큼의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느
낌이었습니다.”3)
국책 선전이 주요목적인 보도사진 진영의 와타나베에게는 수도 신경이 중요한 취재 대상이었지
만 아베에게 있어서는 단순한 정치적 공간에 불과했다. 아베는 재야 서양화 단체인 독립미술협회
출신의 화가로 출발하여 초현실주의 시인이자 문예비평가였던 다키구치 슈조(瀧口修造, 1903~79)
의 시집 『요정의 거리』의 삽화를 담당하기도 했다. 1938년 다키구치와 함께 <전위사진협회> 창
립에 참가하면서 사진가로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전위사진은 통시적으로는 신흥사진의 연장선상
에, 공시적으로는 초현실주의와 추상으로 양분된 전위회화와 상호관계 속에 위치하고 있다. 즉
포토그램(photogram)4)과 포토몽타주(photomontage)5)등의 기술 구사가 신흥사진이 추구했던
방법론에 연원을 둔 것이라면, 이러한 기법을 사용하여 꿈과 무의식의 초현실적 분위기 표현이나
추상적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운 점은 당시 서양화단의 첨단적 경향과 상통하는 점이 있었다. 사
카다 미노루(坂田稔)의 <위기>(도3), 하나와 긴고(花和銀吾)의 <복잡한 상상>(도4)등의 대표작품에
서 드러나듯 간사이(關西)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나니와 사진클럽(浪華写真倶楽部)>과 <단
페이사진클럽(丹平写真倶楽部)>의 사진에는 포토몽타주, 콜라주, 포토그램은 물론 다중노출과 솔
라리제이션(solarization)6)을 통한 이미지의 왜곡, 인화 후 채색과 같은 다양한 기법이 사용되어
초현실적이고 낯선 분위기를 자아냈다.
3)
「大陸現地報告座談会」, 『フォトタイムス』, フォトタイムス社, 1938年11月.
4) 카메라를 사용하지 않고 감광재료 위에 물체를 배치하고 빛을 쬐어 물체의 윤곽이나 그림자의 추상적인 영상을
구성하는 사진 기법을 의미한다.
5) 사진을 오려내어 동일한 화면 안에 두 개 이상의 새로운 합성 이미지를 조합하는 기법으로 사진뿐만 아니라 그
림과 색깔, 글자까지 덧붙이거나 물리적 합성뿐만 아니라 촬영할 때 다중노출 등으로 복합이미지를 만드는 기법
까지 확장하여 볼 수도 있다.
6) 현상할 때 감광지나 인화지에 빛을 극단적으로 노출하여 흑백의 반전시켜 표현하는 사진 기법이다.
파인더 속의 실험국가- 일본의 전위사진과 보도사진이 표상한 만주국 173
도3 坂田稔 〈危機〉 1938年
도5 平井輝七 <月の夢想> 1938 年
도4 花和銀吾 <複雑なる想像> 1938 年
도6 阿部芳文 <夜の目> 1939 年
174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하지만 아베가 추구했던 사진은 전형적인 방법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는 “쉬르리얼리즘의 오브
제와 꿈의 메커니즘, 환상 같은 의미를 단순히 기괴한 환상의 앙상블로 말하려는 방향만이 아니
라 우리 일상 속에서 발견할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7) 작품을 통해 본다면 히
라이 테루시치(平井輝七)의 <달의 몽상>(도5)은 인체의 일부를 콜라주하면서 눈동자가 훔쳐보는
환상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면 아베는 <밤의 눈>(도6)에서 동일한 모티프인 눈동자를 채택했지만
밤거리 안경점의 간판이라는 현실을 촬영했다. 즉 극단적이고 인위적인 기법과 조작을 사용하지
않고도 밤이 주는 스산한 분위기를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아베의 이러한 사진관과 조형론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이는 다키구치 슈조였다. 다키구치는 어떠한 기법과 조작도 가하지 않은 ‘스
트레이트 포토’, 즉 사진 본래의 기능인 기록성에 의거한 전위사진의 가능성을 일관되게 주장하
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쉬르리얼리슴적인 사진도 스트레이트 포토로 가능하며 오히려 현실 속에 파악된 ‘초현실성’이
가장 강하게 우리를 움직이게 만든다. (중략) 이 말은 결국 기록성을 염두에 둔 것으로, 쉬르
리얼리슴적인 작품을 기묘히 왜곡하거나 구성하거나 하는 것만으로는 달성할 수 없음을 암시
하려 했다.8)
그는 사진의 핵심이란 항상 대상을 어떻게 인식하는가라는 문제설정에 있다고 생각하여 “초현
실주의 사진도 추상 사진도 결국 각각으로부터 대상의 발견과 해석과 다름없다”9)라고 언급하기
도 했다. 즉 초현실주의(쉬르리얼리즘)는 리얼리즘과 상호 보완하는 것이었고 현실로 향하는 통
로였던 동시에 결코 현실을 뛰어 넘거나 배반하는 의미는 아니었다.10) 한편 <전위사진협회>를
조직하여 도쿄 지역의 초현실주의를 주도했던 다키구치의 의견은 간사이 지방 작가들의 작위적
인 제작 방식에 대한 비판으로도 볼 수 있다.
7) 阿部芳文, 「前衛的な方面への一考察」, 『フォトタイムス』, フォトタイムス社, 1938年7月.
8) 瀧口修造, 「前衛写真試論」, 『フォトタイムス』, フォトタイムス社, 1938年11月.
9) 瀧口修造, 「植物の記録」, 『フォトタイムス』, フォトタイムス社, 1939年1月.
10)北澤憲昭, 「危機のリアリズム―シュルリアリズムと抽象」, 『美術手帖』 2005年7月.
파인더 속의 실험국가- 일본의 전위사진과 보도사진이 표상한 만주국 175
도7 阿部芳文 <大陸の足> 1940 年
도8 阿部芳文 <二つの背景> 1940 年
176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도9 阿部芳文 <奇妙な調和> 1940 年
그렇다면 아베가 만주를 테마로 촬영한 사진은 어떠했을까? 『포토타임스』1940년 2월호에 실린
<대륙의 발>, <두 개의 풍경>, <기묘한 조화>는 각각 두 장을 한 세트로 구성한 작품이다(도
7~9). 구체적인 제재는 다렌(大連)과 신경 간을 시속 100km 이상으로 주파하던 남만주철도회사
의 자랑 ‘특급 아시아’호와 전통적인 운송수단인 마차, 베이징의 천주교회당과 펑톈(奉天)의 국립
박물관, 경극 의상을 입은 중국인과 러시아 유민 등 옛 것과 새 것, 동양과 서양을 대비한 두 종
류의 피사체를 병치했다. 전위사진가의 작품이라지만 얼핏 보면 단순히 만주의 대표적인 풍물을
선택한 것처럼 보이며 기법적으로 새롭다고 보기는 어렵다. 전술했던 다키구치의 이론에 따라 일
상과 생활을 기록하듯 찍은 이 사진을 두고 아베는 자작해설에서 “<기묘한 조화>(도9)는 지역적
인 거리와 시간의 문제에서 보면 매우 당돌한 조합”이지만 “대륙에서 때때로 마주치며 불가사의
하게 느껴졌던, 백계 러시아인과 중국인의 자긍심과 생활이 기묘하게 공존하는 모습이 마음에 떠
올라 묶어보았다”고 설명했다.11) 아베의 사진은 스트레이트 포토이면서도 현실 그 자체의 재현
11)阿部芳文, 「阿部芳文の頁」, 『フォトタイムス』, フォトタイムス社, 1940年2月; 나머지 작품에 대해 아베는 다음
과 같이 설명했다. “<대륙의 발>은 보시다시피 기관차 아시아호의 앞 부분과 내륙의 택시라고도 불리는 마차가
멈춰 쉬고 있는 모습이며 이는 유선형의 기관차인 근대적 마력의 대표와, 살과 뼈로 살아있는 생물의 마력(을
파인더 속의 실험국가- 일본의 전위사진과 보도사진이 표상한 만주국 177
이 아니라 흔한 일상에서 발생한 돌발적인 이미지를 현실 세계에서 ‘잘라 내어’ 병치, 대조시켰
다. 서로 다른 장소의 이질적이거나 동질적인 모티프를 사진가가 선택, 발견하여 표현해 냈던 셈
이다. 이는 초현실주의 이론에서 종종 언급되는 로트레아몽(Comte de Lautréamont, 1846~70)
의 “해부대 위의 재봉틀과 우산의 갑작스런 만남”, 즉 ‘데페이즈망(전치)’ 효과를 연상케 한다.
말하자면 아베에게 있어 만주는 자신이 추구했던 ‘초현실’을 보다 용이하게 마주하고 발견할 수
있게끔 자극을 주는 공간이었다.
일상 속에서 초현실을 발견하려는 의식은 중국과 만주를 여행했던 다른 사진가들에게서도 종
종 나타난다. 대표적인 예로 고이시 기요시(小石清, 1908~57)는 당시 유행했던 포토그램, 다중노
출 등 혁신적인 기법을 구사한 사진집 『초하신경(初夏神經)』(1933년)으로 주목을 받았고 전위사
진의 기법을 집대성한 『촬영·작화의 신기법』(1936년)을 상재한 전위사진의 대표 작가였다.(도10).
도10 小石清
도11 小石清 <肥大した敗戦記念物>
<自己擬視・ひしひしといれてくるもの>
(『半世界』) 1940 年
『初夏神経』 게재
대비했습니다-옮긴이). (중략) <두 개의 풍경>. 하나는 북경의 천주교회당의 고딕풍 예배당과 그 앞에 있는 중국
인이 만든 사자 스타일의 이상한 위치를, 다른 한 장은 봉천의 박물관 앞뜰에 있는 사자. 이 두 장 모두 유럽식
창문이 열려 있는 대륙의 도회의 점묘입니다.”
178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1938년 고이시는 해군성 촉탁으로 파견되어 내각정보부가 발행한 『사진주보』의 촬영을 담당하
면서 보도사진가로 전향한다. <반세계(半世界)>(1940년)는 중국 대륙을 테마로 한 작품 가운데
공무와는 별개로 촬영했던 사진을 모아 재구성한 연작이다. 이 시리즈는 ‘시대가 요청하는 사회
성과 예술가로서의 자립성의 갈등에서 생겨난 작품’12)이자 직업인으로서의 입장과 예술가로서의
입장이 교착된 작품으로 해석된다. 실제로 <반세계>에서는 이전까지 추구한 첨단적 기법과 자의
식은 희박해졌지만 몽타주 등 최저한의 가공을 한 스트레이트 포토를 통해 현실 속에 존재하는
중국의 모습을 담았다. 그렇지만 <비대한 패전기념물>과 같은 암시적 제목에서는 어딘지 염세적
이며 꺼림칙한 느낌이 부각되며 일상 속의 현실과 초현실이 교차한다(도11). 아베는 어느 좌담회
에서 고이시의 <반세계> 연작에 대해 “저도 중국과 만주, 몽강(蒙彊; 내몽고 자치주 일대로 만주
국의 영향권 아래 있던 일본의 괴뢰정권)에 갔을 때, 대체로 이러한 구성을 제작했으며 그것을
보고 저런저런, 하고 생각했다”며 공감을 표한 적도 있다.
아베의 만주 출장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사항은 만주사진계와 교류 활동이다. 아베는 다롄
과 하얼빈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젊은 사진가들을 ‘만주사진계의 영거 제너레이션’이라 부르며 쿠
리(苦力; 중국인 하층노동자)와 석양이 비치는 비스듬한 성벽으로 대표되는 만주 사진의 전형적
인 주제에 대한 항의의 의미를 담아 이들을 소개한다고 밝혔다.13) 그러나 이들의 작품의 대부분
은 정작 아베 요시후미 류가 제안한 ‘일상 속의 초현실’과는 거리가 있었다. 예컨대 콘덴서 속에
사물을 넣어 포토그램으로 제작한 후 반투명한 천 같은 이질적인 재료를 콜라주하거나 다중노출
로 인물의 형상을 겹쳐 표현한 그로테스크한 조형성이 눈에 띤다.(도12,13) 아베는 1940년에 열린
<미술문화협회전>에 이들의 출품을 주선했으나 “렌즈를 매개로 하지 않는 사진이 매우 눈에 띄
지만 양식 차원에서 가장 안이하다”고 비판하면서 “만주 전위작가들에게 렌즈 속으로부터 라이
온과 학의 교통사고를 이끌어내는 마술사와 같은 측면을 강조하고 싶었다.”14)고 언급했다. 인화
후 작업을 거치지 않은 스트레이트 포토에 의한 데페이즈망의 돌발적 효과를 요구하고 있는 것
이다. 이러한 아베의 우려와는 달리 만주의 젊은 사진가들은 “실제로 카메라의 유리 렌즈는 때로
는 큰 장해가 된다. 그러나 사진이라는 것은 반드시 렌즈를 통해야만 할 이유는 조금도 없다.”15)
라며 새로운 기법에 대한 관심과 경도를 강하게 드러냈다. 만주의 젊은 사진가들이 자신들을 지
원하고 본국에도 소개했던 ‘내지’의 저명한 전위미술가와 다른 입장을 취한 이유는 무엇 때문이
12)中島徳博, 「小石清と浪華写真倶楽部」展, 西武百貨店池袋店・ザ・コンテンポラリー・アートギャラリー, 1988年.
13)阿部芳文, 「私の作家紹介」, 『フォトタイムス』, フォトタイムス社, 1940年2月.
14) 阿部芳文, 「美術文化展を終へて」, 『フォトタイムス』, フォトタイムス社, 1940年6月.
15) 大部六蔵, 「満洲に於ける造型写真について」, 『満洲カメラ時報』, 1940年5月1日.
파인더 속의 실험국가- 일본의 전위사진과 보도사진이 표상한 만주국 179
었을까?
도12 廣松正満 〈無題〉 1939 年
도13 村田実一 1940 年頃
본토의 전위사진가는 만주의 일상을 통해 초현실을 발견하고 영감을 얻었고 여기에는 분명 여
행이 주는 고양감과 이국취미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여행자들이 열광했던 ‘만주의 일
상’은 만주국을 생활공간으로 삼고 있던 젊은이들에게는 ‘내지’에 비해 ‘뒤떨어진 현실’에 불과했
던 듯 하다. 오히려 ‘일상’을 뛰어 넘고 뒤쳐진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첨단적 표현이야말로 ‘청
년 만주’에 부합되는 방법으로 생각되었다. 하얼빈에서 활동했던 사진가 오부 로쿠조(大部六蔵)는
자신들의 사명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아직 젊은 제너레이션인 우리 만주국은 일본보다 청년의 창조적 정신이 제일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청년의 창조적 정신이라 함은 모든 방면에서 새로운 형식을 통해 신국가에 어울
리는 새로움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16)
180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이렇듯 만주 지역의 젊은 사진가들은 표현 방법의 새로움을 예술적 신세대의 국가의식과 연결
하려는 지향을 보였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새로움과 첨단을 지칭할 때 사용한 용어이다. 자신
들의 사진론을 문답형식으로 쓴 기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언급이 보인다.
“전위적이란 어떤 것일까?”
“글자 그대로지. 가장 첨단적인 것, 가장 새로운 것. 다만 오해해서는 안 되는데 결코 마르
크시즘이 창창할 무렵의 사회적 투쟁집단의 첨단을 뜻하는 건 아니다.”17)
“(전위라는 말이; 인용자) 특별한 미련을 둘 글귀는 아니라는 점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기에
깨끗하게 버리고 지금 사용하는 ‘사진조형’이라는 말로 바꾸게 된 것이다.18)
<다롄사진조형연구회>, <하얼빈사진조형연구회> 등의 단체명과 잡지기고문에서 알 수 있듯 이
들은 ‘전위’보다 ‘조형’이라는 말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좌익적인 뉘앙스를 내포한 ‘전위’라는
말을 피해 의도적으로 ‘조형’을 선택한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본토인 일본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전쟁이 격화되고 사상통제가 강화되자 서양화단에서는 추상과 초현실주의 경향을 지향했던 <자
유미술가협회>가 1940년 ‘자유’라는 말을 버리고 <미술창작가협회>로 개칭했고. 1941년 4월 15
일에는 초현실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공모 관계로 의심받았던 다키구치 슈조와 화가 후쿠자와
이치로(福沢一郎)가 검거되었다. 만주국 사진가들이 ‘조형이라는 말을 선택한 것도 정치적 전위의
혐의가 자신들에게 미치게 될 상황을 피하고자 한 의도가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오부 로쿠조
는 “초현실이니 앱스트랙트니 운운하는 좌익적 맛을 지닌 불건전 분자는 만주국에 한 발자국도
들어올 수 없다”고 말한 미술계 유력인사의 말을 인용하면서 “다행이 사진계에서도 그러한 작화
운동은 이미 지하로 숨어들었고, 그 피해 역시 경미하여 지상에서 싹트고 있는 것은 ‘조형’이라
는 용어다”라고 언급했다.19)
한편 만주의 조형사진가가 ‘새로움’에 집착했던 이유는 세대 갈등에서도 찾을 수 있다. ‘영거
제너레이션’들은 당시 빈번히 사용되던 ‘청년 만주, 젊은 만주’라는 수사와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만주사진계의 개척자로 불렸던 후치가미 하쿠요(淵上白陽, 1889~1960)와 <만주사진가협회>를 구
세대로 표현했다. 그는 1927년 만주로 이주하여 만철의 홍보잡지『만주그래프』의 사진과 편집을
16) 大部六蔵, 「満洲に於ける造型写真について」, 『満洲カメラ時報』, 1940年5月1日.
17) 毛利風, 「前衛写真問答(1)」, 『満洲カメラ時報』, 1940年2月1日.
18)大部六蔵, 「満洲に於ける造型写真の地位とその分布」, 『フォトタイムス』, 1940年2月.
19)大部六蔵, 「満洲に於ける造型写真の地位とその分布」, 『フォトタイムス』, 1940年2月.
파인더 속의 실험국가- 일본의 전위사진과 보도사진이 표상한 만주국 181
도14 淵上白陽 <列車驀進> 1930 年
도15 淵上白陽
<満洲国国務院弘報処発行対外宣伝ポスター>1932 年
담당하며 보도사진에 종사했지만 예술로서의 사진 작업
과 표현도 병행했던 사진가였다. 만주 시대 작업에서 드
러나는 리얼리즘과 픽토리얼리즘(회화주의 예술사진), 프
로파간다와 주관적 미의식이 상반하는 요소는 후치가미를
일본사진사에서 독특한 존재로 위치시켰다.20)(도14,15)
젊은 세대에 맞서 후치가미는 가장 만주 사진계에서 위험
한 환경이 ‘쉬르리얼리슴과 추상적인 경향’이며 전위사진
을 ‘말초신경의 유희적 지배의 노예적 작품’이라고 강하게
비판하면서 이에 대항하는 ‘현실이 가져다 주는 박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21)
만주사진계의 세대 문제는 ‘어두운 사진’과 ‘밝은 사진’
도16 政徳信義 〈路上静物〉 1937年
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당시의 평문에서도 엿볼 수 있다. 아베 요시후미가 『포토타임스』에 소개하
기도 했던 신세대 사진가 오부 로쿠조는 ‘흑백의 계조(階調, gradation)만을 내세워 빛이 닿는
20)본 발표에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후치가미 하쿠요에 관한 연구는 ‘만주사진’과 관련하여 가장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먼저 예술사진에서 신흥사진으로 이어지는 교량 역할을 했던 일본 시대의 작품활동에 대해서는 『構成派の
時代』(名古屋市美術館. 1992年)를, 만주국 시대의 작업에 대해서는 『異郷のモダニズム :淵上白陽と満州写真作家
協会』(名古屋市美術館, 1994年)의 전시도록을 참조할 수 있다. 이밖에 후치가미의 전체상을 다룬 연구로는 飯沢
耕太郎, 「「芸術写真」の理想郷-淵上白陽と満洲の写真家たち」, 『日本の写真家 6 淵上白陽と満洲写真作家協会』,
岩波書店, 1998가 있다.
21) 淵上白陽, 「満洲写真作家協会」, 『フォトタイムス』, 1940年2月.
182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부분을 강조하기 위해 다른 쪽은 한층 어둡게 표현하는 수법’을 ‘어두운 사진’이라 칭하며(도16)
“예술지상주의자이며 만주 사진계의 선배격인 만주사진가협회의 멤버가 이 파의 정통”이라고 지
적했다. 한편 ‘밝은 사진’에 대해서는 “오늘날 세계 사진의 주체가 된 작풍, 즉 첨예한 렌즈, 우
수한 유제, 명쾌한 인화지를 사용하여 사진의 묘사성을 구사하는 경향”이라고 구분했다. 즉 만주
사진가협회의 작품을 과거 시대의 예술사진으로, 자신들을 새로운 사진으로 자리매김하려는 의식
이 드러난다. 하지만 오부는 ‘밝은 사진’을 취미적이며 깊이가 없다고 평가하면서 단점으로서 만
주의 특이성에 대한 연구 부족과 지도자의 결여를 지적한다. 전위적이고 첨단적인 기법을 구사하
면서도 만주의 독자성, 특이성에 대한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부족함을 자각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는 표현상의 전위성과, 국가건설을 위한 혁신 요구가 결부되지 않는 모순이 드러난다. 후
배 세대의 도전에 대해 후치가미는 자신들의 사진이 “찰나적이고 경묘한 근대의 감각적인 매력
은 부족하지만 어둡다기보다 중후함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22) 예술지상주의, 즉 예술사진의
잔재가 있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자신의 사진을 ‘사실주의의 무기력에서 일약 예술적 흥분을 주는
향상을 보여준 인상파와 동일한 목표에 이른 것’으로 보았다. 국가주의적 담론에 강하게 공명하
여 선전 사진을 담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예술적 흥분에 강하게 끌렸던 후치가미 또한 모순성에
서는 젊은 사진가들과 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세대 간의 갈등은 전위사진 진영뿐만은 아니었다. 예술사진의 영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만철 공
보부에 소속되어 국가에 유용한 보도사진을 제작했던 후치가미 하쿠요와 <만주사진가협회>는 본
토에서 온 보도사진가들로부터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베 요시후미와 함께 만주를
방문했던 보도사진가 와타나베 쓰토무는 이들의 사진이 보도사진으로서 애매하면서 미숙하다고
비판하며 발전도상에 있는 만주국의 상황을 본국에 보다 명쾌하게 전달할 방법을 요구했다. 다음
으로는 보도사진 진영이 만주국을 다루었던 방식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3. 보도사진가의 만주국
존재 자체가 거대한 국책이었던 만주국은 보도사진의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소재였다. 만주를
촬영한 보도사진은 일본 국내에는 ‘대동아공영권’의 모델을, 해외에는 ‘독립국가로서의 만주국’을
주장하기에 효과적이었다. 와타나베 쓰토무는 기후현 출신의 사진평론가로 전후에는 다수의 이론
서와 기법서를 펴냈지만 전쟁기에는 보도사진가로서 활동했다. 그는 9개월간의 만주출장 후 기고
22) 淵上白陽, 「満洲写真作家協会」, 『フォトタイムス』, 1940年2月.
파인더 속의 실험국가- 일본의 전위사진과 보도사진이 표상한 만주국 183
한 여행기에서 만주를 촬영지로서 선택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대륙이라고 말해도 왜 지나를 선택하지 않고 만주로 여행하기로 계획했는지는 그만큼 이유가
있었다(중략) 오히려 사변이 종료되고 새로운 왕도국가를 세워 이미 평화의 전쟁으로 접어들
어 신동아 건설의 구축하려는 만주국의 움직임에 무척 흥미가 일어 전선 이상으로 매우 중요
한 테마라고 믿었기 때문이다.23)
‘왕도국가’, ‘신동아 건설’ 등의 말에서 알 수 있듯 와타나베의 목적이 만주국의 선전에 있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같은 글에서 와타나베는 중국전선에 파견된 많은 사진가가 “전쟁과
같은 이상한 분위기에서 뉴스 카메라맨으로서가 아니라 보도사진가가 어느 정도의 작품을 만들
어 낼 수 있는가?”에 대해 자신이 없다고 강조했다. 즉 와타나베는 자극적인 전장을 촬영하고 승
리를 전해 전의를 고양하는 것을 넘어서는 보도사진가로서의 독자적인 입장을 모색하고 있었다.
여기서 신문에 사용된 단순한 뉴스사진과 보도사진이 구별되는 특수성이 드러난다. 후술하겠지만
보도사진이란 독일에서 활동하던 나토리 요노스케(名取洋之介, 1910~62)가 일본에 들여온 ‘르포
르타주 포토’를 1934년 무렵 평론가 이나 노부오(伊奈信男, 1898-1978)가 번역하며 성립한 개
념으로 나름의 미학과 체계적인 방법론을 갖추고 있었다.
만주국에서 와타나베가 특히 주목했던 것은 수도 신경과 소련 국경 인접지역의 개척민이었다.
