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5回大会本選に参加した人の原稿(韓国語と日本語訳)

第 5 回大会の応募者
나에게 꿈을 준 한국
야마나시 에이와 고등학교 2 학년
히로세 다미
포기할 수 없는 꿈. 여러분은 그런 꿈이 있습니까?
“한국에 유학가고 싶다! 한국어를
유창하게 알하고 싶다!” 중학교 3 학년 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친구들이랑 푹 빠졌던
가수가 한국인이라서 친구하고 다투듯이 배웠던 한국어, 어렸을 때부터 뭘해도 오래 하지
못했던 제가 처음으로 열중할 수 있었던 것, 그것이 바로 한국어였습니다. 그 때 학교에서
모집했던 한국유학프로그램. 고등학교 2 학년이라는 중요한 시기에 학교를 떠나는 것에
적지 않은 마음의 동요가 있었고, 몇번이나 “지금 가도 될까?:” 라고 고민을 했습니다.
그래도 역시 포기할 수 없었던 “유학”이라는 꿈. 엄마의 “조금은 빙 돌아가도 괜찮아”
라는 한마디. “인생은 경험이다. 언젠가 꼭 힘이 될 거야” 라고 힘차게 말해주셨던 아빠의
말씀에 힘을 얻어 저는 고등학교 2 학년 봄에 그렇게 가고 싶던 한국유학을 위해 혼자
떠났습니다.
유학생활은 생각보다 무척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힘들었던 만큼
많은 것을 배운 것 같습니다. 그 중에서도 제일 힘들었던 것은 친구관계였습니다. 문화
차이를 느끼고, 성격 차이를 통감하고, “일본인” 이라는 이유로 친구들에게 무시당한 적도
있었습니다. 또한 학교에서 하는 예배시간이나 역사수업 때 나오는 일본과의 전쟁
이야기는 제 가슴을 아프게 했고, 옆에 있는 친구에게 어떤 표정을 지으면 좋을지
몰랐습니다. 게다가 구개월이라는 길고도 짧은 기간동안, 저는 여섯번에 달한 홈스테이를
했습니다. 그래서 계속 바뀌는 환경에 괴로워하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친해져도 극복할 수 없는 역사의 장벽이나 언어, 문화, 생각하는 방법의 차이…
때로는 모든 것을 내던지고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지금
돌이켜 보면, 다시 한번 유학하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많은 사람의 따뜻한 마음에
돌러싸였던 멎진 유학생활이었습니다. 지금 전화고 싶은 말, 그건 “고마워요” 입니다.
힘들어서 울어버렸을 때, “더 이상 울면 혼내!” 라고 야단쳐줬던 친구에게, 언제나 신경
써주셨던 선생님들께, 문자나 전화로 격려해줬던 가족에게, 그리고 기쁨도 슬픔도 같이
나누어줬던 일본에 있는 친구들에게…
자연스럽게 고맙다고 말할 수 있는 것. 끝까지 뭔가를 해낸 것…. 마음이 꺽일 때마다
몇번이나 일어난 것, 저는 확실히 제가 성장한 것을 느낍니다. 꿈이 하나 이루어졌을 때
다시 펼쳐지는 나의 꿈. 끊임없이 어학 공부를 계속해서 저는 앞으로도 새로운 목표에
향하여 더욱 노력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私に夢を与えてくれた韓国
えてくれた韓国
山梨英和高等学校 2 年
廣瀬 太美
諦められない夢。みなさんには、そんな夢がありますか?“韓国に留学したい!韓国語を流暢に
話したい!”中学 3 年生のとき、そんな想いが芽生えました。友達とはまった歌手が韓国人だったこ
とがきっかけで、友達と競うようにして学んでいった韓国語。小さいころから何をしても長く続かなか
った私が、初めてのめり込めたもの、それが韓国語でした。そんな時、学校で応募のあった韓国へ
の留学プログラム。高校 2 年生という大事な時期に学校を離れることに少なからず抵抗はあり、何
度も“今、行っていいのか”と悩みました。それでもやっぱり諦めきれなかった“留学”という夢。母の
“少しくらい遠回りしてもいいのよ”という一言、“人生経験だ。いつか絶対力になる”と力強く言って
くれた父の言葉に背中を押され、私は高校 2 年生の春、念願の韓国に一人旅立ちました。
韓国での留学生活は想像以上に厳しく、それでも今思えば、辛かったことの分、学んだことも多
かったような気がします。その中でも一番悩んだことは、友達との付き合いでした。文化の違いを感
じ、性格の違いを痛感し、“日本人”という理由でけなされたこともありました。それに学校の礼拝の
時間や、歴史の授業のとき出てくる日本との戦争の話などは、私の胸を苦しめ、隣にいてくれる友
達にどんな表情で向き合えばいいのかわかりませんでした。また、9 ヶ月という長くも短い期間のあ
いだ、私は 6 回にも及ぶホームステイをし、ずっと変わり続ける環境に苦しんだりもしました。
いくら親しくなっても、乗り越えられない歴史の壁や言葉、文化、考え方の違い。時には、全てを
放り投げてやめてしまいたいと思う日もありました。それでも、今振り返ってみれば、“もう一度やりた
い!”と思える、たくさんの人の優しさに囲まれた素敵な留学生活でした。今、伝えたい言葉。それ
は“ありがとう”です。辛くて泣いたとき、“これ以上泣いたら怒るよ!”なんて、厳しくも愛のある言葉
で、守り叱ってくれた友達に、いつも気にかけて下さった先生方に、メールや電話で励ましてくれた
家族に、喜びも悲しみも分け合ってくれた日本にいる友だちに…。
素直に“ありがとう”と言えること、最後まで何かをやり遂げること…、くじけ、また立ち上がり、私は
確かに自分が成長したことを実感しています。一つの夢が叶えられたとき、また広がる私の夢。終
わりない語学の勉強を続け、これからも新しい目標に向けて、もっともっと努力する私でありたいと
思います。
第 5 回大会の応募者
사투리
히로시마시립 모토마치 고등학교 2 학년
나카무라 미오
안녕하세요?
