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스테이의 추억

クムホ・アシアナ杯 2009
홈스테이의 추억
관동국제고등학교 학년
사사키 유우카
2
지난 여름의 제일 큰 추억은 한국 단기유학입니다. 저는 한국의 서울에 있는
경희대학교에 유학을 다녀왔습니다. 단기유학에서는 웃음과 눈물이 함께하는 드라마
같은 매일 매일을 보냈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1 주일 동안의 홈스테이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유학 첫날부터 홈스테이가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홈스테이 가족을 소개할까요?
점심은 대학교의 학생 식당에서 먹었는데도, 꼭 점심 도시락을 넣어주셨던 어머니.
저를 차에 태워 백화점이나 관광명소 등 여러 장소에 데려다 주셨던 아버지. 말이 적고
자주 삐지던 홈스테이 파트너 소리, 그리고 사교적이고 항상 미소를 잃지 않았던 누리
언니.
저는 이 가족들과 함께 한국말로 많이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힘들었던 기억은 전혀 없고, 즐거웠던 기억만이 남아있습니다. 그렇게 즐거운
1 주일을 보내고 가족과 헤어지는 날, 저는 너무나도 슬퍼서 집합장소로 가는 차
안에서 계속 눈물이 났습니다. 그런 저를 보고 어머니는 화장지를 건네 주셨습니다.
아버지는 저에게 “또 만날 거니까 울지마!” 하고 따뜻하게 저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집합장소인 기숙사에 도착해서, 다시 한 번 어머니, 아버지께 인사를 하니까
지금까지의 감정이 북받쳐올라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울면서 헤어지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저는 눈물을 참고 웃으면서 마지막 이별의 인사를 했습니다.
기숙사의 내 방으로 들어가니까 룸메이트가 먼저 와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앞으로 잘 지내자.” 하고 웃으면서 인사를 했습니다. 그 때, 제 친구는 저를
보더니 크게 웃으면서 “유우카, 이에 미역이 붙어 있어.!” 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놀라서 거울을 보고, 이에 붙어있던 미역의 크기에 다시 한 번 놀랐습니다. 이런
모습으로 홈스테이 가족과 마지막 인사를 했나 하는 생각을 하니 너무나도
부끄러워졌습니다. 중요한 날에는 인사를 하기 전에 꼭 거울을 봐야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것이 바로 저의 웃음과 눈물이 함께한 홈스테이 이야기입니다. 저는 홈스테이
아버지가 이별할 때에 해주신 가족을 소중히 여기라는 말을 가슴에 새기고 있습니다.
한국에 또 하나의 가족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한국에 갈 때마다 꼭 연락을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저도 홈스테이를 해서 한국 사람에게 따뜻한 일본의 가족이
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1178 字(スペースを含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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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国語スピーチ部門
ホームステイの思い出
関東国際高等学校 2 年
佐々木優香
去年の夏の一番の思い出は韓国短期留学です。私は、韓国のソウルにある慶熙大学に留
学に行きました。短期留学では、笑いあり涙ありのドラマのような毎日を過ごしました。
今日は、その中で 1 週間のホームステイで起こったことを話したいと思います。
留学の初日からホームステイが始まりました。まず、ホームステイの家族を紹介しまし
ょう。お昼は大学の学食で食べているのに、必ず私にお弁当を持たせてくださったお母さ
ん。私を車に乗せて、デパートや観光名所などいろいろなところに連れていってくださっ
たお父さん。無口で、時々ごきげん斜めだったホームステイ・パートナーのソリ。そして、
社交的で、いつもニコニコしていたヌリお姉さん。
私は決して、この家族と韓国語でたくさん話ができたわけではありません。しかし、そ
のせいで辛かった記憶はまったくなく、楽しかった記憶だけが残っています。そんな楽し
い一週間を過ごして家族と離れる日、私はあまりの悲しさに集合場所へ行く車の中でずっ
と泣いていました。そんな私を見て、お母さんはティッシュを一箱くれました。お父さん
は、「また会えるから、泣かないで」と、優しく私を慰めてくださったのです。
集合場所の寮に到着して、改めてご両親にお礼を言うと、今までの感情が高ぶって涙が
止まりませんでした。しかし、泣いて別れたくはなかったので、私は涙を流しながらも、
笑って最後の挨拶をしました。
寮の部屋に入ると、ルームメートが先に来ていました。久しぶりに会った友達に、「これ
からよろしく」と、笑って挨拶しました。その時、私を見るなり、私の友達は大笑いして
「優香、歯にワカメ付いてるよ!」と、言ったのです。私はびっくりして、すぐに鏡を見て、
歯に付いていたワカメの大きさに驚きました。こんな姿でホームステイの家族と最後の挨
拶をしていたのかと思うと、すごく恥ずかしくなりました。大事な日には挨拶をする前に
必ず鏡を見ないといけない、ということを学びました。
これが、私の笑いと涙のホームステイの話です。私は、ホームステイのお父さんが別れ
の時におっしゃった「家族を大切に」という言葉を胸に刻んでいます。韓国にもう一つの
家族があるということを忘れずに、韓国へ行くたびに必ず連絡をとっていきたいと思って
います。そして今後、私(の家)もホームステイを受け入れ、韓国人に温かい日本の家族
になりたいと考えて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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クムホ・アシアナ杯 2009
한국말에 사랑을 해버린 나
구니지마 고등학교 학년
오카무라 아야카
2
저는 중학교 3 학년때 한국말에 사랑을 해버렸습니다.