동행했던 아베 요시후미가 신경에서 제작 의욕을 잃고 하얼빈에 관심을 가졌다면 와타나베에게
하얼빈은 신경과 같은 ‘현실의 공리적인 정치 움직임’이 없었기 때문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 장소
였다. 신경과 개척민 마을은 명백한 국책의 현장이었지만 신경은 살풍경하기까지 한 정치도시이
며, 개척지 역시 실제로는 낙토와는 거리가 있었다. 와타나베는 “개척지의 농법이 잘못되어 있으
면 잘못된 것으로서 표현했다. 위생 설비가 나쁘다면 그것을 어떻게 사진상에 표현할 수 있을까
를 염두에 두었다”24)고 하여 단순히 국책 찬미를 위한 사진을 촬영하지 않았음을 밝혔다.
아베가 만주의 전위(조형)사진가와 교류했듯 와타나베도 만주국정부의 홍보기관에서 활동하고
있던 보도사진가들을 내지에 소개하고 만주의 사진 저널리즘에 대한 비평활동을 펼쳤다. 중앙의
보도사진가로서 지도적 위치에 있었던 와타나베에게 만주의 보도사진은 그다지 높은 수준으로
여겨지지 않았던 듯 하다. 그렇다면 와타나베가 만주에서 실현하고자 했던 ‘바른’ 보도사진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23)渡邊勉, 「大陸カメラ旅行記二題 轉戦九ヶ月を顧みて(1)」, 『フォトタイムス』, 1940年3月. 24)「大陸現地報告座談会」, 『フォトタイムス』, 1940年3月.
184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와타나베는『포토타임스』1940년 1월호에 <신경 보도사진의 신인소개>라는 기사를 작성하며 만주
국 국무원 홍보처 소속의 젊은 사진가를 2~3점의 작품과 함께 소개했다.25) 그들의 도만 이전의
경력, 성격과 인상, 가족관계에 이르는 내용에서 꽤 깊은 교류가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와타나베는 그들의 기술적인 숙련도, 완성도는 인정하면서도 테마와 제작 태도에 회의적
인 의견을 표한다. 즉 열하의 라마교 사
원, 펑톈(심양)의 북릉, 동릉 등 만주의
문화유적을 주요 테마로 삼은 작품(도
17)에 대해 보도사진가로서의 맹렬한 의
식이 부족하다고 평하고, 국경의 개척지
의 자연과 개척민의 생활을 다뤘다 하
더라도 풍경화를 연상시키는 로맨틱한
감각의 표현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도
18). 반면 자신이 찍은 개척지 사진 해
설에는 “민족협화의 현실에 땅과 싸우
도17 加持正範 〈紅湾(熱河)〉 1940年
는 개척민의 모습은 지금까지 보도되어
온 목가적인 풍경만은 아니었다. 건설의
고투를 이어가는 그들의 생활을 보도할 때 대부분 들판에서 일하는 풍경만으로 일관하고 있다”
라고 말하며 만주의 로맨틱한 서정 표현을 지향하는 보도사진가들을 비판했다.
도18 喜入隆 〈青少年訓練所〉 1940 年頃
25)渡邊勉, 「新京報道写真の新人紹介」, 『フォトタイムス』, 1940年1月; 이 기사는 만주국 국무원 홍보처 소속의 佐
藤一, 加持正範와 만주 유일의 국책 사진잡지인 『개척화보』의 喜入隆 등 젊은 사진가에 대해 다루었다.
파인더 속의 실험국가- 일본의 전위사진과 보도사진이 표상한 만주국 185
주제 선택과 제작 태도에 대한 비판은 젊은 사진가들에게 한정되지 않아서 후치가미 하쿠요가
이끄는 <만주사진가협회>가 담당한『만주그래프』는 더욱 표적이 되었다.『만주그래프』는 만주국 정
부의 공식 보도잡지가 아니라 만철 공보과가 발행했지만 와타나베는 만철이 민간이 운영하는 회
사에 머물지 말고 만주국의 경제와 문화의 추진력이 되어 단순한 만주관광의 선전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로맨티시즘과 프로파간다가 혼재했던 <만주사진작가협회>의 애매한 태도는
내지에서 파견된 보도사진가에게 “도저히 같은 작가의 작품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두 개의 인격
과 개성이 보여 실로 지킬과 하이드의 양면”26)이었다. <개척지의 생활>이라는 와타나베의 사진
은 극적인 카메라 앵글이라기보다 개척민의 일상적인 생활풍경에 짧은 설명문을 덧붙여 담담한
표현이 눈에 띈다.(도19)
도19 渡邊勉 <開拓地の生活> 1939 年頃
26)渡邊勉, 「満洲の弘報機関と報道写真」, 『フォトタイムス』, 1940年1月.
186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텍스트와 사진의 결합을 강조한 보도사진의 형식에 관해서는 후술하겠지만 그가 보도사진의
태도로서 가장 중시했던 것은 ‘인간의 생활과 감정’의 표현이었다. 좌담회의 발언과 여행기에서
“외관이 아닌 생활이 있는 만주를 촬영했다. 단지 사진가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도
인생 공부가 되었다.”27), “이 여행을 통해 인간으로서 새로운 자기를 쌓게 되었다.”28)라는 취지
의 언급을 반복한 것도 이러한 의식의 반영일 것이다.
와타나베가 추구했고 만주에도 전파하고자 했던 보도사진의 방법론은 무엇이었을까? 보도사
진의 방법을 둘러싸고 내지와 만주 재주 일본인 사진가 사이의 갈등을 보여주는 와타나베의 다
음 언급에 주목해보자.
“좌담회에서 (어느 만주 지역 사진가가-옮긴이) “내지의 모 보도사진가가 보도사진
을 한 장 한 장 액자에 넣어 관람하는 방법은 이미 낡았다, 보도사진은 조사진(組寫
眞; 두 장 이상을 조합하여 구성한 사진)에 의한 다양한 레이아웃 기술의 협력을 통
해 관람해야만 하는 것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나는 이러한 난폭한 이론을 내지의 사진
가로부터 들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운운했다. 오히려 나는 신경의 작가협회 회원의
이런 난폭한 견해에 아연했다. 보도사진가가 레이아웃에 신경을 써야 할 필요가 있고
몽타주의 방법 등에 의해 보다 훌륭하고 올바른 호소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정도의 이
야기는 요즘의 상식이다.”29)
위의 문장은 또한 와타나베는 앞서 서술한 신인보도사진가를 평가하는 글에서도 “한 장 한 장
작품 속에는 꽤 재미있는 것이 있었지만, 전체로서는 보도의 의도가 선명치 않게 끝났다”30)라고
말해 촬영뿐만 아니라 종합적인 구성과 편집 능력을 강조하면서 『만주그래프』에 대해서는 “레이
아웃은 사진보다 한층 졸렬’하며 “때로는 모든 사진을 죽여버릴 정도가 되고 있으며, 몇 매인가
조합한 사진에서 하나의 테마를 말하고자 하는 것도 어떤 연결된 이야기로 발전이 없는 경우가
무척 많다”라고 한층 과격하게 비판했다.31)
와타나베가 제시한 ‘바르고 새로운’ 보도사진의 방법, 요컨대 레이아웃과 조사진의 기원은 일
27)「大陸現地報告座談会」, 『フォトタイムス』, 1940年3月.
28)渡邊勉, 「大陸カメラ旅行記二題 轉戦九ヶ月を顧みて(1)」, 『フォトタイムス』, 1939年3月.
29)渡邊勉, 「満洲の弘報機関と報道写真」, 『フォトタイムス』, 1940年2月.
30)渡邊勉, 「新京報道写真の新人紹介 佐藤一君(2)」, 『フォトタイムス』, 1940年1月.
31)渡邊勉, 「満洲の弘報活動に現れた写真宣伝物批判」, 『フォトタイムス』, 1940年2月.
파인더 속의 실험국가- 일본의 전위사진과 보도사진이 표상한 만주국 187
본사진사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보도사진이 단순한 기록과 뉴스사진(신문사진)에서 한 발 나아
가 사진 미학 속에 편입될 수 있었던 이유는 전술했던 신흥사진 운동의 성과, 혹은 그 연장선상
에 위치하기 때문이었다. 신흥사진은 회화를 모방하여 개인의 표현을 중시한 예술사진과 결별하
고 카메라와 렌즈라는 ‘기계의 눈’이 만들어내는 ‘현실사진(리얼 포토)’를 목표했다. 신흥사진의
대표적인 예로 호리노 마사오(堀野正雄, 1907-1998)의 사진집『카메라·눈×철·구성(カメラ・眼×
鉄・構成)』(1931)과 이나 노부오의 논문「사진으로 돌아가라」를 들 수 있다. 호리노는 철교, 기관
차, 여객선이라는 기계적 건조물을 피사체로 삼아 카메라가 가진 기계성을 추구했고 그래프 몽타
주의 실험에도 착수했다. 그래프 몽타주란 어떤 주제를 촬영한 일련의 사진을 하나의 문맥에 따
라 인쇄물로서 구성하는 기법으로 보도사진의 ‘조사진’으로 이어졌다. 이나 노부오의「사진으로
돌아가라」32)는 예술사진과의 절연, 기성예술 개념의 파기, 우상 파괴, 그리고 사진이 가진 독자
적인 기계성을 인식할 것을 촉구했다. 또한 사진의 중요한 특성을 빛에 의한 조형으로 파악하여
이후 전위사진의 포토그램과 포토몽타주로 전개되는 발판을 마련했다. 동시에 이나 노부오가 중
시했던 것은 ‘시대의 기록, 생활의 보고’의 의의를 지닌 사진예술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아래 나
토리 요노스케가 중심이 되어 1933년 해외를 대상으로 한 사진 저널 회사 <니혼코보(日本工房)>
를 결성했다. 나토리는 조사진, 즉 일상적인 테마에 착목하여 복수의 사진을 조합하여 하나의 스
토리(문맥)으로 재구성하는 방법을 공식적인 방법론으로 채택했다. 따라서 포토 스토리를 정리하
는 방법, 즉 레이아웃과 편집작업이 보도사진에서 무엇보다 중시되었다. 이는 와타나베가 만주에
전파하고자 했던 방법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니혼코보>에는 나토리를 중심으로 이나 노부오, 기무라 이헤이(木村伊兵衛, 1910~74), 영화
프로듀서 겸 배우 오카다 소조(岡田桑三, 1903~83), 디자이너 하라 히로무(原弘, 1903~86)가 참
가했지만 설립 이듬해인 1934년에 해산한다. 패전후 와타나베는 해산의 이유를 ‘새로운 사진에
대한 이념을 달리했기 때문이라고 회상했지만 그들이 보도사진의 기본적 입장을 공유했다는 점
은 틀림없다. 해산 후 나토리는 <제2차 니혼코보>를, 오카다, 기무라, 하라는 대외선전 회사 <도
호샤(東方社)>를 설립하여 각각 해외 발신용 보도 사진잡지 『NIPPON』과 『FRONT』를 발행했다.
이들 잡지는 모두 만주특집호를 기획하는 등 보도사진의 대상으로서 만주국에 주목했다.(도20,21)
조사진이라는 기본적 방법론에서는 의견을 같이 했지만 와타나베 등 국내에 통용되는 보도사진
과 대외적으로 배포된 선전잡지는 또 다른 성격을 갖고 있었다.
32)伊奈信男, 「写真に帰れ」, 『光画』 創刊号, 1932年
188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도20『NIPPON』第19 号(満洲国号)表紙
1939 年
도21『FRONT』第5-6 号(満洲国建設号)
表紙 1943 年
4. 대외용 그래프 잡지의 만주 표상
전전과 전후에 걸쳐 활동한 일본을 대표하는 사진가 기무
라 이헤이는 보도사진으로 자신의 경력을 시작했다. 특히
소형 카메라로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스냅으로 찍은 사진으
로 ‘라이카의 명수’라고 불렸다. 그가 일약 주목을 받은 것
은 1933년 12월 니혼코보가 주최한 <라이카에 의한 문예가
초상사진전>에 출품한 작품 때문이었다. 이는 단순한 초상
사진이라기보다 시대 속에 살아가는 인간의 내면까지 잡아
내고자 한다는 기무라의 보도사진관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도22) 이후 기무라는 “단순한 초상사진과 달랐던 점은 보도
도22 木村伊兵衛 〈高田保氏〉 1933年
사진적 요소가 부가되어 있다는 점이다. 어떤 사람인지 알
파인더 속의 실험국가- 일본의 전위사진과 보도사진이 표상한 만주국 189
려주는 경우에는 찍힌 사람의 성격과 감정의 움직임까지 확실히 잡아내지 않으면 사실을 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33) 인간의 일상 모습을 주위의 세부 요소까지 생생하게 표현하여
‘시대의 숨결, 생활의 숨결을 전달’34)하려고 했던 기무라의 지향점은 만주에서 촬영한 사진에도
잘 나타났다.
기무라는 1940년 5월부터 약 40일간 만주철
도총국의 의뢰로 만주에서 촬영활동을 펼쳤고
이 때 찍은 사진을 모아 사진집 『왕도낙토』
(1943)를 출판한다.(도23) 그래프 잡지가 아니라
사진집의 체재를 취했기 때문에 조사진의 특징
은 드러나지 않지만 만주의 사람들을 기무라 특
유의 따뜻한 시선으로 잡아내고 있다. 기무라는
서문에서 “건국7년,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 원칙
인 왕도정치가 뚜렷하게 펼쳐져 글자 그대로 민
족협화, 안거낙업의 모습이 곳곳에 카메라의 대
상이 되어 전개되었습니다.”라고 써서 국가선전
의 목적을 확실히 드러냈다.
수록사진에는 주민들의 평화롭고 여유로운 풍
경이 펼쳐져 제목 그대로 만주국을 미화, 선전
도23 木村伊兵衛 『王道楽土』 1943年
하는 모습이 두드러졌지만 자신의 보도사진 이
론을 구현하려는 시도도 엿보인다.(도24~26) 내면과 심리를 잡아내려는 자세와 사진에 붙어 있는
텍스트가 그렇다. 펼친 면에 사진과 함께 배치된 문장은 사진의 내용의 설명으로 보도사진의 필
수요소이기도 했다. 설명문에 덧붙여 작은 글씨로 촬영방법을 해설한 부분도 있어 백계 러시아인
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로마노프>라는 항목에서는 렌즈의 선택을 통한 효과적 표현방법을 다음
과 같이 서술해 놓았다.(도27)
인물의 클로즈업에는 장초점 렌즈가 한층 현실감을 확실히 묘사한다.연초점 렌즈 탐
발은 앞의 목적에 어울리는 한편 연조묘사의 장점이 둥근 얼굴 묘사와 피부 질감을
잘 표현해준다.35)
33)木村伊兵衛, 「私の写真生活」, 『木村伊兵衛傑作写真集』, 朝日新聞社, 1954年
34)井上裕子, 『戦時グラフ雑誌の宣伝戦 十五年戦争下の「日本」のイメージ』, 青弓社, 2009年.
190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도24 木村伊兵衛 〈渡しを待つ間(吉林)〉 1940 (『王道楽土』掲載) 도25 木村伊兵衛 〈千山〉 1940 (『王道楽土』掲載) 35)木村伊兵衛, 『木村伊兵衛傑作写真集』, アルス, 1943年.
도26 木村伊兵衛 〈奉天〉 1940 (『王道楽土』掲載) 파인더 속의 실험국가- 일본의 전위사진과 보도사진이 표상한 만주국 191
도27 木村伊兵衛 〈ロマノフカ〉 1940 (『王道楽土』掲載) 도28 木村伊兵衛 〈葛根廟〉 1940 年
192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넓은
평야에 뛰노는 양떼를 배경으로 중국인의 옆 모습을 찍은 사진에서도 “넓은 시야의 풍경
은 눈으로 본 것보다 필름에 더 잘 감광되기 때문에 촬영자가 의식한 노출을 반 정도 낮게 하면
과도노출에 의한 평범한 원판은 생기지 않는다. 적외선 필름을 사용하여 명암의 차를 약하게 하
는 특수한 표현방법도 시야가 넒은 풍경에 적용하면 효과적이다.”라며 촬영기법을 상세하게 설명
하고 있다.(도28) 또한 책 뒤쪽에는 촬영에 사용한 장비(카메라, 렌즈, 필터, 필름, 현상액 등)의
정보를 정확히 기재했다. 이 책은 아마추어 사진가를 위한 기법서와 같은 인상을 주는데 실은 그
러한 의도 역시 보도사진이 중요시했던 목적 중 하나였다. 이나 노부오는 「신체제 아래의 사진가
의 임무」라는 글에서 사진잡지와 카메라 그래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보도사진가의 역
할로서 ‘사진이론의 수립, 사진기술의 향상’과 함께 후진 양상과 아마추어에 대한 지도’를 들었
다.36) 기무라에게 사진 보급 임무는 촬영과 발표 이상으로 중요한 작업이었다. 1937년에 이미
오키나와 나하의 시장 등을 찍은 연작을 기법서 『사진실기대강좌 소형 카메라의 촬영법, 사용법』
에 수록했는데 이 역시 보도사진의 이론과 기술을 보급하려는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이 밖에도 기무라는 대외선전 사진 잡지 『FRONT』의 사진부장으로도 만주를 취재했다. 총력전
체제 아래에서는 많은 선전 잡지가 발행되었지만 그 중에서도 『FRONT』와『 NIPPON』에는 보도
사진계의 주역, 즉 당시 최고 수준의 사진가와 아트 디렉터, 지식인이 결집하여 이론실천의 장으
로 삼았다. 전술했듯 『NIPPON』은 19호(1939년10월)에 <만주특집호>를 마련하고 만주국의 정치,
국방, 역사, 문화, 자원뿐만 아니라 다른 사진 잡지는 다루지 않았던 화폐와 우표 등을 사진과
해설을 통해 소개하여 독립국으로서 발전하는 만주국의 모습을 선전했다. 매호 특집형식을 취한
『FRONT』는 제5-6호(1943년3월)을 <만주국건설호>로 발행했다. 두 잡지의 공통점으로는 구성과
편집, 레이아웃을 강조하여 질적으로 우수한 디자인,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장정과 재료를 들 수
있다. 이는 당연히 해외를 대상으로 했다는 조건에서만 가능했다. 나토리 요노스케가 주도한
『NIPPON』은 사진과 활자의 조합, 즉 조사진이 중요한 과제였기 때문에 캡션과 설명문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컸지만 『FRONT』는 사진의 보정이나 콜라주 등 화려한 시각적 효과에 주목했다. 표
현상 특징으로는 러시아 아방가르드와 독일의 바우하우스를 의식한 추상표현과 구성주의, 몽타주
와 콜라주의 빈번한 사용, 미국의 상업사진 표현의 도입, 과장된 카메라 앵글과 반복 효과 등이
다.(도29-31)37) 이러한 실험적 표현은 소련의 선전 그래프잡지 『СССР НА СТРОЙКЕ(USSR in
CONSTRUCTION; 소련의 건설)』과도 상통했다(도32). 『FRONT』를 제작했던 도호샤의 스탭 중에
는 좌익에 심정적으로 동조하거나 전향자가 모였던 이유도 있지만 ‘혁명(좌익)의 조형언어’와 ‘전
쟁(우익)의 조형언어’가 국가주의의 이름 아래 공명했던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일 것
36)伊奈信男, 「新体制下に於ける写真家の任務」, 『カメラアート』, カメラアート社, 1940年3月号
37)柏木博, 「モダンなグラフィズムの捻れと合理」『FRONT』(復刻版)第1巻 平凡社 1989, 飯沢耕太郎, 「写真史のな
かの『FRONT』」 『FRONT』(復刻版)第1巻, 平凡社, 1989年.
파인더 속의 실험국가- 일본의 전위사진과 보도사진이 표상한 만주국 193
이다. 만주국은 특히 『FRONT』가 강조했던 생산과 건설의 역동적인 시각효과에 잘 들어맞는 장
소였을지도 모른다.