한국어를 혼자서 공부하기 시작한지 약 4 년, 4 년 동안 저는 한번도 한국어로 대화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처음으로 한국사람과 대화를 하게 된 사람이 대구에 사는 친구였습니다.
그 친구와
처음으로 이야기를 해봤을 때 느낀 점은 ”뭐야? 진짜 한국사람들은
드라마와는 전혀 다른 말을 쓰네”였습니다.1 년 후 다시 대구 친구를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이 1 년 동안 저는 한국어학원에 다니게 되었고 한국어로 이야기하는 기회도
많아졌습니다. 그러자 대구 친구의 말이 분명히 표준어와 다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대구 친구가 쓰는 말이 사투리라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그 전까지는 한국어에도
사투리가 있다는 것조차 몰랐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사투리 때문에 못 알아듣는 경우가 많아서“제 한국어 실력이 이
정도밖에 안 되나?” 라고 자신감을 잃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며칠 동안 같이
지내고
대화를
하는
사이에
처음에는
신기하게
들리던
사투리에도
점점
익숙해졌습니다.그 뿐이 아니라“뭐라 카노?” ”니 아나?” ”이거 해본적 있나?”라고 말끝에
노나 나를 붙여서 묻는 것이 표준어보다 귀엽게 들려서 친근감마저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친구가 사투리를 하나 가르쳐줬습니다.”가가가가?이게 무슨 뜻인지 아나?이건
경상도 사투리고 그 아이가 그 아이가?라는 뜻이다.재밌제?”제게는 뜻은 커녕 어디가
주어이고 어디가 술어인지도 잘 몰랐습니다. 단 한글자로 충분히 문장을 만들 수 있다는
것에 너무 놀랐습니다.저는 점점 사투리의 재미를 알게 되었고 사투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제가 서울 사람보다 대구 사람과 대화하는 기회가 많아서 가끔 서울 사람과 대화하면
“발음이 좀 사투리 같네”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조금 부끄럽기는 히지만 발음을
사투리로 하면 부드럽게 들리는 것 같아서 좋지 않을까요?원래 저는 사람 앞에 서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한국어 사투리를 통해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즐거움을 알 수 있었습니다.그래서 지금은 한국어뿐만 아니라 일본어로도
이야기하는 것을 아주 좋아하게 되었고 공부한 언어로 다른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것에 큰 기쁨을 느꼈습니다.