중학교 3 학년때 어느 날. 집에 돌아와서 텔레비전을 켜보면 한국프로가
방송되었습니다. 그게 자막이 없고 그 때 저에게는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
때 왠지 생각한 것이 있었습니다. 『이야기할 수 있게 되고 싶다.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싶다.』바로 제가 한국말을 시작한 계기였습니다.
요즘은 고등학교 입시를 위한 수험공부로 한창였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항상
한국말에 관한 것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스스로 책을 사와서 우선 인사등부터
공부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처음뵙겠습니다. 공부하기가 너무너무 즐거워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무사히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거기서 기쁜 것을 알게 됐습니다. 참 수학여행의
행선지가 한국이였습니다. 그걸 들어서 저는 매우 놀라서 정말 기쁘고 수학여행까지를
카운트하기로 했습니다. 일년도 앞인데 마음이 들떠있었습니다.
그 무렵부터 더 한국말을 열심히 공부하게 되어 휴일이 돼면 쓰루하시[鶴橋]에 가서
아줌마들과 몸짓 손짓을 더하면서 조금씩 회화를 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회화를 한다고
해도 간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용기를 내고 제가 『안녕하세요?』
라고 말하면 아줌마들은 놀란 얼굴로 『안녕하세요?』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런 저와 아줌마들의 인사가 점점 회화가 되어 취미의 이야기나 가족의 이야기등
많이 이야기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 때 저는 평소 자기가 뭔가가 달랐습니다. 그 날
처음 만난 아줌마들과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나. 일본말로 말하는 것보다도 더
즐겁게 이야기하고 있는 나. 그 때 저는 깨달았습니다. 『난 한국말에 사랑을
해버렸다.』
그 때부터 제 마음속에서 『한국말』『한국말을 말하는 나라 대한민국』이란 것이
매우 크게 됐습니다. 그리고 사전이 없어도 사람의 도음이 없어도 한국사람과 즐겁게
이야기하고 싶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더욱 한국말에 흥미를 가졌습니다. 시간이 있으면
사전을 열어 집에 돌아오면 한국의 코메디프로를 보며 폭소하고 있는 나. 그 모습을
신기스럽게 보고 있는 가족. 이런 날마다가 매일 계속 되어 저는 너무 행복합니다.
한국말에 접하고 있는 시간이 제일 행복합니다.
앞으로도 제 인생에서 한국말에 접하고 있는 시간이 조금이라도 길게 있도록 한국말
공부를 열심히 하려고 합니다.【1121 字(スペースを含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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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国語スピーチ部門
韓国に恋をしてしまった私
大阪府立柴島高等学校 2 年
岡村彩香
私は中学3年の時に韓国語に恋をしてしまいました。
中学3年のある日。家に帰ってテレビをつけてみると韓国の番組が放送されていました。
それは字幕がなく、その時の私にはどういう意味なのか全く分かりませんでした。でも、
その時なぜか思ったことがありました。「話せるようになりたい。分かるようになりたい」
まさにこれが私が韓国語を始めようと思ったきっかけです。
その頃、高校入試のための受験勉強の真っ最中でした。しかし私は、韓国語のことばか
り考えていました。自分で本を買って、はじめは挨拶などから勉強しました。アンニョン
ハセヨ?チョウムベッケスンニダ……勉強することがとても楽しくて楽しくて仕方ありま
せんでした。
無事に高校に入学して、そこで私は嬉しいことを知りました。なんと修学旅行の行き先
が、韓国だったのです。それを聞いて私はとても驚き、本当に嬉しく、修学旅行までをカ
ウントする事にしました。1年も先のことなのに心がウキウキしていました。
その頃から、より韓国語を一生懸命勉強するようになり、休みの日になれば鶴橋に行き、
おばちゃんたちと身振り手振りを加えながら、少しずつ会話をするようになりました。で
も、会話をすると言っても、簡単なこと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しかし、勇気を出して私
が「アンニョンハセヨ?」と言うと、おばちゃんたちは驚いた顔で「アンニョンハセヨ?」
と答えてくれました。
こんな私とおばちゃんたちの挨拶が少しずつ会話になっていき、趣味の話、家族の話な
ど、たくさん話せるようになりました。この時の私は、いつもの私とは何かが違いました。
その日初めて会ったおばちゃんたちと、こんなにも楽しく話している私。日本語で話すよ
りも楽しく話している私。その時私は悟りました。「韓国語に恋をしてしまった」と。
この時から、私の中で「韓国語」「韓国語を話す国、大韓民国」というものはとても大き
なものになりました。そして、辞書がなくても人の助けがなくても、韓国の人たちと楽し
く話したい。と思うようになり、よりいっそう韓国語に興味を持つようになりました。時
間があれば辞書を開き、家に帰れば、韓国のお笑い番組を見て爆笑している私。その姿を
不思議そうに見ている家族。こんな日が毎日続き、私はとても幸せです。韓国語に触れて
いる時間が一番幸せです。
これからも、私の人生の中で韓国語に触れている時間が少しでも長くあるように、韓国
語の勉強を一生懸命頑張ろうと思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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クムホ・アシアナ杯 2009
깊은 추억이 된 여행
하시모토 고등학교 학년
사카구치 카스미
2