도29
『FRONT』 第5-6号(満洲建国号) 1943年
194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도30 『FRONT』 第5-6号(満洲建国号) 1943年
도31 『FRONT』 第5-6号(満洲建国号) 1943年
파인더 속의 실험국가- 일본의 전위사진과 보도사진이 표상한 만주국 195
도32 『USSR in CONSTRUCTION』1934 年11 月
4. 나가며
‘신천지’의 이미지가 넘쳐났던 만주국은 제국 일본의 지식인, 문학예술가 등에게 저마다의 유
토피아적 기획과 자유로운 실험을 가능케 했던 공간이었다. 일본 모더니즘 건축의 기수였던 사카
쿠라 준조(坂倉準三, 1901~69)는 전쟁기에 만주국의 도시계획에 관여하면서 수도 신경이 책상
위가 아니라 실제로 시험과 검토가 가능했기에 생생한 실험실과 같았다는 언급을 남겼다.38) 만
주의 광활한 공간은 처음부터 새로 시작할 수 있는 ‘백지상태(tabula rasa)’로 여겨졌음이 틀림
없다. 정치적으로는 문제가 있었을지라도 전위적 건축가에게는 전시 통제하의 일본에서 불가능했
던 계획을 실험할 수 있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건축가들이 ‘버추얼 국가(도시)로서의 만주국’을
구상했다면, 사진가들은 ‘파인더 속의 실험국가’를 꿈꿨다. 본 발표에서는 만주국을 둘러싼 (재만
일본인 사진계를 포함한) 일본사진계의 상황을 살펴보면서 그 근저에 공통하는 개념으로 ‘전위’
와 ‘실험’을 적용해 보았다. 이와 관련하여 근년 제기된 ‘지정학적 전위’로서의 만주국을 위치 지
38)越澤明,『満州国の首都計画』, ちくま学芸文庫, 2002年
196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으려는 관점은 흥미로운 분석틀을 제공한다. 나미가타 쓰요시(波潟剛)에 따르면 만주국은 서구와
맞서기 위한 전쟁에서 일본이라는 본국, 즉 본대에 앞선 최전선의 ‘선도부대(아방가르드)’로 존재
했다.39) 만주국을 기존에 존재했던 예술적 전위와 정치적 전위가 자신의 뜻을 펼칠 공간으로 상
정한다면 만주에 대한 사진계의 반응 역시 여기에 대응 가능하다. 먼저 예술적 전위의 입장은 출
장을 떠난 내지의 전위사진가와 재만일본인 ‘조형’사진가를 들 수 있다. 이들은 미묘한 입장 차
이가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상 속의 초현실’을 전파하거나 신국가에 걸맞은 ‘첨단적 표현’을
실험하고 적용할 공간으로 만주를 바라봤다. 마르크시즘(좌익사상)이 전유했던 정치적 전위가 소
멸된 전쟁기에는 국가주의와 파시즘이 그 의미를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다. 보도사진가들은 ‘조
국의 제1선’이었던 만주국으로 나서 최전선의 정보를 본대(일본의 국민)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자
임했다. 또한 보도사진가에게서도 정치적 선전과 전달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추구했던 사진이론과
기법-조사진,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첨단표현, 아마추어 사진가 육성 등-을 전파하려는 장소였다
는 점에서는 사진계가 바라본 만주는 예술적 전위와 정치적 전위의 목적을 선명히 구분하기 힘
든 착종된 실험 공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39)波潟剛,『越境のアヴァンギャルド』,NTT出版,2005年
파인더 속의 실험국가- 일본의 전위사진과 보도사진이 표상한 만주국 197
ファインダーの中の実験国家
―日本近代写真と満洲国
崔在爀 (チェ・ジェヒョク)
誠信女子大学校
< 目 次 >
1. はじめに 2.前衛写真の満洲認識
3.報道写真家が捉えた満洲
4. 木村伊兵衛や海外向けグラフ雑誌の満洲表現
5.終わりに
1.はじめに
写真は、帝国の植民地表象の最も代表的なメディアであった。「見る者(撮影者)」と「見られる者(被写
体)」の間の力関係が、カメラを通して直接的に作用するからであり、その典型例が、オリエンタリズムの視
線である。植民地の女性や風俗を対象に、エキゾティシズムが投影された写真には、見る者と見られる
者の不均衡な力関係が端的に現れている。写真の記録性を通して、帝国主義の支配戦略が現れる場合
もあった。人類学や民俗学、古蹟調査などで撮影された写真は、差別意識がなくても、植民地支配に
必須の「知の構築」に寄与するアーカイブとして機能した。一方、記録性のもうひとつの分野である報道
写真も、帝国支配の正当化に積極的に活用された。
そうした国家プロパガンダの先兵の役割を果たした写真が、最も活用された場が、「王道楽土の理想
198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郷」「大陸進出の生命線」といったレトリックで美化、宣伝された満洲国であった。満洲国と関連する写真
活動だが、そこにはオリエンタリズムの差別的視線、アーカイブとしての記録性、宣伝工作としての報道
など、様々な要素が全て関与していた。しかし、そこには一方向的な植民地支配戦略だけでは十分に説
明できない多元的な視線が交錯していた。第一に、カメラを持つ主体の錯綜である。これは、満洲国の
視覚イメージ生産者の立場と認識を考えるうえで、重要な視座を提供する。「居住者」と「訪問者」では、
同じ満洲でも「生活空間」と「旅行地」という場の違いがあり、同じ訪問者でも、報道写真と前衛写真では
アプローチが異なった。また同じ「居住者」でも、旧世代と新世代の写真には葛藤が存在し、それぞれに
異なる満洲国が写真に写し込まれたのである。第二に、満洲国は、日本の近代写真の主要な流れが凝
縮して展開した、縮図ともいうべき場だったことである。芸術写真、新興写真、前衛写真、報道写真など
が同時代の満洲国に集結しており、その状況を考察することで、満洲国が写真の巨大な実験場となって
いた実態を提示出来るだろう。
『フォトタイムス』1940年3月号には、「大陸現地報告座談会」という記事が掲載されている。出席者は、
1938年満洲に取材旅行した報道写真家の渡邊勉、前衛写真家・阿部芳文をはじめ、「報道写真」「前衛
写真」の両陣営の関係者だった1)。渡邊と阿部にとって、満洲国は魅力的な撮影地のみならず、自らの
写真論を表明・適用しうる場所でもあった。彼らは満洲国に指導的立場に立って在満日本人写真家と交
流し、満洲写壇の状況を「内地」に紹介した。 本発表では、彼らの活動を糸口にカメラを持った主体の
錯綜や競合に焦点を当てて、帝国の文化権力としての写真イメージを検討したい。
2.前衛写真の満洲認識
報道写真と前衛写真は、ともに1930年頃の新興写真にルーツをもつが、前者は社会性、後者は個人
の主観性を基盤とする正反対の志向を持っていた。阿部の次の発言は、満洲での両者の活動にも、関
心と立場の相違があったことを示している。
(渡邊君が―筆者)
哈爾濱(ハルビン)は文化の脱殻のやうで、制作欲をおこさなかつたと言つたと同じく、
私は全然新京で制作欲を失つた。新京は一つの政治的な意志はあるけれども、其処には何等吾々が取組む
だけの事柄が起つて居ないといふ感じです。2)
1) 「大陸現地報告座談会」『フォトタイムス』フォトタイムス社 1938年11月。内閣情報部・林謙一、同盟写真部・
内山林之助、写真造型研究会・瀧口修造、名古屋写真文化協会・坂田稔が出席した。
2) 「大陸現地報告座談会」『フォトタイムス』フォトタイムス社 1938年11月
파인더 속의 실험국가- 일본의 전위사진과 보도사진이 표상한 만주국 199
阿部にとっての首都・新京はたんなる政治的空間であり、制作意欲を掻き立てる場所ではなかったのに
対して、国策宣伝が主要目的の報道写真陣営の渡邊勉は、新京を取材対象として重要視したようであ
る。では、前衛を自認した阿部が、満洲という空間で写真に込めようとしたのは何だったのか。
阿部芳文(展也、1913~71)は、独立美術協会や創紀美術協会など、在野団体に参加したシュルレア
リスムの画家であり、瀧口修造の詩集『妖精の距離』の挿絵を担当したことでも知られる。1938年、瀧口と
共に前衛写真協会創立に参加して以降、作画活動と並行して写真に取り組むようになった。
当時の前衛写真は、シュルレアリスム写真とアブストラクト写真に分類され、通時的には新興写真の延
長上、共時的には前衛絵画との相互関係の中にあった3)。具体的には、フォトグラムによる抽象イメージ
の生産、フォトモンタージュによるイメージの重りなどは、新興写真に淵源し、前衛写真はその方法論を
用いて、夢と無意識、抽象的造形を全面に打ち出したのであった。そうした傾向は、当時関西を中心に
活動した浪華写真倶楽部や丹平写真倶楽部のシュルレアリスム写真によく現れている。坂田稔の「危
機」、花和銀吾の「複雑な想像」などは、フォトモンタージュ、コラージュ,
フォトグラムに加え、多重露
出、ソラリゼーションによるイメージの歪曲、着色など、多彩な技法を駆使した作品である。
ところが阿部自身は、こうしたシュルレアリスム写真に対して否定的な態度を取っていた。
シュールレアリスムの、オブジェや夢のメカニズム、幻想などの意味を単に奇怪な幻想とかグロテスクなもの
のアンサンブルと云った風な方向ばかりでなしに、私達の日常的なものの中での発見にもその可能な方向を
考へることが出来る4)。
例えば、平井輝七の「月の夢想」が、人体の部位をコラージュし、目玉がのぞく幻想世界を構築してい
るのに対して、阿部の「夜の眼」の目玉は、眼鏡屋の看板に違和感なく納まっている。阿部は、平井のよ
うな極端な人為的操作をすることなく、夜の奇怪さを表している。
阿部のこの写真論に強い影響を与えたのは、瀧口修造であり、瀧口はいかなる技法や操作も加えない
ストレートフォト、つまり写真本来の機能である記録性に依拠した前衛写真の可能性を、一貫して主張し
た。
シュルレアリスム的な写真もストレート・フォトで可能であり、むしろ現実の中に把握された「超現実性」はもつ
3) 西村智弘『日本芸術写真史 : 浮世絵からデジカメまで』美学出版 2008年
4) 阿部芳文「前衛的な方面への一考察」『フォトタイムス』フォトタイムス社 1938年7月
200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とも強く吾々を打つものである。(中略)それは結局、この記録性を念頭に置いて言つたのであつて、シュルレ
アリスム的な作品が、ただ被写体を奇妙に否曲したり構成したりすることだけでは達せられないといふことを暗
示したつもりである5)。
1938年に前衛写真協会(1939年造型写真研究会と改称)を組織し、東京のシュールレアリスムを主導
していた瀧口のこのような意見は、関西の作家達の作為的制作への批判と対抗と見ることもできよう。
瀧口は、写真のポイントは、常に対象をどのように認識するかという問題設定にあると考え、「シュルレ
アリスム写真もアブストラクトの写真も、結局それぞれから対象の発見と解釈にほかならない」6)とした。北
澤憲昭氏が指摘するように、瀧口にとってシュルレアリスムは、リアルなものに向かう通路であると同時
に、リアリズムと相互に補完するものであり、決してそれに背反するものではなかったのである7)。
『フォトタイムス』1940年2月号に掲載された阿部の写真「大陸の足」、「二つの風景」、「奇妙な調和」
は、それぞれ2枚で1セットの作品である。被写体としては、特急あじあ号と馬車、北京の天主教化堂・奉
天の国立博物館、京劇衣装の中国人とロシア移民など、新旧、東西を対比した二種類の被写体を並置
している。これらは前衛写真家の作品ながら、一見、たんに満洲風物を撮ったもののようにも見え、古典
的形式からの飛躍を示すとは言い難い。むしろ前述の瀧口修造の理論に沿った、日常と生活を記録する
ように撮られたものに見える。これが同行した報道写真家と衝突しなかった理由でもあった。阿部は、自
身の作品について次のように言及している。
「奇妙な調和」と書かれて頁等は土地の距離、時間的問題の点から非常に唐突な組み合わせですが、私と
しては、直感的な意味でですが、大陸で屢屢ぶつかって不思議に感じた、白系露人と支那人のプライドと生
活が奇妙に同存してゆく有様をと心に浮かべて組んだものでした。(中略)「大陸の足」は御覧の様にアジアの
機関車の頭と、内地のタクシーとでも云へる馬車が休んでゐるところで、これは流線型の機関車である近代的
な馬力の代表と、肉と骨とから生まれる生物の馬力と。(中略)「二つの背景」一つは北京天主教化堂のゴシッ
ク風の礼拝堂とその前に有る支那人が造った獅子のスタイルの両方の不思議な位置を、いま一枚は奉天の博
物館の前庭に有った獅子、此の二枚いづれもヨーロッパの窓が開いてゐる大陸の都会点描(後略)8)。
ここからも分かるように、阿部の写真はストレートフォトでありながら、現実そのものの再現ではなく、あり
5) 瀧口修造「前衛写真試論」『フォトタイムス』フォトタイムス社 1938年11月
6) 瀧口修造「植物の記録」『フォトタイムス』フォトタイムス社 1939年1月
7) 北澤憲昭「危機のリアリズム―シュルリアリズムと抽象」『美術手帖』2005年7月 119頁
8) 阿部芳文「阿部芳文の頁」『フォトタイムス』フォトタイムス社 1940年2月
파인더 속의 실험국가- 일본의 전위사진과 보도사진이 표상한 만주국 201
ふれた日常にのぞく突発的なイメージを、世界から「切り取って」並置、対照させている。これはシュルレ
アリスム理論でしばしば言及されるロートレアモンの「解剖台の上でのミシンとこうもりがさの不意の出会
い」、つまりデペイズマンの効果を連想させる。それが阿部の作品では、異なる場所の異質・同質のモ
チーフを、写真家が対比・並置させたセット構成になっているのである。阿部にとっての満洲は、「超現
実」を「発見」できる空間だったと言えるのではないだろうか。
日常のなかに超現実を発見する表現意識は、中国と満洲を旅行した他の写真家達にも現れた。その
代表例が、小石清であり、浪華写真倶楽部を中心に活動した小石は、当時流行したフォトグラム、多重
露出など、革新的な技法を駆使した写真集『初夏神経』(1933年)で注目を集めた。また前衛写真の技法
を集大成した解説書『撮影・作画の新技法』(1936年)を上梓した、前衛写真の代表者であった。しかし小
石清は1938年、海軍省嘱託として内閣情報部発行『写真週報』の写真を担当し、報道写真家に転向す
る。そして中国大陸で取材した作品のうち、公務以外で撮影した写真を集め、「半世界」(1940年)という
シリーズに再構成した。このシリーズ作品は、小石の「時代が要請する社会性と芸術家としての自立性」
の葛藤から生まれた作品であり9)、「職業人としての立場と芸術家としての立場」10)が交錯した作品だっ
た。実際、このシリーズは、それまでの先端的技法と自意識が薄まり、モンタージュなど最低限度の加工
を施したストレートフォトで、現実のなかに存在する中国の姿を捉えている。「抜穀の挙動」、「肥大した敗
戦記念物」といった暗示的タイトルで、どこか超現実的で不気味さを漂わせる小石の写真には、日常の中
の現実と超現実が交錯している。阿部芳文も、ある座談会で「半世界」シリーズについて小石の話を聞
き、「自身も中国や満洲、蒙彊に行った時、大体こんなコンポジションを制作し、それを見てオヤオヤと
思った」と、共感している。
阿部芳文の満洲出張でのもうひとつの注目事項は、満洲写真界との交流活動である。阿部は滞在期
間中、満洲写真作家協会を結成した満洲写真界の重鎮・淵上白陽だけでなく、満洲唯一の写真新聞
『満洲カメラ時報』の発行者・青山春路、そして若い前衛写真家達と、23回もの座談会を開いたという。
阿部はその中で大連写真造型研究会の存在を日本、朝鮮、満洲全地域に知らしめるため、廣松正満、
平野義昌らの作品を『フォトタイムス』誌上に紹介している。
此活発な満洲写壇のヤンガーゼネレーションの選手達はどんなしてゐるでせうか、満洲紹介と云へば、き
9) 中島徳博「小石清と浪華写真倶楽部」展(西武百貨店池袋店・ザ・コンテンポラリー・アートギャラリー) 1988年
10) 藤村里美「夢に楽土を求めたり 前衛写真家と報道写真の挟間で」『近代の東アジアイメージ―日本近代美術はどうア
ジアを描いてきたか』展図録 豊田市美術館 2009年
202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まつた様に苦力の顔、夕陽の斜めな城壁と云つた表面的な色彩に塗りつぶされる習慣に対する抗議の意味
を含めて大陸特集の機会に誌上にこれ等選手達の仕事ぶりを紹介させて頂かうと思ひます11)。
ここで「ヤンガーゼネレーション(新世代)」と呼ばれているのは、大連写真造型研究会だけでなくハル
ビン写真造型研究会の大部六藏、村田実一らも含んでいる。彼らは主に満洲南部と北部で団体を結成
した作家たちであり、『満洲カメラ時報』に自らの意見を多く発表した。
フォトタイムス誌の図版で確認出来る彼らの作品を見てみると、大連で活動した廣松正満の「無題」
は、コンデンサーの中に物体を入れ、フォトグラムと半透明な布地をコラージュした作品である。ハルビン
の村田実一の作品は多重露出で人物の形状を重ねた、グロテスクな造形性を示している。平野義昌の
日常風景のようなごく一部を除けば、彼らの作品の多くは、阿部芳文流の日常の中の「超現実」より、む
しろフォトグラムなどの抽象表現を多用している。つまり満洲の「ヤンガーゼネレーション」の作品は、阿部
芳文や瀧口修造などの前衛写真観、「ストレートフォトによる超現実の発見」とは異なっていることが分か
る。阿部は、1940年の美術文化協会展に彼らの作品の出品を斡旋した際、次のような評を加えている。
今年集つた作品であるが展覧会に発表せぬ作品では本誌発表の平野、廣松両君のフォトグラムの様な傾
向が案外多く、レンズを通さぬ作品が非常に目立つてゐた。絵画の持つ平面の強さに対比してスタイルの点
から一番安易な方法として考えられる。(中略)画面の持つ抽象の機能と云ふ点からも子供の絵の様に偶然
な率直さで出来上る方法の単純さが取りあげられたのではあるまいか。此の方法は単純なだけにより作家の
パーソナリティが考えられねばならない。これ等の作家達にレンズの中からライオンや鳩や交通事故を取り出
す魔術師の様な一面を強調してみたかった12)。 阿部は、レンズを通さない彼らの作品に対して、実名を挙げながら「偶然な率直さで出来上る方法の単
純さ」を批判し、「ライオンや鳩や交通事故を取り出す魔術師の様な一面」を期待している。
しかし、こうした阿部の思惑に反して、満洲の若い写真家達の言説には、新たな技法と造型的写真へ
の関心がはっきりと表れている。
実際カメラのあの硝子製レンズは、時として大いなる障碍となる。然し写真することは必ずしもレンズを通して
でなければならぬ理由は少しもない13)。
11) 阿部芳文「私の作家紹介」『フォトタイムス』フォトタイムス社 1940年2月
12) 阿部芳文「美術文化展を終へて」『フォトタイムス』フォトタイムス社 1940年6月
13) 大部六蔵「満洲に於ける造型写真について」『満洲カメラ時報』1940年5月1日
파인더 속의 실험국가- 일본의 전위사진과 보도사진이 표상한 만주국 203
満洲の若い写真家達が、職業報道写真家とも、彼らを支援する本国の著名な前衛美術家・阿部芳文
とも異なる立場をとった理由は、何だったのだろうか。内地から出張してきた前衛(シュルレアリスム)系の
写真家は、満洲の日常に超現実を発見し、インスピレーションを受けた。そこに、旅行の高揚感やエキ
ゾティシズムの影響があったことは事実だろうが、造型的探求への真摯な試みでもあったろう。
しかし彼らが熱狂した「満洲の日常」は、満洲の若者にとっては「内地」に比べて“遅れた現実”であり、
そうした「日常」を乗り越える先端的な表現こそが、「若い満洲」にふさわしい方法と考えられたのではな
かったろうか。ハルビンで活動した写真家・大部六蔵は、自分の使命を次のように語っている。
私は未だ若いゼネレーションにある我が満洲国は、日本のそれより、もつともつと青年の創造的精神が必
要であると思ふ。ここで青年の創造的精神と云ふのは、凡有方面から、新しい形式をふんだんに採り入れて
(中略)新国家に即したものとして更に新しきものを創り出すことである14)。
彼らは、表現で先端を志向しつつ、同時に、「前衛」よりさらに新しい次世代の国家意識を志向して
いるように見える。そうした意識は、彼らが団体名や写真論で、「前衛」より「造型」という語を積極的に使
用した点からも窺われる。造型写真家たちが、自らの写真論を問答式に書いた寄稿文には、次のような
興味深い言及がある。
「前衛的とはどういふことかね」。
「読んで字のことさ。最も先鋭的なもの、最も新しいもののことさ。ただ誤解しちゃいけないけど、決してマ
ルキシズム華やかなりしころの社会的闘争集団の先鋭ではないんだ」15)。
「(前衛という言葉には;引用者) 別段未練の字句ではない事が、はじめから判つているから、あつさり捨
てて、現在使用の「写真造型」なる文字に替へたわけである」16)。
彼らは、左翼的ニュアンスを含む「前衛」という言葉を避け、意図的に「造型」を選択したのであり、この
傾向は、本土の日本でも同様だった。戦争の激化とともに思想統制が強化されると、1940年には抽象と
シュルレアリスム傾向の団体<自由美術家協会>が、「自由」の語を避けて<美術創作家協会>と改
称。1941年4月15日には、シュルレアリスムと共産主義のつながりが疑われ、瀧口修造と福澤一郎が検
挙されている。
14) 大部六蔵「満洲に於ける造型写真について」『満洲カメラ時報』1940年5月1日
15) 毛利風「前衛写真問答(1)」『満洲カメラ時報』1940年2月1日
16) 大部六蔵「満洲に於ける造型写真の地位とその分布」『フォトタイムス』1940年2月
204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満洲国での「造型」の語の選択にも、政治的前衛の嫌疑が自らに及ぶのを回避しようとした意図もあっ
たと思われる。満洲での造型写真を分析した大部六蔵は、「超現実だのアブストラクトだの云ふ左翼味を
持つ不建全分子は満洲国へは一歩も入れさせない」と語った美術界の有力者の言葉を引用し、「幸いに
写真界においてそのような作画運動は、既に地下に潜り、そしてその被害は軽微であり、地上で芽生え
たのは「造型」という用語である」と述べている17)。
一方、満洲の造型写真家が「新しさ」に執着した理由には、世代論的な意識もあった。「ヤンガーゼ
ネレーション」は、当時盛んに使われた「青年満洲」と自身を同一視しながら、満洲写壇の開拓派と言わ
れた淵上白陽と満洲写真家協会を旧世代と見なし、自らの新しさを主張したのである。
満洲写真界の指導者だった淵上は、「最も危険な環境」が「シュルレアリスムやアブストラクティブな傾
向」であるとし、前衛的写真を「抹消神経の遊戯的支配の奴隷的作品」と強く批判しながら、それに対抗
する「現実の齎す迫力」の必要性を強調した18)。
満洲写真界の世代性については、当時の批評に「暗い写真」と「明るい写真」という評も見える。阿部
芳文がフォトタイムスに紹介した造型写真系の大部六蔵は、「黒、白の諧調を出来る丈け詰めて、光輝
部を強調する為に他部をグット暗くする手法」を「暗い写真」と呼び、芸術至上主義の彼らを「満洲に於け
る先輩格のメンバーを揃へて居る満洲写真作家協会が此の派の正統」と指摘している19)。
一方の「明るい写真」については、「今日世界の写真の主体を為して居る作風即ち尖鋭なレンズ、優秀
なエマルション、明快な印画紙をして全力を発揮せしめ写真の描写性を駆使して凡有面に利用せんとす
るもの」とし、「作画精神は必ずしも芸術至上主義ではない」とする。つまり満洲写真家協会の作品を、過
去の時代の芸術写真、自らを新たな写真としているのである。
しかし大部六蔵は、「明るい写真」を「趣味的であり、浅い」とも評し、短所として「満洲の特異性」への
研究不足と、指導者の欠如を指摘する。前衛的で先端的な技法を駆使しながらも、満洲の独自性、特
異性への要求に応えられない不足を、自覚しているのである。ここに、表現上の前衛性と、新国家建設
の革新が結びつかない矛盾が露呈している。
この後輩世代の挑戦に対して、淵上白陽はどのように対応したのだろうか。彼は満洲写真作家協会の
写真について、満洲の土俗的カラーが一種の哲学的重厚さを持っているとし、自身の写真を「刹那的
な、軽妙な近代感覚的な魅力には乏しい」が、「暗いといふより重厚さを持ってゐる」としている20)。
17) 大部六蔵「満洲に於ける造型写真の地位とその分布」『フォトタイムス』1940年2月
18) 淵上白陽「満洲写真作家協会」『フォトタイムス』1940年2月
19) 大部六蔵「作品を通じて満洲写真を打診する」『カメラグラフ』1939年10月
20) 淵上白陽「満洲写真作家協会」『フォトタイムス』1940年2月
파인더 속의 실험국가- 일본의 전위사진과 보도사진이 표상한 만주국 205
また淵上は、芸術至上主義という批判、つまり「芸術写真」の残滓があるという批判に対しては、自らが
「ルネサンス以後の写実派が自然従属性のまま伸展し、写実派の無気力から一躍芸術興奮への当然の
向上を示した印象派と同一なるゴールに這入ったもの」とした。国家主義的言説に強く共鳴し、宣伝写真
を担当しながら、一方では「芸術的興奮」にこだわった淵上白陽もまた、矛盾性において若い前衛写真
家達と通じる部分があったのである。
しかし満洲写真界問題は、新旧の葛藤だけではなかった。芸術写真の影響を残し、しかし満鉄広報
課に所属し、国家に有用な報道写真を制作した淵上白陽と満洲写真作家協会は、日本本土からやって
来た報道写真家からも批判の対象となったからである。
阿部と共に満洲を訪問した報道写真家・渡邊勉は、満洲写真作家協会の曖昧さを、「報道写真として
の未熟さ」として批判し、発展途上の満洲国の状況を、本国により明快に伝えるためには、プロデュース
とレイアウトが重要になることを指摘している。 次節では、報道写真の多様な傾向が、満洲をどのように
認識し、フィルムに焼きつけたのかを考察することにする。
3.報道写真家が捉えた満洲
存在自体が巨大な国策だった満洲国は、この上ない報道写真の対象だった。満洲を撮影した報道写
真は、日本国内には「大東亜共栄圏」のモデルを、海外には「独立国としての満洲国」をアピールする効
果的手段だった。しかし、「見せたい満洲国」を報道するという共通目的にもかかわらず、報道写真の内
容と志向には違いがあった。
ここでまず、阿部芳文とともに満洲を旅行した報道写真家・渡邊勉(1908~1978)をとり上げ、満洲国を
捉えた彼の報道写真を見てみよう21)。彼は9ヶ月間の満洲出張後、『フォトタイムス』に寄稿した旅行記
で、満洲を撮影地として選んだ理由を次のように説明している。
大陸と云つても、なぜ支那を選ばずに満洲に旅行することを計画したかには、僕としてはそれだけの理由
21) 渡邊は、岐阜県出身の写真評論家で、戦後に多数の理論書、技法書を書いたことで知られるが、戦前には報道写真家
としても活動した。戦前の渡邊勉は、東方社などに所属して報道写真を撮影し、戦後は『世界画報』の編集長、木村伊
兵衛賞の最初期の選考委員も務めた。著書に『組み写真の写し方纒め方』(1941)『今日の写真 明日の写真』(1
964)『新しい写真の考え方』(滝口修造、金丸重嶺と共著、1957)『現代の写真と写真家 インタビュー評論35人』
(1975)などがある。
206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のあることだった。(中略) 寧ろ事変が終了し新しい王道国家をうち建て既に平和の戦争に入つてゐる、新
東亜建設の樞軸としての満洲国の動きの方を遥かに興味が湧き、戦線以上に極めて重要なテーマだとも信
じたからであつた22)。
「王道国家」「新東亜建設」などの言葉が示すように、渡邊の目的が、満洲国の宣伝にあったことは疑
いない。しかし同文で渡邊は、中国戦線に派遣された多くの写真家が、「戦争の様な異状的雰囲気で
ニュースカメラマンとしてでなく、報道写真家がどれだけ作品を創り得るか」について、自信を持っていな
かったことを明かしている。つまり渡邊は、刺激的な戦場を撮影し、戦勝を伝えるだけではなく、報道写
真家としての独自の立場を模索していたのである。
満洲国の中で、とくに渡邊が注目したのは、新京と、満ソ国境の開拓村だった。先述のように、同行