외국어를 배우는 것은 참으로 유익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할 수 있는 언어가 하나
많아지면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은 몇십배 많아집니다.저는 앞으로 한국어를 통해 더 넓은
세계로 나가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方言
広島市立基町高等学校
広島市立基町高等学校 2 年
中村 美緒
こんにちは。
私が韓国語を独学で勉強し始めてから約 4 年、4 年の間私は一度も韓国語で会話したことがあり
ませんでした。初めて会話をすることになった人は大邱に住む友達でした。その友達と初めて会話
した時、感じたことは「え!?本当の韓国人の話し方はドラマなんかとは全然違うなぁ」と言うことでした。
1 年後、再び大邱の友達と会う機会がありました。この 1 年間、私は韓国語教室にも通い始め、韓
国語で話す機会も増えました。そうすると大邱の友達の発音が明らかに標準語とは違うことに気付
きました。大邱の友達が話す韓国語が方言だということに初めて気付きました。それまで韓国語に
も方言があるということさえ知らなかったのです。
慣れない方言のせいで聞き取りにくいことが多々あり、「自分はまだこの程度しか韓国語ができ
ないのか・・・」と自信を失いかけていました。しかし、何日も一緒に過ごし話をするうちに初めはおか
しく聞こえた方言にも、だんだん慣れて行きました。それだけでなく“뭐라 카노?(何て言った
の?)”“니 아나?(これ知ってる?))”“이거 해본적 있나?(これやったことある?)”と語尾に「노」や
「나」を付けて尋ねる言葉遣いが何だか標準語よりも可愛く聞こえて親近感さえ湧いてきました。
その大邱の友達が方言を教えてくれました。「『가가가가?』これがどういう意味か分かる?これは
慶尚道の方言で『その子がその子なの?』という意味なんだよ。面白いでしょ?」私には意味どころ
か、どこが主語で、どこが述語なのかさえ分かりませんでした。たったひと文字で十分に文章が作
れることにとても驚きました。私は方言の面白さに気付かされ、だんだんに興味が湧いてきました。
私はソウルの人より大邱の人と話す機会が多くあります。そのため私がソウルの人と韓国語で話す
と少しなまってるね、と言われるようになってしまいました。少し恥ずかしい気もしますが、方言を話
すと軟らかく聞こえていい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韓国語の方言を通して私は言葉を介して人と会話する楽しさを知ることができました。元々、私
は人前で話すことが得意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しかし、今は韓国語だけに限らず日本語でも話す
ことが大好きになりました。自分が勉強した言語で人とコミュニケーションを取れることに大きな喜び
を覚えました。
外国語を学ぶことはとても有意義なことだと思います。話せる言語が 1 つ増えるだけで、会話でき
る人は何十倍も増えます。私はこれから、韓国語を通してもっと広い世界に出て行きたいです。あり
がとうございました。
第 5 回大会の応募者
Dream High
센슈대학부속고등학교 3 학년
다마이 시오리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다마이시오리입니다.
제가 한국어를 공부하게 된 계기는 어머니가 보시던 한국드라마를 사이좋게 같이
보면서부터입니다. 한국드라마를 보면서 한국어의 단어나 프레즈에 관심을 갖게 됐고,
간단한 프레즈도 조금씩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처음 본 드라마는 여러분들도 다 아시는 후유노소나타 였습니다.후유노소나타나
다른 한국드라마에 빠지게 된 것은 일본 사람들이 평소에 거의 쓰지 않는 말들을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들면 [사랑해]라는 말을 한다거나, 눈뭉치 속에 펜단트를 넣어서 선물을
하는 서프라이즈들이 있어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드라마를 좋아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드라마를 통해 한국인의 감정표현이
풍부하다는 것입니다.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을 때 저는 9(아홉)살 이었는데, 그 때부터 혼자 한국어교과서를
사서
공부했습니다.
한국과
교류가
활발한
지금의
고등학교에
입학해
한국인
선생님에게서 직접 배울 수 있게 됐습니다. 독학으로 공부할 때보다 훨씬 더 자세히
한국어에 대해 알 수 있게 됐고, 한국과 한국문화에 대해서도 더 친근감을 느끼게
됐습니다.
얼마전에는 한국의 식문화에도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머니의
친구분
중에
한국분이
계신데
그
분
집에서
요리교실을
하셔서
참가했습니다.
여러분들께서도 잘 아시는 파전, 불고기, 나물, 김치,잡채 등을 만들었는데, 특히 나물과
잡채를 만들면서 한국요리의 특징 중의 하나인 오색오미에 대해서도 알 수
있게
됐습니다.
요리교실에서 또 하나, 일본에서는 직접 손으로 나물을 무치지는 않습니다만, 나물을
손으로 무쳐야 맛이 난다는 [한국의 ‘손맛’]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습니다. 정말 즐거운
요리교실이었습니다.
한국어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지 9 년, 그동안 계속 한국어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저에게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 꿈은 한국에 살면서 일본과 관련이 있는 국제적인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한국의 공항에 취직을 해, 관광으로 한국에 오신 일본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서 입니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앞으로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우선은 지금 고등학교에서
배우고 있는 한국어 토요강좌를 무엇보다도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리고 대학교에 진학한 후에는 한국에 유학을 갈 수 있도록 열심히 그리고 재미있게
한국어를 공부하겠습니다.