중학교 2 학년때 였습니다. 저는 와카야마현 중학생 방한 연수단의 일원으로 처음
한국 땅을 밟았습니다. 서울의 학생들과 교류회를 했던 일이나 관광도 모두
신선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친구가 생긴 것이 기뻤습니다. 메일을 보내거나 편지를 쓰며
한국친구들과의 우정을 소중히 여기며 더욱 한국에 흥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고등학생이 되어 저는 한국요리점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한국의
식생활문화를 접하며 일상생활에서의 차이도 배울 수 있어서, 모든것이 공부가
되었습니다. 저는 점점 더 한국에 흥미가 생겨 다시 한국에 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중 2007 년 12 월, 저는 언니와 함께 한국에 여행을 가게되었습니다. 도착한
한국, 서울의 거리는 열기와 흥분으로 활기에 넘치고 있었습니다. 그날은, 한국 제 17 대
대통령 선거가 있던 날이었습니다.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이명박씨가 당선됐다고
들은 나는 왠지 모를 기쁨과 감동을 느꼈습니다. 기뻐하는 한국 사람들 속에서 함께
일본과 한국의 우호를 바라는 큰 기대에 가슴이 뛰었습니다. 호텔로 돌아가기 위해 탄
지하철 안에서 생긴 일이었습니다. 한분의 할아버지께서 저에게 말을 걸어오셨습니다.
“일본사람이니?”라고 물으셔서 “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할아버지께서는 옛날에 일본에서 사신 적이 있다고 유창한 일본어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후, 할아버지께서는 귀를 의심할 만한 반일 감정을 저에게 털어
놓으셨습니다. 정말로 놀랍고 무섭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주위에 있던 사람이 친절히
마음을 써주신 덕분에 그 자리는 피할 수 있었습니다.
호텔에 도착해 이 체험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역사문제, 독도문제 등 아직
해결되지 않은 것도 많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전쟁이나 식민지시대에 괴로워 한
사람들의 분노이구나. 그 할아버지께서도 그 기분을 일본인인 나에게 전하고 싶으셨던
거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때문에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으면 안되는
현실이라고 실감했습니다.
이 귀중한 체험으로 인해 알게된 한국이 바라보는 일본에 대한 의견도 참고로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느꼈습니다. 양국의 신뢰와 우정을 이룩하기 위해서 우리세대가
과거와 미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다면 새로운 바람이 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적극적인 태도가 그 나라나 국민들의 생각과 가치관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17대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을 기념할만한 순간에 서울의 거리에서 한국 사람들과
함께 큰 기쁨과 감동을 준 21 세기의 한페이지를 쓸 수 있었던 것에 감격했습니다.
이문화라는 것은 오감으로 느껴 생각의 폭을 넓히는 중요한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직접 그 문화를 체험하고 느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준 여행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저의 스피치를 들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1058 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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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国語スピーチ部門
思い出深い旅
和歌山県立橋本高等学校 2 年
坂口可純
中学 2 年生の時でした。私は和歌山県中学生訪韓研修団の一員として初めて韓国の地を
踏みました。ソウルの学生との交流会や観光も全てが新鮮なものでした。何よりも友達が
できたことが嬉しかったです。メールをしたり手紙を書いたり友情関係を大切にするにつ
れ、韓国に強い興味を抱くようになりました。
高校生になり、私は韓国料理店でアルバイトを始めました。韓国の食文化に触れ日常の
生活からも違いを学び、あらゆることが勉強になりました。興味が膨らみ再び韓国に行き
たいと思うようになったのです。
そう思っていた 2007 年 12 月、私は姉と共に韓国旅行に行きました。韓国に着き、ソウ
ルの街は熱気と興奮で活気にあふれていました。その日は、韓国第 17 代大統領選挙の日だ
ったのです。日本出身、大阪生まれである李明博氏が当選されたと知らされた私は、無条
件に喜びと感動が込み上げてきました。喜びに沸きあがる韓国人の輪の中で日韓友好を願
い、大きな期待に胸を躍らせていました。ホテルに戻ろうと乗った地下鉄の中での出来事
です。ひとりのおじいさんが私に話しかけてきました。
「日本人?」と、尋ねられ、「はい」と、答えました。
そのおじいさんは昔日本に住んでいたことがあると、流暢な日本語で話してくれました。
しかし、その後耳を疑うような反日感情をぶつけてきたのです。本当に驚き、恐怖も感じ
ました。しかし、周りの人が優しく気遣ってくれたおかげで、その場は乗り越えることが
できました。
ホテルに着き、この出来事について深く考えてみました。歴史問題、竹島問題など解決