した阿部芳文は新京で制作意欲を失い、ハルビンに関心を示したが、渡邊にとってのハルビンは「肩が
凝らないで楽だったが」、新京のような「現実の功利的な政治の動き」がないため、興味を感じなかった場
所だった23)。新京と開拓村は、まさに国策の現地だったが、新京は殺風景なまでの政治都市であり、開
拓地も実際には楽土からは程遠かった。渡邊は、「開拓地の農の方法が間違つて居れば間違つて居ると
して写真の上に表現する。衛生設備が悪いとすれば、それをどうして写真の上に表現するか」24)を念頭
に置いたとし、単純に国策賛美のための写真を撮影したわけではなかったことがわかる。
また渡邊は撮影だけでなく、満洲国での「写真弘報活動」、つまり報道写真界の状況を視察・見学し
た。阿部芳文が満洲の「前衛(造型)写真家」と交流したように、渡邊も満洲国政府の弘報機関で活動して
いた報道写真家たちの内地への紹介、満洲の写真ジャーナリズムの批評などを行なっている。批評の対
象には、新人報道写真家のほか、満洲写壇を率いた淵上白陽の『満洲グラフ』も含まれていた。中央の
報道写真家として指導的位置にあった渡邊にとって、満洲の報道写真の評価はさほど高くなかったよう
だ。
では、渡邊が満洲で実現しようとした「正しい」報道写真とは、どのようなものだったのか。渡邊の言説
と作品から、当時日本の写真界で盛んになった報道写真理論が、満洲国に適用された様子を明らかにし
たい。
渡邊は 『フォトタイムス』1940年1月号に「新京報道写真の新人紹介」という記事を通して満洲在住の報
道写真家を紹介した25)。 彼らの渡満以前の経歴、性格と印象、家族関係などまで記しているため、か
22) 渡邊勉「大陸カメラ旅行記二題 轉戦九ヶ月を顧みて(1)」『フォトタイムス』1940年3月 23) 「大陸現地報告座談会」『フォトタイムス』1940年3月
24) 「大陸現地報告座談会」『フォトタイムス』1940年3月
25) この記事は、満洲国国務院弘報処所属の佐藤一、加持正範、満洲唯一の国策ピクチャー・マガジン『開拓画報』のカ
파인더 속의 실험국가- 일본의 전위사진과 보도사진이 표상한 만주국 207
なり深く交流していたと考えられる。しかし渡邊は、彼らの写真の技術的な熟練度、完成度を認める一
方、テーマや制作態度には懐疑的な意見を述べている。 つまり、熱河のラマ廟、北陵、東陵など、満
洲の文化遺跡を主なテーマとした加持正範については、繊細で情緒的な主題と表現だが、「神経とか感
覚のデリカシーでなく、性格的な繊細さ、生活の内容、環境の支配から影響され」るのではなく、「作家と
してのキャラクター、報道写真家としてのアクの強さ、猛しさ」が必要だとした。しかし同時に、彼が考える
報道写真の基準に沿っていなければ、たとえ「激しく流動する満洲の現状」や、国策の中心ともいえる開
拓地を扱っていても、高く評価しなかった。その俎上に上げられた一人、喜入隆の写真は、国境の開拓
地の自然と開拓民の生活をとり上げている。喜入隆は、プロレタリア美術家同盟の画家・喜入巖の弟であ
り、当時は洋画家を志望していたため、写真にも風景画を思わせるロマンチシズムが表れている。渡邊
は、「僕の様に開拓地を野暮で深刻な表現をとらずに、あくまでもロマンティスト喜入隆君」としながら、
「良しと悪しは別として、彼と僕との報道写真家としての現在の立場の相違」があるとする。渡邊が開拓地
を撮った写真の解説には、「民族協和の実現に土と戦ふ拓民(ママ)の現状は、今迄報道された様な牧歌
的な風景だけではないのです。建設の苦闘を続ける彼等の生活の報道が、殆ど野良仕事の場景だけに
始終してゐた様です」という言及があり、満洲のロマンチックな抒情表現を志向する報道写真家たちへの
不満が読みとれる。
芸術写真的な主題選択、制作態度への渡邊の批判は、若手写真家に限らなかった。注目されるの
は、淵上白陽が率いた満洲写真家協会による『満洲グラフ』の報道写真への批判である。『満洲グラフ』
は、満洲国政府の公式の報道雑誌ではなく、満鉄弘報課が発行したグラフ誌だった。しかし渡邊は、満
鉄が単なる民間の営利会社ではなく、満洲国の経済、文化の推進力になっているとし、満洲観光の宣伝
にとどまってはいけないとした。 渡邊は『満洲グラフ』への批評でで「これが鉄道会社としての観光宣伝の
為のグラフとして考へても、僕は甚々不満に堪へない。勿論観光宣伝は国家の財源ともなる大きな使命
を持つものであらうが、同時にそれは国家の文化の内容を、発展の姿を知らしむる必要もあるのではなか
らうか」と述べている。芸術写真志向の雑誌『光る丘』で見たように、淵上らの写真には、ロマンティシズム
とプロパガンダが混在していた。渡邊は、満洲写真作家協会の曖昧な態度は、「到底同一の作家の作
品だと思はれない二つの人格が、二つの個性が見られ」、「正にジキルとハイドの両面」26)だとした。淵
上白陽主催の芸術写真講演会に招待された渡邊は、「これは私としても相当意見もありそれに自分一個
の立場でなく内地の新しい写真界の為に反駁しなければならんこともある」と述べている。『満洲グラフ』に
ついても、「単にスッケチ風な一人良がりのものが比較的毎月多く見られるのは編集の重点がそう云ふとこ
メラマン・喜入隆など、若い写真家を2~3点の作品とともに紹介している。
26) 渡邊勉「満洲の弘報機関と報道写真」『フォトタイムス』1940年1月
208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ろにおかれてゐるのではないだろうか」27)と述べており、写真家の表現意欲が優先する満洲写真作家協
会を痛烈に批判している。
「開拓地の生活」という渡邊の写真は、劇的なカメラアングルというより、開拓民の日常的な生活風景
に、短い説明文を加えた淡々とした表現のものだった。テクストと写真の結合という報道写真形式に関し
ては後述するが、彼が報道写真として最も重視したのは、「人間の生活や感情」の表現だったと考えられ
る。座談会の発言や旅行記で、「外観ではない、生活のある満洲を見て撮れた」「唯写真家としてでな
く、一人の人間としても人生勉強ができた」28)「この旅行を通じて人間として新しい自己を築く」29)といった
言葉が繰り返されているのは、そうした意識の反映と言えるだろう。
渡邊が考えた報道写真の方法論については、満洲写真作家協会との座談会の感想から窺うことができ
る。
(満洲の写真家が―引用者)「内地の某報道写真家が座談会を開いた時、その写真家が報道写真は既
に一枚一枚額縁に入れて展覧する様な方法は最早展示方法として古い。報道写真は何枚かの組写真に
よって色々なレイアウトの技術の協力を得て展覧すべきものであると言はれたが私はかくの如き暴論を内地の
写真家から聴こうとは思はなかった」云々と言つておられた。むしろ私は新京の作家協会の会員の暴論を唖
然として聞いていたのだ。(中略)報道写真家がレイアウトの神経を必要とし、鋏の入れ方、モダンアー
チュの方法等によって、より秀れた正しい訴究力(ママ)を加えるものである位のことは今日において常識であ
る30)。
上記の文章からは、報道写真の方法をめぐる、内地と満洲在住の日本人写真家の間の葛藤が読みと
れる。また渡邊は、満洲報道写真に関する他の文章でも、レイアウトや編集の重要性を強調しており、こ
こでの「内地の某報道写真家」には渡邊自身も含まれていると考えられる。渡邊は、先述の新人報道写
真家評の中でも、「一枚一枚の作品の中には仲々面白いものがあつたが、全体としては報道の意図が不
鮮明に終わつてゐる」31)とし、撮影だけでなく、総合的な構成・編集能力を求めている。喜入隆の『開拓
画報』の写真についても、写真そのものより編集方法の問題点を指摘し、「東京のビルディングの中で開
拓地を一度ものぞいたことのない連中が、現地から送られた写真を無責任に編集」32)していると批判し
27) 渡邊勉「満洲の弘報活動に現れた写真宣伝物批判」『フォトタイムス』1940年2月
28) 「大陸現地報告座談会」『フォトタイムス』1940年3月
29) 渡邊勉「大陸カメラ旅行記二題 轉戦九ヶ月を顧みて(1)」『フォトタイムス』1939年3月 30) 渡邊勉「満洲の弘報機関と報道写真」『フォトタイムス』1940年2月
31) 渡邊勉「新京報道写真の新人紹介 佐藤一君(2)」『フォトタイムス』1940年1月
파인더 속의 실험국가- 일본의 전위사진과 보도사진이 표상한 만주국 209
た。『満洲グラフ』への批判はより強烈で、「レイアウト技術は写真より数段と拙劣」であり、「時に全く写真
を殺し、何枚か組にした写真から一つのテーマを語らうとしてゐるものが、何等連結と物語りの発展がな
い場合が極めて多い」と述べている33)。
ではここで、渡邊が言う「正しく新しい」報道写真の方法、つまりレイアウトや組写真の起源を、日本写
真史にさかのぼって簡単に触れておきたい。
「報道写真」とは、ドイツで活動した名取洋之介が日本にもたらした「ルポルタージュ・フォト」を、1934
年頃に伊奈信男(1898-1978)が訳した言葉である。しかしそれは単なる記録のニュース写真(あるいは新
聞写真)から、もう一歩進んだ概念だった。報道写真が、新たな写真美学の中に捉えられる理由は、そ
れが新興写真運動の一つの成果、あるいはその延長線上にあるためである。新興写真は、絵画を模倣
し個人の表現を重視した芸術写真と決別し、カメラとレンズという「機械の眼」が作り出す「現実写真(リア
ル・フォト)」を目指したものだった。新興写真の代表例が、堀野正雄(1907-1998)の写真集『カメラ・眼×
鉄・構成』(1931)であり、理論としては伊奈信男の論文「写真に帰れ」であろう。堀野は、鉄橋、機関車、
客船といった機械的建造物を被写体に、「カメラの有する機械性」を追求し、また美術評論家・板垣鷹穂
や村山知義らとともに、「グラフ・モンタージュ」の実験を行なった。グラフ・モンタージュとは、ある主題を
撮影した一連の写真を、一つの文脈に沿った印刷物として構成する技法で、報道写真の組写真にも繋
がるものである34)。のちに堀野は報道写真に転向し、日本工房が発行した雑誌『NIPPON』の写真を担
当、朝鮮総督府や満鉄の依頼で朝鮮半島、中国各地を取材することになる。
伊奈の論文「写真に帰れ」35)は、「「芸術写真」と絶縁せよ。既成「芸術」のあらゆる概念を破棄せよ。
偶像を破壊し去れ!そして写真の独自の「機械性」を鋭く認識せよ!」 という煽動的な文章で知られ、新
興写真のマニフェストとして知られる。この文章では、写真の特性として「光による造形」を挙げ、のちの
前衛写真のフォトグラムやフォトモンタージュなどへの方向性を準備した。同時に、伊奈が重視したの
が、「時代の記録、生活の報告としての写真芸術」だった。
伊奈の社会性と記録性の重視は、名取洋之助の報道写真論と共鳴し、1933年<日本工房>が結成
される。名取がドイツから影響を受けた報道写真とは、一言で言えば「組写真」であった。これは、日常
的なテーマに着目し、複数の写真を組み合わせて一つのストーリー(文脈)に再構成する方法であ
る36)。このフォト・ストーリーのまとめ方、つまりレイアウトや編集作業が、報道写真では何より重視され
32) 渡邊勉「満洲の弘報活動に現れた写真宣伝物批判」『フォトタイムス』1940年2月
33) 渡邊勉「満洲の弘報活動に現れた写真宣伝物批判」『フォトタイムス』1940年2月
34) グラフ・モンタージュに関しては、金子隆一の「グラフ・モンタージュの成立 『犯罪科学』誌を中心に」『モダニズム/
ナショナリズ 1930年代日本の芸術』を参照。
35) 伊奈信男「写真に帰れ」『光画』創刊号 1932年
210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た。これは、渡邊勉が満洲に伝えようとしたものと、まさに一致するものだった。 <日本工房>には、名取を中心に伊奈信男、写真家・木村伊兵衛、映画プロデューサー・俳優の岡
田桑三、デザイナー・原弘が参加したが、設立翌年の1934年には解散している。渡邊勉は戦後、解散
の理由を「新しい写真についての理念を異にしていた」37)ためとしたが、彼らが報道写真の基本的立場を
共有したことは間違いない。解散後、同1934年に、名取は第2次日本工房を、岡田・木村・原は東方社
を設立し、それぞれ海外向けの報道写真雑誌『NIPPON』『FRONT』を発行することになった。既に述べ
たが、このグラフ雑誌も満洲特集号を企画するなど、報道写真の対象として満洲国に注目した。
4.木村伊兵衛や海外向けグラフ雑誌の満洲表現
木村伊兵衛(1901-1974)は、小型カメラで人々の日常生活をスナップショットで捉えた写真から、「ラ
イカの名手」と呼ばれている。彼が一躍注目を浴びたのは、1933年12月、日本工房が主催した「ライカ
による文芸家肖像写真展」への出品作によってである。これは単なる肖像写真というより、時代の中に生
きる人間の内面まで捉えようとした、木村の報道写真観を示すものだった。のちに木村は、「これが単な
る肖像写真と違っている点は、報道写真的要素が加えていることである。人に知らせる場合には、写され
た人の性格や感情の動きまではっきりつかめていなければ、真実を伝えたことにはならないから」38) と述
べている。人間の日常の営みを周囲のディテールとともにリアルにとらえ、「時代の息づかい、生活の息
づかい」を伝えようとした39)。木村のこの志向は、満洲で撮影した写真にも現れている。
木村は1940年5月~6月の40日間、満洲鉄道総局の依頼で撮影した写真をもとに、『王道楽土』(ア
ルス、1943年)を出版した。これはグラフ雑誌ではなく写真集の体裁だったため、組写真的な要素は薄
いが、満洲の人々を彼特有の温かみのある視線で捉えている40)。タイトルも示すように、木村は序文で
「建国7年、治国の基本原則、王道政治が隈なく行き届き、文字通り民族協和、安居楽業の姿が、いた
るところでカメラの対象になって展開されておりました」と述べ、国策宣伝を目的にしたことを明らかにして
36)
伊奈信男も日本工房主催の報道写真展のパンフレットで「意識的に、ある意図の下に組み合わされた所謂「組写真」
にして、始めて種々なる事象の全貌を明確に表現し、報道し得る」と述べ、名取の意見に共感していた。
37) 渡邊勉『今日の写真 明日の写真』東京中日新聞出版局 1964年
38) 木村伊兵衛「私の写真生活」『木村伊兵衛傑作写真集』朝日新聞社 1954年
39) 井上裕子『戦時グラフ雑誌の宣伝戦 十五年戦争下の「日本」のイメージ』青弓社 2009年 31頁
40) 名取流の組写真と木村伊兵衛の報道写真の距離について、飯沢耕太郎氏は「(木村の写真は)あらかじめ与えられたス
トーリーの流れに沿って組織され、思想やメッセージを伝えるということを拒否する」と述べている。
파인더 속의 실험국가- 일본의 전위사진과 보도사진이 표상한 만주국 211
いる。
収載写真には、平和な満洲国民のゆったりとした情景が映し出されているが、満洲国の宣伝・美化の
みならず、ここには自分の報道写真理論の具現化を試みた様子も窺われる。内面、心理を捉えようとした
姿勢、そして写真に付されたテクストである。見開き頁に写真とともに配された文章は、写真内容の説明
だが、これは報道写真の必須要素でもある。説明文に加え、小文字で撮影方法を解説した文章もあり、
白系ロシア人の顔をクローズ・アップした「ロマノフカ」という項目では 、レンズの選択による効果的な表現
方法を、 次のように述べている。
人物のクローズ・アップには、長焦点レンズが一層現実感をはっきりと描写する。軟焦点レンズ・タムバア
ルは右の目的にかなう上に、軟調描写の特長が、顔の丸みと、皮膚の地肌の感じを良く表現してくれる。
広い平野と山羊を背景に、中国人のプロフィールを撮った写真でも、「視野の広い風景は、眼で見た
よりもフィルムにはよく感光するから撮影者の意識した露出を半分にすれば露出過度による平調な原板は
出来なくなる。赤外線フィルムを使って明暗の差を弱くつけた特殊な表現方法も視野の広い風景には応
用して効果がある」と、撮影技法の詳細を記している。
また巻末には、撮影に使用した撮影装備(カメラ、レンズ、フィルタ、フィルム、現像液)の情報を、
正確に記載している。この本は、まさにアマチュア写真家のための技法書のような印象があるが、じつは
そうした意図も、報道写真の目的の一つであった。伊奈信男は、「新体制下に於ける写真家の任務」とい
う文章で、写真雑誌とカメラクラブの重要性を強調し、同時に報道写真家の役割として、「写真理論の樹
立、写真技術の向上ともに後進の育成やアマチュア指導」を挙げている41)。
木村にとって、報道写真家としての写真普及の任務は、写真の撮影・発表以上に重要な仕事だったか
もしれない。1937年にもすでに木村は、沖縄那覇の市場などの写真連作を、技法書『写真実技大講座 小型カメラの写し方、使ひ方』に収録しており、これも報道写真理論の普及の一環と見ることができる。
木村は、対外宣伝グラフ雑誌『FRONT』の写真部長としても、満洲を取材した。総力戦の体制下では
多くの宣伝雑誌が作られたが、中でも『FRONT』と『NIPPON』には、報道写真界の主役、即ち当時最高
レベルの写真家やアートディレクター、知識人が集結し、自らの報道写真理論を実践した42)。これらの
雑誌は今日、完全な復刻版が出版され、写真史、デザイン史、メディア研究の各方面で盛んに研究さ
41) 伊奈信男「新体制下に於ける写真家の任務」『カメラアート』カメラアート社 1940年3月号
42) 名取が主導した『NIPPON』は、写真と活字の組み合わせ、つまり「組写真」が重要な課題だったため、キャプションや
説明文の比重が『FRONT』より大きかった。 『FRONT』は、原弘らデザイナーの影響から、より写真の補整、コラージュ
などの技法を多用している。
212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れている。先行研究を踏まえながら、両誌が扱った満洲写真について、ここで触れておきたい。
まず『FRONT』と『NIPPON』の特徴として、構成、編集、レイアウトを強調した、高いクオリティのデザ
イン、豪華さ、贅沢さが挙げられる。これは、海外向けという条件でのみ可能だったことが指摘されてい
る43)。とくに『FRONT』の写真表現の特徴として、柏木博氏は次の三点、ロシア・アヴァンギャルドやバウ
ハウスを意識した抽象表現と構成主義、モンタージュやコラージュ、アメリカのコマーシャル表現、を指摘
する44)。飯沢耕太郎氏も、クローズ・アップ、カメラアングルの強調、繰り返しの効果を挙げている。
『NIPPON』は19号(1939年10月)で「満洲特集号」(図4)を組み、満洲国の政治、国防、歴史、
文化、資源、他のグラフ雑誌は扱わなかった通貨や切手などを、写真・解説で紹介、独立国としての発
展をアピールした(図60、61、62)45)。毎号特集形式をとった『FRONT』は、第5、6号(1943年3月)
を『満洲国建設号』(図5)として発行した。クローズ・アップ効果(図63)やモンタージュ(図64)、また五族協
和を象徴する笑顔の各民族を撮影した図65では、その二つの技法とイメージの繰り返しが、全て使われ
ている。
こうした実験的表現は、ソ連の宣伝グラフ誌『СССР НА СТРОЙКЕ(USSR in CONSTRUCTION)』
(ソ連の建設)と共鳴するものでもあった。スタッフの中に左翼シンパがいたことにもよるが、「革命(左翼)
の造形言語」「戦争(右翼)の造形言語」が、国家主義と共鳴したことを示す好例と言える46)。満洲国は、
とくに『FRONT』が強調した、生産・建設のダイナミックな視覚効果に相応しい場所だったかもしれない。
43) 飯沢耕太郎「写真史のなかの『FRONT』」『FRONT』(復刻版)第1巻、平凡社 1989 14頁
44) 柏木博「モダンなグラフィズムの捻れと合理」『FRONT』(復刻版)第1巻、平凡社 1989 4頁
45) 井上裕子『戦時グラフ雑誌の宣伝戦 十五年戦争下の「日本」のイメージ』青弓社 2009 178頁
46) ロシアアヴァンギャルドと日本の翼賛体制下の近似する表現形式について、柏木博氏は、異なるイデオロギーを支えた同
じ意識、つまり「最小限の力によって最大限の効果をあげようとする」合理性に、その原因を見出している。(柏木博
「モダンなグラフィズムの捻れと合理」7-8頁)
파인더 속의 실험국가- 일본의 전위사진과 보도사진이 표상한 만주국 213
5.終わりに
「新天地」としてのイメージが溢れた満洲国は、帝国日本の知識人、芸術家がそれぞれのユートピアを
企画した「機会の土地」でもあった。彼らが、閉塞状況にあった本土に比べて、ある程度の自由な実験
や、自らの理論の適用が可能な場所、または「タブラ・ラサ」として満洲国を認識していたことは間違いな
い。建築家・坂倉準三は、建築家にとっての全ての課題を、机上ではなく実際に実験し検討できる満洲
国の首都・新京は、真に生きた実験室のようであると言及している47)。満洲国が、政治的には問題をはら
みながらも、前衛的建築家にとっては、戦時統制下の日本では不可能な計画を実験できる場として捉え
られていたのであった。自由な実験が可能な満洲国というイメージは、当時、建築家のみならず文芸全
般に共通した傾向だった。「バーチャル国家(都市)としての満洲国」を、思う存分計画したのが建築領域
だったとするなら、「ファインダーの中の実験国家」を自在に模索したのが、写真領域だったと言える。とく
に前衛写真と報道写真にとって、満洲は実験室として積極的に認識されていた。本発表では満洲国と日
本近代写真との関係を扱いながら、「前衛」や「実験」という概念に注目してみた。近年のアヴァンギャルド
研究では、「地政学的前衛」として満洲国を位置付ける視点が提起され48)、満洲国が芸術的前衛と政治
的前衛、双方にとっての新天地だったことが明らかになってきた。本発表で見た満洲写真は、それを端
的に映し出した絶好の資料であり、多様な前衛の立場と視線が交差し、絡み合っていたことを確認した。
内地の前衛写真家や在満日本人の前衛(造型)写真家たちは、自らの「新しさ」、すなわち「日常の中
の超現実」と「新国家に相応しい尖端(=造型)」を適用、実験する場として満洲を“発見”した。そして報道
写真家もまた、「祖国の第一線」となった「満洲の前衛」に立ち、その情報を「本隊」である日本に向けて発
信した、いわば満州は、二重のアヴァンギャルドだったのである。
47) 越澤明 『満州国の首都計画』ちくま学芸文庫 2002年
48) 波潟剛『越境のアヴァンギャルド』NTT出版 2005年
214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図1
鳥居龍蔵 <身体測定写真> 1914 年
図2 『写真報道 戦ふ朝鮮』 1945 年
파인더 속의 실험국가- 일본의 전위사진과 보도사진이 표상한 만주국 215
図3 坂田稔 〈危機〉 1938年
図5 平井輝七 <月の夢想> 1938 年
図4 花和銀吾 <複雑なる想像> 1938 年
図6 阿部芳文 <夜の目> 1939 年
216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図7 阿部芳文 <大陸の足> 1940 年
図8 阿部芳文 <二つの背景> 1940 年
파인더 속의 실험국가- 일본의 전위사진과 보도사진이 표상한 만주국 217
図9 阿部芳文 <奇妙な調和> 1940 年
図10 小石清
図11 小石清 <肥大した敗戦記念物>
<自己擬視・ひしひしといれてくるもの> 『初夏神経』
(『半世界』) 1940 年
218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図12 廣松正満 〈無題〉 1939 年
図14 淵上白陽 <列車驀進> 1930 年
図13 村田実一 1940 年頃
図15 淵上白陽
<満洲国国務院弘報処発行対外宣伝ポスター>1932 年
파인더 속의 실험국가- 일본의 전위사진과 보도사진이 표상한 만주국 219
図16 政徳信義 〈路上静物〉 1937年
図17 加持正範 〈紅湾(熱河)〉 1940年
図18 喜入隆 〈青少年訓練所〉 1940 年頃
220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図19 渡邊勉 <開拓地の生活> 1939 年頃
図20『NIPPON』第19 号(満洲国号)表紙
1939 年
図21『FRONT』第5-6 号(満洲国建設号)
表紙 1943 年
파인더 속의 실험국가- 일본의 전위사진과 보도사진이 표상한 만주국 221
図22 木村伊兵衛 〈高田保氏〉 1933年
図23 木村伊兵衛 『王道楽土』 1943年
図24 木村伊兵衛 〈渡しを待つ間(吉林)〉 1940 (『王道楽土』掲載) 222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図25 木村伊兵衛 〈千山〉 1940 (『王道楽土』掲載) 図26 木村伊兵衛 〈奉天〉 1940 (『王道楽土』掲載) 파인더 속의 실험국가- 일본의 전위사진과 보도사진이 표상한 만주국 223
図27 木村伊兵衛 〈ロマノフカ〉 1940 (『王道楽土』掲載) 図28 木村伊兵衛 〈葛根廟〉 1940 年
224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図29
『FRONT』 第5-6号(満洲建国号) 1943年
図 3 0 『 F R O N T 』 第 5 - 6 号 ( 満 洲 建 国 号 ) 1943年
파인더 속의 실험국가- 일본의 전위사진과 보도사진이 표상한 만주국 225
図31 『FRONT』 第5-6号(満洲建国号) 1943年
図32 『USSR in CONSTRUCTION』1934 年11 月
226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M E M O》
만주의 재발명: 제국일본의 북만주 공간표상과 투어리즘 227
만주의 재발명: 제국일본의 북만주 공간표상과 투어리즘
조정우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연구교수)
1. 식민지 문화지리의 창출과 투어리즘
‘만주’는 한국 내셔널히스토리의 구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육당 최남선이 ‘不咸文化
論’을 내세워 한반도와 요동반도, 만주를 한민족의 영토로 위치지우고자 한 것에서 보듯, 만주는
한국 민족의 역사와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던 공간이었다. 특히 근대사에 있어 만주는 항일독립운
동이 전개된 민족사의 성지이다. 김좌진과 홍범도의 전과(戰果), 신흥무관학교를 비롯한 항일전투
부대의 양성지, 그리고 무엇보다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 등 독립운동사의 굵직한 업적이 성취되었
던 공간이 바로 만주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주라는 지역은 일본의 근대사에 있어서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지금은 일본 근대사
연구에서 만주사는 주변적인 분야이지만, 사실 일본 제국주의의 역사는 만주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제국주의 일본의 탄생 계기가 되었던 러일전쟁 승전의 성지, 일본판 동인도회사임을 자
부하던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이 철도의 수비대에서 출발했다가 후에 일본육군의 주력이 되어 파
시즘을 이끈 관동군, 그리고 무엇보다 1932년 건국된 만주국의 근대국가 실험과 이상 등에서 보
듯, 만주는 일본 제국주의의 출발이자 끝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렇게 만주는 한국 민족주의의 상징적 공간이면서 그와 동시에 일본 제국주의의 핵심적 공간
이기도 하였다. 그렇다 보니 한국근대사에서 만주는 일본의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는 항일독립군
의 영토라는 이미지로 각인되어 왔다. 즉 한국 민족주의와 일본 제국주의의 경합이라는 이항대립
도식으로 만주의 역사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도식으로 만주라는 문제적 지역을 이해
하기에는 그 한계가 뚜렷하다. 2008년 670만 관객을 동원했던 ‘만주 웨스턴’ 영화 <좋은 놈, 나
쁜 놈, 이상한 놈>에서 의아한 장면을 발견할 수 있다.