제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Dream High
専修大学付属高等学校 3 年
玉井 史織
皆さん、こんにちは。私は玉井史織です。
私が韓国語を勉強することになったきっかけは、母の見ていた韓国ドラマを仲良く一緒に見るよ
うになったからでした。韓国ドラマを見て少しずつフレーズや単語に興味を持ち、簡単なフレーズも
覚え始めるようになりました。
私が初めて見たドラマは、皆さんもご存知の「冬のソナタ」でした。「冬のソナタ」や他の韓国ドラ
マに惹かれたのは、日本人が普段言わないことを言っていたりしたからでした。例えば、「愛してる」
のような言葉を言ったり、雪の玉の中にペンダントを入れて贈るようなロマンチックなサプライズがあ
ったからかも知れません。
韓国ドラマが好きなもう一つの理由は、ドラマを通して韓国人の感情表現の豊かさを知ることが
できたからです。
ドラマを見始めた時私は9歳でしたが、その時から自分で韓国語のテキストを買ったりして勉強し
ていました。韓国との交流が盛んな今の高校に入学してからは韓国人の先生の下で韓国語を勉強
できることになりました。独学で勉強していた時よりも、より深くハングルや韓国の文化、事情などに
ついても一層親近感を持つようになりました。
この間は、韓国の食文化にも触れる良い機会がありました。それは母の友人に韓国の方がいら
っしゃるのですが、その方のお宅で開かれた料理教室に参加したことです。皆さんもよく知っている
チヂミ、プルコギ、ナムル、キムチ、チャプチェなどを作りましたが、特にナムルとチャプチェを作りな
がら、韓国料理の特徴の一つである五味五色も知ることができました。
料理教室で、もう 1 つ覚えたのは日本ではナムルなどを直接手で和えませんが、手で直接混ぜ
ることで韓国の「手の味(ソンマ)」がでることを教わりました。本当に楽しい料理教室でした。
韓国語に興味を持ち始めてから9年間、韓国の勉強を続けられたのは夢があるからです。
私の夢は、韓国に住みながら日本との関わりを持つような国際的な仕事に就くことです。例えば、
韓国の空港に就職して観光に来た日本人のために役立つような仕事です。この夢を叶えるために
は、これからもまだまだたくさんの努力が必要ですが、まずは高校で現在受講している韓国語土曜
講座をなによりも頑張りたいと思います。
そして大学に進んでからは、韓国への語学留学に積極的に参加して夢に近づけるように一生懸
命、そして楽しく、韓国語を勉強していきたいと思います。
私のスピーチを最後まで聞いていただき本当にありがとうございました。
第 5 回大会の応募者
한국생활을 통해서
요코하마 상업고등학교 2 학년
후루타 사호
“한국에서 근무하게 되었다”라고 2001 년의 어느 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어버지께서 단신부임할 예정이었지만 제가 “가족이 떨어지는 건 싫어. 나도
아빠랑 같이 한국에 갈 거야.”라고 말해서 우리 가족은 8 월에 한국 대전에 이사갔습니다.
그 곳은 일본 사람이 거의 없고 일본어도 통하지 않은 우리에게는 미지의 세계였습니다.
9 월부터 저의 학교생활이 시작했습니다. 대전에는 일본인학교가 없어서 저는 현지
초등학교에 다녔습니다. 처음으로 학교에 간 날, 저는 울었습니다. 왜냐하면 한국어를
하나도 모르는 저에게 같은 반 친구들이 다 같이 한국어로 여러 가지 말했으니까요.
처음에는 아주 불안했지만 자택에서도 한국어를 가르쳐 주신 담임 선생님, 몸짓 손짓으로
말해준 같은 반 친구들 도움 덕분에 점점 학교 생활에 익숙해졌고 자연히 한국어를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과묵한 성격인 저도 한국어에 매료되어서 친구들하고 많이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2 년간의 한국 생활은 아주 즐거웠고 좋은 경험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괴로운
일도 있었습니다. 여러분 어떤 일이었는지 상상할 수 있습니까? 저는 욕을 먹기도 하고
애들이 저한테 돌을 던지려고 한 일도 있었습니다. 이유는 제가 일본 사람이니까 아니
일본 사람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전쟁도 지배도 내가 한 일이
아닌데. 일본 사람이 나쁜 일을 한 것은 옛날 이야기인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면 이런 역사를 모르는 자기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상처 준 사람은
잊어 버리고 상처 받은 사람은 기억하고 있다는 게 바로 이런 일이었습니다.