していないことも多々あることに気付きました。戦争や植民地時代に苦しんだ人々の怒り
なのだろう。そのおじいさんは、この気持ちを日本人である私に伝えたかったのだろうと
思いました。だからこそ、正面から向き合わなければならない現実なのだと実感しました。
この貴重な体験をしたからこそ知ることができた、韓国から見た日本への意見も参考に
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感じました。両国の信頼と友情を築きあげるためにも、私たち世代
が過去と未来に思いを巡らせば、新しい風が吹くように思うのです。積極的になることで、
その国や人々の考え、価値観などを理解できるのではないかと思います。
第 17 代李明博大統領誕生の記念すべき瞬間に、ソウルの街で韓国の人々と共に大きな喜
びと感動を与えてくれた 21 世紀の 1 ページを綴れたことに感激しました。異文化は、五感
で感じ、考えの幅を広げる大切な経験だと思います。直接その文化を感じ取ることが必要
だと教えてくれた旅になり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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クムホ・アシアナ杯 2009
일본과 한국
메누마 고등학교 학년
모테기 쿠미
저는 작년에 신기한 체험을 했습니다. 한국 행 비행기에서 객실승무원이 저에게는
한국말로 말을 걸고 옆에 앉아있는 동생에게는 일본말로 말을 걸었습니다. 왜 저한테는
한국말이고 동생에게는 일본말 이었을까요?
저 나름대로 조금 분석을 해 보고 싶었습니다. 먼저 외면입니다. 저를 봐주세요. 눈이
가늘고 눈초리가 치켜 올라가있는 한국사람의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그때 저의
옷차림은 T 셔츠에 청바지, 캡이었습니다. 한국사람은 심플하게. 일본사람은 옷을 겹쳐
입는 것을 좋아합니다. 옷에 유행에 관해서도 일본사람은 유행에 따라 자신을 꾸미고
한국사람은 유행을 자기방식으로 꾸며간다, 그런 느낌 인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조금 더 일본사람하고 한국사람을 비교하고 싶어졌습니다.
표현방법에 관한 일이지만 한국사람은 사물을 직선적으로 표현합니다. 그것에 대하여
일본사람은 사물을 완곡하게 표현합니다. 직선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심하게 들리지만
그것은 솔직하게 전하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는 다고
생각해서입니다. 일본사람의 완곡한 표현은 상대에게 상처주지 않는 다는 생각입니다.
정반대되는 표현이지만 어느 쪽도 상대를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진학에 대해서도, 일본사람과 한국사람의 생각은 다릅니다. 한국에서는 부모나
주위에서의 영향으로 대부분에 아이들이 대학진학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학력중시와 고학력이라면 취직에 문제가 없다, 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은 것 입니다. 일본도 대학진학을 생각하는 사람은 많이 있고 대학수험도
만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국과 비교했을 때 일본에는 많은 대학이 있습니다. 또
일본은 자격 등도 중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장래, 취직을 했을 때 바로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는 학생자신이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절차탁마하고 일본은 대학자신이 매력 있는 학교를 만들어 학생이 자기에게 알맞은
대학을 고르고 있습니다. 방법은 다르지만 장래에 일, 취직을 중시하고 있는 것은
같다고 생각합니다.
방법은 다르지만 상대를 생각해서 행동하는 거나 장래를 생각해서 대학을 고른다는
등 일본사람도 한국사람도 목표로 하는 것은 똑같습니다. 실은 저는 한국사람과
일본사람의 양쪽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일본사람, 어머니가
한국사람입니다. 저는 이 일을 매우 자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본과
한국의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큰 장점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내면에서 만이 아니라 겉모양에서도 볼 수 있다, 라는 것 입니다. 사람은
아무리 해도 주관적으로 보기마련입니다. 하지만 저는 양쪽에 피가 흘러있기 때문에
냉정한 판단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과 한국, 가까운 나라지만 보이지 않은
벽과 생각의 차이가 많이 있습니다. 저는 한국말을 공부해 일본과 한국에 상호이해에
힘쓰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언젠가 양국이 굵은 유대로 맺어지도록 힘쓰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자 저에게는 왜 한국말로 말을 걸었을까요?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1156 字】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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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国語スピーチ部門
日本と韓国
妻沼高等学校 1 年
茂木玖美
私は去年不思議な体験をしました。韓国行きの飛行機で客室乗務員の方が、私には韓国
な ぜ
語で話しかけ、隣に座っている弟には日本語で話しかけたのです。何故
、私には韓国語で、
弟には日本語なのでしょうか?