영화는 경비병을 실은 기차가 만주의 광야를 가로지르고, 이를 비적단이 습격하는 장면으로 시
작한다. 그리고 이 조선인 비적을 만나러 온 항일독립군이 등장한다. 만주의 벌판, 철도, 비적,
독립군 등 한국인들이 익히 생각할 수 있는 만주의 표상들이 배경으로 제시되고, 관객들은 독립
군과 일본군의 전투, 그 속에서 펼쳐질 세 주인공 ‘놈·놈·놈’의 갈등과 활약상을 기대하게 된다.
228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하지만 항일독립군은 그 뒤 영화의 전개에서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1) 러시아인들이 그렸다는 보
물지도가 사실 유정(油井)을 표시한 것이었다는 반전은 만주에 철도를 부설하면서 지질탐사를 했
던 러시아의 행동을 모티프로 활용한 것이고,2) 또 일본 관동군의 이데올로그 이시와라 간지(石
原莞爾)의 이름을 딴 것이 분명한 장교 ‘이사하라’가 이끄는 관동군이 비적을 추적하는 장면도
연출하고, 북만의 오지를 헤매는 주인공들의 모습도 보여주지만, 한국인들의 만주 인식에 있어
가장 강력한 표상인 항일독립군은 까메오처럼 잠깐 출현했다가 더 나오지 않는다. 심지어 세 주
인공은 사실 꼭 조선인이지 않아도 되는데,3) 만주에서 일확천금을 꿈꾸는 일본인으로 설정하거
나, ‘정치 따위는’ 안중에 없는 중국인—혹은 한중일이 뭉쳐 결성한—도적떼로 설정해도4) 영화의
전개에 아무런 지장이 없다. 결과적으로 이 영화는 한일 양 민족 간의 대립구도로 만주를 ‘이야
기’ 하지 않음으로써 항일독립군의 투쟁 서사를 해체하고 있다.
<놈·놈·놈>의 이런 스타일은 만주 웨스턴 특유의 무국적성과 혼종성이 반영된 것이다. 한석정
이 지적했듯이, 1930-40년대 만주국의 국책영화제작소였던 ‘만영(滿映)’이 중심이 되어 제작한
오민(娛民) 영화들은 철도, 비적, 봉천역전, 대련항, 개척촌, 하얼빈과 신경의 뒷골목 · 선술집,
일본군경의 사이드카 등 만주를 생각할 때 떠올릴 수 있는 주요 표상들을 “붙박이 소품”으로 활
용하였다. 1960년대 한국의 만주 웨스턴은 이 소품들을 그대로 활용하면서, 그 주인공을 한국 내
셔널리즘으로 바꿔치기하였다.5) 이렇게 만주 웨스턴은 전후(戰後) 일본의 ‘대륙물’을 모방했을 뿐
만 아니라, 만영이 재현한 만주까지도 태연하게 이용하였다(한석정, 2009: 21-22).6) 이 글에서
분석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무국적성 · 혼종성의 역사적 토대인데, 다시 말해 식민지 시대에
조선인들이 제국일본의 영토확장 과정에서 ‘만주 경험’과 ‘만주 상상’7)을 일본인들과 공유하였다
는 점에 주목하고자 하는 것이다.
최근 한국 문학사 연구에서는 당시 만주를 형상화한 조선인 작가들의 문학작품들을 집중적으
1) 그것도 미모의 여군으로 등장하여 세 남자의 음모와 배신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여성이라는 전형적인
경쟁구도를 기대하도록 하지만, 그 이후 영화의 전개에서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2) 하얼빈 북서쪽에 위치한 大慶 유전을 가리킨다.
3) 영화의 항일독립군이 한 역할은 주인공들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 것뿐이다.
4) 중일 연합 비적은 실재했고, 아마도 한중 연합도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5) 많은 연구자들이 지적하듯이, 이 치환은 내셔널리즘 서사의 균열과 그것으로부터의 이탈이라는 지점에까
지 이르렀다.
6) 그럼에도 한국 관객들이 이에 대해 거부감을 표시하고 항의를 했다는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2008년의
<놈·놈·놈> 역시 그보다 불과 2-3년 전에 개봉되었으나 反日정서로 흥행에서 대참패한 <청연>(2005)과
달리 대중 민족주의로부터 제재를 받지 않았다.
7) ‘만주 상상’은 피터 두스가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를 바탕으로 구성한 제국의 제도와 기구를
지탱하는 비젼으로서의 상상을 공간표상의 구축에 적용시킨 것이다(Duss, 1998: 13-15).
만주의 재발명: 제국일본의 북만주 공간표상과 투어리즘 229
로 분석하고 있다.8) 1932년 만주국 건국을 계기로 많은 저명한 조선인 문학가들이 만주를 방문
하고, 그 경험을 기행문이나 소설, 혹은 수필로 기록해 두었다. 이 ‘만주문학’이 주목을 끌고 있
는 것은 당시 조선인들에게도 만주는 비록 ‘오족협화’와 ‘대동아공영권’이 “명분뿐인 슬로건”이
라 할지라도 만주국의 ‘한 주체로서 참가할 수 있다는 환상과 욕망을 투사할 수 있는 장소’이자
“새로운 가능성이 땅”으로, 한국의 식민지 경험과 기억이 가진 복합성을 다층적으로 재구성해 볼
수 있는 대상이기 때문이다(민족문학연구소, 2007; 김재용·이해용 편, 2014). 환언하면, 조선인
문학가들의 작품에서 ‘제국의 시선’과 ‘제국의식’이 어떻게 투영·굴절되고 있고 또 어떤 지점에서
교착되어 있는가 하는 점을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프랫의 논점을 빌려서 말하면(Pratt, 2015),
이 글은 제국의 문화권력이라는 자장을 과연 식민지인들이 횡단—‘transculturation’—할 수 있
었는지를 검토해 보는 작업이기도 하다.
프랫이 분석한 것처럼, 非유럽 지역에 대한 유럽의 여행 책자들은 제국의 질서를 창출하고 그
질서 속에서 본국의 자리가 어디인지를 제시해 주었다. 이를 통해 제국의 확장에 의미를 부여하
고 그 확장에 열광하도록 만들었다. 제국민들은 여행기가 묘사한 “식민화되고 있는 지역”을 마치
잘 알고 있고 또 소유하고 있다는 감각을 느꼈던 것이다. 즉 여행 책자는 “유럽 본국에 있는 사
람들에게 지구적 차원의 기획[제국주의]에 자신도 참여하고 있다는 느낌을 제공하는 주요한 장
치 중 하나”였던 것이다(Pratt, 2015: 23-24). 이렇게 투어리즘은 가이드북이나 신문광고 등의
인쇄매체를 통해 미지의 세계에 대한 지리적 지식과 문화적 표상을 제공하고, 교통수단과 여행사
라는 이동장치를 통해 그 지식과 표상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한다. 하지만 그 경험은 가공되어 제
공된 표상지식에 한정된다는 점에서 투어리즘은 상상된 경험을 체험하는 것이다.9) 그런데 여기
서 그 ‘미지의 세계’가 제국의 권력이 폭력적으로 행사되는 식민지라면 투어리즘 연구는 식민지
에 대한 제국의 지식문화 체계에 대한 비판 작업의 일환이 된다.10) 즉 식민지 투어리즘은 식민
지에 대한 문화지리(geo-culture)의 창출 논리를 이해하고, 또 그것이 사회적 · 대중적 인식틀로
확산되고 공고화되는 과정을 분석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연구영역이라 할 수 있다.
8) 한국학계의 최근 만주문학 연구의 동향을 이해할 수 있는 연구성과로는 동국대학교 한국문학연구소에서
펴낸 제국의 지리학, 만주라는 경계(2010)와 김재용·이해영이 편집한 만주, 경계에서 읽는 한국문학
(2014)이 있다.
9) 이른바 ‘진정성 여행’은 이에 대한 반발로 나타난 관광형태라 할 수 있다.
10) 어쩌면 식민지 투어야말로 근대 관광여행의 본질일지도 모르겠다.
230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2. 제국의 성지순례와 헤테로토피아로의 상상여행
제국일본의 ‘투어리즘 공간’은 제국의 권역 팽창과 일치하며, 또 식민철도의 영역 확대를 그대
로 따랐다(荒山正彦, 2007). 다시 말해 일본의 철도 제국주의는 식민지 투어리즘이 가능하도록
하는 물적 토대를 제공해 주었다.11) 일본이 부설권을 획득하여 해당 철도에 대한 치안력을 확보
하게 되면, 관광루트는 그에 따라 새로이 개설되는 방식이었다. 조선의 경우를 예로 들면, 경주
는 1935년 동해남부선이 완전개통 된 후에야 비로소 일본본토로부터 오는 관광객들의 여행지가
될 수 있었다. 만주의 경우, 1935년 하얼빈과 그 북쪽의 흑하(아이훈)를 잇는 빈북선이 개통되고
나서야 북만주 관광루트가 개발되었다. 이처럼 제국일본의 식민지 투어리즘은 그 자체로 철도 제
국주의의 역사라 할 수 있다(김백영·조정우, 2014). 만주와, 그 중에서도 특히 하얼빈을 중심으로
한 북만주 투어는 철도를 빼놓고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철도와 관광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12)
제국일본에 있어 식민지 투어리즘의 본산은 여순-대련-봉천(심양)을 중심으로 한 남만주 지역
(즉 ‘遼東’ 지역)이었다. 그 때문에 기존의 연구들도 대개 이 지역에 대해 집중적으로 분석을 하
였다. 그도 그럴 것이 만주국 건국 이전의 일본의 식민지 투어가 실제로 조선과 남만주 지역에
한정되어 이뤄졌기 때문이다.13) 이 남만주 투어는 철도를 통해 조선 투어와 연결되어 있었다. 부
산-경성-평양-신의주로 이어지는 경부선-경의선의 조선철도는 압록강 철교로 安東-奉天 간의 安
奉線과 연결되었다. 일본인들의 조선-만주 관광루트는 크게 부산-봉천-대련이라는 삼각형 구도
로 구축되었던 것이다. 이 ‘선만(鮮滿) 관광루트’에 있어 중심은 여순-대련을 중심으로 한 ‘관동
주’ 일대였다(김백영·조정우, 2014).
러일전쟁의 승전지이자 그 전리품인 관동주에는 전몰자 위령탑으로 대표되는 전적지(戰迹地)와
11) 아라야마는 이에 더해 해상운송까지 포함하여 ‘투어리즘 공간’이라는 틀로 식민지 투어리즘의 전체상을
그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荒山正彦, 2007·201). 그의 논의는 그간 ‘식민자의 오리엔탈리즘’ 혹은 ‘동화주
의 관광정책’ 등으로 협소하게 전개되어 온 식민지 투어리즘 연구의 폭을 ‘제국의 지정학’이라는 관점에
서 볼 수 있도록 확장하였다. 이는 그간 ‘동화주의 관광정책’에만 초점을 맞춘 한국학계의 연구경향에 대
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학계의 식민지 조선 투어리즘 연구사 정리는 김백영·조정우의 글(2014) 중
270~272쪽을 참조할 것.
12) 정재정의 연구(2013)은 식민지 조선에서의 철도와 투어리즘의 상관관계를 규명하였는데, 그 연구범위를
조선에 한정하다 보니 제국일본의 투어리즘에서 식민도시 경성이 갖는 위상을 다소 높이 평가하고 있다.
13) 그리고 별개의 여행코스로 대만 투어가 있었다. 대만 식민지 투어리즘에 대해서는 소야마 다케시의 연
구가 독보적인데, 그는 대만 관광여행도 대만철도를 중심으로 이뤄졌다는 점에 주목하여 양자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분석하였다(曽山毅, 2003). 그런데 대만철도는 섬이라는 지형조건 상 연결선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조선과 만주의 철도와는 성격이 달랐다고 하겠다.
만주의 재발명: 제국일본의 북만주 공간표상과 투어리즘 231
만철이라는 일본의 최대 식민지 국책회사 경영하고 있는 개발지가 있었다. 남만주는 제국일본의
전쟁과 산업의 역사적 현장이었던 것이다. 일본인의 남만주 투어는 제국일본의 탄생과 그 위세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과정이었다(高媛, 2007; 임성모, 2009). 일본이 조차권을 토대로 배타적
행정권을 보유했던 여순·대련에서는 물론이고, 동북군벌의 중심도시인 봉천에서도 만철이 일본의
치외법권 지역으로 광대한 ‘만철 부속지’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 관광객들은 여행에
부담이 없었다. 이러한 남만주 지역은 일본의 ‘제국의식’(有山輝雄, 2002; 임성모, 2009)이 타민
족의 저항 없이 관철되고, 또 투어리즘을 통해 확대재생산되는 제국의 성지였던 것이다.14)
하지만 하얼빈을 중심도시로 한 장춘(長春) 이북의 북만주 지역은 성격이 달랐다.15) 북만주 지
역은,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일본인의 ‘제국의식’이 관통하기에는 백인제국인 러시아의 흔적이
너무나 깊이 새겨져 있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하얼빈이 러시아의 도시가 된 계기는 차르 니꼴라
이 2세가 동진정책의 핵심사업으로 극동의 부동항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는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부설하면서, 유럽 러시아가 마침내 만주에 모습을 드러낸 데 있었다. 러시아는 시베리아 철도의
병행선으로 만주를 횡으로 가로지는 동청철도(東淸鐵道)를 함께 부설하였다. 동청철도 본선은 러
시아-청-몽골 쪽의 만주리(滿洲里)를 발착역으로, 러시아-청-조선 쪽의 수분하를 종착역으로 하
였다. 그리고 러시아는 삼국간섭으로 청으로부터 조차한 관동주의 여순과 대련을 향한 철도인 동
청철도 남만지선을 동시에 부설하였다. 이 본선과 남만지선의 교차점이 바로 하얼빈이었고, 이
도시에는 차르의 특허회사인 동청철도회사의 본사가 자리 잡았다. 다시 말해, 러시아의 동청철도
는 만주를 T자 형으로 종횡하였고, 그 중심에 ‘만주의 심장’ 하얼빈이 건설되었던 것이다.
14) 식민지 투어리즘에 대한 연구는 그간 문학가들의 기행문에 대한 분석이 주를 이뤘다. 최근에는 각급 학
교의 수학여행 자료가 일부 발굴되어 투어리즘의 실상을 복원하는 데 성공하기도 하였다(정재정, 2010;
임성모, 2011; 長谷川令, 2013). 하지만 그 답사와 수학여행 기록이 대체로 러일전쟁 후 10년간과 전시
체제기를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본 연구에서 주목하는 1920년대와 30년대 전반의 북만주 여행에 대해서
는 까오웬의 일련의 연구(高媛, 2007 등)와 임성모의 연구(2009)를 제외하고는 충분히 분석이 이루어지
지 않고 있다. 먼저 까오웬은 전후 일본인들의 만주여행을 노스탤지어를 키워드로 분석하기까지 하여 일
본의 만주 투어리즘에 대해 종합적인 분석을 가하였지만, 만주 관광과 한 세트를 이루어 진행되던 조선
관광은 시야에 넣지 않고 있다. 그리고 임성모는 만주 투어리즘에서 일본인들이 느낀 균열과 불안을 지
적하여, 향후 연구를 위한 새로운 가능성을 시사하였다. 한편 김백영과 조정우(2014)는 ‘선만 관광루트’
분석을 통해 조선-만주 관광을 연계시켜 분석하였고, 그 결과 제국의 투어리즘 구상에서는 조선은 철저
히 만주를 향한 통과지로서의 성격만 가졌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15) 북만주 여행에 대한 분석은 주로 1930년대에 대한 것이며, 대개 문학작품이나 기행문을 대상으로 한
것들이다. 즉 기존의 연구들은 대체로 특정시기 하얼빈-북만주의 상을 전체상으로 간주하고 있다. 특히
한국학계의 연구들은 1930년대 이후 조선인 문학가들의 만주기행문이나 만주 답사 후 쓴 작품들을 집중
적으로 분석해 왔다. 특히 1938년 이후 것들에 대한 분석이 많은데, 이는 ‘선만일여’ 노선을 위해 조선총
독부가 주요 문학가들을 정책적으로 북만주에 보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이에 반해 본 연구가 주
목하는 것은 북만주 투어의 성격과 표상의 내용이 시기에 따라 상이하다는 점에 있다.
232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세계최초의 철도 전쟁’이었던 러일전쟁에서의 패배로 러시아는 관동주 조차권과 동청철도 남
만지선의 대련-장춘 노선을 일본에 넘겨줬지만, 남만지선 중 장춘-하얼빈 노선과 본선의 운영권
은 여전히 동청철도가 보유하였다.16) 그런데 1917년의 러시아혁명은 북만주의 정세를 더욱 복잡
하게 만들었다. 反혁명파인 백계러시아인들은 유럽러시아를 탈출하여 시베리아로 몰려들었다가
결국 북만주로까지 밀려들었던 것이다. 또 일본은 반혁명 지원을 위해 1918년 ‘시베리아 출병’을
감행하였다. 일본군은 극동의 블라디보스톡에서 바이칼호 서쪽의 이르쿠츠크에 이르는 시베리아
철도의 주요 교통요지를 점령하였다(22년 철군). 한편, 같은 시기에 군벌 장작림은 동북의 지배자
로서 입지를 완전히 굳혀, 만주 3성의 관할권을 국민정부로부터 인정받았다. 일본의 적극적 지원
을 등에 업은 장작림은 봉천을 ‘수도’로 한 準국가를 건립하고 북경까지도 자신의 세력권으로 삼
았다. 장작림은 만주의 철도를 자신의 관할 하에 두고자 하였지만, 동북군벌의 역량 부족, 일본
의 격렬한 반발, 소련의 소극적 태도 등으로 인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徐徹, 2011).
이렇게 북만주는 철도를 둘러싼 각 국가들의 이해관계가 가장 첨예하게 맞부딪히면서도, 어느
세력도 영토주권을 확립하지 못한 권력의 공백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식민철도도시로 건
설된 하얼빈에는 무국적의 백계러시아인, 소련인, 유태계를 포함한 동유럽인, 중국인, 일본인, 조
선인 등이 뒤섞여 사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북만주와 그 속의 하얼빈이 갖는 이 공위기(空位期)
의 독특한 정치지리는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휘발성으로 인해 더욱 매력을 끄는 요소가 되었다.
최근 한국의 문학사·문화사 연구자들이 미셸 푸코의 논의를 응용하여 전개한 ‘헤테로토피아로
서의 만주론’17)은 하얼빈의 이러한 역사적 특징에 주목한 것이다. 김미경은 하얼빈이라는 도시공
간이 갖는 문화적 혼종성과 역사적 다층성에 주목하여 하얼빈이 환상과 욕망이 교차하고, 일탈을
꿈꿀 수 있으며, 그 속에서 새로운 주체가 탄생하는 장소였다고 보았다(김미경, 2014). 서재길은
나운규의 영화에서 만주는 식민지 조선의 현실에서는 “상상으로만 가능한 활극영화적 장면이 펼
쳐질 수 있”는 장소로 선택되었다는 점에서 헤테로토피아적 공간이었다고 지적한다(서재길,
2014: 78). 곽은희는 만주는 탈주의 움직임 속에 이탈의 에너지가 흐리는 공간으로 제국의 감시/
통제 시스템이 쉽게 탐지할 수 없다는 점에서 제국의 불안과 공포를 야기하는 균열의 지점이라
보았다(곽은희, 2014).
그러면 이와 같은 ‘헤테로토피아로서의 만주’는 제국일본이 창출한 만주 상상과는 어떤 관련이
16) 만철은 동청철도 남만지선의 이 일부노선과 안봉선을 합쳐 설립된 것이다. 만철은 노선 인수 후 곧바로
중국인 인부들을 대거 동원하여 불과 일주일 만에 동청철도의 광궤선로를 표준궤로 바꾸었다. 이를 통해
표준궤 조선철도 노선과 만철 노선이 이어졌다. 한편 이는 광궤 동청철도를 통해 러시아군이 곧바로 남
하하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이기도 했다.
17) ‘헤테로토피아 만주’는 야마무로 신이치가 키메라—만주국의 초상(2009)에서 처음 제기한 관점이다.
만주의 재발명: 제국일본의 북만주 공간표상과 투어리즘 233
있을까? 만주의 혼종적·이국적 성격은 이미 일찍부터 일본인들이 간파한 것이었다. 나쓰메 소세
키를 비롯한 문학가들은 일찍이 만주를 이질성과 생성의 공간, 전도와 반전의 장소로 형상화해
왔다(이영희, 2014). 이 기이한 공간에 대한 욕망은 문학작품을 통해 소비되는 것을 넘어 여행이
라는 이동행위를 통해 몸과 눈으로 체험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즉 만주를 향한 제국일본의 투
어리즘은 문학이 묘사한 헤테로토피아로 직접 옮겨가 그 공간 속에서 일탈을 꿈꾸고 해방감을
맞볼 기회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되었던 것이다.
하얼빈이 제국일본의 ‘관광권’으로 편입된 것은 192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였다.18) 그 이전까
지의 만주 여행은 즐기러 가는 관광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하세가와는 1910년대에 만주 수학
여행에 나섰던 학생들이 겪었던 곤란을 잘 설명하고 있다: 치안을 보장할 수 없다는 이유로 ‘안
전모’를 구비하라는 지침을 받았고, 또 관광객에게는 도통 관심이 없는 만철의 불친절에 크게 실
망하기도 하였다(長谷川怜, 2013). 원래 유럽에서 근대 투어리즘이 종교적 성지를 찾아 떠나는
순례여행(pilgrimage)에서 출발한 것처럼,19) 일본인들의 만주 투어리즘도 관광의 원초적 형태인
순례에 가까웠다. 제국의 성지를 향한 순례여행이었기 때문에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야만 했던 것
이다.
이러한 순례여행이 대중적인 투어리즘으로 변환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에 들어서였다.
1920년대는 세계적으로도 대중관광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대로, 그 흐름은 일본에까지 이어졌
다. 일본정부는 해외관광객 유치를 위해 관료기구로 ‘국제관광국’을 설치하고, 또 반관반민단체로
‘일본여행협회’를 창설하여 정부사업을 보조하도록 하였다. 일본여행협회는 ‘外客誘致’를 목적으
로 출발하였지만, 곧 일본인들의 국내·국외 관광여행을 알선·지도하는 역할도 함께 맡았다(中村
広, 2006; 平山昇, 2006). 이렇게 일본정부 차원의 조직적 관광진흥정책이 뒷받침되면서, 일본인
들의 해외여행 · ‘外地’여행도 순례여행에서 관광여행으로 그 성격이 바뀌었다.
그간 미지의 세계로 알려져 있던 하얼빈도 마침내 관광여행의 대상이 되었다. 물론 하얼빈 관
광은 만주국 건국 이후에나 본격화되었지만, 1920년대에 이르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고,
그렇기 때문에 하얼빈 관광에 대한 욕망은 더욱 커졌다. 때마침 발간된 논픽션소설 하얼빈야화
(ハルビン夜話)(1923년)는 소비에트혁명을 피해 하얼빈으로 도망쳐 온 러시아인 백인여성댄서를
섬세한 필치로 에로틱하게 묘사하여 하얼빈을 향한 일본인들의 욕망을 더욱 부추겼다(高媛,
2007). 하지만 우에다가 지적한 것처럼, 일본인들은 하얼빈 러시안들의 유럽식 생활양식과 러시
18) 하얼빈에 일본인 관광객들이 쇄도하게 된 것은 만주국 건국 이후로 특히 1935년 이후부터였다.
19) 근대여행의 창시자인 토마스 쿡은 이 순례여행의 프로그램을 조직하던 인물이었는데, 여기서 종교적인
목적을 떼 내어 근대 투어리즘의 골격을 만들어 내었다.
234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아가 조성한 유럽식 도시공간과 건축물에 대해 일본식의 우위를 도저히 주장할 수 없었다. 만주
국 건국 이후에도 하얼빈의 일본인들은 러시아 정서에 애착을 보이는 등 복잡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上田貴子, 2007: 149-150).