요즘은 한류붐 덕분에 한국과 일본 사이가 좋아지고 있지만 약국간에는 독도 문제처럼
역사적인 문제가 남아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저는 한국과 일본 관계가 나빠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한국과 일본의 우호관계가 유지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좋아하는 이웃 나라 한국을 깊게 이해 하기 위해 한국 역사를 공부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장래에는 한국어를 말할 수 있다는 장점을 살려서 정이 깊고 계속 친구를 소중하게
대해주고 난처한 사람에게는 손을 뻗쳐주는 그런 한국 사람의 좋은 점을 일본사람에게
전하고 한국과 일본의 우호, 교류를 위해 활약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자리에서 많은 것을 가르쳐 준 한국과 친구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韓国生活を
韓国生活を通じて
横浜商業高等学校 2 年
古田 紗帆
「韓国で勤務することになった。」と2001年のある日父が言いました。最初は父が単身赴任する
予定でしたが、私が「家族が離れてしまうのは嫌だ。私もお父さんと一緒に行く。」と言って、私たち
家族は 8 月に韓国の大田に引っ越しました。そこは日本人がほとんどいなくて日本語も通じない、
私たちにとって未知の世界でした。
9 月から韓国での学校生活が始まりました。大田には日本人学校がなかったので、私は現地の
小学校に通いました。初めて学校に行った日、私は泣きました。なぜなら韓国語が一つも分からな
い私にクラスメイトが一斉に韓国語で話しかけてきたからです。最初はとても不安でしたが、自宅で
も韓国語を教えて下さった担任の先生、身振り手振りで話してくれたクラスメイトの助けのおかげで
だんだん学校生活にも慣れていき、自然に韓国語を話せるようになっていました。無口な性格の私
も韓国語に魅了され、友達とたくさん話すようになりました。
2 年間の韓国生活はとても楽しく良い経験になりました。でも時には辛いこともありました。皆さん
はどんなことか想像できますか。私は悪口を言われたり、子供たちが私に石を投げようとしたことも
ありました。理由は私が「日本人」だから、いや私が「日本人」であるがためでした。私はショックを受
けました。「戦争も支配も私がやったことではないのに。日本人が悪いことをしたのは昔の話なの
に。」と思いました。でも後から考えるとこうした歴史を知らない自分自身が恥ずかしくなりました。傷
付けた人は忘れて、傷付けられた人はずっと覚えているというのはまさにこのことでした。
最近は韓流ブームのおかげで韓国と日本の仲が良くなってきていますが、両国間には独島問
題のような歴史的な問題が残っていることも事実です。私は韓国と日本の関係が悪くなることは望
みません。韓国と日本の友好関係が維持されるといいと思います。私は大好きなお隣の国、韓国を
深く理解するために韓国の歴史を勉強したいと思います。そして将来は韓国語を話せるという長所
を活かして、情が深くてずっと友達を大事にし、困った人には手を差し伸べるそんな韓国人の良さ
を日本人に伝え、韓国と日本の友好、交流の為に活躍できる人になりたいです。
最後にこの場でたくさんのことを教えてくれた韓国と友達に感謝の気持ちを伝えたいです。あり
がとうございました。
第 5 回大会の応募者
꿈이있으니까
코리아국제학원 고등부 1 학년
양 영리
그 피리소리에 제 마음은 빼았겼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나도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빼앗을 수 있는 소리를
내고싶다!” 라고..
제가 한국의 국악과 처음 만난 것은 초등학교 6 학년 때 였습니다.그 때 엄마께서 오사카에서
한국국악을 접할 수 있다고 하시기에 같이 갔던 것입니다. 원래 사물놀이등에 대해 알고 있던
저는 가벼운 마음으로 엄마를 따라갔습니다.그렇지만 저는 그 곳에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충격?”
이 충격이라는 말 만으로는 무슨 뜻인지 모르시겠죠? 다시 말하면 저는 그 자리에서 미래의
꿈이 생긴 것입니다. 그 날부터 제 머리속은 온통 피리로 가득 찼습니다.그리고 “한국대학에 가서
더 국악을 공부하고 싶다!”라는 마음이 강해져 한국어를 공부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한국어를 공부하게 된 계기는 바로 국악피리의 연주자가 되고 싶다라는 꿈이였습니다.
새로운 꿈이 생긴 후, 많은 사람들 앞에서 피리를 연주하는 모습이나 한국어로 이야기하는
모습이 구체적인 모습으로 이미지가 떠올랐습니다.그 만큼 저는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어를 배워가면서 한국의 역사에도 흥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갔을 때
국립중앙박물관에 가서 그때까지 제가 몰랐던 수 많은 “살아있는 역사”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공부할 것이 많구나, 아직도 공부는 끝나지않았다 라는 것을 마음으로부터
느꼈습니다.
일본이라는 곳에서 한국구악 피리를 만나고,자기 모국어로써 한국어를 공부하는 길을 저는
선택하였습니다. 그리고, 피리 부는 소녀를 꿈꾸던 제 마음속에 조금씩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제 마음속에서 일어난 아주 작은 변화이고 다른 사람들눈에는 안 보이는 것일지도
모릅니다.그것은 제 꿈이고 한편으로는, 모든 사람의 꿈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국경을
넘어 또 “차이”를 차이라고 인정하고 모두가 함께 살아갈 세계의 흐름, 즉국제화 입니다.
언어를 배움으러써 제 시야는 넓어졌고, 세계의 있는 수 많은 문제에도 눈을 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저희들에게 제일 가까운 문제이지만 쉽게 해결 할 수 없는 한일문제입니다.