私なりにちょっと分析してみたくなりました。まず外見です。私を見てください。目が
細く目尻がつり上がっている韓国人の特徴を持っています。その時の私の服装は、T シャツ
にジーンズ、キャップでした。韓国人はシンプルに、日本人は重ね着を好みます。服の流
行に関しても、日本人は流行に自分をアレンジし、韓国人は流行を自分流にアレンジする、
という感じがします。
ここまで考えた時、もう少し日本人と韓国人を比較してみたくなりました。表現方法に
ついてですが、韓国人は物事を直接的に表現します。それに対して日本人は物事を婉曲に
表現します。直接的に表現するときつく聞こえますが、それはストレートに伝えないと、
その人にきちんと伝わらないと思っているからです。日本人の婉曲表現は、相手を傷つけ
ないためです。正反対の表現ですが、どちらも相手のことを思っての表現です。
進学についても、日本人と韓国人の捉え方は異なります。韓国では、親や周りからの影
響により、ほとんどの子が大学進学について真剣に考えています。韓国は学歴重視で、高
学歴なら就職に問題が無い、と思う人が多いのです。日本も大学進学を考える人はたくさ
んいますし、大学受験も甘くはありません。しかし、韓国と比較して日本には多くの大学
があります。また、日本は資格なども重視しています。それは、将来、就職をした時にす
ぐに対応できるからだと思います。韓国では学生自身が大学に入るために切磋琢磨し、日
本は大学自身が魅力ある学校づくりをし、学生が自分に適した大学を選んでいます。方法
は違いますが、将来の仕事、就職を重視していることは同じだと思います。
方法は異なりますが、相手を思って行動することや将来を考えて大学を選ぶこと等、日
本人も韓国人も目指すところは同じです。実は、私は韓国人と日本人の両方の血が流れて
います。父が日本人、母が韓国人です。この事をとても誇りに思っています。なぜなら、
日本と韓国のすべてのことを、客観的に見られる大きな長所だと思っているからです。そ
れは、内側からだけでなく、外側からも見ることができる、ということです。人間はどう
しても主観的に見てしまいがちです。しかし、私は両方の血が流れているということで、
冷静な判断ができると思っています。日本と韓国、近い国ですが、見えない壁と、考えの
違いがたくさんあります。私は韓国語を勉強し、日本と韓国の相互理解に努めたいと思い
ます。そして、いつか両国が太い絆で結ばれるように力を尽くしたいと思います。
な ぜ
さて、私は何故
韓国語で話しかけられたのでしょうか? 皆さんはどう思います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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クムホ・アシアナ杯 2009
작은 평화
가나가와소고 고등학교 학년
하야시 와카코
1
“전쟁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평화의 방벽을 세워야 할 곳도
인간의 마음속이다” 이 말은 UNESCO 헌장의 한 구절입니다.
초등학교때 평화 활동에 대해 조사하다가 이 구절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
평화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적이 없는 저는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세계 여러
나라를 조사할 때, 제 눈에 들어온 것은 암호같이 생긴 한글이었습니다. 동그라미와
네모의 조합이 아주 귀엽고 흥미로웠습니다.
저는 평화 활동 조사를 통해 관심을 갖게 된 “평화”와 “한국어”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평화”와 “한국어”, 언뜻 전혀 관계가 없는 것 같지만, 저에게 한국어는 이문화를
접하고, 평화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하는 계기가 되어 주었습니다.
저와 한국과의 첫 만남은, 초등학교 2 학년 때 도서실에서 본 “솔이의 추석
이야기”라는 예쁜 그림책을 통해서 였습니다. 민속의상을 입고 있는 “솔이”, 저는
“솔이”의 그 책이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한국의 그림책이라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습니다.
한글에 흥미를 갖제 된 후, 6 학년때 부터는 근처 시민회관의 한글 강좌에서 한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어뿐만 아니라, 문화나 습관의 차이도 조금식 알게
되었습니다. 중학생때는 한국의 여중생과 서툰 한국어로 편지를 주고 받으며, 우정을
쌓았습니다. 작년 봄에, 오래간만에 그 친구를 만나서,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때 저는 서로의 문화나 습관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 “언어”는 매우 중요한
도구라는 것을 절실히 느겼습니다. “내가 조금더 한국어를 잘 한다면 지금보다 더 많은
얘기를 하며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 텐데.”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어 수업을
받을 수 있는 고등학교를 목표로 하여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작년에 그 학교에
진학했습니다.
제가 다니고 있는 학교는 매년 한국 고등학교와 자매 교류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작년 여름 역사 교과서 문제로 인해 자매 교류가 중지 되었습니다. 제겐 아주
슬픈 사건이었습니다. 조금도 사이좋게 해결할 수는 없는 걸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 열심히 공부해온 한국어로 한국의 고등학생들과 우정을 나누는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올해는 다시 자매교류가 이루어 질까요?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저는 한국
고등학생들과 다양한 문제에 대해 의견을 주고 받고 싶습니다. 물론 한국어로 말이죠!