3. 하얼빈 투어와 밤의 하얼빈
1920년대 들어 만철에서도 철도경영의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 관광객 유치에 매우 적극적이었
다. 만철은 주요 요지에 철도호텔을 설립·경영하면서 여행객들의 숙박 편의를 돕고 경영수익을
극대화하였다. 만철은 대련·심양·장춘 등에 ‘야마토(大和)호텔’을 만철 철도역 근처에 설립하여 만
주 관광여행의 상징이자 중심으로 삼았다.20) 그리고 만철은 도쿄·오사카 등 일본 내지의 대표 두
도시와 관부연락선의 기점인 시모노세끼(下関)에 ‘鮮滿觀光案內所’를 설치하여 조선-만주 관광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였다(中村宏,, 2006). 그 정보 수집을 담당한 것은 ‘일본여행협회’의 각 현지
지부였다. 만철과 일본여형협회는 상호협약을 맺고 일본여행협회의 지부를 만철의 현지 사무소에
설치하였다. 만철은 지부 운영 자금과 사무소를 제공하고, 일본여행협회는 정보수집가공 업무와
만철의 선만관광안내소 경영을 위탁받아 일본 내지에서의 홍보·알선을 대행하는 관계였던 것이
다.
일본여행협회는 일본인들의 관광여행을 촉진하기 위한 종합가이드북으로 여정과 비용개산을
1920년부터 매년 발간하였다.21) 이는 “일본 가이드북의 바이블”로서 여행지의 기후 등의 기본정
보에서부터 권장관광루트와 주요 관광지 소개, 선박 및 철도 요금과 시간표, 현지 숙소 정보, 주
의사항 등을 종합적으로 수록하고 있었다. 일본 내지에서부터 대만, 조선, 만주, 중국에 이르는
동아시아 관광권의 주요 정보를 종합적으로 다루었기 때문에 900~1000쪽에 이르는 두꺼운 분량
으로 발간되었다. 그래서 이 책은 현지에서 들고 다니며 참조하는 것이 아니라 여행 전에 관광루
트를 구상하고 여행비용을 가늠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荒山正彦, 2012).
이 책자는 만철과 일본여행협회 간에 조직된 현지 중심형 네트워크를 통해 관광지의 정보를
수집 · 정리하였기 때문에, 이 책자의 관광정보는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책이 관광
안내서의 ‘바이블’로서 다른 관광안내서 제작의 바탕이 되고, 여행사의 선만관광상품의 기본 지
20) 1926년 만철의 위탁경영 계약을 해지한 조선철도도 여객수입 증대를 위해 관광객 유치에 적극적으
로 나섰다. 조선철도도 부산 · 경성 등지에 ‘조선철도호텔’을 설립하였다.
21) 日本旅行協會, 旅程及費用槪算. 1920년 창간되어 매년 발간되었는데, 현재 확인된 것은 1942년
판까지이다. 이 책자의 소장현황에 대해서는 김백영·조정우의 글(2014)을 참조할 것.
만주의 재발명: 제국일본의 북만주 공간표상과 투어리즘 235
침이 되었던 것은 만철과 일본여행협회라는 두 準정부기관의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역으로 전전 일본인의 관광여행이 관주도적 성격을 갖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일본인의 만주여행
은 만철이 구축한 철도노선과 일본여행협회가 디자인한 관광루트 안에서 진행되었다(김백영·조정
우, 2014).
여정과 비용개산 1928년 판에서 하얼빈은 ‘동양의 파리’ · ‘동양의 모스크바’로 표상되었다.
하얼빈을 서구 모더니즘 도시의 본산인 파리에 등치시키는 한편, 유럽에서도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 비유함으로써, 하얼빈에 근대성과 이국성을 부여한 것이었다.
이는 하얼빈이 단순한 유럽 도시의 모방이 아니라, 유럽 도시의 정수(精髓)를 간직하면서도 ‘동
방’의 분위기를 갖는 독특한 도시공간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하얼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만철본선’22)으로 장춘역에 도착한 후 동청철도로 갈아타야만 했
었다. 앞서 지적했듯이, 러일전쟁 후 일본과 러시아는 장춘역을 기점으로 장춘역 이남은 일본이
전리품으로 인수하고, 장춘역 이북은 러시아가 그대로 운용하는 것으로 했는데, 일본이 인계받은
선로를 곧바로 표준궤로 바꾸었기 때문에23) 대련에서 하얼빈까지 열차가 직통할 수 없게 되었
다. 따라서 승객들은 장춘역에 내려 맞은 편 플랫폼에 대기하고 있던 동청철도 열차로 환승하는
방식으로 하얼빈으로 들어갔다(越沢明, 2004). 일본인들은 만철 열차보다 더 육중한 덩치를 가진
동청철도 열차와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장신의 백인 승무원들을 바로 눈앞에서 보며 하얼빈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실감했을 것이다.
당시 하얼빈 가이드북에 소개된 하얼빈의 풍경은 아르누보 양식의 하얼빈역, 둥근 지붕을 얹은
러시아정교회 성당들, 동청철도 시설들, 송화강변의 여름과 수영복을 입은 백인들, 발레학교의
러시아 소녀들과 러시아 클래식연주단, 츄린백화점과 키타이스카야 거리, 중국인지구, 그리고 유
럽풍의 카페 · 바 · 카바레 등으로 이미지화되어 있었다. 1928년 판 여정과 비용개산에는 하얼
빈 투어 권장코스를 다음과 같이 제시해 두고 있다.24)
新市街 → 埠頭區공원과 시장 → 중앙사원 → 동청철도 → 츄린백화점 → 상품진열소
→ 러시아식 사우나 → 송화강 → 傳家甸
22) 滿鐵本線은 <대련-심양-장춘> 간의 선로를 가리켰다.
23) 만철이 동청철도의 광궤를 표준궤로 바꾼 것은 우선 표준궤인 조선철도와의 연결이 중요했기 때문
이고, 또 하나는 러시아군이 철도를 통해 곧바로 대련까지 남하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철도
가 서로 맞닿는 경우 군사적인 목적으로 상대 철도와 다른 궤도를 채용하는 것은 철도부설사에서 흔
히 찾아 볼 수 있는 일이다.
24) 여정과 비용개산 1928년 판 524, 534쪽.
236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하얼빈 관광은 하얼빈역을 중심으로 시계방향으로 하얼빈 중심부를 순회하는 방식으로 짜여져
있었다. 신시가는 하얼빈역의 아래쪽으로 있는 사각형 계획지구로, 철도관리국과 철도클럽 등의
동철철도 부속건물과 경찰서 등의 행정시설, 영국·일본영사관을 비롯한 각국 외교관저 등 하얼빈
시의 주요 시설들이 자리 잡고 있던 곳이었다. 도쿄 모더니티의 핵심 공간인 긴자가 앵글로색슨
스타일을 의도적으로 연출하여 인위적 분위기가 있었던 데 반해(吉見俊哉, 2007), 하얼빈은 슬라
브 유럽풍의 건물들이 전혀 어색함 없이 즐비하게 서 있었다. 그곳을 위화감 없이 거닐고 있는
백인들을 보면서 관광객들은 하얼빈의 ‘진정성(authenticity)’을 체감하였다.
이 완벽한 유럽도시의 풍경에서 빠져나와 서북쪽의 부두구로 가는데, 이곳에는 하얼빈의 명소
중 하나인 키타이스카야가 있었다.25) 이곳에는 러시아, 폴란드, 벨기에, 영국 등 유럽 무역회사
들의 점포는 물론이고, 유태계 은행과 일본인 상점들도 일직선상의 대로에 늘어서 있어, 마치 세
계무역박람회장을 연상케 하는 분위기를 풍겼다. 키타이스카야를 둘러 본 후 관광객들은 신시가
로 다시 돌아와 그 중심에 있는 중앙사원을 방문하였다. 이 중앙사원을 비롯하여 러시아의 전통
건축 양식인 이즈바 스타일로 시내 곳곳에 서있는 러시아교회 건물들은 하얼빈의 도시풍경에 있
어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26) 중앙사원의 왼쪽편에는 하얼빈을 건설한 동청철도의 본사와 러시아
군사령부가 있었다.
이렇게 주요 시설을 돌아 본 후, 관광객들은 유럽 본사직영의 츄린백화점 하얼빈점을 방문하여
유럽산 최고급 상품을 쇼핑하고 일본인 상인조합이 만든 상품진열관에서 기념품을 사는 것으로
짜여졌다. 이 일정이 끝난 후 러시아식 사우나에서 피로를 푼 후, 송화강변에서 저녁 노을을 구
경하고 밤에는 중국인 지구인 전가전에 가서 여흥을 즐기도록 되어 있었다. 이 코스는 그 이후에
도 기본 골격이 거의 유지되었는데, 1931년 판 여정과 비용개산에는 하얼빈의 밤을 즐기는 팁
이 추가되어 있다.
“밤 11시 반 <카라 카바레>에서의 러시아 댄스 관람도 묘미이다 (차는 1엔, 식사는 3,4불)”.
25) ‘키타이’는 중국인을 뜻하는 말이고 ‘스카야’는 거리라는 뜻이다. 따라서 키타이스카야는 중국인거리
라는 의미가 되는데, 실제 중국인거리는 그 옆인 전가전이었다. 그럼에도 키타이스카야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원래 동청철도회사에서 하얼빈 도시계획을 할 때, 신시가는 직영 개발하고 하얼빈역 위쪽
지역은 민간에 불하하여 개발되도록 구상하여 그 지역을 러시아구역이 아니라는 뜻에서 키타이스카
야라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키타이스카야는 상점가로 발달하여 중국상인들보다는 유럽계, 일본계 회
사자본이 자리를 잡았다.
26) 하얼빈의 러시아교회 건물들은 단 1채만 제외하고는 모두 문화대혁명기에 파괴되어 버렸다. 남아
있는 성소피아성당은 현재 하얼빈의 최고 관광명소로, 하얼빈을 상징하는 건물이 되었다.
만주의 재발명: 제국일본의 북만주 공간표상과 투어리즘 237
1926년 하얼빈의 일본상인조합에서 일본인 관광
객 유치를 위해 만든 상품진열관에서 홍보용으로
제작한 하얼빈안내에는 일본계 회사·상점들의 광
고가 대거 실려 있는데, 그 중에는 레스토랑, 바,
카바레 광고도 실려 있다. 아래 그림은 바(bar) 광
고로, “오후 8시부터 댄스가 있습니다”라고 하는
문구와 함께, 하이힐에다 어깨를 드러내고 짧은 치
마를 입은 단발머리 여성과 춤을 출 수 있다는 삽
화를 사용하였다. 1920년대 말부터 일본본토에서
‘미풍양속’에 해가 된다는 이유로 댄스홀과 카페에 대한 엄격한 통제 법규가 시행되면서(Tipton,
2012) 하얼빈의 밤은 그 매력을 더해갔다.
이처럼 하얼빈은 철도, 백인, 성당, 백화점 등 유럽 본토의 도시풍경을 직접 볼 수 있고, 밤에
는 유럽의 유흥문화를 직접 만끽할 수 있는 장소로 표상되었다. 이 유럽 도시는 아시아 대륙, 그
것도 ‘아시아의 발칸반도’라 불렸던 만주의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었고, 또 제국일본 대륙정책의
최선두인 만철과 철도로 닿아 있었다는 점에서 유럽 본토의 도시들과는 그 의미가 달랐다. 서구
의 모더니티를 향한 선망이 손에 잡힐 듯이 바로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그런 장소가 바로 하얼빈
이었다. 러일전쟁의 승리로 남만주 철도와 여순·대련을 손에 넣는 데 성공하였지만 ‘만주의 심장’
을 얻지 못했던 제국일본에게, 망국의 도시로서 만주 광야 속에서 외따로 빛을 내고 있던 하얼빈
은 러일전쟁의 완결과 제국의 완성을 의미했다.
하지만 하얼빈은 중국 영토의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소련의 영향력이 관철
되는 곳이었기 때문에, 일본이 꿈꾸기에는 버거운 도시였다. 흔히 만주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點과 線의 지배’라는 말로 비유한다. 일본은 만주의 철도노선과 그 주요 연선도시만을 장악했을
뿐, ‘面’을, 다시 말해 광대한 농촌지역까지는 지배력이 미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하는 말이다.
게다가 하얼빈으로 이어진 선은 실선(實線)이 아니라 쇄선(鎖線)이었고, 하얼빈이라는 만주광야에
찍힌 작은 점마저도 사실 색깔이 달랐다.
238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4. ‘국제도시’와 ‘개척지’ : 북만주 공간 재편성
1931년 만주사변과 1932년 만주국 건국은 만주 지역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신생 독립국’ 만
주국은 정치적 정당성에 있어 치명적 약점이 있었기 때문에 ‘문화정치’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특
히 제국일본은 복잡하게 뒤얽혀 있던 만주의 문화지리를 만주국 통치이념에 부합하도록 재조직
해야만 했다. 소련을 향한 불온한 상상이 펼쳐지던 하얼빈과 비적의 영토 북만광야는 만주국의
국가통합에 있어 쇄기처럼 삐져나온 불편한 존재였다. 하얼빈과 비적을 어떻게 ‘순치’하는가 하
는 것은 만주를 일본제국의 영토로 편입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관건문제였다.
동양관광의 중심 만주국
만주국의 문화정치는 다방면에서 全방위적으로 전개되었는데, 관광도 그 중 하나였다. 만주국
은 건국 직후부터 건국의 정당성을 알리는 수단으로 관광의 효과에 주목하여, “관광만주국”을 슬
로건으로 내걸고27) 관광객 유치에 노력을 기울였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관광지를 개발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했다. 우선 만주국은 기존의 관광지인 남만주 일대를 재발굴하는 데 착수하였
다. 역사적 공간을 재정비하고 주요 도시를 관광지화하고자 하였다. 「關東洲의 史蹟」이 신문기사
에 연재되고, 산업도시 무순이 “炭都 무순, 大관광지 계획”을 발표하여 대규모 도시계획을 추진
한 것이 그 일례이다.28) 만주국 철로총국(鐵路總局)도 만철의 야마토호텔 체인을 모방하여 직영
호텔 설립에 착수하여 제1지점으로 하얼빈에 철로총국호텔을 오픈하였다. 철로총국은 관할 하에
있는 만주국 국철의 연선에 호텔을 집중적으로 설립하고자 하여, 만철본선에서 빗겨나 있던 吉
林, 농경문명의 탄생지 열하성의 承德, 그리고 중국본토의 관문인 山海關에까지 호텔을 설립한다
는 계획을 발표하였다.29)
이러한 만주국의 노력이 효과가 있었는지, 1936년 늦봄부터 만주국으로의 관광객이 크게 증가
하였다. 특히 북미 지역으로부터의 관광객이 많았는데, 이들은 중국 경유, 일본 경유, 시베리아
경유라는 세 루트를 통해 만주로 들어왔다. 만주국에서는 ‘미국인들이 樂土滿洲의 매력’에 빠졌
고, 이제 만주는 ‘동양관광루트의 왕좌’에 올랐다고 기뻐하였다.30) 1936년 여름 만주는 ‘관광만
주’의 실현가능성에 들떠 있었는데, 이를 더욱 증폭시키는 세계적인 호재가 날아 들어왔다. 다름
27) 朝日新聞 滿洲版(復刻板) 1935년 12월 ??일자.
28) 朝日新聞 滿洲版 1936년 5월 6일자.
29) 朝日新聞 滿洲版 1936년 6월 7일자.
30) 朝日新聞 滿洲版 1936년 7월 8일자.
만주의 재발명: 제국일본의 북만주 공간표상과 투어리즘 239
아니라, 1936년 7월 31일에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1940년 제12회 올림픽을 도
쿄에서 개최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만주국 관광국은 도쿄 올림픽 개최가 ‘관광만주’를 완전히 굳힐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으로 보
고, 관광객 유치 정책을 더욱 적극화하였다. 도쿄 올림픽을 보러 오는 관광객들을 만주국으로도
끌어들인다는 전략 하에 관광시설을 대대적으로 확충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뒷받침할 반관반민기
구로 관광협회도 곧 설립한다고 공표하였다.31) 만주국 관광의 키를 쥐고 있던 만철도 관동군의
후원 하에 만주관광 정책에 보다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만철은 관광홍보부서로 ‘국제선전계’를
창설하여 ‘도쿄 올림픽을 계기로 만주를 세계에 알리는 선전’을 담당하도록 하였다.32) 1937년에
들어가면 만주국은 관광위원회를 설치하여 관광사업을 국가의 ‘통제’ 하에 두어 ‘관광만주’의 실
현을 국가가 선도한다는 방침을 발표하고,33) 곧이어 도쿄 올림픽을 직접 겨냥한 ‘만주관광5개년
계획’을 수립34)하여 관광사업을 하나의 국책사업으로 삼았다.
그런데 1937년 7월 7일 발발한 ‘노구교사건’이 일본의 계획과 달리 ‘중일전쟁’이라는 장기총력
전으로 비화하자 ‘일만블록’ ‘일만지블록’이라는 제국일본의 광역국방경제 구상이 수면 위로 부상
하였다. 이에 일본본토의 철도성에서는 ‘日滿支관광블록’ 구상을 입안하고 있었다.35) 만주국이
제국일본의 블록 구상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이상, ‘관광만주’라는 슬로건으로는 해외관
광객들을 설득할 수 없었다. 만주국에서 주목을 받은 것은 바로 ‘國際’라는 용어였다.
일본은 만주사변과 만주국 건국 문제로 ‘국제연맹’에서 탈퇴하였고 ‘국제주의자들’은 힘을 잃었
지만, 도리어 1930년대 제국일본에서는 국제라는 용어가 빈번하게 사용되었다. 만주에서도 국제
라는 말은 대단히 적극적으로 사용되었는데, 당시 만주 발행 신문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국제’라
는 말을 어렵게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특히 만주국의 관광정책의 각 사항에는 ‘국제’가 입버릇
처럼 붙어 있었다. 예를 들면, 호텔의 이름도 이제 일본풍이 물씬 풍기는 ‘야마토호텔’ 보다는
‘국제호텔’이 선택되었다.
만주국적의 국제도시 하얼빈과 새로운 중심 신경
하얼빈은 만주국이 내세운 ‘국제’라는 말의 내용을 채워줄 수 있는 역사를 가진 현실의 도시였
다. 하얼빈은 만주국 건국 이전부터 러시아인 · 중국인 · 일본인 · 유태인 · 조선인 등등이 뒤섞
31) 朝日新聞 滿洲版 1936년 8월 5일자.
32) 朝日新聞 滿洲版 1936년 8월 22일자.
33) 朝日新聞 滿洲版 1937년 2월 20일자.
34) 朝日新聞 滿洲版 1937년 6월 7일자.
35) 朝日新聞 滿洲版 1938년 4월 ?일자.
240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여 살던, 만주국의 ‘오족협화’를 선취하고 있었던 다인종도시였다. 이른바 ‘국제도시 하얼빈’은 만
주국 건국 이전인 1920년대 말에도 하얼빈의 이러한 무국적성 · 혼종성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
었지만, 여기서 ‘국제’를 적극적으로 잡아 꺼내어 활용한 것은 바로 만주국 시기였다. 만주국에서
는 하얼빈에 ‘국제’라는 기표가 부여되었고, 국제도시 하얼빈은 만주국의 국제성을 알리는 표상
이 되었던 것이다.
이제 상상의 헤테로토피아 하얼빈은 주권권력에 의해 국제도시 하얼빈으로 주조되었다. 하얼빈
이 국제도시가 되기 위해서는 그 내부의 이질성은 제거되어야만 했다. 하얼빈은 분명히 제국일본
의 국제도시였고, 더 이상 무국적성은 용납되지 않았다.36) 무국적성과 쌍을 이루던 하얼빈의 혼
종성은 오족협화의 원리로 위계화되었다. 만주국은 ‘복합민족국가’를 표방했지만 그 속에는 일본
을 중심으로 한 위계질서가 구축되어야만 했다(윤휘탁, 2013). 더 이상 하얼빈의 주인이 누구인
지 다툴 필요도 없었고, 이제 러시아인들에게 주눅 들지 않아도 되었다.
영토주권이 확립되자 만주국은 하얼빈의 인구를 파악하기 시작하였다. 이동진의 연구에서 볼
수 있듯이, 만주국은 하얼빈의 유흥업 종사자들을 인종별로 분류하여 그 숫자를 일일이 기록·관
리하였다(이동진, 2005). 하얼빈의 밤은 ‘직업여성들’에 대한 면밀한 조사와 관리로 그 민낯을 드
러냈다. 유흥업 여성들을 한명한명 숫자로 파악하는 수준의 인구통치가 진행된 하얼빈을 더 이상
헤테로토피아로 상상할 수는 없었다.
만주국의 주권권력은 人口(→국민)와 쌍을 이루는 地理(→영토)에까지 관철되었다. 만주국은 국
제 이외에도 중앙, 특별, 계획 등 지리를 통치하는 용어를 빈번히 사용하였다. 국제가 만주국의
대외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라면, 중앙·특별·계획은 만주국 내의 정치지리를 구축하는 용어였다. 중
앙과 언저리를 나누고,37) 특별한 곳과 주변적인 곳을 구분하고,38) 계획적인 곳과 무질서한 곳으
로 나누어39) 위계화함으로써, 이질성과 혼종성으로 가득 찬 만주를 인식 가능한 영토로 구획하
고자 했던 것이다. 이 중에서도 ‘중앙’이야말로 만주국의 지리통치를 가장 잘 표현한 용어이다.
신경은 만주국 영토의 사방 끝단을 지도 위에 연결하여 그렸을 때, 그 사각형의 맨 정중앙에 위
치한 지점이었다. 만주국은 만주 지역의 기존 주요 도시인 대련, 봉천, 하얼빈을 두고 철도종점
도시에 불과했던 장춘을 굳이 ‘신경’이라는 이름의 수도로 결정하였다. 기존 도시들의 역사성과
36) 그럼에도 백계러시아인들 중 상당수는 소련의 회유와 종용에도 불구하고 무국적자로 남아 불이익을
감수하였다.
37) 국립중앙도서관, 국립중앙박물관, 중앙관상대 등의 국가 지식장치들과 만주중앙은행 등의 경제기구
들을 들 수 있다.
38) 신경 특별시와 하얼빈 특별시 등의 행정구획들과 만주국의 경제기구였던 수많은 특수회사들, 또 관
동군 특무대, 관동군특별연습 등 만주국에서는 특별하고 특수한 것들이 넘쳐났다.
39) 경제개발5개년계획 등의 무수한 계획들과 통제 정책들.
만주의 재발명: 제국일본의 북만주 공간표상과 투어리즘 241
현재성은 무시되고, 공간기하학의 중심이 현실의 수도가 되었던 것이다. 북만주의 중심도시 하얼
빈은 ‘국제도시’로 규정되었고, 남만주의 중심도시 대련은 ‘경제도시’로 격하되었다. 대련의 만철
은 신경의 요구에 굴복하였고, 관동청은 폐지를 종용받았다가 청사만 남는 방식으로 존속되었다.
만주국의 중앙인 신경에는 일본본토에서는 불가능한 대규모 도시계획이 실시되었고, 제국 내
다른 지역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규모의 국가기구 건물들이 들어섰다. 신경은 대련과 봉천 등지
에 흩어져 있던 식민기구들을 끌어 모았다. 심지어 신경은 ‘하얼빈의 밤’까지 끌어 당겼다. 1937
년 신경에서 발행된 新京案內에는 신경의 카페 · 바 · 찻집 · 카바레 · 화류계 · 중국기녀· 댄
스홀을 소개한 부분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서는 이제 신경에서도 “먹고 마시고, 러시아여성을 껴
안고 미친 듯이 춤을 출 수 있는” 하얼빈식 카바레가 들어왔다고 하며 “밤의 신경”이 존재함을
알려준다.40) 하지만 신경은 강대한 정치권력이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는 공간이었을 뿐만 아니라,
제국일본이 치장한 만주 ‘쇼케이스’의 대표도시로 과장된 인공성으로 가득 찬 도시였다(임성모,
2009; 김백영, 2009). 신경의 카바레는 이러한 정치도시에서 발달하는 유흥과 환락의 홍등가로,
하얼빈의 특유한 매력을 흉내 낸 것에 불과하였다.
철도와 개척으로 순치되는 광야
만주국의 중앙은 점차 그 위상을 강화해 갔지만, 여전히 그 외부의 광대한 농촌지대는 문제지
역으로 남아 있었다. 1920년대는 물론이고 만주국 건국 초기에 이르기까지 일본은 물론이고 다
른 어느 세력도 북만주의 ‘면’을 장악하지는 못하였다. 소련은 동청철도에 대해서만 영향력을 갖
고 있었을 뿐 드넓은 북만주의 광야에는 힘이 미치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동북군벌이 ‘면’을 실
질적으로 지배한 것도 아니었다. 면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철도를 먼저 장악해야 했지만 동북군벌
의 ‘만철 대항선’ 부설계획과 동청철도 회수계획은 부분적으로만 진행되었을 뿐이었다(徐徹,
2011). 하얼빈이 이 세력다툼의 교착점이라면 하얼빈 밖의 광야는 국가 주권의 공백지대였다. 하
얼빈을 헤테로토피아로 상상할 수 있었던 것은 비적이 활보하고 일본 ‘대륙낭인’이 헤매고 다니
던 북만주 벌판을 배경으로 했기 때문일 것이다. 푸코의 표현을 빌면, 하얼빈은 북만의 광야를
떠도는 배와 같은 존재였다(Foucault, 2009: 58).