일본이라는 곳에서 태어났으면서 국적은 한국이고, 한국인이지만 그렇지 않는 자신,, 이렇게
느껴져도 사실은 아주 뜻깊은 것,, 그런 것에서부터 저는 시작하고 싶습니다.
그냥 피리를 불고 싶다 라는 꿈에서 배우기 시작한 한국어가 저에게 큰 가능성과 큰 꿈을 안게
해 주었습니다.
올해부터 한국재외국민도 국정선거에 투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재외동포들에게는
아주 좋은 결과겠죠? 그렇지만, 못했던 것을 단지 할수 있게 되었으니까 대단하다,라고 생각해
끝내면 좋을까요? 물론, 많은 사람들이 아주 긴 세월에 걸쳐서 조금씩 한거름 한거름 노력한
결과하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 처럼 꿈은쉽게 이루어지지는 않지만 저도 한거름 한거름 힘내서
언젠가는 국제사회에서 “한국재외국민투표”처럼 기여할 수 있는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습니다. 그래도 저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구요? 그건 저에게는 꿈이 있으니까요!
夢があるから
コリア国際学園高等部
コリア国際学園高等部 1 年
梁 英理
そのピリの音色に、私の心は奪われました。
そして、私はこう思ったのです。 “私もこのように人の心を奪うことができる音色を出したい!”、
と。
私が韓国の国楽と初めて会ったのは、小学校 6 年生の時でした。母が大阪で韓国国楽の舞台
があるというので一緒について行ったのです。もともとサムルノリを知っていた私は、軽い気持ちで
母について行きました。しかし、私はそこで大きな衝撃を受けました。
「衝撃?」
それだけでは、どういう意味かみなさんわからないでしょう。
つまり、私はその場で未来の夢ができたのです。その日から私の頭の中は、左から右までピリ一
色で染まりました。 そして、その夢は具体的に“韓国の大学に行ってもっと国楽を勉強したい!”と
いう気持ちに変化し、ますます強くなって、韓国語も勉強することに決めました。
そうなんです。私が韓国語を勉強することになったきかっけは、国楽のピリ演奏者になりたいとい
う夢からだったのです。
あたらしい夢ができたあと、大観衆を前にわたしがピリを演奏する姿や、韓国語で語りかける姿が
具体的な像となってイメージできました。 それだけ私は韓国語を熱心に勉強しました。
そして韓国語を勉強することで韓国の歴史と文化を学ぶということにもつながっていきました。そ
して韓国を訪れた時、国立中央博物館に行き、私がまだ知らなかったたくさんの“生きている歴史”
にも出会いました。 そして、まだまだ勉強することが沢山あるな、まだまだ勉強はおわらないな、と
素直に思えたのです。
日本という場所で、韓国の国楽ピリに出会い、自分の母国語としての韓国語を学ぶきっかけをも
らいました。それからピリを吹く少女を夢見た私の心の中に少しずつ変化がおきました。
それはわたしの中で起こったちっぽけな変化で、みんなからは見えないことかも知れません。そ
れは、自分の夢でありながらも、かつ、みんなの夢にもなりえることです。それは国境を超え、また、
「違い」を違いと認め合い、ともに生きていく世界の流れ、つまり、「国際化」についてです。
語学を知ることで、私の視野は大きく広がり、世界にあるいろんな問題にも目をむけるようになっ
ていきました。例をあげると、私たちにとってとても身近な問題でありながら、容易には解決すること
ができない日韓問題です。日本という地で生まれながらも国籍は韓国で、韓国人でありながらそう
でない自分・・・こんな小さいけれども深いこと、そういうことからでも、始めたいと思います。
ただ、ピリを吹きたいという夢から学び始めた韓国語が私にとって大きな可能性と大きな夢を与
えてくれました。
今年から韓国在外国民にも国政選挙に投票することができるようになりました。 この結果は、私
たち在外同胞にとってとてもうれしい結果でしょう?しかし、できなかったことが単にできるようになっ
たから素晴らしいことで終わっていいのでしょうか?
それには多くの人々がとてもとても長い歳月をかけて、少しずつ一歩一歩努力した結果だと思い
ます。
これと同じように、夢は簡単に叶わないけれど、コツコツ頑張っていつかは私も国際社会で活躍
できるようになりたいと思います。
それは私にはできると思います。 なぜかって?
「それは私には夢があるからです!」
第 5 回大会の応募者
나답게 사는 것
가나가와종합고등학교 3 학년
시나가와 도실
여러분, 자기 자신의 이름이 소중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름이 두 개 있습니다.「시나가와 도실」그리고「한 도실」입니다.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저에게 부모님은 일본에서 살아가기 편하게 그러나 한국인이라는 것은 잊지
않도록 성은 「시나가와」 이름은 「도실」이라고 지어 주셨습니다.