우리들과 같은 고등학생들이 나누는 우정은, 작은 평화를 만들어 가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개개인의 교류를 통해,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작은 평화를 실천해 간다면, 그것이 곧 큰 의미의 평화로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저는 앞으로도 좋아하는 한국어를 출발점으로 하여 작은 평화를 실천해 가고
싶습니다.【1051 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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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国語スピーチ部門
小さな平和
神奈川県立神奈川総合高等学校 1 年
林和歌子
“戦争は人の心の中で生まれるものであるから、人の心の中に平和の砦を築かなければな
らない”これは UNESCO 憲章の前文の一節です。
小学生の頃、平和活動について調べていたとき、この文章に出会いました。それまで平
和について深く考えた事のなかった私にとって、強く印象に残るものでした。そして、世
界の多くの国々を調べていたとき、私の目に飛び込んできたのは暗号のようなハングルで
した。丸や四角が組み合わされていてとても可愛いく、興味深いものでした。
私は平和活動の調査を通して関心を持つようになった“平和”と“韓国語”について話
をしようと思います。
“平和”“韓国語”一見別のもののようですが、私にとって韓国語は、異文化に触れ平
和をもう一度考えるきっかけとなりました。
私と韓国との初めての出会いは、小学校2年生の時に図書室で見つけた“ソリちゃんの
チュソク”という、かわいい絵本を通してでした。民族衣装を着た“ソリちゃん”、私は
この本をとても気に入っていました。しかし、それが韓国の絵本だということを、その時
は知りませんでした。
ハングルに興味を持ったあと、6 年生のときからは、近くの市民館のハングル講座で韓国
語を勉強し始めました。そして、言葉だけではなく、文化や習慣の違いも少しずつ分かる
ようになりました。中学生のときは、韓国の女子中学生と片言の韓国語で文通をしながら、
友情を深めました。昨年の春、久しぶりにその友達に会い、とても楽しい時間を過ごしま
した。そのとき私は、お互いの文化と習慣を理解し、受け入れるためにも“言語”はとて
も大切な道具だということを痛感しました。「私がもっと韓国語が話せたら、今よりももっ
とたくさんの話ができ、お互いを理解できたのになあ」と。そして、私は韓国語の授業を
受けられる高校を目指し、一生懸命勉強しました。そして昨年、その学校に進学しました。
私が通っている学校は毎年、韓国の高校と姉妹校交流を行っています。しかし、昨年の
夏、歴史教科書問題で交流が中止になりました。私にとって、それはとても悲しい出来事
でした。もっと仲良く解決できないかなあ?と考えました。今まで一生懸命勉強してきた
韓国語で、韓国の高校生と友情を深め、友達になりたいです。今年また、姉妹校交流がで
きるでしょうか。もしそうなったら、私は韓国の高校生とさまざまな問題について意見を
交わしてみたいです。もちろん韓国語で!私たち高校生同士が分かち合う友情は、小さな
平和を築きあげていく、ひとつの過程だと考えます。そして、そのような一人ひとりの交
流を通して、お互いを認め合い尊重し、小さな平和を実践していけば、それは必ず大きな
意味の平和へ繋がっていく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私はこれからも、大好きなハングルを出発点に、小さな平和を実践していこうと思いま
す。
21
クムホ・アシアナ杯 2009
용서와 망각:
망각: 한일관계를 생각하면
야마나시 에이와 고등학교 학년
나카고미 구미코
저는 교환학생으로 선발되어 한국에서 1 년간 공부를 했습니다. 늘 가깝고도 먼
나라인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 대해 관심이 많아 유학을 결심했습니다. 이제 한국에서
수다를 떨 수 있는 한국친구들도 많이 생겼습니다. 다른나라에서 생활할 때는 그
곳에서의 경험자체를 그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그 문화나 사고방식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 줄 수 있다면 충분한 것 같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평범한 학생으로써 학교에
다니며 행복을 느꼈습니다.
제가 다닌 학교는 열여섯의 어린나이로 독립운동에 앞장 서 생명을 바친 유 관순
열사의 모교입니다. 그래서 항일의 상징인 이화여고와 우리 야마나시 에이와여고와
자매결연을 맺은 감격스러운 그 날을 당시 중학생이었던 저는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화와 에이와가 비슷한 시기에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학교라는 공통점 외에
아사카와 형제도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아사카와 타쿠미는 한국인이
차별받던 때에 한국을 위해 일하다가 일본인들로부터 박해받은 인물입니다. 그는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라고 새겨진 기념비와 함께 지금 한국에 잠들어 있습니다. 놀랍게도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있는 3 만여개의 무덤 중에 일본인으로써 매장이 허락된 유일한
인물입니다. 그는 그만큼 한국을 사랑하여 한국인과 함께 생활했던 것입니다. 타쿠미가
야마나시 출신이라는 것이 무엇보다 두 학교를 연결해 준 큰 힘이 되었습니다. 이제 두
학교가 부단히 노력하여 교환학생 제도가 생겼고 이를 통해 한일관계에 대한 이해와
평화를 추구할 인재양성에 힘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반일교육을 받은 선생님들 중에는 일본인인 저를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분도
계셨습니다.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현수막, [독도는 우리나라거야]라며 제 눈을
쳐다보며 주장하는 친구, 또 홈스테이 집에서 본 [독도 사랑해]라고 쓰여진 인형 등을
통해 [내가 일본인이구나]라며 새삼 깨닫고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누군가와
아무리 친해져도 결국 저는 일본인이었습니다. 역사나 국제관계를 생각할 때 상대가
한국인이면 더욱 더 그랬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경험이 제가 역사와 직접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해 준다는 것입니다.