만주국은 북만주 광야에서 비적과 마주쳤다. 강도와 의적의 경계를 넘나들고, 때로는 항일게릴
라가 될 수도 있었고, 때로는 만주국군이 될 수도 있었던 이 무장집단은 만주의 광야를 상징하는
존재였고, 스스로 만주 벌판의 주인임을 자처하였다. 이들은 단순한 도적떼가 아니라 만주국 “건
국에 필요한 경제적, 군사적 자원을 두고 만주국과 다투는 경쟁자”로 반드시 소탕해야만 했다(한
40) 永見文太郎, 新京案內 1937년 판, 新京案內社, 124쪽.
242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석정, 2007: 76). 그렇기 때문에 만주국은 비적들을 타자화하고 또 ‘共匪’로 규정하였다(정종현,
2009).
비적의 저수지인 농민들은 ‘匪民분리’를 통해 왕도낙토 만주국의 품으로 포섭해야만 했다. 만
주국은 개척총국을 설치하고 만철과 만주척식공사를 동원하여 북만의 광야에 대한 대규모 개척
사업을 실시하였다. 그래도 되지 않는 지역은 관동군과 만주국군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소개(疏開)
작전을 펼쳤다. 특히 연해주에서 흑룡강을 따라 이어진 소련-만주 국경지대는 철저한 ‘치안숙정
공작’에 의해 제국의 국방을 위협하는 요소들을 제거해야 할 ‘특수지대’로 규정되었다. 1938년부
터 이 소개지·특수지에는 투철한 제국의식을 훈련받은 일본인 농업이민단이 차례로 배치되었다
(손춘일, 1999; 윤휘탁, 2006). 만주국은 북만주의 광야를 제국일본의 개척지, 군사요충지로 구획
하고 배치함으로써, 더 이상 抗日과 공산주의를 향한 불온한 꿈이 만주를 떠돌지 않도록 하였다.
비적의 땅이었던 북만주의 벌판은 일본농민들이 개척해야 할 광대한 ‘黑土’로 표상되었다. 근
면성실한 일본농민의 손길이 닿고 제국일본의 기술·자원이 투입된다면, 방치되었던 이 흑토의 무
한한 잠재력을 실현시킬 수 있을 것이라 기대되었다. 만철의 조사팀과 홋카이도제국대학의 교수
들은 북만주에서 대규모 기계화 영농의 가능성을 면밀히 검토하였다. 만주국에서는 항공기를
동원하여 북만주의 지형을 세밀하게 촬영하였다. 이 모든 조사활동이 실질적 힘으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철도망이 구축되어야만 했다. 건국 3년 만인 1935년 만주국은 하얼빈-北安
-黑河(아이훈)를 잇는 빈북선-북흑선을 개통하여, 옛날 아이훈 조약이 체결되었던 만주의 북쪽
끝 흑하로부터 러일전쟁으로 얻은 만주의 남쪽 끝인 여순까지 이어지는 만주 남북 종단철도를
마침내 완공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긴 협상 끝에 소련으로부터 동청철도 全노선을 거액의 자
금으로 인수하고, 인수 즉시 광궤 선로를 표준궤로 바꾸었다. 이로써 제국일본은 만주의 동서
남북을 관통하는 철도망을 완비하여, 러일전쟁 때부터 꿈꿔왔던 만주의 철도망을 완전히 수중에
넣게 되었다.
더 나아가 제국일본은 북만주와 일본본토를 잇는 최단거리 노선으로 조선의 北鮮鐵道에 주목
하고, 만주 길림과 조선 회령을 잇는 길회선과 북선철도를 연결하는 작업을 만철에 지시하였다.
그간 조선총독부, 만주국, 만철 간의 입장 차이로 곳곳이 단선되어 있던 북부조선의 철도와 동만
주의 철도가 하나의 선로로 일체화되었던 것이다. 이제 일본본토에서 대련과 부산을 거치지 않고
서도 곧바로 북만주의 국제도시 하얼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최단거리 교통망, 즉 ‘북선루트’가
새로이 구축되었다.41) 여기에 만철이 청진-하얼빈 간 직통특급열차를 투입하자, 이 북선-동만주
-북만주를 잇는 선로는 “신칸센(新幹線)”이 되었다.42)
41) 북선루트에 대해서는 정재정의 연구와 田中隆一의 연구를 참조.
만주의 재발명: 제국일본의 북만주 공간표상과 투어리즘 243
1938년 조선 북부의 청진항은 북선루트를 통해 북만주로 들어가려는 만주이민단과 관광객으로
북적였다. 밀려오는 관광객과 물자로 북선루트의 수송능력은 벌써 한계를 드러낼 정도였다.43) 청
진역에서 관광객들은 만주개척의 사명을 띠고 북만주 행 열차에 탑승하고 있는 이민단의 행렬을
보고 가슴 먹먹한 제국민(帝國民)으로서의 동료애를 느꼈다. 하얼빈 행 직통열차에 탑승한 관광
객들은 그간 베일에 싸여 있던 조선인들의 땅 간도와 동만주의 풍경을 차창 밖으로 감상할 수
있었다. 토속적인 주택은 민속학적 흥취를 돋우었고, 동만주의 깊은 산림은 풍취미를 더해 주었
다.44)
이렇게 十字 형 간선철도 노선이 완비되고, 거기에 보조선으로 북선지역을 이용한 최단거리 노
선까지 추가됨으로써, 제국일본의 식민지 디자인을 북만주에도 구현될 수 있게 되었다. 1939년
관동군과 만주국군은 최후의 동북항일연군 부대를 섬멸함으로써 치안숙정공작을 완수하였다. 남
은 항일게릴라들은 흑룡강 국경을 넘어 소련으로 달아났다.
5. 결론: 제국의 공간과 냉전의 풍경
푸코는 ‘식민지는 그 자체로 헤테로토피아일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하얼빈과 만주는 상상된
헤테로토피아에 불과하였다. 제국일본에 있어 북만주는 슬라브 러시아와 공산주의 소련에 대한
선망과 공포가 뒤섞인 미지의 세계였다. 대중소설과 관광안내서는 여기에 헤테로토피아의 분위기
를 입혔다. 이 헤테로토피아는 ‘제국의식’이 규정한 테두리 속에서, 관광안내서가 창출한 상상의
헤테로토피아였다. 그래서 하얼빈에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헤테로토피아로부터는 점점 멀어지는
역설이 생겼던 것이다. 1928-29년에 일본인 관광객들은 마침내 하얼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지
만, 이미 여행업체들이 조직해 놓은 안전하고 손쉬운 장소만 접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관광지
밖의 공간은 그저 러시아인들과 중국인들의 일상이 영위되던 생활의 장소였을 뿐이었다.
상상된 헤테로토피아 만주는 만주국의 ‘복합민족국가 상상’(윤휘탁, 2013)으로 대체되었다. 만
주국은 오족협화의 원리로 그 내부의 인종적 복합성을 해소하려 하였고, ‘국제’라는 표상으로 하
얼빈이 갖고 있던 무국적성을 뒤덮어 버렸다. 만주의 광야는 ‘개척민의 땅’으로 신생 만주국의
42) 여정과 비용개산 1940년판, 914쪽. 전후 일본에 교통혁명을 불러일으킨 신칸센을 부설한 것은
바로 ‘만주파’였다(小林英夫, 2005). 북만주 신칸센에 대해서는 정재정의 최근 논문(2015)를 참조할
것.
43) 朝日新聞 滿洲版 1937년 1월 6일자.
44) 여정과 비용개산 1940년판, 997쪽.
244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열기를 보여주는 공간으로 포장되었다.
하지만 그 이면의 실상은 참담하였다(김경일 외, 2003). 하얼빈은 관동군 특무의 거점이었고
북만주의 철도는 철저히 군사적 관점에서 부설되었다. 하얼빈의 공장 중 태반은 관동군 특무가
‘특수임무’로 사용한 유령회사였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하얼빈 외곽에는 731부대가 생체
실험을 하고 있었다. 하얼빈 밖의 흑토 대지는 불온한 기운이 감도는 ‘특수지대’로 일반인들의
출입은 제한되어 있었다. 관광객들은 차창 밖으로 북만주 광야의 분위기를 잠깐 엿볼 수 있었을
뿐이었다(김백영·조정우, 2014). 제국일본의 구성원들도 이 균열의 낌새를 느꼈는지 ‘명랑 만주국
은 죽음에 대한 상상력’으로 가득 차 있었고, 누구도 돌보지 않는 ‘우크라이나인 공동묘지’에서
만주국의 현실을 목도하였다(임성모, 2009; 손유경, 2009; 조은주, 2014). ‘이등신민 조선인’이
허상이라는 것은 만주 도시의 재만조선인들의 생활상만 봐도 쉽게 간파할 수 있는 것이었다(윤휘
탁, 2001; 김경일 외, 2003). 문학사 연구들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조선인 문학가·지식인들은 기
꺼이 만주를 방문하였지만, 만주에 도착하자마자 만주국의 이념에 내재한 균열과 모순을 금세 눈
치 챘다. 이효석이 조선인 개척촌을 방문하기를 주저하고, 白石이 만주국 국무원 관료생활을 6개
월 만에 그만 둔 것은 그 불편함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1941년 큰 기대를 품고 하얼빈으로 이주
한 서정주가 ‘하얼빈과 같은 것은 없었다’고 하며 조선으로 다시 돌아온 일은 하얼빈의 실상을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박수연, 2014: 59-60).
그런데 푸코는 헤테로토피아는 언제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이라 강조하였다. 그는 헤테로토피아
를 선언적으로 사용하면서 그 개념을 명확히 정리해 주지는 않았는데,45) 몇 가지 특징적인 사례
는 들어 두었다: 박물관, 도서관, 정신병원, 감옥, 배, 묘지, 극장, 휴양지, 매음굴, 거울 등. 헤테
로토피아는 안과 밖이 구별되지 않으며 또 다른 시간성의 차원에 놓여 있기 때문에 공간이기도
하면서 非공간이기도 하다. 비일상적인 경험을 제공함으로써 이 공간은 지식권력이 은폐한 것을
드러내기도 하며 생명정치의 은밀한 작동을 노골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어떤 작은 변이도 놓치
지 않겠다는 듯이 생물체 표본들을 축적해 놓은 자연사박물관에서 우리는 근대과학의 폭력성을
공간적으로 경험한다. 또 문서고에 누적된 엄청난 양의 문서들에서, 푸코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지식권력의 계보를 엿볼 수도 있다. 정신병원과 감옥, 매음굴은 인간의 신체에 작동하는 규율권
력의 매커니즘을 은폐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실재함을 알려준다.
이 헤테로토피아는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것이지만, 만약 이를 굳이 지도 위에 표시한다면
그것은 아마 어떤 경계지역이 될 것이다. 1937년 간도의 도문·훈춘 국경지방에는 전운이 감돌았
45) 헤테로토피아론을 역사적 설명에 적용시키기 어려운 것은 푸코가 헤테로토피아가 어떻게 출현하는
지를 체계적으로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주의 재발명: 제국일본의 북만주 공간표상과 투어리즘 245
다. 관동군은 만선척식회사에 지시하여 훈춘 이북의 조선인들을 소개시켜 집단부락에 수용시켰
다. 이를 감지한 소련도 그 맞은편 연해주의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집단이주 시켰다. 소련과
일본은 연해주-간도 국경 일대를 임박한 군사작전을 위해 無主地(terrae nullius)로 만들고자 했
던 것이다. 그곳에서 살던 농민들, 그리고 국경을 넘나들며 밀무역을 하던 사람들은 ‘집단부락’으
로 강제수용되었다. 현경준이 1938년에 쓴 「유맹」에서 바로 도문의 이 조선인 집단부락을 헤테
로토피아로 형상화한 것(노상래, 2014)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1945년 8월 일본의 패전으로 만주국은 소멸하였다. 하얼빈은 소련군이 점령하였고, 북만 흑토
의 개척민들은 방기되었다. 만주국이 붙잡고 있던 ‘국제’라는 표상은 散破되어 흘러 나갔다. 방대
한 미군이 주둔하게 된 ‘玉碎의 땅’ 오끼나와의 나하에는 ‘국제거리(国際通り)’가 형성되어 미군
물자가 암거래되고 미국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과 미군을 상대로 한 유흥시설들이 빼곡히 들어섰
다(김백영, 2008). 대륙을 향한 관문 중 하나였던 식민도시 부산에는 쏟아져 나오는 미군의 물자
를 바탕으로 ‘국제시장’이 형성되었고, 그 바로 옆에는 헐리우드 영화와 만주 웨스턴을 상영하는
극장들이 즐비하게 늘어섰다. 鮮滿 투어의 필수코스였던 동래온천의 일본식 료칸은 국제호텔이
되었다. 한편, 제국농업의 재편성과 식민지 개발을 고민하던 식민정책학은 국제경제학으로 이름
을 바꾸었다. 일본을 패배시킨 연합국(United Nations)을 뜻하는 UN은 그 속에 ‘international’
이라는 말이 전혀 없음에도 ‘국제연합’으로 멋대로 번역되었다(田中明彦, 2007). 제국의 소멸로
‘제국주의’와 ‘국제주의’의 양립을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게 되자, ‘국제’라는 기표는 舊제국의
곳곳에 냉전의 풍경을 만들어 내면서 유행처럼 퍼져 나간 것이다.
246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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荒山正彦, 2012. 「旅費と費用概算(1920年~1940年)にみるツーリズム空間―樺太・台
湾・朝鮮・満州への旅程―」, 関西学院大学先端社会研究所紀要 8号.
越沢明, 1988. 満洲国の首都計画 : 東京の現在と未来を問う, 日本経済評論社.
越沢明, 2004. 哈爾浜(はるぴん)の都市計画―1898‐1945, 筑摩書房
248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田中隆一, 2007. 滿洲國と日本の帝國支配, 有志舍.
小林英夫, 2005. 滿州と自民黨, 新潮社,.
姜克實, 2006. 「「滿洲」幻想の成立過程—いわゆる「特殊感情」について」, 國際日本文化硏究センタ
紀要 日本硏究 32.
Duss P., 1998. 「想像の帝国—東アジアにおける日本—」(浜口裕子 譯), 帝国という幻想, 青木
書店.
Jackson P., & Penrose J. eds., 1993. Constructions of race, place and nation, London:
UCL Press
Jacobs Jane M., 1993. “″Shake ‘im this country″: the mapping of the Aboriginal sacred in
Australia-the case of Coronation Hill”, in Constructions of race, place and
nation, Jackson P., & Penrose J. eds., London: UCL Press.
만주의 재발명: 제국일본의 북만주 공간표상과 투어리즘 249
《M E M O》
250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M E M O》
綜合討論
2
綜 合 討 論 2
參加者全員
251
252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M E M O》
綜合討論
《M E M O》
2
253
254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M E M O》
綜合討論
《M E M O》
2
255
256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M E M O》
翰林大學校 日本學硏究所
2015
國際學術
심포지엄
參加者
翰林大學校 日本學硏究所 2015 國際學術심포지엄
參加者 PROFILE
(가나다順)
PROFILE
257
258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姓名:
河田明久 (KAWATA Akihisa)
現 職 : 千葉工業大学 教授
學 歷 : 早稲田大学大学院 文学研究科芸術学(美術史)専攻 博士後期課程 単位取得退学
經 歷 : 早稲田大学、学習院大学、多摩美術大学、女子美術大学、他で非常勤講師、
千葉工業大学准教授をへて現職
著書 : 『日本美術全集18巻 戦争と美術』(編著、小学館、2015)
『画家と戦争 日本美術史の空白』(編著、平凡社、2014)
『美術批評家著作選集 第3巻 新聞美術記者の群像』(編著、ゆまに書房、2010)
『画家たちの「戦争」』(共著、新潮社、2010)
『戦争と美術 1937-1945』(共編著、国書刊行会、2007)
『クラシック モダン 一九三〇年代日本の芸術』(共編著、せりか書房、2004)
『イメージのなかの戦争 日清・日露から冷戦まで』(共著、岩波書店、1996)
ほか
論 文 : 「作戦記録画をめぐる思惑のあれこれ」
(『戦争/美術 モダニズムの連鎖と変容』 神奈川県立近代美術館 2013)
「阪急西宮球場の博覧会空間―支那事変聖戦博覧会からアメリカ博覧会へ」
(『記憶の痕跡―WIJLC報告』 早稲田大学国際日本文学・文化研究所 2011)
「板垣鷹穂・「あたらしき芸術」以後の合理主義」
(『板垣鷹穂 クラシックとモダン』 森話社 2010)
「描く兵士―日中戦争と「美術」の分際」
(『昭和期美術展覧会の研究 戦前篇』 東京文化財研究所 2009)
「戦時期美術作品の複数制作について」
(『近代画説』15号 明治美術学会 2006)
ほか
email: [email protected]
[email protected]
翰林大學校 日本學硏究所
姓 名:
姜泰雄
2015
國際學術
심포지엄
參加者
PROFILE
259
(KANG Tae-Woong)
現 職 : 光云大學校 東北亞文化産業學部 副敎授
學 歷 : 東京大學 総合文化硏究科 (表象文化論 專攻)
經 歷 : 前 東京大學 外國人 客員硏究員
現 翰林大學校 日本學硏究所 編輯委員
現 서울大學校 『일본비평』編輯委員
等 歷任
著譯書 : 帝國日本의 文化權力 2 :政策·思想·大衆文化 (共著, 소화, 2014) *翰林大 日本學硏究所 硏究叢書
일본대중문화론 (共著, 방송통신대학출판부, 2014)
가미카제 특공대(神風特攻隊)에서 우주전함 야마토까지(宇宙戦艦ヤマト)
–戰後 日本의 戰爭映畵와 戰爭意識 (共著, 소명출판, 2013)
臺灣을 보는 눈 (共著, 創批, 2012)
複眼의 映像 : 나와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 (譯書, 小花, 2012) *日本學硏究所 日本學叢書
日本과 東아시아 (共著, 東아시아硏究院, 2011)
外 多數
論 文 : 「‘싸우는 미술’-아시아태평양전쟁기 일본의 미술은 어떻게 싸웠는가-」
(日本學報, 한국일본학회, 2014)
「優生學과 日本人의 表象 –1920~40年代 日本 優生學의 展開와 特徵-」
(日本學硏究, 檀國大學校 日本硏究所, 2013)
「滿洲開拓團 映畵 오히나타마을(大日向村)을 통해본 滿洲國의 表現空間」
(翰林日本學, 翰林大學校 日本學硏究所, 2012)
「歷史의 再現과 ‘歷史映畵’ 製作運動
「原爆映畵와 ‘被害者’로서의 日本」
(東北亞歷史論叢, 東北亞歷史財團, 2009) 外 多數.
e-mail : [email protected]
260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姓 名:
金容撤
(KIM Young-Chol)
現 職 : 高麗大學校 글로벌日本硏究院 HK敎授
學 歷 : 東京大學 文學博士 (東아시아近代 및 日本美術史 專攻)
經 歷 : 誠信女子大學校 專任講師 등 歷任
著譯書 : アジアの女性身体はいかに描かれたか: 視覚表象と戦争の記憶 (青弓社, 2013) 外 多數
論 文 : 「‘히시다슌소 (菱田春草)의 <과부와 고아(寡婦と孤兒)>에 대한 재검토」
(翰林日本學, 翰林大學校 日本學硏究所, 2014)
外 多數.
e-mail : [email protected]
翰林大學校 日本學硏究所
姓 名:
2015
國際學術
심포지엄
參加者
PROFILE
261
朴羊信 (PARK Yang-Shin)
現 職 : 翰林大學校 日本學硏究所 硏究敎授
學 歷 : 北海道大学 卒業 (日本近代史 專攻)
經 歷 : 現 翰林大學校 日本學硏究所 編輯委員
前 翰林大學校 翰林科學院 HK敎授
前 高麗大學校 東아시아硏究所 硏究敎授
等 歷任
著譯書 : 帝國日本의 文化權力 2 :政策·思想·大衆文化 (共著, 소화, 2014) *翰林大 日本學硏究所 硏究叢書
한 單語 事典 -文化-(驛書, 푸른歷史, 2013)
東아시아 槪念硏究 基礎文獻 解題 (共著, 翰林科學院, 2010)
陸羯南, 政治認識と對外論 (著書, 岩波書店, 2008)
開化期 在韓日本人 雜誌資料集1-2 (著書, 제이앤씨, 2005) 外 多數
論 文 : 「도고 미노루(東鄕實)의 植民政策論:農業植民論과 ‘非同化主義’」
(歷史敎育 第127輯 歷史敎育硏究會 2013)
「大正時期 日本ㆍ植民地 朝鮮의 民衆藝術論 : 로맹롤랑의 ‘帝國’橫斷」
(翰林日本學, 翰林大學校 日本學硏究所, 2013)
「近代 日本의 아나키즘 受用과 朝鮮으로서의 接續 : 크로포트킨 思想을 中心으로」
(日本歷史硏究 日本史學會 2012)
「近代日本, ‘進步’에서 ‘發展’으로 : 帝國主義 成立期의 歷史, 社會意識」
(翰林日本學, 翰林大學校 日本學硏究所, 2011)
「1930年代 日本의 ‘民族’槪念과 政治의 교착」
(韓日民族問題硏究, 韓日民族問題學會, 2010)
「日本의 戰後 民主主義와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歷史批評, 歷史批評社, 2009) 外 多數.
e-mail : [email protected]
262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姓 名:
禎
徐 完
(SUH Johng-Wan)
現 職 : 翰林大學校 日本學科 敎授, 日本學硏究所 所長
學 歷 : 筑波大学大學院 文藝言語硏究科 卒業 (日本中世藝能史 專攻)
經 歷 : 現 翰林大學校 日本學硏究所 所長
現 韓國日本言語文化學會 副會長
前 韓國日本學會 副會長
前 立教大學 客員敎授, 法政大學 客員硏究員, 筑波大學 外國人硏究員
前 國際日本文化硏究Center 外國人硏究員
等 歷任
著譯書 : 帝國日本의 文化權力 2 :政策·思想·大衆文化 (共著, 소화, 2014) *翰林大 日本學硏究所 硏究叢書
韓國日本學會40年史 日本 硏究의 成果와 課題 (共著, 寶庫社, 2013)
植民地 帝國50年의 興亡(譯書, 小花, 2012)
帝國日本의 文化權力: 學知와 文化媒體(共著, 小花, 2011)
歌舞音樂略史(譯注書, 소명出版, 2011)
植民地朝鮮と帝国日本:民族,都市,文化(アジア遊學138P) (共著, 勉誠出版, 2010)
外 多數
論 文 : 「総力戦体制下における芸能統制:能楽における技芸者証とその意味を中心に」
(外國學硏究 第25輯 中央大學校 外國學硏究所 2013)
「伎樂」追跡考: ‘舞’에서‘樂’으로」
(翰林日本學 第 22輯 翰林大學校 日本學硏究所 2013)
「1980年代 韓國日本學會 活動과 硏究成果」
(日本學報第91號, 韓國日本學會, 2012)
「植民地朝鮮における能ー京釜鐵道開通式における「國家藝能」能」
(アジア遊学138, 勉誠出版, 2010) 外 多數.
e-mail : [email protected]
翰林大學校 日本學硏究所
姓 名:
宋錫源
2015
國際學術
심포지엄
參加者
PROFILE
(SONG Seok-Won)
現 職 : 慶熙大學校 政經大學 政治外交學科 敎授
學 歷 : 京都大学 法學硏究科 卒業 (日本政治 文化 專攻)
經 歷 : 現 翰林大學校 日本學硏究所 運營委員
現 國際移住文化 포럼 事務總長
前 日本學術振興會(JSPS) 特別硏究員
等 歷任
著譯書 : 민족과 네이션,(韓國學術情報, 2015) *翰林大 日本學硏究所 아시아를 생각하는 시리즈
21世紀 韓國의 政治,(韓國學術情報, 2014)
東아시아 近代 韓國人論의 地形,(소명出版, 2012)
日本 내셔널리즘 解讀, (그린비, 2011)
帝國日本의 文化權力: 學知와 文化媒體 (共編, 小花, 2011)
暴力의 豫感(共譯), (冨山一郎 著, 그린비, 2009)
日本文化論의 系譜(大久保 喬樹 著, 小花, 2007) *日本學硏究所 日本學叢書
論壇의 戰後史(奥 武則 著, 小花, 2011)
外 多數.
論 文 : 「日本과 太平洋同盟 : 地域 間 交流와 協力의 强化를 中心으로」
(翰林日本學, 翰林大學校 日本學硏究所, 2014)
「日本의 中國殘留 日本人=中國歸國者 支援 政策」
(韓國東北亞論叢, 韓國東北亞 學會, 2013.12)
「아베노믹스 1年의 評價와 韓國經濟」
(翰林日本學, 翰林大學校 日本學硏究所, 2013.12)
「朝鮮에서의 帝國 日本의 出版警察과 刊行物의 行政處分에 관한 硏究」
(日本硏究, 韓國外國語大學校 日本硏究所, 2012)
e-mail : [email protected]
外 多數.
263
264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姓 名:
辛承模
(SHIN Seoung-Mo)
現 職 : 東國大學校 日本學硏究所 硏究員
學 歷 : 名古屋大學 人間情報學硏究科 卒業 (日本近現代文學 專攻)
經 歷 : 前 韓國外國語大學校 日本語通譯飜譯學科 講師
前 季刊 創作과 批評 飜譯士
等 歷任
著譯書 : 日本推理小說 사전,(學古房, 2014)
日本 帝國主義 時代 文學과 文化의 混淆性,(지금여기, 2011)
아시아-太平洋戰爭과 朝鮮,(제이엔씨, 2011)
外 多數.