제가 누군가에게 한국인이라고 말할 때 그 사람이 제일 먼저 묻는 것이 언어입니다.
저는 한국어는 거의 말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초등학교 2 학년 때 문득 생각했습니다.
도실이라는 이름을 쓴다면 한국말을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도서관에서 어른들이
공부하는 한국어 책하고 CD 를 빌려 혼자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역시「한국인이 아니잖아.」라고 했습니다. 일본인도 아니고 한국인도
아닌 저는 무엇인가요?
지금은
부모님
때하고는
다릅니다.
저는
어릴
때“특별하다”라고
생각하고,
차별보다는「나는 한국인이야.」라고 자만했습니다.
그런 제가 요코하마 하기 학교에서 모든 것이 무너졌습니다. 그 곳에서는 한국의
문화나 역사를 배우고 한국 이름을 사용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한 도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곳에 모인 재일한국인들은 본명을 말하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이름을 쓰고 있는 나에게 한국인과 일본 부모님을 가진
한 학생이「나도 용기가 났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깨달았습니다. 나와는 다른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러
사람들에게는
그들만의
생각이나
사정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재일
한국인이기에 특별한 것도 없고 같이 배워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지금 여기까지 걸어 온
선배나 앞으로 나아갈 저희들은 일본에 있는 한국인이기에 많은 사람들을 만나 경험을
쌓고, 쌓아 갈 것입니다. 재일 한국인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저의 일부입니다. 저는
도실로서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러기에 먼저 도실이라는 이름을 소중히 하고 싶습니다.
앞으로도「도실」이라는 이름으로 친구와 지내고 꿈인 간호사가 되어 사람들과 이어져
가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공부한 한국어는 한국인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제가 배우고 싶어서 공부합니다. 한국어와 일본어를 자유롭게 쓰고 싶습니다. 여기에 선
것도 하나의 목표였습니다.
단지 본명을 말하는 것이 아닌,「나답다」라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소중하다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상대방을 소중히 여기십니까?
自分らしくあること
自分らしくあること
神奈川総合高等学校 3 学年
品川 桃実
皆さんは自分の名前を大切にしていますか。
私には 2 つ名前があります。「品川桃実」と「韓桃実」です。日本で生まれ育ってきた私に両親は、
日本で住みやすいように、でも韓国人ということは忘れないように、苗字は「品川」、名前は「桃実」と
しました。
私が誰かに“韓国人”だと言ったとき、一番先に聞かれるのは言語のことです。私は韓国語をほと
んど話せません。それで、小学校 2 学年のときふと考えました。「桃実」 と名乗るからには韓国語を
話さないといけないと。図書館で大人用の韓国語学習用の本とCDを借り、独学で勉強しました。
でも結局うまくいきませんでした。やはり言われるのは「それでは韓国人ではない。」です。日本人
でもなく韓国人でもない、私は何なのでしょうか。
現代は両親の時とは違います。私は幼いころ“特別だ”と思い、差別を恐れるどころか、「自分は
韓国人なのだ。」と誇張していました。
それが、「ヨコハマ・ハギハッキョ」を通して、 一気に崩れました。ここでは、韓国の文化や歴史を
学べ、韓国の名前を使えます。私は「韓桃実」と名乗るのです。でも周りの在日韓国人の皆は本名
を名乗りたがりません。ある時、何も考えずに本名を名乗っていた私に、韓国人と日本人の両親を
もつ一人の学生が「自分も勇気がわいてきた。」と話してくれたのです。気付きました。私とは違う、
様々な境遇にある人が存在することを知ったのです。
それぞれの人に、彼ら彼女らだけの考えや事情があると思いました。在日韓国人だから特別だと
いうことではなく、共に学んでいくべきだと気付きました。今ここまで歩んできた先輩方や、これから
進んでいく私たちは、日本にいる韓国人であるからこそ多くの人に出会い、経験を積み、これから
も積んでいくのでしょう。在日韓国人であることはあくまで私らしさの一部です。私は「桃実」として生
きていきたい。だからまずは「桃実」という名前を大切にしたいです。これからも「桃実」という名前で
友達と過ごし、夢である看護師に就き、人と関わっていきたいです。
今まで勉強していた韓国語は、韓国人と証明するためのものでした。でも今は自分が学びたいと
思って勉強しています。韓国語と日本語で自由に使うことができるようにしたいです。ここでスピー
チをすることも一つの目標でした。
ただ本名を名乗ることが全てではなく、「自分らしさ」が一番大事だと思うのです。皆さんは自分ら
しさを大切にしていますか。そして相手らしさを大切に想っていますか。
第 5 回大会の応募者
쌍둥이
이치오카 고등학교 2 학년
가와히가시 나나코
저는 쌍둥이로 태어났습니다. 저는 동생입니다. 저희는 조산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불과 800 그램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무사하게 자랐습니다.낳아 주신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도와주신 의사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어렸을 때 저희는 집에 돌아오면 매일 함께 놀았습니다. 첫사랑도 같은 사람.