[용서는 하더라도 잊지말 것] 이것은 일본군이 한국인을 교회에 가두고 무참히
화형시킨 사실을 전하는 전시관에서 본 말입니다. 그들은 그 잔학한 행위를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확실한 것은 우리들은 결코
시간이 흘렀다고 해서 과거의 부정적 행위가 용서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 반일감정이 엷어진다는 것을 용서와 오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의 잘못을 정확히 배우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진정한 평화를 추구하며
행동해야만 할 것 입니다.
[비록 용서받는 날이 온다고 해도 망각하는 날이 와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한일교류
속에서 가장 강조하고 싶은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여러분 앞에 말씀드리는 것도
세계화시대를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1160 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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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国語スピーチ部門
許しと忘却:日
許しと忘却:日韓関係を考えて
山梨英和高等学校 2 年
中込久美子
私は交換留学生として韓国で1年間勉強をしました。「近くて遠い国」と言われる韓国と
日本との関係に興味があった私は、留学を決意しました。今ではたわいもない会話をも出
来る友達をたくさんつくることができました。海外で生活するときは、ただ相手を知り、
自分とは異なった文化や考え方を持っているということを、ありのまま尊重できれば十分
だと思います。私はただ友達と同じように学校に通うことに幸せを感じていました。
私が通っていた学校は、16 歳という若さで独立運動の先頭に立ち、命を落としたユガン
スンの母校です。そのため反日のシンボルである梨花と山梨英和が姉妹校提携を結んだ時
のことは、当時中学生だった私もよく覚えています。両校の結び付きには、単に梨花と英
和がミッションスクールとしてほぼ同時期に宣教師によって建てられたという共通点だけ
ではなく、浅川兄弟の存在もありました。特に浅川巧は、韓国人が差別を受けていた時代
に韓国のために働いていたため、日本人から迫害を受けていた人物です。彼は今も「韓国
の山と民芸を愛し、韓国人の心の中に生きた日本人、ここ韓国の土となる」と刻まれた記
念碑と共に韓国の地に眠っています。驚くことに、独立運動家も多く眠る3万余と言う墓
の中で、日本人として埋葬が許された唯一の人物でもあります。彼はそれほど韓国を愛し、
韓国人と共に生きたのです。その巧が山梨県の出身であったことは、両校を結びつける何
よりも大きな力となりました。両校が絶え間ない努力を費やして築いた交換留学の制度は、
日韓関係についての理解と平和を追求する人材を育成することに力を注いでいます。
しかし、反日教育を受けた先生方の中には、日本人である私の存在を快く思わない先生
もいました。また、「独島はわたしたちのものだ」と書かれた横断幕、「独島は私たちの国
のものだ」と、日本人である私に面と向って主張してくる友達、あるホームステイの家で
は「独島愛している」と書かれたぬいぐるみが置いてある部屋を使っていたこともありま
した。その度に私は、自分が日本人であるということを改めて感じました。たとえどんな
に仲の良い友達が出来ても、結局私は1人の日本人として見られるのだとも感じました。
相手が韓国人であれば、歴史や国際問題を考えた時なおさらのことです。しかし、ここで
1番重要なのは、これらの経験を通して私自身が直接生きた歴史に触れ、学ぶことができ
たということです。
「許しこそすれ、忘れる勿れ」。これは、日本軍が韓国人を教会に閉じ込めて、無残にも
焼け殺したことを伝える展示館で目にした言葉です。この言葉の通り、彼らはこの残虐な
行為を忘れることはないでしょう。それでは、許しとはどういうことなのでしょうか。こ
こで私が強く思うのは、私たちは決して時の流れによって許されてはいけないということ
です。時が経ち、反日感情が薄れてゆくことを許しと勘違いしてはいけないということで
す。私たちは過去の過ちを正しく学び、それを理解した上で真の平和を心から求め、行動
していか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
「たとえ許される日が来ても、忘れる日が来てはいけない」。これは、日韓交流の中で今
日私が1番大きな声で唱えたい言葉です。そして今日、こうしてみなさんの前でスピーチ
したことも、国際人への第一歩として私にできる役割の1つだと思って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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クムホ・アシアナ杯 2009
감사
이치오카 고등학교 학년
카타이 유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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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에게 고맙다고 감사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까?
저는 작년 3 월부터 올해 1 월까지 한국으로 유학을 다녀왔는데 그것이 우리
할머니하고 처음으로 떨어져 살게된 경험이었습니다.