論 文 : 「帝國 日本의 文學賞과 그 공공권(公共圈) 範圍의 摸索-芥川賞을 中心으로-」
(日本語文學, 韓國日本語文學會, 2015.3)
「在日에스닉 雜誌에 나타난 在日朝鮮人의 自己敍事」
(일본연구, 일본학연구소, 2014.12)
「재일문예지 『민도(民涛)』의 기획과 재일문화의 향방* ー서지적 고찰을 중심으로ー」
(日本學硏究, 日本硏究所, 2014.9)
外 多數.
e-mail : [email protected]
翰林大學校 日本學硏究所
姓 名:
吳亦昕
2015
國際學術
심포지엄
參加者
PROFILE
265
(WU Yi-Shin)
現 職 : 国立中正大学台湾文学研究所 助理教授
學 歷 : 筑波大学人文社会科学研究科 博士 (植民地文学、比較文学 專攻)
經 歷 : 現 日本台湾学会 會員
現 比較文学会 會員
著譯書 : 『제국일본의 이동과 동아시아식민지문학 2』, (공저, 문, 2011)
論 文 : 「植民地台湾における童謡運動」
(『東アジアと同時代日本文学フォーラム第二回国際シンポジウム』中国北京師範大學, 2014)
「不幸を呼ぶ恋愛と妊娠-『フォルモサ』期の張文環の作品にみる植民地男女の婚外関係」
(『文学、社会、歴史の中の女性たち:学際的視点から 2 』, 丸善プラネット, 2013)
외 多數.
e-mail : [email protected]
266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姓 名:
吳允禎
(OH Youn-Jung)
現 職 : 서울대학교 아시아言語文明學部 硏究員
學 歷 : 美國 남가주대학교 美術史學科 卒業 (美術史學 專攻)
經 歷 : 現 서울대학교, 韓國藝術綜合學校 講師
前 美國 오레곤대학교 미술사학과 客員 助敎授
前 英國 세인즈버리일본예술연구소 硏究員
前 日本國際交流基金 Fellow
著譯書 : 『백화점, 근대의 별천지』, (공저, 부산근대역사관, 2013)
『시대의 눈』, (공저, 학고재, 2011)
『1900년 이후의 미술사』, (공역, 세미콜론, 2007) 論 文 : 「1920년대 일본 아방가르드 미술운동과 백화점」
(『미술사와 시각문화』, 미술사화 시각문화학회, 2015)
“Shopping for Art: the New Middle Class’s Art Consumption in Modern Japan”
(Journal of Design History, Design History Society, 2014)
「근대 일본의 백화점 미술부와 신중산층의 미술소비」
(『한국근현대미술사학』,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2012)
e-mail : [email protected]
翰林大學校 日本學硏究所
姓 名:
稲葉真以
2015
國際學術
심포지엄
參加者
PROFILE
(INABA Mai)
現 職 : 光云大學校 光云翰林院 助敎授
學 歷 : 國民大學校 美術理論學科 博士課程修了 論 文:
「포스트모던한 시대의 일본 현대미술-1980년대 뉴 웨이브와 뉴 페인팅 현상을 중심으로-」
(기초조형학연구, 2012년 12월 Vol.13. No.6)
「1950년대 일본의 탄광노동자 판화가 센다 우메지(千田梅二)–땅 밑의 빛나는 사람들」
(인물미술사학회, 2012년 12월)
「1950년대 일본 전위미술에 나타난 저항주의」(일본문화연구,
동아시아일본학회, 제52집, 2014, 11월)
e-mail : [email protected]
267
268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姓 名:
城
任 模 (YIM Sung-Mo)
現 職 : 延世大學校 史學科 敎授
學 歷 : 延世大學校 史學科 卒業 (日本近代史 專攻)
經 歷 : 現 翰林大學校 日本學硏究所 運營委員
現 東洋史學會 硏究理事
現 現代日本學會 編輯委員
現 滿洲學會 硏究理事
前 韓日民族問題學會 硏究理事 等 歷任
著譯書 : 帝國日本의 文化權力 2 :정책·사상·대중문화 (共著, 소화, 2014) *한림대 일본학연구소 연구총서
中國殘留 日本人 – 버려진 60여년 (譯書, 小花, 2012) *한림대 일본학연구소 일본학총서
帝國日本의 文化權力 : 學知와 文化媒體 (共編, 小花, 2011) *한림대 일본학연구소 연구총서
帝國의 地理學, 滿洲라는 境界 (共著, 東國大學校出版部, 2010)
戰後 日本의 保守와 表象 (共著, 서울大學校出版文化院, 2010)
近代 滿洲 資料의 探索 (共著, 東北亞歷史財團, 2009)
帝國日本の再編と二つの「在日」 (共著,明石書店, 2010) 外 多數.
論 文 : 「冷戰과 大衆社會 談論의 外延-美國 近代化論의 韓·日 利殖」
(翰林日本學, 第26輯, 翰林大學校 日本學硏究所, 2015.5)
「冷戰期 日本 進步派 知識人의 韓國 認識 -『世界』의 北送・韓日會談 報道를 中心으로-」
(東北亞歷史論叢, 東北亞歷史財團, 2011)
「戰時期 日本 植民地政策學의 變容 : 民族・開發・地政學」
(帝國日本의 文化權力 : 學知와 文化媒體』, 小花, 2011)
「戰後 日本의 滿洲 記憶-그 背後와 回路-」
(日本批評, 서울大學校 日本硏究所. 2010)
「滿洲 農業移民 政策을 둘러싼 關東軍 朝鮮總督府의 對立과 그 歸結
-우가키(宇垣) 總督의 構想 및 活動과 關聯하여-」(日本歷史硏究, 日本史學會, 2009)
e-mail : [email protected]
翰林大學校 日本學硏究所
姓名 :
寬
趙 子
2015
國際學術
심포지엄
參加者
PROFILE
269
(JO Gwan-Ja)
現 職 : 서울大學校 日本硏究所 HK敎授
學 歷 : 東京大学敎 綜合文化硏究科 卒業 (日本 思想史・文化史 專攻)
經 歷 : 現 翰林大學校 日本學硏究所 運營委員 및 編輯委員
現 國際韓國文化文學會 編輯委員
前 日本 中部大学 歷史地理學科 敎授
等 歷任
著譯書 : 帝國日本의 文化權力 2 :정책·사상·대중문화 (共著, 소화, 2014) *한림대 일본학연구소 연구총서
帝國日本의 文化權力 (共著, 小花, 2011) *한림대 일본학연구소 연구총서
植民地 公共性 實體와 隱喩의 거리 (共著, 冊과 함께, 2010)
植民地朝鮮/帝国日本の文化連環-ナショナリズムと反復する植民地主義-
(著書, 有志社, 2007)外 多數.
論 文 : 「內在的 發展論의 네트워크,‘民族的 責任’의 境界 :
가지무라 히데키(梶村英樹)와 그의時代,1955-1989」
(亞細亞硏究, 高麗大學校 亞細亞問題硏究所, 2013)
「文明의火山에서 바라보는 災害와 日本人」
(日本批評 서울大學校 日本硏究所 2012)
「戰後日本의 文化政策과 人文學」
(翰林日本學 第20輯 翰林大學校 日本學硏究所 2012)
「在日코리안의 正體性과 超國家主義 : “民族主體”를 呼出하는 “在日朝鮮人”」
(日本學, 東國大學校日本學硏究所, 2011)
「帝國日本의 浪漫的 民族主義 : 日本浪漫派 (1934~1945)」
(帝國日本의 文化權力 : 學知와 文化媒體, 소화, 2011)
「日本浪漫派와 朝鮮의 文化硏究」
(日本硏究, 韓國外大 日本硏究所, 2010) 外 多數.
e-mail : [email protected]
270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姓 名:
廷祐
趙
(CHO Jung-Woo)
現 職 : 翰林大學校 日本學硏究所 硏究敎授
學 歷 : 서울大學校 社會學科 卒業 (社會史/歷史社會學 專攻)
經 歷 : 現 韓國社會史學會 運營委員
前 東京大學 社會科學硏究所 客員硏究員
前 光云大學校 敎養學部 및 韓神大學校 社會學科 講師 等 歷任
著譯書 : 植民勸力과 近代知識 : 京城帝國大學 硏究 (共著, 서울大學校出版文化院, 2011)
論 文 : 「‘拓殖’이라는 비즈니스 : 植民地 國家企業으로서의 拓殖會社」
(‘東亞’트라우마 : 植民地/帝國의 境界와 脫境界의 경험들, 그린비, 2013)
「滿洲事變 前後 ‘拓殖’事業機構의 變化―東亞勸業(株)의 企業支配構造를 中心으로」
(社會와 歷史, 韓國社會史學會, 2011)
「民族國家 形成과 ‘歷史 만들기 : 民俗博物館의 設立과 展開를 中心으로」
(韓國學報, 一志社, 2002)
e-mail : [email protected]
翰林大學校 日本學硏究所
姓 名:
2015
國際學術
심포지엄
參加者
PROFILE
271
趙亨根 (CHO Hyung-Keun)
現 職 : 翰林大學校 日本學硏究所 硏究敎授
學 歷 : 서울大學校 社會學科 卒業 (社會學 專攻)
經 歷 : 現 歷史批評 編輯委員
現 韓國社會史學會 編輯委員
前 서울大學校 奎章閣韓國學硏究院 先任硏究員
等 歷任
著譯書 : 朝鮮사람의 世界旅行 (共著, 글항아리, 2011)
韓日 歷史敎科書 敍述의 理念 (共著, 京仁文化史, 2010)
左右派事典 (共著, 위즈덤하우스, 2010)
植民地의 日常: 支配와 龜裂 (共著, 文化科學社, 2006)
近代性의 境界를 찾아서, (共著, 새길, 2007)
外 多數.
論 文 : 「植民地 大衆文化와 ‘朝鮮的인 것’의 辨證法 : 映畵와 大衆歌謠를 中心으로」
(社會와 歷史, 韓國社會史學會, 2013)
「植民權力의 植民地 再現戰略 : 朝鮮總督府 機關誌 朝鮮의 寫眞이미지를 中心으로」
(社會와 歷史, 韓國社會史學會, 2011)
「主體性의 觀點에서 본 日帝時期 場市의 葛藤」
(歷史와 現實, 歷史學會, 2009)
「批判과 屈折, 轉化 속의 韓國 植民地近代性論 : 構造, 主體, 經驗의 三角構圖를 中心으로」
(歷史學報, 2009)
「日帝의 公式醫療와 改新敎 宣敎醫療間 헤게모니 競爭과 그 社會的 效果」
(社會와 歷史, 韓國社會史學會, 2009)
外 多數.
e-mail : [email protected]
272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姓 名:
崔在爀
(CHOI Jae-Hyuk)
現 職 : 誠信女子大學校 大學院 講師
學 歷 : 東京藝術大學 藝術學科 博士 (美術史 專攻)
經 歷 : 現 詳明大學校 敎育大學院 美術敎育科 講師
前 서울대학교 美術大學 東洋畵科 講師
著譯書 : 美術の日本近現代史-制度 言說 造型 (共著, 東京美術, 2014
나의 朝鮮美術 巡禮 (共著, 반비, 2014)
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 (譯書, 한권의책, 2014)
外 多數
論 文 : 「滿洲國과 民藝運動」
(韓國近現代美術史學, 韓國近現代美術史學會, 2012.7)
「1930·40年代 日本繪畵의 滿洲國 表象」
(美術史論壇, 한국미술연구소, 2009.6)
「滿洲國美術展覽會硏究」
(近代畵說, 明治美術學會, 2007.12)
「1930년대 일본 서양화단의 신일본주의」
(韓國近現代美術史學, 韓國近現代美術史學會, 2005.8)
外 多數.
e-mail : [email protected]
翰林大學校 日本學硏究所
姓 名:
洪善英
2015
國際學術
심포지엄
參加者
(HONG Seun-Young)
現 職 : 翰林大學校 日本學硏究所 硏究敎授
學 歷 : 筑波大學 文藝言語硏究 博士 (韓日比較文學 專攻)
經 歷 : 前 忠南大學校 人文科學硏究所 專任硏究員
前 韓國航空大學校 專任硏究員
前 淸州大學校 및 世宗大學校 講師 等 歷任
著譯書 : 帝國日本의 文化權力 : 學知와 文化媒體 (共著, 小花, 2011)
現代日本戱曲集 4 (共譯, 韓日演劇交流協議會, 2010)
日本雜誌 모던日本과 朝鮮 1940 (共譯, 語文學社, 2009)
明治日本의 알몸을 훔쳐보다 - 프랑스 諷刺畵家 조루주비고가 본 近代日本-
(共譯, 語文學社, 2008)
外 多數
論 文 : 「기쿠치 간(菊地 寛)<아버지 돌아오다>(1917)論 : 漂迫者의 歸還과 狂氣
(韓國日本語文學會, 日本語文學, 2013)
「戰時 藝術動員과 ‘國語劇’ : 1940年代 演劇競演大會 日本語參加作을 中心으로」
(日本文化硏究, 東아시아日本學會, 2013)
「總動員體制의 移動演劇과 프로파간다」
(帝國日本의 文化權力: 學知와 文化媒體, 소화, 2011)
「帝國의 文化領有와 外地巡行: 天勝一座의 <살로메> 景福宮 公演을 中心으로」
(日本近代學硏究, 韓國日本近代學會, 2011)
「기쿠치 간(菊池 寛)과 朝鮮藝術賞: 帝國의 藝術制度와 히에라르키」
(日本文化學報, 韓國日本文化學會, 2011)
「雑誌「モダン日本」と「朝鮮版」の組み合わせ、その齟齬」
(植民地朝鮮と帝国日本 :民族・都市・文化 (アジア遊学138), 勉誠出版, 2010)
外 多數.
e-mail : [email protected]
PROFILE
273
274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姓名:
日比嘉高
(HIBI Yoshitaka)
現 職 : 名古屋大学大学院文学研究科 准教授
學 歷 : 筑波大学大学院文芸・言語研究科 修了 (近現代日本文学・文化 専攻)
經 歷 : 現 日本近代文学会 評議員
前 米国UCLA visiting scholar、米国ワシントン大学 resident scholar 等
著譯書 : いま、大学で何が起こっているのか,単著,2015年5月,ひつじ書房
ジャパニーズ・アメリカ――移民文学・出版文化・収容所――,単著,2014年2月,新曜社
スポーツする文学――1920-30年代の文化詩学,編著,2009年6月,
疋田雅昭・日高佳紀・日比嘉高 編,青弓社
〈自己表象〉の文学史──自分を書く小説の登場──,単著,2002年5月,翰林書房
論 文 : 越境する作家たち――寛容の想像力のパイオニア――,単著,
(『文學界』,2015年6月,第69巻第6号,pp.218-236)
外地書店を追いかける(4)――台湾・新高堂の発展――,
(『文献継承』金沢文圃閣,2015年3月,第26号,pp.1-2)
朝鮮半島における日本語書店の展開――戦前外地の書物流通(1)――,単著,
(『跨境 日本語文学研究』,2014年6月,第1号,pp.205-219)
外地書店とリテラシーのゆくえ――第二次大戦前の組合史・書店史から考える――,単著,
(『日本文学』日本文学協会,2013年1月,第62巻第1号,pp.44-56)
ほか。
e-mail : [email protected]
硏究槪要
姓名:
平瀬 礼太
(HIRASE Reita)
現 職 : 姫路市教育委員会生涯学習部
學 歷 : 京都大学文学部哲学科 卒業 (美学美術史学 專攻)
經 歷 : 前 姫路市立美術館 学芸員
前 姫路短期大学非常勤講師、岡山大学教育学部非常勤講師、
国際日本文化研究センター共同研究員等 歷任
著譯書 : 『<肖像>文化考』(単著, 春秋社, 2014)
『美術の日本近現代史 制度 言説 造型』(共著, 東京書籍, 2014)
『彫刻と戦争の近代』(単著, 吉川弘文館, 2013)
『Art and War in Japan and its Empire 1931-1960』(共著, Brill, 2012)
『銅像受難の近代』(単著, 吉川弘文館, 2011, 第23回倫雅美術奨励賞)
『戦争のある暮らし』(共著, 水声社, 2008)
『戦争と美術 1937-1945』(共著, 国書刊行会, 2007)
『講座日本美術史 第6巻 美術を支えるもの』(共著, 東京大学出版会, 2005)
『美術と戦争』展図録(編著, 姫路市立美術館, 2002)
『コレクション・日本シュールレアリスム13 米倉寿仁・飯田操朗 世界の崩壊感覚』(編著,本の友社, 1999)他
論 文 : 「軍都東京の銅像」
(『東京人』336号, 都市出版, 2014)
「超現実と新体制と裸と」
(『りずむ』第3号, 白樺サロンの会, 2014)
「一美術家の東洋 和田三造の見つめたもの」
(『美術フォーラム21』第21号, 醍醐書房, 2010)
「『陸軍』と『美術』」
(『軍事史学』第44号第1号, 軍事史学会, 2008)
「四つの架橋-清水登之の『工兵隊架橋作業』をめぐって」
(『歴史評論』671号, 歴史科学協議会, 2006) 外 多數
e-mail :r-asehi @outlook.com
275
276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硏究槪要>
帝国日本の文化権力: 学知と文化媒体
第一段階
2008.12
2011.11
第二段階
2011.12
2014.11
第三段階
2014.12
2017.11
帝国日本における文化権力: 学知と文化媒体 (帝国の中心としての日本)
The Cultural Power of Imperial Japan : Knowledge and Media
帝国日本における文化権力: 学知と文化媒体 (周辺部の共通性と独自性)
The Cultural Power of Imperial Japan : Knowledge and Media
帝国日本における文化権力: 学知と文化媒体 (周辺部の中心部のと関係性)
The Cultural Power of Imperial Japan : Knowledge and Media
硏究槪要
研究者氏名及び所属
277
研究分野
徐禎完 翰林大日本学科・日本学研究所所長 能楽史・芸能史 *研究責任者
任城模 延世大 史学科
日本近代史・政策論
超寛子 ソウル大 日本学研究所
日本近代思想史
朴相絃 慶熙サイバー大 日本学科
日本近代文学
宋錫源 慶熙大 政治外交学科
日本政治思想
姜泰雄 光云大 東北亜文化産業学部
日本文化(映画)
徐在吉 国民大 国文学科
韓国近現代文学
朴羊信 翰林大 日本学研究所
日本近代史
洪善英 翰林大 日本学研究所
日本文化(演劇)
超亨根 翰林大 日本学研究所
社会学
超廷祐 翰林大 日本学研究所
社会学
本研究は、植民権力の統治構造及び政治・経済的支配に関する従来の研究を踏まえながら、
文化的領域において非可視的、自律的な形態で遂行された権力のあり方を究明することを目的
とする。
具体的には、帝国の学知の領域を植民政策学、官学から民間学、ひいては国家権力と衝突し
た運動の領域にまでその範囲を拡大し、帝国日本の文化権力と学知の関連性を明らかにするこ
とを目指す。その実践の一つとして、「体制」側の学知と運動としての「反体制」側の学知という二
つの枠を設け、両者の交渉・衝突、包摂・排除の過程を追求する。そしてその一方で、新聞·雑
誌、演劇、映画、ラジオ放送、歌謡などを含む文化媒体が帝国の秩序構築と帝国文化の伝播に
いかなる役割を果したかを追跡する。特に権力と文化媒体の関係性を明らかにし、「帝国」という
時空間の中で形成された文化権力のあり方を見きわめることを目的とする。
「帝国日本の文化権力」という研究課題は、本研究の問題意識を端的に示すものである。すな
わち「帝国日本」という研究対象と「文化権力」という研究テーマを設定したのであるが、これは、
従来の帝国主義研究あるいは植民地研究の限界を乗り越え、新しい視点や研究方法を提示す
るためである。
278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
第一に、本研究は、「帝国日本」という時空間を研究対象とする。これは、植民地期をとり扱っ
た従来の研究が日本対朝鮮、日本対台湾、日本対満洲といった「帝国対個別植民地」という二
項対立的視点で捉えてきたという反省に基づく。さらには、日本の学界で産出されている帝国史
研究は一国史の延長という限界をのり越えていないという批判的な立場をも含めている。つまり、
本研究は「帝国日本」という視点から帝国対個別植民地の関係はもちろん、帝国版図内の共通
性と独自性、同一性と差別性に着眼するという点において有効である。特に東アジアという地域
単位の重要性がますます高まる現在的意味においても、このような研究対象の設定は極めて大
きな意味があると言えよう。
第二に、本研究は、帝国と植民地間の関係を、政治権力 · 経済権力というような通常の硬性
権力ではなく、学知と文化媒体を中心にした
「文化権力」という軟性権力を見極めることでアプ
ローチーする。これは帝国-植民地間の関係をより立体的に捉える視点を提供してくれる。ここに
は、帝国の成立と植民統治の根幹が力の優位に基づいた政治的支配と経済的侵奪に他ならな
いが、軍事的占領と経済的搾取を越えた支配 · 統治の実行と持続は日常の領域、すなわち日
常と文化に対する支配なしでは不可能であるという立脚が基本としてある。つまり、表面的には
非政治的かつ自律的な「知」と文化的実践の実行によって植民支配の安定的な再生産と永続化
を追い求めるが、それらは植民地の暮らしの中に染みこみ民衆の精神と暮らしを改変させてい
く。一方、植民地側は帝国の圧倒的な強力インフラを背景にした学知と文化媒体の実践を不可
避に受容しながら、その表面的非政治性と自律性が許す空間の中で文化権力の効果を変容さ
せ、植民権力が意図しない効果を生産していく。相互の間で異なる意図が衝突しひしめき合う文
化権力の作動する空間の中で、時には帝国と植民地、支配と順応、抑圧と抵抗という単純な対
立構図を乗り越えた諸現象として現出するのである。
本研究は帝国の文化権力のあり方を立体的に捉えるために知の領域である「学知」と日常的
· 大衆的実践の領域である「文化媒体」に分け、その特性と効果を追跡する。第一段階研究では
帝国の中心部に焦点を置いて文化権力の歴史的系譜を探求し、第二段階研究では中心から周
辺部へ移動して文化権力の拡散、移植、変容の躍動性を追跡した。今回の第三段階研究では
中心と周辺間の相互作用の脈絡、そして連続性と拡張性を同時に追い求めるという点から第二
段階研究に基盤しながらもそれを確張して総合する作業になる。中心の学知と文化媒体の影響
力が伝播 · 拡散する過程は周辺による伝播・専有、競合・連帯、還流・分枝といったより多層的
で多方向的な脈絡の中で把握される。
「学知」分野と「文化媒体」分野の具体的な研究テーマは次の通りである。
硏究槪要
279
<学知>分野
1年次研究
2年次研究
3年次研究
伝播・専有
競合・連帯
還流・分枝
植民政策学の植民地転移:
史学早稲田人脈を中心に
植民政策学の
新しい地平と満洲論
「植民地ない帝国」建設プ
ロジェクトと植民政策学
金億の和歌翻訳
: 「殉難遺珠」
人口学と植民地
:「人口食糧問題」の誕生と
拡散
日本浪漫派と
戦後文化ナショナリズム
和歌翻訳の全体像と訳語選
択を取り囲んだ競合
「和歌」 翻訳の戦後
日滿農政研究会の帝国農
業構想と朝鮮人姜鋌澤
戦時農村社会学の
展開とその戰後
日本資本注意論争と
戦後再生
災害と資本主義―東アジア
アナキズムの
環境思想
アジア連帯論と
戦後日本民族主義
分野⁄研究テーマ
植民政策学
翻訳
官学/民間学
民族革命/文化論
アナーキズム
エスペラント運動と言語ナ
ショナリズムの拮抗
日本農本主義と満洲国農
業合作社運動
<文化媒体>分野
1年次研究
2年次研究
3年次研究
伝播・専有
競合・連帯
還流・分枝
植民地時代言論と
日本出版物の中の朝鮮像、
『朝鮮日報』と『毎日新報』
「親日」 問題
「 蒙彊」
朝鮮出版物の中の日本像
「国策」
の「民族」言説の分枝
帝国日本の他者、ハルビン
の日本語戯曲研究
帝国日本のドイツ映画受容
紙芝居の移動する観客
帝国日本と朝鮮の防諜小説
の「安重根」
帝国日本と合作映画のパ
とその影響
と防諜映画研究
ラジオ放送と植民地大衆文
帝国日本内電波ネットワー
ターン化研究
プロパガンダ道具からネー
化
クの競合と連帯
大衆文化、雑種的ファンの
マスコミに映った朝鮮大衆
出現
文化の海外進出
教育に投影された能と謡:
植民地朝鮮の能と謡
社会統合のイデオロギー的
分野⁄研究テーマ
新聞•雑誌
演劇
映画
ラジオ放送
大衆的実践
統合研究
装置として
ションの言語に再誕生した
朝鮮語放送
戦争と大衆文化: 帝国の
座礁と植民地以後
帝国日本の文化権力
としての能と謡
280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국제학술심포지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