쌍둥이이기 때문에 서로 마음 속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희는 정말로 사이가
좋았는데.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사소한 것으로 싸움을 하게 되었습니다.저희는 옷을 교대로
바꿔입었습니다. “오늘은 내가 이 옷을 입을래.” “아니야, 내가 입을거야.” 이런 싸움이 늘
일어났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서로를 라이벌로서 보게 되었습니다. 라이벌이라고 해도 서로를 제일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언니하고는 다른 고등학교에 다니고 싶었지만, 결국 언니도 같은 학교를
선택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저희는 16 년동안 완전히 같은 길을 걸어 왔습니다.
저희에게는 같은 꿈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여배우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중학교 1 학년 때부터 댄스학원에 다녔습니다.
그런
저에게
언니와
다른
길이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객실승무원이
되는
것이었습니다.객실승무원의 상냥한 미소와 친절한 태도가 매우 빛나 보였습니다. 원래
영어를 좋아했던 저는, 전세계를 날아 다니면서 많은 나라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그 일에
매우 매력을 느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저는 명문대학의 외국어학부에 진학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저는 4 년간 계속
다니던 댄스학원을 그만두고, 대신 입시학원에 다니면서 공부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대학진학 공부에 제가 열심히 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한국어입니다. 어학 자격을
따서 대학입시에 활용하기 위해서입니다.
1 년전에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3 개월
후에는 초급 2급에 합격했습니다.
한국어를 배우게 된 계기는 가족 여행이었습니다. 한국여행 후에 한국에 대한 관심이
생겼습니다. 저에게 한국은 언어 뿐만 아니라,식문화, 노래나 댄스 등 알면 알수록
좋아하게 되는 나라입니다. 앞으로도 한국어를 공부해서 언젠가 한국에 유학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해서 저와 언니는 각각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현재 언니하고 사이가
좋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언젠가 서로의 꿈이 이루어졌을 때, 진심으로 웃으며 서로를
축하하는 날이 오겠죠? 언니와 저, 저희는 진정한 파트너, 쌍둥이입니다.
지금까지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双子
大阪府立市岡高等学校 2 年
川東 奈那子
私は双子に生まれました。私は妹です。私たちは早産で生まれたので、わずか 800 グラムしかあ
りませんでした。しかし今まで無事に育ちました。産んで下さったお父さん、お母さんそして助けて
くださったお医者さんに感謝の言葉を申し上げます。
幼かった時私たちは家に帰れば毎日一緒に遊びました。初恋も同じ人.双子だから互いに気持
ちをよく理解していました。その時は私たちは本当に仲が良かったのに。
小学校に入るとすぐにささいなことでけんかをするようになりました。私たちは服を交替で着てい
ました。「今日は私がこの服を着るの」「駄目よ、私が着るのよ」こういうケンカがいつも起きました。
中学校の時からお互いをライバルとして見るようになりました。ライバルといってもお互いを一番よ
く理解していました。
私は姉とは別の高校に通いたかったのですが、結局姉も同じ学校を選択しました。このようにし
て私たちは 16 年間全く同じ道を歩いてきました。
私たちには同じ夢がありました。それは女優になるということでした。それで私たちは中学校 1 学
年の時からダンススクールに通いました。
そんな私に姉と違った道が現れました。それは客室乗務員になるということでした。客室乗務員
のやさしい微笑と親切な態度が非常に輝いて見えました。もともと英語が好きだった私は、全世界
を飛び回りながら多くの国の人々を会うことができるその仕事に非常に魅力を感じました。
このようにして私は名門大学の外国語学部に進学することを決心しました。私は 4 年間ずっと通
ったダンススクールを辞めて、代わりに予備校に通いながら勉強に専念しています。
大学進学のための勉強のうち私が熱心にしていることの一つが韓国語です。語学の資格を取っ
て大学入試に活用するためです。1 年前に韓国語を学び始め、3 ヶ月後には初級の 2 級に合格し
ました。
韓国語を学ぶようになったきっかけは家族旅行でした。韓国旅行後に韓国に対する関心が生ま
れました。私にとって韓国は言葉だけでなく、食文化、歌やダンスなど知れば知るほど好きになる
国です。今後も韓国語を勉強していつか韓国に留学したいです。
このようにして私と姉はそれぞれ別々の道を歩き始めました。現在は姉と仲が良いとは言えませ
んが、いつかお互いの夢がかなった時、心より笑ってお互いを祝福する日がくるでしょう?姉と私、
私たちは真のパートナー、双子です。
ご静聴ありがとうございまし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