모녀 가정이고 어렸을 때 엄마하고도 떨어져 살았던 저는 워낙 할머니를
좋아했습니다. 그렇지만 중학생이 됐을 때 사춘기가 와서 그런지 왠지 어색하거나 싸울
때도 자주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1 학년 초여름.갑자기 한국으로 유학을 가고 싶다고 이야기를 꺼냈던
저에게 가족은 별로 놀란 모습도 없이 쉽게 승낙해 주셨습니다. 유학비용은 장학금이
나왔는데 그 외에 생활비가 필요하니까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했습니다. 방학동안
그리고 학교에 다니면서 일하고 모았던 금액은 40 만엔 학생에게는 결코 작은 돈이
아닙니다."내 유학을 내가 번 돈으로 간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다 내 자신의 힘으로
이룰 수 있다." 자랑스러운 마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제 유학은 다른 사람들의 응원이 있었기 때문에 달성한 것
같습니다. 그런 마음을 처음 느꼈던 때는 한국으로 떠나는 날 아침. 신칸센
안이었습니다. 할머니가 점심에 먹으라고 만들어주신 도시락. 그 속에는 제가 아주
좋아하는 닭튀김하고 계란말이. 그리고 평소에는 절대 들어 있지않던 스테이크까지.제
유학에 대해서는 특별히 응원의 말씀도 없었던 할머니이셨지만, 도시락 속에 들어있던
많은 사랑을 느꼈습니다.어떤 요리 못지않게 맛있었고 눈물 탓에 조금은 짜게 느껴졌던
그 도시락의 맛을 저는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학교에 다닐 때에도 아르바이트를 다녔을 때에도 언제나 아침에 일어나면 식탁 위에
있던 작은 도시락. 그것은 저에게는 당연한 것이라고 여겨졌고 감사하는 마음조차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당연함이 당연하지않은 것으로 바뀌게 된 유학생활을
하다보니까, 제가 혼자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에 대해서 너무 부끄럽게 느끼고,
또 언제나 할머니는 저를 사랑해 주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랑은 보이지 않는 것인데 특히 가족간의 사랑은 변함없이 지나가는 하루하루 속에
숨어있고 좀처럼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가장 가까이 있기에 쑥스럽고
쉽게 말할 수 없는 감사의 마음.하지만 제일 가까운 존재야말로 그 감사의 마음을
표현해야한다고 유학생활을 통해서 생각하게 됐습니다.
할머니, 언제나 감사합니다. 사랑해요!
감사합니다.【1144 字(スペースを含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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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国語スピーチ部門
感謝
大阪府立市岡高等学校
片井有紀恵
家族に「ありがとう」と、言ったことがありますか。
私は去年の 3 月から今年の1月まで韓国に留学をしてきたのですが、それが祖母と離れ
て暮らす初めての経験でした。
母子家庭であり、幼い頃、母とも離れて住んでいた私は、根っからのおばあちゃん子で
した。しかし、中学生になると、思春期のせいか何となく言葉につまったり、喧嘩するこ
ともしばしばでした。
高校一年生の初夏。突然、韓国に留学したいと言い出した私に、家族は別に驚いた様子
もなく承諾してくれました。留学費用は奨学金がおりたのですが、生活費が必要になると
いうことでアルバイトを始めました。夏休み、冬休み、学校に通いながらも働き、貯まっ
た金額は 40 万円。学生にしては決して小さい金額ではありません。”自分の留学を自分で
稼いだお金で行く。自分のしたいことは全て自分自身の力で叶えることができる。”誇らし
い気持ちでした。
しかし、今考えてみると、私の留学は他の人の応援があってこそ達成されたのだ、と思
います。そんな気持ちを初めて感じたのは、出発の日の朝。新幹線の中でした。祖母が、
昼に食べるように、と渡してくれたお弁当。その中身は私の大好きな唐揚げに卵焼き。そ
して、いつもは絶対に入ることのないステーキまで。私の留学に対して特に応援の言葉も
なかった祖母ですが、お弁当の中に詰まっていた沢山の愛を感じました。どんな料理にも
負けないぐらい美味しくて、涙のせいで少ししょっぱかった、そのお弁当の味を私は生涯
忘れられないことでしょう。
学校に行くときも、アルバイトに通った日々も、いつも朝目覚めれば、食卓の上には小
さなお弁当箱。それは、私には当たり前のことであり、感謝する気持さえ、ありませんで
した。しかし、当たり前が当たり前でなくなった留学生活の中で、なんでも一人でできる
と思っていた自分を、とても恥ずかしく思うと共に、いつの日も祖母は私を愛してくれて
いたのだ、と気付きました。
愛は見えないものですが、特に家族間の愛というのは、変わらず過ぎていく毎日の中に
隠れてしまい、気が付きにくいも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一番近くにいるからこそ照れく
さくてなかなか言うことのできない感謝の気持ち。ですが、一番近い存在だからこそ、感
謝の気持ちを言わなければならない、と留学生活を通じて思えるようになりました。
おばあちゃん、いつもありがとう。大好きだよ!
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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